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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3 (00:00:00)
내비게이션 따라가는 행복한 성경여행




< 오동춘 장로·시인·화성교회 >


“내비게이션 따라가는 행복한 성경여행”은 한양대 법대 교수인 조성민 박
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영어단어로 CROSS를 키워드로 하여 그 의미를 풀이
해 본 동기에서 신구약성경 사전을 쉽게 풀이하여 신앙의 초보자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CROSS를 내비게이션으로 설정하여 이 단어 철자에 따라 Christ Resurrecte
Our Soul Sincerely 로 규정하고 그 뜻은 ‘그리스도가 진실로 우리의 영혼
을 부활시키신다’로 풀이했다. 성경 66권의 말씀을 짧은 시간 내에 이해하
고 그 말씀이 오래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경 본문을 여러번 정독하여
이해하고 170여개의 영어단어의 키워드로 키워드 바이블을 엮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1천 6백여년의 오랜 역사에 걸쳐 40명 이
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록한 책으로 온 세계에 널
리 읽히는 우리 인류의 생명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은 1,500년에 걸쳐 히브리어(유대)로 기록 되었고
신약은 헬라어(그리스)로 씌어졌다. 구약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록
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기록이다.
구약에서 인류의 창조와 원리는 EVE라는 키워드로 에덴동산(Eden), 말씀을
거역함 (Violation),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Exile)로 이 세 영어 단어로 내
용을 요약 풀이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영어 단어의 키워드로 성
경을 쉽게 풀이했다. 누구나 쉽게 성경 내용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해 1월에 도서출판 성경문화에서 초판을 찍은 이후 10월에 3판까지 발행한
책이다.
지은이 조성민 박사는 머리글에서 이 책은 신학적 배경이나 개인적 견해를
가지고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며 다만 성경을 처음 대하거나 성경을 읽는
데 그 방대함에 부담을 느낀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성경과 더 친숙
해지도록 엮은 책이라 했다. 책 속에 신구약성경 참고 지도가 들어 있어 입
체적으로 읽기에도 편리한 책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더욱 성령이 충만해
지고 전도에 힘쓰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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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조주석의북카페| 예수 그리스도 안에 허락된 하나님의 의 파일 (1)
편집부
5874 2011-06-22
예수 그리스도 안에 허락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 |박영선, 합신출판부, 2011년 |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하나님 나라의 이중 구조 속에 ‘오늘’이라는 삶이 있어” 설교자는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산상설교의 중심 주제라고 설교 내내 이야기한다. 그 하나님의 의가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늘 위협을 받는 바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는 어디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의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생명이 생명을 낳는 것과 같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아버지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아니한 그들의 의는 하나님의 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의 의, 곧 자기 의였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베푸시고 확인시키는 의는 용서하는 의이다. 십자가 안에서의 용서와 사랑이란 무엇인들 참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자기 의를 주장하게 되면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해서만 증명되는 의이다. 지나간 20세기 역사에서 경험한 역사적 현실은 이념 투쟁 때 사람이 가장 인간성을 상실하더라는 것이다. ‘옳은 사회를 만들자, 옳은 세상을 만들자.’ 이러한 구호는 좋은 것이지만 그때 제일 많이 사람을 죽였다. 이처럼 그의 설교는 예수님의 교훈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까지 끌어내어 하나님 나라 교훈의 적실성을 밝혀낸다. 설교자는 ‘오늘’을 무척 강조한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로 말미암아 임했지만 아직 완성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고, 우리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지긴 했지만 아직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 구조 속에 ‘오늘’이라는 우리의 삶이 끼여 있다. 이 오늘은 긴장성을 갖는다. 구원의 기쁨과 만족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면 이 구원을 핍박하고 또 의식주나 명예나 자랑이라는 세상의 유혹도 공존하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늘의 삶에 용서와 관용과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의는 신앙인의 삶에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다가 교회라는 공동체를 망쳐도 상관이 없습니다. … 순교란 기독교 신앙을 지켜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여기저기에 선다면 정말 교회는 부서지고 사라질 운명에 놓이게 될까. 설교자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크게 둘로 나누어 강해했다. 보통 팔복으로 알려진 서론부와 그 나머지 산상설교 내용들이다. 이 나머지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는 것이라고 이미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천국의 복에 관한 그의 설명은 아주 특이하다. 그 복들이란 “그 모든 내용들이 자격과 조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된 나라에 초청을 받을 수 있는 무조건적인 범위를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할 때 그 복들은 천국 시민이 갖는 성품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설교자가 이렇게 해석하는 데는 마태복음 4:12-15과 4:23-25을 산상설교 해석의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산상설교 강해서)에 크게 의존한 해석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천국 복음 선포(마 4:17, 23)와 제자의 삶으로 부르심(마 4:18-22)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산상설교의 해석적 전제로 삼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갈릴리 해변에서 소수의 사람을 그의 제자로 부르신 일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앉으시자 제자들이 나아왔고 긴 설교를 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교훈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따른 요구, 곧 제자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산상설교는 먼저 천국 시민의 성품을 규정한 다음 그 성품들이 오늘이라는 자신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확인되고 배양되어야 할지를 가르치신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은 먼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이런 공동체를 세워나가셨고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시려는 계획(마 28:20)을 승천 전에 밝히셨다. 오늘의 교회가 선 것도 이 계획에 따른 것이다.
104 |조주석의 북카페| 그리스도인의 미덕_톰 라이트 파일 (164)
편집부
9820 2011-05-11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미덕 [그리스도인의 미덕, 톰 라이트, 포이에마, 2010년, 480쪽]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폭력 사회조차도 그들 나름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 의리가 그것이다. 의리가 무너지면 그들의 조직도 와해되고 만다. 배신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이 초래하지 않게 하려고 의리를 강요한다. 사회에 기생하는 폭력 단체라도 그 조직이 유지되려면 의리라는 게 필요하기 마련이고 조직원들의 몸에 의리는 익숙한 것이 되어야 한다. 저자인 톰 라이트는 미덕의 문제를 다룬다. 미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善)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길러진 성품이다. 다시 말해서 제1 천성이 아니라 제2 천성이라고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어떤 필요한 일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 바로 미덕이다. 예컨대 누군가 실족해서 철로에 떨어졌는데 몸을 사리지 않고 진입하는 전동차로부터 그를 구해내는 용기나 희생정신 같은 게 미덕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미덕은 일반 미덕이 아니라 기독교적 미덕이다. 기독교적 미덕은 영웅사회나 귀족사회나 시민사회나 국가사회와 관련된 게 아니다. 영웅사회에서는 용기가, 민족사회에서는 애국심이, 시민사회에서는 관용이나 희생이, 조선시대의 유교 사회에서는 충효가 중요한 미덕이었다. 그러면 기독교적 미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미덕이 아니라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 바울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용기나 정의나 절제와 같은 공동체의 미덕을 주장했지만 그것은 영웅사회에 필요한 미덕이었다. 한 국가의 정치나 전쟁의 선두에 서게 할 위대한 영웅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미덕은 그런 게 아니다.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덕목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성령의 열매라는 공동체적 미덕을 제시한다. 이러한 미덕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강점을 지닌 것들이어서 교회를 세상과 구별시켜 준다. 그것들은 신자들의 몸에 밴 익숙한 것이 되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이런 미덕들이 자기 자신과 교회 안에 희미하거나 없다면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서기 어렵다. 이름뿐인 교회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기독교의 주요한 세 가지 덕목으로 간주되어 온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시민사회나 국가사회나 회사와 같은 조직사회에 필요한 덕목이 아니다. 시민사회나 국가사회나 기업체는 그런 것들로 세워질 수가 없다. 다른 덕목이 필요한 것이다. 관용이나 애국심이나 성실성 같은 덕목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들로 세워지거나 채워질 수가 없다. 교회가 교회되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덕목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처럼 미덕이란 그 사회를 결정하고 규정하는 본질적 내용인 까닭에 각기 독특한 강점을 갖게 된다. 덕스러운 사람을 놓고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가 다른 관점을 보인 데서도 알 수 있다. 전자는 위대한 행위를 하고 박수갈채를 받는 세계를 활보하는 도덕적인 거인 곧 영웅의 비전을 제시한 반면에, 후자는 사랑이 많고 관대한 성품을 가졌고 사람들의 이목을 자기에게 집중시키지 않는 겸손한 자의 비전을 제시한다. 전자는 인간과 세상 나라가 그 중심에 있지만 후자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인간상을 충만히 드러냈다. 그러한 인간상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왕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고 섬김과 봉사와 사명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중개할 뿐 아니라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드리는 기쁨과 감사를 표하는 예배하는 삶을 통해 실천되고 드러난다. 저자는 우리 한국 교회에 상당히 널리 알려진 신학자로서 그의 저술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보다는 부활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태도가 복음의 긍정성과 생명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데 큰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부패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상대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는 단점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에 유의하고서 그의 책들을 대한다면 유익 얻을 점들이 많다.
103 |조주석의 북카페|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 파일 (5)
편집부
6555 2011-04-06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 <고든 스미스 지음, CUP, 2010년, 464쪽 > 회심, 변화의 출발점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회심은 한순간 혹은 삶의 과정속의 경험이기도” 나는 회심 체험을 했는가? 유아 세례 교인으로 자라난 까닭에 어느 시기에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딱히 그런 체험을 꼬집어 낼 수는 없지만 삼십을 전후로 신앙의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전에도 영적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 이후로 지적 차원의 성숙을 더 추구한 것이 분명하다. 이 지적 성숙은 단지 지식의 증대만 가져온 것이 아니다. 삶의 총체적 차원에서 그것이 내게 성화를 가져오는 지적 요소로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회심 체험은 반드시 필요한가? 그렇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회심을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인식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기초요 사회와 세상의 변화를 위한 소망의 근거로 보았다. 이런 기준에 따른다면 나의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거기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인가 아니면 이 기준을 그대로 내게 적용하기에는 뭔가 무리한 것이 아닌가? 고든 스미스는 미국에서 이천 여 교회를 가진 기독교선교연맹(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이라는 교단에 속한 신학자이다. 이 교단은 원래 장로교 목사였던 심슨(A.B. Simpson)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그는 극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온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다. 이 교단 소속 교회가 국내에도 소수 있다. 이 책은 미국 복음주의의 회심 신학을 교회사적이고 성경적인 차원에서 검토한다. 교회사적으로 검토한다는 말은 교회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회심 경험을 살핀다는 뜻이요(3-4장), 성경적으로 검토한다는 말은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체계적인 회심 신학의 모델을 제시한다는 뜻이다(5-8장). 이것의 의의는 ‘회심’이라는 주제가 조직신학의 구원론에서는 간단히 다루어지는데 교회사와 성경을 토대로 방대한 회심 신학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회심은 인간의 반응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행동”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한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반응하는 삶의 전환이다.” “회심은 인간적인 의지의 행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반응이 인간 내부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지는 직접 들여다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신비에 속한다. 회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변화 곧 성숙이라 할 수도 있고 성화라고도 할 수 있는 목적을 갖는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목적을 갖는다. 그래서 회심은 변화 곧 성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화라는 목적이 빠진다면 회심은 어떤 것이 될까? 그것은 성장을 멈춘 기형이 아니겠는가? 태어난 아이가 크지 못하고 성장을 멈춘다면 부모의 속은 정말 타들어갈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이 끼친다. 욕망을 제어하려고 무덤을 거처로 삼거나 피가 낭자하도록 자신의 등을 채찍으로 치는 극단적인 고행주의가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나의 시각에 크게 들어온 저자의 한 요점이 있다. 회심이 과정이라고 한 대목이다. 그것이 한 순간의 경험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일정한 삶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본서를 읽기 전까지 회심이 일정한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생각조차 못했었다. 당연히 한 순간의 경험이라고 여겨온 까닭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회심은 대개 여러 해에 걸쳐 오랫동안 진행되는 신앙 경험이기도 하지만 바울에게서 볼 수 있었던 대로 급격한 경험이기도 하다. 이 주장이 정말 그러한지 알아보려고 신학교 때 배웠던 루이스 뻘콥의 조직신학을 펼쳐 보았는데 간단히 몇 줄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회심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자복해야 하는 회개와는 다른 것이다. 회심은 잘못을 고치어 착하게 되는 개과천선도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깨달음’(覺)과도 다른 것이다. 즉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깨달음으로써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을 버릴 수 있게 한다는 철학이 아니다. 기독교의 회심은 인간의 경험인 것은 사실이나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다. 목회자의 시각을 열어줄 책이라 여겨 꼭 읽기를 추천한다.
102 "자기 부인"(The shadow of The cross) / Rev. Walter J. Chantry_조여자 권사 파일 (90)
편집부
13634 2010-08-18
"자기 부인"(The shadow of The cross) / Rev. Walter J. Chantry < 조여자 권사, 죽전남포교회 > 우리 교회에서는 지난 2월부터 4월까지 경건서적 읽기 기간을 정하였다. 이 기간에 챈트리 목사의 '자기 부인'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저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칼라일에 있는 그레이스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39년 동안 섬겼다. 그는 복음과 여러 주제에 대한 바른 성경적 지식을 전해주는 뛰어난 저술가 중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진리의 깃발](The Banner of Truth) 잡지의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며, 지은 책으로는 {우리 시대의 복음 전도, 무엇이 문제인가}(Today’s Gospel), {자기 부인}(The Shadow of the Cross) 등이 있다. 이 책을 통해 자기 부인과 관련해 다음 몇 가지를 점검하게 되었다. 1. 자기 부인의 원리를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 즉 신자가 되는 첫 번째 문은 '자기 부인'이라는 문이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참된 크리스챤이 될 수 없다. 성경(막 8:43)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주님은 크리스챤이 되는 기본 원리가 자기 부인임을 말씀해 주고 있다. 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신자는 믿는 순간부터 자신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자로 여기기 때문에 자아나 자기연민, 자기애, 자존심 등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매일의 삶에서 자기 부인이 나타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신앙의 진위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으며 자기 사랑을 뿌리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 사랑을 심어야 하며, 따라서 자기애가 줄어 들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자아와의 전쟁, 즉 자기 부인의 내적 싸움은 주님께서 사신 삶의 특징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평생, 날마다, 어디에서나 자기 부인인 십자가를 짊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좁고 험난한 좁은길을 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곧 죽음이며 자기 부인의 실천이다. 2. 자기 부인은 신자들에게 보상을 가져다 준다. "십자가를 지라"는 복음의 요구는 어쩌면 가혹하게, 크리스챤을 괴롭히려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가혹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놓으시고 사랑을 보이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롭고 힘든 것을 명령하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 너머에 있는 기쁨, 평안, 복, 영광, 하늘의 상을 아셨기에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라고 명하실 수 있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약속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내세의 영생이다(막 10:30).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고 승리하신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존귀와 영광을 받고 계시며 장차 심판주로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고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에게 하늘의 상을 약속 하고 있다. 주님 나라의 기쁨과 하늘의 상은 십자가와 더불어 찾아온다. 3. 자기 부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신앙의 유익을 가져다 준다. 1) 참된 자유 그리스도인, 아니 모든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데 이 자유에 대한 절제력을 잃을 때 자유는 방종이 되며 반면 지나친 절제는 자칫 율법주의나 금욕주의에 빠지게 된다. 크리스챤이 자유를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크리스챤의 자유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저급한 육신적 탐닉을 가리는 은폐의 수단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2) 온전한 가정을 세우는 열쇠 가정 문제(자녀문제, 부부갈등, 고부간의 불화 등)의 해결책은 자기 부인이다. 아내가 자기를 부인하고 남편을 섬기며 순종하고, 남편이 사랑하는 몸 된 아내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아량을 베푼다면 사랑의 가정을 세울 수 있고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서 가정의 참 의미와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 3) 참된 소명 의식의 확인 여기서 목회자는 목사만이 아니고 장로 등 교회의 사역자 모두를 의미한다. 목자는 자신의 유익보다 양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양떼를 위하여 자기를 바치는 것이 목자의 사명이다. 인내와 온유의 태도로 양들을 대해야 하며 겸손과 친절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또한 물질의 소유에 있어서도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딤전 3:8)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 특히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은 현대인들이 꿈꾸는 물질적 풍요와 호화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아야 한다. 목회자들이 주님의 동산을 가꾸는데 가장 필요한 도구는 '자기 부인'이다. 4) 기도의 승리 및 참된 기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인본주의,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쾌락주의 등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을 피할 수 없는데 우리에게 있어서 강력한 무기는 '기도'이다. 사도 바울은 예배소서 6장 13-17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소개하고 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시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기도야말로 크리스챤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놀라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아니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주된 원인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 요구되는 고통스러운 '자기 부인'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원천인 '자기 부인'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준엄한 자기 부인을 통해서 철저히 낮아져서 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분의 무한한 위엄과 능력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올바르고 뜨거운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 먼저 구해야 한다. 우리의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만이 그 분을 움직일 수 있다. 주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듯이 "땀방울이 핏 방울 같이"(눅 22:44)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마치는 말 주님은 기도라는 무기를 우리 손에 쥐어 주셨다. 우리는 언제 이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될 것인가?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긴 자는 영적 싸움에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영적 싸움의 승리는 오로지 '자기 부인'이라는 진주를 발견한 사람들만 누리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101 |주주석의 북카페| 교회를 뼈아프게 경험한 목사의 삶 파일 (103)
편집부
7675 2010-08-18
교회를 뼈아프게 경험한 목사의 삶 조지 마즈던|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시대|복있는사람|2009년 “냉혹한 교회 현실 불구하고 불후의 명작 일궈내” 이 책을 덮고 나서 천천히 두 가지 질문이 내 뇌리로 걸어 들어왔다. 인생의 어느 길에 서야 할 것인가, 목사의 삶은 꼭 이렇게 끝나야만 하는가. 두 질문 중 처음의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벤저민 프랭클린이 걸어간 인생관에 걸린 문제요, 나중의 것은 에드워즈의 목회 인생을 두고 떠올린 것이다. 이 두 사람 다 동시대인이요 청교도적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두 사람 모두 과학에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피뢰침과 다촛점 렌즈를 발명한 프랭클린은 자연법칙이 우주를 움직인다는 이신론을 따른 반면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에 계시는 인격적인 곳으로 바라보는 유신론을 따랐다. 이처럼 다른 토대로 출발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과정 속에서 그 토대를 현실에 적용하고 또 글로 썼다. 프랭클린은 미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애국자요, 에드워즈는 대각성운동이라는 신앙 혁명에 헌신한 목회자다. 천연두로 50대 초반에 사망한 에드워즈보다 프랭클린은 무려 30년도 더 넘게 장수한다. 결론에서 지은이는 이 두 사람의 삶을 이렇게 평하는데 “역사는 각성운동보다 혁명을 더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억한다. 아마 에드워즈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결론이 첫 질문에 대한 나의 적절한 답이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찾기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말년은 치밀어 오른 분노와 뼈 속 깊이 느껴지는 배신감에 어금니를 꽉 깨물지 아니하면 이겨내지 못할 지경까지 치달아갔기 때문이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자기 개혁적인 에드워즈가 맛본 교회 현실은 그 자체로 정말 냉혹했다. 성찬 참여 자격을 두고 목사와 회중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논쟁의 핵심은 세례교인이 곧 성찬 교인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였다. 에드워즈는 형식적 세례만이 아닌 ‘신빙성 있는 고백’도 필요하다고 제시한 것이다. 이 온건한 개혁을 회중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임 목회자인 스토다드의 입장을 뒤집는 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소수의 지지만 얻게 된 그는 즉각 해임되었다. 젊은 나이인 26세에 외조부의 후임으로 노샘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20년 동안 섬긴 그였지만 그의 말로는 고통의 극치 상태였다. 이 고단한 목사의 삶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목사는 교회와 결혼한 남편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이 말 속에는 애증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목사가 교회로부터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교회가 목사로부터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은 어느 곳에나 상존한다. 이 문제를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지상의 교회는 복음 신앙보다도 인간의 전통과 감정을 더 앞세우는 어리석음을 떨쳐내기가 여간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복음에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 자체가 악해서 그러한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 복음 내용이 현실 교회 안에서는 그리도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단 말인가. 그러니 믿음이란 인간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진리에 우리는 찬동할 수밖에 없다. 목회에서 좋은 이들을 만나게 해주시라고 기도하라는 선배들의 조언은, 고통의 자리를 면하고 싶은 소극적 태도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인 우리는 이처럼 연약하다는 고백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에드워즈가 이 땅에서 받은 보상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대가족을 이끌고 인디언 선교지로 떠나야 했던 그의 삶을 읽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섭리까지 따지고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은, 열악한 그곳에서 쓴 두 권의 빼어난 저술이 그의 상급이라는 데까지 미쳤다. 지금도 읽히는 『참된 미덕의 본질』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것이다. 이 땅에 서 있는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에드워즈의 삶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서로 아픔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부부와도 같은 목사와 회중이 서로 인간의 감정을 앞세우면 질그릇 속에 담긴 복음의 광채는 찬연히 빛날 수 없다는 교훈이다. |조주석 목사, 합신출판부편집실장, chochuseok@hanmail.net |
100 |조주석의 북카페| 실패자를 찾아오신 하나님 파일 (102)
편집부
9744 2010-07-21
"실패자를 찾아오신 하나님" 백악관에서 감옥까지 |찰스 콜슨, 홍성사, 2008년| “삶의 목적과 방향 일대 전환한 동기 되어” 하나님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시는 데 왜 실패를 동원하시는가. 사실 실패란 당하는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아프고 억울하고 슬픈 일인데도 말이다. 그러하다면 실패란 잔인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이것 말고는 하나님께서 쓰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인가. 상상컨대 수없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어리석음과 도덕적 부패를 보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가장 효험이 있는 방법이 아닐까. 역사에서 줄곧 하나님이 사용해 오셨던 방법도 주로 이게 아니던가. 찰스 콜슨은 변호사인 아버지를 두었고 법대에 입학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변호사로서 워싱턴의 법조계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닉슨 선거 운동에 가담하여 그를 제37대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일조한다. 닉슨에게 신임을 얻어 4년간 그의 측근 참모가 되어 권력의 핵심부에서 활동하였고 그를 재선시키는 데도 성공한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다니엘 엘즈버그 사건의 배후자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 받고 앨라배마의 맥스웰 연방 교도소에서 약 1년간의 수형 생활을 한다. 이것이 본서 전체의 핵심 줄거리다. 엘즈버그 사건이란 다니엘 엘즈버그가 국방부의 일급비밀문서를 뉴욕타임스에 제공하여 1971년 6월에 게재된 일로 그 발단은 시작된다. 이 무렵 키신저는 닉슨의 지시로 베트남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외교 협상을 벌이는 중에 있었는데 이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협상은 난항에 빠진다. 베트남 전을 종식시킴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 닉슨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백악관의 권력자가 그를 가만 둘 리 없다. 그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사실을 인지하고 그의 정신과 진료기록을 불법으로 열람하고 전화도 도청하여 매장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배후에 콜슨이 지시 당사자였다는 게 언론과 여론의 대세였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매스컴이 날마다 쏟아내는 수많은 비난을 이겨내기 어려웠던 콜슨은 큰 상처를 입었고 그의 영혼은 점차 쇠잔해만 갔다. 이 무렵에 그는 탐 필립스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필립스는 경쟁적인 사업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려고 애를 쓰는 뉴욕의 큰 사업가였다. 또한 콜슨의 신앙을 돕는 자들 가운데는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당파적 비판을 초월하여 그리스도께 헌신한 공화당 정치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고 콜슨이 기독교적 회심을 빙자해서 자신이 저지른 정치적 비리를 속죄 받으려 한다고 맹비난하였다. 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가 그를 등진 상태였고 사법부도 그를 법정에 세워 단죄를 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적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헤롤드 휴즈에게 털어놓는 그의 말에서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정신분석의의 사무실에 침입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네.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알게 되었지. 하지만 도덕적으로 볼 때 그것이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네. 난 엘즈버그를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을 거야. 대통령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일세.” 그는 이제 법정에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두려운 수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변호사로서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접는 변호사 면허 취소를 의미하였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인생의 실패자다. 이 실패자를 하나님은 어떤 존재로 바꾸어 놓으셨는가. 백악관의 대통령 참모에서 교도소 수형자들의 친구가 되게 하셨다. 권모술수를 부리는 권력의 높은 자리에서 내려앉혀 약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억울함을 들어주는 섬김의 자리로 옮기셨다. 그에게 실패가 없었더라면 이런 제자도가 가능이나 했겠는가. 개인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그는 출감 후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하여 다시 수형자에게로 돌아간다. 삶의 목적과 방향을 일대 전환한 참 회개가 무엇인지 그의 이야기는 선명히 보여 준다. 실패자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 된 것이다. |조주석 목사, 합신출판부편집실장, chochuseok@hanmail.net |
99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무능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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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0 2010-04-28
무능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열림원, 2010년 | “70평생 살아온 삶은 잿불과 같다는 것 알게 돼”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무능에 대하여 별 의식 없이 살아가거나 그냥 회피하 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도 인생에서 한두 번쯤은 전 존재를 흔들어대는 절 망 앞에서 그 무능을 뼈저리게 경험하는 실존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실존 앞에서 절망 느끼기도 그 때가 언제일까.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장년 시절, 노년의 시절. 이어령 교수에게는 그 날이 노년기였다. 팔팔한 청년이 아닌 쓴맛단맛 다 겪은 인 생 황혼기에 딸이 당하는 온갖 고통 앞에서 자신의 무능이 두둥실 뜬 보름달 처럼 커다랗게 보인 것이다. “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너의 어둠으로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네가 애통하고 서러워할 때 내 머릿속의 지식은 건불 에 지나 지 않았고 내 손에 쥔 지폐는 가랑잎보다 못하다는 걸 알았다. 70평 생 살아온 내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무신론자였다던 이어령 교수의 이 고백은 존재론적 회개가 아닐 수 없다. 그 는 때로 신념이 자신을 광기로 몰아넣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니체도 예수님도 다 같이 믿을 수 없다던 사람이다. 20대에는 반기독교적인 글도 많 이 썼고 소설가로서 창작도 했지만 그건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것들을 자신 이 만들겠다는 오만한 생각에서였다. 그는 이제 인간은 뛰어봐야 벼룩이며, 이 단순한 사실을 아는 데 시간이 걸렸노라 부끄러워한다. 알량한 자존심조 차 내다버리는 어린아이의 언어다. 그가 30대에 쓴 글에서 밝혔듯이 신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도 기성의 모 든 권위에 대해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아온 무신론자였다. 인간이란 이 세상 에 아무런 희망도 구제도 없이 내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에 무신론자 실존주의자가 되었다고 자변한다. 그가 써왔던 저항의 글들은 인간이 얼마 나 비참하며,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증거하는 무신론자의 생산물이었 다. 이 무신론의 웅대 한 포부도 갑상선암에 걸려 망막 파열로 시력을 잃어가는 딸의 안쓰러운 현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사실에 그가 이제껏 의지해 왔던 기반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 는 장면이다.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천한 능력밖에 없사 오니 그것이라도 좋으시다면 당신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쓰실 수 있도 록 바치겠나이다.” 딸을 문병 갔던 하와이의 작은 교회에서 그가 드린 생의 첫 기도였다. 지상 의 아버지도 해주지 못한 그 이상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신의 딸을 구해준 하늘 아버지께 귀향한 것이다. 물론 딸로 인해 하나님을 만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기적 때문에 기독교 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기적은 목적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께 서 병을 고쳐주셔도 언젠가는 누구나 죽게 된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진짜 기적은 단 하나, 곧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다’고 알토란 같은 고백도 한 다. 그동안 온갖 자유를 누리며 살았는데 이제 자신을 가두는 벽이 생겼고 그에 게 새로운 문이 열린 것인지, 벽이 생겼는지는 아직 모르겠다는 불안한 심정 도 드러낸다. “나처럼 먹물에 찌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백 퍼센트 신자는 못 됩니다. 하루에도 몇번 밤에 자다가도 회의와 참회를 되풀이하면서 살지 요. 문지방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자신이 딱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 만 빛과 어둠 사이의 황혼이 아름답듯이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의 문지방에 는 긴장의 노을이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에는 회의가 일절 없는 것도 아니 어서 그의 말은 진실로 들린다. 딸 민아의 서원은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고, 은총 받고, 아버 지가 크리스천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 소원을 받아주심으로 무신론자인 아버지는 이제 하늘 아버지의 두 팔 안에 안기게 되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두 팔에 안기는 것 보이지 않는 무엇이 이끌고, 들리지 않는 무슨 소리가 그를 부르지 않았다 면 무인도 같은 상황에 처박히기 위해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찾아간 일본의 연구소생활의 금기를 깨고 서울로 다시 돌아올 수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무능을 불쌍히 여기신다.
98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묵시 열광이 미래를 왜곡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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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7 2010-03-03
묵시 열광이 미래를 왜곡한다 리차드 카일|역사 속의 종말인식|기독교문서선교회|2007년 "세속적 묵시론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근거한 것" 1956년 10월.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 군을 시나이 반도 밖으로 몰아냈다. 영 국과 프랑스 군은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고 소련 군은 이집트 군을 지원하겠 다고 위협했다. 한 때 세대주의적 종말론 유행해 십대 시절에 저자는 이 전쟁이야말로 아마겟돈의 서막이라고 생각했다. 그 만 그렇게 생각했을까. 스코필드 관주 성경, 휴거, 아마겟돈에 익숙한 세대 주의적 전천년설 신봉자들이라면 다 가졌을 법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십대 시절에 가졌던 생각이 과연 성경적이었는지 반성한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 천년왕국 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 었는지 교회사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추적한다. 미국은 유럽과 는 달리 천년왕국을 강렬히 소망했다. 그 후폭풍으로 휴거 열풍이 미국을 휩 쓸었고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는 천년왕국 사상이 늘 종교적 경 험의 중심부에 놓여 있었지만 유럽 사회에서는 변방에 있었을 뿐이다. 우리 의 현실은 미국과 더 가깝게 보인다.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조차도 세상의 종말에 관하여 예 견을 한다. 2000년에 천년왕국이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부흥사 찰 스 피니는 자신의 사역 중 어느 날 3년 안에 천년왕국이 시작할 것이라고 예 견한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신학자나 부흥사 나 목사가 별로 없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종말에 관한 신학적 겸손이 아닐 수 없다. 묵시론은 무척 다양하다. 묵시란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인 현 시대의 끝과 심 판의 날, 장차 올 시대와 관계된 것들이다. 묵시론은 이런 내용을 다루지만 다 같은 게 아니다. 크게 나누어 보면 종교적 묵시론과 세속적 묵시론으로 양분된다. 종교적 묵시론은 정말 무척이나 다양하며 역사 속에서 수많은 변 종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세속 적 묵시론도 그와 다를 바 없다. 이 둘은 종말의 원인과 결과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종교적 묵시 사상 은 재앙이 있고 그 다음에 승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속적 묵시론에서 는 승리를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핵전쟁이나 환경 재앙 이후에 황금시대가 뒤따른다는 발상이 없다. 인류가 낭떠러지의 끝에서 겨우 벗어나 재앙을 면 한다는 것이 고작이다. 종교적 묵시론에는 심판 다음에 구원의 완성이라는 승리가 있지만 세속적 묵시론에는 이런 승리가 없다. 원인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양자는 명확히 다른데, 세속적 묵시론은 종교적 묵시론과 달리 전쟁이나 지진이나 기아나 전염병이나 환경 위기라는 사건들 배후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신학보다는 과학과 사회적 비평에 빚진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근거한 것이 다. 저자의 이러한 연구 고찰은 이 책의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 리 현실 속에 깊숙이 들어와서 우리의 미래 시야를 흐리게 하는 그릇된 종교 적 세속적 묵시 사상을 가려낼 수 있는 예리한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 다. 지난 12월에 '2012'가 극장 가에 걸렸다. 호들갑은 떨었지만 상영관들이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마야의 달력에 근거하여 2012년 12월 21일에 지구가 종 말을 맞이한다는 가정아래 거기에 노아 홍수 이야기를 덧칠하여 구조선에 탄 사람은 재난을 피한다는 게 큰 줄거리다. 정말로 영화산업다운 대중을 호리는 기발한 상상력이다. 영상 볼거리로써 일 순간에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관객의 지갑을 털어가려 한 것 이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과는 비슷한 것 하나 없는 걸 가지고 '그 영화가 성경적이다, 아니다'라고 서로 다툴 필요조차 없다. 그냥 재미로 봤으면 되 었다. 사람들은 묵시에 대하여 열광하고 많은 호기심을 표하며 그런 예언을 풀어내 어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런 것이 우리의 미래 구원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세 상의 종말은 하나님께서 가져오실 것이요 또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나 우리 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하루하루 믿음으로 근실히 살면 된다. 오직 하나님 손에 맞기고 살아가야 여전히 사람들은 미래의 재난 이야기를 계속 생산해 내어 미래를 왜곡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조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Selected no image 내비게이션 따라가는 행복한 성경여행_오동춘 장로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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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5 2010-01-13
내비게이션 따라가는 행복한 성경여행 “내비게이션 따라가는 행복한 성경여행”은 한양대 법대 교수인 조성민 박 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영어단어로 CROSS를 키워드로 하여 그 의미를 풀이 해 본 동기에서 신구약성경 사전을 쉽게 풀이하여 신앙의 초보자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CROSS를 내비게이션으로 설정하여 이 단어 철자에 따라 Christ Resurrecte Our Soul Sincerely 로 규정하고 그 뜻은 ‘그리스도가 진실로 우리의 영혼 을 부활시키신다’로 풀이했다. 성경 66권의 말씀을 짧은 시간 내에 이해하 고 그 말씀이 오래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경 본문을 여러번 정독하여 이해하고 170여개의 영어단어의 키워드로 키워드 바이블을 엮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1천 6백여년의 오랜 역사에 걸쳐 40명 이 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록한 책으로 온 세계에 널 리 읽히는 우리 인류의 생명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은 1,500년에 걸쳐 히브리어(유대)로 기록 되었고 신약은 헬라어(그리스)로 씌어졌다. 구약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록 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기록이다. 구약에서 인류의 창조와 원리는 EVE라는 키워드로 에덴동산(Eden), 말씀을 거역함 (Violation),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Exile)로 이 세 영어 단어로 내 용을 요약 풀이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영어 단어의 키워드로 성 경을 쉽게 풀이했다. 누구나 쉽게 성경 내용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해 1월에 도서출판 성경문화에서 초판을 찍은 이후 10월에 3판까지 발행한 책이다. 지은이 조성민 박사는 머리글에서 이 책은 신학적 배경이나 개인적 견해를 가지고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며 다만 성경을 처음 대하거나 성경을 읽는 데 그 방대함에 부담을 느낀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성경과 더 친숙 해지도록 엮은 책이라 했다. 책 속에 신구약성경 참고 지도가 들어 있어 입 체적으로 읽기에도 편리한 책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더욱 성령이 충만해 지고 전도에 힘쓰게 되리라 믿는다.
96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다시 쉐퍼를 읽을 때다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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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1 2009-12-17
다시 쉐퍼를 읽을 때다 [콜린 듀리에즈|프랜시스 쉐퍼|복있는사람|2009년]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와 사랑의 필요성 일깨워” 쉐퍼가 다시 대화를 청했던 서신에 칼 바르트는 무척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 다. “당신이 내 평생의 과업을 ‘통째로’ 반박해도 좋습니다……당신이 미 국, 네덜란드, 핀란드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당신의 ‘형사’ 업무를 계속하 고 나를 가장 위험한 이단으로 비난해도 좋습니다. (중략) 나로서는, 형사 의 조사관의 속성을 가진 사람 또는 이교도를 개종시키려는 선교사의 자세 로 나에게 와서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마디 로 거절합니다.” 쉐퍼의 대화 제의를 거절한 바르트 이 시절 쉐퍼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전하고 수호하는 열정적 투사였다. 이 러한 그의 눈에는 바르트의 기독교적 진술이 분 명코 정통 기독교의 것이 아 니었다. 19세 후반부터 몰아닥친 위협적인 자유주의 신학에 나름대로 대항 한 바르트였을지라도 쉐퍼는 그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쉐퍼는 바르트의 편지를 받고서 자신의 투사적 태도에 영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 바른 교리에 대 한 열정은 있으나 그 열정 속에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나 사랑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40(1951년)이었다. 기독교의 충만한 모습은 진리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 리인 동시에 사랑이시다. 그분의 형상인 인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와 사 랑을 드러내야 한다. 쉐퍼는 이 영적 실재가 자신에게 충만히 없다는 사실 을 상당한 시간에 걸쳐 성찰하고 자신의 결핍을 공개적으로 시인한다. 또한 순수한 교리에 몰두하는 많은 신자들에게서 그런 충만함이 드러나지 않음도 간파한다. 이런 삶의 배경을 안고 나온 책이 바로 (1971년)이 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일방적인 진리 투사에서 벗어나 진리와 사랑을 함께 드러내는 복음전도자로 전환했고 향후 라브리 사역도 그런 방향으로 전개된 다. 내가 책으로는 를 통해 쉐퍼를 처음 대했고 그때는 30 대 중반으로 80년대였다. 이 무렵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 뿐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문화 변혁을 꿈꾸며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 을 탐독했다. 쉐퍼와 카이퍼의 책들이 그런 꿈을 꾸게 했다. 이로 인해 한 국 기독교 안에 새로운 흐름이 하나 더 보태진 건 사실이나 문화와 사회를 변혁하겠다던 큰 꿈이 뚜렷한 현실로 드러난 건 아니다. 도리어 지금은 기독 교 세계관 운동이 이전만큼 우리 젊은이들에게 흡인력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다. 여기서 왜 그랬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것은 우리와 쉐퍼 사이에 삶 의 처지가 서로 달랐던 게 큰 이유가 아닐까. 그곳은 근대문명이 활짝 만개 했던 문화권이었고 우리는 이제 막 근대문명권으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그곳 은 기독교 신앙이 역사와 문화 속에 깊숙이 뿌리 내려진 곳이었으나 우리는 아직 기독교 역사가 채 1세기도 못된 곳이었다. 그곳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로 끊임없이 그들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 고 이성을 최종의 권위로 내세우고자 했던 반면에 우리는 그와 전혀 상관없는 이방나라였다. 따라서 쉐퍼의 외침이 우리에게는 아직 절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삶의 양상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경제적으로는 빈부 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지성적으로는 대학 교육과 서구의 수많은 서 적들의 출판을 통해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와 상대주의가 널리 확산된 상태 다. 문화적으로는 반기독교적 성향을 띤 창작 활동들과 대중문화가 점점 늘 어나는 추세요 전통문화를 복원하려는 바람도 거세지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와 천주교와 개신교와 원불교 등 여러 종교가 각축을 벌이면서도 겉으로 는 관용과 평화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은 지난 서양의 기독교 가 걸어왔던 삶의 처지를 더 닮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제 쉐퍼를 다 시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원주의 시대에 걸맞는 의식 필요해 이참에 나는 그의 전집을 구입했다. 80년대에는 그 진정한 가치도 다 모른 채 그의 책 몇 권을 읽은 것으로 끝냈을 뿐이다. 50대 끝자락에 들어선 아버 지로서 영적 혼란기에 접어든 나의 두 아들에게 말해줄 나의 기독교 신앙을 쉐퍼를 통해 다시 정리해 볼 요량이다.
95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사람을 위한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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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4 2009-08-05
기독교는 몸을 긍정한다 사람을 위한 영성 |로드니 클랩,IVP,2006년| 본서를 읽기 전까지는 내 자신의 신체적 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딱 꼬집어 내기는 어렵다. ‘신체’에 대해 무관심 하기 쉬워 정신의 차원에 속하는 지식 획득에는 한껏 열을 올렸건만 정작 그 지식을 담 고 이리저리 나르는 신체적 몸에 대하여는 왜 깊은 생각이 없었을까. 몸은 아무래도 영혼의 거처 정도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몸보다 영혼을 더 우월시 한 그리스 철학이 배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합리성에 치중해 온 근대 교육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는 아닐까. 내가 속한 이천 년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신체적 몸이란 사회적 몸과 분리 될 수 없다고 본서는 주장한다. 신자 개개인은 교회를 떠나 그 존재가 성립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이 개인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익숙 한 현대인에게 는 생뚱맞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 주장에 온전히 동의 한다. 이 주장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 선배들이 가진 ‘신체적 몸’과 ‘인간 의 성’과 ‘성찬’에 대한 어떤 이해들을 본서는 심도 있게 논의한다. 신체적 몸에 관해서 기독교는 몸이 부활한다고 전제함으로써 죽음의 순간까 지 몸을 포기하지 않는다. 육체를 부정적으로 파악한 당시의 세상 철학이나 크게 성행한 영지주의와는 판연히 다른 입장이다. 창조와 성육신과 부활의 교리가 이를 담보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지적인 능력에 너무 치중한 나머 지 사람이 정신만 가진 존재인 것처럼 축소되었고, 몸은 두뇌를 나르는 성가 신 수레로 전락해 버렸다. 긴 역사 속에서 성의 문제를 관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독신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 이전의 주장들과 다른 태도를 칼빈 이 취함으로써 독신이 결혼보다 더 이상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점차 약화되었 다. 그렇더라도 성적 즐거움을 부정하는 유보적 입장이 칼빈에게서 멈춘 것 은 아니다. 오늘에야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기혼자에게 성을 즐기라고 격려하 는 현실인 것을 보면 그러하다. 저자는 성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보인 과거의 유산을 놓고 이렇게 반성한 다. “우리 선조들이 지상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무성(無性)을 칭송하고 그것 을 가지라고 요구한 것은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신학적 오류에 빠진 것이다” (74쪽). 이런 파괴력 있는 성찰이 신학자도 아닌 평신도에게서 나올 수 있다 니 놀랍다. 나는 이 말에 힘주어 밑줄을 그었다. 나의 시각을 새롭고 크게 틔어준 성찰이어서다. 우리의 구원은 구약 때의 것과 비교도 안될 만큼 진전 된, 실현된 종말의 때에 이루어진 것이나 아직도 신체적·성적 욕구에 흔들 리지 않을 만큼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근대 교육의 우산 아래 있는 우리는 합리성과 지적 능력을 크게 중시한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의 몸은 마치 영혼의 명을 받드는 신하인양 격 하되었다는 말이다. 몸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몸에 관한 이러 한 시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의 태도와 실천에도 결핍은 따를 수밖에 없다. 내게 있어서 성찬은 기념의 성격을 띠거나 기억을 돕는 보조 도구로 축소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 몸으로서, 또 한 몸 안에서 성찬에 참여하게 된 다 . 우리의 몸은 성찬으로 중개되는 은혜와 자비에 참여하게 된다. 성찬은 오늘의 여정에 힘을 공급하는 현재의 식사일 뿐 아니라 예비적 식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이 성찬에 참여할 때 유한한 몸이 아닌, 부활 소망을 갖는 몸으로 재확인되기 때문이다. 필자와 동일한 영적 임재라는 성찬관을 나도 가지고 있지만(139쪽), 실제에 서는 기념이나 기억 정도로 축소되는 것만 같다. 성찬에 참여하는 횟수가 적 어서인가. 성찬이 은혜의 수단이기는 하지만 말씀 없이는 성찬 자체로는 아 무 효력도 가질 수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한 인식 때문인가. 나의 결핍을 그런 탓으로 결코 돌려댈 수 없는 노릇이다. 성찬이란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의 참 모습, 곧 함께 나눔으로써 모두가 풍 성하고 충만한 삶을 배로 누리는 그런 세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는 저자의 신앙 인식에서, 나는 분명 비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찬의 본질조차 훼손할 수 있어 더욱이 과거에 멋지게 창조되었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멋지게 회복된 세계로 우리를 편입시킨다는 성찬과는 더욱 거리가 먼 것만 같다. 힘 든 것도 사실이었으나 상쾌하고 복된 책읽기요 글쓰기였다.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chochuseok@hanmail.net
94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하나님의 뜻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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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6 2009-06-11
조주석의 북카페 하나님의 뜻 제럴드 L. 싯처, 성서유니온선교회, 2004년, 376쪽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다양한 가능성 찾아야” 입학 시즌이나 결혼 시즌이 되면 우리의 고민은 온통 어디에 가 있는가. 하 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 여기 가서 묻고 저기 가서 묻는 소동이 벌어진 다. 이 학교냐 저 학교냐, 이 남자냐 저 여자냐 어찌할 줄 몰라 한다. 인생은 늘 선택의 기로에 있어 하나님의 뜻과 관련한 이 두 문제를 빼놓는다면 과연 우리에게 고민거리가 있기라도 한 것인가. 미래의 중요한 결과로 이어질 오늘의 선택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또 작고 사소해 보이는 날마다의 일들은 어찌 할 것인가. 저자인 제럴드 싯처는 하나님의 뜻 찾기와 관련해서 자신의 두 가지 이야기 를 털어놓는다. 하나는 대학 진학 문제요 다른 하나는 고통의 문제다. 처음 에 그는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결국 목사와 대 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40 대 시절에 음주 운전자가 고속도로 중앙선을 넘어 자기 가족이 탄 미니밴을 덮치는 탓에 사랑하는 아내와 모친과 한 자녀를 잃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뜻 찾음에 있어서 실제적이고 깊이도 갖추게 된 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가 사용했던 이전의 방식은 전통적인 것으로서 그에게 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다 그려낼 수 없는 방법으로 확인한 셈이다. 이 방 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가 따라야 할 미래의 구체적인 길로 이해 된다. 다시 말해 저자처럼 하나님의 뜻이 의사가 될 것인가 다른 뭔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만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성경에는 그러 한 하나님의 뜻은 거의 없다. 다만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현재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명할 뿐이다. 그런데 만약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늘 미래의 구체적인 길로만 이해된다 면 오늘의 삶에서는 무엇이 경시되겠는가. 날마다 내리는 작고 사소해 보이 는 결정 대신 중요하게 보이는 미래의 결정에 훨씬 더 집중하고 말 것이다. 내가 의사가 되느냐 아니면 목 사가 되느냐로 말이다. 그뿐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지식도 부정적일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든 당신의 뜻을 숨겨두고 그것을 우리로 찾게 하는 존재로 내몰릴 수 있다. 그래서 시련이 닥치면 그 원인을, 한때 저자가 그랬듯이 하나님께 전 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놓 칠 수 있다. 나아가 앞날에 대한 집착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자신 힘으로 통제하겠다고 덤비게 된다. 물론 도전은 가능하나 통제는 불가능할 뿐이다. 지은이는 의사가 되려 했으나 목사가 되는 다른 길로 들어섬으로써 미래에 대한 자신의 지나친 집착을 버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다른 길이 열려 있다 는 것을 발견하고 자유를 누리게 된다. 또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신비를 인정하고 그에게 닥친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다. 이리하여 구원의 삶에 대한 그의 이해의 폭은 더 넓혀진다. 하나 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참된 자유가 신장되고 더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러면 지은이가 우리에게 권하는 자기 경영의 원리란 무엇인가. 하나님 나 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것의 장점은 신자의 미래가 기계론적 이나 결정론적으로 이해되지 아니하고 인격적으로 관계적으로 이해된다는 사 실이다. 새 사람의 인격 활동이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우리의 선택이 존중되고 또 그것을 우리로 책임지게 하신다. 이런 차원에서 성찰해 볼 때 신학이란 설명의 학문이 아니라 해석의 학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설명이란 자연의 이치를 찾아내어 서술하는 방식이요 해석이란 인과법칙으로 다 설명이 되지 아니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부여되 었다고 전제하는 신학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고 또 그것을 우리로 책임지 게 한다. 오늘날 일반 서점은 말할 것 없고 기독교 서점에서조차 자기 경영서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현실 속에서 참다운 기독교적인 자기 경영을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자기의 행복과 성공만을 자기 경영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그런 기독교 서적들이란, 내 보기에 사이비에 가깝고 아류로 보인다. 무한한 가능성 찾을 수 있어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은 타의 추종을 불 허할 기독교적인 자기 경영 서라고 강력 추천한다.
93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회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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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5 2009-04-15
회심, 개인적인 문제만의 것인가 회심 짐 월리스, IVP, 2008년 “영적 싸움은 다면적이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어” 짐 월리스는 복음주의 좌파로 분류된다.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멘토이기 도 하다. 그는 본서에서 빈곤과 폭력(전쟁)의 문제를 회심과 연관시켜 아주 깊이 다룬다. 죄는 사회적, 정치적인 것도 포함해 미국의 20세기 복음주의가 이 두 문제를 신앙의 영역에서 진지하게 취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반성한다.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관행 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식으로 들어오는지에 대한 설교가 미국 교회에 서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왜 그랬는가. 부와 권력에 대한 주류 사회 의 가치관을 복음주의자들이 거부하지 않고 자신들의 것으로 삼은 까닭이다.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성경은 부와 빈곤에 관한 주제를 상당히 많이 다룬 다. 이 주제는 우상숭배 다음으로 빈번히 나온다. 신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다룬 데만 500곳 이상이며 평균적으로 열여섯 구절마다 한 번씩 등장한다. 빈곤이란 단지 게으름의 결과나 경쟁에서 도태됨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이 나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불의에서 자라난 것이다. 탐욕이라는 우 상숭배가 낳은 자본주의 불량품이다. 전쟁 폭력도 마찬가지다. 불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평화와 맞서는 반대 편의 것이다. 군국주의나 제국주의는 자국의 이익과 민족국가 확대라는 명목 으로 전쟁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당한 전쟁이 아니라 침략 전쟁 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도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소환될 수 있다. 이것이 저 자가 말하는 영적인 문제인 셈이다. 경제 사회적 문제로서 ‘빈곤’(3장)과 정치적 문제로서 ‘폭력’(4장)은 회 심과 관련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회피하고 있는 것들이다. 돈과 권력 과 성공에 몰두해 있는 그리스도인은 빈곤과 폭력의 문제 앞에서 회심할 준 비가 되어 있지 않다. 빈곤은 시장경제에서 밀려 한쪽으로 저만큼 물러난 자 들의 몫이요 전쟁(폭력)은 패권국이 어느 국가든 자기 마음대로 다루기 위 해 사용하는 강자의 사악한 수단이다. 복음 전도를 통해 수백만이 회심했건만 이 두 문제에 대한 급진적 회심은 미 국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왜 그런가? 복음주의가 죄를 단지 사적인 문제로 국한시켜 생각해 왔기 때문인 것이다. 나눔이 없고 평화를 세 우지 못하는 것은 죄를 사회적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리스에 따르면 죄(도덕적 악)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닌 사회적 정치적인 것 이기도 하다. 이것의 장점은 한국 보수주의 교회가 간과해 온 ‘세상’이라 는 문제를 더 정면으로 보게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교회의 원수를 ‘육신’과 ‘세상’과 ‘마귀’라고 지목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 치게 육신만 영적 전투의 대상으로 여겨 왔다. 그 까닭은 죄의 문제를 개인 의 문제, 즉 개인 구원의 문제로만 좁혀 생각해 온 까닭이다. 그래서 사회적 이고 정치적인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세상은 보지 못하고 기피해 온 것 이 아닐까. 물론 회심이란 빈곤과 폭력의 문제와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세계 관을 거부하는 자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돌아서는 지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두 세계관에서 흘러나오 는 많은 지식 체계에 감염되 어 있다. 따라서 회심은 지성의 차원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나를 지배하는 기존의 지식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싸움은 다면적이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월리스 식의 회 심 논의가 이 시대의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지만 회심이란 그 가 말하는 실천의 문제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때 제도권 교회를 ‘배교한’ 교회라고 하대했던 저자는, ‘참된 교회’ 가 그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생기는 좋은 전통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긍 정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열심가들이 한때 교만의 함정에 빠졌다가 건짐 받는 각성이 아니겠는가. 회심은 지성의 차원에서도 일어나야 이 시대의 교회를 안타까워하고 열렬히 비판하는 자일진대 월리스의 삶에서 배울 점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서평_조주석 목사|합신 출판부
92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생각을 담아 세상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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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7 2009-02-25
조주석의 북카페 은혜 없는 사회 변혁 가능한가 생각을 담아 세상을 보라 손봉호|286면|노잉힘|2008 “오로지 자신의 책임 다하는 것에 역점 두어야”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한국 의 전통적 세계관이 전혀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또 세계화되고 있는 현대 문 화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형성된 것도 아니어서다. 손봉호 교수의 얘기 다. 그럼에도 왜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살려고 애써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고 통이 우리 사회에 늘 현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은 악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온다. 가뭄과 홍수나 지진과 해일이라는 자연 의 악뿐 아니라, 욕망과 야망과 폭력과 살인이라는 온갖 종류의 인간의 악으 로부터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현대인은 이전 시대보다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고 익명적이어서 훨씬 더 고통당할 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다시 주장되는 기독교적 세계관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사람이 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문화의 발전과 긴밀히 연계된 까닭이다. 달구지 모는 사람이 잠깐 졸았다 해 서 큰일 날 건 없었지만 버스 기사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가 잠깐 조는 사이에 대형 인명 사고가 날 수 있어서다. 이런 예들은 부지기수다. 과학 기 술이나 문화의 발전으로 우리가 더 편리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류의 불행도 훨씬 더 커졌다. 그런대도 우리의 책임 의식은 그만큼 자라나 지 못한 상태다. 그러면 이러한 악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나쁜 머리인가, 나쁜 제도인가, 좋 지 못한 기술인가, 유한한 인간 존재인가. 물론 이런 것들도 원인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근원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면 인간의 도덕 적 악이란 인간의 의지와 늘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쁜 머리나 나쁜 제도나 인간의 유한성과 같은 객관적 사실의 문 제는 그 근원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존재론적 설명에 대해서, 칸트 는 “존재에서 당위가 도출될 수 없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거부한다. n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놓고 그 최후 책임을 유한한 인간을 만든 창 조자에게 결코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는 데서 발생 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 하고 범행을 저지르며, 더 근본적으로는 거짓 신들을 숭배하고 이데올로기 를 추종한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을 가리켜 성경은 ‘죄’라고 한다. 이 세계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세계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고대 신화에 따르면 이 세계는 사람이 아기를 낳고 짐승이 새끼를 낳듯 이 우주가 생물학적으로 생산(generation)된 것이다. 신들이 우주를 생산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르게 서술한다. 토기장이 가 옹기를 만들고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를 만들어 내듯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제조(fabrication)해 내신 것이다. 이 제조의 방식을 옛날 원시 인들은 우리처럼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오직 무엇이 새롭게 생기는 것 은 짐승이 새끼를 낳고 사람이 아기를 낳았을 때 경험해 본 것뿐이다. 그래 서 성경의 우주 창조 이야기는 정말 독특하다. 인간의 고통은 인류 사회 속에 늘 존재해 왔다. 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 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최전선에 진보주 의자들이 늘 있었다. 그들은 기득권 보호에 앞장서는 보수주의자들을 비도덕 적이라고 비판하고, 그 상황을 바꾸는 사회 변혁 자체를 도덕적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수 없다. 왜냐하면 우 리는 진보주의자들과는 달리 도덕적 악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야 지은이에 따르면 사회 개혁이란 거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또 성공한 다 해도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따라 서 자랑할 것도 없다. 그냥 자신의 책임만 다할 뿐,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 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그는 ‘선지자적 비관주의’라고 이 름 붙인다. 내가 보기에 ‘제조’, ‘고통’, ‘변혁’이라는 세 개념으로써 기독교 세 계관을 새롭게 풀어내어 기독교 사회 변혁을 도모한 이야기가 구체적인 실 천 사항으로 확대되지는 않아 아쉬움은 남지만 노학자가 후대에 남긴 선물 인 건 분명하다.
91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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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48 2008-12-31
하나님에 관한 언어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들 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몬|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복있는사람|2008 년 서평| 조주석 목사/합신 출판부 실장 "교회 공동체는 윤리 위에 우뚝 서 있어야" 기독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서양의 기독교는 지금 이에 대한 답 을 선명히 제시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식이다. 그 책임의 소재를 이렇게 저 렇게 따질 수 있겠지만 그 일차적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것인가. 교 회의 신학자들이 아니겠는가. 신학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학문인 까닭에 그렇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도전받고 있어 기독교는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 기독교는 초기 시대에 그런 모습으로 존재 했었다. 그런데 모진 박해를 지나 기독교가 국교로 용인된 콘스탄티누스 시 대로부터 상황은 확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사람들이 이교 신앙 대신 기 독교를 자신들의 종교로 가져 야 로마 제국이 잘 굴러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 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고백 없이 교리의 동의만으로도 교인이 될 수 있 었다. 이것의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복음은 우리 자신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그런 데 그만 새로운 삶 대신에 이교의 지식에서 기독교의 지식으로 바꾸라고 요 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는 복음을 지적 전환을 요구하 는 것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글쓴이들은 이러한 '콘스탄티누스적 전제'가 기 독교를 삶의 문제에서 지적인 문제로 바꾸어놓았고, 현대의 신학자들도 이 문제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기독교는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복음이요 다 른 하나는 교회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며, 이 구원이 거룩한 삶으 로 이어져서 그것이 사회 형식으로 드러나면 교회가 선다. 이처럼 복음과 교 회는 떼래야 뗄 수가 없다. 먼저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역사와 문화를 둘로 가른다. 시간과 질의 측면에서 그것들을 딱 갈라 한 쪽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 께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우리 문명을 끝내 "셨기 때 문이다. 너희 세상 나라는 이제 끝났다, 너희의 문명도 끝났다, 다만 최후 의 종말만 남겨두었을 뿐이다. 그러니 속히 너희가 속한 세상에서 나와 예수 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강권하신다. 이런 복음 메시지야말로 인류에게는 급진 적인 과격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복음으로 세워지는 교회는 성화의 차원에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그 누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신념으로 형성된" 신앙인 공동체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세련된 신학 사상이라 해도 하나님에 관한 언어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대신할 수 없"는 노 릇이다. 이래도 교회가 세상 단체와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불신의 눈길을 보내는가. 그 큰 이유는 뭘 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섬기는 그분을 본받는 데 실패했기" 때문 이다. 복음이 요구하는 자기 부인의 삶, 존재 자체가 낮아지는 삶, 그리스도 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삶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서는 구원의 최종 목적지를 "하나님과의 참되고 완전한 교제"라고 풀어낸다. 이 교제는 사귐이다. 하나님이 나를 깊이 알고 내가 하나님을 아 는 친밀함이다. 그래서 윤리가 필요하다. 그 친밀한 관계는 윤리로 유지되 기 때문이다. 윤리가 실종되면 개인이든 사회든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기 때 문이다. 산상설교는 예수의 윤리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데,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 듯 영웅적이고 윤리적인 초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 교 공동체를 세우라고 주신 하나님 나라의 헌장이다. 교회의 성화를 지향하 는 예수의 윤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다. 이 공동체 내에 서 우리는 세상의 핍박과 환난에 맞설 수 있고 이 세상을 본받지 아니할 힘 을 얻는다.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 회복이 우선 기독교는 나에게 무엇이었는가. 이해의 문제였는가 새로운 삶의 문제였는 가. 본서는 내개 이런 원색적인 질문을 던졌고, 나의 기독교를 다시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갖게 했다.
90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십 자 가_시월의 한 회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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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1 2008-10-22
시월의 한 회개 이야기 십 자 가 김응국 지음 | 규 장 | 2008년 “칭의 역시 과정적 경험 포함하고 있어” 교회 부흥회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이 회사에서 터졌다. 어찌 그런 일이 발생 할 수 있단 말인가. 규장과 갓피플의 전 직원은 2007년 4월에 소위 ‘방언한 다’고 하는 종교적 신비 체험을 하였다. 종교적 신비 체험한 회사 직원들 나는 이 방언이라는 말을 신비한 체험이라는 말로 대체하고 싶다. 왜냐하면 신학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어이며, 계시 시대의 방언과 오늘의 그 런 현상이 동일한지 결코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체험으로 그 들에게서 초보적 열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삶의 변화에까지는 이어지지 않았 다. 종교적 신비 체험이 거룩한 삶을 담보한 것은 아니다. 왜 그랬을까? 거룩한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 종교 체험. 진정한 설교자라면 이런 현실에 만 족할 사람 아무 도 없을 것이다. 김응국 목사와 회사 대표는 말씀을 통해 삶 의 변화 없는 직원들이 깨우침 받기를 원했다. 그해 10월부터 저자는 매주 금요일 직원 부흥회를 통해, 또 은혜가 퍼부어 질 때에는 요일을 가리지 않고 매일 아침 10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십자가 의 복음을 전했다. 책이나 만들고 장사나 잘 하면 될 회사에서 그런 사건을 도모한 것이다. 2007년 10월 23일 화요일 아침, 설교자로부터 터져 나온 공개 자복은 회사 대표는 물론 일반 사원으로까지 번지는 회개의 봇물로 이어졌다. 사건이 터 져도 정말 확 터진 것이다. 모든 업무가 중단되었다. 통회 자복은 오전 7시 부터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회개로부터 심령의 부흥은 시작한다. 회개 없는 교회 부흥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뻔히 다 아는 진실이다. 이게 어렵다. 본서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복음이 필요하 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얻으면 전인적 구원 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 물음은 죄가 무엇인지 알아 야 풀린다. 모든 죄의 뿌리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자 신의 삶에 간여하는 것을 여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죄에 대한 저자의 이러 한 접근은 참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교리적 접근이기보다는 인격적 총체적 접근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밑바닥을 친 인생이라야 따뜻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영적 허영기로 가득 차 있는 한 그 따뜻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사람은 없다. 그 자리가 편해서다. 자기 부인은 십자가 복음을 믿는 데서 창조된다. “내 자아를 위해 살고, 내 자아를 놓치면 죽을 줄 알고 나를 사랑하며 살아온 이 돼지 냄새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목 박아라.” 설교자의 단호함이 폭력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사 람들 가운데 자아가 죽지 않은 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이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123쪽). 생사가 달린 치열한 전투에서는 직선적 인 간단명료한 말만 오갈 뿐이다. 저자의 많은 표현들이 내게 그런 식으로 들렸다. 저자가 단언한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이란 로마서 6:6에 근거한 것인데, 이 말씀은 신앙 초입부터 죽는 날까지 확인 해 가야하고 믿어야 할 복음 내용 이다. 의롭다 함도 일순간의 사건이자 과정적 경험을 모두 아우른다고 성경 은 가르친다. 또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고전 3:1)이 있다 고 기록한다. 저자가 이것들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 단언은 삶의 변화가 없는 이들 에게 이름뿐인 교리적 구원 인식이 아닌 실제적 구원을 촉구하는 준엄한 사 자(獅子)의 복음일 것이다. 특유한 저자 표현대로 온유한 어린양의 복음이 아닌 무서운 사자의 복음 말이다. 역사의 진정성을 상품으로 바꿔 시장에 내놓았다고 타박하는 이들도 있다(복 음과 상황 9월호). 타 출판사가 냈더라면 그런 의혹쯤 면했을 터이니 말이 다. 그게 어찌 됐든 나는 친구인 저자를 옹호하고 싶다. 그 까닭인즉, 신학 교 3학년 때 나는 친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깊이 알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 다.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최근 전화 통화에서 그 이야기했더니 지금도 기 억하노라고 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부활 증거해 그가 바라는 소망은 너무 분명하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해져야 생명 없는 교인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나의 소망도 다를 바 없다. 이 아름다운 시월의 이야기를 우리 주님은 또 써 가실 테니 말이다. 서평|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실장
89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은혜의 재발견-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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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84 2008-08-13
은혜의 재발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IVP 1999년 “교회는 결코 구원의 문을 닫으면 안돼” 지난해부터 이끌어온 책읽기 모임에 3권의 도서를 추천했다. 그 중에 얀시 의 책도 하나 넣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이다. 추천자인 나 도 읽어보지 아니한 책. 흔한 대중서 정도로 얕잡아 본 게 미독서의 가장 큰 이유다. 그게 어찌 됐든 그 모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읽어내려 갔다. ‘은혜’에 대한 이해도 높여야 결론부터 말하라면 ‘은혜의 재발견’이라는 개혁자 정신이 잘 배어나는 어 느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독자는 기독교의 핵심인 은혜 가 ‘아, 이런 게로구나’라고 공감할 것이다. 주변의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의외로 은혜니 믿음이니 사죄니 하 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들에 대한 부실성이 적잖게 드러나는 것을 본다. 얀시 는 그 러한 핵심 문제를 꺼내어 벽창호 같은 미국 기독교 대중들을 향해 많 은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기독교가 대중화되고 문화화 된 탓으로 은혜를 상실한 교회이니 현실을 잘 읽어낸 기획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질문 형태로 바꿔보면 이렇다. 은혜 없는 교회에 서는 무엇이 난무하는가. 값없이 주시는 것이 은혜인데 사람들은 이 은혜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가.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 해서 은혜의 남용을 허용 하는, 정의를 외면하는 종교인가. 교회가 정부와 친해지면 교회는 무엇을 상 실하는가. 이런 문제들은 교회 역사 대대로 중요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위협하는 건 이단이나 세속주의만은 아니다. 은혜 없는 교회가 더 치 명적일 수 있다. 버젓이 신앙의 이름으로 나의 영혼을 옥죄고 억압할뿐더러 생명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다. 비난과 정죄와 자기 의만 무성하고 은 혜는 자취를 감출 것이니 말이다. 율법주의나 도덕주의가 그러한 위협이다. 과거에는 금주나 금연 같은 금기사 항이, 오늘에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서 낙태와 동성애 문제가 은혜를 사라 지게 하는 것들이라고 얀시는 안타까워한다 . 그는 자신이 보고 겪은 그런 경 험들을 이 책 구석구석에 쏟아내었고 독자들도 공감이 갈 이야기들이 많다.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는 하루 품삯처럼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 혜는 일등이냐 꼴찌냐를 따지지 않는다. 은혜는 산수가 아니다. 은혜란 하나 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은혜 는 창녀도 세리도 강도에게도 주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척 황당해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이다. 사람의 눈에는 저 런 것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니 하겠지만,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 요 은혜다. 이런 은혜가 넘쳐나야 죄인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가볍게 옮기지 않겠는가. 우리가 정작 구원의 문을 막고 있다. “은혜로 치유된 눈”이 필요하다. 이것의 필요성을 얀시는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로 독자를 설득한다. 신학교 교수요 목사요 기독교 영화 제작자였던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나중에 동성애자였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 그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대해 주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과연 내가 그였다면 그렇 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두려움과 의문을 갖게 하였다. 나의 눈은 치유되 지 못한 사팔뜨기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쯤해서 강하게 드는 의문 하나를 이제는 풀고 넘어가야 한다. 은혜가 값없 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은혜의 허점을 악용하려는 약아빠진 자들에 대해서 성 경은 아무런 방비책도 갖추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다. 로마서 6-7장에 나오는 죽음의 예화(6:1-14), 종의 예화(6:15-23), 결혼 예화(7:1-6)가 다 은혜의 남용을 단호히 경계한다. 요사이 한국 보수주의 교회 일각에서는 정부와 친해지려고 많은 제스처를 보 내고 있다. 얀시는 이런 현상을 두고 뭐라고 말하는가. 교회가 정부와 친해 지면 친해질수록 손해를 보는 곳은 교회란다. 늘 비은혜의 법칙으로 움직이 는 정치는 은혜를 내놓으면 권력을 주겠다며 유혹해 온다. 그리고 교회는 이 유혹에 저항하지 못한 때가 많았다. 이게 역사의 증언이다. 은혜 포기할 때 가장 위험해 이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안 칼빈이 그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 여간 애썼는 데, 이제 그 후예들은 다시 복원시키려하다니 달콤한 권력 맛이 아직은 성 에 차지 않은가 보다. 서평_조주석 목사/합신출판부편집실장
88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십계명_일상에서 하나님 증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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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8 2008-07-02
일상에서 하나님 증언하기 십계명 스텐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몬 복있는사람 2007년, 218면 “십계명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교본” 미국의 어느 판사가 자신의 법정에 십계명을 걸어놓으려다 반대에 부딪쳐 그 만 둔 일이 있다. 자신의 법정에서 집행되는 법이 하나님의 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려 했다. 십계명은 일반 윤리개념 넘어서 하지만 그의 행동은 십계명의 정당한 위치를 분명히 놓친 처사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결코 하나님 예배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이라는 원 제목도 그것을 지시한다. “하나님은 십계명 속에서 끊임없이 우 리에게 오시고, 우리 역시 그 계명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 말은 십계명이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 다는 뜻이다. 그래서 값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십계명이 결코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들에게는 십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은 될 수가 없다. 단지 도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십계명은 오늘의 교회가 어떠한 사회가 되어야 할지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말 씀이다. 교회는 거룩한 사회다. 여기서 ‘거룩하다’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아주 탁월하다는 뜻이 우선적이지 않다. 하나님을 인정한다,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의미가 더 우선한다. 그래야 교회가 이 세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 화를 갖는다. 1-4계명이 요구하는 바가 바로 그 점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 을 만들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 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이 계명들이 요구하는 바 는 무엇인가. 하나님 예배가 아닌가.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요구가 아닌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느 한 구석에서만 요구되는 삶의 내용이 아니 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요구되는 바이다. 그래서 십계명은 종교의 영역에서 윤리의 영역으로 나아간 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사회가 어떠해야 할지를 지시할 때 하나님께만 고정시키지 않는다. 나와 늘 곁에 있는 이웃을 바라보게 한다. 5-10계명이 정확히 그런 도덕 내 용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이 개인 수양의 차원의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너’를 대접할 때 ‘나’의 나 됨을 결실케 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너’를 배제한 채로는 결코 기독교 사회 윤리는 실천될 수가 없다. 우리 는 이 교훈을 2007년 이랜드 사태에서 정확히 확인한 바 있다.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를 떠나서는 결코 설 수 있는 구석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러한 경제 구조가 우리의 욕망을 한껏 부추긴다. 그 욕망은 무질 서한 것이다. 어느 누구라고 이 탐욕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마지막 계명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른 어느 계명보다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성경은 탐욕을 우상숭 배라고 정죄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하나님 예배는 종교의 영역이 아닌 윤리 의 영역에서도 강하게 요청되는 삶의 내용이다. 우리는 자기 계발이라는 명 분 아래 내 안에 탐욕을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늘 돌아 보아야 한다. 서구 사회는 우리보다도 훨씬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려온 사회다. 이 러한 그들이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한번 살펴보자. 자신들의 삶 전 영역에 서 하나님을 철저히 몰아내지 못해 절치부심한 사회였다. 이런 세속화 작업 이 그들의 문명사적 과제요 사명이었다. 학자나 문학가나 예술가는 물론이 고 신학자들조차 그 일에 혼신을 다해 몰두했다. 이를 통해 비로소 신에 버 금가는 자유를 구가하는 근대인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 토록 자랑하는 근대적 특징이다. 하지만 십계명은 우리에게 이런 근대적 인간형을 추구하라고 요청하지도 않 는다. 불교나 유교를 통해 빚어지는 전통적 인간형도 추구하라고 하지 않는 다. 그것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형을 추구하라고 요청한다. “십계명은 인류 전체에 주어진 지침이 아니다. 십계명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누구 의 소유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현세의 문화에 대항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삶 의 방식이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명확히 해야 십계명을 오늘의 언어로 이렇게 탁월하게 해석해 낸 글을 찾기 어려운 시대 에 본서는 나의 지성에서 상당한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chochuseok@hanmail.net
87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강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복종_윤리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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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1 2008-05-28
강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복종 조주석 목사_합신출판부편집실장 “교회조차 자아 발전 욕구로 변질되고 있어” 드라마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김수현의 ‘엄마가 뿔났다’를 재미나게 시청 한다. 세 자녀를 둔 한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이 드러내는 삶의 방식에 대하 여 깜짝깜짝 놀란다. 이것은 두 세대간에 갈등이 있다는 증거다. 변화되고 있는 전통적 가치관 그 갈등은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한 부모와 현대적 삶의 방식에 익숙한 자녀들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다. 따라서 그 이면에는 전통적 윤리관과 현대 적 윤리관의 충돌이 존재한다. 물론 이야기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해소하 는 방식을 통해 세대간에 이해하고 조화하라고 설교한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만약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그것 을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기로 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증발될 것이 다. 그러 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웰스의 책을 따라 읽으면서 그런 문제들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확인해 보 자. 그는 자신의 저술 의도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한다. “이 책은 미국 사회 에서 윤리가 붕괴되는 현실과 이런 현상이 오늘날 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에 초점을 맞춘다.” 윤리는 삶의 영역에서 어디쯤 위치하는가. 그것은 제3의 영역에 속한다. 법 과 자유 사이에 존재한다. 법은 인간을 규제하고 강제하는 반면에 자유는 인 간의 자기만족의 욕망에 열려 있다. 우리가 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을 땐 그만큼 사회는 경직되고 자유는 줄어 든다. 반면에 자유가 확대되면 우리의 삶은 방종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윤리 는 이와 달리 법과 규제를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부과해서 실천하는 영 역이다. 따라서 보스턴대 총장 존 실버가 말한 대로 윤리는 “강제할 수 없 는 것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이러한 윤리가 왜 실종되었는가.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웰스는 그 이유를 현대문화에서 찾는다. 현대문화는 개인의 반경을 엄청나게 확장시켰 다. 전통 사회보다 선택의 기회를 훨씬 더 넓혀 놓았다. 예컨대, 우리는 수많은 상 품 속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수많은 직업 속에서 어느 하나의 직업을 골라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배우자 하나 를 택해야 한다. 남성이면 어떤 남성이 되어야 하는가, 여성이면 어떤 여성 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개발하기 위해 뭔가를 선택해 야 한다. 이처럼 전통 사회보다는 선택의 기회가 훨씬 더 확장된 문화 속에 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문화적 변화로 인해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나 자아관은 크게 달 라졌다. 전에는 삶의 일관성을 미덕으로 생각했지만 요새는 자아 해방을 미 덕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에 대한 인식도 ‘인격’에서 ‘개성’으로 바 뀌었다. 인격은 훌륭하거나 나쁘지만 개성은 매력적이거나 설득력 있거나 사 람의 마음을 끌게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도야해야 할 윤리 덕목 대신 자신 의 이미지로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자기표현이나 자기만족이 나 자기실현이 중요할 뿐, 헌신이라는 옛 덕목은 내팽개쳐진다. 그뿐 아니다. ‘인간 본성’보다는 ‘자아’를 더 강조하는 문화 현실이 되 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인간 본성’이 있다고 강조한 과거의 생각 에 서 벗어나 사람마다 서로 다른 각각의 ‘자의식’이 있음을 더 중시한다. 인 간 본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것이지만 자아는 순전히 인간의 영 역 속에서만 논의되는 현대적 술어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미국 사회에서는 광고와 심리치료가 가장 인기를 누리 고 있다. 이것이 윤리의 세속화를 재촉했다. 삶의 중심에 계시던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아가 등극한 것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출 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는 회개는 사라지고 내면 자아 의 벌거벗음을 느끼는 수치심만 위로 부상한다. 하나님 떠난 인간, 자아 부각돼 이것이 바로 현대문화가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타격을 입힌 윤리 실종의 핵 심이다. 앞에서 말한 그 드라마의 메시지도 우리에게 이런 윤리 실종의 도래 를 은연중 알리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교회에게도 유효하다고 본다.
86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사도신경, 송영으로서 신앙고백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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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3 2007-12-13
조주석의 북카페 사도신경, 송영으로서 신앙고백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강영안 지음|IVP|293쪽|2007년 서평_조주석 목사|합신 출판부 실장 군복무 시절에 각인된 한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이 책의 지은이가 사병 식당에서 아 침 식사 때 칸트의 ‘프롤레고메나’를 독일어 원서로 읽고 있던 모습이었다. 대학에 서 철학을 공부한 나였지만 그 책을 번역서로도 읽어보지 못한 내가 아니었던가. 그는 얼마 있다 제대했고 계속 철학을 공부하여 대학 교수로 재직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 다. 감동 없이 암송하는 사도신경 이참에 그가 사도신경 첫 문장을 강의하여 책으로 펴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니”라는 고백을 강의한 것이다. 이 한글 고백은 라틴어 원문의 단어 배열과 달라, 지은이는 이렇게 옮긴다. “아버지이시고, 전능자이시고, 천 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 어느 번역을 취해도 내용에는 빠진 것이 없지만 후자의 번역이 원문의 순서와 더 가깝다. 이 첫 문장은 하나님을 아버지, 전능 자, 천지의 창조주라는 세 요소로 신앙을 서술한다. 지은이의 접근 방식은 아주 실제적이다.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큰 문제들을 꺼내어 공 론화하는 식이다. 원래의 취지가 망각되고 있는 사도신경의 문제(제1강), 팽배한 무신 론의 문제(제2강), 여성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하나님의 호칭 문제(제3강), 전능한 하나 님이 허용하시는 고통의 문제(제4강), 기독교 안에서 창조와 진화를 이해하는 문제(제5 강) 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때 상대의 견해를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에서 인격적 학문적 성숙성이 엿보인다. 눈에 띄는 몇 가지를 들여다보자.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이 그렇고, 길선주 목사도 그 랬으며, 아버지의 폭력과 박해 경험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 어려워하는 사람 들도 있다. 이 모두 하나님의 호칭 문제와 관련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나 여성적 이미지로 그리는 구절들도 있다. 더 나아 가 칼빈 선생이 이사야 46:3을 주해하면서 교회사 전통에서 매우 드물게 하나님을 ‘아 버지와 어머니’라고 말한 것조차 감추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 불러야 할 이유는 서술어로 사용된 비유적 용어가 호칭으로는 결코 사용될 수 없다 는 주장이다. 예컨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요새라 고백했다고 해서 서술어에 해당하 는 반석이나 요새를 호칭으로 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껄끄러운 문제도 다룬다. 창조와 진화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안에 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이 세 견해 모두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지식을 얼마만큼 수용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그 경계는 갈 린다. 철학 교수이자 고신측 장로로서 지은이는 과학적 지식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입 장이다. 흔히 ‘진화론적 유신론’이라 비판받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이 대다수인 한국교회 풍토에서는 대단히 도발적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재빨리 그를 재단하려 들지 말고, 천동설로 지동설을 억 압하고 단죄했던 중세 교회의 실패를 한번쯤 떠올려 본다면 그의 논의는 신중히 검토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일 예배 때마다 나는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고백한다. 이제 그것은 너무 익어 단순한 암송에 가까운 때가 더 많다. 이 느슨한 나의 태도를 본서는 처음부터 여지없이 두들 겨 팼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 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사랑의 고백이요, 찬양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말입 니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의 주장에 크게 공감했을 뿐 아니라 해이해진 내 영혼을 다 시 추스르기도 했다. 나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라도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당당한 만큼 실려도 갖춰야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이요 송영이라고 주장하고서도 이 기조 를 일관되게 유지한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지면을 변증하는 데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 다. 왜 그랬을까. 변증의 목적은 우리의 고백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내어 믿음을 더 공고 히 하려는 데 있지만, 송영이란 예배에 속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변증을 통해 우리가 송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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