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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no image 바로 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_거듭남이 뭘까 진짜 궁금하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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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1 2007-10-31
거듭남이 뭘까 진짜 궁금하다 스테판 차녹 지음, 바로 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 A Discourse of the Nature of Regeneration 손성은 옮김, 2007년, 도서출판 지평서원 펴냄, 신국판 반양장 334면. 값 12,000원. 서 평 | 손성은 목사_런던 양무리 교회 참으로 궁금하기만 했다. 거듭남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이 바뀌는 것이라고들 하는 것을 물론 몰랐던 것은 아니다. 거듭나려면 소나무 뿌리 하 나 정도는 뽑을 정도로 힘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실제로 소나무 뿌리를 잡 고 씨름을 했다고 하면 웃을는지 모른다. 소나무 뿌리라도 캐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도 해 보았다. 하늘을 향해서, 아니 허공을 향해서 얼마나 고 함을 질러대었던가? 진짜 거듭남이 무언지 “하나님이 계신다면 진짜로 좀 가르쳐 주세요.” 그런 고함은 허공을 치고는 내 귀로 다시 들려 메아리만 진동하였다. 신학을 조금 하기 시작 하면서 거듭난다는 것을 조금은 신학적으 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이기는 한데 사람의 그 무엇이 바 뀌는가 질문하게 될 때 ‘의지’가 바뀌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거듭나 기로 ‘결심’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렇 다. ‘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결심’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하 였다. ‘결심’하기로 ‘결심’했는데, 그렇게 ‘결심’해놓고 나서 자신을 곰곰이 살펴보면, 그 그리스도는 저만치 먼 곳에 계신 것만 같았다. 내가 ‘결심’해서 만든 그리스도와 그분 자신이 나에게 보여주시는 그분 자체로 서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의지’의 ‘변화’라는 것이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닌 것임을 알게 되었 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사람의 ‘의지’가 바뀌는 것 이상의 그 어 떤 변화여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 사람 전체를 담고 있는,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정곡을 찔러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 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남이란 ‘의지’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여야 한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녕 이 ‘마음의 변화’란 무엇일까? 과연 내가 내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일까? 바꿀 수 있다면 ‘의지’를 ‘결 심’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렇다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고민하고 몸부림쳤다. 고민했다고 거듭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그것이 거듭남을 보장하 는 것이 아니다. 소나무 뿌리를 뽑아도 소용없는 것이 이 거듭남이다. 이것 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혈통으로도 육정으로도 사람의 뜻(의지)으로 도”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요 1:13). 하나님으로만 나는 것이다. 도대체 이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의 기갈이라도 해소시켜 준다. 그 거듭남의 신 비를 신비로 남겨두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거듭남 이 참된 것이냐 거짓된 것이냐를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시금석을 제공해 준 다. 거듭남의 주제가 그저 개인 의 구원문제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의 문제요 사회와 민족의 문제임을 더 깊이 탐구하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거듭남은 개인 떠난 교회 문제 하나님을 아는가? 나를 아는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 모든 것에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천국을 보지 못하고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은 너무나도 지당하다.
84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거룩하신 하나님_교회보다 더 작은 하나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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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8 2007-10-31
조주석의 북카페 교회보다 더 작은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데이비드 웰스| 부흥과개혁사| 359쪽| 2007년 서평_조주석 목사|합신 출판부 실장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위기 불러와”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질문을 해본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존 재인가.” 이 물음에 포함된 의미는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철 저히 외면당할 수도 있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이용될 수도 있고, 경배의 대 상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웰스의 판단에 따르면 두 번째 부류쯤에 속한다. 하나님조차도 마치 상품처럼 소비 제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현상이 유독 미국만의 특징이겠는가.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는 사람들 지는 1976년을 ‘복음주의의 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인식은 미 국의 개신교 교회가 부인할 수 없는 사회 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지적일 것이 다. 구 자유주의 교회는 실패로 끝났지만, 196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 교회 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교회와 국가가 분리는 된 상태지만 미국 개신교 교회는 오랫동안 국교 역할 을 자임해왔다. 즉 문화적 국교의 위상을 계속 유지해 온 것이다. 이 점에서 는 미국과 우리가 서로 다르기는 하나, 교회 성장이라는 명분 앞에서는 하나 님도 상품처럼 판매하려 드는 태도만은 빼닮은 구석이 분명코 존재한다.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이용하 려 들 것이다. 이것은 시장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하도록 배웠다고 웰스는 지 적한다. “시장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탓에 우리는 교회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 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으 로 바꾼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바뀌 었다는 뜻이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을 가리켜 ‘가벼운 하나님’(the weightlessness of God)이라고 규정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중요성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을 회복할 수 있 r 는 길은 없는 것인가. 웰스의 모색은 이렇다. 현대에 만연한 인간론을 바꿔 야 하고, 우리 시대에 만연한 신학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의식을 없애는 도덕적 책임에 둔감한 치유 중심적 인간론을 폐기하 고, 인간 중심적 신앙을 하나님 중심적 신앙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중심적 종교는 참된 교회를 점차 사라지게 하고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커지는 역전 현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본서와 그의 다른 책 인 에서 상세히 논의된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지금 신론과 인간론 에서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신론의 위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 재성의 위기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의 거룩하심과 권위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동양의 종교처럼 인간 경험의 심오함에서 발견되지도 않 으며, 인간의 죄란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정하지 않게 되면 그저 인간의 실 패 정도로 축소될 뿐이요 우리의 유일한 권위의 근거로서 자아를 내세우게 된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초월성은 교회 안에서 크게 손상을 입 고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내재성의 위기를 어떻게 말하는가. 하나님의 내재성은 하 나님이 세계를 도덕적으로 다스린다는 섭리 교리의 핵심 요소와 밀접한 관계 가 있다. 이 교리는 문명의 불안감, 전쟁과 기아, 진보 신념에 대한 회의로 인해 그 확신이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성경은 자연과 역사에 하나님의 섭리 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증거한다. 이것이 단호하고 결정적으로 나타난 곳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십자가는 세상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심판을 결정적으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또 십자가 사건은 오늘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 는 일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표준이다. 종교다원주의로 인해 지금 이 지 점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두어 달 앞에 두고 있다. 누구를 찍든 그것은 선거권 자의 권리 행사이겠으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신의 당락에 이용하려는 어 떤 세력에 대해서도 경계의 고삐를 늦출 수 없다. 거룩한 교회가 이용을 당 한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용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교회가 선거판에 이용당하면 안돼 적어도 우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주요한 실체 로 인식된 미국 의 복음주의 교회와 동조화 현상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한국 교회가 그 정체 성을 확인받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83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_현실에서 칼빈주의로 살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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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2 2007-10-04
조주석의 북카페 현실에서 칼빈주의로 살아가기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홍병룡 옮김 | |IVP 399쪽 | 2007년 저자는 자신이 처음에는 칼빈주의 전통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털어 놓는다. 개인의 변화에만 집중하였지 사회적 변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억눌린 자와 불행한 자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 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자신의 신앙 전통은 전혀 그렇지 않은, 중세 적인 것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급진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억눌린 자에 대한 관심 커져 그 신앙 전통은 세계 형성적 기독교로서 칼빈주의다. 여기서 세계란 자연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의미한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사회 질서를 개혁해서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 개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사회적 불의에 의해 고통 받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 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서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약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한 그런 사회다. 이런 기독교라야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가 세계 에 등을 돌리고 만다. 이것이 칼빈이 발견한 기독교였고 그것을 칼빈주의라고 한다. 이전의 내세 지향적이었던 어거스틴적이고 중세적인 회피적 기독교와는 크게 다르다. 물 론 양자 모두 구원을 주창하는 동일한 종교지만 후자는 신앙의 내면화에 주 력했고 전자는 사회 구조 개혁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칼빈주의는 오늘날 분명 필요하고 또 크게 주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가 그것을 강하게 요청한다. 좌파 학자인 이매뉴얼 월러 스틴에 따르면, 근대 세계 체제의 주된 특징은 여러 국가와 다양한 민족이 점차 자본주의 경제 체제 속에 하나로 여지없이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미와 북서부 유럽과 일본이라는 중심부가 반(半)주변부나 주변부 국가들 을 자신들에게 종속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요청되는 것이 정작 무 엇이 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칼빈주의자들이 분명 놓쳐 왔던 바가 있었다. 월터스토프는 이를 찾기 위해 두 신학 사조를 탐색한다. 그것들은 칼빈주의를 가장 훌륭하 게 변형시킨 신칼빈주의와 해방신학이다. 전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신학이요, 후자는 남미의 카톨릭에서 유래한 신학이 다. 필자는 이 두 사조로부터 현대 사회를 날카롭게 분석한 사실에 주목하 고 그것을 탐색한다. 신칼빈주의는 문화 개혁과 관련하여 우상숭배를 배척했고 해방신학은 지배 및 착취와 관련하여 인간 해방을 주장했다. 후자는 탐욕과 권력욕에 추동되 어 중심부가 주변부를 지배하는 세계 체제를 죄라고 규탄하며, 전자는 경제 성장을 궁극적인 선으로 취급하는 세계 체제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한다. 그런 데 문제는 신칼빈주의가 성장 우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전략은 제시하 지만, 스스로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려고 싸우는 집단들에 대해서는 별 말 이 없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이랜드 사태가 불거지자 싸잡아 기독교도 함께 욕먹었다. 그것의 핵심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보기 에 기업주의 기독교 사회 사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우 호적으로 볼 수 있는 신학 논리가 매우 빈약했다는 점이다. 약자에 대한 권 리를 시장 논리로 희생시켰다. 이것이 바로 월터스토프가 본서를 통해 우리 의 칼빈주의를 향해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본서는 나에게 이런 질문도 던져왔다. 너의 개혁신학은 어떤 것인가. 저자 가 나중에 인지한 칼빈주의 전모가 분명 나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불의와 관련하여 구조를 배제한 채 개인의 차원으로만 접근하면 칼빈주의 전모에는 결코 다가설 수 없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원수라고 지목한 세상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좀더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사회 구조나 사회 체제와 단단히 손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본서를 읽으면서 얻은 나 의 큰 유익이다.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 높여야 “착취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는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주님을 고백하는 일 부 그리스도인들과 대립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계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커다란 슬픔이다.” 이게 현실의 딜레마다.
82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삶의 출발선으로서 하나님의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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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5 2007-08-29
조주석의 북카페 삶의 출발선으로서 하나님의 용서 신앙은 체험과 고백의 양면 모두 가져 . 얼른 감히 잘 안 잡히는 제목이다. 이런 채소, 저런 과일이 웰빙에 좋다고 떠들어대는 책들 가운데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어쨌 든 책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신앙 서적 같지가 않다. 삶의 변화에 관심 가지는 책 그런데 한 친구는 이 책을 가리켜 필력이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상찬까지 했다. 노동판에 나가 지금은 막일을 하며 고단하게 살고 있는 그가 아내의 신앙을 걱정하며 읽게 하려고 빌려왔는데 자기가 먼저 보았다는 이력도 붙 은 책이다. 삶의 변화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자신의 인간성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 한 삶의 변화란 기대하기 어렵다. 본서는 정확히 이러한 문제를 다루 고 있다. 지은이는 자신의 대학 1학년, 문학철학 수업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해서 더 발전 시켜 본서가 나왔다고 술회한다. 그녀는 인간 존재와 삶을 들여다 볼 때 성경만 사용하지 않고 문학과 심리학 과 자신의 경험담도 그 곁에 놓고 사용한다. 이렇게 하자 신앙의 문제가 단 지 교리적 언어로만 표현되는 한계를 벗어나 일상의 언어로 표현되어 일반 대중에게 친근히 다가서게 된다. 지은이는 까뮈의 을 예리하게 분석함으로써 현대인의 절망적인 모습 을 그려낸다. 그들은 하나님을 꺼리는 나머지 스스로 신이라 자처한다. 이 도 성에 차지 아니하면 로맨스에서 찾거나 아니면 섹스라는 극단적 처방을 통해서 해결하려 하나 삶의 행복이나 소망은 저 멀리 있을 뿐이다. 그렇다 고 눈을 단번에 하늘로 돌리는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신을 만들 어 그곳으로 피신하려 한다. 현대인이 처한 이런 딜레마를 피터 쉐퍼는 라는 연극을 통해 상징적 으로 보여준다. 말들을 신이라 믿는 소년과 이 소년을 치료해야 하는 정신 과 의사의 고뇌 속에 그런 모습이 투영된다. 그 소년의 병을 고치자면 의사 는 그에게서 열정, 곧 예배를 빼앗아야 한다는 역설을 응시하면서 자기 인생 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를 정직히 대면하 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현대 문화와 단호하게 이별해야 할 시간이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십자가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해결책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불 신자는 고사하고 우리에게도 쉽게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 십자가의 도가 아 닌가. “누군가를 죽인다고 아픈 사람이 낫거나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는 가? 그저 썰렁한 개그로 들린다”(146쪽). 그러나 지은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아주 편안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정 의와 자비의 충돌을 극적으로 그리는 에 나오는 세 인물 분석 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는 이런 것이라고 손에 잡힐 정도로 생생하게 설명해 낸다. “용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준 다. 용서는 우리 본성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줌 과 동시에 우리 빚을 우리가 갚을 수 없음도 보여준다.” 장발장은 주교로부 터 이런 용서를 받았고 마침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 는 삶의 토대요 그 출발선인 셈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같지는 않다. 우리는 주로 경험을 통해 서 하나님을 만나지만 서양의 그리스도인은 대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많 이 생각함으로써 그를 단단히 붙드는 편이다. 즉 우리의 신앙은 체험적인 반 면에 저들은 고백적이고 사색적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대비되는 믿음의 방식 을 보면서 한 가지 짚이는 게 있다. 이제 우리도 신앙의 문제를 생각하는 쪽 에 더 무게를 두었으면 한다. 이런 바람은 역자 후기에도 선명히 드러난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신앙한 다는 것, 그리고 이 신앙을 반영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해 거의 혁명적인 인식 전환을 했습니다.” 지은이는 자신의 독자를 비신자와 기존 신자로 설정하고 있다. 신앙에 대한 혁명적 인식 가져 인간 본성의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현실적이고 궁극적으로 해결 하고 싶은 구도자나,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고 싶지만 그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기존 신자라면 이 책은 분명히 유효할 것이다.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chochuseok@hanmail.net
81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죄책감과 은혜_용서는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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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3 2007-08-06
용서는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는가 죄책감과 은혜 폴 투르니에 지음| IVP| 331면 “용서는 대가 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사람끼리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용서를 베풀면 용서가 일어난다. 이 용서란 상대의 허물을 덮고 그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게 하나 남 아 있다. 용서는 주고받는 실체 있어야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용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또 진짜라 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하는 이런 궁금증들이다. 을 본 후 이런 의문들은 더 늘어갔다. 이런 의문의 문턱을 넘어서야 확신의 거리로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어느 날 학교 구내 서점을 들렀는데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전에 도 몇 번 시선은 갔지만 그냥 무시했던 였다. 이 책은 나온 지 칠 년이 넘었고, 작년 오월에 8쇄를 찍었으니 아직도 독자들에게 유용하 다는 증거다. 지은이인 폴 투르니에(1899-1986)는 스위스의 일반 가정의에 불과했으나 그 의 명성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부친은 칼빈이 목회했던 제네바의 상 피에르 교회에서 오십 년 동안 목회한 분이기도 하다. 생후 삼 개월만에 그 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모친도 유방암으로 여섯 해 후 폴만 홀로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 이 책은 죄책감과 회개와 은혜라는 내용을 다룬다. 그는 이런 성경의 큰 주 제들이 심리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죄에 대한 기 독교적 경험과 병리적 현상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 죄책감은 사람에게 널리 퍼져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 려면 그것을 은폐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없다. 이 은폐는 양심을 억압하고 자 기를 정당화시키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으로 표현된다. 사람들은 이런 식 으로 해결하려 하나 거기엔 위장된 해결만 있을 뿐이다. 해서 있는 그대로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외부를 통해 참된 죄책감을 느껴 야 한다. 이런 변 화는 심리 치료나 기독교적 경험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하나는 전환이라는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회개라는 삶의 형식으로 표현된 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도 사람에게서 죄책감이 제거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죄 책감을 느끼고 산다. 단지 거짓된 죄책감에서 참된 죄책감으로 전환만 있을 뿐이다. 유아적 죄책감에서 벗어나 어른다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고, 하나 님 앞에서 거짓된 죄책감이 아니라 참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란 자신의 죄책을 인정하는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 여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알게 하는 죄책의 자각인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 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감지하는 거룩한 영역이 아니겠는가. 이는 바울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그가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악을 행한다고 절규한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한다. 은혜가 제거하는 것은 정죄였지 결코 죄 책감이 아니었다. 죄책감은 점점 더 깊이 느껴가나 정죄함은 없었다. 이 거 룩한 신앙 정서가 참된 죄책감이요 건강한 신자의 영적 바로미터다. 그런데 우리 를 늘 괴롭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공짜는 없다라는 의식이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잘 못을 했는데 뭔가 자신의 것으로 직접 어떤 대가나 희생을 치러야 하나님께 서 용서하실 것같이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 거짓된 생각이 하나님의 자 녀들 가운데 만연해 있고 또한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생각을 떨쳐버 리지 못하는 한 값없는 용서의 기쁨은 결코 누릴 수 없다. 용서는 내 것으 로 따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선물인 까닭이다. 죄책감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 프로이트 전기를 쓴 어니스트 존스 박사가 그렇게 지적한 바 있다. 투 르니에는 이 어려운 문제에 도전했고 심리학으로 성경을 조명하여 그것을 상 당히 풀어냈다. 신학과 심리학의 통합을 주도한 게리 콜린스의 평가가 그것 을 담보한다.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 본서는 그의 저서 중 가장 훌륭한 책이요 후대의 다른 작가들이 널리 인용하 는 권위 있는 진술이다(폴 투르니에의 기독교 심리학, IVP). 정말로 한 번 목회자들이 꼼꼼히 읽어봤으면 하는 책 이다.
80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가벼운 기독교 탈출하기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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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3 2007-06-27
조주석의 북카페 가벼운 기독교 탈출하기 이창동 감독의‘밀양’을 보고 나서 조주석 목사/ 합신출판부편집실장 현충일 저녁 식사 때 아내에게 정말로 느닷없는 질문을 하나 했다. “하나님 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정말로 믿어.” 이 오만불손한 질문에도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어서 믿어”라고 가볍게 응 한다. 이 말에 이어서 나는 “‘밀양’을 본 후 용서라는 주제가 나의 큰 화 두가 되었어”라고 되건넸다. 여전히 신비로운 ‘용서’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용서라는 주제가 이처럼 심각하게 나에게 말을 걸 어온 적이 없다. 어쩌면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너무 익숙한 터였으리라. 이 주제를 놓고 책장들을 지루하게 넘기면서 그 미묘하고 복잡 한 세계를 더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 종교와 심 리학의 만남’(김용희 지음, 책세상), ‘용서와 화해’(웨버렛 워딩턴 지 음, IVP), ‘용서의 미학’(루이스 스미디스 지음, 이레서원)을 통해서 말이 다. 아직도 이 탐험은 진행 중이다.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밀양’은 아주 정확하게 이 질문을 던진다. 하나 님인가 사람인가. 피해자 신애는 그 주체를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해 자인 유괴 살해범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인가. 그들 모두 동일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음에도 말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처지가 그리 갈라놓은 것인가.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나가 보자. 아들을 살해당한 신애의 고통은 ‘상처받 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를 통해서 어느 일순간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이 평안으로 구역모임에서 간증도 하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전도도 하며 역전에 서 노방 찬양도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기 위해” 유괴범한테 면회도 간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터진다. 유괴범의 당당한 신앙고백 앞에서 신애의 평 안은 너무나 무력한 것으로 드러난다. 평안한 얼굴로 상대가 “하나님께 회 개하고 용서받으니 이래 편합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라는 말에 신애 는 할 말을 잃는다. 자신 앞에서 정말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자책하는 겸손 한 마음을 보고 싶었을 텐데 웬걸 상대의 말은 그 정반대였다. 이제 신애의 평안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애가 유괴범을 용서하 겠다던 마음도 실은 상대가 스스로 죄책감을 갖고 있기를 바라는 전제를 깐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믿는 기독교가 가볍다 보면 신자의 마음이라도 그렇게 움직이 기 십상이다. 내가 보기에 신애의 평안은 심리적 해소나 옅은 기독교적 평 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신애는 야외 집회로 모인 어느 모임을 찾아가 “거 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대중 가수의 씨디를 몰래 틀어 자신의 평안이 참 평안이 아니었다고 강하게 어필한 게 아닐까. 자신의 거짓 감정에 스스 로 속았다는 분노를 그렇게 대리 분출한 게 아니었을까. 마음의 평안이라는 것도 실은 따지고 보면 기독교의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가져다주는 결과일 따름이다. 신애가 그리도 비난했던 유괴 범이 받았다는 용서가 도리어 일차적인 것이요 근본적인 것이다. 복음이 주 는 근본적 은혜는 용서이지 마음의 평안이 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따지면 유 괴범의 평온함을 아무도 문제삼을 권리는 없다. 신애조차 도 마찬가지다. 이 용서는 신비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남이 볼 수 없도록 마음 의 문을 꼭꼭 닫아야 한다. 필요할 때만 몰래 자기만 꺼내 보아야 한다. 하 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할 때만 몰래 꺼내보아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외부에 노출된 음식이 금방 상하듯 용서의 신비도 마음 바깥에 내다놓으면 그 맛은 쉽게 변하고 만다. 신애는 유괴범의 고백에서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 다. 이래서 용서의 평안도 상대에게 무례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 가벼운 기독교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어디쯤에 있을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스스로 주술을 걸어 생산해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이비 평안 을 발행해 주는 면죄부도 아니다. 대중적 기독교는 복음의 사죄와 의롭다 함 에만 치중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발 더 나가면 성화 대신에 성공을 강조한 다. 이것의 문제는 하나님의 용서가 복잡한 인생을 통해 성숙해 가야 한다 는 사실을 잊게 하는 데 있다. 용서도 성숙의 과정 필요해 우리의 기독교가 이런 가벼움을 안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할 때이다. 자기 죄 를 용서받음이 타인의 허물을 용서할 근거가 된 아름다운 유산을 남긴 손양 원 목사님이 우리의 역사에도 엄연히 있지 않는가. chochuseok@hanmail.net
79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떨기나무_시내산 미스터리를 벗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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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45 2007-05-30
조주석의 북카페 시내산 미스터리를 벗기다 떨기나무 김승학 지음|두란노|408쪽|2007년 “지금의 시내산은 진짜 시내산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성경 고고학자도 아니요 전문 탐사가도 아닌 한 주치의가 그런 주장을 하다니 고고학적 주장이란 픽션을 쓰는 거나 다름없다 는 생각이 앞서 그런 말을 그냥 무시할까도 해봤다. 그래도 탐사자의 경력 이 퍽 남다르고 또 그가 학교에 가져온 몇 가지 유물들을 둘러보고 나자 생 각은 좀 바뀌었다. 남다른 자료 보고 관심 쏠려 그 날 이 책을 사서 벼락같이 읽었다. 지구 한 바퀴와 맞먹는 탐사 여행, 그 수치만으로도 놀랄만한 거리다. 를 쓴 김승학 씨와 그의 다섯 식구가 이 여행기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틈만 나면 북부 사우디아라비아 를 탐사한다. 칠 년 동안에 그곳을 열두 차례나 탐사함으로써 그는 왕자의 주치의라는 직책에 미디안 탐사 전문가라는 이력도 하나 더 보탠다. 중동 붐이 한창 일던 팔십 년대 1987년에 청년 김승학은 침술 의료인으로 사 우디에 돈 벌러 나간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고 마침내 그의 영험한 침술 소 문은 메카 주지사인 마지드 왕자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된다. 당시 목 디스크 를 심히 앓고 있던 왕자는 하찮아 보일 수 있는 침술로 신통한 효험을 본 다. 이를 계기로 하여 그는 왕자의 주치의로 들어가 화려한 상류 사회와 교 류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런 영광의 세월로도 자신의 영혼을 채울 수 없는 공간 하나쯤은 텅 비어 있는 법이다. 2000년에 잠시 조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부친께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접한 다. “어떤 분한테서 이 테이프를 입수했다. 이 테이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미디안 땅에 있는 어떤 산이 진짜 시내산이라고 하는데, 아주 성경적이더구 나. 네가 지금 사우디아라비아에 살고 있으니, 있는 동안에 네가 기도하면 서 사실을 확인해 보면 좋겠다.” 그 비디오테이프는 탐험가 론 와트와 그 의 아들이 몰래 미디안에 잠입하여 찍은 였다. 부친의 부탁은 그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준비를 꼼꼼히 하고서 2001년 3월에 첫 탐사를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탐사는 귀국하기 바로 전인 2006 년 7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는 탐사를 다 마치고 다음의 주장을 편다. 시 나이 반도의 시내산은 진짜 시내산이 아닙니다. 그 근거로는 아홉 가지 이유 가 있습니다. 진짜 시내산은 미디안 광야, 즉 오늘날의 북부 사우디아라비아 에 있습니다. 그 근거로는 여덟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에 들이댈 고고학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죽을 고비도 넘 기며 이 지역을 두루두루 답사한다. 사진으로 찍고 수많은 자료들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으며, 또 유물들을 직접 채취도 하고 수집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 흔적이 미디안 지천에 널려 있다고 확신한 다. 사우디는 우리와는 영 딴판인 나라다. 자국민이라도 여행증명서가 없으면 마 음대로 어디나 다닐 수 없는 나라다. 여행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국가다. 이 런 나라에서 남다른 외적 조건이 그에게 없었더라면 북부 사우디 탐사는 불 가능했을 게 분명하다. 그 조건들을 열거해 보면 이렇다. 왕자의 주치의라는 신분, 왕자가 하사한 자동차에 고위층이나 달 수 있는 특 별 번 호판을 부착한 것, 왕자의 이름으로 등록된 자동차 등록증, 왕자의 여 행허가증명서, 유창한 아랍어 구사 능력, 이슬람의 문화에 아주 익숙한 점. 아무나 쉽게 갖출 수 있는 조건들이 아니다. 이런 조건들을 선용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따져볼 게 있다. 시내산 역사 왜곡은 왜 일어난 것인 가. 그것은 로마 교황청의 정치적 해결의 소산으로 보인다. AD 527년 교황청 은 시내산을 순례하고자 하는 순례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시나이 반도의 무 사산 북서쪽에 캐더린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을 시내산이라 명명했다는 것이 다. 학계의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시내산 왜곡은 순례객의 종교적 감정의 과잉 배출을 해소시켜 주려 한 교황청의 선의적 해결책 정도로 보인다. 그럴지라 도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장소나 건물을 성스럽게 보려는 인간의 종교적 욕 망과 교회의 정치적 해결이 합작해 낸 역사 왜곡이라는 오명은 씻을 길 없 다. 역사 왜곡 오명 씻을 길 찾아야 이제 먼발치서 세계 성서 고고학계에 한국인의 이름과 업적이 기록될 날을 기대해 본다. 시내산 여행 경비를 절감하시려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책 을 꼭 한 번 읽어보시라.
78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_현대문화와 지성적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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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4 2007-05-09
조주석의 북카페 현대문화와 지성적 증인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레슬리 뉴비긴| 홍병룡 옮김| IVP | 205쪽| 2005년 서평|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인도에서 삼십오년 동안 선교 활동을 펴다 1974년 65세의 나이로 귀국한 영 국인 레슬리 뉴비긴은 자신의 조국이 참으로 낯선 이방 나라였다. 그가 보기 에, 다시 찾은 조국 영국은 복음을 멸시하는 이교도 사회였다. 공적 영역에 서 기독교 복음이 사실이나 진리로 주장될 수 없는, 사적 영역의 가치로 취 급되는 강력한 다원주의 사회였다. 뉴비긴은 영국의 이런 이교적 현실에 강한 도전을 받았고 복음을 서구 문화 에 어떻게 대면시킬지 애쓰게 된다. 귀국 선교사가 영국을 위한 선교사로 변 신한 것이다. 새로운 사명을 느낀 것이다. 인도 선교사에서 돌아왔으니 이 젠 쉴 때도 됐건만 역전의 용사에게는 그런 휴가도 누릴 수 없는 절박한 현 실이 코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의 선교적 과제는 복음이 공적 영역에서 어떻 게 하면 진리 주장을 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복음을 상실한 서구 사회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뉴비긴은 공적 자리에서 강연을 하고, 또 저술을 하 여 공적 영역에 복음을 대면시킨다. 그 결과 (1986년), (1989년), (1996년)라는 책들이 출간된다. 나는 근년에 들어 이러한 책들을 읽었고 기 독교적 지성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뉴비긴의 저술은 반기독교적 지성적 환경, 즉 무신론적 환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이 왜 진리인가 하는 것을 다층적으로, 즉 문화적 학문적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변증 작업, 고도의 지성적 작업이 펼쳐진다. 이런 작업에는 많은 질문이 던져져야 하고 그것을 해명해야 하는 고된 지적 작업이 따라야 했다. 서구 문화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런 문화는 어디에 뿌 리를 두고 있는가. 서양의 모든 학문은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라는 등식을 중시하는데 이는 무엇을 배제한 채 나온 것인가. 또 정치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것은 타당한 비전인가. 그 비전 의 한계는 없는 것인가.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변을 해 나가면서 서구 문화 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복음과 정면으로 마주서게 한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 문화는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면서 자연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목적론을 배제한 채 인과율만 용인함으로써 그리 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복음을 공적 영역에서 몰 아낸 후 사적 영역에 꽁꽁 유폐시켰다. 복음이 자연주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사적 가치의 영역에 갇힌 까닭에 그의 지성적 작업은 결코 간단한 작업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노고로 인해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거하는 그리스도 인의 사명, 교회의 사명은 사적 영역에서 풀려나 공적 영역으로 자연스레 옮 겨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적 영역에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 다. 이런 증인의 삶에는 강력한 지성적 회심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신앙의 공동체와 일반 사회를 나누는 경계선은 회심이기 때문이다. 이를 현대 용어 로 빌어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 두 사회는 하나의 복음을 놓고 회심이라는 경계선 사이에서 한쪽은 실재 로 믿고 다른 쪽은 신화나 환상으로 간주한다. 이렇듯 이 두 사회는 서로 다 른 타당성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역사는 하나이지만 그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 이 다른 까닭에 서로 다른 역사 해석을 갖게 된다. 단 하나의 역사를 두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유신론적이든 무신론적이든 할 뿐이다. 우리의 현실을 잠시 돌아보자. 독제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칠팔십년대에 도 우리는 여의도 광장에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다. 이천년대 에 접어들자 그런 무대는 다시 시청 광장으로 바뀌었고 촛불집회, 구국기도 회가 연이었다. 이렇듯 공공의 영역에서 기독교를 증거해 왔고 또 세를 과시 해 온 셈이다. 이런 특권은 한편 부끄러운 것이나 이를 용인하는 사회 환경 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한 현상이 아니다. 정작 복음을 멀리하는 우리들 이런 환경에서 자만이나 나태의 수렁에 빠지지 말고 복음을 깊이 사랑한 뉴 비긴의 노력과 열정을 되살려 내야 한다. 이런 지성적 노력이 우리 한국교 회 도처에서 찾을 수 있어 반갑지만 대다수의 흐름은 이와 역 행하고 있어 안 타까움 또한 함께 있다.
77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가르침과 배움의 영성_단절시키는 교육, 연결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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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7 2007-04-05
조주석의 북카페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단절시키는 교육, 연결하는 교육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파커 팔머|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IVP, 261쪽, 2006년 ‘경쟁력’이라는 말은 흔히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단어다. 이 말은 경쟁에 서 이기지 못하면, 경쟁에서 이겨낼 힘이 없으면 상대에게 밀려날 수도 있다 는 두려움이 내포된 섬뜩한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상대를 모두 잠재적 경쟁 자로 간주하고 있다. 경쟁력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 이런 현실에서는 교육도 이제 ‘경쟁력’을 키워내는 데 올인하고 있다. 경 쟁은 이제 교육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전 영역에서 절대적인 규범으로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왜 이런 관점이 교육에 들어온 것인가. 그것은 지성 사회가 교육에서 영적 차원을 철저히 외면한 결과라고 한다.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객관화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조작할 수 있는 인식론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관점에 서있는 현대 교육은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도 지식이 발생하는 인간 조건의 중심부에 깔려 있는 영적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 지식이 인간 영혼 내부의 열정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정작 지식은 호기심이나 지배욕에서 나오는데도 말이다. 이런 시각은 교육이 잘못된 인식론에 서 있다는 증거다. 이제까지 교육학에 서 주류를 이루어 온 인식 이론은 ‘객관주의’다. 그것은 세계를 분석과 조 작의 대상으로 보는 앎의 방식이다. 세계에 대한 지배를 목적으로 삼는 앎 의 방식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러한 교육을 받아왔고 거기에 흠뻑 젖은 채 그런 방식으 로 지식을 습득하려 한다. 책을 객관화시켜 분석하고 종합하여 지식을 얻으 려 하는 독서 태도도 그런 한 예이다. 책 자체(저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에는 연결이 아닌 단절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교육은 학생에게 인간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문화 현상이든 간에 그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여기게 할 뿐 그것들이 나에게 말하는 것 을 용납하 려 들지 않는다. 이러하니 학생과 학습 대상 사이에 진정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고, ‘저쪽 바깥’ 세계를 멀찍이 관람하는 자들로 찍어 낼 뿐이다. 저자는 여기에 현실 교육의 근본적 실패가 들어 있다고 꼬집는다. 왜냐하면 주체와 객체를 서로 연결해 주는 사랑에서 나오는 지식이라야 그것이 정복 과 착취와 파괴라는 두려운 결과를 산출해 내지 않기 때문이란다. 지식이 사랑에서 나오면 자신과 세계,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가 서로 포용 하고 화해할 수 있다. 교육에서 이런 공간을 창조해 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교육의 원리요 핵심이다. 그 구체적 실천 방법들 은 5,6장에서 아주 자세히 제시된다. 이렇게 인식과 교육과 실천에서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을 펴는 저자의 태도 에는 사활이 걸린 어떤 근본적 대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실재의 핵심이 ‘공동체의 관계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전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발 견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통일체로 존재하시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역 사하신다. 이 삼위는 우리의 교육 현실처럼 서로 죽자 사자 싸우는 관계로는 결코 존재 하 시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단지 존재하는 방식만이 아닌 사랑의 관계 속에 서 창조와 섭리와 구원 사역이라는 경륜을 이뤄 가시는 상호 의존적이며 상 호 침투적인 존재라는 표현이다. 토머스 머튼은 이를 은유적으로 ‘숨어 있는 온전성’이라 표현했고, 조직신 학에서는 ‘페리코레시스’라고 한다. 팔머의 교육학에는 이러한 기독교 실 재론, 존재론이 깊숙이 깔려 있다. 그런 까닭에 주체와 대상을 단절시키는 객관주의나 오직 자신의 말만 듣겠다는 독단에 빠지는 주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학, 신학, 철학, 사회학, 과학 전반에 걸쳐 단절이 아닌 연결이 공동체 의 핵심이라는 지적인 반성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교육 현장에서는 그 런 반성이나 실천이 거의 없어서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이제 우리는 무엇과 맞서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해졌다. 상호 의존 관계 중요성 살려야 나의 이익과 힘을 얻기 위해 자연과 사회와 인간의 마음까지 지배하고 조작 하려고 하는 경제 제도의 노예로 전락한 교육 방식을 폐기하고 단절이 아닌 연결을 이루어내는 배움의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교육관을 이참에 확실 히 들 여놓자. 교육은 관계망에서 이루어진다는 저자의 확신이야말로 정말 빼어나 며 소중하게 보인다. chochuseok@hanmail.net
76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신학실종_그러나 나는 짖어야 한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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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4 2007-02-14
조주석의 북카페 "그러나 나는 짖어야 한다" 신학실종 데이비드 웰스 지음| 신국판|부흥과개혁| 459쪽|2006년 11월 서평|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현대문명을 거칠게 말하라면 그 외적 요소는 도시화라는 특징일 것이고, 내 적 요소는 상대주의가 될 것이다. 이 새로운 문명은 19세기 중반에 서구에 서 시작되어 들불처럼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한복판에 서 있는 미국의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세속 문명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함으로 써 그 본질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신학을 상실하고 있는 교회들 이를 가리켜 웰스는 신학의 실종이라고 한다. 즉 신학이 교회 중심부에서 변 두리로 쫓겨났고, 그 대신 개인주의와 대중주의가 현대 복음주의 교회를 점 령했으며, 목사는 진리 전달자에서 교회 경영 전문인으로 실추한 것이다. 따 라서 본서는 신학적 성찰이 담긴 기독교 문화 비평서 쯤 으로 분류할 수 있 다. 그러면 왜 신학이 현재 교회 생활에서 빠져나간 것인가. 그 이유는 신학의 세 요소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따로 놀기 때문이다. 즉 신앙고백과 신 학적 성찰과 이 두 요소에 기초한 미덕이 함께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성경 지식 연구에만 몰두할 뿐, 성찰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 철 학자나 역사학자나 사회학자가 더 열성적이다. 이들의 성찰에는 신앙고백이 빠진 까닭에 그 성찰이 정작 하나님을 섬기는 작업일 순 없다. 그러면 일선에서 기독교적 실천에 힘쓰고 있는 일반 신자들에게서는 어떤 일 이 일어나고 있는가. 믿음의 지식과 신학적 성찰에 토대를 둔 진정한 실천 은 없고 자기 성취, 곧 성공을 기독교인의 실천의 결과라고 오해하고 있다. 이런 모든 현상이 바로 신학의 해체요 신학의 실종이라는 것이다. 신학이 교회에서 점점 퇴색되고 있는 현상은 다른 각도에서도 고찰된다. 그 것은 미국적 특성인 개인주의와 대중주의가 복음주의 안방을 턱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자유를 핵심 가치로 여기는 개인주의는 교회에서 객관적 진리를 잠식하고 주관적 체험을 중시하게 했다. 그래서 간증 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증거였지 오늘 날처럼 우리 자신의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 자신에게 눈을 돌리게 되면 자기 도취에 빠지게 되고, 교회 안에서 인 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라고 외쳐 댈 수밖에 없다. 노먼 빈센트 필과 로버트 슐러가 앞장서더니 복음주의권 대다수가 너도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 다. 대중주의는 개인주의보다 힘이 더 세다. 그것은 여론에 따라 움직이는 세속 적 신앙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대중적 여론은 지도자에게 참된 신학을 저 리 제쳐놓고 다중의 의사를 따라 교회를 지도하도록 요구한다. 이런 신학은 대중적인 슬로건 이상을 넘지 못한다. 이런 대중주의적 심리가 기독교 신학 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여론에 따라 움직이는 신앙을 가리켜 웰스는 신 약성경이 말하는 ‘세상’이라고 규정한다. 이 세상은 교회가 대항하여 맞 설 그 무엇이지 기꺼이 맞아들일 우리의 아군일 순 없다. 신학의 실종은 목사의 사역에서도 나타났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문직의 수효가 증가하고 그들의 위상도 높아 졌지만 목사의 위상은 점점 떨 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슬슬 목회직에 대한 전문화라는 말이 나왔다. 전문직 이란 자기 분야의 전문 지식으로써 신분의 격상과 수익의 상승을 올리게 하 는데, 목회자라고 이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겠는가. 미국에서 칠십 년대 초에 목회학 석사와 목회학 박사가 생겨난 이유가 거기 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목사는 진리 전달자에서 교회 경영 전문 인으로 점점 바뀌어 갔다. 정작 필요한 신학은 채우지 않고 전문적인 지식 만 더 보태 갔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밀리언셀러 진입을 목전에 둔 에 대한 신자들 의 열풍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제자의 도는 자기 부인에서 출발하지 부 패한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의 사역자 구인난이나 각종 워크숍이나 세미나의 포스터를 보면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찾거나 그런 교육 을 시켜준다는 광고문이 주변에 제법 많아졌다. 이런 현상들이 세를 더 얻 어 가는데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글들은 별로 올라오지 않는다. 이제 글을 마감하면서 저자에게 하나 묻고 싶다. 교회에서 신학의 실종이 왜 그렇게도 큰 문제이죠. “나는 신학이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 지식이며, 신학에 대한 본연의 그리고 일차적인 청중은 지식인 집단이 아니라 교회라고 생각한다.” 웰스의 대답은 백번 지당하다. 교회가 신학의 일차적 청중이지 신학자나 철학자나 사회학자는 그 다음이라 한다. 교회는 신학의 일차적 청중이다 나는, 웰스가 자신의 처지를 ‘개’에 비유한 표현에서 그 처절함과 외로움 의 숨결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면서 달을 향해 짖어대는 어리석은 개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짖어야 한다.” chochuseok@hanmail.net
75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공동체_아직도 유효할 치유적 모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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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9 2006-12-13
조주석의 북카페 아직도 유효할 치유적 모델 공동체 길버트 빌지키언, 신국판, 두란노, 234쪽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press@hapdong.ac.kr 회중의 자유로운 참여냐 강한 리더십이냐? 교회 사역에서 회중들의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리더십은 상대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하지만 회중 전체 나 그중 일부가 사역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지도자의 사역은 강화될 것이 다. 상호 보완적인 참여와 리더십 초기 신약교회는 대체로 받은 은사를 따라 회중이 모두 사역에 참여하였다.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은 말씀 사역이 회중 안에서 풍성히 이루어져서 각 신 자가 말씀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전한 가르침에 따르 면 모든 사람이 교회의 선지자 사역과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행 2:16-18). 사역에 대한 책임에서 제외되거나 면제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교 회의 사역은 온 회중이 서 로 종이 되어 참여해야 한다. 목회서신을 제외한 나머지 서신서가 그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사역 구조는 지역 교회가 처한 형편과 필요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디모데전후서에 거론된 에베소 교회와 디도서에 거론된 그레데 교회가 그런 예외적인 경우다. 거짓 선생이 일으킨 이단 문제로 인해 강력한 리더십이 그 교회들에 요구되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강력한 리더십을 부여하여 혼란한 교회를 바로 잡게 하였다. 따라서 교회 사역은 일부 사람으 로 극히 제한되었다. 이처럼 교회 사역에서 어떤 교회는 개방된 사역 정책을 취하였고 어떤 교회 는 제한된 사역 정책을 취하였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다 성경적으로 타당 한 사역 구조다. 저자는 전자를 가리켜 표준적 모델이라 하고 후자를 치유 적 모델이라고 한다. 전자는 공동체 리더십에 근거를 두고 있고 후자는 지도 자 리더십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치유적 모델에서 표준적 모델로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강력히 주장하는 요점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 됨의 공 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이단 척결이나 질서가 무너진 교회를 바로 잡거나 새로 시작하는 개척 교회의 경우에는 치유적 모델이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해석학적으로도 틈이 보이지 않는 이 책은 나를 아주 곤혹스럽게 하였다. 그 이유는 소수로 구성된 사역 구조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제시 하였기 때문이다. 내?외부적 상황으로 교회가 심히 흔들리는 가운데서 바울 사도가 처방한 사역 구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교회나 장로교회는 여기 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태까지 나로서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다. 칼빈은 아주 힘을 들여 왜곡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 제도를 바로 잡아놓 았다. 계급 구조를 봉사의 구조로 되돌려놓았다. 장로교회는 이런 전통에 서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 가?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구라파, 미국 아니 한국의 현실을 돌아 볼 때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사-장로-집사의 직무가 섬김의 자리뿐 아니라 불행하게도 계급 또는 명예의 자리로 인식되는 실정이다. 직무에 대한 아주 어설픈 인식 이다. 미숙한 반쪽 인식이다. 더욱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우면 섬김보다는 위압적 권위를 내세운다. 여기서 한발 더 떼면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 세상적 계급 인식을 내 안에서 싹 몰아내야 한다. 이쯤해서 저자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야겠다. 그의 주장을 십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과연 치리가 없는 교회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때보다 도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세속주의의 유혹에 감염된 교회가 대다수인 오늘의 현실에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현실적으로 실효성을 거둘 수 있겠는가. 교회는 역사적으로 늘 넘어지는 약한 현실에 처해 있었지 강력하지는 못했 다. 초대교회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외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되 지 않을 만큼 교회가 평온한 적은 별로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 와 약함과 악함을 읽어내야 한다.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던 나에게 홍창표 교수님의 예는 좋은 모범이 될 것 같 다. 도미 후 역사적 전천년설에서 무천년설로 선회하였는데 그것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긴 연구 과정을 통해 한 결정이었다고 술회하 신다. 끊임없는 도전과 연구 필요해 치유적 모델에서 표준적 모델로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빌지키언의 주장에 원 칙적으로는 동의한다 해도 실효성에 아직 의문을 갖는 나로서는 그의 책 한 권으로 나의 장로교 전통을 손에서 놓을 만큼 확실한 것을 쥐었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다만 씨름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는 셈이라고나 할까.
74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부흥 어게인 1907_부흥, 관계의 회복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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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0 2006-10-18
부흥, 관계의 회복 부흥 어게인 1907 권문상 지음, 도서출판 브니엘, 2006.8 서평_조주석 목사|합신출판부 실장| 교회는 한 사람으로 구성될 수 없다. 거룩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이 사회 를 이루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한다. 이 말씀의 전파를 통해 교회 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명도 수행한다. 교회는 사명의식 갖춰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이요 동시에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 말씀에 대한 신자의 반응은 항상 순종으로만 나 타나지 않는다. 불순종으로도 나타난다. 이 두 방향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 의 경건이나 거룩한 사회인 교회의 자태는 드러나게 된다. 교회가 어느 일정한 민족 국가 안에 세워지면 교회는 그 나라의 사람들로 채 워진다. 그렇다면 교회는 문화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물 음이 생길 수 있다. 한국의 교회는 한국의 전통 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영국의 교회는 영국의 전통 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살피면 어느 나라의 교회든 그 나라의 전통 문화에서 해방되기란 여간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전통 문화의 영향력을 벗 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다스려지는 교회가 선다면 그 교회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성숙한 교회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는 교회의 부흥을 논하면서 오늘의 한국(인) 교회의 현주소가 어디쯤인지를 비판적으로 진단한다. 한국(인) 교회는 다른 어느 나라 교회보 다도 갈등과 분열이 심한 편이었다고 지적한다. 지역적으로 한국에 있든 해 외에 있든 그런 현상은 매한가지였다. 이는 공동체의 질이 낮다는 증거요 교회가 세인의 눈에 이전투구장인 저급 한 사회로 비쳤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부흥 또한 이러한 갈등과 분열로 인 해 지금 막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유독 한국(인) 교회에 갈등과 분 열이 많은 것인가. 저자는 그것을 문화적 요인에서 찾는다. 즉 유교적 가족 주의가 그 장본이라고 주장한다. 유교의 폐쇄적 가족주의 철학은 지독히 ‘우리’ 의식을 강조하였고 권위주 의와 서열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 ‘우리’ 의식 때문에 ‘나’가 아닌 ‘남’을 용납하지 못하고 ‘우리’가 아닌 ‘그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각 사회 집단 내에서 혈연, 지연, 학연에 근거한 집단 이기주의 행동이 나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위주의와 서열 문화를 버리지 못하면 목사-장로-집사라는 직분은 섬기는 직분보다는 계급의 직분으로 인식되고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목사와 장 로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목사와 목사 사이에 교권 다툼이 일어난다. 장로 피택이나 안수집사 선출에서 잡음이 생기는 것도 결코 이와 무관치 않다. 봉 사의 직분이 계급의 직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것의 폐해는 신자의 경건이 개인의 차원이 아닌 관계의 차원, 다시 말하 면 공동체의 차원으로 확대되는 것을 저해한다는 데 있다. 서로 사랑하고 신 뢰하는 연합의 공동체, 서로 섬기는 공동체를 생산해 내지 못하게 한다. 하 지만 원래 교회는 인종과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 는 개방적 성격이 강하다. 이런 개방적 문화 성격은 유교의 폐쇄적 가족주의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 싸움에서 천국 의 개방성이 문화적 폐쇄성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 면 교회의 문화는 전통 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분 열의 근본 원인을 선교사들의 교파별 선교 구역 분할에서 찾는 이만열 교수 를 반대하는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이 부흥 운동은 선교사 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만과 권위주의를 회개함으로써 일어났 다. 회개가 일어남으로 공동체가 회복되었다. 그렇다면 회개란 관계의 회복 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요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다. 이런 관계 가 회복될 때 공동체는 개방적이 되며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 다. 이처럼 교회 부흥은 공동체성 회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본서 의 주장이다. 요사이 이러한 책들을 대하면서 확인하고 확신하는 바가 하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며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거룩한 사회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나라 실현하길 좋은 신학이라면 그러한 교회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신학일 것이다. 부흥 의 문제를 전통 문화와 교회론과 연관시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저자의 노 고에 박수를 보낸다.
73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완전한 진리_우리의 지성이 평안을 누리려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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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4 2006-09-06
조주석의 북카페 우리의 지성이 평안을 누리려면 완전한 진리 학교에서 배운 것과 교회에서 배운 것이 서로 충돌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 까. 지적 혼란이 생긴다. 이 책의 저자가 고교 시절에 그런 홍역을 치렀다. 혼란이란 지성적 무질서를 뜻한다. 자신의 지성 안에 이런 무질서가 생기면 심리적으로 안정이나 평안을 잃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이 혼란에서 벗어나 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이리저리 생각도 해보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도 나눠보고 이 책 저 책을 뒤지기도 한다. 지적 혼란기에 빠지기도 왜 지식의 차이가 생기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 서로 다른 세계관에 따라 사고하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사물이나 사회 현상에 대해서 그가 보는 관 점, 즉 세계관의 차이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다윈주의 자는 자연적으로 우연히 발생했다고 하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를 말 한다. 이렇게 동일한 문제를 놓고도 어느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사람은 전혀 다른 지식을 생산한다. 종교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개인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세 계를 해석해 낼 수 있는 틀이 있다. 기독교 신앙도 그런 기능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앙은 단지 체험의 문제만이 아닌 진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말은 기독교가 총체적 진리라는 뜻이다. 책의 제목도 그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제1차 부흥운동 이래 200여 년 동안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은 개인 경건과 구원이라는 한쪽만 강조했지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해석해 내는 일에서는 개인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결과 미국 사회 에서 기독교 신앙은 인지적 내용이 없는 개인의 체험 문제로 좁혀진다. 교실 이나 학문 세계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말하면 안 되는 금기가 생기고 입법화가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독교 신앙보다 과학적 세계관이 훨씬 우세한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비지성적 복음주의로는 자신의 지성을 설득할 수 도, 자신의 믿음을 버텨내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성경의 믿음이 이 세상 을 설명해낼 지식으로는 합당하게 보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낸 시 여사처럼 고교 시절에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글을 써서 솔직하게 불신 선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적 세계관들이 왜 합당하지 않은지 그 뿌리째 흔들어 놓았던 라 브리의 쉐퍼 박사를 접한 후 저자의 기독교 신앙은 다시 새롭게 살아나기 시 작했고 지성의 질서도 찾아가게 된다. 그 후 30여 년이 넘게 성경의 말씀으 로 현대 문화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구원과 인 생과 온 우주의 궁극적 질문에 답하는 총체적 진리라고 변증해 낸다. 이러 한 삶의 결실로 이 두툼한 책이 나올 수 있었다. 본서는 미국의 복음주의가 체험과 느낌을 중시한 나머지 점차 지성을 잃어 간 역사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저자 자신을 넘어지게 한 근본 뿌리도 밝혀 낸다(제3부). 또 다윈주의가 과학과 윤리와 교육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 고 있으며 그것이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도 가려낸다(제2부). 사실/가치, 사 적 영역/공적 영역이라는 이중 구조는 그리스도인에게 대단히 치명적인데 이 를 극복하려면 기독교 세계관을 확고히 세워야 하고( 제1부), 이러한 정립이 한낱 정신적 운동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이 동반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도 한다(제4부). 전문성 면에서 고도의 교육은 받았어도 자기 분야의 중심 주제를 성경적 세 계관에 따라 해석해 낼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사람에 게는 기독교 신앙이 총체적 진리로 작동하지 못하고 사적 영역에 갇히고 만 다. 복음의 능력이 문화 속에 들어가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이다. 성화 가 단지 도덕적 차원만이 아닌 지성적 차원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외치는 교회의 설교나 가르침이 정말 절실한 현실이다. 이런 높은 이상을 갖는 개혁 신학이 실천에 옮겨져야 당대의 지성과도 한판 겨룰 수 있다. 신앙은 총체적 지성 갖춰야 우리의 지성은 질서를 찾아야 비로소 평안도 소명도 갖게 된다. 이것이 본서 가 기독교 지성을 꿈꾸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72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변혁과 샬롬의 대중문화론_대중문화 이해 다리놓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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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4 2006-08-02
조주석의 북카페 대중문화 이해 다리놓기 변혁과 샬롬의 대중문화론 신국원 지음, 문고판, IVP, 313쪽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대중문화를 학적으로 이해할 기회는 거의 없었 다. 그 이유가 대중문화는 너무나 늘 쉽게 대할 수 있는 것이요 또 별것 아 니라는 무지도 한몫 거들었거니와 더욱이 내 관심 밖에 있어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생각을 확 뒤집어놓았다. 내노라하는 철학자들이 대중문화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학문의 대상이 된 게 아닌가. 나의 시각 전환은, 좀 풍을 치자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쯤 된다. 학문적 탐구 대상된 대중문화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가요 등이 모두 대중문화에 속한 다. 이런 것들은 즐거움과 여가의 대명사처럼 쓰이지만 마냥 오락의 기능만 하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세계관을 강하게 반영한다. 삶의 가치나 비전을 제 시한다. 그것도 어 느 하나의 세계관만 일관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양한 세계관이 각축하고 충돌하는 문화의 장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대중은 자신의 삶과 세계를 형성해 나간다. 확실히 대중문 화는 우리의 삶을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규범적 성격을 분명 갖추고 있 다. 그것은 이제 현대인에게 삶의 경전이다. 이런 문화를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비평해야 하는가? 물론 상식적 비판으로 읽어내겠다 하는 자세는 말도 안 된다고 지은이는 일축한다. 그리고는 통합 적 비평, 즉 세계관적 비평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우리에게 이런 틀 을 구비하여 대중문화를 읽어내라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대중문화를 비평해 온 여러 비판의 방법들, 즉 심미적 비판과 정치 사회적 비판과 윤리적 비판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면서(3-5장) 그 것들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통찰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하나로 묶어 세계 관적 비평을 제시한다(6장). 이것의 장점은 인간의 삶이 예술과 정치와 윤리 를 포함하는 통일체이듯, 이 틀도 예술과 정치와 윤리를 다 포괄하는 통합적 이라는 데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글로 된 깊이 있는 기독교 대중문화 이론서가 우리 가까이 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만큼 언어나 시간이라는 장벽에 막혀 더 나가는 못 하는 독자들에겐 이 책이 대중문화 이해 다리놓기로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독자의 하나로서 나는 지식의 한계도 느껴야 했다. 마르크시즘, 구조주의가 등장하는 정치 사회적 비판을 논의한 대목에서다. 대중문화 이해에 이런 것 들이 필요하리라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현대철학을 다룬 ‘철학과 굴뚝청소 부’라는 책까지 동원해서 그 간격을 조금이나마 메워야 했다. 대중문화의 역사는 일백년 남짓밖에 안 됐지만 대중을 사로잡는 힘과 영향력 은 거의 절대자에 가깝다. 지식산업사회로 들어선 21세기에서는 그 파워가 더 세면 세졌지 반대는 아닐 게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그리스도인 이 직면한 어려움은 어떤 것인가. 빈곤이나 압제가 아니라 ‘죽도록 즐기려 는’ 분위기가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우리의 믿음의 삶을 야금야금 축내는 생쥐들이 있다. 연예와 오락이 그 장본 이다. 이로써 본질적 매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점점 세상과 짝짝꿍 하는 교 회는 늘어가는 것 같다. 이 말은 문화 생활에서 대중에게 신뢰를 줄 만한 권 위를 이미 상실했다 는 뜻이기도 하다. 산업사회의 등장과 함께 일과 놀이는 분리되었다. 그 결과 대중은 대중문화 를 통해 휴식과 안식을 찾으려 하지만 일회용 음료에 지날 뿐이다. 사서 마 시고 또 사서 마시지만 진정한 갈증은 해소될 수가 없다. 아무리 섭취해도 일회성에 불과 우리 인간은 결코 그것만으로는 영혼의 갈증을 흡족히 채울 없는 존재다. 허 나 샬롬, 이 샬롬은 문화의 이상이요 비전이며 그것의 핵심은 안식과 평안이 다. 이 안식의 비전이 예표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예배다(7장). 그렇 다면 이 예배를 통해 샬롬을 깊이 맛보고 그 맛을 전하는 교회 본연의 모습 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71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판타지는 우리 십대들에게 혹시 독이 아닐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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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3 2006-02-16
판타지: 톨킨, 루이스, 롤링의 환상 세계와 기독교 판타지는 우리 십대들에게 혹시 독이 아닐까 송태현/문고판/살림출판사/95쪽|2003/12발행 큰애는 중학교 시절 때 판타지를 좋아했다. 도 도 읽었다. 하지만 난 아이의 이런 독서가 썩 마음 내키는 건 아니었다. 이 런 생각은 나처럼 좀 고지식한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아마 예외 없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혹시라도 앞뒤 분간 못하고 환상 세계나 마법에 내 귀여운 새끼가 빠져 탈이나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말이다. 이런 나의 염 려와는 달리 큰애는 별 탈 없이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사려 깊은 대학 생이 되었다. 그러면 정작 문제는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판타지였는가 아니면 나의 태도였 는가. 사실 난 아이가 아무 탈 없이 큰 까닭에 이 문제를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이 그냥 잊고 지내온 게 사실이 다. 아마 자녀에 대한 부모 의 태도가 늘 이런 식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자녀를 기르는 방식이 상당 부 분 부모의 불안이나 선입견에 좌우되는 일이 많을 것 같다. 그래서 판타지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막연한 불안감만 가지고 아이를 얽어매려 한 나 자신 과 또 내 무지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사이 극장가에서 가 상영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과 연이어 이 상영되었고 또 선풍적이었다. 이 런 환상성 열풍으로 관객들은 극장가로 앞 다투어 몰려갔고 재정난에 허우적 대는 서점가는 때아닌 구세주를 만나 판타지 문학 붐으로 장삿속을 챙겼다. 아마 웬만한 가정이라면 판타지 서적 한 권쯤 없는 집이 없을 게다. 그게 우 리의 열풍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큰 증거이리라. 그러면 이런 영화나 문학이 성행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들을 어떻게 보 아야 하는가. 이 책은 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환상문학을 다루고 있 다. 그리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을 만큼 학문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환상문학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 한번 정도 생각 해 본 독자라면 제 격인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기독교학문연구회의 회원이면서 또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학자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을 위해 자신의 소임을 이런 저술로써 그 일부를 다 한 것이다. 아주 귀한 일이다. 그가 다루는 내용을 보면, 먼저 사실주의 예술과 환상예술이 무엇이며, 요사 이 한국사회에서 환상문학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 지, 그리고 환상과 판타지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간략히 잘 설 명해 낸다. 이렇게 한 다음 환상문학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두 학자(톨킨과 루 이스)와 유명한 작가가 된 한 사람(롤링)을 각각 따로따로 소개한다. 그의 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현대의 판타지 부흥에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섭렵한다. 내 생각으론 그의 글의 힘과 포인트는 이 적용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큰 아이로 인해 잠 시라도 고민해 보았던 나의 문제가 여기서 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옛 이야기의 세계에 접촉해지 못했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 이런 세계에 흠뻑 빠지면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할 위험성이 훨씬 더 크다는 지적은 참으로 설득력 있어 보였다. 오늘날 젊은이들 중에 갑자기 약물에 의 한 몽환의 세계에 빠져들거나, 도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거나 점성술을 믿거 나, 갑자기 자기의 삶이 멋지게 바뀌는 마법적인 사건이 생길 거라는 현실 도 피적인 백일몽에 빠져드는 경우가 꽤 많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산타할아버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아이들의 상상 속에는 존재 한다고 믿도록 나두는 편이 아이들에게는 더 자연스럽고 정서에도 맞다는 꼬 집음이 내게는 일침이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아이로 그 리 믿도록 조장하는 내가 아닌가 하는 어줍잖은 신앙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아이가 크면 아무도 그렇게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터인데도 말이다. 십대 의 아이들을 둔 부모나 현직 교사나 주일학교 교사나 중고등부를 맡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고추는 작지만 아주 맵다는 말이 분명 이 책을 두고 한 말 같다. 서평_조주석 목사/합신출판부 편집실장 press@hapdong.ac.kr
70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맥주 타이타닉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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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8 2006-02-16
조주석의 북카페 맥주 타이타닉 그리스도인 윌리엄 로마노프스키 지음|정혁현 옮김|IVP|263쪽|2004. 8월 발행 그리스도인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동안 우리 사회에 큰 담론을 불러일으킨 영화가 있다. . 며 칠 전 이천원 주고 디브디로 빌려 식구들과 함께 재밌게 봤다. 6.25에 참전 한 세 부류의 군인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산골마을 동막골에 흘러 들어와 그들이 이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동화적 기법으로 그려낸 영화 다. 이 주제는 우리 대다수가 바라는 희망 사항이므로 쉽게 대중의 공감도 얻 어낼 수 있었으리라. 더욱이 비극적 분단 현실을 지성적이 아닌 감성적으로 접근한 까닭에 젊은 세대에게는 호소력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호주 머니를 기꺼이 털어 그 스크린 앞에 다가가 즐기고 소통한 것이다. 우리 큰 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처럼 대중문화인 영화는 사회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지 만 그 영화에 담긴 메 시지를 통해 다시 사회를 형성해 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는 문학작품과 더불어 한 국가의 사회상과 한 민족의 집단 심리와 한 시대의 문화를 읽어내 는 중요한 문화적 텍스트로 인정을 받는다. 이 외면할 수 없는 대중문화를 우 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마냥 즐기기만 해야 하는가. 그 러기에는 상당히 꺼림칙하다. 그렇다면 마냥 피하기만 해야 하는가. 그러기에 는 책임성 있게 신앙 생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대치 현실을 보고 그 해결책을 모색한 문서 텍스트가 있다. 미국의 칼빈 대학교 언론학과 교수인 윌리엄 로마노프스키가 쓴 이다. ‘눈을 크게 뜨라’(Eyes Wide Open)가 원제인데 젊은이들이 즐기 는 대중적인 알콜과 영화 제목을 가져와 따다 붙여 그들에게 친근히 다가서 려 한 배려로 보이지만 내겐 생뚱맞다. 이 책은 대중문화 특히 영화가 예술로 서 어떤 위치에 서며, 어떤 역할을 하며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썩 잘 기술하고 있다. 나는 영화라는 대중문화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온 게 사실이다. 이건 나만 아니라 다수 목회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더욱이 보수 적인 신앙에서 자라난 기성세대라면 더 그러리라 여겨진다. 영화는 우리에게 재미도 제공하고 또 이상과 희망과 가치도 제시한다. 반면 그 악영향의 힘도 결코 만만치 않다. 크면 크지 결코 작지 않다. 그래서 이 역기능이 크게 보이 면 순기능은 가려지고 묻힐 수밖에 없다. 젊은 날의 수많은 영화 체험이 나 의 부정적 태도를 낳은 주범도 그래서 생긴 게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 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대중문화를 우리 젊은이들은 어떻게 극복해 낼 것인가. 오 늘 우리의 교회는 이에 속수무책인 듯하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사회에만 떠 맡기고 나 몰라라 하는 태도로 일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떤 대책이 있어 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의 젊은 세대도 나의 경우처럼 영화를 미학적 관점은 무시한 채 도덕적 관점으로만 이해할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될 경우 문 화를 개혁하기는커녕 반문화적인 태도로 이어질 게 거의 확실하다. 이런 현실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지은이는 이러한 현실 을 명확히 직시하고 20세기에 혜성처럼 떠오른 이 대 중문화를 성경적이고 신 학적이고 미학적으로 면밀히 반성하고 검토하는 지적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이의 눈을 크게 떠서 볼 수 있게 할 장점들을 이 책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를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비평한 내용들에서 독자의 눈이 새롭게 열릴 것이라 기대해 본다. 이 책을 통해 거둔 나의 큰 수확이라면 대중문화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 를 발견하게 했다는 점이다. 영화도 인간이 수행하는 문화명령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어리석게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 점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 쳤기에 미학적 비평이라는 점을 놓친 게 사실이다. 한눈에 금방 들어오지 않 는 논증 구조라는 약점도 있고 또 성경해석이나 관점에 동의하기 어려운 몇 가지 점들이 있긴 하지만 큰 틀은 대중문화를 되짚어 보게 할 장점이 많은 책 인 게 분명하다. 조주석 목사|합신촐판부 편집실장 press@hapdong.ac.kr
69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갈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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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1 2005-12-08
조주석의 북카페 갈대상자 조주석_합신출판부편집실장 김영애 지음, 도서출판 두란노, 352쪽 밀린 교직원의 급여를 지급하려고 교육부에 예치해 두었던 학교 돈을 총장이 차용해 씀으로 횡령죄로 구속된 일이 있었다. 사적 목적에 쓴 것은 아니나 행 정 책임자로서 이도저도 못할 어려운 지경에서 한 일이라 했다. 지난 달 4일 에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을 방문하던 차 다른 직원에게 전해들은 한동대 김영 길 총장의 이야기다. 세간에서는 떠들썩했는데도 나만 모른 아주 새로운 뉴스 였다. 외국 갔다 온 것도 아닌데 내가 둔한 것이 분명하다. 지은이인 김영애는 김영길 총장의 부인이다. 그리고 이 책은 포항에 있는 한 동대라는 무대에서 펼쳐진 10년의 이야기를 주로 담는다. 플롯은 회상식이 다. 첫 장을 펴자마자 현직 총장과 부총장이 이례적으로 법정 구속되는 이야 기로 시작한다. 2001년 5월 11일의 일이다. 세간은 상당히 떠들썩했던 모양이 다. 진행은 다시 카이스트의 김영기 교수의 한동대 수락 장면으로 돌아가 7년전 이야기부터 지은이는 시작한다. 이렇게 일단 막을 내리고서 이야기는 다시 더 근원으로 올라가 두 사람이 부 부가 된 달콤한 결혼 이야기, 김영길 총장의 서른두 살 때의 중생 이야기, 1979년 유치 과학자로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이야기, 한때 카이스 트에서 별 풍파 없이 안온하게 보냈던 행복한 나날들이 부담 없이 술술 나온 다. 이 행복을 깨고 그들의 삶에 내습한 강타는 한동대 총장 제의였다. 남편을 돕 는 자로서 아내는 이 현재의 안정된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 계산에 덜 익숙한 남편의 결심에 시간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마침내 한동대로 더 낙향한다.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 계속된다. 수십 억 아니 수백 억이라는 돈의 고통, 끊임없는 고소 고 발로 인한 모욕……. 오죽했으면 아내가 욕실로 뛰어 들어가 옷을 입은 채 샤 워기를 틀어놓고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울고 또 울었겠는가. 눈물에 인색한 나조차도 여러 차례 코가 찡하고 가슴이 울컥했다. 그들 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왜 이런 고통을 스스로 자취해야만 했는가. 아내의 소망처럼 편히 카이스트에서 지냈더라면 세계적인 과학자로서 대접도 받고 많 은 업적도 남겼을 텐데. 포항에서 1심 구형이 떨어지던 날 검사 앞에서 한 최 후 진술에서 그 이유를 우리는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저는 한동대를 통 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을 견뎌 왔습니다.” 사명감, 참으로 무겁디 무거운 단어다. 이렇듯 그 는 삶의 문제 앞에서 유불리를 따져 편한 쪽으로 저울추를 놓는 범인이 결코 아니었다. 사명은 자신을 깨뜨리는 일이요 모든 안정과 완전히 결별하는 올가미다. 왜 냐, 그것은 섬기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부부의 삶에서 그것을 확 연히 읽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한 사례로는, 교직원의 월급을 주지 못하자 끝내는 이제까지 미뤄뒀던 카이스트에 사표를 쓰고 16년간의 퇴직금까지 몽 땅 떨어 한동대에 넣어야 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옛날로 돌아갈 수도 있다 는 아내의 희망과 피난처가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 내는 그 후로 오랜만에 자유도 느끼 고 또 야윈 몸도 차츰차츰 되찾는 경험을 한다. 최후에 붙잡을 끈마저 놓아버리는 자기 버림의 위력이 바로 이런 것이 라. 후원금이 수억 단위로 나오고 지인들이 박사들로 수두룩하니 서민과는 먼 일 로 보여 좀 심기가 불편키도 했다. 또 성경을 묵상하여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 는 것이 어느 때는 무리다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도회의 안락한 귀족적 인 신앙생활을 접고 한동대를 하나님과 조국이 자기에게 맡긴 사명으로 인식 하고 무던히 참아낸 저 낮은 인고의 삶은 분명 서툴게 사는 내게 큰 울림으 로 다가왔다. 한동대 후원운동 이름인 ‘갈대상자’를 책 이름으로 쓴 이 이 야기는 힘없는 관념적인 신앙에 큰 도전장을 내민 아름다운 서사시가 아닐 수 없다.
68 no image 한부선 평전: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_서평 조주석 실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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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5 2005-11-11
조주석의 북카페 한부선 평전: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서평|조주석 실장-합신 출판부 press@hapdong.ac.kr 박응규 지음, 신국 양장, 도서출판 그리심, 487쪽, 2004년 6월 발행 신앙고백에 충실한 선교사 젊었을 때 해외 선교에 열정을 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신자로서의 삶도 변 변치 못하고 소명의 확신도 충실치 못하다는 이유로 도중에 그런 열정은 식 고 말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개혁신앙을 접한 후 감정에 충실하기보다는 고 백에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에 대해 별 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이름 정도만 알 뿐이었다. 희미한 기억으로는 고 려신학교와 연관을 맺고 활동한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라는 지 식이 그 전부였다. 그를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다든지 지금처럼 책이나 정보 가 흔했던 시절이 아니 었다는 이유로 물론 나의 옅은 지식을 간단히 덮으려 할 마음은 없다. 한 가지 짚고 싶은 바는 신앙의 주류에 선 한부선이라는 인 물을 하마터면 이 책소개라는 강제 자리마저 없었더라면 놓칠 뻔했다는 사실 이다. 긴 책을 짬짬이 일주일에 걸쳐 읽고나니 한부선의 삶과 사역, 또 겹쳐 나오 는 100년 장로교회의 역사가 상당히 선명히 그려졌다. 한부선은 미국 북장로 교 선교사인 한위렴(William B. Hunt)의 장남으로 조선의 평양에서 태어났 다. 만 두 살에 어머니를 여위고 황해도 재령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세 에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휘튼대학에 다니면서 중생의 체험 을 하게 된다. 그 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에 한국선교사로 파 송되어 청주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한다. 1966년 6월 6일 의 인터 뷰 기사에서 이러한 자신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애당초 믿음이 없어서 목사 될 생각은 안했는데 대학 2학년 때 참된 신앙을 얻어 몸 바쳐 일하게 되 었고 고생 많다고 하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로 지원했더니 선교부에서 한 국으로 파송하여 다시 한국에 왔다.” 한부선 선교사가 한 국 장로교회역사에서 보여준 바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 다. 그는 신앙의 주류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준 인물이다. 일 제 강점기에 교회는 신사참배라는 불화살 앞에 모두 노출된 상태였다. 외국 인 선교사로서 그는 철수하면 그만이었겠지만 그의 믿음의 진가는 여기서 발 휘된다. 그는 만주에서 봉천노회를 중심으로 7개 조항으로 된 ‘장로교인 언 약문서’를 작성하여 교인들로 그 문서에 서명하게 하고 그들과 더불어 신사 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참 교회를 보존시켜 나가는 일에 앞장선다. 이 신령한 전투는 당연히 감옥행이었다. 전교회적으로 배교하는 현실 속에서 개인의 차 원이 아닌 교회적 차원에서 참 교회를 보존해 나간 좋은 모범이 아닐 수 없 다. 흑암을 뚫고 해방이 찾아왔다. 그 기쁨은 잠시일 뿐 청산해야 할 과제는 교회 에 태산 같았다. 제27차 총회(1938년)에서 가결한 신사참배 결의로 이미 배교 의 자리로 떨어진 타락한 장로교회였다. 극소수만이 믿음의 순결을 지켰을 뿐 이다. 교회재건과 회개운동이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타락한 교 회는 엎드려 권징을 통해 신사참배 행위를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는 자책이 있 어야 했다. 그러나 소수만 이 권징에 응할 뿐 다수가 뻔뻔한 소리로 자신의 더러움을 가리우자 전교회적인 회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는 또 다시 실패한다. 그리고 교권에 눈 먼 지도자들은 적반하장격으로 교회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을 사갈시하고 또 밀어냈다. 결국 경남지역에서 일어난 교회쇄신운동은 소수파에 그쳐 한 모퉁이로 밀리고 말았지만, 한부선 은 개혁에 충실하려 한 고려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거기에 가담하여 은퇴시까 지 함께 한다. 역사가인 민경배 교수는 이러한 역사를 놓고 메이첸파 선교사들(한부선도 포 함)의 자기의(自己義)를 주장하는 비타협적 태도와 소수의 열등한 자들의 광 기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교회는 교회의 성결을 위해 아무도 치리할 수 없다는 희한한 답밖에 가질 수 없다. 또한 교회 분열을, 회개를 거 절한 사람들이 아닌 회개를 요구한 사람들에게 돌리는 무리한 논리를 세울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역비판을 한 서영일을 정당한 것으로 지은이는 우리 앞에 제시한다. 우리는 선교 대국이다. 후일에 한부선 같은 신앙고백에 충실한 믿음의 주류 에 선 아름다운 한국인 선교사 이야기를 다시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67 no image 작은 예수처럼 살다간 사람 로버트 맥체인_ 서평 조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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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8 2005-10-13
작은 예수처럼 살다간 사람 로버트 맥체인 서평|조주석 실장-합신 출판부 press@hapdong.ac.kr 이중수 지음, 부흥과개혁사, 174면, 2005.3발행 부흥의 불길 지핀 29세 생애 진솔하게 그려내 “로버트 맥체인, 그의 이름은 스코틀랜드의 일부 지역에서는 존 번연의 이름 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설교는 스코틀랜드 교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메시지다.” 지은이는 칠십년도 초 한국에 부임한 스코틀랜드 어느 여선교사 를 통해 그를 처음 접하게 된다. 맥체인은 에든버러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갑작스런 형의 죽음(26세) 에 마음을 돌려 열여덟에 회심을 한다. 목사 수업은 에든버러 신학부에서 시작되었다. 매주 토요일에 친구들과 만나 서로 읽은 책을 나누고, 원문으로 예언서를 연구했다. 챔머스 박사는 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교수다. 매주 토요일 전도팀을 만들어 에든버러 미전 도 지역에 심방 전도를 하 게 했다. 이런 산 경험을 통해 맥체인은 마음 깊이 새긴 바가 있다. 영적으로 어둡고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이다. 이런 실천성이 오늘의 신학교에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 같다. 그에게는 ‘성경 묵상이 숙제가 아니라 밥상’이었다. 성경을 하루에 3장씩 읽고 주일에는 한 주간의 본문들을 복습했다. 이러한 밥상을 통해 강단의 메 시지가 늘 새롭고 힘 있게 흘러나올 수 있었다. 삶을 마감하기 일년 전에는 자신이 목회하던 성 베드로 교회의 회중을 위해 성경 읽기표를 제작했다. 구 약은 일년에 일회, 신약과 시편은 이회 통독하도록 짜여졌다. 마틴 로이드 존 스 목사도 이 성경읽기표를 사용해서 말씀을 묵상했다고 한다. 그 뒤를 잇는 개미떼 같은 대열이 줄을 섰으면 한다. 그는 전기와 경건 서적을 많이 읽었다. 존 뉴턴, 조나단 에드워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토머스 보스턴, 새뮤얼 러더퍼드, 존 엘리엇의 생애를 사랑하고 존 오웬, 루터,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학서적을 애독했다. 피가 끓어오르듯 영혼을 사랑한 그의 불타는 열정은 시샘이 날 정도다. “그 는 눈물을 머금지 않고는 악인의 멸망을 언급할 수 없는 자였다.” 이 대목에 서 잠시 숨이 막혔다. 내일이면 목사 안수를 받는다. 냉혈 목사가 아닌 열혈 목사로 세워주셨으면 한다. 거룩한 삶은 거듭난 인간의 몸과 영혼이 온전히 투입되는 영적 투쟁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 라”고 하신 교훈과 맞닿는 말이다. 이러한 삶이 맥체인의 실재였다. 선교 여행, 한국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종교어다. 맥체인은 유대인 선교 를 위해 긴 답사 여행을 한다. 팔레스타인과 터키를 돈 것이다. 비행기와 차 를 이용한 눈요기 관광 여행이 아니라 생사를 건 답사였다. 바울의 치열한 충 성의 수고에 버금가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 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 이 기간 동안 그는 번스 목사에게 섬기는 교회를 맡긴다. 해외 선교지로 갈 계획이었던 번스 목사가 잠시 성 베드로 교회를 맡은 것이다. 첫 4개월이 지 나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회개 운동과 성령의 초자연 적 역사가 일어났다. 번스 목사로 시작한 이 부흥 운동은 맥체인 으로 이어졌 고 그 불길은 들불처럼 전국에 번졌다. 스코틀랜드 국교가 공적으로 심사할 만큼의 교회사적 사건이 되었다. 우리 헌법은 목사의 자격을 삼십세로 규정하고 있다. 스물셋에 목사가 되어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의 법으로는 아예 목사조차 될 수 없는 나이 였다. 이 짧은 생애 동안에 그가 선명히 보여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자 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의 성숙과 부흥이었다. 신자로 서의 삶과 목사로서의 삶, 인격의 성숙과 사명의 충성. 이 두 화두는 오늘의 목회자에게도 충분히 유효하다. 새내기 목사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66 no image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버포스_조주석 실장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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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2 2005-09-16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버포스 서평|조주석_합신출판부편집 실장 "기독교 최고의 정치적 가치 실천한 하나닝의 정치가" |가트 린, 송준인 옮김, 두란노, 신국판, 300쪽|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가 있다. 윌버포스는 이 책에서 간략 히 두 쪽으로 언급되고 만다. 이러한 윌버포스를 가트 린(Garth Lean)은 300 쪽 분량의 방대한 읽을거리로 만들어 낸다. 한때 병으로 요양을 했던 지은이 는 병상에서 윌버포스를 깊이 읽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를 계기로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엽을 살다간 윌버포스를 ‘하나님의 정치가’(God's Politician - 영어 원제목)라고 선언한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저널리스트 인 그가 왜 윌버포스를 그렇게 높이 칭한 것일까? 이 물음은 저자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이 책의 저술 목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윌버포스와 그의 친구들이 그들의 시대 정신을 그렇게 독특하고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해 준 그들의 자질과 방법을 그려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자 질과 방법을 우리로 배우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지은이는 윌버 포스의 삶을 연대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주제 중심으로 기술한다. 그래서 읽 기가 재밌다. 책은 윌버포스 시대의 영국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당시 영국은 세계에서 제 일가는 노예 무역국이었다. 이 노예 무역으로 국가적 부를 창출하던 당당한 제국주의 영국. 이러한 치부를 1장에서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그가 어렸 을 때, 노예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 목사, 우리에게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로 유명해진 그의 설교와 간증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또 크게 감명도 받는 다. 하지만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정계에 뛰어든 그는 여느 정치가나 다름없 이 젊음을 향락으로 보낸다. 그의 회심의 방식은 독특하다. 요크셔의 하원에 당선된 다음 얼마 되지 않 아 떠난 두 번의 여행, 이 여행은 각각 4개월씩 걸렸는데, 이 시기에 하나님 께로 돌아온다. 아이작 밀러와 주고받은 깊 은 신앙 토론을 통해서 회개한 것 이다. 자신의 생활을 들여다 볼 때 당분간 공적 생활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 겠다고 생각하나 존 뉴턴 목사를 찾은 다음 마음은 바뀐다. 뉴턴 목사는 그 에게 주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국가의 유익을 위해서 길러주셨으니 공 적 생활에서 떠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러한 조언에 따라 그는 개인의 성결 과 세계를 위한 헌신 사이에서 성숙한 균형을 갖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본이지만 매우 신실한 신자라도 자주 무시할 수 있는 원칙이다. 회심 후 2년이 지난 10월 28일의 일기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인식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 예 무역을 근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20년 간 끊임없이 수고한 결과 마침내 노예 무역은 철폐될 수 있었다. 영국 정치 의 전통 속으로 이타주의가 들어온 것이다. 정치는 원래 성격상 이타적이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의 획을 긋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정치가 정직한 사람에게 적합한 존경할 만한 직업”이라는 생각도 영국 사회에 서 게 된다. 이러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는 최근에 7월 28일을 그 의 날로 정한 것인데 정치인으로는 수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정치가다. 지은이는 그에게 왜 이런 화려한 수식어를 붙인 것인가? 이런 정치가가 또 나오기를 바라는 애틋한 소망을 담은 표현으 로 보인다. 저널리스트라는 속성에서 나온 화려한 수식어는 아닌 것 같다. 이쯤 되자 단번에 튀어나오는 질문이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왜 이렇게 도 개판인가? 역대 대통령 중에 개신교 신자가 둘이나 나왔고 또 천주교 신 자도 있었다. 국회의원과 장관 중에는 기독교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으 로 안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속에 벌써 이타주의가 들어왔어야 하지 않을 까? “이기심에 대한 직접적인 적대감이 기독교 최고의 정치적 가치”라고 주장한 윌버포스의 지적을 또 곱씹으며 이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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