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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01 |7월의 시| 외로운 밤에는 별이 많아지는 까닭을 알겠다_최해혁 시인 파일
편집부
1459 2017-07-05
600 no image |수필| 감사와 행복_장인선 수필가
편집부
1320 2017-07-05
< 수 필 > 감사와 행복 < 장인선 수필가 >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돌을 던진다고 해도 나는 자신 있게 그리고 분명히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다른 병에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다가 상대방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면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래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 사실 내가 처음 아팠을 때는 벌써 사십 년 전이다. 아마 그래서 내가 그 병으로 아픈 것에 대해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혈압이나 당뇨같이 꾸준히 전문적인 의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면 잘 살아 갈 수 있다. 문제는 환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하는 사실을 잊고 산다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 정신과 환우들이 오히려 세상의 편견을 만드는 원인 제공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봐서 기분이 나쁘다고만 하지 말고 우리는 더욱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려고 노력하고 또 많은 면에서 오해받지 않으려고 한다면 시간이 지나 우리에 대한 편견도 조금씩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살면서 누구를 도울 만큼 착하지는 못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 경우는 스무 살에 아팠고 약 두 달 정도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때 나는 내가 왜 하필 이런 병에 걸렸냐고 내가 믿는 하나님께 따졌다. 치료 후가 더 고통스럽고 힘이 들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때 분명히 찬송가 “주 안에 있는 나에게”가 내 귀에 울려 퍼지고 주님의 위로의 음성을 들었다. 그 후 나는 나름 혼자 열심히 성경 공부도 하고 의사 선생님의 치료도 열심히 받았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소유가 풍성하든 않든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 나의 건강과 형편을 볼 때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다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나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미련을 버리고 얼른 포기한다는 점이다. 유행가에 “포기 하지 마!”라는 제목의 노래가 인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능력이 있는데도 노력을 안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한계가 분명한 나 같은 사람은 계속해서 포기를 안 하고 능력이 없는 그 일에 미련을 갖고 있으면 자신도 불행하고 주위 사람들까지 힘이 들게 한다. 얼마 전에 나도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꿈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자립할 능력이 없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나도 편하며 상대방에게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자립을 고집하며 장애인 시설이나 아주 적은 장애인을 위한 아파트로 간다면 나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고 같이 사는 언니를 아주 인격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또 한 가지 행복한 것은 언니와 내가 많이 다르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점이다. 언니는 아주 경우가 바르고 차가운 지식인이다. 이 세상에 100%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냥 싫건 좋건 간에 서로 맞춰 가며 살아야 한다.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이 가족이고 그것이 사람이 사는 모습이다. 나도 물론 힘이 들지만 언니도 답답한 나를 섬기며 사는 것이 많이 힘들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주 나만 피해자라고 우기는 것 같다. 언니가 있어서 항상 보호해 주고 좋은 집에서 참으로 편하게 산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무슨 일만 생기면 항상 “나는 약자니까.”하고 내가 먼저 서운해 하는 것을 합리화시킨다. 정말 나쁘고 못된 생각이다. 내 자신이 예순 살의 어른으로서 대접만 받으려고 하지 않고 조금은 더 성숙한 어른이 되면 좋겠다. 항상 언니는 주님이 맺어 준 끊을 수 없는 자매이고 천륜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세상에 아주 “완벽한 동그라미”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가 부족한 동그라미라고 한다. 그래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것이 가족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나보다 멋진 언니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나는 말 할 것도 없다. 서로 살면서 맞춰 가는 것이 좋고 상대방이 변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맞춰 가는 어른다운 어른으로 변화하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행복이다. * 장인선 작가는 몸이 연약하고 불편함에도 믿음으로 살면서 많은 수필을 발표하여 주님의 은혜와 감동을 나누고 있다. 저서로는·주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1990. 12)·이 시간이 있음으로(1992. 11)·만일 한 가지 소원만 말하라면(1994. 6)·아픈 마음의 노래(1996. 5)·작은 사랑의 노래(2001. 2)·허물(2003. 3)·가난한 여자의 행복(2007. 12)·어른 아이 (2016. 10)
599 |한국의 명시 감상-6월의 시| 나비의 소녀_황금찬 시인 파일
편집부
1870 2017-06-21
598 |등불이 있는 책상| 존 플라벨의 ‘섭리의 신비’ 파일
편집부
1518 2017-06-21
<등불이 있는 책상> 존 플라벨의 ‘섭리의 신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새롭거나 큰 어려움들이 생겨날 때에도 하나님을 불신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을 위하여 그토록 많은 일들을 행해 오신 하나님이 지금 와서 느닷없이 여러분을 대적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1).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저지른 죄악들, 즉 여러분의 불신앙과 배신입니다.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사랑이 무수히 베풀어진 것이 확인되는 경우에 여러분 속에 있는 불신앙이 고쳐질 수 있다면 이미 그런 은혜들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왔기 때문에, 여러분의 불신앙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것과 비슷한 환난들 아래에서 하나님이 주신 예기치 않은 은혜로 인해서 번번이 여러분의 불신이 허물어진 것이 확인되는 경우에 여러분 속에 있는 불신이 고쳐질 수 있다면, 단지 여러분이 지금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기만 하십시오. 틀림없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시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불평하였다가 나중에 여러분에게 베풀어진 섭리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부끄러워하며 불평한 것을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잖습니까? 그런데도 또다시 그런 배신과 불신앙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고 조용히 기다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은 일은 결코 없었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여러분이 이제는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헛되이 찾지만 않는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았는데도, 그것이 헛수고가 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존 플라벨 John Flavel, 섭리의 신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7) 중에서 존 플라벨(1627-1691)은 비국교도 청교도의 지도자였기에 자주 위험에 처하여 목회지를 다트머스에서 슬렙튼, 런던 등지로 옮겨가며 사역하였고 박해를 피해 가정집과 숲에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다트머스에서 생애 마지막까지 목회에 힘썼다. 1678년에 출간된 『섭리의 신비』는 시편 57:2 강해집이다. 플라벨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을 높임과 섭리 교리에 대한 실천적 목회적 강조에 있다. 기타 저서로는 『은혜의 방식』 등 여러 권과 1820년 출간된 『플라벨 전집』이 있다. * 여러분이 읽은 고전과 동시대의 명저나 강연들 중에서 나누고 싶은 부분을 짧은 소개 글과 함께 보내 주십시오. (A4 1장) - 편집자 주
597 |포토에세이| 철조망의 눈물 _조대현 파일
편집부
1251 2017-06-21
596 |생각하는 동화| 틈_남은록 시인 파일
편집부
1648 2017-06-02
<생각하는 동화> 틈 < 남 은 록 시인 / 동화작가 > 오래된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있었다. 그런데 너무 굽이진 산길이라 자동차 이용객들이 항상 불평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근처에 터널을 뚫어 평탄하고 수월한 길을 만들었다. 그 후부터 옛길에는 인적이 끊겼다. 모두들 씽씽 새길로만 다녔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는 사이에 옛길은 많이 외로웠다. 폭설이 내린 겨울이 되자 꼼짝없이 혼자 눈을 덮고 봄을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골짜기에 눈이 녹았다. 옛길에게도 봄바람이 찾아왔다. 봄바람은 옛길의 얼굴을 살랑살랑 어루만져 주었다. 봄바람은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흙가루를 데려와 소개했다. “이 친구는 저쪽 새길을 뚫으면서 생긴 흙가루라네.” “흙?” “그래. 인적 드문 여기에 살고 싶대.” 옛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흙가루는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살 곳을 조금만 내주시면 안 될까요?” 옛길은 난처해졌다. “너희들은 우리 아스팔트 도로를 싫어하잖니? 우리 때문에 집을 잃거나 밑에 묻혀 버리잖아?” 봄바람이 끼어들어 말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삭막하다고들 하지만 자넨 아니야.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길이라고 칭찬도 많이 받았잖아?” “다 옛날 얘기지.” 옛길의 얼굴색이 잠시 어두워졌다. 봄바람이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만은 흙가루를 받아 줄 줄 알았는데.” 초조한 흙가루가 다시 부탁했다. “옛길님. 제발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전 여기가 무척 좋아요.” 잠시 생각하던 옛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음, 네가 날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뭐 나도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다만...” “정말요? 진심으로 감사 드려요.” 흙가루는 풀풀거리며 기뻐했다. “그런데 아스팔트 도로는 네가 살기엔 힘들 텐데? 비가 오면 쉽게 쓸려가 버릴지도 몰라.” 옛길은 여기저기를 살폈다. “가만 있자. 아무리 봐도 안전한 곳은 이 작은 틈밖에는 없는데 어쩌지?” 옛길은 한복판에 있는 어떤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틈은 사실 나의 상처란다. 금이 가고 갈라져 부서진 곳이야.” “아! 그렇다면 옛길님의 상처를 제게 내어 주시는 거예요? 감사해요.” 흙가루는 밝은 얼굴로 옛길의 상처를 덮으며 새처럼 내려앉았다. “내 상처가 네가 살아갈 작은 틈이 된다면 더없는 보람이지 뭐.” “귀한 틈을 내주셔서 고마워요. 저도 옛길님의 상처를 최선을 다해 어루만져 드릴게요.” 봄바람은 참 잘 됐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흙가루는 옛길의 틈 속에서 비를 맞으며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의 상처를 꽉 채워 주었다. 옛길도 그런 흙가루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사진 이종섭 >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봄바람이 다시 날아왔다. “그 동안 잘들 지냈지?” 옛길과 흙가루는 누가 봐도 한 몸으로 보였다. 봄바람은 그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자, 깜짝 놀랄만한 손님을 또 모시고 왔지.” 그때 꽃씨가 조그마한 얼굴을 내밀었다. 한눈에도 가냘프고 여린 꽃씨였다. 봄바람이 진지하게 말했다. “힘없고 가여운 이 꽃씨를 좀 부탁할게.” 꽃씨는 수줍어서 말을 더듬으며 흙가루에게 말했다. “저, 저에게 조금만 틈을 내어 주시면...” 그러자 흙가루가 기뻐 소리쳤다. “와! 물론이죠! 틈을 드리고말고요.” 옛길과 봄바람이 껄껄대며 웃었다. 봄바람이 말했다. “흙가루야. 넌 꽃씨가 그렇게 좋아?” “그럼요, 제가 언제 꽃씨님을 모실 수 있겠어요?” “하하. 고맙다. 꽃씨가 잘 지낼 수 있도록 힘써 줘.” 흙가루는 꽃씨를 받아 안고 가장 좋은 틈에 들어가도록 해 주었다. “너무 누추하고 작은 틈이지만 꽃씨님이 행복하시길 빌어요.” “정말 고마울 뿐입니다.” 꽃씨는 감격해서 미소를 지었다. 온 산이 초록으로 덮였다. 이 초록 속에 옛길이 있고, 그 틈에 흙가루가 살고, 그 흙가루 틈에 싹이 돋아났다. 무더위가 지나면서 싹은 점점 키가 크고 줄기는 우아해졌다. 그리고는 가을이 왔다. 어느 날 잠에서 막 깬 옛길과 흙가루는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새벽빛 속에 찬란한 꽃송이가 피어나 있었던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흙가루가 말했다. “누, 누구?.....” “호호, 제가 바로 그 꽃씨예요.” “그, 그렇군요. 자세히 보니 맞네요.” 흙가루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꽃씨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흙가루님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됐어요.” “제 덕분이라뇨? 꽃씨님이 비좁은 틈에서 잘 견뎌 준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실 모든 건 옛길님 덕분이고요.” 옛길이 웃으며 말했다. “어허, 내 이름은 왜 나와? 나도 작은 틈 하나 내주었을 뿐이지. 모든 게 봄바람 덕분이라구.” 옛길과 흙가루와 꽃씨는 서로 칭찬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꽃씨가 말했다. “봄바람님과 두 분께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전 사랑을 받기만 해서 미안한 마음이에요. 저도 누군가를 위해 틈을 내어 줄 수 있을까요?” 옛길이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멋진 질문이야. 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요?” “그래. 잠시 후면 너도 누군가를 돕게 될 거야.” 꽃씨는 갸우뚱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침 안개가 흩어지며 숲이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슬 한 방울이 꽃씨의 얼굴에 맺혔다. “안녕? 난 아침 이슬이야.” 꽃씨는 이슬의 감촉에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나!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름도 예뻐!” “너에게 잠시 머무르고 싶은데 괜찮겠지?” “정말 그래 줄래? 그럼 내가 더 고맙지.” 꽃씨는 기뻐서 살짝 춤을 추었다. 아침 이슬은 비틀거리며 외쳤다. “어어! 이러지마. 자칫하면 흘러 떨어지겠어.” “앗! 미안. 너무 좋아서 그만......내가 잘 지켜 줄게.” 얼굴이 빨개진 꽃씨에게 아침 이슬은 조금 심각하게 말했다. “나는 잠시 후엔 떠나. 해가 뜨면 우린 사라지거든. 하지만 내 친구들은 아침마다, 내일도 모레도 찾아 올 거야. 그때도 네가 틈을 내주면 좋겠어.” “염려 마. 그건 내게 큰 복이야. 아침마다 생수를 주고 얼굴도 적셔 주고 내 눈물이 되어 준다면 내 아름다움은 더 빛날 테니까.” 햇빛이 숲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가만히 보니 이슬도 햇빛이 스며들 틈을 내주고 있었다. 꽃잎 위에서 아침 이슬은 햇빛을 품고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러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꽃씨는 맑은 얼굴로 숲속에 외쳤다. “내 이름은 이제부터 이슬꽃이야!” 날이 완전히 밝았다. 언뜻 나무들 사이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 보였다. 멀리서 웅성웅성 강물 흐르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런데 다시 들어 보니 그건 사람들 소리였다. 꽃씨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남녀노소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배낭과 카메라를 메기도 하고 어깨에 띠를 두른 학생들도 보였다. 그때 선두에 선 사람이 행렬을 세우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제1회 옛길 걷기 대회 및 사진 콘테스트에 참석하신 여러분! 여기서부터 사진을 잘 찍으시면 되고요, 절대 식물들을 파손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즐겁게 사진을 찍기도 하고 길가에 앉아 쉬기도 했다. 모두가 조용한 숲이 되어 가는 옛길을 칭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 어린이가 소리를 질렀다. “우와! 여기 좀 와 보세요!” 사람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니 이런 놀라운 일이!” “아스팔트를 뚫고 꽃이 피었네?” “이건 작품 중의 작품이야!” 삽시간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옛길에 가득 찼다. 아스팔트 한복판을 뚫고 솟아난 위대한 꽃이라고 모두들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꽃씨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위대해서 뚫고 나온 게 아니에요. 아스팔트 옛길님이 작은 틈을 내주었어요. 그 틈에 살게 된 흙가루님도 보잘것없는 내게 틈을 내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아름답게 피어난 거죠.” 꽃씨는 있는 힘껏 진한 향기를 뿜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넓은 여백. 그것이 바로 틈이에요.” <끝>
595 |포토에세이| 언덕 위의 자전거 _고순철 파일
편집부
1342 2017-06-02
594 |영화감상| ‘어메이징 그레이스’에 얽힌 두 편의 실화 영화 파일
편집부
1981 2017-05-24
<영화 감상> ‘어메이징 그레이스’에 얽힌 두 편의 실화 영화 - 존 뉴턴과 윌리암 윌버포스를 만나다 프리덤 Freedom 이 영화의 매개체는 바로 영국의 전도자인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의 신앙과 삶이다. 흑인 노예 사무엘이 버지니아 농장에서 도망쳐 추적을 피해 지난한 삶을 산다. 절망에 빠진 사무엘은 하나님을 원망하던 중 어머니로부터 100여 년 전 노예였던 증조할아버지와 노예선 선장 존 뉴턴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잘 알려진 존 뉴턴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리스도인인 뉴턴의 어머니는 그를 목사로 기르고자 했지만 뉴턴이 여섯 살 때 소천했고 뉴턴은 어릴 적부터 뱃사람인 아버지를 따라 항해를 했다. 품행이 썩 좋지 못했던 뉴턴은 선원들과 어울려 방탕에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노예선의 선장으로 노예매매를 하다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고 죽음 앞에서 주님께 자비를 구한다. 주님은 뉴턴을 구원해 주셨고 그는 주의 종이 된다. 덧붙이면 그는 40여 년 간 주의 종으로서 저술과 섬김의 사역 중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기초하여 찬송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가사를 썼다. 이러한 존 뉴턴과 사무엘의 삶의 과정이 교차되며 영화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인간은 진정한 자유(Freedom)를 누리게 됨을 전한다. 존 뉴턴이 자신의 혼인식에서 “여러분이 알던 존 뉴턴은 대서양 폭풍우 속에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울부짖다 새 생명을 얻고 아기로 거듭났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사실상의 절정이다. 사무엘 또한 결국 주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는데 마지막에 어머니가 물려 준 존 뉴턴의 성경책을 집어 들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진정한 신앙에 이른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이 영화는 영국 노예제 폐지 운동의 개혁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의 삶에 바탕을 두었다. 21세에 하원의원이 된 윌버포스는 20대 후반에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정치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교역자가 될까 그저 평탄한 인생을 살아갈까 갈등한다. 그는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가 존 뉴턴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뉴턴은 그에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가진 정치적 영향력으로 불의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윌버포스는 용기를 얻어 평소에 추구하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정치 활동에 진력한다. 그는 의회에서 수많은 반대에 불굴의 신앙과 의지로 맞서 마침내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라는 목적을 이룬다. 존 뉴턴이 죽던 1807년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통과되고 국왕의 재가를 받아 새 역사가 열린 것이다. 명예와 부의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정치적 사명을 향해 달려간 윌버포스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에도 감동을 준다. 그가 한 정치 모임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는 장면은 윌버포스의 삶이 주는 커다란 울림이다.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적 개혁 운동에 뛰어들어 의회에서 포효하는 윌버포스의 연설은 명장면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울리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한다. (편집국)
593 |등불이 있는 책상| 위대한 예술가이신 하나님 파일
편집부
1648 2017-05-10
<등불이 있는 책상> 위대한 예술가이신 하나님 - 에디스 쉐퍼 (Edith Schaeffer) 우리는 하늘에 있건 땅에 있건 보이건 보이지 않건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배웁니다. 보이는 모든 것! 나는 버뮤다 군도의 통성조, 알프스 골짜기의 푸른 용암초, 깊은 갈색의 눈동자, 메뚜기의 투명한 녹색날개, 캘리포니아 해변의 무리지은 삼나무, 몽트루 선창의 줄지어선 종려나무, 눈송이마다의 오묘한 구조, 보름달이 내리 비치는 눈 덮인 언덕과 골짜기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 등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 바람과 중력, 원자와 전자, 산소와 소리 등은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들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라는 생물체 및 천사라는 보이지 않는 생물체도 역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술은 온 세계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시편에 의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 낮은 낮에게,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전하고 알려줍니다. 그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아도 그 소리는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끝까지 번져갑니다(시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것은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의 존재의 영광과 그가 하신 일에 관한 거룩한 그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망원경이나 맨 눈으로 별들과 태양과 달에서 볼 수 있었던 것 보다 더 많은 것들,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예컨대 지금은 월석을 직접 가져옴으로써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창조물들은 연구되고 분석되어서 그 각각이 존재하는 유용한 이유들이 밝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바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언어로 전달하려 하면 그 차이점 때문에 여러모로 방해를 받지만 창조물이 직접 전달하는 그 무엇, 곧 하나님의 영광과 경외에 관한 것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그 일은 방해받지 않고 계속되어 왔습니다. 인간은 그 시대의 지식과 언어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왔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시대와 언어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전달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이 온 세계에 선포하고 전달하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필연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지성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술가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예술관의 참된 기초입니다. - 에디스 쉐퍼, <생활 속에 숨은 예술, 보이스사, 1981> 중에서 * 에디스 쉐퍼는 남편 프란시스 쉐퍼(1912~1984)와 함께 라브리(L’Abri) 공동체를 설립하여 성경적 세계관을 기초로 현대 기독교적 지성의 지평을 열었고 <최고의 예술가인 하나님> <가정이란 무엇인가?><결혼 이야기>등의 저서가 있다. 오른쪽 그림은 에디스 쉐퍼의 스케치 - 편집자 주
592 가정의 달 초대 시<詩> 어머니의 무지개_채 원 파일
편집부
1536 2017-05-10
591 |등불이 있는 책상|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파일
편집부
1727 2017-04-19
<등불이 있는 책상>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 1742년 4월 28일 - 홀로 있기 위해 늘 찾는 곳으로 물러갔다. 큰 평안과 고요함이 있었고, 거기서 두 시간 가량 은밀한 임무들을 행하였고, 어제 아침보다 좀 약했으나 흡사한 느낌을 얻었다. 내 사랑하는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한 것 같았고, 달리 의지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느낌이었다. 내 하나님께 무어라 말해야 할지를 몰라서, 이를테면 그의 품에 기대어 모든 일에서 그에게 온전히 복종하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바람을 토로할 뿐이었다. 완전한 거룩함을 향한 목마름과 지칠 줄 모르는 사모함이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이 내게 어찌나 고귀한지, 세상과 그 모든 쾌락거리들이 무한히 추하게 느껴졌다. 그가 과연 선의 근원이신 것이 보였고 그리하여 그를 다시 불신하거나 혹은 내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걱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버려진 형제들을 위해서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확장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큰 만족을 얻었다. 저녁이 되자 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고 내 속에 내재하는 부패성으로 정말 낮아졌고 그리하여 “비둘기처럼 애곡하였다.” 오오, 하나님이 나의 “찌꺼기를 청결하게 하며” 나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려” 주시고 나를 몇 배나 더 단련되게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조나단 에드워즈 저,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중에서 부분 발췌. *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21세에 회심하고 24세에 헌신하여 29세로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인디언들의 구원을 위해 온전히 헌신한 불꽃 같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윌리엄 캐리, 짐 엘리엇, 조나단 에드워즈 등 역사적 신앙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일기는 지금도 절절한 감동과 교훈을 준다. _ 편집자 주
590 |포토에세이| 따뜻한 노을 속의 교회당 _조대현 파일
편집부
1514 2017-04-19
589 |한국의 명시 감상| 갈보리의 노래_박두진 파일
편집부
2444 2017-04-19
한국의 명시 감상 갈보리의 노래 < 박두진 시인 > < 1 > 해도 차마 밝은 채론 비칠 수가 없어 낯을 가려 밤처럼 캄캄했을 뿐. 방울방울 가슴의 하늘에서 내려 맺는 푸른 피를 떨구며, 아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늬……… 그 사랑일래 지지러져 죽어간 이의 바람 자듯 잦아드는 숨결 소리 뿐. 언덕이어. 언덕이어. 텅 비인 언덕이어. 아무 일도 네겐 다시 없었더니라. 마리아와 살로메와 아고보와 마리아와 멀리서 연인들이 흐느껴 울 뿐. 몇 오리의 풀잎이나 불리웠을지, 휘휘로히 바람결에 불리웠을지, 언덕이어. 죽음이어. 언덕이어. 고요여. 아무 일도 네겐 다시 없었더니라. < 2 >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여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 꽝 쳐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 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같이 밀려오는 승리에의 욕망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패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혈적(血滴)으로, 어떻게 만민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神인 줄을 믿었는가? 크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가 달려들어 안긴 줄을 알았는가? 엘리......엘리......엘리......엘리......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神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일 수 있었는가? 인간이여! 어떻게 당신은 神일 수가 있었는가? 아! ......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人子여! 人子여! 마즈막 쏟아지는 폭포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 3 > 무엇이 여기서는 일어나야 하는가. 갈보리의 하늘은 여전하구나. 하늘도 해도 있고 여전하구나. 비틀거리며 비틀거리며 지고 오른 나무들엔 피와 땀의 기름 번들거려 하늘 아래 고웁기도 하구나. 내가 쓰는 면류관 가시관 위에, 아으 무지개처럼 이제야 둘러 피는 원광을 보라! 진달래를 이기듯, 네 군데의 못자국은 네 군데의 꽃! 솟구쳐 나온 고운 피여! 먼 먼 은하에도 한줄기의 피와 강은 서는데, 떨궈지는 방울마다 타는 목마름, 아으 죽음소리, 어둠소리……한낮의 갈보리는 캄캄해져 오는데 땅들은 갈라지고 무덤들은 트는데, 엘리…… 엘리…… 엘리…… 아으 사랑하게 하라. 사랑하게 하라. 이제야 다시 한 번 껴안게 하라. 죽음을, 원수를, 어둠을, 밤을 이제야 다시 한 번 껴안게 하라. 쏟아지는 먹비 대신 찬란한 빛 발하는 함빡 빛발들이 쏟아져 오면 가슴마다 새로 발해 빛이 솟으면, 사랑이여! 꽃 빛깔 꽃 빛발에 쓰러지게 하라, 파다아하게 서로 안게 쓰러지게 하라. 파다아하게 서로 안고 일어나게 하라. - 『거미와 星座』(기독교서회 1962) 중에서 ● 해설 _ 편집국 박두진 시인(朴斗鎭 1916-1998)은 정지용의 추천으로 <묘지송 墓地頌>을 발표하며 등단하여 청록파의 일원으로서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하다가 이후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과 사회의 현실 및 인간의 존재성을 통찰하는 지조 높은 시 정신을 보여 주었다. <박두진 시인 연보> ·1916년 경기 안성 출생 ·1939년 문예지 <문장>으로 등단 ·1946년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시집 <청록집> 출간 - 이후 청록파로 명명됨 ·1949년 시집 <해> 출간 ·1956년 아시아자유문학상 수상 ·1973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정교수 ·197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84년 <박두진전집> 출간 ·1998년 타계
588 |부활절축시| 끝나지 않는 선율_이은숙 시인 파일
편집부
1847 2017-04-05
587 |수필| 부러운 분들_장인선 수필가 파일
편집부
1549 2017-04-05
< 수 필 > 부러운 분들 < 장인선 수필가 > 원래 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성품이 훌륭한 사람들을 훨씬 존경한다. 아마 이것은 능력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그대로이지만, 성품은 노력하면 주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조금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부러운 분은 전에 다니던 교회 권사님이다. 그 분은 겉모습도 아름답고 온유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그렇다고 그 분이 또 학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여자들이 가고 싶어 하는 ㅇㅇ대학교의 여왕이셨다. 그럼에도 그 분은 겸손함이 몸에 배어있다. 그 분의 경제적인 삶은 잘 모르겠지만 중산층의 어르신이다. 그 분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30세이고 그 분이 50세일 때다. 지금 내가 60세이니까 그 분은 80세가 되었을 것이다. 워낙 내가 그 분을 좋아해서 그 분 옆에만 있으니까 사람들은 나를 그 분의 친척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그 교회를 떠난 지금 먼저 연락을 주시는 분은 그 분밖에 없다. 나 역시 나의 기도 속에 그 분을 빼먹은 적은 거의 없고 그 교회를 떠나면서 가장 그리운 분도 그 분이다. 내가 그 교회에서 얻은 가장 큰 주님의 선물은 그 분일 것이다. 다음에 내가 또 존경하고 부러운 목사님이 계신다. 그 분은 어느 신학대학교 교수님이시고 그 대학 총장님을 역임하셨다. 그 분을 생각할 때마다 어쩌면 “바울 사도”가 그 분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겸손하시고 “삶의 여유”가 있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셔서 항상 같이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이다. 그 분은 당신을 소개할 때 “욕심 많고 돈 좋아하는 목사”라고 재미있게 표현하신다. 아마 많은 목사님들, 특히 교수님들은 특권의식으로 사람들 앞에 “군림”하기 쉽다. 그런데 그 분에게는 그런 부분을 찾아볼 수가 없다. 수 년 전에 그 분은 내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셨고 나만큼 그 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어디 가서 그런 사랑을 받고 그렇게 세움을 받기는 힘이 들 것이다. 내가 많이 아둔한 것을 알아서 바쁘신 그 분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서로 그냥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고 생각하고 기도만 한다. 주님이 그래도 끊임없이 나에게 좋은 사람들을 붙여 주셔서 외롭지 않게 하신다. * 장인선 작가는 몸이 연약하고 불편함에도 믿음으로 살면서 많은 수필을 발표하여 주님의 은혜와 감동을 나누고 있다. 그동안 <주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 <어른 아이> 등 7권의 수필집을 상재하였다.
586 |기독교문화탐방| “기독교인의 문학 감상과 이해”_이종섭 목사 파일
편집부
1879 2017-03-22
<기독교문화탐방> “기독교인의 문학 감상과 이해” - 윤동주와 워즈워스의 시를 중심으로 < 이종섭 목사, 찬미교회·시인·문학평론가 > 한국인이 애송하는 시를 선정할 때 윤동주의 서시는 언제나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이것은 윤동주의 시가 상당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아가 기독교의 입장을 견지하는 독자나, 특히 평자일 경우에는 기독교성이라는 특별함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도 한다. 그래서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평을 읽어 보면, 일반 평자와 기독교 평자의 입장이 다르다. 입장 자체가 다르다기보다는, 관점의 차이에서 나오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윤동주의 서시를 읽어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전문 보편적인 방향에서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기독교적 입장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평을 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이 첫 부분에서부터 해석의 틀을 완전히 정하고 들어간다. 즉, ‘하늘’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내용들도 그렇게 풀어 간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방식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첫째는, 과연 하늘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둘째는, 처음에 어떤 평자가 하늘을 하나님으로 해석했을 때, 왜 이후의 기독교 평자들은 하나같이 이 시각을 좇아가는가, 왜 다른 시각의 분석은 없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기독교적 입장에 서 있는 평자들은 신선함이나 실력이나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저 기독교라는 신앙의 순수함 앞에 평론의 새로운 시도가 죽는다는 생각이다. 서시를 기독교의 틀로 해석하는 것이 신앙이 될 수 없고, 서시를 절대 신앙을 떠나 해석한다고 해서 저촉될 것도 없다. 이 명제를 극복하고 이 틀을 깨는 것이 신앙인에게 절실하고, 또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우선, 보편적 입장에서 살펴볼 때 서시에서 나타나는 하늘을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규정하면, 시의 내용이나 맛이 변하거나 떨어진다. 이렇게 할 경우, 시와 시인의 입장에서 하늘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별과 바람까지도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건 시를 죽이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떤 방향이든 그것이 해악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어떤 작품을 반드시 기독교의 소유라고 증명하거나 확인해야 할 명분도 없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기독교 문학이 되거나 발전하는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서시를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평자들은 신학에 바탕을 둔 사유가 부족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통해 나타난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별계시와, 창조와 피조라는 일반계시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 기독교인은 이 두 가지가 다 우리 것이고, 자유로운 것이며, 어느 하나라도 잃어 버려서는 안 될 귀중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런 사유는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중요한 문제를 등장시킨다. 그것은 일반적인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시인들이 자주 하는 말을 듣는다. 신앙적인 용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반계시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적용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고가 부족하면 기독교 시인은 많은 이론적 장애에 부딪쳐 좌초하거나 초보적인 시만 써내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다시 주제와 연결시켜 논의를 계속해 보자. 윤동주의 서시는 서시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듯이 특별계시 차원에서 쓰이지 않았고, 일반계시 차원에서 쓰였다. 이것은 서시를 이해할 때 일반계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서시에서 하늘을 지나치게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규정하지 말고, 그냥 시인 자신의 절대 고백과 결심의 배경 차원에서 나타나는 대상의 주체 정도로 인식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고, 서시 자체가 형태적으로 소품이며, 개인 고백적인 서술을 취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경우 참 어리석다. 세계가 하나님 것인데, 그것에 이름표를 달아야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성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와 존재》부터 다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서시를 그냥 서시답게 읽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읽어도 기독교의 시가 충분히 된다는 말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서시를 그렇게 읽어도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도움이 되는 텍스트로 삼아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라는 1차성과,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2차성에 대한 구별과 적용이 모호하고 그런 지식조차 없어서, 언제나 이런 오류에 빠지고, 진정한 자유를 잃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신앙의 이름으로 시를 오용하는 것은 번역시에서도 가끔 나타난다. 윌리엄 워즈워스(W. Wordsworth)의 〈My heart leaps up〉이라는 시를 보자.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 W. Wordsworth의 <My heart leaps up> 전문 이 시에서도 보면, 어떤 기독교인들은 앞서 말한 ‘계시의 두 가지 차원’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기 때문에 너무도 뻔히 보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실수가 아니고 신앙이요 충성이라고 생각하며 흐뭇해 한다. 마지막 행의 ‘by natural piety’가 바로 이것을 재는 바로미터다. 필자는 워즈워스의 무지개를 정말 좋아했었는데, 그것은 번역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처음으로 읽은 번역시는 그 부분을 ‘천생의 경건한’으로 번역을 했는데, 여기서 ‘천생’이라는 말이 문제다. 왜 natural이라는 단어를 천생으로 번역한 것일까? 이 문제를 이렇게 추측해 보며 해결을 시도해 볼 뿐이다. 이 번역자는 어쩌면 기독교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낸 것이고, 그 섣부른 진심이 문학의 눈을 가렸을지도 모른다고. 자연을 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문제인가? 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문제가 되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인데 그것을 바라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과연 문제가 되는가? 종교개혁가 칼빈은 ‘자연은 하나님을 보여 주는 눈부신 극장’이라고 했다. 왜 기독교인들은 자연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기를 꺼려하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자연을 바라보며 노래하기를 부담스러워 하는가. 혹시라도 유아적 신앙의 굴레에 스스로 속박되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 문학은 표현과 관련된 창작이나 해석에서 그 자체에 얽매이거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 기독교 문학이라면 소유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방향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문학의 확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불필요한 오류로 가는 것을 방지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 이종섭 목사는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바람의 구문론><물결무늬 손뼈 화석>등의 시집을 상재하였으며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585 |등불이 있는 책상|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가겠습니다!_차동재 목사 파일
편집부
1763 2017-03-22
<등불이 있는 책상> 원문 _ 존 파이퍼 목사 | 번역 _ 차동재 목사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가겠습니다! - 난민들을 도와주는 기독교 - < 차동재 목사, 고덕중앙교회 > 만약에 미국 정부가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공포심과 냉담함을 기초로 한 난민 정책을 결정해 버린다면, 미국에 있는 복음을 믿는 교회는 그런 심적 경향이나 그 공포들을 억지로 수용하지 않아도 되며 그 결정에 제한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다른 북소리에 맞춰 행진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왕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반응 차원에서, 우리는 행동으로 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정부가 당신들을 두려워하고 배제한다면,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가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을 전하며, 모든 고난당하는 자들, 특별히 영원히 고난당하는 자들을 돌아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공포심이나 완악한 마음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종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증언하는 선교사들과 복지사들을 미국 밖으로 꾸준히 보내고 후원해 온 우리의 오래된 헌신을 강화할 것입니다. - 목사와 교회지도자를 위한 베들레헴 2017 컨퍼런스 설교에서 발췌 김주환, 삶-축제(Life-Festival)∣72.7⨉60.6cm∣Mixed media∣2016 “We Will Come to You” - Christian Help for Refugees - If it turns out that the U.S. government settles on a refugee policy based on fear and callousness to the most vulnerable people, the gospel-believing church in America is not constrained to embrace that mindset or those fears, or be limited by that action. We march to a different drum. We have a different King. Our citizenship belongs elsewhere. And in response, we should say to the world by our action: If our government fears and excludes you, we will come to you. We will increase our age-long commitment to send and support a steady stream of missionaries and support workers out of America who carry the best news in the world, and who care about all suffering, especially eternal suffering, and thus bear witness that we are not governed by fear or hardness of heart, but by Jesus Christ, who became a servant unto death that all the peoples might glorify God for his mercy. ▣ 존 파이퍼 목사 John Stephen Piper(1946~ ) : 베들레헴 신학대학교 총장, 미국 미네소타 주 베들레헴 침례교회 원로 목사, 저술가. 휘튼 칼리지, 풀러 신학교를 거쳐 뮌헨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우리말 역서> :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좋은 씨앗), 삶을 허비하지 말라(생명의 말씀사),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을 때(IVP), 하나님이 복음이다(IVP) 등 다수. 존 파이퍼 목사는 우리 시대의 교회와 사회의 현안,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 부단히 기도하며 성경적인 진단과 처방을 찾아내려고 선두에서 애쓰는 사람이다. * 독자들이 읽은 고전과 동시대의 명저나 강연들 중에서 나누고 싶은 부분을 짧은 소개 글과 함께 보내 주십시오. (A4 1장) - 편집자 주
584 |등불이 있는 책상| 메튜 헨리의 결심 파일
편집부
2430 2017-03-22
<등불이 있는 책상> 메튜 헨리의 결심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다음과 같이 더욱 굳게 결심한다. 즉 복음서의 모든 지시와 방법들에 대해 더욱 순종할 것이다. 더욱 겸손하고 더욱 진지해지며 경계심을 갖고 자아를 부정하고,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곳과 그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위해 살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의 좀 더 나은 생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성경을 읽을 것이며, 사역을 하는 데에 태만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할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데에 더욱 열성적인 마음이 될 것이며 또한 신중함을 가지고 부여받은 모든 능력과 기회를 이용하여 좋은 대화나 교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 나의 구세주이신 주님을 위한 교회를 장식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나의 목적으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특히, 나는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성령님의 은혜 안에서 나의 임직식 때의 맹세를 완수할 것을 결심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속에서 듣고 받아들여진 건전한 말씀들의 형태를 잡기 위하여, 그리고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진리는 놓치지 않으려는 신앙과 준행의 단 하나의 규칙으로서, 성경을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던 그 맹세를 다시 생각해 보며 그 일을 완수할 것을 결심했다. 그 일을 위하여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것이며 진지함과 근면으로 하나님과 영혼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데 나의 모든 능력을 소모할 것이며 또한 모든 반대자들에게 대항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할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힘과 능력을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부정하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며 그들을 침묵시킬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 안의 평화와 통일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며, 또한 같은 신도들의 경고를 참을성 있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J.B.Williams, 『메튜 헨리』(세종문화사, 1979) 중에서 ▲메튜 헨리 Mattew Henry(1662-1714)는 청교도 신학자요 탁월한 주석가였으며 그의 일기와 편지, 비망록은 지금까지 많은 감동과 교훈을 준다. 위의 글은 1687년 메튜 헨리가 목사 임직을 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점검하며 결심하는 내용의 한 부분이다. 여러분이 읽은 고전과 동시대의 명저나 강연들 중에서 나누고 싶은 부분을 짧은 소개 글과 함께 보내 주십시오. (A4 1장) - 편집자 주
583 no image |봄을 맞는 시| 봄_송영권 시인
편집부
1572 2017-03-08
582 |포토에세이| 사진_조대현 파일
편집부
1817 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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