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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 no image |목회칼럼| 개혁신학과 목회_고경태 목사 (42)
편집부
4680 2013-04-16
개혁신학과 목회 < 고경태 목사 · 주님의교회 > “진정한 목회자라면 일평생 한 명이라도 그의 회심을 위해서 정진해야” 작금 들어 한국교계의 관심사는 외형적 성장과 부흥에 온통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한국교계가 지향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이 정상적인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교회성장 운동들 신학은 몇 년에 완성되고, 목회는 몇 년에 완성되는가? ‘평생에 완성할 수 없다’가 답일 것이다. 그럼에도 성도는 구도자(求道者)가 아니다. 중생된 성도는 신자이다. 신학은 신자가 하는 것이다. 신학은 믿음으로, 성경으로, 교리로 하는 끊임없는 정진이다. 성경 66권의 정확무오한 말씀에 대한 확증으로 연구한다. 그리고 확정된 교리(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교리, 이신칭의 교리)에 입각해서 모든 신학을 구성한다. 목회란 “하나님께서 주신 양을 교회의 목사가 하나님의 양으로 목양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주의 지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양이다. 교회와 양을 위해 주께서 세우신 직분이 목사(牧師)다. 그렇다면 목사는 어떻게 하나님의 양을 양육할 것인가? 현재 교회 상황에서 목회의 능력을 교회성장(?)으로만 평가한다. 오직 수의 성장, 재정의 규모, 목사의 스펙뿐이다. 이것이 교회의 성장이라면 분명 개혁신학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목회에 개혁신학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만약 많은 수자를 수평이동시킨 목사와 한명을 회심시킨 목사가 있다면 어떤 사역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의 기분을 업(up)시킨 목사와 한 영혼을 부흥시킨 목사가 있다면 어느 목사가 참된 목사인가?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사람을 이끌어놓고, 더 심한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저주하셨다(마 23장). 개혁신학은 칼빈신학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의 신학은 개혁신학도에게 가장 이상적인 롤모델(Role Model, 指標)이다. 칼빈은 철저하게 성경에 입각하여 신학을 이루었고, 목회와 삶도 이루었다. 고집 센 제네바를 그리스도의 도시로 이룬 것도 오직 성경에 입각한 것이었다. 칼빈의 목회 상황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한다면 칼빈 목사의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다고 본다. 약한 건강, 훼방과 협박, 많은 거짓 고소들, 배반 등등 수 없는 악재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직 성경은 변하지 않았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목사는 오직 성경에 매여야 하며, 성경에 끊임없는 정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로 목회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회에 위임하신 양들을 목양하는 것이며,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천국의 잔치를 이룰 수 있는 목회가 될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하늘의 잔치가 열리는 대 기적은 한 사람의 회심이다. 한 죄인의 회심을 추구하는 목사는 분명히 개혁신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 영혼의 부흥을 추구하는 목사는 분명히 개혁신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에서도 자신들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신학도는 오직 은혜에 매인 종으로서 사역한다. 하나님께 매인 종으로서 영광스러운 목사의 직임인 목회를 감당한다. 그러기에 평생에 한 명의 회심을 위해서 정진하고 또 정진한다. 교회의 성도는 목사의 나타난 믿음의 진보로 인해서 영혼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부흥은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것 개혁신학이 교회의 수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정된다 할지라도 두렵지 않게 개혁신학을 추구하자.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경과 교리를 탐구함으로써 교회를 교회로 세워야 한다.
443 no image |신앙칼럼|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신적 인지(認知)_한병수 전도사 (69)
편집부
5286 2013-04-02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신적 인지(認知) < 한병수 전도사, Calvin Theological Seminary 재학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판단의 불완전성 지적한 것”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요 10:26)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언사가 때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 수 있다. 유대인 몇 사람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시는가? 그리스도가 맞다면 밝히 말하라'고 했을 뿐인데 곧장 '내 양이 아니라'는 신분 차별적인 격문을 토하시며 소통 단절적인 국면으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며 '따르지 않는다'는 가시적 결과에서 소급하여 '내 양이 아니라'는 근원을 진맥하는 듯한 소위 '실천적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 적용도 불사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지를 시공간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본문은 분명히 '믿지 아니한 것을 보니 내 양이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와 같은 주장과는 판이한 입장을 표명한다. 즉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원인과 결과는 동일하나 인식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인간의 지각은 가시적 결과를 보고 비가시적 원인을 추정하는 소급법을 선호하고 그런 인식론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주님은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아시되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논리적 순서도 존중하신다. 칼빈의 표현처럼 '선택은 믿음에 선행하나 그 선택은 믿음에 의해 식별된다'는 식의 인지적 한계를 그에게 돌려서는 아니 된다. 하지만 우리는 결과를 보고 근원을 지각한다. 믿음을 보고 주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특정한 시점에서 믿음을 관찰하고 선택을 추정하는 것이어서 오류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또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살폈다고 할지라도 추정의 부정확성 때문에 백성의 여부를 단정하고 염소와 양으로 편가르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원수로 분류된 사람들도 사랑과 복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이미 인간적인 판단의 불완전한 상대성을 지적한 셈이다. 하여 예정을 근거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건 무례하다. 주님의 심판석에 불법적인 착석을 단행하는 도발이기 때문이다. 예정이 구원의 견고한 토대이며, 인간의 어떠한 공로도 자랑의 고개를 내밀지 못할 겸손의 빙거이며, 변덕스런 상황 속에서 주어진 근원적인 위로이며, 복음의 불모지를 기경함에 있어 끝까지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을 마지막 소망의 이유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예정론이 구원의 유무를 사람이 가타부타 규정하는 식별용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심해야 하겠다. 엄밀한 의미에서 주께서만 그의 백성을 아신다. 그러므로 '내 양이 아니므로 너희가 믿지 않는다'는 냉담은 사실 당신의 백성을 아시는 주님만의 고유한 어법이라 하겠다. 우리 편에서는, 내가 믿고 있다면 당신의 양으로 창세전에 택하신 주님의 뜻과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돌리는 게 도리일 것이다.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에서 비롯되지 아니했다. 믿음도 그러하고 구원도 그러하다. 본문은 염소에게는 멸망의 빙거이며 양에게는 구원의 빙거이다. 인간의 명의로는 발설하지 말아야 할 주님만의 고유한 언술이다.
442 no image |김영큐칼럼| 에너지와 성도의 책임 (76)
편집부
5909 2013-03-19
에너지와 성도의 책임 < 김영규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높은 이상 잃지 않아야”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한 시민으로서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나 한 민족 혹은 어떤 지역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삶으로 살아야 하고 그 시작과 목적에 있어서도 우주의 시작과 끝의 목적에 합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 주변의 조그만 질서도 거기에 맞게 해석하여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그 질서가 발현되는 현실로서 우리의 삶이 있고, 그 삶의 실체인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형상에 따라 자신의 발현 내용을 점검하고, 거기에 목표로 두고 있는 품격에 맞는 현실을 삶을 통해서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이상이 지금 직면하는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어서 좀 더 좁혀 보려고 하면 할수록 시험에 들게 마련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부터 눈을 즐겁게 하는 일 등 너무 많은 것으로 적응하려는 습관이 결국 그 이상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시험이 들기 쉬운 것이다. 더구나 일반사회나 속해 있는 국가 공동체의 보이지 않은 공동의 힘과 법체계가 그런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 종종 당황하게 되나 용기를 가지고 그런 이상을 선택하고자 할 때도 더구나 이런 저런 고난이 뒤따른다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혁신적 이해에도 비슷한 고난이 뒤따른다면, 높은 이상으로 인한 고난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순수한 물뿐만 아니라 어떤 물이든 물을 연료로 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에 대한 발명이 공개된 바 있다. 그 기술은 특정한 금속판들을 음극과 양극으로 사용할 때, 물분자의 수소가 전자를 빼앗기고 빠른 프로톤 널뛰기(proton hopping) 현상이 일어나 급하게 물의 pH 변화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이다. 특별히 물분자들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Å이하)이 있는 폴리머들을 겹쳐 프로톤 펌핑(proton pumping)에 의한 전류의 생산성을 높이는 발명품이다. 더구나 이 기술을 이용하면 그 전에 제1 전지나 제2 전지에 사용된 전해질이 전기에너지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연료로 사용이 되어 높은 전류 생산의 원료로 사용될 수 있고 소금과 같은 고체까지도 소금물보다 더 많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원료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기술은 지금까지 연료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되었던 많은 물질 상태가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연료로 사용될 수 있는 참으로 응용이 무한한 기술이다. 지난 해(2012년) 여름 그 기술에 대한 공개프로그램에서 그런 물 연료 전지로 어떻게 모터가 돌아갈 수 있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체험해 보기도 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하버드 대학과 MIT의 연구팀이 그 기술을 이용하여 공기의 습기에 쉽게 휠 수 있고 전기도 생산할 수 있는 필름을 개발하여 Science 잡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이 기술이 더 많이 이용될 수 있는 분야는 의학 분야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의 세포들 안에 있는 프로톤 펌핑 채널, 나트륨 이온 펌핑 채널, 칼륨이온이나 칼슘이온 펌핑 채널 등 많은 특별한 채널들을 활성화시켜 신체의 다양한 치료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 임상 실험의 경우, 이 기술을 이용하여 가려움증, 통증, 감기, 무좀 치료 등의 다양한 치료효과도 확인이 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기술은 또한 효소 없이 흔한 셀롤로오스들을 글루코스로 분해하여 바이오 연료를 경제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로도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존 전기화학 에너지 기술에 있어서 환원과 산화 반응에 대한 이해나 전해질에 대한 이론들이 큰 벽이 되어 그런 기술이 인정이 되지 못하고 그런 혁신기술이 폐기 처리될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특허청의 심사관들의 심사에 있어서 기존의 알려지지 않은 기술에 대한 심사의 경우 그들의 독립성과 기술적 지식이 장점이 되기보다는 약점이 된다는 점이다. 더 큰 이유는 대기업이나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의 기술 경쟁 혹은 언론들의 이익 챙기기가 그런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나 권리취득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예가 그렇게 많이 지원하기를 원하는 국가 과학기술이나 미래 과학에 있어서 큰 위기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높은 기술도 폐기처분될 정도로 그렇게 경쟁적인 고소득 세속 사회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높은 이상을 잃지 않고 그 고유한 행복 조건들을 향유하기 위해서 적어도 독립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몇 가지 구조적 삶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첫째로 에너지의 자급자족이나 엥겔계수를 높이는 생산활동 영역들의 자급화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자율적 노동은행제도를 도입하여 실질적인 소득이나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다. 셋째로 생산활동이나 주거생활에 필연적인 시설들이나 장비 및 기구들의 공동화 비율을 높이는 것이다. 넷째로 개인의 생산활동의 만능화와 전문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틀을 깨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요구들이 잘 충족이 되어 쉬는 것도 노동이고 노는 것도 노동이 되는 희년 제도의 정신이 잘 구현이 되는 공동체의 운영도 궁극적 행복지수를 높일 수는 없다. 오히려 고난이나 죽음이 수단이 되어 얻는 행복지수가 그런 행복지수보다 더 높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만 하나님이 모든 행복의 시작과 조건 및 종결이 되기 때문이다.
441 no image |목회칼럼| 오른손과 왼손_최광희 목사 (1)
편집부
4438 2013-03-19
오른손과 왼손 < 최광희 목사, 행복한교회 > “교회에서는 주로 성도들이 목사를 위해 왼손 역할 감당하게 돼” 어제 또 왼손을 다쳤다. 오른손에 드라이브를 들고 뭘 좀 하다가 그만 왼손을 찌르고 말았다. 옆에 보이는 종이 한 쪽 찢어서 지혈하고 급한 대로 셀로판테이프로 고정하고 그냥 다녔다. 다친 손으로 샤워를 하자니 좀 불편하다. 그렇다고 오른손을 탓할 마음은 없다. 내 왼손에는 사실 상처가 굉장히 많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우리 집에서 토끼풀을 베는 것이 내 담당이었는데 오른손에 낫을 들고 왼손으로 풀을 잡고는 풀을 벤다는 것이 서툴러서 왼손을 찍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대충 봐도 왼손에 난 흉터가 스무 군데는 넘어 보인다. 그 외에도 나는 이런 저런 물건을 고치거나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오른손에 연장을 들고 일을 하다보면 다치는 것은 주로 왼손이다. 과일을 깎을 때도 오른 손에 칼을 잡기 때문에 혼시 손을 베인다면 틀림없이 왼손이다. 오른손이 힘이 세다고 하면 왼손은 섬세하다. 그래서 샤워를 할 때에는 왼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청소를 할 때 더러운 물건도 왼손으로 처리한다. 실수로 왼손을 다치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아들 예찬이는 왼손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데 중학교 때 조각칼에 난 상처이다. 나무를 파내려고 오른손으로 힘을 주었는데 조각칼이 미끄러지면서 나무를 붙들고 있던 왼손을 파 버린 것이다. 아마 왼손에 난 상처 자랑 대회를 열면 다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왼손은 또 붙들어 주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오른손을 미워하지 않는다. 종종 오른손이 다치거나 아파서 왼손으로 뭔가를 해 볼라치면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왼손은 어디까지나 보조역할이며 훌륭한 파트너일 뿐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오른손을 향해 왼손을 향한 가해자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오른손과 왼손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형성된다. 인간관계 속에서 어떤 사람은 오른손이 되고 어떤 사람은 왼손이 된다. 그리고 왼손은 뜻하지 않게 오른손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다. 그러고도 또 오른손을 위한 보조 역할을 꿋꿋이 감당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주로 아내들이 왼손의 역할을 한다. 회사에서는 주로 아래 직원이 왼손 역할을 감당한다. 교회에서는 주로 성도들이 목사를 위해 왼손 역할을 감당한다. 이렇게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어떤 오른손도 왼손 없이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어떤 왼손도 오른손을 대신할 수는 없다. 만일 오른손이나 왼손이 혼자서 뭔가를 하려면 엄청 고생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은 왼손에게 고마워해야 하고 모든 공로를 왼손에 돌려야 한다. 또한 왼손은 오른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고 의도하지 않은 가해까지도 양해하고 동반자로 살아가야 한다. 어제 왼손을 다쳐서 불편을 느끼면서 또 결심한다. 오른손은 제발 왼손을 배려해야하겠다고. 혹시 왼손이 다칠지도 모르는 위치에 있지 않는지 먼저 살펴야겠다고. 혹시 일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다치지 않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라고. 나는 어릴 때부터 다친 왼손을 너무 함부로 취급했다. 풀 베다가 다치면 쑥 잎으로 지혈하고 바랭이 잎으로 묶어주면 그만이었다. 때로는 어제 했던 것처럼 아무 종이나 찢어 지혈하고 문구용 테이프를 감아주고 만다. 깨끗하고 예쁜 대일밴드라도 하나 붙여 주어야겠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 때문에 다치는 사람도 그렇게 토닥거려 주어야겠다.
440 no image |목회칼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_정요석 목사 (604)
편집부
16186 2013-02-19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사람에게는 객관적 기억이나 해석 존재하지 않아” 파티가 의례 그런 것처럼 칵테일 파티는 매우 시끄럽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리까지 칵테일 된 파티장에서 끼리끼리 잘도 대화를 나누고, 어디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매력적인 이성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귀를 쫑긋하고 그 대화 내용을 듣기까지 한다. 사람은 이처럼 시끄러운 곳에서도 어떤 소리에 집중하면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을 “칵테일 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고 한다. 사람이 이렇게 특정한 소리만 골라 들을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소리만 골라서 집중하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능력이 실제로는 뇌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2012년 4월 19일에 국제학술지 “네이쳐”(Nature) 인터넷 판에 발표되었다. 뇌는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들리는 여러 목소리 중 하나의 목소리만 처리하기 때문에 칵테일 파티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녹음기를 한 번 생각하여 보자. 녹음기의 특징은 균일성이다. 녹음기는 들리는 모든 소리를 수동적으로 녹음한다. 능동적으로 택하여 녹음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능동적으로 택하여 듣는다. 듣고자 하는 것을 듣지, 절대로 그대로 듣지 않는다. 사람은 택하여 듣고 보기 때문에 그 택하여 듣고 본 기억도 기억자의 성향과 의도에 따라 기억이 된다. 그래서 사람에게 객관적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객관적 해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불안정한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 18절에서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각자 자기의 지향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자기의 지향하는 바와 다르면 보아도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을 하여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기의 지향하는 바를 보고, 듣고, 기억하며 객관적으로 옳게 보고 듣고 생각한다고 여긴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그 형상을 잃고 그 계획이 항상 악하면 그는 이미 존재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 하나님은 젖먹이까지 모두 이 땅에서 죽이셨다. 오직 은혜를 입은 노아와 그 가족 8명을 제외하고! 홍수로 그들을 전멸하신 후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선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본디 악하기 때문에 선한 것이 나올 것이 없으므로 기대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 땅에서 많이 성취한 이들은 대개 지향성이 큰 이들이다. 자신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하여 강한 집념으로 시간과 노력을 목표에 집중하여 열심히 행한 이들이다. 그런데 때로 신앙의 내용과 목표마저 이런 세속의 집념과 큰 성취로 오해된다.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한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욕심을 작정기도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굶으며 협박을 하면서까지 기도를 한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의 계획이 어려서부터 악한 줄로 알라고 말한다. 그 계획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그 집행을 포기하는 싸움을 피 흘리면서까지 싸우라고 말한다. 신자는 진정 이것을 위하여 금식 기도하여야 한다. 어느 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곳으로 돌이키는 싸움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자칫 하면 자신의 욕구와 지향을 드러내는 행위를 신앙의 이름으로 열심히 하기 쉽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사람들은 갈수록 모든 상황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자기와 관련된 조그마한 내용만 있어도 그 소리를 듣고야 말 것이다. 이런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영으로 부르시지 않으면 누가 깨닫고, 하나님을 찾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을 깨닫게 하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여 선한 것을 하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 중 누가 스스로 선을 알고 진리를 알겠는가? 누가 십계명을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으로 알겠는가? 그 어느 사람이 영생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의지하겠는가? 구원을 받은 신자여도 남아있는 부패성 때문에 악한 것을 원하여 저 멀리서도 나를 부르는 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싸움에서 누가 승리를 하겠는가? 사람을 알고 사회를 알수록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다.
439 no image |목회칼럼| 약수신앙(若水信仰)_이동만 목사 (35)
편집부
4319 2013-02-05
약수신앙(若水信仰) < 이동만 목사, 약수교회 > “하나님 잊고 만족 모른채 부족하다며 떼쓰는 모습 안타까워” 우리 교회 주보 2면 아래쪽에 몇 년째 두 개의 사자성어가 쓰여 있다. 하나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이고, 다른 하나는 지족상락(知足常樂)이다. 상선약수를 써 놓은 것은 먼저 교회 이름의 의미를 주보를 보면서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교회를 개척하여 처음 예배를 드릴 때 주보에 “약수교회 설립에 부쳐”라는 제목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약수라고 하면 어느 깊은 계곡에 맑게 솟아오르는 옹달샘이 생각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오염되어 맑고 깨끗한 것을 보는 것이 감격스러운 때라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도 유쾌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이름은 이 약수(藥水)는 아니고, 약수(若水)입니다. 뜻은 ‘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가운데 물만큼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것도 없어 보입니다. 늘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서도 모든 생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동양 고전의 하나인 노자의 도덕경 8장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여 그 길을 가는 물처럼 약수교회 성도와 교회는 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소원하며 지은 이름입니다. 또 무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지나침으로 가득합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도 지나침이 믿음이요, 미덕으로 보입니다. 온 세상이 다 지나침으로 달려가도 무리하지 않는 참 안식과 자유로움이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이 안일함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가속 페달만 밟고 있는 때에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약수(若水)’라는 말이 성경 어느 곳에도 나오지는 않지만 물의 속성과 같이 사는 신앙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척한 지 몇 달이 안 되어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등산 가방에 페트병을 여러 개 넣고 교회 이름을 보고 약수를 뜨러 온 적이 있었다. 이제는 주일 학교 아이들도 상선약수의 뜻을 안다. 지족상락(知足常樂)은 1982년 선교 단체 선배 간사로부터 처음 들었는데 좋아서 그때부터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 ‘족한 줄 알면 늘 기쁘다’는 뜻이다. 이 말은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는 성경 구절에서 따 온 것같다. 두 사자성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비슷하다. 교회 개척 준비를 하면서 성경을 새로 읽고 한국 교회사, 기독교 교회사를 다시 읽으면서 교회 이름도 생각하면서 어떤 목회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때 함께 읽은 책이 노자의 도덕경이다. 이런 가운데 마음속에 강하게 떠오른 것이 지금 한국 교회는 너무 욕심꾸러기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열심과 관계없이 우리 앞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고 계시는 하나님을 잊은 채 만족을 모르고 늘 모자라다고 떼쓰는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현재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셨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현재 상황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선인 것을 믿으며 감사하는 삶을 살며, 이후에도 가장 알맞은 것으로 채우실 것을 확신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또 가르치는 삶을 살고 싶다. 주보에 써 놓지는 않았지만 자주 소개하는 것이 ‘일반은총’(一般恩寵)이다. 한국 교회에서 시급히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은총에 대한 이해 없이, 성도에게만 허락된 구원의 은혜인 특별은총 하나의 공식만으로 신앙 내용을 설명할 때 많은 무리가 따른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일반은총을 베푸신다. 그래서 좋은 머리, 좋은 건강, 좋은 직장, 많은 재산도 허락하신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진 자는 믿음이 좋아서 그렇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신자와 불신자에 골고루 나누어 주신다. 늘 상선약수(上善若水), 지족상락(知足常樂), 일반은총(一般恩寵)의 의미를 배우고 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
438 no image |목회칼럼| 오징어를 먹지 말라구요?_김성한 목사 (890)
편집부
22151 2013-01-22
오징어를 먹지 말라구요? < 김성한 목사, 은혜교회 > “대형교회 추구하는 한국교회 경향과 목사들의 심리가 심각한 문제” 얼마 전에 우리교회 교우 한 분이 건강 검진을 받았다. 일상적인 건강 검진이었는데, 검사 결과가 나오자 담당의사가 “오징어를 먹지 말라”고 했단다. 오징어뿐만 아니라 새우도 먹지 말고, 달걀도 가급적 줄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다 먹지 말라고 하더란다. 오징어가 무슨 죄가 있나? 오징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것이 문제였다. 오징어는 아주 좋은 식품이고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는 좋은 음식이지만, 그 분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오징어를 먹지 말라고 권면한 것이다. 결국 그 분은 의사의 설명을 듣고, 딱 5년 동안 오징어를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고, 이후 건강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 대형교회병 어떻게 하나?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형화’를 꼽는다. 교회가 대형화 되는 것도 문제지만,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한국교회의 경향과 목사들의 심리가 더욱 심각한 문제다. 과거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목회하시던 시절에는 교인 수가 200명이 넘으면 당회에서 분립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고, 300명이 넘으면 적극적으로 교회를 분립했다. 지금은 교인이 천 명이 되면 목표가 만 명이 되고, 만 명이 되면 목표가 10만 명이 된다. 멈출 줄 모르는 한국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대형병은 심각한 상태를 넘어서 중병에 걸린 상태다. 대형화가 만병의 근원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불미스러운 문제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 문제의 근원을 캐보면 대형화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경향은 교회의 체질을 건강하지 못하게 하고 교리적 윤리적 건전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입만 열면 한국교회의 비만 현상이 심각하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아무도 처방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으니 안타깝다. 반대 처방을 하고 있다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병이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정작 내놓는 모든 처방이라는 것은 오히려 작은 교회로 하여금 대형교회를 따라 모방해서 성장하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왜 반대의 처방을 하고 있나? 자꾸 이러면 작은 교회 목사는 은근히 못난 사람처럼 여기는 풍토를 만들고, 작은 교회는 뭔가 문제가 있는 교회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대형화 병을 더 부추기는 꼴이 된다. 급속하게 성장한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제시하거나 큰 교회를 모범적인 교회의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며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교회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속도와 과정이 있는데, 정상적인 과정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 작은 교회로 하여금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대형화 병에 걸렸는데 오히려 작은 교회가 문제라고 하면서 반대의 처방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총회에 참석해 보니까 최근 총회나 혹은 교단 행사를 참관하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총회의 임원이 되려면 교회가 커야 되는가?”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 언제부터 한국교회는 이런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교회의 대형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형화를 지향하도록 하는 교회의 풍토며, 목사들의 인식이다. 병이 깊었으니 빨리 어떤 처방을 내놔야 하지 않겠는가? 오징어는 죄가 없지만 오징어는 아무런 나쁜 음식이지 아니지만, 일부 비만이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사람에게는 금하는 것이 좋다. 큰 교회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의 비만병을 고치려면 뭔가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작은 교회를 목회하시는 선배 목사님들 중에 정말 마음으로 존경스럽고 덕망과 인격과 신앙과 실력을 갖추신 분들이 많이 계시다. 교단의 행사나 총회 임원을 선출할 때, 작은 교회에 더 우선권을 주면 어떨까? 계속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딱 5년만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훨씬 더 건강해질 것이다. 약이 없으면 음식으로 고치는 것이 더 현명한 처방이라고 생각된다.
437 no image |김영규칼럼| 총체적 회의주의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역할 (25)
편집부
5320 2013-01-22
총체적 회의주의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역할 < 김영규목사 >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국가의 임무는 보다 큰 도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 요즘 사람들은 생산물들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들과 새로운 창조적 아이디어 혹은 디자인을 소비한다고 할 만큼 시대상이 지식경제 사회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것의 간접적 영향으로 삶 자체가 놀이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를 지탱하는 과정에서 비우량 담보대출의 부실이나 투자기관들과 금융회사들의 투자상품 내용들에 대한 통제가 장기적으로 기본 생산 활동의 전체적 특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영향으로 인하여 주고받으며 속고 속이는 자본 시장의 규모가 여하튼 켜야 한다는 성장요구에는 크게 미치지 못함에 따라 체감 경기의 위축을 느끼고 국가의 전체적 경제 기능으로부터 나타난 허점들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것 같다. 그러나 국가나 사회 및 교회는 세계가 과거의 어떤 시대보다 전혀 다른 장기적 위기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가 정책이나 환경의 위기도 아니요 세계 경제나 지역적 경제위기도 아니다. 미래 에너지 위기나 전쟁 등과 같은 재난의 위기도 전혀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살 희망이 없는 근본적 위기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것을 찾고 추구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과거에는 그 근원을 찾는 인간의 행위나 욕구의 대상에서 쉽게 변하는 지각세계는 경쟁에서 밀려났었다. 지금은 감각세계 자체가 물질세계가 아닌 심오한 세계의 실체라는 사실이 저절로 발견이 되면서 인간의 탐구활동에 있어서 절망과 풀 수 없는 근원적 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미래 사회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위기의 근원적 내용이다. 거의 절망적 내용이다. 과거에 회의주의는 어떤 것에 대한 회의주의이고 어떤 사람들에게서 찾게 되는 회의주의였다. 그러나 지금의 회의주의는 총체적 그리고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는 회의주의이다. 우주 질서의 마지막 꽃이 바로 물질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와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인류가 발견한 마지막 절망의 내용이다. 더구나 지금은 물질세계의 창조에 있어서 대략 10의 43승 분의 1초의 마지막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이 힉스와 같은 어떤 입자들이 정보단위로 있는 빈 공간에 대한 발견으로 끝나게 됨으로, 물질세계에 대해서 풀 수 있는 모든 입자들이 거기에서 생산이 되는 벽만을 발견했을 뿐 그 넘어 어떤 정보의 세계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수단들이 없는 근본적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게 지금 우주 질서의 비밀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는 과학의 종말에 도달한 것이 총체적 회의주의를 가속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회의주의란 없다. 우리가 19세기 이전에는 물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었지만, 20세기에 와서는 공기 중에 산소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었고, 21세기에 와서는 지금 우주의 질서들이 드러나기 전에 그런 힉스 공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을 뿐이다. 좀 더 고급한 감사기도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진화론자들은 그런 힉스 공간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필요가 없지만, 하늘에서 정한대로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힉스 공간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게 하신 모든 질서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은 상급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닮아 가는 은택들을 받는 것을 마지막 최고의 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받은 기업이나 일자리도 그들의 분깃이 아니요 몸의 부활이나 하나님의 나라도 진정한 그들의 분깃이 아니다. 그들의 보상은 그런 모든 것들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큰 보상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다른 종교란 없다. 기독교는 종교운동도 아니고 세속운동도 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그런 하나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저항할 뿐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할 뿐이요 있는 것을 가지고 줄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이 없는 그 자체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그렇게 의존하여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인류 안의 초기 교회인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부름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웃을 위해서 세금을 내야 했고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해서 세금을 내야 했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주는 왕 제도가 도입된 이후 그들은 왕을 위해서 인두세, 물품 거래세, 소득세, 취득세, 통행세 등 각종 세금들을 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용병제도처럼 도입된 왕 제도가 국가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제도의 발전과 함께 정부도 큰 비영리단체처럼 기능하는 작은 정부의 개념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 정부가 국민의 의무들에 의해서 지원을 받는 것을 이용하여 잠정적으로 위임된 그 권력을 휘두르고 법을 이용하여 철 밥통이 되면 당연히 국민의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국민을 위한다고 국민의 의무인 세금을 국민의 합의 없이 마음대로 정하여 국민들에게 실제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없이 착취만을 일삼으면, 그것은 정권을 잡은 다수인들이 국민에 대해서 무서운 도둑질과 강도짓을 하는 것이다. 큰 도둑질은 자기 안에 숨기고 작은 도둑을 잡으면서 뻔뻔스럽게 일하였다고 하는 꼴이 된다. 국가의 청지기들은 그런 큰 도둑질을 가능한 적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회의주의가 극도에 도달한 미래 사회에 있어서 삶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흔들리어 한 순간에도 살 희망이 없는 미래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지식으로 초대하여 영혼들에 대해서 사기를 치지 않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위로하는 일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그 권력을 잡은 자들도 자체나 다른 이들로 하여금 큰 도둑질을 가능한 적게 하여 선한 약자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할 것이다.
436 no image |목회칼럼| 그래도 희망은 있다_안두익 목사 (34)
편집부
4533 2013-01-08
그래도 희망은 있다 <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 “바늘 끝이 한쪽에 고정되어 있으면 그 나침반은 쓸모 없어” 201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만 되면 무언가 한 가닥 기대감을 걸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보게 됩니다. 이 추운 계절에 보신각에 모여 소원을 비는 수많은 인파를 보지 않습니까? 해가 바뀔 때마다, 동해 바다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자신의 소원을 비는 사람이, 지난 해 조그마한 해안선 역인 정동진에만도 3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동해안 바닷가에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손을 비비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인간의 실존입니까? 이와 같이 나약한 존재인 우리가 새해를 다시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한 해를 살아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여러 가지로 원칙과 질서로 나라를 이끈다는 신념이 있습니다만 현실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하우스 푸어’(house poor)라는 단어입니다. ‘하우스 푸어’라는 말은 자기 집을 가지고 있지만, 집을 살 때 받은 대출에 대한 이자를 갚느라 살림이 굉장히 힘든 사람을 말합니다. 집을 살 때에는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출을 많이 받았는데, 집값은 오르지 않고 금리만 올라 수입의 많은 부분을 이자로 내야 합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지난 ‘2012년 국내 10대 트랜드’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하우스 푸어가 108만 가구에 이른다고 합니다. 연체로 인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버 푸어’(siver poor), ‘리타이어 푸어’(retire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 자녀교육에 신경쓰느라 노후대비를 하지 못해서 은퇴 후에 빈곤하게 사는 노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노년에 더욱 빈곤하게 사는 가구가 무려 102만 가구나 된다고 합니다. 이제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시기를 맞고 있는데 이들이 은퇴하면 실버 푸어나 리타이어 푸어는 엄청난 숫자로 늘어날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하우스 푸어나 실버 푸어들이 대부분 중산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먹고 사는 것에는 별로 걱정할 것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날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안에 경제로 인한 이 엄청난 부담이 우리의 가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삶이 어려운 시대적 환경에서 우리가 잃어가는 게 많은데 그중에 현저하게 나타나는 게 감사의 메마름입니다. 감사의 메마름.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날카로워지고, 서로 원망하고 불평이 잦아집니다. 심지어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정부를 믿을 수가 없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불신의 덩어리로 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미칠 듯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앞에는 무언가 밝은 미래를 점칠 수가 없는 답답한 환경만이 놓여 있지만 감옥과 같은 이런 환경도 우리를 절대 꺾지 못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시대 앞에선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앞에 선 우리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나 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선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에벤에셀의 자녀입니다. 그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살맛나지 않습니까? 이제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새해를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되새김질을 할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나침반을 보면 항상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침반의 바늘이 항상 북쪽을 지향하는 자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나침판을 자세히 보면 항상 바늘 끝이 떨고 있습니다.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자석은 자기에게 지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바늘이 떨리고 있다면 이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바늘 끝이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그 나침반은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떨어야 합니다. 나침판의 바늘 끝이 항상 북쪽을 향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영혼이 무디어지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떨어야 합니다. 이제 야곱이 브니엘의 아침을 맞아 약속의 땅으로 나아간 것처럼 말씀을 붙잡고 내 인생의 선장이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힘찬 걸음을 내닫으십시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435 no image |목회칼럼| 그런 목회자가 부럽습니다_이상업 목사 (4)
편집부
4214 2012-12-26
그런 목회자가 부럽습니다 < 이상업 목사, 성은교회 > “자신의 한계와 그릇 인정하고최선 다하는 목회자 되길” 얼떨결에 개척으로 시작한 목회 22년을 돌아봅니다. 목회자 모두가 다 나름대로 기가 막힌 시련과 위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힘든 때가 있으면 좋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근데 저는 오직 힘든 생각만으로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처음 6-7년의 목회 사역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힘들게 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누구도 아닌 준비되지 않은 저 자신이었던 것만은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두 번째 목회의 기회가 왔습니다. 감격하며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개척보다 힘들 수도 있었으나 오직 감사뿐이었습니다. 7년의 골병(저는 탈진을 골병이라 합니다)으로 약해진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저의 모습을 그분이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2-3년 동안 부흥이 무엇인지 진짜로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말씀이 왕성하다는 것, 교회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 한국 교회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 속에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놀라고 감탄은 했으나 그 목회를 즐기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족하며 감사로 충만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70-80평의 땅을 우습게보고 예배당 건축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당당함을 넘어서서 자고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골병든 7년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없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은근히 교만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목회 현장과 저 자신에게 또 새로운 위기가 왔습니다.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아니 마음은 이미 도망갔었습니다. 좌절과 낙심과 번민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부흥이 아닌 억지 성장마저도 추구할 의욕도 기회도 다 사라졌습니다. ‘언제든지 예배당 소유하는 것쯤이야’ 하는 생각은 안개처럼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땅값은 2배, 3배, 4배까지 올라갔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예배당은 좁아서 90평 임대 상가로 옮겼습니다. 1억 수 천을 들여 실내 장식을 하면서도 마음에 모든 의욕과 열정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오직 힘들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교인들은 더 줄고 헌금은 반 토막이 되었는데, 철저히 골병든 저에게 목회 재미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목회 14년 만에 처음 겪는 경험이었습니다. 외적으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 참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의 태평성대를 누리는 심정이 이런 것 이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감사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삶을 다 돌아봐도 하나님이 주시는 재미, 성경적인 즐거움을 경험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회하고 있는 게 기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를 위한 최상의 선물은 목회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교회와 저의 형편은 더 어려워져가고 있는데도 감사와 만족은 사라지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가 재미있었습니다. 옛날에 어떤 교수님이 ‘재밌냐?’고 물으시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목회를 재미로 하나’라고 말입니다. 경험을 못해 봤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이 경험 이후부터 저는 이런 목회자를 가장 부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교세가 크던 작던 목회를 최상의 선물로 알고 목회 자체를 즐기고 있는 목회자가 제일 부럽습니다. 만족치 못하고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끝없이 달려가는 열정의 목회자보다 자신의 한계와 그릇을 인정하고 만족하며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목회자가 더 부럽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긍정의 힘’과는 너무 상반된 생각일까요? 성공이나 출세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지라도 목회하는 자체만 생각해도 황송한 심정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그런 목회자가 가장 부럽습니다. 시시때때로 성장의 욕심과 힘든 현실 때문에 미혹을 받아 흔들리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목회를 즐기며 감사할 수밖에 없는 마음으로 가득 찬 그런 목회자가 가장 부럽습니다.
434 no image |김영큐칼럼| 절대속도와 영적 세계 (31)
편집부
4768 2012-11-27
절대속도와 영적 세계 < 김영규 목사 >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물질계의 절대속도보다 바른 정보는 영적세계의 존재 입증하고 있어” 최근 사용되는 우리의 일상용어들이나 학술용어들은 성경의 언어들보다 좀 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언어들로 바꾸어지고 있다. 나노세계보다 작은 피코(pico) 세계나 펨토(femto) 세계를 지나 아토(atto, 10의 마이너스 18승) 세계의 변화를 읽어내고자 하고, 기가(giga) 에너지 세계를 넘어 테라(tera, 10의 9승) 에너지 세계에서 물질의 근원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지구의 역사와 함께 풀려면 지구 중력권을 일시적으로 쉽게 벗어나고자 하는 기술들을 우선 확보해야만 태양계 안의 위성들이나 행성들의 중력권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에너지 자원들을 찾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넓게 세계는 지금 태양보다 10배내지 20배 이상의 블랙홀들을 찾아내 우리 물질세계의 에너지의 근원에 대해서 풀고자 한다. 지구만한 블랙홀이 있다면, 나로호에서 지구의 중력가속도를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그곳을 벗어나려면 빛보다 빠른 가속도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물질세계의 에너지의 궁극적 공간이라고 하는 빛과 같은 절대 가속도를 가진 공간은 서로 상대적인 점들이 있다고 가정해도 항상 그 절대 속도로 거리를 갖는 점들이라고 가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점들은 실제로 어떤 입자로 생성될 때만 가능하고 이미 그런 입자로 존재하면 그런 공간은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입자로 존재하면서 그런 절대속도로 달릴 수 있는 공간은 블랙홀의 공간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에너지 세계 자체가 그런 절대속도로 정의되고 있는 한, 그런 블랙홀로부터 우리 세계의 어떤 에너지 입자들도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블랙홀을 하나 가진 어떤 은하계들이 함께 합쳐지거나 몰락하는 현상은 그런 가정과 모순이 된다. 그런 블랙홀이 쿼크 입자들을 생성하여 제트기류로 몰락할 수 있었다면, 지금 쿼크 입자들이 생성되기 전에 힉스 입자들이 생성되어 있었고 어떤 순간이라도 힉스 공간이 생성될 수 있었다는 말도 된다. 그런 별들의 신비를 넘어 중성미자들이 지구를 통과하듯이 부활의 몸이나 영혼의 세계의 정보 입자들이 우리 물질세계의 절대속도보다 빨라 그런 블랙홀의 세계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다면, 그런 영적 세계는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물질세계의 절대속도로 달리는 정보 입자들보다 더 빠른 정보입자들로 구성된 어떤 현상이 있다면, 우리 세계의 속도에 맞추어 우리 세계의 질서와 충돌하거나 나타날 수 있는지는 신학의 특별한 과제이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타날 가상 정보 세계로 있는 정보와 창조된 힉스 공간에 가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정보의 세계는 그 근원적으로 원형의 성격에 있어서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보의 세계가 없이 모든 에너지 입자들이 생산될 수 있는 어떤 힉스 공간을 인공적으로 생성시킬 수 있는 기술들이 열린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중 하나이다. 아마 그런 기술들을 이용하여 블랙홀의 세계가 어느 시간(창조자의 정지 가상시간)을 지나 에너지가 커져서 그런 힉스 공간의 세계가 열려 최종 제트 기류나 빛으로 몰락하는지를 검증할 수 있을 것이고 절대 가속도를 극복하는 길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힉스 공간의 생성은 창조의 원 비가역성으로 절대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경계영역 혹은 한계선을 가리킨다. 물론 거기에서 시간여행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나 지각 세계들 자체가 물질세계의 절대속도보다 빠른 정보의 세계로 전환되는 방향이 이미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결론하자면, 미래 인류가 에너지를 얻어 생활해야 한다면 누군가가 극히 작은 힉스 공간을 만드는 기술을 찾아내야 할 것이고 그런 미니 힉스 공간(mini Higgs field)을 이용하여 미래 에너지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국가의 경쟁력은 세계의 어떤 나라나 집단이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수행하였을 때 그리고 그런 수행능력의 수가 많았을 때 크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핵융합에너지 생산시설이나 미니 친환경 원자로 개발 등 최첨단 기술들도 그것을 위해서 함께 높여 놓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기술이나 새로운 과학적 사실들은 그런 경쟁 단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틀린 사실을 발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들을 통해서 합리적으로 실수하는 일들을 모두 겪어야 비로소 다른 합리적 실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올해 노벨 과학상들이 주는 과학적 사실들의 경우에도 대충 예측되어 있었고 다음 단계의 기초과학 사실의 발견에 대한 이정표로 상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며 대부분 상을 주는 수준보다 지금 더 발전되어 있거나 특정 영역들에도 아직 그런 상을 줄 수 있는 분야의 인물들이 많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학적 진실이든 사회과학적 진실이든 소박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자들이 많아야 하고 거짓을 가려내는데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국가나 사회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런 소박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일만은 포기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박사학위과정까지 모두 국가가 지원하더라도 그런 진실한 싸움을 하나의 국력으로 지혜롭게 잘 모아야 할 것이다. 더 큰 미래를 가진 교회는 하나님의 긴 시간만큼 그런 진실한 싸움을 세상이 지속적으로 지속할 수 있도록 높은 가치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교회가 추구하는 높은 가치는 세상의 높은 가치와 같이 달리고 주는 자로서의 그런 길을 마지막까지 피할 수 없다. 아직 미완성된 하나님의 길에 있어서 교회는 그가 맺을 열매들만을 열심히 맺으면 되는 것이다.
433 no image |목회칼럼| 나는 시시한 일들은 예언하지 않습니다!_김원광 목사 (113)
편집부
5822 2012-11-13
나는 시시한 일들은 예언하지 않습니다! < 김원광 목사, 충계충성교회 > “미래를 궁금해 하는 심리 이용한 교묘한 상술에 빠지지 말아야” 지난 11월 8일 대학수능시험이 끝났다. 마음 졸이며 시험을 준비했을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기도하게 된다. “주님! 이 젊은이들의 앞길을 열어 주시고, 자녀들을 위한 부모님들의 간곡한 마음에 주께서 가장 좋은 것들로 응답해 주시옵소서.” 어느 날 성도 한 분이 찾아왔다. 그분은 자녀의 대학입학시험을 놓고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목사님 우리 아이가 시험에 붙을까요?” 나는 “집사님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며 웃었다. 요즘 우리 사회 안에 온갖 점술이 만연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점집들을 아무런 죄책감이나 부담감 없이 출입하는 타락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한 때는 미신이라고 무시당하던 것들이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미혹시키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람들이 미래를 궁금해 하는 심리를 잘 이용한 교묘한 상술이며 또한 마귀의 술수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미래사에 관심이 많다.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예언기도’라는 것을 좋아한다. ‘예언기도’해 준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낀다. 약한 존재인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사에 대해 궁금증이 클 수밖에 없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 도처에는 소위 ‘가정 제단’이라는 예배처소들이 있었다. 거기서는 주로 예언기도를 많이 해 주었다. 그 시절에 나도 몇 차례 ‘예언 기도’를 받아본 기억들이 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그것은 그 예언기도가 상당수 맞지 않더라는 것이다. 부흥회에서 어느 유명한 부흥강사가 예언했다. 자신의 꿈에 하나님이 남북을 나누고 있는 붉은 줄을 다 지우고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이제 10년 안에 통일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당시 통일이 되리라고 제시했던 10년이 훨씬 넘었으나 통일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부흥사로 잘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미래사를 이야기해 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예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은 예언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은 곧 바로 예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예언을 좀 합니다. 그런데 나는 시시한 예언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대학에 합격할지 떨어질지 모릅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번에 집을 사야 할지 팔아야 할지 모릅니다. 나는 여러분의 건강이 나아질지 더 악화될지 잘 모릅니다. 내가 예언하는 것은 좀 더 큰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운명에 대하여 주로 예언을 합니다. 내가 해 주는 이 예언대로 반드시 될 것입니다.“ “목사님! 그 예언이 뭔가요?”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실제로 복음은 예언이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미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해 주는 것이 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믿는다면 나머지 일들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녀들이 당장 대학에 붙거나 떨어지거나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정말로 하나님이 행하실 말씀의 약속들을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저 믿고 맡기면 된다. 미래 일이 걱정된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 자신이 이미 말씀의 예언자이다.
432 no image |목회칼럼| 지혜롭고 거룩한 길_정요석 목사 (148)
편집부
7121 2012-10-30
지혜롭고 거룩한 길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자기 욕심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것” 어떤 사람이 가장 지혜로울까? 나는 중학교 때까지 신앙생활을 했지만 그 이후로 10년 동안은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죽고 만다는 깊은 허무감에 빠져 고생했다. 그 때 사귄 친구들은 대부분 비그리스도인들이었다. 10년 만에 다시 교회로 돌아와 죽음과 반복의 지루함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전과 다른 매우 활력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니 예전과는 관심이 틀려지고, 그 친구들과의 만남도 점점 줄어들었다. 아마 기독교인이 된지 삼사 년이 지났을 무렵에 한 친구 아들의 돌잔치로 오래간만에 친구들이 모여 저녁을 먹으며 정을 나누었다. 저녁을 먹고도 헤어지기 싫은 친구들은 카드를 하며 놀게 되었다. 카드라는 것이 처음에는 정으로 시작할지 모르나 돈이 왔다갔다 하다보면 진지한 노름의 성격을 띠게 된다. 나도 한 때 좋아했던 카드인지라 그들과 섞여 놀았지만 이미 기독교의 물이 든 나에게는 노름의 진지함보다는 친구들과의 정이 더 좋았다. 도통 카드에 집중할 수 없었다. 대신 친구들의 얼굴을 더 보게 되었다. 나는 이미 전의를 잃은 채 돈 얼마쯤은 기꺼이 잃겠다는 마음으로 카드를 받아든 친구들의 희노애락을 보며 웃음을 짓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친구들의 희노애락에서 그들이 들고 있는 카드가 어떤 내용인지 눈에 들어왔다. 미국에서 2009년부터 방영된 “나에게 거짓말을 해봐”(lie to me)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주인공은 순간적인 근육의 움직임과 미세한 표정의 변화로 사람의 거짓말 여부와 내면의 상태를 알아내곤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친구들은 좋은 패가 들어오면 순간적으로 눈을 깜박이거나, 어금니에 힘을 주거나, 발을 잠시 흔들거나, 엉덩이를 살짝 올리거나 했다. 패가 나쁘면서도 과장을 할 때는 목젖이 순간적으로 움직이고, 음성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판돈에 초연하게 되면서 내 카드를 보지 않고, 친구들을 보니 오히려 나는 그들의 카드를 읽게 되면서 판돈을 모두 딸 수 있었다. 나는 그날 그전까지 그리고 그이후로도 결코 이루어보지 못한 완벽한 싹쓸이를 해버렸다.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탄식하셨다. 이들을 떠나 제자들과 같이 배를 타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남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떡 일곱 광주리를 가져오지 않은 것 사이에 굳이 연관성을 찾는다면 “누룩과 떡”이다. 누룩(yeast)은 발효와 부풀리는 기능이 있어 떡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에는 도저히 떡을 연상할 수 있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 문장에서 “누룩”이라는 단어 하나를 인하여 바로 떡을 연상한 것이다. 제자들이 평소에 무엇을 지향했고, 어떤 지혜를 갖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제자들 또한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는 바리새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는 것에 관심을 가진 제자들이기에 더 많은 떡을 확보하고, 더 높은 자리에 앉는 지혜는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 대하여는 아직 부요하지 못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3장 ‘작정’과 5장 ‘섭리’를 말하며 “가장 지혜로우시고 가장 거룩한”(the most wise and holy)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한다. 2장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면서도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시며”(most wise, most holy)라고 나란히 말한다. 지혜로움과 거룩함은 같이 가는 것이다. 가장 지혜로움은 가장 거룩할 수밖에 없고, 가장 거룩함은 가장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절대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다른 면들이고, 하나의 여러 이름들에 지나지 않는다. 지극한 지혜는 지극한 거룩과 자유와 절대와 불변과 사랑과 은혜와 오래 참음 없이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에는 사사로운 잔꾀가 없고, 우리를 향하신 절대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거룩함으로만 물들어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할 때 어떻게 하면 가장 거룩할 가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 되는 것이다. 거룩함은 지금 당장은 손해 일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익이 된다. 우리는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의 기발함에 만족하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에 거룩함이 있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그 생각이 연관된 상대편도 기뻐하게 하는 것이고, 이 일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도 편안하게 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 생각을 할 줄 아는 것이 어쩌면 꾸준한 새벽기도와 며칠의 금식기도보다도 더 힘들지 모른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줄 알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할 줄 아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얼마나 자유로워지고, 얼마나 사랑이 풍성해질까? 이러한 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자이다. 더 높은 자리와 명예와 돈을 인하여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이런저런 행동도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재승덕(才勝德)한 자가 아니라 거룩이 지혜와 같이 가는 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431 no image |시사칼럼| WCC 토론회 파행, 교회는 안중에 없나?_최재호 (32)
편집부
4603 2012-10-16
WCC 토론회 파행, 교회는 안중에 없나? < 최재호 · 실로암교회 > “예정된 찬반토론회 불참은 한국교회를 향한 무책임한 태도” 지난 10월 8일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WCC 관련 찬반 토론회가 찬성 측의 불참으로 인해 반쪽 행사로 전락했다. 한 기독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찬성 측 토론자가 불참했으며, 주최 측 기독교사상연구원(원장 최덕성)은 하루 전 반대 측의 토론회 불참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오래 전부터 언론광고와 SNS광고 등을 통해 'WCC 실체는 무엇인가?' 행사 개최 사실을 알고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토론 참가자가 이형기 명예교수(장신대, 찬성 측)와 최덕성 전 교수(고신대, 반대 측)여서 행사 전부터 팽팽한 설전과 함께 찬반입장의 신학적 근거가 제시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은 후라, 그 실망감과 당혹감은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언론 보도에 따르면 통합교단내 여러 인사의 불참 권유가 있었고, 이 교수가 이를 수용하면서 토론회 불참이 결정됐다고 한다. 주최 측이자 반대 측 토론자 최덕성 교수의 불만과 비난이 잇따른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안들을 보면서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사실 2013년 부산 WCC 총회에 대해 보수 신학진영에서 우려를 표명하거나 반대 입장을 천명한 것은 드러난 사실이다. 그리고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이 같은 우려와 반대에 대해 '교회의 하나 됨을 헤치는 편협한 주장', '세계교회 차원의 축제에 재를 뿌리는 행위' 등을 내세우며 적극 공박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총회가 열릴 부산 경남지역의 보수교단들의 반대움직임은 상당히 거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WCC 총회를 유치하고 준비하는 이들은 많은 교회들이 우려하는 WCC 의 신학적 노선, 정체성, 방향성에 대해 제대로 알리고 적극적인 이해를 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세계교회건설, 종교다원주의, 에큐메니컬운동 등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들의 입장을 성경적 근거나 합당한 추론을 통해 선명하게 밝히는 노력이 선행되고 나서 행사의 동참과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순서에 옳다. 또, 이번 토론회는 '교회를 위한'이란 정신을 간과했음을 지적하고 싶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대립하게 하는 신학사상이 제기되었을 때, 그때그때 교회들은 회의를 통해 논의하고 입장을 정리해 왔음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순수성과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며, 교회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런 노력들을 기울여 온 것이다. 좁게는 한국교회가, 넓게는 보편교회가 대립하고 분열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논의하고 정리하여 하나의 보편교회를 견고히 세워가는 일이 진정 에큐메니컬 진영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번 토론회에 불참한 분도, 그를 권유하여(?) 불참케 한 통합교단내 일부 인사들도 그분들이 천명하고 강조해온 신학적 노선과는 달리 에큐메니컬적 입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교회를 염두에 둔 학자도, 지도자도 아니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게 됐다. 2013년 WCC 총회를 즈음해 무조건적 찬성이나 반대가 아닌, 교회 안에서 신학적 점검과 검증이 있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단순히 행사 찬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과 주장에 대해 교회가 분명한 이해와 해석을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번 행사는 많은 기대를 가졌던 이들에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가겠지만, WCC 운동에 적극적인 분들은 반드시 이에 대한 해석과 점검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위한다면, 교회에 의한 모임이라면, 또 스스로를 교회라고 여긴다면 공교회의 유익을 위해 교회의 순결과 순수성과 거룩성을 견지해야 하며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잘 새겨야 할 것이다. (http://cafe.daum.net/tknewsnjoy)
430 no image |목회칼럼| 굳 잡(Good job)_박삼열 목사 (408)
편집부
19862 2012-09-28
굳 잡(Good job) < 박삼열 목사, 송월교회 > “웃다가 울다가 반복하지만 주님께 칭찬받는 날 바라보며 살아가길” 우리는 ‘훌륭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명절에 모두가 모였을 때 어른 중 한 분이 이 말을 해 줄 때면 뿌듯해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것이란 쉽지 않았습니다. 학교 성적이 좋아야 했고, 아니면 무슨 대회에서 좋은 점수를 얻을 때에야 가능했습니다. 결혼을 했더니 아내는 한술 더 뜨는 사람이었습니다. 딸만 넷이 자라는 집에서 아빠와 함께 낚시를 가면 아주 많이 잡아 ‘아들 같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운동회도 좋아했는데, 달리고 싶은 만큼 몸이 따라 주던 아내로서는 쏜살같이 달려서 팔목에 ①이라고 찍힌 시퍼런 도장을 받고 상품으로 공책까지 받은 날이면 집까지 한 숨에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친구가 생각납니다. 평소 명랑하다 못해 너무 부잡스러워서 선생님께 꾸중을 받곤 하던 친구입니다. 그런데 운동회 날 응원단장이 되어 반 전체를 이끌며 마구 뛰어다닐 때면 우리 모두는 그에게 열광하곤 했습니다. 여하튼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매겨지는 점수 때문에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던 제가 몇 해 전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산 조카가 자기가 경험한 봉사활동 이야기를 해 준 것입니다. 어느 장애아들의 운동회 날 그는 도우미로 봉사했는데 그 역할이란 그들이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도록 소소한 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중 달리기 순서에서는 아이들이 힘껏 달려오면 골인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품으로 받아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총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 달려왔습니다. 도우미들은 정해진 라인 끝에서 자기 아이를 얼른 품에 안아내면서 “굳 잡(Good job), 훌륭해, 정말 잘했어!”라고 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체 부자유한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굳 잡, 굳 잡!”을 말하는데 왠지 가슴이 찡해지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 이야기를 듣는 나 자신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아마, 우리의 현실이란 힘든 상황의 연속이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던 우리 모두의 상황과 어우러져 공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에 우리 모두는 부르신 삶, 주어진 길을 걸어 냈습니다. 목회의 현장이란 움직이는 생물인 것 같습니다. 태어나고 세상 떠나고, 한쪽에서는 즐거운 가정이 생기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방금 찢어지는 슬픔에 휩싸이고, 취직되면 실직하고, 건강한 성도와 암 수술이 시작된 성도, 눈부신 새싹과 같은 성도들 너머로는 부상병들이 실려 오고, 개 교회 목회뿐만 아니라 지역 및 교단적 연합전선에 함께 출정하는 일 등 ‘나이’와 ‘주말’을 잊고 살아오던 것이 어느덧 10년, 20년이 되어 오고, 우리 중에는 30년이 넘어가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한편 언제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하고도 좋은 소리 못 들은 날도 정말 적지 않았습니다. 다 우리가 부족해서 그랬겠지요. 그러면 또 기도하면서 정말 수많은 날들을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걸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을 위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저는 위대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말씀이 좋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딤후 4:7-8). 마치 주님이 우리에게 “굳 잡(Good job), 수고하고 잘했다!”라고 말해 주시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429 no image |목회칼럼| 목회자의 독서 생활_안만길 목사 (245)
편집부
10040 2012-09-18
목회자의 독서 생활 < 안만길 목사 · 염광교회 > “얕은 물가에서 노는 사람은 심해의 아름다움 알 수 없어” 목회자와 독서생활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목회사역의 중요한 몫이 설교사역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설교가 어떤 공식에 의해서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공식에 대입만 하면 설교가 뚝딱 나온다면 설교자의 수고를 훨씬 덜어 줄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운 설교는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 수고에는 목회자의 풍부한 독서가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풍부한 물을 저장하고 있는 저수지에서 가물 때에 필요한 용수를 확보할 수 있듯이 말이다. 목회자의 독서는 이처럼 뚜렷한 방향성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게 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독서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그 시대의 정신세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많은 사람들 또한 성도들의 마음까지도 침투하여 우리의 가치관을 흔들기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리는 기독교서적의 수준은 중학생이 읽을 만한 수준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깊이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하고 난해한 신학적인 책은 기피하는 경향이 심한 것 같다. 간증 위주의 가볍고 성공 일화를 다루는 번영신학의 책들이 잘 팔리는 것을 보면 신앙의 깊이가 얼마나 얕은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때에 목회자의 독서는 좀 더 깊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개혁주의 입장에서 나오는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할 것이다. 가벼운 책들은 멀리하고 씹기 어려운 가죽 같은 책을 접하는 것이 목회자의 신학의 깊이를 더해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얕은 물가에서 참방거리는 사람이 심해의 아름다움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의 독서 생활을 보면 그는 휴가 때에 두툼한 신학책을 늘 곁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그는 ‘책을 잘 씹고 소화해야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나는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나오는 것은 내가 읽은 독서의 진액들이다. 하지만 이 진액은 나의 사고의 결정이다’라고 말하였다. 요즘 보면 젊은 칼빈주의자들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어 환영하는 바이다. 고전과 현대적인 연구의 서적들을 함께 읽으면 더욱 유익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늘 곁에 두고 눈에 익숙할 정도로 읽는다면 우리의 설교가 더없이 깊어 질 것이며 바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장정일은 이렇게 자기의 독서관을 말하였다 : “내가 보기에 바른 독서란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와 같다. 독서는 저자가 그 책을 쓰기 위해 펜을 내어 달렸던 그 열정의 속도와 같은 속도로 읽어 내려가야 한다.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어떤 책을 들고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보아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라는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한다. 목회자의 손에는 늘 책이 들려져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책 읽을 시간이 그렇게 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에 갈 일 있을 때 그 나라의 문화나 선교의 역사 같은 책을 읽으면 그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북경에서 온 편지’(펄벅)를 읽었을 때 중국의 격동기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시간나면 책을 읽겠다고 한다면 평생 읽기 어려울 것이다. 목표를 정하여 일 년에 어느 만큼의 책을 읽겠다고 하면 더 많은 책을 더 열심히 읽을 수 있는 자극이 될 것이다. 또한 읽은 책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 노트나 컴퓨터에 간단하게 읽은 소감을 적으며 또한 인상적인 구절을 적어 놓으면 그것만 읽어도 그 책에 대한 기억이 피어날 것이다. 깊은 독서 생활을 통해서 목회자의 신학이 깊고 성숙해 지며 또한 그 폭이 넓어진다면 그 강단 역시 풍부하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는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존 맥아더의 설교론에 보면 훌륭한 설교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빈약한 설교의 근본적인 이유는 준비에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기 때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독서는 당장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정신에 그 내용이 들어가서 그것이 녹아 나올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독서의 담수율을 높여야 할 것이다. 반면에 목사가 너무 책만 읽어도 안 될 것이다. 그저 책상에만 붙어 있다면 목양은 언제 할 것인가? 한 손에 책을 들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목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428 no image |목회칼럼| 누구 때문에 대접을 받는가?_안두익 목사 (128)
편집부
5779 2012-09-04
누구 때문에 대접을 받는가? <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 “그 경험은 나를 철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 제가 전도사 시절 때입니다. 그 동안 섬기던 교회에서 사임을 하고 새로운 임지를 위해 기도하던 차에 경기도 광주 쪽에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즈음으로 말하면 선(?)을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시던 집사님 내외분이 버스정거장까지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한참이나 신작로를 걸어서 그 집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도살장에서 나는 역겨운 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저의 코끝을 스칠 때 구역질이 갑자기 나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내외분은 소, 돼지를 잡는 도살장을 경영하셨는데 그분들이 거주하는 방을 그 도살장 맞은편에 고기를 저장하는 창고 같은 집 위에 2층 베란다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비위가 약했던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고, 억지로 구역질을 참아내며 베란다에 있는 방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었고, 또 목회자가 자신의 가정을 심방 온다 하니까 오늘 아침 잡은 고기를 가지고 대접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었습니다. 갖은 정성을 다한 음식이 나왔지만, 문에 들어설 때부터 비위가 상한 저는 도무지 상에 올라온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못해 한 숟갈을 입에 넣었지만 그게 넘어가겠습니까? 식은땀은 나고 한 숟갈 넣은 음식물이 자꾸 나오려는 것을 참는데 넘어 올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을 보던 그분들도 당황했습니다. 땀은 나지요, 밥은 안 들어가지요 숟가락만 대면 구역질이 나지요, 정성스럽게 준비한 분들의 성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맞은편 도살장에서 소를 잡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처절하고 슬프게 들리든지, 그런데 그 소의 울음이 마치 저의 귀에 하나님 음성처럼 들려 왔습니다. 저 처절한 도살장에서 죽어 가는 한 마리 소의 죽음이 주님께서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갖은 고난을 다 당하시다 도수장에 끌려가듯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어린양 예수의 부르짖는 음성으로 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한동안 구토가 나는 것도 잊은 체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이 나 때문에, 내 죄 때문에 도수장에 끌려가는 그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내 마음에 울리고 있었습니다. “안 전도사, 네가 지금 대접받는 것이 누구 때문인가?”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 이처럼 귀한 식탁에 앉아 주인행세하며 대접을 받는가 하는 마음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뭐가 복에 겨워 구역질을 하는가?” 하며 막 따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도저히 눈물이 앞을 가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간 나는 그렇게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던 그 시뻘건 육개장을 어떻게 다 먹었는지 모릅니다. 비록 제가 그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는 못했지만, 사실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저의 오늘의 모습은 없었을 것입니다. 목회에 권태가 오고, 때로는 내가 드러나려고 하는 순간마다 여지없이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꽂히는 게 “네가 지금 대접받는 것이 누구 때문인가?”입니다. 이 음성은 나로 철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과도 같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가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 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그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실토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고 자기 공로를 이야기할 만도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수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이제 가을이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내가 누구 때문에 대접을 받는가?”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일을 섬겨야겠습니다. 내가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내려놓고 묵묵히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보며 목양에 전념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427 no image |목회칼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_허태성 목사 (236)
편집부
8334 2012-09-04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 허태성 목사, 강변교회 > “목회자로 온전히 충성 못할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언제부턴가 교계 관련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이 두려워졌다.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추하고 악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기독교를 음해하려고 악랄한 누군가가 꾸며낸 거짓 기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것이 목회자들만 알 수 있는 제한된 정보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세상의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문과 방송 그리고 인터넷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수치와 폐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있으며, 얼마나 전도의 문이 막히고 있으며, 안티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모욕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던가? 며칠 전에도 한 일간지에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해 입건된 사람 가운데 현직 목사가 끼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십자가의 복음을 위한 고난은 고사하고 사상범이나 양심수도 아닌 잡범으로 한 명당 3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벌려고 그런 짓을 하는 추잡스러운 인간들 속에 목사가 끼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얼마전(2012. 8. 27) 아침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웃을 수가 있었고 감사할 수가 있었다. 감리교회가 한국 개신교 최초로 교단 차원에서 ‘교회 세습’을 막는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가 1면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사에 의하면 감리교 교회법인 ‘장정’(章程) 개정위원회가 ‘교회 담임자 파송 제한’ 규정을 신설해 ‘부모와 자녀가 연속해서 한 교회를 담임할 수 없다’, ‘부모가 장로로 있는 교회를 그 자녀가 담임할 수 없다’는 취지의 조항을 마련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 규정은 장인, 장모와 사위, 며느리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아, 감리교회가 그래도 아직 살아있구나!’라는 탄성을 지르며 그 개정안이 꼭 통과되기를 기도드렸다. 감리교회보다 훨씬 더 성경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장로교회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을 감리교회가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느낀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충현교회 김창인 원로목사의 “한국교회와 하나님 앞에 저의 크나큰 잘못을 회개합니다. 충현교회 성도 가슴에 씻기 어려운 아픔과 상처를 주었습니다”라는 참회의 선언에 이은 또 하나의 역사에 감사를 드린다.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역자는 많은데 목양지가 부족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개척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 년 내에 문을 닫지 않고 생존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사실이다. 잘 알지 못하는 외부인(?)을 담임으로 맞아 어려움을 겪는 교회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담임목사 리더십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각종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아들이나 사위가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목회를 잘 함으로써 계속하여 부흥되는 교회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일구어 온 교회를 남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목사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청빙과정에 전혀 하자가 없다면 아들이나 사위를 후임목사 후보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교회 세습’이라는 용어가 비성경적이기에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필자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필자의 생각이 치우쳐 있다고 비판할 분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고백(고전 9:15)이 필자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 문제가 이미 과거가 된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미래의 가능성으로 꿈꾸는 분들에겐 차라리 목회를 못할지언정,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래야만 교회가 이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살아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426 no image |김영규칼럼| 독도와 국가의 신용도 역학관계 (23)
편집부
4379 2012-09-04
독도와 국가의 신용도 역학관계 < 김영규 목사·남포교회 협동목사 >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일본의 독도 야욕은 국제 사회에서 신용도에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게 될 것” 최근 국가의 영토, 국권 및 정치사회뿐 아니라 미래 해양 자원과 군사 영역에 이르기까지 인문과학의 연구 활동이 그렇게 중요하게 부각이 되는 때도 없었다고 본다. 독도 영유권 문제로 태프트-가쓰라 밀약 혹은 합의 보고서(Taft-Katsura Agreement or agreed memorandum)가 역사의 그림자로부터 다시 부각이 되었고, KBS TV 스페셜 ‘독도의 증언’에서 1902년에 대한제국으로부터 울도 군수 배계주에게 울릉도에 출입하는 모든 화물에 세금을 매기라는 공적 문서인 『울도군 절목』의 발견이나, 독도에서 잡은 강치에 대한 수출세를 울도 군수에게 납부한 증거나, 일본인의 독도 전복 채취와 관련하여 일본의 어업자들이 울릉 도감에게 수출세를 내겠다는 약조문과 함께 도감이 일본인에게서 받은 영수증에 대한 증거를 통해서 1905년 시마네 현으로 독도 편입 이전에 독도의 실효적 지배에 대한 역사적 자료 발견과 그것에 대한 추적은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그 당시 열강 나라들의 숨어 있는 깊은 의도에 강탈의지를 보여준 외교문서들은 한 국가의 역사적 흔적으로써 국가 이미지와 신용평가에 있어서 오히려 긴 역사 안목에서 보면 자신의 국가에 큰 손해를 끼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향후 5년 동안 실효성이 있는 1902년 1월 3일의 영일 동맹(The Anglo-Japanese Alliance) 문서의 서문에 외교적으로 다만 극동에 있어서 평화를 유지하고, 중국과 한국의 독립성과 영토권을 유지하며, 이들 나라들에 있어서 모든 국가들의 무역과 산업을 위해 동등한 기회들을 보증하는데 관심을 보인다는 명목 하에 중국의 이권에 대해서 일본은 영국에 간섭하지 않고 한국의 이권에 대해서 영국은 일본에 간섭하지 않으며, 외부 힘의 공격적 행위나 그들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혼란에 의해서 위협받거나 생존권과 이익에 부응하여 상호 개입이 필연적일 때 필연적 수단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호 인정하며, 다른 힘과 상호 전쟁에도 참여하거나 엄밀한 중립을 유지한다는 협약은 지금도 영국과 일본의 얼굴이 되고 있다. 1905년 7월 27일 서로의 관심사들에 대해서 교환하고 극동(원문에 extreme 대신 far로 수정한 흔적이 있음)에 있어서 일반적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관한 가쓰라와의 긴 대화 내용을 담고 있는 워싱턴에 보낸 태프트의 보고서의 경우, 가쓰라로부터 필리핀에 대해서 어떤 공격적 의도를 품고 있지 않고, 영국과 일본 및 미국과의 형성되어 있는 어떤 좋은 이해 혹은 동맹의 입장에서 필리핀이 미국과 같은 강하고 친밀한 국가에 의해서 지배되어야 된다는 입장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 대화 내용 중 한국과 관련해서 한국이 노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며 절대적 중요성의 문제라면서 대외적으로 한국의 독립적 외교권을 확고히 빼앗고자 하는 일본의 야욕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주변국가와 전쟁을 수행하기까지 도둑적 야욕에 의해서 편입된 독도에 대해서 일본이 아직도 그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전 땅에 대해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독일 국민들이 과거의 치명적 잘못에 대해서 외형적으로나 깊은 반성을 표명하는 반면,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이 아직도 그런 치명적인 잘못에 대해서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국제질서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다. 아마 국제신용평가에 있어서 일본 정부나 일본 전체 국민에게 세계 질서의 책임이나 깨끗한 세계경제, 평화적 기술이용 및 건전한 문화 예술에 대한 책임을 도저히 맡길 수 없다는 마음을 세계인들에게 다시 심어 준 것은 일본에게 가장 치명적인 해로 나타나고 있는 듯 보인다. 최근 자국이익을 중심으로 선행한 특허기준의 변화나 애플 대 삼성의 특허논쟁에 있어서 배심원들의 공정한 판결에 약점을 보인 것도 미국의 국가 신용도에 있어서 장기적으로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힘은 그 공정성에 더 큰 힘을 얻는다. 한 국가의 시민들의 종교생활이나 사회생활도 그런 공정성과 합리성의 일면들이 잘 드러나고 있는 영역들이다.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나 예정론이나 기독론 및 구원의 방식에 있어서 그런 공정성과 합리성의 최극단을 고백하고 있다. 성도들의 삶의 질은 그런 공정성과 합리성을 표현해 주고 있는 얼굴과 같다. 교회가 국가나 그 땅에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은 거기에 한 시민의 일원으로서 사는 성도들의 삶의 질을 통해서 그런 공정성과 합리성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과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만을 남기고 국가까지 다 버리는 일만큼 그런 세상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행위는 없을 것이다.
425 no image |목회칼럼| 당신의 실력이 늘었다는 소리입니다_최광희 목사 (114)
편집부
4489 2012-08-21
당신의 실력이 늘었다는 소리입니다 < 최광희 목사, 행복한 교회 > “불평과 불만이 늘었다는 것은 구별할 수 있는 실력이 늘어난 것” 지난주에 끝난 2012 런던 올림픽, 예전과는 달리 우리나라 선수들이 전에는 명함도 못 내밀던 여러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은 너무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지난 주말에는 어린 손연재 선수가 나와서 리듬체조를 한다고 해서 바쁜 중에도 틈틈이 TV를 봤다. 옛날에는 리듬체조에 주로 러시아 선수들이 나와서 환상적인 연기를 펼쳤는데 올림픽 때마다 나는 감탄하며 보곤 했다. 그런 곳에 우리나라 선수가 도전하였고 본선진출(10위)이 목표라더니 무려 5위까지 했으니 얼마나 장한지 모른다. 리듬체조를 보면서 나는 고민 아닌 고민이 생겼다. 저렇게 하나같이 다 예쁘게 연기를 잘하는데 도대체 심사위원들은 어떻게 우열을 가려서 점수를 줄까 싶어서이다. 내가 이런 고민을 말하자 리듬체조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아내가 하는 말이 계속해서 보면 조금씩 차이가 보인다고 한다. 아하, 그러니까 보는 사람의 실력이 늘면 잘하는 선수와 못하는 선수가 가려진다는 말이다. 지난 주말에는 주일 예배에 특송을 할 자매가 찬양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노래가 너무나 아름다워 노래 끝나면 박수를 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래를 끝내자마자 박수를 칠 틈도 없이 반주자에게 박자가 잘 안 맞는다고 다시 맞춰봐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박수칠 순간을 놓쳐버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 좋은데 뭐가 안 맞는다는 거지?” 또 자매는 보컬 전용 마이크가 없어서 노래 부르기가 힘이 든다는 말도 했다. 그 전에 아들 예찬이도 보컬 전용 마이크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이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필요한 것이 확실한 모양이다. 내가 담임목사니까 보컬용 마이크를 구입할 돈을 달라고 기도해야겠다. 그런데 한편으로, 내 귀에는 노래가 잘만 들리는데 왜 노래하기가 힘들다고 하는가 싶다. 한 마디로 내 귀가 음악 듣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어떤 남자들은 부인이 해주는 음식이 다 맛있다고 한다. 개그맨 김준현은 음식의 맛은 두 가지라고 한다. 맛있다와 정말 맛있다. 그런데 내 입에는 맛있는 음식이 분명하게 구별된다. 누가 나에게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고. 체조건 노래건 음식이건 내가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구별할 수 있다면 내가 실력이 늘었다는 소리이다. 연기를 볼 수 있는 감각, 음식 맛을 구별할 미각, 노래를 평가할 청각, 예쁜 옷을 구별할 시각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하거나 불만족스러운 것을 느끼는 것은 내가 불평과 불만이 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실력이 늘었다는 소리이다. 또 설교를 들으며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설교가 형편없거나 내 영성이 떨어졌다기보다는 내가 더 좋은 설교를 사모하는 믿음이 생겼다는 뜻이다. 교회에서나 집안에서나 직장에서 불만이 느껴지면 그것은 우리 교회, 우리 집안, 우리 회사가 문제가 많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좋은 방법과 시스템을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누가 그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거나 이미 적응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실력이 생긴 당신이 그 단체를 위해 공헌하고 개선하는데 헌신해야 한다. 지적하고 불평하기보다 개선안을 내어놓고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실력 있는 당신으로 인해 당신이 속한 단체가 더욱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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