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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no image |민현필의 북카페| 삶으로 드리는 주기도문
편집부
2500 2016-12-13
삶으로 드리는 주기도문 |저자 : 채영삼 교수(이레서원)|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 내는 일상 속의 제사장” 2016년 가을은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만추의 기쁨을 즐길 여유도 없이 정말 스산하게 지나갔다. 우리가 그토록 신뢰하고 믿었던 정치, 종교계의 지도자들의 몰락에 관한 소식들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애잔하다 못해 무너지는 심정이다. 밀당하듯 벌어지는 정치권과 광장의 소식들을 전하는 특종 보도들과 기사들이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더라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어느새 우리는 ‘막장 드라마’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던 중 문득 마음 한켠에 스쳐 지나가는 기도가 있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기도를 떠올리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 언제부턴가 자리잡기 시작한 아득한 절망감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이내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열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옷깃을 여미는 겨울의 초입에 이 기도를 떠올린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었으리라. <삶으로 드리는 주기도문>은 비록 2014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한국교회를 향해 시의성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 책이 기존의 주기도문 강해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교적 최근까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회적인 이슈들이나 교계 내부의 아픔들에 대한 고뇌에 찬 반성과 성찰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만의 성경신학적 프리즘을 통해 주기도문(Lord’s prayer)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아름답게 펼쳐내고 있다. 6개의 청원으로 이루어진 주기도문(Lord’s prayer)을 해설하면서 저자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특히, 저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더럽히면 그 더럽혀진 복음이 다시 교회를 더럽히고, 그렇게 더럽혀진 교회는 또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행복이 우상이 되고, 엔터테인먼트가 종교가 된 소비주의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극대화되고, 복음의 신앙마저도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하나님은 수단이 되고, 물질은 숭배의 대상이 되어 버린 현실에 대해 저자는 개탄한다. 이 인간의 욕망과 맘몬숭배야말로 복음을 더럽힌 주요한 원인임을 저자는 지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자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신앙이란 외면하고 버리고 싶은 이 현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함께 그 현실과 세상 한복판, 악의 한복판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다. 죽음을 뚫고 부활에 이르는 것이며, 악을 뚫고 의와 평강이 거하는 새 하늘, 새 땅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구원 받는다는 것은 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하나님의 선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은혜와 진리로, 하늘의 능력으로 뚫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현실을 피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내 가족, 내 교회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신앙에 대한 일침이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예수 받는 것‘이 복음이다. 예수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그것을 누리고 다스리고 섬기며, 그 나라의 완성을 대망하는 ’산 소망‘(living hope)을 누리며 사는 것이 복음인 것이다. ’썩어지고 더럽고 허무한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영원한 생명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함께 부활 생명을 지금도 누리며 장차 몸의 부활까지 받을 소망으로 사는 것, 날마다 속 사람이 그분의 형상대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바로 복음임을 저자는 역설한다. 이렇게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회복할 때 성도들은 이 땅에서 ’단순한 삶‘을 살 수 있 다. 이것이 주기도문 후반부의 3개의 청원에 나타난 주님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세상과의 ‘경건의 거리’를 두면서도 이웃을 향한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일상 속의 제사장’들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정복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난 심령의 회복된 양심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 사람들을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 내는 일상 속의 제사장!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 제사장의 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처했던 상황만큼이나 암울하다. 혹자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이 한국교회에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들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비록 그것이 피상적인 인상비평 정도의 수준일지라도, 더 중요한 것은 이사야처럼 ‘온 땅에 충만하신 여호와의 영광’과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주권적인 통치’의 현실을 다시금 자각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일상의 제사장’들로 헌신하는 일일 것이다.
144 no image |민현필의 북카페| 돈에서 해방된 교회
편집부
2668 2016-09-20
돈에서 해방된 교회 |돈에서 해방된 교회, 박득훈 목사, 포이에마|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우리는 ‘돈의 본질과 그 정체’를 바로 파악해야” 제1, 2금융권을 통틀어 현재 한국교회가 은행에 진 빚은 대략 10조원 정도라고 한다. 이것을 연리 5.5~6.5%로 계산할 경우 매달 은행 이자로 나가는 돈만 600억이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교회 부도가 늘어나면서 연체 이자와 경매 물건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최근에는 이렇게 경매로 나온 교회들을 이단들이 천문학적인 액수를 투자해 매입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어디 이뿐인가. 경기 불황 속에서 자녀 교육비에 대출 빚과 이자 감당하기에도 벅찬 성도들의 헌금과 십일조는 갈수록 줄고 있고, 교세는 감소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과연 저 엄청난 빚을 청산할 수는 있는걸까? 왕의 재정과 고지론, 깨끗한 부자를 설파해온 한국교회는 왜 이토록 빚에 허덕이는 신세가 됐을까. 혹자는 이런 현실 인식을 믿음 없고 부정적인 아웃사이더의 견해로 일축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현실을 빨리 직시하고 어디서부터 이런 문제가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진단과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득훈 목사의 <돈에서 해방된 교회>는 한국교회의 곪고 상처난 부분들을 경제적인 시각에서 잘 분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장에서 저자는 한국교회가 처한 사회적 맥락이 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라고 말한다. 너무나 뻔한 얘기다. 하지만 저자는 그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에 ‘맘몬 숭배’가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우리가 숨을 쉬듯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젊은이들이 아픈 것은 청춘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삶이 지리멸렬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개인의 노력과 자기관리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메시지를 수도 없이 들어 왔다. 저자의 따르면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이렇듯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선호한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가난의 책임은 오롯이 그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과 가정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동안 왜 이렇듯 냉혹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친화적이었을까. 저자는 그 주요한 원인을 6.25 전쟁과 분단의 아픔에서 찾고 있다. 즉, 이 격동의 시기 동안 구세주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미국이 추구했던 정신이 바로 자본주의였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장에서 저자는 맘몬 숭배를 그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가 한국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오게 된 역사적 맥락을 짚어낸다. 그리스도인이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던 3.1 운동의 실패를 기점으로 교회의 정치참여 의식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대신 개인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신앙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그 와중에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교회에 뼈아픈 상처를 남기게 된다. 저자는 이 신사참배를 철저히 회개하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수치심을 감추는 방어기제의 측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북한의 공산 치하에서 핍박받다가 월남한 개신교 지도자들이 가세하면서 이런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토지를 비롯한 사회적 자산을 소유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공산주의 치하에서 자산을 강탈당한 아픈 경험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 군정 당국으로부터 일본인들이 두고 간 막대한 종교재산을 무상으로 공여 받는 등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또,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미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살아남은 남한의 교회는 반공주의와 친자본주의적 태도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3장에서 저자는 이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어떻게 한국교회의 신앙을 왜곡시켰는지를 상세히 분석하면서 대표적인 증상과 사례들을 몇 가지 제시한다. 그 첫번째 증상은 바로 기복신앙이다. 저자는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기복신앙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낸다. 즉 그것은 ‘돈 자체를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을 단지 이용할 뿐인 왜곡된 신앙’이다. 저자는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한다. 두번째는 번영신학적인 복음이다. 이는 고후 8:9이나 요삼 2절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외에도 저자는 야베스의 기도, 깨끗한 부자론, 긍정의 힘, 값싼 은혜와 죽은 믿음을 열거하는데,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기본정신은 기복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4장에서는 맘몬의 정신에 의해 뒤틀리고 왜곡된 신앙이 어떻게 한국 교회를 부패시켰는지를 분석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두 가지 문제인 개교회성장주의와 빗나간 정치참여를 예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5~7장에서 저자는 그 동안의 성찰과 분석들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저자는 우리가 맘몬의 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의 본질과 그 정체’를 바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경제 문제는 결국 신앙의 문제와 맞닿아 있으며, 이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 좀 더 거시적으로는 공동체적 민주주의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결론을 맺고 있다. ‘기독교 경제윤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추구하면서 그것을 한국교회라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다. 전반부를 통해 보여준 저자의 구체적인 현실 인식과 문제제기에 비해 대안은 다소 원론적인 느낌을 준다. 당장 한국교회는 10조원을 육박하는 막대한 부채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던가. 그러나 아쉽게도 본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빠른 지름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결국 본질로 돌아가는 것만이 가장 빠른 회복의 길이리라.
143 no image |민현필의 북카페| 아더 핑크 -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했던 진정한 에큐메니컬
편집부
2387 2016-08-23
아더 핑크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했던 진정한 에큐메니컬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우리가 할 일은 진리를 성경에서 제시하는 대로 설명하는 것” 아더 핑크는 미국, 호주, 영국 남부에 이어 영국 북부의 한 작은 섬에서 생을 마칠 때가지 전 세계 여러 나라, 여러 교파의 사람들과 만나 직, 간접적인 소통을 나누었던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인해 핑크는 알미니안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 팽배하던 그 시대와 필연적인 불화를 겪어야만 했다. 핑크는 분명, 모든 사람이나 교단이 진리를 전부 소유할 수는 없으며 성령은 획일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했다. 따라서 교파의 다양성 또한 우리가 '찬송해야 할 주제'라는 점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떤 교단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그것이 바로 [성경연구] 라는 잡지의 편집이었다. 그가 이 간행물을 편집하면서 늘 염두에 두었던 것은 모든 교파를 아우르는 '핵심 진리'에 집중하는 것과 그 진리를 각각의 결에 따라 다루는 '균형'이었다. 그것이 아마 어둠과 혼돈 속에 있던 당시 교회에 대한 아더 핑크식 대안이었을 것이다. 균형잡힌 메시지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말하는 것의 열 배나 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글을 쓰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훨씬 더 영광스럽게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은 믿음을 열심히 옹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진리를 성경에서 제시하는 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명백히 부인하는 것보다 그릇되게 설명하고 왜곡하는 것이 훨씬 더 잘못이 크기 때문입니다.” 핑크의 전기를 읽으면서 핑크야말로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한 진정한 에큐매니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걸어간 외곬수의 삶만이 꼭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소명과 그에 대한 확신이다. 그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알았고, 그분이 주신 소명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줄 아는 복된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는 챕터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흐느껴 울고 말았다. 그의 진가를 몰라보았던 그 시대가 원망스러워서가 아니라, 세상을 부인하고 올곧게 자신만의 부르심의 경주를 이제 막 끝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다 이해 못했을지라도, 주님은 그를 알아주시리라. 아더 핑크, 주님을 향한 그의 순전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충성됨은 내 마음 속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또 하나의 별이 되어 남을 것 같다.
142 |민현필의 북카페| 성경에 대한 고백적인 해석이란? 파일
편집부
2936 2016-07-19
성경에 대한 고백적인 해석이란? Michael Marlowe, Bible Research 편집인 < 번역 : 민현필 목사(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 전공)> “전통적인 신앙고백서들은 성경신학의 체계적이고도 요약적인 진술” ‘고백적인 해석’이란 신앙고백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 해석방법을 일컫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신앙고백이란 단순하면서 정교하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다. 좀 이상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성경 신학과 기독교적 의무들 -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것들 - 의 중요한 요점들에 대한 요약적인 진술들과 상응하는 내용들로 구성 되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요약들(‘신앙고백’, 역자 주)은 우리가 성경의 각 본문들을 해석할 때 성경신학 전체의 전반적인 구조를 기억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매우 유용하다. 성경을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훈련된 사역자의 지도 아래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고백적인 해석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최근 – 아마도 지난 세기쯤에 – 각 신학교들 안에서는 그저 뒷 배경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전 시대의 성경 주석가들은 그와 같은 신앙고백을 마음 속에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본문을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종교 개혁자들이 천주교의 해석 전통들을 거부했을 때, 그들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교회로 하여금 별다른 지도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개혁교회들이 동의하고 찬성할 만한, 사려 깊게 구조화된 몇 가지의 교리적 요약들을 제시했다. 이것들이 바로 16-17세기 개신교의 위대한 신앙고백 문서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문제는 어떤 고백 문서를 성경의 전체적인 신학적 맥락에 관한 가이드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 신학의 믿을 만한 요약으로 삼을 수 있는 몇 가지 역사적인 고백들이 있다. 어떤 고백 문서를 택할 것이냐는 학생들이 어떤 신학적인 토대 위에 서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전통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침례교도들은 ‘1689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개정판)이나 더 단순하면서 최근에(2000년) 나온 남침례교단의 신앙고백서를 사용할 수도 있다. 내 견해로는, 지난 세기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잠시 빤짝했다가 사라지는 대중적인 성경 해설서들이나 독자 스스로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게 만들어줄 것처럼 약속하는 온갖 종류의 책들 속에서 표류하게 된 결과 이러한 성경신학의 체계적이고도 요약적인 진술인 신앙고백서들은 슬프게도 소홀히 취급되기 시작했다. 물론 해석학에 관한 좋은 책들도 있기는 하다. 또 나는 그것들을 내 독서 목록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독자들이 각종 언어들에 대한 지식이 결핍되어 있거나, 성경의 각 권들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그 어떤 해석학적 매뉴얼도 독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정확한 성경 해석이 가능하도록 구비시켜 줄 수는 없다. 또한 조직신학적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신학적으로 면밀하게 그 상관관계들을 따져보면 옳을 수가 없는 몇몇 해석들이 갖는 함의들을 보는 일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쯤해서 우리는 ‘교리 NO, 성경 Yes’(No Creed but the Bible)라는 생각 속에서 모든 신조들과 고백 문서들의 사용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언급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A. A. 핫지는 우리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성경의 각 부분들을 최선을 다해 해석해야 하며, 성경이 각 주제들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든 내용들을 일관성 있는 전체의 큰 덩어리로 통합시켜야 한다. 또, 각각의 주제들에 대한 그 가르침들을 조화로운 시스템의 부분들로서 상호 연관성 갖도록 조정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모든 학생들은 이 작업을 해야 하며, 이 모든 과정들은 비록 그들이 인간의 신조들이나 신앙고백들의 정당성을 인정하든 부인하든지 상관없이, 바로 그들 자신의 기도나 종교적인 담론 속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통해 하고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드러내 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교회에 의해 서서히 정교해지고 다듬어진 교리적 진술들에 의해 제공되는 도움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얻지 못한 채 자신만의 독자적인 지혜에 의한 자신만의 교리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실질적인 문제는, 종종 과장되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이 만들어 낸 신조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집합적인 몸인 (교회의) 정련되고 입증된 신앙과 신조들을 거부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판단과 사사로운 지혜 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 원문 출처 : http://www.bible-researcher.com/confessional.html
141 no image <독후감> 어린 아이들도 회심이 가능합니다_전두표 형제
편집부
2355 2016-07-05
어린 아이들도 회심이 가능합니다. < 전두표 형제, 시광교회 > 우리 교회에서는 오후 예배 때 세례에 관한 설교가 연속 이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주제가 ‘유아 세례’와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장로교회 교인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유아 세례를 논할 때 아이들의 회심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됩니다.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합당한가?" 그리고 "아이들도 회심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음들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아이들도 회심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해 답을 주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회심 이야기 '(제임스 제인 웨이, 코튼 매더 저, 지평서원 간)입니다. 이 책에는 회심한 어린 아이들의 반응과 아이들이 구원의 확신으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이 회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회심하는 것에 대하여 의심스러운 반응을 보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에게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반응을 아이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아이들도 회심이 가능한지를 묻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회심이 가능하다면 오늘날에도 그런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회심할 수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아이들의 지각 능력에 의문을 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회심은 지성의 반응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이요, 주는 구원자이시자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은 '복음을 듣고' 그 '내용을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내용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동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 고백은 일면 지적 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누구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라는 사실을 먼저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죄인이 회심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조명해주신 결과입니다. 혼자 성경 말씀을 읽고, 복음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혼자서 믿고 회심할 수 있다면 성령께서 빌립더러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가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행 8:27). 이런 점을 보아도 회심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죄인에게 역사하신 결과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른들보다 지능이 낮은 아이들도 회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아이들도 회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능의 정도와 상관없이 언약 자손을 구원해 주십니다. 물론 신자의 모든 자녀들을 구원해 주시지는 않지만, 얼마의 자녀들을 구원해 주십니다(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자녀 양육 , 조엘 비키 저, 지평서원 간, 50p. 참고). 단 아이들의 회심을 바라볼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자신의 내적 상태를 스스로 진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상태를 조리 있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들의 회심 여부를 한눈에 알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아이들의 회심 이야기 '에서와 같이 극적인 회심의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회심할 때에 모두가 두드러진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심할 때 극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회심을 자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회심 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뒤늦게 '내가 회심 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 때문에 장로교에서는 부모의 믿음을 따라 유아 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면 그때에 입교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이들도 회심할 수 있다면, 이제 남은 일이 있습니다. 곧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조엘 비키의 조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분의 온전한 희생이 구원의 유일한 토대이자 근거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 요소이며, 성령은 그것을 죄인의 마음에 적용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필요하다. 둘째, 우리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복종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자녀들에게 외적인 선(goodness)만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언약의 의무를 온전히 이행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거룩한 삶은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바치는 절대적이고도 포괄적인 차원의 삶이다(고전 10:31; 벧전 1:15,16 참고). 우리는 자녀들의 외적 행위를 지켜보는 데 그치지 말고 그들의 심령을 돌보며, 그들 앞에 경건한 본을 보여 우리가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자녀들에게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경건한 교훈이 자녀들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출 12:24-27; 딤후 3:14,15 참고). 언약의 가정은 그리스도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 먹기 싫은 음식을 마구 쑤셔 넣듯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강요하기보다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만찬을 베풀듯이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시 34:8-16 참고). 이제 부모들은 아이들의 회심이 불가능 할 것이라는 의심을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회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곧 부모는 자녀들의 회심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려주어 아이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부모들의 그런 노력이 부단히 이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정하신 구원의 날에 성령님을 통해 아이들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140 |민현필의 북카페| 개혁주의 문화관 / 교회 중심성의 재발견 파일
편집부
2493 2016-06-07
개혁주의 문화관 / 교회 중심성의 재발견 <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부목사 > “개혁주의 문화관의 풍성하고 다양한 유산들을 만날 수 있어” 신학은 그 신학이 태동하게 된 시대적 배경뿐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고 소비하는 주체들이 처한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함의를 갖게 된다. 한 때는 유행하던 신학이 한 세대가 지나면 진부한 것으로 드러날 때도 있고, 과거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신학이 재조명되기도 한다. 그것은 진리의 상대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능력이 가진 한계성 때문에 발생하는 부득이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신학은 어떤 면에서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인문학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신학사의 뒤안길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를 좀 더 분별 있는 성찰의 길로 안내해주는 좋은 길잡이와 같은 책이다. 저자는 개혁주의권의 대표적인 문화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퍼와 스킬더, 그리고 반드루넨, 다우마를 중심으로 어떻게 신학이 당대의 컨텍스트와 조우하면서 변천해 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이 가진 최고의 미덕 중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개혁주의 문화관의 그리스도 중심성, 교회 중심성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재조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윤 교수가 인상적으로 부각시킨 ‘개혁주의 문화관의 교회 중심성’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의의를 갖는다. 예를 들면, 최근 <하나님 나라의 비밀>(스캇 맥나이트)이라는 책이 출간된 이후로 페이스북 상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 교회와 문화의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열띤 논쟁이 있었다. 그 책에서 스캇 맥나이트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해방신학의 원류로 규정하면서 이런 시도가 '사람들을 교회에서 빼어냄으로써 교회를 탈중심화'시키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일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면서 상당히 래디컬한 자신의 재세례파적 입장을 천명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사회봉사나 인권운동과 같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일과 등치시키는 오류를 지적한 부분은 공감할 만하다. ‘교회의 신실한 현존’ 없이 어떻게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통한 사역일 수밖에 없다. 또, 지역 교회의 일상 속에서 서로 교제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일구어 나가는 평범한 삶의 비범성을 풍성하게 드러낸 점 또한 스캇의 공로 중 하나다. 그러나 김재윤 교수는 '개혁주의 문화관'의 다양한 유산들을 소개하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나 변혁주의에 대한 비판이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며, 그 대안이 꼭 재세례파적인 입장으로만 귀결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행간의 메시지’를 통해 지적한다. 스캇처럼 카이퍼를 비판했던 같은 개혁주의자인 스킬더에 의하면, 신칼빈주의자들이 추구했던 문화변혁의 비전이 꼭 일반은총론을 기반으로 한 카이퍼주의로만 한정되지도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회복된 ‘문화사명’을 이어받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또, 스킬더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삼중 직분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 나가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일방적으로 스킬더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두 사람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달랐음을 지적하면서 카이퍼의 공헌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카이퍼는19세기 말의 발전과 진보의 시대를 살았던 신학자로서, 겉보기에는 기독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듯 보이는 세상을 살았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이미 프랑스 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태동한 이성주의, 자유주의였음을 보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근대적 자유가 당시 유럽 사회를 오히려 ‘획일성’의 늪에 빠뜨리고 있음을 간파했다. 따라서 카이퍼는 이 근대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삶의 체계로서의 신학’이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일반은총론과 영역주권’ 개념을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 영역주권 개념이 당시 네덜란드 교회의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임을 지적한다. 하지만 스킬더는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신학자였다. 스킬더가 보기에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실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었다. 또 스킬더는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문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원래 주어졌던 은사들을 ‘도둑질하여 실행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문화와 관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명령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원래 주어진 의미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스킬더가 문화변혁을 거부하고 반문화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식의 견해를 일축한다. 오히려 스킬더는 카이퍼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이다. 스킬더가 문화변혁에 대해 얼마나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그가 바르트의 탈정치적이고 탈문화적인 신학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스킬더에 의하면 바르트의 ‘극단적인 그리스도 중심성’이 젊은 청년들로 하여금 분별을 잃게 만들어 급기야 나치주의의 협력자들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르트주의자들은 이러한 스킬더의 비판은 지나친 것이며, 오히려 스킬더가 더 권력 지향적이라고 일축한다. 그들에 의하면 나치의 상황에 직면했던 바르트에게 탈문화, 탈정치적 입장은 곧 나치에 대한 저항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바르트주의자들의 변론은 일면 정당하게 들린다. 하지만, 스킬더의 지적 또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 외에도 이 책은 다우마나 반드루넨 같은 최근의 학자들의 대안적인 작업들도 소개하는데, 이 부분도 흥미롭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의 궁극적인 의도는 독자들이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지지하거나 선택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개혁주의 문화관의 풍성하고 다양한 유산들을 산책하면서 독자들을 좀 더 분별 있고 신중한 신학적 사색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구체적인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행간에 개혁주의 문화관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최근 학자들과의 대화의 흔적과 이를 반영한 성찰들이 엿보여서 좋았다. 아마도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있어서는 또 하나의 필독서가 될 것 같다. 특히 스킬더를 재발견한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큰 소득 중 하나이다.
139 |민현필의 북카페| 선하신 하나님 파일
편집부
2932 2016-04-12
선하신 하나님 <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부목사 > “신앙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것” 최근에 필자가 살고 있는 집 옆 공터에 새 건물이 올라오고 있다. 이틀 정도 포클레인으로 터파기를 하더니 순식간에 철근과 콘크리트가 부어지고 이내 4주 정도 만에 벌써 4층 높이 정도로 올라왔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이러니 부실공사지. 아무리 빌라라도 이렇게 날림으로 지어도 되는 거야’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필자는 사실 건축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이 과정이 날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한 때 자취생활 하면서 살던 집 근처에 고급 빌라가 들어선 적이 있는데, 지하 주차 공간을 포함하긴 했지만, 그 기초 공사만 상당 시간이 걸린 것을 오며가며 지켜본 경험이 있다. 그러니 바로 코앞에서 이뤄지는 이 초스피드 공사가 괜스레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신앙생활도 기초 공사가 중요하다. 우리의 신앙을 ‘반석 위에 세운 견고한 집’처럼 세우기 위해서 반드시 잘 다져두어야 할 영역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주된 사역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자신의 <로마서 강해>(BST)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 중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고 그래서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하나님이 바로 ‘삼위일체로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에 있다. 근대적인 이성과 교육 환경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3=1’이라는 식의 도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또한 교의신학, 특히 신론을 다루는 교의신학 교과서들을 친절한 교사의 해설이 없이 혼자서 읽어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때문에 신학교를 졸업한 사역자들이라 할지라도 삼위일체론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가지고 졸업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졸업하고 시간되면 다시 공부해야지 하는 정도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리브스의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신앙의 핵심 요체인 삼위일체론이라는 ‘비옥한 땅’으로 인도해줄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감당하리라 생각한다. 마이클은 딱딱한 신학적 주제를 쉽게 설명하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이 책 역시 경건서적처럼 쉽게 읽히지만 깊고, 감미롭기 그지없다. ‘감미롭다’는 표현은 삼위일체론을 논할 땐 왠지 부적절한 어휘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저자에 의하면 신앙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한 것이며,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거하시지만, 그저 막연한 신비가 아니라 우리가 알아갈 수 있는 분이시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랑과 기쁨의 교제 속에 거하셨다. 그 하나님은 생명과 사랑을 한량없이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부’이시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이유는 그분이 ‘성부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부의 정체성이다. 성부는 본성적으로 충만하시고, 흘러넘치시고, 아낌없이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다. 이 점에서 단일위격으로 존재하는 이슬람교의 ‘알라’는 ‘사랑하는 자’(알 와두드)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할 뿐, 기독교의 성부 하나님처럼 그 관심이 외부로 향하거나, 사랑이 흘러넘치는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알라는 비록 낙원을 제공할지라도, 피조물과 더불어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반면, 성부 하나님은 성자를 향한 그 사랑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창조는 성자를 향한 넘치는 사랑의 결과요 그 사랑의 샘의 넘쳐흐름이다(‘성자를 위한 성부의 선물’). 이 창조에는 값없이 주어진 것들과 필요이상의 풍성한 아름다움이 있고, 이로 인해 만개한 것들이 있으며, 그로 인한 기쁨을 통해 우리는 순전히 후하게 베푸시는 성부를 누릴 수 있다. 이처럼 천지창조는 ‘성부 하나님’의 성품에 완전히 부합된다. 또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천지창조의 논리이자 청사진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성품에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역설 또한 존재한다. 다시 말해, 만약 하나님이 홀로 고독한 존재였다면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할 수 없다. 그러나 성부께서 성자와 더불어 항상 누려 오신 ‘사랑과 자유’를 나누기를 기뻐하시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생명과 인격’을 허용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가능성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즉, 그분이 악을 만드신 분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거역할 자유를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부패한 우리의 심령에 새 마음을 주시고, 소경된 우리의 눈을 열어 진실하고 아름다우신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신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 생명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분은 ‘어떤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셔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즐거워하도록 이끄시며, 그분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누리시는 교제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태양이 자연스럽게 그 빛과 온기로 우리를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그분이 영원토록 누려 오신 행복을 주신다. 하나님을 성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성령을 주셔서 그렇게 하신다. 다소 반복적인 내용들이 긴장감과 간결한 맛을 떨어뜨리는 면은 있지만, 대체로 쉽고 감각적인 설명과 은유들이 가독성과 흡입력을 높여준다. 조나단 에드워즈나 존 파이퍼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공감하면서 읽을 만한 평이하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이 인상적인 책이다. 특히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삼위일체 신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갈리게” 됨을 역설한다. 또, 삼위일체론을 부록처럼 취급했던 신학사적 오류는 오늘날 ‘신무신론자’들의 약진에 상당한 원인이 되었음을 조심스럽게 지적하는 부분은 주목해 볼만 하다.
138 <독후감> "잃어버린 기독교의 보물 교리문답 교육"을 읽고_김경미 성도 파일
편집부
2606 2016-03-29
잃어버린 기독교의 보물 교리문답 교육 < 김경미 성도, 안양한길교회 > (도널드 반 다이켄 지음, 김희정 옮김, 부흥과 개혁사) “교회에서 교리교육은 더욱 체계화되고 철저히 행해져야”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전에 먼저 교리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5살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어린이 성경학교 주일학교를 다니고 성인이 되어 다시 교회에 다닌 지 10년이 넘어서까지 교리라는 용어 자체를 들어보지 못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저의 무관심 탓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부러 찾아보기 전까지 잘 접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 같습니다. 교리란 교회의 공적 성경 해석으로부터 비롯된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성경말씀의 기본을 요약한 것이며, 신앙고백의 형태로 이루어져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이 되며 성경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중요한 교리를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잘 가르친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 되고 또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따라야 하는지 신앙생활에 바른 기준이 정립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더 안타까웠던 것은 기독교에서 이렇게 접하기 어려워져버린 교리 교육이 오히려 천주교에서는 더욱 체계화되고 철저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알게 된 우리부터 제대로 교리 교육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리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이 책에서는 교리 문답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원래 교리는 문답형태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같이 질문과 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리 교육법 역시 아이들에게 해당 교리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그것에 대한 답을 통해 아이들이 어떻게 교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역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그 문제의 딜레마나 오류를 깨닫게 다시 질문을 바꿔주고 함으로써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른인 저도 일방적인 수업을 듣다보면 스스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고 강사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가 질문시간에 질문을 하나 둘 듣거나, 떠올리며 제가 갖고 있던 지식이나 생각과 얼마나 합해지는지 혹은 충돌하고 있는지 깨닫게 될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 역시 단순히 교리문답을 듣거나 외웠다가도 질문을 듣고 답을 생각하다보면 이해가 안 되거나 왜 그런지 그제야 질문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 스스로가 많은 질문과 답을 갖고 제대로 교리를 이해하고 있을 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이런 수업을 위해서는 아이들의 관심도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거나 성경공부가 우선시 되지 않아 자꾸 빠지는 경우에 대해서도 간단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사로서의 선행되는 자질에 대해 스스로를 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당연히 전제되어야겠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의 능력에 갇히기 보다는 교리문제에 더 집중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면 아이들이 거부하거나 어려워해서 이해가 매우 느릴지라도 서서히 변화할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교리교육의 중요성과 교리문답교육법에 대한 명쾌함과 도전의식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 책이 추구하는 것도 그것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교리자체나 교리문답교육방법이 세밀히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 책을 통해 동기부여가 되셔서 실제로 아이들에게 적용시키시거나 스스로 교리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137 <독후감> “잃어버린 기독교의 보물 교리문답 교육”을 읽고_서은숙 권사 파일
편집부
2578 2016-03-15
“잃어버린 기독교의 보물 교리문답 교육”을 읽고 < 서은숙 권사, 한길교회 > (도널드 반 다이켄 지음, 김희정 옮김, 부흥과 개혁사) “우리는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은 부모들” 내가 출석하고 있는 한길교회는 작년 1월 장로교회의 예배를 회복하고 성경공부 그리고 교리교육을 바르게 시행하고 가르치며 배워서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삶으로 이어지도록 하여 교회의 권위와 명예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새롭게 출발한 교회이다. 현재 20여명 모이는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있는 예배를 사모하고 바른 성경공부에 목말라 하는 분들이라 겉으로는 조용하고 조촐하지만 가슴이 뜨겁고 열정이 있는 성도들이다. 박동근 목사님은 주일 오전 예배, 수요 기도회에도 강해 설교를 하시고 오후 예배에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1문부터 차근차근 강설해 나가는 중이다. 수요일 오전에는 목사님이 직접 편집 요약하신 <기독교 강요>를 가지고 진지하면서도 깊이 있는 강의와 질의 응답으로 유익하고 재미있는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오늘날 성도들이 이단에 많이 쉽게도 미혹되어 가고 있는 현상은 교회가 깊은 성경과 바른 교리공부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소홀히 함으로써 성도들이 말씀에 대해 무식하고 무지한 탓이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한길교회는 처음 시작부터 성경과 교리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들은 <잃어버린 기독교 보물 교리문답>이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점심식사 후 다 함께 읽고 배웠다. 처음에는 교사교육을 위한 교재로 이 책을 읽었지만 교사들, 미래의 부모들이 될 청년들, 교회 직분자들 모두가 이 책을 한 번씩 읽어 보기를 꼭 권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부모이기도 하고 교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앙교육은 가정에서 부터 잘 시행되고 교회에서도 성경공부는 필수적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은 교리문답 교육의 의미, 교리문답의 의미와 위치, 교리문답의 중요성, 교리문답 고유의 역사(모세에서 바울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메사추세츠까지), 교리문답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등의 흥미 있는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쉽게 설명되어 있다. 또 ‘교리문답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서는 교리문답의 암기와 질문 복습과 반복, 노래로 배우기 등의 구체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내용이 담겨 있고 ‘누가 배우고 누가 가르치는가?’에서는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은 부모들은 교회 장로들의 도움과 안내에 따라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해 간다고 하였다. 이 책에서는 교리문답 교육을 6세 이전에 시작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들의 성품이 형성되기 전에, 아이들의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로그램 만들기’에서는 교회 장로들이 어떻게 교리문답 책 선택과 부모의 협력구하기라는 두 가지 임무 수행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교리문답 교육자 찾기’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성경교리문답으로 교육시키고 젊은이들을 교육시킬 교사를 찾고 임명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검증된 전쟁’에서는 이러한 교리문답 교육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그 효능이 입증 되었는가? 정말 좋은 결과를 얻을까에 대한 답이 나와 있다. 이 책은 수세기에 걸쳐 성경과 신앙고백을 교리문답 형식으로 가르쳐 보았고 그 결과가 아주 강력하게 효과적이란 사실을 증명해 내었다고 말한다. 부록으로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모음’도 있는데 읽어보면 유익하다. 자녀들을 성숙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고 싶은 부모들이나 교사들은 누구나 읽고 습득하여서 교육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이나 교회에서 적용하고 실천해 보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된다.
136 |민현필의 북카페| 주일성수보다 더 시급한 것 파일
편집부
3128 2016-02-16
주일성수보다 더 시급한 것 <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부목사 > 저자 김남준 | 익투스 | 2015.12.15. | p190 “오늘날 주일 성수 문제는 사실 실패한 주일예배로부터 비롯된 것” 어릴적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사람들치고 주일날 부모님과 교회 가는 문제로 다퉈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 하필 방송사들은 유년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맞춰서 만화영화를 방영해야만 했던 것일까? 한 번은 주일학교 선생님이 교회에서 제법 떨어져 있단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교회 가자고 호통을 치셨던 기억이 난다. 집사님 아들이 그러면 되냐는 반협박성 멘트와 함께 말이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사회적 위신까지 챙겨가면서 억지로 교회 출석하는 일은 보통의 결단과 인내심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현장의 사역자들이나 주일학교를 섬겨본 경험이 있는 성도들이라면 필자와 같은 청소년 시절을 지나는 자녀들을 무수히 많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청소년들이 부모의 바람처럼 ‘예배의 자리’로, ‘주일성수’하는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님을 가슴 아프게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회적 맥락 속에서 ‘주일성수’를 아예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모든 날이 주의 날이며 일상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라는 식의 섣부른 일반화 내지는 방종주의적인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은 몹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충분히 살피면서 저자인 김남준 목사는 우리를 잠시 오래된 ‘옛적 길’로 안내한다. 그는 ‘주일성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논점을 제기한다. 첫째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의 역사적 정당성, 그리고 둘째는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의 연속성에 관해서이다. 그에 의하면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모여 기념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로마와 황제숭배와 타협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것은 ‘선교적 정황화’(contextualization)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날 주일성수 개념이 약화된 것은 다름 아닌 ‘부활의 의미가 교회 안에서 퇴색되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또, 루터의 경우, 중세의 유대교 개종자들이 범한 안식일주의의 과오를 피하고, 천주교회가 제정한 지나치게 많은 성일들의 준수로 인해 오히려 ‘피폐해진’ 대중들을 삶을 회복하기 원했기 때문에 구약 시대의 의식법 으로서의 ‘안식일 제도’는 신약 시대에 와서는 ‘폐지되었음’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영속적인 의미까지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반면, 칼빈의 경우는 안식일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이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주일에 투영하여 주일을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며, 이날을 지킴으로써 신자는 전 생애에 걸쳐 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주일성수에 대한 청교도들의 엄숙주의 전통을 분석하면서, 그러한 전통이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맥락에 깊은 공감적 태도를 취한다. 즉, 제임스 1세 등과 같은 이들에 의한 외부적인 박해의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주일성수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거의 배교와 다름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또, 청교도들은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주일성수‘ 신학을 전개했는데, 주일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된 날만이 아니라 6일 창조와 7일째날의 안식 패턴에서 보듯이 ’자연법‘적인 근거를 갖고 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교회사적 고찰을 토대로 한국교회의 상황을 점검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주일성수‘를 미신적인 ’치성‘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심성과 율법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현장의 목회자들이나 교회학교 교사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금 주일성수의 당위성과 신학적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양심의 자유‘를 보전하고, 중세적 율법주의 전통으로 약간 회귀(김남준)한 듯 보이는 ’청교도적 엄숙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의 5장은 이에 대한 저자의 목회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제안이 담겨 있다. 그에 의하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명시된 주일성수를 위한 가르침들을 뛰어넘는 우리 시대만의 신앙고백 전통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안에 현대인들의 환경과 생활 패턴에 부합하는 주일성수 지침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각자의 양심의 자유 속에서 스스로를 위한 지침이 먼저 되어야 하며, 그것을 외적으로 공표하거나, 타인을 강제하고 판단할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주일성수라는 주제가 신학의 다양한 분과와 영역들을 포괄하는 응집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바른 교리 교육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뼈아프게 다가온 부분은, 오늘날 주일 성수 문제가 사실은 실패한 주일예배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잠든 강단의 설교’와 ‘영적으로 잠든 교회’로부터 비롯된 문제라고 지적한 부분이다. 필자도 이 부분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주일 예배가 만화영화나 연속극보다 더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줄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문화보다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영광을 맛보고 경험하는 장소가 된다면... 결국 주일성수와 관련된 모든 논쟁의 핵심이자 동시에 그 결론은 그것을 등한시하는 ‘젊은 세대’라는 표면적 문제 이전에 그것을 가르치고 전수해야 할 교회 전체의 문제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자’는 저자의 주장이 결코 논점 일탈일 수만은 없다.
135 |민현필의 북카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_민현필 목사 파일
편집부
2995 2016-01-1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민현필 목사, 새순교회 > “신자들에게는 보편적 신조와 같은 공교회적 가르침 필요해” 교회를 오래 다녀도 신앙생활의 핵심을 놓칠 수 있다. 또, 각자의 신앙 여정에 따라 강조하는 영역도 다른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십일조와 주일 성수를, 어떤 이는 섬김과 구제를, 또 어떤 이는 전도와 선교를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는 지표로 삼기도 한다. 도대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대학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신자라면 아마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공교회적 가르침이다.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성경의 핵심적 교훈이라고 인정해 온 보편적 메시지에 먼저 귀 기울인 다음에야 비로소 신앙적 체험과 훈련이 따라오는 것이다. 바른 교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바른 감정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출간된 로완 윌리엄스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영국 성공회 신학자이며, 104대 켄터베리 대주교로 10년간 활동했던 로완 윌리엄스는 상당히 폭넓은 신학적 지평을 가진 학자 겸 성직자다. 영국 BBC 방송은 그를 일컬어 100년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성 안셀무스 이후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교회 지도자라고 칭송한 바 있다. 국내에는 그저 복음주의 신학자 정도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그의 저서들이 연이어 출간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방법론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근대 신학이 이론과 실천, 신학과 영성, 교리와 목회, 학문과 기도, 예배와 삶의 현장의 괴리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로완은 신학을 방법론 구축보다는 세 유형을 가진 단계적인 흐름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즉, 신학은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묘사하는 활동으로 시작하다. 그 다음 신학은 교회 공동체만의 배타적 전유물이 아니라 정치, 경제, 예술 등 각 분야와 영역에 있어서도 그 적실성을 보여주는 ‘소통적 형태’의 신학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신학자는 인간 활동으로서의 신학을 절대시하기보다는 반성적으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하며, 그 이후에 다시 찬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찬양, 소통, 비판 그리고 찬양의 순환적 활동을 통해 신학의 언어는 정제되고, 영적 깊이가 더해지며, 인식의 지평은 넓어지며, 윤리적 감수성은 예민해진다고 한다. 신학적 이론과 목회적 실천의 조화를 추구하는 로완 윌리엄스 신학의 특성은 세례, 성경 읽기, 성찬, 기도라는 4가지 주제를 다루는 이 책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각각의 네 챕터에서 로완은 간결하면서도 비교적 쉬운 문체로 핵심적인 진리들을 설파한다. 그에 의하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또, 그 인간성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예수처럼 예수의 삶과 죽음을 따라 철저히 무기력한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즉, 성공을 추구하고 사물을 지배하려는 인간성이 아니라, 혼돈의 심연 속에서 하나님께 손을 뻗어 잡아 주시도록 내어 맡기는 인간성으로 성숙되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읽기에 대해서 로완은 주장하기를, 지금껏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여 온 방식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오류 가운데 하나는 성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옳다고 여기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또, 그는 성경을 예수에 관한 비유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성경 전체는 우리 자신을 새롭고 좀 더 바르게 보게 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초청이요 선물이자 도전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하나님의 뜻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말씀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 또한 지적한다. 성찬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찬례에 참여하는 일은 자신이 언제나 손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환영받는 사람이요,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처럼 로완의 언어는 매우 상징적이고 시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고, 대중적인 저술가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점이 있다. 그는 공교회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개혁파 신조들처럼 정식화된 메시지에 천착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신학적 기획 속에서 형성된 신학적 상상력의 나래를 펼친다는 점이다. 그 상상력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론에서 실천으로, 예배와 삶의 현장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지향성을 갖는다. 현실에 대한 고민이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매력적인 저자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과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 러시아 정교회의 로스키나 한스 발타자르의 ‘자기 비움’의 신학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옥스포드에서 그의 박사학위를 지도했던 교수는 그의 신학적 성향을 ‘성공회의 형태를 지닌 정교회’라고 평가한 바 있다. 로완의 신학적 사색은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마시멜로우 같은 현실 적합성을 갖지만, 어디로 전개될지 모르는 미완의 작업처럼 느껴진다. 이런 그의 신학적 정향을 무비판적으로 받는 것은 곤란하다. 사실, 그가 말하는 자기 비움은, 명문화된 교리적 진술에 대한 ‘의심과 불만족’도 내포한다. 로완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교리는 언제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질 수 있어야 하며, 절대화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탄탄한 성경 주해에 기초한 교리적 진술을 미완의 언어로 상대화하고, 자신만의 철학적 신학과 사변을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는 로완의 태도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익숙한 4가지 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깊은 학문적 내공과 성경 교사로서의 시적인 언어만큼은 인상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134 |민현필의 북카페| 새 하늘과 새 땅_민현필 목사 파일
편집부
3121 2015-11-17
 새 하늘과 새 땅 리처드 미들턴의 변혁적-총체적 종말론 되찾기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 담당 > |저자 J. 리처드 미들턴, 역자 이용중, 새물결플러스, 2015.07.27 p.492| “문화는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에게 주어진 본문이며 소명” 필자가 7살 무렵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발인하던 날 아침, 하필 억수같은 장대비가 내렸다. 어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울며불며 할머니 상여를 따라가겠노라고 떼를 썼다. 그 날 상여꾼들과 시골 교회 어른들이 줄기차게 불렀던 찬송가를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어린 동심에 새겨진 ‘천국의 이미지’는 어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떼를 쓰며 어렵사리 따라가야 했던, 그러나 살아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요단강 건너편 어디쯤에 존재하는 그런 곳이었다. 천국에 대한 이 첫 인상은 내가 대학생 선교단체 시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다시 만날 때까지 오래도록 내 의식을 지배했다. 대학생 선교 단체 활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캠퍼스에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참 많이 했다. 물론 선배들의 열정적인 기도를 흉내내는 차원에서 말이다. 처음엔 천국을 구태여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조차도 어색했다. 사실 모태 신앙으로 자라왔지만 거듭나기 전까지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일이 별로 없었다. 또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설교를 제대로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사실 왜 한 번도 없었겠는가?!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때 내 기억 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필자와 같은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다. 대체로 동의하는 부분이지만 우리 아버지 세대나, 우리 세대가 경험해 온 한국교회는 그렇게 신학적으로 미숙했고, 또 시대정신의 한계 속에 갇혀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첫 번째 계기는 대학 1학년 새내기 시절 선배들의 권유로 읽었던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리처드 미들턴이 공저한 책이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미들턴은 <새 하늘과 새 땅>(새물결 플러스)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다시 찾아왔다. 이전의 논의들도 좋았지만, 훨씬 더 깊고 풍성해진 느낌이다. 오랜 세월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쳐온 과정에서 연마된 미들턴의 주석적 통찰과 지혜들이 번득인다. 미들턴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20세기를 풍미했던 ‘종말론’ 논의들을 다시 한 번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정돈하기 위함이다. 그가 보기에 이 종말론 논의들은 대부분 현세적 삶을 초월하려는 ‘비성경적 충동’과 현세에 대한 성경적 긍정을 혼합해 놓은 ‘혼란스럽고 미성숙한 것’이었다. 미들턴이 이 책을 통해 집요하게 논증하고자 했던 핵심적 논점은, 신약의 종말론이 성경에 대한 사변적 부가물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는 ‘총체적 신학의 논리적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시작된 것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결말을 맺는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창조 속에 이미 종말의 씨앗의 담겨 있다. 이러한 총체적 비전의 핵심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며 앞으로 더욱 더 풍성하고 영광스럽게 이 땅에 임하는 나라다. 문화에 대한 변혁적 노력들은 문화의 변혁 가능성에 방점이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에게 주어진 본문이며 소명이다. 혹자들은 이러한 변혁주의 세계관을 ‘신학화된 고지론’쯤으로 폄하하거나, 하나님의 나라는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심’이 포괄하는 우주적 경륜과 스케일은 간과하기도 한다. 또 창조의 원리를 폐기처분하다시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변혁의 모델로서 붙들려고 하는 재세례파적 입장도 존재한다. 미들턴은 변혁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평들을 충분히 의식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변혁주의적 세계관이 가장 설득력 있는 신학적 프레임인지를 탁월하게 논증해 내고 있다. 변혁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주석학적 논증’에 가까운 책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일반은총’에 대한 풍성한 논의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또, 중간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 일부 본문들에 대한 미들턴의 주석은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신학자들 내부에서도 분명히 이견이 존재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 정도로 보면 어떨까 싶다. 다양한 논쟁적 텍스트들에 대한 명쾌한 주석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해 준다. 큰 틀에서 보면 이 책은 대학생이나 평신도 지도자들, 목회자들의 신학적 성숙을 위한 귀중한 자양분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133 |민현필의 북카페|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파일
편집부
3904 2015-08-25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존 페스코 저, 강희정 역, 부흥과 개혁사, 240p| ”언약과 창조'의 관계를 논증하기 위한 주해들에서 통찰력 돋보여” 이 책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별 5개를 주고 싶다. 정말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에 번역자의 실력도 한 몫 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일관되고 분명한 논지가 참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언약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꼭 읽어볼 만한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인 존 페스코는 창세기 1-3장에 나타난 '창조론(protology)과 성경 전체에 나타난 언약들'과의 상관관계를 집중적으로 추적하면서, 태초의 첫째 아담에게 의도하셨던 창조의 목적은 바뀌지 않았으며 이후에 새로운 '아담들'을 통하여 계속 그 목적이 실현되도록 섭리하셨고, 마침내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1-3장은 성경의 서론만을 장식하고 사라져도 좋은 그런 장들이 아니라 이후 구속사의 단계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실 때 주요한 패턴으로 다시 재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론(protology) 속에는 이미 종말론적(eschatology) 함의가 담겨 있게 되고, 구원론 속에는 창조론과 종말론과 기독론이 함께 맡물리게 된다는 것이다. 존 페스코는 한 각주에서 쿰란 공동체의 예를 들며 이러한 종말론적 해석학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너는 시대의 끝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고대의 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쿰란 공동체(4Q 298 frs. 3~4ii)> 옛 시대의 한복판에 종말은 이미 도래해 왔으며,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이러한 종말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특징은 태초의 첫째 아담과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대칭적 관계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으로서 종말론적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페스코는 창세기 2장의 안식일 역시 종말에 도래할 완전한 구원과 영원한 안식에 대한 종말론적 표지였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주장을 재진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니는 진짜 가치는 창세기 1-3장에 대한 기존의 편협하고, 왜곡된 해석들에 대한 적절한 비평과 '언약과 창조'의 관계를 논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탁월하고 통찰력 있는 주해들에 있는 것 같다. 페스코의 말처럼 창 1-3장은 과학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창조과학의 텍스트'도 아니며, 문서설을 주장하는 비평학자들의 레고불럭도 아니다. '창조의 패턴' 속에 담겨진 요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속하시는 '구속의 패턴'을 제공하며 서로 공명하고 있다. 둘째 아담의 구속 사역은 첫째 아담의 창조시 받았던 통치 명령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페스코는 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 자체가 성경의 해설자이다(Sacra Scriptura est sui interpres)" 나는 페스코의 이런 논증 방식이 맘에 든다. 즉, 성경에 대한 그릇된 관점이나 해석들을 성경 자체의 문맥과 의도를 풍성하게 드러냄으로써 무효화시키는 방식 말이다. 로이드 존스가 주로 사용했던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1-3장을 가지고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를 논쟁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그런 의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성경과 과학은 영역이 다르다는 식의 이원론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느끼는 아쉬움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모세 언약을 행위 언약의 반복으로 묘사하려 한다는 점(p.152) 페스코는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용한다. 과연 웨스트민스터 디바인즈들이 그런 관점을 갖고 있었을까? 이 부분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페스코는 '행위 언약의 재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행위 언약의 목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좀 모호하게 다가왔던 부분이다. 또, 흥미롭게도 이 책이 저술되는 과정에서 페스코와 긴밀히 의견을 주고 받았던 ‘데이비드 반드루넨’ 역시 이런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페스코가 반드루넨이나 클라인과 조금 다른 점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의 연속성을 충분히 인정한다는 점이다. 둘째, 문화사명에 대해서 페스코는 반드루넨과 같이 우리가 '일곱 째 날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둘째 아담의 공로 때문임을 지적한다. 또, 둘째 아담은 '둘째 하와'인 교회의 도움으로 이 땅에서 통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면이 아쉽다. 교회가 얻은 구원과 안식이 종말적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은 좋았지만, 정작 그 이후에 교회가 어떻게 종말적인 자세로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좀 더 충분히 강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둘째 아담의 지상명령'은 창세기 1장의 '통치명령'을 염두한 것(p.202)이라는 점을 잠깐 언급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132 |민현필의 북카페|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파일
편집부
4084 2015-07-07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데이비드 반드루넨)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저자 데이비드 반드루넨, 역자 윤석인 부흥과개혁사, 287p| “지금의 세상과 새 창조 사이의 연속성은 오직 신자 자신뿐” 최근 변혁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들인 데이비드 반드루넨이나 마이클 호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 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명칭을 따라서 소위 ‘에스콘디도 신학’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이 비판적 관점은 세상 문화에 대한 변혁주의자들의 집착과 승리주의적 태도를 경계한다. 따라서 일반은총론이나 문화적 산물에 대한 입장도 우리에게 익숙한 변혁주의적 세계관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1. 반드루넨의 신학적 입장 반드루넨은 이 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이 땅에서 우리들이 행했던 모든 문화적 활동은 갑작스럽게 종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드루넨의 문제 제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변혁주의적 세계관을 거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상 책 전체 내용은 이런 메시지를 전제하고 있다. '오늘날 세상의 변혁을 부르짖는 일단의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애씀와 노력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장차 올 세상'의 문을 여는 것은 오직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진 사역이었으며, 우리 믿는 무리에게 다시 '왕적인 통치'의 사명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은 장차 사라질 곳이며,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들이 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창 8:22)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 반드루넨은 히 13:14을 근거로 ‘우리가 문화에 참여하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다만 그는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아담이 아니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할 뿐이다. 반드루넨에 의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에게 남겨진 문화적 책무 또한 크다. 그것은 문화명령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9장에서 노아에게 주어진 ‘수정된 문화명령’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생명을 일시적으로 보호하는 수동적인 역할만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첫 창조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새 창조를 얻으시고, 그 새 창조에 속한 복을 그 백성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첫째 아담의 사명을 회복하러 오신 것이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 그에 의하면 종말의 때가 되면 자연 질서는 파괴될 것이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지금의 세상과 새 창조 사이의 연속성은 오직 신자 자신뿐이다. 이것은 변혁주의자들이 문화적 산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입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또, 우리가 속한 이 땅의 삶은 인류의 최종본향이 되도록 의도되지도 않았다. 2. 반드루넨에 대한 평가 우리는 이러한 반드루넨의 입장을 어떻게 평가해야만 할까? 먼저 그는 '장차 올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안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다 보니, 우리 믿는 무리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요, 베드로가 말하듯이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통치의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들인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이승구도 마태복음 28장의 대위임령을 설명하면서 프란시스 나이젤 리(Lee)를 인용하면서 ‘예수의 대위임령을 다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옳게 지적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가 의미하신 것은 문화 명령을 포함한 모든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전포괄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권위 전체’에 바른 관심을 두는 것이 된다”(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p.213) 사실, 반드루넨과 같은 입장은 개혁파 내부에서도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극적인 문화변혁에 대한 반드루넨의 유보적인 태도 속에서 승리주의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인 변혁주의적 입장을 가진 리처드 마우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피력한 적이 있다. “우리는 오직 수동적으로 예수의 빛을 받음으로써만 그 빛을 적극적으로 반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주님의 계명들에 겸손히 복종함으로써 우리는 억압과 고통의 세계 안에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의 빛을 밝힐 이러한 선행들을 할 수 있는 권능들을 받을 수 있다”(<미래의 천국과 현재의 문화> 중에서) 변혁주의적 세계관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마도 반드루넨의 주장이 다소 어색하고 못마땅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개혁파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다. 그의 주요 논지와는 상관없이 이 책 속에는 우리가 주목할 만한 풍성한 성경신학적 통찰들이 많이 담겨져 있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
131 no image |민현필의 북카페| 리처드마우의 <왜곡된 진리>
편집부
4057 2015-05-26
리처드마우의 <왜곡된 진리>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 문제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사단이 왜곡한 것” 이 책은 번역 과정부터 강영안 교수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번역된 기독교 세계관 관련 도서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새 목회 상담학 관련 책을 읽은 듯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 책의 메시지를 목회적 차원에서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다.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 형식보다는 왜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지에 더 먼저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목회현장에서 성도들과 더불어 각종 사역을 진행하다 보면, 서로의 생각이 부딪히고 살아온 시간과 연륜의 차이에서 오는 어떤 긴장과 단절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간극을 불필요하게 잘못 해석하다 보면 자칫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 마우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그들이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세계관이나 가치체계의 이면에 어떤 특정한 ‘희망과 두려움’이라는 동기가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마음의 동기를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외적인 행동양식이나 가치체계에 대한 판단은 그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마우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어떤 믿음 체계를 철학적, 신학적 토대 위에서 엄격하게 평가하는 일과 그러한 믿음을 어떤 사람의 영적 순례라는 더 넓은 배경에 관련시켜 이해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마우에 의하면 삶 속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영역들은 대게 신뢰라는 것으로 지탱될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신뢰하는 존재이며, 이 신뢰야말로 인간성의 핵심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세속적 휴머니즘을 지향하든, 범신론적 일원론에 몰입하든, 주술주의에 빠져 있든지, 허무주의를 신봉하든지, 상대주의의 늪에 빠져 있든지 간에 각각의 세계관에 대한 논리적 분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더 신뢰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우는 주술주의를 하나의 ‘독특한 신뢰방식’이라고 요약한다. 세계관을 분석하면서 왜 마우는 신뢰의 문제를 지목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범죄하여 타락한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기 3장 문맥에서 죄의 본질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근본적인 신뢰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에 두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죄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그분이 만든 것을 사랑하고 숭배한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 시대에 난무하는 온갖 이즘들(ism)들이란 실상 하나님을 상실한 자아의 불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마우는 우리가 이 불안을 조장하는 현실적인 ‘두려움과 희망’을 바로 해석하지 못한다면 사탄의 간교함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마우가 볼 때, 거짓의 아비 사단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유혹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희망과 두려움’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진리를 왜곡시키는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즘들에 대한 세계관적 분석을 시도하면서 마우는 우리에게 ‘신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더 나아가 그 신뢰가 머무는 자리인 마음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마우에게 있어서 외적인 표현 형식으로서의 세계관들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그저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능력은 가장 깊은 신뢰를 형성하는 장소에 있다. 바로 성경이 ‘마음’(heart)이라고 부르는 내밀한 곳이다. 이 곳은 피조된 인간의 실제적 중심이다. 신뢰 할동을 하는 이 공간은 우리의 인식이나 정서나 의지보다 더 궁극적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방향을 부여해 주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일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공감적 인식은 공공 신학자로서의 마우를 특징짓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마우에게 있어서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사단이 교묘하게 왜곡시킨다는데 있다. 왜곡된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버려야만 하는가? 마우는 그 창조적 활동들 속에서 ‘연결과 접속’을 추구하는 인간의 갈망을 본다. 예를 들어, 뉴에이지 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과 희망’ 곧 ‘우주적 통일을 바라는 일원론적 갈망’을 간파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것은 연계성(connectedness)에 대한 갈망이요, 통합된 삶에 대한 향수에 다름 아니다. 마우는 현대인들의 고향 상실과 그로 인한 주술주의에의 집착 역시도 ‘더 광범위한 이야기’에 접속(연결, connecting)되기를 바라는 갈망임을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주술주의는 소속감과 정체성(‘뿌리’)를 찾고 싶은 사람이 발견해 낸 일종의 ‘연락 체계’(networking system)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리처드 마우는 명민하게도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가 바라기에 참된 것과 실제로 참된 것이 꼭 맞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유명한 기도의 내용이다. ‘주께서 우리를 당신으로 향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우리의 마음은 쉬지 못합니다’” 이렇게 볼 때, 마우가 인식했던 ‘마음의 중요성’은 다른 아닌 파스칼이 "내 마음(coeur)에는 이성(raison)이 모르는 이유(rasion)가 있다"고 했을 때의 그 마음과 다르지 않고, 어거스틴이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마우의 세계관적 분석은 공공 신학적이며, 어거스틴적인 사유와도 닮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마우가 “인간은 시간과 변화로 인해 제한되어 있어 불안정한 존재이지만 영원한 진리가 되신 하나님께(ad Deum) 마음이 열려있는 존재”라고 했던 어거스틴의 사상을 어느 정도 현대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물론 그의 사상 전체가 과연 ‘충분히 어거스틴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혹자는 마우가 진리의 반정립적(antithesis)적인 측면을 간과했다고 느낄 수도 있으며, 죄와 사단의 영향력을 너무 가볍게 취급했다는 볼 맨 소리를 내놓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마우의 주장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다. 리처드 마우를 어떻게 읽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독서하는 즐거움 아니던가? 그러나 이 책에 담긴 인간에 대한 마우의 따뜻한 시선만큼은 우리 목회자들이 꼭 눈 여겨 보았으면 좋겠다. 결국 목회자는 성도들의 마음과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130 |민현필의 북카페| 르네 빠딜라의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_민현필 목사 파일
편집부
3753 2015-04-28
르네 빠딜라의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교회의 선한 일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실재로 가시화되는 길” 이 책의 핵심 요지는 비교적 길게 편집된 '제2장 복음 전도와 세상'이라는 챕터이다. 그 이후의 장들은 여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생각들을 다양한 루트들을 통해 발표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빠딜다는 로잔 언약의 주요한 싱크탱크였던 사람답게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강조한다. 그의 성찰은 주로 남미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자신의 논지를 끌어내기 위해 본질적으로 복음이란 무엇이며, 신학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1세기 문맥에서 복음이란 말 그대로 정치, 사회적 함의를 지닐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면서 오늘날 미국이나 남미에서 유행하는 세속화된 복음전도와 성공주의를 비평한다. 그는 교회가 두 가지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첫째, 복음을 개인주의화하거나 영성화시키는 것. 둘째, 복음을 사회 혁명을 위한 Agenda로 환원시키는 것. 그는 오늘날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을 비판적 사유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문화화된 기독교, 세속화된 기독교의 속물근성을 꼬집는다. 또, 서구 유럽 중심으로 발전되어온 서양신학이 남미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성찰의 과정 없이 답습되고 있는 '고민 없는 교회'의 모습을 한탄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신학이 해야 할 역할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학은 복음이 문화 속에 뿌리 내리기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이다." 그런 면에서 남미의 교회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빠딜라는 복음을 '구속과 해방'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가 주로 지적하는 부분은 바로 교회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침묵하고 정치, 경제적 예속 상태를 영속화시키려는 구조적인 모순들, 곧 '정사와 권세들'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거나 선지자적 목소리를 발하지 못하는 남미의 교회를 지적한다. 그는 시종일관 이 책에서 묻는다. 참된 믿음과 회개는 무엇이냐고. 참된 복음은 무엇이냐고.... 복음과 선한 행실은 항상 함께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신 선한 일들을 행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 일을 위함이다(엡 2:10). "사도들의 기록을 통하여 예수님과 사도들은 오늘날도 계속하여 말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동시에 교회와 교회의 선한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실재로 역사 안에서 가시화되어 나타난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선한 일들은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부수적 사역이 아니다. 오히려 선한 일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나타나는데 있어 핵심 요소이다. 교회가 선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으며 또한 장차 임할 것임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p.274) 르네 빠딜라의 특징은 균형잡힌 신학적 고찰과 절제 있는 어조 그리고 복음과 우주적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큰 틀에서 남미의 상황을 조망한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은 우리도 배워야 할 자세이다. 남미 교회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토대로 쓴 책이기 때문에 다루는 주제들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철저히 성경 신학적 논증을 통해 절제 있는 어조로 저술하고 있기에 생각보다는 책 분위기가 무겁지 않다. 복음 전도와 사회 개혁,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 소비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교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교회의 본질적 소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책이다.
129 |민현필의 북카페| 존 파이퍼의 <로마서 강해1 : 복음과 하나님의 의> 파일
편집부
4285 2015-03-17
존 파이퍼의 <로마서 강해1 : 복음과 하나님의 의>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다원주의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보편성과 유일성 변증해” 기독교 희락주의로 국내 목회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존 파이퍼. 그는 지난 2013년 3월 31일 부활절 설교를 끝으로 미네아폴리스 베들레헴 교회 목사로서의 목회 여정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었다. 이 책의 의의 지난 32년 동안 그는 시종일관 기독교 희락주의 사상에 천착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선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그의 희락주의 사상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장 크게 만족할 때, 우리 안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Desiring God> p.10)로 정의된다. 그런 그의 설교 사역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로마서 강해다. 그는 1998에 이 강해 시리즈를 시작하여 2013년 목회 현장을 떠날 때에야 비로소 마칠 수 있었다. 무려 16년간, 파이퍼의 목회 사역 절반의 기간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쏟아 부었을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들인 설교였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설교집을 통해 설교가로서의 존 파이퍼의 진면목을 잘 확인할 수 있다. 복음의 보편성과 유일성에 대한 변증 필자는 이 책을 탐독하면서 그의 희락주의 사상이 어떻게 설교 가운데 녹아져 들어가는지를 유심히 살펴보고자 노력했다. 그는 먼저 이 로마서를 강해함에 있어서 1세기 당시의 다문화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와 오늘날 현대 미국 사회의 다원주의적 사회 분위기를 연결시키면서 로마서 강해의 의의를 설명한다. 1세기 당시 바울이 여러 종교와 사상들이 난무하던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보편성과 유일성을 변증했다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도 이 바울의 복음은 유효하며, 절박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눈여겨볼 만한 중요한 대목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매우 빠르게 퍼져나가던 1세기의 상황과 아주 유사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어느 한 부족의 종교가 아니며, 모든 족속, 모든 언어,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믿음과 충성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그분은 만군의 주시며 왕 중의 왕이십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로마서의 이 강력하고도 자비로운 메시지는 여러 구원의 길 중 하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p.27). 죄의 문제 파이퍼가 죄나 복음의 의미에 대해 정의하는 것을 보면 '희락주의'라는 것이 결코 성경을 지엽적으로 왜곡시킨 개념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죄에 대한 파이퍼의 설명은 간단명료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자(죄인)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도둑질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 역시 우리를 빚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향유할 보화로 보는 대신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도둑질한 것이지요.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p.136). 죄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p.521). 죄에 대한 이같은 정의는 파이퍼가 그려내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이 복음이다>(IVP, 2006)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파이퍼가 말하는 ‘희락주의’는 세속화된 쾌락주의의 아류나 변종이 아니라, 참된 기쁨과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희락주의를 뒤짚어서 얘기하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해 파이퍼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에서(p.52) 조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자신의 피조물의 영광을 구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발산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누어 준 피조물의 탁월함과 행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충만함을 피조물에게 어떻게 나누어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것을 자신을 위해서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하시는 피조물의 유익은 하나님 자신과 아주 많이 연합되어 있고, 하나님 자신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탁월함과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의 발산과 표현일 뿐이다(천지 창조의 목적 114번). 따라서 파이퍼가 복음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것은 결코 어색하지 않다. 복음의 핵심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에게로 이끌려 주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신뢰하면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p.90).
128 no image |민현필의 북카페| 극한의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
편집부
4013 2015-01-27
극한의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 < 민현필 목사, 중동교회 교육담당 > “하나님은 절망과 한계 속에 있는 인간에게 있어 구원의 소망” 랭던 길키는 1939년 미국 하버드 대학 철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연경 대학'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길키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군에 의해 중국 북부의 산둥 지방에 있는 ‘위현 수용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된다. 대략 1,500-2,000여명의 서양인들이 포함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용광로와 같았던 그 수용소에서 그는 2년 반 동안 시간을 보내게 된다. 철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젊은 수재의 예리한 인문학적 감수성에 의해 포착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죄성으로 가득 찬 누추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 때의 일을 상세히 일기로 남겼던 길키는 후일 수기 형식의 <산둥 수용소>라는 인상적인 작품을 남기게 된다. 모든 사회적 기반이 상실된 수용소라는 제한적 공간 속에서 새로운 인간 실험의 장을 경험했던 길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위기는 기술의 실패가 아닌 인격의 실패로부터 야기되었다"(p.142). 그는 여러 나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뒤엉켜 살면서 겪어야 했던 인간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로 '이기심'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이 이기심은 도덕적인 명분이라는 거창한 위선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수용소 생활이 깨닫게 해준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인간의 도덕성과 비도덕성은 우리 생명의 가장 심오한 영적 중심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인간은 이 영적 중심으로부터 삶의 안전성과 의미를 얻으며, 그래서 이 영적 중심에 자신의 궁극적인 사랑과 헌신을 다 바치게 된다"(p.429). 나아가 길키는 인간의 비도덕성은 결국 인간의 영적 중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문제의 핵심은 그 중심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헌신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들에게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종교성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은 사회적 실존 안에서 행해지는 종교다"(p.433). 길키는 여기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죄성을 본다. "죄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즉, 죄란 자아와 자아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으로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는 것이다"(p.432). 이런 길키에게 있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길키에 의하면 그런 문제는 ‘생물학이나 인류학자들의 몫’이라고 말하면서 한 발 물러선다. 또한 인간의 문제를 아담으로부터 받은 유전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진화의 조상인 동물을 탓하는 것만큼이나 무익하고 무책임한 태도라고까지 말한다. 이렇듯 길키는 외과 의사가 환자의 환부를 예리한 칼로 도려내고 해부하듯 죄성으로 점철된 인간의 실존을 날카롭게 파헤치지만 분명 우리와는 다른 신학적 입장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키가 수용소 경험을 통해 배운 통찰은 목회자들뿐 아니라, 세상 속 인간 군상들의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에게도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실제적인 사회적 행동을 보면 이런 신학적 개념, 즉 우리는 선을 원하지만 의지에 있어서 악하다는 원리가 그 어떤 판단 기준보다 더 잘 우리의 경험을 설명해준다. 내가 수용소에서 본 것은 바로 원죄론이 말하는 것이었다....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행하고 싶은 바를 무엇이든 마음껏 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서로 사랑하기를 원할 자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는 그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매여 있었다"(p.212). 그는 원죄론을 신학 책이 아닌 혹독한 수용소 경험을 통해 배운 셈이다. 궁극적으로 길키가 본 것은 인간의 자아숭배 혹은 우상숭배였다(p.432). 이러한 사유의 과정에서 길키는 인간이 얼마나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모순된 존재인지를 누차 강조한다. 인간은 억압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각가지 도덕적 명분을 추구하며 자신의 지성을 활용한다는 것이다(p.208, 431). 그렇다면 그가 도달한 결론은 무엇일까? 길키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미와 안정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둔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복지가 된다. 이런 신앙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고, 자기중심성을 포기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p.435). 결국 인간은 그가 스스로 거부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에만 자아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진정한 이타적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길키는 시종일관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자제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도덕적 절망과 한계 속에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역설한다. 이렇게 <산둥 수용소>는 인간의 죄성이나 허위성, 신앙의 의미까지도 역설하는 변증적 차원의 성격도 갖고 있다. 또, 이 외에도 미처 다 열거하지 못한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이 책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와 더불어 수용소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127 |조주석의 북카페| 하나님은 왜 혼인 제도를 내셨는가 파일
편집부
4416 2014-12-30
하나님은 왜 혼인 제도를 내셨는가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 김홍전 | 혼인, 가정과 교회 | 성약출판사 | 335쪽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것에 혼인의 목적 있어” 지인들의 자녀들이 혼인하는 식장에 가는 일이 종종 있다. 가보면 주례사도 천차만별이고 혼인 예식도 참 다양하다. 대다수 주례사는 예수님 모시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서는 부부의 사랑이나 행복을 혼인의 최우선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혼인 생활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수는 있겠지만 혼인 생활의 목표나 지향성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 14:8)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품고 살아야 할 생활의 큰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이나 행복을 혼인생활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일반 세상 사람의 혼인생활과 뭐가 다르다 하겠는가?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와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창세기 2장과 에베소서 5장에 따르면 부부가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되었고 그 비밀이 크다고 말씀한다. 혼인이란 부부가 한 육체가 되는 데 있다. 이 말의 깊은 의미는 사람이 독처하기보다는 거룩한 사명을 같이 붙들고 나갈 짝과 혼인하는 것이고 혼인을 했으면 같은 생각을 품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서 남편 따로 아내 따로 각각 주장하고 나간다면 하나의 몸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혼인을 앞두었든지 아니면 혼인생활 중이든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명을 두 사람이 하나로 여기고 나가겠는가, 따로따로 가겠는가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한 사명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다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나는 일생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가? 이 물음에 답을 가지려면 자기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까닭에 나에게 주신 은사를 낭비 없이 사용하여 일생 동안 그 은사를 잘 사용하여 점차 받은바 거룩한 사명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즉 목회자가 되었던 다른 직업을 가졌던 그 자리에서 내 영광이나 명예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부가 맹목적으로 한 지붕 밑에 살아가고만 있다면 그 혼인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남보란 듯한 직장에 다니고 멋진 주택을 마련하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혼인생활의 최고 목표였다면 설교자는 그것을 뭐라고 단정하는가? 사실상 혼인 부재 상태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부의 인생에 그들 자신이 중심에 서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육적이요 세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혼인 부재 상태가 자꾸 늘어가는 것이 오늘의 세태라고 설교자는 탄한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의 중요한 도리다. 그런데 혼인 초기에는 그 도리가 사실상 무슨 말인지 실제로 알기란 어렵다. 혼인생활에 들어가 고단하고 팍팍한 현실 생활을 살아보면 아! 자신이 거기서 얼마나 먼 존재인가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부가 서로 간에 모든 점에서 만족스럽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싫을 때도 있고 짐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서로가 연약하고 결함이 있는 까닭에 자기의 결함을 반성하고 자기가 져 줄 수 있는 짐이 있다면 져 주는 것 자체가 주님께 대한 봉사요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혼인제도를 내셨는가? 이 책을 펴든 어느 순간에 내 가슴 깊이 파고들었던 질문이다. 이 내용이 본서의 등줄기를 이루는 핵심으로 보인다. 근 20여 년 전에 혼인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당위나 원칙을 배웠던 책이지 않았던가. 30년 넘는 혼인생활을 되짚어 보니 그런 당위나 원칙이 나의 현실 삶과는 참 거리가 나 있었다. 그러니 꾸불꾸불 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세월의 행로가 반듯하고 풍요로웠어야 좋으련만 그렇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긍휼과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126 no image |조주석의 북카페| 정암신학강좌 재음미
편집부
4319 2014-12-02
정암신학강좌 재음미 < 조주석 목사, 영음사 편집국장 chochuseok@hanmail.net > “신앙교육은 신자의 믿음과 경건을 배양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식” 매년 11월이면 정암신학강좌를 맞이한다. 올해로 26회째였다. 이번 강좌에서는 ‘개혁교회의 신앙교육’에 관한 주제를 다루어 주변의 관심을 더 높였다. 강좌가 끝났음에도 이곳저곳에서 강의안을 찾는 일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간략히 세 가지 요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는 개혁자마다 신앙교육을 중시하였고, 둘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가장 오래 사용되었다는 것이요, 셋째는 신앙교육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강좌는 종교개혁 시대의 세 지역의 개혁교회를 다룬다. 즉 제네바 교회, 취리히 교회, 팔츠 교회다. 이들 개혁교회가 만들어낸 신앙교육서들은 16세기 중엽 20여년 어간에 걸쳐 작성된 것들이다. 그 주요한 것들로는 칼빈의 <제2 신앙교육서>(1542), 불링거의 <기독교 신앙의 요해>(1556)와 <성인들을 위한 신앙교육서>(155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이 있다. 이 신앙교육서들은 신앙의 대립과 갈등 상황 속에서 나왔다. 개혁교회는 먼저 로마 가톨릭 교회와 크게 대립했고, 개혁이 진행됨에 따라 성만찬 이해 문제를 두고 루터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이런 역사적 환경 속에서 성도들의 신앙의 오류를 바로 잡고 불일치를 일치로 전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작성된 신앙교육서들이다. 이 개혁의 시대에서 성직자가 하는 역할은 뚜렷이 달랐다. 미사와 성례를 집례하는 것이 중세 사제들의 주요 업무였다면, 개혁교회의 성직자들은 말씀을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였다. 성경을 강해하고 교리를 가르침으로 교회 개혁이 가능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신앙교육은 신앙 계대에서도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칼빈이나 불링거가 작성한 신앙교육서들은 그들 사후엔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만다.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가 주도하여 만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만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즉 독일과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신앙교육으로 활용하고 있다. 450년 동안 영향력을 발휘해 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어떤 방식으로 처음에 가르쳐졌는지 자못 궁금하다. 팔츠의 교회법(1563)에 따르면, 이 요리문답은 낭독과 설교라는 두 방식을 통해 전달되고 가르쳐졌다. 낭독은 두 가지 방식을 취했는데 하나는 요리문답 전체를 9회분으로 나누어 매주 공예배에서 낭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를 간략히 요약한 내용을 매주 낭독하였다. 그리고 주일 오후 예배시에 설교를 통해 요리문답을 상세히 배울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런 신앙교육서로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배우는 자로 하여금 짧은 시간에 성경 전체의 그림을 그리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이 주어지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반적인 확신을 갖고서 언약의 표인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와 성만찬에 참여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팔츠의 성도들은 요리문답서와 함께 세례 받고 자라나고 교육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며, 죽을 때까지 요리문답서와 매일 함께 하며 삶과 죽음에 있어서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30여년의 부흥기를 지나면서 교리 교육보다는 간단한 그룹 성경공부 교제를 더 선호해 왔고,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성공과 복과 위로와 헌신 촉구 중심의 강단 설교나 심령부흥회가 대세였다는 것이 사실이다. 반 기독교적이요 반 교회적인 질타가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잇는 우리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우리의 헌법은 성경과 신조와 헌법 공부까지 신앙 교육에 필요하다고 명시하면서 그 목적은 학자를 양육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자의 믿음과 경건을 배양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목적을 충실히 이루면 이룰수록 더 개혁된 교회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번 강좌가 우리에게 들려준 교훈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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