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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 no image |목회칼럼| 명품인격 名品人格 _장석진 목사
편집부
1463 2017-09-06
목회칼럼 명품인격 名品人格 < 장석진 목사_보배교회 >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껍데기로서의 명품’이 아니라 ‘인격의 명품’ 명품사치품 매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일부 부유층에서만 유행하던 명품들이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대중화되고 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정장, 샤넬 스카프, 까르티에 시계, 구찌 가방, 페라가모 구두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고급스런 외제차를 사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옷과 시계, 집과 승용차는 물질적 껍데기일 뿐이다. 높은 학벌, 직위, 명예는 정신적 껍데기일 뿐이다. 인간은 물질적 정신적 외관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껍데기들을 무리하게 추구한다. 껍데기뿐인 외관을 꾸미므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껍데기로서의 명품’이 아니라 ‘인격의 명품’이다. 로키산맥의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樹木) 한계선지대가 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한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낸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모진 비바람 가운데서도 무릎으로 견디며 인내해 온 나무로 인해 명품 바이올린은 만들어진다.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아름다운 인격의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런 문제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온갖 풍상과 역경을 이겨 온 사람이다. 이민 사회를 지탱해 가야 할 뿌리는 명품인격의 가치관을 소유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러면 명품인격의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어떤 고통과 환란에서도 굴하지 않고 강한 의지와 주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용기 있게 실천해 가는 하나님의 사람”을 말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고난의 대명사인 명품인생 욥은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날렸다. 자식이 한순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욥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에 악창이 나 기와조각으로 긁어야만 했다. 심지어는 아내마저 나가 죽으라며 저주를 퍼부었다. 고난을 당하는 자의 가장 큰 괴로움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마저도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아픔을 모를 것이라는 절망감이다. 그러나 그의 고백을 들어 보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까닭은 자신을 해치려함이 아님을 믿었다. 오히려 정금처럼 단련시키기 위함임을 잘 알았다. 그가 경험한 역경의 승리는 위대한 신앙의 표상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할 때가 있다. 굽이굽이 힘겨운 삶의 고갯길을 넘어갈 때마다 구상 선생님의 ‘꽃자리’란 시가 생각난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지금 가시방석과 같은 곳에 앉아 있는가?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그것은 결코 가시방석이 아니다. 보다 성숙한 내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한 꽃자리이다. 명품인격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무릎을 꿇고 있는 인생이다.
583 no image |목회칼럼| 뒤집지 않은 전병煎餠_이동만 목사
편집부
1571 2017-08-23
목회칼럼 뒤집지 않은 전병煎餠 < 이동만 목사, 대구 약수교회 > 신앙적 열심과 일상에서의 인격적 인애의 향기가 동시에 나타나야 호세아 7:8에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은 비유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적합하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전병은 찹쌀가루나 밀가루 따위를 둥글넓적하게 부친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전병은 앞뒤를 다 알맞게 노릇노릇 굽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뒤집지 않으면 한쪽은 시꺼멓게 타고 다른 쪽은 생 가루로 남게 된다. 한쪽은 너무 익어서 다른 쪽은 너무 익지 않아 문제가 된다. 이스라엘이 뒤집지 않은 전병인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지만 이렇게 생각해 본다. 호세아 6:6의 말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에서 보듯이 제사와 번제는 많은데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제사나 제물이 부족하다고 책망하시지 않았다. 도리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신다(사 1:11). 그 이유는 이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그 피가 가득한 모습은 선행을 배우지 않으며, 정의를 구하지 않으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않으며,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사 1:17).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 전병의 한쪽이라면 인애를 행하는 것은 다른 한쪽이다. 어느 한쪽이 잘못 돼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다.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늘 제사에 열심이었지만 인애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자는 사람에게 인애로 다가가야 마땅하다. 인애는 자비, 선함, 참 사람다움, 사랑이다. 예수님의 바리새인을 향한 질책도 다르지 않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도다”(마 23:2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 12:6상)는 호세아 6:6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도 안타깝게 동일한 모습을 목격한다. 얼마 전 한 사령관 부부의 소위 갑질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신문에서 이 기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새벽 기도가 나오고, 주일 예배가 나오는 게 아닌가. 또 터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상황을 알 수 없고 늘 기사라는 것이 과장되기 쉬운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람이 사령관이 되기까지 얼마나 수고가 많았겠는가. 육사를 나와 대위에서 소령 되기가 어렵고, 대령에서 별을 달기가 어렵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별을 4개나 달았으니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주일 예배에 출석하고, 새벽 기도를 가고 하는 것과 나이를 봐서 자신은 장로요, 부인은 권사일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에 거룩한 모습으로 부부가 나란히 강단에 앉아 있는 사진도 올라왔다. 아마도 군선교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을 것이다. 한쪽 전병은 확실히 너무 잘 익었다. 그런데 다른 한쪽은 전혀 익지 못한 게 아닌가.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병사를 교회에 데려갔다. 그를 참으로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면 ‘우리 사령관님 부부는 참 좋으신 분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모습이 이들 부부에 그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한국 교회의 틀이 잘못 되어 이런 모습은 여기저기서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믿음의 힘이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얻는 데만 작용하고, 자신을 버리고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데는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보다 높은 가치가 아니라 상식 수준에도 못 미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기도와 성경읽기, 성경 필사,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과 선교와 봉사 등을 열심히 한 결과는 일상적인 삶에서 참 사람의 향기로 나타나야 한다. ‘아우슈비츠’라 하면 우리에게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떠오를 것이다. 아우슈비츠(폴란드 남쪽에 소재한 소도시, 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침이었는데 독일식으로 바뀜)라는 곳은 본래 그렇게 잔인한 곳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수용소 때문에 아우슈비츠는 치를 떨게 만드는 곳으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아우슈비츠는 본의 아니게 참 억울하게 되었다. 성도인 우리의 모습에 의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기도 하고, 모욕을 받으시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범사에(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사람들에게 인애를 베푸는 일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딛 2:10) 삶을 살아야겠다. “Business for Mission!”이 아니라 “Business as Mission!”으로 가야 한다. 이 말은 “선교를 위한 사업이 아니라 사업 자체가 선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맡은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감당할 때 그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선교의 기회도 된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가 예배를 적게 드린다고, 헌금 적게 한다고 책망하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애의 삶을 보시며 분발하기를 촉구하실 것이다. “기독교의 능력은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다” - 윌리엄 우드핀
582 no image |목회칼럼| 타 협_안두익 목사
편집부
1486 2017-08-02
목회칼럼 타 협 <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 우리가 눈을 닫고 멈춰 서면 그것은 무서운 세상이라는 결과로 다시 덮쳐 온다 제가 청년 시절 많이 읽었던 소설 가운데 하나는 이문열 씨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입니다. 내용은 한 시골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권력에 대항해 보지만 어쩔 수 없이 환경에 굴복하고 결국에는 그 권력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병태는 학급의 반장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엄석대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항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따돌림과 누명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석대에게 달라붙어 자기 안위를 도모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었던 청년 시절에는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희끗희끗 머리가 바래고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는 시기가 되자 청년 시절에는 그렇게 싫었던 나약한 병태의 모습이 내 안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설에서처럼 우리의 살아가는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게 피해만 없다면 부당한 권력에 도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본제국주의 시절 변절한 수많은 사람들을 욕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요? 지금도 부당한 일에 흥분하지만 조금이라도 나에게 해가 되면 제삼자처럼 조용히 뒷걸음을 칩니다. 그리고 자신과 관계 없으니 상관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눈과 귀를 닫아버립니다. 하워드 가드너는 「열정과 기질」이란 책에서 무서운 세상은 무심한 세상에서 태어난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말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눈을 닫고 멈춰 서면 그때는 나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을지 몰라도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되어 무서운 세상이라는 결과로 우리를 다시 덮쳐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시대의 선각자가 되어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가정을 바로 세워 가고 있는지, 이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의롭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 편집자 주/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희망을 노래합시다』 (생명의 말씀사, 2010)에서 허락받아 전재함.
581 no image |목회칼럼| 그리스도인과 상담_이경희 목사
편집부
1526 2017-07-05
그리스도인과 상담 < 이경희 목사_대구한빛교회,경북노회장 > 교회 사역자들은 신앙 문제나 인생 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적절한 상담을 해 주어야 한다 현대 인류의 문명은 매우 발달하였으나 인간의 문제와 고통은 감소하지 않고 점점 더 증대되고 있다. 그래서 우울증과 중독 같은 정신 장애와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2016년 통계청에서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6개월 동안 6,660명, 하루 평균 37명의 자살로 OECD국가 중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정치인 및 경제인 그리고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의 자살은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주고 있다. 심지어 모 교회 고등부 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은 더욱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이들을 돕기 위해서 상담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필자가 중고등학교에 재직해 있을 때, 한 학생이 자살한다고 유서를 써 가지고 와서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고, 또 어떤 학생은 가출하겠다고 상담을 요청한 사례도 있었다. 교회에서도 상담이 필요한 교인들이 많이 있다. 사춘기 청소년들, 부부 상담, 가정 상담, 진로 상담 그리고 신앙 상담 등 여러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이들에게 ‘영적인 문제는 목사가 상담을 하지만 인생 문제는 인생 상담 전문가(심리상담사, 정신과 의사, 예언가, 철학관 등)에게 가시오’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다. 교회 사역자들은 신앙 문제이건 인생 문제이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서 피상담자에게 적절한 상담을 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하여 상담을 해야 하는가? 지금 많은 종류의 상담 이론과 심리치료법이 소개되고 있다. 예를 들면, 피상담자의 이상 행동을 개인의 성장 과정과 무의식적 갈등의 관점에서 상담하는 정신분석학적 상담, 이상 행동을 개인의 역기능적인 사고 과정과 신념 체계 그리고 환경적 영향에 의한 학습 과정의 관점으로 상담하는 인지행동 상담 그리고 이상 행동을 뇌와 중추신경계의 손상이나 기능 이상으로 보고 치료하는 생물학적 치료 등 아주 세분화된 상담 방법까지 합하면 무려 400여 종의 심리 상담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담 및 심리 치료 이론 가운데는 비기독교적인 사고와 더 나아가 반기독교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종교는 일종의 마취제와 같은 하나의 환상 또는 망상적 신경증의 보편적인 한 형태’라고 말했다. 기독교에 대해서 이렇게 편향적이고 왜곡된 생각을 가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상담을 기독교 상담에서 수용할 수가 없다. 또 칼 로저스(Carl Ransom Rogers, 1902-1987)의 인간 중심 상담은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이며, 이해와 공감을 받으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성경적 인간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나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하였고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다. 이런 비성경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한 상담 방법을 그리스도인의 상담에 사용한다는 것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을 논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본 바탕을 두고 알아 가야 하는 것이지 비성경적인 심리학으로 인간을 알아 가면 자칫 잘못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사도바울은 그 위험성을 “누가 철학과 헛됨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세상 철학과 세상 초등학문에 바탕을 둔 심리 상담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부부 상담의 경우도 심리학에 근거를 둔 심리 검사, 애착 이론, 정신분석 이론, 대상관계 이론, 인지행동주의 이론, 정신병리학으로 문제를 찾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부부의 원리(떠나라, 연합하라, 하나되라, 사랑하라)를 중심으로 문제 인식을 하고, 원인 이해를 하고, 방법 적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실 때 그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만약 어떤 심리 이론을 근거로 한 심리 상담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면(온전한 해결도 되지 않겠지만) 하나님보다는 그것을 주장한 학자에게 더 관심이 가며, 성경보다는 심리 이론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목회 사역을 하기 전에 중고등학교에서 이십 여 년 동안 상담을 하면서 갈등을 많이 느꼈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상담사 자격증을 따서 학생들을 상담할 때 성경구절을 사용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기독교적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심리 이론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함을 보고 순수한 성경적인 상담으로 사람들을 상담할 수는 없을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상담해도 되는가? 하는 아쉬움과 갈등을 많이 느꼈다.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기독교 상담학자들이 심리학을 차용한 심리 상담과 혼합된 기독교 상담이 아닌 순수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성경적인 상담, 즉 성경적인 순수한 원리와 방법들이 많이 개발되고 임상을 거쳐서 교회에 많이 보급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580 no image |목회칼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일애원<2>_조봉희 목사
편집부
1852 2017-03-2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일애원<2> < 조봉희 목사, 지구촌교회 >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통일애원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선교는 자랑스러운 특징을 갖고 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에 발을 딛기 전, 1884년 11월에 벌써 황해도 장연군 솔내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나라는 자랑스럽게도 선교사보다 복음이 먼저 들어온 것이다. 그 당시 한약 상을 하던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1882년 만주에 가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 목사님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쪽 복음을 가지고 들어와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복음이 남으로 내려왔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복음이 새문안교회를 태동시켰다. 또한 사도행전적 성령의 부흥도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1906년에 함경도 원산에서 시작한 부흥의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강산으로 번졌다. 1907년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 같은 성령의 불이 내려왔다. 이런 부흥의 쓰나미가 서울과 강릉으로 남진하여 내려왔고, 대구와 부산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으며, 결국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1945년에 해방을 맞이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로 북한이 공산화되자 수많은 신자들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6.25 동란과 함께 대부분의 북한 신자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교회를 세웠다.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북에서 내려온 성도들로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교회 부흥이 국가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런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복음과 성령의 바람은 다시 북상해야 한다. 우리나라 태풍은 남쪽에서 북으로 올라간다. 바람도 북상한다면, 성령의 바람도 함께 북진해야 한다. 그래서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다시 올라가는 글로벌 선교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이 받아야 할 통일의 축복이다. 21세기 아브라함과 그 백성이 되는 축복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한국 교회는 다급하게 서둘러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 긴급한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 지금까지 세계 선 교는 북위 10도에서 40도 사이의 지역을 집중했다. 20세기 선교 운동가 Luis Bush가 제안한 선교 전략이다. 이 지역은 북아프리카, 중동, 아시아권으로, 62개 국가 중 55개 나라가 비기독교 국가이며 30억 인구다. 소위 10/40 Window라고 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50대 도시가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80%가 살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인 도움과 영적인 필요를 채움 받아야 할 선교대상들이다. 종교분포는 이슬람, 힌두교, 불교권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다. 거기다가 이슬람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25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30% 이상이 모슬렘이 되어 기독교 인구를 능가할 전망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계 선교는 10/40 Window 지역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21세기 선교 방향은 또 하나의 새로운 정책과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것은 곧 4/14 Window 전도운동이다. 4~14세에 해당되는 어린이와 청소년 세대를 복음화하는 선교 운동이다. 세계 선교 전략이 지역에서 나이로 바뀐 것이다. 매우 중요한 전환 전략이다. 전 세계 인구 중 12억 명이 이 나이에 속해 있다. 엄청난 숫자다. 이들 중 1/3 이상이 한 방에서 5명 이상 살고 있다. 또 굶주림과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대부분 어떤 형태의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다급한 선교 대상이다. 이들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할 뿐이다. 이들이야말로 21세기 미래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을 믿고 변화 받아야 할 주인공들이다. 만일 이들을 전도하는데 실패한다면 기독교의 미래뿐만 아니라, 세상의 미래가 암담해진다. 보통 아이들은 9세가 되면 정신적 구조가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점점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현상을 보인다. 따라서 4~14세에 해당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들려주어야 한다. 미국 같은 경우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 85%가 4~14세 사이에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한다. 아마 우리나라 같은 경우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 어린이들을 향한 선교 전략은 너무나 긴급한 과제다. 엄청난 미래 과제다. 신속하게 서둘러야 한다. 현재 북한 인구는 2천4백7십 만 명인데, 그 중 만 14세까지 아이들 인구는 550만 명이다. 굉장한 숫자다. 현재 남한 인구 5천1백 만 명 중에 주민등록상 만 14세까지 아이들 인구가 745만 명이다. 비율로 환산하면 북한의 아이들이 더 많다. 한 가구당 남한 가족보다 1명의 자녀가 더 많은 셈이다. 매우 희망적이다. 그런데 국제 어린이구호재단인 유니세프의 조사에 의하면 북한 청소년들은 남한 아이들보다 키가 9cm 정도 작다고 한다. 몸무게도 14kg이나 적게 나간다고 한다. 세계에서 폐결핵 환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북한이다. 그만큼 영양 섭취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데도 힘든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있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게 되면 통일이 된 이후에도 그 후유증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통일 대한민국을 이루려면 북한 어린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무조건, 무제한, 무차별 지원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통일 전략은 프로젝트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어야 한다.(Project vs. People) Mission보다 Man을 우선해야 한다. 사상보다 사랑을 본질로 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표본으로 보여 주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메시지다.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것만이 실천 복음이다. 우리 정부는 민간 단체나 교회의 대북 사랑 지원 물꼬를 터 주어야 한다. 사랑만큼은 막지 말아야 한다. 사랑의 물길까지 막으면 영혼의 기근과 재난이 온다.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통일애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가슴이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심장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통일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자. 통일 이후 우리들의 발자취가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도록 해 보자.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일애원이 있으십니까? <끝>
579 no image |목회칼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일애원<1>_조봉희 목사
편집부
1934 2017-03-08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일애원<1> < 조봉희 목사, 지구촌교회 > 탈북한 통일민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통일의 선구자로 쓰임 받을 것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His story)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것도 그분의 작품이다. 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야말로 남북통일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해석해 본다. 요즘 TV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영화의 소재와 주제가 남북의 공조, 연합, 하나 됨이다. 통일은 하나님의 복된 섭리로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준비시켜 주시는 청신호다. 통일 대한민국의 미래 청사진은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이루어져가고 있다. 그 프로세스를 분석해 보면 더욱 확실하다. 하나님은 통일을 준비시키려고 탈북자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탈북자들은 하나님이 보낸 중요한 분들이다. 요셉이 먼저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번영시대를 맞이하도록 보냄 받은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나리오요, 하나님의 통일 전략이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북에서 남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 주셨다. 1945년 북한이 공산화되자 수십만 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왔다. 동쪽으로는 흥남부두에서 10만 명이 넘게 배를 타고 엑소더스(exodus)를 했고, 서쪽에서는 남포항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으며, 그 외에도 수십만 명이 육로를 따라 걸어서 38선을 넘어 내려왔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약 65만 명 정도가 월남하였다. 그리고 1989년부터 최근까지 내려온 탈북자가 3만 명에 이르고 있다. 남한으로 내려온 숫자가 3만 명이지 해외에서 유랑자로 살고 있는 탈북자는 3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현재 탈북 목회자가 100여 명이 넘었으며,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남한으로 보내 주신 그들이야말로 북한으로 다시 올라가 무너진 교회를 회복하고, 고향산천을 복음화 하는데 주역이 될 수 있는 자들이다.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탈북자들은 그들이 넘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 보낸 자들이다. 그 동안 우리 정부나 교회가 통일을 준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주도하셔서 탈북자들을 내려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탈북자라는 표현보다 통일민이라고 호칭한다. 지금 남한에 내려와 있는 통일민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돈이 연간 150억이 넘는다. 이들이야말로 통일한국을 위한 전령들이다. 이들은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몽골, 태국, 베트남, 라오스를 거쳐 남한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나중에 훌륭한 통일 리더가 될 수 있다. 냉혹한 한지에서 산전수전 훈련을 받았고, 사생결단이 준비된 자들이다. 마치 모세나 다윗처럼 광야훈련을 통과한 미래 리더들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통일의 선구자로 쓰임 받을 것이 여실하다. 하나님은 그 어떤 악도 선으로 바꾸어주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화위복이라는 역설의 왕국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기도운동이 필요하다. 요즘 원코리아 연합기도운동이나 컴패션 같은 단체가 앞장서서 통일기도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은 1949년 동서독으로 분단된 지 41년 만에 놀라운 통일을 이루었다. 독일 중부의 작은 도시 라이프치히에 있는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작은 기도운동이 거대한 통일의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 정점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다. 오늘 우리의 작은 기도로도 큰 기적을 가져올 줄 확신한다. 특히 우리가 뜨거운 가슴으로 기도하며 준비하는 만큼 통일의 기적은 분명히 앞당겨질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통일은 광속도로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다리는 통일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정치가들이 말하는 경제 통일이나 땅의 통일 이전에 가슴의 통일, 사람의 통일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즉 사상의 통일보다 사랑의 통일을 먼저 해야 한다. 이념의 통일보다 신앙의 통일을 우선해야한다. 서독 교회는 41년 동안 동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70%는 동독 정부가 횡령을 했고, 30%만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서독 교회의 해석이 너무나 감동적이다. 사랑으로 했으면 된 것 아니냐는 성경적 계산이다. 그야말로 거룩한 수학(divine mathematics)이다. 사랑은 계산을 초월한다. 사랑으로 한 것은 낭비나 허비가 아니다. 하나님이 계산해 주신다. 더하기 수준이 아닌 곱하기의 승법 공식으로 보상해 주신다. 남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인프라를 보면 더욱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통일 이후가 기대된다. 우리 대한민국을 오묘하게 쓰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북진을 추진해야 한다. 교회부흥의 북진, 대륙선교의 북진을 위해 더 큰 비전과 불타는 열정을 품어야한다. 나는 왜 우리가 복음의 북진, 부흥의 북진, 선교의 북진을 지향해야 하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호에 계속>
578 no image |목회칼럼|우리 고을에 오신 그의 이야기_김양호 목사
편집부
2041 2017-01-10
우리 고을에 오신 그의 이야기 < 김양호 목사, 하누리교회_목포기독교역사연구소장> “지역교회 목회자로서 그 지역교회의 역사 잘 알아야” 주어진 인생길을 걸으며 나름대로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의 영향을 받는다. 좋은 목사님을 만나 목회의 멘토로 삼아 따르기도 하고, 훌륭한 신자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를 본받기도 한다. 종종 전혀 자신이 예측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에 눈을 뜨고 그것이 남다른 인생길을 꾸리게도 하는 것이다. 나는 5,6년 전쯤 한 사람을 만나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시간들을 보내왔다. 그는 지역의 기독교 역사 연구에 일생을 헌신해 온 분이었다. 그렇게 그 일에 몰두한 끝에 최근 한 권의 책을 냈다. 목포를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목포기독교이야기”(세움북스 펴냄)이다. 어릴 때부터 문학을 즐겨하며 가까이 하긴 했어도 역사에 대해선 전혀 무지와 무관심으로 지냈었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고향에 내려와 목회에 대한 열정을 쏟으며 성경과 문학에 심취하는 정도였는데, 한 사람과의 만남이 나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고향을 사랑하여 목포에 와서 목회를 한다면서 정작 목포 땅에 어떻게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어 흘러왔는가에 무지한 내게 그분은 완곡하면서도 진중하게 지적을 했다. 지역 교회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부담과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자주 지역 교회의 역사에 대한 자료나 선교사들의 편지 등을 건네주며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하며 그다지 열심을 내지는 않았다. 1-2년 정도를 그저 그렇게 반응하다가, 3년 쯤 지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목포 기독교 역사에 대해 자료를 찾아 먼 곳을 마다 않고 다니게 되었다. 지역 대학 도서관의 책들을 뒤지고 복사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문서를 탐독하며 책상에 붙어 글을 쓰는 게 일상이 되어 있었다. 목회사역 외의 남은 시간들을 아껴 실로 그 일에 미친 듯이 몰두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내게 새로운 삶과 과업을 주시는구나, 새삼 깨달음과 감사함 속에서 열정을 쏟으며 복된 일 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이런 내력으로 지극히 미흡하지만 지난 해 11월에 지역교회사로선 드물게 앞서 말한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로 귀한 생명의 복음을 지니고 값진 은총을 누리고 산다. 하지만 우리가 몸담고 사역하는 지역 속에 임한 하나님의 구체적 은혜의 실체와 역사적 가치들에 대해선 많은 경우 이해가 낮으며 거의 관심이 없는 듯하다. 말씀의 본질을 잊고 지내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 신앙과 삶을 망가뜨리며 어렵게 만든다. 세속의 영향력으로부터 참된 신앙을 지키고 그 능력을 회복하며 키우려면 역사에 대한 이해력을 넓히는 일이 동반돼야 한다. 성경도 이렇게 말한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우린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옛날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누군가를 통해 값지게 받은 십자가의 복음 아닌가! 말씀의 본질을 회복함과 아울러 우리가 받은 귀한 역사를 되찾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어려움에 처한 한국교회를 반성하고 돌이키며 제대로 된 교회로 세워 가는데 큰 유익을 줄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의 한 지역에 거주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다. 마땅히 우리 목회의 대상이요 섬김의 장인 그 지역에 대한 인문 사회학적 통찰과 함께 그곳의 역사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애써 찾아보고 알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에 그것들을 들려주고 값진 유산을 물려 줘야 할 것이다. 각자가 처한 고을마다 그곳에 임한 특별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고을에 오신 그의 이야기, 곧 역사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이야기들을 밝혀내고 알리고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는 주의 일꾼들이 많아지길 소원한다.
577 no image |목회칼럼|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다짐_임용민 목사
편집부
2214 2016-12-27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다짐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믿음의 대상이신 유일한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중심 두어야” 신년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다짐은 비장하다. 새로운 마음으로 경건 생활을 힘쓰겠다는 결심으로 충만하다. 특별히 새해 벽두는 시간을 써가면서 경건 생활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기 위해 기도하고 소원하는 성도들이 더욱 많다. 각각 약한 부분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다시 일독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하며, 예배 생활 회복을 다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기도 생활의 회복을 다짐한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하고 있는 다짐과 행동이 옳은 것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참으로 영광이 되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방식과 일치하는가? 하나님을 계시하신 성경의 가르침, 즉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과 위격의 구별성과 분리됨이 없는 신앙생활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과 다른 것이고, 하나님의 뜻과 다르며, 나아가 하나님 그분 자신과 분리된 것이라면 그 자체가 헛된 것이 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우리의 열심과 노력을 기준으로 돌이키는 방식을 거절해야 한다.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을 좇아, 그의 속성과 분리됨이 없이 그를 섬겨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길이 있는가? 칼빈은 제네바 요리문답서(1542년)에서 명확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네 가지 방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참되게 신뢰하는 법과 내용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믿는 자에게 중심이 있지 않고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유일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중심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상상한 하나님, 즉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느낌을 통해 산출한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 된다.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과 위격의 구별성과 분리됨이 없이 믿는 자에게 복음 안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그대로,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믿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이와 같이 거룩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같은 진리를 따라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된다. 둘째, 복음과 율법의 바른 이해를 통해, 즉 그분의 뜻에 복종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과 율법의 목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옳게 이해하여 참된 경건, 즉 두려움, 공경, 신뢰 그리고 복종으로 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개혁교회는 항상 율법의 세 가지 용도를 설명하여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했다.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 됨을 알고, 그로 인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것에 의존돼야 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택함을 받은 성도에게 유일한 양식이며, 삶의 유일한 규범이 되어 거룩과 영생에 유익이 됨을 알고 즐거워하게 된다. 복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이 없는 무질서한 복음은 존재할 수 없다. 즉 성도는 항상 복음 안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며 즐거워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을 삶의 양식으로 삼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된다. 셋째, 우리의 모든 곤경 중에서 그분에게 도움을 청하며 그분 안에서 구원과 모든 선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를 통해 참된 간구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풍성하게 제시되어 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그런데 택함을 받은 성도의 기도가 자신의 욕망과 비례할 뿐 하나님의 영광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욕망에게 영광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시하신 그대로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간구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해야 한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때도 우리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장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맡기는 기도라야 한다. 특별히 우리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욕망과 죄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 이와 같이 기도하는 것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에 묶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창조주이시며, 홀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나님 되심에 적합한 영예로써” 기도를 요구하신다고 설명한다. 네 번째, 설교와 성례이다. 설교와 성례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 그분 자신에 대해 배우고, 그 진리를 실제적인 양식으로 대면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모든 피조물들과 인간들 중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받는 자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일하는 자로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일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은총을 따라 베푸시는 것들을 받는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단순하게 육체적인 양식을 주는 수준에서 대접하지 않으신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도록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설교를 통해 실체와 분리됨이 없이 드러나도록 은총의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하신다. 또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니면 죄인이 우리는 용납될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로 양식을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만나게 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받는 자로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이 세상에 양식과 진리의 양식을 주시는 자가 유일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영광스럽게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이제 다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또 다시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식과 분리된, 그릇된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신년 벽두에 우리는 참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576 no image |김영규칼럼| 미래 국가와 사회에서 기독신자의 위치
편집부
2043 2016-12-14
미래 국가와 사회에서 기독신자의 위치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자연이나 본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겸손한 태도 가져야” 미래의 국가나 사회는 지식기반 국가나 사회로 가야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맞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지식기반 사회가 없었던 때는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지식기반 국가나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지식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야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발전해야 할 미래의 집단 지식 즉 한 나라가 미래 지속 가능한 지식에 기반을 둔 국가나 사회로 길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지식이나 전통적 혹은 관습적 지식에 의해서 발전되어 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과거보다 지금 확고히 검증된 기초과학 지식이나 인류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진보된 기술들에 기초한 최고의 합리적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열린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로부터 생산된 지식들을 국가 구성 주체들이 빨리 공유해 가는 방향으로 국가나 사회의 시스템을 확고히 하는 일이 더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전체 경제규모가 개인의 경제규모를 좌우하겠지만, 개인의 경제규모가 크고 삶의 질이 높다고 해서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행복지수의 질에 있어서 상대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그 구성원들에게 그런 최고의 합리적 지식이란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개인의 행복에 어느 정도 크고 작게 기여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위해서 장기간 국가는 개인들의 성장과 함께 저출산과 장수시대로 가는 사회에서도 통하는 인간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인류의 과거 역사를 통해서나 현재 진보된 어떤 국가의 예들에 의해서도 찾을 수 없으며 앞서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극히 비판적 프로그램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에 있어서 미래 생산 활동에 있어서 자동화 수준과 경제행위자들 수의 적정성에 대한 고려에 못지 않게 개인들의 미래 성장에 대한 맞춤형 진단 능력과 그 진단에 따른 개인별 해법들 및 전체 사회의 그런 지식들의 넓은 공유성을 위한 실천 방안들이 현실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전체 사회나 학교 제도가 한 개인의 맞춤형 진단을 수행할 때 무의식이나 의식과 같은 근대적 개념들에 의해서 진단하였다고 한다면, 최근 전까지도 1초의 반인 500 밀리초 내에 무의식과 의식 세계에 대해서 모두 설명해내야 하는 과제로부터 이제는 뇌세포 내에서 분자들이나 원자 구조들 내부의 젭토 초나 아토 초의 변화들까지 읽어내어 그 합리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든 시점에 와서 인간 발전에 대한 예측된 프로그램들을 찾아내고 그 프로그램들을 가능한 한 빨리 넓게 적용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초과학 지식이나 첨단 과학기술이 갑자기 나노기술로부터 피코 기술로 거치지 않고 바로 펨토 시대나 아토 시대로 바로 넘어가 버린 상태에서 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과학기술 시대로 넘어와 버렸기 때문에, 산업과 교육도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 후진적 효소나 촉매 기술을 가지고 먹고사는 길이 좁아 졌고 산업구조의 무게감이 첨단 광학기술 산업으로 급히 옮아가야 겨우 세계 경쟁에 있어서 약간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나 어른들은 그런 최고의 지식을 습득하는 시대에 맞게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바로 적용해 미래 인재를 길러내야 할 당위성을 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자연’(nature) 혹은 ‘본성’은 젭토 초 기술까지 요구하고 있다. 느린 문화의 상징인 법치사회는 조금씩 축소되어야 하고 어설픈 과학적 지식들과 기술들도 물러나야 하며 모든 인문과학이 기반을 두고 있는 언어생활 일반이나 창작 활동 및 감성들의 표출 활동 일반에도 그런 맞춤형 최고의 지식들이 빨리 적용이 되어야 미래사회로 가는 안전한 자리가 확보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새로운 지식을 팔고 사는 시대로 빨리 발전하는 미래 세계상 앞에 인류 사회가 걸어온 과거의 세계상에 묶여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빠른 지식 정보 사회의 장점을 살려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의사 결정시간을 빨리 흡수하는 제도들과 정치 사회 체계를 구축하여 집단적으로 구성원들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더 깊게 성찰하게 하고, 거기에서 발견되고 고증된 진리들을 지구상의 어떤 사회보다 빨리 적용할 필요가 있는 시대로 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급한 대안이 될지 모른다. 인간 인자들은 긴 역사 자체가 증명하듯이 아주 느린 인자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느린 문화, 느린 생활은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다. 또한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대 시대에 와서 더욱 더 공직자들이나 책임을 맡은 자들은 고도의 민주사회의 이념이나 청지기 사상에도 불구하고 결코 명예직이 아니라는 것도 잘 증명이 되고 있다. 크고 작은 다수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특별한 능력을 갖지 않으면 그 명예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능력 중에서 자연이나 본성 앞에서 항상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놀라운 합리성을 넘어 급하게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그 자연이나 어떤 본성을 인간이 새롭게 창조하거나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자연이나 본성을 주의하고 보호하되 가능한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에 열중하면서 그런 것에 대한 최고의 지식들이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급하게 함부로 그 자연이나 본성에 훼손을 가해서는 아니 된다는 겸손하고 소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인간은 본성을 창조할 수 없어 물론 그런 태도를 넘어 기독교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놀라운 답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일 것이다. 그런 답들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큼 국가나 사회 앞에서 그 책임이 무겁다고 해야 할 것이다.
575 no image |목회칼럼| “이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_김수연 목사
편집부
2407 2016-11-29
“이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 김수연 목사, 서부제일교회 > “나라 위해 뼈를 깎는 노력과 개혁이 필요한 때” 지라시는 지라시가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최순실 게이트 말이다. 요즘 온 나라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시끄럽다. 많은 사람들은 설마설마 하면서도 아마 이 정도는 아닐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대통령의 아픈 가족 역사를 알기에 그의 옆에 ‘가족처럼 보살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류의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지금 온 국민들은 대통령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분노와 수치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이런 국정농단이 있었을까? 과연 이 땅에는 하나님이 그리도 바라시는 정의와 공의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지금 대한민국은 도덕과 윤리와 최소한의 사회 정의가 지도자들과 부패한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어이없게도 사단의 하수인인 무당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가슴이 아프다. 이제 대통령은 더 이상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려 한다든지 자리에 연연한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대통령 스스로 손과 발을 묶어야 하며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자신의 안위가 아닌 진정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결단해야 할 시기라 생각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살고 국민이 살고 대통령 자신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비참한 현실을 목격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지자적인 사명을 다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본연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준엄하게 비판하고 선지자적 역할을 담당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권력의 편을 들었으며 용비어천가를 불렀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이 비굴함에 대해 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죄, 돈을 더 사랑한 죄, 권력을 더 사랑한 죄, 교만한 죄, 외식을 밥 먹듯한 죄, 숫자의 성장에 매여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편법을 사용한 죄, 물량주의에 빠져 숫자의 증가로 그것이 곧 교회 부흥으로 오인한 죄를 함께 회개해야 한다. 정의는 모든 정치의 목적이고 고유한 판단의 기준이다. 따라서 정의추구가 모든 국가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초대교회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에서 정의에 따라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를 향하여 거대한 강도떼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나 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기 위해 뼈를 깎는 자정 노력과 개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이런 나라가 대한민국이었음 좋겠다. 1) 우리나라가 의의 나라이길 소원해 본다.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의의 문제였다. 로마서에서 의란 단순한 사회정의의 개념이 아니다. 로마서에서 정의되는 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완성된 나라인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질문에서 하나님을 떠나면 무의미해 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으면 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장하는 정의는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파스칼은 팡세에서 “피레네 산맥의 이쪽에서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가 되는 것”이 인간적 정의의 실상이라 하지 않았던가? 절대적인 정의의 표준은 하나님 한분이며 그분이 바로 정의의 원천이다. 따라서 현 시국에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 것을 기뻐하실까?”라는 질문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이 정의롭게 사는 성경적 처방이기 때문이다. 2) 우리의 나라가 평화의 나라이길 소원해 본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람들과의 평화이다. 바울은 로마서 12:18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5:17)고 언급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나라가 평화의 나라이길 소원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속한 하나님의 나라가 평화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의 희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평화를 가져오는 방편은 사랑밖에 없다. 형제를 정말 사랑한다면 형제와 평화할 수 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과제는 형제의식이며 평화인 것이다. 3) 우리나라가 희락의 나라이길 소원해 본다.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은 기쁨의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락의 나라, 기쁨의 나라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대한민국만큼 고난과 환란을 겪은 민족이 얼마나 될까? 그러기에 우리민족이 복음 안에서 기뻐하며 평화하는 나라가 되길 소원한다. 분명 우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민족이 지금의 상황을 교훈삼아 주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주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다면,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의 상황을 떠나서 기쁨의 축제가 있는 민족이 될 것을 믿는다. 진실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하나님나라 가치관에 근거한 의의 나라, 평화의 나라, 희락의 나라가 되길 소원해 본다.
574 no image |목회칼럼| 역사에 대한 판단과 교회의 자세_임용민 목사
편집부
2194 2016-11-16
역사에 대한 판단과 교회의 자세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교회는 진리를 따라 역사의 의미와 가치 밝혀야 할 의무 있어” 칼빈은 이방의 저자들이 '역사는 인생의 교사이다'라고 말한 것을 옳다고 설명한다.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교훈을 배워, 자신의 삶을 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과 의미가 드러나야 한다. 최소한의 객관성과 사실로부터 분리된 역사는 사람의 생각을 무지와 오류로 인도하여 방종과 부패에 이르게 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에도 문제가 있다. 역사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 삶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많은 내용들은 지배자를 주된 내용으로 하며, 상대적으로 수많은 민초들의 삶은 그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반대로 역사가 수많은 민초들의 삶을 담아낸다고 해도 그 자체로 역사의 많은 사실 그 자체를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초들의 삶이라는 것이 대부분 역사의 주류를 담아내는 것에는 취약할 뿐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지배자들의 정치 행위로서의 역사와는 그 영향력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세상에 인간들의 욕망과 죄악됨이 펼쳐지고 그것이 어우러진 현실을 나름대로의 학문적 작업을 통해 객관화 한 것일 뿐이다. 때문에 객관화 할 내용도 대부분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정해지고, 그에 의해 다뤄질 소스를 선택하는 일이 정해진다. 이 때 객관화를 주장하는 주체가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역사가 추구하는 객관성 자체가 이미 중립적 성격을 떠난 다는 한계를 갖는다. 결국 역사 자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분 자신의 실체에 대해 접근하는 길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고작 해야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지식과 학문적 필요에 의해 교훈을 찾아 현재 세상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대안과 지혜를 제공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그래서 칼빈은 역사의 의미와 가치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에(이방인 저자) 의해 기록되어 전해 내려 온 바와 같이 그 역사에서 건전한 발전을 이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만이 이러한 종류의 기능을 해낸다. 먼저 성경은 우리가 모든 다른 역사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일반 법칙을 규정해 놓는다. 그렇게 해서 그 역사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도록 만든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행동과 피해야 할 행동을 분명하게 구분해 준다. 그러나 교리에 관한 한 - 그것은 성경의 특별한 분야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 그의 백성들을 향한 그의 의와 선하심, 그리고 약한 자들에 대한 그의 심판들을 우리에게 유일하게 밝혀 주고 있다." 칼빈은 인간 역사 그 자체의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건전한 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설명한다. 오직 성경만이 인간에게 건전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는 죄악된 본성과 부패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그 결과들인 물질적 발전이나 어떠한 편리성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경은 오히려 역사를 시험할 수 있는 일반 법칙을 제공한다. 이로 인해 인간의 역사적 객관성과 그로부터 나온 모든 발전은 판단을 받고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사라지는 현실을 고스란히 판단하게 된다. 실제로 인간 역사가 비춰주고 제공한 모든 편리성은 인간 자체에 의해 거부되거나 제거되고 결국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한계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교리들을 떠나서 역사의 유익들을 누릴 수 없다는 칼빈의 말은 참되다. 성경이야 말로 인간의 얄팍한 편리성과 객관성에 의존하는 본성과 욕망을 하나님의 진리 관점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따라 인간이 아무리 작은 현실로서 역사를 판단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이 세상이 감히 산출할 수 없는 객관성을 가진 것이며, 형용할 수 없는 발전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된다. 이로 인해 성도는 인간 자체의 궁극의 발전인 영원하고 무한하고 불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과 분리됨 없는 뜻을 따라 자신의 행동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탁월한 발전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의 객관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교리의 지도를 받지 않는 순간 인생의 교사가 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참된 진리를 따라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밝혀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일에 충성되지 못한 교회는 그 자체로 진리를 사용하는 은총을 성령으로부터 받지 못한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사실상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것이 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설명을 인용하겠다. "만일 성경의 역사들을 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에서 건전한 교리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참된 교회는 역사의 객관을 앞세워 하나님의 진리들을 넘어서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이 산출할 수 없다는 점을 겸손히 인정하고, 모든 역사들 위에 하나님의 진리를 드높여 드러내야 할 것이다.
573 no image |목회칼럼| ‘다른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서_천한필 목사
편집부
2007 2016-11-01
‘다른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서 < 천한필 목사, 예다임교회 > “교회는 복음의 본질 보존하고 계승하는 역사적 책임 감당해야” 채근담에 “미유기불고(未有基不固)하면 이동우견구자(而棟宇堅久者)니라”는 문장이 나온다. 풀이하자면, ‘기초가 단단하지 못하면 동우(棟宇), 즉 그 집이 견고하게 오래 갈 수 없다’는 뜻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채근담의 저자 홍자성이 말하는 기초는 ‘덕(德)’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궁극적 기초이자 토대는 바로 복음이다. 오늘날에는 흔히 교회를 조금 더 바르게 하고 싶고, 의식있는 목회를 하고자 하는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 사이에서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의미는 정의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용어이다. 그럼에도 필자 또한 개혁주의에 대해서 굳이 한 마디 더 언급하자면, 개혁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이다. 받은 것을 계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전 15:1-3절). 이것을 가리켜 개혁주의 전통(the Reformed tradition)이라고 한다. 곧 칼빈이 정립한 개혁주의 사상을 바르게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이 바로 개혁주의인 것이다. 개혁주의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한 믿음 가운데 전수받은 복음의 정통성을 잘 보존하여 다음 세대를 향해 잘 계승해야 하는 역사적 책임을 간과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이며 목사의 사명이라는 사실 앞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우리 시대의 교회와 목사는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 세대에서 우리끼리만 목회 잘하고, 신앙생활 멋지게 하다가 끝나는 것은 개혁주의를 잘 모르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향해서 계승하는 중요한 숙제가 남겨져 있다. 그래서 66권 성경의 토대 위에서 지금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목회적 상황을 끊임없이 개혁해가야 하는 것이다. 사사기 2장 10절에는 여호수아 이후의 세대가 ‘다음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사기 2장 10절의 상황과 많이 비슷한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교회의 중요한 역할은 복음으로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그 때부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기대하기 어렵다. 교회가 복음에서 벗어나 타락할 때 가장 닮아가는 조직이 바로 로마 천주교라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직의 규모나 성장이나 교인의 숫자 증가는 사실상 목회의 주된 관심사일 수가 없다.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보존하여 계승해가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주제는 없다. 이미 들었고, 알려진 그 복음의 본질을 다시금 상기하고 반복해야 한다. 이로써 목사는 교회가 온전히 개혁될 수 있도록 번거로운 수고와 책임을 직면해야 한다. 교회 사역이 힘든 것은 단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수많은 성도들 또한 목사 그 이상으로 고생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목회의 진짜 수고와 고생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의 교회가 다음 세대를 위해 복음의 본질을 잘 보존하고 계승해 갈 수 있도록 역사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을 전제할 때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개혁주의 전통에 따라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우리의 자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572 no image |목회칼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담긴 함의_노승수 목사
편집부
2324 2016-11-01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담긴 함의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믿음은 특별계시 통해 계시자이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지식” 칼뱅은 믿음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지식을 포함합니다(기독교강요 3권 2장 2절). 그런데 칼뱅이 이 표현을 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그의 시대에 지식이란 대상과 인식 사이의 일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은 그 기초가 우리 인식에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자연스런 전제였던 대상 세계가 우리 인식으로부터 도려내어진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지식의 기초를 우리가 지닌 회의적 인식에 놓은 후부터 모더니즘과 후기 모더니즘은 지식으로서 전체 세계를 자기 내적인 체계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후기 모더니즘은 이런 체계가 도리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과 한계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타자라는 대상을 인식의 영역으로 받아드려서 객관 개념을 대상과 인식의 일치가 아니라 상호주관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했지만 이 역시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곧 지식은 있지만 실제로 거기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반사로 출현합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을 보면 기독교 윤리학에서 A학점을 받는 신학생이 인종차별을 하는 장면을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신약학자 한 사람도 그가 쓴 글에 비해 매우 좋지 않은 평판을 얻고 있으며 교회사학자이며 저명한 학자인 어떤 교수도 인종차별적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재세례파이면서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어떤 사람은 여러 자매들을 장기간에 걸쳐 성추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기 연구를 빌미로 말입니다. 이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날 지식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살펴보십시오. 학원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도덕적일 필요도, 인격이 훌륭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잘 전달하면 그뿐입니다. 국회에서 관료의 청문회를 할 때 도덕적 기준들은 형식적 사항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도 재능만 있다면 그리고 그 재능으로 인정을 받으면 모든 것이 용서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계시를 우리 인식의 내용으로 받는 패러다임을 버린 탓이라고 할 것입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말합니다. 특별 계시뿐만 아니라 자연 계시 전체가 우리 인식의 대상이며 이것이 우리 지식의 근거라는 사실을 버린 데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것을 버린 채로 성경의 완전 영감을 주장해도 사실 헛된 일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지식이란 자기 체계이거나 혹은 이웃과 더불어 하는 체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계시와 그 수여자이신 하나님을 고려한 체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을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근대적 데카르트 체계를 버리고 계시적 체계, 곧 계시하신 하나님과의 대면을 전제로 한 체계인 것입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을 설명함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지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대면하여서 그 계시를 아는 것은 동시에 자기를 아는 일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에 현대에서 지식은 대상을 아는 것이 자기를 아는 일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자기의 상태와는 전혀 무관하게 대상을 알 수 있고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것과 무관하게 대상을 잘 설명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를 기초로 한 인식은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를 대면하여 알 때, 상대에 대해 궁금해 하고 알려는 마음이 커지고 사랑이 커질수록 자기에 대한 인식도 함께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계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자기 투여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드러납니다. 이 계시를 그저 나와 무관한 어떤 대상으로 아는 것이 사실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삶으로부터 유리된 지식이 바로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대상이신 하나님을 도려내고 자기를 기초로 지식의 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칼뱅이 믿음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할 때, 이는 계시를 도려낸 인식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교육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속성과 그 뜻에 대해 앵무새처럼 외워대는 것은 참된 의미의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칼뱅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인식이 전제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인식에 바로 믿음이 존재한다는 말인 셈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이런 문맥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특별계시를 통해서 그 너머에 계시자이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세간에 유행하는 말 중에 사랑을 글로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삶속에서 배운 적은 없고 책으로만 배운 것을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단지 글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경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그 곳에 바로 참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571 no image |목회칼럼| ‘n분의 1시대’_이은상 목사
편집부
2026 2016-10-18
‘n분의 1시대’ <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김영란법 핑계로 獻身(헌신)을 獻心(헌심)으로 포장할까 염려돼” 초등학생들이 대형수족관을 견학하러 갔다. 투명한 수족관 속에서 스킨스쿠버가 송사리들에게 먹이를 뿌려주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한 아이가 소리쳤다. ‘야 뇌물 먹는다 뇌물.’ 잠시 후 이번에는 스킨스쿠버가 큼직한 다랑어에게 먹이를 뿌렸다. 아이가 다시 소리쳤다. ‘떡값 먹는다 떡값.’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인솔 선생님이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아빠가요 송사리가 먹는 것은 뇌물이고 큰 놈들이 먹는 것은 떡값이래요.’ 사람은 누구나 선물받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받지 말아야 할 선물, 즉 댓가성인 뇌물이 있는가 하면, 받아서 가슴 뿌듯한 감동이 오는 감사의 선물이 있다. 그렇다면 뇌물과 선물의 구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주 어려운 걸 정부에서 법으로 정해주었다. 그것이 바로 청탁금지법이라는 김영란법이 아닌가. 식사 기준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 이상은 목적성이 있는 뇌물로 간주한다는 법이다. 가령, 3만 원이 넘는 식사대접을 받으면 과태료를 물게 된다. 그렇다면 김영란 법은 참 좋은 법일까? 먼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비약된 생각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부정청탁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 비리의 시작은 미약하게 '밥 한 번 하시죠' '제가 한 번 모실게요' '필드에 한 번 나가시죠'에서 비롯되지만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하여 억억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부정청탁에 들어가는 비용은 고스란히 제품과 서비스의 가격인상이나 다양한 형태의 서민증세 등으로 국민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영란 법은 부패방지용으로 꼭 필요한 법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이 법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있다. 김영란법은 법이 아니라 칼이라는 말이 있다. 국민들이 살아가는 최소한의 의례를 막고 사제지간의 정, 이웃 간의 교류와 소통을 억지로 막는 법이라고 말을 한다. 더구나 삼시세끼를 집에서 혹은 도시락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서민에게는 거리가 먼 법이라는 지적이 있다. 따라서 김영란법은 이웃과의 아름다운 교제와 섬김, 감사와 겸양과 경애를 묶어버리는 마치 그 모습이 소의 부리망과 같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이 법을 살펴보자. 기독교문화의 특징 중 탁월성을 들자면 바로 공동체성과 헌신이다. 교회는 공동체성을 이웃과 ‘즐겨나눔’으로 표현했으며(행4:32-36), 헌신을 하나님께 ‘힘써드림’으로 실천하였다(고후8:2-4). 이 즐겨나눔과 힘써드림은 가난한 자나 부자 모두를 부요하게 하였다. 만일 김영란 법을 교회에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아마도 이웃과의 ‘즐겨나눔’은 줄고 세속사회처럼 1/n, 더치페이, 혼밥문화 등이 일상 시 되지 않을까? 헌신에 있어서도 거액의 헌금을 드리는 ‘힘써드림’의 은혜는 사라지고 날마다 십시일반이라는 구호를 외치거나 작은 일에만 충성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마음을 전하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방법에는 말이나 혹은 선물 그리고 기타 감사의 행위가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하나님이시든 방법은 동일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자시니까. 그런데 만일 전하고 싶은 마음의 감동이 크다면 어쩔 것인가? 교회를, 성도를, 목회자를 무지 사랑하는데, 주님께 엄청 감사 하고픈데, 그때는 감동대로 크게 드림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법을 지켜야 하지만 그 법을 하나님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면 곤란할 것이다. 세상의 법과 문화를 빙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팔아먹을 수 없다. 김영란법을 핑계로 獻身(헌신)을 獻心(헌심)으로 포장할까 염려가 된다. 우리 주변에는 물질의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웃들이 있다. 구제헌금이나 선교헌금 그리고 장학헌금 봉투에 숫자 몇을 쓸 것인가? 3만, 5만, 10만? 이런 답을 기대해본다. ‘그건 제가 다 감당하겠습니다. n분의 m입니다(m=my).’ 통큰 헌신은 하나님나라에서 불법이 아니고 적법이며 적극 권장할 만고불변의 도덕법이다.
570 no image |김영규칼럼|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
편집부
2192 2016-10-18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신자들은 비복음적인 것들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 가지고 있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무오한 진리로서 신적인 권위를 가지되 그 권위가 인간에게 의존하거나 교회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오직 성경에 따라 자연 속에 있는 자유에 대한 강조가 고백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택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그 방식 혹은 길에 대한 고백에 앞서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고백이 하나의 장으로 고백되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보존에 대한 고백과 은혜와 구원의 보증에 대한 고백 이후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에 대해서 은혜 아래 중생된 자들의 경우 더 강화된 성격을 강조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백에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고백이 뒤따르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옛 교회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즉 그의 행위들과 고난들 및 은택들을 예표하는 규례들인 의식법에 대한 폐지와 정치적 집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재판법의 만료를 담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백도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게 도덕법으로서 율법과 관련해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된 자들에게 성경에 따라 더 강화된 그런 고백 조항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논리적으로 종속될 수 없을 것 같은 예배와 안식일에 대한 고백, 법적 맹세와 선서에 대한 고백, 관원에 대한 고백 및 결혼과 이혼에 관한 고백 등이 그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고백 조항들에 일종의 저항 정신을 담고자 하는 면이 있다. 그와는 상관이 없다 할지라도,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 이후에 이미 작정과 예정에 대한 고백에서 분리될 수 없는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져 있는 택자들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고백들이 순서 상 자유 의지에 관한 고백에 종속이 되어 있다는 입장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에 대한 고백의 제1항 안에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이 포함이 되어 있다는 점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시편 115편 3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가장 자유롭다고 하면서 그 자신의 의지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논의에 의해서 일어날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영원 전부터 결정하였고 그의 의지의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서 그의 영광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미리 정하였지만, 그 결정에 있어서 피조물들의 의지에 어떤 폭력이 제공된 일이 없고 두 번째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도 없애버리는 일이 없는 방식이었음을 처음부터 정의해 주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섭리도 첫 원인이신 하나님의 작정과 관계해서 모든 것들이 불변하고 틀림없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제2 원인들의 본성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혹은 우연하게 일어나도록 질서화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상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란 그 핵심으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라는 고백에 근거해 있으며 반대로 이것은 기독교 자유의 가식아래 양심의 참된 자유를 배역하고 기독교 자유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어떤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의 교리들이나 명령들에 저항하는 데 있다. 그런 기독교 양심에 의한 저항의 내용에 맹목적 신앙이나 절대적이고 눈먼 순종의 요구로부터 자유를 포함하지만, 훨씬 깊게 유효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택자들이 값없이 자유롭게 의롭다고 여겨지는 일이란 단지 그들의 죄들이 용서되는 방식이 아닌 마치 의가 부어지는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배제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 때문이 아닌 그들 안에 일어나거나 행해진 어떤 것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든지, 혹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의 전가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 자신의 의로서 신앙 자체나 신앙 행위 혹은 어떤 다른 복음적 순종의 전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일체의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고 쉬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런 고백들과 함께 극히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의 양심 자체는 비 성경적인 일들에 대하여 이미 저항의 근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조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놀라운 강조도 아직 고린도전서의 초반 논증들이나 로마서 전체에서 보여준 사도 바울 자신의 실제적인 강조의 방식에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오래된 순수한 저항 정신은 실로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최소한 그런 고백들과 사도 바울과 같은 진리를 가진 자로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 개인들은 과학과 그 기술들이 그 합리성으로 대표되어 가고 있는 미래 사회에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점점 더 심하게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런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성장과 함께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저항하는 양심 뒤에 가식과 더불어 숨어 있는 더 본질적이고 더 큰 허무주의가 점점 크게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는 언제든지 돈이나 물질로 오염된 국민 개인의 신앙 자유를 세법개정으로 압박해 오는 국가적 통제나 감시자로서 실제적으로는 부패의 덩어리이요 원상인 기관장들에게 더 힘을 싫어주고, 오히려 이제 가냘픈 서민의 양심까지 그들에게 다 맡겨야 하는 현실적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주는 압박보다 더 좌절되게 하는 힘의 깊은 원천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구 환경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밀려오는 피해들보다 더 큰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할 내용으로 인한 그런 짐이 더 무거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로만 위로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마지막 위로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피눈물이 나는 눈물을 닦고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임을 믿으며 그런 내적인 무서운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를 참아내어 끝까지 하나님이 바로 진정 그들의 보상이요 영광임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힘은 여전히 부활과 그 영광에 이르기 전에 그와 같은 일을 증명해 내는데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69 no image |목회칼럼|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고 계십니까?_안두익 목사
편집부
5896 2016-10-05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고 계십니까?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채워가는 지혜자들이 되기를”’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이 말은 김 훈 씨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소설가 김 훈 씨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책을 보면 1636년 12월 14일 인조는 청나라의 침략을 피해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그곳에 머무는 47일은 가장 혹독하고, 치욕스러운 겨울이었습니다. 한겨울이라 가진 것도, 먹을 것도 변변치 못합니다. 그렇다고 나가서 싸울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고립무원의 성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 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는 결단에 대한 고통이 깊어만 갑니다. 결국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맙니다. 저자는 인조 임금이 굴복한 역사적 현장을 기록하면서 이 치욕을 잃지 말자고 독자들에게 도전을 합니다. 이 <남한산성>을 읽고 나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이제 결실의 계절입니다. 잎이 무성했던 여름이 가고 낙엽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누구나 1년을 되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런 계절의 흐름 속에 우리 인생도 언젠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해보면 의미 있게 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에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힘주시고, 능력 주셨을 때에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영국 격언에 “해가 비추는 동안, 건초를 말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지금 해야 합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 할 날이 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는 자들이 되셔서 오늘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채워가는 지혜자들이 되어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씀하십니다. 곡식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씨앗이 먼저 썩어져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썩어지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온 몸을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그 죽음은 사탄의 저주와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모든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삼일 만에 무덤을 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어야 사는 것, 죽어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다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피어납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 하수구에서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 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찬 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모두가 조건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가 있습니다. 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합니다.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는, 추수를 생각하는 거두어드림을 생각하는 이 계절에 무엇을 결실할 수가 있을까요? 이 가을 - 열매 맺는 계절에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지, 나의 상태, 현재 나의 삶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 앞에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 아직도 삶의 기회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라는 이 글귀가 나의 마음에 맴도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다시 한 번 나를 생각해 봅니다.
568 no image |목회칼럼| 사람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_남웅기 목사
편집부
2184 2016-10-04
사람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어느 경우든 총대들은 노회 대의원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권위 더 높여야” 제가 목회를 29년째 하면서 얻은 것은 깨달음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절실한 깨달음이요, 확실한 깨달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비롯된 권세라고도 하겠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목회의 연륜에서 얻어진 것도 아니요, 특별한 영성으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예외 없이 경험하게 되는 첫 번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권위인 줄 믿습니다. 제가 아둔해서 그렇습니다. 다른 목사님 장로님들은 이미 일찍이 깨달은 부분인 것을, 저는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이렇게 글로서 설레발 치고 있으니 스스로도 이 민망함과 쑥스러움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미 내친 글이니 계속하겠습니다. 제가 노회 안에서 목사임직식이나 교회설립예배에서 혹 순서 맡을 일이 있으면 곧잘 목사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대해 축하하며 권면하게 됩니다. 목사로 임직 받음과 동시에 그 권위가 대단하며, 교회 설립순간부터 그 영광이 찬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목사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을 목회성공과 부흥에서 보게 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결코 현실적으로 큰 교회 목회자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을 부인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영광의 무한함과 그 권위의 지극히 거룩함을 믿는다면, 목사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은 누구에게나 이미 차고 넘칩니다. 목사는 주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점에서,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시란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교만도 좌절도 죄가 됩니다. 우리 눈에 지구가 엄청 커 보여도 은하계에서 보면 하나의 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외면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이라면, 혹 교회가 위대한 실적으로 영광을 얻었다 한들, 문 닫을 입장에 있는 교회의 영광과 50보 100보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누구도 스스로 자랑하거나 상대방을 비하하지 않습니다. 혹 아쉬운 대목의 목회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를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되레 보다 열세에 놓인 목회자나 교회를 주목하게 됨은 주께서 보다 약한 자와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가능성이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를 말합니다. 목사의 인격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의 실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혹 우쭐거리는 이가 있다면 이는 안타까운 일이요, 혹 그렇지 못한 열악한 환경이라 해서 좌절하는 이가 있다면 또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것이 제가 받은 그 절실한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제가 보다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었다면 놓쳐버렸을 은혜입니다. 오늘의 열악한 환경 중에도 제가 기쁨과 소망을 줄곧 노래하게 됨은 그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에다 대입시키면 교회의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시찰회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도 교제가 우선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가 우선입니다. 노회는 그러한 여러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곳이어서 더욱 하나님의 권위가 서릿발 같습니다. 더욱 그러한 22개 노회가 모인 합신 총회라면 그 권위가 또 얼마나 아름답고 지엄하겠습니까? 그런데 101회 총회에서 지난 총회의 <두 날개> 결의에 대한 유권해석을 4개 노회가 동시에 총회에 올린 헌의안은 심도 있게 논의되기도 전에 기각되어 버렸습니다. 표결은 105대 34로 기각하기로 결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금번에 기각된 결과를 통해 총대들 각각의 존재 위치와 의미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목사요 장로이기에 각 노회의 총의를 대변하기 위해 그 자리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경우든 총대들은 노회의 대의원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결코 사람이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총대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사안을 결의함에 있어 정말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권위 앞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굴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의가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 드러내고 있는지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4개 노회가 결의해 올린 헌의안은 보다 넓은 치리회인 총회에서 기각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권위가 높이 드러났는지, 우리 총대들은 스스로 양심의 자유를 따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567 no image |목회칼럼| 어머니의 기도로 금메달을 딴 펜싱 선수_정요석 목사
편집부
2309 2016-09-21
어머니의 기도로 금메달을 딴 펜싱 선수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기도라는 명목으로 사람의 욕심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박상영 펜싱 선수가 이번 8월에 열린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에페 종목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한 점이면 지는 10-14에서 그는 연속으로 5점을 획득하여 15-14로 극적으로 역전했습니다. 그는 10-14에서 포기하지 않고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되 뇌이며 평상심으로 대범하게 칼을 휘둘러 그의 말처럼 끝내 해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전율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금메달을 따도록 기도했다는 기사를 읽고는 또 놀랐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기도만 했다고 인터뷰했습니다. 그녀는 박상영의 올림픽 대비 훈련에 맞추어 2달 전부터 매일 전국 사찰을 돌며 기도를 올렸고, 그때마다 “펜싱 선수 박상영 리우올림픽 파이팅”이라는 기도 내용을 기왓장에 적어 올렸습니다. 그 덕에 전국 유명한 사찰에는 그 기왓장이 하나씩 다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시합이 있는 8월 9일 저녁 5시부터 진주 인근 사찰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앞으로 많은 불교인들이 사찰의 기왓장을 사대면서 기도를 할 것입니다. 특히 금메달을 따는 순간에 기도를 했다는 진주 인근의 사찰은 영험한 사찰로 이름이 나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는 불자들로 붐빌 것입니다. 어쩌면 이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사찰 입구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불교도 아이러니컬하게 기복을 강조하는 사찰들이 부흥합니다. 오순절 계통처럼 북을 치며 통성으로 기도를 하는 절들은 불자들로 붐빕니다. 로또 1등 당첨이 나온 복권판매소에 사람들이 줄을 서듯, 기도응답이 이루어진 사찰들은 한동안 인산인해가 됩니다. 그녀가 기도에 관하여 인터뷰한 기사를 한국인들은 접하며 기도에 관한 개념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식의 기도 이해는 그녀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부터 한국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이러한 정서와 이해가 그대로 기독교의 기도에 파고듭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신에게 정성스럽게 간구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생각이 무속, 불교, 기독교에 상관없이 한국인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이것을 넘어서서 성경에 의거하여 기독교의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우리 주님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이 중언부언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부처나 무당들이 섬기는 잡신처럼 생각하여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중언부언하는지 모릅니다. 자극적으로 기도하여 신의 감동을 받아내어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고 여깁니다. 참된 신자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하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십니다. 그런즉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십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신의 원을 부인하는 것은 강력하게 날아가는 로켓의 방향을 바꾸는 것보다 힘듭니다. 기도 없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속한 나라와 지역의 문화와 정서를 성경으로 극복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좋은 게 좋은 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이들은 응답을 받으려고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고, 큰 소리고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왕상 18:28). 마치 무당들이 하는 굿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기도 이해가 우리에게 침투하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회를 하지만,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이것들을 잠재우기 위하여 회개하며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라는 명목으로 사람의 욕심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원함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하는 것이 기도임을 알고,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욱 상고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기도 응답을 받으려하기에 앞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미 주시고자 한 약속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566 no image |목회칼럼| 대화가 있는 공동체의 밝은 미래_가정호 목사
편집부
1898 2016-09-21
대화가 있는 공동체의 밝은 미래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풍부하고 넉넉한 대화는 공동체의 의미와 존재의 기쁨 누리는 선물” 이제 막 사물에 관한 호기심이 생긴 아이들은 쉬지 않고 질문한다. "엄마 이건 뭐예요? 아빠 이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호기심을 가득 담은 질문을 계속하는 귀여운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런 질문과 호기심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발전되었다면 우리나라의 어른들은 어떤 어른들이 되어 있을까? 어린아이 때는 모두 천재에 가깝도록 신동이다. 그런데 조금 씩 성장하면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청소년기가 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귀찮아한다. 무표정과 무감각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는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심한 고통을 느낀다. 요즘 청소년들은 부모와 함께 어디를 가는 것은 서로 부담스러워한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이 부모와 쾌활하게 웃으면서 거리를 힘차게 걷는 모습을 보는 일은 쉽지 않다. 가정도 교회도 학교도 국가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무서운 형편이 되어 가고 있다. 어디에 무슨 일로 가정을 방문하여 자녀들에게 말이라도 걸어 볼라치면 "그냥 놔두세요. 그 아이 지금 예민해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보편화된 아픔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이 과연 건강한 것일까? 아이든 어른이든 서로 간에 대화하기가 부담스러운 가정, 학교, 나라의 형국, 교회의 분위기, 총회의 상황들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삼삼오오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교환하며 집담회 같은 모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 아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부모와 어른들과 같이 다니고 싶은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선후배간에 흉금 없는 의견교환과 토론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아이들은 어디 갔나요?", "이제 아이들이 안 따라 다니려고 해요." , "그렇지요 이제 사춘기니까요!" 나도 너도 서로 잘도 알아서 생각하고 선언한다. 어리석음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된 것일까? 왜 함께 다니지 아니하고 서로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가 되었을까? 거기에 무슨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어떤 나라에서는 3대가 같이 웃고 떠들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같이 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왁자지껄하게 의사소통을 하고 사춘기도 모르고 지내고 자기살해(자살)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기쁨으로 청소년 시절을 지내는 것일까? 이 나라의 아이들이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이유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해결책은 없을까? 자기 의견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려면 어떻게 관계하며 도와야 할까? 비록 내 의견, 네 의견이 조금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 의견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의사를 소통하고 또 조심스럽게 개진된 의견들을 함께 검토하고 의논하는 분위기가 좋지 않을까? 부족한 의견일지라도 그 의견을 논의하고 수렴하는 과정에서 더 탁월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회의는 빨리 끝낼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진행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비록 길고 더딜지라도... 미숙한 의견이나마 어떤 이가 개진한 그 용기를 격려하고 박수쳐 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 이 땅에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침묵이 미덕이 되어 입을 꽉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을 성숙함이라고 좋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언어와 침묵에 관한 전문가인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은 언어를 길어내는 깊은 샘과 같다"(막스 피카르트, 까치. 1996)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침묵이 주는 미덕이 있다. 그러나 오직 침묵만이 오직 미덕일까? 불의와 악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죄에 동조하는 것이다. 거룩한 침묵은 금이지만 더러운 침묵은 적극적인 패악이다. 따뜻하고 허심탄회한 대화, 깊은 사색의 세계까지 고려하는 진지한 대화를 원하지만 쌍방 간에 소통보다는 일방적인 훈계나 선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깜짝 깜짝 놀란다. 일방적으로 잔소리나 해대는 부모나 리더를 좋아 할리 없다. 그런 공동체나 기관들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받들거나 귀한 소출들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질문하고 응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앎의 희열과 이해의 기쁨은 육신의 욕망으로 얻는 쾌락과는 전혀 그 질이 다른 하늘의 쾌락이다. 소통의 기쁨은 소속감과 연합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다. 소통의 기쁨을 잃어버린 채 어떤 기대도 없이 회의석에 장시간 강요된 침묵 가운데 앉아있는 것은 감옥과 별반 다름이 아니다. 이 땅에서는 희한하게 성인이 되면 문제에 대한 본질과 근본적인 원인들을 살피기보다는 알아서 생각하는 경향성이 자라난다. 질문과 대답이 없다. 올바른 질문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도 없다. 이런 보이지 않는 큰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면 너무 좋겠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떤 모임들에서 질문의 유익과 질문이 가져다주는 공동체적 성숙에 대하여 활발한 교통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 교회에 질문이 있는가? 원활하고 빈번한 질문과 대답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사람들처럼 서로 딴 생각을 하고 딴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것을 관철하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나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들어보는 일에 익숙한가? 성도들은 또한 목회자가 무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들어볼 여유가 있는가? 총회주간이다. 총대와 사회자가 서로 소통하기 위해 빈번한 의견교환을 하고 있는가? 총회에 상정한 헌의문서들을 가지고 노회가 소통을 충분히 했는가? 노회의 회원들이 먼저 모여 헌의문서가 가진 의도와 내용, 그 헌의가 통과, 또는 보류, 거부 되었을 때에 어떤 대안을 가지고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의견교환이 있었는가? 오히려 불합리한 질문, 수준에 합당하지 않은 질문이 나올까봐 걱정이 앞서는 것은 아닌가? 충분한 대화, 넉넉한 대화는 소속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보람, 공동체의 의미,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선물이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할 일이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겸손히 알려주고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물어보면서 배우려는 일상이다. 흉금 없는 대화가 꽃필 때 조직이나 기관, 그 어떤 모임이든 의미가 있고 미래가 있다.
565 no image |목회칼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선수들을 지지합니다_최광희 목사
편집부
3011 2016-09-0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선수들을 지지합니다 <최광희 목사, 행복한교회> “이해할 수 없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의 몽니는 지탄받아야” 2016년 리우 올림픽이 17일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많은 태극 전사들이 땀 흘리며 싸웠고 온 국민들은 밤을 새우며 응원했습니다. 전 종목 금메달을 석권한 종목도 있었고 아쉽게도 메달을 놓친 종목도 있지만 그 기간 동안에 우리 국민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히 꼭 이겼으면 하는 경기에서 월등하게 이겼을 때는 우리 모두 짜릿한 기쁨을 누렸고 아쉽게 패배했을 때는 다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단체가 있어서 우리의 기쁨이 반감되기도 했는데 바로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 이사장 박광서)이라는 단체입니다. 리우 올림픽 개막식에 앞서 열린 피지와의 축구 조별리그 1차전에서 석현준 선수가 기도 세레모니를 한 것에 대해 종자연은 올림픽은 개인의 종교를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며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종자연은 8월 8일 성명을 내고 “석현준 선수의 과도한 기도 세레모니는 옥의 티였다”며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중요한 순간을 동료 선수들과 함께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자신의 종교 행위를 위해 전 세계인의 시선을 잡아둬 기쁨이 반감됐다”는 것인데 그런 성명이 오히려 우리 모두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행위입니다. 종자연은 올림픽이 전 세계인이 함께 즐기며 소통하고 화합하는 지구촌 잔치임을 강조하며 “경기장에서의 종교 색 드러내기가 운동 종목을 가리지 않고 이어짐으로써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순간에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게 올리는 것에 대해 종자연 관계자 외에 우리 국민 중에 누가 안타까워하겠습니까? 유명 선수들이 자기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일은 우리나라 선수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번 리우 올림픽 개최국인 브라질 축구팀의 네이마르 선수를 들 수 있습니다. 온두라스와의 4강전 경기 때에는 시작과 동시에 14초 만에 골을 넣은 네이마르 선수는 결국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 네이마르 선수가 올림픽 시상식에서 흰 머리띠에 “100% JESUS”라는 글귀를 써서 매고 나왔습니다. 게다가 네이마르가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나는 행동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그는 우승을 할 때마다 100% JESUS 밴드를 하고 나와서 신앙을 표현했지만 브라질 국민을 포함한 전 세계 누구도 네이마르를 비난하거나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문제 삼는 단체는 오직 우리나라의 종자연 밖에 없습니다.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은 그 이름만 보면 중립적인 종교 연구기관 같지만 실상은 불교 단체에서 지원받고 있는 불교단체입니다. 단체의 명칭에는 ‘종교자유’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지만 실상은 타종교인의 신앙을 간섭하고 탄압하는 일에 열심인 것을 보면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체입니다. 중요한 우승의 순간에 믿음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선수는 우리나라나 외국 선수 중에서 얼마든지 있습니다. 브라질의 히카르두 카카(올랜도 시티) 선수는 유니폼 안에 입은 티셔츠에 “I belong to Jesus”라고 쓰고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것을 노출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콜롬비아의 라다멜 팔카오(맨유) 선수는 가슴에 “Believe and you’ll see the glory of God”이라는 글귀를 쓰고 다니며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권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나라 선수 중에서도 여러 명이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앞서 종자연이 논란을 제기했던 석현준 선수를 위시하여 양궁 2관왕 장혜진 선수와 유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정보경 선수도 기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특히 장혜진 선수는 인터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다 돌려 드린다는 아름다운 고백을 했습니다. 이어서 올림픽에 참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인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개인의 자유로운 신앙을 탄압하는 종자연의 이런 몽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도 대한축구협회에 축구대표팀 선수의 기도 세리머니를 자제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은 이에 대해 “국가대항전에 정치적 표현은 금지하지만 신앙의 표현은 따로 규제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종자연의 부끄러운 신앙 탄압이 이번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순간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선수들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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