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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6 (20:47:45)

개혁신학과 목회

 

< 고경태 목사 · 주님의교회 >

 

진정한 목회자라면 일평생 한 명이라도 그의 회심을 위해서 정진해야

 

작금 들어 한국교계의 관심사는 외형적 성장과 부흥에 온통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한국교계가 지향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이 정상적인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교회성장 운동들

 

신학은 몇 년에 완성되고, 목회는 몇 년에 완성되는가? ‘평생에 완성할 수 없다가 답일 것이다.

 

그럼에도 성도는 구도자(求道者)가 아니다. 중생된 성도는 신자이다. 신학은 신자가 하는 것이다. 신학은 믿음으로, 성경으로, 교리로 하는 끊임없는 정진이다. 성경 66권의 정확무오한 말씀에 대한 확증으로 연구한다. 그리고 확정된 교리(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교리, 이신칭의 교리)에 입각해서 모든 신학을 구성한다.

 

목회란 하나님께서 주신 양을 교회의 목사가 하나님의 양으로 목양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주의 지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양이다. 교회와 양을 위해 주께서 세우신 직분이 목사(牧師). 그렇다면 목사는 어떻게 하나님의 양을 양육할 것인가?

 

현재 교회 상황에서 목회의 능력을 교회성장(?)으로만 평가한다. 오직 수의 성장, 재정의 규모, 목사의 스펙뿐이다. 이것이 교회의 성장이라면 분명 개혁신학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목회에 개혁신학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만약 많은 수자를 수평이동시킨 목사와 한명을 회심시킨 목사가 있다면 어떤 사역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의 기분을 업(up)시킨 목사와 한 영혼을 부흥시킨 목사가 있다면 어느 목사가 참된 목사인가?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사람을 이끌어놓고, 더 심한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저주하셨다(23).

 

개혁신학은 칼빈신학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의 신학은 개혁신학도에게 가장 이상적인 롤모델(Role Model, 指標)이다. 칼빈은 철저하게 성경에 입각하여 신학을 이루었고, 목회와 삶도 이루었다. 고집 센 제네바를 그리스도의 도시로 이룬 것도 오직 성경에 입각한 것이었다.

 

칼빈의 목회 상황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한다면 칼빈 목사의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고 본다. 약한 건강, 훼방과 협박, 많은 거짓 고소들, 배반 등등 수 없는 악재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직 성경은 변하지 않았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목사는 오직 성경에 매여야 하며, 성경에 끊임없는 정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로 목회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회에 위임하신 양들을 목양하는 것이며,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천국의 잔치를 이룰 수 있는 목회가 될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하늘의 잔치가 열리는 대 기적은 한 사람의 회심이다.

 

한 죄인의 회심을 추구하는 목사는 분명히 개혁신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 영혼의 부흥을 추구하는 목사는 분명히 개혁신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에서도 자신들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신학도는 오직 은혜에 매인 종으로서 사역한다. 하나님께 매인 종으로서 영광스러운 목사의 직임인 목회를 감당한다. 그러기에 평생에 한 명의 회심을 위해서 정진하고 또 정진한다. 교회의 성도는 목사의 나타난 믿음의 진보로 인해서 영혼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부흥은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것

 

개혁신학이 교회의 수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정된다 할지라도 두렵지 않게 개혁신학을 추구하자.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경과 교리를 탐구함으로써 교회를 교회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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