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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 no image |목회칼럼| 나쁜 지도자들_이광호 목사
편집부
3492 2013-12-30
나쁜 지도자들 < 이광호 목사, 실로암교회 > “불의를 일삼는 조직에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이 나라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미국은 순수하고 정직한 나라인가? 국가의 지도자들이 전체적으로 부패한 지경에 빠지게 되면 암울한 상황이 도래할 수밖에 없다. 거짓말을 일삼는 지도자들이 들끓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향해 정직하게 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치는 정치인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입술로는 한결같이 애국자인양 주장하지만 저들 가운데 진정한 애국자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저들에게는 권력을 향한 유치한 욕망만 있을 뿐 더 이상 진실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필자는 지금 진보냐 보수냐 하는 정치적 성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부정직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치인들과 지도층 인사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이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어른들은 당연히 그에 대한 깊은 신경을 써야만 한다. 우리는 지도자들의 부정직한 삶의 태도가 이 땅의 아이들을 어둠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자라나는 세대는 어른들의 행동을 보며 그대로 답습해 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모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최근 일부 천주교 사제들이 시국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일부 기독교 단체와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인들이 그에 합세했다. 앞으로 누가 어떻게 나설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종교를 앞세워 시국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슬픈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굳이 정치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근저에는 정치, 종교, 경제계 지도 계층의 부정직한 행태가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나쁜 지도자들이 득세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그로부터 피해를 입는 자들은 순진한 모든 백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국가와 백성을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이기적인 욕망에 꽉 차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땅에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며 그에 동참하고자 하는 진실한 지도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국가의 지도자들 가운데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진실의 편에 설 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우리 주변에는 세상이 바뀌어 힘의 판도가 바뀌게 되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그 쪽으로 몰려 갈 것이 뻔한 소신 없는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지금 이 나라에는 부패한 지도자들이 득세하고 있을 뿐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을 위한 진정한 봉사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쁜 지도자들은 위장된 웃음을 머금고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다. 당리당략에 익숙한 정치인들과 저들의 충견을 자처하는 자들은 늘어나는 반면 백성들을 위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 순진한 일반 백성들은 어느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그로 말미암아 분별력을 상실한 힘없는 국민들 사이에는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은 천박한 욕망을 추구하는 나쁜 지도자들의 거짓말에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라 주장하는 지도계층 인사들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일삼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욕되게 하는 가증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성도라면 거짓 세력과 타협하며 악을 도모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뻔뻔한 태도를 취할 수 없다. 한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과 법조인들 등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는 기독교인들이 상당 수 차지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장로도 있고 집사도 있다. 그 사람들은 교회에 이름을 올려 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진정한 성도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기독교인이라 주장하는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진실보다 천박한 권력을 탐할 것이며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불의를 일삼는 조직에 충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강력하게 촉구하는 바이다.
463 no image |목회칼럼| 교인 수, 교회 수, 어린이 수 감소를 접하고_김수흥 목사
편집부
3766 2013-12-17
교인 수, 교회 수, 어린이 수 감소를 접하고 < 김수흥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 “기도하지 않고 말씀 연구 않는 것이 한국교회 위기 가져온 것” 최근 각 교단이 9월 총회(2013년 9월 총회)를 하는 중에 발표한 각교단 통계는 교인 수, 교회 수, 어린이 수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는 소식이다. 이를 두고 원인을 분석한 것을 보면 바른 분석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원인을 나열하는 것을 보면 연합기관의 금권선거와 내부갈등,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의 잇단 구설과 건축부도, 교회당 경매 등의 소식이 한국 개신교회의 끝없는 추락의 원인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이 교인 감소로 이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연합기관의 그 고질적인 문제들이 왜 생겼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참 원인을 찾아내지 않고, 연합기관의 그 고질적인 문제가 교인 감소, 교회 감소, 어린이 감소로 이어졌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바른 분석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한국 기독교목회자 협의회가 발표한 보고에 따르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원인을 내 놓았는데, 목회자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19.6%), 교인들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면(17.7%), 헌금을 강조해서(17.6%) 등을 꼽았다. 그리고 동 협의회에서 목회자들이 말하는 원인 분석을 내놓았는데,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 네 가지를 보면 첫째, 신앙의 실천부족(31%), 둘째, 지나친 양적 성장 추구(27.7%), 셋째, 목회자의 자질부족(14.8%), 넷째, 교회의 양극화 현상(7.6%) 등을 꼽았다.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두더라도 목회자들 스스로가 꼽은 신앙의 실천부족이나, 지나친 양적 성장추구, 목회자의 자질 부족, 교회의 양극화 현상 같은 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하나, 그러나 그 원인들이 참 원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런 원인들은 벌써 여러 해 동안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그런 원인들이 생기는 참 중요한 원인을 찾아내어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고려해야 할 원인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말하는 그 원인들 속에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단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도행전 6장 4절에서 그 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당시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사도들의 이 외침 뒤에는 초대교회의 놀라운 부흥이 이어졌다. 우리나라 교계에서는 오래 전까지만 해도 사도행전 6장 4절이 아주 중요한 요절로 나왔는데,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성구는 목회자들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최근의 통계, 혹은 최근의 보고서에는 기도와 말씀 전파라는 것이 등장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기도와 말씀 전파는 어떤 교단에서는 금기시 되고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사실 지난 5월(2013년) 기독교목회자 협의회가 발표한 원인 같은 것들(신앙의 실천부족, 지나친 양적 성장추구, 목회자의 자질 부족, 교회의 양극화 현상)은 기도와 말씀이 아니면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부수적으로 생긴 그 원인들은 100년이 가도, 혹은 1,000년이 가도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많은 기도를 하고 또 말씀을 연구하여 말씀을 잘 전파하면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의 신앙은 강화되고 또 실천되는 법이고, 교회는 성장하게 마련이며, 목회자의 자질도 해결될 것이고, 교회의 양극화 현상도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사도시대에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했던 이유는 말씀 사역을 위해서였다. 말씀을 능력 있게 전파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두 시간도 하지 않고 성경공부를 시키는 교역자, 기도를 두 시간 이상도 하지 않고 설교하러 나서는 설교자는 거의 실패한다. 공기만 진동하고 강단을 내려오고 만다. 우리는 매일 정규적으로 최소 두 시간, 때로는 세 시간 정도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한 번 설교를 위하여 최소 두 시간 이상의 기도가 필요하다. 필자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너무 답답하여 울먹이는 심정으로 합동신학 채플(chapel) 설교(한 학기에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를 위하여 5시간 이상을 기도하고 강단에 서곤 했다. 그래도 엄청난 영적 부흥은 다가오지 않았다. 단단한 마음의 땅들은 오래오래 시간을 두고 기경해야 할 것이다(호 10:12).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인 수 감소, 교회 수 감소, 어린이 수 감소를 해결하려면 그 동안 우리가 말하던 원인들을 더 들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 같이 기도에 생명을 걸어야 할 것이며,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여 말씀을 전파하는 중 개 교회 부흥, 교단 부흥, 한국 교회 부흥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바로 기도가 약해진 것이 위기를 불러왔고, 말씀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위기를 불러왔다.
462 no image |신학칼럼| 구원관에 있어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성_박동근 목사
편집부
4625 2013-12-17
구원관에 있어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성 < 박동근 목사, 강변교회 교육목사 >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을 추구한 유대교는 율법주의로 규정되어야” E. P. 샌더스는 1세기 유대주의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하였다. 그의 언약적 율법주의란 은혜의 언약에 의해 언약 공동체 안에 들어간 자들이 율법을 순종하므로 공동체 안에 머무는 체계를 의미한다. 샌더스는 1세기 유대주의 문헌을 연구하고서 유대인들의 인간론이 죄에 있어 중립적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에는 원죄나 전적 타락 같은 것은 없다. 인간은 은혜와 죄성이라는 본성과 무관하게 죄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지을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죄는 그 순간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샌더스는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적 혹은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시작이 언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가 아닌 은혜의 종교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를 기독교와의 연속성 속에 넣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새로운 언약적 율법주의이다. 유대교와 같이, 기독교도 은혜로 공동체에 이동하여 순종으로 머무는 체계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샌더스는 유대교를 나름 잘 통찰했다고 여겨진다. 샌더스가 소개한 유대주의는 개혁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한 유대교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율법주의로 바울과 대립된 것으로 이해되는 유대교는 은혜로 시작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도 유대교가 은혜 자체를 부정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은 유대교를 결코 펠라기우스주의적으로 보지 않고 세미펠라기우스주의로 규정해 왔다. 그래서 바울이 반대한 유대주의나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을 세미펠라기우스주의자들로 보았고, 세미펠라기우스주의로서 로마 카톨릭을 이와 대비시켰다. 확실히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맞다. 그들은 은혜로 시작하지만 순종으로 머문다. 그러나 여기서 순종하는 인간은 은혜와 협력하지만 스스로의 중립적, 자율적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인간이며, 이러한 인간의 행위가 은혜와 함께 공로를 이루니 이들은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율법주의인 것도 확실하다. 정확히 통찰했음에도 불구하고 샌더스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왜 언약적 율법주의를 율법주의가 아닌 은혜의 종교로 규정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샌더스의 유대교 종교 체계의 해석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동일한 체계를 놓고 한편은 은혜의 종교로 규정하고 한편은 율법주의로 규정하는데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고 구원론에 큰 차이를 안은 채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헤르만 리델보스가 본 유대교도 샌더스와 다르지 않다. 그는 말한다. "이스라엘에게 특별 은총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은총을 주신 목적이 유효한 구원의 원인으로 이해되지 않고, 토라를 성취해 보상을 받게 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헤르만 리델보스, 하나님 나라, 287). 따라서 헤르만 리델보스는 특별은총이 있지만, 협력하여 이룬 순종을 공로로 여기며, 죄를 질적 의미가 아닌 수량적 의미로 이해해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을 추구한 유대교를 율법주의로 규정한다. 헤르만 리델보스에 따르면, 예수님의 구원 선포는 유대주의적 공적 사상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따라서 헤르만 리델보스를 따를 때, 이스라엘 안에 구약을 온전히 따른 백성들과 구약을 공로주의적으로 이해한 예수님의 대립자들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문헌에서 이런 율법주의자들의 사상적 흔적이 발견된다. 예수님의 사도로서 헌신한 바울과 유대교와의 논쟁은 예수님의 복음과의 연속성 속에서 율법주의에 관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새관점 학자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늘 "민족적 우월감에서 나온 민족적, 종교적 배타성"에 도전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예수께서는 실제로 유대인의 민족적 배타성만을 지적하시지 않고, 유대 백성 안에 유대인 세리와 창녀를 자기 의에 비교하며 정죄한 유대인들도 공격하였다. 유대인들이 공격한 것은 이방인만이 아니라(민족적 배타성), 유대인으로서 도덕적 흠을 가진 세리와 창녀(도덕적 배타성)도 공격하였으며,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들의 교제의 식탁에 비수를 꽂았다. 민족적 배타성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종교개혁자들도 인식한 문제이며 설교의 자료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들은 민족적 배타성만이 아니라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자기 의를 드러내며 다른 죄인들을 정죄한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사상의 문제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타락하여 공로화 된 유대교와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한 헤르만 리델보스의 이해가 합당하다. 물론 유대인들의 교리적 부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참된 신자가 존재했지만, 구약과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도 지적하고 싶다. 예수님과 바울의 복음은 유대교의 성취나 재해석이 아니라 구약의 성취로 봐야 한다.
461 |김영규칼럼| 첨단 과학 기술과 교회 존재 의미 파일
편집부
3784 2013-12-03
첨단 과학 기술과 교회 존재 의미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인간의 최종 종착점이 물질계가 아닌 영적 세계임을 각성해야” 최근 한국에서 세계 에너지 문제에 있어서 크게 공헌한 연구 논문이 있다면, 2013년 10월 24일 Nature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한 대장균에 의한 휘발유 생산기술에 대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07년 이래 이와 비슷하게 대장균을 유전자 조작하여 알코올 생산을 가능케 한 기술들은 소개되어 왔었다. 하지만 직접 셀룰로오스를 구성하는 굴루코제를 변형하여 가솔린 일종으로 분류될 수 있는 디젤보다 짧은 탄화수소화합물분자들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한국 과학기술자에 의해서 가장 먼저 확보되었다는데 의미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그 생산이 대장균을 통한 효소활동에 의해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은 대량 생산을 위해서 방해가 되는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입자가속기들 중 소규모 양자 가속기를 건조할 수 있는 기초과학 기술들이 조금씩 발전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도 고무적이지만, 직접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중성미자들을 검출하여 좀 더 정확한 변환상수를 밝히는데 성공하는 경험도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 환경기술 중에서도 일산화탄소를 수소로 바꾸는 기술이라든지, 이산화탄소를 그래핀 망을 통해서 포집하는 기술, 액체를 그래핀에 의해서 싸서 액체 안에 있는 물질의 변화를 관찰하는 기술들은 좀 더 확대되어 기초과학의 발전과 경제생활에 유용한 다른 기술들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최근 동북아 군사적 긴장 상태가 지속이 되면서 최첨단 국방기술이 전쟁방지의 최우선 정책이 됨으로 인하여 국민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갈 가능성이 있지만, 한반도가 열강들의 틈에 끼어 힘이 지나가는 길목으로 다시 전략하거나 유린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들을 알면서도 장기적인 대비에 예산만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전투기나 군함의 스텔스 기능에 있어서 정보 수집의 다양한 파장들이나 파형 및 주파수들(infrasound, sound, ultrasound, hypersound, heat)을 조작하거나 조정하기 위해서 반도체에 쓰이는 나노물질 기술들과 전도성 물질을 넘어 금속 표면에 전기가 생산이 되는 기술들을 융합할 수 있는 기초기술들이 잘 상업화되도록 돕는 일부터 시작하여 국가 미래안보를 준비해야 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핵 에너지를 이용하지 않고 우리 주변의 흔한 물질들을 이용해서 장기간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고 장기전쟁도 치를 수 있는 에너지 생산기술들은 평화의 시대에 더 필요로 할 것이다. 어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대해서도 몸 자체가 에너지를 생산하여 저항할 수 있는 기술들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런 미래 첨단 기술들은 후손들이 이스라엘처럼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행복의 조건으로도 유용할 것이다. 물론 교회의 관심도 하나님의 관심처럼 인간 일반의 행복 문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교회는 가까운 이웃들과 나라 안에서의 갈등 및 세계의 이웃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도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라를 잃은 후에도 교회는 있고 교회의 가치도 살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행복이나 진보보다 창조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부정하는 회의론들에 대해서 더 경계를 한다. 이런 회의론이 아마 미래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히려 물질의 기원과 세계 질서의 기원에 대한 좀 더 객관적으로 설명할 기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제공될지도 모른다. 그 만큼 그렇게 큰 허무주의가 교회에게 종말론적인 고난과 고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시간개념이 없이도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이 유효적 원인으로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영역에서 물질세계의 근본입자들(한 차원이 열린 근본 에너지 초끈들의 극한 자유 공간)이 생겼다고 믿는 것이 물질세계의 기원에 대한 이해라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이 계신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미래의 위협에 의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안에서만 두려움의 근본이 있을 뿐이다. 지각세계의 마지막 종착점이 물질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과학과 기술 및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가장 두려운 경고로써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확인한다면, 그런 두려움과 허무주의가 지금 충돌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460 no image 장년 교인들을 위한 교리교육의 실제_황원하 목사
편집부
4352 2013-11-19
장년 교인들을 위한 교리교육의 실제 < 황원하 목사, 산성교회 > “교리 교육은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시작하는 말 필자는 최근까지 1년 10개월 동안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장년들을 대상으로 교리를 가르쳤다. 이때 가르친 것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 개관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소요리문답이었다. 필자는 담임목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부교역자 시절에 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는 교리를 가르쳐 본 적이 있지만 장년들에게는 교리를 가르쳐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장년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야겠는데 어떻게 교리를 가르쳐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주위에 있는 선배들이나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필자의 주위에는 여기에 대해서 조언을 해 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스스로 알아서 하기로 했다. 1. 금요 기도회 시간에 교리공부 도입해 우선 교리를 전체 교인에게 가르칠 수 있는 마땅한 시간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구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주일에 하려고 했지만, 주일 오전에는 교인의 층위가 너무 광범위한데다 교회력과 절기 등을 고려하다 보니 할 수 없었고, 주일 오후에는 매달 1-2회 있는 헌신예배와 각종 행사들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금요기도회 시간에 교리를 가르치기로 했다. 금요기도회 시간에 설교를 하지 않고 교리를 가르쳤는데 교리를 처음 배우는 교인들에게서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도회라면 모름지기 말씀이 은혜롭고 뜨거워야 하는데 교리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딱하고 고전적인 표현들로 가득 찬 교리를 듣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 고역이었다. 처음에는 목사가 저러다 말겠지 하던 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평하기 시작했다. 어떤 분들은 필자에게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물론 교리를 배우니 좋다고 말한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중에 깨달은 것인데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은 힘들어 하는 필자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가보자라는 생각과 교리가 언제가 사람을 변화시키겠지 하는 막연한 신념을 가지고 필자의 생각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반응이 시원찮으니 필자 자신도 재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장년들에게 교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터득하게 되었다. 2. 교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 모색하길 교리를 가르칠 때 교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야 하고 그들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젊은 청장년들일 경우에는 교리의 문구를 충실히 해설하면 된다. 보충 자료들을 활용하여 교리의 역사적 배경부터 성경의 근거 구절까지를 다룰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든 장년들의 경우에는 다르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처럼 이해력이 높지 않다. 게다가 그들의 삶의 정황은 복잡하고 다단하다. 따라서 목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마구 말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특히 넓은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말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에는 그들의 이해도와 관심도를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2번째 주일부터 4번째 주일까지(3문-11문)에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교리가 나온다. 이것을 가르칠 때에 신앙고백서에 적혀 있는 문구 자체만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이해를 잘 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이해했다 하더라도 금방 잊어버린다. 따라서 이런 교리를 가르칠 때에는 그 문구에 담겨 있는 뜻을 풀어서 가르쳐야 하고, 그 뜻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즉 원죄와 자범죄로 인한 인생의 비참함과 무능함이 실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며 체감되는지를 설득력 있고 생생하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실존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은 교리 교육은 효과적이지 않다. 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위주로 시작해 필자는 장년들에게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설교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강의보다는 설교가 장년들에게 적합하다. 만약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작은 그룹에서 교리를 가르친다면 교리의 문구 자체를 충분히 다룰 수 있겠으나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장년들을 대상으로 교리를 가르치려면 그룹이 크든 작든 교리의 문구 자체를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다. 교리를 가르치는 목사야 이미 준비된 사람이니 괜찮겠지만 교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장년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장년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에는 설교 형태가 낫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는 52주 동안 다룰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목사가 일주일에 한번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설교한다면 1년 동안 특정한 본문이나 주제에 치우치지 않고 성경 전체의 주제를 골고루 가르칠 수 있게 된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를 설교할 때에는 그 주일에 해당하는 문답들을 충분히 연구한 후에 관련된 성경본문을 찾아 주해하면서 연결하여 설교하는 것이 좋다. 이때 성경본문을 주해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지 문답의 문구들 자체가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리 자체는 설교의 근거가 아니다. 교리는 성경본문을 해석해서 나오는 교훈일 뿐이다. 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볼 때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의 순서대로 설교하는 것이 좋지만 때로 교회의 일정과 상황을 고려하여 순서를 바꿀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성례는 25번째 주일부터 31번째 주일까지에 위치해 있으나 몇 주 후에 성례가 있다면 그 부분을 먼저 설교할 수 있다. 마치는 말 목사는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융통성 있게 교리를 설교할 필요가 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는 문구들이 대체로 쉽게 되어 있다. 다른 신앙고백서들에 비해서 문구가 길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의 제일 앞에 나오는 ‘위로’는 전체 내용의 목적이요 이유이다. 따라서 이 신앙고백서를 설교하는 것은 다른 신앙고백서 설교보다 쉽고 유익하며 점차 다른 신앙고백서들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다지게 될 것이다.
459 no image |김영규칼럼| 현대 사회에서 신자의 삶이 가지는 의미
편집부
4508 2013-10-22
현대 사회에서 신자의 삶이 가지는 의미 < 김영규 교수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하나님의 형상 빛내며 버티는 것이 인류의 과학 기술보다 위대해” 신문이나 잡지 및 방송 등의 대중 매체들은 읽을거리나 이야기 거리 혹은 볼거리를 찾아 이용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 즐거움 뒤에도 가능한 한 인간의 복합적인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 조건들이 뒤따르고 있다. 그런 요구들 중에서 창의성, 경제성, 예술성, 시대성, 대중성 등 다양한 조건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가치나 정체성이 그런 조건들에 맞추게 되면 장기적 안목에서 교회는 타락하고 거짓교회가 그런 창의성, 경제성, 예술성, 시대성 그리고 대중성을 등에 업고 교회의 중심 자리에 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간들이 길면 길수록 참된 교회 자체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그때 국가나 사회도 역시 피해를 보게 된다. 좋은 사회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은 좋은 사람들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가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사회 안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영원히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근본을 깨닫는 기회를 얻지 못하여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복을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하고 죽음의 즐거움에 빠지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죽음은 아마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형벌이기 때문에, 인간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도약 점이라기보다는 이제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운 참된 복으로 갑자기 옮겨지는 비상하는 점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런 비상의 점에 의해서 바르게 평가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약자가 되거나 영혼에 있어서 이미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거나 포기하면서 살아가기 쉽다. 물론 교회에 오는 자들은 오래된 죄인들일 수 있고 극한 죄인들일 수 있다. 기도하기 위해서 모인 자들도 기본적으로 우울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죄인들이 교회 안에서 큰 일을 행하고 사회 안에도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점이 바로 국가나 공공 매체들이 이룰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깨끗한 자들이 모인 자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최소한 회개할 수 있고 잘못이나 오류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자들이 모인 모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런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들이 가득한 곳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죄인이 되는 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를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 도시에서 터툴리아누스가 그러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키프리아누스가 그렇게 돌아와서 그들이 진리의 증인들로서 순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하여 돌아온 아우구스투스가 카르타고 도시를 빛나게 하였다. 이처럼 회개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간단하여도 국가나 사회가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에게 위대한 일은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기술도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패망으로 가게 하는 교만의 씨가 되고 있다. 에너지 법칙은 비가역성(시간)을 근본으로 하는 운동의 법칙이지만, 그런 법칙으로부터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런 설명이 하나님 없이 무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교만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담의 죄나 사탄의 죄의 근본은 모두 이런 교만의 극치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자, 하나님께 경배하고 감사하지 않는 자 모두가 같은 죄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인류에게 일순간 교만이 어떤 힘으로 있을 때 사고로서 일어난 순교보다 위대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진보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로서 자연과 인간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하나님께 진정 돌아 와서 거기에서 발견되는 은택들을 하나님께 돌리고 감사할 때 순교보다 위대한 일이 될 것이다. 시대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란 진정한 인류에게 그런 정신 하에 어떤 시대에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진보를 이루는 일일 것이다. 우주의 역사는 첫 창조로부터 엔트로피가 커가는 소비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런 소비의 역사는 인간에게 은택의 시대들이고 기회의 시대들이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짧지 않다. 인생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서 우주의 궁극적 일들이 꽃피는 공장과 같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빛나는 우주 역사에 있어서 더 이상 기회가 없는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는 공장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빛내며 버티는 것이 인류의 과학 기술의 모든 진보들을 모은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일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진보가 아니라 어디에서 피는 하나님의 선물에 불과하다. 위대한 일은 그런 인간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시대를 저항하여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묵묵히 극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진보를 이루는 일이 위대한 일이다. 모든 것들을 버리고 그런 것들만 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미래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적을 것이다.
458 no image |목회칼럼| 타잔의 실수: 사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_정요석 목사
편집부
4368 2013-10-08
타잔의 실수: 사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보는 모든 시도들은 한계 있기 마련” 제가 어렸을 때 타잔이라는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타잔이 초식동물을 잡아먹으려는 사자를 제압하면서 다시 한 번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 때는 타잔이 참으로 멋있다고 여겼는데, 커가면서 사자는 그럼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 사자와 표범과 하이에나와 같은 포식자들이 누우와 얼룩말과 영양 같은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잔인하게 보인다고 하여 이들을 한마디로 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초식동물과 같이 온순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들의 소화기관과 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들이 풀과 잎사귀를 뜯어 먹어도 맛있게 소화시킬 수 있는 구조를 만든 후에야 육식동물에게 잡아먹지 말라고 경고할 수 있습니다. 타잔이 동물을 잡아먹지 못하게 해서 끝내 포식자들은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초식동물들은 무수하게 번식합니다. 너무나 번식되어 풀과 잎사귀들은 모두 뜯기어 없어지고, 환경은 고갈되고 오염되고, 전염병이 번지면서, 끝내는 초식동물도 대부분 죽게 됩니다. 타잔의 값싼 동정이 전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이사야 11장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자를 소처럼 풀을 먹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데, 소를 잡아먹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포식자들이 부상의 위험을 무릎 쓰고 사냥을 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제 풀이 고기보다 훨씬 맛있으니 위험한 사냥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 순간부터 사자는 소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육식 동물의 신체 구조가 바뀌어 버리는 그 순간에 모든 짐승은 서로 친구가 됩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 손상을 입지 않습니다. 짐승들은 소화 기구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감과 공격성도 변화하여 그 마음에 평화가 가득합니다. 그 날이 되면 사람 또한 변화를 받습니다. 사람 또한 인체 구조가 변하고, 그 마음이 변화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여 아무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세상 법률로 악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십니다.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세상에는 변화가 가능합니다. 더 훌륭한 대통령이 나온다고 세상에 본질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 주변에 발생하는 부정부패와 사건사고와 공갈과 사기와 미워함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20세기에 소련과 중국을 비롯하여 공산주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차별이 없는 인간 사회가 탄생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대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은 교육을 시켜도 그 마음속에 있는 죄성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생산력이 발달하여 풍성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자아비판과 타아비판과 엄청난 사상 학습을 받으면 사람의 내면이 바뀌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고귀한 내면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필요는 끝이 없었고, 사적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생산력이 발달하여 갖고 싶은 것을 무한정 갖게 된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행복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아야 할 의미가 없어지므로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지고 허무에 빠져 자살이 속출할지 모릅니다. 사람 자체도 변화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 줄 아는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삶을 최대의 덕으로 아는 정신과 마음가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보는 모든 시도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땅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타잔과 같이 죄 없는 사자만을 족치는 경우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일하셔서 본질적인 변화를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만드시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드는 사람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습니다. 하나님은 몸소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여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오직 이 나라만이 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큰 기도입니다.
457 no image |신앙칼럼| 험난한 개혁주의 신학의 길_한병수 박사
편집부
5451 2013-09-24
험난한 개혁주의 신학의 길 < 한병수 박사, Calvin Theological Seminary 졸업 > “주장하고 논쟁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태도 갖추어야”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분들은 ‘지나치게 엄격한’‘건조한’‘죽은’‘지나치게 사색적인’‘차가운’등의 수식어로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이러한 비난은 단지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의 성향까지 겨냥한 지적이다. 이럴 때 반박의 격한 손 사레를 치기보다는 성찰이 우선이다. 물론 적당한 변명도 필요하다. 이눌서 선교사가 잘 지적한 것처럼 개혁주의 신학은 감정이나 감흥에 휘둘리지 않고 유명세에 의존하는 법도 없고, 나에게 유익이 된다거나 끌리는 호기심에 맡겨지는 법이 없으며, 상황의 시급한 필요에 맞추고자 하지도 않으며, 오직 진리이기 때문에 붙들고 따른다는 정신을 고수한다. 게다가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으니 정나미가 뚝 떨어질 수 있는 체질을 가졌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은 각 개인을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 만든다. 각자의 마음을 격동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깊고 꾸준한 책임감을 갖게 만든다. 개인으로 하여금 외톨이가 되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친밀감이 가장 높아야 할 신학적 특성을 가졌는데 그런 이해에는 이르지를 못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사람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제시하기 때문에 믿음의 유무를 떠나 상대방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항구적인 끈기가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신학이다. 찬동과 계승을 독촉하지 않는다. 강요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님의 역사에 내맡긴다.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은 끈덕진 기다림에 있어서 실패했다. 반면에 개혁주의 신학은 내용이나 방법에 있어서 인간론 중심성을 거부하고 신론 중심적일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우리의 성정에 거북하고 때때로 상식과도 어긋나고 우리의 존재감도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한 박탈감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나는 광야이고 죄인 중에 괴수이고 무익한 종이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개혁주의 신학은 외로움과 고독과 인내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학이다. 엄청난 손실과 상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 길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당연히 '독종'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 성향의 소유자가 풍기는 인상은 친절과 매력과 감화력과 심히 동떨어진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인물들과 신학에 비판의 날을 세우는 분들에게 객관적인 명분과 실증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가장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가장 값없이 나누고 공유할 가장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고, 주장하고 논쟁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태도를 갖추는 수밖에 없다. 나아가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설파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의 ‘살벌함’을 풍기고 알리는 것을 마치 개혁주의 기수의 표징인 것처럼 여긴다면 서둘러 그런 의식에서 돌이켜야 하겠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고수하는 자는 기쁨과 즐거움과 자발성과 희열과 감격으로 충만해야 한다. 내용을 담는 정도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주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묵상한 이유가 그 계명을 즐거워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길을 즐거움 중에 걸어가는 것보다 더 향기롭고 매력적인 일이 없음을 생각할 때 개혁주의 신학의 길도 즐거움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는 객관적인 내용의 마땅한 수용이 주관적인 즐거움의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고급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자의 자태여야 한다. 우월성에 도취되어 서두르고 위협하고 독촉하는 식이 아니라 아무리 수용하지 않고 거부와 비판의 태도로 일관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친절과 관용의 자세에 있어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과연 개혁주의 신학의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본성적 부패를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우리가 시간이 종결되는 순간까지 인내할 수 있는 근거이며,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진리를 아무리 거부하고 멸시하고 멀리해도 기이한 일로 여기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허무는 무리들의 거친 물살에 휩쓸리고 저항하다 보면 발등의 불끄기에도 급급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객관적 거리를 두고 전방위적 침착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심히 어렵고 고독한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거칠고 딱딱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가장 높은 가치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주는 희열이 식어서는 아니 된다. 요약하자면, 개혁주의 신학의 내용적 부요함과 그것을 전하고 공유하는 자의 고결한 자세를 늘 겸비해야 한다. 내용이 빈약한데 자세만 고매하면 안 되겠고, 자세는 뻣뻣한데 내용만 부요해도 안 되겠다. 이는 진리의 이성적인 정보취득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진리의 전인격적 체득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신학교와 교회의 막중한 책임이 여기서 요구된다.
456 no image |목회칼럼| 자연을 수학화 함, 그 유익성과 위험성_배현주 목사
편집부
3709 2013-09-10
자연을 수학화 함, 그 유익성과 위험성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 “구원의 계시는 수학적 이성으로 해석되지 않아” 14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그가 그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익명으로 출간한 그의 논문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제자격인 케플러는 천문학 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자연 과학자 갈릴레오가 고전 역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시대에 이르러 자연 과학은 하나의 이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자연을 수학화 함이다. 갈릴레오 이후에 자연 과학은 자연을 수학함이라는 이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방향은 후대에 계몽주의 철학이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이삭 뉴튼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저서에서 더욱 철저하게 자연을 수학화 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세속 철학자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은 수학적 이성을 절대시하는 이론을 개진하였다. 그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 그는 존재의 근거를 생각하는 자신에게 두었다. 이는 계시가 만물의 존재 근거라고 제시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들은 그 이후에 칸트에 의해 저작된 <순수 이성 비판>에서 수학적 이성만이 진리를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는 도그마로 나아간다. 그 이후 인류는 수학으로 해석이 되는 자연만을 오로지 인간이 제대로 인식 할 수 있는 자연이라고 간주하였다. 이러한 자연 과학의 이념은 계시가 위험하다 경고하는 영역에까지 부단히 실험과 증명을 통해 해쳐왔다. 그 결과 너무나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미신으로 간주 되었던 것들의 실체가 수학 앞에 드러났다. 거짓 종교들이 드러났다. 자연 과학은 인류 문명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자연 과학의 이념으로 사라져 버린 높은 가치들로 인해서 인류는 오히려 정신문명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자연 과학의 발달은 인문 과학의 퇴조로 이어지고 결국 인문 과학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현대 시대는 과학자 중에서 시를 음미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학자가 거의 없다. 시를 통해서 자신의 감성을 돌이켜 볼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 그래서 시는 겨우 동시를 통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거나 여인네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인문 과학의 몰락은 철학에서도 겨우 언어 분석이 철학의 마지막 과제라고 주장하며 분석 철학이 발달하였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신학 분야이다. 18세기 이후에 발생한 현대 신학이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계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성서 고등 비평학이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인문 과학 전 분야가 몰락했다. 18세기 이후에 학문은 자연 과학의 구조로 발달하였다. 자연 과학이 철학의 범주를 결정하고 그 철학이 신학의 범주를 결정한다. 양자역학이 발달하자 포스트모던 철학이 발달하고 그에 맞추어서 포스트모던 신학이 발달하고 있다. 모든 학문이 자연 과학의 이념에 충실하다. 이제 왜 자연을 수학화 하는 이념이 한계가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자연이 수학 보다 크기 때문이다. 수학에서 루트 2를 풀면 1.414....로 불규칙하게 풀리게 되어 있다. 이것을 비순환 소수라고 한다. 이는 인류가 영원히 수학으로 루트 2를 완전하게 풀 수 없다는 것을 자증하는 것이다. 수학은 그 자체가 신비주의다. 고대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신비주의자였다. 현대 문명이 자연을 수학화 하면 할수록 점차적으로 진리로 부터 멀어진다.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는 자연보다 크시다. 여기에 자연을 뛰어 넘는 계시의 자리가 있다. 자연 과학의 발달 이후에 발생한 현대 신학이 얼마나 수학에 영향아래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구주의 말씀은 수학적 이성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계시는 시간과 인간의 언어를 뛰어 넘어야 해석 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해석해야 할 것이 구주의 계시다. 얄팍한 현대 신학으로 역사를 뛰어 넘어서 계시된 구주의 말씀을 해석할 수 없다. 참된 신자는 그 하나님 앞에 잠잠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17세기 대영제국 장로교 퓨리탄들이 그립다. 그 거룩한 성자들을 만나고 싶다. 정통 교회는 17세기 이전 개혁 신학으로 돌아가고 그로부터 사도의 디다케로 돌아가야 하리라.
455 no image |김영규칼럼| 물전지 이론과 신앙고백의 보존
편집부
4325 2013-09-10
물전지 이론과 신앙고백의 보존 < 김영규 교수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신앙고백서들을 교회가 보존하고 그 이하로 내려가지 말아야” 시간을 뒤로 가지 못하는 비가역적 자연수로 시간을 우리가 세고 있을 때, 그런 시간을 우리는 칸트가 이해하듯이 공간처럼 그렇게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지금 물리학에서 쉽게 상정하는 시간에 대한 변수처리는 더욱 더 웃을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운동으로부터 시간을 분리하기란 쉽지 않고 기존 차원에 그것을 한 차원으로 더하기에는 너무나 애매하다. 그런 시간이 기존의 차원에 플라톤-데카르트의 좌표 개념처럼 직각관계의 하나를 더한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 중 대표적인 한 예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어떤 절대적인 것을 상수처리하고 길이를 상대화시키는 것처럼 있지도 않는 시간을 상대화시키는 일이란 하나님 없이 피조세계를 피조물이 스스로 절대화시키는 어떤 방식과 다름이 없다. 틀리지 않는 이상 그때까지 진리라는 구실아래 어던 이론이 과학적 이론이라고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방법이 우리의 무지를 증명하는 가장 절묘한 길일 가능성이 높다. 얼마전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에서 연구하는 한 연구원으로부터 노포포라는 이름으로 2011년 6월 일본에서 소위 물 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고 일본신문 보도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내용인즉 마그네슘 음극과 탄소인 양극 사이에 물을 공급하여 각각의 소재에서 이온이 용출하여 전력을 생산하고 물이 아니더라도 커피, 콜라 등 음료수를 주입하더라도 전력발생이 가능하다고 하여 그런 전지로서 세계 최초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보도는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아주 부끄러운 주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먼저 개발된 물 연료 전지에 대한 세계 각국의 물타기 작업일 수 있다는 점에서 특허 전쟁이나 기술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인상을 얻게 된다. 일본에서 발표된 물 배터리는 전형적인 볼타전지의 기술 방식으로서 1841년 챨스 워커(Charles V. Walker)가 물 배터리(water-battery)라고 칭한 전형적인 그 전지이어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 발명을 아주 크게 평가해 주고 있다는 점인데, 그런 보도에 대해서 웃을 내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주류 과학계나 특허청 및 대기업들이 아마 일본의 그런 배터리의 대대적 보도처럼 물타기 작업에 적극 참여하거나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배터리의 전력생산의 원인과 관련하여 마그네슘이 물이나 소위 전해질 용액에서 이온화되는 현상에 전기발생의 원인이 있다는 1883년에 발견된 아르헨니우스(Svante August Arrhenius)의 이론이 대학에서 자신의 박사학위 과정에서나 그 당시 지배적인 과학자들에 의해서 인정을 받지 못했어도 긴 싸움 끝에 1903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음으로 인정을 받는 결과를 얻게 되었을 때, 그 이론도 지금 불완전함을 알리는 내용이 지금 한국에서 개발된 물 연료 전지 개념이다. 즉 소금이 물에 잘 녹을 때, 나트륨이나 염소가 물에서 쉽게 이온화되어 전자들이 자유롭게 배회하는 상태가 됨으로 전기 전도도가 높게 나타나지만, 설탕물이나 알코올이 물에 잘 녹거나 퍼지더라고 그 고분자들이 이온화되지 않아 전기 전도도가 낮다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금속의 이온화로 인한 자유 전자들의 배회도 있지만, 이온화 준위와 관계된 특정한 금속들 사이에서 그 금속들의 이온화나 물에 이온들이 없는 순수한 물의 경우에도 빠른 물의 이온화, 혹은 수소이온의 널뛰기나 펌핑이 원인이 된 자유 전자들의 배회도 전력생산의 다른 원인이 된다는 이론이다. 그런 일은 특별히 셀룰로오스와 같은 분자들의 구조 속에 더 빨리 물의 이온화 현상이 일어나 금속에 물이 직접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전력의 생산이 가능하다는 기술이다. 바로 세포와 같은 자연 자체가 이미 이런 원리에 의해서 전기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수 천 년 전에 욥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땅을 어떻게 허공에 매달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물었던(욥 26:7) 물음이 아직도 현대의 장 이론이나 입자 물리학에 의해서 최종 답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최근에 약력이나 전자기력 혹은 강력의 세계가 각각 힘의 입자들의 발견에 의해서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복병을 만나고 있다. 전자기력과 같은 낮은 에너지에서만 광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톱 쿼크나 힉스 입자들을 생성하는 세계를 넘어 훨씬 높은 에너지에서도 광자가 생성되어 나온다는 사실이 그 복병이다. 광자가 낮은 에너지 세계 속에서 자기력의 원인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훨씬 근원적으로 중력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고 하는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지금까지 모든 이론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최초에 ‘빛이 있으라’는 명령을 새롭게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인류가 포기하지 않고 끊임이 없는 의심들 속에서도 사실의 진실성이나 성경의 진실성이 좀 더 크게 발견되는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성에 따라서 진실되게 고백한 고백서들은 교회나 인류가 그대로 보존하고 그보다 덜 한 것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숭고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454 no image |김영규칼럼| 혼돈의 시한폭탄과 하나님의 의지
편집부
3847 2013-08-06
혼돈의 시한폭탄과 하나님의 의지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세계 질서 속에는 하나님의 자유의지라는 시한폭탄 담고 있어” 가족이나 직장, 혹은 집단이나 사회 안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이나 환경을 관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 만든 질서 속에서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을 두고 관리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깨닫지 못하며 관리할 수 없는 구멍이 있게 마련이고 이런 것들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연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열역학 법칙에 따라 혼돈이나 무질서가 질서를 낳는다는 이론이 상당히 타당한 것도 에너지 세계 자체가 피할 수 없이 입자들의 절대 운동에 의해서 설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력이란 힘의 근원에 수학적 의미에서의 ‘자유’의 개념이 도입되어 있다. 아마 힉스 입자들의 장들도 그런 자유의 개념이 도입이 되어야 설명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절대적 미시 세계 그 자체가 경우의 무한 수 아니라 혼돈 자체라는 말이니 그로부터 첫 시작하여 갑자기 팽창하여 세계의 한계선으로 남아 있는 가장 큰 거시 세계는 얼마나 다른 혼돈의 세계이겠는가? 그런 혼돈세계 사이에 생기거나 존재하는 모든 질서들이란 이미 그 근원적 환경에 큰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 은하계의 중심인 블랙홀이 그렇고, 태양계 전체의 운동이나 지구의 공전과 자전도 그러하며, 아마 이 여름에 종잡을 수 없게 하는 기후현상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물질세계의 근원에 혼돈 혹은 자유 개념이 도입되어 있다면, 그것은 질서의 필연성에 의해서 발견된 개념이다. 그 대신 질서의 필연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서 자체의 생성과 관련해서 추론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은 질서가 아니라 영적인 인격체로서의 임의성을 대표하는 칭호라는 점은 물질세계의 근원과 관련되어 발견된 혼돈이나 자유에 의해서 잘 지지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물질세계나 세계 질서 및 그 질서의 유지는 직접적으로 만물의 근원적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자유의지라는 속성에 의해서 풀어내고 있는 점이 그런 설정과 다른 점이다. 어떻든 세계나 그 질서의 세세한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의 자유의지라는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시한폭탄은 인간의 실수나 오류를 찾듯이 위기로 나타나기 전에 찾는 전혀 오점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시한폭탄이라고 하지 않을 뿐이다. 반대로 무한한 사랑과 긍휼 및 공의와 같은 속성들에 의해서 묶여 있는 하나님의 실체적 자유의지에 있기 때문에 피조된 모든 세계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로서 마지막 최고의 신뢰성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뢰성은 하나님의 다른 실체적 모든 속성들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그 자유 자체가 인간으로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신적 자유로움에 그 근본으로 있는 의지로서 하나님의 역사의 근원적 원인으로 있는 그 통일성이 그 기반으로 되어 있는 신뢰성이다. 루터의 말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자유의지의 조그만 불빛에 불과하다는 표현은 아직 그런 내용을 표현하기에 너무 부족하다. 말로 생각하고 우울증에 걸리며 인간과 감정을 교류하는 앵무새의 조그만 뇌와 인간의 뇌가 공통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대상들과 거리를 갖는 의지라는 자유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느냐는 물음은 아직도 살아 있는 모든 과학적 물음의 궁극적 물음으로써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뇌 세포 하나 안에 정보들의 네트워크를 결정하는 소위 ‘자아’의 범위를 어디에까지 정할 것인가도 확증된 것이 없고, 컴퓨터의 중앙처리 장치나 칩의 선형적 회로가 그렇게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서 아무리 빠르게 처리되어도 비록 느리지만 뇌 세포 내의 정보처리 능력 방식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다른 점을 비선형적 방식이어서 다르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뇌 세포가 스냅스들에 의해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거나, 신경전달물질들의 종류 및 그 채널들의 수와 그 운동 방향 및 그 운동 방향에 영향을 주는 인자들의 발견, 뇌 세포 층들을 가장 길게 연결하는 뇌 세포들의 수에 있어서 차이 등으로 그 특징을 찾아내어 다른 점들을 발견해 보아도 전체적 자아 문제가 근본적으로 풀리지 않아 다른 문제점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의식적 자아를 우리 신체와 동일하게 보아 면역체계 혹은 림프계 자아와 동일할 것이라고 보고 자신의 줄기 세포를 특정 장기의 세포로 배양하여 이식하면 곧 바로 그 장기에 그 세포가 적응하여 건강을 회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제 과학자들이 스스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위기관리에 있어서 최대의 시한폭탄은 여전히 인간이다. 아무리 훌륭하게 자라고 큰 성취에 의해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고 해도 그 인물 자체가 어떤 집단이나 사회를 파괴하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당연히 긴 생애의 검증을 통해서 그 능력도 검증이 되어 믿을만한 인물일지라도, 지금 초인처럼 자기 자신을 처서 오류로부터 벗어나고자 복종시키지 않으면 이웃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지나 마음으로 모은 모든 시대나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몇 천 년 동안 어두움의 시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은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요, 강제로 그 길로 이끌리어 가야 하는 길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 길의 참됨이 검증되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453 no image |목회칼럼| 법을 많이 알면 법을 잘 지킬 수 있을까?_김영길 목사
편집부
6176 2013-07-23
법을 많이 알면 법을 잘 지킬 수 있을까? < 김영길 목사, 더불어사는교회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 뜻 위해 세상나라 가치관 버린 삶” 가끔 청문회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청문회에 출석한 사람들 중에는 법을 공부하고 과거에 검사나 판사 혹은 변호사를 역임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청문회에 나가서 검증을 받게 되면 하나 같이 법을 어기고 부정을 저지른 경력 때문에 도중하차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법을 많이 안다고 해서 법을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오히려 법을 많이 공부하고 법을 많이 아는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이 알고 있는 법을 이용해서 법망을 피하거나 더 큰 죄악을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작은 범죄를 저지르지만, 법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더 큰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법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착하다거나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공부한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을 많이 안다고 해서 법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많이 공부하고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많은 교회들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지만, 성경 지식을 쌓는 일에만 열심을 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성경 지식을 아는 만큼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그러한 지식은 오직 자신만을 돋보이게 하고, 그 지식으로 교회 안에서 남들을 군림하는 위치에서 자기 지식을 자랑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나오는 율법사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남을 정죄하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다(마 23:17). 겉보기에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송장 냄새가 풀풀 나는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신자는 머리 속으로 외우는 지식이나, 말로만 그럴듯하게 재잘대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알다’라고 하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σκω)라는 단어가 ‘알다’라는 단어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순히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직접보고 확인한 사실을 아는 일반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지는 단어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 때, 그 안다고 하는 차원이 단순하게 몇 번 만난 적이 있어도 잘 알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σκω)라는 단어는 그러한 의미에서 쓰는 단어가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경험한 사실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말로 쓰인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 때 그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경험에 비추어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도 누구 보다 잘 안다고 할 때 쓰는 단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여러 번 읽고 하나님에 대한 상식을 많이 알고 있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에서 만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경험되어진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하여 감동하며 기뻐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지식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위하여 세상나라의 가치관을 버린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신자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장차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믿음으로 맛보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진정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생명처럼 붙들고 있는가?
452 no image |목회칼럼|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_최진기 목사
편집부
4234 2013-07-09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 최진기 목사, 자카르타동부교회, 태평양노회장 > “대한민국의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교회의 기도뿐” 다음달 15일이면 자카르타동부교회를 섬긴지 만 12년이 됩니다. 교회에서 3개월(6월 24일-9월 30일)의 기간을 허락해 주셔서 처음으로 소중한 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국에 나와 이런 저런 분들을 만나면서 교제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경인지역의 교회 중 10명 미만의 교회가 1500개는 된다고 들었습니다. 2050년이 되면 우리나라 개신교인 수는 300만으로 떨어질 것이고, 그 중 70%는 60세 이상이 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제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으로 가는 동포가 더 많아진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이것은 단순히 교회가 어려워진다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희망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부산에서 안세혁 선교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영국 웨일즈에서 태권도와 검도를 가르치면서 백인교회에서 말씀도 증거 하는 분입니다. 최근 그 지방 영국인 교회 집회에서 두 달 만에 3만 명의 마약 중독자가 회심하는 부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많은 교회당이 회교사원으로 넘어간다는 영국에서 이런 부흥이 일어난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교회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는 영국에서 부흥이 일어난다면 아직 불씨가 살아 있는 조국 대한민국에서야 왜 부흥이 어렵겠습니까? 부흥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닙니다. 실의에 빠져 있는 많은 목회자를 살려내는 문제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 구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잘 산들 100년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우리의 이웃과 동포들이 고통당하고 살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감내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헛되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이 오겠습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이용희 교수의 언급에서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봅니다. 서울에 와서 이 교수를 처음 알게 되었고 잠깐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2007년부터 에스더 기도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용희 교수가 누구인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자라신 분이 손양원 목사입니다. 손양원 목사가 나환자 목회자를 세우겠다고 한성신학교를 만드셨습니다. 그 한성신학교의 첫 번째 교수로 부임하신 분이 김준곤 목사입니다. 2009년에 김준곤 목사가 갑자기 사랑하는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2012년에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나라가 적화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선출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 번 반복된 그 말씀이 그 제자에게는 유언처럼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그 제자가 바로 이용희 교수입니다. 이 교수는 어느 날 교회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어느 청년에게 이런 말을 따끔하게 하였답니다. “북한을 위해 먼저 기도하게. 그러면 교회의 부흥은 덤으로 주실 걸세!” 그 말을 들었을 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북한을 위해 기도해 오긴 했지만 그렇게 애절함이 없이 기도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10차 지저스 아미(Jesus Army) 수련회(7월 2-6일)에서 구체적인 기도제목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체사상”이 무너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하나의 이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 10번째 종교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 사상 뒤에는 어두움의 영이 궤계를 부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지배계급이건 피지배계급이건 모두 주체사상에 묶여 있습니다. 그들의 결박을 풀 수 있는 방법은 기도와 금식밖에 없습니다. 굶주린 북한 동포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살아 있어야 복음도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흑암의 세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 어찌 북한의 영혼들만 어두움에 묶여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국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음란, 동성애, 낙태, 안티기독교 사상 등에 묶여 있는 동포들도 건져내야 합니다. 이것 또한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기도하되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금식은 초대교회 관습이었습니다(행 13:1-3; 14:21-23; 고후 11:27-여러 번 굶고<in fastings often/KJV>). 기도하되 연합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개개인은 물론 교회와 교회가 연합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뜨겁게 기도하여 북한의 영혼들을 구원하고 조국 대한민국의 교회가 다시한번 부흥하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더 힘 있게 감당하도록 합시다.
451 no image |김영규칼럼| 인류의 역사 속에서 증거되는 하나님
편집부
4284 2013-06-25
인류의 역사 속에서 증거되는 하나님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이 그 조상이라는 데서 의미 나타나” 지난 2013년 5월 3일에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6월 18-20일 예루살렘에서 여러 주제들을 다루는 토론회의에 참여를 거부하는 문제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언론기관들을 통해서 보도된 바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종차별 혹은 인권오용과 관련하여 국제적인 불매, 박탈 및 제제 운동(BDS)에 한 노벨상 수상자의 참여 결정이 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긴 역사적 논쟁점에 불을 붙인 사건이 되어 의미가 큰 보도가 되었다. Nature 잡지에서 지난 5월 16일지에 그 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깝게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관련된 UN의 정체성 문제이고 넓게는 세계 근원과 역사에 대한 진실성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필자는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과 그 속의 굴 및 그 사방에 둘린 수목에 대한 부동산 매매에 관한 창세기 23장의 기록이 주전 2600년 전의 슈메르 대화체 판매문서로부터 주전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는 중재재판에 의한 대화체 판매문서들에 대한 증거들에 의해서 실제적인 매매문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바 있다. 고대 근동 문헌들 중에서 아주 드문 대화체 기록 방식에 있어서 ‘PN가 일어나서 그리고 가라사대’라는 표현은 유일하게 주전 2400년 이전의 에블라 토판들에서 발견이 되어 언어표현에 있어서 셈족의 고유성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체 문서가 창세기 전체에 포함되어 책으로 종결된 성격에 있어서 ‘PN이 말하여 가라사대(infinitive)’라는 표현은 애굽의 제 12, 13왕조의 서술체들의 특성인 ‘PN이 말하여 가라사대(infinitive)’에서만 찾을 수 있고 그 후 애굽의 기록 방식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은 가장 중요한 발견이다. 그처럼 모세도 알지 못한 기록된 책으로서 20세기 후반에 와서 비로소 창세기의 기원에 대한 진실성 문제가 겨우 풀렸던 것이 고려된다면, 그런 문제가 사회 윤리 문제를 넘어 법적 성격으로서 한국의 독도 문제에 있어서 진실성과 법적 문제만큼이나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대 근동 지역은 문명의 중심지로서 정착민들이 끊임이 없이 변화해 버린 역사들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원 정착민에 대한 권리증명을 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한 성경 아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충돌하는 상황 하에서 헬라 로마사회에 있어서 유대인 저항세력 중 그 뿌리가 깊은 과격한 열심당원들의 중심인물이기도 하였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여 그런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가르침들 중에서 특별히 로마서의 가르침이 대표적인 것이다. 온 세계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소명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서 유일하게 야곱 곧 이스라엘만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고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는 역사를 눈으로 목격하고 그런 특별한 역사를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 안에 출애굽과 함께 창세기 18장 17-19절의 아브라함의 선택에 대한 뜻대로 율법과 가나안 정복이 잘 결합이 되었으나, 가나안에서의 국가 전체 역사가 결국 그런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에 그 원인이 되어 그들이 나라를 잃고 영원히 유리하는 슬픈 역사가 강한 율법주의자들을 생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진실을 찾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 중에 하나였던 사도 바울이 그런 율법주의에 의해서 배척되어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만났다.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기록문화의 진실성의 핵심임을 성령에 의해서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에 대한 진실성을 그대로 받았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들의 진실성을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체험하고 겪었던 그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을 중심으로 풀지 않고 피조물로서 인간 전체의 진실성 문제를 푸는 말씀으로 다시 발견한 진리가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핵심이었다. 그런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스라엘 문제와 가나안 문제가 모세의 책 전체로 돌아가는데 있지 않았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준 것이거나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 것에도 그 해결점의 핵심이 있지 않았으며 아담 이후 모든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신 진정한 선물을 숨기시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 복음의 핵심은 인권에 있지 않고 바로 죽음에 있었으며, 일하는데 있지 않고 죄에 있었으며, 선물로써 세계나 그 안에 있는 복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즉 죄를 지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 동시에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에 대해서 아버지가 내리시는 그 진노를 받아 냄으로 이룰 수 있는, 영원한 무를 향한 그 무한한 죽음의 형벌로부터 스스로 부활하신 그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성취할 수 있는 복들을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뜻이 이 세계와 그 역사의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그 복이 그 세계 안에 어떤 동기나 이유가 없는 복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복을 받을 지는 영원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 안에 영원히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로 진정 돌아가는 것이 인류가 받을 아브라함의 복의 본질이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실체는 그런 복을 처음부터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도 바울의 대답에 따라 그런 복을 세계인들에게 가리키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영원히 남을 역사이며 그 진실성을 누구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복을 세계 역사의 끝까지 증언할 자들로서 세계에 의해서 보존될 가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전체나 이스라엘이나 우주의 마지막 역사까지 그 진리에 대한 목격자가 되어 남아 있어야 한다. 그들이 남길 증언들 중에서 질서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무질서의 세계가 깊어질수록, 모든 질서에 영원히 포함되지 않고 피조 세계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공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고유한 자유의지에 모든 질서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언이 가장 큰 증언으로 남을 것이다.
450 no image |목회칼럼| 신앙에 구닥다리가 어디 있나요?_노승수 목사
편집부
6312 2013-06-25
신앙에 구닥다리가 어디 있나요? < 노승수 목사, 인천노회 >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주일 공동 예배’의 참석을 가르쳐야 합니다” 선조 아브라함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으신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성경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쌍둥이도 세대차가 난다며, 점차 공교회로서 공동체적 신앙고백을 멀리하고 아이들과 청년에 이르기까지 개별 교육에 개별적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초등부 예배, 중등부 예배와 같은 이런 말들은 부적절한 말입니다. 그리고 수요 예배, 금요 예배도 적절한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배라는 말은 ‘공동 예배’의 줄임말입니다. 즉 주일 낮 예배와 저녁 예배 정도에 쓰면 적절한 말입니다. 이런 중요한 말을 마구 남발하다보니 한 교회 안에서 부모 자식 간에 세대차도 극복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래서야 천국 가서 아브라함과 엄청난 세대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넌센스입니다. 성경이 표준이라는 말, 즉 '오직 성경'이라는 말과 '전체 성경'이라는 말은 모두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동일한 신앙고백', 즉 동일한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라는 거창한 건 뒤로 하고 적어도 한 교회 안에서는 ‘동일한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주일 공동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주일 성수’라고 볼 수 없고, 충분히 신앙을 고백할 나이에 입교 예식을 치른 후에도 주일 공동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청년 예배’니 ‘중고등부 예배’니 하는 방식으로 청년들과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커다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지상 교회에서 이러 저러한 교파들이 있고 교리적 색깔도 조금씩 다르지만, 큰 틀에서 '구원에 이르는 신앙 원리'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적어도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에서는 이것이 세대와 세대를 잇는 가르침으로 이어지지 않고 또 부모와 자녀간에 신앙적 대화를 잇는 가르침으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쌍둥이 간에도 세대차를 부추기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 가려니 가랑이가 찢어질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처음부터 부모와 함께 공동 예배를 함께 드려야 합니다. 믿음의 자녀들이라면 철들기 전부터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엄숙함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세대에게 부모의 신앙을 물려줄 수 있는 구조는 빨리 정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직분자 부모들도 자녀들의 신앙에 대해서 거의 방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니 않다보니 서로 대화할 접점이 없습니다. 고작 관심을 보인다는 게 ‘오늘 예배 잘 드렸니?, 전도사님이 어떤 말씀 전해주셨니?’ 정도입니다. 신앙의 내용과 전할 유산이 없는 것입니다. 아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전체가 1주일에 20분 정도 만나는 전도사의 메시지에 달려 있다 보니 ‘체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부모가 물어도 제대로 자신의 신앙이나 배운 걸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신앙을 전도사에게 맡겨서 될 일이 아닙니다. 전도사가 아이들의 신앙 양육에 대해서 교회 앞에 약속한 일은 없지만 적어도 부모는 아이들의 ‘유아세례’ 시에 아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할 것을 약속한 이들입니다. 가정에서 가장에 의해 매일 익숙하고 반복적으로 아이들의 심령에 가르쳐져야 할 본질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되려면, 적어도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주일공동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부모는 그것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고, 교회의 직분자들 역시 예배 시간에 정숙함을 깬다는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르쳐서 아이들이 예배하는 인격자로 자라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베푸시는 시간인 ‘주일 공동 예배’ 시간에 다음 세대를 참석 시키지 않는 것은 사실상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그 결과가 교회 곳곳에 나타납니다. 한국 사회 청년 중 크리스찬의 비중이 4%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인지는 몰라도 거반 맞을 것입니다. 지금 그렇다면, 지금 자라나는 주일학교는 더 심할 것이 불보는 자명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가는 거 같습니다. '상황화 논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신앙이라는 것이 '유행' 내지 '시대의 풍조'와 흡사해집니다. 스펙이 중요해지다보니 교회에서 조차 심지어 신앙에서조차 스펙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 모두가 세대차를 벌려놓는 교회 교육 때문입니다. 막 나가는 것을 견제할 장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치를 갈등으로 여기고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서 세대차를 부추기는 현상이 점차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주일 공동 예배’의 참석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에 구닥다리가 어디 있나요? 어른들도 자꾸 자신의 신앙을 구닥다리로 여긴다든지, 젊은이들의 새로운 바람은 신선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선조부터 이어온 신앙의 유산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 길만이 이 나라 다음 세대의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유일한 길이라 여겨집니다.
449 no image |목회칼럼| 야곱의 기도를 통해 보는 기도의 자세_강영모 목사 (18)
편집부
7864 2013-05-14
야곱의 기도를 통해 보는 기도의 자세 < 강영모 목사, 과천한샘교회 > “인생의 연륜만큼 하나님 앞에서 성숙하고 정직한 기도할 수 있어야” 시작하는 말 야곱은 흔히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성공 지향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야곱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일방적인 편견을 낳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년의 간격을 두고 행한 벧엘에서, 그리고 다른 한번은 에돔들에서 드렸던 그의 기도의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굴곡진 인생과 깊어진 신앙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그의 기도의 변화를 통하여 그의 진면목을 직시하게 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암시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도망하는 중에 보여준 기도와 20년 후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와 “에서”에게로 귀환하는 중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 이 두 번의 기도에서 그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1.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한 첫 번째 기도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로서 이 둘 사이에는 날 때부터 저절로 서로에게 경쟁 관계가 형성된다. 그들은 사실 태어나기 전에 벌써 어미의 태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두 생명체가 잉태되면서부터 이미 그 경쟁은 시작되었고 쌍둥이를 중심으로 이삭의 가정에는 여러 가지 해프닝이 일어난다. 에서와 야곱이 장성하였을 때 사냥에서 돌아온 배고픈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아우는 장자의 명분을 사게 되고 야곱은 급기야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마저 속이면서 장자의 복을 가로챈다. 그 결과 야곱은 에서의 미움을 사고 밧단아람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마치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사듯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식의 기도를 했다(창 28:20-22). 즉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 중이던 한 젊은이가 하나님을 매수하여 불안한 미래와 알 수 없는 자신의 앞길을 순조롭게 풀어가 보겠다는 의도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과연 ‘성공 지향적’인 야곱다운 발상이며 저돌적인 야곱에 어울리는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야곱의 첫 번째 기도를 오늘 우리들의 표현으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 이번 일만 잘 되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십일조도 바치겠습니다. 제발 이것만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뭐든지 다 할께요.” 2. 하나님께 모두 맡긴 두 번째 기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위하여 각각 7년씩 14년, 양떼를 돌보는데 6년을 일하여 제법 큰 재산과 일가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야곱은 지난 20년간 라반에게 당한 고통과 억울함을 통하여 2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즉 형의 배고픔을 약삭빠르게 이용하고 눈이 희미한 아버지마저 속인 자신의 저지른 행위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자각을 할 즈음에 귀향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니 20년 전의 광경이 눈에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20년 전의 원한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에서를 어떻게 대면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20년 전에 그를 피할 때의 새로운 환경, 낯선 세상이 아니던가? 이런 점에서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할 때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가 다시금 야곱을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20년 전에 기도하였던 베델 근처의 강둑에 와서 다시금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게 바로 즉 야곱의 두 번째 기도이다(창 32:9-12).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의 두 번째 기도에는 처음 기도와 전혀 다르게 하나님과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고 음식, 의복, 재물, 안전한 귀가 등 ‘우리들의’ 일상적인 기도 목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 주님은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을 만큼 기대 이상으로 제게 이미 베푸셨습니다. 제가 주께 기도하는 것은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면 제가 독을 품고 있는 형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에서를 대면할 일이 무섭습니다. 주님 없이 혼자 감내해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다. 3. 본받아야 할 야곱의 성숙한 기도 우리는 야곱의 두 기도를 통하여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잘 몰라도 성숙한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야곱이 20년 전에는 마치 어린 아이가 기도하듯 하였지만 인생의 연륜과 신앙이 농익자 전혀 다른 성숙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야곱의 두 번째 기도는 도덕적으로 부정하다는 의미인 ‘속이는 자’라는 야곱에서(창 27:36; 렘 9:3; 호 12:3) ‘이스라엘’로(창 32:28), 그리고 더 나아가 정직한 자 ‘여수룬’으로 바꾸어 놓는다(신 32:15; 33:5,26; 사 44:2). 비뚤어진 야곱이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바른 사람 여수룬으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야곱의 첫 번째 기도만 되풀이 할 것인가!
448 no image |목회칼럼| 농사를 통해서 본 신앙과 목회_이기원 목사 (22)
편집부
5013 2013-04-30
농사를 통해서 본 신앙과 목회 < 이기원 목사, 목은교회 >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을 보면 무언가 잘 못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올바로 세워지기 위해 가장 급선무가 무엇인가? 그 해답을 목회와 농사의 원리를 통해 점검하고자 한다. 농부가 농사를 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목적은 농사를 잘 지어서 많은 수확량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단 기간에 많은 수확량을 얻기 위해서 비료를 많이 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비료를 적정량을 초과하여 과도하게 사용하게 되면 식물은 위로 지나치게 자라며, 그래서 약하게 되고, 결국 수확량도 많지 않게 되며, 종국에는 그 농작물은 죽게 된다. 이처럼 농사의 바름과 좋은 수확량은 비료 한 가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햇빛과 적정한 온도, 수분, 바람, 그리고 농부의 부지런함에 의해서 결정된다. 기독교 신앙과 목회는 어떠한가? 농작물을 돌보는 농부와 같은 면이 있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자다. 영혼을 돌보는 궁극적인 목적은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데 있다.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 개개인의 신앙이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 개개인의 신앙을 바르게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의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목회자이다. 만일 목회자가 바른 신앙을 형성하는 신학이 잘못 되어 있다면 성도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없게 되고, 교회를 바르게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목회자가 먼저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바른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떠한 종교적인 체험을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그릇된 신앙이 난무한다. 마치 이러한 신앙이 정통 신앙인 것처럼 주장하며, 성경과 교리에 무지하거나 어린 성도들을 미혹한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열심히 하면 바른 교회가 되는가? 아니면 목사가 어떤 특별한 능력을 얻어 목회하면 교회가 되는가? 아니면 기업 경영 방식을 도입하여 적용하면 교회가 되는가? 아니면 최신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교회가 되는가? 기독교 신앙은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사에 의해 검증된 역사적 정통 신앙이다. 그 역사적 정통신앙은 우리에게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떠한 신앙이 잘못된 신앙인지, 바른 신앙인지를 가르쳐 주는 시금석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바른 교회인지, 거짓된 교회인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이다. 농작물을 해치는 요인들은 가뭄과 침수, 고온, 저온과 일조부족, 흙의 독소와 염분, 살충제 찌꺼기, 비료의 과용, 해충, 질병 등등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른 신앙과 바른 목회를 저해하는 요인들은 역사적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그릇된 신앙이다. 우리 주변에 득세하는 그릇된 신앙 운동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그릇된 신앙에서 교회를 지키고 성도를 지키는 것은 역사적 정통신앙뿐이다. 그 역사적 정통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교리이다. 이것을 성도들이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 교리문답과 신앙고백서들이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교회가 가르칠 때 바른 신앙이 되고 바른 교회가 된다. 이것이 참된 목회이다. 인간의 편리성과 실용성을 최대한의 가치로 삼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바른 신앙과 바른 교회를 위해서 역사적 정통신앙 위에 굳건히 세워져 나가야 할 것이다.
447 no image |목회칼럼| 사회적 통념의 한계와 위험_이광호 목사 (186)
편집부
9499 2013-04-30
사회적 통념의 한계와 위험 < 이광호 목사, 실로암교회 > “죄를 죄라고 지적하는 것을 범법행위로 간주한다면 매우 불행한 일” 인간사회에는 어디든지 ‘통념’(通念)이라는 것이 있다. 사회적 통념은 시대에 따른 가치를 형성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 통념에 의해 자신의 사고를 지배받게 된다. 그러나 그 통념은 전체 역사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 객관적이지 않은 주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세상의 통념에 대한 해석을 하게 된다. 성숙한 성도들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 그에 대한 정당성 여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사안이 어떤 시대에는 범죄가 되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시대에는 권장사항이 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차별금지법’에 연관된 문제로 인해 시끄럽다. 몇몇 국회의원들이 그 법안을 제출했다. 그렇게 되자 그에 대해 찬성을 표시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이 팽팽히 맞서 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당연히 차별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인종차별, 장애인에 대한 차별, 학벌에 대한 차별 등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성적인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 법안에는 ‘성적지향성’과 ‘성별정체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또한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와 자신의 성별에 관한 인식 또는 표현에 관한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차별금지법안, 제1장 제3조 2,2). 그리고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 구별, 제한, 배제, 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금지하며(제4조 6), 누구든지 그에 관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문을 넣고 있다(제5조). 또한 이를 회사, 사회집단, 교육기관 등에서의 차별요소 제거, 차별에 대한 개선대책과 사회분위기 조성, 그리고 구제 대책을 세우도록 강제하고 있다(제2장, 12조). 누구든지 이를 어기게 되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일정한 배상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제4장 제41조, 제42조 참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제출된 법안에 따르면 앞으로 동성애나 동성결혼을 죄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법안이 통과되고 시행되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하게 될 학교의 교사들 가운데 동성결혼을 한 자들이 생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나 동성결혼을 한 자가 목사가 되려고 할 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모든 것이 다 좋다고 할지라도 한두 가지 내용이 결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주의 깊게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위에 언급된 인종이나 장애인, 학벌 등에 대해서는 법이 있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일반 사회에서도 기본 교육이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당연히 지켜지게 된다. 그런 것들은 법으로 규제하기 전에 기본적인 인간성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속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차별해 멸시하면서 법이 무서워 피해간다면 유치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으며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소유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제출된 ‘차별금지법안’의 내용들 가운데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역시 동성애와 동성결혼 문제이다. 이는 절대로 법제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점은 그에 연관된 악법을 만들어 놓고 세월이 수십 년 흐르게 되면 그것이 통념화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동성애나 동성결혼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죄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죄를 죄라고 지적하는 것을 범법행위로 만드는 것 자체가 무서운 죄악이다. 즉 그와 같은 죄를 범하는 자들보다 그것을 법제화하려는 사람들이 더욱 위험한 자들이다. ‘죄는 죄이다’라고 가르쳐야 할 내용을 차별금지법을 앞세워 건전한 사람들을 범법자로 만든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암울할 따름이다. 국가가 범죄를 옹호하고 장려한다면 교회는 그런 부도덕한 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 죄를 죄라고 지적하는 것을 범법행위로 간주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와 같은 죄를 회개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죄악을 지속적으로 범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죄 없는 것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고수해야만 한다. 말세가 되어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446 no image |김영규칼럼| 신학과 관련한 학문과 표절의 딜레마 (30)
편집부
8120 2013-04-30
신학과 관련한 학문과 표절의 딜레마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모든 학문에 대한 최고의 객관성 확보해야 허위와 표절 막을 수 있어” 미카엘 폴라니(Michael Polanyi)를 조력하였던 한 철학 교수 헤리 프로쉬(Harry Prosch)가 미카엘 폴라니의 사상의 마지막 발전에 대해서 공저로 『의미(Meaning)』라는 책을 1975년에 출판했다. 미카엘 폴라니에 의해서 그 동안 논문으로는 발표되었거나 텍사스 대학, 시카고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제공된 강의들에 의해서 발표되었으나 아직 출판이 되지 않은 1968년 이후에 진보된 여러 그의 글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미카엘 폴라니의 요청에 의해서 그런 글들이 수집되고 정리되어 출판된 책이다. 그러나 최종 정리한 글의 표현들과 미카엘 폴라니의 원 자료들의 글의 표현들 사이에 원 저자의 표현들을 잘 가릴 수 없을 만큼 최종 글을 정리한 헤리 프로쉬의 공헌이 커서 ‘우리’란 표현으로 출판되었다. 물론 그 책은 대부분 발췌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출처만 밝힐 뿐 그 내용과 표현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나 각주도 없이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라니 사상의 마지막 발전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대부분 독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렇게 학자들이나 공인들의 학문 활동이나 공적 생활에 있어서 그 정직성은 그런 기록물이나 성취 활동들의 자료들에서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인류에 공헌하거나 사회에 공헌한 어떤 특별한 공헌내용들은 그에게 고유한 것으로 돌리면 돌려질수록 그의 생애에 있어서 그의 글이나 강의 및 그 활동 속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런 반복되어 나타나는 내용들을 표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허위나 표절은 남의 진보나 발전을 나의 것으로 삼았거나 그것을 정직하게 밝히지 않거나 혹은 자신의 새로운 진보와 발전에 있어서 그 전의 진보나 발전과 다른 점들을 밝히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위와 표절 문제들에 있어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지적재산권의 침해나 학문의 도덕성보다 더 큰 무지에 대한 부분이다. 즉 자신이 어떤 한 분야에 진보를 보였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일에 있어서 그 전에 그 진보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알고 있고 수집되어 있느냐에 있어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사 학위 과정이나 석사 학위 과정에 있어서 그 진위 여부나 진보 여부는 그 제출된 논문에서 제공된 참고문헌들에 근거하여 평가하게 된다. 그렇지만 박사학위 과정에서 제출된 논문은 그 객관성과 그 진보를 밝히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선행된 자료들을 읽었고 그 독립성과 그 진보 내용들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자세히 알고 있느냐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점에 있어서 한국에서 요구되는 학위과정의 질적인 수준이 경쟁하고 있는 세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대학에서 쓰이는 교과서들의 개정판들의 횟수나 개정 주기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오는 전문적인 도서들도 교과서로 쓰기에는 너무 낙후되어 있거나 최신으로 개정된 번역된 저서들이 아니어서 교과서로 쓸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서 원 저서를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어도 언어장벽 때문에 그 학업 성취도를 이룰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허위와 표절은 그런 정보 부재와 무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문제 중에서 학문의 발달이 길지 않은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약점으로서 학문의 발달이 오래된 다른 언어권들의 자료들에 대한 정보들이 아주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학문의 발달이 어느 정도 많이 공개되어 있는 영어나 독일어 및 불어 언어권들에서 발전된 학문의 객관적 활동에 대한 정보들은 어느 정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학문적으로 더 오래되었거나 늦지 않은 이태리 언어권, 스페인 언어권, 기타 북구 언어권들의 학문활동 자료들은 거의 활용되지 않는 실정이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학문적 활동의 객관성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독일 도서관들의 경우에는 세계 어느 나라든 거기에서 발생하는 제1 자료들을 확보하는 데 아주 많은 노력을 기하고 있다. 그런 자료수집들이 어떤 의미에서 바로 한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국가 안에서의 아무리 뛰어난 진보나 발전일지라도 다른 국가들이나 이웃 국가들에 의해서 그 진보나 발전이 이미 알려져 있다면, 그런 것들은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허위나 표절이 될 수밖에 없다. 생활의 기본에 있어서 도시문화의 발전, 주거 생활의 구조, 그 생활 물품들의 디자인들과 재료들, 그 제조 기술과 모양 등 세세한 것들이 이미 주전 7천 년 전부터 발달되었기 때문에 세계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진보와 발전을 따지는 평가는 그 모든 역사에 대한 절대 평가를 향하여 끊임 없이 노력을 해야 그런 허위와 표절을 막을 수 있다. 신학의 경우 더 심각하다. 신학은 오늘날 남아 있는 어떤 학문 분야들보다 가장 오래되었고 그 전문성에 있어서 가장 크고 깊은 분야이지만, 그 전문성에 있어서 의학이나 법학 및 과학 일반에 비해 스스로 자멸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전체로부터 그 전문성의 광범위한 성격에 있어서 자문하는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다른 학문 분야에 의해서 비판을 받고 역사가 길지 않은 종교들이나 신흥종교들과 함께 어떤 특정 영역으로 몰아 세워지고 있다. 신학은 지금까지 있어 왔던 문명의 모든 언어권들의 진보에 대한 연구, 헬라 로마 문화로부터 기독교가 자국어로 글을 남기지 않을 만큼이나 객관적 자리를 얻어 왔던 모든 교부들의 자료들, 현대 학문들로부터 성취되었던 자연과 문명에 대한 학문적 객관성에 대한 모든 자료들로부터 그 최고의 객관성을 다 확보해야만 진정한 허위와 표절을 막을 수 있다. 교회가 좀 더 깊고 넓은 그런 절대적 기준에 의해서 그 진리의 객관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허위와 표절에 대해서 비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회와 일반 학문 세계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허위와 표절 문제는 직접적으로 교회에서 주장하는 진리문제에 대한 다른 반전에서의 비판임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45 no image |신앙칼럼| 하나님의 질서와 동성애 문제_한병수 전도사 (20)
편집부
4639 2013-04-16
하나님의 질서와 동성애 문제 < 한병수 전도사, Calvin Theological Seminary 재학 >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근원적인 질서 회복에 앞장서야” 작금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동성애 관련 이슈가 날로 그 정도를 더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성적소수자들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며 동정을 표하거나 혹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며 애써 외면하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우리 교회는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행하는 것은 성경이 규정하는 명시적 죄이기도 하지만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응하는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도다”(롬 1:27)라고 하면서 바울 사도가 '저희의 그릇됨에 상응하는 보응'이라는 언급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벌이요 신적인 진노의 결과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 이 진노와 형벌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맞바꾸는 인간의 우둔하고 어두운 마음이 그 원인인 샘이다. 당연히 동성애 이해의 주안점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그 배후의 원인에 주어져야 하겠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결국 조물주가 아니라 피조물을 경배와 섬김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질서의 전복과 혼동대로 그들을 그들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신 결과이다. 이로써 짐승들 중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무한한 색정과 성적인 역리가 개인의 고유한 권리라는 주장을 넘어 제도적 보편성과 법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다양한 방편을 동원하는 단계까지 이르도록 내버려 두셨다. 결과인 동성애의 심각성을 알면 원인인 하나님의 영광 박탈의 심각성도 얼추 가늠될 것이다.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성적인 도착과 동성애는 모든 시대에 존재했던 악(vitia quae quum saeculis omnibus exstiterunt)이며, 짐승적인 정욕에(in beluinas cupiditates) 스스로를 내던지고, 나아가 짐승보다 더 하등한(infra bestias) 그런 비속함의 심연으로 추락한 이유가 본성의 총체적인 질서(totum naturae ordinem)의 전복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총체적 질서의 전복은 그 자체로 발생하는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발생한 질서의 전복에 상응하는 형벌의 결과로 수반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동성애 문제는 오늘날의 갑작스런 일처럼 떠들썩거릴 필요 없다. 게다가 본성이 더러운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마저도 버러지와 손쉽게 바꾸는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정상적인 질서를 뒤집어서 부끄러운 욕심으로 서로를 욕되게 하는 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이 고상한 명분을 가지고 법적인 합의라는 형식으로 머리 둘 곳을 물색하는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고 보다 근원적인 질서의 전복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돌이키는 계기로 삼으면서, 동시에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고 오해와 불이익을 감수하고 목소리를 내시는 분들이 있다는 건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의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교회가 보다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버러지를 방불하는 우상과 맞바꾼 교회가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 우선이다. 먼저 우리가 돌이킨 이후에 사랑과 자비를 따라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감되지 않은 진리 그대로를 분명하게 증거해야 하겠다. 즉 각자의 성적 취향과 기호를 따라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아비가 자녀와 더불어, 어미가 자녀와 더불어, 자녀가 자녀와 더불어, 할아비가 손주와 더불어, 인간이 짐승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전체에 죄짓는 것이라고 말이다. 바울은 동성애 문제만 꼬집어서 그 사안에 과도한 핏대를 올리지는 않았다. 문제의 해결이 현상 자체의 완화나 변경에 있지 않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 할 하나님의 전복된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열쇠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과 자연을 섬기고 돌보는 가장 우선적인 책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근원적인 질서의 회복에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불거진 동성애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의 눈길은 교회로 향할 수밖에 없다. 교회의 돌이킴이 무엇보다 우선이고 핵심이다. 이는 교회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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