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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no image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_서평 조주석 실장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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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5 2005-08-18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 토니 사전트,황영철 옮김,IVP,신국판,480쪽 서평| 조주석 실장_합신출판부 20세기 개혁신학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는 누굴까? 로이드 존스라고 에밀 브 루너(1889-1966)는 꼽는다. 이런 칭송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많은 설교학 자들과 비교할 때 소수 입장에 선 설교학자로 분류된다. 왜 그런가? 이 궁금 증을 풀어줄 책이 바로 일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에 앞서 이 책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왔고 또 로이스 존스의 삶을 간략히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교회에 대 해 관심이 많은 저자인 토니 사전트는 자신의 책이 이들 교회의 설교자도 염 두에 둔 것이라고 밝힌다. 그 까닭은 이 지역에서 성경적인 설교에 대한 욕 구가 강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활동도 하고 목격도 해서 감지한 것이라 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가 본서를 펴 낸 것인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쓴 로이드 존스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 이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1899년 웨일스에서 태어나 목사로 부름받기 전에 의학박사와 영국 왕립의과대학 회원이 된다. 정규 신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지만 28세에 목사가 되었고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40세에 웨스트민스터 교회로 옮겨 부목사로서 켐벨 몰간 목사와 동역을 한다. 그후 30년 동안 그곳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했고 82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다.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로이드 존스는 왜 설교학자들 중 소수 입장 에 선 사람으로 분류되었는가? 그것은 설교가 성령의 기름부음에 기초를 두 어야 한다는 견고한 확신 때문이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설교자가 늘 받아 야 능력이요 이 능력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고 줄곧 강하게 주장했다. 왜 이 렇게 주장한 것인가? 설교를 할 때 성령의 역사는 옆으로 제쳐둔 채 계획을 수립하고 설교의 체제에 초점을 맞추는 설교자들의 허점을 여지없이 간파했 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설교학은 철저히 성령론에 의존한 것이 되었고 이 런 이유로 그는 소수파에 선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그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50세 때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 했다고 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한 체험이다. 이 체험을 그는 성경과 교회 사를 통해서 확인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불굴의 확신을 결코 굽히지 않은 채 크게 외쳐댔다. 물론 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가리켜 중생의 사실과는 다른, 별도의 성령세례의 체험이라는 그의 주장은 계속 논란거리지 만 설교에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 사실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 기여 로 보인다.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 과 큰 확신으로 된”(살전 1:5)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주장은 오늘도 여전 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설교는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 사실 여기 에 나의 고민이 웅크리고 있다. 이제 목사고시를 목전에 둔 나다. 만감이 교차된다. 신학교를 졸업한 이래 24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던 7~8년, 그 후 목 회 소명을 확인하겠다는 열정 때문에 평교인으로 산 14년, 소위 황금기를 그 렇게 보냈다. 소명의 확신을 튼튼히 하고 싶었으니 누구 를 탓할 노릇도 못된 다. 그럼에도 스스로 진단해 보면 빈틈은 여기저기 많아 보인다. 그 구석을 일일이 거론하라 한다면 또 부끄러울 뿐이다. 소명의 확신이란 아무리 확인한다 해도 만족할 만큼 되지 못한다는 옛 선배 들의 지적은 참으로 적확하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렇게 내세울 게 없고 또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니 감수해야 할 불편도 한두 가지 아니다. 낭비 같았던 삶이었을지라도 그 허물쯤은 덮으시고, 목사의 진정한 권위가 흘러나 올 수만 있다면 좋겠다. 목사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교회를 법적으로 잘 다스리는 데서 나 오는 것인가? 아니면 신령한 양식을 잘 먹이는 데서 나오는 것인가? 신령한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이 풍부하게 좋은 꼴과 같이 나와야 한다. 이것으로 써 목사의 권위는 드러나는 것이고 소명도 입증할 것이다. 몇 날이 되든 몇 년이 되든 그러한 목사로 서나가기를 또 빌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64 no image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_서평 조주석 실장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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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9 2005-07-22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 인생의 격조 높은 고전이 된 루이스 루이스 마르코스| 최규택 옮김| 그루터기하우스| 375쪽 C.S. 루이스는 삶의 선이 아주 뚜렷하다. 이러한 그를 잘 소개할 욕심에, 전 기와 자서전을 먼저 두어 권 읽었으나 성에 차지 않았다. 한발 더 들여 놓고 서, 그가 쓴 신앙서적도 몇 권 내리 읽었지만 머리에 그려지는 그림은 별로 선명치 않았다. 한두 권 읽어 뭔가 해보려 했던 내 안이한 태도에 구멍이 뻥 뚤린 셈이다. 이러던 차에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을 읽으면서 루이스 의 전모도 서서히 드러났고 이 정도면 되겠다는 확신도 섰다. 지은이인 루이 스 마르코스는 휴스턴 침례대학의 영문학과 교수이다. 그는 루이스 전문가답 게 간략한 전기뿐 아니라 그가 씨름한 주제들까지 몽땅 한 책에 다 담는다. 책값 이상의 몫을 다하는 셈이다. 크게 둘로 구성된 이 책은, 먼저 루이스의 일생을 짤막하게 보여준다(1장). 그의 일생은 여기서 이성과 직관, 사랑과 고통의 싸움터로 그려진다. 이렇 게 살핀 다음, 본격적으로 그가 씨름한 주제들을 차례로 배열한다(2~6장). 즉 과학(2장), 뉴에이지(3장), 악과 고통(4장), 예술(5장), 천국과 지옥(6 장)이라는 씨름판이 때론 재미있기도 하고 때론 지루하기도 했다. 루이스의 많은 책들을 거론도 하고 지은이가 직접 씨름판에 나와 자신의 통찰과 시각 을 겹쳐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통찰과 서술이 간간이 식상한 구석도 있었지 만 루이스가 평생 무엇과 씨름했는지 금방 알 수 있게 한 친절과 노고는 결 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씨름판에도 등장할 수 있는 살기등등한 적수로 여전히 상존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유년시절에 장로교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이 유년시절은 이성 과 직관의 전쟁터였고, 중등학교시절은 이성의 벽을 차곡차곡 높이 세우는 시기였다. 즉 근대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기독교 신앙을 송두리째 상실 해 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대학시절로 이 어지고 그곳에서 가르치는 옥스퍼드 시절은 이성의 벽을 허물고 다시 유년시절의 기독교로 선회하는 역전의 시기 가 된다. 루이스의 삶에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난 것인가? 유럽의 전형적인 지식인이 된 그가 회의주의와 완고한 무신론을 버리고 왜 이성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하고 나선 것인가? 근대주의 교육으로 층층이 지식은 쌓여갔지만 공허한 마 음은 채울 길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성을 판단의 척도로 삼는 근대주의 세계 관의 옷이 아닌, 상상력이 풍부하고 초월적인 다른 옷이 필요했을 터이다. 거기서는 그의 영혼이 순전한 기쁨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첨단 과학이 판을 치는 오늘에도 허무맹랑하게까지 보이는 판타지 소설에서 우리 청소년 들이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면 루이스의 갈증은 금방 이해가 간다. 목사였던 조지 맥도날드는 를 통해 마법의 세계를 흥미진진하 게 그렸다. 현대 독자에게조차 신비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책 은 무미건조한 자연주의에 깊이 파묻힌 열일곱살의 루이스를 다시 일깨웠 다. 이 경험을 통해 오직 초자연적 세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세계의 본질을 어렴풋 이 깨닫고 볼테르, 기번, 존 스튜어트 밀에게서 떠나 단테, 밀턴, 체 스터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성만으로는 인간의 눈에 초자연의 세계가 열릴 수 없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그후 십육년의 세월이 흘렀고, 톨킨(반지의 제왕 저자)과 어느 날 밤을 지세 우며 나눈 신화 이야기들은 기독교의 신비 곧 성육신이라는 믿기 어려운 실 체 앞에 루이스가 무릎을 꿇게 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신화가 역사 의 실재가 되는 진정한 성취 사건이란 예수의 성육신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 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생의 반전은 여기서 끝나고, 이제 루이스는 기독교 변증가로서 이성과 직관 을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평이한 언어로 믿음의 문제들을 훌륭하게 변증하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이런 작업이 그가 씨름한 다섯 가지 주제들 안에 면면 이 배어 있다. 근대교육의 수혜자로서 과학과 성경이 자신의 지적 세계에서 충돌을 일으켜 혼돈 가운데 있는 학도라면 루이스는 21세기에도 만나야 할 인생의 훌륭한 고전이 아닐 수 없다. 이 더운 여름의 좋은 피서법의 하나로 추천한다.
63 no image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서평 조주석 실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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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53 2005-03-17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백금산 편저/신국양장/부흥과개혁사/279면/2003년 12월(개정판) “넌 누구 좀 닮아라.” 어렸을 때 부모님께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금새 귀에 거슬려 부모님께 대들곤 했다. 다른 누구와 비교해 서 닮으라 하는 것이 무척 언짢았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의 이런 경험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법하다. 좋은 말도 석자리 반이라지만 두 아이를 둔 부모인 나로서도, 빈도의 차는 있겠지만 그런 말을 또 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편저자는 책 제목을 의문형으로 만들 어 우리에게 도전한다.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한 것인가? 내 생각으론, 이 땅 의 교회가 교인수는 많아도 영적으로 성숙한 개개인은 적다는 판단에서 나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실 인식을 출발로 삼아 에드워즈의 삶을 들여다봄 으로써 우리도 그처럼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평전이나 전기 라기보다는 자기경영서에 가깝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을 분석하여 영적 성 숙에 이를 수 있는 원리들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특이한, 그리 스도인의 자기 경영서인 것 같다. 영적 성장 원리를 연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성경 을 연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사의 영적 거인들을 찾아 그들이 어떻 게 성장해 갔는지 살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다. 교회사에 영적 거인이 많 다. 엄밀성은 다소 떨어지나 호방한 지성을 소유한 어거스틴, 조직적이고 간 결 명료성으로 유명한 칼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은 심오성을 가진 에드 워즈…. 이러한 에드워즈를 로이드 존스는 한 폭의 멋진 초상화로 그려낸 다. “청교도들은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 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이라 한 다. 에드워즈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이런 영적 거인을 한번 배워 보고 싶다. 에드워즈에게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없는가. 그의 자서전과 70개의 결 심문(Resolution)과 일기 를 읽는 것이 그 첩경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것들 을 무턱대고 읽어댈 수는 없다. 이 책의 구성을 따라 읽고 실천하는 것이 좋 은 방법일 성 싶다. 모두 4부로 엮었지만 크게 보면 둘로 나뉜다. 1부에서 는 에드워즈가 어떻게 해서 영적 거인이 될 수 있었는지를 입체적으로 분석 해 내는데, 이를 토대로 한 것은 2~4부에 실린 그의 자서전과 결심문과 일기 다. 제1부 3장을 보면, 에드워즈가 영적으로 거인이 된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금 방 한눈에 들어온다. 여섯 가지다. 즉 지상 최고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 고자 했던 사람, 종말의식을 바탕으로 철저히 시간 관리를 한 사람, 자기 자 신 및 세상과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한 사람,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전인적 조 화와 균형을 이룬 사람, 철저하고 지속적인 경건의 습관을 유지한 사람, 통 전적이고 총체적인 거룩을 이룬 사람. 이런 원리들이 에드워즈의 성화의 삶 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비결들이라고 필자는 압축한다. 에드워즈는 18세(1721년)에 놀라운 회심 체험을 한 다음 ‘지상 최고의 그리 스도인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그후 대략 1여년에 걸쳐 평생 살아갈 자 신의 자세와 태도를 담은 70가지의 결심문을 작성한다. 이것들은 그의 인생 점검표였다. 1주일에 한 번씩 반복하여 읽으면서 그의 거룩한 삶 은 심화되어 나갔다. 영적 성장이란 그냥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말씀과 성 령의 역사로 이어지는 회개와 순종의 결과물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신자가 반응하는 새창조이다. 편저자인 백금산 목사는 독서광으로서 ‘평목공’(평생 공부하는 목회자 모 임)을 이끄는 중년의 지도자이다. 그가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조나단 에 드워즈를 생각하며 펑펑 울었다는 그의 애통이 참으로 부럽다. “에드워즈 의 거룩을 추구하는 삶에 비하면 그 동안 나는 너무 짐승처럼 먹고 마셨으 며, 짐승처럼 본능을 따라 살았으며, 짐승처럼 말하고, 짐승처럼 생각하고, 짐승처럼 살았다는 생각 때문에 울었다”(11쪽). 이런 애통의 바람이 중, 고, 대, 청년들의 가슴에도 일었으면 한다.
62 no image 외로운 길을 걸어간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서평 조주석 실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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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6 2005-02-17
외로운 길을 걸어간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유해무 지음/헤르만 바빙크-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258면/살림/2004년 10 월 발행 입춘이 지났다. 따스한 봄기운이 수척한 내 얼굴에도 가벼이 느껴진다. 점심 을 먹으러 오가는 사무실과 생활관 사이에서 맛본 며칠 전의 즐거움이다. 우 리보다는 훨씬 북쪽이지만 1월의 평균 기온은 영상 2~3도 안팎인 온화 다습 한 나라가 있다. 이천이 월드컵으로 방방곡곡을 뜨겁게 달구게 각인한 히딩 크의 나라, 네덜란드다. 그렇더라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바빙크와 카이퍼의 나라요 개혁교회의 나라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자기가 속한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 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가? 어느 누구라도 의당 삶의 내용으로써 이 물음 의 답을 하늘 아버지 앞에 내놓아야 한다. 1세기 전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 크(1854~ 1921)는 어떤 답을 내놓았던가? 이 책은 정직한 필치로 바빙크를 그 려낸다. 부풀리지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전반부는 그의 생애를 다루고(1~5 장), 후반부는 간략히 신학사상을 요약 평가하며(6~10장), 끝장에서는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모색한다. 바빙크는 분리측 교회의 출신이다. 부친은 그 교단의 목사였다. 자유주의 성 향의 레이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개혁신학에 튼실히 섰고 신학박 사 학위도 받았다. 분리측 교회가 획득한 최초의 것이기도 하다. 캄펀신학 교 교수로 임명되어 10여년 동안 두 교단(분리측과 애통측)의 통합과 두 학 교(캄펀신학교와 자유대학교)의 합병이라는 난제를 끌어안고 씨름한다. 이 과정에서 오랜 지기들과 감정의 골도 깊어갔고 자신의 약점도 노출했다. 두 교회의 통합은 이루지만 학교 합병은 끝내 이루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그의 신학세계는 우리에게 훌륭한 유산으로 남는다. 신앙과 문화를, 창조와 재창 조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망하여 기독교문화를 창달하려 한 탁월성 때문 이다. 네덜란드 교회는 1816년에 국가교회가 되었다. 이 국가교회를 개혁하려는 신 령한 싸 움은 영국의 청교도주의와 독일의 경건주의라는 새 기운에 힘입어 전 국을 강타한다. 국가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분리하자는 외침이 있는가 하면, 그 안에서 개혁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50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두 개혁교회가 나온다. 하나는 1836년에 조직한 분리측 교회요, 다른 하나는 1887년에 카이퍼를 중심으로 조직한 ‘애통’ 측 교회다. 이 둘의 통합을 위 해 견인차 노릇한 사람은 바빙크였다. 1892년에 통합한 ‘네덜란드 개혁교 회’의 탄생으로 우리는 뿌듯한 화합과 희락의 교회역사를 갖게 된다. 허나 아쉽게도, 두 학교의 통합은 이루지 못한다. 캄펀신학교는 분리측 교 단 신학교로, 자유대학교는 애통측의 학교로 남는다. 바빙크의 끊임없는 중 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상한 통합 학교는 역사에 탄생하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신학의 부재였는가, 리더십의 부재였는가, 편협성에 사로잡인 교단주의였는가. 바빙크는 개혁교회를 참으로 사랑한 학자였다. 그럼에도 양 편으로부터 모두 오해와 버림을 받아야 했다. 그가 지도자로서 역량을 더 보 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중재의 과정 속에서 간혹 보인 결단성 의 부족이나 미숙한 일처리 방식, 또 냉혹한 교회정치의 현실 속에서 지혜롭지 못한 순진성이 그런 예들이다. 우리를 들여다보자. 갈기갈기 찢긴 장로교회들의 합동과 수많은 신학교육기 관의 통폐합은 참으로 요원할 것 같다. 이런 엄청난 과제는 그만두고라도 신 학교 운영을 놓고 인준이다 직영이다 설왕설래하는 우리의 문제는 또 어떻 게 풀어야 하는가. 결코 사익의 편에는 서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편에 서 서 연약한 교회 현실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도 장로교회의 이상을 손에서 놓지 않는 역동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沈黙精進 與主同行의 리더십이 꼭 살 아나야 한다. 책을 덮으며 선명히 그려지는 한 상이 있다. 사대성의 청산이라고나 할까. 서구 개혁교회도 나약성과 허물을 보였다는 저자의 올곧은 지적에서 그런 소 리가 들렸다. 믿음에는 반드시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이 항상 믿음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확인을 또 한 셈이다.
61 no image 개인사 읽기 <서평 조주석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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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1 2005-01-12
개인사 읽기 조주석 합신출판부 실장 press@hapdong.ac.kr 9년 전에 나온 책을 읽었다. . 사회 문화 비평적으로 어 두운 구석이 내게 너무 많다는 자책을 해본다. 그 방면에 내가 닫힌 것도 아 닌데 책을 읽어낼수록 점점 소견 좁다는 다소 떨떠름한 생각이 들었다. 말하 는 내용을 따라갈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많 은 것도 아니다. 현대문화 속에 사는 내가 그것을 탐닉도 거부도 못하면서 이해의 폭은 협소하고 참 옅다. 학번으로 말하면 나의 대학시절에, 지은이 는 중학생에 지났을 뿐인데. 그는 서울에서 자라났고 난 지방에 자라난, 이 차이가 그런 우열을 가져온 것인가.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종교 분야에 대한 교양서를 읽어야겠다. 그리 맘먹 은 것이 10여년도 더 된 것 같은데 무엇에 억눌리다 읽지 못했는지 답답한 심정이다. 게으름 탓이다. 더 깊이 짚자면, 목회적 소명 확인이라는 욕망에 짓눌린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든 교회에서 확인 받고자 한 우직한 욕망 r 이……. 거룩한 소원 자체는 잘못이 아닌데도 그것이 욕망으로 바뀌면 사정 은 달라진다. 거룩한 소원이나 비전이라는 것도 거룩한 자유를 억압하는 포 악한 주인으로 정체는 바뀔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커온 교회는 이 땅에 있다. 한국의 교회, 더 좁히면 장로교회 다. 유학 한 번 가보지 못했으니 한국의 교회밖에 모른다. 이 교회에서 말씀 을 먹고 자랐다. 그렇게 컸으니 은혜의 빚은 한국의 교회에 모두 지고 있 다. 영적 허기를 채우려 이리저리 옮긴 교회도 여럿이다. 이것은 꼭 내 못 난 탓만도 아니요, 그렇다고 어머니인 교회 탓만도 아니다. 원래 이 땅의 교 회는 완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나그네가 아닌가. 이런 교회에서 유독 내가 허기를 더 느꼈을 따름이리라. 그렇더라도 발을 딛고 있었던 한국의 교 회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7,80년대에는 3박자 축복이라는 기복신앙이 교회를 도배질했다. 90년대 이후 로는 비전 신앙이 교회 성공 신화를 가져온다고 야단들이다. 목적문을 쓰고 아침마다 읽고 실천에 옮긴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일간신문조차 이런 교회 들을 성공한 교회라 부추겨 세운다. 자기 경영을 통해 삶을 극 대화하고 효율 을 높일 수 있다는 경영학의 원리가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기독교와 교회에 깊숙이 들어와 출렁이고 있다. 그러면 성령이 서실 자리는 어디인가. 또 효 율 극대화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명목은 하나님이지만 그 이익을 챙기는 것 은 인간 아닌가. 물론 인생에 경영이 없는 건 아니다. 하나님도 구속 경영 을 가지신다. 하지만 경영이라는 것은 수단일 뿐이다. 수단이 변해 능력으 로 둔갑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우상으 로 변한다. 그것이 성공을 만들어 낸다고 철썩 믿으면 우상일 뿐이다. 빨간 십자가들이 성장 신기루라는 허상에 홀린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원수를 색출해 내야 한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꼭 이 렇게 된다는 말은 아니어도 적을 알고 싸우면 승리에 유리하다는 뜻일 게 다. 우리는 정말로 대항할 원수를 잘 알고 있는 것인가. 보수주의측에서는 아직도 교회의 원수를 ‘육신’ 정도로 옅게 보는 수준에 주력하는 것으로, 내 눈에 비췬다. 내 시야에는 그리 비추니 제한적인 판단이라 해도 부정치 않겠다. 그럼에도 교회의 원수는 작아 보인다. 이 작은 원수와 죽고살 고 싸 움 벌인다면 다른 원수는 보일 리 없다. ‘세상’과 ‘마귀’라는 원수가 생 생히 보여야 한다. 우리는 선교 열풍, 교회성장 열풍에 들어간 지 오래다. 이 열풍 속에 잠입한 바이러스를 찾아내어 적극 치료해야 한다. 부적절하거나 제한적인 치유로는 그 열풍이 계속되기는 어렵다. 내부에 들어 온 바이러스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수준 낮은 피상성, 한류 열풍에 만끽하 다 보면 일시에 작동이 멈출 지도 모른다. 이런 탐닉식의 신앙 사고방식에 는, 그런 문제들은 다음 대에서나 생각할 문제로 밀어낼 위험도 안고 있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 있고, 그것은 차근차근 풀어야 할 숙제로 여겨진다. 이런 현실에 맞대어, 올 한 해엔 신앙전기들을 소개함으로 개인들이 당대 교 회 안에서 원수들과 어떻게 힘겹게 싸웠는지 엿보는 나의 숙제라도 해보고 싶다. 신앙전기・평전을 읽습시다.
60 no image 소명 <서평 조주석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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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0 2004-12-16
소명 오스 기니스 지음/홍병룡 옮김/4*6양장/384면/IVP/2000. 9. 나는 어느 주유소 직원과 10분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지난 한 주간 동안 대화를 나눈 유일한 비그리도스인이다. 나는 종교적인 특정 구역 에 갇혀 익사할 위험에 처한 존재인 것 같았다. 지난 9개월 동안 유명한 교회 에서 일했지만 내게는 맞지 않았다. ‘나의 길이 아닌 것’에서 해방되어 나 의 소명을 발견하고 비로소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후 수십년 동 안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진리에 압도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 책 저자 의 이야기다. 오스 기니스는 2차 대전 중에 중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사회학 박 사를 받았다. 8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현대 기독교 문명과 철학 의 흐름을 주도하며 유럽, 미국, 캐나다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온 실 천적인 기독 지성인이다. 이 책은 모 두 26장으로 구성되지만 글의 형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비슷하 다. 먼저 세속인의 치열한 삶의 적절한 에피소드를 제시한 다음 이것을 기독 교 소명과 적절히 연관시켜 심화해 나간다. 왜 이런 전개 방식을 택한 것인 가? 그 이면에는 세속 사회든 신앙 사회든 각각 궁극의 주인이 있고 그 주인 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명이 이루는 내용은 다르겠지만 그 외적 양상은 동일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자기 주인에게 충성 하고 예배하는 인간의 피조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은 세속 세계와 그의 신앙을 연계시키는 평생의 노력과도 무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은이가 소명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이라고 주장한 바는 아주 설득력 있어 보인다. 또 35년이 넘도록 하나님의 행진 명령에 따라 살려고 애썼다는 고든 맥도날드가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소명의 의미가 더 확연해졌다고 호평한 것은 칭찬 일색만 아니 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문화요 가장 강력한 문화라는 것이 현대세계이다. 이 놀라운 혜택을 우리는 안고 산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가 져온 세속화, 사유 화, 다원화라는 것들이 기독교에 큰 손상을 입혔다. 세속화는 하나님을 삶의 변두리로 끈질기게 밀어내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피부로 느끼고 코로 냄새 맡는 이 오감(五感)의 세계로만 살라고 제한한다. 이에 못 지않게 사유화는 기독교 신앙이 삶의 공적 영역에 놓이는 것을 꺼려하고 비난 한다. 개인의 자유나 성취나 믿음은 사적인 영역에서만 작용해야 할 것으로 제한한다. 이런 서양 사회에서 지은이가 하나님의 소명을 되살려내고, 하나님 이 삶의 유일한 청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 나라를 살려냄이다. 이런 외침이 서양 사회를 뒤엎기에는 역부족일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회복에는 이 보다 더 강한 처방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상황도 현대 세계라는 배경은 마찬가지 다. 하지만 서양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진행돼온 사회이고 우리는 그렇지 아니 하다. 무교적 불교적 유교적 사회 배경이 강하다. 그래도 기독교가 우리 사회 에서 무시 못 할 종교는 결코 아니다. 이런 까닭에 소명이라는 문제를 접근 할 때도 서양과는 좀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 니스가 소명에 대해 지 적하는 ‘가톨릭적 왜곡’이나 ‘개신교적 왜곡’이 우리 문화 전통과는 상당 히 거리가 있다. 그런 왜곡의 징후가 우리에게서 감지될지는 몰라도 주류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독교도 이제 신선한 종 교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정화의 대상으로 세상에 비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다. 이 대목에서 기니스가 말하는 소명에 분명 귀 기울여야 하며 또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아쉽다. 이 책을 더 젊은 날에 접할 수 있었더라면 생의 낭비는 줄었을 법하 다.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소명’과 ‘신자의 삶’이라는 문제 앞에서 끙끙 대던 시절이 있었다. 신자로서의 삶도 뚜렷한 것이 없고 목회의 소명도 마찬 가지였다. 20여년도 넘게 이 문제와 씨름한 것이 진지한 것일까 소심한 것일 까. 소심하고 둔한 것으로 내비친다 해도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리 탓할 일만은 아닐 것 같다. 책을 읽는 도중에 나처럼 고민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혹시 내 일터가 아닐까 하는 스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59 no image 마음의 혁신 <서평 조주석 실장>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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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6 2004-11-18
마음의 혁신 달라스 윌라드/윤종석 옮김/신국판양장/448면/복 있는 사람 설교 능력이 부족하고 독선적이어서 신자가 급감하는 등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일류병과 관료주의병에 걸린 사람은 교회직분을 진급이나 출세수단 으로 생각하고 그 자리를 독점하면서 세도를 부리게 된다.” 모두 상대를 깎 아내리는 말이지 높임이 아니다. 최근 어느 큰 교회에서 공적으로 오갔다고 신문은 보도한다. 당회장과 장로님들 사이에. 치유될 수 없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마음의 깊은 변화다. “인간의 마음 은 인생의 중앙 살림부서요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래서 죄로 더럽힌 이 중앙 살림부서가 그야말로 확 뒤집히지 않는다면 답은 없어 보인다. 달라스 윌라드의 (Renovation of the Heart, 2002)은 독자를 그 문으 로 인도한다. 그래서 목회자라면 어느 누구에게라도 먼저 손에 꼭 들려주고 싶은 책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인가?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 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쓰레기통에서 쓰레기가 나오지 않게 혁신 하는 일이다. 본서는 이 과정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과정에 깊이 주목한 다. 지은이의 눈에는 개인이든 교회든 대부분 이 대목에서 고만고만하고 별 진전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왜 고만고만하고 별 진전이 없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낮은 신앙 수준을 당 연한 것, 슬프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쉽게 포기하는 널리 퍼진 시 각 때문이다. 또 지역교회가 너무 산만하기 때문이다. ‘원리와 절대적 요 소’에 집중하지 못하고 건물, 강대상, 설교의 길이, 음악 형식, 예배순서, 집회시간, 기도원, 교회장지 등 세부적이고 이차적인 것에 너무 집중하기 때 문이다. 더 근본적인 과오는 없는가?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죽어서 천국 갈 준비를 시키는 것이 기본 목표가 됐다는 점이다. 사람들 안에 천국을 들여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천국에 들여놓는 것이 그들의 목표”(406쪽)가 됐다는 것이 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교회 보수진영과 서구교회 주류가 갖는 근본적 과오라 고 지적한다. 그래서 “전도를 지역교회의 일차 목표로 삼는 것은 중대 과오 다”라고 하는 지은이의 고언은 반기독교적인 말처럼 보인다. 분명 이 시대 는 성화보다는 내세의 복락에 관심이 더 많다. 자아숭배에서 자기부인으로 이 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근간인데도 말이다. 자기부인의 길이야말로 천국을 내 안에 들여놓는 지름길인데도 그 길을 마다 한다. 이런 실상을 잘 아는 지은이는 영적 변화라는 해결책을 이 시대 앞에 제시한 다. 영적 변화는 하나님의 주권의 발휘와 인간의 반응(책임)이 만나는 곳에 서 일어난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주권이며 어디까지가 인간의 책임 의 경계인지는 사실 구분하기 쉽지 않다. 성경을 봐도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 울 때도 있고, 인간의 책임을 전면에 내세울 때도 있으며, 그 반대일 때도 있 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그렇게 서술한다. 허나 정의하자면, “영적 변화는 자아의 각 본질적 차원이 중생한 의지의 지 휘 아래, 하나님 은혜의 끝없는 주도에 협력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처럼 변화 될 때 이루어진다”(393쪽) . 이 핵심 주제를 이처럼 풍부히 풀어내는 책을 다 음 시대에서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성 싶다. 실천적인 차원에서 볼 때 교회 의 거룩함은 개인의 영적 변화로 일궈내는 결과물이라는 지은이의 말은 적확 하다. 과학은 분명 마음을 놓친다. 기껏해야 주변의 물리적·사회적 사회에서 벌어 지는 사건들과 인간 내면생활의 일부 신기하고 중요한 상관성은 지적할지 몰 라도 사람의 마음은 변화시킬 수 없다(28쪽).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이 고치신다면 몰라도. 오늘날 교회 밖에서는 세상이 두 눈 부릅뜨고 교회를 지켜보고 있다. 아니 감 시하고 있다. 이 앞에서도 두려움을 못 느낀다면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 할 개인이나 교회가 어디 있을지!
58 no image 하나님의 모략 <서평-조주석 실장 >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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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9 2004-10-20
하나님의 모략 달라스 윌라드/윤종석 옮김/신국판 양장/복 있는 사람/556면/2000년 7월 복음은 화재보험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복음이 결정적 위기만 담보한다면 절 반의 기쁜 소식일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현재 ‘소비자 기독교’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이다. 이런 특징이 미국의 우익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발견 되는 지점이다. 슬프게도 서서히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징후가 보인다는 점이 다. 이런 현실을 무척 안타까워하는 학자가 있다. 남캘리포니아대학교 철학부 교 수인 달라스 윌라드이다. 그가 쓴 (The Devine Conspiracy, ⓒ 1998)은 이런 고민과 극복 방안을 응축시켜 놓은 보기 드문 책이다. 이 노 고를 치하하여 크리스챠니티 투데이는 1999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였 다. 그리고 이어 2003년 도서상(영성 분야)에 그가 쓴 (Renovation of the Heart, ⓒ 2002)을 또 올려놓았다. 현재 7개 국어로 출 간 내지 번역 중에 있다. “하나님의 모략은 복음에 관한 책이다.” 이 천국 복음은 우리 인간 생활에 명확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저자의 확신이 강하게 배어난다. 천국 복음은 단지 죄 용서라는 칭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복음을 설명할 때 이 부분을 뛰 어넘지 못하면 복음은 축소의 길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복음은 칭의의 복 음을 넘어 천국 삶의 복음이다.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과 기쁨과 헌신을 빚어내며 하나님의 성품을 이웃에 고스란히 드러내게 한다. 기독교 복음은 그 런 능력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본서는 상당히 마태복음적이다. 저자는 먼저 마태복음 4:17-25을 근거로 미국 의 기독교 현실을 진단하고(1-3장), 마태복음 5-7장을 토대로 천국의 삶이 무 엇인지 제시한다(4-7장). 즉 천국이 우리의 마음에 어떻게 세워지고 구체적 행동으로 드러나야 하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이렇게 한 다음 마태복음 28:19,20을 근거로 제자도가 무엇이며 그 교육 과정이 어떠한지 자신의 경험 과 결합시켜 친절히 풀어낸다(8,9장). 그리고 끝으로 믿는 자들이 들어갈 세 계에 대한 소망도 빼놓지 않는다(10장). 그렇다면 이런 논의는 행함으로 믿음 이 온전케 된다는 야고보의 복음 정신과 상통한다 하겠다. 두 가지를 더 상세히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제자도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제자도를 이렇게 이해한다. “예수의 제자도는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381쪽)라 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로 생각하면 율법주의에 빠질 우려 가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제자도에는 지향해야 할 목표도 있고, 금해야 할 사항도 있다. 전자는 하나님 사랑과 구습 벗기(427쪽 이하)이며, 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외형적 동조와 정확한 교리와 교회에 충성하기와 특 별한 체험이라고 한다(426쪽 이하). 이러한 나열에 좀 아니다 싶은 마음도 들 었지만 꺼리는 마음은 거의 들지 않았다. 제자도는 영적 훈련 틀도 갖춰야 한 다. 훈련이라는 말이 조작적 인위적이라는 말로 이해된다면 성령의 역사가 들 어설 자리는 없겠지만 윌라드는 이 말을 삶의 일부, 곧 자연스런 삶의 훈련으 로 제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8복 논의가 아주 새롭다는 것이다. “8복에 대한 윌 라드의 이야기 는 … 우리의 통상적 생각을 많은 부분 뒤집어 놓으며 그야말로 말문이 막히 게 한다. 이 한 부분만으로도 이 책 전체의 가치를 가늠하고도 남는다”(리차 드 포스터). 그래서 과연 이 해석이 정말로 맞을까 하는 유보적인 생각이 들 었다. 만약 그의 논의가 해석학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면 8복에 대한 전 통적인 해석과 이해는 상당 부분 수정을 거쳐야 할 것 같다. 문맥적 역사적 해석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어 더욱 당혹스럽다. 복음 진리가 그믐달처럼 가물가물 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교회가 아닌 대학의 교수를 쓰시어 당신의 파수꾼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경영 방식이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주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제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사 건들이 여기저기 많이 터졌으면 한다.
57 no image 희열의 공동체 <서평 조주석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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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1 2004-09-23
희열의 공동체 마르바 J. 던 지음/이종태 옮김/신국판/340면/복 있는 사람/2004.3발행 1983년 어느 통계에 따르면, 세례교인 300인 이하인 교회가 전체의 74%라고 한다. 옛 자료라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칠 만도 하지만 “여전히 작은 교회가 한국 교회의 대종이다”라고 지적하는 분도 있다. 이런 작은 교회의 엄존을 현실로 삼아 성장 정체를 맞이한 한국 교회가 지금 반성해야 할 부분 이 어디인지 차곡차곡 꼬집은 그늘에 가린 빛 바랜 책도 있다. 『작은 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그런 책이다. 책제목만 보면 굉장히 도발적이 다. 하지만 이 책으로 내가 부끄럽기도 하였고 또 그분이 부럽기도 했다. 이 런 생각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을 때 더하여 읽은 책이 있다. 『희열의 공동체』(Truly the Community, ⓒ 1997)라는 책이다. 서체가 작아 읽기는 좀 불편했지만 전자의 책 내용을 더 구체화한 제2부쯤 되는 책이라고 나 할까? 물론 저자는 다르다. 내용으로 이제 더 들어가 보자. 본서는 로마서 12장 전체를 차곡차곡 풀어내 고 있다. 저자는 본문과 진지하게 씨름하고 또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이야기 들도 들려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관계의 중요성이 큰 그림으로 그려진다. 모 두 21절로 된 본문은 더 세분되어 본서에서는 31장으로 묶인다. 저자는 목발에 의지하며 또 시력장애로 한 눈도 보지 못하는 여성으로서 아름 다운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요 성경교사요 캐나다 리젠트 대학의 교수이기 도 하다. 이러한 자신의 개인 생활 이야기들을 대목 대목 담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추상적일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는 이유이다. 그 타당한 근거는 이렇다. “고대 사람들은 신앙이 깊은 차원 의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을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15쪽). 큰 그림으로 그린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또 다짐해 보는 시간 이었다. 아마 이 책을 읽는다면 내 말에 끄덕끄덕 하실 것이다. 물 론 이 관계 의 중요성이라는 가치가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새로 발견한 것은 아니 다. 그렇더라도 효율성과 성공을 쫓는 목회자가 적지 않고 또 그런 잠재적 수 효도 무시 못 할 우리의 현실일진대 이런 가치는 소중히 여겨져야 마땅하다. 사실 인격성과 구체성, 자발성이라는 특징은 작은 교회라면 몰라도 큰 교회에 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점들 아닌가? 그렇다고 작은 교회가 그 특징들을 다 잘 드러내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익명성을 띄기 쉬운 큰 교회에서는 그 런 특징들이 수면 위로 오롯이 올라오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은 작은 공동 체의 그런 친밀하고 깊은 관계들을 잘 드러낸다. 요사히 큰 교회들이 이를 반성하며 그 대안을 찾고 있다니 참 다행이다. 교 회 내 소그룹 모임이 그런 단적인 예로 보인다. 놓친 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다. 그런데도 여러 가지로 헉헉대는 작은 교회들 은 이를 알고도 역행하려 한다. 교회의 본질은 ‘성도의 교통’이다. 이것은 역사 대대로 진리였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찾으시는 교회상이다. 이만 하면 우리 주님의 눈치쯤은 우리가 볼 줄 알아 야 한다.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율법주의, 사회복음주의가 틈을 엿볼 수 있 다. 하지만 본서는 큰 틀에서 보면 그런 위험성은 희박하다. 신자의 행함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라고 저자가 딱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독 자가 잊을 만하면 은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머니처럼 이 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작은 교회가 70%도 넘는 우리 현실일진대 이 두 책은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 그 책을 펼 때마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매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56 no image 세상의 포로 된 교회<서평 조주석 실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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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7 2004-08-26
세상의 포로 된 교회 마이클 호튼/김재영 옮김/신국판/374쪽/부흥과개혁사/2001.10 좀 오래 전에 가족끼리 둘러앉아 재미있게 본 비디오가 있다. 이야기 줄거리 인즉 동유럽 첩보원들의 비밀명단을 훔쳐 무기상에게 팔아넘기려는 음모를 막 아낸다는 블록버스터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는 영화 제목이자 임무를 띤 첩보원의 팀명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도 주인공은 천신만고 끝에 임무를 완수하고 새로운 팀의 리더가 되어 또 다 시 첩보원으로 돌아간다는 줄거리다. 임무 충실은 첩보원에게 두말할 나위 없 이 중요하다. 저자 호튼(Michael S. Horton)은 본서에서 미국의 기독교가 과연 자기 임무 에 충실했는지를 놓고 냉철하게 반성한다. 이 반성은 우리를 위한 설득이요 성찰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핵심이 무엇인지 독 자의 손에 확실히 쥐어준다. 또 체증이 내려갈 정도로 속이 후련할 만큼 서술 도 아주 정직하다. 추천사를 쓴 토머스 오든의 말처럼 이 책은 “포스트모던 문화에 대한 복음주의적 통찰을 담고 있는 탁월한 작품”이다. 이 도발적이고 용기 있는 설득이 미국의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희미한 마음을 분명 환하게 비추었을 것이다. 1995년도 미국복음주의 출판협의회 선정 ‘기 독교와 사회’ 부문 골드 메달리언상 수상이 그 증거이다. 원래의 제목은 ‘Beyond Culture Wars’(ⓒ 1994) 즉 ‘문화 전쟁을 넘어서’인데, 옮기면 서 ‘세상의 포로 된 교회’로 바뀌었다. 전자는 문학적이라면 후자는 설명적 이라고나 할까! 본서는 크게 둘로 나뉜다. 제1부는 문제 제기를 하고 제2부에서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80년대 이후로 미국은 기독교 우파와 좌파 사이에 벌어진 문화 전쟁으로 몸살 을 앓고 있다. 단연 큰 화두는 낙태 문제, 동성애 문제 등이다. 이 전쟁에서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전략적으로 5가지 실책을 범했다고 호튼은 진단한다. 이 로써 그들의 정체는 분명히 세속주의에 사로잡힌 자들로 밝혀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 들의 정치적 행동들에 대해서 미국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싸 움”으로 주장한다. 자신들의 과업을 ‘기독교 아메리카’ 건설로 내세운다. 반면에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은 ‘기독교 아메리카’를 침식하는 존재라고 비 판한다. 하지만 호튼의 눈에는 우파의 비전이 성경적인 것도 아니요 세속주의에 사로 잡힌 잘못된 사명 이해라고 질책한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국가)를 성경 적으로 정당히 구별하지 못한 어두움에서 나온 것이요, 복음과 율법을 바로 구별하지 못한 오해의 소치일 뿐이다. 대규모 캠페인, 전도집회, 행진, 항의 집회가 변화를 가져올 수단으로 생각하 는 그들은 정작 복음이 모든 치유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잊고 있다. 도덕적이 며 정치적인 개혁 운동을 그리스도의 복음 및 그의 나라의 전진과 혼동하고 있다. 시민 사회적 정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의롭다함과 혼동하고 있 다. 따라서 미국의 기독교는 문화적 기독교로 변신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호 튼의 지적처럼 “영광은 떠났다. 왜냐하면 복음이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복음이 교회에서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336쪽). 이런 일이 미국의 일만이 겠는 가? 미국 신학을 직수입하는 우리도 결코 강 건너 구경할 불만은 아닌 것 이다. 임무 곧 사명은 최일선 지도자들에게 재확인되어야 한다. 사령본부가 내린 임 무도 아닌 것으로 그들의 임무를 삼을 수는 없다. 호튼은 제2부에서 복음주의 자들의 바른 임무가 무엇인지 길게 설명한다. ‘주기도문을 통한 교회의 부흥과 개혁이 우선이다’라는 해결책이다(제2 부). 그것이 문화전쟁에 몰두해 있는 현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받아야 할 재 지령이다. 간략히 말해서 그들의 최대 임무는 복음 전파에 있다. 그러나 하나 님은 정치와 도덕도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두 신 그 자리에서 사회의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목적에 기여하면서 다른 한편 우 리는 불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355쪽). 책 말미에 이런 주장도 덧붙인다. 미국은 전투지가 아니라 선교지이다(12 장). 이 발언은 하나님 앞에 선 자다운 아주 정직한 아픔의 반성이요 진정한 겸손이다. “미국이 한국이나 아프리카 크리스천들의 선교 대상이 된다는 생 각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아주 수치스러운 생각이다. 그런 데 지금 그렇게 되 고 있다. 그러한 현실은 궁극적으로 자만심과 관계되어 있는 이슈이다” (349,350쪽). 선교 한국교회를 크게 자랑으로 삼는 우리가 배울 아름다운 겸 손이다.
55 no image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서평 조주석 실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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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2 2004-07-21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 존 스토트/윤종석 역/국판변형양장/198쪽/두란노서원/2004.1 남녀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어 이삼십년 지나면 자식들도 커서 그 가정 의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훌륭한 가정도 생기고 평범한 가정도 생기고 형편 없는 가정도 있게 된다. 사회에 기여하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국가와 이웃에 짐이 되는 가정도 있다. 세월은 같이 보내지만 나타나는 가정의 실상은 많이 다를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마다 처한 환경 속에서 교회는 자신 의 교회상을 형성하고 다른 실상을 드러내 보인다. 존 스토트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실상을 일목 요연하게 잘 제시한다. 그 교회에 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포착하여 영적 각성 과 회개를 하라고 영국 교회에 도전한다. 이런 도전이 우리에게 곧장 적용되 는 것이 거리는 있어 보이나 우리의 정체성을 들여다 볼 거울은 된다. 그가 쓴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What Christ Think of the Church 2003)가 그런 책이다. 1957년에 강해설교 한 것을 다시 재정리하여 이번에 출판한 것 이다. 지은이는 이 일곱 교회를 통해 살아 있는 참된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일 곱 장으로 나누어 하나하나 제시한다. 즉 '사랑으로 성장하는 교회'(에베 소), '고난을 견디며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서머나), '진리를 사랑으로 지키 는 교회'(버가모), '삶과 성품이 거룩한 교회'(두아디라), '영적 파산에서 다 시 일어서는 교회'(사데), '구원의 문으로 들어와 섬김의 문으로 나가는 교 회'(빌라델비아), '예수님께 인격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는 교회'(라오디게아) 라는 특징들이다. 이런 차이들은 예수님의 목표가 달라서 생긴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처한 상황이 달라서 발생한 것이다. 더불어 이 메시지들은, 스토트에 따르면, 모든 교회에 주시는 보편적 도전이기도 하다. 교회가 처하는 사회적 상황은 서로 늘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의 전통 은 그렇지 않다. 유구한 전통을 갖는 교회가 있 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회 도 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이나 한국교회는 모두 전통이 짧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적으로 중진국 대열에 다가서는 사회 경 제적 환경 속에서 교회들이 발생했고 자라왔다. 또 빈부의 격차, 진보와 보수 의 대립, 세대간의 갈등이 점차 심해가는 사회 속에서 지금 영적 전투를 벌이 고 있다. 풍요, 부자, 웰빙을 너도나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갈등하 고 있다. 그것들은 교회를 넘어뜨릴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이단들의 열성이 연약한 교회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고 또 어떤 영적 전 투를 해야 하는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몇 교회로부터 도전과 자극을 받 을 수는 없는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주님의 메시지가 우리 에게 도전이 될 수 있다. 버가모는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들 안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 진리를 철저 히 수호하지 못한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은 있었지만 자칭 선지지라 하는 악한 자 들을 용납했다. 그들은 이세벨의 무리를 용납했다. 음행과 술 수, 방종과 거짓 계시를 용납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양적 성장은 크게 이루었지만 도처에서 이단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 해결책은 없는 것인가? 비진리를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 있게 선포하는 것이 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까닭이다. 무시 무시한 종교재판이나 이단자 화형 처벌법으로는 비진리를 억누를 수 없다. 진 리만이 오류를 이길 수 있다. 이단 대책위를 설치해 대안을 세우는 것보다도 각 교회가 참된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고 잘 간직하고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사 는 길이 이단을 이기는 더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이 길을 스토트의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조주석 ac.kr)
54 no image 솔라 에클레시아 - 프로테스탄트 교회관 <서평 조주석 실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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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1 2004-06-23
솔라 에클레시아 - 프로테스탄트 교회관 존 맥아더 외 지음/돈 키슬러 엮음/조계광 옮김/신국판/278면/생명의말씀 사/2001.1 발행 우리는 어떤 물건에 찍힌 메이커만 보고도 그것이 믿을 만하다 아니다 하는 것을 금방 가려낸다. 또 고가품이냐 중가품이냐 저가품이냐 하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브랜드 이미지를 아주 중시한다. 마크나 메이커는 상품의 질을 가려내는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요 거룩하며 보편적이요 사도의 가르침에 서 있다. 이것은 교회 의 4대 속성이며 니케아신조가 확정한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이 네 속성을 아무리 주장한다 해도 그 교회가 참교회냐 거짓교회냐 하는 것은 쉽게 가려내 기 어렵다. 그래서 16세기 개혁자들은 교회의 표지(marks)로써 그것을 분별 해 낼 수 있다고 하였다. 돈 키슬러가 엮은 이 책은 이러한 개신교 노선을 고수한다. 또 필자가 각각 한 장씩 맡아 기고한 11장으로 구성은 되지만 크게 보면, 교회의 표지를 중 심 주제로 하여 다른 주제들이 서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교회론은 이 문제만 다루지 않고 교회의 정치나 은혜의 수단도 더 다룬다. 참교회의 표지는 무엇인가? 교회의 일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권징에 해 당하는 죄들은 무엇인가? 교회는 언제 떠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 하여 여러 필자가 한 책에서 대답을 한다. 사실 후자의 세 물음은 첫째 물음 에서 파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당 필자들은 연구와 목회 경험을 통해 얻 은 해결책들을 조심스레 제시하고 있다. 참교회란 완전한 교회를 뜻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둘을 혼동하 면 4세기에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도나투스주의 논쟁이나 16세기에 일어난 재 세례파 논쟁 같은 것이 지금도 재현될 수 있다. 그들은 완전한 교회를 주장 하다가 결국 교회를 분열하여 독자 노선을 취했다. 이처럼 참교회와 완전한 교회를 혼동할 경우 교회 분열은 결코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참교회를 가늠할 수 있는 표지란 과연 무 엇인가? 그것은 말씀의 참 된 설교, 성례의 올바른 집행,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다(벨기에 신앙고백 29 항). 이 표지로써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별해 낼 수 있다. 교회가 본질적으 로 더 순수하냐 덜 순수하냐 하는 것으로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는 것 이 아니다. 이것은 질의 정도 차이요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순수성의 차이 문제로 교회를 분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참교회의 표지 중 하나인 말씀의 참된 설교는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말씀 의 참된 설교가 교회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일 치는 무엇을 근본 토대로 가능한가? 교회는 기독교의 근본 토대인 참된 복음 을 선포해야 한다. 이 복음을 믿는 자들로 구성된 교회들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영적 유기적 일치를 이루며 거룩한 성질을 갖게 되고 보편성을 지님 으로써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로마가톨릭 교회나 복음을 도외시한 채 교회의 일치를 외치는 WCC 운동과는 그 궤를 달 리 한다. 복음을 토대로 하는 교회의 일치는 획일적이거나 외적 화해만 앞세 우지 않고 다양성 속에서 나타나는 유 기적 영적인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속 성 실현과 일치는 말씀의 참된 설교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서 복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필자의 하나인 R. C. 스프룰은 "우리 시대가 직면한 신학적 위기는 바로 복음의 위기이다"(205쪽) 라고 진단한다. 이 복음에 관하여는 『복음이란 무엇인가』『그리스도의 십 자가』『신약에 나타난 부활』『부활』이라는 4권의 책을 통해 이미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이 복음으로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들어간다. 그리고 교회의 성숙과 확장으로 이어진다. 교회의 설 교는 교회를 세우거나 넘어지게도 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이다. 하여, 말씀 전파자가 이 복음을 어설피 알거나 일부만 알거나 피상적으로만 안다면 교회는 참교회의 표지를 갖기 어렵다. 이 대목에서 우리 교단의 많 은 교회들도 다시 한번 고뇌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교역자라고 하 면 너나나나 할 것 없이 과연 내가 복음을 똑바로 풍부히 깨닫고 그것을 몇 시간 동안이고 어디서든 전할 수 있겠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교 회의 마크는 상품만이 아닌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지교회를 두고도 그것이 믿 을 만한지 아닌지 가려지는 한 수단이다. 우리 교단과 교회들이 참교회의 표 지를 풍부히 갖기를 주님께 조용히 빈다.
53 no image 하나님 나라와 비유 <서평- 오광만 교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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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9 2004-06-09
하나님 나라와 비유 홍창표 지음, 합동신학대학원출판사, 2004. 404쪽. 14,000원. 예수께서 갈릴리 농촌에서 당시 대중적인 언어였던 아람어로 말씀하셨다는 것 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께서 하신 말씀 을 현대 서구 문화의 관점으로 읽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예수님의 비 유가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많은 사람 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저마다 해석하는 내용이 달랐고 비유에서 예수님의 의 도와 비유의 메시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유 해석 지침으로 제시된 안내서들도 비유 해석방법이 다양하고 복잡하여 독자들이 그 중에 어느 방법이 바른지 선택하기도 어렵고, 설령 선택하였다 고 하더라도 실제 그가 비유를 읽으면서 적용하기가 어려운 책들이 대부분이 었다. 이런 것을 극복하고 독자들을 그 때 그 장 소로 안내하여 비유의 의미를 설명 해준 비유 연구서가 출판되었다. 홍창표 교수의 ‘하나님 나라와 비유’가 바 로 그것이다. 이 책은 10년 전에 같은 제목으로 출판되었던 것인데, 이번에 독자들이 더욱 쉽게 읽을 수 있게 본문의 문체를 다듬고 각주도 새롭게 정리 하여 새로운 판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책은 균형 잡힌 비유 연구서이다. 전체 4부로 구성이 되어, 전반부(1-3부) 에서는 최근의 비유 해석에 영향을 미친 여러 방법론을 소개, 분석하면서 그 방법의 허점을 비판하였고, 후반부(4부)에서는 실제로 비유를 해석하였다. 저자는 1부(15-47쪽)에서 비유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한다. 비유는 구약의 마 샬처럼 비유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 성격을 지니는지를 설명하고, 예 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을 비밀의 계시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2부(49-105쪽)는 역사적으로 비유해석에 영향을 준 비유 해석의 역사를 다룬 다. 홍 교수는 이곳에서 비유해석이 풍유(allegory)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이 유와 풍유적 해석이 극복된 계기 그리고 비유해석에 관여되는 요소들을 설명 한다. 특히 현대 비유해석에 막대한 영향 을 미치고 있는 학자들과 해석 방법 론(율리허, 다드, 예레미야스, 신해석학, 구조주의 수사비평 등)을 분석하 여, 그들의 강조점과 결정적인 약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3부(109-127쪽)는 홍창표 교수가 이 책에서 비유를 해석하면서 채용한 해석 학 원리를 소개한 부분이다. 홍 교수의 비유 해석법은 “천국 문화적 해석 법”이다(126쪽). 이것은 비유 이해에 동양의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케네 드 베일리가 ‘시인과 농부’(오광만 옮김. 서울: 여수룬, 1998)에서 천명한 문화적, 문학적 방법론과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을 하나님 나라로 이해한 게할 더스 보스의 하나님 나라 이해를 접목시킨 방법론이다. 홍 교수는 보스가 하 나님 나라의 중심 사상을 구원 능력의 범위와 의의 범위와 복의 상태라고 주 장한 것을 그의 하나님 나라 이해로 삼았다(111쪽). 이 책의 3분의 2 분량을 차지하는 4부(129-366쪽)는 예수님의 개별 비유를 해 석한 부분이다. 홍 교수는 총(마흔 일곱 개의 본문에 나오는) 서른 개의 이야 기 식 비유를 설명한다. 저자는 이 책의 목표가 이 비유들을 세밀하게 주석하 기보다는 “주로 비평학자들을 비평하는 데 주 력하려 한다”고 천명하였다 (131쪽). 하지만 그는 모든 비유를 동양의 문화로 설명하고,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비유들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왕이나 아버지 또는 주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꾸며져 있고, 이들 대부분은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어서 “군주의 비유들”이 라는 제목을 붙일 만하다. 저자는 열아홉 개의 비유를 군주의 비유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들 비유는 비유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속 성을 가르친다. 그밖에 제자도와 기도를 가르치는 비유 다섯 개,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인 가 치를 다루는 비유 두 개, 자비와 심판에 관한 비유 두 개, 마지막으로 은혜 를 가르치는 비유 두 개 등이 동양문화적 관점에서 설명되었다. 이 책에 제시된 것처럼 비유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다는 것과 비유를 동양문 화에 비추어 이해할 경우, 독자는 그 동안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비유를 이 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실례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경 우, 많은 사람들이 그 중심 사상을 “너도 선을 행해라”는 것을 결론으로 알 고 있을 것이지만, 저 자는 그렇게 하는 것은 정확히 예수께서 질문한 율법사 에게 도전하신 내용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지”에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에게는 그가 율법에서 가르치는 것을 실행할 이웃을 찾는 것은 스스로 의로움을 획득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께서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다 만 하나님만이 인간을 의롭게 하시며 은혜로 영생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 리는 데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목적이 있다고 지적한다(276-77쪽). 이것은 독자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저자의 비유 해석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의 지극 히 일부분이다. 저자의 비유 해석의 많은 부분이 케네드 베일리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이 책은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비유 연구서 중 에 단연 독보적인 책이다. 동시에 이 책은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하 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보배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감상 할 수 있는 값진 책이다.
52 no image 성화의 은혜(서평-조주석 합신출판부실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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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4 2004-05-27
서평-조주석 합신출판부실장 성화의 은혜 브라이언 채플/조계광 옮김/신국판/398면/생명의말씀사/2002년10월발행 몇 해 전 양난을 선물로 받았다. 지금도 화사하던 꽃줄기가 눈에 아른아른하 다. 사실 우리 집 식구들은 화초를 잘 키울 줄 모른다. 정확히 꼬집어 지적 하면, 내가 그렇다. 물 주는 때보다도 잊은 적이 더 많다. 그래도 이번 겨울 에는 꽃을 기대하고 정성도 들여 보았지만 꽃줄기는 나오지 않았다. 못내 아 쉬웠다. 아직도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것을 알아보려는 노력도 여태 하 지 못했다. 책을 보면, 저자의 목회 이야기도 종종 튀어나온다. 20년 이상 목회한 분으 로서 초기에 미처 깨닫지 못해 미숙했다는 이야기도 술술 털어놓는다. “목 회 사역을 하던 초창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들어 사람들을 위협함으로써 그 들로 하여금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독려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 다주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300 쪽). 사실 이런 위협식의 설교나 상담은 많은 폐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초년생 목회자라면 여기서 쉽게 비켜설 사람 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는 교인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는 모습을 보면 기쁨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성숙해 가는 증거요 거룩한 삶 곧 성화가 삶에서 이루어지는 일 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가 성숙한 자리로 올라서기를 바라지 않는 목회자 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성도가 어떻게 해서 기쁜 마음으로 복종할 수 있 는지를 모른다는 데 사실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책은 이 문제를 잘 해결 해 줄 것이다. 목회자든 일반 신자든 이 책을 주의해서 읽는다면 분명 해답 을 얻게 되리라 확신한다. 성급한 분들을 위해 먼저 그 답부터 말하겠다. ‘성화는 우리의 행위 곧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 이 게 저자의 대답이요 성경의 대답이다. 채플 목사님은 북미 교회의 현실을 잘 진단한다. 즉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는 대부분 20세 초의 자유주의와 근본주의간의 논쟁에 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와중에서 발생한 것은 기독교인이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올 바른 행위에 관심 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예컨대 카드놀이 금지, 금주, 금 연, 영화 관람 금지 등과 같은 행동 지침을 잘 지키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 의 표지로 여기는 교회가 많았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성향이 율법주의로 회 귀하는 것이라는 판단 아래 은혜를 다시 강조하다가 방임주의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신자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관심이 없다고 믿게 했다. 이 예리 한 지적은 미국 교회의 현실에만 해당하지 않고 우리의 현실도 반영하는 역사 의 거울이다. 즉 우리 보수주의 교회나 자유주의 교회를 보면 금방 드러나 는 점이다. 이런 현실 진단에 따라 본서의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본서의 목적 은 율법주의와 방임주의라는 두 가지 위험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 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 있다. 본서는 성경의 핵심 구절들을 통해 칭의와 성 화의 근거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는 진리를 밝히고자 한다”(13쪽). 아무도 행위로써 구원을 얻을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행위로써 구원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분명 낭패를 볼 것이다. 방금 밝힌 대로, 저자 는 성경 핵심 구절들을 들이대 칭의와 성화를 조근조 근 설명해 나간다. 그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책을 크게 3부로 나누고 세분해 서 10장으로 묶는다. ‘은혜의 원리’라는 제목을 단 제1부에서는 칭의가 어 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누가복음 17:7-19(1장), 갈라디 아서 2:20(2장)으로써 설명해 나간다. 그리고 ‘믿음의 실천’이라는 제목을 단 제2부에서는 성화가 어떻게 하나님 의 은혜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마가복음 10:17-22(3장), 고린도전서 10:13 (4장), 골로새서 3:5-9(5장), 에베소서 6:10-18(6장)을 제시하고 설명해 나간다. 이렇게 한 다음 제3부에서는 성화의 동기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 제를 다룬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즉 자비라는 이야기다. 히브리서 12:4- 11(7장), 로마서 12:1-2(8장), 시편 112:1-10(9장), 마태복음 20:1-16 (10장)을 들이대 풀어 나간다. 그래서 본서는 크게 둘로 나눌 수도 있다. 먼저 칭의를 다루고 나중엔 성화를 취급한다. 이렇듯 기독교는 철저히 은혜의 종교이다. 우리의 행위는 은혜의 결과일 따 름이지 그것이 칭의나 성화의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 본서의 주장이다. 커버넌트신학교 학장이자 탁월한 설교자인 브리이언 채플은 북미 교회에 일 고 있는 이 신선한 은혜의 바람이 더 확산되기를 고대한다. 복음주의 교회 가 대부분 지난 세기 동안 율법주의라는 혹한의 시절을 겪어왔지만 이제 불 기 시작한 은혜의 교리가 따뜻한 봄바람처럼 교회 위로 불어와서 율법주의나 율법폐기론이나 자율주의라는 폐단까지 넘고 일어서기를 바라고 있다(209 쪽). 이 고무적인 현실은 북미 교회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한국교회에서도 확 인되는데. 아무쪼록 이 책이 이 고무적인 일에 더 널리 쓰였으면 한다. 목회 자나 일반 성도도 고민하고 반성케 하는 책으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조주석 press@hapdong.ac.kr
51 no image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서평-조주석 합신편집실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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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1 2004-04-28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서평-조주석/ 합신출판부 편집실장 우리가 이룩한 경제 성장을 세계는 모두 다 놀라워한다. 또 부러워하는 나라 들도 적지 않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가난했다. 하지만 이제 한 국 경제는 거품이 끼여 있다고 지적하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밤하늘에 빨갛게 물든 십자가로 대표되는 예배당도 우리만큼 많은 나라는 없 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신학자나 목사님들이 이 기이한 현상에 놀라워하 고 또 칭찬한다. 교회도 많고 목사도 많고 신학교도 많고 해외선교사도 많고 열심도 대단하다. 하지만 냉정히 따질 때 한국교회에 거품이 상당히 끼여 있 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거품이 낀 경제나 교회를 놓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물 론 이 자리는 경제를 논하는 자리가 아닌 까닭에 교회만 대상으로 삼겠다. 교 회 는 사실 구원받은 무리들이 하나를 이룬 하나님의 거룩한 사회이다. 이 세 상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존재요 사회적 실체이다. 따라서 구원과 아무 상관없 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교회라면 이름은 교회여도 하나님의 교회일 수는 없 다. 아마도 한국교회의 거품을 논하자면 문제점이 여기에 있을 것 같다. 그 핵심 사안은 구원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왜 구원은 필요한가? 구원은 누가 계획하고 주는 것인가? 김남준 목사의 은 이런 물음에 답변을 하고 있다. TV 토론장에 나와 한 것이 아니라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한 것이다. 2003년 고난 주간에 교회 사경회에서 시작하여 약 16주간에 걸쳐 전한 설교로써 그 교인들 에게 답한 것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 절망적인 영혼의 죽음의 상태로부터의 구출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생명적인 관계를 다시 회복 하여 창조 목적을 따라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71쪽). 즉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과정이다. 구원이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사죄를 받는 것이요 하나님 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시는 것이다. 구원은 사죄와 성화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삶을 인정하시고 받아주시고 기뻐 하신다. 하지만 구원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원은 영화를 포함한다. 우 리 주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는 영화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다. 본서는 대체로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죄와 사죄의 관계 문제를 잠시 생 각해 보자. 죄가 없는 개인이나 사회나 나라는 없다. 죄는 재판으로 그 형벌 의 경중도 가려진다. 대선자금으로 드러난 볼썽사나운 치부가 법의 심판대 앞 에 놓인 현실이 매스컴을 통해 구구절절이 보도되고 있다. 이전 같으면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사법권의 독립성이 드러나 뿌듯함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법 기관보다 높은 판단의 잣대도 있다. 인간의 도덕적 양심이다. 이 기준에 따 라 한 점 부끄럼 없는 깨끗한 사람이란 아무도 없다는 말에 수긍이 갈 것이 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경의 다음과 같은 선언에 선뜻 수긍하려 들지 않는 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선을 행하 는 자는 없나니 하 나도 없도다"(롬 3:10,11). 죄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 어쩐지 찜찜 해 하고 등부터 돌리고 싶어한다. 이것이 현대인이 갖는 특징이요 욕구요 어 두움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라고 시편기자는 지적한 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 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이런 현대인을 향 해 설교자는 죄의 실체와 그 무서운 형벌을 들이대어 죄인이라 자복시키고 하 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선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구하게 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죄를 추궁하는 식의 협박조 설교는 성경의 태도와 거리가 멀다. 죄를 깨달을 수 있게 전해야 한다. 이 글들을 처음부터 읽어온 독자들에게 이제 한 가지 밝히고 싶은 바가 있 다. 그것은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풀어내려고 (1 월), (2월), (3월), (4월)과 같은 여러 책들을 소개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책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 아나신 사실, 그리스도 의 구속 곧 복음을 풍부히 다루고 있다. 이 복음을 믿고 고백하는 무리의 수가 더 늘어난다면 교회에서 거품은 사라 질 것이다. 본서는 저자의 시무하는 교회가 그런 교회로 서기를 원해서 가르 친 설교였으리라 그려 본다. 우리 곁에 이러한 목회자와 교회가 더 늘어나기 를 주님께 한구석에서나마 빈다.
50 no image 부활 (서평-조주석 합신편집실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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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9 2004-04-02
부활 폴비슬리 머레이 지음/정옥배 옮김/신국판/382면/IVP/2004.3발행 어느 날 출근해서 신문을 펼쳤는데 (The Message of the Resurrection, 2000)이라는 최신간 책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 수첩에 서 지 정보를 메모하고 며칠 후 서점에 나가 그 책만 사들고 돌아왔다. 사실 부활에 관한 서책이 우리 기독교 출판계에는 절대 빈곤한 현실이다. 신 앙 실용 서적은 넘실대는데 정작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외면 당하 다고 있다. 주객의 전도요 젯밥에 마음 빼앗긴 냄새나는 장면이다. 예수의 부 활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당장 짚어볼 대목이다. 하여, 이 책을 펴낸 IVP에 열 렬히 박수를 보내며 치하하고 내심으로 기뻐한다. 폴 비슬리 머레이(Paul Beasley-Murray)는 한때 선교사였고 지금은 목사요 신 약학자이기도 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하고, 맨체스터대학에서 신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부친 조지 비슬리 머레이도 신약학자이 며 (1947)와 (1964)라는 책도 저술했다. 이런 책들이 나온 시기를 보면, 불트만이 예수의 부활은 신화다고 폄하하고 깔아뭉 갠 학문적으로 정말 힘들었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 두 부자는 대를 이어가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보(家寶)처럼 세상에 자랑한다. 믿음의 훌륭한 가문이 다. 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신약의 핵심 메시지 다." 이 "부활의 메시지가 신약 모든 부분에 스며 있다"(21쪽). 이렇게 주장 하면서 중요한 주제들을 명확히 보여준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다. 예 수 부활은 신자의 현재적 삶에 큰 능력으로 작용도 하고 미래의 소망이기도 하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만천하의 주님으로 드러나게 한 하나님의 능력의 표 현이다. 지은이의 이러한 주장은 부활의 메시지가 약화되어 서구 교회의 결핍 을 가져왔다는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본서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해당 부활 본문을 선정해 차근차근 강해해 나간다 는 점이다. 먼저 4 복음서에 기록된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출현 본문 들을 강해한다(1-4장). 바울과 다른 사도들 의 증거도 다룬다(5-6장).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가 사용한 찬송, 신조, 신앙고백에 나타난 예수 부활의 증거 도 다룬다(7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20세기 중반부터 예수 부활을 놓고 격전 을 치른 양대 진영 신학자들도 간략히 언급한다(8장). 하지만 우리는 그 중심 부에 있지 아니한 어린 교회여서 그 대결을 멀리서 구경하거나 거드는 정도였 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벅찬 일이었으리라! 예수 부활 이전에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 한 베드로였지만 그런 그의 믿음은 계집종 앞에서조차 처참히 무너진다. 순 간 목숨이 아까웠던 것이다. 반면 예수 부활 후 그의 믿음은 요지부동한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종교최고재판소인 공회의 위협 앞에서조차 두려움 은 싹 가신다. 이런 백팔십도의 급변에 사람들은 당혹해 한다. 특히 20세기 중엽에 루돌프 불트만 같은 학자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예수 부활을 초 대교회의 산물로 깎아 내리고 신화(神話)라는 말로 그 당혹감을 감추려 한 다. 여기에 편승해서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교회도 신학자도 서구에 서는 덩달아 일어났다. 물 론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그런 담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 답은 다 안 다. 예수의 부활이다. 부활의 주님을 친히 목격한 그는 오순절날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담대히 선포한다. 부 활이 그런 큰 확신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선포는 항상 그리스 도의 부활이 그 중심에 있었다. 우리처럼 부활절에나 전하는 절기용 주제가 결코 아니었다. 이 점이 초대교회와 우리가 판연히 구별되는 장면이다. 예수 부활은 이 땅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그리 스도의 빛이라는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보배는 자신 을 못났다고 생각하는, 질그릇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간직할 수 있다. 예수 의 부활은 고난 한가운데서 더욱 빛나는 능력이라고 한다(201-209쪽). 지은이 의 이런 고찰에 내 마음이 더 끌렸다. 마틴 루터 선생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나는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리고 천 사가 내 무덤을 두드리면서 '일어날 시간입니다. 루터 박사님! 심판 날이에 요!'라고 말할 때까지 아무것도 더 알지 못할 것이다"(235쪽). 이토록 심리적 으로 안정되고 편안하게 한 능력이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이제 책을 펴서 그 해답을 찾아보는 수고 정도는 독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49 no image 신약에 나타난 부활 (서평-조주석 합신편집실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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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8 2004-03-03
신약에 나타난 부활 머레이 J. 해리스 지음/ClC/서인선 옮김/신국판/351면/1995.8발행 서평-조주석/합신편집실장 학교 뒷산은 1,2월의 풍경으로 말하면 그윽하다. 그 색깔의 맛이 아주 깊다 고 할까!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그 맛은 더욱 깊게 배어난다. 이런 즐거움 때 문에 그와 같은 다른 산들에도 매료된다. 하지만 슬픈 마음으로 그 숲을 보노 라면 죽은 거나 별 다름없어 보인다. 한두 개 달린 이파리들은 한 나무의 죽 음을 상징하는 듯 대롱대롱 한다. 그래도 3,4월이 지나고 싱그러운 5월이 오 면 돋아난 새움으로 그런 우려와 걱정과 두려움은 모두 싹 가신다. 고목 같 은 나무에서도 생명은 힘차게 뚫고 나오다. '부활' 하면 금방 떠오르는 우리의 추억은 여의도 광장이다. 부활절이면 수많 은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갔다. 그러던 광장이 군사문화 청산이라는 명분과 함 께 싹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제 그 추억도 기념사진 한 장일 뿐이다. 캄캄한 새벽부터 부산떨던 부활절의 열심과는 달리 우리의 믿음에 큰 능력과 소망과 확신을 갖게 한 부활 메시지는 적었던 것 같다. 앞선 열심에 비해 받은 가르 침은 빈약했다. 이런 아픈 과거를 우리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산다. 이제 한달 남짓한 부활절 을 앞에 두고 어떻게 준비할까? 성경을 부지런히 읽을까! 수난절 금식을 할 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일상만 쫓아갈까! 을 시간 내어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이것이 부담스러우 면 더 얇은 책도 있다. (G.E. 래드). (J.A. 스케프). 더 깊이 읽고 싶으면 (리챠드 개핀)이라 는 책도 있다. 너나없이 여가보다는 부활이 더 소중하다는 인식은 다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시간을 내어 부활에 관한 책 한 권 들기란 그리 만만치 않다. 날마다 보는 아 홉시 뉴스나 드라마 앞에서 시간 죽이기는 쉬어도 책 잡기는 쉽지 않다. 여 가 생활이다 휫트니스다 여행이다 하는 데 들이는 시간은 안 아까워도 책 한 권 택해 이 3월 한 달 보내자는 데는 선뜻 나서기 어려울 것이다. 부활 신앙 의 실력을 쌓자는 데도 그럴 것이다. 솔선수범하는 수밖에? 대학 2년생인 우 리 아들한테나 먼저 권해봐야지. 을 좀더 소개하겠다. 이 책은 (493p. 1990)의 제1부만 번역한 것이다. 제2부는 저자가 부활의 역사성을 반 대하는 노만 가이슬러와 석의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주고받은 논쟁을 담고 있어 서 2부는 빼고 1부만 번역했노라 역자 서문을 붙였다. 개스크(W.W. Gasque) 박사는 본서를 가리켜 "복음주의적 시각에서 부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가 장 철저하게 또 학적으로 다룬" 책이라고 평한다. 역서는 모두 3부로 나뉘는데 독자가 이 책을 택해 읽기로 한다면 제2부부터 시작하기를 권한다. 처음부터 보다가 정작 중요한 2부로 넘어가지도 못한 채 중도 탈락할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한 토막만 소개해 보자. 당 시 유대 문학에 따르면, 여성의 증거는 법정에서 인정도 받지 못했다고 한 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자는 누구였는가? 여성인 막달 라 마리아였다(요 20:11-18). 이렇게 성경은 세상 방식으로는 가장 설득력 없 는 자의 목격에 부활의 사실성을 의 탁한다. 그뿐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 직 신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 역 사가는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부활의 사실성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아무 자격 도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부활의 사실성을 오직 신자에게만 의탁 하셨다. 아주 귀한 은혜를 입히신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전 내내 인터넷을 뒤졌다. 검색해서 찾은 부활에 관한 책은 고 작 10여권 남짓했다. 폐간된 책들도 있었고 남은 책들도 나온 지 5년이 넘는 폐간 직전의 것이었다. 도서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고서로 지정될 형편이 다. 독자는 책을 사는 열심 좀 내야겠고 출판사들은 재번역하고 디자인도 멋 있게 꾸며 독자의 시선을 끌어내야 하겠다. "예수의 부활은 구속의 중심이다"고 한 R.B. 개핀 박사의 중요하고도 외로운 논지가 이 땅에서 다시 드높여졌으면 한다. 그래야 기독교에 새바람이 불 것 이다. 이러한 소망도 공염불로 끝날 공산이 크다는 생각에 그저 씁쓰레 할 뿐 이다.
48 no image 그리스도의 십자가 (서평-조주석 합신편집실장)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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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8 2004-02-06
그리스도의 십자가 존 스토트 지음/IVP/558쪽/1998년 개정판 서평:조주석/ 합신출판부 편집실장 서양은 우리의 현실과 다르다. 기독교의 세속화가 깊고 배교적 요소도 강한 서양인 반면 우리는 그런 특징들이 옅고 복음적인 세력이 주류를 이룬다. 미 숙은 하겠으나 서양보다는 우리의 기독교가 더 생동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 른 삶의 정황으로 인해 설교나 글을 쓰는 것도 그 접근이 다를 수 있다.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분명 양서(良書)이지만 접근의 차이로 그 논의는 좀 낯설 수 있다. 이 책 전체의 핵심어는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 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 그리스도의 죽 음과 부활이 복음의 기원이요 그 자체요 핵심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이방 선 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좀더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했다. 대속의 죽음 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는 '칭의', 하나님과의 '화목', 하나님의 사랑받 는 '자녀 됨' 등에 무게가 더 실린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은 서방 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대대로 스며들어 내려왔 고, 16세기 종교개혁은 이를 왜곡시킨 서방 신학을 바로잡아 신앙의 물꼬를 바르게 해 놓았다. 이런 역사 흐름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철저 히 서방 교회의 신앙 전통을 고수한다.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자 꾸 서진해서 로마 교회를 발판으로 유럽에 확산되었고 그 복음은 북미로 전파 되어 마침내 선교지 한국 교회도 서게 된다. 우리는 이런 서방 교회의 전통 에 서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역사 흐름을 타고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복음 이해와 그 신앙에서 우리는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는지 의문이 다. 물론 이전보다는 복음 이해가 더 부요해진 좋은 양상도 여기저기서 보이 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런 기색이 전 교회적인 색체는 아닌 것 같다. 왜 그럴 까? 교회를 맡아 말씀을 전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 이 옅은 까닭이라고 조심스레 어림해 본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좋은 타산지석은 로이 든 존스 목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안목과 설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었다. 그는 사역 초기의 설교에서 중생은 강조했지만 그리스도의 속 죄와 그의 공로는 전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남웨일즈의 브리젠드에서 설교 를 마쳤을 때 그곳 목사는 그의 설교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공로'에 대 한 언급은 거의 없다고 도전했다. 즉시 그는 자신이 즐겨 찾던 헌 책방으로 발을 옮겨 속죄에 관한 대표적인 책 두 권을 요구했고, 데일(R.W. Dale)이 쓴 『속죄』(The Atonement, 1875)와 데니(James Denney)가 쓴『그리스도의 죽 음』(The Death of Christ, 1902)을 소개받는다. 그가 이 책에 얼마나 깊이 몰입했던지 점심과 차 마시는 것까지 잊자 그의 아내는 의사를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할 정도였다. 이 책들을 다 읽고 난 존스 목사는 '복음의 참된 핵심과 기독교 신앙의 깊은 의미'를 발견했노라 외쳤고, 그 이후로 설교의 내용도 설교의 능력도 바뀌었 다. 이러한 일화를 지은이는 책 서문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소개한 다. 물론 본서는 십자가의 복음 이 무엇인지 아주 치밀하고 깊게 다룬다. 최근에 제기된 신학 문제뿐 아니라 역사 속에 묻힌 책들도 다시 꺼내 논의와 토론을 거쳐 복음 이해를 더 풍부히 제시하려고 애쓴다. 모두 13장과 결론으로 이루 어졌고 크게 4부로 나뉜다. 그리고 이런 물음들을 다룬다.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 자신이나 사도들이나 그 이후 온 세계 교회에서 중심을 차지하 는 중요한 사실인가(제1부)? 우리의 죄 용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 존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제2부)? 그리고 십자가로 성 취한 내용은 무엇인가(제3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하여 스토트는 자신의 입장 을 딱 견지하며 개혁신학에서 비켜선 신학자들일지라도 취해야 점이 있으면 조심스레 들이댄다. 이러한 물음들을 하나하나 대답한 다음, 제4부에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철저 히 바뀐 우리의 모든 관계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십자가는 십자가의 공동 체 곧 교회를 탄생시켰고, 교회는 성만찬을 통해 십자가의 은혜를 하나님 앞 에서 경축하며, 권력을 쥔 자가 아닌 섬기는 자라는 혁명적인 태도 변화를 그 리스도인으로 갖게 하며, 원수까지 사랑하게 하 며, 고난을 통한 영광에 이르 게 한다. 십자가에는 이런 능력이 있다. 이 만한 두께의 책(원서는 383쪽, 역서는 558쪽)을 서양의 상황은 절실히 요 구했겠으나 사실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영적 투쟁이나 신학 논쟁에서 서양만 큼 역사 대대로 얼키설킨 복잡한 전통도 없고, 또 정통 기독교를 옹호하거나 반대할 목적으로 좌우에 선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정치한 신학을 주장해야 할 첨예한 대립도 서양만큼 드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책을 끈질기게 읽어내노라면 자신이 들인 시간만큼 거둬들일 열매도 짭짤할 것이다. 촘촘히 읽고나면 어렴풋하던 구원의 신앙도 더 두터워지고, 어렵기만 하던 바울 서신 도 더 환히 보이게 되기를 기대한다. 구도자에게는 결코 편한 길이란 그 앞 에 없는 법!!
47 no image 복음이란 무엇인가 (서평-조주석 합신편집실장)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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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3 2004-01-07
조주석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편집실장) 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지음/두란노/213쪽/2003년 발행 어렸을 때 교회 다니면서 복음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사실 복음이 무엇인 지는 잘 몰랐다. 한참 커서도 잘 몰랐다. 부끄럽지만 대학 다닐 때도 잘 몰 랐다. 겨우 신학교 2학년 때에야 비로소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 복음의 풍부한 내용을 알고 싶었다. 그후 20년 세월을 훌쩍 넘긴 지금,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독자들에게 여기 소개한다. 이 책은 김세윤 박사가 쓴 소책자이다. 2001년에 대구와 부산에서 한 강의 를 토대로 다듬어 집필한 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 분이 나 더 잘 이해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돕기 위해 썼다고 밝힌다. 지은이는 훌 륭한 신약학자이다. 현재 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 교수라는 사실뿐 아니라 이 책이 더 큰 증거라고 생각한다. 예 수의 복음은 사도들의 복음과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이 물음은 신약신학 에서 논쟁을 일으키는 큰 주제이며, 이 물음을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상세 히 규명해 내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고, 그의 사도들 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복음을 선포했다. 이 양자는 단절되지 않았고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계시의 역사 발전이라는 신학적 방 법론을 통해 해명해 나간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약속"한 바를 그의 죽음으로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에 의한 약속과 예수에 의한 성취라는 구도로 제시한 다. 이 구도를 크게 둘로 나누어 제1부에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 음"이 무엇인지를 다루고, 제2부에서는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이 양자를 설명하면서 그 상관 관계를 다 루는데 변증적 요소도 많다. 또한 논의가 다소 복잡해지기도 하지만 복음의 내용은 우리 앞에 더 풍부히 제시된다. 사실 한 권의 책으로 이렇게 복음을 풍부히 설명하는 글을 대하기도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복음을 죄 용서 정 도로 좁 혀 이해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세계와 그 내용이 그렇게도 광활한 것인 가 하고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 도께서 성취하신 것이다. 이 하나의 복음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또 포괄적 으로 선포된다. 예컨대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좀더 초점을 맞추며, 누가 와 요한은 부활에 초점을 맞춘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을 함께 강조하는 복음을 선포한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 의 구체적 필요성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라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즉 복음 전파자는 자기 시 대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거기에 맞춰 복음의 어떤 측면을 더 강조할 것 인지 아니면 양자 모두 강조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뒤따른 다. 이 책을 차근차근 읽어나갈 때 독자는 분명 이에 대한 도움과 유익을 얻 으리라 확신한다. 지은이는 이 책의 대상을 불신자와 믿음의 초보자로 정했지만 책의 내용과 전 개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 대상의 범주를 훨씬 벗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대상 이 오히려 목회 소명자로서 신학 수업을 하고 있거나 복음을 현재 전 하고 있는 자에게 더 적절한 책이겠다 하는 판단이다. 이 책의 신학적 중량 감이 그만큼 무게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복음 이해를 바르고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가라는 물 음에 지은이는 회의적인 것 같다. 교인수는 굉장하지만 복음의 능력은 거기 에 미치지 못한다는 저자의 판단이다. 복음을 이해할 때, 내세에서 우리 영 혼의 안녕을 보장한다거나 또는 현세의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는 것 정도로 이 해하는 경우도 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교회 안에는 복음을 바로 믿어 구 원 얻을 자도 있겠지만, 헛되이 믿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도 있을 것이라 고 지적한다. 헛된 믿음이 생기는 그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의 책임이 앞서겠 는가? 복음 전파자인가 아니면 듣는 자이겠는가? 이 책과 더불어 복음을 해명하는 또 하나의 책도 소개하고자 한다. 김홍전 박사의 『복음이란 무엇인가』(성약출판사)이다. 1964년 일본에서 행한 설 교들의 일부를 일본어로 출판했던 것인데, 1973년 우리말로 다시 옮긴 책이 다.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이 애독한 것으로 안 다. 복음이 무엇인지 간절 히 알기 원하는 자라면 먼저 김홍전 박사의 책을 읽고 그 토대 위에 김세윤 박사의 글을 읽는다면 큰 유익을 얻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46 no image 정암 박윤선 목사의『개혁주의 교리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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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4 2003-09-25
박윤선,『개혁주의 교리학』, 서울 영음사, 2003, 755쪽, 주경신학자의 교의학 저서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선물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담임목사, 횃불트리니티 신대원대학교 명예총장/ 조직신학 교수, 아시아신학연맹(ATA) 회장, 세계신학교 총학장 회의(PAD) 의 장) 성경 66 권의 주석을 저술하신, 한국이 낳은 세계적 주경신학자 박윤선 박 사의『개혁주의 교리학』 이 출판된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저서란 점에 서 한국교계에 놀라움과 함께 큰 기쁨을 준다. 사실상 조직신학은 탄탄한 주 경신학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확실한 주경신학의 기초 없이 온갖 종류의 철 학적 전제를 근거로 하여 철학적 신학을 주장하므로 세계 기독교에 많은 문제 를 야기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주경신학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박윤선 박사께서 교의학 분야에 유일하 게 이 저서를 남기신 것 은 너무도 다행한 일이다. 이번에 출판된『개혁주의 교리학』은, 박 박사님께서 그의 평생을 신학교에 몸담고 교수하실 때에 학교 의 요청을 따라 여러 차례 해를 거듭하여 교의학 강의를 하시면서 그때마다 그의 강의안을 보강하여 두셨던 그 원고를 박 박사의 제자이신 합동신학교의 김재성 교수(조직신학)의 원고정돈과 역시 박 박사의 제자이신 신구약 두 교 수의 성경원어 및 원서교정의 수고로 말미암아 출판된 것이다. 박 박사의『개혁주의 교리학』은 전통적 교리학의 기본 주제들을 다루는 것 은 물론이고 신학적으로 혼동이 심했던 20세기에 부각된 현대신학 특히 칼 바 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과 기타 비정통 신학, 즉 폴 틸리히의 신학, 해방신 학, 세속화 신학, 소망의 신학, 과정 신학 등을 전통적 개혁주의 입장과 특 히 철저한 주경신학의 전망에서 비판해 줌으로써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제 자리에 확고하게 서도록 해 준 저서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교의학 저서보다 더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년시절까지(7-17세) 이미 동양철학을 통달한 신학자로서 유 교사상과 불교사상 및 기타 동양 종교와 사 상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토론해 준 것은 다른 교의학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장점이라 하겠다. 동서양 의 철학과 종교를 폭넓게 다루며 해석한 저서는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다. 한 국의 목회자나 신학도들이나 성장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박윤선 박사님께서 남 겨주신 유작이요, 주경 신학적 교의학이라는 점에서 어느 책보다 귀하게 여겨 진다. 이 책의 가치는 오랜 세월 동안 성경 원어들은 물론 한문, 일본어를 포함 한 동서양의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신 박 박사님께서 일찍이 중국, 일 본, 미국, 영국, 독일, 특히 화란의 수많은 개혁주의 원서들을 직접 읽으시 고 많은 각주를 남겨주신 것은 내용에 대한 풍부함과 신뢰를 더해 준다. 그 외에도 마귀론, 진화론, 은혜 계약, 속죄, 방언, 입신, 이단, 재림에 이르기 까지 논란이 되는 주제들에 대한 건실한 성경적 대답을 제공해 주셔서 읽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세계적인 한국의 대학자 박윤선 박사의 유작인 『개혁주의 교리학』의 출판은 필자를 포함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쌍수 를 들어 크게 환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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