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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7 (00:00:00)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28uru.jpg성경시대 역사탐방<4>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3




사진 | 우르의 지구랏

“커다란 충적 침전 층은 노아 홍수 규모 보여줘”

노아에게는 대홍수 이전에 낳은 세 아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셈과 함
과 야벳이다. 이들의 계보는 창세기 10:1-32에 기록되어 있다. 홍수 이후 이
들의 후손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 전 세계로 흩어졌다.

노아홍수 관련된 설화
남아 있어

성경 기록 외의 대홍수의 이야기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토판에도 기록되어 있
다. 바로 구약성경 창세기의 6장에서 9장에 등장하는 노아홍수의 이야기를
연상하는 내용이다.
아카드어로 보존된 이 토판문서는 1872년 30대 초반의 대영박물관의 직원이
었던 조지 스미스(George Smith, 1840-1876)가 발견한 것으로, 그는 박물관
수장고에서 무더기로 쌓여있던 토판문서 중의 한 부분을 읽어가는 동안 길가
메쉬 서사시(Gilgamish)의 내용을
보고 감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서사시의 주인공은 우트나피쉬팀(Faroway Utnapishtim)이다. 그는 노아
격에 해당하는 인물로 유일하게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강들의 입구에 살고 있었다. 11번째 석판에는 그가 방주를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던 일, 홍수를 몰고 온 큰 폭풍, 7일 후에 방주가 니시르 산(Mount
Nisir)에 정착한 일, 처음에는 비둘기, 다음에는 참새, 마지막에는 까마귀
를 내보내었는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우트나피쉬팀이 방주를 떠났을 때 “신들이 파리 떼처럼 제물 주위에 몰려들
었다. 그리고 엔릴(Anril)은 방주 위에서 우트나피쉬팀에게 영생을 주었다”
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토판문서는 니느웨에 위치한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도서관에서 출
토된 유물이었다. ‘우트나피쉬팀’이라는 말은 ‘생명의 날’(Day of Life)
이란 뜻이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당시에 홍수설화가 널리 퍼
져 있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기록된 성경만이 그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여진 것이라 할 것이다(창 8장).
메소포타
미아 평야에서는 커다란 충적침전층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고고학
자 랑돈(Rang Dong)은 그것을 노아시대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셈의 자손들이 정착한 전 지역은 북쪽의 시리아에서부터 남쪽의 아라비아까
지, 그리고 동쪽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을 따라 메소포타
미아(Mesopotamia)까지 이어졌다. 이곳으로 뻗어간 셈의 후손들은 창세기
(10:21-31)에 기록되어 있다.
니므롯의 나라(창10:9-11)는 시날(바빌로니아)에서 시작하여 그곳 바벨과(바
벨론) 에렉(우르크)과 아카드를 통치하였다. 그는 또한 앗시리아의 레센과
니느웨와 칼라를 건설하였으며, 바벨론 서남쪽에 위치한 님루드와 같은 몇
몇 지역들은 이름의 형적을 지니고 있다.
성경의 니므롯을 흔히 아카드 제국을 세운 사르곤 1세(Sargon 1)와 비교하
는 학자도 있다. 성경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은 역사적 서술로 보아야 한다
(창 11:1-9). 그것은 유별나게 큰 지구랏(Ziggurat)을 건축하였다는 기사이
다. 앗시리아의 지구라투(Zigguratu:산정상)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지구랏
은 에렉(우루크)에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1장 4절에 언급되어 있는 바벨탑의
규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이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바벨론 유수가 끝난 다음 100
여 년이 흘렀을 때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서 바벨탑을 목격한 내용을 그
의 저서 역사(Historia)에 이렇게 기록하여 놓고 있다.
“성역 중간에는 가로 세로 모두 1스타디온(90m)정도의 견고한 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 위에 제2의 탑이 있고 다시 그 위에 제3의 탑, 이런 식으로 8층
까지 이어진다. 위로 오를수록 탑 바깥의 나선형 통로가 나 있다. 계단을 반
쯤 오르면 층계 휴식처가 있고 거기에는 잠시 쉬는 의자가 많이 있다. 정상
에 오르려는 자는 거기서 한숨을 돌린 다음 탑 바깥으로 이어진 나선형의 통
로를 통하여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정상에는 커다란 신전이 있다.
그 정상 안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침상이 있고 그 곁에는 황금탁자가 놓여있
다. 신상(神像) 따위는 없다. 밤이 되면 지역 원주민 여인 한 명을 제외하고
는 아무도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서 그때 당시만 하여도 바벨탑의 폐허 흔적은 분명히
존재하였다. 고고학 발굴의 해설서 안내판을 기록한 독일인 고고학자 세람
(C. W
. Ceram)은 바벨탑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역사적 사실로 판명된 바벨탑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32m 높이의 첫 번째 테라스를 향해 거대한 계단
을 오를 때의 광경은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그 사이에서는 두 제사장의 행렬
이 중간 테라스를 통하여 세 번째 테라스를 오르고, 거기서 비밀 통로를 통
하여 탑의 정상 마르둑의 성역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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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0)| 바빌론(Babylon) 유적지를 _장인수박사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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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4 2009-04-15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38babel.jpg성경시대 역사탐방 바빌론(Babylon) 유적지를 가다(1) 오랜 역사의 흔적 보여주고 있는 바빌론 성터 폐허 장인수 박사_성지학술연구소장 “유다 왕국 백성들이 끌려간 바빌론 옛길 발굴돼” 바그다드에서 남쪽 100km 거리에 있는 8번 국도변에는 바빌주(州)의 중심지 힐라가 있다. 이 도시 진입 10km를 지나면 서쪽으로 이어지는 구 도로가 있 고 이 도로를 따라 2km 가량 달리면 바빌론 유적지가 있다. 현재의 바빌론은 신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2세(Nabu-Kudrri-usuri; 나부 여 나의 후손을 보호하소서)가 신 바벨로니아 왕으로 즉위하여 그의 통치 43 년 동안(605-562 BC) 신 제국을 이끈 전성 시대의 군주로 이 지역에서 바빌 로니아 제국을 통치하였다. 바빌론 전성시대 연 느부갓네살 이 도시의 외곽은 16km의 외성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 안쪽 둘레에 8km의 내성(內城)이 있었다. 그러나 성곽 구조물의 자재가 벽돌인데다가 수천 년 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방치됨으로써 성벽은 모두 허물어져 황무지의 일부 가 되어버렸다. 지상에서는 희미한 흔적들만 추적할 뿐이다. 다만 지하에 묻 혀있던 벽돌더미가 오랜 세월의 잊혀진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보게 한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근래에 철근 시멘트 콘크리트로 일부 복원된 건축물 을 만난다.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시대에 건설된 그리이스의 계단식 노천극장 의 흔적이다. 2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의 폐허가 바빌론에서 가 장 큰 구조물의 유적이다. 이곳에서 300m정도 들어가면 전쟁의 여신 이쉬타르(Ishtar)를 위하여 세워 진 이쉬타르 문의 복제 건축물이 서 있다. 높이가 12m나 되는 웅장한 건물이 다. 이 문은 느부갓네살 박물관 정문으로 세워져 있다. 그 원형은 독일의 고 고학자 콜데바이(Robert Koldewey, 1855-1925)에 의해 발굴되어 현재 독일 의 베를린 페르가모 박물관에 원형 그대로를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 원 형을 본따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에 의해 1970년대에 이곳에 복제물을 세웠 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최고의 정성을 다하 여 이 성문을 세웠다. 광택타일 로 표면을 처리하고 그 벽돌 표면에 용과 황소, 사자 등을 정교하게 새겨 넣 었다. 용은 마르둑을, 황소는 바람의 신 아다드를, 사자는 이쉬타르를 나타 낸다. 느부갓네살 박물관에는 옛 바빌로니아 시대의 문자가 새겨진 붉은 점토판, 바벨탑 상상 모형, 당시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뒤편 쪽문을 통과하여 나가면 정면으로 신 바빌로니아 시대의 개선 행진로가 50m 정도 발 굴되어 있고, 원래 느부갓네살 왕궁이라 불리는 남궁(南宮)의 복원된 모습 을 볼 수가 있다. 이 건물의 규모는 190×300m로서 면적이 17,200여 평이 며, 왕좌가 있었던 궁전은 50×25m로서 380여 평의 규모로 되어 있다. 유명 한 바빌론 공중정원도 이 왕궁의 일부였다. 느부갓네살의 왕비 아미티스는 메디아의 공주였다. 느부갓네살이 왕자시절 에 앗시리아를 공격하기 위하여 메디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우의를 다지기 위 하여 메디아 공주 아미티스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공주 아미티스가 살던 지역은 서북 페르시아의 시원한 고원지대였으므로 그 녀는 뜨거운 바빌론 날씨를 견딜 수 없었다. 왕은 뜨거운 사막 열풍에 괴로 워하는 공주를 위하여 왕궁을 건설하고 그 위에 2층, 3층으로 정원을 만들었 다. 정원의 정상에는 종일 정원에 나무들을 위하여 물이 공급되었다. 고온의 건 조한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만든 특수한 장치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공주 는 시원한 궁전에서 아름다운 수목들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였을 것이 다. 1990년경, 이라크 정부는 공중정원을 복원하기 위하여 정책수립에 들어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행진하였다고 하는 행진로 는 왕궁 외벽을 향하여 뻗쳐있었는데 지금 일부만 원형 그대로 발굴되어 전 시되고 있다. 이곳에서 500m 거리에 신 비빌로니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빌론 사자의 석상이 남아있다. 콜데바이에 의해 그 규모 밝혀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끌려온 유다 왕국의 유민(Free Man)들이 이 길을 따라 들어왔을 것이다(대하 31:20).
500 no image |포토에세이| 소가 있는 풍경_전우식 장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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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6 2009-03-18
499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9)| 하란으로 떠난 아브라함_장인수박사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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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2 2009-03-18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36nipro.jpg성경시대 역사탐방 하란으로 떠난 아브라함 니푸르 : 갈대아 우르에 있었던 지구랏의 옛 폐허 장인수 박사_성지학술연구소장 “하란으로의 이주는 우상으로부터 떠난 것” 아브라함은 많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던 갈데아 우르 지역에서 살았었다. 여 호수아서는 당시 상황을 증거해 주고 있다. 우상들을 섬기던 갈데아 우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 내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 루 행하게 하고”(수 24: 2-3). 바벨로니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화는 길가메쉬 서사시(Epic of Gilgamesh) 이다. 주인공 길가메쉬는 우르크(Urk)의 왕으로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인 물이었다. 그는 친구인 엔키두(Enkidu)가 죽은 후 영생을 찾아서 대홍수에 서 살아남은 우트나피시팀(Utunapisitim)을 찾아나서는 긴 여정에 올랐다. 엔키두는 온몸이 털로 덮여있었고 여자처럼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야성의 모습으로 사막에서 살았는데 에렉에서 길가메쉬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엔키 두는 문명생활에 젖어들면서 야생의 상징인 털을 모두 잃어버렸다. 엔키두는 길가메쉬를 따라 케도로스산의 왕 움바바(Humbaba)를 죽이러 갔을 때 길가메쉬를 도와 괴물 움바바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이슈타르(Ishtar)의 저주에서 길가메쉬를 구하고 자신은 저주로 병이 들어 죽는다. 이때 길가메 쉬는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백향목 나무가 우거진 산에서 우트나피시팀을 만나지만, 이러한 예언을 듣는다. “길가메쉬여, 그대가 찾는 것은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신들이 인간을 창 조할 때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안겨주었고 영생의 삶을 거두었기 때문이 다. 그대는 살아 있는 시간을 즐겁고 충만하게 보내라. 그대의 손을 잡은 어 린 아이를 사랑하라. 그대의 아내를 품에 안고 즐겁게 해주라. 기껏해야 이 러한 것들만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n길가메쉬는 그제야 깨닫는다. 인생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영 생은 그의 자녀와 자녀들에 의해 삶을 이어가는 것이란 것을. 이러한 길가메 쉬 서사시(敍事詩)를 통하여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인생관을 발견할 수 있 다. 우르 제3왕조 통치기간은 많은 지구랏을 건축한 시대였다. 지구랏 건축은 정 착문화의 기준이 된다. 국가의 절대 지도자는 신관(神官)들이었고 이들에 의 한 지도력에 의존하던 시대였다. 도시국가로 형성되었던 이곳은 문화의 차이 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협조하였고, 신관을 왕으로 추대하여 외부의 침입을 막고 공동체를 지켜나가야 했다. 수메르의 옛 신전들은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우르남무는 옛 수메르 의 심장부를 이끌었던 영웅들과 왕들의 이야기, 특별히 길가메쉬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수메르의 19개 도시에는 각종 조 공품들이 지구랏에 바쳐졌다. 이런 엄청난 헌납 조례로 인한 과도한 재정지 출은 우르 왕조의 경제를 파국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가장 힘들게 하였던 것은 계속되는 가뭄의 피해였다. 수많은 농경지 가 불모의 땅으로 변해갔다. 지배계급은 염분에 약한 밀을 포기하고 소금기 에 강한 보리를 심도록 권장하였지만 설상가상으로 외부 유목민들의 침략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엄청난 염화현상으로 척박한 땅이 되어가면서 식량 가격은 당시 자료에 의하면 60배 이상으로 뛰었다고 한다. 기원전 2000년경 지금의 이란 땅에서 넘어온 엘람인들과 사막에서 건너온 유 목민(遊牧民)들에 의해 수메르의 도시들은 약탈당하고 신전이 파괴되고 재물 을 강탈당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이러한 고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도시를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당시의 참혹함을 말해주는 토판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우르가 파괴되었다. 그 슬픔을 어찌 견딜 수 있으리. 피가 이 땅의 구멍 을 메웠다. 뜨거운 쇳물이 거푸집을 채우듯이 산덩이가 녹아내린다. 햇살을 이기지 못한 기름덩이처럼. 우리의 신전이 파괴되었다. 신들이 우리를 버렸 다. 철새처럼. 자욱한 연기가 우리의 도시를 덮었다. 수의(壽衣)처럼.” 이렇게 우르시대의 비관적 사고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 왔다. 아브라함 시대의 가치관은 현세의 한계성을 지닌 운명이라는 비관적 세계관 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특별계시에 의해 조상 때부터 섬겨왔던 우상 의 문화에서 벗어나 우르에서 1,600km 떨어진 스탭(Steep) 지역인 하란 (Haran)으로 이주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하란으로 이주한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내일을 향한 언약(Covenant)의 조상이 되기 위한 첫 발 걸음으로 하란을 향하여 옮겼던 것이다.
498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8)|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4)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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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71 2009-03-04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35abura-1.jpg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4) 니프르에 있는 아브라함의 박물관 장인수 박사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제도는 발굴된 점토판에 의해 해독한 결과 왕정 정치제 도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행정제도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자유시 민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맡았다. 시원적 민주주의 체제 벌써 나타나 하지만 자신들이 세운 관리가 마음에 들지 않고 공동이익에 해가 된다고 판 단되면 그 자리에서 파면시킬 수도 있는 제도였다. 이러한 민주적 정치제도 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부재를 가져왔고, 외부 군사적 위협이 가해질 경우 에는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 었고 왕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메르어로 왕을 루갈(Lugal)이라고 하였는데 ‘큰 남자’라는 뜻이다. 루갈 들은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면 자신 이 세운 공헌을 많은 시민들에게 인정받 기 위한 검증을 받았으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나면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들처럼 다시 소시민으로 돌아가 살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과 국가적인 분쟁이 발생하고 위험이 도래하자 지속적인 왕정제도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 로 인하여 세습왕조가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3000년 경, 세습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왕정제도(王政制度)가 확립되 었다. 이후부터 수메르(Sumer)의 도시국가는 여러나라로 나뉘어 패권 싸움 에 휘말리게 된다. 이즈음 아브라함의 고향 갈데아 우르(창 11:28), 우르크 (Uruk, 창세기에 나오는 에렉 10:10) 등 10여 개의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2000년까지 소모적인 내부투쟁을 하다가 엘람에 의해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주권은 엘람에 넘어가게 되었다. 수메르 왕명표 (Sumerian King List)에 보면 기원전 3000년 경 초기 수메르 지역을 다스렸 던 왕국은 키시(Kish) 왕국의 에타나 왕이었다. 그는 수메르 여러 도시들을 지배하였으며 주변 도시국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키시 왕국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우르크가 키시로부터 패권을 잡았 는데, 우르크 제1왕조를 창건하였던 메스키아 가시르가 자그로스 산맥에서부 터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다. 우르의 신전(Ziggurat)에서 주 춧돌에 신전설립 날짜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서 이 왕조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길가매쉬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로 유명한 길가매쉬도 우르크의 초 기 왕으로 기원전 2700년경 메소포타미아를 통치하였다. 그의 영웅적인 서사 시는 수세기에 걸쳐 수메르어, 아카드어, 히타이트어, 그 밖의 중근동 언어 로 전하여졌다. 그후 그리이스 신화에 나타나는 헬라클레스 출현에 영향을 주었다. 우르는 제3왕조까지 이어지는데 제1왕조는 177년을 통치하였고, 제2왕조는 네 명이 통치한 116년, 우르의 제3왕조(2060-1950 B.C.)는 아브라함이 살았 던 시대이며, 우르남무(Ur-nammu)가 통치하던 시대였다. 우르남무는 우르의 제3왕조를 창건하였으며, 약 반세기에 걸쳐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 는 수메르와 아카드 이외의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와 엘람의 일부지역을 포함 한 왕국을 통치하였다. 우르남무가 남겨놓은 법전이 닙푸르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가 남긴 법전이라 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그 서판에 보면 우르남무의 아들 슐기는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라 약 50년을 통치하였고, 신전 건축에 많은 정성 을 기울였다고 하였다. 이 왕조기간동안 가장 신성한 도시는 닙푸르(Nippur)였다. 이 나라는 여러 지방으로 분할되어 있었으며 닙푸르의 신전을 위하여 매달 예물을 헌납하였 다. 비교적 온화한 기후의 영향을 받았던 이 시대에는 무역도 번창하였으며, 무 역 저장지역이 딜문(Dilmun)섬에 있었는데 현재 바레인 섬으로 추측되고 있 다. 우르 제3왕조의 주신(主神)은 신(Sin)즉, 닌나(Ninna) 월신(月神)이었 다. 무역 비롯한 문화, 문명도 발달해 다음에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이 시기의 종교와 문화를 조명하도록 하겠다.
497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7)|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3)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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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2 2009-02-11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33uru.jpg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3) 아브라함은 높은 문명 갖춘 우르 제3왕조 시대 인물 사진 | 우르의 지구랏 정상 장인수 박사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1929년 3월 12일자 뉴욕 타임스의 머릿기사에 다음과 같은 톱뉴스가 실렸 다.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아브라함 역사 사실로 밝혀져 “우르의 발굴, 아브라함의 새로운 사실 발견, 아브라함은 유목민의 신분이 아니었으며, 그 도시의 주인이었다. 하갈의 추방은 합법적이었다. 구약 성경 의 관습은 합법적이었다. 이렇게 구약 성격의 관습들이 고고학적 발굴들을 통하여 사실임이 밝혀졌다.” 당시 경제 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국 사회에 이러한 톱뉴스는 복음 주의 교회에 엄청난 회생을 안겨주는 기사였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인물은 울리라고 하는 학자였다. 자유주의적 성경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 던 그 시대에 이러한 기사는 파격적이었다.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가족을 이끌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 남쪽의 가나안으 로 가는 도중, 하란에 들렀다. 사도행전 7장 2-4절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 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 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 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 이 갈데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겼느니라.” 당시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던 시기였다. 즉 사도행전에 나타나 는 스데반의 설교 내용 중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라는 언급과, ‘아 브라함이 갈데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라는 내용에 대한 고고 학적 증거가 증명된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증명을 확증한 인물이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경이었다. 아브라함의 활동연대기를 대략 주전 2100년경으로 본다. 울리는 1922년에서 1934년 동안 갈데아 우르(Ur of the Chaldees)에 서 발굴한 유적들의 연대기 를 추적한 결과 주전 2070년경에서 주전 1960년경 사이를 족장 아브라함의 활동시기로 보았다. 우르는 주전 1960년경 아모리(Amoritee)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우르 는 구 바벨로니아 왕국의 마지막 통치자 엔릴-나딘-아히(Enlil-nadin-ahi, 1157-1155 B. C) 이후 53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신바벨로니아 제국의 창건 자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625-605 B.C)에 의해 재건되었다. 신바벨로니아(Neo-Babylonia)의 나보폴라사르는 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 데, 그의 아버지는 앗시리아의 13대왕 아슈르 에텔 일라니(Assur-etil- ilani, 627-623 B.C)로, 바벨로니아 수비를 담당한 수비대 사령관이었다. 신바벨로니아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기회에 기술하기로 한다.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Nebuchadezzar, 605-562 B.C)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벨로니아 제국을 통치하는데, 이때 유대 공동체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융 합주의 시대, 즉 통합된 세계관(Cosmopolitanism)의 기초를 세운 시대를 연 인물이 바로 느부갓네살이었다. 다시 아브라함 시대로 돌아가 보자. 수메르(Sumer)의 왕 우투헤갈(Utu- Hega l, 2170 B.C)은 우르남무(Ur-Nammu, 2068-2050 B.C)를 우르 지역의 총독 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우르남무는 우투헤갈을 암살하고 우르 제3왕조를 창건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2068년경이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건축되어 진 건물이 지금 남아있는 우르의 지구랏(Ziggurat)이다. 지금의 우르 유적지는 우르 제3왕조의 도읍지로 남북의 길이가 2km 동서 700m인 계란 모양의 도시였다. 이 작은 도시에는 수메르 사회의 핵심인 신전 을 중심으로 왕궁과 귀족과 저택과 묘지들이 들어 차 있었고, 주위에는 벽돌 로 쌓아올린 성벽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성벽의 서문과 북문에는 선착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도시를 휘감아 흐르던 유프라테스강의 물줄기가 약 20km 북 상함에 따라 주위는 모두 황무지로 변하고 말았다. 우르남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슐기(Shulgi, 2050-2002 B.C)왕은 48년 간 통치하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외교 수완이 뛰어나 이웃 국 가와 평화조약을 맺어 평화의 시대를 이끈 군주였다. 그는 예술에도 많은 관 심을 가졌고 많은 예술 작품을 남겼다. 슐기는 절대적 중앙집권제를 실시하 였으며, 정부의 최고 관리자 를 숙갈마크로 호칭하고, 왕의 최고 책사로 임명 하였다. 문명 체제 갖춘 높은 문화 시대 이렇게 우르 제3왕조는 40여 명의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총독들은 일 반 행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통치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정책은 왕의 결정 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다음에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이 시기의 사회와 정치 적 배경을 조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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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4 2009-02-11
495 no image |포토에세이| 농악놀이_전우식 장로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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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3 2009-02-04
494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6)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2_장인수 박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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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6 2009-01-21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31babel.jpg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2 사진_바벨론성터 옛 폐허 장인수 목사(D.Min.Ph.D) "오늘날의 시간 개념, 수메르 시대부터 사용돼" 에집트의 나일강과는 달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은 불규칙한 범람으로 인하여 강물을 관리하기 위해선 둑을 쌓고 수로(水路)를 파야했다. 이러한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지도자가 있어야 했다. 조직적인 농경 생활 이루어져 농경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인력의 동원인 다산(多産)정책으로 인구 증가를 유도하였다. 그리고 곡식을 저장하기 위해서 곡식 창고를 지었으며, 날로 증 가하는 주민들을 위한 질서와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고 정부조직 과 관료제를 도입하였다. 정당한 곡물 분배와, 시장에서 물물교환을 하기 위한 계산과, 기록의 필요성 을 인식하여 수학적 표기법을 만들었다. 이러한 문자형태가 표의 문자, 표음 문자로 발전하였다. 강가에서 채취한 진흙덩어리로 만든 점토판에 쐐기 모양 의 글씨를 적었다. 그들은 하늘에 대하여 종교적인 경외심을 품었고, 천체의 변화를 예민하게 의식하였다. 여기에서 천문학이 발달하였으며 사람들은 진흙을 찍어 지구랏 (Ziggurat)이라는 높은 계단식 탑을 쌓고 그 꼭대기에 신전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6과 10과 60이라는 숫자를 바탕으로 공간과 시간을 측정하였는데, 이 러한 측정법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 원 의 중심각은 360도이고, 하루는 24시간이며, 한 시간은 60분이라고 하는 원 칙은 이미 수메르 시대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은 수 세기에 걸쳐 진로를 바꿈으로써 물과 교역로를 바꾸어 버렸다. 주민들은 결국 도시를 등질 수밖에 없었다. 버려진 도시는 황폐한 언덕이 되었다. 이러한 폐허를 텔(Tel)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Ur)는 지금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기원전 2000여 년 전에는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그곳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하 고 있던 도시였다. 어떤 여행가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나는 우 르와 사랑에 빠졌다. 저녁 황혼이 깃들면 우르는 보여주는 아름다 운 희미한 그림자를 던지며 높이 솟아있는 지구랏, 아름다운 살구색과 장미 색과 푸른색과 남자색으로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는 더 넓은 모래바다를 사랑 하게 되었다"(애거사 크리스티의 자서전에서). 1930년대 추리작가 애거사 크리스티(Christie)는 남편과 이혼 후 슬픔을 극 복하기 위하여 머나먼 우르를 방문하기로 결정한다. 그녀를 초대한 사람은 레너드 울리(Leonard Woolley)와 그의 아내 케스린이었다. 고고학자 울리는 우르에서 영미 합동발굴단을 이끌고 있었다. 최초의 우르 의 발굴은 1894년부터였다. 당시 바스라 주제 영국 부영사였던 J.E 테일러 (Tayler)는 영굴 박물관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 유적을 탐사하여 달라는 의뢰 를 받았다. 그는 이라크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텔에 마음이 끌렸다. 이 텔을 아랍인들 은 텔, 엘, 무카야르 라고 불렀다. 이는 역청의 언덕이란 뜻으로 지구랏을 쌓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벽돌과 벽돌 사이에 역청을 발랐기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이곳에서 설형문자로 새겨져있는 명물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명물 을 통하여 이 고대 도시 가 우르로 확인되었다. 그 후 1922년에 영국박물관 과 미국의 펜실베니아 대학의 합동 발굴단 단장으로 임명된 울리는 열성적으 로 발굴에 착수하였다. 울리 자신은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그 자신도 성직자가 될 생각이었던 만 큼 울리는 우르의 역사를 좀 더 밝혀내고 싶었다. 울리는 우르의 둔덕 측면 을 발굴하는 동안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놀라운 증거들을 발견하게 되었 다. 홍수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노아 홍수시대를 추측하는 지층구조 를 발굴하였던 것이다. 성서시대의 역사 속속 밝혀져 울리는 계속하여 발굴한 결과 우르왕 묘를 발굴하게 되었고, 왕과 왕비의 무 덤 16기를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푸아비(Fuabiy) 왕비의 무덤 안에서는 왕 실 안에서 실내 게임을 즐겼으며, 영원히 유물로 발굴될 조개껍질로 조각된 꽃과 도미노 무늬로 음각되어 있는 놀이 기구들도 발굴되었다.
493 no image |포토에세이| 고향(故鄕)_전우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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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1 2009-01-21
492 no image |포토에세이| 순백의 세계_전우식 장로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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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2 2009-01-14
491 no image |포토에세이| 겨울에 핀 설화(雪畵)_전우식 장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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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8 2009-01-06
490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5>|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1_장인수 박사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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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6 2009-01-06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29-uru.jpg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1 사진_우르남무 시대의 인장 장인수 박사(D. Min. Ph. D) "문명의 발원지로서 집합문화의 틀 잡혀" 고대 수메르인들(Sumerian)은 메소포타미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티 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황량한 벌판과 페르시아만 일대의 갈대밭 에 주거를 정하고 살았다. 이러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이 인류 역사에 새롭게 조명을 받게된 시기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20세기들어 고대 문명 조명돼 1920년부터 약 20년간 이 지역에서 대대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오 늘날 이라크(Iraq)공화국의 땅이다. 이라크는 북위 30도에서 35도 사이에 있 으며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작열하는 메마른 사막이 끝없이 펼쳐 있는 땅이 다. 현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지독히도 무더운 도시이다. 보통 온도계는 r 섭씨 50도에서 영하 20도까지 표시되지만 이런 온도계는 이곳에서 사용할 수 없다. 섭씨 70도까지 나타낼 수 있는 온도계일지라도 여름에 내리쬐는 직 사광선에 그냥 놓아두었을 때에는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수은주가 끝까지 올라가 버리는 지역이다. 이 온도계를 그늘에 옮겨놓더라고 45도에서 50도 사이를 가리킨다. 집안에 둔다면 30도 전후를 가리키지만 필자가 바그다드에 도착하였던 7월에는 습기 찬 더운 기온과 더불어 밤인데도 40도 이상을 나타내는 무더운 날씨였다. 이라크의 우기는 겨울이 시작되는 1월부터 봄이 시작되는 3월까지이며, 여름 철인 7월부터 8월 사이에는 전혀 비가 오지 않는다. 이라크의 연 강수량은 140mm정도이다. 뜨거운 태양열기로 인하여 수분을 증발시켜 버리기 때문에 토양은 해마다 메말라간다. 이러한 기후조건으로 인하여 호수와 땅 속의 염 분 농도는 점점 짙어가고 있다. 인류의 문화는 성경에 언급되어진 대로 생존 하기 위한 직업의 선택이 두 가지의 형태로 나뉘게 되었음을 본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 하는 자였더라"(창 4:2) 라는 기 록대로 농경문화와 유목문화로 나뉘어져 역 사를 이어왔다. 유목문화는 수렵 및 열매채취로 시작하여 야생동물을 길들이 고 작물을 재배하는 시대를 거치게 되는데 이 시기가 유목생활의 생존방법이 었으며, 농경생활은 야생보리와 밀을 경작하며, 정착된 주거지로써 거푸집에 서 흙벽돌집으로 발전하였고, 6~7개의 방을 만들어 집단 가족제도를 형성하 며, 다산(多産) 정책으로 노동력을 얻었고, 이러한 거주 문화가 국가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촌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인구 또한 급격하 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한 것은 아니었 고, 유목과 농업을 겸한 반 유목민들로 섞여 살았다. 제법 넓은 뜰 안에서 기온이 내려가는 저녁이 되면 맥주를 만들어 마시고 화덕에서 갓 구운 빵으 로 온 가족들이 나누어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가족애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이러한 사회형태를 핫수라 문화시대라고 분류한 다. 가축을 가두어 사육하기도 하고 방목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토목사업이 비 교적 발달하여 도로에 돌을 깔기도 하였으며 동제품(銅製品)이 석기 와 같이 병행하여 사용되면서 청동기 문화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겨울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하류지방은 늪지대가 생겼으며, 봄이 되면 자그 로스 산맥에서 발원한 눈 녹은 물은 퇴적물을 운반하여 배수만 잘해 주면 비 옥한 토지로 변하였고, 밀과 보리농사로 많은 수확을 거두어 들였다. 수메르 인들은 이 지역에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티그리스강은 이디글라, 유프라테스강을 부라눈 이라고 불렀다. 수메르인들은 이러한 말들을 그대로 점토판(Tablet)에 사용하였다. 수메르인 들의 도시인 에리두(Eridu), 우르(Ur), 라가쉬(Lagash), 니푸르(Nippur), 키 시(Kish)등의 도시에는 농업, 목동, 금속 세공사, 직공, 목수와 같은 다양 한 직업을 가진 장인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문명의 발원지로써 집합문화의 틀 을 잡아가고 있었다.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수리시설을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 라, 가족들이 번성함으로 인하여 경작지를 넓혀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인구 증가와 더불어 공동체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원시 종교의 기 원을 가져오는 기초가 되었다. 에리두 유적지에서 발견된 신전 폐허 에서 흙벽돌로 건축한 흔적을 발견하였 는데 길이가 45m의 직사각형의 건물로써 단출한 제단과 여럿이 사용하는 탁 자가 놓여있었다. 그러나 마을이 도시로 발전하였고 아브라함 시대(2125- 1950 B.C)에는 거대한 지구랏으로 발전하였다. 아브라함 시대 지구랏 발전해 제사를 통하여 공동체의 결속이 강하여졌고 인간윤리의식이 법제화되었으며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악기에 맞추어 불려지게 되고 기도문이 점토판에 기록 되었다. 이렇게 발전된 정치 형태는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낳았으며 아브 라함 시대에는 우르남무(Ur Nammu)가 통치하는 시대로 이어졌다.
489 no image |포토에세이| 이 한 장의 사진_전우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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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3 2008-12-17
Selected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4>|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포타미아3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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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2 2008-12-17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28uru.jpg성경시대 역사탐방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3 사진 | 우르의 지구랏 “커다란 충적 침전 층은 노아 홍수 규모 보여줘” 노아에게는 대홍수 이전에 낳은 세 아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셈과 함 과 야벳이다. 이들의 계보는 창세기 10:1-32에 기록되어 있다. 홍수 이후 이 들의 후손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 전 세계로 흩어졌다. 노아홍수 관련된 설화 남아 있어 성경 기록 외의 대홍수의 이야기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토판에도 기록되어 있 다. 바로 구약성경 창세기의 6장에서 9장에 등장하는 노아홍수의 이야기를 연상하는 내용이다. 아카드어로 보존된 이 토판문서는 1872년 30대 초반의 대영박물관의 직원이 었던 조지 스미스(George Smith, 1840-1876)가 발견한 것으로, 그는 박물관 수장고에서 무더기로 쌓여있던 토판문서 중의 한 부분을 읽어가는 동안 길가 메쉬 서사시(Gilgamish)의 내용을 보고 감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서사시의 주인공은 우트나피쉬팀(Faroway Utnapishtim)이다. 그는 노아 격에 해당하는 인물로 유일하게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강들의 입구에 살고 있었다. 11번째 석판에는 그가 방주를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던 일, 홍수를 몰고 온 큰 폭풍, 7일 후에 방주가 니시르 산(Mount Nisir)에 정착한 일, 처음에는 비둘기, 다음에는 참새, 마지막에는 까마귀 를 내보내었는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우트나피쉬팀이 방주를 떠났을 때 “신들이 파리 떼처럼 제물 주위에 몰려들 었다. 그리고 엔릴(Anril)은 방주 위에서 우트나피쉬팀에게 영생을 주었다” 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토판문서는 니느웨에 위치한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도서관에서 출 토된 유물이었다. ‘우트나피쉬팀’이라는 말은 ‘생명의 날’(Day of Life) 이란 뜻이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당시에 홍수설화가 널리 퍼 져 있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기록된 성경만이 그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여진 것이라 할 것이다(창 8장). 메소포타 미아 평야에서는 커다란 충적침전층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고고학 자 랑돈(Rang Dong)은 그것을 노아시대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셈의 자손들이 정착한 전 지역은 북쪽의 시리아에서부터 남쪽의 아라비아까 지, 그리고 동쪽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을 따라 메소포타 미아(Mesopotamia)까지 이어졌다. 이곳으로 뻗어간 셈의 후손들은 창세기 (10:21-31)에 기록되어 있다. 니므롯의 나라(창10:9-11)는 시날(바빌로니아)에서 시작하여 그곳 바벨과(바 벨론) 에렉(우르크)과 아카드를 통치하였다. 그는 또한 앗시리아의 레센과 니느웨와 칼라를 건설하였으며, 바벨론 서남쪽에 위치한 님루드와 같은 몇 몇 지역들은 이름의 형적을 지니고 있다. 성경의 니므롯을 흔히 아카드 제국을 세운 사르곤 1세(Sargon 1)와 비교하 는 학자도 있다. 성경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은 역사적 서술로 보아야 한다 (창 11:1-9). 그것은 유별나게 큰 지구랏(Ziggurat)을 건축하였다는 기사이 다. 앗시리아의 지구라투(Zigguratu:산정상)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지구랏 은 에렉(우루크)에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1장 4절에 언급되어 있는 바벨탑의 규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이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바벨론 유수가 끝난 다음 100 여 년이 흘렀을 때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서 바벨탑을 목격한 내용을 그 의 저서 역사(Historia)에 이렇게 기록하여 놓고 있다. “성역 중간에는 가로 세로 모두 1스타디온(90m)정도의 견고한 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 위에 제2의 탑이 있고 다시 그 위에 제3의 탑, 이런 식으로 8층 까지 이어진다. 위로 오를수록 탑 바깥의 나선형 통로가 나 있다. 계단을 반 쯤 오르면 층계 휴식처가 있고 거기에는 잠시 쉬는 의자가 많이 있다. 정상 에 오르려는 자는 거기서 한숨을 돌린 다음 탑 바깥으로 이어진 나선형의 통 로를 통하여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정상에는 커다란 신전이 있다. 그 정상 안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침상이 있고 그 곁에는 황금탁자가 놓여있 다. 신상(神像) 따위는 없다. 밤이 되면 지역 원주민 여인 한 명을 제외하고 는 아무도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서 그때 당시만 하여도 바벨탑의 폐허 흔적은 분명히 존재하였다. 고고학 발굴의 해설서 안내판을 기록한 독일인 고고학자 세람 (C. W . Ceram)은 바벨탑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역사적 사실로 판명된 바벨탑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32m 높이의 첫 번째 테라스를 향해 거대한 계단 을 오를 때의 광경은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그 사이에서는 두 제사장의 행렬 이 중간 테라스를 통하여 세 번째 테라스를 오르고, 거기서 비밀 통로를 통 하여 탑의 정상 마르둑의 성역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487 no image |포토에세이| 숙성시키는 메주_전우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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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9 2008-12-11
486 no image |포토에세이| 겨울을 알리는 마이산_전우식 장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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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9 2008-12-03
485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3>|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포타미아 2_장인수 박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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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32 2008-12-03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25babel.jpg성경시대 역사탐방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2 “바벨론(Bab-ili)은 ‘신(神)의 문(門)’에서 유래한 말” 장인수 박사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사진 | 바벨론 성 복원 현장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는 앗시리아의 군사령관이 었다. 그에 의해 기원전 626년 신 바벨론 제국을 세운다. 그리고 페르시아 북쪽 메디아, 즉 베데제국의 키악사레스(Cyaxares)와 연합하여 앗수르 제국 을 멸망시킨다. 아브라함은 우르 제3왕조 시대 인물 느부갓네살은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였으며 포로민으로 취급하 지 않은 정책으로 유대인들은 새로운 신앙의 유대교로 발전하며 책의 백성 (People of the Torah)으로서의 별명을 갖는 민족 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유 대인들의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을 지키고 바벨론 풍 습과 종교에 동화되 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렘 24:4-7; 27:8-11). 이들에게는 여러 성읍들에서 공동생활을 위한 거주지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나라는 멸망해도 그 역사는 이어져 가고 있었다. 창세기 12장에 서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 시대의 연대기는 우르 제3왕조 시대로(2112-2004 BC) 보고 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데아 우르는 우르의 멸망 전후의 연대기로 본다. 그의 삶의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족장 시대(The Patriarchs in Time)는 일치되거 나 장기간에 걸친 연대표가 정확하지는 않는다.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은 족 장시대가 215년 간 지속된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창 12:4; 21:5; 25:26; 47:9). 오늘날 이라크(Iraq)의 국가명칭은 이라크 공화국(Al-Jumhuriyah Al- Iraqiyah)이며, 이라크라는 명칭은 고원 산악 지대에 살던 이란 사람들이 메 소포타미아 지역이 지대도 낮고 땅도 평원으로 둘러싸인 것을 보고 저 아래 쪽 평지의 땅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음은 ‘이락’ 또는 ‘에락’이다. 이라크 공화국은 동쪽으로는 이란, 북으로는 터키, 서북쪽에 시리아, 서쪽 에 요르단, 남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남서쪽에 쿠웨이트 등 모두 6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 나라의 지리적 상황은 황무지와 사막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지리적 특성으로 보면 동북부 산악지 대, 중부 황무지 지역, 서부 및 서남부 지역의 시리아 사막, 그밖에 호수지 대가 있다. 이라크는 수도인 바그다드를 비롯하여 다음과 같이 주(州)에 해당하는 19개 의 마파다(Mhafadha)가 있다. 종족별 분포도는 에르빌, 술래마니아, 도훅의 3개주 주민 그의 전부와 모술을 중심으로 한 니네베주와 키르쿠크를 중심으 로 한 타밈주는 60% 이상이 쿠르드인이며, 그 외에는 아랍인이 다수를 차지 하고 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까지 차를 타고 쉬지 않고 가면 약 20시간 이상 걸리는 지역이다. 바그다드로 향한 넓고 곧게 뻗은 길 은 키 큰 야자수와 그 푸른 잎사귀들로 뒤덮여져 있어 순례자의 마음을 상쾌 하게 한다. AD 8세기 중엽의 건설된 수도 바그다드는 1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 다. 그러나 현재 바그다드 도시는 13세기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도시 전체 가 폐허 가 되는 아픔을 간직한 도시이다.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버려진 뒤 영국의 지배를 받던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도시 모양으로 건설되었 다. 바그다드 시내를 티그리스 강은 굽은 강물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다. 바그다드 최고의 상가의 이름은 라시드(Rashid)이며, 이 명칭은 8세기 무렵 바그다드를 이슬람 공동체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던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 시대의 인물이었던 왕의 이름이다. 그는 그 터전 위에 이슬람 문 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군주였다. 이 시대에 아라비아 지역의 이야기 모음집인 ‘아라비안 나이트’가 쓰였으 며 의학, 천문학, 수학, 문학 등 당시 최고 수준의 문예 부흥을 이루었던 시 대였다. 이런 바그다드가 지금은 계속되는 테러와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으 로 입국의 제한을 받는 국가가 되어 있다. 이제부터 그 옛날 고대 바벨론(Old Babylon) 시대 역사의 흔적을 추적하여 보기로 한다.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도시 옛 바벨론이란 지명은 본래 밥 일 리(Bab-ili), 즉 신(神)의 문(門)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것은 이 도시를 둘러 싼 성의 여러 성문들이 각각 신들의 이름으로 인한 오랜 전승(Tradit ion)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 바벨론은 기원전 2300년 전 초기 아카드 시대만 하여도 여러 수메르 도시 국 가로부터 다소 떨어진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후 우르(Ur) 제3왕조 말기에 셈인들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규모가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셈족과 더불어 대규모 도시 형성돼 이 우르 3왕조는 우르남무(Ur-nammu)의 통치시절을 유의하여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야말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시 기이기 때문이다.
484 no image |포토에세이| 북한산 백운대_전우식 장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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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5 2008-11-20
483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2)|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포타미아1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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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4 2008-11-12
http://www.rpress.or.k r/files/culture/523-8.jpg아브라함의 고향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1 장인수 박사_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사진 | 고대 갈대아 우르의 주거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살았던 지역 찾아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란 이름은 초기 헬라 역사가(歷史家)들에 의해 붙 여진 이름으로서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 강 사이에 있는 땅”을 의미한 다. 메소포타미아를 상징하는 국가는 이라크이다. 그러나 그 어느 국가도 국경선이 티그리스(Tigris)강과 유프라테스 (Euphrates)강 전체를 수용하지 않는다. 고대 이 지역에 살았던 거주민들은 전체를 포괄하는 이름을 갖지 못하였으며, 수메르(Sumer), 아카드(Akkad), 앗수르(Assur), 바벨론(Babylon), 갈데아(Chaldea) 등등의 이름들은 전체 통 칭으로 부르지 않는 일부분에 불과하였다. 논경 문화의 꽃 피운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은 아르메니아에 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고 있 다. 두 강 중에서 티그리스 강은 더 짧고 큰 경사를 이루고 있다. 더 긴 유 브라데스 강은 서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의 지역 가까이 까지 곡선을 이루며 흐르고 있다. 이 두 강은 늪지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에서 하나로 모 여 페르시아 만(일명 걸프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메소포타미아 중남부에 있는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 강 사이에 있는 대평원 의 기후는 여름에는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 이지만 겨울에는 온도가 가끔은 영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 이전까지 기후의 변화가 없 었던 것으로 보이며 강을 끼고 고대의 문명이 대홍수 이후부터 발달하였을 것이다. 남쪽 평원 지대는 겨우 연평균 250mm 정도의 비가 오며 이것도 겨울에만 비 를 내린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은 4월과 6월 사이에 강둑이 범람하는 데 이렇게 적은 강우량으로 인하여 초기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수로(水路)를 타고 저수지와 제방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농경문화의 꽃 을 피우게 된다. 기원전 4세기 그리이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orodotus)는 이 땅의 비옥함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 하였다.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나라 중 이 나라는 보리 가 월등하게 최고의 상품인데 이곳의 나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무 화과나무,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 등도 있었지만 보리 수확량보다는 부족하 였다. 보리는 최고 200배에서 최고 300배를 생산하였고, 밀과 보리의 잎사귀 는 족히 네 손가락 넓이에 달하였다.” 티그리스와 쿠르디스탄(Kurdistan) 산맥 사이에 놓여 있는 북동쪽의 구릉지 대는 앗수르(Assur) 왕국의 심장이었다. 그 기온은 남쪽 지역보다 온화하였 으며 충분한 강우량은(500-625mm) 메마른 땅에 넉넉한 농사를 지을 수 있었 다. 그러나 북쪽지형은 농사가 주업(主業)이 될 정도로 땅이 넉넉하지 못하 였다. 식량수입이 절실한 지형적 구조 속에서 앗수르는 강력한 군사력을 소 유할 수밖에 없었다. 남쪽평야와 북동쪽의 구릉지역 외에도 발리크(Balikh)와 카불(Khaju)강 주 변 북서 메소포타미아의 대초원 지대는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의 많은 고대 언덕들은 오랫동안 비옥하였고,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지역에 있는 남방평야는 많은 얕은 호수와 좁은 수로가 있는 늪지대이며 서쪽은 사막이 펼쳐지고, 동 쪽으로는 자그로스(Zagros)산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살았고(창 12:1-2; 행 7:2-3) 유대공동 체가 유민(Free Men)생활을 하였던 지역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2003년 7월 필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 이라크를 답사하는 기 회를 가지게 되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였지만 족장 아브라함의 고향이기도 하였던 지역이며 후일 남왕국 유다가 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Nebuchadrezzar 605-562 BC) 대왕에 의해 유민(Free Men)간 지역이기도 하 다. 파괴되어버린 성전을 잃어버린 그들은 이제 새로운 신앙과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다. 바벨론 포로의 아픔을 간직하기도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 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 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 밤에 있어 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 137:1-4)라는 노래를 불렀다.
482 no image |포토에세이| 풍성한 가을 낟가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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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9 200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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