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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 |성서시대역사탐방 <52>| 출애굽 시대의 성경적 연대기 설_장인수 박사 파일 (951)
편집부
52475 2012-01-10
출애굽 시대의 성경적 연대기 설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성경은 15세기 출애굽 사건 연대기를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어” 유대교와 전통적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출애굽기의 저자는 모세이며 시내산 언약체결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출 17:14; 24:4; 34:27). 이러한 전통적 견해를 뒤집은 사람이 벨하우젠(J. Wellhausen, 1844-1918)이다. 그에 의하면 “족장시대의 역사적 지식은 전혀 얻을 수 없는 족장들의 이야기며, 이스라엘 민족들에 의해 후대에 기록된 전승(Tradition)일 뿐이며, 족장기사는 허구일 뿐이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아브라함의 사건은 무의식 예술의 자작 창작으로 취급하여야 할 문학이다”라고 하였다(J. Wellhausen,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Israel, New York:Meridian, Library, 1957, 318-320). 소위 역사 비평(Historical Criticism) 혹은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이라고 부르는 학설의 이론을 제공한 인물이다. 문서설로 일컫는 이 학설은 모세오경이 익명의 제사장 계열의 편집자들에 의하여 다듬어진 문서들로 포로기 혹은 그 이후인 BC 600-400년경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그 권위를 증거하고 있다(딤후 3:16). 이러한 역사비평으로 일컫는 자유주의자들을 향해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학자가 있었다. 바로 존 그레샴 메첸(J.G. Machen)이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교리가 권위 있는 가르침과 도덕성을 상술함에 있어 불완전성을 막아 준다고 확신하였다(J.G.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76). 율법서인 모세오경은 정경(Canon)으로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였을 때(출 24:7),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서를 서기관 사반에 의해 요시아 왕에게 그리고 회중에게 읽어 낭독하였을 때(왕하 22:8-9; 대하 34:14), 학사 에스라가 율법서를 낭독하였을 때(느 8:9; 14-17; 10:28-39; 13:1-3)에도 언제나 모세오경이었다. 구약성경은 시대별로 영감받은 자들에 의해 오경을 언급하였다(수 7:11; 8:31; 23:6-8; 왕상 2:3; 왕하 14:6; 17:37; 대상 16:40; 대하 17:9; 23:18; 30:5,18; 31:3; 35:26 등). 오경 속에는 저자로서 모세의 활동을 언급한다(출 17:14; 24:4-7; 34:27; 민 33:2; 신 28:58-61; 29:20-27; 30:10; 31:9-13 등). 또한 역사적으로 모세오경은 기원전 3세기경 헬라어로 번역되어 70인역의 첫 부분을 정경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창세기를 비롯하여 모세오경이 모세의 기록으로 인정되었음을 볼 수 있다(Eusebius, Preparation for the Gospel, 13:12). 사마리아 오경에서도 모세오경을 보존하였다는 사실 또한 이를 증거하고 있다(Proto-Samaritan text type). 신약성경에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로 된 언급이 12회나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역사적 사실로 말씀하셨다(눅 16:16, 29-31). 사도 바울 또한 다 믿는다고 확신하였다(행 24:14; 26:22). 이와 같이 성경의 정경성을 인정한다면 출애굽 연대는 초기 연대설(Early Date)로 주장하는 15세기 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출애굽 15세기설의 근거는 열왕기상 6장 1절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땅에서 나온지 사백 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학자들에 의하면 출애굽이 솔로몬 즉위 4년보다 480년 전에 있었다는 기사를 바탕으로 산정하고, 성전 건축 연대가 기원전 966, 960, 957년경으로 추정됨에 따라 출애굽 연도는 기원전 1446/1440/1437년이 된다. 또한 사사기 11장 26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사사 시대의 300년 전을 거론하고 있는데 입다의 활동시기를 기원전 1100년 또는 1050년 시기로 볼 때 출애굽 년도는 BC 1440년-139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람세스 2세(RamsesⅡ, 1279-1212 BC)의 아들 메르넵타(Merneptah, 1212-1202 BC) 석비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13세기설을 주장하고 있는 학설은 성경의 정경성보다는 고고학적 배경을 근거로 출애굽 연대기를 설정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이란 12세대×40년에서 나온 상징적인 숫자라고 말한다(J.Maxwell Miller, J.H. Hayes,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고대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85). 또한 비돔과 람세스 성의 건축에 이스라엘 백성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비돔과 람세스는 제19왕조 시대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F. Albright, From Stone Age to christianity, 2nd ed., Garden City:Doubleday, Anchor Books, 1957, 233). 존브라이트(J.Albright)는 고대 이집트 왕조사에 이스라엘이 노예생활을 하였다는 역사적 증거가 없었다고 말한다(J. Bright, Early Israel in Recent History Writing, London, SCM, 1956, 27). 이처럼 그들이 추정하는 출애굽 연대기는 두 학설 모두 켐브리지 연대기(Cambridge Ancient History)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초자연적 재난과 이적들은 이집트의 바로가 수백만 명의 히브리인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성경기록이 성경에만 나온다고 제한한다. 단지 이 기사는 신앙적 고백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애굽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이 단순히 전설을 사실(fact)로 받아들여 수천 년 동안 거짓된 사건을 매년 지켰던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라고 하는 출애굽시 제정된 3대 절기를 어떻게 지킬 수 있었겠는가? 이스라엘의 그 어떤 지도자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출애굽 사건을 지어내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처럼 거짓말로 백성들을 설득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월절을 지키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다음 호부터는 15세기 설에 근거한 시대적 배경을 더듬어 보며 출애굽 역사를 일반 역사적 사실과 함께 입체적으로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560 |성경시대 역사탐방<51>| 일반 고대 문헌 속에 나타난 출애굽 자료와 연대기설_장인수 박사 파일 (1015)
편집부
46488 2011-11-01
일반 고대 문헌 속에 나타난 출애굽 자료와 연대기설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출애굽 이후 480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근거 출애굽 년대 산출해” 세계 지도상에 나타나는 4대 문명의 발상지를 추적하여 보면 나일강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의 사이가 비교적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인더스강과 황허강은 멀리 떨어져 있다. 비옥한 초승달지역(Fertile, Crescent)이라는 말은 나일강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일찍부터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한 지정학적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에서부터 시작한 초승달 문명권은 팔레스타인 요르단강을 거쳐 나일강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강들을 따라 비옥한 농토가 펼쳐져 있다. 도시국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원하였지만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발전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에서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이집트는 서쪽과 남쪽 지역이 불모의 사막지대이다. 북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남으로는 호수와 습지대가 있어서 천혜의 요세와 같은 지역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지중해성 바람은 남쪽으로 불기에 반대로 흐르는 나일강 상류지역으로 배를 띄우면 돛을 사용하여 쉽게 남으로 갈 수 있었고 북으로 이동할 때에는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 쉽게 여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들은 해로를 이용할 줄 알았다. 이집트가 농경문화를 이루는 국가가 된 배경에는 나일강에 의해 상부에서 흐르는 지류에 따라 우기철이 되면 천연 비료와 같은 비옥한 토양들이 하류에 가라앉아서 기름진 토양을 형성하면서 사람들에게 풍부한 식량을 공급하여 주었다. 나일강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처럼 우기철에는 심하게 범람하지는 않았다. 나일강에 의해 이집트 문명의 뿌리가 된 농경문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언급하신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그 배경이 되는 지역의 기반은 델타지역인 나일 삼각주 지역이었다(창 12:1-2: 16:13-14; 46:34). 분단된 이집트가 기원전 3100년경 즈음 바로 메네스(Menes, 3150-3050 BC)에 의해 상하이집트로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로서 본격적인 왕정국가의 틀과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고대 이집트의 3000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와 깊은 관계를 언급하려면 출애굽 역사를 빼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출애굽 역사를 어느 시대로 보는가는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가 많이 있다. 진보적 13세기 설을 주장하는 견해로는 람세스 2세(RamsesⅡ, 1279-1212 BC) 통치시기로 본다. 반면 15세기 설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적 견해에 의해 추정하기로는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53-1419 BC) 통치시기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200년이나 차이가 나는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가? 13세기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세토스 1세(Sethos Ⅰ, 일명 SetiⅠ, 1291-1278 BC)와 그의 아들 람세스 2세(Ramses Ⅱ, 1279-1212 BC) 시기로 본다. 람세스 2세가 동쪽 라암셋에서 시작한 왕실 거주지 공사를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로 부역한 출애굽기 1장 8-11을 근거로 하여 출애굽 당시의 바로로 해석하는 학설이다. 또한 람세스 2세의 13번째 아들인 메르넵타(Merneptah, 1212-1202 BC)가 그의 전통기념비에서 이스라엘을 거론하므로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확고하게 정착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경 기록의 연대기 해석보다(왕상 6:1) 고고학적 견해를 우선으로 두고 있다. 이러한 13세기 설을 주장하는 학자로는 부르스(F.F. Bruce), 헨리 프랭크(H.T. Frank), 헤리슨(R.K. Harrison), 야딘(Yadin), 멘덴홀(G.E. Mendenhall), 고든(C. Gordon), 엔더슨(B.W. Anderson), 알트(A. Alt), 피트리(E. Petrie), 라솔(Lasor), 존 브라이트(J. Bright), 글루엑(N. Glueck) 등이다. 그러나 비교적 15세기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을 기본 텍스트로(Text)로 그 기원 연대를 설정한다. 열왕기상 6장 1절은 출애굽 역사를 솔로몬 즉위에 대한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는 기록에 의존한다. 솔로몬이 즉위한 지 4년 후에 성전이 건축되었고, 이것은 출애굽한지 480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출애굽 년대를 산출하는 것이다. 솔로몬 즉위 연대는 기원전 966/960/957년 경으로 대부분 동의한다. 이를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출애굽 사건은 기원전 1446/1440/1437년이 된다. 또한 사사기 11장 26절은 이스라엘 민족에 의한 가나안 정복 전쟁이 사사 입다보다 300년 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기원전 1100-1050년 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므로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전쟁은 기원전 1400-1350년 경으로 년대를 산출할 수 있다. 이렇게 연대를 계산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출애굽 당시의 바로는 아멘호텝 2세(Amenbotep Ⅱ)가 된다. 모세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았을 당시의 바로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후대사가들에 의해 평가받은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1504-1450 BC) 시대가 된다. 이들이 통치하던 시대는 많은 성경기록이 언급하고 있는 출애굽 배경 시대를 조명하는 입체적 재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이러한 15세기 설을 지지하는 학자로는 메릴(E.H. Merrill), 촬스 알렝(C.F. Aling), 시크프리드 H. 혼(S.H. Horn), 레온 우드(Leon Wood), 존 빔슨(J.J. Bimson), 에드워드 J. 영(E. D Young), 라이트(A. Right), 월터 카이져(W.C. Kaiser.Jr), 알프레드 J. 허트(A.J. Hoerth), 괴딕(Goedicke) 등이다. 그 무엇보다도 고대 역사가들의 자료속에 15세기 설을 주장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는 점인데 신관 마네토(Menetho)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힉소족처럼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James Orr de.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olopaedia<Grand Rapides : Wm B.Eerdmans Publishing Co. 1955. 1053>). 그의 기록에 의하면 년대가 기원전 1550년경이다. 또한 마네토의 잃어버린 기록을 재인용한 인물로는 요세푸스가 있으며 그 또한 15세기 설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Contra Apionen. J.ⅩⅣ 75-82). 그밖에도 헤로도투스(Herodotus, Polymnia, trans C. 89), 그리이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 Geofraphy, trans xvi:c2), 디오돌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 Library of History. trans, lib. l. 2p. phot) 등이 출애굽 기록을 객관적으로 남겼다.
559 |성경시대 역사탐방<50>| 힉소스 왕조(Hyksos Dynasty)의 이집트 지배 시대 파일 (1707)
편집부
56281 2011-10-04
힉소스 왕조(Hyksos Dynasty)의 이집트 지배 시대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전차(戰車)와 강궁(强弓) 기술 개발해 군사 강국으로 등장해” 사관 마네토(Manetho)에 의하면 셈족 계열의 유목민족인 힉소스(Hyksos) 족의 이집트 지배시대의 왕조를 제15, 16왕조 시대로 구분하였다. 힉소스라는 말의 뜻은 히카우 코스웨트(hikaukhoswet), 즉 ‘사막의 왕자’라는 말인데 마네토가 인용한 그의 이집트의 역사(History of Egypt)에서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 대한 마네토의 전승(tradition)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아피온에 대한 반론(Against Apion)에 길게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대 이집트에 닥쳐온 위기의 시대였던 힉소스의 식민통치시기를 그리이스계 이집트인이었던 사고의 한계를 참고하여 기록하였을 것이다. 특별히 12왕조 시대의 귀족이었던 크놈호테프 2세(Khnumhotep Ⅱ)의 무덤에 그려진 아시아의 셈족계열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힉소스인들은 기원전 18세기말에 이르러 그들의 수도였던 아바리스(Abaris)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나간다. 이 시기에는 창세기의 요셉 시대 이후부터 모세 출생까지의 약 430년의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계시는 침묵을 지켰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마네토가 열거하는 힉소스의 다섯 왕(셰시:Sheshi, 야쿠브헤르:Yakubher, 키안:Khyan, 아페피 1세:ApepiⅠ, 아페피 2세:ApepiⅡ)이 통치하던 시기(1663-1555 BC)였다. 이들은 108년을 통치하였는데 개별 통치자들의 재위기간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동쪽 스텝지역에서 이주하여 온 힉소스인들은 당시 이집트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던 ‘말을 사용한 전차’ 등의 월등한 신무기들로 무장한 체 델타지역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도시들을 불태우고 신전들을 파괴하였으며 이집트인들을 잔인하게 살육하였으며 또한 그들을 노예로 혹사시켰다.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힉소스인들은 곳곳에 지역 관리들을 임명하고 조공을 받음으로써 하이집트는 힉소스인들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인, 아시아인 등 셈족계열의 이주가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마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해가 더하여 갈수록 번성하였을 것이다. 세소스트리스 왕조(혹은 세누스레트:Senusret) 시대에 이집트로 이주하여 왔던 야곱의 후손들은 힉소스 통치시기에 더욱 많은 정착 농경민들로 번성하였다. 세소스레트 3세(SesostrisⅢ, 1878-1841 BC)는 문민정책으로 백성들의 복리정책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왕권중심의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동기가 되었고 이틈을 틈탄 유목민족인 힉소스 족이 이집트를 점령한 것이다. 같은 샘족계열인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힉소스 지도층의 반발을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을 예상할 수 있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기원전 18세기는 특별히 팔레스타인 지역을 비롯한 스텝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는 시기였기에 이들의 델타지역 이주는 어쩔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선택의 한계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이스라엘인들을 비롯한 셈족인들은 상이집트까지 진출하였는데 이곳에 정착한 그들은 요리사, 양조업, 포도원지기 등 각종 직업에 종사하였다. 셈족의 족장들 중에는 뛰어난 장인들이 많았으며 수많은 용병들에 의해 각종 신무기들을 개발하는 기술자들을 배출하였다. 이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상상도 못할 말(馬)을 다루는 기술과 전차(戰車)들을 힉소스인들이 개발하였으며 정밀한 강궁(强弓) 기술 등을 개발하여 군사력을 확장하는 정보들을 이집트에 유입시키는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 델타(Delta)지역의 아바리스(Abaris)에 정착하였던 힉소스 족들은 데베 남쪽 게벨렌(Gebelen)에 신전을 두고 있는 세벡(Sebek:악어)을 숭배하였다. 통상적으로 제15왕조를 위대한 힉소스 시대(Great Hyksos)로 16왕조는 작은 힉소스 시대(Small Hyksos)로 불린다. 현재 델타지역의 아바리스(Abaris)에는 힉소스시대의 고고학적 유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렇게 힉소스의 유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힉소스 족들을 몰아내 낸 후 이들 유목민들에 의해 지배를 받은 시기를 치욕의 시기로 평가하였던 이집트 지도층 계급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힉소스 왕들이 하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을 때 상이집트에서는 제17왕조의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난다. 이들은 힉소스의 지배를 도전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힘을 기르면서 언젠가는 이들을 이집트에서 추방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힉소스의 아페피 1세(ApepiⅠ)와 데베의 바로였던 세케넨레타오(Seqenenre Tao Ⅱ, 1574 BC)에게 보낸 편지 일부가 발굴되어 해독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곳 데베에는 하마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인하여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시오.” 이러한 편지의 내용을 보더라도 당시 하이집트를 지배하였던 아페피 1세가 북 이집트를 다스리던 세케넨레타오를 향하여 협조를 요구한 것만 보아도 그 시대의 정황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세케넨레타오 2세는 후일 힉소스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참혹하게 치명상을 입고 전사하였다는 전황을 그의 미이라를 통하여 알 수 있다. 1881년 다이르 알 바하리의 왕실 보관소에서 발견된 그의 미이라에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흔적을 볼 수 있다. 마침내 그의 아들 아흐모세(Ahmose Ⅰ, 1570-1546 BC)가 힉소스를 몰아내고 제18왕조를 탄생시켰다. 상이집트는 힉소스 족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도 힉소스 족이 소유하고 있던 말이 이끄는 전차와 강궁 기술 등을 비롯한 유목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첨단 무기의 신기술을 배우면서 서서히 이들을 물리칠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바로 아흐모세 1세였다. 이런 격동기를 지내면서 출애굽의 아침은 멤피스 온 등에 위치한 고센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에 의해 서서히 밝아져 가고 있었다.
558 |성경시대역사탐방<49>| 요셉 이주 430년 간의 침묵 시대_장인수 박사 파일 (273)
편집부
20024 2011-09-20
요셉 이주 430년 간의 침묵 시대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사진설명 / 온 지방(현재의 헬리오폴리스) 전경 “야곱의 이집트 이주는 힉소스 족의 이집트 침입 이전에 이뤄져” 출애굽기 12장 40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 년이라 사백 삼십 년이 끝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에서 나왔은즉” 이라는 기록이다. 즉 창세기 50장에서 출애굽기로 넘어가는 시간의 세월이 430년이 흘렀다는 언급이다. 정통 성경 연대기로 계산하면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한 때인 주전 1876년경으로부터 출애굽한 시기의 때인 주전 1446년의 기간을 계산한 연대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고 그의 아버지 야곱, 즉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때의 바로는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Ⅲ, 1878-1843 BC)가 통치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요셉이 감옥에서 오랜 기간 투옥되어 있었을 때의 이집트를 통치하였던 바로는 (1889 BC) 세누스레트 2세(1897-1878 BC) 통치시기로 본다(G. Posenor, ‘The Middle Kingdom in Egypt’ in CAH 1. 2. p. 502-04). Eugene H. Merrill에 의한 연대기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활동하였던 시기의 바로가 이집트 중 왕국(Middle Kingdom) 시대의 위대한 바로였던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Ⅲ or Senusret Ⅲ, 1878-1843 BC)로 보며 이 시기를 이집트의 중왕국 제12왕조 시대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세누스레트 3세는 37년 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의 화강암으로 조각된 좌상은 수심에 가득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선 왕조시대의 바로의 신격화된 조각상보다는 매우 사실적으로 제작되었는데 7년 흉년의 시기(창 41:53-57)를 극복한 이후 당시의 바로들이 백성들의 복지에 많은 정책을 세웠다는 간접적인 표현이 아닌가 해석할 수 있다. 세소스트리스라는 이름은 그리이스식 이름이며 세누스레트는 이집트 이름의 명칭인데 그 뜻은 여신의 남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왕을 위한 큰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으며 왕을 신격화하는 건축물이나 정책에 자원을 집중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농업정책이나 관계수로를 정비하는 일에 많은 투자를 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바로 제상 요셉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세소스트리스 왕가는 이집트 국경을 뛰어넘어 리비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9년 동안 아시아 지역까지 정복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가 이집트로 귀환하였을 때 친동생의 음모로 암살위기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많은 전쟁 포로들과 채무자 들을 해방시켰으며 많은 신전을 세우고 특별히 그의 재임시절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거대한 운하도 건설하였다. 당시 제상 요셉은 온(혹은 헬리오 폴리스:Heliopolis)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Asenath)과 결혼한다. 요셉은 출옥 후 당시의 바로 세누스레트 2세 앞에 알현하였을 때 그는 왕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면도를 하였다. 이 사실 자체가 당시의 힉소스 족의 이집트 침입이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Prit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p 18-22, Alan Gardiner, Egypt of the Pharaoh, London:Oxford Univ Press,1961, p. 130). 그의 통치 16년이 되는 해 국경을 표시하는 지역에 비석을 세우고 “나는 국경을 정하였다. 나는 선조들이 도달하였던 국경을 넘어섰다. 나는 물려받은 것을 더 늘렸다. 나는 말씀을 전하는 바로이며 나는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행동을 보인다”라고 새겨 놓았다. 그는 제2폭포 남방, 엘레판틴과 셈나 사이에 13개의 요세를 세우며 영토를 굳건히 하였다. 고지대와 섬 위에 세운 요세들은 누비아 지역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문화의 시대였다. 특별히 보석 세공술은 과히 황금시대라 할 만큼 장인들에 의해서 발달하였다. 더구나 이 시기의 문학작품인 시누헤의 이야기(Story of Sinuhe)는 단편적인 파피루스 자료들과 굴껍질에 새겨진 문서들을 종합하여 완벽하게 재구성되어 학계에 발표되었다. 프리챠드(Pritchard)에 의해 정리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구성하여 보았다. 시누헤의 이야기가 쓰여진 시기를 메릴은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있던 때였다고 하였다(Eugene H. Merrill, Kingdom of Priests, Grand Rapids, Michigan, 1997, p. 65). 평범한 환경에서 태어난 관리 시누헤는 라쉬트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다. 시누헤는 세누스레트 1세의 아내인 스네프루(Snefru) 왕비의 하렘의 시종이었다. 세누스레트 1세는 그의 아버지 아메넴하트 1세(Amenemhet Ⅰ, 1991-1962 BC)와 함께 권력을 공유하면서 리비아 지방으로 군사 원정을 떠난다. 그 원정에 참가한 시누헤(Sinuhe)는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복잡한 상황에 휘말리고 말았다. 아메넴하트 1세는 기원전 1962년 세상을 떠난다. 원정을 떠났던 세누스레트 1세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즉시 이집트로 귀국한다. 시누헤는 궁전에서 왕을 축출하려는 일단의 음모를 엿듣고 이집트를 몰래 탈출한다. 남동쪽으로 떠난 시누헤는 델타의 남쪽 끝을 지나 국경을 넘었다. 네겝 광야를 지날 때 갈증 속에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고 도움을 청하려고 주위를 살펴보니 일단의 가축 때를 거느린 베두인들을 보고 도움을 청한다. 그들은 물과 우유를 주며 자기 집으로 데려가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통과하여 멀리 바블로스까지 갔다. 이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 팔레스타인 군주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그는 상세하게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죄가 없다고 변명을 하였다. 결국 팔레스타인의 레테누 왕은 시누헤를 그의 맏딸과 결혼시켜 고위직에 임명하고 좋은 땅을 하사하였다. 후일 장군이 된 시누헤는 그의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그의 명성을 질투한 장군이 결투를 청한 후 치열한 싸움 끝에 그의 정적을 쓰러뜨렸고 마침내 그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그는 이집트로 다시 돌아왔을 때 세누스레트는 시누헤를 기쁨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세누스레트 3세는 이렇게 선언한다. “보시오 시누헤는 유명한 아시아인이 되었고 베두인 같지 않소?” 그는 팔레스틴에서 돌아와 25년을 이집트에서 행복한 말년을 보내었다(Pritchard. Ibid).
557 |성경시대 역사탐방<48>| 요셉의 이집트 이주가 주는 의미_장인수 박사 파일 (569)
편집부
31847 2011-09-07
요셉의 이집트 이주가 주는 의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70여 명 야곱의 자손들 이집트에서 큰 민족으로 번성해” 성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무리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며 구속 완성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시기 위한 언약서이다. 창세기의 마지막 네러티브(narrative)는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에 의해 이스라엘국가 공동체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이루어져 가는 거대한 서사적 드라마이다. 유목민들로 족장시대가 계속 이어져 온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 12:2)고 말씀하신 계획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유목사회는 흩어지는 사회이지 큰 민족을 형성하는 정착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여 보았다. 이제는 요셉을 이집트로 인도하시는 뜻을 사회학적 개념에서 성서의 사실(a historical fact)을 기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가나안 생활은 양들을 기르는 목자로 살았다(창 46:31-34; 47:3). 유목민들은 천막생활을 하며 계절을 따라 목초지를 따라 유랑하였다. 이들은 믿을만한 길을 따라 새로운 목초지나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한다. 유목민들은 무엇보다도 정착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정한 거주지역에 묶여 있지 않는다. 이처럼 유목사회는 지역적으로 연관성이 없다. 그리고 행정이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다. 그리고 부족과 씨족 단위로 혈연과 인척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창세기 12장 1절에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father's house)이란 가정보다는 큰 집단, 즉 가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유목사회는 자손들이 각각 독립하여 독립된 가정과 가문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는 문화이다(한동구, 고대 이스라엘 사회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1, p.16-17).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단 공동체인 12지파에 의해 결성되는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농경문화의 삶인 정착문화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삶의 전환을 위해서는 바로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이다. 당시 이집트는 목축업을 천하게 여기고 있엇겼다. 이들이 이집트로 내려온 후 43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70여명의 야곱의 자손들(창 46:26-27)은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된다.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이집트로 내려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된 것이다(신 10:22). 이 과정에서 요셉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할 정도로 애매히 고난받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창 37:18-24; 39:19-20).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섭리 아래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게, 되고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사브낫바네아(Zaphnath panneah)라는 이집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창 41:45). 그리고 고센에 정착한다. 고센은 70인역(LXX)에서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고 불렀다. 즉 태양의 도시라는 뜻이다. 고센의 수도 온(On)을 가리키기도 하고 요즈음 지명으로는 알마타리아(Armatailia)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마타리아는 카이로(Cairo) 북쪽 자이툰 지역에서 동북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요셉이 꿈을 해몽하여준 당시의 바로는 누구였을까? 마네토의 연대기를 기준으로 볼 때 당시 바로는 다름아닌 세누스트리스 2세(Senusret Ⅱ, 1895-1878 BC) 통치시기로 보고 있다. 기원전 1895년 그가 사망하자 세소스트리스 2세(혹은 세소스레트 2세)가 왕위에 오른다. 기록에 의하면 세소스트리스는 아버지와 적어도 3년 간 공동통치를 하면서 지도자 수업을 쌓았다. 요셉은 이집트로 끌려온 지 약 10년 후 세소스트리스 2세의 꿈을 해몽하였을 것이다. 고고학자 피트리(Petrie)에 의해 이 시대에 해당하는 라훈(Lohoun)에 있는 그의 피라미드 근처에서 1913년 대대적인 발굴을 시작하여 네 개의 수갱묘를 발굴하였고, 피라미드 공사에 동원된 노종자들의 거주지도 발굴하였다. 당시에 이 지역명을 헤테프세누스레트, 즉 ‘세누스트레스가 만족했다’는 이름을 붙인 마을이었다. 이처럼 세소스트리스 2세 통치시기에는 대규모 치수사업과 토지개발을 하였다. 파윰 분지(Fayyum basin)와 나일강을 연결하기 위한 수로공사를 그가 완성하였는데 고대에는 이 운하의 유적을 요셉의 강(Bahr Yusef)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에도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Pasener, ‘Middle Kingdom’ in Cambridge Ancient History 1, 2. p. 505-511). 그의 아들 세누스트레스 3세(Senusret Ⅲ, 1878-1841 BC)는 선대의 7년 흉년이라는 엄청난 국가적 재난을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위한 피라미드 건설 등의 정책을 포기하고 백성의 복지에 모든 정책을 입안하였고 농업과 관련된 개혁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북부와 남부 그리고 최남부 지역으로 분할하고 각 행정구역에 총리 직속 셈족의 고급관리를 이용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세누스트레스 3세의 선대 대부분 바로들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피라미드를 비롯한 자신의 사후를 위한 준비를 하는데 비하여 그가 백성들의 복지와 농업개량 치수사업(flood Control)에 치중하였던 것은 선대 바로 시절의 요셉 정책을 참고하였을 것이다(Pater A Clayton, Chronide of the Pharaohs, London and New York, 1990, p. 108). 오셉의 이집트 이주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요셉의 발언 속에 나타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이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6:13-14).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정착 농경민으로 430년을 보내게 됨으로 비로소 흩어지지 않는 큰 민족으로 형성되기 때문이었다.
556 |성경시대 역사탐방<47>| 아브라함의 이집트 이주로 본 시대적 배경_장인수 박사 파일 (580)
편집부
30853 2011-08-24
아브라함의 이집트 이주로 본 시대적 배경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모세의 양모 하셉수트 장제전 (이집트 룩소) “이스라엘 민족사는 하나님의 능력 체험하는 역사”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위대한 정치인을 남긴 민족도 아니며 과학적 발명품을 남긴 인물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한 세계 정신사에 미친 영향은 유대교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육필로는 그 막대한 영향을 표현하기 힘들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3대 종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이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의 인지도는 무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생존의 물음(Siz im Leben) 앞에 해답을 주는 유일한 대안인 성경을 통한 구원의 서정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하나의 개인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그의 삶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의 인생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정착 농경문화인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갈데아 우르를 떠나 스뎁(steppe) 지역인 하란으로 이주하게 된 경위를 조명함으로써 얻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우르 제3왕조 시대였으나 엘람의 침공으로 우르 왕조가 멸망의 길을 가던 시기였다. 우르남무(Urnammu)와 그의 아들 슐기(Shulgi)가 통치하던 농경문화의 대표적 도시국가였던 갈데아 우르가 엘람에 의해 멸망 직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가족을 하란으로 이주시키셨다. 한편 그의 아내 사라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당시에는 자녀를 낳지 못할 경우 이것은 이혼의 조건이었다. 함무라비 법전 제138조에 의하면 자녀가 없을 때에는 이혼의 조건으로 법제화되어 있었다(Herbert Bristho C., Prelude to Emprie;Babylonian Society and Politics 745-626BC. Philadelpia: Univ. Museum, 1984, p.128). 아마 하나님께서 사라를 성태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들이 살고 있던 우상의 도시 갈데아 우르(Chaldeea Ur)를 떠나 하란(Haran)으로 이주케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농경 정착 문화의 꽃을 피웠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목 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하란으로 이주시킨 정황적 배경에는 나그네적 삶을 발견하게 하신 언약적 섭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창 11:31; 12:1-4). 이러한 유목민적인 삶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으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나그네의 개념으로 보게 되었다(시 39:12; 창 46:32-34, 47:9). 그를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세속적 부를 조건으로 하는 언약을 체결하신다. 이러한 언약의 이면에는 환경을 의지하는 연약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려하신 측면이 담겨 있었다(창 12:1-3). 그러나 그가 가나안에 도착하자마자 기근이 그 땅에 찾아 왔고 이 기근을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착각한 아브라함은 유목인의 삶을 버리고 이집트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아내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말이다(창 12:13). 이집트인들은 유목민들을 천하게 여겼다(창 36:43). 유목 생활만이 생존 가치의 수단이었던 유목문화 속에서 혈연관계야말로 그들의 삶의 목적이요 신앙으로 여겼던 아브라함은 극심한 기근 앞에서 그 가치관을 포기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제11왕조 시기였다(2134-1991 BC).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하였던 때로 추정되는 인테프 3세(Intef Ⅲ, 2069-2060 BC) 통치시기에는 이집트가 남북왕조로 갈라져 있었으며 아브라함이 일시 이주하였던 지역은 북왕국 수도인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였을 것이다. 당시의 남왕국 수도는 테베(Thebes)였다. 중왕국 11왕조 멘투호테프 2세(Mentugotep Ⅱ, 2060-2010 BC)는 남북왕조를 일시적으로 통일하였던 바로였다. 아브라함 당시 유목사회의 특징은 가부장적 사회였다. 때문에 용기를 내어 모험을 감래하고 가족을 위하여 희생해야 하는 혈연공동체의 가치관을 아브라함은 생존을 위하여 버린 것이다. 아내를 빼앗긴 이집트에서의 하룻밤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매우 고통스러웠으며 자신의 연약한 실존(實存)을 발견하는 밤이었을 것이다. 사라 또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아내를 버리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식을 낳지 못한 슬픈 비애를 가슴에 품고 바로의 궁으로 들어갔을 것이다(창 12:14-17). 그러나 이러한 위기에서 아브라함의 가계를 지켜주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약속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나야만 한다. 바로는 사라와 아브라함이 부부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다시 돌려보내며 그의 소유와 함께 가나안으로 돌려보내며 가축과 은, 금이 풍부한 선물을 주어 보낸다(창 12:2). 이후 아브라함은 네게브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재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3:4). 인간은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철저하게 깨닫게 될 때 회개하며 신앙을 회복한다(눅 15:11-32). 하나님의 섭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인도하실 때 그가 철저한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때 나일강 유역의 관개농업은 정착된 시기였다.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으로 둘러 쌓여 있지만 백성들은 나일강변 주위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였다. 95%가 사막이라는 어려운 지형여건에도 불구하고 5%의 나일강변을 중심하여 이어지는 농토에서 그들은 식량을 추수하였다. 나일강의 길이는 6,690km나 되며 상류에서 하류까지 위도의 격차가 30도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나일강은 6월 중순의 가장 무더운 여름철부터 수량(水量)이 증가하였고 이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강의 범람이 시작되는 6월 11일을 ‘눈물의 밤’이라고 불렀다. 창세기에는 나일 삼각주의 델타지역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비유하였다(창 13:10). 이집트인들은 이처럼 천혜의 땅을 다스리는 태양신 라(La)의 은총을 입은 신의 아들 바로를 전능한 이집트의 왕권을 행사하는 지배자로 생각하였다. 바로는 신전제사를 드리는 공식 석상에 나타날 때는 갈고리와 채찍의 형상으로 된 홀을 들고 의식을 집례하였다. 상 이집트의 아부심벨(Abu Simbel), 오시리스신을 섬겼던 아비도스(Abydos), 태양신의 도시 아마르나, 데베의 데이르 엘-바하리(Deir el-Bahri), 하토르 사원의 덴데라 등은 이집트의 신성한 신전이 있는 중요한 도시였다. 이러한 신의 아들 바로를 속인자가 아브라함이었다. 그리고 유목민의 족장으로 가솔을 생명처럼 사랑하고 지켜야 할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를 버리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러한 아브라함은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바로의 손에서 지켜 주셨다. 오히려 큰 재물을 바로로부터 하사 받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재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던 것이다(창 13:4).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555 |성경시대 역사탐방<46>| 기자의 피라미드와 꿈의 석비_장인수 박사 파일 (457)
편집부
18543 2011-08-02
기자의 피라미드와 꿈의 석비 <사진 / 스핑크스와 꿈의 석비>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스핑크스(Sphinx)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인 동물” 창세기는 인류 역사의 시작과 창조 후의 타락 과정을 그리며 바벨탑 사건 이후(창 11:1-9) 갈데아 우르 사람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 형성사를 그의 부족과 가계의 형성과 진행 과정(fact)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당대 시대적 배경이 되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Sumer), 도시국가 아카드(Akkad), 아모리족과 마리(Mari) 왕국으로 이어지는 초생달 문명과 더불어 이집트 지역의 중간 지대인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아브라함이 살았던 삶의 현장을 기술하고 있다. 이 무렵 전후로는 고(Old) 바벨론이 가장 강성하였던 시기로서 앗수르(Assur), 우르(Ur), 키쉬(Kish) 등의 도시국가가 성장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셈계의 힉소스족이 이집트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게해에서는 중기 미케네 문명이 진행 중이었고(2200-1600 B.C) 크노소스(Knossos) 섬의 왕조(王朝)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의 성경에 기록된 창세기의 중심사는 12장부터 아브라함 계보의 족장사로 기술하고 있다. 고대 근동지역(Near East) 전체의 지역적 정황에서 볼 때 이는 한 부족의 부족사에 불과하였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이집트 이주를 단행하였던 아브라함의 행로는 이집트를 구속사의 흐름에 있어서 한 변방 국가로 소개하고 있다. 이때는 이집트 제4왕조 때 건축한 바로의 피라미드가 세워진 지 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그후 이집트와 히브리인과의 관계는 창세기 후반부터 두드러진다(창 39장-50장).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때 이미 위용을 자랑하고 있던 피라미드는 기자(Giza)에 위치하고 있다.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앞선 제3왕조 시대 조세르(Djoser, 2668-2649 BC)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제상 임호테프(Imhotep)에 의해 설계되어 건축된 세계 최초의 건축물로 그 위용을 자랑하며 사카라(Saqqara)에 서 있었다. 그후 제4왕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피라미드 건축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할만한 천문학, 건축학, 수학, 기하학 등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 정확도는 현재의 건축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피라미드가 나타내는 각종 수치와 데이터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또한 이렇게 견고한 바윗돌을 어떻게 정확한 각도로 잘랐으며 2.5톤 이상의 거대한 바위들을 어떻게 146m의 높이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는지는 5000여 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리이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Herodotos)는 기원전 5세기경 이집트를 방문한 후 나무로 만든 기중기로 이 돌들을 들어올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는 철기나 청동기 시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제2왕조시대(2890-2686 BC)부터 이미 석재를 다루는 건축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돌로 만든 망치와 돌보다 부드러운 구리로 만든 정과 톱을 사용하였다. 노동은 고되었지만 바로(Pharaoh)를 위한 노동을 오히려 즐거움으로 여기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기자에서 발견된 당시의 이집트 파피루스 가운데는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신을 향해 드리는 제사 때처럼 빵을 배부르게 먹고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피라미드(Pyramid)의 건설은 이집트의 바로가 전력을 기울인 대 역사(役事)였다. 특별히 3대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는 카이로 중심가에서 남서쪽으로 13km 떨어진 서안 사막지대의 석회암 언덕 평원지대에 나란히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서 있다. 제4왕조의 2대 바로인 쿠푸(Khufu, 2579-2556 BC) 그리고 4대 바로인 카프라(Khafra, 2547-2521 BC)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주변에는 6개의 작은 왕비들의 위성 피라미드가 폐허가 된 체 남아 있고 그 곁에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를 지키고 있다. 스핑크스(Sphinx)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인 동물로 종종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던 바로를 상징하는데 사용되었다. 스핑크스가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머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조각된 것은 인간의 지혜를 상징하고 있다. 수천 개의 스핑크스가 세워졌지만 기자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이 스핑크스는 넓이가 약 70m, 높이가 약 20m가 되는 거상으로 기자에서 두 번째로 큰 카프라의 피라미드와 연결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바로의 살아있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스핑크스를 쉐세프앙크(Shesepankh)라고 불렀다. 이 대 스핑크스(Great Sphinx)는 정확하게 동서로 향하고 있으며 그 눈은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땅에 묻힌 스핑크스는 1816년 칼비올리아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완전하게 끝냈을 때는 1886년이었다. 이곳에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유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출애굽 사건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석비의 발견이다. 이 석비는 투트모세 4세(Tuthmose Ⅳ, 1419-1386 BC)의 화강암 돌비석이다. 그는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53-1419 BC)의 아들로 그가 왕자 시절에 사막에 사냥을 갔다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꿈에 스핑크스가 나타나 모래에 막혀 죽을 지경에 있으니 다시 세상에 나를 나타나게 하여 준다면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냥과 무술을 좋아하였고 바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자가 아니었다. 그는 즉시 모래를 파헤치고 스핑크스를 꺼내 주었다. 당시의 장자는 웨벤세누(Webenseenu)였다. 그러나 장자 웨벤세누가 죽고 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내용의 기념 석비가 이것이다. 출애굽 연대기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가 이집트의 10대 제앙이 임하였던 시기였고 마지막 장자 재앙 때에 바로는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53-1419 BC)였으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Moses)와 대결하였던 바로였다. 그의 재위 2년에 육로를 이용하여 시리아의 오론테스강까지 진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34년을 치리하였으며 가나안의 갈릴리까지 정벌하러 갔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 도강 이후 38년을 광야생활로 유랑할 때 그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진군하지 않았나 추론할 수 있다. 그의 장자였던 웨벤세누가 사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장자를 치신 시기였다(출 12:29-30). 아멘호텝 2세는 왕들의 골짜기에 안장되었다(무덤 KV 35호). 그의 무덤에는 그의 장자 웨벤세누의 미이라와 함께 안장되어 있었는데 그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이다(Charles F. Aling, Egypt and Bible History From Earliest Time to 1000 BC,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1984, p.105). 장자 재앙 이후 왕의 차자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가 바로 출애굽 이후의 바로였던 투트모세 4세(Thutmose Ⅳ, 1419-1386 BC)이다.
554 |성경시대 역사탐방<45>| 함족의 후예인 이집트 문명_장인수 박사 파일 (306)
편집부
14572 2011-06-08
함족의 후예인 이집트 문명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나일강의 교통수단으로 이집트 문명 꽃피워”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427-347 BC)이 전해주는 철학자 솔론(Solon)과 이집트의 신관과의 대화의 내용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덴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당신네 그리스인들은 언제나 아이들이요. 그리스(헬라)에는 노인들이 없소.” “그 말이 무슨 말이요?” 그들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영혼이 젊은 철없는 사람들이요.” 이집트 신관이 말하였다. “왜냐하면 당신들에게는 정말로 오래된 전통, 시간에 대한 정확한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요 … 당신네 나라는 그 무엇이건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 탁월한 것을 이루어 내지 못하였고 우리 이집트에서처럼 오래 전 문자로 기록되어 신전에 보존된 것이 없단 말이오.” 이 말은 솔론이 이집트에 체류할 당시의 일화이다. 이 내용 속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의 문명에 대하여 지녔던 존경심이 드러나 있다. 그리스의 현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지식은 이집트의 현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Herodotos, 484-425 BC)가 ‘나일강은 이집트의 선물’이라고 하였듯이 그리스인들의 숭상을 받았던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이 없었다면 발전할 수 없었다. 이집트는 전국토의 97%가 사막지대이다. 나일강을 낀 서편에는 광대한 리비아 사막이 있다. 동편에는 좁은 아라비아 사막이 있으며, 홍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시나이 반도에는 전 지역에 걸쳐 시나이 사막이 펼쳐져 있다. 이 사막의 강우량은 세계에서 가장 적은 지역이다. 남쪽으로는 빅토리아만이 가로막고 있다. 이처럼 이집트는 천혜의 요세와 같은 지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고대 이집트 문명은 외부와의 전쟁과 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집트 문명의 태동은 먹을 것이 풍부한 나일강으로부터 시작한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새나 물고기 혹은 파충류들을 잡아먹었으며 사자와 표범을 비롯해 초원에 사는 짐승들을 사냥하기도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인종의 분포를 살펴보면 이들은 바벨탑 사건이후 흩어진 함의 후손들로 북부 아프리카 지역으로 이동해 온 종족들이었다(창 11:1-9; 시 78:51-52). 나일강을 중심으로 정착한 함의 후손들은 정착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형성된 습지를 이용하여 곡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알아내어 점차 정착 농경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나일강의 홍수는 시리우스(Sirius) 별이 솟아오르는 7-8월의 새벽녘에 시작되었으며 9월이 되면 어김없이 물이 빠져 지중해로 흘러내려 갔다. 이때 물 속에 잠겼던 나일 강변에는 개천의 비옥한 침전물이 쌓이게 되었다. 거기에 겨울과 봄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일강의 범람이 정기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이집트인들은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타지역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중 16시간 이상 중노동을 하여도 수확할 수 없었던 곡물 생산을 이집트인들은 비교적 쉽게 심고 수확하였으므로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외부의 적으로부터 거주지를 보호받을 수 있었던 지형 구조와 나일강이라는 풍부한 수량,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농경 생활로 말미암은 안정적 식량 확보는 찬란한 왕조 문명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정기적인 나일강의 범람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치수 사업의 발달로 인하여 천문학, 기하학, 역법(曆法) 등과 같은 과학적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잉여 생산물까지 양산할 수 있는 문명권도 형성시켜 나갔다. 이렇게 여유 있는 생활 패턴은 생필품 외에도 삶의 여유를 갖고 장식품도 만들었으며 신비로운 자연 현상과 우주의 신비를 향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비로운 우주 질서를 신격화시키며 국가적 종교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죽음과 질병, 사후의 세계, 희노애락에 대한 사고를 함으로써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를 의식하고 서로가 협력하는 조직 사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 별들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여 1년 동안 태양이 움직이는 자리를 따라 그 남쪽에 있는 별들을 36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1년을 대략 360일로 계산하였고 10일마다 모습이 달라지는 별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는데 이를 데칸(Decan)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인류 최초로 태음력을 사용하는 지혜도 있었다. 한 달을 30일, 하루는 24시간이라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이집트의 국토는 동서로는 1,200km이며 남북으로는 1,300km이고 넓이는 약 100만㎢에 이른다. 사막에 둘러 쌓여 있는 지정학적 위치로 매우 덥고 건조한 전형적인 사막기후이다. 5월부터 9월까지는 무더운 여름이며 11월부터 그 이듬해 3월까지는 온난한 기후로 겨울에 해당한다. 겨울의 평균 온도는 섭씨 14도이며 여름의 평균 기온은 섭씨 30도이다. 그러나 사막지역과 남부내륙지역은 지열로 인하여 5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된다. 강우량은 카이로가 평균 24mm이며 남부 이스완은 1mm밖에 되지 안는다. 동북 아프리카의 광대한 사막을 지나가는 나일강은 그 길이가 6,695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나일강을 이테루(Iteru)라고 불렀다. 이 말은 ‘큰 강’이라는 고대 이집트말이다. 나일강의 원류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한 백나일(White Nile)과 에디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한 청나일(Blue Nile)이 수단의 하르툼(Khartoum) 부근에서 만나고 아트바라(Atbara)강이 합류하여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지중해를 향해 흘러 들어간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강물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나일 강변의 90군데에 범람의 집이라고 불리는 나일로미터(Nilometer)를 설치하였다. 또한 나일강은 교통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만일 나일강을 이용한 교통의 수로를 이용하는 지혜가 없었다면 그 찬란했던 이집트 문명은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대한 땅을 바로가 다스릴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제4왕조시대(2613-2500 BC)의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석조 기념물도 건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근대 달력의 기원을 제공한 이집트의 태양력은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Julian Calender)과 그레고리 13세가 이를 개량하여 만든 오늘날의 달력을 탄생시키는 기원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여러 신들을 섬겼다. 아몬족의 신 아몬-라(Amun, Amun-Ra)를 비롯해 이집트 최고의 신중 하나였으며 달의 신인 토트(Thoth), 나일신 하피(Hapy), 사랑을 받은 오시리스(Osris), 사후 세계의 신 아누비스(Anubis), 태양신의 부활을 알리는 쇠똥구리 신의 케프리(Khepri), 오시리스의 아네 이시스(Isis),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Horus) 등등의 신들을 섬겼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신들을 섬기는 일들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으니라”(고전 8:5-6).
553 |성경시대 역사탐방<44>| 고대 이집트의 기원을 찾아서_장인수 박사 파일 (148)
편집부
11095 2011-05-25
고대 이집트의 기원을 찾아서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카멘 데드마스크 _ 카이로박물관 소장 “선박 건조, 금속 재련, 석조 기술 등 고도로 발전해”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로 추산되는 기원전 3000년 경, 소위 과학자들이 빙하기 후기 시대라고 일컫는 이때부터 지구의 온난화로 인하여 나일강 유역의 초지들이 말라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서식하던 코끼리, 사자, 기린 등 야생 동물들이 아프리카 밀림 지역으로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였다. 원래 나일강은 급류로 인하여 강바닥이 점점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지만 차츰 강물이 마르면서 오랜 기간동안 침식 작용이 진행되던 지류의 변화가 멈추게 되었다. 그 대신 나일강은 1년에 한번 여름이 끝날 시기에만 범람하였다. 범람할 때에는 수위가 무려 6m나 높아져서 강 유역들이 물에 잠겼다. 반면에 우기철이 지나게 되면 멀리 이디오피아 화산에서 흘러내려 온 퇴적물이 델타지역에 쌓이게 되었다. 이러한 기후 변화로 인하여 지금의 사하라 지역은 그 울창했던 밀림지대가 사막지대로 변하면서 수렵채집의 문화가 사라져갔다. 사냥터를 찾아 이동하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필요에 의해 강 유역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축을 길들이고 곡식을 재배하는 법을 채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도기를 만들고, 벽돌로 벽을 쌓는 기술도 경험을 통하여 얻게 되었다. 이들은 서서히 정착민이 되면서 부를 축적하였고 이집트 곳곳에서는 그들이 정착하여 큰 도시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이집트 고고학자들은 마디(Maadi) 근처에서 고대 신석기 시대의 유적터를 발굴하였다. 이곳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현무암 꽃병과 피륙과 화장품으로 사용되었던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고인이 살아 생전에 아꼈던 물품들과 함께 시신을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매장하였다. 이러한 장례 문화는 고대 이집트의 관습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는 온(On)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천체를 관측하는 천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의 천체 관측 기술은 시리우스(Sirius) 달력의 기준이 되는 시리우스 별이 온(On)에 떠올랐던 시각(時刻)을 정확하게 기원전 4241년 7월 19일 오전 4시 58분으로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David. R. and David A.E.A Biographical Dictionary of Ancient Egypt. London 1992). 이 온(On) 지역은 요셉이 다스리던 지역이었다(창 41:45). 온의 천문학자들은 달의 순환주기를 따르는 자연력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 1년이 354일이지만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면 주기가 더 길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태양력은 그들이 섬겼던 태양신 라(Ra)와도 연결시킬 수가 있었다. 또한 계절별로 농사를 짓는 때의 절기 계산을 하는 데도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태양력에 따라 한 해가 시작되는 시점이 언제인가가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시리우스는 늦봄, 달이 두 번 반을 순환하는 동안 가려져 있다가 한번 뜨고 지는 기간의 날 수가 365일로 태양력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은 365일을 30일까지 12달로 나누었으며 남은 5일은 축일로 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은 4년마다 하루가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온의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공전 기간이 365일 하고도 4분의 1에 걸쳐 공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1년에 4분의 1씩 남다보니 점점 태양력의 틀이 맞지 않게 되었다. 결국 시리우스가 뜨는 날과 1월 1일이 정확하게 겹친 횟수는 이집트력으로 1461년 주기로 단 4차례에 지나지 않았다(기원전 4241년, 2780년, 1321년, AD 142년). 기자의 피라밋 벽에는 태양력과 비슷한 달력이 발견되었는데 이 피라밋은 기원전 2600년 전에 건축되어졌다. 온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던 여러 도시 국가들이 2개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상(上) 이집트의 영토는 나일강 남쪽으로 아스완까지 이어진 지역을 다스렸다. 그리고 하(下) 이집트는 나일 삼각주 델타(Delta) 지역 습지에 자리잡았으며 그 남쪽 끝에는 온이 있었다. 상하 이집트는 오랜 기간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며 정복하고 정복을 당하는 암흑의 시대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100년경 상(上) 이집트의 바로가 나일 삼각주를 점령함으로써 오랜 기간 남북왕조의 갈등은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렇게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바로가 나르메르(Narmer, 3150-3050 BC)였다. 그후 상하 이집트의 통일은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상하 이집트 통일 이후 부유층들이 소유하고 있던 많은 재원들을 전쟁 경비에 충당하는 대신 예술과 건축 그리고 문화 사업에 투자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착민들로 구성된 농경 도시 국가가 복잡하여지면서 기록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문자를 발명하였으며 필사 기술이 발달되었다. 서기관들을 배출하기 위한 학교가 세워졌고 역사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역사상에 가장 먼저 기록된 바로는 대단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상하 이집트의 국경선이었던 지역에 수도를 정하였는데 하 이집트의 수도였던 온(On)은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쪽으로부터 외세가 침략하여 올 경우 수도를 지킬 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대신 강 건너 남쪽으로 약 30km 내려간 지역에 대운하와 제방을 쌓고 수도를 세웠다. 이때 쌓은 제방이 흰 흉벽 색깔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백색성벽’이라고 불렀다. 백색은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제1왕조인 나르메르 이후 수도였던 이 도시의 유적지는 콤알-아마르(Kom-al-Ahamr)라고 불려졌는데 6번째 바로가 이 도읍은 ‘영원하고 아릅답다’는 의미의 네페르(Nepher)로 개명하였다. 그후 호르아하(일명 아네지브, Hor-Aha, 3050-2890 BC) 통치시기에는 수도를 멤피스(Memphs)로 개명했다. 이후 이집트의 농경문화는 더욱 발전하였다. 이 문화는 정착문화였으며 특별히 이집트 문명은 문명의 젖줄이었던 나일강을 중심으로 농경문화의 왕조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부터 이집트는 국가행정이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었고 각종 법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선박건조, 금속 제련, 석조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였다. 멤피스가 통치의 도시로 번영을 누리는 동안 온(On)은 종교의 도시로 발전하였는데 기원전 1800년대에 이 지역의 행정을 다스렸던 히브리인이 요셉이었으며 이집트 이름으로는 사브넷 바네아(Zaphnath Paaneah)였다(창 41:45).
552 |성경시대 역사탐방<43> | 고대 문명과 성경이 숨쉬는 땅 이집트_장인수 박사 파일 (543)
편집부
16394 2011-05-11
고대 문명과 성경이 숨쉬는 땅 이집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이집트 왕국은 BC.3200년경 나르메르(Narmer)로부터 시작해” 기원전 4000년경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이 아직 석기 시대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이집트(Egypt)는 찬란한 고도의 문명권을 형성하였다. 이집트 왕조가 대략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다. 이집트 학자들은 연구의 편리성을 위하여 프톨레미 1세 소테르(PtolemaeosⅠ, 305-282 BC) 통치 시기의 이집트의 총독이었으며 프톨레마이어스 왕조의 초대 왕의 신관이었던 역사가 마네토(Manetho)에 의해 구분된 왕조의 연대기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3100년경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바로였던 나르메르(Narmer, 3150-3050 BC)를 초대 바로로 기술한다. 마네토는 이집트의 왕조 역사를 30왕조로 나눈다. 왕권을 나타내는 왕권에는 5가지의 종류가 있다. 가장 흔한 것으로는 상(上)이집트 통치를 의미하는 하얀 왕관과 하(下)이집트를 통치하는 붉은 왕관이 있으며, 이 밖에 파란색의 왕관과 아테프 왕관도 있다. 18왕조 시기의 바로들이 쓴 푸른색의 왕관을 아테프(Atef) 왕관이라고 한다. 아테프 왕관은 하얀 왕관과 비슷하지만 양쪽에 깃털 장식이 되어있고 끝에는 둥근 공이 달려있는 것으로 특수한 종교의식이 있을 때에만 사용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의 의복들은 아름다운 육체를 드러내는데 관대하였다. 남자들은 주로 허리에 천을 두르는 것으로 옷을 대신하였으며 길이나 허리 장식에 변화를 주어 계급과 지위를 나타내었다. 여인들은 몸에 맞게 제단된 긴 원피스를 입었다. 가볍고 얇은 반투명 재질로 되어 있었으며 남자들은 중요한 장소에서 파라오만 그러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집트의 왕조시대(Dynastic Period, 3200-332 BC)는 초기 왕조인 고대왕조(Old Kingdom), 중왕조(Middle Kingdom), 신왕조(New Kingdom) 그리고 후왕조, 즉 말기 왕조 시대로 구분한다. 이렇게 약 3000년 동안 이어오면서 30왕조 185명의 바로가 통치한 지역이 고대 이집트이다. 사관 마네토에 의하면 고대왕조시대는 기원전 3200-2270년까지이며 중왕조시대는 기원전 2270-1570년까지이고 신왕조시대는 기원전 1570-525년까지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이집트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성경과 관련된 언급은 어느 정도였는가? 성경에서 고대이집트는 창세기 12장 10절에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2절은 이어서 아브람이 이집트 여행 중에 겪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애굽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를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라는 아브라함의 표현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의 연대기는 정확하게 기술할 수가 없으나 보편적으로 이 시기가 기원전 2100년경으로 산정할 때 이집트는 제11왕조 시대에 속한다(2134-1782 BC). 아브라함 시대를 따라 내려가면 요셉의 시대에 다다른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시기는 기원전 1800년대로 계산한다면 세누스트레스 2세(Senustres Ⅱ, 1897-1878 BC) 통치 시대로 본다. 창세기 37장 36절에 보면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야곱이 자녀들과 함께 이집트로 이주한다(창 46:7). 이들의 숫자가 70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창 47:27).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이 사망하고 출애굽기 1장과의 시간 간격은 430년이다. 이 430여 년 간의 이집트 역사 속에는 셈족 계열의 유목민이었던 힉소스족(Hyksos)의 식민통치의 시기가 있었다(1720-1550 BC). 이때의 통치자들은 요셉을 비롯한 셈족 계열의 아시아인들을 세워 나라를 다스렸던 것으로 본다(R. K. Harrison, OLD Testament Times,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ulishing Co. 1970, 111-115). 그러나 힉소스 족은 이집트의 카모세(Kamose, 1573-1570 BC)에 의해 축출당한다. 이집트 연대기에는 힉소스족의 통치시기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파괴되고 없다. 마네토는 힉소스 왕조의 다섯 왕들이 108년을 통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들은 주로 하 이집트를 통치하였으며 상 이집트까지 지역을 넓히지는 못하였다. 마네토는 이렇게 셈족의 통치왕조를 제15왕조로 구분하였다. 아마 이 시기에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한 보호 속에서 번성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출애굽기 1장 11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렇다면 이러한 박해와 고난이 의미하는 교훈은 무엇을 보여 주고 있으며 출애굽이 의미하는 구속사의 흐름에 대해 깊이 있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요셉과 그 일가를 우대하던 이집트의 바로는 셈족계열의 힉소스 왕조가 등장하면서 많은 보호를 받았을 것이고 이 시기 전후로 엄청난 자손의 번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1550년 힉소스 족을 몰아낸 이후 이집트를 다시 통일시킨 18왕조인 신왕조(New Kingdom)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18왕조는 기원전 1550년부터 1150년 기간까지의 왕조시대였으며 이 시기를 출애굽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 출애굽기 1장 9-10까지 보면 이스라엘이 급속히 인구가 증가하면서 심히 강대한 집단이 되자 이들 18왕조의 통치자들은 과거 힉소스족에게 지배를 받았던 충격을 기억하고 같은 셈족계열의 이스라엘을 경계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출애굽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출 1:8-10).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바로는 누구일까? 이때의 바로는 당시 아모세 1세(Ahmose I, 1570-1546 BC)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의 대적’으로 언급한 세력은 다름 아닌 힉소스족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살펴 볼 때 출애굽 사건은 압제와 고통 속에서 시작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본토 이집트인과 이방 출신의 이스라엘, 이방 족속과 하나님의 신민 사이의 갈등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이제부터 이집트의 오랜 왕조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시간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역사(歷史)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시간, 즉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 역동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551 |성경시대 역사탐방<42>| 마네토Maneto와 쌍뽈레옹Chanpollion_장인수 박사 파일 (286)
편집부
12223 2011-02-23
마네토Maneto와 쌍뽈레옹Chanpollion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마네토의 저서에 출애굽 관련 사실들 기록으로 남아 있었을 것” 지난번 필자는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입법가인 솔론(Solon 640-560? BC)이 이집트를 방문했던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그곳에서 솔론은 밀레도 출신의 그리이스인들이 정착한 도시였던 델타지방의 나무크라티스 신전(神殿)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위대한 정치가답게 자신의 조국 아테네의 오랜 역사에 관한 일들을 자랑하였다. 이때 이집트의 신관들은 자기들의 역사에 대하여 그리스보다 더 오랜 전통과 역사를 비교하며 설명하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네 헬레네(그리스)인들은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이들의 언급은 그리스 역사는 감히 이집트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신관들은 거의 3천년 전으로 올라가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보존하여 온 자들이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료들을 바탕으로 설명한 것이지만, 그들이 생존했던 시대에는 고대 이집트의 화려한 영광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 솔론과 대담을 나누었던 신관들의 말들은 전설처럼 구체적으로 내려오지 않지만 아마도 마네토의 역사적 기록을 거론하였을 것이다. 델타의 세벤니토스 출신 그리스계 이집트인 마네토(Maneto, 305-246 BC)는 기원전 3세기경에 자세한 이집트 역사인 이집트사(History of Egypt)를 편찬하였다. 오늘날 이집트 연대기는 마네토가 기술한 이집트사를 참고로 한 것이다. 마네토는 이집트 역사를 왕조 중심으로 다루었으며 기원전 3,100년 경 이집트 통일에서부터 기원전 343년 정통 이집트 왕조의 마지막 바로였던 넥타네보 2세(Nextanebo Ⅱ, 360-343 BC)까지 30개 왕조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제31왕조는 페르시아의 통치시기였으며, 제32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였으며 기원전 30년에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Ⅶ, 51-30 BC)를 끝으로 오랜 이집트 역사는 막을 내린다. 신관 마네토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Ptolemaeous Ⅲ, 246-222 BC)의 명에 의해 그리스판 30권으로 된 이집트사를 편집하였다. 도서관과 신전의 고문서 보관소에 남겨 있던 역사 기록물들을 열람할 수 있었던 마네토는 태고적부터 발생하였던 이집트 역사를 사건별로 추적하였을 뿐 아니라 이집트 옛 사람들의 풍습과 전통 그리고 종교생활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사실 그대로 기록하였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마네토는 원본을 제작한 다음 서기관들이 일일이 필사한 후 이 필사본들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두고 책의 원본은 세라피스(Serapis) 신전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로마의 실력자 율리우스 가이사르(Julious Caesar, 100-44 BC)가 이집트에 원정왔을 때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이 봉기하자 그의 함대가 시민들에게 탈취당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함선들뿐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이집트사 사본도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후 세라피스 신전에 비치되어 있는 원본마저도 서기 391년에 신전에 대한 폐쇄령을 내린 기독교인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Ⅰ, 379-395 AD) 황제에 의해 소실되어버렸다. 신전 폐쇄령에 따라 접근이 어려웠기에 이집트사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원인 미상의 화제로 신전과 더불어 이집트사 원본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집트 3천년의 정사 기록물이 한 순간에 소실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은 우상의 신성문자라는 명분 아래 황제의 명에 의해 이집트 최후의 신전이었던 펠라 신전마저 폐쇄되면서 이집트 문자와 함께 사제들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 이집트 신성문자는 해독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계적 학문의 요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전부 가져오도록 명령하였다. 책들이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선박을 통하여 운반되자 그는 특명을 내려 보관되어 있던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을 압수한 다음 복사본을 만들고 그 후 원본은 되돌려 주었다. 이렇게 수집된 서적들을 ‘선박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붙여놓고 열람하게 하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49만 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본을 뺀 진본만 12만 권 이상이 보관되어 지식인들과 학자들에게 많은 자료들을 열람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렇게 하여 알렉산드리아는 지식과 학술을 연구하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비교할 수 있는 도서관은 소아시아 버가모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당시 양질의 파피루스는 알렉산드라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학자들을 위하여 정보 누출마저 금지하였다고 한다. 만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세라피스 신전에 보관되었던 20만 부의 중요 자료들이 소실되지 않았다면 마네토의 저서 속에 기록된 출애굽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이 성경의 외적 증거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더 올라가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당시의 바로와 관련된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며, 위대한 총리 요셉의 이야기도 성경 외의 외적 자료로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찌했든 데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신성문자 해독 금지령을 발표한 이후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는 신비에 가려진 체 수세기를 흘러가 버렸다(Henry Rida & Yousself Hanna shehata, Guide to the Alexandrian Monyments, Nasr Misr Press, 1987). 세월이 흘러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이집트를 침공한지 꼭 1년만인 1799년 8월에 이집트의 고대사를 밝혀줄 획기적인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프랑스 공병대 소속 병사들이 이집트 북부의 로제타(Rosetta)시 근교에 있는 라쉬드에서 한 석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기원 후 450년 펠라 신전에서 유일하게 신성문자를 쓰고 읽던 신관들이 사라져버리자 이를 해독하는 사람들도 사라져 버리고 역사의 미궁으로 빠져버렸었다. 이교도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 한마디에 3천년에 이르는 이집트의 고대 역사가 영원히 지워질 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799년 발견된 로제타석은 나폴레옹(Napoleon)의 원정대 중에 동참했던 언어학자 쌍폴레옹(Chabpollion, 1794-1831)에 의해 1822년 드디어 그 신성문자가 해독되었다. 미궁 속에 잠자던 신성문자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1200년만이었다. 석비의 내용은 기원전 196년 사제들이 프톨네마이오스 5세(Ptolemaeos Ⅴ, 205-180 BC)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검은색 현무암 상 중 하단에는 상형문자, 민용문자, 그리스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리스 문자를 통해 상형문자 해독의 결정적 열쇠를 얻게 되었다(Robert Sole, 나폴레옹의 학자들, 이상빈 역 서울:아테네, 2003, 208-209).
550 |성경시대 역사탐방<41>| 성경을 재조명한 이집트학Egyptology_장인수 박사 파일 (397)
편집부
18879 2011-01-19
성경을 재조명한 이집트학Egyptology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쌍폴레옹에 의해 해독된 로제타 스톤 “나폴레옹 원정으로 고대 이집트 문명과 역사 활짝 열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전쟁과 파괴의 문명보다 월등하게 풍부하게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다. 더구나 이 많은 기록들은 상당히 오랜 고대시대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기원전 2250년경 멤피스(Mempis)에 석비가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그동안 이집트를 통치하였던 140명이나 되는 바로들의 연대기가 기록되어 있다(Ludlow Bull, In the Kdea of History in the Ancient Near East 4-5). 튜린 파피루스(Turin Papirus)로 알려져 있는 석비는 기원전 13세기에 와서야 제작되었지만 300여명에 달하는 기원전 16세기 이전 왕들의 목록을 담고 있으며 고대 선사시대 시절 지배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신화 속의 신들의 이름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토스 1세(Setos Ⅰ, 1291-1278 BC) 때 작성된 왕들에 대한 인명록도 기원전 2000년경의 뛰어난 두 통치자에 대한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역사 기록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 이집트의 암흑시대의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집트는 자체의 세력이 쇠퇴함을 의식하고 무려 1000년 이상 지난 옛 관습과 예술, 그리고 사회적 전통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집트의 권력자들과 역대 바로들은 이스라엘에 관계된 사건들만은 이상하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부분이 있다. 고대의 역사 기록은 영광과 화려한 치적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이스인이었던 사관(史官) 마네토(Manetho)는 이집트 역사에 대해 객관적인 저술을 남겼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서 무어라 평가할 수 없다. 특별히 창세기 50장 이후부터 출애굽기 1장 사이의 430년의 세월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이집트 문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데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Ⅰ, AD 379-395)는 그의 제위시대에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 원본을 보관하고 있던 세라피스(Serapis) 신전을 불태워버림으로써 후대의 학자들이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박탈하여 버렸다(AD 391). 그 후 643년 술탄 오마르(Sultan Omar)에 의해 이집트에 남아있던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 기록물들 역시 소각되고 말았다. 오직 헤로도투스가 남긴 기록물과 마네토의 기록물을 인용한 내용들만 단편적으로 전하여질 뿐이다. AD 320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ts Ⅰ, AD 324-337)는 이집트 룩소(Luxar)에 있던 모세와 함께 자랐던 시기로 추측하는 투트모스 3세(Thutmose Ⅲ, 1504-1450 BC)의 오벨리스크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이 오벨리스크(obelisk)는 지금도 이스탄불(Istanbul)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내용은 투트모세 3세의 시리아 원정을 찬양한 것으로 바로에 대한 칭송비로 해독되었다. 1600년대 독일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독한 4권의 책을 출간하였지만 후일 신성문자가 해독된 후 그의 번역은 오역으로 하나도 정확한 번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8세기 말이 되어 가면서 스웨덴 학자 아케르블라드와 덴마크 학자 조에가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고 하였지만 완전히 해독하지는 못했다. 그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비로소 이집트의 고대역사에 대한 신비가 벗겨지는 시기가 오게 되었다. 나폴레옹 원정대에는 200여명의 학자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비방드농(Vivant Denon Dominiqe)은 1809년부터 1823년까지 이집트 고대 유적 의 스케치를 곁들인 ‘이집트의 이해’ 36권을 출간하였다. 드농은 1804년 나폴레옹(B. Napoleon)의 의해 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되어 1815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스페인, 폴란드를 원정할 때마다 박물관장 자격으로 동행하며 어떤 예술품을 약탈하여 올 것인가를 조언하였다. 오늘날 이 모든 예술품의 대부분은 루블(Louvre)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침내 나폴레옹 원정 이후 전 세계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기원과 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직적인 발굴이 시작되었고 고대 근동문명사를 그리이스 위주로 연구하던 기본 가치관을 뒤집기 시작했다. 이 또한 성경의 배경 역사를 다시 한번 재 조명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그후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이집트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아직 그 누구도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신비에 쌓여 있던 이집트의 고대 역사를 비로소 해독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 시작하였다. 1799년 8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동북쪽 약 56㎞에 있는 로제타(Rosetta) 마을 부근에서 나폴레옹 군대장교였던 부샤르(Bouchard) 대위에 의해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이 발견되었다. 길이 114cm, 폭 72cm인 이 현무암에는 세 종류의 문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위 14행은 상형문자였으며, 중간 32행은 민용문자, 아래 54행은 그리이스 문자였다. 이 석비는 기원전 196년 이집트 신관들이 멤피스(Memphis)에 회집되어 신전과 신관을 위하여 많은 선행을 베푼 젊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5세(Ptolemaeos Ⅴ, 205-180 BC)를 위한 칭송에 관한 내용이었다. 참석자들은 이 신전에 젊은 바로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이 로제타 스톤은 이집트 상형문자인 히에로그라피(hieroglyp)를 해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철수 한 뒤 로제타 스톤은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후 이집트 고대의 역사는 나폴레옹에 의해 임명된 언어학자 쌍뽈레옹(J. P. Champollion, AD 1793-1880)에 의해 1822년 9월 27일 더디어 해독되기에 이르렀다. 쌍뽈레옹의 이집트 문자해독으로 고대 이집트 역사 속에 출애굽 연대기와 바로의 이름들을 드디어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출애굽 연대기를 성경(Text)에 기초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Context)을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549 |성경시대 역사탐방<40> | 이집트 시대 역사 탐방을 시작하면서_장인수 박사 파일 (17)
편집부
6787 2010-12-14
이집트 시대 역사 탐방을 시작하면서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기자의 피라밋 _ 쿠푸 멜카우레 카프레왕의 무덤<이집트 제4왕조, 2600B.C.> “역사 탐방은 학문적 탐구 지속할 수 있는 계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회가 주어질 때 성경에 등장하는 지역들인 이집트를 비롯한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란, 터키 등으로 탐방 여행을 떠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지역들을 향해 출발하면서 기대 이상의 상상을 하기 쉽다. 필자는 이러한 사고의 틀을 깨고 출발하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곳은 새하늘과 새땅과 같이 우리를 맞이하는 거룩한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죄로 오염된 세속인들이 살고 있는 땅이며, 그로 인한 실망도 크다고 하는 사실이다. 나아가 대부분 탐방자들은 같이 여행을 떠나는 일행들이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 자매들이기에 아름다운 교제 속에서 은혜로운 탐방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출발하는 데 이 또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동행하는 탐방자들이 나로 인하여 도움을 받고 기뻐할 수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것이 실망을 줄이며 은혜 가운데 탐방을 마치고 귀국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편 주의해야 할 것은 현지 안내자에게 너무 무리한 안내를 바라는 것 또한 조심해야 한다. 특별히 주의할 점도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성서시대와 관련된 내용들만 요구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서시대를 지나 20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 아니라 근동지역 대부분이 이슬람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에는 단성론 계열인 꼽틱 정교회(Coptic Church)가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요르단과 시리아, 레바논 등에는 동방교회 계열의 기독교가 소수의 기독교 계열로서의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종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라 할 수 없다. 특별히 시리아, 레바논, 이란 지역은 이스라엘의 국가 자체를 인정치 않기 때문에 여권에 이스라엘 스탬프가 찍혀 있는 경우 즉시 추방을 당하게 된다.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인들은 보이지 않는 반(Anti) 기독교적 정서가 그들 민족 감정으로 깔려 있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이스라엘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성경과 관련된 지역들이 대부분 무속적 요소가 가미된 가설들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특정 지역의 장소는 성역화(聖域化)되었거나 인위적이며 상업적인 요소들로 오염되어 있음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때문에 성서시대의 지역을 탐방하고자 하려면 장소적 개념보다는 지리적 개념에서 성서가 기록되었던 계시 시대를 탐방한다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세월은 흘러 2000년의 시간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들 국가에는 삼대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모두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의 신앙고백과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효과적인 성서시대 탐방을 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우르는 시대적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재확인하는 시간 여행(Time Trip)이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을 놓쳐버린다면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실망하고 돌아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뿐이다. 이러한 시간 여행이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일선상에서 조명되는 카이로스(Kairos)의 개념을 가져야만 역사 탐방의 가치를 체험하는 소통(The Communication)을 나눌 수 있다. 항상 은혜의 방편으로 쓰여진 말씀(Scripture)이 전제되고 성서시대 배경의 현장인 지리적 개념과 역사적 정황들을 참고하는 입체적인 성서 조명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탐방한다면 풍성한 구속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자세 아래에서 우리는 신앙의 가치관이 정립된 감동(Inspiration)을 받고 돌아올 수 있다. 성경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저자가 동일한 재능과 지성과 직업을 가진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된 책이 아니다. 1600여 년이 넘는 기간동안 수많은 영감을 받은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놀라운 계시(A Shockong Revelation)의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시대 역사 탐방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위대한 말씀이 되는가를 다시 확증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즉 목적(Text)이 은혜의 방편인 말씀의 확증이며 수단은 역사 탐방이라고 전제한다면(Context) 의미있고 보람있는 탐방이 될 것이다. 이제 성경시대의 역사 탐방이 유익이 되기 위하여 몇가지 자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신앙적, 신학적 사상이 일치하는 일행들과 탐방을 떠나야 한다. 필자는 개혁주의 신학을 전재로 연구한 바탕 위에 성경시대 지역을 탐방한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 일선의 강단과 현장을 풍성하게 목양한다는 열정을 더욱 가치 있게 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탐방프로그램이라는 여행(action plan)을 한다. 이런 점에서 탐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학문적(신학) 작업을 더욱 알차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기로 삼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앙적, 신학적 사상이 일치하는 일행들과 탐방을 떠나야 한다. 둘째,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고 확증하고자 하는 약속하신 깊으신 뜻은 제한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고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더욱 심도 있게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렇게 연구하면서 목양의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설교자료 빈곤이라는 갈증을 해소하는 무한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목회 현장은 성도들을 양육하는 말씀의 꼴이 항상 신선하고 풍성해야 한다. 필자는 목회한 지 33년이 지났고 때로는 신학교 교수로, 목회의 현장에서는 목회자로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양떼들을 보살피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풍성함과 진리에 대한 즐거움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음은 성서지역 역사 탐방을 통하여 채워졌기 때문이다. 셋째, 역사탐방은 목회의 빈곤함을 채워주는 대안이다. 필자는 목회의 보람과 즐거움도 있었지만 인간적으로 이겨내기 힘든 시절도 있었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엄동설한에 홀로 남아 서 있기도 힘든 고난의 세월을 보낸 적도 있었다. 목회를 그만두고 싶은 큰 시련의 고비를 통과할 때 제일 먼저 필자에게 함께하여 위로해 주신 분은 성서시대 역사탐방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나의 주님이셨다. 그리고 학문적인 열정과 더불어 학위를 취득한 이후 더 많은 학문적 탐구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신학대학원 은사님들과 사랑하는 가족들,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있다. 이처럼 성서시대 역사탐방은 필자에게 진리에 대한 열정을 더욱 불러 일으켰으며 목회뿐 아니라 학문적 탐구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제 출애굽의 역사가 살아 있는 이집트 지역으로 본격적인 역사탐방을 함께 떠나보기로 하자.
548 |성경시대 역사탐방<39>| 페르시아 멸망과 디아스포라 이스라엘_장인수 박사 파일 (106)
편집부
12510 2010-12-08
페르시아 멸망과 디아스포라 이스라엘 한때 최고의 영화를 자랑하던 페르시아 왕국 수산성의 궁중정원 폐허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페르시아 국운을 종결지은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6세기경 인도유럽어(야벳)족 계열의 유목민들이었던 페르시아인들은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도 그리고 유라시아의 연해까지 지배한 아리안(Aryan)족의 후예들이었다. 이들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말과 기마병이 반드시 따라다녔다. 물론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말을 이용하였지만 이들은 말 위에 올라탄다는 생각은 하지를 못하였다. 페르시아인들의 초기 벽화 부조를 보면 용사들은 항상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전차를 끄는 말의 목에 장식된 멍애가 달리는 말의 기동력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스키타이, 메데(메디아), 페르시아에서는 사람이 직접 말에 올라타는 기마병의 민첩성과 기동성의 전술을 발견하고 발전시켰다. 나아가 그들은 고원지대에 왕이 거주하는 왕궁을 건축하면서 아름다움의 극치인 건축과 자연 환경을 각종 나무들로 꾸몄다. 이것을 낙원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낙원으로 상징되는 파라다이스(Paradise)는 원래 페르시아어이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아케메네즈 왕실 정원과 유원지를 이렇게 꾸미고 파라다이자(Pairidaeza)라고 불렀다. 고레스 대제는 제국을 평정한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바벨론을 정복하고 유민 생활을 하던 유대 민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은 하나님의 계획된 언약(Covenant)의 성취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사 44:28; 45:1). 당시의 정황은 민족 개념이 희박하였던 관계로 페르시아의 통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페르시아 통치자들은 엑바타나(Ecbatana)와 페르세폴리스(Perespolis), 수사(Susa) 등을 건축하고 티그리스(Tigris) 강과 인더스 강 사이의 드넓은 이란 공원 각 지역에 왕궁을 지어 도시를 형성하였고 도로를 건설하여 왕의 명령을 받은 칙령을 파발마가 신속하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또한 페르시아는 고유의 종교인 조로아스트교를 신봉하였다. 이 종교는 동양 불교 및 바빌론의 원시종교를 가미한 자연종교로서 이원론 종교를 체계화시킨 마니교의 출현을 제공하는 동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역사 배경 속에서 유대 공동체는 야웨니즘(Yhwhnism)이라고 일컫는 언약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바벨론 근교에서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라쌈서판들(Rassam clay barrel)을 발견하였는데 해독한 결과 그 내용은 고레스의 관용과 통치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군사적으로 페르시아는 페니키아 수병들을 흡수합병하여 해군정예부대를 창설하고 그리이스를 침공하는데 유용하게 투입하였다. 고레스의 관용정책에 따라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였는데 42,630명이 귀환하였고 뒤이어 7,537명이 귀환하였다(스 2:64-65). 또한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그곳에서 그들은 시민권자로서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대인 무라슈 집안의 부(富)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무라슈 집안은 약 150년 간 은행업과 모든 영역의 신탁업을 하고 있었다. 그밖에 운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많은 농지소유자들도 있었다. 무라슈 집안은 보험업과 임대업을 가지고 있었고 채무 불이행으로 투옥된 자들을 위하여 보증도 서주었다. 그리고 차용금의 20%의 이윤을 받고 차용해 주기도 하였다. 무라슈 집안은 “너희는 그땅에서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는 예레미야 29장 28절의 말씀을 지켜나갔다. 이즈음 유대 공동체들(Communities)은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면서 더욱 결속된 조직적 공동체로 형성하여 나갔다. 반면에 말라기(Malachi)가 예언하였던 시기는 아하수에로(Xerxes Ⅰ, 486-546 BC)가 통치하였던 시기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하던 시대를 지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종말론적 꿈도 사라져 버린 정황을 적나라하게 책망하였다. 그의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말라기 역시 오실 메시아를 강력하게 예언하였다(말 4:2). 이렇게 유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페르시아도 역사의 흐름 속에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331년 10월 1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36-323 BC)과 다리우스 3세(Darius Ⅲ, 336-330 BC)와의 역사의 운명을 결정할 대전투가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일어났다. 페르시아 운명을 결정할 이 전투는 고대 도시 아르벨라(Arbela) 외곽 60km 떨어진 넓은 평원에서 펼쳐졌다. 가우가멜라 전투가 일어난 그 해 여름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함락한 두로(Tyros)에서 동쪽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그 사이에 다리우스 3세는 페르시아 주력군과 동쪽 총독령 군대를 지휘하며 바벨론 북쪽 아르벨라 평원까지 이동하였다. 이전에 알렉산더는 기원전 333년 지중해변의 이수스(Issus)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쪽과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였고,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두로 요새를 함락함으로써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지배권을 박탈한 바 있었다. 이런 점에서 가우가멜라 전투는 페르시아 국운을 종결짓는 전투라 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군을 패배시키고 타프사코스(Thapsacos)에서 유프라데스강을 도강하여 북동쪽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더는 예전에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불태운 일에 대한 보복으로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워버렸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는 그의 측근에 의해 살해당했다(330 BC). 이로써 기원전 559년 찬란한 제국의 기초를 놓았던 고레스 2세 이후 대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리오 1세가 그의 비문에서 언급했던 “소그디아를 건너 스키타이부터 에디오피아까지, 신드에서 사데까지, 이것이 내가 다스리던 왕국이다”라고 언급한 대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의 전설이 되고 말았다.
547 |포토에세이| 태백산의 설화雪花_전우식 장로 파일 (11)
편집부
7005 2010-12-08
546 |성경시대 역사탐방<38>| 학사 에스라(Ezra)와 유대 공동체(Jewish Community)_장인수 박사 파일 (280)
편집부
15938 2010-10-27
학사 에스라(Ezra)와 유대 공동체(Jewish Community)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유대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보이는 수산성의 폐허 엘리아십의 아들이자 예수아의 손자인 여호하난이 제사장으로 있을 때인 아닥사스다(Artaxerxes I, 465-524 BC) 통치 제7년 되던 해에 학사 에스라(Ezra)가 예루살렘에 귀환한다(458 BC). 에스라보다 늦게 느헤미야는 BC 445년이나 444년경 예루살렘에 도착한다(E. Bertheau). 그리고 12년간 예루살렘의 총독임기를 마치고 아닥사스다 1세 통치인 32년에 페르시아로 귀환한다. 이때가 기원전 433년경이었을 것이다. 그 후 두 번째 임기를 보냈다. 당시 이집트의 엘레판틴에 거주하였던 유대 공동체 수비대의 한 유대인에 의해 쓰여진 편지에서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아들들인 들라야와 셀레마에게 보낸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는 기원전 407년경으로 추측되는데 산발랏은 느헤미야의 정적으로 그 무렵에는 연로하여 그의 아들들이 그의 지위를 대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자료에서 엘리아십의 손자 요하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엘리아십은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통하여 느헤미야의 후원자가 아닥사스다 1세였음을 알 수 있다(느 12:36). 기원전 516년 드디어 제2성전이 완공되고 본토로 귀환한 유대인들과 포로로 잡혀 가지 않았던 북왕국 후예들 중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내려온 사람들은(대하 30: 11-12) 온갖 이교도적 우상숭배의 행위들을 금지하고 유월절을 기념하는 절기를 성전에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때 학사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1세의 명에 의해 유대 법전(Torah)을 연구하게 하고 절기 회복을 선포하였다(BC 456). 포로 생활 귀환자들 가운데 첫 번째 돌아온 지도급 인물들은 개혁적 사고로 무장되어 있던 제사장들이었다. 유민기 이전 시대의 제사장들은 대부분 왕들에 의해 종속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586년 시드기야 왕의 죽음으로 그들은 비로소 독립된 위치로 서게 되었다. 비록 솔로몬 성전과 같은 규모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특별 섭리속에 완공된 성전 제의의 회복은 그들의 사명감을 뜨거운 열정으로 부활시켰다. 그리고 다윗 왕조의 계보에 속하는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는 예루살렘 재건에 대한 중대한 사명이 부여되었다(스 5:2; 학 1:1; 2:4; 12:14). 이런 상황에서 스가랴서에 나타나는 왕적 메시아와 제사장적 메시아라는 두 그룹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개념(슥 4:11-14; 6:11)은 당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인 국가 개념의 제의적 관점과 동시에 페르시아의 속주 안에서 제한적 신앙공동체로서 제의적 개념으로 인하여 상당한 갈등 구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갈등 구조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던 중 기원전 445년에서 429년까지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요하난 2세(Johanan Ⅱ) 시대를 마지막으로 다윗 계열의 지도자는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다윗 계열의 마지막 지도자급 인물은 엘요네이와 아나니였다. 그 후 다윗 왕조 계열의 왕정 재건이라는 꿈은 접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제사장들은 유대 공동체를 이끌 지도자로서 독창적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기에 여호수아와 힐기야의 자손들로 하여금 다윗 자손과 인연을 단절하고 대신 제2성전에서 대제사장 직임이 보장받도록 개혁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유다 신앙공동체(Jewish Community)를 형성시켜 나갔다. 하지만 개혁자 요시야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개혁의 구심점은 신명기적 회복을 위한 개혁을 주장하는 집단만 남게 되었다. 이들 단체는 더 이상 다윗 왕조의 부활을 원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다윗 왕조가 유다를 통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의 인장반지를 빼어 이방 갈데아 왕에게 줄 것을 예언한 말씀을 기억하라고 백성들을 선동하였다(렘 22:24-25). 이 당시 학사 에스라(Ezra)는 제사장이었는데(스 7:12) 그는 대제사장의 후손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586 BC) 처형당하였던 스가랴의 아들이었다(왕하 25:18-21). 그는 강 건너 속주에서 재판을 담당하였던 재판관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로, 범법자를 옥에 가두고 처형할 수 있는 행정관으로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스 7:25-26). 이 시기 에스라와 같은 동일 임무를 부여받고 이집트로 파견된 총독 웃자 흐레스넷(Udyahorresnet)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었다(L. Blenkinsopp, “The Mission of Udyahorresnet and Those of Ezra and Nehemiah.” JBL 106(1987) ; 413). 당시 지도자 에스라의 사명은 유대 땅으로 귀환한 백성들에게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앙 체계가 필요함을 가르쳤고, 전승(tradition)에 의하면 유다 왕국을 포기하도록 지도하였으며, 다윗의 후손에 의한 왕국 재건은 불가능하다는 시대적 정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이교풍습에 물들지 않고 철저한 신앙회복운동만이 국가가 존재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상을 제공하였다(스 10:1-15). 그후 신앙적 지도자들이 서서히 사라져 가면서 새롭게 귀환한 유다 백성들과 팔레스틴의 남은자(Remnant)들에게 새로운 신앙 집단을 형성하게 한 그룹이 나타났는데 바로 사반(Shaaphan)의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사반의 손자 그달리아와 함께 비 다윗 자손들을 중심으로(왕하 22:3-13) 특별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스룹바벨의 임무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R. de Vaux, Ancient Israel : Its Life and Institution, London / New York Darton(1961) 129-131). 이들 사반 계열의 평민계급은 개혁적 제사장들과 함께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적 그늘 아래 보호받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다윗 왕가의 부활을 견제하는 대안이기도 하였다. 당시 팔레스틴은 페르시아가 관용적 정책을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특별히 자신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 한 유다 국가의 재건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신앙적 제의가 자유로웠던 그 시기에는 신명기적 신앙개혁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하고 있었다.(R. Albertz, Einleitung, 1992, 472-475). 당시 유대 공동체의 사회구조는 페르시아의 총독과 장로위원회, 제사장, 평민 평의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직은 유대자치 행정위원회로서의 성격을 가진 행정 체제였다. 이 길만이 페르시아의 20개 속주 가운데 소수 민족인 유대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보았다. 다윗의 후손(Seed of David)으로 이어지는 유다 왕족의 회복운동은 후일 마카비 혁명(The Maccabean Revolt)에 의해 여호야립 가문 제사장 계보 중심의 신앙공동체인 하스모네안 왕가 출현으로 더욱 희박하여져 갔다. 만약 에스라 시기에 다윗 왕조가 세력을 얻어 국가 독립을 선언하였다면 페르시아의 강력한 무력 진압으로 유대 공동체는 역사의 현장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R. Albertz, Die Exilszeit,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배희숙 역 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178).
545 |성경시대 역사탐방<37>| 총독 느헤미야 시대_장인수 박사 파일 (235)
편집부
14478 2010-10-13
총독 느헤미야 시대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페르시아 왕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 늘어선 속주국들의 대표 행렬 “재건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확고한 위치 되찾아” 다리오 1세(DariusⅠ, The Great, 522-486 BC)의 뒤를 이은 왕은 아하수에로(XerxesⅠ, 486-465 BC) 왕이다. 그들의 통치시기에 다아스포라 유대인들에 대한 기록은 성문서에 속하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의 시대적 배경을 통하여 조명되고 있다. 그는 왕의 직위에 오르자마자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483 BC) 바벨론 지역에도 국지적 반란이 일어났으나 24개 지역의 속주를 연결하고 있는 ‘왕의 도로’(王道;Royal Road)를 통하여 신속하게 제압하였다. 특히 메데, 엘람,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있어 이 도로는 큰 역할을 하였다. 아하수에로는 그의 정책의 기조가 선왕들과는 달리 속주를 관용정책으로 다스리기보다는 페르시아에서 파견된 총독(Satrap)을 통하여 통치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M.W.Stolpler, ‘The Governor of Babylon and Across the River in 486 BC’ JNES 48(1989); 297). 그리고 페르시아 정책에 위반하는 속주지역에 대하여 재정지원을 단절하여 버렸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의 성전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아각 사람 하만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고 왕비 에스더와 모르드게를 비롯해 유대주의자들을 숙청하려한 하만의 계략에 대한 특별 배려였으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만의 음모를 제거한 이후 아하수에로는 그리스 침공을 위한 원정을 떠난다(BC 481). 아하수에로의 페르시아 대군이 침공하자 그리스 동맹군들은 고린도에 모여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동맹을 결성한다. 이 고린도 동맹은 페르시아군을 맞아 일전을 벌일 장소로 모이다 산맥이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지점에 형성된 협로 데르모필레(Thermopylae)로 정한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Leonidas) 휘하의 300명의 정예부대는 처절한 싸움 끝에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BC 480). 그러나 그후 프라티아 전투(Plataiai)에서 연거푸 아하수에로는 대패하고 만다(BC 479). 결국 전투 중에 사망한 아하수에로의 뒤를 이어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Ⅰ, 465-423 BC)가 왕위에 오른다. 그의 통치기간에 유다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성벽을 제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제위 기간에도 많은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집트의 반란이 가장 큰 반란이었다(465-455 BC). 그러자 이 전쟁 기간 중 휴전을 선포하고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에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평화조약을 칼리아스 조약(Peace of Kallias)이라고 부른다(449 BC). 이 조약을 끝으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 유대 공동체는 아닥사스다 왕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페르시아의 속주정책이 바뀌게 되었다. 아닥사스다 통치시기에는 에집트와 그리이스의 평화조약 이후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유대지역을 정략적 완충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요충지역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기원전 445년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기에 이른 것이다(O.Margalith. ‘The Political Role of Ezra as Persian Governto’ ZAW(1986);111). 이러한 역사 속의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지키시기 위한 특별 섭리가 있었다. 이 시기는 또한 학사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의 활동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느헤미야는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 앞에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느 1:1-10). 당시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대적 세력이 있었다. 즉 느헤미야에 의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그 배경에는 방백 르홈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예루살렘 백성들의 성벽재건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보냄으로써 시련이 시작되었다(스 4:8-16). 그러자 성벽 재건은 중단되었고 이렇게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느헤미야는 특별기도를 드린다. 그후 왕께 이 사실을 아룀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닥사스다를 감동시키신다(느 2:8-9). 이후부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과 함께 신앙개혁운동도 병행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황은 칼리아스 평화 협정을 맺은 직후인 관계로 매우 불안한 시대였다. 더욱이 강 서편의 총독 메가비조스(Megabyzos) 반란이 일어난 시대(449-448 BC)였기에 유대 주변의 지역은 세력간의 갈등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 속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원전 516년에 완공된 제2성전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벽 공사를 완공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파송되어 성벽 공사를 완공하는데는 많은 방해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처럼 안팎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느헤미야는 무장병력을 성 주위에 주둔시켜 지키도록 조처하였다(느 4장). 심지어 대적자들은 느헤미야를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으며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대한 모반을 꽤하고 있다고 거짓 소문을 유포하기도 하였다(느 6:1-9).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벽은 52일만에 완공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지 14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되찾게 되었다. 느헤미야는 당시대의 레위인들을 성전 안으로 불러들이고 제사장들의 직임도 감당하게 하였다. 또한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고 안식일에 상업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그리고 곡물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 또는 일부의 수입이 되게 하여 레위인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느 13:31). 유대민족을 향한 신앙 개혁운동은 이어서 느헤미야보다 3년 전에 귀환한 학사 에스라에게 그 사명이 넘겨지게 된다(457 BC).
544 |포토에세이| 해뜰참의 기도_전우식 장로 파일 (456)
편집부
14671 2010-10-13
543 |성경시대 역사탐방<36>|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몰락_장인수 박사 파일 (427)
편집부
16860 2010-09-15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몰락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수사에서 발견된 고레스의 ‘사이러스 실린더’(고대 문서) _ <대영박물관 소장> “역사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 보살펴” 그리이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 484-425 BC)는 그의 역작 『역사』(Hestoriai) 제3권에서 다리오 1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리오는 제국을 20개 주로 나누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주마다 한 사람의 총독(Sotrap)를 두고 있었는데 지역(Satrapia)마다 신임하는 총독이 있었고 백성들은 그에게 세금을 납부하였다.” 기원전 494년 반란의 진원지였던 밀레도(Miletos)를 정복한 이후 4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리오 1세는 이오니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반란을 영구히 진압하기 위하여 원정길에 오른다. 그의 계획은 철학과 교육의 도시 아테네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25㎞ 떨어진 마라톤 평원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은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490 BC). 수많은 전사자를 낸 페르시아는 그 이후 한번도 그리이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후 다리오 1세는 기원전 486년 11월 말경 중병으로 30일간 누워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다리오 1세가 죽고난 후 혼란의 와중 속에서 시간은 흘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한 군주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빌립 2세(PhilipposⅡ)였다. 빌립 2세는 기원전 358년 기병 600명, 보명 1만 명의 군대를 조직하고 세력을 장악한 지 22년 만에 기병 2,800명 보명 2만 7천명의 정예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보병들을 가리켜 ‘사리사’(Sarissa)라고 부르는 장창(長槍)으로 무장시켰는데, 이 보병들의 밀집대형의 진을 팔랑크스(Phalanx)라고 불렀다. 빌립 2세가 다스리는 마케도니아는 시민들이 모두 군인들이었고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용사들이었다. 빌립 2세는 평소에 정예 용사들만 골라서 생사를 같이 할 동지를 규합하였는데 그들을 헤타로이(Hetairoi)라고 불렀다. 그리이스의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일한 빌립 2세는 기원전 337년 고린도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이오니아 지역의 페르시아 지배권을 되찾기 위하여 국지전(局地戰)을 벌인 끝에 페르시아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때 고레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의 8년 통치는 에집트, 에디오피아를 정복하는 도중에 마감하고 만다(522 BC). 다리오 2세는 약 36년간 통치하면서(522-486 BC) 페르시아의 영토를 인도까지 넓혔고 그리이스를 뛰어넘어 동유럽까지 영향권 속에 있게 한 지도자였다. 다리오 1세의 관용은 유대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동기를 부여한 군주였으며 이 또한 언약 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스스로 “모든 민족들의 왕이며 세계의 혈통을 하나로 잇는 왕”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고레스 2세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트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또한 피정복민의 지도자들 역시 페르시아의 군주를 통치자나 압제자로 보지 않았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과 사회질서를 지켜줄 왕으로 보았다. 유대의 율법(Torah)과 이스라엘의 ‘유일신 여호와 신앙’을 인정한 것도 이러한 정책 중 일환이었다. 그 뒤를 이어 다리오 1세의 아들 아하수에로(XerxesⅠ, 486-456 BC)가 다리오 2세를 계승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시기를 폭군이 통치하던 시대로 평가하였다. 아하수에로는 편협하고 잔혹할 뿐 아니라 퇴폐적이고 방탕했던 군주로 언급되었다. 그는 자신이 거느렸던 후궁들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처제, 며느리, 조카딸을 포함하여 많은 여인들과 문란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통치기간 동안 속주의 민족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노예신분으로 끌어내렸다. 이 시기에 에스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에스더와 모르드게가 아니었다면 유대인 공동체는 와해되었을 것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뿐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공동체의 사활에도 큰 위기가 닥쳐왔을 것이다. 기원전 456년 아하수에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아르닥크세르크세스 1세(456-424 BC), 크세르크세스 2세(424-423 BC), 다리오 2세(423-404 BC), 아르닥 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exes Ⅲ, 359-338 BC), 아르세스(Arses, 338-336 BC), 다리오 3세(Darius Ⅲ, 336-330 BC)로 이어지는 페르시아의 통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역사의 전설로 사라져갔다. 신바벨론 제국은 유대를 48년동안 통치하였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213여년을 지배하였다(539-523 BC). 이처럼 오랜기간 근동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가 작용하였다. 이때 두 제국 통치 기간동안의 관용정책(寬容政策)은 유대인들의 유일신 신앙을 더욱 체계화시키고 국제화시키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나아가 이 관용정책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의 관용정책을 더욱 발전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팔레스타인 정복이후 근동지방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슬로건 아래 더욱 발전되어 갔다. 절대적 진리로 고백되어지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러한 토양 아래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확장하였고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롬 11:23). 아케메네즈 왕조(Achaemenian Empire) 후반기에는 제국 전역에 걸쳐 반란이 격화되었으며 특별히 소아시아에서는 심각한 반란과 가혹한 진압이 반복되어 아하수에로 왕은 힙겹게 제국을 지켜야만 했다. 아르닥크세스크세스 3세의 뒤를 이어 다리오 3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336 BC),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마케도니아 왕 빌립 2세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며 그리이스 전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빌립 2세는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제국이 무너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제국의 관용주의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후일 이러한 관용이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고 하는 점이다. 급속하게 뻗어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종교나 문화를 사회적인 절대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상과 종교적 이념으로 통일되지 못한 제국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분열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을 페르시아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후일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의 관용정책을 가리켜 팍스페르시카(Pax-Persica)라고 불렀다. 페르시아를 파라다이스(Paradis), 즉 낙원(樂園)이라고 불렀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의 조직과 제도는 결국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임을 페르시아 멸망의 역사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
542 |포토에세이| 남사당 민속놀이_전우식장로 파일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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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9 201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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