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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트모세 4세 시대, 가나안 정복 시대의 배경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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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투트모세4세의 꿈의 석비(장자인 위벤세누가 죽고 자신이 바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유일한 고고학적 유물자료)

 

아멘호텝 2세(Amenhotop Ⅱ, 1453-1413 BC)의 무덤에서 출토된 미이라 가운데에는 그의 후계자 투트모세 4세(ThutmoseⅣ, 1419-1386 BC)의 미이라까지 동시에 발견되었다.

 

투트모세 4세는 아멘호텝 2세의 장남이 아니다. 아멘호텝 2세의 장남은 위벤세누(Webenseenu)였다. 그가 어떻게 해서 장자가 이어야 할 왕위에 대신 오를 수가 있었는가에 대한 이집트 고대사는 침묵을 지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4왕조 시대의 카프레(Khafra, 2558-2532 BC) 왕의 피라밋을 굽어보고 있는 스핑크스 앞의 두발 사이에 세워진 석비가 발견되었는데 이 석비에 기록되어 있는 글씨를 해독한 결과 그가 어떻게 차남으로서 왕위에 올랐는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투트모세 4세가 어린 왕자시절 기자지방으로 사냥을 나갔다. 당시에 기자에 세워져 있던 스핑크스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체 모래더미에 묻혀있었다. 그가 정오가 되어 피곤이 엄습해와 스핑크스 옆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 이때 호레마케트(Hamachet)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투트모세 4세야 내가 모래더미에서 묻혀서 고통을 당하는데 나를 모래더미에서 벗어나게 하여 준다면 왕위에 오르게 하여 주겠다”는 꿈이었다. 이때 그는 일어나 군사들을 동원하여 모래를 치웠다. 이러한 결과로 그가 왕이 되었다는 기념 석비를 스핑크스 양 다리 사이에 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비는 그의 형이었던 위벤세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그가 장남이 아닌 차남의 위치에서 왕이 된 사실을 기록하여 놓은 역사적 증거는 이 석비 밖에 없다(Delia Pomberton, The Glories of Ancient Egypt Treasures of the PHARAOHS, 「파라오 이집트의 영광」 김희상 역, 서울:2006. 74)

 

그렇다면 호레마케트는 어떤 존재인가? Hamachet는 지평선 위의 호루스인데 그리이스 어로는 하르마키스(Harmachis)이다. 이는 스핑크스 앞에서 매년 올리는 큰 제사를 드리는데 쓰여진 이집트의 우상신화에 나오는 이름이다(Idid., 74).

 

투트모세 4세는 아버지 아멘호텝의 뒤를 이어 1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당시의 종교적 도시는 요셉이 제상으로 있을 때 통치하였던 지역인 온의 헬리오폴리스였으며 호레마케트는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의 아들이었다. 그가 출애굽당시 10대 재앙으로 인하여 그의 형이자 장자인 위벤세누가 세상을 떠난 뒤 이집트 왕조의 뒤를 이어 받은 왕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스핑크스 앞의 석비인 것이다.

 

또한 그의 통치시기에 재무장관을 역임하였던 소벡호텝(Sobekhtep)의 무덤속에 (TT 36) 그려진 벽화에는 이집트에 조공을 바쳤던 아시아계에 속한 근동에서 온 사신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왕에게 황금과 상아를 공물로 바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형적인 시리아 풍의 복장과 턱수염 등이 그려진 아시아 귀족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Ibid., 75). 이러한 묘사들은 아시아인들에 대한 피해 의식이 출애굽 역사로 인한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그가 통치하던 시대에 아나톨리아 지방의 히타이트가 동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미타니는 히타이트에 의해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미타니는 이러한 히타이트의 위협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투트모세 4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의한다. 미타니 왕은 동맹의 조건으로 그의 딸 무타무야(Mutemwiya)를 투트모세 4세와 정략으로 결혼시킨다. 이 여인을 바로의 정통왕비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당시의 관습상 파격적이었다.

 

투트모세 4세와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후일에 바로가 된 아멘호텝 3세(Amenhotep Ⅲ, 1386-1349 BC)이다(Peter A. Clayton, Chronicle of the Pharaohs, 「파라오의 역사」 정영목역 서울:까치 2009. 147. 또한 Christian Uaca, L' Egypt des Grands Pharaons, 「파라오 제국의 파노라마」 임헌역, 서울:시아출판 2001. 216-17).

 

그의 통치 10년기간 동안 아시아 원정을 떠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시기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동편(Trans Jorden) 지역을 방랑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특별히 그의 부친이었던 아멘호텝 2세가 갈릴리 지역까지 원정을 갔으며 팔레스타인에서 포로로 잡아온 아시아인들은 아피루(Apiru)라고 표현하여 그가 통치하였던 수도 멤피스(Memphis) 기념 석주(石柱)에도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이러한 아피루에 대하여 올브라이트 교수는 이러한 언급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아피루족의 역할과 성경 초기의 자료에 기록된 히브리인들의 역할 사이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유사성이 있어서 양자간의 관계를 의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W.F. Albright, ‘The Smaller Bath Shan Stele of SethosⅠ(1309-1290 BC)’,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No. 125(February 1952), 32).

 

만약 하비루와 히브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면 기원전 14세기에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였다는 것과 아마르나의 편지(Amarna Letters)나 그 당시의 다른 문헌들이 가나안 족속들에게 비친 자신들의 곤경을 묘사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자료로는 바로 앞으로 다급한 편지를 보낸 예루살렘의 왕 압두헤바(Abdukheba)와 게셀왕 말키루(Milkilu)와 그 외의 가나안 왕들의 편지들이다.

 

그 문서들에 의하면 침공하여 오는 하비루(히브리족) 족속들이 점점 강대하여 지자 그는 그와 다른 가나안 통치자들이 그들과 싸울 때마다 패배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바로에게 군사적 원조를 강조하였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내주 왕들은 이 땅을 하비루 족속의 손에서 지켜주소서. 그렇지 아니하면 내주 왕은 우리의 종들이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우리를 데려갈 병거를 보내어 주소서.”

 

압두헤바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지 못함을 이렇게 원망조로 탄원하는 글을 보낸다. “어찌하여 당신은 하루비 족을 좋아하시고 당신의(충성된) 종들을 좋아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당시 히브리인들에 의해 쫓겨난 가나안 왕 하름합(King Harmhab, 1353-1319 BC)은 이렇게 무덤의 부조에 세겨 놓았다. “외국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땅으로 쳐들어와 우리들을 멸망시키고 성읍을 황폐케 하였느니라.” 이 시기가 투트모세 4세가 통치하던 시기였다(Siegfride H. Horn, Light from the Dust Heaps, 「성서 고고학 입문」 오강남, 장수돈 공역, 서울:대한기독교 서회 1965.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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