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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 no image |목회칼럼|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고 계십니까?_안두익 목사
편집부
1742 2016-09-06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고 계십니까? <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 “오늘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채워가는 지혜자들 되기를”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이 말은 김 훈 씨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소설가 김 훈 씨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책을 보면 1636년 12월 14일 인조는 청나라의 침략을 피해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그곳에 머무는 47일은 가장 혹독하고, 치욕스러운 겨울이었습니다. 한 겨울이라 가진 것도, 먹을 것도 변변치 못합니다. 그렇다고 나가서 싸울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고립무원의 성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 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는 결단에 대한 고통이 깊어만 갑니다. 결국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맙니다. 저자는 인조 임금이 굴복한 역사적 현장을 기록하면서 이 치욕을 잃지 말자고 독자들에게 도전을 합니다. 이 <남한산성>을 읽고 나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이제 결실의 계절입니다. 잎이 무성했던 여름이 가고 낙엽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누구나 1년을 되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런 계절의 흐름 속에 우리 인생도 언젠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해보면 의미 있게 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에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힘주시고, 능력 주셨을 때에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영국 격언에 “해가 비추는 동안, 건초를 말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지금 해야 합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 할 날이 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는 자들이 되셔서 오늘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채워가는 지혜자들이 되어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씀하십니다. 곡식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씨앗이 먼저 썩어져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썩어지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온 몸을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그 죽음은 사탄의 저주와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모든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삼일 만에 무덤을 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어야 사는 것, 죽어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다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피어납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 하수구에서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 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한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모두가 조건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가 있습니다. 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합니다.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며, 추수를 생각하고 거두어드림을 생각하는 이 계절에 무엇을 결실할 수가 있을까요? 이 열매 맺는 가을의 계절에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지, 나의 상태, 현재 나의 삶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 앞에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 아직도 삶의 기회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라는 이 글귀가 나의 마음에 맴도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다시 한 번 나를 생각해 봅니다.
563 no image |김영규칼럼| 인공지능 개발과 신학적 과제
편집부
1878 2016-08-23
인공지능 개발과 신학적 과제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면역체계 인자 발견은 인공지능 수준에서 구현할 수 없는 상수의 개념” 건축에 있어서 그 건물의 튼튼함이나 완전성은 그 토대나 기초공사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건물의 완전성을 책임지는 토대나 기초 공사는 좀 더 거시적인 세계로 보면 지각의 변동이나 지구의 운동과 같은 거시적인 변화와 운동에 기초하고 있다. 거시적인 변화나 운동이란 예측할 수 없는 거대 정보들에 속한 것으로 긴 운동이나 변화가 축적이 되어 있어서 갑자기 나타나는 변화나 운동을 조그만 인간 세계의 계측수단에 의해서 쉽게 관찰이 되거나 인간에게 유익되게 그 변화나 운동이 통제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런 거대 거시 세계에 있어서 변화나 운동에 반복이 되는 질서나 규칙적인 변화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자연의 법칙이라고 과장하기도 한다. 지구의 일정한 두께를 지각 변동의 세계가 아닌 토양으로 이해하는 경우란, 인간세계에 가깝게 두고 이해하는 경우가 되어 거기에 좁고 짧은 정확한 질서가 있다고 해도 항구적인 자연의 법칙으로 과장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나 태양계 전체 질서가 어느 정도 태양이라는 별의 질서에 토대나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해도, 지구나 태양은 훨씬 빠른 질서들의 세계들인 원소들 사이의 그 작은 구성 입자들의 수나 구성 입자들의 질서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학적 지식들은 대부분 어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어떤 한계로 괄호 안에 넣고 그 안에서의 법칙이나 필연적 질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염색체나 DNA와 같은 인간 세계에 가까운 거대 질서들의 단위들은 유전 인자 혹은 유전 정보와 같은 훨씬 요긴한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탐구해야 할 그 범위를 좁게 하여 주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3년 James Watson과 Francis Crick이 Nature 잡지의 한 면의 구석에 DNA 구조를 발표함으로써 RNA 개념도 정립되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다양한 단백질들이 합성이 되는데 관여하는 효소들이나 인자들이 밝혀지면서 유전정보들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Nature 잡지에 의하면, 염색체로부터 한 개체 유전자를 분리시키는 작업의 성공이 1969년에 이루어졌다고 알려주고 있다(28 November 2002, 363 쪽). 2002년 12월 5일 쥐에 대한 유전정보 지도, 2004년 10월 21일 인간에 대한 유전정보 지도가 발표되었다. 거기에 가상적인 수많은 유전자 단위들이 이름을 얻었으나 DNA가 유전정보의 기원인지 RNA가 유전정보의 기원인지 아직도 애매하게 남아 있고 세포 내에 기능하는 단백질 형성이나 세포 내 DNA 정보들을 읽어 내고 정보 전달에 관여하는 인자들이 서로 사회적이고 동시에 어떤 인자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라지기도 하여서 유전 인자들의 체계적인 이해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면역체계와도 관련이 되어 있으면서 유전자 편집 효소들(CRISP- Cas9)에 관심이 뜨겁고 최근 발표된 뇌세포들의 연결고리와 사회적 행동을 관리하는 인터페론 감마라는 인자의 역할에 대한 발견(21 July 2016, Nature)의 경우, 그것들이 다같이 의식적 자아 영역 밖에 면역체계의 자아에 속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이 되고 있다. 그 면역체계 인자는 스트레스나 심리자극인자들에 관여하면서 집중적으로 사회적 행위들에 관계되되 쥐와 같은 생명체에게 없는 사회적 혹은 집단적 행동을 관리하는 인자에 대한 발견으로서 소위 인공지능 수준에서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상수의 개념일 수 있다. 즉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 기능들은 그 상위 원인들이 규명이 되는 영역에 대한 특정한 경계선을 그어서 그 경계선 안에 인자들에 대한 연구에 의해서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세 생명체들로부터 영향 인자들 혹은 이 세계에서 발생할 수 없는 분자들에 대한 발견으로 그 탐구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일정한 크기의 세계 안에 피코초 단위로 움직이는 분자 세계들 안에서 생명체의 문제들을 풀기에는 너무나 버겁다는 말이 된다. 그런 유전자에 대한 발견처럼 일반적인 큰 유기물들을 소단위의 유기물로 쪼개는 일이나 거꾸로 소단위의 유기물을 큰 단위의 유기물들로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 매달리고 있는 효소들에 대한 연구 역사와는 다르게, 오늘날 프로톤 이동들이나 전자들의 공급 조건에 의해서 분해나 합성이 가능한 기술들도 새로운 탐구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런 길은 지금까지 화학이론들에 대한 근원적 혁신이 필요로 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말도 된다. 미래에 언제나 회우하게 되는 이런 별안간의 변화는 이미 예측이 될 수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극 거시세계나 거시 세계들이란 모두 기본적으로 극 미시세계에 토대를 두고 기반을 가진 질서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지각들이나 뇌 활동들, 혹은 그 기능들이 생산하는 상상력도 자연의 근원적 질서들에 대해서 전혀 풀 수 있는 수단들이 아님을 지금까지 스스로 증명하고 있을 셈이다. 그렇다면, 엄밀한 학문들의 영역에서도 모두 서로 합의 하에 대충 거짓말하자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더 이미 이 칼럼의 글에서 반복하여 주장하듯이, 우리의 모든 지식에 있어서 거짓의 핵심은 물질세계의 넘어(beyond) 초월적인(transcendetal) 우주 밖의(extra-universe) 세계로서 너무 가깝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는 우리 지각 세계 자체의 디스플레이 세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미래 신학적 과제는 더 커질 것이고 성경에 계시된 극 거시세계와 극 미시세계의 모든 열쇠들을 쥐고 계신 창조자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의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잘 알고 계신 자가 이미 창조할 때부터 어떤 해답들을 제시하셨다고 전할 때, 처음부터 인간에게 같은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이 예측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 더 미래의 교회는 그 과정에서 증명이 되고 있는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추구에 대해서 충분히 수용하고 용납할 수 있는 배려의 마음과 열린 마음, 그리고 그들의 회의와 방황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미래의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짊어질 멍에는 이제 더 무거워져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562 no image |목회칼럼| 술이부작(述而不作)_이동만 목사
편집부
1836 2016-08-23
술이부작(述而不作) <이동만 목사, 대구 약수교회> “거짓 선지자들은 계시를 청중들의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선포해” 과거에 존재했던 위대한 유산을 기술(記述)할 뿐 새로 창작하지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은 논어 술이편 1장에 나온다. 술(述)은 옛 것을 풀이하다, 작(作)은 새로운 것을 지어 만들다의 뜻이다. 사상가요, 교육자로서의 공자는 많은 현명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는 했으나 독창적인 사상을, 독립된 저작으로 짓지는 않았는데 위의 말은 이를 토로한 것이다. 이 말을 보면서 설교하는 사람도 술이부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교자에게는 성경(위대한 유산)이 주어져 있으므로, 성경을 기술할 뿐(전달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설교자 자신의 말을 하지 않는다). 감히 설교자가 창작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성경을 만드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지만 성경을 풀이(해석)함에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이런 우를 범할 수 있다. 설교자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맥을 무시하면 한 구절의 성경 말씀으로 별 희한한 내용을 만들어 전할 수 있다. 김정운 박사는 <에디톨로지>라는 책에서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창조는 편집이다”라는 말을 했다. ‘에디톨로지’(Editology)라는 말은 영어 사전에도 없는 말인데 ‘편집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현대에는 많은 자료들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낸 책이름이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편집하면 창작은 될 수 있을지언정 바른 설교는 될 수 없다. 설교가 창작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어디까지나 성경의 본의(本義)를 잘 들어내기 위한 기술적인 면에서만 가능하다. 윌리엄 A. 반게메렌은 <예언서 연구>에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를 일곱 가지로 대조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선포하지만,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택적으로 선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위안을 주는 주제들만 선택하여 선포하고, 하나님의 경고와 위협들은 선포하지도 적용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참 설교자와 거짓 설교자의 차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명기 28장을 흔히 ‘축복의 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1-14절까지만 해당된다. 15절 이하는 ‘저주의 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 설교는 14절까지만 하는 것 같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 하는데 1-35절상까지는 믿음의 결과로 신나는 일이 일어났지만, 35절하부터는 결코 신날 수 없는 일들이 믿음의 결과로 일어난다. 앞부분까지만 설교하고 만다면 참 설교자라 할 수 없다. 참 설교자는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설교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성도의 무기력은 복과 고난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고난을 빼면 참 복음이 될 수 없다. 회중이 고난을 듣기 싫어한다고 설교에서 뺄 수 없다. 어느 설교의 성분을 분석해 보면- 자기 계발 51%, 만담 19%, 상담 15%, 심리 12%, 성경 3%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합신 교수들과 경북노회 목사들이 경주에서 모임을 갖고 보문단지 옆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보통 식당에 가면 ‘손님은 왕이다’라는 표어를 쓴 액자가 걸려 있는데 그 식당에는 ‘손님은 신(神)이다’라는 큰 액자가 붙어 있었다. 한 교수가 “당신에게 신이다”라고 한다고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다고 해서 주위를 웃게 만들었다.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회중을 왕으로 여겨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때로는 회중은 참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飢渴)이 들어 있는데 설교자만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회중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설교자로 부름 받은 자는 모름지기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성경을 우리의 선이해(先理解)를 가지고 해석할 때 곡해하기가 쉽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으로 바깥에 있는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있는 말과 성경에 있는 말의 다름과 같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복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그려 볼 때 떠오르는 것과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다르다면 회중이 오해할 수 있으므로 그 차이를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합신의 한 교수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될 때 기복적인 생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목회자는 성경 말씀을 잘 가르쳐서 참 믿음과 복을 깨닫게 주어야 한다. 그런데 목회자가 도리어 기복을 조장하거나 심화시키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사역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길 소원한다.
561 no image |목회칼럼|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단 경계_유영권 목사
편집부
2099 2016-08-23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단 경계 <유영권 목사, 빛과 소금의 교회, 총회이대위원장> “신학과 현장의 경험과 인격이 균형을 이룬 이단 전문가 양성해야” 필자는 이대위원이고, 이대위 위원장이다. 누구라도 이단에 대해 물으면 답할 자료들을 가지고 다니지만, 나를 만나는 사람들 중에 이단에 대해서 묻는 목회자 혹은 성도의 수가 많지 않다. 필자의 이단 지식에 대한 불신일까? 아니면 이단 자체에 대한 무관심일까? 아니면 스스로 이단으로부터 자신과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자신감일까? 이단에 대해 궁금한가? 이단에 대해 진지하게 문의한 적이 있는가? 시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눈물로 상담을 호소하는 교회, 가정, 성도들이 있다. 이미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경우이다. 피해를 입기 전의 무관심의 정도와 피해를 입은 후의 간절함이 극과 극을 달린다. 일반적인 이단에 대한 막연한 자세 통계청 자료를 보면 한국 기독교인의 수가 850만 명 정도이다. 그 중에는 이단의 수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단들이 말하는 수를 무시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소화시켜도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150만 명을 훨씬 넘는다. 아닐 것이라고 아무리 부정을 해도 사실이다. 심각한 것은 이단에 빠진 사람의 수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이단의 피해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관련자들을 만나 한국교회가 이단에 대해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대처하여야 한다고 알릴 때마다 들려오는 유사한 메아리는 미래를 더욱 두렵게 한다. 대부분 이단의 등장과 존재에 대해 어느 순간에 등장하였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리라 여기는 듯하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쇠퇴할 것을 쓸데없이 불집을 쑤실 필요가 있을까? 홍보만 해 줄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불 위 냄비 속에 개구리와 같은 한국교회 정통 기독교의 성도 수가 700만 명이라고 하고, 이단의 속한 사람의 수가 150만 명이라고 하자. 신앙을 통하여 추구하는 목표 성취를 빌미로 조건을 붙여 이끄는 이단의 특성상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이 윗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이단에 빠진 150만 명이 움직이는 것이다. 반면에 일반 교회는 어떠한가? 평균 20%가 열심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140만 명이다. 매년 끊임없이 이단 단체가 발표하는 전체 인원의 수가 늘어나는 이유이다. 기독교가 갖고 있는 부정적 요소들을 배제하더라도 이단과 관련한 계산만으로도 한국교회는 위기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단에 속한 사람의 수는 늘어나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위기의식을 갖지 않고 있다면, 한국교회는 불 위 냄비 속에 담긴 개구리와 다르지 않다. 냄비 속 개구리는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여유 있게 헤엄치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현대 이단들의 교묘한 전략과 결과 예상 이단의 관심은 돈이다. 돈 없는 이단을 보았나? 돈이 없는 교주를 보았나? 이단에 세뇌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 놓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가정을 뛰쳐나오고,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포기하든지 혹은 소홀하게 여기는 것을 보라! 이런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은 어렵지가 않다. 때문에 이단은 사람들의 동원능력이 뛰어나다. 많은 돈과 동원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는 이단들의 소식을 듣고 있지 않나? 벽에 그림을 그려주고, 김장과 연탄을 나눠 주고, 쪽방을 다니며 독거노인들을 돌보며 지역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동원하여 적극 참여하면서 봉사를 한다. 아름답게 포장하여 세계를 다니며 갖는 각종 행사와 이벤트에 각국의 수장들과 교주들이 함께 찍은 사진과 기사들을 보지 못하였는가? 간혹 이단 단체가 정치인들로부터, 기관으로부터 표창장을 받는 이유이다. 세상은 이단과 정통교회를 분리하여 판단하지 않는다. 세상이 이단과 정통을 구별할까? 세상은 교리와 신학에 관심이 없다. 다 똑같은 기독교로보고 교회로 본다. 그리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는 쪽에 손을 들어준다. 이런 세상을 향해 ‘양의 탈을 쓴 늑대와 순수한 양’을 분별도 못하냐고 비난을 퍼부을 것인가? 아니면 제발 분별을 하라고 고함을 질러야 할까? 그렇다고 세상이 반응이나 할까? 이것이 한국교회의 위기의 배경이다. 한국교회가, 우리 교단이, 우리 교회가 이단대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이단의 피해는 단순하지 않다.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케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트린다. 나는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다는 말을 쉼 없이 쏟아내고 있다. 무분별한 이단 해제 시도와 관련한 타 교단들의 혼탁한 모습에서 그 심각성을 본다. 결론 성도가, 교회가, 교단이, 한국교회가 이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까? 이단은 발생 발견 즉시 존재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단에 대한 자세는 냉정하고 냉철하여야 한다. 이단성과 관련하여 의심이 가면 관용이 아니라, 철저한 조사가 우선이다. 이단에 대한 냉정하고 냉철한 자세 역시 사랑을 배경으로 하여야 한다. 기관이든, 개인이든 이단에 대한 판단은 확인된 자료와 사실에 근거하여야 한다. 이단으로부터 이탈한 사람들에 대해선 철저한 교육과 함께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이단피해로부터의 최고 전략은 사전예방이다. 이단경계주일 등을 활용하여 이단을 알리는데 힘을 다하여야 한다. 일 년에 한 두 차례 세미나를 반드시 하여야 한다. 이단의 피해에 대한 해결은 교회, 지역연합, 기독교연합기관이 힘을 합하여 하여야 한다. 교회마다 전문이단상담자를 양성하여야 한다. 신학교와 교단에서 이단전문사역자, 신학과 현장의 경험과 인격이 균형을 이룬 이단 전문가를 양성하여야 한다. 이단 및 사이비대책위원회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와 지지가 있어야 한다. 이단 및 사이비대책위원회는 교단으로부터 인정과 존중을 받는 기관이 되도록, 내용에 있어서는 정확하고, 모양에 있어선 겸손하여야 한다. 우리교단이, 총회 이대위가 한국교회의 든든한 파수꾼이 되어주기를 소망해 본다.
560 no image |목회칼럼| 함께하는 교육_손종국 목사
편집부
1677 2016-08-23
함께하는 교육 < 손종국 목사, 청소년교육선교회 대표 > “관계 형성에 실패한 교사는 바람직한 제자의 삶 가르칠 수 없어” 오래 전에 총신 신대원에서 청소년교육 과목을 가르칠 때였다. 용인에 강의를 하러 간 어느 날 김의원 교수가 불러서 방에 갔더니 누가 선물했다며 꿀을 한 병 주셨다. 당신은 꿀을 싫어하니까 나보고 가져가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만날 수 있었던 예전의 두 분 스승이 계셨는데 김의환 총장님은 고등부 때 교회 담임목사님이셨고 그 다음 총장이셨던 김의원 교수님은 전도사님이셨다. 아마 고등부 수련회 동안 회심을 하고 진로를 수정하면서 신학을 선택한 것은 두 분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다음 해 고등부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이정석 교수는 대학시절을 함께한 좋은 선배이자 기도의 동지였고 멘토였다. 역시 개인성경공부 방법을 알게 해주시고 어린 학생에게 주석을 빌려주셨던 당시 강도사님, 성경암송과 전도의 열정을 함께 나누었던 유년부 전도사님(필리핀 선교사역을 마치고 풀러에서 부총장을 하신)도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모두 다 신앙과 삶을 함께 나누어 주신 분들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다양한 부류의 제자들이 있다. 전국 어디든지 교회에 강의를 하러 가면 대부분 꼭 아는 사람을 한 명 이상은 만나게 된다. 일회성 강의를 들었던 분, 내가 쓴 책을 읽었던 분, 일정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은 분, 신대원과 대학에서 1학기 강의를 들었던 분, 그리고 청소년교육선교회란 울타리 안에서 함께 간사나, 지회 간사, 동아리 멤버, 자원봉사자 등으로 만났던 분들이다. 지금도 ‘교수님’이란 호칭으로 불러 주는 제자들을 만나면 새삼스럽기도 하다. 어떤 제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목사님,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입니다.” 나는 다양한 환경에서 만나는 이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었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는 꼭 조를 짜서 학기 중에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사적인 나눔을 가졌었다. 물론 그 돈은 학교에서 받는 강사비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회교육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복음에 대한 감격과 사명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관계성이 희미해지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부산 서부교회를 탐방을 했었을 때 나이가 많으신 선생님이 조그만 전화번호 수첩을 보여주시며 150명까지 이름을 적을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 교회 교사들은 한번 적힌 제자들을 위해서 평생 기도한다고 하셨다. 한번 전도한 학생을 중학교 갈 때 까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8, 9년까지 매주 주일 이른 아침에 학생들 집을 찾아가서 다른 학생들과 무리지어 교회로 데려오는 광경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생님의 뒤를 따르는 아이들의 쾌활하고 활달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거기에서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따로 일주일에 한번씩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까지 있었으니 그 깊이는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안 믿는 부모들도 이런 선생님들을 신뢰한다고 자랑을 하였다. 설교와 공과를 포함하는 모든 성경공부는 골로새서 1장 9, 10절에서 그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처음에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시작하여(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더 나아가 그 지식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발전하여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그 모든 것을 실천하게 하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마지막에는 헌신으로 결실을 얻게 해야 한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이러한 모든 요소를 포함하지 않은 가르침은 불충분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P.E.T.(부모역할훈련)과 T.E.T(상담 이렇게 하라)를 쓴 토마스 고든은 성공하는 교사에게는 내용과 기술, 관계라는 3가지 요소가 순서적으로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교육현장에서 겪어보면 시간적으로는 관계형성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기술을 갖춰야 하며 마지막에 내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학생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교사야말로 관계형성에 성공한 것이고 이것이 내용을 잘 가르치는 중요한 준비인 것이다. 관계형성에 실패한 교사는 결코 학생에게 바람직한 제자의 삶을 가르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명령하신 말씀을 따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가르쳤고 그를 통하여 또 다른 충성된 사람을 가르치고 이어서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것을 바라보았다(딤후 2:1-2). 지금 우리 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새로운 학생을 전도하는 것보다 그나마 지금 교회 안에 있는 학생들을 무관심 내지 무감동으로 교회 밖으로 내몰지 않는 것이다. 또는 내몰지는 않아도 상급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세상풍조에 휘둘려 교회를 떠나는 학생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에게는 신앙과 삶을 함께 나누어 주는 교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함께하는 교육을 이루어야 한다.
559 no image |목회칼럼| 삼포신자들이여_이은상 목사
편집부
1652 2016-08-02
삼포신자들이여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지금 이 시대에 요청되는 것은 교회의 경건 회복이며 말씀 회복”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삼포세대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젊은이의 문화가 3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5포(3포+내집마련+인간관계), 7포(5포+꿈+희망), 그리고 더 나아가 특정 숫자가 정해지지 않고 여러 가지를 포기한다는 N포세대로 확장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시대는 성경의 약속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일까요? 요엘 선지자는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현실은 도무지 그와 같은 약속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아마 요엘 선지자가 이 세대를 본다면 “오호 통재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N포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먼저 외부적요인으로 경제불황과 청년실업, 그리고 전세값과 자녀양육비의 부담에 대한 대안이 없는, 그래서 청춘이 꿈을 꿀 수 없는 나라 탓(헬조선)이라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내면적 요인을 들추어보자면, 요즘 젊은이들의 꿈과 비전이 현실과 거리가 먼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신세대들의 연애와 결혼관을 보자면 좋은 아파트, 좋은 자동차, 시부모를 모시지 않는 좋은 조건 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실업의 경우도 전부는 아닐지라도 다수의 젊은이들이 3D업종의 기피는 물론 오직 공무원과 대기업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N포현상의 원인 중 하나인 영적요인을 간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영적요인이라 함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인데요. 말인즉 ‘포기’라는 말이 ‘욕심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데로 욕심을 돌렸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7:2을 보면 음행의 연고로 남자든 여자든 결혼하라는 권면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자든 여자든 결혼하지 않으면 음행에 빠질 수 있는 성적욕망의 위험을 가지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 욕망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신성한 제도를 인류에게 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은 그 많은 젊은이들이 불같이 타는 정욕을(고전7:9) 어떻게 해결하며 지내고 있을까요? 그냥 포기하고 사는 것일까요? 문제는 부부라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음행과 동성애와 혹은 가상현실 성적체험(VR. virtual reality) 같은 비정상 혹은 기형적 방법으로 욕망을 해결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음행과 동성애가 늘어나는 것이 독신과 만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결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성적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그 편한 방법을 선호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정이라는 굴레에 묶이지 않고 오직 남녀 한 부부라는 거룩한 제도에 매이지 않는 자유와 방종을 추구하는 욕망의 덫이 바로 N포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N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잠언 30:7-9에 기록된 아굴의 기도는 빈과 부의 중간쯤이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배고파도 죄를 지을 수 있고 배불러도 욕망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자임을 깨달으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곧 인간은 환경탓에 원인을 돌리기 전에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아래 두고 살라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 시대적 상황과 풍조들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경건의 타락과 시대적 타락이 맞물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요청되는 것은 교회의 경건 회복이며 말씀 회복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히 지키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와 편안이 곧 행복이다’라는 말이 현시대의 풍조인 듯합니다. 젊은이들의 3포로 인하여 저출산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와 낙태만 포기해도 어느 정도 저출산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교인감소로 인한 교회쇠퇴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삼포(십일조포기, 새벽기도포기, 주일성수포기)가 이런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요? 삼포신자들이여 요즘 유행어를 깊이 생각해봅시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니라(딤전4:5)가 그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요엘 선지자의 약속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욜 2:28).
558 no image |목회칼럼| "큰 교회? 작은 교회?"_임용민 목사
편집부
1730 2016-08-02
“큰 교회? 작은 교회?”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교회에 회중의 숫자가 많고, 돈이 많아도 참된 신앙고백과 교회 정치와 예배 모범을 따라 성도들이 목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오히려 위험한 상태일 뿐” 교회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눠진다. 장소적으로는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로 구별된다. 특별히 지상에 속한 보이는 교회는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로 구별된다. 이 때 형식적으로 교회의 표지인 성례와 말씀과 기도와 권징을 합법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면 최소한 가시적으로 참된 교회라고 인정한다. 우리 헌법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한다. “교회는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높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세우신 신령한 나라요, 은혜와 진리를 영원히 나타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인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성도들로 구성된 거룩한 단체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분리됨이 없는 은혜로 세워진다는 사실이다. 둘째, 교회는 현재적 개념에 묶여 있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한 거룩한 모임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내용은 교회를 대할 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정해준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지배할 수 없고,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이 다스리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를 세우신 자가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그의 명령과 방식에 순종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인간의 경영학적 방법이나 처세술이 자리해서는 안 된다. 세우신 자의 뜻에 합당하길 애써야 할 뿐이다. 또 교회는 예정론적 개념이 지배하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교회를 구성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정론적 질서를 따라 이전에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신앙과 동일한 신앙을 주께 받은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이후에 나타날 택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주님께서 동일하게 베푸실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헌법은 이런 의미에서 보이지 않은 교회를 설명할 때 “하나님만 아시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선민 전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그 유지(維持) 뿐만 아니라, 그 구성원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기초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것은 교회가 철저하게 예정론의 실천적 의미가 구현되는 곳임을 가르쳐 준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에 대해 사용되는 구별들은 매우 위험한 것들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작은 교회, 큰 교회의 구별이다. 최근에 물질주의적 교회관이 팽배해지면서 교회를 크고 작음으로 구별하는 일이 많다. 이런 구별이 발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직 회집하는 성도의 숫자와 그에 따른 교회의 재정 규모를 기준으로 단순하게 판단하고 구별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세우신 자로 계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영원하신 뜻을 모조리 삭제하고 우리의 물질적 기준으로 교회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기본적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엡 1:23)이라는 실질적 은총 아래 놓여 있다. 이것은 교회가 질량적으로 판단 받거나 다뤄질 수 없는 중요한 기초이다. 실제로 이것은 성경의 수많은 서신에서 교회를 언급할 때 모두 주님의 것으로 증거할 뿐 질량적 판단으로 작은 교회, 큰 교회의 구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의 구분이 아닌 어떤 다른 구분이 가능할까? 장로교 정치원리를 따라 조직 교회와 미조직 교회로 구별이 가능하다. 이것은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라는 항존직을 수행할 직원이 교회에 있는지 유무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교회에 모두 있으면 조직 교회이고, 그렇지 않으면 미조직 교회인 것이다. 사실 주님의 참된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의 참된 치리를 온전히 받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최소한 합법적으로 세워진 목사에 의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면 모든 말씀의 왕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치리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형적인 조직 면에서 볼 때, 미조직 상태인 것이다. 그 외형적 표식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주님의 말씀과 그에 준거한 참된 신앙고백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그리고 교회정치와 예배 모범에 따라 합당하게 주님의 성도들을 섬기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미조직 교회인 것일 뿐이다. 반대로 성도가 많고, 돈이 많아도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없고, 목사가 홀로 교회를 치리하는 임시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 자체가 미조직 상태인 것이다. 미조직이라는 것도 어떤 교회가 외형적 부실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주님께서 교회에 합당한 사역자를 주시지 않은 것으로 아직 진리에 합당한 체계와 질서를 갖지 못한 것을 말한다. 합당한 사역자가 없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진리의 모범을 따라 앞선 자를 주님께 선물로 받지 못한 것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사역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과 교회 정치 및 예배 모범”따라 교회를 잘 치리하는 것을 전재한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있어도 이들이 자신들이 선서한 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과 교회 정치 및 예배 모범”을 성경에 총괄한 교훈으로 알고 신종하겠다고 한 것을 어긴다면, 이 자체가 주님께서 세우신 직분과 주님께서 명하신 직무가 분리된 이격현상이 교회 안에 발생한 것일 뿐이다. 직분은 가졌으나, 그 직무를 수행할 내용이 없고, 그 내용과 상관없이 일하고 있다면 조직 교회 역시 외형적 형식만 갖춘 것일 뿐 복음 진리와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조직과 미조직의 구별도 그 외형적 형태의 기초를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분리됨이 없는 복음 진리로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구별하여 말할 때 외형적으로 크냐, 작냐를 기준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성도의 수가 적고, 재정이 열악해도 참된 신앙고백에 기초해서 주님의 치리가 합당하게 행사되고 있다면 참된 교회로서 그 자체가 복된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교회에 회중의 숫자가 많고, 돈이 많아도 참된 신앙고백과 교회 정치와 예배 모범을 따라 성도들이 목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오히려 위험한 상태로 봐야 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작은 교회와 큰 교회를 구별하는 언어 방식도 지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언어 방식은 교회를 물량적으로만 자라게 만들어가려는 의도가 본의 아니게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사용되는 현대의 언어의 특징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교회의 품위와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될 뿐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증거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는 어떤 교회가 성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과 분리됨이 없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다면 이미 우주적 성격을 가졌음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이런 역사를 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고후 13:8)이라고 가르치신 내용을 따라 모든 교회로 하여금 진리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다.
557 no image |목회칼럼| 교회는 정직자들의 모임_이은국 목사
편집부
1765 2016-07-05
교회는 정직자들의 모임 < 이은국 목사, 용연교회 >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 들으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교회도 알고 보니 장삿속이라는 가혹한 말을 건네 왔다.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와 다르다는 식의 대꾸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아주 대못을 박았다. 최근의 일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문이 아니라 가까이서 허물없이 지내는 불신 친구가 느닷없이 뱉은 말에 일격을 당한 나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구나 하며 흘려버릴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정도가 ‘심각하구나, 어찌할꼬’ 하며 잠시 목회자로서의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멈출 줄 모르고 연일 추락하는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신뢰도를 과연 회복할 수 있을까. 산에서 직접 땔감을 구해야 했던 옛 시절 귀한 땔나무를 구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때는 청솔가지 하나라도 꺾어서는 안될 만큼 엄격하게 산림자원을 보호하던 터라 쉽게 땔감을 구할 수 없었다. 주로 갈비(말라서 땅에 떨어져 쌓인 솔잎) 아니면 가느다란 마른가지 몇 개나 어린 잡목 따위가 전부였다. 어쩌다 썩은 나무 한 그루라도 만나는 날이면 거의 횡재라고 여길 정도였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마을 사람들은 그 능력자에게로 시선이 모아졌고 요즘말로 노하우를 공유하고자 매달리기라도 할 때면 그는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크게 헛웃음만 하며 결코 비법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감추어진 모든 것이 드러나는 법,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나무꾼이 한 짓은 반칙과 거짓을 일삼은 것이다. 자신만 아는 곳에다 일찌감치 생나무를 베어 놓았다가 몇 년 후에 그 곳으로 찾아 가 죽은 나무를 가져오는 잘못된 수법인 것으로 드러났다. 양심 바르지 못한 불량적 행위이자 우연을 가장하여 이익을 앞세운 몹쓸 비법이었던 것이다. 정직이라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려는 자신과의 싸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정직한 사람이 쉽게 매도되고, 오히려 유연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 공동체의 걸림돌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도덕한 자가 큰소리치고 앞장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나 가질 법한 것이 정직하면 손해라는 인식이 깊숙이 파고드는 세속화가 교회를 넘나든지 오래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이 혹세무민 거짓을 일삼는 수법을 앞세워 신실한 성도들을 도둑질하는 것을 목표하는 이단에 빠진 사람들까지도 교회를 그 활동무대로 삼아 둥지를 틀 정도가 되었으니, 교회 안에 뿌리 내린 삼허(허수, 허세, 허상)와 같은 온갖 반칙과 거짓을 몰아내고, 지금부터라도 크게 각성하고 일깨워야 할 것이 교회를 정직한 자들의 모임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오래전 개인 사업을 하는 한 분이 예배당을 쉽게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 적이 있는데 그 쉬운 방법이란 종교와 단체라는 이름을 앞세워 온갖 편법을 동원하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힘주어 한 그분의 말이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다. 그런데 “목사님,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불신자가 알고 있는 교회의 성역(聖域)이자 교회만큼은 뭔가 달라야 합니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평생 정직하게 행하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헷 사람 우리아의 일로 인하여 한 가지 과오를 피할 수 없었다. 그 때 크게 실추된 그는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며 정직한 영을 통한 회복을 갈망했다. 지금 나는 무너져 가는 교회의 신뢰성을 세우고 하루가 멀다하며 추락하는 목회자의 신용을 회복하는 마스터키로써의 정직을 강력히 추천한다. 정직한 말씀에 근거하여 정직한 자의 집은 흥할 것이며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교회는 정직한 자들의 모임으로 유지되어야 하겠고,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세상이 우리를 보며 예수 믿기 이전에 양심부터 바로 하라는 말이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도록 정직을 방패로 삼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사람으로서 마땅히 말만 잘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우선 정직한 저울추와 공평한 됫박을 갖도록 힘써야 하겠다. 정직을 기초로 삼는 일이야말로 어떤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보다도 효과적이며 어떤 훌륭한 설교보다도, 어떤 핵심적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도 큰 능력이 된다. 정직성의 회복은 말에 그치지 않는다. 오래 기록돼 남아있을 회의록을 작성할 때는 아주 쪼금이라도 자신한테 유리한 쪽으로 치우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함과 평소 주어진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것 또한 정직의 실천이다. 교회를 정직자들의 모임으로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으로부터 날아드는 숱한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요새를 이루며,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건실하게 하는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다.
556 no image |김영규칼럼| 창조 질서와 자연이 주는 복
편집부
1917 2016-07-05
창조 질서와 자연이 주는 복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자연을 통해 창조자 하나님의 품성들을 더 잘 이해하고 감사해야” 성경에 따르면, 사람을 창조하신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아래 우리로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역시 같은 단수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아래 성부, 성자, 성령이 인간들 사이에 언어들의 배경이 되는 구음의 통일성을 깨셨다는 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인간들 사이에 소통이 되려면, 서로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의지의 뜻을 전달하는 내적인 소리들이 먼저 있고 인간의 구강 구조가 갖는 특별한 소리 표현의 방식들과 그 능력에 따라서 구음들이 발생하는데, 그 구음들에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 어떤 통일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인간 언어의 현상들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무엇을 표현해 내는데 있어서 구음들의 분할 현상, 즉 문법화 현상이다. 다른 동물들이 인간의 구강과 다른 기관들을 통해서 인간 구음들과 같은 소리를 내고 혹은 인간의 분할된 구음들의 차이를 듣고 그 뜻을 읽어내는 일들을 직관적으로 따라서 행하는 일이 가능하더라도, 문법적으로 분할하여 구음들의 일치를 흉내 내는 일은 일부 새들에게만 제한이 되어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Science, 14 August 2015, 688-689). 그런 구음능력이나 언어 능력은 처음부터 침팬지를 포함한 원숭이들에게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인간들의 경우, 구강의 움직임에 의해서 구음으로 소리를 내기 전에 입가에 암묵적으로 같은 소리들을 내고자 하는 준비 혹은 암묵적으로 속에서 소리를 내어보는 것과 같은 내적 구음으로 거리를 갖는 행위들이 길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의 경우에도 행동으로 표현하기 전에 거리를 갖는 내적인 다양한 과정과 행위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밖으로 반응이 나타나기 전에 내적으로 소리의 문법화 현상들에 의해서 거리를 갖는 행위들이 있다는 것이 독특하다는 것이다. 아마 성경의 그런 구음과 언어의 일치성은 속으로 소리하는 독특한 행위들을 포함하여 실제적으로 밖으로 구음을 내는 방식들에 있어서 분할된 개념들에 있어서나 어떤 질서로서 문법화를 이루어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통일성이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시점을 계기로 해서 인간들 사이에 구음들의 차이로 인하여 서로간의 각 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이 생겼다는 것은 인간에게 내린 하나님의 외형적 형벌로써 전 인류가 깊게 성찰하여 극복해야 할 큰 과제로 있다는 말이 된다. 성경에 따르면, 그런 피할 수 없는 형벌로 인한 큰 과제를 극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깊게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근본과 우리 세계 밖에 다른 세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인간 안에 영혼과 육체의 분리 이전에 인간 안에 들어온 더 큰 고통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연 현상과 분리될 수 없는 노동에 대한 문제들은 깊게 성찰하여 극복해야 할 인간세계의 근본적인 과제들로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 간에 혹은 집단들 사이에 소외되고 피해를 입은 자들의 소리나 그 뿌리 그리고 저 성장의 시대를 알리는 지표들에 대한 성찰에 앞서, 더 깊게 근원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열과 고통 및 죽음의 원인들에 대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신앙과 삶의 규범이 되기 이전에 이미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그 제목 자체로부터 하나님의 말씀들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과 함께 하나님께 돌아오고 자연이 주는 복을 누리되, 인간 소외의 피할 수 없는 그 원인과 근본을 이해하고 다른 세계들과 함께 푸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로 인간 안에 원치 않게 들어온 고통과 고뇌, 노동과 죽음의 슬픔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 중심에 있다. 이미 온 세계에 대한 복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데에 있다면, 인간들에게 근원적으로 울 필요가 없고 슬퍼할 이유가 없다. 자연 안에 꽃과 열매를 보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웃음소리 자체나 그 기원과 근원에 대해서 깊게 관찰하지 않고 인간들이 이룬 성취들만을 보며 자연 질서의 근원 속에 근원적 입자 세계의 뒤얽힘(Entanglement)만을 본다면, 거기에 여전히 진정한 소외와 고통 그리고 슬픔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 세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 세계의 모든 종들을 보존하고 처음 있는 대로 잘 가꾸며 우주를 탐험하되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를 찾아보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우리 주변의 빈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안에 산소가 어떻게 생명들의 에너지원이 되며 빛은 세계 안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깊게 깨달아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이용하거나 혹은 미래 개인용 드론 자동차를 타고 이곳 저곳을 이동하기 전에, 먼저 동물들이 어떻게 초원에서 달리고 어떻게 공중의 새들이 창공을 날 수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더 잘 이해함으로써 창조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그 주신 자와 그 품성들을 더 잘 이해하며 그에게만 감사해야 내용들을 찾아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있는 행복은 어느 때보다 더 빠르고 혹은 그 반대로 더 느리게 살면서 더 좋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 서로를 기쁘게 하는데 있는 것보다 자연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 하나님께 돌려야 할 무엇을 얼마나 깊게 상상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쉽게 빠지고 즐기는 색들이나 소리들에 대해서 그 관계를 차디찬 파장과 같은 운동으로 상상해 본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눈과 귀가 다르듯이 그런 상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수많은 성질들(qualities)과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 바로 직관하여도 거의 대부분 우리의 상상력으로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력, 전기력 혹은 광자들의 운동들과 그런 것들의 상호 관계를 차원이 다른 관계로 잘 이해하는 것 같지만, 아직도 검증해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다. 자연의 어떤 세계도 우리의 상상의 대상들이 될 수 없는 그런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는 아마 기술로 재현해 보는 것에 의해서도 아닌, 자연 자체 안에 그렇게 나타남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세계는 하나님이 처음 만드시고 자라게 하시며 간섭하시고 그가 친히 일하시는 일터로서 그리고 지금도 지어져 가는 건물로서 하나님 겉에 있는 세계라고 해야 될 것이다. 아마 그런 마지막 이해 속에 세계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이 있다고 본다면, 인간은 이미 누구나 행복한 것이다.
555 no image |목회칼럼| 점검하며 삽시다_안두익 목사
편집부
1571 2016-06-21
점검하며 삽시다 <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 “나를 더 풍성하게 하실 주님 앞에서 충전해야 할 시간 가지길” 며칠 전에 2년을 사용하던 핸드폰을 교체하기 위해 우리 부부가 멀쩡한 핸드폰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즘 20-30여년 전만해도 상상도 못한 것들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핸드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도 없이 어디서나 통화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탄성을 자아낼 만큼 대단한 발명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능 좋은 휴대폰을 가지고 있어도 방전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들고 다니다 보면 방전은 불가피합니다. 먼 길을 갈 때는 예비 충전기를 가지고 가거나 충전할 곳을 찾아야 합니다. 가끔 충전 상태를 점검하지 않고 사용하다가 갑자기 휴대폰이 꺼져 버린다면 여간 낭패가 아닙니다. 시간만 나면 플러그 인 해 두어야 합니다. 곧 꺼질 듯한 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생도 그와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일종의 방전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사람들 대부분은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크고 오버로딩(Overloading)으로 탈진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삶이 까다롭고 힘들어져 가고 있다는 증상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정신적, 육체적 노동에 시달려 살아야 하고 불가피하게 경쟁에 내몰리기도 합니다. 남들이 뛰니 혼자서 고고한 학(鶴)인 척 하며 걸을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혼자 도망을 치듯 살아갑니다. 누군가 지금 피곤하고 지쳐 있다면 이미 많이 방전 된 상태입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곤하다면 곧 멈출지 모른다는 경고 사인(sign)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충전의 시간을 가질 틈도 없이 너무 바빠 잔여 에너지를 점검하는 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이미 밑바닥을 치며 경고음이 울려도 신호를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춰 서 버리는 일들이 잦습니다. 방전이 되고도 무리하게 밀고 나가다가 자칫 엄청난 아픔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가 이미 고갈되어 있는 것을 알고도 멈추지 못하고 뛴다면 그것처럼 무모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갈 된 것을 어떻게 채우며 다시 윤기 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애가 3장 28절에 보면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새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참 좋은 번역입니다.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는 잠자코 있으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일하면 힘들다는 것입니다. 방전의 속도가 빠르게 되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자코 있는 것입니다. 이 점검이 필요합니다. 피곤한 영혼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며 살다가 어느 곳에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하지만 쉴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다 방전이 되어 낭패를 봅니다. 누구에게나 짐이 있습니다. 그 짐 가운데 중독은 우리가 짊어진 가장 큰 짐입니다. 웹스터 사전은 중독을 “어떤 일에 습관적으로 몰두하여 자신을 그 일에 항복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중독이 있습니다만, 그 중독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일중독입니다. 일 중독자는 일을 열심히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 일에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일 중독자는 잠시도 놀지 못합니다. 조금만 빈둥거려도 죄책감이 생깁니다. 일 중독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일을 잘해서 성공하는 것이기에 오락도 취미도, 봉사도 없습니다. 자기 일에 관한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기다릴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연약한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원문에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능동적인 고생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무거운 짐'은 원문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피동적인 고생입니다. 원치 않는 환경 속에서 수난을 겪는 그런 고생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취하든지, 원치 않는 고난을 받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이런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은 위대한 초대를 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초청과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초청이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높이 나는 새일수록 오래 웅크리고 있을 줄 압니다. 이제 2016년도 꼭 절반을 달려 온 셈입니다. 정말 내 삶이 방전이 된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달려 왔습니다. 힘들고 지쳐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널 부러진 채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가 생각이 납니다. 이 남은 시간들, 그냥 체념하며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계속 쓰임받고 싶습니다. 절박한 마음이 생깁니다. 남은 후반을 달려가려고 하면 가능한 충분한 충전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충전기에서 깜빡 거리며 경고음이 울리는지 점검해야 할 시간입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무조건 달리기만 한다고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도와 방향을 조절해야 합니다. 힘을 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완급 조절의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방출되는 만큼 충전은 필수입니다. 나의 삶에 한복판에 오셔서 이제 나를 더 풍성하게 하실 주님 앞에 충전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 동역자 모두 혹시 충전기의 눈금이 밑바닥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점검하고 둘러보아야 합니다.
554 no image |목회칼럼| 동성애는 결코 성적 취향이 아니다_가정호 목사
편집부
1725 2016-06-21
동성애는 결코 성적 취향이 아니다 < 가정호 목사, 부산 세대로교회 > “죄악은 처음부터 완전한 죄악의 형태를 가질 뿐 더 자라지 않아” 동성애는 동성 간의 우정이 아니다. 동성 간의 친밀감을 나누는 어떤 따뜻한 사랑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다. 동성애는 동성 간 섹스를 하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누군가 동성애를 정의하기를 "동성 간에 나누는 친밀감"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란 이런 친밀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아닌 남남, 여여간의 섹스를 나누는 것을 정상으로 생각하거나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동성애를 가리켜 문제없다고 생각한다면 일단 정상적인 사고 체계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고 수 만 마디 말이나 글로 변호해도 그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 사실 동성 섹스를 하는 동성애자가 되는 이유와 과정도 알고 보면 결코 그렇게 엄청난 사건들로 인해 그렇게 된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불알친구들이 서로의 불알을 만지며 크기를 자랑하거나 시시덕거리다가 그만 이상한 덧에 걸려든 아이들로부터 시작해 다양한 형태의 증언들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대부분 성인으로 자라면서, 조금씩 성에 대해 바로 알고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그와 같은 호기심은 대체로 그림자 사라지듯 흐려지기 마련이다. 자연적인 성장 과정에서 호기심이 아닌 정상적인 성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결국 동성애자가 되기도 한다. 에드워드 웰취나 폴 스미스 같은 상담가들도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동성 섹스를 하면서 지내는 서구의 동성애자들도 자신들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눈치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이미 몸에 밴 중독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중독들도 대개가 그렇지만 다양한 죄들은 죽음에 이르는 싸인이나 혹은 죽게 될 것이라는 선고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어떻게 해 보려고 한다. 대개 동성애자들은 에이즈와 같은 질병으로 죽어가면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무튼 동성애가 죄이든 질병이든 그것을 정상이라고 자랑하고 홍보하고 축제하는 것을 옹호한다는 것은 성경의 어떠함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하더라고 결코 동의할 수는 없다. 얼마 전 설교에서 이 내용을 아주 원색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보수신학을 한 목사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왜 남자끼리 항문에다 섹스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행위가 아주 오래전부터 해온 성교의 한 흐름이기 때문에 그것도 역사성이 있고 전통이 있으니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동성애가 뭔지는 알고 좋아하고, 옹호하고 그러는지 궁금해서이다. 그냥 막연하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단 말인가 하며 넘길 일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것처럼 느낌이 좋으면 그것이 진리라고 확신할 뿐 아니라, 그룹을 만들어 홍보하고 동아리를 만들어 확장해 대는 세상에서 그것은 진리의 자식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언제나 외롭게 자문해야 할 이유일 뿐이다. 굳이 진리를 변증하고 옹호하려고 하지 않아도 참 진리는 스스로 죄를 공격하는 무서움을 가지고 있으니 그게 두려울 뿐이다. 혹여 동성애를 벗어나고자 그 고통을 나누고 기도를 함께 하기 원한다면야 뭘 아끼겠는가? 반면에 그것이 옳다고 고집하고 홍보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침묵 이외에 무엇을 하겠는가? 사실 우리 역시 다른 종류의 죄들로 인하여 시달리고 점철된 악한 인간들인지라 자신에 대한 걱정, 자식들에 대한 걱정, 자신이 속한 공동체 걱정하기에도 역부족인 세상에서 이렇게 생뚱맞은 문제로 고민하는 사치스러움에 젖어들기에는 우리 스스로가 무능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고, 내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인생이라면 그런 수많은 것들을 다 해보는 모험도 꽤 재미있겠다 싶다. 그것을 누가 말릴 것인가? 그게 신자가 기도 안하고 전도 안하고 올바른 진리를 외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도 묻고 싶다. 그럼 그대의 말대로 진리가 올바르게 외쳐졌던 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었던가? 또 없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금 동성애자들이 축제를 벌이고 동성애를 홍보하는 일들은 분명히 인류 사회에 대한 도전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을 가리켜 개개인의 인권에 관한 일이라고 넘긴다는 것은 이 사회가 그만큼 죄에 대해 무감각해졌음을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죄와 죄의 역사는 창세 이후의 역사와 그 길이가 같다. 언제나 미숙한 죄가 장성하게 자라온 것이 아니다. 죄는 그냥 처음부터 완전한 죄였다. 그 죄가 관영한 역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동일했다.
553 no image |김영규칼럼| 성자 그리스도와 인간 존재 이해
편집부
1758 2016-06-07
성자 그리스도와 인간 존재 이해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지탱해 나가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을 그릇들로 창조되었다. 피조세계 안에 깊게 있는 임의성이나 자유성은 그 그릇의 신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은 구별이 되어야 한다. 곧 사람이 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은혜로운 행위들을 나타낸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그런 속성이란 하나님의 실체와 함께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자 하나님이 택자들을 위한 직분으로서 그리스도라는 직책을 얻어 시간상에 인간이 되었을 때조차도 하나님으로서 동시에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실체적인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나타내신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실체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인하여 계시되는 경우에서나 그런 거하심에 의해서도 그 실체적 속성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신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나 보이는 세계 및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것으로서 기능들이 나타나고 서로 간에 지각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가감을 일으킬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들 사이는 분명히 구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창조된 세계란 하나님의 선물들에 불과하되,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담을 수 있는 그릇들도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깨달음도 생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곳에 그런 실체적 한 속성이 다른 모든 실체적 속성들과 분리되거나 나누어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선물로서 피조물 안에 그런 실체적 속성들이 축약이 되어 충분히 나타날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말로 표현하실 때,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성경에 자주 표현하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완전한 자의 이상이 표현되었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실체적 속성들도 가감이 없이 표현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닮아 가는 역사들이 세계 안에 계속 진행이 된다고 해도, 그런 역사들이 하나님의 명령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마치 없는 것으로부터 창조되는 그런 방식에서 이루어진 역사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극대화된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동일하게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들은 분명히 구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완전한 인간이 되시기를 포기하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되신 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적어도 주후 2세기 이후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독생자(unigenitus)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된 자(primogenitus)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히 구별해 왔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총화나 교회의 충만으로서 그리스도의 충만이 이루어지는 역사 없이도 독생자로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들을 영원히 발휘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셨고 계신다는 점에 그 구별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실제적으로 이런 구별점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체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자들이 되는 일이 역사로서 성취되는 일이라면, 독생자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의 모든 실체적 속성들을 발휘하시는 먼저 된 자로 계신다는 것 자체와 별개로 하나님의 선물 혹은 하나님의 은택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속성들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들은 그것과 구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다르게 신자들은 긍휼의 그릇들,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들을 맺는 자들,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옷을 입은 자들 등으로 구별되어 소개되고 있다. 지금 세계 안에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런 자들이 계속 등장하였고 등장할 여지가 남아 있는 세계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같은 선물로서 자연 속에 꽃이 있고 열매가 있으며 거기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면, 또 다른 선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속성들을 발휘하여 열매들을 맺어 그 향기들을 나타내는 인간들의 삶에 대한 아름다움이 그 비유의 실체로서 있다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렇게 높은 이상이 있는 세계를 그 이상대로 아름답게 꾸미거나 가꾸지 못한 것에서 사회나 세계의 불행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상을 향해서 세계는 분명히 아름다워야 한다. 역으로 그런 이상적 아름다움이 구현이 되지 못한 곳이나 사회에는 문화와 예술이 있어도 실제적으로 그것들이 지향하는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이 거기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구석에서라도 그런 아름다움을 구현하면서 살아가야 할 주체로서 세계를 지탱해 가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552 no image |목회칼럼| 성경 계시의 주인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_임용민 목사
편집부
1802 2016-06-07
성경 계시의 주인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신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열어 보여주시는 계시이다. 이 말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심, 무한하심, 불변하심에 가장 합당하고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피조된 인간이 철저하게 하나님이 만드시는 눈과 입과 귀와 피부와 감정을 가졌을 뿐, 창조자가 아니기에 하나님을 우리의 실력으로 스스로 열어서 알 수 없다. 성경 전체가, 그리고 각 부분들이 여러 모양으로 이것을 밝히 드러낸다. 성경 시대 전체가 여러 모양과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성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에 대해 분리됨이 없이, 오해됨이 없이 증거했다. 때문에 사도 시대를 마치면서 교회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 실체적 속성의 통일성과 실체적 속성의 교류성, 그에 따른 위격의 구별성을 오해됨이 없이 가르쳤다. 왜냐하면 완성된 계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과 분리됨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약의 교회는 사도 시대를 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매우 크게 받는다. 교회는 충분하고 명백한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성경 계시로 받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초대교회가 무엇을 배웠을까 많이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해 충분한 답을 줄 수 있는 초대교회의 흔적은 설교와 성례이다. 이 두 가지 내용은 각각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으로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이 때 설교와 성례는 모두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통성을 갖는다. 성경 계시가 완전히 완성된 이후에는 교회의 모든 것은 사실상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것만 드러냈던 것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자신의 죽음의 때에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노래했던 것은 이상하거나 신기한 일이 아니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그에게 경배하는 것에 오해나 부족함이 없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극치로서 완성된 계시인 성경이 지향하는 것을 정확하게 고백한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은 성경 계시의 주인이 되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앙고백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이것은 매우 소중한 특징으로,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모든 교회는 항상 인정하는 진리이다. 그래서 이것은 국가가 주도하는 종교 회의가 됐든, 부패한 로마 교회가 됐든, 종교개혁 시기의 민주적 종교 회의가 됐든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진리로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경우 다음과 같이 명백한 참된 신앙고백의 선(線)을 제시한다. “구원받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들에 앞서 보편 신앙(catholicam fidem)을 붙드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그 보편 신앙을 전적으로 순전하게 보존하지 못한다면, 의심할 필요 없이 영원히 멸망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편 신앙이다. 우리는 삼위(성) 안에서의 한 하나님(ut unum Deum in Trinitate)과 일체(성) 안에서의 삼위(성)(Trinitatem in unitate)을 경배한다.” 이와 같이 참된 교회의 신앙고백의 선은 매우 명확하다. 우리의 구원을 걸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참되게 고백하는 선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는 성경을 통해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배우지 않는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고, 우리의 이익과 현실이 더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시대는 성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에 대한 참된 표준을 성경을 통해, 교회에서 배우는 것을 불편해한다. 조금 양보해서 배우고 있다 해도, 그 배우는 양에 있어서도 매우 지엽적이며 파편적인 것만 다룰 뿐이다. 그런데도 현대교회는 힘들다 어렵다 하길 중지하지 않고 실용성에 근거해서 이러한 참된 신앙의 길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불평한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교회는 성경을 통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에 따른 신구약성경의 실체의 통일성 그 자체에서 멀어져도 안타깝지 않은 것이다. 급기야 성경은 조각나고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그 자리에 인간의 욕망을 위한 성경 해석이 자리한다. 인간의 문학과 문화와 문법과 언어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하고 불변하신 속성들 위에 눌러 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마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불렀을 때, 모세와 같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계시를 주신 성삼위일체 하나님, 계시의 주인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언어와 지식이 더 탁월하다고 말하는 모양이 된 것이다. 결국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의 통일성에 기초한 모든 진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소위 사람들이 찾기 원하는 만들어진 하나님으로 가득할 뿐이다. 사실상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계시로서 성경은 인간의 욕망을 편드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므로 우는 우리 시대의 지성이 발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 계시의 저자이시며, 주제가 되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수단으로서 우리의 지성과 문명이 치닫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자체로부터 멀리 떨어진 우리의 발전과 편리함은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을 참되게 알도록 할 때 의미가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세상 자체가 보이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조차 보이는 것에 갇히는 모순과 오류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 자체가 큰 재앙의 증거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하는 성삼위일체 하나님 그분 자신과 그의 영광을 말하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거나 생소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경을 들고서 그 속에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본질에 참예하는 길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와 가장 익숙한 문화와,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누리게 된 큰 편리함과 평안에 익숙한 감각 때문에 말이다. 성경은 가장 완전하고 완성된 성삼위일체 하나님 자기 자신에 대한 계시이다. 우리의 현실의 속도와 편리함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참되게 가르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러한 진리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것과 이것을 명확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현대 시대와 우리의 편리함이 형벌로 주어졌음을 알고 애통해야 할 것이다.
551 no image |목회칼럼|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대해 보면서_정종은 목사
편집부
1998 2016-05-24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대해 보면서 < 정종은 목사, 동백리교회 >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 통해 교회는 새롭고 강하게 태어나는 것”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이 임하심으로 새롭게 태어난 교회이다. 120명의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함께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은 약속하신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 주셨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회에 참석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는 성령 충만함으로 요엘서 2장 28절을 인용하면서 모인 순례자들과 청중을 향해 설교를 했다. 세계 각국 16개 지역에서 찾아온 순례객들은 각자 자기 나라 방언으로 듣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그들이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에게 한 것이니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 기간에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이 3천명이 되었다. 성령 충만한 120명의 초대교회는 한 순간에 3천명이 모이는 큰 교회가 되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초대교회는 순식간에 큰 교회로 성장했지만,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초대교회 성도가 큰 수로 불어났지만, 그들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가 필요한 대로 집에서 음식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들은 갑자기 수가 많아졌음에도 교회로서의 특징인 지체의식을 가지고 유무상통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눔이 사이좋게 이루어졌다. 미래에 나타날 천국의 모습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였고, 주위에서는 칭찬을 들었고,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겁쟁이였던 베드로는 담대한 전도자로 바꾸었다. 그가 주님을 증거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 마디로 복음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들을 맞서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게 마땅하다고 외쳤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채찍에 맞는 것도 당연하고 기쁘게 생각했다. 무엇이 이렇게 초대교회를, 그리고 베드로를 변화시켰는가? 단적으로 성령이 임하심으로 교회와 베드로가 변화된 것이다.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심으로 기도했던 초대교회 공동체를 바꾸어 주셨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지체의식을 가진 진정한 공동체였다. 그들은 공동체가 커졌고, 그들을 수용할 만한 마땅한 교회당 건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단코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았다. 커다란 공동체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으로 지체의식을 가지고, 유무상통이 이루어지고 각자 필요한 대로 나눔이 이루어졌다. 초대 교회는 분명히 모범적인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리고 능력이 나타나고, 주님의 사랑이 함께하는 진정한 교회였다. 초대 교회와 오늘날 교회를 비교해보면 초대 교회보다도 그 기대치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성경 안에서만 나타나는 교회인가? 그리고 초대 교회에 임하신 성령님은 성경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으로 국한시켜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님이나 지금 우리가 믿는 성령님은 똑같은 성령님이며, 초대교회에서 역사하신 성령님은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똑같이 역사하시는 분이다. 초대교회는 분명히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교회가 교회답게 변화하고, 능력이 나타난 교회였다. 다시 말하면 너무나도 분명한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 주시면서 교회가 새롭고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가 성령이 없으면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하루빨리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함께 닮아지기를 기도하고, 그 때에 임하신 성령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역사하셔서 베드로처럼 강하고 담대한 전도자요, 설교자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한다.
550 no image |목회칼럼| 하나님의 영광인가 우리의 영광인가?_김영길 목사
편집부
2068 2016-05-10
하나님의 영광인가 우리의 영광인가? < 김영길 목사, 더불어사는교회 > “하나님의 말씀 통치를 이루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나는 것” 매스컴에서 연예인들에게 주어지는 시상식 장면이 방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시상식에서 가끔 기독교인들이 꽃다발을 받고 "먼저 하나님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피력하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러한 수상 소감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까요? 어떠한 부흥회 같은 집회에서도 집회 인도자가 청중에게 자주 요청하는 내용 속에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립시다"라고 선창을 하면 모든 청중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박수를 쳐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영광을 받으실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신분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거나 상승되어지는 위치에 오르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박수를 쳐드리면 그것으로 영광을 받는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신분이 낮고, 가난하거나, 자신의 일에 대해서 실패한 사람들로부터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수준을 넘어 성령으로 말미암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깨달음 없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의미를 하나님의 창조 원리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곧 태초에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를 받고 순응함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의도하시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가운데 서로 충돌함이 없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찬양하며 이를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파괴됨으로써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파괴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 통치를 거부한 결과로 나타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통치 받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 가운데 서로 조화를 이루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아니하고 서로 상합하며 연락하여 주님의 몸을 세워나가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어진 그 원리 안에서 질서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처럼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받들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말씀 안에서 서로 충돌함 없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아니하고,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므로 말미암아 교회공동체가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고 이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주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신분의 계급적인 상승이나 차등에 관계없이, 혹은 세상에서는 실패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의지하고자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다면 이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체계에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행위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님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치를 경홀히 하면서 주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입술로만 주님의 십자가만을 이야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만을 밟고 다니는 가짜 신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백성들은 세상적인 신분 상승이나 차등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아 저들이 세상에서 망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삶이라면 곧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질서 체계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스스로 영광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임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면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549 no image |목회칼럼| 제3의 목사상(牧師像): 장수(將帥) 혹은 성주(城主)_김무곤 목사
편집부
1778 2016-05-10
제3의 목사상(牧師像): 장수(將帥) 혹은 성주(城主) < 김무곤 목사, 대구동흥교회 > “목사는 마을 혹은 도시의 영적인 안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어” 목사는 그 누구보다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목사의 사명이 무엇인지, 나는 왜 지금 이 시기에 목사로 부름 받아서 지금의 이 교회에서 지금의 이 성도들을 섬기고 있는지를 알고 사역하는 목사야말로 건강하고 충성스럽게 사역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그가 붙들어야 할 정체성의 핵심들을 정확히 알려주셨다(렘1:9-10). 정체성이 분명하면 짐이 무거워도 잘 감당해 나간다. 그렇지 못하면 목사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고, 결국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없다. 목사안수를 받은 지 16년이 넘어가고 있다. 소명을 받아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고 교육전도사, 전임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기간을 거쳐서 지역교회의 청빙을 받아서 지금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목사후보생 시절부터 기준으로 하면 30년이 다 되어간다. 부르심을 받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순수하고 이상이 높았으며 뜨거웠지만 목사상(牧師像)에 대한 굳건한 정립은 되어 있지 않았다. 막연히, 이런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거나 나는 결코 저런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하겠다고 하는 정도의 막연한 이미지만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의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한다. 목사는 설교자요 목양자라고 하는 것이 목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전적 대답이다. 담임목회로 들어선 초기 몇 년까지 나의 목사로서의 정체성은 주로 설교자로서의 목사였다. 설교자라는 정의 속에는 말씀을 선포하는 자(하나님의 대언자)와 말씀을 가르치는 자(교사)의 정체성이 주를 이루었다. 말씀을 잘 연구하고 준비하여 그 말씀을 잘 전달하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목사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라고 여겼다. 지금도 그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돌아보면 균형을 잃었었다. 목자로서의 개념은 한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내게 목자의 심령, 목양의 심령이 부족함을 알게 되면서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다. 청년이 결혼을 하여 처음 아이를 낳아서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로서의 준비는 아직 잘 안되어 있는 것이다. 태어난 아이가 자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생활하면서 점점 진짜 아버지가 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보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훨씬 더 손주들을 잘 돌보는 이유는 이미 큰 실패를 맛보고, 지금은 깊은 요령을 터득했기 때문이리라. 하여간 목사는 설교자라고 하는 정체성에만 기대어 지역교회 담임목사로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음을 절감하게 되면서부터 목양자로서 목사의 역할을 점점 익혀가고 그 마음을 알아가고 있다.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해 나를 설교자요 목양자로 보내셨다고 하는 생각이 정립되면서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더 들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나는 최근에 심중에 각인되고 있는 목사의 제3의 정체성을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장수(將帥) 혹은 성주(城主)로서의 목사상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그 자리에 세워진 지역교회를 지키는 성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일전에 여러 목사들의 모임에서 들은 말이 있다. 목사들은 참 통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종의 ‘분봉왕’이기 때문이다. 각 지역교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고집도 세고, 하나로 이끌기도 어렵다고 하는 푸념이었다. 목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초한 조소에 가까운 유머였다. 그러나 항상 모든 표현들 속에서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존 맥아더 목사가 말한 것과 같이 지역교회 목사들은 실제로 성을 지키는 성주와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중세 봉건시대를 생각해보면, 각 성의 영주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성의 안전을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기사들을 세워서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한 것이다. 종교개혁운동 시기에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발생한 진리 전쟁의 와중에서 각 도시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신앙의 색깔들을 분명히 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때 각자의 입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그 성의 성주와 핵심 그룹들이 어떤 입장을 따르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념에 의해 그 성 전체가 종교개혁의 품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아니면 구교의 편에 남아 있기도 하게 된 것이다. 현대 사회는 중세의 제도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개교회주의가 만연되어고 있고, 대표성도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대 속에서라도 우리 목사들은 내가 목회하고 있는 마을 혹은 도시의 영적인 안전을 보호하도록 부름받은 성주 혹은 장군의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으면 좋겠다. 목사로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좋은 목사들이 곳곳에서 맡겨주신 자신의 몫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기대해 본다.
548 no image |김영규칼럼| 순수 이성보다 앞선 ‘자연’의 빛
편집부
1967 2016-04-26
 순수 이성보다 앞선 ‘자연’의 빛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 우리 앞에 있는 자연의 대상들 중에서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이라고 느끼거나 지칭하기에 너무 불편한 상황을 우리는 종종 만난다. 그 이유로서 자연 속에 자연과 너무 비슷한 인공물들이 많고 또한 그런 인공물이 자연에 잘 흡수되기도 하고 자연은 그런 인공물에 잘 적응하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합성이나 조작이 없는 자연에 대한 사진을 찾기 힘들 듯이, 인공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이제 극히 찾기 어렵게 되었다. 주는 자가 아무리 변치 않게 준다고 해도 받는 자가 늘 변하는 자로 받는 다면, 주는 대로 받는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가 계속 전달이 되고 발견이 된다고 해도 진리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진리가 항상 거기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기독교 진리도 모든 시대마다 그런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일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있는 영역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들이 축적이 되는 방향이 극 거시세계와 극 미시세계로 확대되면서 있는 그대로 ‘자연’ 혹은 진리를 발견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지금까지 인간의 상상력으로 불가능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겨우 설명이 되고 진척이 되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지금 과학의 궁극적 과제들에 대해서 문제들을 풀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에 있어서 어떤 한계에 도달한 문제들이 대부분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유행하고 있는 상상력이 아직도 19세기 상상력에 기반을 두는 경우들이 많다. 극단의 예를 들자면, 어거스틴의 기억에 대한 상상력이 지금 컴퓨터 개념에 있어서 비트의 개념으로 남아 있는 이상, 지금 컴퓨터 공학이 어거스틴의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한 채로 계속 남아 있는 예가 그 대표적 예이다. 즉 현대의 많은 진리에 대한 진보나 영향력이 있는 내용들은 과거의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 상상력의 기준으로 보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대한 원초적 내용이 어거스틴의 개념론에서 찾을 수 있다든지, 훗설 이후 현대 실존주의들의 뿌리인 지향성의 개념도 어거스틴의 지향성 개념에 의존한다든지, 거부할 수 없는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사상의 원형도 창세기 3장의 인간의 타락상에 대한 뿌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 등이 다 그런 예들이다. 지금도 어거스틴이 말한 생각의 마지막 경계선들, 즉 “질이 없는 선, 양이 없는 최대성, 부족함이 없는 창조자, 위치가 없는 좌정 자, 가진 것이 없이 만물을 포괄하는 자, 장소 없이 어디에서나 전체인 분, 시간이 없는 영원한 분, 어떤 움직임이 없이 움직이게 하는 자, 어떤 것에도 수동적이지 않는 자”로 표현된 그 상상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거나 그것을 띄어 넘는 상상력을 표현해 낼 수 없다는데 인간의 지성에 있어서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인간의 상상력은 그 끝에 도달하였다는데 문제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의 이런 끝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상상력의 한계의 그 극한점에 도달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대부분 필연적으로 인공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상상력의 부재와 함께 의식이 지향성이라는 의식 자체의 오류나 그 지향성이 판명성을 향하는 방향이 있다는 오류, 따라서 지향적 행위와 정반대인 우리 중심을 향하는 방향이 있다는 오류 등과 같은 오류들과 엮여 있는 모든 상상력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 최대의 방해물로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 우리 앞에 모든 대상들이 우리의 그런 상상력들에 의해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세계로 발견이 되면 될수록, 그런 상상력의 한계에 의해서 완전히 감추어진 채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창조자 하나님이 그런 인간 상상력에 의해서 표상되거나 발견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십계명만을 어기는 일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스스로 가장 자유롭게 하나님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답으로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안에서만 세계의 문제들은 다 풀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한 번도 발견해 본 적이 없다는 말도 된다. 당연히 진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 궁극적 인간 상상력의 부재 앞에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들에 대한 답으로 있듯이,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에게 나타내시는 방식인 계시가 유일한 답이요 인간이 그 계시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을 피조물들이 그 질서들에 대해서 듣고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듣고 보며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기 위해서 그 질서들이 처음 생기고 그 질서들이 존속하고 있는 비밀이 자연 속에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 앞에 있는 자연을 처음 있는 그대로 인공적으로 인간이 완벽하게 만들 수 없는 동안, 이 결론은 인간에게 영원히 거부될 수 없는 진리로 남아 있다. 지금 자연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이런 진리를 느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547 no image |목회칼럼| 버티고(Vertigo), 비행착각 현상_박동근 목사
편집부
2286 2016-04-12
버티고(Vertigo), 비행착각 현상 < 박동근 목사, 안양한길교회 > “하나님의 말씀만이 천국과 지옥의 길을 분별하는 유일한 기준” 능수능란한 비행기 조종사들도 간혹 위험에 빠뜨리는 신체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버티고’(Vertigo) 현상이라고 합니다. 버티고 편상을 ‘비행착각현상’이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비행한다는 것은 3차원적이고, 절대적 기준이 되는 방향점이 없기 때문에 비행기 조종사들은 지면에서 외부환경을 인식하는 것과 몹시 다른 느낌을 갖는다고 합니다. 한 예로 전투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들은 엄청난 속도로 비행하면서도 속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구름이나 지면에 가까이 가면 속도감을 느끼지만, 공중에 외부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위 환경에 대한 조종사의 인식과 실제 상황이 다른 경우를 ‘버티고, 즉 ‘비행착각현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도 이런 착각을 가끔 하게 되는데, 정지해 있는 기차에 탑승해 있을 때, 옆 기차가 떠나면 마치 자신이 탑승한 기차가 후진하는 듯 하는 착각을 하는 예가 그렇습니다. 이러한 ‘버티고’ 현상은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을 비행할 때, 이들은 ‘버티고’ 현상 때문에,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의 불빛을 하늘의 별로, 하늘의 덮인 구름을 바다로 착각하여, 하늘로 오른다고 한 것이 바다를 향하여 추락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때를 위해 비행기에는 ‘자세계’라는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계측기가 달려있지만, 비행사들이 ‘버티고’ 현상에 빠지면 자신의 느낌 때문에 ‘자세계’를 고장난 것처럼 여기고 자신의 생각대로 비행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다고 합니다. ‘버티고’ 현상에 대해 들어보니, 이 현상이 인생에 주는 교훈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비행기에 반드시 부착되어야 하고, 조종사들이 꼭 살펴야 하는 것이 ‘자세계’라는 하늘과 땅을 구분해 주는 계측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착각 때문에, 때로는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너무나 신뢰한 이유로 조종사들은 귀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사들에게 엄습할 수 있는 이런 위험은 우리 인생에도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타락을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의 이성은 진정 인식해야 할 것들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인식하더라도 마치 ‘버티고’ 현상처럼 몹시 왜곡되고 오도된 판단을 내릴 때가 많은 것입니다. 죄성을 지닌 우리의 의지도 우리 자신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인생을 큰 위기 속에 몰아넣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도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늘 우리의 유한함과 죄성을 인해 보이는 세계이든 보이지 않는 세계이든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선택할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판단과 선택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자세계’가 필요합니다. 부패한 우리 마음을 믿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패하고 어리석은 자신의 판단만 따르다가 인생의 추락을 경험하는 예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미련한 인생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미혹 속에서 속지 않고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인도하신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자세계’가 됩니다. 그 자세계가 지시하는 길을 주목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은 안전하고 목표한 곳에 이를 수 있답니다. 그러나 그 자세계를 무시하고 주목하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혼돈과 고통 속에 머물게 되며, 인생의 추락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세계가 필요합니다. 비행사가 하늘과 땅을 자세계를 통해 구분해야 하듯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빛과 어두움을, 생명 길과 사망의 길을, 천국과 지옥의 길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곳에 성령께서 신앙하는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셔서 복된 길로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과 구원의 삶의 완전한 표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의 ‘자세계’를 살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546 no image |목회칼럼| 신뢰(信賴)가 힘이다_김수연 목사
편집부
2172 2016-03-29
신뢰(信賴)가 힘이다 < 김수연 목사, 서부제일교회 > “신뢰성은 마음의 거리이며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안에 평안 있어” 개인공간(Personal-space)이란 심리학에서 인간 혹은 물건과의 사이의 사람이 두는 거리를 말한다. 이 개인공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싼 공간 중에서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는 범위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 공간을 네 종류로(네 단계) 구별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단계를 밀접거리라고 한다. 아주 가까운 거리, 마치 연인의 관계처럼 서로 사랑하고 밀착된 그런 마음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신뢰가 있고 참된 평안이 있다. 둘째 단계를 개인(체)거리라 한다. 개인거리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이다. 내가 마음을 열면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런데 열지 않는다. 한 평생 같이 살지마는 아직 믿을 수가 없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세 번째 단계가 사회(교)거리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많은 사람과 만나야 한다. 필요에 의해서, 사업상 또는 여러 이유로 만나며 산다. 함께 만나는 것 같지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교적으로 필요에 따라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거리다. 네 번째 단계가 공중거리이다. 공간적으로는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은 전혀 멀리 있다. 내가 남을 얼마나 믿으며, 믿을 수 있으며, 저는 나를 얼마나 믿어 준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신뢰성이라는 것이다. 신뢰성은 마음의 거리이다. 온전히 믿으면, 혹은 나 자신처럼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고 사랑이다. 여기에 평안이 있다. 요즘 우리의 사회를 보면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신뢰가 무너졌다. 위정자들과 국민의 관계에서 신뢰는 찾아보기 어렵다. 부부간에도 신뢰에 위기가 감도는 시대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신뢰가 흔들린다. 친구끼리도 믿지 못하고, 교회끼리도 믿지 못한다. 목회자와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불행이다. 여기서는 재미가 없고, 평안이 없다. 믿을 때 평안하고 믿을 때 자유함이 있다. 그리고 신뢰할 때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된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알고도 믿음이 없다면 소용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믿지 못하면 생명이 없다. 능력이 될 수 없다. 믿을 때 지혜가 되고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이다. 신뢰할 때 힘이 된다. 지금 세계는 정치적인 힘, 경제적인 힘, 문화적인 힘으로 주도하고 지배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힘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신뢰성에 있다. 신뢰성을 가질 때 거기서 진정한 힘이 나온다.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이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이 있고,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장성하자 짝을 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부인이 될 사람을 가나안 땅에서 찾지 않고 고향에서 며느리를 구하려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 그의 종 엘리에셀을 보내어 사람을 찾게 한다. 한 집안의 며느리를 들이는 일은 너무나 중차대한 일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큰 일이다. 때문에 이 일은 당사자들인 부모가 직접 나서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을 종에게 맡긴다. 그리고 종은 이 일을 맡아 길을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종 엘리에셀 사이에 얼마나 큰 신뢰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에 대한 절대 충성과 신뢰를 통해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신뢰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진정한 신뢰란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신앙(信仰)이 사람도 신뢰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엘리에셀도 마찬가지다. 그도 하나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렇다. 신뢰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중심을 가질 때 그때 우리는 온전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에, 내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믿기에, 세상이 어떠하더라도, 사람이 어떠하더라도 나는 신뢰할 수 있고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진정한 신뢰는 사랑(愛)에서 발휘된다. 아브라함과 엘리에셀은 주종관계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종을 사랑했고, 종은 주인을 사랑했다. 여기서 사랑이란 가족과 같이 친구와 같이 생각하며,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그를 가족과 같이 생각했다. 그러기에 한 집안의 며느리를 선택하는 일, 아들의 부인을 선택하는 막중한 일을 맡긴 것이다. 또한 엘리에셀 역시 그 일을 위임받아 주인의 뜻을 존중하며 나간다. 이 둘의 관계가 얼마나 사랑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종에게 권한을 주고, 종은 주인을 존중하고 그 뜻을 온전히 따른다. 이게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위로는 존중, 존경이며, 아래로는 긍휼이요, 수평적으로는 우의, 나눔, 인정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신뢰는 성실(誠實)함에서 나온다. 엘리에셀은 참으로 성실한 종이었다. 진실한 종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했다. 그리고 아브라함 형제의 집을 찾아 아브라함의 뜻을 그대로 전한다. 더하지도 감하지도 않는다. 아브라함이 그를 보낼 때 많은 보화를 주었다. 그것에 대해 사심이 없다. 깨끗이 받은바 대로 전한다. 신뢰를 이루는 또 하나의 힘은 바로 성실함, 진실함인 것이다. 주님은 일찍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다’(눅 16:10)고 하셨다. 충성이란 주어진 일에 순종하며 성실한 것이다. 작은 것에 성실한 자는 큰 것에 성실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신뢰가 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시급성은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뢰가 진정한 힘이기에 말이다. 성실을 식물로 삼자.
545 no image |목회칼럼| ‘칼(劍)’의 권세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통치_장대선 목사
편집부
2025 2016-03-29
‘칼(劍)’의 권세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통치 < 장대선 목사, 가마산 교회 > “방종하는 자들을 치리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권력을 위임해 주신 것” 현대사회에서는 종교 혹은 신앙의 문제와 정부 혹은 사회의 문제 사이에는 엄연한 구별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구별은 단순히 행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의식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뿌리깊이 갈라져 있어서 일반적인 신앙으로는 이를 바르게 의식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하다보니 그러한 구별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교집합(交集合)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것은, 기독교를 가히 이슬람(Islam)과 같은 신정국가를 지향하는가 하는 의심을 받기 십상이다. 프랑스 신앙고백(1559년) 제35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방종과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굴레와 같은 것을 두셔서 법과 정치를 통해 이 세상이 다스림을 받는 것을 원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세습 혹은 여타의 방법에 의해 군주국, 공화국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종류와 형태의 국가와 정체(政體)들을 세우셔서,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것들의 설립자로서 인정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고백이 이어지고 있어서,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여타의 어떤 세속의 권위나 정체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세속권세에 대한 이해와 고백은 1647년에 공표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동일하게 고백되고 있다. 제23장 국가 공직자에 대한 주제 제1항에서 “온 세상의 지고하신 왕이요, 주님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위해 자기 아래 국가 공직자들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 분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들에게 칼의 권세를 허락하시어 선한 자들은 보호하고 격려하며, 악인들은 징벌하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들은 사회적 합의나 종교회의에서 토론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의 권위 가운데서만 도출된 것이니, 이에 따라 신앙고백서들은 동일하게 성경 증거구절들을 첨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러한 신앙의 고백 가운데서 세속의 군주 혹은 의회는 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논의된 결과를 공적으로 공표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와 성경이 교훈하는 바에 따라, 교회와 정부(혹은 국가)는 각각 별개의 집합들이 아니라 각각 양립하는 교집합으로서 세상에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성경을 통해 두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세속정부와 교회정치에 있어서 각각의 권세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세속정체나 교회정체나 공히 권세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그러한 모범을 가장 잘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장로교회의 정체(政體)인데,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성경의 진리보다 위에 설 수 없고, 누구라도 성경의 진리 외에 그 어떤 속박이나 지배도 받지 않는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으로서의 정치체계다. 따라서 이런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세속정부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곧 세속군주나 관원들에게 칼이 주어지는 것은 백성들의 악을 징벌하는 도구로써 주어진 것이지, 군주나 관원이 군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원리에 따라 교회에 누군가가 머리의 권세를 차지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앉을 수 없는 권세를 차지하는 지극히 큰 패역이다. 곧 목사나 장로, 집사나 그 어떤 신자라도 교회에서 권세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원리에 따라 국가에 누군가가 머리의 권세를 차지하는 것은 그를 도구로 세우신 하나님의 권세를 찬탈하는 것이며, 인간인 자신의 자리보다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지극히 큰 죄악이다. 곧 왕이나 원로, 관원이나 의원 등 그 어떤 자라도 백성들의 악을 징벌하는 기능 외에 그 어떤 위해나 속박을 가해 권세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독재자는 세속사회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극악한 죄인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회나 국가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회나 국가라도 독재의 자리에서 군림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죄인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도구로써 합당한 교회와 국가의 모습은, 성경의 진리 외에 누구도 권세 가운데 있지 않는 교회의 설교자들과, 백성들의 악을 벌하는 역할 외에 그 어떤 위세나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국가의 위정자들이 함께 참된 신앙과 삶을 치리(治理)하는 의미에서의 신정국가이다. 그러한 국가관과 그러한 교회관은 먼 이상(理想)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요 목적이니, 멀리서 관망할 것이 아니라 멈추지 말고 부지런한 걸음을 더해가야 하는 것이다. 또 한편, 그러한 통치와 치리는 결코 방종을 위한 명분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대적하고 거스르며, 양심의 자유가 아니라 화인 맞은 양심으로 방종하는 자들을 치리하고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장로들과 국가의 관원들에게 각각 권징과 권력을 위임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무단히 주인을 거스르는 종이나 자유로 법을 거스르는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서의 채찍과 법치가 내려지는 것이며, 고의로 죄를 범하며 진리를 거스르는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에게도 권징이 시행되는 것이다. 비록 교회나 국가나 온통 권세자들이 우글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된 모습은 하나님의 진리와 통치만이 자리하는 진정한 장로주의교회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아울러 분명한 것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롬 13:1-4)는 말씀처럼 선하지 않음에 권세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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