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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no image <문화칼럼> 1인칭 단수-이은상 목사
rpress
3601 2004-04-28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50illu.jpg1인칭 단수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아이 마이 미, 유 유얼 유, 쉬 허 허...' 중학교 때 외우던 인칭대명사들입니다. 인칭대명사에는 1인칭 뿐 아니라 2인 칭 3인칭도 있고 또한 단수와 함께 복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 는 이유는 다 필요해서겠지요? 그런데 예전과 달리 현대인들은 유독 1인칭, 그것도 단수만 자주 사용하려고 합니다. 마치 성경(눅12:16-21)에 나오는 한 바보처럼 말입니다. 바보란 소 리 들어도 좋으니 나 중심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 한마 디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바보가 아니라 죄입니다. 이런 죄를 청교도 목회자 로이 드 존스 목사님은 '시돈형 죄'(삿18:7)라 불렀습니다. 시돈형 죄란 다른 사람 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지만 또한 다른 사람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이기 적인 삶을 말합니다. 이웃을 탐내는 것도 죄이지만 이웃에 대해 관심이 결여 되어 있는 것도 죄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공동체에 관한 현대인들의 소신과는 달리 교회를 다른 사람들과 분리 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개신자들의 단순한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 다. 성경 어디를 보나 교회는 신자들의 결합체로 유기체로 묘사하고 있습니 다. 상호간의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의 헌신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는 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몸 외에도 성도들, 양떼, 가족, 나라, 포도원, 건 물 등 집단적 용어와 표상들로 가득합니다. 오늘날 개성을 높이 평가하고 자 기 완성을 최고의 덕으로 생각하며 자기 이익에만 열중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개인의 문제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구 원을 대신 해 줄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훌륭한 교회의 모형은 가족입니다. 교회는 가족처럼 혼자 가 아닌 구성원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더 염 려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교회는 제외하고 교회의 모형인 육적인 가족에만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쩨쩨할 정도로 말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가정의 달에 더 심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가정의 중요한 강조점을 부각시키는 교회프로그램에 대해 서 약간의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좋은 프로그램들이 가족과 멀 리 떨어져 있거나 아예 가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으로 더 마음을 아파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 안에는 역기능 의 가정들이 너무 많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들에게는 아마도 5월 이 잔인한 달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정의 달이라 할지라도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 중요 하고 영속적인 가족 즉 교회 공동체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프로그램도 계발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도 혈연의 가족처럼 아니 그보다 더 풍성함을 제공해준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교회 안에는 이혼자, 독신자, 소녀가장, 독거노인처럼 가장 강력하게 후 원해줄 가정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는 가정이 있더라도 군인이나 유학 생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 중 가까이 있지만 외면당하는 선지생도들의 아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경제적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고독과 고된 집안 일입니다. 그래도 남편인 선지생도들은 학교에서 새롭게 깨 닫는 지식과 삼각족구 등의 교제를 통해서 신앙과 삶의 의욕이 생기곤 하지 만 선지생도의 아내들은 혼자서 아이양육과 집안 경제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 에 많은 상처와 눈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혹자는 훈련의 과정이라는 명목으 로 이런 아픔들을 당연시 하지만 그것은 먼저 된 자로서의 기득권을 주장하 는 은혜의 왕국 밖의 이야기 같습니다. 가정의 달 5월이 옵니다. 주기도문대로 1인칭 단수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1 인칭 복수 '우리들의 아버지'를 자주 사용합시다. 그리고 '우리 아들, 우리 집, 우리 교회'뿐 아니라 2인칭 3인칭 '너희 자녀, 너희들의 교회, 그녀'의 고민을 위해 헌신합시다. 1인칭 단수는 이제 그만...
63 no image <김영규칼럼> 첨단과학이 범할 수 없는 초자연 현상 영역 (81)
rpress
4844 2004-04-22
http://w ww.rpress.or.kr/files/column/349kcal.hwp 김영규 목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첨단과학이 범할 수 없는 초자연 현상 영역 20세기 초만 해도 첨단과학이라 하면 상식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지금 은 다르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지금의 첨단과학이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로 가면 갈수록 그 혼돈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혼돈이 자연의 법칙이 되 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 각각 극단에서 나타나는 경계선들은 과거 존재론 적, 우주론적, 윤리적 신 존재 증명보다 훨씬 강력한 신 존재 증명의 영역이 될 것이다. 각 극단의 영역에서 차원이 다른 질서의 혼돈적 배후에 대한 우주의 첫 방정 식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계속적이고 끝없는 인자들의 개입이 증명된다면, 그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거시세계에 있 어서 모든 것이 풀려야 미시세계에서 하나가 풀린다는 원리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초자연 영역 분명히 존재해 물론 지향성 자체와 판명성의 오류들로부터 인류가 근원적으로 자유로울 수 는 없다. 미래 과학의 발전이나 문명은 그런 오류들의 적정선에 잘 머물러 있 어야 한다. 그러나 그 오류들로부터 오는 피해가 빠르다는 것은 인간테러나 방사능 피해, 환경오염 피해보다 더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그 런 오류들로부터 오는 피해를 줄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도시문화와 주거환경으로써 말끔한 기하학적 재구성을 피하고 가능하다면 자 연친화적이되 자연에 피해를 주는 에너지 사용을 조금씩 줄여 가야 한다. 다 만 깨끗함은 그런 오류들에 기초하기 때문에 자연친화적 환경일지라도 적절 한 정도에 있어서는 오류들도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 속에서 과학의 조화 찾아야 전통적으로 어거스틴 이래 우리 의식 속에 있는 지향점의 움직임을 가리 켜 '의지'라고 한다. 우리의 지향적 초점(의식의 커서)은 컴퓨터 화면과 같 은 2차원 표면에서 움직이는 커서나 3차원 화면에서 움직이는 시각 초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외부 정보의 개입과 상관없이 우리 의식의 지향점은 항상 움직이는 의지적 커서이며, 동시에 오감을 기점으로 하여 온 피부들을 따라 암묵적 으로 찾는 지향점(tacit searching cursor)이기 때문이다. 시각 역시 단순히 뇌의 시상피질에 3차원의 색상 형상으로 뿌려지는 것이 아 니다. 시각은 눈 위의 이마 중심으로 호로그래프와 같은 3차원으로 뿌려지는 인간투시 시각화면(Human Optical Display)안에 자발적 커서가 있으며, 그것 은 기억을 요구하여 끊임없이 표상들을 띄우면서 무엇인가 찾고 있는 지향적 커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과 함께 암묵적으로 끊임없이 찾고 있는 커서가 단순히 뇌세포들 이나 신경세포들에서 느끼는 정보전달물질들의 비가역적 흐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최근 신경과학의 연구 중에 관심을 끄는 것은 외부정보의 유입과 관계 없이 선행하여 의식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현상 인식보다 의식 앞서 세포 증식의 경우에도 염색체를 끌어들이는 두 극점이 세포 안에 생기기 전 에 외부로부터 두 극점을 유도하는 인자가 들어 와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 다. 인공배양세포 증식의 경우에도 그런 인자를 포함해야 증식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 최근 한국의 황우석 교수팀이 성공한 체세포인 간복제의 경우 비정상적인 방추사 출현의 원인과 세포분열의 분위기를 유도하는 인자들 에 대한 증거들이 실험의 실패와 성공의 과정에서 명쾌하고 충분하게 제시되 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또한 거시세계의 조작기술인 세포융합기술에서 한 세포 안에 있는 많은 단백 질 군들 사이의 정보 이동의 사회적 체계가 갖는 전인적 성격이 인간 지향점 의 초점에 의한 분할의 오류와 판명성 오류에 의해 생략되거나 무시되는 기술 적인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직 풀리지 않은 세포융합의 신비 이런 기술적인 문제는 세포 자체가 갖는 재생력과 생명력에 의존하기에는 너 무나 많은 생명 경시의 치명적인 실패들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생식 복 제'는 금지되고 '치료용 복제'가 허용되어 있다 할지라도 실험 과학이 갖는 세포 윤리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와 동일하게 생기고, 동일하게 기능하며, 동일하게 대화할 수 있으나 영 혼이 없는 그런 체세포복제인간을 우리가 미리 예상한다면 앞으로 사회와 자 연의 혼돈 현상이 더 가중되고 말 것이다.
62 no image <문화칼럼> 가이사 뉴스, 부활 뉴스! - 이은상 목사
rpress
3234 2004-04-02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48mcal.hwp가이사 뉴스, 부활 뉴스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힘들지?'라는 말 가끔은 어색하죠, 그냥 '소주 한 잔 할까!'라고 말해 보 세요.' 요즈음 세인들의 심정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말로도 백 성이 지금 당하고 있는 아픔을 위로 받을 수 없는 우울한 시대라는 말입니 다. 포장마차에서나 사용하는 욕이라도 한번 내뱉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겁 니다. 파병 대상국의 테러가 끊임없는 것처럼 국민들의 상처는 아물 틈이 없 습니다. 특히 우리 국민을 짓누르고 있는 정치적 상황은 너무도 답답하고 서럽기까지 합니다. 탄핵폭풍 이후에도 촛불집회와 정치권의 공방 등 빛과 소리가 멈추 질 않고 있습니다. 정말 피난처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렇게 나라의 위기 가 고조되고 어려움과 문제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에 교회의 임무는 과연 무엇일까요? 국가의 난제들에 대해서 사람들과 모여 대화를 나눌 때 그리스 도인들은 어떤 입장에 서야할까요? 교회는 먼저 사소한 것에 너무 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소하다니요? 나라의 비상사태를 보고 소가 닭 보듯 하란 말인가요? 물론 그런 뜻이 아닙 니다. 교회가 사회참여를 거부하자거나 혹은 그것이 전혀 성도들에게 중요하 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정치사안에 안이하게 대처하거나 침묵하자 는 말도 아닙니다. 교회의 정치참여는 죄가 아니며 아니 오히려 냉담한 것 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사회 참여에 적극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일에 교회가 지나치게 몰두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 다. 그러므로 정치참여를 사소하다고 표현한 것은 비교해서 볼 때 덜 중요하 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정치라는 주제로 신자의 대화의 중심을 장악 당해서 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관심을 가져야할 일을 놓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마22:15이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은 세상대로 교회는 교 회대로 각자 전공과목이 따로 있으며 각자의 중심역할을 조화롭게 잘 해나가 라는 것입니다. 요즈 음 교회의 모습은 전공과 부전공이 바뀐 듯합니다. 가령 이 시대와 나라 의 잘못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는 제사장으로서의 책임이 있다는 말이지 법적 책임을 전부 지는 범죄자는 아니 란 말입니다. 법적 책임은 당연히 정치인들에게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교회 가 나라 일에 대해서 법적 죄인처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는 것입 니다. 로마의 멸망을, 6.25동란이나 IMF와 같은 위기를 교회의 책임으로 돌 릴 수 없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나라가 신정국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한편 교회가 정치에 대해서 지나치게 몰두해서는 안될 이유는 정치나 국가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정된 국가는 여러 가지로 국민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 니다(딤전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정치가 우리의 영원에 대해서 책임져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고요하고 평안한 삶 과 함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딤전 2:4). 때로는 이 구원을 위하여 나라의 평안을 깨기도 하십니다. r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에 어려움이 올수록 오히려 하나님나라라는 주제로 입술 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나라의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원인이 사실 하나님 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죄로부터 기인한다는 삶의 원리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과 같이 나라의 위기 때에는 가 이사의 뉴스보다 부활뉴스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국민이 충족할 수 있는 길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진리를 전파해야 합니다. 기자나 앵커맨이 가이사 의 뉴스를 전하는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뉴스를 영적 기상도와 함께 보 도해야합니다. 세상이 총선 등 쟁점이 될만한 큰 사건이 있을 때 집중 보도 하는 것처럼 교회도 부활절과 같은 큰 사건이 있을 때는 특집 뉴스를 다루어 야 하지 않을까요?
61 no image <김영규칼럼> 미래를 결정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rpress
3759 2004-03-17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47kyk.hwp 미래를 결정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김영규 목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기독교는 인간의 욕심이나 명예 혹은 이상을 우상화하여 섬기는 주술종교도 아니요 인간의 윤리나 정의를 신격화하여 섬기는 합리적 종교도 아니며 인간 의 저항정신을 신격화시켜 섬기는 저항적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 교이다. 자연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자연 안에 그의 사랑의 대상을 두시며 그 대상을 위하여 창조자 자신을 선물로 주시는 그런 역사적 계시종교이다. 오히려 그 창조자는 그의 사랑의 대상을 만드시기 전에 대상에 대해서 사랑 의 내용과 은혜의 내용을 정하시사 창조를 통해서 그의 사랑하는 대상을 위 한 사랑과 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처음 보여 주신 것이다. 피조물 안에 있 는 자율적 독립성이나 의지의 자유성은 그런 은혜의 내용이 얼마나 특별한 형 식을 취하여 주여지는 지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인간의 안식의 처소인 자연의 창조도 그의 사랑과 은혜의 내용의 시작 에 불과하고 창조와 같은 능력으로 더 높은 가치로 보존되고 통치되고 있는 것이 우주와 인류의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무로부터 존재하였지만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향하여 가까이 오시며 오실 수록 점점 스스로 그로부 터 멀어져 가게 하는 인간의 죄나 그로 인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넘어지는 많 은 인간의 역사의 내용, 즉 속임과 고통, 노동과 죽음 등은 아직도 계속된 은 혜와 사랑의 수단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향하여 가치로 요구하시는 것은 그렇게 사 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그에게 생명을 주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서 알 고 그가 원하시는 가치와 수준으로 인간이 창조되고 재창조됨으로 더 높은 은 혜의 내용을 누리는데 있다. 인격체를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상급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주어지는 방식은 자신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의 모든 짐을 지 시고 그가 미처 선물로 깨닫지 못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 준비하시며 그가 인 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역사하심으로 주시는 방식이다. 그런 은혜의 방식 앞 에 우리의 수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먹고 사는 독특한 삶으로 초대되어 나그네로 살도록 초대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가치를 기대 하지도 않고 모방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민족단체나, 민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우는 자선단 체나, 세상가치를 위해서 거리 앞에 그리고 국회 앞에 시위하는 운동단체도 아니다. 조그만 가치를 위해 생명을 걸고 있는 관원들이나 그들과 거의 동일 한 가치를 위해서 관원들과 충돌하여 시위하는 군중이나 똑같이 좋은 가치를 생산할 만한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들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그렇게 긍 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아무리 진홍같은 붉은 죄를 범한 자들도 진정으 로 용서할 수 있고 아무리 깨끗한 양심을 가진 자도 예리하게 비판할 수 있 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다만 관원들과 국민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양심 앞에 자유로운 자 가 되라고 권하고 싶다. 법을 지키는 것이나 법을 만드는 양심의 자유를 꺾 을 수 없을 때 나라 안에 선과 평화가 정착이 된다. 대화와 토론은 문제를 해 결하는 창조적 직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일에는 결단의 시기가 있고 그 처리는 신속하고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무관심과 무기력, 다수의 횡포 그리 고 이어지는 폭력 앞에 히틀러 시대나 레닌의 시대를 기억해야 한다. 모두가 거시적 안목을 갖기를 바란다. 모두가 이런 위기를 통해서 개인의 미 래보다 국가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 한 다. 민주주의 제도는 희랍의 자유도시국가의 정치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고 탄 핵소추는 영국에서 의회민주주의가 발달하였을 때부터 있어 왔기 때문에 새로 운 것이 아니다. 국민이나 관원이나 의회가 공정한 법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지금의 시점에서 그 법 결정의 공정성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다만 법은 약자에게만 공의 가 실천되고 강자에게 공의가 왜곡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예언 이 가능하다면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모두가 미래를 결정하신 하나 님을 두려워하기를 바란다.
60 no image <문화칼럼> 웰빙족-이은상 목사
rpress
4397 2004-03-03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46mcal.hwp웰빙족 이은상 목사/동락교회 현대의 바쁜 일상과 인스턴트 식품에서 벗어나 '잘 먹고 건강하게 살자'는 라 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 웰빙족은(Wellbeing 族) 건 강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한 새로운 인류일까요 아니면 상업주의가 가공해 낸 정체 불명의 변종일까요? 그 날이 가까울수록(히10:25) 인류의 웰빙문화 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 음료보다 천연쥬스를, 커피보다는 녹차를, 위스키보다 건강에 좋다는 와 인을, 일반 채소보다 유기농을, 대중목욕탕보다는 찜질방을... 그야말로 이 시대는 비싸더라도 '닭 대신 꿩'을 찾는 웰빙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습니 다. 웰빙은 의류, 채소, 주택, 수면법 등 의식주는 물론 스포츠, 음악, 문 학, 여가, 종교(뉴에이지)등 문화 전반에 걸쳐, 특히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으 로 건강에 대해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로즈메리 향처럼 스며들고 있습 니다. 그렇다면 유행을 타고 오는 이 손님을 그리스도인들은 어 떻게 맞이해 야 할까요? 먼저 이 손님을 반길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건강을 살피지 않고 앞 만 보고 달려가는 인생들에게 웰빙은 심신의 조화를 제공해주는 쉼표입니다. 또한 웰빙은 그동안 물질적 가치나 명예만을 행복의 척도로 삶아온 현대인들 에게 느낌표입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레포츠와 근교로 떠나는 가족여행이라든 지,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스파를 즐기는 것은 자연환경과도 이웃과도 가까 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굳이 웰빙을 외면할 이 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웰빙문화에 대해서 또한 긴장할 필요도 있습니다. 왜 냐하면 웰빙은 신자의 우선 순위에 위협을 주기 때문입니다. 웰빙이 단순한 물질적 가치보다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육 에 관한 지나친 관심이 영혼을 소홀히 여길 수 있는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즉 신자의 우선 순위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들 의 모습을 점검해 보면 영혼에 좋다는 큐티는 걸러도 몸에 좋다는 반신욕은 거르지 않고 바쁘면 족탕이라도 합니다. 성경보다 연수기 , 정수기, 공기청정 기에 더 마음을 빼앗길 위험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신자가 웰빙문화에 대해서 조심해야할 이유는 그것이 청지기 정신을 위 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외해야할 대상은 우리 몸이 아니라 우리 몸을 지 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즉 생명경시(生命輕視)도 문제지만 생명경시(生命驚視) 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레포츠 교회도 있고 웰빙 교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가 풀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물론 예수께서도 당시 5천명이 넘는 사오정과 이태백들 에게(눅9:12 저녁 늦도록 광야에 남았던 것을 보면 그들은 실업자가 아닐까 요?) 은혜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이들이 다 가버렸다 는 것입니다(요6:66). 이 사실은 웰빙은 좋지만 십자가는 싫어하는 군중들의 미묘한 심리가 결국 진정한 경외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잊게 만든다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대가 지나고, 단지 먹고살기 위한 문제가 아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따지는 시대가 왔다고 합 니다. 그렇다면 진 정한 삶의 질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서 헬스니 요가니 찜 질방이니 스파니 아로마테라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 게 단련시킨 건강한 생명을 오늘밤 도로 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눅12:20). 그러므로 이 시대에 가장 탁월한 웰빙은 우리 몸과 영혼의 쉼을 위하여 마련 된 멍에의 자리로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마11:28). 웰빙족이 지나가면 다음에 어떤 족이 나타날까 궁금합니다. 혹시 얼짱, 몸짱, 돈짱 등 정신 못 차리고 사는 '짱족'이 등장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의 공약처럼 예수를 떠난 문화는 언제나 '네 시작은 창대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미약하 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9 no image <김영규칼럼> 자연과 역사 속에 축적된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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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2 2004-02-19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45kcal.hwp자연과 역사 속에 축적된 '은혜' 김영규 목사/개혁주의성경연구소 우리가 광자를 절대온도에 가까운 온도에서 정지시켜 보면, X선이나 감마선 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낮은 에너지의 광자가 입자처럼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리고 그 이동을 다시 확대해 보면, 비선형적인 파동의 골이 겹쳐 있 고 그 겹친 것들이 에너지 끈처럼 다시 파동의 골을 이루어 겹치면서 앞으로 파동의 방식으로 이동하는 형상이 마치 입자의 이동(빛의 속도)처럼 보이게 된다. 여기에서 광자들 사이의 충돌과 산란을 설명하기 위해서 양자역학에서 우리에게 판명한 기하학적 양자입자의 개념과 스핀의 개념이 도입되었을 때 빛의 실체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되게 표상하고 있는가를 보게 된다. 그런 광자의 형상처럼 우주 태초의 어떤 극한 에너지 차이에서 서로 다른 높 은 에너지 파동들이 극대로 겹쳐 시간의 형성과 함께 자체 스핀과 시간운동 을 갖는 여러 쿼크들과 같은 기본입자들이 생성될 수 있다. 그 자체가 힘인 빈 공간이 거기에 생성되면서 생긴 우주확장과 함께 온도가 떨어지면서 입자들 을 모으는 힘입자들을 포함한 다른 소립자들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면, 에너 지 없는 절대 빈공간의 상대적 역반응 정보 복합계는 영원한 미지세계가 될 가능성이 있고 에너지(1차원 초끈) 파동이론이나 최근 밀스(R.L.Mills)의 대 통일이론과 같은 시도가 각광을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쿼크들을 함께 모이게 하는 강력을 설명하기 위한 자루모 델(Bag model), 흔한 끈 모델(String model), 아니면 특별한 글로즈만-리스카 모델(Glozman-Riska model)이나 스키럼-위튼 모델(Skyrme-Witten model) 등 의 표상 자체는 우리의 판명성 오류이고 그 운동 자체는 특별한 차원들의 비 선형 운동 즉 혼돈 운동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인류는 늦었지만, 광자나 소립자들의 세계와 같이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서 지구의 궤도, 해안선, 빛의 궤적,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인 우주나 자연 안에서 비선형 법칙이나 혼돈의 법 칙(리아퍼너프 지수의 양수적 성격)이 거기에 근본법칙임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리아퍼너프 지수의 양수적 성격들은 자연을 이해하는 인간의 사고의 한계를 긋는 가장 기본적인 경계선이고 그것을 통해서 혼돈의 외형적 성격만 을 밝힐 뿐, 그 양수적 성격들의 다양한 차원들 뒤에 돌아가야 할 그 세계 자 체는 우리에게 마치 창문이 없는 모나드 세계와 같다. 그럼에도 그런 비극은 인간 호기심에 대한 비극일 뿐, 자연 자체는 여전히 우리의 최선의 안식처이 다. 사고라는 것은 언어나 표상을 통해서 대상에 거리를 갖는 행위이다. 한편 사 고는 그것을 통해서 자연의 어떤 놀보다 더 깊은 감정의 깊은 골 속에 들어가 는 입구이다. 물론 바위가 파도에 깍키는 정도의 속도보다 자연의 빛은 너무 빠른 놀이다. 우리의 시각은 그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역시 자연의 질서에 따른 우리의 감정의 놀은 비록 요란할지라도 그래도 플라 스마와 분자들의 운동, 심장세포들의 박동과 일부 뇌세포들의 기본적인 춤의 속도보다 빠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진 가시적 자연은 언어 의 빠른 교환으로 지향성의 오류나 판명성 오류와 더불어 혼돈 속에 요란한 그 감정의 놀을 잔잔케 하는 안식의 장소가 될 만큼 더 느리다. 죽음과 삶을 오가는 한 개인의 처참 한 삶의 놀은 생각할 수 있도록 더 느리다. 지금 관심이 되는 부분은 그런 감정의 놀이 함께 얽혀 꿈틀거리는 사회현상계 나 자연계가 그렇게 느린 속도로 축적해 가는 엔트로피처럼, 먼 뒤로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 비가역적 사실들이 또한 축적해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화 란 사회현상의 갈등 요소들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가역적 사실들의 축 적보다 약간 앞서서 그 축적을 가시화하고 있다. 노벨상의 일부 수상내용의 우수성은 그 축적내용을 잘 읽고 있다는 것과 그 축적의 선보다 약간 뒤따라옴으로 신뢰성을 높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비가역적 사실들의 축적 뒤에 저 멀리 뒤따라오는 축적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 의 축적이다. 불행하게도 인류의 거의 모두가 그 축적되고 있는 은혜의 깊은 내용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고 있다. (*정정: 원고를 다운로드 하실 때 단어중 '축척'을 '축적'으로 수정해 주세요. '축적'이 바른 표현입니다.)
58 no image <문화칼럼> 상승의 사다리와 야곱의 사다리-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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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8 2004-02-05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44mcal2.hwp상승의 사다리와 야곱의 사다리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쇠문고리를 쥐면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고, 웃풍이 드세서 형제지간이라도 윗 목 아랫목 자리다툼을 해야 하며, '꼬리가 길다' 빨리 문을 닫으라는 고함소 리, 무거운 솜이불을 덮어쓰고 구구단을 외우던 시골집, 그곳에서 가난한 세 월을 보낸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습니다. 그 당시는 공부가 문제가 아니 라 의식주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웬만해야 자녀들을 그나마 상업고등학교라 도 보냈습니다. 세월이 수십 년 흘러 가끔 명절을 맞이해서 그곳에 가보면 누구누구 서울대 입학이니 고시합격이니 하는 플래카드가 달려 있는 것을 보노라면 현대사회 는 시골이나 도시나 문화혜택은 별 차이 없다고 하지만 신분상승의 법칙은 아 직도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니 예전보다 훨 씬 더 차이가 생겨 개천에서 용커녕 미꾸라지도 나오지 못할 판인 것 같습니 다. 이러한 실상을 증명하는 연구결과가 나와 시끄러운가 봅 니다. 연구결과인즉 고소득층 자녀의 서울대 입학비률이 비고소득층 자녀에 비해 무 려 17배나 높고, 전업주부 어머니를 둔 수험생의 서울대 입학률이 취업주부 어머니를 둔 수험생보다 4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또한 대졸 학부모 집안의 자녀들이 고졸 학부모 집안에 비해 높은 입학률을 보여 부모의 학력에 따른 격차도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여겼던 일류대 진학이 저소득층 가정에는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 다. '아빠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이라는 소문처럼 가난한 아이 불우한 가정 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상승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없는 현실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처럼 지식과 신분과 가문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나 죽으나 신분 의 상승과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몸과 시간과 정열을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닐 까요? 이런 기정사실을 보면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까요? 첫째로 차이와 차별을 구분해서 인정해야 합니다. 부와 지식을 비롯하여 모 든 인생은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물질 같은 경우에도 교회는 공산주의 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습니다(행2:45). 이처럼 지 식에도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천차만별의 학생들 을 평준화한다는 것은 공부 받을 기회와 인격에 차별을 두지 말자는 것이지 만일 학습능력의 차이, 각 사람의 개성과 재능에도 모두 다 평등하자고 한다 면 그것은 잘못된 평등관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세상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상승의 사다리보다 언약의 사다리가 더 중 요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 예가 야곱의 가정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잣대로 야곱의 가정을 판단한다면 그의 가정은 역기능의 가정이었습니다. 부 모의 편애(창25:28), 자녀와 함께 거짓모략을 꾸미는 어머니(창27장), 속이 는 야곱보다 한 술 더 뜨는 외삼촌 라반(창29장), 윤리적으로 상황적으로 문 제가 되는 일부다처, 성폭력을 당하는 딸 디나와 그에 대한 피의 복수극을 펼 치는 아들들(창34장), 서모와 통간하는 르우벤(창35:22), 며느리와 근친상간 하는 유다 등 야곱의 가정은 교육환경이 제로에 가깝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상승의 사다리를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것입니다. 그러 나 그런 야곱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건이 벧엘에서의 사다리 환상입니다(창28:10 이후). 그러므 로 문제는 상승의 사다리를 붙잡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냐입 니다. 집안 사정이 낫고 못하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가정이냐 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는 세상 말대로 따라지 인생도 껍데기 가문도 없는 것이며 반대로 알짜가지고도 '피박(?)' 당하는 인생이 없 으란 법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는 결코 제한이 없습니다. 학벌과 가문에 너무 민감하지 마시고 언약의 사다리 환상으로 충만합시다.
57 no image <김영규칼럼> 교회가 인류에게 주는 가치들-김영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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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9 2004-01-20
http://www.rpress.or.kr/files/column/kcal2.hwp 교회가 인류에게 주는 가치들 김영규목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많은 혁명과 사고의 전환 그리고 큰 시행착오를 거쳐 인간의 호기심을 극대화 시키고 경제적, 사회적인 모든 힘을 모아 인류는 마침내 화성에 도착했다. 그 렇지만 화성에는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웃고 우는 가치가 없다는 것에 새 삼 놀랄 것이다. 반면에 지구와 같은 땅이 있기 전에 우주의 모든 힘들이 축 약되어 말려져 있는 소립자 세계들이 먼저 창조되고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 고 있는 그런 화성이 있어야 지구의 가치들도 보존된다. 이것이 교회가 간직 하고 있는 진리이다. 한 광자가 발생하여 공간에 에너지로 풀어질 때 우리의 눈은 대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뻐한다. 교회는 그런 가치들을 다른 차원 에서 보고 기뻐한다. 다른 차원에서 사물을 보는 교회로부터 흔히 모든 오류들이 극대화된 죄의 현 상과 그 근원의 성격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와 인류는 우선 '지향성 자체 오류'와 '판명성의 오류'를 주의해야 한다.2차원 공간에 통과된 빛으로 형상화된 컴퓨터의 커서와 같이, 폐쇄된 다른 차원의 공간 화면에 인간 의식 의 자유로운 지향적 초점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오류의 핵심이란 것을 인류는 너무 늦게 깨닫고 있다. 지향점이 추구하는 체계만이 가장 판명하다고 하는 오류가 바로 '판명성의 오 류'이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문화든 모든 글을 쓰고 말하는 인간은 이 오류 들을 먹고살고 있다. 글 없이는 전달이 불가능하고 표현이 불가능하며 표상 을 하지 못하고 꿈을 꾸지 못하며 상상할 수 없다. 그 만큼 그 오류들은 인간 에게 치명적이고 가장 깊은 오류이다. 괴델이든 튜링이든 또는 좀 더 수학의 한계를 비판하고자 하는 G.J. Chaitin 이든 그들은 먼저 인간논리와 인간수학의 근저를 비판하기 전에 그 오류들을 생각해야 한다.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든 진화의 나무가지들을 발견하든 모든 자연을 인간에게 가까운 지식체계로 꿰어 자연을 파괴하는 좀 벌레들이 우리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중심한 인식 체계를 가진 문화의 풍토 속에서 그 오 류들을 요리 하여 먹고사는 인간의 언론 매체들과 정치, 경제 매개인들일 수 있다. 인류의 평화를 외치고 정의를 부르짖기 전에 그 오류들을 먼저 주의해 야 한다. 지각의 방향과 편견은 그 오류들로부터 시작하지만 방향이 결정되자 마자 그 오류들은 스스로 감추어 사라지는 의식의 근저에 있는 변신의 원인자 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들을 때, 눈으로 글을 읽을 때 이미 그런 오류들의 태풍 중심의 고요한 자리에 빨려 들어가 있다. 자신에 대해서 좀 더 엄밀하기를 원하는 종 교인들은 이 오류들에 대해서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런 오류들을 주의하 여 보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들이 많아질수록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거리가 조금씩 단축될 것이다. 순수한 의미에서 고대 애굽의 역사로부터 더 발전된 근대 역사에 이르기까지 이런 오류들로부터 인류가 가장 피해를 입은 내용은 판명한 수학의 강조로부 터 온 피해이다. 수학은 인류가 만들어 놓은 가장 재미있는 놀이 문화이지만 그러나 중력상수, 프랑크 상수, 상수로서의 빛의 속도, 우주 상수 등 자연의 가장 신비한 부분을 상수로 처리함으로써 진리를 감추어 버리는 엄청난 실수 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 정당성을 주는 것은 판명성의 오류와 지향성의 오류에 인류가 얼마나 깊게 빠져있는가를 증명하는 증거이다. 자연의 숲에 길을 내는 인간 행위는 나노세계에까지 매끈하게 표면 처리하는 공정에서까지 그러한 인간 오류의 극 치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대수학, 유크리트 기하학, 비유크리트 기하 학, 비선형수학(혼돈수학) 등 인류 역사가 낳은 다양한 수학들을 배운다는 것 이 그런 방식으로 인류가 얼마나 실수하고 있는가를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56 no image <문화칼럼> '껄껄 까까'-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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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2 2004-01-07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42mcal.hwp'껄껄 까까'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신년벽두가 되면 세인들의 입가에 멈추질 않는 혀끝소리가 있습니다. 그것 은 바로 '껄껄(!), 까까(?)'입니다. 전자는 지나간 한 해를 후회하는 한숨 의 소리이고 후자는 앞으로 펼쳐질 한 해를 두려워하는 염려의 소리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정말 후회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도자 로서 부모로서 신자로서 '이렇게 할껄 저렇게 할껄' 하는 아쉬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또한 새해를 내다볼 때 여전히 앞이 캄캄합니다. 그래서 '요렇게 할까 조렇게 할까'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에 대한 지나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막연한 염려가 현재 의 삶을 저당 잡는다는 것입니다. 후회와 염려라는 감정이 현재를 사로잡아 결국은 삶의 침체로 빠뜨린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밥맛을 잃기 도 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쇠약함을 경험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후회와 염려 라는 질병은 신자들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는 주된 시기가 바로 연말연시인 것 같습니다. 지나친 경우 주일학교교사나 집 사, 성가대, 구역장과 같은 봉사직은 물론 신자의 거룩한 삶에 대한 투쟁마 저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가 되면 멋진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후회와 염려라는 감 정의 부스러기들부터 정리해야할 것입니다. 물론 지난 과거를 거울삼는 정당 한 후회와 또한 현실에 근거한 앞날에 대한 논리적 계획은 필요합니다. 그리 스도인이라고 그저 '주님 잘못했습니다'하는 습관성 얼버무림이나 아니 면 '주여 믿습니다'하는 무계획성 맹신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극단적 후회와 염려라는 감정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가령 탁구공이 여 기에 있습니다. 어디가 처음 시작일까요?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점하나 찍고 '여기가 시작이다' 라고 하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 금 사용하고 있는 양력달력이 이와 같은 이치입니 다. 양력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자연현상을 기준으로 만든 것입니다. 고대에서는 춘분이 들어 있 는 3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답니다. 그것을 로마의 율리우스가 지금처 럼 1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끊임없이 돌고 도 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어디에 놓고 일년의 시작이다 라고 말하기가 참 어 려운 것입니다. 기준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서 한 해의 시작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준비할 때 1월1일이라는 기준점에 너무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 다. 새해가 왔다고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 무언가 획기적인 계획이 없으면 마치 한 해를 완전 히 망칠 것과 같은 불길한 예감은 버려도 좋은 망령된 마음인 것입니다. 오 히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라며 해가 바뀌어도 변 함 없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찬양하도록 합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마20:1- 16)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만일 장 터에서 놀고 있던 자들이 오전 9시에 일거리가 없다고 다 집 으로 돌아갔다면 그들은 그 날 품삯을 받지 못하고 하루를 공쳤을 것입니 다. 그러나 나중까지 기다린 결과 처음 된 자들과 동일한 품삯을 받았습니 다. 우리는 기회가 지나갔다고 포기하지말고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습니다. 2003년도에 이루 지 못한 일이 2004년도에 더 크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앞날에 대해서 두 려워하지 마시고 새해에도 하나님의 품삯을 기대하며 씨를 힘껏 뿌리십시 오. '껄껄껄, 까까까' 하는 한숨소리는 멈추시고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 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전11:6)' 기대합시다 ^^.
55 no image <문화칼럼> 빈 방 있습니까? -이은상 목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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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8 2003-12-17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41mcal.hwp빈 방 있습니까?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덕구 : (조용한 허밍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내가 연극 망쳐 놨어요. 그치만 어떻게 고짓말을 해요... 우 우리 집엔 빈 방이 있 걸랑요. 아주 좋은 방은 아니지만 요. 그건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근데 어떻 게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나라구 그래요. 난 정말 예수님이 우리 집에서 태어 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빈 방 있습니까?'는 1977년 12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실제 이야기로 1980년 성탄 무렵 일간신문 한 구석에 이라는 칼럼으로 소개 된 것을 보고 감동한 연출가 최종률씨에 의해 극화된 작품으로 극단 증언에 의해 해마다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성극입니다. 우리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 는 '덕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본대로라면 덕구는 '빈 방 없습니 다' 라고 해야하지만 그러나 여관 장면에 이르자 빈 방을 애타게 찾는 요셉 과 만삭의 마리아를 보면서 극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던 덕구는 심한 갈등 끝에 대본과 달리 '빈 방 있습니다' 라고 답하여 연극을 망치게 합니다. 여기 서 극중 인물인 덕구가 겪었던 내면의 세계를 통하여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들 의 현실세계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덕구의 정직에 대한 갈등입니다. 그 당시 여관주인의 입장이라면 충분 히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하라는 칙령 으로 재미를 보는 사람은 바로 여관집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관집 주인 은 숙박계의 사람의 숫자를 세고 방마다 돈 계산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을 겁니다. 방 하나에 손님 몇씩이라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런 와중에 한 사람 도 아닌 그것도 해산할 날이 찬 허름한 부부를 받는 다는 것은 주인의 입장에 서 손해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때는 마치 합승에 보탬이 되지 않는 손님을 거 절하는 택시기사처럼 빈방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 처세였을 겁니다. 그러 나 덕구는 거짓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기 전에 하나님께 서 주신 자신의 양심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을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일 것입니다. 올 한 해도 돌이켜 보면 양심을 지키느 라 주님을 따르느라 손해 본 사건들이, 가난해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 정직한 모습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덕구의 순진에 대한 갈등입니다. 좋은 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수님 을 모시고 싶은 덕구의 마음은 그 당시 왕궁에 있는 권력자들이나 제사장과 서기관 등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의 마음과 다르게 보입니다. 성경을 보 면 메시야의 탄생 소식이 사회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다니다가 결국 양치 기로 전락한 사람들에게 먼저 전하여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서 외적권세를 누리는 자들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순진하게 메시야를 기 다리는 자들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우리는 무언가 큰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할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일 겁니다. 주님은 화려한 장식이나 웅 장한 문화시설을 찾으시지 않고 마굿간과 같은 순전한 곳을 찾으실 겁니다. 고사리 손을 모아서 율동을 하는 유치부 아이들에게, 구석진 주방에서 손수 빚은 떡만두국을 끓여 대는 권사님의 손길 위에, 그리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노엘을 외치는 새벽송의 발걸음 위에 주님이 찾아오실 겁니다. 자신만이 중요하고 손해보는 것 피해 받는 것을 싫어하는 요즘, 명품 신드롬 이나 '얼짱'과 같은 세태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덕구의 대사를 다시 한 번 기 억해야 합니다. '그치만 어떻게 고짓말을 해요... 아주 좋은 방은 아니지만 요, 그건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말로만 부르짖는 똑똑함보다 세속에 오염 되지 않은 바보스러운 행동이 넘치는 성탄절을 만들어 봅시다. 그늘지고 소 외 받은 마음의 빈 방 구석까지, 영혼의 어두운 방까지 그리스도의 빛이 임하 기를 서로 축복합시다.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로다!
54 no image <문화칼럼> 배짱으로 목회합시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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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9 2003-12-04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40mun.hwp배짱으로 목회합시다! 이은상목사/ 수원노회 동락교회 예수님은 가끔 우리에게 충격을 주십니다. 상처와 결점을 가진 무리들을 자 상하게 치료하시던 예수께서(마15:29-31) 어느날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 을 반가이 맞아주시기는 커녕 오히려 거친 태도로 대하십니다(눅9:57-62). 마치 ‘올테면 오고 갈테면 가라’는 식의 배짱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 에게 진단질문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예수를 추종하는 현대 교회는 과연 어 떤 모습일까요? 아마 예수님의 전자의 모습에는 아주 익숙한 반면 후자의 모 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서 옵쇼, 뭘 드릴갑 쇼’와 같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현대 교회는 이제 후자의 모습을 기피하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 우 리는 예수님의 후자의 모습도 따라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필요를 채워주는 것과 비위를 맞추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 교는 아부꾼이 아니라 봉사단입니다. 봉사는 빵이 절실 히 필요한 자에게 양 식을 선물로 주는 것이고 아부는 배부른 자에게 더욱 탐욕을 부추키는 뇌물 을 주는 것입니다. 가령 전도를 한다는 핑계로 교회가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여러 가지 선물공세를 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비위라 보여집니다. 정말 선 물이 필요한 자들은 입주자들이 아니라 평생토록 청약통장도 없이 살아가는 ‘절대 빈곤의 0순위자’들입니다. 이웃사랑과 비위를 맞추는 것은 다르다 고 봅니다. 무조건 사랑과 무절제한 감상적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더이 상 교회가 이러한 궁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욱 문제시되는 것은 필요와 아부를 구분하지 아니하면 복음에 손상을 입히 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잘 팔리지 않아 남 은 떨이를 없애려는 상인의 마음처럼 조급합니다. 심지어 비굴하게까지 보 여 결국 복음의 영광의 빛이 바래지고 있습니다. 바나 리서치그룹의 조지 바 나 박사는 “오늘날의 교회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지적한 대로 이른바 ‘싸구 려 은혜’의 일차적인 수출업자이며 싸구려 은혜는 신앙에 대한 소비자적 접 근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복음은 영광스런 것이며 이 세상 의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보화이며 진주입니다. 교회는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려는 미련을 다함께 접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할 것은 당당함입니다. 배짱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살얼 음판을 걸어가는 자처럼 스트레스 받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좁은 길로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 오는 법입니다. 교회를 나와주는 사람들이 더 이상 늘어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나와주는 곳이 아니라 죽더라도 나와야 하는 곳입니다. 유명한 학원 은 차량운행을 하지 않아도 학생이나 학부모가 군소리 없이 다닙니다. 교회 도 세상의 소리에 꿀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비위를 맞추다보면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짱은 사람을 투 명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만듭니다. 억지로 하거나 척하지 말고 배짱으로 기독교를 전해야 합니다. 물론 주제 넘는 똥배짱을 갖자는 말이 아닙니다. 배짱과 똥배짱은 다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자기 고집만 세우는 것은 배짱이 아니라 ‘똥배짱’입니다. 배짱은 내 맘대로 내 뜻대로가 아니 라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교회가 부흥하겠느냐구요? 그렇다면 합신의 태동기를 생각해봅시 다. 그때 학위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짱으로 나왔습니다. 이러한 배짱을 갖게 한 것은 주님을 ‘바로’ 따르겠다는 개혁정신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합신은 지금까지 개혁의 요람으로 건강하고 힘있게 자라왔습니다. 까 짓 것, 안되면 그만이지 뭐, 그래도 주님은 되게 하십니다. 벙어리 삼 년 귀 머거리 삼 년 눈물목회를 접으시고 콩 내라 팥 내라는 세상의 요구에 굽실대 지 마시고 주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며 배짱 으로 목회합시다.
53 no image <문화칼럼> 강남불패-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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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0 2003-11-19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39mill.jpg강남불패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산 넘어 강남에는 누가 살길래 날마다 투기바람 남으로 오나'. 필자가 한 때 개척지를 물색하던 중 아파트가 빌딩처럼 들어서는 한 곳을 들린 적이 있 었습니다. 약간의 보증금과 월세로 개척공간을 찾는다는 저에게 그곳의 공인 중개사는 신경질적이면서도 조소가 섞인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다른 곳에 가 서 알아보세요, 여기가 어딘 줄 아세요?'. 기분이 상하고 기가 꺾인 필자는 다시는 그곳 근처라도 얼씬도 못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강남불패라는 신화로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곳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 1%가 산다는 도곡동 타워밸리스였습니다. 지금 그 곳에서는 계약자리에서 2-3천만 원이 오르기 예사이고 초대형 평형은 한 주에 도 시세차이가 2-3억이 왔다 갔다 한답니다. 미친 집값'이라 표현될 만큼 정신 없이 오른 강남의 집값을 잡기 위해 정부 는 부동산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하고 백방이 소용없듯이 그 신화 는 꺾이질 않나 봅니 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성급하게 단언할 수 없지 만 강남불패의 신화는 '역시나'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치 강남공화국인 것처럼 여론이나 방송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곳 은 왜 부동산 대책이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까요? 오락가락 정책 때문 인지 아니면 집값 상승의 주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학군 때문인지 도대체 강 남불패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러한 원인을 파싱(parsing, 철저한 분석?), 적용해서 떼돈을 벌기도 한다고 합니다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본 강남불패의 원인은 아마 이런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쉽게 돈을 모으려는 인간의 욕구 때문이라고 봅니 다. 사람은 누구나 고생해서 돈벌기보다는 편하게 많이 버는 것을 원할 것입 니다. 그런데 돈을 쉽게 버는 방법중의 하나가 요즘 말처럼 '그래도 부동 산'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필자가 사는 동네 아파트도 2년 전 입주 때보다 시세가 거의 1-2억이 뛰었습니다. 어림잡아 한 달에 천만 원을 앉아서 번 셈입니다. 이런 현실에 서 누가 '그 맛'을 거절하겠 습니까? 또한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에 대 한 미련 때문에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돈벌고 자 하는 욕망이 잡히지 않는 한 강남불패는 잠시 멈추거나 방법을 달리해서라 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강남불패는 강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에 사 서 고생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으며 죄가 아니라면 '좋은 게 좋은 거지 뭐'라 는 인식을 거부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강남불패는 강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원리는 사실 목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목회자들은 신도시 종교부지를 흔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쯤으로 알고 있습니 다. 이것은 사실 부인할 수 없는 목회현실입니다. 왜 '그 산지'를 목회자들 이 꿈에라도 그리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지역이나 다른 여건에 비해 성도의 수를 늘 리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고생고생 전도해도 한 달에 한 명 등 록하기도 어려운 현실과는 달리 종교부지에 교회당을 확보한 교회는 과장하자 면 매주 주보에 신입교인 명단이 마르질 않습니다. 현재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대형교회 지성전 같은 경우에도 거의가 신 도시를 거점으로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강남불패는 그 칠 줄 모르는 인간의 욕구를, 특히 어려운 과정은 생략하고 쉽게 목표를 이루 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성경적 토지공개 념이나 경제정의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결과적 측면 에서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가 돋는데서부터 해가 지는데 까지 찬양 받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시113:3). 부동산경기 의 혜택을 받은 곳이나 혜택에서 제외된 지역이라도 모든 거주지역에서 하나 님께서는 결국 찬양을 받으십니다. 해가 뜨는 동해의 정동진이나 해가 지는 서해의 안면도에서도 찬양을 받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벼락을 내리시거든 기왕에 돈벼락을 내려 주세요' 라는 기 대심리를 벗어 던지고 어디에서든지 찬양 받으실 하나님만 기대하며, 특히 스 스로 낮추시고 천지를 살피시는 하나님을(시113:6-9) 노래하며 살아가야 하 는 것입니다.
52 no image <문화칼럼> 지금은 다르게 기도할 때입니다-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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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3 2003-11-06
http://www.rpress.or.kr/files/column/swa.jpg지금은 다르게 기도할 때입니다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동락교회 이야기 하나, 필자의 고향마을에 축산을 하는 신체 건강한 농부가 있었습니 다. 이 사람의 주특기는 힘과 열심 그리고 축산 외에도 동물을 거세하는 기술 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직한 이 농부의 아내가 그만 바람을 피우고 말았습니 다. 화가 난 농부는 소문 끝에 아내와 놀아난 남자를 찾아 나무에 묶어놓고 간통에 대한 벌로 그 남자를 거세시켰답니다(풍문괴담). 이야기 둘, 평범한 30대 맞벌이 부부인 혁과 경은 나른한 부부생활에 권태를 느껴 결국 이들 부 부는 성적 불만을 해소하고자 부부끼리 서로 배우자를 바꿔 성관계를 갖는다 는 '스와핑'의 유혹을 받아들입니다(영화 '클럽 버터플라이'). 두 이야기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면 전자는 천민스럽고 무식하며 비논리적고 후 자는 귀족스타일을 풍기고 매우 합리적인 것 같으며 전자에 비해 성에 관한 고상한 진보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모두가 다 엽기적이고 망령된 행동 들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 타락상을 보면서 '세상에 어찌 이런 일 이?' 하며 놀라거나 인륜이 무너졌다고 흥분 비판하거나 아니면 '性도 사회 의 변천과정 중의 하나이려니' 하며 수수방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엽기적 사회에 대해서 방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신자의 삶이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은 사회에 대해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인들은 현 사회의 성적타락상을 보면서 '말세중의 말세다' 라고 흥분만 할게 하니라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가?' 그 원인을 분석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하면 이러한 타락을 막을 수 있을까?' 라는 해결책을 밝혀내야 하는 것입니 다. 그렇다면 스와핑과 같은 성도착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신경전문의들은 스와핑을 노출증, 관음증 등의 심각한 심리적 질병 으로 말하기도 하며 통념과 달리 한 편에서는 음식에도 기호식품이 있듯이 성 에도 개인의 취향이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욕구본능이라는 옹호론을 펼치 기 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성적 도착을 사단의 속임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은 고린도교회 내에 음행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고전6:9). 이 말은 곧 '속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적 윤리를 버리고 인간의 쾌락의 권리 만을 주장하도록 하는 사단의 속임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눅17:26- 30). 오늘날도 사단은 동일하게 '왜 부부끼리만 성이 가능한 거지?'란 의문 을 던지며 금지된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미혹하고 있으며 이러한 미혹에 빠 진 인류는 타락의 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고린도 교 회에도 이전에 불의의 인생을 살아왔던 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깨끗하게 살 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9-11절). 바울의 논리는 불의를 막을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라는 사실을 제공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먼저 경험한 그리스도인 들은 불의에 빠진 이 사회를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들로 하여 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 다. 이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최상의 방법은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임하도록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야말로 사회의 극적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시2:4)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 그리고 불신자들의 대거 회심이 동반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에도 극치가 있는 것처럼 경건에도 극치가 있습니다. 경건의 극치는 하나 님의 선물이 아닌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 '그 분' 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 부와 귀와 명예만을 추구하지 않았는지 요? 그 결과 스와핑과 같은 타락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일탈 의 극치와 부유층과의 함수관계는 우리가 기도할 때임을, 아니 다르게 기도 할 때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다르게 기도할 때입 니다.' '저런 저런' 하면서도 짜릿한 기사나 망측한 이야기들을 즐겨 찾으려는 숨은 심리까지도 불태울 수 있는 하나님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그 렇지 아니하면 마귀가 오순절을 맞이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
51 no image <문화칼럼> 쿨(Cool) 권하는 사회-이은상 목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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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2 2003-10-22
http://www.rpress.or.kr/files/column/sacndle.jpg쿨(Cool) 권하는 사회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소위 요즘 젊은층이 선호한다는‘쿨&섹시’특히 그 중에서도 쿨한 삶은 사람 이 살아가는 일 그 무엇이든 현대사회의 문화의 광장에서 공식이 될 수 있는 키워드인 듯합니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cool'의 정의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함과 자기 조절능 력 잃지 않기, 너무 열렬하거나 친근한 모습 보이지 않기, 감정의 기복 절제 하기' 등입니다. 간단한 형용사로 표현한다면 '세련된, 멋진, 냉정한, 서늘 한, 뻔뻔한, 침착한, 훌륭한, 가벼운 그러나 천박하지 않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유행에 맞는' 등의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쿨한 삶이란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감정에 질퍽대지 않고 집착 하지 않고 솔직하고 깔끔한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얄밉게 자신의 욕구에 충 실하되 남을 해코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쿨은 젊은이들 의 남녀관계 뿐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 등 모든 인간관 계에서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소통형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쿨한 느낌으로 포장된 사극‘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대박을 터뜨리 고 있다는 소문을 듣는 것을 비롯하여 드라마도 광고도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들의 옷차림에서도 이 사회는 쿨 권하는 사회가 분명합니다. 광고제작과정에 서도 아이디어를 끄집어 낼 때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쿨하냐 그렇지 않으냐 를 따진다고 하는 것을 보면 쿨은 소비적이고 대중적이며 문화상품적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녀관계의 예로 본다면 조선시대는 수절, 청상이요, 근대에는 삼각 관계, 배 신, 책임, 고민이지만 현대인들의 사랑법은 로맨스에 빠질 땐 빠져도 이별 후 에는 전화해서 울고불고 하거나 배신했다고 몸부림치지도 않고 훼방놓거나 못 살게 굴지 않는 그야말로 '쿨'인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쿨은 교회 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필자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안수집사 장립을 받는데 담임목사님이 각자 삼천만원 씩 내라고 해서 편안 마음으로 냈다고 합니다. 그 리고 그 집사님은 '목사님 도 솔직하고 화끈하게 그리고 자신들도 속편하고 교회에 유익해서 좋다'는 식 으로, 그리고 덧붙여서 그 목사님의 목회경영능력까지(?) 칭찬하는 것을 들 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 편에서 보면 일종의 거래요 흥정이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이 은근히 요구하는 쿨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교회를 옮기는 문제도 예전 같으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 자기교회를 끝까지 사수했지만 요즈음은 가깝고 편리하면 교회도 쿨하게 옮길 수 있다는 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그 교회가 싫다는 성도를 굳이 질질 붙잡지 말고 교회를 옮기기를 원하면 쿨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쿨은 예배에도 나타나는데 예배형식도 늘어지는 찬송이나 긴 대표기도를 싫어하고 성령의 감동과 상관없이 예약된 시간에 마쳐야 하며 특히 교회소식 같은 것 은 쿨하게 주보로 대신하고 설교 후에 즉시 축도로 마치기를 원하기도 합니 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적 사고방식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쿨은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지나친 관계와 과장과 명분을 강요당하던 지 난 시절과 달리 쿨은 합리적이고 실리적입니다. 허례허식과 가식적 관계에 집 착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회식자리에서도 남이 싫다는 술과 노래를 권하지 않 고, 대통령도 자격이 모자라면 그만두겠다는(?)그래서 독재를 멀리하는, 정치 인들도 필요이상으로 딴죽걸지 않는 쿨한 정치는 참 좋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도 사람들의 유전과 명분만 고집하려는 바리새적 신앙이나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과 상관없이 감정과 흥분(hot)을 중시하는 신비주의를 경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쿨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할 세속적 사고방식입니다. 쿨은 개인주 의를 토대로 자라나기 때문에 기독교가 추구하는 공동체성을 약화시킵니다. 쿨은 '너는 너 나는 나,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그래서 도움을 필요로 하 는 이웃을 외면케 하는 냉소주의를 부추깁니다. 쿨은 끈끈한 정과 사랑으로 서로 감싸주는 기독교 공동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집단해체 정신 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쿨은 편리함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결국 생각 없는, 고민 없는, 버르장머 리 없는, 이것이 죄에 대한 무감각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배우 자가 바람피워도 징징대지 않고 맞바람 피겠다'는 식으로 죄의 도미노현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쿨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랑 을 권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그러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제 넘는 집요함이나 지나친 방관도 없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쿨한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 니다(히10:24-25절).
50 no image <문화칼럼> K.I.S.S라는 삶의 철학-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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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6 2003-10-09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36ill.jpgK.I.S.S라는 삶의 철학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먼저 질문에 답해봅시다. '옷을 갈아입어도 그대로 있고 옷을 벗어도 그대로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살다보면 가끔씩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하며 스스로의 삶을 자책하 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몰두했던 그 일이 다람 쥐 쳇바퀴 돌 듯 이어지는 무목적적인 삶처럼 느껴질 때, 그리고 '이게 아닌 데' 하면서도 그 무엇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어 빠져나오질 못할 때 삶의 자책 은 더욱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 안에 있는 나를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 시간이라는 굴레입니다. 마귀가 인류에 대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탁월한 전략이 '바쁘게 사는 삶' 이라는 말대로 이 세상은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시간에 쫓겨다니는 사람들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 다. 흐트러져 있는 책상과 서랍과 서류뭉치, 빈번하게 잊어버린 약속들, 자녀 들과 의미 있는 대화 없이 지낸 며칠, TV 리모콘을 재빨리 눌러대는 솜씨, 뒤 죽박죽 된 신문들, 애타게 물을 기다리는 스킨다브스, 배고플 때가 아닌 남 는 시간에 식사하는 경우 등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이 여우 꼬리처럼 남아 있 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쫓기는 삶은 예외가 아닌 듯 합니다. 기도 요청을 받아놓기 만 하고, '하나님 탱큐'식으로 드리는 번개기도, 예배시간에 시계를 자주 보 는 습관, 늘 레위기에 꽂혀 있는 성경읽기표, 얇은 책만 고르는 습관, 그리 고 하루가 서른 시간이면 좋겠다는 강박관념 등 조용히 멈춰 설 시간이 없습 니다. 이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고속철도보다 먼저 시간을 다스리는 것입니 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시간을 다스려야할까요? 그것은 시간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면 우리 자신을 상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 생각할 시간은 가장 희귀한 자원입니다. 이런 자원을 잃게 되면 주로 보이지 않은 내 면의 세계는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목표에만 열중하게되며 본질보다는 속도 를 중히 여겨 인 생의 됨됨이(being)를 망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면 또한 대인관계를 상실합니다. 단지 얼굴이나 이 름만 익힐 뿐이고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의무감 특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간과함으로 이웃사랑이라는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시간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게 되면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위험이 생기게 됩 니다. 하나님을 알되 그저 명함식으로 알고 깊은 친밀감이 없기 때문에 우리 인생을 예비하신 주님의 계획들에 대해서 심지어 천국에 대해서조차 아주 희 미하게 알뿐입니다. 결국 하나님마저도 우리의 스케줄에 따라 주실 것을 협박 하며 경건생활의 궤도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요즈음 전원주택이나 팬션생 활, 귀향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의 철학을 통해서 배워봅시다. 이들은 KISS (Keep it simple and small!)의 삶의 철학 즉 단순하고 작은 것의 가치를 중 요시 여기며 산다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부처(불교문화에서 말하는 무소유 철학)처럼 백수가 되거나 상류층의 유한계급처럼 놀고 먹어서는 안됩 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빨리빨리'라는 공격용 무기뿐 아니라 '다음에'라는 방어용무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KISS의 생활철학 'small'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족하는 법, 탐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딤전6:8). 우리가 주로 시간에 쫓기는 이유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 탐심 때문입니다. 또 한 KISS라는 삶의 철학 'simple'은 우리에게 절대 우선순위를 가르쳐 줍니 다. 단순한 삶이란 모든 것을 제쳐놓는 포기의 삶이 아니라 급한 일과 중요 한 일을 구분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많은 것에 관심을 갖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사항을 빼놓는 경우 가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소년 예수를 예루살렘에 남겨두고 고향을 떠났 던 일화는(눅2:41-51) 오늘날 절대 우선순위를 잊고 사는 대부분의 삶의 모습 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정치, 경제, 스포츠, 의식주 등의 많은 사건과 연예 인을 비롯한 스타들의 X-파일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가장 중요한 일인 영혼구 원, 그리고 절대 중요한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 밖입니다. 단 순한 삶이란 모든 것보다 예수그리스 도를 절대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삶을 말 하는 것입니다. 예약으로 가득 찬 식당에서 눈치를 보는 것보다 온가족이 참여해서 만든 수제 비를 올려놓고 옹기종기 둘러앉은 밥상머리를 만들어 봅시다. 집안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폭군 시계로부터 자유선언을 합시다. 주일하루만이라도 TV, 컴퓨터, 핸드폰을 OFF해 봅시다.
49 no image <문화칼럼> 바람 난 코리아~-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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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9 2003-09-25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35illutr.jpg바람 난 코리아~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 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한국대중가요의 일반적 특징은 당대 대중들의 경험과 관심사, 인식과 정서, 욕망 등을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노랫말처럼 6.26동란이후 한국근대화의 물결은 영자의 전성시대를 낳았고 새 마을운동과 함께 돈벌이를 위해 너도나도 고향을 등지고 단봇짐을 싸도록 했 습니다. 그 후 세월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이제 국민소득 1만 불을 넘어선 우 리나라는 20,30대는 물론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너도나도 밖으로 밖으로 나가 고자 합니다. 홈쇼핑 사상 최고의 대박소식은 물론 이민계, 기러기 아빠, 원정출산, 위장입 양 등 '엑소더스 코리아'의 기세는 정말 놀랍기도 하고 한편 부러움속의 우려 이기도 합니다. 물론 자본에 국경이 없듯 삶에도 국경이 없습니다. 한국사람 이라고 꼭 한국에서 살라는 법도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민족주의를 넘어서 이웃사랑의 동심원을 마땅히 넓혀야 합니다. 이민은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개척이며 도전일 수 있습니다. 서울이 좋 은지 시골이 좋은지 각자 사람 사는 방식일 뿐 가든지 머물든지 상관할 필요 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민을 가는데 그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천정부지 로 치솟는 아파트값과 사교육비만 보더라도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도무 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불안에 떨고 있느니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이 자칫 알거지 신세가 되더라도 무작정 떠나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민 희망자가운데 우리 국가사회의 주역이 돼야 할 20,30대 젊은이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60.4%). 경제활성화와 정치 및 교육개혁을 추 진해야할 청년들이 나라를 떠난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미래에 심각한 불안감 을 증가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이민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적인 책임을 회피하 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해외이민 급증 현상이 하나의 심리적 현상이라는데 있습니 다. 정말 어려운 시절에는 만 주, 북간도, 독일 등으로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떠났지만 지금은 생존이라기보다는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상대적 박탈 감 때문에 떠난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흥부) 배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놀부)는 비교의식 때문에 이쁜이도 가니 금순이도 간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뒤질 수 없다는 강박관념, 풍요속에서 빈곤을 경험케 하는 심리적 불 안감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래가 불안한 청년층의 좌절과 비교의식으로 인한 총체적 불안감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성경을 보면 지 금 상황과 비슷한 세대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약4:13-17). 야고보 당 시 성도들이 늘 듣는 말은 '누가 어디 가서 부자가 되었더라, 누가 성공했더 라'는 풍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지금이나 그 때나 진실반 허풍반일 겁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불만족한 가난한 교인들에게는 그 말이 꿈과 희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 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약4;13)'며 탈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생겨 난 것 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4:14-17). 계획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업가는 미래를 내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계획자의 정신과 자세입니다. 계획을 세울 때 하나님의 섭리나 뜻이나 인도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리라는 자기확신이 문제의 초점인 것입니다(잠16:1). 국가든 개인이든 역사를 뒤돌아보면 인간의 계획들이 좌초되고 깨어진 파편들이 널려 있습니 다. 그러므로 신자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의 욕망이나 소원을 하나님 의 뜻에 합리화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일만 아니 라 교회적으로도 교회개척이나, 교회당건축, 구제 및 선교 등의 제활동들이 목회자 개인적 야망이나 당회의 집념이나 혹은 교회간의 경쟁이데올로기에 빠 진 것은 아닌지 또한 무분별한 열심인지 감상적인 도전인지 세심하게 하나님 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뜻에 자신을 복종함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 다고 모든 일에 회의적인 자세로 모 든 것에 확신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절대적 인 통치와 신령한 계획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계로 나가보면 중국 인들은 발로, 유대인들은 머리로, 인도인은 말로, 한국인은 온몸으로 산다고 합니다. 허탄한 꿈이 가져다 준 결과일지 모릅니다. 요즈음 시대 정말 무서 운 것, 바람 조심합시다. 바람 난 가족, 바람 난 코리아, 바람 난 교회~
48 no image <문화칼럼> E-대회, 에클레시아드-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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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8 2003-09-08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34illust.jpgE-대회, 에클레시아드 이은상/ 수원노회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북한을 비롯해 세계 174개국 열방의 젊은이들이 열기 를 쏟아냈던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가 막을 내렸습니다. 꿈과 젊음, 여기에 다 미모의 축제까지 마치 기록대회가 아닌 감각대회처럼, 그럼에도 이 대회 가 남긴 것은 늘 스포츠가 그렇듯이 '스포츠는 짧고 여운은 길다'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경기에는 승자는 승자로서의 영광의 순간이 패자는 패자로서 의 실패의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기 후에 우리의 시선은 좌절하고 있는 패자들에게서 벗 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국가대항이든 동네대항이든 스포츠세계에서 승자 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이 패자에게는 좋지 못한 앙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 다. 물론 달음질하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달음질해야 하고 또한 상 얻는 자 는 하나인 것을 서로 인정해서(고전10:24) 패자는 자신의 패배를 깨끗하게 받 아들이고 승자에게 진정한 박수갈채를 보내야 마땅합니다. 사 람은 앞서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 지배받기 때문에 지게되면 속상한 법이며 차이나 석차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가끔 수련회 때 조별대항에서 게임의 법칙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시험에 드는 성도들도 있 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가지 패배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패자들의 응어리를 생각하면서 'E-대회, 에클레시아드'(교회끼리 화목을 위하여 치르 는 스포츠?)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필자가 속한 교회는 이웃교회들과 여러 번에 걸쳐 친선축구경기를 하였습니 다. 지금까지의 전적은 전패입니다. 그것도 경기마다 큰 점수 차로 패하였습 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경기에 패하고도 성도들은 속이 상하거나 배가 아 프든지, 아니면 '다음부터는 절대로 축구시합을 하지 말자'는 등 부정적 반응 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추적해보니 다름 아닌 패자의 영광이었던 것 입니다. 패자의 영광이란 경기에 지고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어떻게 경 기에 지고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E-대회만이 가지는 독특함입니 다. E-대회는 세상의 경기와는 달리 그야말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고 자하는 경기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회가 아니라 교제일 수 있습니다. 그 래서 필자가 속한 교회는 게임보다는 교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심지어 스스 로 '기쁨조 혹은 위문단'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패함으로 상대방에게 승리 의 기쁨을 얻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경기에 임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패자가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인 자 기합리화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패배에 익숙한 자의 변명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해주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름(구별됨)이 그 특징입니다. 그 특징 중의 하나는 환란 중에도 즐 거워할 수 있는 것이며(롬5:3),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머리가 아닌 꼬리가 될 줄도 아는 것입니다. 스포츠, 교육, 물질, 은사 등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실력 차이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적 찬스에 개 발(헛발)을 한 선수를 보고도 열 받지 않고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무 한경쟁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인 지 현대교회에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 다. 지고 못사는 세상처럼 교회도 모두가 다 이기려하고 일등만 하려고 합니 다. 그 결과 각 교파별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어찌되 었든 한국교회는 보이지 않는 성도수의 경쟁, 과업의 경쟁, 확장의 경쟁, 이 름에서도 뒤질세라 '제일, 중앙,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야 합니다. 물질이 많아서 감사하고 일등해서 기 뻐하고 잘생겨서 즐거워하는,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희락은 세상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특징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쥐꼬리만 한 월급봉투를 받고도 감사할 줄 알고, SKY대학 근처에 얼씬못해도 기뻐하 며, 인생의 성적표마다 늘 내 뒤에 누군가 아무도 없어도 웃을 수 있는 여유 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패자와 꼴찌들이 합창할 수 있는 나라, 지렁이같이 못난 인생 들이 뒤뚱거리며 춤을 추는 나라, 도무지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성령께서 만 들어 주시는 신비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 기를 기 도해야 합니다. 미녀가 아니더라도 응원단이 될 수 있고, 성도수가 작아도 주 의 종이 되며, 그저 꾸무럭거리는 변두리 성도들이 모여서 손뼉칠 수 있는 E- 대회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열방 가운데서 날마다 열리기를 기대해봅니 다.
47 no image <문화칼럼> 아다리 장로님-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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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9 2003-09-01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33ill.jpg아다리 장로님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바둑에 심취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하루종일 그리고 새벽1시까지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예배 기도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 리기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기도 하고 '이러면 안되지'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습니다. 기도시간이 되자 바둑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 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으로 기도 드립니다. 그리고 장로님은 아멘 대신 '아다리' 그랬답니다'. 취미생활 자체가 직업인 사람들은(바둑기사) 예외이겠지만 취미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잘 즐긴다해도 그 도가 지나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우 리는 몸으로 체험합니다. 휴가를 잘 다녀와도 집에 들어오면 우리는 늘 '집이 최고야' 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여름휴가 뒤 수면장애, 피로와 권태감, 소화불량, 직장에서 꾸벅꾸벅 조는 등 바캉스 증후군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최근 미국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직장인 가운데 54%가 휴가를 다녀온 뒤 바캉스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으 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잘 쉬고 많이 놀았는데도 불구하고 왜 휴가 전보 다 더 삶이 생생하지 못할까요? 일반적으로 이러한 원인을 학계에서는 생체리듬의 파괴로 설명합니다. 인체에 는 생체리듬을 주관하는 '생물시계'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시상하부가 있습니 다. 대뇌 깊숙이 위치한 이곳에서 일정 시간마다 각종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명령을 내리는데 수면과 휴식을 유도할 때는 멜라토닌 호르몬을, 그리고 활동 력을 높일 때는 코티손 호르몬을 분비하도록 하여 생체리듬을 조절한다고 합 니다. 이러한 규칙적인 호르몬 분비가 휴가기간동안 서로 뒤섞이거나 상반된 작용을 하다보면 생체리듬이 깨져서 피로와 무기력증에 빠지고 불면증에 시달 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휴가증후군은 시간이나 장소나 환경 등 외부적 요인뿐만 아 니라 내부적 요인 즉 생각의 변 화도 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가와 오락은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경건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체리듬과 경건의 리듬과의 상관성의 실례는 매일 새벽기 도, 큐티, 성경읽기, 주일성수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새벽기도 의 경우 처음에는 힘들어도 훈련이 되면 자다가도 정한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 나게 되며, 또한 잘하다가도 한 번 어긋나면 다시 회복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 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휴가증후군을 통해서 육체든 경건이든 훈 련의 유익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이(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딤전4:8-) 진리인 것을 깊이 깨닫고 절제와 훈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휴가증후군으로부터 신자가 배워야할 것은 일과 여가의 이분법적 사고로부터의 탄력 있는 삶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일과 여가는 모두 선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서 이 둘을 다 창조하셨 습니다. 일과 여가 중 어느 것 하나는 선하게 보고 나머지 하나는 악하게 보 는 경 향을 우리는 거부해야 합니다. 일과 여가는 서로 보완적이어야 합니다. 낙원생활이 나오는 창세기에도 사람들은 완전한 상태에서 동산을 지키는 일 을 했으며 십계명중 제4계명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리듬이 일과 여가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평가절 하 혹은 과대평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일과 여가가 우상화되거나 반대로 나태한 청지기적 삶인 권태로 빠지지 않는 균형적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일에 대한 거부감이나 여가에 대한 죄책감, 반대로 일중독중이나 오락광도 신자가 버려야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영역모두에서 우리로 하여금 책임 있게 행동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노동가운데서도, 여가와 놀이와 휴식 가 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탄력 있는 영적리듬을 습득해야 하는 것입 니다. 한편 이러한 영적리듬은 완전하신 지혜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 께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여가와 노동의 현장에서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시62:1). 그럴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 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둑판 앞에서는 아다리 를 그리고 신앙의 자리에서는 아멘을, 아니 모든 날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다리'라는 말은 '맞춤'이란 뜻의 일본어 '아타리'를 잘못 사용하는 말로 버려야합니다. 單手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46 no image <문화칼럼> 바벨탑 고양이-이은상 목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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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5 2003-08-06
http://www.rpress.or.kr/files/column/cats.jpg바벨탑 고양이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고양이족이냐 싱글족이냐' 젊은층 사이에 새로운 종족이 나타났습니다. 요 즘 화제만발인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를 계기로 혼전동거에 대한 찬성의 목소리로 후덥지근합니다. 드라마에는 항상 안티세력이 등장해서 '인어아가 씨'도 '올인'도 뭇매를 맞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당초 여론의 비판이 불가피 할 것으로 보였던 '옥탑방 고양이'는 예상외로 쉽게 용인되었다고 합니다. 혼전동거에 대한 찬성의 목소리는 여론에 그치질 않고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도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한 정당대표는 100% 찬성을 외치기도 했으며, 그동 안 동거를 숨겨오다가 당당하게 밝히는 커플도 늘고, 회원수가 30만 명에 이 르는 인터넷 동거사이트도 유행하기도 한답니다. 마치 지루한 장마가 거치고 본격적인 피서철이 돌아온 것처럼 전통적인 가족제도 안에서 오랫동안 금기 시 되어왔던 동거가 음지에서 양지로 급부상하고 있나봅니다. 그렇다면 동거에 대한 찬성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자의 상황적 배경에 따 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살아봐 야 상대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동거단계에서 끝내는 것이 이 혼율도 줄일 수 있다'. '연애 3년보다 3개월 동거가 훨씬 더 효과적이라 생각 한다.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정확한 판단 아래 앞으로의 부부사이를 구체화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혼전동거에 대한 찬성의 배경에는 '우린 살아보고 결 혼한다. 그래서 이혼의 아픔을 줄인다'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사고방식이 지 배적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동거를 예찬하는 젊은 세대 앞에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70%이상이 찬성, 80만 쌍 정도가 실제 동거) 우리가 할말은 무엇일까요? 혹 시 반대해서 꽉 막힌 보수니 꼴통이니 하는 욕이라도 먹는 것이 아닐지 모릅 니다. 아니면 자기책임아래 자기 삶을 선택한다는데 주제넘게 가타부타하지 말라는 비난도 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삶의 방식을 남에게 강요받기 싫 어하는 시대일수록 성경적 규범과 윤리를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 다. 동거는 성도로서 옳은 문화가 아니라 봅니다. 옳지 않다는 말은 그저 '매우 모험적인 선택'이라고 지적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택과 자유의 문제 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금령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거는 결혼 외의 육 체적 결합이기 때문에 즉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벗어난 성의 오용인 간음이 발 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혼인이라는 제도입니다. 혼인이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일인데(창2:24,마19:6). 이것이 어느 때 일 어 나는가하면 서로 아내와 남편으로 맞이하기로 서약하는 그 시간에 성립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립이 단순히 개인 둘만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여러 증인 앞에서 서약하기 때문에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거는 이러한 사회적 증인, 혹은 법적 절차 이전 의 남녀의 결합이기 때문에 혼인이전의 일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정 상적인 부부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또 한가지 깊이 생각해볼 문제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결혼의 우선되는 목적은 개인의 즐거움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부라 는 한 사회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나타내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신성하 고 중요하기에 성경은 혼인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의 상징으로 말합 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법은 이 땅위에서만 즉 물리적 육체적 사회적인 관계 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인 나라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혼전동거는 단순히 인륜 도덕적인 윤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경륜의 진행을 가로막는 신적 윤리에 대한 불의를 나 타내는 것입니다. 정당한 부부의 도리를 벗어난 육체적 결합은 내 인생을 내 가 경영하겠다는(창11장) 바벨탑문화일 수 있으며 개인적 책임, 사회적 책임 너머 하나님나라의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험이 없다' 에서 '임신경험이 없다'는 말로 바뀐 소위 성적혁명 시대에 유행의 흐름에 앞도 뒤도 볼 것 없이 따라가서는 안되고 지고지순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하에서 옥탑까지 위로 아래로 묵시가 없이 방자가 충만한 이 땅위에서(잠 29:18),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삿21:25) 시대 앞에서 하 나님 나라의 거룩한 경영에 힘을 다하여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진정한 사 랑은 기다리는 것이라지만 이런저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동거하는 커플에게 도, 결혼의 실패로 고통을 겪는 자들에게도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는 결코 제한 적이지 않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할 것입니다(요8:11).
45 no image <문화칼럼> 부적절한 관계-이은상 목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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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7 2003-07-24
http://www.rpress.or.kr/files/column/331ill.jpg부적절한 관계 이은상 목사/ 수원노회 분당신도시에는 자기동네를 '천당 아래 분당'이라 부르며 자부심을 가지고 사 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필자가 그 땅에 심방을 갔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 에 마침 점심때가 되어 심방대원들과 함께 주변식당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 다. 그런데 생각보다 음식값이 너무 비싸다보니 일행 모두는 값에 놀라고 자 존심에 눌려 맛도 제대로 못보고 서둘러 식당을 나왔습니다. 그때 누군가 '우 리동네에 가면 만 원도 안될 음식인데, 역시 분당은 아무나 사는 동네가 아닌 가봐'하며 촌티발언을 하자 모두가 웃어버렸습니다. 문화란 가치관을 닮는 그릇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 한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가치관과 그릇의 차이가 적을수록 '편하다'는 것이고 그 차이가 클수록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재래시장에 가야 편 하게 장을 보는 주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백화점 외에서는 절대로 장을 못 보는 주부도 있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직 대중교통 이용이 편한 사 람이 있는가하면 가까운 곳이나 교통이 혼잡한 거리에도, 특히 비 오는 날 학 교에 간 자식 마중 나가러 갈 때에도 품위 때문에 자가용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언어와 지식과 학벌, 패션, 뷰티, 먹거리, 여행, 숙박 등 다양 한 라이프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문화 현상이 종교생활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일반적으 로 보면 큰 교회에는 상류층의 성도들이 많은 것 같고 반대로 작은 교회나 개 척교회에는 소박한 성도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교회도 부익부 빈익빈, 유유상종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러한 적절함과 부적절함의 문화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먼저 우리는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류층에는 상류 층에 걸 맞는 문화가 있고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농촌은 농촌에 적절한 문화 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장님은 사장님대로 사업상 고급승용차가 필요하며 고 급 식당도 가야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오직 성결만 추구하는 가난하고 작 은 교회에는 정치인이나 변호사나 의사와 같은 상류층 성도는 출석할 때 부적 절함을(부담감)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절과 부적절의 문화적 특성 때문에 성도의 90%이상이 대졸자인 교회 도 생겨나게 되고, 작은 교회에는 섬기려하는 자들보다 자꾸만 섬김을 받아야 할 자들이 들어오게 되고, 복을 강조하는 교회에는 '복(돈)=믿음'이라는 등식 을 교회가 강단에서 증명해주기 때문에 검은 부자든 하얀 부자든 모이게 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가 복음보 다 더 능력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추구하는 편안함 속 의 우아함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도로서 부적절함 속의 추함인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을 가르칩니다(빌1:27). 여기서 합당함이란 옷 입는 문화를 말합니다. 마치 아무리 편하고 유행이라 도 권사님이 힙합바지를 입고 우아함을 자랑하지 못하듯이 신자에게도 적절하 고 구별된 삶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것이 합당한 삶은 아닌 것입 니다. 또 한가지, 이러한 문화적 특성 앞에서 우리는 각자 성도로서의 부적절한 삶 은 없는지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성도의 특징은 하나님나라의 윤리 와 문화들과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예로 주일성수와 십일 조, 헌금, 봉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에 입각한 마땅한 크리스 찬 문화이기 때문에 성도라면 누구라도 부득이함이 없이 자원함으로 실천합니 다. 그러나 현대교회를 보면 이러한 문화에 부적절함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가 령 헌금생활의 경우 매우 인색합니다. 이발, 미용, 사우나, 자장면, 과자 값 도 10년 전에 비하면 훨씬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적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 다. 그러나 구역헌금, 주일헌금, 감사헌금을 보면 수년 전 그대로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생활필수의 요구에는 적절하게 대응하지만 영적생활의 요구에 는 부적절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치사하게 교회에서 돈 얘기하 는 자체가 복음 앞에서 부적절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깊은 예배의 자리, 넓은 봉사의 자리, 높은 헌금의 자리가 적절한가 부적절한 가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만일 부적절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십시오. 만일 적절하고 편안함을 느낀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분당 위 에 천당'을 소유한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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