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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조주석의 북카페| 신앙고백은 구원의 삶에 체득되어야 한다 파일
편집부
3796 2014-09-02
신앙고백은 구원의 삶에 체득되어야 한다 |박윤선 편저/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영음사| “신자라면 누구나 읽고 새겨야 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박 목사님의 마지막 작업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서랍을 여니까 그게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사실을 마음에 꼭 담아두었던 어느 목회자의 회고담이다. 이 신앙고백은 구원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거의 절반을 할애한다. 이것이 타 고백서들과 두드러지게 다른 주요 특징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부흥기를 맞이하면서 교리는 좀 뒷전에 밀쳐두었던 편이다. 교회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것들을 더 쳐 주었을 것이다. 이단들이 활개를 치는 우리 현실 속에서 새삼 교리의 중요성을 이제 실감한다.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하면 언제든지 거짓된 신앙이 우리를 속일 수 있다. 그런 현실적 필요와 두려움이 그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 아니겠는가! 구원의 신앙에는 항상 참된 구원의 지식이 따라야 건전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고백서는 그런 내용이 무엇인지 압축적으로 잘 진술한다. “본래 택함받은 자들이 아담 안에서 타락되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과정에 있어서, 적당한 시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효과적 부르심을 받으며, 바로 그들이 의롭다 하심이 되고, 양자로 삼으신 바 되고, 성화되고 구원이 완성되기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의 영적 생활이 보호를 받는다.” 이처럼 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서는 그것이 칭의와 성화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칭의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더 나아가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간주하시어 기쁘게 받아 주심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덕(功德)으로 인하여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및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현된다.” 지난 과거 역사 속에서 구원의 확신 문제가 한때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 확신의 문제에 대하여 고백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참된 신자도 확신을 소유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많은 난관으로 더불어 투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각 신자는 그들의 부름받은 사실과 택함받은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할 책임이 있다.” 기계나 나무가 아닌 우리는 그것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해야 할 인격적인 존재인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 때문에 고백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말하지만 그 은혜를 받는 인간의 책임 곧 반응이 무엇인지도 잘 설명한다. 교회사 속에서 이 문제는 늘 오해되어 왔던 바이고 지금도 신자 자신의 신앙 여정 속에서 혼란을 낳게 한다. 예전과 달라진 두드러진 한 현상이 우리 가까이에서 자주 목격된다. 성령의 권능을 앞세워 구원의 도리를 약화시키는 경향성이다. 얼마만큼이야 능력 체험이 구원의 확신에 도움은 주겠지만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자체는 아닌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제3위 하나님이시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역사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을 지나치게 앞세우면 성경도 신앙고백도 점점 뒷전으로 물러날 위험이 있다. 교회 부흥이 참된 믿음을 삼켜버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편자이신 박윤선 목사님은 이 고백서를 누구나 읽어야 할 내용으로 인식하셨다. “이 신앙고백서가 교회의 직분자들은 물론 모든 신도들에게까지 널리 읽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역자는 그 본문을 간결하게 번역하려고 힘썼다.” 그뿐 아니라 간략한 해설도 덧붙여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박 목사님이 번역하신 이 고백서는 총회 헌법의 그것과도 거의 동일하다. 이는 총회가 그것을 그대로 존중해서 받들었다는 뜻이다. 이 신앙고백의 내용이 우리의 구원의 삶에 깊이 체득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으로 튼튼히 세워질 수 있으랴! 우리가 신자라면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이 책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읽어야 한다.
124 |조주석의 북카페| 배제와 포용 파일
편집부
4051 2014-06-24
배제와 포용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IVP | 2012년 “불의와 폭력에 대한 최종적 정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어” 미로슬라브 볼프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이다. 그는 이 책을 쓰는 동안 무척 어려웠다고 술회한다. 이유인즉슨 자신의 동족이 세르바아인에 의해 짐승처럼 짓밟히고 있었으며,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적합한 반응을 생각해 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그의 신앙은 분열된 듯 했다고 술회한다. “희생자들을 위해 정의를 성취하라는 명령과 가해자를 끌어안으라는 부르심 사이에서, 내 신앙 자체가 분열된 것 같았다.” 정의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포용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자신의 신앙 안에서 서로 조화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 난제를 다룸에 있어서 그는 본서를 크게 둘로 나눈다. 제1부에서는 볼프의 핵심 사상인 배제(exclusion)와 포용(embrace)이 주로 다루어지며, 제2부에서는 우리 문화와 사회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세 가지 가치를 다룬다. 즉 정의와 진실과 평화의 문제를, 그것들을 교란하는 억압과 기만과 폭력의 문제와 함께 다룸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우리가 자칫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 구조 개혁이나 사회 변혁에 초점을 맞추기 십상인데 볼프는 그것을 신학자의 임무라고 보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은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구조 개혁이나 사회 변혁은 일차적으로는 정치가나 사회학자나 경제학자의 몫이지 신학자가 논의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발 때문에 그는 사회적 행위자라는 정체성에 집중한다. 사회적 행위자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다. 배제와 포용이란 갈등 관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 우리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나 우리를 중심에 두면 타인이나 그들은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서로 연결이 되지 못하므로 배제가 일어나게 된다. 이 배제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나와 타인 사이에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가 형성되고 그 악순환이 끊이지 않는 한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양자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포용이 일어나려면 사회적 행위자 안에서 네 가지 단계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즉 회개와 용서와 포용과 잊어버리기가 필요하다. 이 네 단계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항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사회적 행위자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그가 속한 사회 구조에 영향을 주려면 먼저 자기를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사회적 행위자로서 포용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가해자가 행한 불의와 폭력의 문제는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법을 통해 정의가 제한적으로 시행될 수는 있겠지만 정의가 온전히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희생자를 위한 정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끌어안으심은 일어났지만 정의의 실행은 미래로 미뤄진다. 그 실행은 어린양이 아닌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백마 탄 자의 폭력에 의해 가해자의 불의와 폭력에 대한 최종적 정의가 실행될 뿐이다. 이렇듯 최종적 폭력은 하나님만이 독점하시고 인간에게는 그 폭력 행사가 금해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칼을 들고 백마 탄 자의 깃발 아래 모여서는 안 되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라가야 한다.” 볼프의 논의는 법이나 도덕으로써 평화 수립을 꿈꾼 홉스나 칸트와도 다른 것이다. 개인에게는 사랑의 규범이 적용되나 집단에게는 정의의 규범이 적용된다고 한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와도 다르고, 정당방위로서의 폭력을 거부하고 비폭력 평화주의를 제시한 존 요더와도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복음의 사회적 적용을 더욱 성경적으로 접근시킨 것으로 보인다. 올해로 64주년을 맞이한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우리는 남북의 대치는 물론이고 좌우 이념 대립으로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 갈등을 자주 내비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신선한 신학적 모색을 제공하며 미래 통일 조국의 갈등 문제에 대해서도 빛을 비추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123 |조주석의 북카페| 삶의 깊이를 요청하는 고통 파일
편집부
3006 2014-04-29
삶의 깊이를 요청하는 고통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박영선|박영선의 욥기설교|559면|도서출판 영음사| “순종-축복, 불순종-저주라는 보응원리에 일침 가해” 고통이 없는 세상이라면 좋을 텐데 왜 고통은 존재하는 것인가? 악인이 당하는 고통이라면 몰라도 이유 없이 당하는 인간의 고통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의로운 욥이 당하는 고통은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행복하게 살다가 갑자기 불행을 당한 욥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를 찾아온 세 친구는 위로보다는 네가 범죄한 까닭에 당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회개하라 욥을 다그친다. 사탄은 욥에게서 복을 제거하면 신앙도 버릴 것이라고 시험한 반면 그의 세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통의 현실을 범죄가 가져온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단죄한다. 그들이 욥에게 들이댄 판단 기준은 보응의 원리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징벌하신다는 것이다. 이 원리에 따라 하나님은 인류뿐 아니라 자기 백성의 행위도 판단하신다. 이 원리에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그가 하시는 일들은 다 옳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세 친구는 줄기차게 3회전에 걸쳐 이 원리로 욥을 판단하나 그것으로는 자신의 고통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다고 비명을 지른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져 묻는다. 내게 잘못이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이 온 것입니까? 하나님이 틀린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정말 의로우시다는 말입니까? 당신이 하시는 바가 정말로 다 옳다는 말입니까? 신학에서는 이러한 난해한 문제를 신정론(神正論)이라 하여 다룬다. 욥기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욥이 당하는 지긋지긋한 고통은 그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시험받는 현실 문제였다. 보응의 원리로 다 설명되지 않는 답이 없는 막막한 현실 속에 하나님은 드디어 찾아오신다. 그리고 당신의 통치가 얼마나 위대하고 크신지를 보여준다. 창조자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창조 세계를 어떻게 다스리고 움직여 가시는지를 자연계를 들어 하나하나 들려주신다. 하나님은 보응의 원리라는 통치 방식에만 갇힌 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능력이 많으시고 위대하시고 의로우신 창조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부당하게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욥의 꽉 막힌 의문의 한계를 지적하고 깨부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을 악하다 할 수 없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4). 이처럼 그는 스스로 어리석고 무지하다고 고백한다. 이유 없이 당하는 재난이나 고통이 자신의 잘잘못과 직접 상관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라 해도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악하다 하거나 원망할 이유를 창조자에게서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설교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놓고 어떻게 하나 보자 하는 그런 대상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은 창조의 완성으로 끌고 가신다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신자의 삶에 찾아드는 가난과 실패와 불행이 신앙 안에서 무엇인지를 바로 설명해 주지 못하고 그저 믿음이 없어서 그런 비루하고 불쌍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현실도 적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방송설교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과거엔 적극적 사고방식이 교회에 들어와 신자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었다면 지금은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온 신사도 운동이 그런 역할을 자처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령의 능력 부으심이 발생하면 가난을 번영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속삭인다. 성령의 능력이 동전만 넣으면 뭔가 툭 튀어나오게 하는 자판기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욥기가 성경에 등장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신사도 운동의 성령론은 성경을 지금 왜곡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욥기는 순종-축복, 불순종-저주라는 보응 원리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한국교회의 신앙 실상에 허를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인간의 고통은 삶의 깊이, 신앙의 깊이를 우리에게 요청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122 <독후감> 고난, 왜 하나님이 나를 때리시는가_강동현 전도사 파일
편집부
3487 2014-03-11
고난, 왜 하나님이 나를 때리시는가 < 강동현 전도사, 영음사 편집부 > |박윤선 지음 | 270면 | 12,000원 | 도서출판 영음사| “어려움 피하지 않고 기도로 맞서 싸운 신앙의 용사” 언젠가 출판사로 할머니 권사님 두 분이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영음사가 수원으로 옮긴지 얼마 안 된 때에 이곳에 들러서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 전집을 구매하셨는데 너무 은혜를 받아서 다른 책들도 구입하고 싶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한 권사님이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썼을까요? 목사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 박윤선 목사님은 평생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주석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어떻게든 한국교회에 제대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써 성경을 연구하고 예화를 찾고 어떻게 하면 쉽고 생활에 밀접하게 성경을 가르칠까 연구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남긴 주석은 쉽게 읽힙니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 박윤선 목사님은 소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의 책들은 잊혀진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감화받은 많은 이들은 박 목사님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감추어졌던 그의 설교들을 모아서 기도, 부르심, 고난, 거룩함, 교회, 이렇게 5가지 주제별로 엮어 2011년에 “정암 메시지 시리즈”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육성을 담은 설교 CD도 함께 출간했습니다. 그중에 이번에 소개할 책은 “고난, 왜 하나님이 나를 때리시는가”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고난은 떼어낼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고난에 대한 책은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매우 단순한 접근부터 심오한 철학적 접근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특별히 박 목사님의 이 설교집이 가지는 의의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입니다.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자신이 겪은 고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시편들에서 얻어지는 교훈은 무엇이든지 현재에 적용하게 되었고, 그뿐 아니라 각 저자의 의도를 보다 쉽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박 목사님도 18세에 기독교를 접하고, 가난 속에서 학업을 감당하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여러 신학교에서 숱한 어려움을 삶으로 겪어낸 분이십니다. 그 어려움에서 도피하지 않고 기도로써 맞서 싸웠습니다. 그 속에서 고난을 이해하게 되었고, 고난으로 유익을 얻게 되었고, 고난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들이 이 설교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한 번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내는 유의 책은 아닙니다. 고요히 홀로 있을 때 한 편씩 꺼내어 읽고 묵상하게 하는 책입니다.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고난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더욱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21 |조주석의 북카페| 서 있는 자리에서 읽어야 한다 파일
편집부
4244 2014-02-25
서 있는 자리에서 읽어야 한다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마이클 고힌|IVP|2009년| “자기 위치와 상관없이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추상적 읽기에 불과해” 나는 굿이나 제사나 시주를 해본 적도 없다. 무속이나 유교나 불교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자연주의는 배웠지만 그것도 나의 전통은 되지 못했다. 증조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내 삶은 그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고 그 진리를 확인하며 예까지 왔다. 전통은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얽어매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고 배우고 확인해 가게 하는 삶의 울타리다. 물론 나의 기독교 전통은 성경 이야기에 뿌리를 박고 있다. 성경은 일반 인문학 책도 아니요 과학책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가 부어주시는 모든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성경은 역사, 시, 도덕 교훈, 신학, 위로를 주는 약속, 인생을 지도하는 원리와 명령 등을 마구잡이로 모아 놓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기나긴 구속의 행로를 가시는 하나님의 여정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 가운데서 한결같이 그리고 점진적으로 펼치시는 활동의 드라마다.” 이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책을 읽다 ‘아, 이거로구나’ 하고 찾아낸 게 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성경을 읽자.’ 이제까지 알아온 방법 중에 이 방법이 최고일 것 같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든 자기가 서 있는 자리와 상관없이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추상적 읽기로 끝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헛 읽는다는 소리다. 이 책은 ‘자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주요한 세 가지 강조점 가운데 하나다. ‘총체성’과 ‘자리’와 ‘선교’(혹은 사명)라는 개념이 그것들이다. 총체성이라 함은 창조, 죄, 구속이라는 성경적 세계관의 핵심을 말한다. 자리라 함은 성경 이야기 안에서 신자 각자가 서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선교라 함은 이스라엘이든 교회든 선교적 사명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신약교회가 출범한 이래 우리는 다 ‘중간기’(in-between)에 서 있는 자들이다.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시기,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낀 시기에 서 있다. 이를 의식하든 못 하든 우리는 이 자리에 서서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이 중간기는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 성령, 교회가 선교를 감당하는 시기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이사야가 서 있었던 자리도 있었고, 오순절 이래 수많은 신자들이 서서 자신의 삶을 펼쳐온 자리도 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동일하지 않고 각각 서로 다른 자리였다. 저자가 성경 이야기를 6막으로 된 드라마라고 비유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각각 다 하나의 자리인 셈이다. 즉 창조, 타락, 이스라엘, 그리스도, 교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나누어지는 자리다. 이 중간기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우리는 성경 전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성경을 읽자’라는 생각까지는 떠올렸지만 그게 뭔지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고 한동안 막막했다. 이 책의 저자도 도무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 방법이 뭘까 궁금해 하던 차에 구약의 역대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성경학자들은 역대기가 그때까지 전개된 구속의 드라마를 포로기의 시각으로 다시 진술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구속의 역사를 반추하고 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모색하려고 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다 싶었다. 교회적 선교/사명에 부름 받은 우리로서는 중간기의 시각으로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하리라. 그렇게 할 때 구약을 그리스도가 빠진 유대교처럼 읽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무턱대고 읽어나감으로써 자신의 현실이나 책임과 무관한 메마른 읽기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 읽기는 자신의 기독교 전통을 확인하고 반성하고 확신하며 책임까지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하리라.
120 <독후감> 성경만을 사랑했던 정암 박윤선_김민철 전도사 파일
편집부
4084 2014-01-28
성경만을 사랑했던 정암 박윤선 < 김민철 전도사, 한솔감리교회 > |성경과 나의 생애(박윤선, 1992, 영음사)| “이제라도 성경을 읽는 일과 성경원어 공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감리교단 소속 목회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의 자서전이나 목사님들의 삶을 기록한 책들은 선호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이 책은 지금의 제 모습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며 저를 헤집어 놓았습니다. 때로는 읽기 싫을 정도로 괴로울 때도 있었습니다. 고 박윤선 목사님께서 성경을 대하시는 자세, 기도하시는 모습, 교회를 사랑하시는 모습, 설교자로서 강단을 사랑하시는 모습, 성경주석 집필을 위해 40여 년 동안 끝까지 애쓰셨던 모습,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시는 모습 등 그 분께서 믿고 고백하시는 대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내가 지금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라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저를 점검해 볼 수 있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목회자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제시해주시는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박 목사님께서 성경을 대하시는 자세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만 알게 된다”(p.45), “성경의 대답이 절대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성경 말씀이 최고의 진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p.57), “나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믿고, 성경을 주석하는 중에 어떤 난해 문구나 난해 부분을 만났을 때에도 불신앙적인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p.85), “나는 항상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제까지 살아왔고, 내 마음은 성경을 주석할 의욕으로 언제나 불이 붙고 있었다”(p.161). 이 외에도 박 목사님께서 성경을 사랑하시는 모습은 곳곳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점은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시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의 속성상 그 죄를 숨기고 싶고, 변명하고 싶은 것일진대 목사님께서는 교회에 공고백을 하신 것뿐만 아니라 책에 기록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그 죄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진실하고자 하시는 목사님의 성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도 신사참배를 했으므로 회개하는 심령으로”(p.89), “나도 단 한 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그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고백하였던 것이다”(p.106), “필자는 오늘까지도 그 일에 대하여 장로회 치리법에 의하면 공범죄를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p.139). 전체적으로 박 목사님의 인생을 보면 박 목사님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 분도 한 인간이었고, 이 책에 다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그 분의 삶에 공도 있을 것이고 과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박 목사님을 들어 쓰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지난 한 해 선물 받거나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책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분께서는 제게 원어 성경과 원어 사전을 선물하시고, 목회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돌직구를 날려주셨습니다.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설교를 위해 읽은 적이 많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나태해지기도 했었으며, 제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였는데 이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받은 선물이라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께서도 이 책을 통해 제게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준비하는데 전력을 다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참 세밀하신 분이고 저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도 다시 한 번 다짐해봅니다. 이제라도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을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성경을 읽는 일과 성경원어 공부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올해는 원어로 성경을 읽는 것을 해보려고 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정말 두렵기도 하고, 상당히 어렵기도 합니다. 올해동안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고, 당장 눈앞에서 결과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소망을 가지고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박 목사님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데 사용하셨던 것처럼 저도 인도하실 것을 기다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모습이든지 간에, 드러나지 않아도 좋고, 이름도 빛도 없이 죽어도 좋습니다만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시는 데 사용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119 |조주석의 북카페| 왜 지금도 그 분은 우리에게 소중한가 파일
편집부
4241 2013-11-05
왜 지금도 그 분은 우리에게 소중한가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신학을 사적 소유가 아닌 교회를 위한 공적인 것으로 여긴 분” |영음사, 2013년| 1979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다. 삼십도 아직 안 된 풋풋한 청년이었다. 그때 총신 신대원에서 박윤선 목사님의 강의를 처음 들었다. 그 뒤로 박 목사님의 강의는 합신으로 갈라져 나와서도 계속 들을 수 있었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러 이제 그분의 강의를 듣는 자리가 아닌 그분의 설교와 강의를 정리하여 책으로 내는 위치에 있다. 이런 자리에 있게 됨으로써 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예상치 못한 유익을 누리고 있다. 그것은 박윤선 목사님이 어떤 분이시며 왜 지금도 소중한 분인가를 뒤늦게 깨우친 점이다. 특별히 올 연초부터 이 대담집을 내기 위해 편집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그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 갔다. 이미 떠나가셨지만 왜 그분은 우리에게 여전히 소중한가? 나는 세 가지 점만 이 대담집을 통해 이렇게 짚어보려고 한다. 1) 박윤선의 개혁주의에 어떤 특징이 있는가. 2) 그분의 신학 작업이 어떤 성격을 띠었는가. 3) 교회 쇄신을 해가면서 무엇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셨는가. 1. 먼저 박윤선 목사님은 개혁주의 틀에 영적인 것을 들여놓으셨다. 이 말은 개혁주의에서는 그 영적인 것이 많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서양의 개혁주의는 지적인 요소가 강한 반면에 신령주의나 경건주의는 영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박윤선의 개혁주의에는 영적인 요소가 늘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박윤선 목사님을 사모하게 했다고 지적한다. “박 목사님은 개혁주의 틀에다 그 영적인 것을 들여 놓았습니다. 영향력을 주는 것이지요. 박윤선 목사님을 다 사모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영적인 영력을 다 사모해서 그런 거지 안 그렇습니까?” “개혁신학이라는 것은 책이고 문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그 불어넣는 생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요소는 박윤선 목사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학운동은 학문운동이 아니고 하나님을 높이는 운동이다……참된 기도로 뒷받침하는 신학 연구는 동시에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다.” 2. 다음으로, 그분은 신학을 사적 소유로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위한 공적인 것으로 생각하셨다. 이는 성경주석 집필에서 찾을 수 있겠다. “박 목사님은 신학을 자신의 명예라든가 사역의 발판으로 삼던가 아니면 신학의 현실적 효용성을 따지기보다 오히려 신학은 교회의 신학이고 신학은 훨씬 공공성을 가진다는 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학문적으로 더 많이 쌓아가는 것보다 신학이 교회의 터전이고 기초라는 면에서 어떤 신학의 공적인 성격을 위해서 평생 애썼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바른 성경 해석이 교회를 살리고 보호하고 세워가는 데에 기초가 된다는 헌신이 바로 박 목사님의 정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왜 박 목사님을 쓰셨는가를 알 것 같았습니다. 첫 번째가 공부에 대한 열심이고 두 번째가 교회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부라는 것도 그냥 많은 지식을 쌓아야겠다는 것보다 열심히 해서 교회에 유익한 것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열심이었습니다.” 3. 마지막으로, 교회 쇄신 추구에서 교회의 순결성과 일체성을 놓치지 않으려 한 신학자라는 사실이다. “이분은 교회의 순결성도 중시하셨지만 교회가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일체성 혹은 보편성을 중시하셨던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신학교가 그분의 현실이었다. 이 신학교는 교단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래서 따라 왔던 문제가 교회 쇄신을 추구할 때도 교회의 도덕적 거룩함을 지키면서도 어떻게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고심하셨다. 이것이 그분이 풀어내야할 신학의 큰 과제였고 감내해야 할 생활의 짐이었다. 이 둘 사이에 끼여 있는 현장의 지도자가 그 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할 때 고난은 피할 수 없다. 박윤선 목사님이 우리에게 큰 스승이신 것은 그 고난을 통과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이 그분의 순종이요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다.
118 |조주석의 북카페| 충성의 극치는 어디까지 파일
편집부
4458 2013-08-27
충성의 극치는 어디까지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우리 자신의 삶을 그린 자화상 같은 친근한 이야기” |영음사, 2013년| 충성의 극치는 어느 지점일까? 이 충성은 무엇에 집중해서 나타낼 수 있는가? 이 충성은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 책은 이러한 말들을 내게 걸어왔다. 대담을 통해 책으로 나오기까지 5여 년의 인터뷰 세월이 소요되었고, 대담자만도 90여 명이 넘는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우리와 먼 초대교회사나 중세교회사나 종교개혁사가 아닌 생생한 한국교회사이니 말이다. 이 책의 소중함이 정녕 여기에 있다 하겠다. 정암의 충성된 삶을 증언하고 또 그를 만나고 배운 분들이 받은 영향이 무엇인지도 증언한다. 이를 위해 핵심 질문을 던져 그 증언을 듣는 형식을 띤 대담이다. 그 기초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박윤선 목사님을 언제 처음 만나셨습니까? 박 목사님에게 받은 영향이 무엇입니까? 박 목사님에게 이 시대가 본 받아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목사님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박 목사님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께 충성한다. 그 출발은 먼저 하나님께 붙잡힘으로 시작되었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그때 나이 22세 무렵이셨다. 어느 장로님에 따르면 “좌우간 그 양반은 아침부터 밤까지 하나님, 성경 외에는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정암은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말씀 제일주의”를 늘 강조하셨다. 기도로 일관한 삶을 사신 이야기들도 수두룩하다. “내가 아무래도 편지를 다시 써야 할 것 같아. 그 분을 위해서 기도도 많이 못했는데 마음이 편안치 않다”고 하시면서 편지를 다시 써주신 일도 있다. 갓 구원의 확신을 가진 초신자에게까지 기도 부탁을 하는 겸손도 보이신다. 어느 도서관으로 가던 중 갈대밭이 나오자 기도하고 싶다 하시고 동행하던 이들의 발걸음조차 멈추게 한 기도 일관의 삶. 우리의 개혁주의는 너무 이론적이어서 기도가 약한 게 약점인데 “박 목사님은 그 기도까지 갖추셨기에 굉장히 이상적인 분이고 제가 부러워하는 이유입니다.” 일찍이 주석 집필에 착수하신 정암이 얼마나 집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다. 아주 가까이 지낸 어느 사모님의 증언에서 알 수 있다. “우리가 성지 순례 갔다 왔다 하니까 굉장히 부러워 하시면서도 자기는 이 주석 못 쓰고 죽을까 봐 성지 순례를 못 간다고 하셨어요.” “내가 평생에 힘써온 중요한 일은 신학 교육과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고 한 증언 그대로다. 그의 충성은 신학 교육에서도 나타난다. 목사는 성 하나를 지키는 성주와 같다 하시고 “성주가 전사하지 않으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얘기도 많이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실천을 몸소 보이셨다. 여든 가까이 되신 연로하신 목사님이 세 시간, 네 시간밖에 안 주무시고 공부를 하셨다니 말이다. 학생들에게 공부하다 죽는 것도 순교라고 하셨다니…… 그 분의 설교도 빼놓을 수 없다. 유창한 설교는 아니지만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설교였고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 같고 토해내는 것 같은” 설교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 분의 설교가 염세적인 어느 고등학생을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내어 긍정적인 삶으로 나아가게도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말씀대로 사셨지 않습니까? 그 앞에 할 말이 없죠.” 그 분을 본받자는 뼈 있는 권고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분 보고 감탄만 하지 말고 그 분이 사신 발걸음을 같이 떼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평소에 살아계신 분은 너무 올리지 말고 돌아가신 분은 올리자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덕을 봅니다”라고 말한 손봉호 교수님의 바람처럼 이 이야기들이 널리 읽혀 덕을 보는 이들이 많았으면 한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얼마나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 귀중한 증언들”이라고 지적한 박성은 박사가 쓴 후기의 평이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117 |조주석의 북카페| 박윤선의 개혁주의 파일
편집부
5394 2013-07-23
박윤선의 개혁주의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성경과 나의 생애 |영음사, 1992| “정암의 개혁주의는 우리의 신학과 교회와 생활에서 드러나야 할 것” 처음에는 <박윤선과의 만남>에 대한 서평을 쓰려 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성경과 나의 생애>를 이곳저곳 읽어나갔다. 그러던 차에 마음이 바뀌었다. 신학교 다닐 때부터도 든 생각이었지만 정암의 글은 화려하지 않다. 핵심을 오롯이 드러내는 글이었다. 이런 글을 젊은 날의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롭게 다가오고 마음에 부딪히는 힘이 강하다. 핵심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될까? 신앙의 기본과 중심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세부 사항에서 나는 약간의 차이로는 그럴 리 없다. 근간이 흔들린다는 것은 개혁주의의 핵심이 흔들린다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개인의 신앙이든 교회의 신앙이든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고 서서히 그릇된 길로 가는 까닭이다. <박윤선과의 만남> 1, 2권 말미에 박성은 박사의 후기가 나온다. 그 글에 보면 정암의 신학을 ‘박윤선의 개혁주의’라고 불렀으면 한다. 나는 그 제안에 수긍이 간다. ‘한국적 개혁주의’라는 말보다는 친근감이 들고 그 정체성이 더 선명해 보여서다. 어쩐지 ‘한국적 개혁주의’라고 하면 추상적으로 들린다. ‘박윤선의 개혁주의’ 하면 아주 실제적으로 다가온다. 정암이 자기 시대를 살아가면서 역경과 고난 속에서 배웠고, 자신의 삶을 통해 겸손히 드러냈고, 후학을 가르치는 진실한 봉사를 하면서 세운 생생한 역사를 갖기 때문이다. 역사는 아주 중요하다. 역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서다. 정암의 개혁주의는 미국 유학 시절로부터 형성되었다. “나의 신앙 성장 과정을 말해 본다면, 대학 시절과 평양신학 시절에는 보수주의적이면서 주관적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평양신학을 마친 후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연구한 후부터는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 신앙을 자각 있게 붙들게 되었다.” 정암의 개혁주의는 자신의 연구와 가르침과 삶을 통해 형성되는 과정의 열매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성경주의’와 ‘하나님의 주권’이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주의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암은 개혁주의 기본 원리를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신자가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와 의지의 활동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따라서 이 원리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이 잘 해명되고 또 그 말씀에 따른 순종이 있어야 한다. 정암의 주석 저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게 하는 한 방편이었다. 그러면 정암이 말한 성경주의는 어떤 것인가?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간결하게 답한다. 이런 관점은 4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주석 저술 사역의 동기에도 나타난다. “나의 주석 저술의 동기는, 나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바로 깨닫고 깊이 안 후에 이 성경을 올바로 증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경대로 믿음을 가지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주의는 그의 설교 사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22세부터 강단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60년간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설교 준비에 있어서 기도도 많이 해야 되지만 먼저 설교 내용이 성경에 의한 올바른 깨달음으로 정비되어야 그 설교가 은혜롭다. 성령님은 진리 체계가 올바른 데서 역사하신다.” 이렇듯 정암의 개혁주의는 신학과 교회와 생활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었다. 부모 없는 자식이 없듯이 신앙에서도 선조 없는 후손이 없는 까닭에 나는 박윤선의 개혁주의를 그렇게 이해해 본 것이다. 우리는 박윤선의 개혁주의를 토대로 하고 서 있다. 그 사실을 바로 깨닫고 계승하고 다듬어 발전시키는 복에 더 많이 참여하는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으면 한다.
116 |조주석의 북카페| 살롬의 공동체_조주석 목사 파일 (22)
편집부
5789 2013-04-16
살롬의 공동체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팀 켈러의 정의란 무엇인가 |두란노, 2012년 | “공의 실현이 빠진 신앙은 자칫 개교회주의 신앙으로 전락되기 쉬워” 목사가 긍휼 사역에 집중하여 헌신한다면 그를 목사라고 불러야 하는가, 집사라고 불러야 하는가? 초대 교회가 구제하는 일로 분쟁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말씀 전파와 기도에 전무하고 집사는 구제하는 일을 맡아 교회를 섬기기로 하였다. 미국의 리디머 장로교회의 팀 켈러 목사는 복음 전도도 중시하지만 사회 정의도 중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정통장로교회에 소속한 목회자이지만 자신의 교회를 통해 사회 정의를 강력히 실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집사 훈련에 관한 논문으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집사 역할이 구제 사역에서 교회 관리 및 회계 담당으로 전환했다는 사실을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 확인한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보수 교회는 사회 정의보다 개인 윤리를 중시하는 편인데 그가 목회하는 리디머 장로교회는 사회 정의를 강하게 실천하는 교회이다. 이러한 전환은 초대 교회처럼 집사의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해야 개인의 구원에만 몰두한 이 시대의 기독교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도시 선교의 한 모델을 우리게 제시한 셈이다. 교회는 병원인가 군대인가? 이 은유적 표현은 교회를 무엇에다 강조점을 두고 보느냐 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병원이라고 한다면 성품의 변화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 할 수 있겠고, 군대라고 하면 비 진리와 싸우는 복음 전파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그린의 관찰에 따르면, 오늘날 서양 교회에서는 교회를 군대가 아닌 병원으로 보기를 더 좋아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 팀 켈러 목사가 지향한 교회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인의 구원 완성보다는 샬롬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는 이제 교회만이 누리는 샬롬은 그만두라고 감히 외친다.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 자체 안에서 다 소진하는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자체뿐 아니라 외부로 드러내어 지역사회 속에서 교회가 샬롬의 공동체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의 사람들이 이 책의 독자가 되었으면 희망한다. 먼저 그는 긍휼 사역에 헌신하려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 다음으론 사회 정의와 개인 구원으로 분할된 20세기 미국 교회 현실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셋째로 복음 전도와 함께 사회 정의를 구현해 가는 쪽으로 부르심을 확장해 가는 젊은 일꾼들이다. 마지막으로 마치 기독교가 지구상에 불의와 폭력을 만연하게 하는 주범인 것으로 크게 오해하고 몰아붙이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샬롬의 공동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소비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로서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와 약자 편에 서기보다는 자신의 경제적 욕망을 채우는 쪽으로 치달아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를 비판 없이 따르는 근본주의 교회로 말미암아 왜곡된 기독교는 성경적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성경적 기독교를 변호한다. 성경적 기독교는 결코 권력을 탐한 적이 없다. 팀 켈러 목사는 집사의 사역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지 그가 집사는 아니었다. 목회자는 자칫 이 지점에서 자신의 직무를 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지 실천해 왔고 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있다. 공의 실현이 빠진 우리의 성적 순결과 예배 참석은 자칫 개인 신앙의 완성 위주로 치우칠 수 있다. “성경은 부자를 악의 축으로, 빈곤 계층을 도덕적 우월성을 가진 집단으로 여기는 계급적 편견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시대적 이데올로기에도 빠지지 않는다. 우리 주변의 교회 현실도 돌아보면 미국 교회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교회 중심으로 자꾸 비대해져 감으로써 이웃보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가진 독자라면 본서가 그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115 |조주석의 북카페| <영화>레미제라블:나는 누구인가 파일 (29)
편집부
5751 2013-02-05
<영화> 레미제라블, 나는 누구인가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자신의 실존에서 발견하고 잉태시킨 삶의 확인은 용서와 정의와 사랑” 굶주린 조카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빵 한 덩이 훔친 죄로 5년형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수차 탈옥을 감행하다 형기가 늘어 19년 수형 생활로 끝은 난다. 하지만 보호 관찰 대상자로서의 가석방일 뿐이다. 정권 유지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정치범으로 단죄하고 형장의 이슬로 보낸 우리의 현대사는 또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모두 믿거나 말거나 할 이야기로다. 이 비참한 존재가 거듭 쏟아낸 ‘나는 누구인가’라는 깊은 외마디는 영화 전체를 통해 계속 확인되어 나간다. 그는 아무도 자신에게 베풀지 아니한 손 대접을 받고서도 도둑질로 그 은혜를 되갚는다. 그는 오로지 빵에만 육신을 지탱할 힘이 있다고 믿었을 따름이리라. 물질 숭배는 이런 식으로도 나타나겠다. 해괴한 것은 다 마찬가지다. 이러했던 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거칠게 내쉴 수밖에 없게 한 그 용서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한 성직자 안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빵처럼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따스한 음식의 형태로 나타났고,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었던 따스한 말의 형태로 그를 후비고 들어왔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 물질만이 아님을 배운다. 이 신비한 접촉을 통해 그의 생명의 에너지는 사회 구조 속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그 단단한 구조를 녹여내고 소망의 빛으로 변한다. 생명은 어두움의 사회적 논리 곧 구조악을 뚫고 들어가 소망의 빛을 여기저기에 조용히 비춘다. 타인에게 돌아가는 시혜는 한 인간의 삶에서 분출하는 생명의 에너지라는 희생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이처럼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정의의 문제도 절절히 느낀다. 그가 어느 수도원에서 가석방 확인서를 찢어 날려 보내고 새 출발을 시작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감출 수밖에 없는 도망자 신세일 뿐이다. 한 존재 안에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삶은 새로 변했어도 그 자신을 늘 따라다니는 가석방이라는 실정법상의 신원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자베르의 끈질긴 추적으로 그는 위기에 몰린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사람이 붙잡혀 그 올가미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도 맞이한다. 무고하게 그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자신을 대신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이때 그는 그 무고한 자가 결코 자신일 수는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끝끝내 외면하지 못한다. 또 다시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울부짖는다. 아무리 타인에게 자선을 베풀어도 그는 보호 관찰 대상자일 뿐이다. 이처럼 이 땅의 형법상의 정의는 그에게 차갑고 두려운 것이었다. 노년에 이른 그는 은둔자로 살아간다. 하루는 거리에 나왔다가 공화파를 지지하는 열혈 청년 마리우스에게 코제트가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긴 사실을 뒤늦게 안다. 그들의 열렬한 사랑이 외로이 살아가는 자신에게서 코제트를 빼앗아갈 참이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은둔자로 살아가는 장발장에게는 코제트가 유일한 위로요 사랑의 대상이요 또 아끼는 자식이 아닐 수 없다. 코제트가 혁명가요 이상주의자인 마리우스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로서는 근심이 아닐 수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보아 온 우리 시대의 부모라면 누가 화염병 들고 앞장서서 거리로 나가는 내 자식을 막지 않겠는가. 어느 부모가 그 같은 청년에게 마음 빼앗긴 내 애지중지하는 딸의 불꽃같은 사랑을 염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장발장은 그런 모든 감정은 마음에 감추고서 조용히 마리우스 편에 서서 싸운다. 이길 수 없는 혁명이었다. 장발장은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온갖 고생하며 간신히 구출해 내어 코제트의 곁에 안겨 준다. 그리고는 조용히 두 사람에게서 물러선다. 이처럼 깊은 사랑이란 자신을 내어주고 비우는 것이리라. ‘나는 누구인가’라고 반문하던 장발장, 그가 자신의 실존에서 발견하고 잉태시킨 삶의 뚜렷한 확인은 무엇이었을까. 용서와 정의와 사랑이었으리라.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의 합창인 ‘Tomorrow Comes’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114 |조주석의 북카페| 공익을 가려낼 분별력을 키워야 파일 (633)
편집부
25509 2012-12-11
공익을 가려낼 분별력을 키워야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칼 트루먼 | 진보 보수 기독교인 | 김재영 옮김 | 지평서원 | 2012 “위정자 세우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의 공익에 있어” ‘알 듯 모를 듯’한 제목이다. 원제목은 뭐라고 했는가. “Republocrat.” 사전을 찾아 봐도 안 나온다. 정치에 문외한이요 애꿎은 영어 실력 탓으로 돌리고서 페이스북을 통해 역자에게 물었다. 짧게 대답이 왔다. “Republican + Demo-crat.” 공화당원이라는 말과 민주당원이라는 말을 합성한 것이란다. “Confessions of a Liberal Conservative”라는 부제도 달았는데 ‘진보적인 보수주의자의 고백/진술’이라는 표현은 그 말에 대한 좀 더 긴 설명이다. 저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라니 신학으로 말하면 보수 중에 보수가 아닌가. 2001년에 그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왔는데 영국에선 보수당원이었으나 지금은 민주당 쪽에 서 있다고 한다. 그가 이 책을 쓴 일차적 동기는 이렇다. “미국에서 복음주의 교회가 보수적 정당 정치와 기독교적 충성을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위험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나의 확신 때문입니다.” 이런 반성은 우리의 거울이기도 하다. 저자는 오늘날 좌파가 길을 잃고서 가까스로 지지를 받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좌파의 강조점이 경제적 압제에서 심리적 압제로 옮겨갔고 복음주의 지성인이 전자보다는 이 후자에 기댄다고 비판한다(1장). 이것의 문제는 빈곤보다는 개인의 심리적 해방을 더 주목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어떻게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는지 비판한다(2장). 교회의 세속화는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미국 현실 속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은 대중 매체가 아주 중요해졌다. 신자든 아니든 사람들은 대중 매체를 접하며 어떤 정보를 얻는다. 미국의 많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채널로는 폭스 뉴스 채널이 있다. 여러 정책적 사안을 교묘히 편향시켜 내보내니 가려서 보아야 한다고 주문한다(3장). 4장에 이르면 좀 어려운 문제도 다룬다.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발흥의 원인으로 꼽은 것이 과연 정당했는지를 따져 그 원인을 다시 제시한다. 그렇게 한 다음 그 자본주의가 부를 창출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작용은 해 왔으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소비주의를 널리 확산시켰다고 지적한다. 이 소비주의는 기독교인에게도 여러 가지 문제를 이미 가져왔다. 지금 이 땅에서는 대선 열기가 무척 후끈후끈하다. 대선하면 미국에서도 금방 텔레비전 토론을 떠올릴 수 있다. 이 토론에서 정치적 담론은 사라지고 후보의 외적 이미지만 더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5장). 이것의 큰 문제는 유권자로 하여금 비판 기능을 무디게 하여 더 나은 선택을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공적으로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장(국가의 위정자)에 보면 하나님께서 위정자들을 세우시는 목적은 "자기의 영광과 백성의 공익"을 위한다고 진술한다. 그렇다면 국가 권력이 이에 합당하게 사용되는지 살펴 장려할 것은 장려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쯤에서 저자가 이 책 전체를 통해 말하려고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질문해 본다. 그것은 우리에게 공익을 가려낼 분별력을 키우자고 말한 게 아니었겠는가. 이 판단이 저급할수록 백성들은 고통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도 국민 전체의 문제를 다 대변하거나 담아낼 수는 없다. 물론 정치가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나 정치가들처럼 온통 거기에 다 마음을 빼앗기는 건 지혜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선은 스포츠 게임 같아서 희비가 너무 극명하다. 그래서 감정도 크게 다칠 수 있다. 지더라도 이기더라도 ‘그래, 됐어!’ 하면 될 것 같다. 어차피 현실 속에 있는 자신의 짐은 자신이 더 많이 지고 가야 하니까. 그러니 저자가 결론내린 대로 주일에 교회 와서는 그것들일랑 다 뒤로 하고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자고 하는 저자의 초청에 수긍이 간다.
113 |조주석의 북카페| 젊은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파일 (16)
편집부
5622 2012-10-16
젊은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그들은 어떻게이단이 되었는가 |알리스터 맥그라스, 포이에마, 2011년, 396쪽| “신앙의 경색 아닌 신앙의 성숙을 위한 교리공부에 힘써야” 씨가 말라가고 있다. 무슨 소린가. 동생하고 어느 날 이야기하다 들은 말인데 지방의 어느 국립대학교에는 학생 복음 단체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단다. 왜 이 불행한 사태가 온 것인가. 도가 지나치게 열광적인 신천지가 활보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들은 사상 강요, 자유에 대한 억압, 권리 침해 같은 어두운 구석들을 가지고 있다. 이 사악한 처사가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나이 든 사람으로서 자못 염려스럽다. 맥그라스는 생뚱맞게 서구의 맥락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주제를 다뤘다. 『이단: 진리 수호의 역사』(Herecy: A History of Defending the Truth)라는 책인데 우리말로는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로 옮겼다. 이 책은 서구보다는 도리어 지금 이단과 사교가 넘실대는 우리 현실에 더 어울리는 주제로 보인다. 이단과 사교는 지금도 수많은 십자가 지붕 밑에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은거하면서 진리에 미숙하고 진리를 비틀고 교회를 허물어내어 양성적으로 또 음성적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있다. 이 책은 현장 목회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이 어려운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단 대처 실용서는 아니다. 이단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고전적인 이단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단은 지금도 영향을 계속 미치고 있는지 하는 문제를 다룬다. 학문적인 책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이단에 관하여 이만큼 깊이 논의한 책도 우리 주변에서 만나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초대 교회에서 이단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 특징은 어떠했는가. 이단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였다. 교회 밖에서 발생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게 아니다. 이단이 어떻게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약성경 전체가 그때는 아직 정경으로 확정되지 아니한 교회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복음서는 복음 진리를 주로 이야기 형식으로 진술하고 있고, 서신서들은 편지 형식으로 진술하며,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직접 드러내는 방식이 아닌 무엇에 빗대어 감춘 묵시 형식으로 진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진리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처럼 교리 형식으로 진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기 교회 안에서 이런 형식으로 된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듣고 살피는 가운데 생겼던 어려움은 해석의 문제였다. 어떤 특정 주제를 놓고 서로 해석을 달리하는 견해들이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초기 교회 역사를 통해 이단으로 정죄된 경우를 보면 이단은 성경의 진리를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성경을 이탈하여 이성 중심으로 논리의 엄밀성을 추구하다 진리를 왜곡하거나 훼손한 경우가 많다. 이단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주제를 특정 방식으로 정립하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조만간 교회는 그 방식이 위험할 정도로 부적절하거나 파괴적인 것임을 알아채었다. 요사이 우리 주변을 보면 교리 공부를 하는 교회나 단체가 늘고 있다. 고무적이고 반가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의 한 그늘은 교리 공부가 이단을 막아 줄 주요한 수단쯤으로 여긴다면 문제다. 교리 공부가 교인의 성숙보다는 교인 이탈 방지 수단으로 사용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생기는 부작용은 신앙의 성숙이 아닌 신앙의 경색이 일어날 수 있어서다. 성숙성이란 유연성과 생명을 특징으로 갖지만 경색이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판단성을 두드러진 특성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팔구십 년대에 허락된 급속한 교회 성장 끝물에 우리가 서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교회에는 어린이들이 많지 않다. 젊은이들도 삶의 비전을 갖지 못한 채 취업이나 쾌락을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스펙 쌓기는 육신의 생명에 도움을 주고, 스포츠와 대중음악과 영화가 제시하는 짜릿한 감각적 즐거움은 영혼에 생수를 공급하지 못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삶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학생 복음 단체의 변신도 요청된다 하겠다. 이제 난 젊은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112 |조주석의 북카페| 신앙이 삶을 창조하다 파일 (178)
편집부
7489 2012-08-21
신앙이 삶을 창조하다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 성영은, 『케플러 - 신앙의 빛으로 우주의 신비를 밝히다』, 성약, 2011년 “당대의 과학적 맹신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추구한 진정한 신앙인” 지은이는 서울대 공대 교수다. 그는 새롭고 깨끗한 에너지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청소년학교, 청년 모임, 계절 학교에서 과학을 강의하고 소속 교회의 신학교에서 과학 개론도 강의한다. 이러한 그가 종교개혁 시대의 과학자인 케플러의 삶을 우리 시대로 불러들인다. 이것은 그에게서 자신의 소명 의식에 대한 동질성을 확인하고픈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케플러를 이렇게 요약한다. “신앙과 삶, 그리고 과학의 터전을 늘 교회에 두었던 그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배척을 받았는데도 평생 그 교회를 사랑하고 바로 세우고자 애썼다.” 요한네스 케플러는 루터가 사망한 지 25년이 지난 1571년에 태어나 5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목사가 될 것만 생각하고 루터교의 신학 본거지였던 튀빙겐 대학에 입학한다. 그의 이런 소원은 조부, 외조부, 어머니도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신학부 3학년 때에 오스트리아 남부에 있는 그라츠의 개신교 학교가 튀빙겐 대학에 수학 교사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해왔다. 튀빙겐 대학 평의회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케플러를 천거하지만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수학 교사로 가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한다. 두 달 후 대학 당국에 조건부 수락을 한다. 그곳에 갔다가 다시 튀빙겐으로 돌아와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회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뒷날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고 난 뒤 이때를 회고하면서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음성이었다고 회고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하고 케플러가 과학적으로 입증한 지동설은 지금 누구나 받아들인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아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지동설이었을지라도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천동설이 확고한 대세였다.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1543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수학 교수인 레티쿠스에 의해 출판되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지만 극소수의 지성 사회에게만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이든 개신교 신학자들이든 거의 다 반대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평생 옹호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케플러는 위험한 인물 그 자체였다. 신앙 문제에서도 그런 존재로 비쳐졌다. 그는 루터교회의 회원이었지만 성찬론에서 루터의 공재설을 따르지 않고 멜란히톤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동의하면서 영적 임재설이 성경의 가르침에 더 적합하다는 확신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루터교의 공식 신앙고백서인 협화신조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인성 편재론도 거부한다. 협화신조에 따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이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든 편재하여 계신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 거부는 그가 루터교회로터 제명될 수 있는 사유가 된다. 자신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오늘날과 다른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용기는 참 대단했다. 그는 평생 루터교를 떠나지 아니하고 교회를 사랑한 성실한 교인이요 당대의 과학적 맹신에서 벗어나 참된 과학적 진리를 추구한 진정한 자유인이다. 물론 점성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에 흐르는 선명한 태도는 개혁 지향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현실과 짐을 훌러덩 벗어던진 도피주의자가 아니었다. 교회나 과학계에서 이리저리 채였지만 자신의 소명을 따라 하루하루 끙끙대며 살아낸 진정한 현실주의자였다. 이러한 삶이 보여주는 묵직한 교훈은 무엇일까. 신앙은 삶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의 삶은 나에게 또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과 직업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 두 가지는 교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신앙인은 자기 직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긋지긋한 밥벌이의 수단쯤인가. 아니면 부패한 문화를 개혁하고 창조적 문화를 건설하는 소명이어야 하는가. 루터교 안에서 칼빈주의 과학자로 살아간 케플러를 우리 시대로 불러들여 신자의 소명 의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그려낸 본서를 과학자뿐 아니라 목회자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111 |조주석의 북카페| 교회의 ‘하나됨’과 교리의 ‘하나임’ 파일 (50)
편집부
6503 2012-05-01
왜 다시 WCC를 비판하는가 교회의 ‘하나됨’과 교리의 ‘하나임’ |문병호, , 지평서원, 216쪽, 2012년|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 “진리에서 하나 됨과 우주적 확산이라는 본질적 요소 결여가 문제” 책을 소개해 달라고 전화 청탁을 얼마 전에 걸어왔다. 그런 청탁받은 기억이 한둘은 있지만 책 소개로 이어진 적은 없다. 내가 소개하고 싶거나 읽어야 할 책을 중심으로 이 난이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청탁자에게 먼저 물은 말은, 그 책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었다. WCC 비판서라 하였다. 195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은 WCC를 찬반으로 하여 연동측(통합교단)과 승동측(합동교단)으로 갈라섰다. 이 과정에서 당시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은 큰 상처를 입었고 또 입히기도 했다. 진리 싸움은 신학자들의 몫이었지만 그 내용을 잘 모르는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는 감정 대결이 우선했다. 이 분열은 교회 재산 분쟁으로까지 번져 볼썽사나운 장면을 여과 없이 사회에 노출시켰다. 어제의 교인이 오늘의 원수로 돌변하는 비상식도 난무했다. 이 수치를 결코 망각하거나 역사에서 지우려 하면 안 된다. 그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지금이다. 2013년 가을이면 부산에서 제10차 WCC 총회가 열린다.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제1차 총회를 가진 이래 2006년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의 총회가 열렸다. 이 과정을 통해 WCC는 자기의 정체와 노선을 더욱 분명히 드러냈다. “WCC의 전반적 양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다른 종교와 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종교다원주의가 사실상 수용되고, 교회의 사회참여라는 명목으로 세속주의와 상대주의가 절대 가치로 여겨진다.” 지은이의 비판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서술된다. 제2장에서는 WCC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간추려 놓았고, 또 WCC의 정체도 무엇인지 간략히 다룬다. 제3장에서는 WCC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비판한다. 이 부분이 본서의 핵심 내용에 해당한다. 그가 다루는 내용으로는 성경론,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교회론, 성례론이다. 기독교 전반에 관한 것이 비판의 대상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제4장에서는 WCC의 교회 일치론의 부당성을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성경적 에큐메니즘과 WCC의 에규메니즘의 차이를 제시함으로써 전자를 추구하고 후자를 비판하려 한다. 즉 “성경적 에큐메니즘은 진리에 관한 하나 됨과 그 진리의 우주적 확산이라는 두 가지 본질적 요소를 가질 때 참되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WCC는 이런 점을 간과하고 교회의 가시적, 기구적 일치만을 현상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다 읽고 난 내 나름의 소감은, WCC가 선언한 텍스트들을 하나하나 검토한 지은이의 결론에 따라 WCC는 복음에서 떠났다는 것이다. 복음은 기독교 신앙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핵심인데 이 복음을 왜곡시킴으로 신학전반도 왜곡을 가져왔다. 성경관,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안 걸리는 데가 없다. 분명 이 책의 장점은 아직까지 WCC 신학에 대해 교리적, 또는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드물었는데 지은이가 그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 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독자인 우리로서는 WCC의 전모를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지은이는 이 책의 독자를 누구로 정하고 논한 것인가. 이 책을 발행한 출판사는 이 책의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한 것인가. 추천의 글을 쓰신 분은 글 끝에 이런 바람을 적었다. “이 책을 널리 읽음으로써 한국 보수교회가 WCC 총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들을 명료하게 알기를 바란다.” 정말 이 책이 그 바람처럼 널리 읽히는 책이 될까. 다 읽은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안 든다. 내용이 나빠서가 아니라 너무 전문적이어서다. 이게 이 책의 한계요 또 무게감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끝으로 우리 자신도 돌아보자. 신학적 비판이 상대만 비판하고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자만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정통 교리로 가지고 있다. 이 “선언적 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고백의 비준일 뿐이다”(유해무). 그 말은 선언적 고백이 나의 고백과 교회의 고백이 되려면 인간의 부패와 의심과 유혹과 고난과 핍박이라는 조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고백문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나의 보화가 될 수 없지 않은가.
110 |조주석의 북카페| 교회와 문화, 그 위태로운 관계 파일 (92)
편집부
10721 2012-04-04
믿음의 삶은 문화적 형식으로 표현된다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 교회와 문화, 그 위태로운 관계 |D.A.카슨 저, 김은홍 역, 국제제자훈련원, 384쪽, 2009년| “신앙은 반드시 문화적 형식 빌어 표현되지 않을 수 없어” 며칠 전에 한 팜플렛을 받아 읽고 사무실에서 실소를 한 적이 있다. 국회의원 출마자로서 출석 교인이 아닌 분이 다른 교회에 찾아가서 기도, 간증, 발언을 하거나 헌금을 하면 당사자는 물론 해당 교회도 선거법 위반으로 고소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수적으로 사회적 힘을 가진 한국교회이니 이런 경고를 받을 터. 이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민주주의는 무엇이며, 교회와 선거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또 이 문제만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도 날마다 수없이 다가온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잠정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것들을 해결하고 우리는 지나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문화적인 형식을 빌어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문화의 문제를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재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래 전에 니버는 그 책에서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했고 그것들은 영어권 세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두 번째 유형인 ‘문화의 그리스도’라는 유형에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전혀 고려치 아니한 치명적인 약점이 들어있다고 카슨은 주장한다. 옛날에 갸우뚱하며 읽었던 니버의 그 대목이 왜 위험한 것인지 이제 아주 분명해졌다. 저자의 지적대로 우리는 지금 니버가 살던 시대와는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카슨은 니버의 논의가 오늘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고 재정립을 시도한다. 그러한 시도가 구체적으로 3-5장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그가 다룬 주제들은 ‘문화와 포스트모더니즘’(제3장), ‘세속주의, 민주주의, 자유, 그리고 권력’(제4장), ‘교회와 국가’(제5장)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큰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창조, 타락, 성육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성령 강림, 최후의 심판과 종말이라는 큰 그림을 진리로 수긍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가 이것을 양보한다면 그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물론 서양과는 다르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젊은이들이 선호한다는 건 분명하다. 다음 세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네 가지 문화적 힘들이 있다고 한다. 즉 세속주의, 자유주의, 자유, 권력이 그것들이다. 이 힘들은 계몽주의 이래 계속 신장되어 왔고 근대가 도래한 지역에서는 결코 경시될 수 없는 것들이다. 개인의 자유만 놓고 보더라도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서로 상이한 태도를 보인다. 한 교회 안에서도 보다 많은 자유의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는 질서와 통제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문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서도 일어난다. 카슨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성경 몇 구절로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로마제국을 국가로 전제하고 있지만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국민국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삶의 정황 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1세기 그리스도인들과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억압과 핍박이 일어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고, 국가에 대한 저항은 어디까지 할 수 있으며, 정치적 권위에 대한 제한적 충성은 어디까지이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통치 방식은 어떤 차이를 갖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이해들이 그리스도인마다 같을 수 없고 또 그가 처한 국가 현실이 민주국가이냐 독제국가이냐에 따라 분명 그 태도도 달리 할 수 있다. 물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고려해야 할 문제들은 이보다 더 많으므로 결코 간단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한된 이해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므로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상대에 대하여 어떻게 대할 것인가. 기다리는 인내의 자세가 필요하리라. 이 선거철에 다는 아니더라도 목회자라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룬 5장만큼은 읽기를 강추한다.
109 |조주석의 북카페|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 파일 (196)
편집부
9936 2012-02-22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chochuseok@hanmail.net > |레슬리 뉴비긴, SFC, 2008년, 101쪽| 복음은 공적 진리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용기와 순종뿐” 다는 아니어도 다수의 그의 책들을 읽었다. 우리말로 번역된 레슬리 뉴비긴의 책들이 나에게 크게 공감이 간 것은 복음에 대한 그의 접근 태도였다. 그는 복음이 진리라는 점에 온통 집중한 선교사다. 사실 돌이켜 보면 이 지면을 통해 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이 난을 시작했다. 그때는 한 개인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복음 진리, 곧 사적 진리 그 이상의 복음은 제시할 수 없었다. 복음이 공적 영역에서도 어떻게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있는지는 풀리지 않은 숙제였다. 레슬리 뉴비긴이 인도에서 30년 동안 선교하고 돌아온 그의 조국 영국은 인도보다 훨씬 더 이교적 국가가 된 것을 확인하고 큰 도전을 받는다. 이러한 도전을 통해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 어떻게 복음 진리가 공적 진리로 제시될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연구한다. 그러한 모색은 그의 여러 책들을 통해 이미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본서가 아주 특별한 의의를 갖는 것은 이 소책자 한 권에 자신의 문제의식을 굉장히 집약적으로 풀어놓았다는 데 있다. 그가 돌아온 조국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사적 영역의 신념 정도로 전락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서 우주적 진리가 그처럼 사적 신념 정도로 축소되고 만 것인가.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는 이 문제가 근대의 인식론과 상관있다고 파악한다. 계몽주의이래 서양은 300년 동안 내내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를 갈라놓았다. 신앙과 지식 사이의 거짓된 이분법을 주장한 것이다. 마치 탐구된 진리 지식이 탐구자의 헌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발견되는 것처럼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서양 전통 속에 계몽주의 이전에는 없었던 이분법, 곧 “나는 안다”와 “나는 믿는다” 사이의 거짓된 이분법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는 1장에서 이렇게 진단한 다음, 2장에서는 복음 진리를 교회 안에서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반드시 복음의 진리, 곧 유일한 주와 구주인 그리스도의 주권과 삼위일체 신앙을 확언해야만 한다.” 이 복음은 먼저 교회 안에서 공적 진리로 긍정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교회의 담을 넘어 공적 영역에서 우주적 진리로 제시되어야 한다. 이는 긍정과 부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긍정의 방식은 교회 영역에서 일어나지만 부정의 방식은 교회의 담을 넘어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 부정의 방식을 그는 3장에서 다룬다. 부정의 방식이란 교회가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고 저주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국가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애국주의에 함몰하지 않는 한 우리는 더 많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절대적 헌신은 속박이다. 가족과 혈족은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귀한 선물이지만, 인종주의는 선한 것의 타락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한 사물 안에 존재하는 특정한 요소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핵심적이고 절대적인 위치에 갖다 두려는 이데올로기를 거부해야 한다. 교회는 왜 이런 방식으로 진리 증언을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지역 회중이 우주적 교회의 한 가지(a branch)가 아니라 우주적 교회가 가시적이 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우주적 교회의 가시적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를 민족교회로 이해하게 되면 복음이 강력하게 공적 진리로 선포되기 어렵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교회가 범한 대표적인 실패다. 나는 본서를 읽으면서 내면의 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에 대한 새로운 의미다. 그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순교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언했다. 이러한 거부는 신사 참배가 공적 교의로 강요되던 지배적 구조를 그 밑바닥부터 뒤흔든 전복적 행위다. 다시 말해 교회의 담을 넘어 복음을 부정의 방식으로 담대히 증언한 것이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주님이시요 구주이셨다. 독일에서는 본회퍼가 그런 증인이었다면 우리에게는 주기철 목사님이 그런 증인이시다. 이런 내면의 소리가 내게 들려온 것이다. 그래서 이번 책읽기는 내게 무척 즐거웠다.
108 |조주석의북카페| 기도, 죽기내기로 기도하라 파일 (1)
편집부
5793 2011-12-14
기도, 사귐의 복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chochuseok@hanmail.net > 기도, 죽기내기로 기도하라 |박윤선, 영음사, 2011년, 287쪽| “신학도 경건도 한참 부족하기에 더 기도할 수밖에 없어” 나는 부끄럽다. 이제사 박윤선 목사님을 좋아하기 시작해서다. 다들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나만 뒤쳐진 것이다. 강의도 설교도 그분에게 직접 들었는데도 말이다. 왜 그랬는가. 삼십대의 나이로는 그분을 따라갈 수 없어서였는가. 그분의 직설적이고 간단명료한 논법이 날 매료시키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사실 그분을 저만치 멀리 두고 쫓아갔다. 다행인 것은 정암메시지 시리즈(5권)를 해가면서 그분에 대해 다시 본 것이 있다. 그분의 깊은 경건! 일전에 어느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 이렇게 썼다. “이제 박 목사님이 좋아지기 시작했어!” 지식을 선호했던 젊은 나이의 나로서는 그분의 깊은 경건을 이리도 알아보기가 어려웠었던 것인가.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가 되려고 하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셔야만 한다. 그 오심은 성령과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이 말씀 앞에 설 때 냄새 펄펄 나는 부패한 자신의 비참함을 비로소 보게 된다. 박 목사님은 평생 이 말씀에 사로잡혀 사셨고 죽기내기로 기도하신 분이다. 책을 펴낸 편집장들은 인터넷 서점을 들락날락 한다. 반응을 보기 위함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날 한 도서평이 올라왔다. 그 한 토막이다. “기도에 대한 책은 많이 읽었던 터라 별 내용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기도책과 달랐다. 평생을 기도로 섬기신 분이라 그런지 느껴지는 깊이가 달랐다.” 이 독자의 말처럼 기도에 대한 책들은 서점가에 정말 많이 나와 있다. <기도, 죽기내기로 기도하라>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기도책과 달랐다”는 게 여타의 책들과 갈라서는 경계선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박 목사님의 기도생활에서 뿜어 대는 강력한 힘이 설교 이곳저곳에 박혀 있어서가 아닐까. 그분은 신학자였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한 기도의 사람이셨다. 책에는 기도의 모범자들이 언급된다. 박 목사님의 기도는 주로 남들을 위한 것이었다. 한나는 어두운 이스라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바꾸는 기도를 올렸다. 요나는 환난이 주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기도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의 고난을 당하셨다. 다 전심전력으로 한 기도들이다. 그분의 따끔한 책망도 나온다. “우리 신자들이 기도를 위하여 바치는 분량이 너무 적습니다. 기도를 거의 안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일이 기도하는 일인데 신자들이 제일 등한히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안 하면 이것은 일종의 반역”이라고까지 하신다. 도저히 내 신앙으로는 거기까지 쫓아갈 수가 없다. 이런 책망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유익이란 평생 기도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위로한다. 신학은 경건과 함께 가야 한다. 저자는 이를 몸으로 살아내신 분이다. 그러면 나는 여태껏 어찌 살아왔는가. 애는 써왔지만 신학도 경건도 한참 부족할 뿐이다. 이제라도 저만치 따라가면서 그분의 기도 생활을 조금씩 배우기로 했다. 평생 기도하는 복을 받는 대열에 서기로. 기도의 사람이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석하시기도 한다.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은혜를 받는 가운데 더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가끔 해도 되는 것인데 기도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자들 때문에 강조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의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실린 설교들은 주로 1980년대에 합신에서 신학생들을 향해 전하신 메시지이다. 특별히 그분의 기도관이 아주 뚜렷이 드러난 ‘나의 기도생활’이라는 설교도 들어 있다. 이 책을 펼치면 누구나 기도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 책에 그런 기대를 걸어본다.
107 |조주석의 북카페| 하나님의 가족 파일 (4)
편집부
5799 2011-11-15
하나님의 가족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교회란 무엇인가, 레슬리 뉴비긴, IVP, 2010년, 464쪽| “사도적 복음 외에 어느 것도 교회연합의 시발점 될 수 없어” 개척교회 하나 세우는 것조차 버거운 때라고 입을 모은다. 큰 교회에서 10여 년 정도 부교역자로 지내고서 지원을 받아 상가에 개척교회 하나 세울 수 있다면 그건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렇게 세운 교회라도 목회자의 삶을 통째로 담보하지 아니하면 존립조차 위태로울 수 있다. 이 두려운 현실이 엄존해도 나누인 교회들이 하나 되는 것은 마땅하다. 얼마 전 교단 신문은 우리 교단이 고신과의 합동 문제를 논의할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시도는 십자가 고난을 바로 앞둔 우리 주님의 기도에 부합한 것이어서 환영한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의 통일성 확보는 지금 개교회의 두려운 현실 극복이라는 과제와 함께 맞물려 있다. 개교회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교회의 합동을 나 몰라라 외면할 수는 없다. 물론 이 합동 추진이 단지 교회의 외연을 확대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꽉 눌린다면 가시적 하나는 진정한 하나 됨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합동 추진은 정치적 노력만큼 신학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그 타산지석을 우리는 본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1946-47년에 남인도 교회의 통합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이런 통합 이전에는 이 교회들이 회중교회, 성공회, 장로교회, 감리교회로 각각 따로 존립했었다. 이처럼 신학과 교회 정치 제도에서 서로 차이를 보인 그 교회들이 하나로 묶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쓴 자서전에서 그 고충을 생생히 읽을 수 있다. 그는 통합을 위한 정치적 노력만이 아닌 교회 연합을 위한 신학 작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어떤 원리에 의해 교회가 점진적으로 하나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신학 작업 말이다. 본서는 남인도 연합 교회의 탄생이 그 실제 배경을 이루고 있어서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다. 1952년 영국 글래스고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커 강좌(Kerr Lectures)에서 발표한 내용이 근간을 이루는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교회의 안목을 더 확대시켜준 신학 작업으로 평가를 받는다. 신약 교회가 선 이래 지금 세계 교회에는 네 개의 큰 흐름이 존재한다. 로마교회, 정교회, 개신교, 오순절 운동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그 흐름들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은 금방 분명해진다. 많은 차이를 서로 보인다. 그러니 이 흐름 중 어느 하나도 성경의 교회론을 전체적으로 다 담아내지 못한다고 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공감이 간다. 본서는 정교회를 제외한 세 흐름을 다루고 있는데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신학적 논의에 필요한 질문을 이렇게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에게로 영입되는가?” 그는 이 문제를 신자들의 회중(2장), 그리스도의 몸(3장), 성령의 공동체(4장)라는 장을 할애하여 풀어 나간다. 제2장은 보수적 개신교의 교회관을 다루며, 제3장은 로마교회의 교회관을 다루고, 제4장은 오순절 운동의 교회관을 다룬다. 이 교회들이 각각 어디에 강조점을 두며 또 그런 강조점은 어떤 한계를 갖는지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논한다. 한번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교회가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경험적으로 어느 누구도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출발점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그것은 사도적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이것 외에 그 어느 것도 교회 연합의 시발점은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도시대에도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 되는 출발점은 정치 제도나 신학적 세부 사항이 아닌 사도적 복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였다. 교회가 하나 된다는 것은 어떤 문제일까. 교리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문제일까. 아니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문제일까. 전자라고 한다면 지식을 먼저 내세울 것이고 후자라고 한다면 신앙을 전면에 내세울 것이다. 신앙이란 신뢰요 사랑이요 헌신이지만 반면에 교리란 신앙을 설명해주는 이해인 까닭에 교회 통합 문제에서 최우선은 사람 곧 회중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통합이란 믿는 사람들이 하나로 묶이는 것이다. 거기에 신학도 따라간다. 우리의 합동 추진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일독을 권한다.
106 |조주석의북카페| 용기있는 기독교 파일 (4)
편집부
6479 2011-09-07
위험한 교회들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용기 있는 기독교, 데이비드 웰스 , 부흥과개혁사, 2010년, 370쪽| “교회는 세상문화 아닌 오직 성경 위에 세워지는 법” “로이드 존스의 책들을 통해 성경과 교회사를 보는 안목을 얻었고, 최근 데이비드 웰스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세상과 교회를 보는 눈을 얻게 되었습니다.”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목사가 누군지 금방 눈치 챌 것이다. 천성을 향해 가는 나그네로서 신앙의 시야를 좀 더 크게 확보하려는 나로서는 그 백금산 목사의 말에 공감한다. 이처럼 책이란 잘 만나면 우리의 시야를 확 열어줄 수가 있다. 데이비드 웰스는 문화신학 4부작인 <신학실종>, <거룩하신 하나님>, <윤리실종>, <위대하신 그리스도>를 완성했다. 이들 네 책은 15년 동안에 걸쳐 집필한 것으로서 1,600쪽(번역서) 분량의 방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 진리, 하나님, 자아, 그리스도, 교회라는 이 다섯 가지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그것들은 하나의 큰 주제를 그려낸다. 20세기 중반 이래로 진행된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의 전체상이다. 이런 저술 작업을 다 마치고 나서 저자는 그 책들의 압축판 내지 안내서 아니면 개론서쯤으로 여겨질 본서를 출판한 것이다. 웰스는 이 책들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낸다. 교회는 세상과 벗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 야고보 선생의 지적대로 말하라면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세상이란 교회의 원수이다. 이 외에도 교회의 원수는 육신과 마귀라는 게 더 있다고 고백서는 말한다. 교회는 이것들로 인해 역사 속에서 변질되고 타락하고 소멸되는 길을 걷기도 하는 까닭에 원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래 전부터 교회의 원수의 하나인 세상의 실체가 무엇인지 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이러한 마음은 가졌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특히 오늘의 맥락에서 그게 이런 거로구나 할 만한 그림이 뚜렷이 그려지지 않았다. 뭔가 잡힐 듯 말듯 한 나에게 본서는 환한 빛을 비추었다. 아 바로 이런 거로구나. 세상이란 문화다. 그렇다! 세상이란 문화다!! 웰스는 19세기의 미국에 등장한 근대 문화를 세상성이라 규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교회를 위협해 왔는지 다각도로 그려낸 것이다. 왜 문화가 교회의 원수라는 것인가. 문화란 우리와 늘 밀착되어 있는 것이요 호흡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문화를 등지는 반문화적 존재가 될 수는 없을 터. 허나 웰스의 말대로 세상이 문화라면 그 문화는 교회의 원수가 될 텐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교회의 원수가 된다는 말인가. 그는 이 문제를 다른 어떤 신학자보다도 신학적으로 깊이 파헤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음주의는 두 가지 결함을 안고 출발했고 근대 문화로 인해 복음주의 지형도는 셋으로 분할되었다. 고전적 교회와 마케팅 교회와 이머징 교회로 재편된 것이다. 이들 교회 중 마케팅 교회와 이머징 교회는 현대 문화와 거리를 두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머징 교회는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기 위해 많은 것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강대상도 없애고 의자도 바꾸고 음악도 바꾸고 악기도 바꾸고 예배당 건물 자체도 영화관처럼 리모델링했다. 그뿐 아니다. 기독교 신앙을 현 세대의 취향에 맞추려고 여론조사, 마케팅, 장사의 요령을 동원하기조차 했다.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몰려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배후에는 성공을 향한 집념이 강하게 깔려 있다. 이런 문화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교회의 원수가 되는가. 문화적인 것들이란 단지 어떤 것에 쓰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들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성공을 가져올 보증수표나 능력으로 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수단을 절대적 능력으로 대하는 순간 그 수단은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게 되어 있다. 문화 자체가 원수가 아니라 그 문화를 절대적 능력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게 된다. 구원 역사 대대로 늘 경계해 왔던 세상의 정체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웰스의 깊은 신학적 성찰은 성경적 진단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문화 위에 세워지는 게 아니다. 문화 위에 세우면 교회는 간음한 여인으로 변한다. 교회는 오직 성경 위에 세워지는 법이다. 세상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다. 문화든 사람이든 다 쓰임 받는 것에 불과할 따름. 교회는 늘 자주 이것을 혼동해 왔다. 이러한 교회가 위험한 교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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