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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 no image |목회칼럼| 거울 뉴런_정요석 목사
편집부
2179 2016-03-29
거울 뉴런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신자들은 자신의 인격과 능력 넘어서는 자리 탐하지 않는 것이 좋아” 사람의 뇌에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는 세포가 있습니다. 이 세포 때문에 상대가 공을 쥐는 행동을 하면, 내 뇌도 공을 쥐는 것과 연관된 신경이 작동합니다. 1990년대 이탈리아 과학자들이 원숭이에게서 처음 발견했는데, 영장류는 모두 거울 뉴런을 갖고 있어서 동료의 아픔과 기쁨을 자기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쥐면 이런 감정이입이 줄어듭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남을 압도했거나 의존한 경험을 글로 쓰게 했습니다. 즉 권력을 쥔 상사의 상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미약한 존재로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손으로 고무공을 쥐는 영상을 보여주고 뇌 활동을 측정했습니다. 그랬더니 권력자의 상태를 생각한 이는 거울 뉴런이 거의 작동되지 않았고, 미약한 존재를 생각한 이는 활발하게 작동되었습니다. 남녀 구분 없이 권력자들은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 호르몬이 증가합니다. 코카인에 중독되면 뇌에 만족감을 주는 도파민 분비가 늘어나는데, 테스토스테론이 도파민 분비를 촉진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는 마약 중독자처럼 그 달콤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점점 독해지기 쉽습니다. 사울 왕도 보십시오. 그는 왕이 되기 전에는 행구 사이에 숨을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맛을 본 뒤에는 하나님 대신에 권력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점점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를 사울이 부드럽게 수용했다면 그는 만만을 죽인 다윗이라는 훌륭한 부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노래를 역하게 받아들여 만만을 죽인 다윗을 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여로보암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의 감독관으로 있을 때에는 훌륭했지만 열 지파의 왕이 되자 권력을 숭상했습니다. 무엇을 하든 권력 유지에 초점을 맞추어 판단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넘어서는 자리를 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는 자리를 얻으면 그 자리가 주는 즐거움은 누릴지 모르지만, 그 자리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힘들어집니다. 자신의 리더십을 받는 사람들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하며 안정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만큼의 자리만 바라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도 권력의 자리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선한 동기로 목사가 된 이들이, 그리고 실제로 순진하고 선했던 그들이 교회의 규모가 커지며 안정된 담임목사의 맛을 보게 될 때에 점점 변해갑니다.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는 목사는 자신이 변한 것을 모릅니다. 성도들과 같이 즐거워하고 울던 낮은 마음이 어느새 효율과 생산성과 권력유지의 높은 마음이 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은 서로 총회장과 총무와 노회장이 되려고 은밀히 선거운동 하는 이들과 파벌이 없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거울 뉴런이 작동되지 않는 이들이 교단과 신학교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니 교단의 어디를 가도 권력의 긴장감이 없습니다. 이러한 건강성이 계속 유지된다면 우리 교단은 타 교단들에게 이렇게 교단이 운영될 수 있다는 개념과 도전을 안겨줄 것이고, 바로 이것이 타 교단들에게 주는 큰 선물일 것입니다. 우리 교단은 권력의 자리가 상대적으로 적어 정치 목사가 적고, 교단 역사가 짧아 파벌이 형성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앞으로 교단이 커지고 역사가 길어지면 언제 어떻게 부패가 시작될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별 수 없는 인간임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선거 운동을 더 하지 않고, 어느 개인이나 기수나 파벌이 좋은 자리에 더 오래 앉지 않고, 이득을 쫓아 더 줄서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거울 뉴런이 작동되지 않는 자는 그가 아무리 큰 교회를 하고, 큰 권력을 가진 자라도 우리가 존경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교단이 갖고 있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정신은 무엇보다 귀합니다. 이 정신으로 제20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4월 13일 총선에 임하면 좋겠습니다.
543 no image |목회칼럼| 오염된 자랑과 부패한 기득권_이광호 목사
편집부
1995 2016-03-29
오염된 자랑과 부패한 기득권 < 이광호 목사, 실로암교회 > “교회에서는 세상의 것들이 특별한 대우 받는 조건 될 수 없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된다. 세속국가에 속해 있으며 노동을 통해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불신자들은 세상적인 가치를 두고 서로 비교하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건전한 직업이라면 귀천 없이 모든 면에서 성실하고 근면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서는 세상에서의 직업과 지위가 결코 부러움이나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세속적인 성공여부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나 은혜인 양 직접 결부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즉 세상에서 출세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하거나 사업에 성공한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그런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복과 은혜에서 거리가 먼 사람인 것처럼 오해할 우려가 따른다. 더욱이 교회의 교사인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세상에서의 과거 경력을 자랑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과거에 어떤 성공한 자리에 있었던가 하는 것은 하등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으며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는가 하는 것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부유한 집안 태생으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Tarsus) 출신이었지만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어 구약 율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은 후로는 그것을 전혀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그런 것들을 아무런 값어치 없는 배설물처럼 여겼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정치적으로 매우 높은 지위에 있던 자였다. 삭개오 같은 인물은 세무 관리를 지냈다. 아리마대 요셉 같은 인물은 큰 부자였다. 그리고 자주장사 루디아나 빌레몬 같은 사람은 상당한 부자였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세상적인 그 형편들이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세상의 것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라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노예와 자유인 사이에도 교회 안에서는 더 이상 신분적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았다(갈3:28; 골3:11). 교회는 그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나간 과거의 경력 뿐 아니라 현재의 형편 역시 교회 가운데서 긍지를 가질만한 자랑거리로 작용할 수 없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진정한 교회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과연 어떤가? 세상에서 높이 인정받는 배경을 가진 자들이 교회 안에서 더 나은 대접을 받거나 보이지 않는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되면 순박한 교인들은 저들의 외형을 부러워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리 시대 한국교회 가운데는 소위 ‘진골과 성골’이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모의 직위와 세속적인 형편에 따라 그 자녀들도 교회 안에서 유사한 대우를 받게 된다. 부모가 힘 있는 목사나 장로라면 상당한 기득권을 누랄 수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을 경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얼마든지 많이 있다. 교회에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그것을 방치하게 되면 악한 누룩이 되어 퍼져나갈 것이며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 될 것이 뻔하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경력과 부와 명예를 가진 자들을 대우하면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복이라 자랑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저절로 상대적인 경시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신학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에서의 자기 경력이 무의미함을 깨달아야 한다. 복음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출신학교나 과거의 직업 자체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바울이 말한바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신학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학력, 경력 등 출신 배경을 여전히 하나의 ‘자랑거리’로 생각한다면 이는 미성숙의 증거이며, 다른 성도들도 같은 시각에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외모를 보고 하나님의 자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보혈로써 용서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동등한 지위를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는 자라면 교회는 마땅히 그를 그와 동일한 관점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상교회가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542 no image |김영규칼럼|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시사하는 것
편집부
2215 2016-03-15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시사하는 것 김영규 목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인공지능보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장 큰 인류의 경계 대상” 최근 인공지능 프로그램에는 몬테 카롤로 나무 탐색 프로그램이 이용이 된다고 알려지고 있다. 인공지능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은 배우는 기능이다. 바둑 게임과 같이 사람들이 바둑알을 둘 수 있는 교점의 수들이 고정이 되어 있을 때, 그 배우는 과정에 있어서 매 교점들이 점진적으로 선택된다는 조건 아래 그 임의성에 있어서 틀릴 수 있는 경우와 맞을 수 있는 경우들에 대한 확률이 최대로 높은 점들을 선택하면서 마치 나무의 가지들과 잎들이 형성이 되듯이 참된 교점들이 찾아지는 탐색기술들과 확장기술을 통해 배우게 된다고 한다. 또한 승률이 가장 높은 예견 교점에 대해서 다시 시뮬레이션들이 이루어져 가장 확률이 높은 교점이 선정이 된다. 동시에 그 교점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예측 확률도 관측되면서 매 교점들의 선택을 반복하여 게임이 이루어지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마치 그 프로그램 자체가 어떤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게임에 임하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역시 그런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인공지능 게임 프로그램의 경우 게임이 더 진행되면서 그 승리 확률에 대해서 예측 시간이 짧아지기 때문에, 게임에 임하는 인간에게 압박감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인공지능이 미래에 더 발전하여서 사람이나 다른 동물처럼 뇌 신경망이 뇌 세포들의 기능하는 방식이나 전체 DNA 유전 정보 안에 유전 인자들의 상호 자극이나 억제 기능을 하듯이, 게임 전체의 마지막 승리를 향하여 매 교점들 사이에 복잡한 자극과 억제의 기능 망들이 형성되도록 프로그램화되는 경우 더 생명체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연적 뇌 기능들이나 유전 정보들의 기능 망과 컴퓨터 기능 사이에 근본적인 큰 차이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람들이나 동물들의 뇌 기능들 그리고 크고 작은 단백질들 사이의 기능 망들의 유동성이나 통일성의 깊은 배경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바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 중앙처리 장치들의 회로도는 우리가 뻔히 알고 있지만, 우리 몸의 각 체세포들의 핵 안에 염색체들의 정보들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는 것처럼 각 교점들이라고 가정이 되는 뇌 세포들의 핵 안에 있는 회로도 역시 실제로 밝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포질 밖에 있는 정보 전달체들이나 세포질과 핵 사이에 정보들을 전달하고 받고 있는 정보 전달체들의 기능들이 몸 전체의 기능들을 축소하고 있는 듯 그렇게 복잡한 유기적 기능 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극히 제한된 정보 전달 방식들만을 우리가 밝히고 있는 정도일 뿐이다. 둘째, 의식의 지향적 성격과 함께 지각들의 지향적 성격 때문에 하나로 선택하면서 앞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 일치점이 있으나, 지각 기관들에 의해서 수집할 수 있는 정보들이 아무리 제한된 경우의 수일지라도 실제로 자연 자체 전체 정보의 수만큼 큰 수라고 해야 될 것이고, 의지가 하나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주의 어느 시점에 갖다 놓아도 그 모든 경우들의 수를 포괄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임의성을 가진 한 점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 물질 세계가 아닌 영혼의 세계에 들어가도 그 세계 안의 모든 경우의 수들에 대해서도 그 의지는 자유로운 무한한 경우의 수들로 있을 한 점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비해 컴퓨터가 기능으로 발휘하는 임의성은 그래도 게임의 규칙들 안에 있는 경우들의 수만큼 제한적인 임의성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셋째, 컴퓨터의 비가역적 진행 성격은 생명체들의 비가역적 선택과 성격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인간은 의지 자체를 포기할 수 있되, 감성들에 의해서도 쉽게 영향을 받는다. 곧 기분이 나빠서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성격은 컴퓨터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내가 이기지 않고 희생하고 잘못과 거짓과 죄에 대해서 인내하는 것과 같은 의지의 표현은 도저히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따라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 기억에 있어서의 차이이다. 컴퓨터에는 디스플레이 장치가 있다고 해도 인간의 뇌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디스플레이 현상과는 다른 것이고, 인간의 뇌의 정보들이 최종 상영이 되는 영역은 우리의 물질 입자들의 어떤 공간의 개념에 의해서 설명이 되지 않는 공간이며, 오히려 우리 물질세계의 공간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해야 한다. 그런 세계에 대한 차이가 가장 결정적이지만, 다만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높다는 것도 인간이 구상하는 저장방식 자체가 마치 원자탄을 만들어 터뜨려 놓을 때, 그 세세한 과정을 통제할 수 없듯이 저장한 비트 단위 자체가 전혀 유동성 없이 그 영역의 세세한 부분들을 통제할 수 없는 파괴적이고 그 파괴를 매우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다섯째, 우리의 물질세계 뒤에 다른 세계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의 뇌 기능이나 감성 그리고 지각들조차도 그런 디스플레이 세계가 밝혀진 바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아무 것도 우리에게 대해서 푼 것이 없다. 더구나 물질세계조차도 에너지 개념이 근거하는 우리의 절대속도보다 큰 절대속도의 세계들을 그 배경으로 두고 있다면, 물질세계의 질서들의 기능 망도 처음부터 근원적으로 다르게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문제들이 항상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상과 같은 기본적인 몇 가지 차이들에 비추어 보아도 우리가 창작하는 인공지성에 대해서 전혀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특히 하나님의 계시에 기반을 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더 그런 인간의 창작물에 대해서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염려해야 할 것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고 그들의 죄들에 대해서 염려해야 할 것이다. 곧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장 큰 경계의 대상이 될 것이다.
541 no image |목회칼럼| 무서운 시대_임용민 목사
편집부
2509 2016-03-15
무서운 시대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하나님 앞에서 했던 임직자들의 선서마저 지키지 않는 것은 두려운 일” 무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인공 지능을 기반으로 한 슈퍼컴퓨터가 점차적으로 신산업 아젠다(agenda)를 형성하고 있다. 반면에 교회는 직분과 상관없이 불법이 횡행하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자식을 죽이는 극단성이 난무한다. 이 같은 교회의 불법적 후진성은 사회적 지성이 만들고 있는 현실보다 가치 없는, 실천적 무속주의로 평가를 받는 수모를 감내(堪耐)해야 하는 현실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 사회가 혹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것은 아니다. 또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자기 자식을 죽이는 현실이 무섭다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지금 하나님의 형벌 가운데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무속주의에 빠지고 있는 교회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도,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때도 사람들의 종교적 희망은 꺼지지 않았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만 들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는 희망이 아니라 전쟁과 포로됨이 찾아 왔을 뿐이다. 우리 시대는 엄청난 종교성으로 충만하다. 서울 거리에 교회 없는 곳을 찾을 수 없고, 대형 교회는 하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은 재물을 축적하고 있다. 심지어 정치인들조차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두려워서 이런 저런 눈치를 보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위정자들에게 신앙이 없어도,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예배를 고위 공직자를 위해 드려주는 형편이다. 마치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앞에서 승리의 예언을 장담했던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와 같은 형국이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묻는 사람도 없다. 관심도 없다. 때문에 무서운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은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목사의 소명이 하나님께 확인하지 않은 지 오래다. 목사 후보생이 되는 과정에서 교회로부터 공적 소명을 확인 받지 않고, 개인적 감격을 빌미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오래되었다. 당회가 오랫동안 살펴 시험하여 노회에 천거하여 노회의 시험과 추천을 통해 목사 후보생이 된 자를 신학교가 위탁을 받아 양성하는 일이 드문 시대이다. 공적 소명 없이 목사가 되기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시대이다. 노회를 통해 개척하고, 교회의 공적 청빙을 통해 목사로 임직을 받는 엄중성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시대이다. 장로교 목사로서 최소한 임직 때 가졌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을 성경에 총괄하는 교훈으로 받고 신종하겠다고 한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선서가 존중되지 않는 놀라운 시대이다. 즉 오늘날은 목사에게서 양심의 선서가 무겁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 과연 목사에게 윤리나, 정의를 물을 수 있겠는가? 최소한의 과정과 양심조차 존중하지 않는 조국 교회의 현실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목사가 이 정도인데, 장로에게 소명은 어떠한 상황일까? 장로의 소명이 무엇인지,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 역시 오래다. 장로교의 장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여 성도들에게 진리의 보살핌을 받게 하는 선물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장로는 자신의 명예와 가족의 행복, 그리고 교인 숫자 증대에 관심을 가질 뿐 교회의 진리를 살피지 않은지 오래다. 장로의 임직을 받을 때 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과 교회 정치와 권징 조례와 예배 모범”을 순종하겠다고 했던 선서를 따라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과 전공과 경험으로 교회를 섬기려 할 뿐이다. 세상 기준으로 교회 섬기려 하기도 장로가 이 정도이니 집사에게 소명은 정말 우스운 것이다. 누가 집사의 소명을 묻는다는 말인가. 집사는 말 그대로 장로가 되기 위해 거치는 일종의 과정적 직분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목사와 장로의 치리를 따라 진리의 총체에 벗어나지 않게 스데반과 빌립 같이 진리를 말하는 집사를 보기 어렵게 된 것이 너무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심지어 길에 차이는 것이 집사들이다. 소싯적에 집사 아니었던 사람이 없을 정도다. 우리의 현실이 이런데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것이 아니요, 마실 것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가 완전히 단절되어 진짜 목사, 진짜 장로, 진짜 집사를 만날 수 없는 무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직분의 가치와 의미가 상실된 현실에서 과연 하나님의 진리의 가장 높은 의미를 산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진리의 가장 높은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씨름하는 사역자가 있다고 치면, 오히려 현실을 모른다고 무시한다. 목회를 모른다고 조소한다. 심지어 교조주의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비근한 예로, 목사가 성삼위일체의 실체의 통일성을 따라 설교하기 위해 힘쓰고 애쓰면 성도들은 별로 수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점심 식사 이후에 주방 설거지를 하고 도우면 목사가 섬기는 것으로 오해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목사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말했다는 사실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진리의 말씀 앞에 서 있어야 목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는 충성됨이다. 여기서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실제로 죽게 될 것임에도 우리끼리 서로 자위하고 있는 교수대 위의 사형수와 같은 꼴이 될 뿐이다. 세상이 자신들과 함께 우리의 죽는 것을 보고 조롱하고 있는데, 우리만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형 집행관의 칼춤을 즐거워하는 모양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권고하려니와......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사 66:2,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참된 교회는 우리의 부패한 종교성과 역사에 의해 누적된 보편성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목사와 장로와 집사에게서는 이런 대중적 보편성조차 거부되는 현실이 있어야 한다.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섬기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게 교회를 진리로 총찰(總察)하는 부지런함과 충성됨이 있어야 할 뿐이다. “이제 남은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 된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여호와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되어야 할 뿐이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두려운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두려워 할 줄 알아야 목사가 자식을 죽였다. 장로가 거짓말로 정치를 했다. 집사가 부정부패로 사업을 일삼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가, 성도가 온 땅에 가득한 이 현실이 가장 무섭다. 하나님에 의해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과 의를 따라 나팔 불고 노래하는 이 현실이 너무 무섭다.
540 no image |김영규칼럼| 한국교회사와 한국의 현실
편집부
2140 2016-02-16
한국교회사와 한국의 현실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평생 벌콥의 조직신학만을 가르친 것은 고 신복윤 교수의 업적” 신복윤 교수님이 향년 91세(1926년 탄생)로 지난 1월 14일에 소천하셨다. 익히 알고 있듯이 해방 후 한국 장로교 역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옥중에서 풀러 나온 분들과 그렇지 않는 분들 사이에 공적으로 혹은 깊게 회개하지 않는 문제로 얼룩진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정작 한국교회에서 발생한 얼룩진 역사는 미국에 있는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가 1930년대 자유주의 신학 문제로 빛을 잃어 가고 있는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한국 유학생들이 선택한 신학적 입장들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6.25 사변과 함께 강제 월북되어 인민군 협력 거부로 소천한 남궁혁 교수와, 북한에 남아 있다가 순교한 이성휘 교수, 그리고 평양신학교 한국인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박형룡 교수가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 출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양신학교와 달리 선교사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설립되었다고 자랑하는 조선신학교의 역사와 함께 해방 후 계속 그 조선신학교 교수들로 활동하였던 송창근 교수와 김재준 교수 등도 같은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 출신이다. 박윤선 교수께서 그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입장들을 피해 메이쳔 교수 밑에서 수학하였던 상징적인 유학생활과 달리 이들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목사 등은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들을 여과 없이 수학하여 받아들인 대표적인 유학생들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 신학교 재건 운동의 열매로 총회의 장로교 신학교 직영 결의에 따라 1948년 6월에 총회신학교가 개교하였을 때, 고 신복윤 교수께서도 그 직영 장로교 신학교의 임시교장이었던 박형룡 교수 밑에 옮겨 수학하였다. 이것은 고 신복윤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확인한 내용으로 당시 박형룡 교수께서 교수하실 때 이미 벌콥의 조식신학을 번역한 프린트물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억하셨다. 그런 연장선에서 신복윤 교수님도 평생 벌콥의 조직신학만을 고집하여 가르치셨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그의 공헌이다. 왜냐하면 그 전 조선신학교 때 1947년 4월 18일 조선신학교 51명의 신학생 진정서 사건 때 참여한 인물들 중에 정규오 목사, 김준곤 박사, 조동진 목사, 차남진 박사 등 많은 유력한 인사들이 포함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근본정신을 살려내 유지하신 분은 바로 신복윤 교수라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 교회 안에 자유주의 신학이 깊숙이 들어 왔었다는 증거는 조선신학교 신학생들의 진정서 사건을 통해서 공적으로 정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진정서를 통해 당시 조선신학교의 면학 분위기도 읽을 수 있다. 당시 학생들 중에는 노회 추천 없이 입학한 자들도 많아서 육체부활이나 재림, 심판,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 처녀 탄생,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주일성수도 하지 않는 재학생들도 있었고 신학생 중에는 흡연자,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도적하여 팔아먹는 자, 다른 교파 신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다는 문제점들도 확인이 되고 있다. 이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의 그 진정서에는 ‘개혁교회’로서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과 “우리가 유아로부터 믿어오던 신앙과 성경관의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에 대한 저항적 자세가 분명히 표현이 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조선신학교의 처음 설립 정신으로서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신학은 자유라는 교육이념이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구현되면서 한국 장로교회 안에 ‘근대주의 신학사상, 성경의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를 그 진정서 내용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김재준 교수의 가르침 안에는 최초로 독일의 근대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 문제인 마르시온 신학의 핵심 내용에 따라 구약을 기독교 성경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경으로 전제하고 모세 오경에 대해서 J.E.D.P 문서들을 소개하거나 이사야에 대해서 다른 문서들을 소개하면서 문서들 사이에 법적, 사상적 혹은 시대적 차이들에 의해서 모순들과 오류들이 생겼을 것으로 가정해 보는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연구와 과학적 철학적 비판을 해야 한다는 연구방법들과 그 결과들이 소개되었다는 점이 그 문제의 핵심이다. 따라서 성경 각 권들의 시대성, 역사성, 저자 등이 부정 되고 성경 각 권이 글로서 완성되기 전까지 시대적 변천과 발전 및 외부적 영향들을 연구하는 소위 세계 곳곳에서 유행하는 학문적 방법들과 그 결과물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소개된 결과가 바로 “성경은 교리의 교과서가 아니다. 신구약 전체를 뒤지면서 삼위일체니 교리니를 찾아 내고자함은 어리석음이니 하나님은 성경에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태도로 이어졌고 그 결과 “예정론에 대하여 의미가 없다. 결국 칼빈의 예정론은 숙명론에 돌아간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마가복음 선행설, 복음서들의 원 자료(로기아)와 타 자료 사용설, 쉴라이어막허 인격 영감설 등과 같은 송창근 교수의 가르침은 당시 한국 선교사들이 위험한 것으로 배제하기를 원했던 미국이나 기타 선교사 파송 교회들 안에 이미 급격히 퍼지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적 방법론들과 함께 세계 학문들과 교류한다는 명목 아래 한국장로교회 안에 심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탐구된 역사적 예수는 다른 종교들의 기원자들과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져 버린 결과 기독교가 없어져 버린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사소한 일들이 아닌 그런 하나님과 성경을 모독하는 성직자들의 불경건한 행위들로 인하여 민족이 해방되었어도 그 해방 이전의 치욕보다 더 뼈아픈 전쟁과 그 분단의 슬픔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늘날까지 형벌로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경에 따르면, 그런 형벌에는 냉전 시대의 정치 역학적 국제 환경들의 영향들보다 이런 참된 교회의 진리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무의식적인 행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반영이 더 무서운 원인으로 있을 수 있음을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를 탓하기 전에 진리를 찾고 진실을 지켜내며 불행을 이기는 일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들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그런 마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신다는 사실을 더 믿고 싶을 뿐이다.
539 no image |목회칼럼| 헌금의 의미와 목적_임용민 목사
편집부
2544 2016-01-26
헌금의 의미와 목적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헌금은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공로에 의존된 것으로 성도에게만 주어진 특권” 최근 한국 사회에 교회의 재정 문제는 그 부패 현상으로 인해 큰 비판을 직면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연 어디에 근원을 두고 발생한 것일까? 이 문제의 원인은 바로 교회가 헌금이라는 거룩한 예배 행위를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속성에 따라 다루지 않은 신학적 경박함에서 찾을 수 있다. 1. 헌금은 예배에 속한 행위 거룩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 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교회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다. 이 말은 교회란 사람이 경영하는 곳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곳임을 함의한다. 실제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과 분리됨이 없이 통치하신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와 분리됨이 없는 것이 교회인 것이다. 때문에 헌금도 사람의 경제 개념과 재산 개념이 강조돼서는 안 된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통치와 머리되심을 드러내는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이 돼서는 안 된다. 오히려 헌금을 통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붙은 자들의 모든 경제 행위에 따른 수고와 그 열매라 할지라도 자신들에게 공로가 전혀 없음을 인정해야 할 뿐이다. 즉 헌금은 택자들이 스스로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나아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는 자로 있음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이며, 예배의 행위이다. 2. 교회 재정의 오용은 심각한 죄 헌금은 우리의 모든 생존에 관한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도의 모든 것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것으로, 마땅히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겸손한 신앙고백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지 않고는 모두 헛것이며, 자기 공로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되지 않은 헌금은 죄일 뿐이다. 반대로 거룩한 예배에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돌리는 참된 신앙고백의 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헌금이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예배에서 헌금은 드리는 자가 강조돼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생존의 모든 부분을 쓸모 있게 하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유효적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할 뿐이다. 그래서 금액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명하신 것에 따라 순종되는 것이 강조돼야 할 뿐이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교회는 이렇게 귀한 헌금을 관리해야 한다. 교회는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속성을 따라 관리해야 한다. 대부분 헌금에 관한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교회가 경영의 원리를 앞세워 헌금을 관리하다보니 더 큰 건물을 짓는 일에, 좋은 차를 사는 일에, 목사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오용되는 사례가 많다. 즉 헌금은 목사 개인의 목회 비전을 이루는 수단도, 교회의 구성원들의 경제 개념을 충족시키는 수단도 아니다. 3. 헌금은 엄격하게 관리되어야 드려진 헌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교회는 이 일을 매우 엄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철저하게 당회를 통해서 헌금을 잘 관리하도록 지도를 받아야 한다. 당회는 치리회로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참되게 드러내는 회(會)이다. 당회는 철저하게 재직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교회정치, 예배모범에 입각하여 재정을 지출하고 관리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은행이나, 시장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높으신 뜻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돈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개념을 넘어서는 진리의 구현을 목적해야 하는 것이다. 즉 관리 자체가 매우 엄중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오직 당회와 제직회, 그리고 공동의회를 통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분리됨이 없는 집행이 이뤄지도록 온 교회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헌금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교회와 해당 당회, 제직회, 그리고 공동의회가 하나님 앞에서 엄중하게 책망을 받아야 할 일이 된다. 하나님의 뜻과 분리되고, 그분의 영광을 가리도록 교회의 재정을 오용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과 같은 죄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일상에 대해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 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시65:10)라고 증거한다. 즉 헌금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교회 재정의 오용은 남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 마땅히 주님의 몸 된 교회는 헌금을 드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공로에 의존된 것으로서 성도에게만 주어진 특권임을 온전히 가르쳐야 한다. 또한 성도는 하나님께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공로가 자신의 전체 삶을 뒤덮고 있음을 드러내는 신앙의 자태로서 헌금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우리 모두는 깨끗한 재정 관리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지 않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기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헌금을 드리는 것과 헌금을 관리하는 것의 의미를 우리 교단이 따르고 신종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교회정치, 예배 모범에 기초하여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속성에 맞추는 것에만 주의하고 만족해야 할 것이다.
538 no image |김영규칼럼| 수소폭탄과 인류의 자유
편집부
2232 2016-01-12
수소폭탄과 인류의 자유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거나 모르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비참해” 인류가 그렇게 염려하였던 대량 살상무기에 대한 우려와 공포가 한반도에 현실로 등장하였다. 그 현실에 모두가 놀라고 있다. 한반도는 조그마한 반도의 땅이지만, 그래도 외부로부터 온 힘에 대해서나 자체 내의 잘못된 권력의 힘에 대해서 피비린내 나는 작고 큰 저항의 운동에 의해서 그 민족과 그 정체성에 스스로 어떤 빛을 찾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고유성과 함께 겨우 세계의 어떤 시민사회의 높은 진보성과도 발을 맞출 수 있는 기회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시대상으로 접어 들어가는 시점에 미래 인류에게 가장 우려되는 일이 그 반도의 땅에 거부할 수 없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역사에 있어서 치명적이고 세계사에서도 결코 일어나서는 아니 될 사건이 되고 있다. 그런 사건 자체는 지구의 종말이 자체 내에 얼마나 빨리 등장할 수 있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하물며 주변 국가들로부터 가장 이상적 국가로서 핵도 포기하고 주변 국가들이 그런 이상적 국가를 오고 가며 그들이 화해할 수 있는 통로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문제의 해결점은 한 반도 전체의 행복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폭탄을 높이 들고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하는 한 젊은이에게 한반도의 권력의 힘을 다 주고 마음대로 평생 행복하게 살도록 하거나, 한반도 전체 구성원들이 한 젊은이와 모두 싸우든지 아니면 한 사람을 제외하고 북한 주민들의 마음들을 돈으로 전부 사는 일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변 국가들은 속으로 한반도 전체가 서로 간에 자폭에 의해서 사람이 없는 땅으로 바꾸어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분명히 답이 지금 그런 방식들에만 있다면, 한반도 구성원들이 한꺼번에 뛰어 들어 그런 긴급한 문제를 가장 끈끈한 협력방식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빨리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선례는 세계로 빠르게 퍼져 가는 바이러스 전염처럼 더 이상 빨리 퍼지지 않도록 세계의 모든 구성원들도 협력에 있어서 집중도를 높인다면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도 갑자기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유를 어렵게 쟁취했다. 그러나 자유는 이상한 것이어서 자신이 스스로 진리와 자유의 이상을 가지고 지키지 않으면, 쉽게 빼앗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실 때는 자신의 가장 자유로운 품격들에 의해서 자신의 무한한 자유를 완전히 숨기시고 피조물에게 가장 큰 자유가 우리의 것이 되도록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다. 피조물에 주어진 자유의 멋 중에 어떤 강제 때문에 진리를 위해서 또 더 높은 자유를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그 멋진 자유에 대해서 창조자가 그 보증으로 있는 것이 인간 자유의 멋있는 부분이다. 그런 자유의 멋은 피조물들 간이든 사람들 사이든 서로 자유가 극대화되도록 그 자유를 지켜주는 데 그 과제가 있을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 발견되어 이용하고 있는 전기 에너지에 대한 자연의 비밀처럼 핵분열 에너지나 핵융합 에너지의 비밀은 아주 귀중한 자연의 비밀이다. 그 비밀들이 바로 지금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 냈다. 인간에게 지나친 욕심만 없다면 물분자를 이용하는 것보다 중수소 액체를 연료로 하여 핵융합 에너지로 이용하지 않고도 더 높은 전기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수소 액체든 삼중 수소 액체든 다른 모든 지구의 원소들처럼 귀중하게 간직해야 할 지구에 남겨진 선물들이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 남긴 삶의 조그만 유산들과 생산물들 및 그들의 지식을 싫은 많은 유산들은 그 자체로 다 모아서 미래의 인간 자산으로 활용하고 귀중하게 다루어서 인간 생활의 가치를 높이는데 사용이 되어야 한다. 자연 자체는 참으로 쓰레기를 남기는 일이 없다. 인간 생산의 나머지들도 실제로 쓰레기들이 아닌 것도 많다. 지금 차가운 우주에 의해서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우라늄 등을 고농도로 모아서 어떻게 일순간에 자연과 생명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소모해 버릴 수 있는 것인지! 어쩌다가 발견되면 최고의 보석으로서 간직을 해도 모자라는 희귀 원소들을 어떻게 쉽게 없이해 버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인간의 역사적 지식 생산물들이나 자원 자체들은 우리가 소중하게 보호해야 할 자유 자체만큼이나 귀한 것들일 수 있다. 우리의 진정한 자유의 확대는 지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보존이나 그 건전한 활용들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그렇게 복합적인 자유의 쟁취를 위해서 우리 자신들과 싸우고 그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한꺼번에 힘을 모을 필요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역사에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로 분석이 되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은 특별히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생명을 주신 자를 버리거나 모르고 행동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물을 담을 수 없는 토기들이 되어 그들을 스스로 파괴하는 웅덩이를 파는 일이었다는 사실(렘 2:13)에 있었다. 그런 실수들을 지금 지구인들이 많이 하면 할수록, 먼 시간을 두고 보면 서로 간에 피해로 돌아올 것이라고 것은 뻔한 것이다.
537 no image |목회칼럼| 확증편향(確證偏向)_정요석 목사
편집부
2613 2015-12-29
확증편향(確證偏向)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신자들은 첨예화된 정치적 사안에 흥분하지 않고 완충제 역할 해야” 보수적이라 일컫는 서초구 서초동에서 10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이분들의 논리와 정서가 무엇인지를 10년 동안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는데, 얼마나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자들인지 모릅니다. 그 후 동작구 상도동에 조그맣게 교회당을 지어 7년 전에 이사했습니다. 서민들이 많이 사는 상도2동에서 7년 동안 목회하며 이분들의 논리와 정서도 자연스럽게 접했고, 역시 이분들 또한 국가와 민족을 크게 사랑함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저는 보수와 진보에 속한 이들이 모두 기본적으로 국가와 국민 전체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예전보다 이분들의 주장이 어떠하든지 안심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보수와 진보가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보는 공통점은 확증편향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는 바로 받아들이거나 찾아다니고, 그렇지 않은 정보나 뉴스는 아예 보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 상대방이 그러한 주장과 정서를 갖는지 살피지 않고 처음부터 무시해버립니다. 자신들만 옳고, 상대방은 척결해야 할 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반대편의 주장과 논리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펴는 사람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처음부터 전혀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비판하고 거부하는 이들은 존중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 영생교에 빠진 이들은 동료가 죽었을 때에 그가 살아날 것이라며 관찰일기를 썼는데, 시체가 부패 때문에 변색되는 과정을 부활의 조짐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미선교회에 빠진 이들은 종말이라고 확정한 날 며칠 전에 지구에 접근하는 혜성을 보면서 천사들이 자신들을 데리러 지구에 오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확증편향에 빠지면 자신들의 주장과 논리를 무너뜨리는 현상마저도 자신들의 논리 강화에 사용합니다. 별의별 주장과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그에 따라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해야지 우로나 좌로나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참된 신자는 의도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기사를 같이 봐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주장과 가치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이것들을 재단(裁斷)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투표를 할 때도 특정 정당과 이념에 매몰되기에 앞서 성경의 내용에 근거하여 종합적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자신의 정치와 이념의 성향에 따라 필요한 증거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정치와 이념 자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들에 설교하러 갔는데, 드물기는 하지만 간혹 극우와 극좌에 해당하는 기관지가 교회 주보와 교단 신문과 함께 나란히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극우와 극좌의 대변지가 어떻게 나란히 놓여있을 수가 있는지 참으로 기이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지라도 함부로 그것들을 성경과 교회의 권위와 같게 놓을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정치인들의 헛된 진영논리와 약올림과 편가르기 등에 빠지면 안 됩니다. 오히려 신자들은 성경에 의거하여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의 속성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이들의 농간을 오히려 비웃어야 합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보수와 진보의 신문을 동시에 살피며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신중히 살펴야 하고,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몇 달 후나 몇 년 후까지 차분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과서 국정화와 같은 사안으로 국민들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할 때 신자들은 흥분하지 않고 완충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함부로 어느 한 편을 목사와 교단과 기독교의 이름으로 편들어서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은 어떠한 사안이든 인터넷에 떠도는 선동적 내용에 휩쓸려 함부로 견해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신자들은 자신의 확증편향에 빠져 가볍게 그 내용들을 퍼 나르면 안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누구보다 신중해야 하고, 무엇을 주장하든 미움과 분노가 제거되어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낸다는 자세가 앞서야 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영원히 거합니다. 국가도, 민족도, 지연도, 학연도, 혈연도 넘어서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 발 딛고 살지만 영원에 잇대어 사는 자입니다. 신자는 보수와 진보의 논객들에게 심판받지 않고,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습니다. 신자들은 현재의 상황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빠져야 합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길은 평탄하게 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536 no image |목회칼럼|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는 말의 의미_노승수 목사
편집부
5423 2015-12-29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는 말의 의미 <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 “성경 해석은 항상 우리의 삶과 순종을 동반하는 우리의 세계관”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eschatology precedes soteriology)라는 표현은 성경신학계의 거장 게르할더스 보스가 했던 말이다. 이 말은 성경신학적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이 조직신학으로 분해되는 순간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은 좁은 의미의 장차 일어날 일을 가리키며 최종적 종말의 개념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머나먼 우주 저 너머에 있는 별들을 허블 망원경으로 당겨서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는 것처럼, 최종적 종말을 염두에 둔 현재의 삶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원’이라는 말 역시 구원의 적용, 곧 내 삶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제대로 이해되려면 현재의 맥락으로는 어렵고 미래적 사건으로 종말이 현재를 사는 방식으로 우리 삶의 현존 가운데 들어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종말’과 ‘구원’에 관한 의미 이해를 가리켜 ‘종말론적 사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구원 계시에 대한 이해의 담보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실현의 방식은 항상 잠재태에서 현실태로의 이행이라는 성질을 가진다. 즉, 상수리나무는 항상 도토리라는 잠재태를 통해서 현실태로 구현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경륜 속에는 도토리보다 상수리나무가 먼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림에 대한 구상을 이미 마친 것과 같다. 화가의 창작 세계 속에는 이미 모든 구도가 완성되어 있지만 이 완성된 그림의 구도는 작가의 창작을 통해서 첫 번째 붓의 터치로부터 작품의 완성이라는 최종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미 화가는 그의 내면세계 속에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있다. 창조와 구원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창조와 구원을 섭리적 영역에서 볼 때 창조와 구원이 종말보다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의 시현자, 즉 하나님의 세계라고 하는 초월의 세계 속에서는 ‘종말’이 먼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는 표현은 성경의 이해와 관점을 단순히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 적용론적 관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함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구원 적용론이라 함은 ‘구원의 서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원의 서정 곧 부르심에서 영화에 이르는 이 과정에 대한 관심은 전적으로 인간의 주관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이미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신학자들이 이 과정에 대한 치밀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일치된 견해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 ‘구원의 서정’이 우리 영혼에 필요한 것임은 틀림이 없지만 실제 하나님이 성경에서 의도하신 것과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진행될 수 있음을 보아왔다. 이처럼 구원의 서정을 엄밀한 방식으로 그 순서를 확정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 주지 않는 것이다. ‘조직신학’에 편중된 사고의 위험은 바로 ‘계시’보다 ‘이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다. 실제로 ‘조직신학’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말하고 있는 것보다 항상 두서너 발자국 앞서서 나가곤 한다. 종말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정암 박윤선의 말씀처럼 ‘계시의존사색’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 계시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내고 있는가? 성경은 구원사라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진술이 되어 있다. 이것을 흔히 ‘구속사적 관점’ 혹은 ‘언약사적 관점’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보낸 편지를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읽어야 가장 정확히 읽을 수 있다. 편지를 받는 사람 스스로의 관심사에 대한 지적 혹은 정서적 함몰은 실제 의도를 왜곡하기도 한다. 예컨대, 교회 청년부에서 마니또 게임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 자매가 한 형제의 마니또가 되었다. 자매는 그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에게 편지 말미에 사랑한다는 인사말을 남겼다. 그런데 형제는 평소 이 자매를 몹시도 흠모하고 있었고 그로부터 받은 편지는 마치 하나님의 계시와 같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말에 정서적 지적 함몰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자신을 남자로 사랑한다고 확신에 빠진 것이다. 이처럼 보낸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구원 계시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곡해 내지 오해 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바라볼 때 늘 이 종말의 최종적 완성을 염두에 두고 현재를 생각해야 한다. 이 종말은 심판적 의미를 포함하며 거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경륜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다. 보스가 종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이런 함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이 구원에 앞선다’는 표현은 성경 계시를 해석하는 하나의 해석적 툴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해석적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고 해석이 항상 우리의 삶과 순종을 동반하듯이, 우리의 세계관이 된다. 이를 ‘종말론적 사고’ 혹은 ‘구속사적 사고’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종말’은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최종 계획과 구원의 경륜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신학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해석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큰 그림을 마음에 담고 현재의 삶을 해석해야 한다. 마치 머나먼 우주의 별을 망원경으로 줌인(Zoom in) 하듯이 종말의 완성을 현재 우리 구원의 문제로 당겨 와서 우리 삶을 해석하고 그 위에 순종하는 삶이 곧 종말론적 신자의 삶이다.
535 no image |신앙칼럼|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_나택권 장로
편집부
2278 2015-12-29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 나택권 장로, 호산나교회 은퇴장로 > “신자들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행위조차 없도록 해야”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조롱을 퍼 붓고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정작 예수님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을 하지만 정작 저들의 삶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믿고 있는 기독교를 타락 시키는 일원이 되었거나 명예를 손상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기독교의 핵심이며 생명인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곧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끼리도 사랑 없이 냉랭하고 비판하고 사람을 차별하고 등급을 나누어 교제하는 판이니 누가 이것을 보고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겠는가? 한 철학자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훌륭하고 이상적인 분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닮지 않았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세상은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이상에 대하여 그렇게 산다는 것이 힘들겠지만 믿는 자들이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자들이 실패하면 곧 저들은 실망하고 말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하게 하셨다(행 2:46-47). 이와 같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더욱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경건한 삶으로 인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핑계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불편과 부덕을 끼치는 자들이 더러 있다는 것에서 문제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일일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도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상적이고 올바른 신앙관과 삶의 태도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찬양도 드리며 또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도 덕을 끼쳐 많은 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내의 여러 단체들을 통하여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인간적인 생각과 계획으로 그 모임을 지속시키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장(場)으로 그 단체를 유지시켜야 한다. 나아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방식대로 예수님을 전파해야 한다. 곧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성경말씀 같이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한다. 저들의 눈이 우리들의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가는데 실패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어떤 것인지, 어디에서 내가 잘 못하고 있는지, 내안에 있는 어떤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리고 흠집 내고 희미하게 만들며 더럽히고 손상시키고 있는지를 늘 반문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3-4)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우리의 선행이나 공적, 행위나 수고 혹은 노력에 의해 보증된다면 우리는 완전히 절망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고 지적한 바 있다. 늘 말씀과 같이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완성시키시고 그것을 마치실 것을 알고 바울 사도의 고백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의 걱정, 절망, 곤란, 좌절, 손해, 역경 등과 같이 나쁘고 해악스러운 것 까지도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를 닮으려면 먼저 반드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우리들 신앙생활에서 사소한 죄악까지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소한 죄라고 해서 간과한다면 우리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또한 작은 일까지도 우리들의 거룩한 삶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일에도 주의를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닮는 삶에 방해 되는 것을 찾아내서 죄가 무엇이며 내안에 어떤 사악한 본성이 있는 지를 찾아내서 항상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항상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한 번의 변화가 아니라 늘 새롭게 고침을 받아야 한다. 진정한 변화란 우리 삶과 관계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이루어졌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을 닮고 증거하는 것이다.
534 no image 지금도 가장 효과적인 대안으로서 종교 개혁 정신_임용민 목사
편집부
2500 2015-12-15
지금도 가장 효과적인 대안으로서 종교 개혁 정신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교회는 신학함의 가치와 수준을 높여 학문을 창조의 질서로 되돌려야” 종교개혁자들에게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진리 자체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참되게 알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중세 로마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부패한 종교적 권위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하나님께서 역사에 준 유익과 편리성을 모두 빼앗았던 것에 대한 유일한 답이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은혜는 종교 개혁 이후 로마 교회의 부패한 질서를 깨뜨리고 심지어 인문학적 질서를 넘어서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삶은 참으로 복되게 발전하게 됐다.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문화와 과학의 발전은 창조 이후 역사에 가장 폭발적인 것으로 속도와 질에 있어서 엄청난 것이었다. 문화와 과학의 발전으로부터 나온 인간의 편리함은 모두 창조된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발전과 편리함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함은 아담 이후 가인의 후손과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시켰다. 인간이 만들어낸 유익과 편리함이 마치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호도할 뿐이었다. 이것이 종교 개혁 이후에 산업혁명 이후 세계가 추구하는 공통 견해이다. 이런 문제는 실제로 개혁 교회들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이것은 실로 비참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의 인도하심을 열어 보여준 주체로서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그 은총의 결과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도전을 받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과학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시대가 인간 자체를 물질적이며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는 자기모순과 혼란에 모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실로 과학은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생물학적 보편성으로 떨어뜨려버렸다. 또한 지구에 생존의 대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또 다른 행성을 대안으로 찾고 있는 실정이다. 지구에 양식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천문학적 비용을 우주로 날려버리는 모순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과학이 창조된 세계를 모두 소진했음을 스스로가 자인하는 것이다. 근대 과학의 방식이 20-21세기의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유일한 생명의 터전을 상실케 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로 여전히 사람을 속이고 있고, 앞으로도 동일한 방법으로 속일 것임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지배는 수많은 엔지니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소비하고 망가뜨리는 일 이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들이 발견한 질서라는 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세계와 그 질서를 깨뜨리는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힉스입자는 원래 존재하던 것인데, 이것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자연적 입자들을 파괴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그것도 천문학적 에너지와 비용을 소비해가면서 말이다. 즉 과학의 지배는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 감춰둔 것을 발견하는 방식이 아니라, 깨뜨리고 그것에서 뭔가를 찾아내지만 그것을 다시 자연으로 돌이키고 재생하여 만들 수 없는 방식만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현대 시대는 창조로 돌아가는 길을 버려버렸다. 이와 같이 답을 전혀 찾을 수 없는 혼돈에 모든 과학계는 빠져 들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는 엔트로피를 증가하는 방식을 중지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과학의 시대가 만들어 놓은 너무나 큰 일반 은총의 유익과 편리함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이후 바벨탑을 중단시키신 은총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연에 머물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교회다. 이것은 과학적 과제가 아니라, 교회의 과제임에도 교회는 16, 17세기의 참된 신앙 고백의 가치를 전혀 회복하질 못하고 있다. 오히려 현대적 관점의 편리함을 유지하기 위한 신학을 추구한다. 이것이 인본주의 신학이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엄밀한 참된 신앙고백은 하나님만을 유일한 상급으로 두고, 그만으로 만족하며,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신학을 말한다. 우리는 이 개혁주의 신학이 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이 창조 세계 안에서 발견하고 만들어 놓은 모든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 유일하게 질서를 주신 자로 계신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우리만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학함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렸다. 오히려 하나님을 현대 시대의 언어인 과학의 질서와 산업의 편리함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도 나 몰라라 할 뿐이다. 이 시대에 개혁신학을 말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거룩하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세상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질서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종교 개혁의 정신은 이와 같다. 존재하는 모든 세상의 유익과 편리함이 아무리 극대화 될지라도, 아무리 자극적인 것이 될지라도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교회는 속히 하나님께 대한 경망스런 사변을 버리고, 참된 신앙고백을 회복해야 한다. 이에 기초하여 신학함의 가치와 수준을 높여, 과학과 산업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방식의 질서를 창조의 질서로 되돌리는 길을 보여주는 수준을 회복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의 모든 직원들은 성도들을 이런 개혁정신으로 고양함으로 이 시대에 모든 선한 것의 아버지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에게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 25:6).
533 no image |김영규칼럼| 수학적 합리성보다 더 큰 자연의 합리성
편집부
2566 2015-12-15
수학적 합리성보다 더 큰 자연의 합리성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자연은 인간에게 창조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첫 번째 길잡이” 인간의 언어 소리는 노래할 때의 소리 내는 것과 다르다. 인간이 밖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이미 뇌의 깊은 곳으로부터 말하는 것이 발생하여 벌써 입가에 말들이 맴돌고 있다. 물론 노래하는 소리도 입가에 맴도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중요한 차이는 노래할 때 입가에 소리로서 맴도는 소리들은 감성을 실어 나르지 않는 소리이다. 그러나 뇌가 이상이 생겨서 전체적인 통제성의 상징인 의지와 상관없이 깊은 곳으로부터 감성을 실어 나르는 말소리가 발생하여 밖으로 소리를 내는 현상이 있는데, 그 소리 현상은 의지에 의해서 통제가 되지 않아 당황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생의 태도들이 야기되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깊은 뇌의 회로 중에서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는 감성을 실어 나르는 말소리와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말소리들은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상당히 부정적인 말소리들이 발생하는 현상이 있다. 그런 현상을 분명히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데, 시기에 따라 혹은 개인에 따라 그 효과가 다양하고 그 효과를 나타내는 기간이 짧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 약들은 그 효과보다 더 다른 현상들을 야기하는 부작용들이 더 큰 경우들이 많다. 이런 현상들을 가지고 고통하는 자들이 사회적으로 점점 많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게 심한 징후들로 발전이 되는 경우는 그렇게 치료할 수 있지만, 미묘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들은 그냥 구별됨이 없이 그리고 별 생각이 없이 사회 속에 섞여 살다가 어느 때에 갑자기 어떤 계기로 그러한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현상들이 발생하였을 때, 가족이나 사회나 아무도 막을 길이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쉽게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피해현상들에 대해서 미래 사회는 고민을 많이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좋은 사회와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일은 어마 어마한 과제들을 안고 있다. 법을 세우거나 법에 따라 판단할 때, 사회에서 소외될 수 있는 영역들을 모두 고려하여 가장 종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감성을 실어 나르고 합리성을 실어 나르는 언어현상이 있어 소통이 가능하고 스스로나 소통하는 사회로부터 치명적인 현상들이 회복도 될 수 있다. 그 만큼 언어 생활도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조심해야 할 영역이다. 물론 그런 내적인 인간의 소리 현상이 없이 인간에게 친근하고 적응이 되어 인간의 말들을 잘 이해하는 동물들에게도 우리 인간과 같은 구강 구조를 이식하여 말하는 일이 성공하였다고 할 때, 그렇게 동물들도 그런 감성을 실어 나르는 말들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일상용어들은 영혼과 같은 인간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 모두 해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의 일상용어들은 우리의 감성만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합리성도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런 합리적 언어 현상 때문에 글자들로 표현된 글쓰기에도 그런 합리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수학적 상징들이 표현하는 합리성과 비교할 때, 그 지향하는 형식주의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자연과 같은 현실과 수학적 합리성 사이에는 분명히 큰 괴리가 있다. 우리가 기하학적으로 그리는 선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적인 내용이 포함이 되어 일찍부터 허수를 가정하였고 당연히 그런 합리성을 가진 다른 기호들도 만들어 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라는 개념이 n(n+1) 분의 1이 무한대로 합해 질 때도 같은 수가 된다는 사실을 잘 풀지 못하고 있다. 4분의 1 또는 2분의 1 혹운 3분의 2 그리고 4분의 3 등도 그렇게 무한수로 표현이 되어도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선과 곡선의 관계를 상징하는 “파이“ 조차도 플러스 마이너스 2n-1 분의 1을 무한히 더하거나 뺀 수로 표현이 될 수 있어도 아직 기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수학적 상징들의 비합리성은 미분의 합리성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원둘레 길이를 반지름 길이로 된 방정식으로 이해할 때, 그 방정식을 미분하면 반지름을 1로 하는 ’2파이‘가 그 합리성의 끝이다. 그러나 원의 넓이를 방정식으로 미분하면, 원 둘레 길이로 나와 분명히 어떤 합리성이 증명이 된다. 반면에 구체나 원통의 부피를 방정식으로 하여 미분하면, 그 미분 값은 원 넓이와 다른 표면넓이 값들을 가지므로 높은 차원들이 숨겨져 있는 경우 미분 방정식이 숨어있는 질서를 대표할 수 없게 된다. 소위 3차원 이상에 대해서 미분하면, 그것에 대응된 기하학적인 현실들은 전혀 다르게 이해해야 할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기하학적으로 혼돈이 예상이 되는 곳에 실제 그래픽의 경우에 질서를 생산해 낸다는 사실을 또 다른 합리성(emergency)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그런 합리성의 충돌이 실제 자연적 현실이나 가상적 현실에서 얼마나 큰 괴리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훨씬 깊게 땅 위에 나무들이 자라 퍼진다는 현상이나 태양 주위에 지구가 도는 궤적이 갖는 혼돈의 세계는 그런 괴리들이 충돌이 되는 합리성에 의해서 설명이 될 수 없는 ’자연‘이다. 그런 자연은 인간에게 그 인간들 파괴 마지막까지 무한히 도전을 제공하면서도 창조자 하나님을 아는 첫 길잡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자연으로부터 그 안에 있는 문제들을 쉽게 스스로 풀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 곳에 자신과 그 자연이 파괴되는 일만이 남기게 된다는 죽음의 원리가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532 no image |목회칼럼| 총대의 동등성, 그 기초와 의미_임용민 목사
편집부
2602 2015-10-20
총대의 동등성, 그 기초와 의미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 > “총대는 주님의 음성으로 주님의 법을 따라 발언하는 자세 가져야” 장로교회의 치리회에서 총대는 모두 주님의 종으로서 동등성을 갖는다. 연령이나 교회의 크기와 상관없이 총대는 주님의 종일뿐이다. 이 때 장로교회의 총대들의 동등성은 그들 자신의 자격과 특권에서 나오지 않는다. 또한 교회의 성도 수나, 학력이나, 연령에 의해 차별을 받을수도 없다. 총대의 동등성은 모든 치리회의 동등성에 기초한 장로교회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우리 총회 헌법은 교회정치 제14장 1조에서 치리회의 성격과 관할에 대해 “교회의 각 치리회들은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높고 낮음과 같은 등급은 없다. 각 회의 회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뿐이므로 각 회가 다 장로회의 성격이 있고, 동등한 자격으로 조직한 것이므로 그 권리도 동등하다”고 밝힌다. 여기에 더하여 총회 헌법이 말하는 동등성은 각각의 치리회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경에 총괄하는 교훈으로 우리 총회가 따르고 신종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그리고 교회정치와 권징조례 및 예배 모범을 기준으로 확보된다. 이 같은 사실은 실제로 총회 소집선언서를 보면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총회의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개혁, 현 합신)이라 하며, 총회의 역사성에 의거하여 제66회 총회로 소집한다. 제2조, 우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인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교회정치, 권징조례 및 예배 모범을 우리의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삼는다”(제1조). 이상의 내용은 합신 총회가 1981년 8.10-13, 총회 소집을 준비 기도회를 거쳐 (20여노회, 1백여 목회자) 총회 소집 선언문으로 발표한 내용 중 일부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에 소속된 모든 치리회의 총대들은 이와 같은 신학적 근거에 기초한 동등성을 갖는다. 이것에 근거해서 합신 총회의 모든 치리회는 당회로부터 파송된 총대나, 노회로부터 파송된 총대를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이들을 파송한 권세가 모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권세를 가진 존재로서 모든 총대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따라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고, 그에 따라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합당하게 억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회원이 교회가 크다고 해서, 그간 큰 업적이 있다고 해서 다른 총대를 억압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언사를 함으로써 죄를 범했다면 해당 치리회는 엄히 책벌해야 한다. 각각의 치리회에 파송된 총대는 개인 자격으로 노회나 총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범죄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어떤 총대가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준거하지도 않고, 다른 총대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발언으로 죄를 범하는 행태를 노회나 총회의 의장이 묵과하고 어떤 결의를 했다면 이것은 치리회의 성격을 상실한 결정이 된다. 왜냐하면 총대들이 모두 모인 본회가 최소한의 기준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벗어난 것을 방기한 것이며, 성경이 말하는 질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회나 총회의 결의는 그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결의 과정에 있어서도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진리의 말씀,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일치해야 한다. 반대로 모든 치리회가 총대를 주님의 종으로 존대하는 방법은 오직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대로 판단하고 발언하도록 돕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각각의 치리회의 의장은 이런 차원에서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능숙한 자가 돼야 한다. 이런 자격을 구비한 의장이 총대들의 발언을 잘 살펴야 하고, 또한 모든 총대들도 같은 기준에서 본회의 모든 결정들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모든 총대들은 성경과 참된 신앙고백의 보호를 받고, 그 터 위에서 모든 지교회를 살피는 일에 수종드는 것이 된다. 이런 내용들은 실천적으로 노회나 총회의 의장을 세울 때,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으로서 성격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때 의장은 명예직도 종신직도 아니다. 치리회의 의장은 파송된 모든 총대들과 동일한 총대로서 회의를 진행하는 권한을 회의가 진행될 동안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일 뿐이다. 일예로 노회나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 치리회의 의장은 자기 마음대로 의장석에서 회의 진행과 관련한 발언 이외에 말을 할 수 없다. 의장이라 할지라도 총대로서 발언을 해야 한다. 또한 발언을 하고자 할 때에도 본회의 허락을 받아야 발언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총회의 의장이라 할지라도 총회로 모인 치리회에 종속된 존재인 것이다. 총회의 의장이라고 해서 다른 총대들보다 높은 자가 아니라 회의 진행을 섬기는 수고를 맡은 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모든 치리회는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이나 권위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없다. 노회와 총회의 총대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교회정치, 권징조례 및 예배 모범을 우리의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삼는다”고 고백한 총회 소집선언서를 기초로 하여 자신들을 살펴야 한다. 따라서 총대들은 자신의 명예나, 연령이나, 교회의 크기에 의존해서 발언해서는 안 된다. 성경과 성경의 교훈에 총괄한 것으로 우리 총회가 받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근거해 발언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발언하는 총대가 있다면 그가 아무리 연소한 자라할지라도 모든 총대들은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주님의 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531 no image |김영규칼럼| 극단적 회의주의 시대에 교회가 갈 길
편집부
2885 2015-10-20
극단적 회의주의 시대에 교회가 갈 길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개혁은 진리를 가장 바르게 세웠던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것” 칼빈에게 있어서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의존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진정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더 풍부해 질 때 비로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며 역시 다른 피조물들이나 우주에 관한 지식도 더 잘 알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근대의 합리적 정신으로부터 자란 논리에 의하면, 자연의 비밀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실험정신과 거기로부터 이끌어 낸 거부할 수 없는 지식들이 큰 거품 이론들을 지나 멀리 쌓게 되는 지식들에 의해서 조금씩 벗겨진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상호 엄밀하게 비판적인 긴 검증에 의해서 쌓아진 지식들도 이제 겨우 검증될 수 있는 지식에 제한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고전적 화석연료들을 대체하기 위해서 물에서 직접 전자들만을 끌어내어 전기를 생산한다면, 물 1g 안에 대략 수소이온인 프로톤들이 10의 24승 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프로톤들이 다른 원소들에게로 이동하여 그 프로톤들의 수보다 더 많은 전자들을 끌어내 지금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전기 생산의 결과만을 이용할 뿐이지 거의 1.5 피코초로 이동하는 프로톤들의 이동을 직접 거리에 따라 관찰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다만 프로톤들의 위치를 변경시키는데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가장 짧게 펨토 초 단위로 생산되는 복합물질로부터 나오는 X선이나 혹은 가시광선보다 약간 긴 적외선 파장을 이용하여 겨우 시간 상 원자들 사이의 간격보다 더 짧은 시간 간격에서 생길 수 있는 변화를 감지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그 위치나 이동들을 추론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직접 그 이동 자체들을 위치적으로 일어난 그대로를 사진으로 찍을 수는 없다. 즉 공간의 길이를 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와 같은 경우는 거시세계의 경우에 더 분명하다. 즉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는 시간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먼 은하계와 지구와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시간으로만 측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객관성에 비해서 지금 시간만큼 불분명한 것은 없다고 할 것이다. 가속과 등속이 있는데 왜 시간이 없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그런 개념들의 실재 현상은 힘이나 운동, 운동의 방식들 및 차원과 같은 비약적 질서 등으로도 설명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많은 거품들로 남아 있는 물리학이나 화학의 근본적 이론들을 낱낱이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현대시대의 회의주의는 지금 과학에서 근본적으로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다른 과학들의 객관성은 더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거의 인간문명과 문화와 관련된 인간론적인 객관성에 불과하다. 경제지표들이나 행복지수와 같은 사회학적 지수들은 그런 대표적 인간론적인 객관성의 예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성경과 교회는 그 진리성에 있어서 그와같은 인간론적인 객관성을 근원부터 철저히 비판해왔고 신적인 답으로 제시된 죽음의 문제, 죄 문제, 신적 은혜의 내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답들을 모든 세상 앞에서 선포하여 왔다. 그렇기에 미래 사회에 대한 대비로써 죽음의 문제, 죄 문제, 신적 은혜의 근본적 성격에 대해서 현존한 인간론적인 객관성으로부터 기독교적 진리성을 더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현대사회에 깊은 뿌리로 자리잡을 수 있는 극단적 회의주의를 막아야 할 것이다. 현 시대의 교회는 과거의 어떤 역사적, 지역적 교회들보다 그 사명이 깊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 사회 앞에서 교회의 고유한 기능들이 이제 국가의 기능들 안에 조금씩 흡수되면서 과거의 역사적 교회들의 모범을 따를 수 없는 위기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교회가 모든 미래 사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오래된 참된 진리를 가진 자로서 지금 예측이 가능한 극단적 회의주의에 대한 방어를 다른 기구들이나 영역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직접 그런 회의주의가 뿌리를 두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교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서로의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값진 인간의 고귀한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의 중요한 골격이다. 극단적 회의주의가 점점 강해지는 미래사회에 교인들의 수가 세계적으로 줄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세계 안에 있는 어느 교회든 교회에게 중요한 것은 참된 진리를 가진 교회로서 문명과 문화에 적응하고 융화하였던 모든 실수들을 정리하여 배제하고, 성경에 따라 진리를 가장 바르게 세웠던 교회의 가르침들을 더 철저히 존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가장 좋은 진리들만을 모아 마지막 인간의 극단적 회의주의를 대비하여 성경적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며, 정통개혁교회를 포함하여 과거의 어떤 역사적 교회들도 싸우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서 초인적으로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기존에 교회의 틀들이 그런 일에 방해가 된다면, 교회의 역사나 세계교회 상황을 고려하지 말고 철저히 정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가장 좋은 바른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바른 진리와 바른 교회만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다 행하시고 이루신다고 믿어야 될 것이다. 문제는 지금 내가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문제들만 남아 있다. 그 문제를 쉽게 푸는 방식은 성경에서 흔히 발견된 대로 선지자적인 파수군의 저항적인 강한 외침에 있다 할 것이다.
530 no image |목회칼럼| 현상 너머의 원인_정요석 목사
편집부
2409 2015-09-22
현상 너머의 원인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애매한 것들에 대한 성경적 견해 가질 때 올바로 갈 수 있어” 경제학으로 석사까지 공부했지만, 정작 경제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신학을 한 이후에 갖게 되었습니다. 신학 전에는 너무나 가까운 원인과 결과의 범주 내에서만 경제 이론과 현상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제 이론과 현상을 어느 정도 알았지만, 왜 이런 이론이 나오고,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 더 깊은 이유를 알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현실 예측력도 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경제학에 수요공급의 법칙이 있습니다. 공급량보다 수요량이 많으면 상품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격은 올라가고, 생산자들은 생산을 늘려 공급량을 늘리려고 합니다. 공급량보다 수요량이 적으면 상품은 남아돌아 가격은 떨어지고, 생산자들은 생산을 줄여 공급량을 줄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가격과 거래량이 균형을 찾게 된다는 이론으로 경제학에서 근본원리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런 수요공급의 법칙이 작동되려면 완전시장(perfect market)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소비자나 생산자나 제품의 가격과 거래량 등에 대한 정보를 완전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 어떤 생산자나 원하기만 하면 경쟁에 완전하게 뛰어들 수 있어야 하고, 각 개인은 기대효용을 최대화하는 합리적 인간이어야 합니다. 경제학은 이런 완전시장을 기본적 전제로 하여 소비자, 생산자, 생산요소, 이자, 분배 등에서 균형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하여 달성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필자는 석사까지 공부하며 경제학의 이러한 기본 내용을 알았지만, 경제학이 전제하는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을 지배하며 이해하지 못했고, 겨우 이론들을 이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볼 때 생산자와 소비자가 그 수많은 제품들에 대하여 어떻게 완전 정보를 가질 수 있으며, 또 이미 형성된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독과점이 발생하는데 어떻게 아무나 평등한 위치에서 경쟁에 뛰어들 수 있으며, 다양한 생각과 가치와 기호를 가진 각 개인이 어찌 합리적으로만 의사결정을 하겠습니까? 이론과 현실 사이에 있는 괴리의 존재감과 원인에 대한 인식이 신학을 하며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며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사람은 합리성이란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절대로 합리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합리적인 존재이었지만, 원죄로 원의를 잃어버리며 지식과 의와 거룩에 손상이 생겨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아담이 타락 전에 가졌던 직관도 흐릿해져 올바른 소비판단이 이루어지지 않고, 정서도 왜곡되어 엉뚱한 욕구에 때로 과다출혈을 하기도 합니다. 완전시장을 전제로 한 경제학이 다른 어떤 전제들보다 현실을 더 잘 설명하기는 하지만, 완전하게 현실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합리적 인간들이 완전시장에서 경제행위를 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 균형을 가져오면 좋지만, 현실에서는 공황과 독과점과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개입하여야 하는 영역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점점 커지기까지 합니다. 다시 경제학을 한다면 신학에서 배운 통찰력으로 보다 사람 냄새가 나고 현실력이 있는 논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경제행위와 사회는 어떤 방향을 향해서 나가야 한다는 규범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는 늦게 학문성이 트인 경우에 속하기는 하지만, 성경을 공부할수록, 신앙의 선배들이 축적해놓은 신학을 공부할수록, 일반 학문과 예술에 대해서도 이해와 직관이 증가함을 느낍니다. 요사이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이들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력이 없이 인문학에 빠져들면 오히려 해로운 학문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이 없는 인문학의 공부는 오히려 사람을 드높이며 엉뚱한 자유들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라고 말했던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인문학에 심취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제 목회의 목표들 중의 하나는 저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성도들이 사람과 삶과 사회와 학문 제반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통찰력을 갖는 것입니다. 흐릿하고 애매한 것들에 대하여 성경적 견해를 가짐으로 올바른 방향을 향하여 경쾌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학문하는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지식으로 자신의 학문을 통합적으로 지배하며 논문을 써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물에 새겨놓으신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찾아 발견하여 누리는 데 일조하는 것입니다. 현상 너머의 먼 원인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발이 되고 싶습니다.
529 no image |목회칼럼|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_장대선 목사
편집부
2455 2015-09-08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 장대선 목사, 가마산 교회 > “세계의 원인과 종국을 하나님께로 두는 지식만큼 신앙생활도 일관성 가져“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지식’(knowledge & understanding)은 사실 절대로 중요하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흔히 신앙에서 요구되는 것은 ‘지식’보다는 ‘의지’와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지나 감정이 지식과 무관하게 활동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의지와 감정에 지식이 결여될 때에 흔히 발생하는 것이 바로 오류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지식을 바탕으로 의지에 따른 마음의 감정이 총체적으로 사용되는 복합적이고도 총체적인 헌신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그런 총체적인 헌신에 있어서 특히 지식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지식이 풍성한 만큼 의지와 마음이 풍성하게 동반되기(실감하기) 때문이다. 심미안(審美眼)이 있을 때 예술품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기쁨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의 지식이 풍성할수록 신앙과 삶의 총체적인 적용과 헌신이 동반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개신교 신앙에서 볼 수 있는 무기력과 무능은 개개인으로서의 개신교 신자들의 무지와 개신교 전체의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리트머스의 색깔이다. 그런 리트머스지의 색깔이 어떤 색깔인지를 생각해 볼 때에, 그 색깔이란 한마디로 ‘이원론(dualism)’ 혹은 ‘이신론(deism)’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신자들이나 이교도들은 차치하고 신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대부분의 신앙과 삶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신론의 패턴 가운데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초의 창조주 하나님은 인정하면서도,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은 개별 존재들의 질서와 의지 가운데서 철저한 인과율로 점철되는 것이라는 사고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이 바로 현대 개신교 신자들의 기본적인 바탕인 것이다. 그런 사고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에 세상을 창조하셨거나, 가장 최근에 나(개별인간) 자신을 창조하셨어도, 지금 현재는 나의 의지와 수고, 그리고 나의 지혜와 경륜으로 살아간다는 전제가 실생활에 거의 본능을 이루다시피 한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사고해보면, 창조는 아주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어제, 그리고 오늘,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있는 전적이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능력이요 역사로 있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신자들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실감 가운데서 비로소 총체적인 헌신, 그리고 연보(捐補)가 유발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출생에서만 창조주로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과 시간 가운데서 항상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궁극적인 창조주로서 여전히 역사하시는 그런 창조주이시다. 우리들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 심장의 박동과 폐의 팽창과 수축, 그리고 혈액과 공기의 흐름 정도밖에는 탐지하지 못하지만, 그 모든 박동과 흐름은 우리들 자신의 의지를 원인으로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원인에 둔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소득에 대해 재화와 용역의 흐름까지밖에 추적하지 못하지만, 그런 재화와 용역의 흐름도 수많은 우리들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원인을 두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원인을 둔 것일 뿐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있는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거시적 세계에서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모든 미시적 세계에서나 모든 원인과 종국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만큼 우리들은 신앙과 생활에 있어 철저히 이신론적이지만, 그런 모든 세계의 원인과 종국을 하나님께로 두는 지식의 풍성함만큼 우리들의 신앙과 생활은 더욱 일관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무관하게 혹은 독립적으로 세계가 있었던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하나님과 무관한 미래나 역사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세계 한가운데 있는 우리, 아니 나 자신에게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이 사실을 직시하는 만큼, 이 진리를 실감하는 만큼, 이 실상을 바라보는 만큼 우리들은 지금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였고 창조하시며 창조하실 하나님의 바라는 바 목적을 따라 신앙과 생활로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528 no image |김영규칼럼| 현대 문명에서 교회의 역할
편집부
2905 2015-08-04
현대 문명에서 교회의 역할 <김영규 목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교회는 기초 학문들 훈련 통해서 생산적인 이웃으로 자리매김 해야” 최근 그리스 사태는 현대사회에 와서 한 국가가 어떻게 몰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좋은 예가 되고 있다. 고대국가들 중에 그 문명과 그 문화가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국가로서 그리스 국가 외에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서구 문명과 문화 및 학문에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게 되었을 때, 그 답은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땅과 국가가 지닌 언어의 우수성과 그 언어를 사용한 자들의 지적 생산성에 많은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진리들을 담아내는데 필요로 하는 언어의 우수성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 지적역량의 함유도가 아직 고유한 글자가 없었던 고대 셈족 언어들이나 그림문자와 소리글자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발전한 고대 애굽어보다 큰 장점을 그리스 언어는 가지고 있다. 그 언어의 특성 중에서 관사의 적당한 발달과 관계사의 다양성 및 부정사와 분사 사이의 구별로 인한 언어 사용의 다양성이 큰 장점으로 있다. 더구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새로운 명사들이나 동사들을 구성하여 사고의 질에 따라서 항상 새롭게 생성할 수 있는 점이다. 한국말은 글자 창제로부터 소리글자로 창제되었기 때문에 어떤 소리든 글자로 표현해 내는 데는 우수하지만, 뜻을 함축할 수 있는 새로운 명사들이나 동사들의 생성에는 약간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과 잘 비교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그림글자이지만, 오용하여 외국어로서 뜻을 담을 수 있는 한자어를 빌러 쓰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능력의 발전과 함께 잘 발전할 수 있는 문화와 학문의 언어로서 큰 장점을 가진 그리스 언어일지라도, 예를 들어 신적 호칭으로서 ‘나는 나인 것이다’라는 뜻을 가졌던 ‘여호와’라는 히브리어 언어와 잘 비슷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술어화할 수 없는 실체의 개념인 ‘우시아’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뜻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는 그리스 언어이었지만, 신적 호칭으로서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 인격체(alius)라는 의미가 포함이 되지 않아 어떤 것(aliud)으로서 히브리어 호칭에 그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정도라도 대응할 수 있었던 그리스 언어에 비해서 라틴어들(essentia, substantia)은 더욱 더 경쟁력이 되지 못했던 것은 교회사에 있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교부들 사이에 논쟁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다른 언어를 가진 교회가 역사적 신학적 진리를 표현하고자 할 때, 언어 상 근본 문제들과 언어 상의 문제들을 띄어 넘어 역사적으로 깊게 성찰되어 최소한 오류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남겨진 신학적 용어들의 사용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표현한 언어들은 그 언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 그 언어의 의미를 잘 알고 더 잘 말할 수 있으며,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말씀하신 언어들이란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고 그 언어들의 진정한 의미도 최종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 맡겨져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최근 2003년에 보고되고 2003년 말에 많이 토론이 되었지만 계속 의심 속에 남아 있었던 다섯 퀘크 입자(테타 플러스)가 새롭게 13 테라 볼트에 도달한 스위스 제네바 입자 가속기를 통해서 거의 힉스 입자의 입증 수준 5 시그마를 넘어 9 시그마의 입증 수준에 가깝게 확증이 되었다. 그 입증에 의해서 표준적으로 이해된 강력입자 세계에 대한 이론들도 크게 변경되어야 할 위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반적 원소들에 있어서 양성자들의 수와 중성자들의 수에 의해서 안정된 상태 혹은 불안정한 상태로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아 왔지만, 그 구성인자들인 양성자나 중성자가 다시 어떤 강력 입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고 어떻게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론들이 급격히 무너지게 될 위기에 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창조된 세계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는 그렇게 묘연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행하며 활동하는 세계가 근원적으로 우리가 잘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학문 세계의 이런 상황 하에서 최근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할 내용이 되고 있다. 현대 시대의 수학과 새로운 수학에 기초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및 그 그래픽들은 그 본질을 알지 못하는 창조된 자연세계의 질서를 예측하고 검증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고 있는데, 그런 분야의 학문적 훈련에 있어서 세계의 다른 국가들의 탐구자들보다 경쟁에 있어서 뒤쳐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수학에 있어서 심오한 분야들을 개척해야 앞으로 세계를 위해서 지도자로서 어떤 역할도 하고 다른 이웃들에게 좋고 생산적인 이웃으로 남아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더욱 그리스도인들은 창조된 세계와 그 세계의 비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구원에 대해서 답으로 말씀하신 성경을 소지하고 있는 자들로서 수학과 같은 기초 학문들의 훈련을 통해서 인간이 진정한 사실과 그 진리를 아는데 얼마나 큰 실수들과 오류들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검증해 보아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그가 친히 주신 자연과 같은 선물들이 얼마나 큰지를 조금씩 알아가야 비로소 참으로 정직하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에게 돌려야 할 영광이 더 많아질 것이다. 다른 땅에서는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을지라도, 한국 땅에서라도 교회가 그 이상을 실현하는 땅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527 no image |목회칼럼| ‘교회의 자유’에 관한 단상_임용민 목사
편집부
3019 2015-08-04
‘교회의 자유’에 관한 단상 < 임용민 목사, 새소망교회(충청노회) > “장로교 정치 체제 거부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질서 거부하는 것” 장로교회 정치원리 중에 제2조가 교회의 자유이다. 교회의 자유만큼 현실 교회에서 오용되는 개념도 없다. 이 개념을 가져다가 노회나 여러 모임에서 일부 목사들은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마음껏 목회할 수 있는 자유라고 주장한다. 장로교회에서 정말 이런 식의 교회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헌법은 교회의 자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전조에서 설명한 바 신자 자신의 양심 자유와 마찬가지로 어느 교단이나 어느 교회든지 교인의 입회 규칙, 목사와 또는 회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전 체계를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선포할 자유권이 있다. 둘째, 교회는 국가의 세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국가에 대하여 각 종교 기관의 안전을 보장하며 동일함을 바라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첫 번째 조항, “어느 교회든지 교인의 입회 규칙, 목사 또는 회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전 체계를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선포할 자유권이 있다”고 말한 부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교회의 자유는 가장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선포할 자유권을 말한다. 이에 따라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성도를 교회에 입회시켜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각 치리회에 교회 직원의 자격을 정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의 전 체계를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자유이다. 이 세 가지 내용은 교회를 형성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첫째로, 교인의 입회 규칙은 매우 실천적 성격이 강하다. 이것은 전도한 성도를 교회에 등록하게 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를 택자의 총수에 포함시키는 원리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는 비가시적 교회를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교인의 입회 규칙은 최대한 엄밀하며, 오직 주님께서 정하신 대로 해야 한다. 아무나 교회 형편을 따라, 목사 개인의 의견을 따라, 전도한 사람의 인격을 따라 성도로 입회케 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최근에 무차별적 전도 행위로 인해 성도의 입회 규칙이 완전히 상실된 현실은 이것이 과연 주님께서 성도를 모으시는 방식인가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를 입회하는 규칙은 반드시 공적인 것이라야 한다. 기본적으로 장로교 신앙고백서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는지, 이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고 배우길 원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 일에 충실한 것이 교회의 자유이다. 둘째로, 목사와 또는 회원의 자격 또한 실천적인 성격을 갖는다. 생각을 해보라! 누군가 목사가 되고자 하는데, 주님께서 정하신 뜻과 상관없다고 하면 어찌하겠는가? 분명 목사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목사가 되는 자격을 주님께서 정하신 대로 엄중하게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당회의 추천과 노회의 시험을 통해 신학교에 위탁 교육을 받고, 총회의 시험을 통해서 강도사로 인허 받고, 교회의 청빙을 받은 자로 목사가 되게 하는 공적인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 일련의 모든 과정은 단순 행정적 과정이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은 목사가 되고자 하는 소원하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공적 과정을 거치지 않는 자에게 목사의 자격을 허락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삯군으로 채우는 것이 될 뿐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의 직원을 세우실 자유를 박탈하고 찬탈하는 것이 될 뿐이다. 이에 따라 장로교 각 치리회, 즉 당회, 노회, 총회의 회원 자격을 아무에게 줄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유명하고 권세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될 수 없다. 당회의 회원은, 일정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지교회의 공동의회의 투표를 통해 선출하여, 노회의 시험을 통해 안수 받은 치리 장로와 목사가 된다. 노회 회원의 자격은 목사와 각 지교회의 당회로부터 총대로 파송된 장로가 된다. 총회의 회원 자격은 각 노회의 총대 투표를 통해 선출된 목사와 장로 총대에게 있다. 이와 같이 회원의 자격이 엄격한 것인데, 각 치리회가 소견에 옳은 대로 회원의 자격을 남발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에 위배되며, 더 이상 주님을 수종드는 치리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치리회에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방종일 뿐이다. 셋째로, 교회는 교회 정치의 전 체계를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선포하는 일을 엄격히 해야 한다. 간혹 장로교 정치 체제를 교회 역사에 나타난 여러 정치 체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 정치의 전 체계는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장로회 정치 체제를 주신 것으로 확인된다. 실제로 성경은 예루살렘 총회(행 15장)와 디모데에 대한 장로의 회의 안수(딤전 4장)를 통해 주님께서 장로교 정치 체제를 통해 교회를 세우셨음을 증거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구체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정치 체제를 역사 속에 상대화 하고 다양한 체제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정치 체제를 거부하겠다는 것일 뿐이다. 즉 장로교 정치 체제를 거부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질서를 미련하다 하는 것이며, 역사의 변화를 따라 언제든지 주님이 주신 것이라도 상대화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과연 주님을 부당하다고 하고 우리를 옳다 하는 자리에 자유가 있겠는가? 이런 자유는 아담이 타락했을 때의 사단이 말했던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은 언제나 주님께서 제정하신 질서를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단의 자유와 주님의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로서 장로교 정치 체제를 선언하는 자유를 포기하길 지금도 공공연하게 종용할 뿐이다. 교회는 위 세 가지 자유를 누림에 있어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또한 장로교 목사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목회의 자유라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깨닫고, 오직 주님께서 주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따라 목회하는 것만이 자유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참된 신앙고백을 벗어난 교회의 자유는 방종이며 자유주의일 뿐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526 no image |목회칼럼|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잘못_김기영 목사
편집부
3275 2015-08-04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잘못 < 김기영 목사, 화성교회 >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서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 사람들이 범하는 과오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큰 과오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는데 안다고 생각하므로 물어보지 않는다. 부모가 자기 아들이 밖에서 하는 행동을 잘 모른다. 그런데 남이 말하는 것을 곧이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는 그럴 리 없어 얼마나 착한 아이인데!”라고 말하면서 이웃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남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다. 나이가 먹으면서 인생을 좀 알게 되면서 사람에 대하여 좀 생각하게 된다. 인생을 늦게 알게 되는지, 그동안 남을 잘 모르면서 아는 줄로 알고 살아온 것이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인 가족으로부터(부모님, 형제, 자매, 남편, 아내, 아이들), 그리고 교인들, 직업상 관계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들은 것만 전부로 생각해 왔다. 또 아직 살아가지 않은 나보다 연상의 사람들에 대하여 역시 안다고 생각해왔다. 가령 이런 말이 있다 “자네도 내 나이 되어보면 알거야.” 젊었을 때 이런 말을 들을 때 속으로 “뭐 꼭 나이 먹어봐야 아나? 나도 짐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이제 나이 먹어 할아버지가 되어 보니 아버님의 나이가 되어 생각해 본다. 내 아버님이 그때 나에게서 ‘참 서운하셨겠다’고 생각이 들고 무척 후회스러운 마음이 든다. 노인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른다고 무시하던 것이 잘못된 행동인줄 알게 되니 무척 괴롭다. 노인들은 현재 돌아가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면이 있으나 인생에 대하여서는 젊은 사람이 들어야 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인생을 보다 먼저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60부터라는 말이 있다. 기술이나 과학 같은 이공학 분야는 젊은 사람들이 뛰어나다고 한다. 첨단을 가는 세상에서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을 만드는 사상은 배운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삶에서 사상이 정립되어 간다고 한다. 그러면 어린 아이에 대하여서는 잘 아는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어린아이들은 이기적이다고 말한다. 남을 배려하거나 양보하는 것은 할 능력이 없다. 할 수 있는데 욕심이 많아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연령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우리 손자 녀석이 엄마가 과자 하나 달라고 해도 인색하게 주지 않는다. 참 못된 녀석이다. 맛있는 것 엄마에게서 받았는데도 “엄마 하나만 줘”라고 하면 엄마에게도 안준다. 아니 그 많은 것 다 먹지도 못하면서 남기고 가면서 자기가 먹기 싫을 때 엄마 먹으라고 한다. 이런 아이를 볼 때 부모는 섭섭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 나이에서는 이웃을 사랑할 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해서 할 수 없다는 것이 에리히 프롬의 주장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아이를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남자 육아를 정부에서 권장하는 것 같은데 꼭 엄마만 아이를 키우느냐 아버지도 아이를 키우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너무 모르는 데서 나온 정책이다. 밤에 아이가 울 때 엄마는 짜증을 내지 않고 끝까지 참고 달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래 참지 못하고 그렇게 귀엽다고 하는 아이에 대하여 짜증을 낸다. 그것은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생리학적으로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 엄마에게는 호르몬이 나와서 아이에 대하여 끝까지 참는다고 한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지 못한 아빠가 아이에 대하여 참지 못하는 것은 남자가 성격이 나쁜 것이 아니라 생리적으로 여자와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무조건 남녀평등이라는 기준에서 세상 직업전선에 동등해야 한다고 하면서 OECD 국가에서 한국이 여성 취업률이 낮다고 말하는데, OECD가 인간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성경말씀인가?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50% 대 50% 동등이어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뇌과학이 발달한 결과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성인이 되기 전 사춘기에는 아직 판단력을 주관하는 뇌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아서 선과 악에 대한 분별이 부족하다고 한다. 미국에서 14살 소년의 살인사건에 대하여 중형을 내린 것이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소년기에는 죄를 죄로 여기는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범죄에 대한 형량을 성인과 같이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기가 지내온 어려웠던 시절을 쉽게 잊어버린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어버린다는 속담처럼, 부자가 된 후 가난했던 시절을 말할 때는 성공담을 이야기 할 때뿐이다. 현재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그렇게도 모를 수 있는가? 지난 정부 때 강북을 강남처럼 잘살게 한다고 뉴타운 정책을 발표하니, 여기저기 온통 뉴타운 붐이 일어났다. 그 결과 집값이 오르고 너도나도 집을 부숴 그 좁은 땅에 5채 6채 지어서 지분을 늘려 나갔고 생전 오르지 않던 화곡동 땅값이 치솟았다. 그런데 땅값이 올라 새로 지어도 남는 것이 없어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뉴타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세가 오르고 살기가 더 어려워 졌다. 곳곳마다 혁신도시를 세워 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시키겠다고 하여 전국의 땅값이 오르고, 그 거품이 10년 째 꺼지고 있다. 돈은 이미 부자들이 가져가고 서민들은 거품만 안고 꺼지니 하우스푸어가 되어 버렸다. 뉴타운이 들어서면 집주인도 개발비를 감당 못해 팔고 이사 간다고 한다. 새로 지은 아파트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다. 서울에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다. 옛날에 지게군도 서울에 와서 잘된다고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파출부를 해도 서울에 와야 일거리가 많다. 어찌하여 서울에는 부자들만 사는 동네를 만들려는 꼴이 되고 말았다. 뉴타운 정책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는가? 이러한 모든 것은 가난했던 시절을 모른 정권을 맡은 사람들의 탁상행정에서 나온 결과이다. 좀 가난한 서민들을 살펴보고 정책을 만들었으면, 전철 한 두 번 타고 TV에서 인터뷰하는 것으로 전셋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서민들의 마음을 알까? 모르면 선거철만 굽실거리지 말고 돌아다니면서 좀 물어 보면 될 것인데 그렇게 물어보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남을 모른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서로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아는바가 적다라고 생각하고 알아가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하자.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옵소서.”
525 no image |목회칼럼| 신자들이 알아야 할 교회의 질서_손재익 목사
편집부
3140 2015-07-21
신자들이 알아야 할 교회의 질서 <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 “바른 교회 세운다는 명목으로 교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 없어야” 요즘 보면 개혁주의 혹은 개혁교회를 말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한국교회에는 늘 그런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에 속한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을 모토로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모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신조로 받아들인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한예수장로회로 표명하고 있는 교단에 속한 교회들의 홈페이지나 주보나 요람 등에는 대부분 이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로 “우리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입니다”라는 내용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모토일 뿐이요, 겉으로 표방한다고 말할 뿐이지 실지로는 그렇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요즘에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기존에 개혁주의를 표방한다고 하는 교회보다는 좀 낫지만, 여전히 기존교회의 부조리한 면들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개혁교회라고 말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배나 직분, 교회질서 등에서 전혀 개혁주의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변질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의 질서가 허물어졌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교회를 옮기고, 아무렇게나 교회를 개척하고, 아무렇게나 교인을 받아주다 보니 교회질서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참된 개혁교회라 한다면 교회의 질서를 바르게 지키려 해야 합니다. 교회 질서의 여러 가지 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교회와 그 지역교회에 속한 성도의 관계 문제입니다. 성도 혹은 교인이라면 반드시 하나의 지역교회에 가입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교회에 가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위 ‘가나안 교인들’이 등장해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하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는 사람,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바 ‘거룩한 보편교회’를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역교회에 가입되어 있다는 것은 그 교회의 치리 아래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지역교회의 치리 아래에 있는 사람은 소속된 지역교회의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그 외에 그 교회의 목사의 가르침과 장로의 권면 등을 통해 배우는 자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 때 성도는 반드시 자신이 소속된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을 받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가 정한 공예배와 여러 모임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지역교회에 속한 회원으로서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속한 교회가 아닌 다른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거나 다른 교회나 모임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의 비성경적인 상황 속에서 부득불 그렇게 하는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당회의 허락이나 목사의 지도를 받아서 참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교회의 질서입니다. 특히 비정상적인 교회나 목사들이 그러한 일을 조장하고 그로 인해 많은 덕을 보았다 할지라도 개혁교회나 개혁파라 자칭하는 목사들이라면 그러한 일들을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평신도 신학강좌’나 혹은 ‘성경적인 신앙상담’들과 같은 유사한 이름을 빙자하여 교회 외적인 모임들을 만들어서 다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자유롭게 참석하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그 내면을 보면 결국에는 참석자들을 자기 교회로 오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직접 대화해 보면 그러한 의도가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기존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빼오는 것을 목적으로 그러한 모임들을 만들고 다른 교회의 성도들이 참석하도록 강조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기존 교회에 있던 분들이 개인적인 사정이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이유로 그 교회를 이탈하여서 개혁교회로 올 때에 받아들이는 것이야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의도적으로 고의적으로 그러한 일들을 꾸미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니며, 양심을 속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른 교회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한국에서 소위 개혁교회라 하는 교회들의 상당수가 ‘수평이동’을 통한 성장이라는 점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과 그 괘를 같이 합니다. 물론 수평이동 자체가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수평이동이라고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년이 흐른 교회에서 대다수가 수평이동에 의한 성장이었다면 심각하게 그 교회의 본질을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개혁교회를 말하고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를 말하는 이들이 그러한 무질서한 행위를 조장하는 일들은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은 그러한 사람들의 유혹에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장 성경적인 신앙고백으로 여기는 분들이라면 의당히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향하는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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