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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8 (11:44:42)

<생각하는 동화>

억새풀

 

< 남 은 록 시인 동화작가 >  

 


757-12_2.jpg 

 

 

   언덕 위에 억새풀이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에 반짝이는 억새풀의 자태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가는 허리에 길고 멋진 풀잎이 바스락거리자 모두들 아, 가을이 왔구나 하며 억새풀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특히 그 은빛 머릿결은 참으로 윤기 나고 매혹적이어서 잠시 땀을 닦으려 길가에 멈춘 나그네들도 감탄을 내뱉었다.


   서늘한 산그늘 속에서 억새풀은 더욱 짙은 은빛을 뿜어냈다. 억새풀은 그 머릿결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냈다.

가을바람도 그런 억새풀이 마음에 들었다.

가을바람은 억새풀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때? 내가 머릿결 멋지게 빗어 줄까?”

정말? 그럼 너무 좋겠어. 잘 부탁할게.”

억새풀은 시원시원한 가을바람이 너무나 고마웠다.

어느 쪽으로 빗어 줄까? 동쪽? 서쪽? 아님 북쪽?”

미안하지만 내가 원하는 쪽으로 빗어 줄 수 있지? 우선은 남쪽.”

왜 남쪽이야?”

남쪽에 사는 내 친구들이 그리워서 그래.”

알았어, 잘 빗어 줄게.”


   가을바람은 억새풀이 원하는 남쪽으로 한참 동안 머리를 빗어 주었다. 억새풀이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 애틋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가을바람은 어느덧 억새풀의 친구가 되어 사랑스럽게 그 머릿결을 빗어 주고 있었다.


   억새풀은 그리움이 벅차올라 무어라 혼자 서걱서걱 노래를 불렀다. 가을바람은 그 아름다운 노래를 실어 멀리 남쪽으로 보내 주었다.

다음날에도 가을바람은 억새풀 곁에 다가왔다.


오늘도 머리 빗어 줄까?”

그래. 고마워, 오늘은 서쪽으로 빗어 줘.”

?”

노을이 지는 쪽이 예뻐서 그래.”


   가을바람은 억새풀이 행복해 하는 모습이 좋아 열심히 머리를 빗어 주었다. 노을이 물들어 올 때 억새풀의 머릿결은 붉은 색을 띠며 남은 햇빛을 머금고 있었다. 억새풀은 또 노래를 불렀다. 가을바람은 그 노래를 멀리 서쪽으로 보내 주었다. 새들도 나무들도 억새풀의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다음날에도 가을바람은 억새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동쪽으로 빗어 줘. 난 해 뜨는 동쪽도 너무 좋아.”


   억새풀은 이제 당연하다는 듯이 가을바람에게 머리를 빗어 달라고 했다. 가을바람은 억새풀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머리를 빗어 주었다. 햇빛 가득한 얼굴로 행복해 하는 억새풀을 보며 힘든 줄도 몰랐다.

 

   날마다 가을바람은 억새풀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성껏 머리를 빗어 주며 곁을 지켜 주었다. 날이 갈수록 억새풀의 모습은 화려해지고 눈부신 은발을 찰랑이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가을바람이 억새풀의 머리 손질을 얼마나 애써 아름답게 해 주고 있는지는 모두들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억새풀 곁에 다가와 앉았다.


야아! 은발이 정말 아름답구나.”

아저씨도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호호.”

그럼. 네 모습을 보니 피곤이 싹 달아나는구나.”

먼 길을 가시나 봐요?”

, 고향을 찾아 가는 중이야. 고향 땅에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단다.”

나그네는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잘 있어. 나는 어서 가봐야 해. 그런데 남쪽으로 머리를 빗으면 더 아름다울 텐데. 남쪽은 내 고향이 있는 곳이거든?”

그래요? 제 친구들도 거기 사는데... 저도 사실 남쪽을 좋아해요.”


   억새풀은 가을바람에게 빨리 남쪽으로 머리를 빗어 달라고 했다. 가을바람은 열심히 머리 빗질을 해 주었다.

나그네가 떠난 뒤 새들이 재재거리며 날아왔다.


! 은발이 대단한데?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머릿결이 있지?”

억새풀은 새들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너희들도 역시 아름다운 건 알아보는구나?”


   억새풀은 우쭐해졌다.

새들이 물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니?”

비결은 무슨... 타고나야 되는 거지.”

억새풀은 머릿결을 찰랑댔다. 그 눈부심에 새들은 움찔 놀랐다.

! 부럽다. 이 주변에서는 네가 제일 멋진 거 같아. 그런데 기왕이면 동쪽으로 빗은 머릿결이 예쁘던데. 우린 아침 해 뜨는 쪽이 좋아.”

그래? 사실은 나도 동쪽이 좋긴 해.”


   새들의 말을 듣고는 억새풀은 가을바람을 재촉하여 얼른 동쪽으로 빗어 달라고 했다. 가을바람은 묵묵히 그렇게 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건너편의 나무들이 억새풀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노을이 지는 서쪽으로 빗긴 머리가 가장 아름답더라고 했다. 억새풀은 가을바람에게 이번에는 서쪽으로 빗어 달라고 재촉했다. 가을바람은 서둘러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마자 흰 구름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 했다.


내가 공중에서 내려다봐서 정확히 말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넌 북극성이 있는 북쪽으로 머리를 빗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걸 모르는구나?”


   흰 구름의 그 말을 듣고는 가을바람은 부랴부랴 다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렸다. 억새풀이 졸라대기 전에 먼저 재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억새풀은 가을바람의 친절하고 민첩한 행동에 더욱 만족하며 마음이 흐뭇했다.


   그래서 억새풀은 가을바람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 하루 종일 동서남북으로 바꿔 가며 머리를 빗어 달라는 거였다. 억새풀은 모두의 칭찬이 듣고 싶어서 가을바람에게 시시각각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빗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더구나 쉬지 않고 계속 빗어 줘야 한다고까지 했다.


   가을바람은 억새풀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이 힘들고 지치더라도 억새풀만 행복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더욱더 힘을 내어 쉼 없이 잠도 자지 않고 시시각각 억새풀이 원하는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빗어 주었다.


757-12_1.jpg


   억새풀의 아름다운 모습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억새풀의 찬란한 모습에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억새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새들은 여전히 날아가다 멈추어 억새풀을 구경하였다. 흰 구름도 억새풀의 빛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한참이나 머물렀다가 흘러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을바람은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쉴 틈 없이 일을 했기에 힘이 많이 빠졌다. 어느 날 가을바람은 억새풀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 너무 지친 거 같아. 조금 쉬었다 하면 안 될까?”

무슨 소리야? 내 머릿결이 이렇게 눈부신데 지금 쉬면 어떡해?”

너무 자주 방향이 바뀌니까 힘이 부치는 걸?”

!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 너 이제 내가 싫어진 거구나?”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증명해 봐. 더 열심히 빗어 달라구.”


   가을바람은 억새풀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할 틈도 없이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억새풀을 만난 지 3개월이 넘었을 때 가을바람은 마침내 힘이 다 빠져나갔다. 그래서 숨을 헐떡이며 다시 억새풀에게 하소연했다.

 

헉헉,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머리 빗질 그만하자.”

그 말 진심이야?”

사실 요즘 내 몸이 이상해 도저히 힘을 낼 수 없어.”

그럼, 조금만 쉬고 다시 해.”

정말 미안해. 하고 싶어도 더 이상은 할 힘이 없어.”

싫어! 이제 와서 멈춘다고?”


   억새풀은 가을바람의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듣지 않고 계속 머리를 빗어 줘야 한다고 징징대며 재촉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바람은 끝내 쓰러져 땅에 눕고 말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억새풀은 하늘을 향해 한껏 머리를 들고 자신을 뽐내고만 있었다. 억새풀의 발꿈치 옆에서 가을바람은 식어가는 몸을 가늘게 떨더니 형체도 없이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억새풀의 머릿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제야 억새풀은 자기 곁을 지켜 주던 가을바람이 사라진 사실을 알았다.


   다급해진 억새풀은 가을바람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수소문 해 봤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가을바람이 없으니 억새풀은 종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가을바람에 찰랑이는 억새풀의 찬란했던 아름다움을 누구도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새들은 억새풀 주변을 떠났다. 나무들도 더 이상 억새풀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흰 구름도 그저 제 갈 길로 흘러가 버렸다. 나그네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마침내 강하고 찬 다른 바람이 다가왔다. 억새풀의 몸은 말라 얼어붙고 은발도 한 올 두 올 빠지기 시작하며 초라해지고 말았다. 얼음이 얼고 잿빛 눈구름이 몰려오고 햇빛은 자주 얼굴을 감추었다. 온 몸을 떨게 하는 추운 날이 계속되었다.


   힘을 잃은 억새풀은 가을바람이 너무도 그리웠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그토록 그리워 한 적은 없었다. 남쪽의 친구들도 해 뜨는 동쪽도 노을 지는 서쪽도 북극성이 빛나는 북쪽도 그립지 않았다. 그 순간은 오로지 자신만을 다정하게 사랑해 주던 가을바람이 너무도 그리웠다. 억새풀은 소리 없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은 조용한 노래가 되어 텅 빈 들판과 얼어붙은 냇물을 따라 퍼져 나갔다. 쓸쓸한 언덕 위에 몇 올 남지 않은 억새풀의 은발이 내리는 눈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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