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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화탐방>  

이영신 작가(서양화가)의 신앙과 미술 이야기  

꿈꾸는 여인, 그날 거기에서

 

 

  740-8_이영신 작가.jpg   



 

   그리스도인이면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란시스 쉐퍼는 <예술과 성경>이라는 책에서 기독교 예술이란 종교적 주제만 다루는 종교 예술이 결코 아니고 한 그리스도인이 개인의 삶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예술가는 신앙과 예술의 합일을 실현하고 지향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난 이영신 작가는 그러한 바람직한 한 예를 잘 보여준다. 문답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함께 이에 대한 생각을 정돈해 보자.

    


 

1. 화가의 길

 

문: 어떻게 화가가 됐나?

답:  초등학교 때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많았다. 칭찬도 받으며 자연스레 화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때는 공부만 하며 다른 길로 갔다가 나중에 혼자 그림 작업을 했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미술을 좀 더 아카데믹하게 배우려고 대학을 갔다.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거대한 목표를 갖고 화가의 길을 걸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 종종 창작을 하고 전시회도 하면서 어느덧 현직 화가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재발견하고 매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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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인 예술가라는 의미와 정체성

  

문: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신앙 활동 외에는 모두 허망한 거라는 의식이 잔존하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답: 흔히 하는 고민이겠지만 나도 딜레마에 빠졌었다. 나는 신앙인인데 뭘 그려야 하지? 내가 이렇게 그리는 게 맞나? 이런 내적 질문이 계속 있었다. 그리고 신앙생활, 엄밀히 말해서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다보면 정작 작업할 시간이 없고 교회 생활이 먼저냐 전업 작가로서의 활동이 먼저냐, 고민한 적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그 이원론적 문제를 해결했다.


   ‘미술로 전업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점차적으로 얻은 각성이지만 특히 아트미션(http://www.artmission.co.kr)이라는 기독교미술 모임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공유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술가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 가치관이 정립된 것 같다. 내게 주신 은사를 가장 잘 발휘하는 것이 나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참 감사하다. 이젠 스스럼없이 내 직업은 화가라고 말함이 자랑스럽다.



 

문: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 예술가의 길이 아닌가?

답: 나로서는 미술가로서의 삶 자체가 신앙이다. 내 미술 활동이 왜 신앙적인가를 알게 되어 작품 활동에 매진하다보니 실제로 교회 활동은 줄어들게 되었다. 전엔 그런 게 무척 미안하고 왠지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젠 신앙인으로서 내 본래의 삶이 이런 것이며 미술이 내 인생의 사역이라는 사명감과 확신이 섰다.



 

문: 한국의 기독교 예술인들이 적잖게 예술 활동의 치열함을 잃고 신앙생활에 안주하곤 한다. 그래서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기독교 예술의 저변 확대도 약하고 그 유산이 풍성히 축적되지도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가의 발전적 각성은 아주 축하할 만하다.

답: 그렇다. 그런 오해와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 감사하다. 세계에 나가 보니 은사를 널리 발휘하려면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도 그저 취미를 넘어 치열하게 전업을 해야 하겠더라. 모든 예술이 그럴 것이다. 전업적인 열정이 없으면 표피적 수준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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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예술가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잘 갈고 닦아 보편적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좋은 기독교 작가는 좋은 신앙인이어야 하고 또한 좋은 예술 작품을 창조해야 한다.

답: 싱가폴에서 전시회를 했을 때 내 그림에 십자가나 눈에 띄는 기독교적 요소가 없는데도 비기독교인인 관계자가 당신의 그림은 분명히 기독교적이다. 뭘 표현하려는지 알겠다라고 하더라. 그때 , 내 그림은 이미 기독교 세계관을 갖고 있구나하고 깨달았다. 꼭 십자가와 성경 이야기가 나오지 않더라도 삶 전반에서 실행하는 예술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깨달았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고 기독교세계관을 지향하는 한 내 그림은 기독교 미술일 수밖에 없다. 다만 내가 좋은 미술가인가, 그리고 내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는 얼마나 열정과 힘을 다해 은사를 발휘하고 좋은 창작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3. 추구해온 작품 세계- 꿈꾸는 여인

 

문: 그동안 어떤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해 왔나?

답: 꿈꾸는 여인이라는 주제에 집중했다. 처음엔 현실 도피적 꿈이었는데 어느 순간 힘든 상황도 아름답다는 각성을 하고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삶을 바라보는 꿈으로 변화되었다. 초기엔 한 명의 여인이었으나 최근엔 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전에는 한곳만 바라보는 여인들이었지만 지금은 함께한 공간에서도 다양한 시선을 갖는다. 자아의 복합성은 물론, 서로 흡사한 여인들을 통해서도 다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다름을 인정하는 의식, 나는 즐겁지만 다른 이들은 슬플 수도 있다는 점을 심각하지 않은 선에서 구현하려고 한다.



 

4. 그날 거기에서

 

문: 꿈꾸는 여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답: 꿈꾸는 여인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다. 그래서 그날, 거기에서’(The day, there)라는 목표를 더하였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어떤 소욕들보다는 그날 거기에서라는 꿈이라고 함축하겠다. 주님을 만나는 날, 혹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날 거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너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이냐? 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미술가의 삶. ‘이런 걸 추구하다 왔어요라고 소박하게 답할 수 있는 그 순간을 꿈꾼다. 그런 꿈을 공유하면 좋겠다.

    


 

5. 기독교 예술의 확장성

 

문: 기독교 예술도 변방에서 만족할 게 아니라 시대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본다. 저변 확대와 교육도 더 필요할 듯하다. 후배들을 이끌어 주고 은사를 함께 나누는 활동은 있는가?

답: 1+10 전시회라고 있다. 미술을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함께 해보자고 만든 모임이다. 거창하게 대가가 되려는 것보다는 일상에서 자기 은사를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 준다. 1은 하나님을 뜻하는데 하나님과 함께하는 10명의 은사자들이 작품을 만들고 나누고 발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시 기회를 만들어 주고 전시장도 소개해 주는 선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방적 가르침보다 홀로서기를 독려하고 작은 도움으로 길을 보여 준다. 그런 뜻으로 시민센터 등에서 그림 그리기 그룹을 지도하기도 한다.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든 그림으로 소통하면서 자기를 표현하고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을 발견하며 정서적 치유를 경험하게도 한다. 이렇게 내 은사로 주변인들에게 삶의 감동을 누리고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 주며 함께 더 좋은 삶을 향유하도록 밑받침이 되면 좋겠다.

    


 

문: 신앙과 예술이 잘 결합될 때 삶도 풍요로워지고 사회도 더 나아지는 모범을 보는 것 같아 기쁘다. 앞으로 이 작가의 작품과 뜻이 더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답: 작은 일부터 함께 격려하며 보편화를 향해 노력함이 필요하다. 기독교 예술도 거창한 목적보다는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이다. 곳곳에 이런 뜻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 막 예술가의 꿈을 꾸거나 초보에 든 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기독교 예술의 본래적 가치를 깨달아 전문적 사명감과 열정으로 그 길을 가면 좋겠다는 것이다.

<대담 및 정리 _ 편집국>

 

 

 

    

 

 

 

<작가의 말>

 

   인생을 작품에 투영시키기도 하지만 작업을 통해 인생을 정립하기도 한다. ‘꿈꾸는 여인을 테마로 작업하면서 그림 속 여인들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내 스스로 내심 놀랐다. 초기의 꿈꾸는 여인은 분명 건조한 삶과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하여, 자신의 꿈을 키우고 간직하며 그 꿈을 동경하는 형태로 출발했었다. 그 여인은 해를 거듭하면서 일시적 도피가 아닌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곳에서 진정한 행복을 노래하는 여인으로 바뀌어 갔다.


   인생은 하모니와 관계성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솔로부터 듀엣, 삼중창, 사중창, 합창을 차례로 등장시켰다. 드라마에서처럼 주인공과 엑스트라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각자 주어진 인생의 주인공들로서 서로의 고유한 색깔을 지닌다.


   인생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인생의 마디마디를 연결하면 한편의 아름다운 드라마가 완성되듯, 이러한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언젠가 서게 될 그 곳에서 인생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며 미소 짓고 활짝 웃는 여인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모든 불평과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는 그 날, 천사들의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 그 곳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며 내 생애 참 행복했었노라, 그리고 또 내 인생의 드라마를 멋있게 연출해 주신 창조주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의 꿈들이 계속 이어지길 소원한다.


   이 꿈꾸는 여인의 꿈들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픈 기대감과 설레는 마음으로 꿈꾸는 여인들의 드라마를 이어갈 것이다.

  


  

이영신 작가 약력

 

- 이화여대 미대 서양화과 졸업

- 개인전 및 개인 부스전 : ‘꿈꾸는 여인 꿈을 부르다21(이브갤러리. 인사갤러리. 관훈미술관. ARTSERI Gallery in Kuala Lumpr ) 국내외 초대전 및 단체전 : 120 여회

- 현재 세종글로벌스쿨 미술 강사, 횃불 트리니티 신대원 평생교육원 강사

- 아트미션 회원. 은평교회(길동)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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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ed |기독교문화탐방| 이영신 작가(서양화가)의 신앙과 미술 이야기 첨부 파일
편집부
2552 2017-02-22
<기독교문화탐방> 이영신 작가(서양화가)의 신앙과 미술 이야기 “꿈꾸는 여인, 그날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이면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란시스 쉐퍼는 <예술과 성경>이라는 책에서 ‘기독교 예술이란 종교적 주제만 다루는 종교 예술이 결코 아니고 한 그리스도인이 개인의 삶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예술가는 신앙과 예술의 합일을 실현하고 지향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난 이영신 작가는 그러한 바람직한 한 예를 잘 보여준다. 문답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함께 이에 대한 생각을 정돈해 보자. 1. 화가의 길 문: 어떻게 화가가 됐나? 답: 초등학교 때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많았다. 칭찬도 받으며 자연스레 화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때는 공부만 하며 다른 길로 갔다가 나중에 혼자 그림 작업을 했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미술을 좀 더 아카데믹하게 배우려고 대학을 갔다.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거대한 목표를 갖고 화가의 길을 걸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 종종 창작을 하고 전시회도 하면서 어느덧 현직 화가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재발견하고 매진하게 된 것이다. 2. 그리스도인 예술가라는 의미와 정체성 문: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신앙 활동 외에는 모두 허망한 거라는 의식이 잔존하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답: 흔히 하는 고민이겠지만 나도 딜레마에 빠졌었다. 나는 신앙인인데 뭘 그려야 하지? 내가 이렇게 그리는 게 맞나? 이런 내적 질문이 계속 있었다. 그리고 신앙생활, 엄밀히 말해서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다보면 정작 작업할 시간이 없고 교회 생활이 먼저냐 전업 작가로서의 활동이 먼저냐, 고민한 적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그 이원론적 문제를 해결했다. ‘미술로 전업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점차적으로 얻은 각성이지만 특히 아트미션(http://www.artmission.co.kr)이라는 기독교미술 모임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공유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술가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 가치관이 정립된 것 같다. 내게 주신 은사를 가장 잘 발휘하는 것이 나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참 감사하다. 이젠 스스럼없이 내 직업은 화가라고 말함이 자랑스럽다. 문: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 예술가의 길이 아닌가? 답: 나로서는 미술가로서의 삶 자체가 신앙이다. 내 미술 활동이 왜 신앙적인가를 알게 되어 작품 활동에 매진하다보니 실제로 교회 활동은 줄어들게 되었다. 전엔 그런 게 무척 미안하고 왠지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젠 신앙인으로서 내 본래의 삶이 이런 것이며 미술이 내 인생의 사역이라는 사명감과 확신이 섰다. 문: 한국의 기독교 예술인들이 적잖게 예술 활동의 치열함을 잃고 ‘신앙생활’에 안주하곤 한다. 그래서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기독교 예술의 저변 확대도 약하고 그 유산이 풍성히 축적되지도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가의 발전적 각성은 아주 축하할 만하다. 답: 그렇다. 그런 오해와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 감사하다. 세계에 나가 보니 은사를 널리 발휘하려면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도 그저 취미를 넘어 치열하게 전업을 해야 하겠더라. 모든 예술이 그럴 것이다. 전업적인 열정이 없으면 표피적 수준에 머문다. 문: 예술가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잘 갈고 닦아 보편적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좋은 기독교 작가는 좋은 신앙인이어야 하고 또한 좋은 예술 작품을 창조해야 한다. 답: 싱가폴에서 전시회를 했을 때 내 그림에 십자가나 눈에 띄는 기독교적 요소가 없는데도 비기독교인인 관계자가 “당신의 그림은 분명히 기독교적이다. 뭘 표현하려는지 알겠다” 라고 하더라. 그때 “아, 내 그림은 이미 기독교 세계관을 갖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꼭 십자가와 성경 이야기가 나오지 않더라도 삶 전반에서 실행하는 예술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깨달았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고 기독교세계관을 지향하는 한 내 그림은 기독교 미술일 수밖에 없다. 다만 내가 좋은 미술가인가, 그리고 내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는 얼마나 열정과 힘을 다해 은사를 발휘하고 좋은 창작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3. 추구해온 작품 세계- 꿈꾸는 여인 문: 그동안 어떤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해 왔나? 답: 꿈꾸는 여인이라는 주제에 집중했다. 처음엔 현실 도피적 꿈이었는데 어느 순간 힘든 상황도 아름답다는 각성을 하고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삶을 바라보는 꿈으로 변화되었다. 초기엔 한 명의 여인이었으나 최근엔 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전에는 한곳만 바라보는 여인들이었지만 지금은 함께한 공간에서도 다양한 시선을 갖는다. 자아의 복합성은 물론, 서로 흡사한 여인들을 통해서도 다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다름을 인정하는 의식, 나는 즐겁지만 다른 이들은 슬플 수도 있다는 점을 심각하지 않은 선에서 구현하려고 한다. 4. 그날 거기에서 문: ‘꿈꾸는 여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답: ‘꿈꾸는 여인’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다. 그래서 ‘그날, 거기에서’(The day, there)라는 목표를 더하였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어떤 소욕들보다는 그날 거기에서라는 꿈이라고 함축하겠다. 주님을 만나는 날, 혹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날 거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너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이냐? 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미술가의 삶. ‘이런 걸 추구하다 왔어요’ 라고 소박하게 답할 수 있는 그 순간을 꿈꾼다. 그런 꿈을 공유하면 좋겠다. 5. 기독교 예술의 확장성 문: 기독교 예술도 변방에서 만족할 게 아니라 시대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본다. 저변 확대와 교육도 더 필요할 듯하다. 후배들을 이끌어 주고 은사를 함께 나누는 활동은 있는가? 답: 1+10 전시회라고 있다. 미술을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함께 해보자고 만든 모임이다. 거창하게 대가가 되려는 것보다는 일상에서 자기 은사를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 준다. 1은 하나님을 뜻하는데 하나님과 함께하는 10명의 은사자들이 작품을 만들고 나누고 발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시 기회를 만들어 주고 전시장도 소개해 주는 선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방적 가르침보다 홀로서기를 독려하고 작은 도움으로 길을 보여 준다. 그런 뜻으로 시민센터 등에서 그림 그리기 그룹을 지도하기도 한다.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든 그림으로 소통하면서 자기를 표현하고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을 발견하며 정서적 치유를 경험하게도 한다. 이렇게 내 은사로 주변인들에게 삶의 감동을 누리고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 주며 함께 더 좋은 삶을 향유하도록 밑받침이 되면 좋겠다. 문: 신앙과 예술이 잘 결합될 때 삶도 풍요로워지고 사회도 더 나아지는 모범을 보는 것 같아 기쁘다. 앞으로 이 작가의 작품과 뜻이 더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답: 작은 일부터 함께 격려하며 보편화를 향해 노력함이 필요하다. 기독교 예술도 거창한 목적보다는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이다. 곳곳에 이런 뜻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제 막 예술가의 꿈을 꾸거나 초보에 든 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기독교 예술의 본래적 가치를 깨달아 전문적 사명감과 열정으로 그 길을 가면 좋겠다는 것이다. <대담 및 정리 _ 편집국> <작가의 말> 인생을 작품에 투영시키기도 하지만 작업을 통해 인생을 정립하기도 한다. ‘꿈꾸는 여인’을 테마로 작업하면서 그림 속 여인들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내 스스로 내심 놀랐다. 초기의 꿈꾸는 여인은 분명 건조한 삶과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하여, 자신의 꿈을 키우고 간직하며 그 꿈을 동경하는 형태로 출발했었다. 그 여인은 해를 거듭하면서 일시적 도피가 아닌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곳에서 진정한 행복을 노래하는 여인으로 바뀌어 갔다. 인생은 하모니와 관계성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솔로부터 듀엣, 삼중창, 사중창, 합창을 차례로 등장시켰다. 드라마에서처럼 주인공과 엑스트라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각자 주어진 인생의 주인공들로서 서로의 고유한 색깔을 지닌다. 인생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인생의 마디마디를 연결하면 한편의 아름다운 드라마가 완성되듯, 이러한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언젠가 서게 될 그 곳에서 인생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며 미소 짓고 활짝 웃는 여인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모든 불평과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는 그 날, 천사들의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 그 곳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며 ‘내 생애 참 행복했었노라’고, 그리고 또 내 인생의 드라마를 멋있게 연출해 주신 창조주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의 꿈들이 계속 이어지길 소원한다. 이 ‘꿈꾸는 여인‘의 꿈들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픈 기대감과 설레는 마음으로 꿈꾸는 여인들의 드라마를 이어갈 것이다. 이영신 작가 약력 - 이화여대 미대 서양화과 졸업 - 개인전 및 개인 부스전 : ‘꿈꾸는 여인 꿈을 부르다’ 등 21회 (이브갤러리. 인사갤러리. 관훈미술관. ARTSERI Gallery in Kuala Lumpr 등) 국내외 초대전 및 단체전 : 120 여회 - 현재 세종글로벌스쿨 미술 강사, 횃불 트리니티 신대원 평생교육원 강사 - 아트미션 회원. 은평교회(길동) 권사
580 no image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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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2786 2017-02-08
기독교문화탐방 _ 박부민 편집국장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뮤지컬 더북 The Book 추위가 매섭던 지난 1월 중순 월요일 오후. 열린극장 지하 쉼터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떨렸다. 문틈으로 합창이 새어 나왔다. ‘새벽종이여 울려라 교회여 일어나라!’ 170석 소극장 공연인데 연일 만석을 기록하며 신년벽두 대학로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 편의 뮤지컬, 더 북. 그 대표자를 찾아간 길. 그는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손을 내밀었다. 몹시 차가웠다. 나는 그 손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문화행동 아트리’의 대표이며 뮤지컬 더북의 책임자 김관영. 무엇이 동네 형처럼 소박한 모습의 김 목사를 추위 속에 동분서주하게 했을까? 아트리, 문화선교 공동체 “대부분의 전문 사역이 그렇지만 제게도 외롭고 가난하고 힘든 길이었지요.” 말을 시작한 그는 먼저 2006년 극단의 태동과 배경이 된 날들을 회상하며 연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덕분에 그의 지난날은 흔히 들을 수 있는 춥고 배고픈 예술가들의 과거사와는 사뭇 다른 하나님의 이끄심이 분명한 문화 선교의 길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은 대학로에서 방황하는 극예술가들을 섬기고 싶었어요. 많은 공연자들이 자아실현의 방편으로 극예술에 입문하여 애쓰고 있지만 아트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아부인의 기반 위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목표로 문화선교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문화행동 아트리는 고난과 외로움 속에서 김관영 한 사람의 믿음과 열정이 도화선이었지만 지금은 종신 문화선교사로 작정한 자들이 자원 합류하며 모임이 놀랍게 확장돼 가고 있단다. 물론 꼭 선교단체의 이름을 내걸고 모두가 표면적 선교 사명으로 일한다고 해서 모종의 우월의식을 가질 만큼 이것만이 옳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 각자가 문화 영역에서 전문인으로 은사를 발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귀하다. 다만 이 시대의 문화적 혼돈 속에서 선교적 사명을 드러내어 감당해 주는 문화공동체가 몇 개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면 아트리는 그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각자 사는 곳이 다르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단원들이 태반이어서 공연예술이라는 특성상 난점이 많고 지치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기도하던 중 차라리 함께 모여 살면서 해 보자는 결론을 얻게 되었지요.” 이런 곡절 끝에 그들은 경기도 여주로 옮겨 한 시골 마을에 함께 산다. 공연 팀이 물리적으로 한 지역에 모여 살며 얻게 되는 경제적 절약과 집중된 에너지 그리고 시너지 효과들을 감안할 때 아트리는 많은 장점을 보여 주고 있다. 아트리라는 이름은 예술(Art)을 통해 나무(Tree)를 가꾸듯이 후세대까지의 신앙적 선교적인 교육 효과를 목표하며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고용된 자들(Employee)이라는 3중 의미를 갖는단다.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아트리는 그동안 10여 년의 역사 속에서 매해 1편의 의미 있는 공연을 해왔다. 매년 11월 1일부터 11일 동안 1.1.1.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복음적 창작 뮤지컬을 발표했는데 1.1.1.은 한 사람이 한 영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더북도 그 중 한 편으로 2014년에 초연돼 이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뮤지컬 더북, 온 교회여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모두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여쭤봤어요. 응답 하시기를 전에 했던 ‘더북’을 다시 올리라 하셨습니다. 그 주제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다시 더북이라 하신 겁니다.” 그들은 단순히 더북을 재공연 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롭고 특별한 사명감으로 준비하여 이 일을 통해 구체적으로 한국교회를 섬기기로 했단다. 주님이 이 길로 이끄심을 분명하게 체험했단다. 사실 500주년이라는 연대적 의미 부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 정신의 회복과 지금 여기서 그 정신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바로 그 책을 다시 사랑하고 그 책 중심의 교회가 되는 것. 그 책을 주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는 교회,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교회와 세상이 되는 것이다. 집집이 쌓인 성경. 그러나 성경보다 다른 프로그램이 더 반응을 얻으려 하는 시대. 이런 때에 뮤지컬 더북은 온 교회가 함께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며 ‘새벽종이여 울려라! 교회여 일어나라!’고 외친다. 롤라드 Lollard, 자기 몸으로 성경이 된 사람들 1517년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 이전에 선구자가 있었다. 최초로 성경의 영어 완역을 추진한 영국의 위클리프였다. 그의 후예들은 각지에서 성경을 사랑하여 몰래 번역된 성경을 돌려 읽다가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마침내 성경을 통째로 암송하며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롤라드라 했다. 번역된 성경을 불허하던 당대의 교회와 교권에 반역하는 가라지라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롤라드는 자기 몸으로 성경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마중물이 되었다. 더북은 바로 그들의 눈물겨운 이야기이며 그들과 ‘그 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이 공연이 피날레를 향해 갈 때 각자 성경 구절들을 외치는 전 배우들의 열연은 진짜 롤라드가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과연 그들은 온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듯 공연을 하고 있었다. 관객들도 비교적 긴 두 시간 동안 거의 미동도 없이 숨죽이며 때론 속으로 울면서 이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런 감동의 진폭은 더북 홈페이지에 남긴 관람 후기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365 대장정 프로젝트 김 대표는 선교적 차원에서 헌신한 일이니 365일을 하나님께 드려보자고 생각했다한다. “그래서 보통의 극단으로는 상상도 실현도 불가능한 365일 공연을 단원들과 만장일치로 합의 했지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어요. 공연 후 피곤한 몸으로도 항상 기도 모임을 갖고 주일엔 대학로의 영혼들을 위한 ‘그 나무 아래’라는 복음 전도 집회로 대신하지요. 대학로의 많은 배우들과 공연관계자들이 찾아들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갈구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1년간 진행되는 공연 대장정 프로젝트가 실현된 것이다. 이런 그들의 마음을 받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도 뚜렷해졌단다. 한 달에 1000만원이나 되는 소극장 대관료를 매월 각자 맡아 후원하는 12교회가 벌써 자원하여 정해졌다 한다. 우리가 바로 ‘롤라드’입니다 교대할 배우들이 많이 부족한 상태로 초인적 에너지를 발산하며 매일 같이 만석으로 열리는 이상한 공연. 교회와 학교에서 단체 관람도 많이 하고 있다. 이쯤 되면 2017년 뮤지컬 더북이 올릴 대학로의 새로운 기록들에 대한 기대감까지 솟는다. 김관영 대표는 설렘과 비장함으로 말했다. “이제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께 드리는 이 공연을 성도님들이 지속적으로 매일 매일 많이 관람하고 공감하며 이 주제가 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돼 가는 겁니다.” 약속된 방송사 인터뷰를 위해 또 나가야 한다는 김 대표와 아쉬운 대화를 마치고 일어섰다. 쉼터 벽면에 있던 글귀가 새벽 종소리를 몰고 가슴으로 뛰어 들었다. ‘우리가 바로 롤라드입니다’ 예매 및 문의 / 010-2648-8255 더북 홈페이지 http://musicalthebook.modoo.at
578 |포토에세이| 못.._김인석 첨부 파일
편집부
1976 2017-01-25
577 |성경시대 역사탐방<68>| 이집트 탐방을 마치며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75)
편집부
18214 2013-04-02
이집트 탐방을 마치며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hanmail.net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0대 왕 아멘호테프4세(Amenhotep IV, 일명 Akhenaten, 재위 1352-1336 BC)의 흉상. “사라는 얼굴이 하얗고 계란형의 미모를 갖춘 여인으로 추정하기도” 필자는 이집트 역사 탐방 기록을 마무리하면서 기대와 아쉬움이 공존하는 가운데 많은 절제와 감격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이집트라는 지역을 언급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는 3200여년의 오랜 기간 동안 번영을 누렸던 인류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 지역이다. 이 지역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족장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란(Haran)에서 가나안(Canaan)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은 목축생활의 가장 힘든 기근의 시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이집트 행을 결심하고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이주하는 장면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창 12:10-20).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온 후 조카 롯은 가족을 이끌고 아브라함의 곁을 떠났다. 롯은 요단지역의 소알(Zoar)을 이주지역으로 정하고 이주하기로 결정할 때 삶의 풍요를 꿈꾸는 표준이 되는 지역으로 이집트 땅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는 장면을 보더라도 이집트 땅은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향하여 이동한 지역 하이집트의 수도는 멤피스(Memphis)였다. 이곳은 델타지역으로 그의 첫 번째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보다, 그리고 제2고향 하란지역보다 기름진 땅이고 기후 조건 또한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당시에는 이집트 제11왕조 시대가 아브라함이 활동하던 시기였으며, 이집트를 통치하던 바로는 인테프1세(Intef Ⅰ. 2134-2117 BC) 치세 시대에서 멘투호테프 4세(Mentupotep IV. 1997-1991 BC) 치세시대까지의 통치 시기였다.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할 때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을 염려하면서 이집트로 이주하면 누이로 호칭하자며 대안을 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이집트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를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아브람이 이집트에 이르렀을 때에 이집트 사람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창 12:11-14)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용모와 피부색깔이다. 아브라함 부부는 샘족 계열의 갈대아 우르지역 출신들이다. 당시의 갈대아 우르의 여인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당시 이집트 11왕조 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교할 수 있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인물상의 조각상으로 인하여 상상할 수가 있다. 먼저 우르 제3왕조 시대의 여인상이 우르 왕묘를 발굴하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Leonard Wolly, 1880-1960)에 의해 샤마드(Shamard) 여왕상이 완벽하게 발굴 되었는데 얼굴은 하얗고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계란형의 여인상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아도 미인형의 모습이다. 아마 사라도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바로였던 멘투호테프 2세(Mentupotep Ⅱ. 2060-2010 BC)의 이집트 군사 모형 인형들이 발굴되었는데 전쟁에 출정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완벽한 상태로 허버트 윈록(H.E. Winlock)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그들의 모습은 얼굴이 검은 마른 모습들이었다. 전형적인 함족 계열의 형통의 군인 모습들이 전사한 병사 60명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던 것이다(The Rise and Fall of the Middle ingdom in Thebes, New York, 1947). 당시의 이러한 얼굴형을 자연히 비교하여 보면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슴 아픈 대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출애굽의 대이동이 있었던 현장들, 초대 교회사에 한 획을 그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고백으로 체계화 시켰던 아타나시우스의 기념교회의 터 아부메나(AbuMane) 등은 이집트가 갖고 있는 탐방프로그램의 중요한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출애굽 대장정의 출발지가 되고 있는 고센지역인 라암셋과 숙곳 지역이라고 추종되는 알마타리아(Almataria)지역은 카이로 북쪽 지역에서 조금 더 동북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 일부 유다 유민들은 이집트로 이주하여 성전을 세운다. 그 성전을 세운 지역이 엘레판린(Elrepantin) 지역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하면 출애굽시대의 행로를 추적하여 여행하는 탐방지역으로 시나이 반도를 지적한다. 시나이 반도하면 모세를 생각하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약 교회의 그림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집트 탐방 속에는 시나이 반도를 횡단하며 출애굽 시대로 시간여행(Time trip)을 하게 된다. 현재 출애굽 유적지로 추론하는 지역은 고고학적 검증을 거친 지역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출애굽 당시의 풍습들을 상상하며 이러한 환경과 지형구조였을 것이라는 피부에 와 닿는 출애굽 당시를 추론할 수가 있다. 현재 시내산(Sinai, Mt)으로 추론하는 가바르 무사(Gebel Musa, 2285m) 지역은 337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 A.D 324-337)의 어머니였던 헬레나(Hellena)에 의해 이 산을 거룩한 산(Holy Mountain)이라고 명명하고 이 지역이 정통 출애굽 순례지로 전승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순례를 하고 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시내산까지는 392㎞의 거리이다. 광야체험과 출애굽시대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코스로 생각한다. 이집트 역사탐방을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오랜 이집트 역사의 흔적보다 구속사의 현장만을 추적한다는 기준을 정하고 탐방하였음을 독자에게 알리며 이집트 탕방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576 |성경시대 역사탐방<67>| 시나이 사본의 발견지 ‘카티리나 수도원’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85)
편집부
8478 2013-03-19
시나이 사본의 발견지 ‘카티리나 수도원’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hanmail.net 세인트 카타리나 수도원(Deer Sant Kathlin) 전경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경 사본으로 학계에서 그 가치 인정해” 해발 2285m인 가바르무사(Gabal Muusa:모세의 산)를 오르기 전, 19세기부터 이 산을 오르는데 낙타를 타고 오르는 코스의 입구에는 세인트 카타리나 수도원(Deer Sant Kathlin)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수도원은 14세기경 일어난 지진으로 인하여 무너진 흔적 위에 다시 개축한 흔적이 남아 있지만 이슬람 혁명이 아랍지역을 휩쓸고 갈 때에도 파괴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보기 드문 일화를 남기고 있는 수도원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시내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카타리나 산(Gabal Kathlin)은 해발 2642m로 시나이 반도 최고봉이기도 하다. 이 산 아래 이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이 카타리나 수도원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모세의 흔적에 대한 설화 등을 기록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 사본 중 가장 권위가 있고 오래된 시나이 사본(Sinai Codex)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 사본을 발견한 사람은 독일 라이프찌히 대학의 교수인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 1815-1874)이다. 19세에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하였던 티센도르프는 신약 성경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보려고 하였으나 당시에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만으로는 많은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외국의 많은 권위 있는 도서관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지만 뚜렷한 사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외면당하고 있던 방치된 성서 사본들을 찾아나서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여행할 수 있는 재원 마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하였던 대안이 독일 정부에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는 당시의 화폐 단위로 100탈러(Taler)를 지원하여 주기로 하였는데, 당시의 5탈러가 한 가족의 일주일에 해당하는 생계비였다. 당시 그는 만족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절약하면서 쓰기로 결심하고 드디어 1840년 파리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는 파리 국립 도서관을 방문하여 4세기경 시리아 교부였던 에프렘(Ephraem)의 설교문 사본을 발견하고 그의 사본을 세밀히 분석한 그는 언젠가는 무관심 속에 묻혀있을 고대 성경 필사본을 발굴할 수 있다는 결심을 굳게 한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귀중한 고대 필사본들은 그리스 정교회(the Greek orthodox Church)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리스나 이집트꼽틱, 아르메니아 수도원에 가면 희귀한 사본들이 잠자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기대를 안고 중동지역에 산재하여 있는 동방 정교회 수도원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여행 도중 제롬(Jerom:일명 Hieronymus)이 번역한 불가타 성경(Vulgata)을 이태리 피렌체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다. 과거 제롬은 베들레헴의 한 지하 동굴(예수 탄생 교회)에 침거하면서 70인역(LXX)을 라틴어로 번역한 희귀한 사본이다. 이 사본 발견에 흥분한 티센도르프는 성경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동지역의 첫 번째 방문지인 이집트를 향하여 1844년 4월 어느 날 출발했다. 그는 마그레브(Maghreb) 지역인 리비아, 중동의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등을 여행하고 시나이 반도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카타린 수도원을 찾게 되었다. 원래 이 수도원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s)가 이 지역을 순례하면서 모세의 시내산으로 전승되어 온 이곳에 수도원을 세울 것을 명한데서 그 기원을 잡는다. 그 후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Justinianus Ⅰ483-565)가 특별히 증축하여 오늘까지 그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전설적인 수도원이다. 이곳에 도착한 티센도르프는 1844년 5월 우연히 오래된 광주리 속에 낡은 양피지 가죽 두루마리가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에 있던 당시 수도사 얘기로는 이러한 양피지를 두 더미나 이미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놀란 티센도르프는 이 자료 가운데 자기가 찾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수도사는 “이 양피지 모두를 달라”고 요청하는 티센도르프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즉시 이 양피지 문서들이 귀중한 것임을 직감한 나머지 담아둔 양피지 가운데 43책만 건네준다. 받아든 티센도르프는 남은 양피지 책들을 잘 보관하라고 부탁한 다음 마음이 들뜬 나머지 이 넘겨받은 자료를 가지고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면서 남은 양피지 자료들은 넘겨받을 심산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말 입수할 수 없게 된다면 필사라도 해서 오겠다고 결심을 하고 9년 만에 다시 수도원을 찾았다. 그러나 그 사본을 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묘안을 짠다. 그 수도원이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었기에 당시 러시아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 후 드디어 1859년 당시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2세의 후원을 받아서 수도원을 찾게 된다.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경 사본을 마침내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는 1859년 러시아 황제의 후원 하에 이 두루마리 사본을 네 권의 성서로 출간하게 된다. 그러나 1930년 러시아 혁명 이후 이 사본에 관심이 없던 러시아는 대영 박물관에 10만 파운드에 팔아버렸다. 오늘날 이 시나이 사본은 신약 성경 사본 중 가장 권위 있는 사본으로 사본학에서는 널리 인정하고 있으며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귀중한 사본이다.
575 |성경시대 역사탐방<66>|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언약의 정신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47)
편집부
11860 2013-02-19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언약의 정신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hanmail.net 홍해의 일출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없어”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께 이렇게 질문하였다.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다고 마가는 기록하였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이 말씀은 레위기서에 인용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언급을 인용하셨으며(레 19:18)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신명기 언약을 인용하신 언급임을 볼 때 이는 출애굽 당시의 언약을 구약 전체의 언약을 총괄한 것으로 선언하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음을 유의하여 보아야한다(마 22:40). 아무리 교회에 속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지 아니하면 당을 짓는 것이며,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선언이셨다. 바로 출애굽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 앞과 이웃과의 관계는 어떻게 고백되어지며 실천에 옮겨야 하는가를 교훈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10번째 재앙 이후 강퍅한 바로(아멘호텝 2세 : Amenhotep Ⅱ, 1453-1419 BC)의 마음이 녹아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로부터 출애굽한다(출 12:37). 그들은 미이라가 된 요셉의 시신을 수습하여(출 13:19) 중다한 잡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다. 이때 장정만 계수하여 60만이 이집트를 벗어났다(출 12:37-38).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때 북동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만약 이 지역으로 인도하였다면 이집트 북동지역의 수비부대와 부딪혔을 것이다(출 13:17). 히브리인들이 고센에서 나오기 전 강퍅한 바로는 돌변하여 600승의 병거를 몰고 델타지역으로 추격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밤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표적을 눈으로 목격하고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었다. 그래도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적들의 사이에 두시고 모세에게 이 백성들이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방법들을 말씀하여 주셨다. 홍해를 건넌 후 3개월 만에 지도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들은 약 1년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 언약의 백성들은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이 언약은 공동체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이 언약에 근거하여 최초의 민법에 해당하는 도덕법이 주어졌다(출 20:22-23:33). 이 법은 공동체적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제적 상황을 적용하는 법이다. 이 민법은 인간관계에서 마찰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보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민법 외에 출애굽기 25-31장, 35-40장과 레위기 1-27장, 민수기 1-10장에는 의식법이 성문화 되어 있다. 세분화 하면 법궤와 성막제도의 규범(출 25-27장), 성직의 반열인 제사장의 의복(출 28장), 제사장의 위임식(출 29-31장), 제사법의 규례(레 1-7장), 제사장의 위임(레 8-10장), 정한 것과 부정한 것(레 11-15장), 속죄일의 피와 생명의 원리(레 16-17장), 성결법(레 18, 26장), 서원에 대한 규범(레 27장) 등이다. 이러한 종교적 의식법이 하나님 임재에 대한 증거의 상징성이 언약궤에 있었다. 언약궤는 성막의 가장 깊숙한 지정된 장소로 서 지성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내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언약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 관심의 표상이었다. 신명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레위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매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신 10:8). 성막이 세워진지 한 달 이후, 12지파는 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하여 시내산을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민 1:1). 그로부터 20일 후인 출애굽 후 제2년 제2월 20일에 시작된다(민 10:11-12). 이로써 거의 1년에 걸친 시내산 체류는 끝난다. 아쉬운 것은 민수기와 신명기 광야 여정에 언급된 대부분의 장소들은 오늘날 그 위치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574 |성경시대 역사탐방<65>| 고대 이집트의 신화와 우상의 신전들_장인수 교수 첨부 파일 (689)
편집부
22773 2013-01-08
고대 이집트의 신화와 우상의 신전들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hanmail.net 룩소에 있는 카르낙 신전 전경 “기독교는 복음 외에 신전은 필요 없어”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화로 헬리오폴리스의 천지창조신화, 크놈의 인간창조신화와, 오시리스의 부활신화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비도스(Abydos)의 오시리스(Osiris)는 후일 여동생 이시스(Isis)를 아내로 맞이한다. 이들 부부는 이집트인들에게 농경문화의 기초가 되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맥주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이시스는 여인들에게 곡식을 빻는 방법과 아마실을 짜는 법, 그리고 천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오시리스는 신전을 만들고 신상을 조각하여 이집트인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얼마 후 사탄의 형상인 동생 세트(Seth)의 질투로 인하여 형인 오시리스는 동생 세트에 의해 살해당한다. 성격이 포악한 세트는 오시리스를 대신하여 이집트를 다스리겠다고 마음먹고 형의 시체를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버린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나일강에 버린 남편의 시체가 들어있는 상자를 찾았으나 세트는 그 상자를 빼앗아 다시 형의 시체를 조각내어 각지에 버렸다. 그러나 이시스는 포기하지 않고 남편의 조각난 시체를 찾아내어 완전한 형태로 연결한 후 부패를 방지하는 향로를 발라 오시리스를 소생시킨다. 소생한 오시리스는 지하세계로 돌아가 죽은 자를 다스리는 제왕이 되었고 자신을 살해한 세트에 대한 복수는 아들 호루스(Horus)에게 일임한다. 마침내 성인으로 성장한 호루스는 삼촌인 아버지의 원수 세트를 물리치고 모든 신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집트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Veronica longs, Egyptian Mythology, Library of the World's Myths and Legends(New York:Peter Bedrick Books, 1988), 56-57). 고대 이집트 초기에는 호루스신을 위한 대축제가 매우 중요한 종교행사 중 하나였다. 특별히 이집트를 통치할 새로운 바로가 등극할 때에는 의식을 맴피스(Memphis)에서 경축명절 행사로 치렀다. 이 경축행사에는 새로 이집트 통치자의 위치에 오른 바로가 어깨와 무릎을 덮는 넓은 가사를 걸치고 의식순서에 따라 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행사에 바로는 호루스 신전에 가서 참배했다. 이집트는 이외에 여러 신화가 존재했는데 우주 창조의 신 눈(Nun)이 있었다. 그는 무한(Infinity), 무(Nothingness) 그리고 무소(無所, Nowhere)로 여겨지는 신이었고 그의 아들은 아툼(Atum)이었다. 그리고 태양신 라(Ra)가 있었고 대지의 신 누트(Nut)가 있었다. 공기의 신 슈(Shu), 습기의 신 테프누트(Tefunt), 주신 아몬(Amon)이 있었다. 한 마디로 잡신 종교의 다원 사상이 이집트의 부족 종교, 즉 우상종교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신화를 근거로 하여 많은 신전들이 건축되었다. 출애굽기 1장 1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70인역(Lxx)에는 온(On)이 첨가되어 있다. 온은 당시 고센의 수도였다(W.H. Gispen, Exodus, 34). 온은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였다(Encylopedia of the Bible, 535). 이사야서 19장 18절에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태양의 성읍, 즉 헬리오폴리스를 언급하는 말로 해석한다. 이곳에는 태양신 라(Ra)와 아톰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 이러한 신전을 건축하는 데는 공식이 있었다. 탑문(塔門), 지붕이 없는 중정(中庭), 지붕이 있는 열주실(列柱實) 그리고 지성소(至聖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신전 입구에 들어서면 바닥이 높아지고 천정이 낮아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신전 안에는 일조량도 적어서 제사를 집전하는 지성소에는 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의미였다. 특별히 신왕국 시대의 바로들은 경쟁하듯 신전 건설을 개축하였다. 그후 가장 대표적인 신전이 루소 신전(Luxor Temple)과 아비도스(Abydos), 에드푸(Edfu), 텐테라(Dendera), 에스나(Esna), 코오옴보(Kom Ombo), 카르낙 신전(Temple of Karnak), 아부심벨(Abu Simble) 신전 등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이러한 신전들을 둘러보면 은혜를 입지 못한 인생들의 허망한 수고를 헤아려 볼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편지하였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 하는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사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7)고 언급한다. 모세는 모압언약인 신명기언약 설교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과 너희가 여러 나라를 통과한 것을 너희가 알며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신 29:16-17).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오랜 역사 속에 지금도 고대 이집트 신전들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솔로몬이 건축한 하나님의 성전은(966-859 BC) 기원전 586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이 파괴될 때 지성소에 있던 법궤마저 사라져 버렸다. 제2 성전이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축되고(516 BC) 헤롯대왕에 의해 성전은 화려가게 개축되었으나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Titus, AD 79-81)에 의해 돌 하나로 남김없이 파괴될 것을 예언한 주님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마 24:2). 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되도록 그대로 두셨는가? 그 해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친히 성전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마 12:6). 이 땅에서 지상 성전은 필요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표상인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다(요 2:14-21).
573 |성경시대 역사탐방<64>| 룩소, 왕가의 골짜기(Valley of the Kings)_장인수 교수 첨부 파일 (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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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25 2012-10-16
룩소, 왕가의 골짜기(Valley of the Kings)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hanmail.net 룩소에 있는 왕가의 골짜기 입구 전경 “애굽 왕들은 무덤을 건설하여 영생의 가치를 통치 이념으로 삼기도”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었던 호머(Homeros, 800-750 BC)는 그의 저서 일리아드(Iliad)에서 지금의 룩소(고대명 테베)를 가리켜 “황금이 산처럼 쌓여있고 100개의 문이 있는 호화찬란한 고도(古都)를 테베(Thebes)”라고 노래 불렀다. 테베라는 이름은 그리스식 이름인데 아문의 도시(City of Amun)라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식의 이름은 ‘노아몬’인데 구약 성경 나홈서 3장8절에 나온다.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렀으며,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70인역(LXX)에는 ‘데베’로 번역되어있다. 데베, 즉 지금의 룩소(Luxor)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7왕조(1633-1555 BC)에서 20왕조(1185-1070 BC)까지 이어지는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원래 수도로 정해진 것은 중 왕국시대였던 12왕조의 창시자 아메넴헤트 1세(Amenemhet Ⅰ, 1991-1926 BC) 통치 시기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룩소가 상 이집트에 위치하고 있는 당시 수도였는데 어떻게 출애굽시대 사건의 현장이 하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 룩소는 오늘날 카이로(Cairo)에서 750km 남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기차로는 약 11시간이 소요되며 비행기로는 한 시간이 채 못 되는 거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출애굽시대(1446 B.C)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곧 풀린다. 모세의 양모로 추정하는 하셉슈트 통치 시기(1498-1483 BC)에 그녀는 과거 힉소스 통치시기에 파괴되었던 하 이집트의 신전들을 복구하며 파괴된 도시들을 제건 하였다. 다시 한 번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 고센 지역을 부활시켰던 시기였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모세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1520년경에 헬리오 폴리스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헬리오 폴리스(Heliopolis)란 뜻은 ‘태양의 도시’라는 뜻으로 구약성경에는 ‘벧세메스’(태양의 집)로 등장한다(렘 43:13). 지금의 위치는 카이로 동북부 공항에서 카이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요셉의 통치 지역인 온(On)이란 지명도 가지고 있다(창41:50). 후일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도 이곳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제 다시 고대 이집트 영광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룩소를 조명하여 보자. 중 왕국시대 이전까지는 소위 피라미드 시대로 일컫는 피라미드와 하안신전, 장재전 등이 한 지역에 건축되었다. 그러나 신 왕국시대 이후부터는 왕가의 골짜기(Valley of the Kings)와 같은 암굴 분묘와 하셉슈트 여왕의 장재전같이 대표적인 신전으로 나뉘어져 건축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태양이 지는 나일강 서안은 사막지대이며,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사후 세계가 있는 장소이며 무덤이었다. 신 왕국시대가 도래하자 바로들은 자신들의 무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룩소 서안의 깊숙한 골짜기에 무덤군을 만들고 사후세계에서 영생할 희망을 꿈꾸며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제왕들은 살아 생전의 삶을 소중한 인생의 시기로 생각한 반면, 고대 이집트의 제왕들은 사후세계를 위하여 무덤을 건설하며 영생의 가치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건 것이다. 그러한 흔적들을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이 왕가의 골짜기이다. 그러나 금은보화의 각종 귀중한 유물들을 노리는 도굴꾼들은 이러한 바로들의 무덤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왕들의 사후 대부분의 무덤들은 도굴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무명에 가까웠던 제18왕조 시대의 젊은 바로였던 투탕카멘(Tutankhamen, 1334-1352 BC)의 무덤이 수천 년의 침묵을 깨고 1922년 11월 왕가의 골짜기에서 도굴을 당하지 않은 채 발굴되었다. 그는 기원전 1361년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9년 동안 짧은 통치를 한 후 세상을 떠난 소년 왕이다. 출애굽 사건 약 100년 후 이집트를 다스린 바로였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3-1930)였다. 그가 무덤을 발굴하기 전까지는 투탕카멘의 이름은 무명에 가까웠다. 사관 마네토의 이집트사 그 어느 왕명록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카터는 당시 유명한 고고학자에게 8년간 학문적인 수업을 쌓았다. 특별히 페트리에게 수학하며 독학으로 히에로글리프(Heiroglyphe:이집트 민용문자)를 읽는 법을 습득하였다. 그는 체계적인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가운데 유년 시절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고고학 발굴의 동지를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당시의 부호이며 귀족이었던 카나본 경(Lord Canarvon)이었다. 그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숙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자가용으로 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몸져눕게 되었을 때 담당의사가 이렇게 권고하였다. “계절적으로 따뜻한 나라로 가서 요양을 하면 몸의 건강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이집트에 요양지를 정하고 이집트로 향한다. 그가 아스완에 도착하여 필레의 이시스 신전을 돌아보다가 발굴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카터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화려한 문화와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러한 위대한 발굴도 영원을 갈망하는 인생의 해답은 되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하였느니라”(마 6:28-29).
572 |성경시대 역사탐방<63>| 기자의 대 피라미드(Great Pyramid)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918)
편집부
34269 2012-09-18
기자의 대 피라미드(Great Pyramid)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hanmail.net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피라미드 높이 146.7m의 10억 배는 지구와 태양사이 거리와 일치해” 피라미드란 헬라어 피라미스(Pyrami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고대 이집트 왕 바로(Pharaohs)의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피라미드를 메르(Mer)라고 불렀다. 피라미드의 건축 시대 기원은 고대 이집트 제4왕조 시대(2613-2498 BC)의 초대 바로였던 스네프루(Snefru, 2613-2589 BC) 통치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제4왕조를 창건한 이후에 그의 치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나 왕의 초상, 흉상 등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스네프루가 그의 선대왕 후니(Huni, 2637-2613 BC)의 딸 헤테프헤레스(Hetepferes, Qeen)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기자의 피라미드 중 제일 높은 피라미드를 건축한 쿠푸(Khufu, 혹은 케오프스, 2589-2566 BC) 왕이다. 그의 출신지는 하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Manphis)이다(Bagnall R.S, Ehypt in Later Antiquity Princeton, 1993. 98). 쿠푸의 아버지 스네프루는 이집트를 24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가공할 건축 계획을 실천에 옮겼으며 백성들을 사랑하였고 그의 선정은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사관 마네토는 기록하고 있다. 그의 별명이 ‘나라 전체에 복을 주는 왕’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건축에 필요한 재목으로 양질의 레바논 백향목을 신전 건축 목재로 사용하였다. 다슈르(Dahshur)에 있는 그의 피라미드가 2개 있는데 그 중의 1개가 스네프루 왕의 피라미드이다. 스네프루가 사후를 위하여 그의 피라미드 도시를 영구 보존하기 위한 세금과 각종 부담금을 면제하였다고 한다. 스네프루는 전 이집트의 실무행정을 위한 총리를 세워 통치하였다. 스네프루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로는 쿠푸였으며 그는 2551년 왕위에 올랐다. 쿠푸의 피라미드는 카프라(Khafra, 2547-2521 BC)와 멩카우라(Menkaoura, 2514-2486 BC)의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에 위치하고 있다. 기자는 카이로에서 약 13km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대 피라미드로 알려진 쿠푸의 피라미드는 사방의 밑변 길이가 같으며 서쪽 변이 230.36m, 북쪽변이 230.25m, 동쪽의 변이 230.39m, 밑변이 230.46m이다. 평균하여 230.365m이다. 대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73m이고 기울기 각도가 모두 52도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꼭대기 마감돌이 떨어져 나가 지금 현재의 높이는 137m이다. 밑변의 각도 역시 거의 완벽하게 90도를 형성하고 있다. 각도의 오차는 0도 3분 33이고 남서 코너가 0도 0분 33이다. 이런 대형 석재 건축물이 기원전 2500년 전에 건축되었다는 데 경이로움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를 구성하고 있는 수치들이 천체의 법칙과 행성간의 거리, 그리고 지구의 규모 등과 놀랄 정도로 일치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피라미드의 높이는 지구의 반지름과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레이엄 헨콕에 의하면 높이 146.73m의 43.200배는 지구의 반지름 6.354km와 같은 6.338km이다. 그리고 피라미드 밑변과 적도의 길이는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다. 네 밑변의 43.200배는 적도의 길이 40.067km와 거의 같은 39.807km이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높이와 지구 태양사이의 거리와 일치한다. 높이 146.7km의 10억 배는 지구와 태양사이의 거리와 일치한다. 또한 대 피라미드는 지구의 북반구의 1/3지점인 북위 30도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서 북위니 적도니 하는 개념은 먼 훗날 천문학자들에 의해 정해졌는데 어떻게 오랫 옛날 이러한 수치를 계산하였는가 하는 것은 수수께끼이다(그레이엄 헨 콕 & 로버트 보말, 윤인경 역, 창세의 수호신, 서울:까치(2007) 28). 소위 진화론자들에 의한 이 피라미드의 시대는 후기 석기시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시시대에 속한 이 시기에 인류의 지능과 과학적 수치 계산의 재능을 진화된 지능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성경에 나타난 인간창조의 역사는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지음 받은 재능은 진화된 재능이 아님을 대 피라미드는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관 마네토(Manetho)에 의하면 쿠푸의 통치시대 건축가인 헤몬(Hemon)에 의해 피라미드가 설계되었고, 헤몬은 스네프루 때의 위대한 제상 임호테프(Imhotep) 밑에서 피라미드의 설계와 건축기법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백성들이 아끼고 사랑하였던 바로 스네프루와 그의 뒤를 이은 쿠푸 왕의 선한 덕치에 감동을 받아 농한기를 이용하여 자발적으로 피라미드 건축에 지원하였다고 한다. 신의 아들 바로를 위하여 건축공사에 참여하였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Etelka, Holt, The Sphinx and the Great Pyramid, Los Angeles: Summit Univ Press. 1975. 126). 이 시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살았던 것보다 500여 년 전이었다.
571 |성서시대 역사탐방<62>|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526)
편집부
20718 2012-08-21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아타나시우스는 구원론에 근거해 삼위일체 교리의 체제 구축해” <현대의 알렉산드리아 시내 전경>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고 살아가던 유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우대를 받고 있었다. 이 정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철학에 기초한 범세계적(Cosmopilitanism) 헬라세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던 알렉산더 대왕의 정치철학에 기초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기류는 유대적 특수주의(Particularism)라고 하는 유일신앙을 가지고 있는 유대공동체에게는 크나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의 사상적 혼란 속에서 아티카 방언에 속하는 코이네 헬라어는 당시의 철학과 유대공동체 속의 신학적 표현을 사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기원전 25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의 영향 속에서 정통적 관습을 잊게 되었고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서서히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기원전 198년 파네아스(가이사랴빌립보) 전투에서 수리아의 셀레우코스(Seleucid. 198-167 BC) 왕조의 승리로 이들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히브리어와 아람어 대신 헬라어를 상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특별히 알렉산드리아는 인류 최초의 세계도시(Cosmopolis)로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항해와 무역 그리고 건축분야의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도시의 위치를 선정하고 당시 최고의 건축가 데이노크라테스(Deinokrates)에게 도시 설계를 명령하였다. 그는 이 계획된 도시가 헬레니즘 대제국의 본산으로서 아테네를 능가하는 새로운 문명의 중심지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대왕의 기대대로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상업과 교역이 번성하고 학문과 예술이 꽃을 피웠으며 동서 문명이 교차하는 국제적인 도시로 번성하였다.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도로스(Diodoros Silelos)는 기원전 60년경 이 도시를 방문한 뒤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과 규모, 부요함과 편리함 그리고 화려함에 있어 알렉산드리아에 견줄 만한 도시는 없다.” 이에 앞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270년 동안 15명의 바로를 배출하며 명성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바로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 Ⅶ 69-30 BC)였다.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클리트(Euclid)는 기하학의 원론을 집필하였고, 에라스토텔레스는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였으며, 아리스타르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헤로필로스는 인간의 시체를 해부하여 의술을 발전시켰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일식, 월식을 예측하였으며, 알마케스트는 천문학 집대성을 저술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Mouseion:왕립학문 연구소)에서 기하학을 발전시켰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들이 이곳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은 것만 보아도 이 도시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교리사에 있어 한 획을 그었던 삼위일체(Trinitas) 논쟁의 주무대였다. 당시 논쟁의 두 당사자는 아리우스(Arius, AD 256?-336)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D 296-373)였다. 4세기의 교리논쟁은 알렉산드리아가 중심 무대였으며 삼위일체 논쟁을 언급하지 않고는 초대교회사를 말할 수 없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거의 50년 동안 아타나시우스의 삶속에서 중요한 신학적 교리를 정립하는데 최대의 적수는 아리우스였는데 아리우스는 기독론의 토대를 그리스의 철학과 연관된 신학을 기초로 하는 성경해석에 그 전제를 두었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본성은 분할할 수 없는 단일성에 있었다. 그는 분할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이성적으로 볼 때 모순이라고 하였다. 아리우스는 성자를 신학적, 철학적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아들은 성부와 같은 하나님일 수가 없다. 성자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시작이 있었다. 그는 영원할 수 없으므로 “그분(聖子)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하였다. 성자는 성부와의 경계선 상에서 보아야 하며 그 본성에 있어서 창조물 영역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Thomas Marsh. The Triune God : A Biblical. Historical and Theological Study. Mystic Conn.:Twenty-Third Publications 1994. 104). 아리우스는 성자를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높여진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성자는 시간 이전에 창조되었으며 시간 밖에서 태어났다. 성경은 성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성자에게 부여한 이름은 기껏해야 ‘온유’였다.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최고의 창조물로서 차지하는 놀라운 지위를 차지하는 명예였다. 그리고 “아들은 하나님이다”는 “참으로만 아니라 이름으로만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견해에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죄에서 구원되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셔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므로 아리우스와의 논쟁에 불을 지폈다. 아타나시우스의 초점은 구원론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셔야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어야 했을까?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에게 준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 성부는 성자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셨다. 창조물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아리우스는 성자를 모든 창조물 가운데 가장 높은 존재로 묘사하였다. 반면에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가 피조물이라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능력이나 특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정의하였다(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아타나시우스는 296년경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대교주 알렉산드(Alexander, 재임 312-328)의 비서로서 교회사에 등장한다. 정통 삼위일체 교리논쟁에서 아리우스에게 승리함으로써 교회사에 그의 위치는 무시할 수가 없다. 격랑의 4세기 초 아타나시우스는 교리사에 한 획을 그으며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Concilium Nicaenum)에서 그의 주장이 정통교리로 채택되었다.
570 |성경시대 역사탐방<61>| 신학과 철학의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583)
편집부
23613 2012-07-24
신학과 철학의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꼽틱교회 설립자 마가 기념교회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설립자는 요한 마가(John Mark)로 알려져 있어” 무역도시 두로(Tyre)를 철저하게 파괴한 후 이집트로 향한 알렉산더는 이집트 해안지역의 한 장소를 지정하고 앞으로 새로운 철학과 문화의 꽃을 피울 교육도시를 세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렀다. 그후 이 도시는 그리스적 성격이 무척 강하지만 이집트의 최고 지식의 요람이 되었다. 당시 이 도시의 아름다운 수많은 건축물 중 하나가 도서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2세 필라델푸스(Ptolemyos philadelphus, 285-246 BC)가 완공한 도서관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문화의 도시를 세운다는 통치이념을 실천에 옮긴 건물이 알렉산더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이었다. 인쇄기가 없었던 시대의 문학, 역사, 지리, 수학 천문, 의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양피지(羊皮紙) 두루마리 책 70만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 마네토(Manetho, 305-246 BC)가 쓴 36권의 “이집트 역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주전 200년에서 주후 300년까지 이 도시가 그리스 세계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이곳 알렉산드리아는 세상의 어떤 도시보다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70인역(LXX)이 이곳에서 번역된 이유도 그러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도서관 이름은 무세이온(Mouseion)으로 불렸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로 지식의 전당이라는 뜻으로 박물관(Museum)의 어원(語原)이 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학자 지식인 중에는 수학자 유클리드(Eukleides), 질량불변의 법칙 이론으로 유명한 알키메데스(Anchimedes),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 등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이 활동하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헬라적 사고 방식을 가진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삶에 대한 가치관은 헬라적 사상과 생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로마와 카르다고처럼 이곳 알렉산드리아 기독교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집트의 기독교, 특별히 알렉산드리아 기독교는 철학적 이데아(Idea)를 기초로 하여 교리적 체계를 세운 바실리데스(Basilides)와 발렌티누스(Valentinus)같은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이곳 알렉산드리아 출신들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에 대하여 처음으로 접할 수 있는 자료는 주후 180년경에 나타난다. 그러나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설립자는 요한 마가(John Mark)로 알려져 있다. 요한 마가는 AD 64년 전후해서 사도 베드로가 순교한 이후 로마를 떠난다. 그후 베니스 근처에 있는 아퀼리아에서 2년을 보내며 복음을 전하다가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렀다. AD 68년 세라피스 축제일은 마침 부활주일과 같은 날이었다. 그날 요한 마가는 바우칼리스라는 곳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이때 성난 폭도들은 마가를 체포하여 길거리에 끌고 다니며 채찍을 가하고 감옥에 가두며 모진 고문을 가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요한 마가는 순교하였다. 그후 마가의 시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비밀리에 장사되었다(C.H.B.Swete. The Gaspel According to St.Mark(1998) pp.ix-xxxiii. Refutation of All Heresies VII.30). 주후 70년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봉기는 티도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후 73년경에 살아남은 반란 주모자들인 급진주의 계열의 열심당들은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하였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게 하였다. 그러자 유대 자치기구인 원로회의는 이 사태를 막기 위하여 600명의 열심당들을 감금시켰다. 그때 나머지 열심당들은 상이집트로 도피햇다. 한편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는 유대 그리스도인과의 갈등이 싹트게 된다. 유대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Vespasianus, AD 69-79)는 팔레스타인 안에서 다윗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인물들을 무조건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P.Eusebius. The Ecclesiastical History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엄성옥 역, 서울:은성(1990) 152). 세월이 흐른 후 콘스탄투누스 대제(Constantinus Ⅰ, AD 324-337)에 의한 기독교 공인이 비로소 AD 313년에 내려졌다. 오랜 박해가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을 받자 박해에서 해방이라는 기쁨보다도 분열이라는 또 다른 아픔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을 막기 위하여 황제는 AD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를 소집하여 삼위일체의 세 위격(位格)은 동일하다고 고백하고 동시에 세 위격이 한분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이었던 아리우스(Arius)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2위되심을 부인하고, 성자는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한 그의 주장은 단죄를 받았다. 이후 451년 칼케톤 공의회와 449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단성론(Monophysite)자인 아리우스파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역시 정죄를 받았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하사한 수사학(Rhetorica ad Alexandrum)이라는 웅변지침서를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과 그 목록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리케이온 컬렉션의 자연철학 목록도 있었다. 심지어 페르시아의 죠로아스트교에 관한 서적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새로운 의술서적인 히포크라테스 의학서적도 목록 속에 있었다고 한다. 신비적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도 유행하였는데 미트라교와 같은 것들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철학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다양한 학문을 탐구 수집하였는데 철학, 수학, 신학, 문헌학 등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진정한 보편적 가치(university)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정서 속에 후일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트는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듯이 철학은 그리스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교사(Schoolmaster)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준비이다.” 이렇게 언급한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위대한 교부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en)은 보이지 않는 플라톤 주의자 들이었다(Gonzal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ashville(1970) 3vols. 194).
569 |성경시대 역사탐방<60>|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새로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전경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166)
편집부
13491 2012-07-10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새로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전경 “헬리니즘 사회의 인본주의적 사고가 유대인의 가치관에 혼란 불러와” 하 이집트의 델타지역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최초로 외국에서 형성된 유대공동체(Diaspora)의 현장이다. 야곱(이스라엘)의 11번째 아들 요셉을 통하여 그의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이 전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했다. 그후 이집트의 제26왕조 프삼티크 1세(Psamtik Ⅰ, 664-610 BC)의 통치 당시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가 통치하기 이전 이집트로 이주하여온 유대인들은 나일강 지역의 한 섬인 엘레판틴(Elephantine)에 정착하고 있었다. 이곳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은 많은 문서들을 남겼다. 이 문서들에 따르면 그들은 그곳에 성전을 세우기도 했다. 남 왕국 유다가 멸망했을 때(586 BC) 일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함께 이집트로 갔다. 그후 BC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가(Ptotcmaeos Dynasty, 305-30 BC)가 들어선 이후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엘레판틴은 매력적인 거주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상인, 농부, 용병, 관리들과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유대인 관용 정책에 힘입어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70인역(LXX)이 번역되었고, 이 70인역 헬라어 성경은 이방 세계에 언약의 백성, 곧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사회의 인본주의적 사고는 헤브라이즘(Hebraism) 사상의 절대 가치관 중심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유대사회의 분열을 야기하는 동기가 되었다.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다원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헬레니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위협적인 사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이로 인하여 공동체가 이완되는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 가운데 등장한 사상가가 필로(Philo in Alexandria)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사상가인 필로의 출생과 사망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다. 대략 주전 20년경에 출생하여 5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필로는 헬레니즘(Hellenism)의 가치관인 헬라 세계에서 유대교를 체계적으로 변증하고 더 나아가 유대인들의 신앙과 사상의 정체성을 알리는데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E. R Goodenough, An Introduction to philo Judaeus, New Haven:Yale Univ Press 1980, 11-12). 주후 37년 로마제국의 3대 황제 칼리쿨라(Caligula, AD 37-41)로부터 팔레스타인 북부지역의 왕으로 임명받은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 Ⅰ, AD 37-44)는 자기가 통치할 유대 왕국을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인준을 받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경유하여 출항 계획을 세우고 이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이곳 유대인들이 존경의 표시로 그를 위한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반 유대시민들은 유대인들의 환영 연회가 끝난 다음날 알렉산드리아의 거리에서 배회하고 있는 정신 이상자를 데리고 원형극장으로 가서 시민들을 모아놓고 유대 왕처럼 옷을 입히고는 그 앞에 절을 하는 조롱을 하면서 유대인들과 아그립바 왕을 비하하는 사건을 벌였다. 이때 주동자가 아피온(Apion)이라는 그리스계 이집트인이었다. 후일 아피온은 아그립바가 카리쿨라 황제의 절친한 친구임을 뒤늦게 깨닫고 그 불똥이 자기에게 떨어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계략을 꾸미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그립바 왕을 조롱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황제를 모독하기 위함이었다’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당시 이집트의 로마총독 아빌리우스 플라쿠스(Avbilius Flaccus)에게 찾아가서 유대인 회당 안에 황제의 흉상을 세우고 황제를 숭배하게 건의하라고 제의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의 충성도를 시험해보라는 것이다. 총독은 당시 유대인들의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폭도들이 두려워 아피온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총독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총독은 유대지도자들 체포구금하고 고문까지 자행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의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인권을 모독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지도자들은 필로를 단장으로 하여 로마 원로원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그러자 이 정황을 파악한 아피온과 반 유대세력들은 동일하게 로마에 사절단을 파견하게 되었다. 칼라쿨라 황제는 아그립바의 친구였지만 반 유대인 정서에 동조하고 말았다. 이로써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과 반 유대 세력들과의 긴장 상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대결 구도가 계속 되었다. 세월이 흘러 AD 70년에 유대 열심당(Zealots)들의 반란에 의한 로마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발생했다. 이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로 유입하여 들어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과 연합하여 반 로마 투쟁을 선동하게 되었다. 이때 알렉산드리아 유대 지도층들은 이들의 선동을 반대하였으나 하층민 유대인들은 지도층들의 설득을 뿌리치고 소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은 곧바로 진압되고 말았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총독은 헬리오폴리스(Heliopolys)에 있던 오니아스(Onias) 성전을 폐쇄하여 버렸다.
568 |성경시대 역사탐방<59>| 70인경(LXX)이 번역되었던 곳, 알렉산드리아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801)
편집부
23264 2012-06-26
70인경(LXX)이 번역되었던 곳, 알렉산드리아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성채 “유대인들을 형제국가로 예우하고 신앙의 자유 보장한 알렉산더 대왕”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온화한 기후와 눈부신 햇살, 밀려오는 파도, 맑은 날씨 등은 전형적인 지중해 도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60년경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Diodorus)가 이곳을 방문한 뒤 “아름다움과 규모 부요함과 편리함 그리고 화려함에서 알렉산드리아와 견줄만한 도시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처럼 디오도로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지성적인 도시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동방원정을 떠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36-323 BC)이 기원전 331년 봄 이집트의 정통을 이은 왕으로 즉위한 후 경무장병(輕武將兵)과 사수(射手)와 근위대를 이끌고 카노푸스 나일강 지류를 타고 16개 마을이 밀집한 곳에 새 도시 하나를 건설했는데 이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이다. 그에 앞서 알렉산더는 섬의 도시 두로를 정벌하고 가자(Gaza)를 두 달 만에 함락시킨 후 이집트를 정복하러 도착했을 때, 이곳 페르시야 지방 총독이었던 마자케스(Mazaces)는 겁을 먹고 멤피스로 후퇴하였다. 이때 이집트인들은 정복자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맞이하였다. 그는 곧 이집트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이곳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가 멤피스(Memphis)에 도착하자 마자케스는 그에게 8,000달란트에 해당하는 은을 비롯한 왕궁의 재산과 이집트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이때가 기원전 332년 겨울이었다. 8,000달런트의 거액은 그 액수로만 385,000명의 사람들이 1년간 생활할 수 있는 재원이었다. 이로써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CambysesⅡ, 530-522 BC)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202년 만에 이집트인들은 비로소 페르시야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아문(Amun)의 사제들은 알렉산더를 제30왕조 초대 바로인 넥타네보 2세(NectaneboⅡ, 360-343 BC)의 아들로 선언하고, 이집트의 통치자로 공식 선언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당시 이집트에서 유명한 아문(Amun)의 신탁처가 있는 시와(Siwa) 오아시스를 방문하고 아문 신전의 시와 제사장이 아문 신을 대신하여 그를 제우스의 아들이라 환영하였다. 역사는 흘러 알렉산더가 죽고 난 후(기원전 323년 6월 13일) 곧이어 후계자들의 권력투쟁과 유산상속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다. 그중에서 가장 현명하게 처신한 장군이 지략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PtolemaeosⅠ, 305-282 BC)이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어린 시절에 펠라(Pella)에서 함께 뛰놀던 소꿉친구로 훗날 알렉산더의 신임을 받는 장군이 되었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사망할 때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를 계승한 이집트 총독직을 계승하였다. 알렉산더의 시신이 방부처리 된 체 다메섹(Damascus)에 이르렀을 때 그는 지혜롭게 처신하였는데, 알렉산더가 유언으로 시와의 아문 신전에 묻히기를 원하였다는 구실로 그의 시신을 가로챈 것이었다. 결국 알렉산더의 무덤은 세마(Sema)라고 알려진 왕궁지역에 안장하였다. 하지만 후일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14 BC-AD 14)가 이집트에 도착하여 그의 무덤에 엄숙하게 참배한 이후 알렉산더의 무덤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프폴레마이오스 1세는 내정을 정비함과 동시에 문화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의 후계자로 기원전 285년에 즉위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부왕의 정책을 더욱 발전시킴과 동시에 고대 이집트의 왕가전통이었던 근친혼을 스스로 행하였다. 이러한 관습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a Ⅶ, 51-30 BC)까지 이어졌다.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섬을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지중해 해변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했을 때 요세푸스와 탈무드에 따르면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야두아(Jaddua, 350-320 BC)가 화려한 제사장의 옷을 입고 한 무리의 제사장들을 이끌고 알렉산더를 맞으러 나갔다고 한다. 이 야두아 대제사장은 머리에 관을 쓰고 손에는 금대접을 바쳐 들고 알렉산더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가 그리이스의 최초의 왕이 되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벌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된 다니엘의 구절을 보여 주었다(이 다니엘서는 다니엘 8:5에 관한 예언을 일컫는 말이다). 알렉산더 또한 야두아 대제사장을 향하여 자기의 꿈속에서 노인을 본 일이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이후부터 유대인들과 알렉산더는 친구(filo�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일 알렉산드리아에 많은 유대인이 저주하였다는 것은 알렉산더의 유대인 배려 정책에 영향이 컸었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의 별도의 구역에 거주하면서 자기들의 신앙관습의 보호를 받았다.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는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작용하였음을 의미한다(Harold Lamb “Alexander the Great”, The Encyclopedia Amerieana. 1. 370-71).
567 |성경시대 역사탐방<58>|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출애굽 여정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252)
편집부
23553 2012-06-13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출애굽 여정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친 곳으로 추정되는 시내산 아래의 평원] “출애굽 역사 속에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뜻 숨겨져 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유목문화의 삶에서(창 46:32-34) 농경문화의 삶으로 그들의 생존방식의 사회를 변화시키셨다(창 47:3). 야곱은 이집트에서 17년을 더 살았으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의 나이가 147세였다(BC 1857, 창 47:28). 그의 열 두 아들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다(창 49:28). 야곱의 유해는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묻혔던 가나안땅 막벨라굴에 장사되었다. 야곱을 아브라함, 이삭과 함께 묻혀있는 장소에다 장사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이방의 객이 된 생활에서 언젠가 기한이 차면 가나안으로 귀환한다는 언약에 의한 것이었다(창 15:13-16, 49:29-33). 이스라엘 12지파를 중심으로 큰 민족이 형성되는 4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선조 아브라함에 의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이끄시기 위한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 지도자 모세를 예비하시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역사가 출애굽이다. 이집트에서 시작한 출애굽 역사는 민수기 33장 5-49절에 진을 친 장소가 언급되어 있다.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라암셋, 숫곳, 에담, 바닷가 믹돌 바알스본의 맞은 편, 수르광야, 마라, 엘림, 홍해바닷가, 신광야, 돕가, 알루스(Alush), 르비딤, 시내광야, 시내산호렙, 기브론 핫다아와, 디베라, 하세롯, 가데스바네아, 릿마, 림몬 베레스, 립나, 릿사, 그헬라다, 세벨산, 하라다, 막헬롯(Makheloth), 다핫, 데라(Thrah), 밋가, 하스모나까지의 진을 친 기간은 2년간이다. 그후 38년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한다. 신명기 2:1-3에 의하면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신다 :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날 동안 세일산을 두루 다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돌아가라는 말씀대로 38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가나안으로 이끄신다. 이제 그들은 이렇게 진을 치며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간다. 진친 지역은 다음과 같다. 모세롯, 브네야아간, 홀하깃갓, 욧바다, 아브로다, 에시온 게벨, 가데스, 호르산(Mountain Hor, 민 33: 37). 가데스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40년 5개월 하루 만에 도착한 지역이다(민 20:22-23). 이곳에서 아론은 세상을 떠난다(민 33:38-39). 그후 살모나, 부논, 오봇, 리예 아바림, 디본 갓, 알몬 디블라다임, 아바림산, 모압평지(The plains of Moab.민 33: 48-49)까지가 진을 친 장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명들이 성경에만 있는가? 성경 외의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BC 1504-1450)시대의 팔레스타인의 지명 목록의 일부로 카르낙(Karnak) 신전 벽에 새겨져 있는 지명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출애굽루트에 성경과 동일한 지명 네 곳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예, 디몬, 오봇, 요단 등이 성경의 지명과 일치하게 기록되어 있다(Charles R. Krahmalkov. "Exodus Ltinerary Confirmed by Egyptian Evidence, BAR 20(1994):54-62).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시고 계약법(출 20:22-23:19) 그리고 십계명(출 20:2-17; 신 5:6-21)과 제의법(출 34:14-26), 성결법(레 17-25장)을 제정하셨으며 모세를 통하여 모압 언약인 신명기법(신 12-26장)을 선포하셨다. 모세는 출애굽 40년(BC 1407) 11월 말경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바라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120세였다(신 34:5-7). 출애굽 역사 속에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 그 사실은 땅을 갖지 못한 유랑민족으로 40년을 보냈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동행하심이 있었다. 그들은 땅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이었으나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민족이었다(신 7:6-7). 이방 민족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초자연적 사건을 통하여 그들의 생존을 보장하여 주셨다. 불기둥과 구름기둥같은 초자연적 현상이 이같은 증거였으며(출 16:15-36), 먹을 수 없는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키셨고(출 15:25), 생존의 미래를 보증하는 유일한 창조주와 맺은 언약의 계약을 이어가는 백성으로서 증거를 보여주신 사건이 출애굽시대였던 것이다(신 8:12-18).
566 |성경시대 역사탐방 <57>| 투트모세 4세 시대, 가나안 정복 시대의 배경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1104)
편집부
52390 2012-04-03
투트모세 4세 시대, 가나안 정복 시대의 배경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사진설명 / 투트모세4세의 꿈의 석비(장자인 위벤세누가 죽고 자신이 바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유일한 고고학적 유물자료) 아멘호텝 2세(Amenhotop Ⅱ, 1453-1413 BC)의 무덤에서 출토된 미이라 가운데에는 그의 후계자 투트모세 4세(ThutmoseⅣ, 1419-1386 BC)의 미이라까지 동시에 발견되었다. 투트모세 4세는 아멘호텝 2세의 장남이 아니다. 아멘호텝 2세의 장남은 위벤세누(Webenseenu)였다. 그가 어떻게 해서 장자가 이어야 할 왕위에 대신 오를 수가 있었는가에 대한 이집트 고대사는 침묵을 지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4왕조 시대의 카프레(Khafra, 2558-2532 BC) 왕의 피라밋을 굽어보고 있는 스핑크스 앞의 두발 사이에 세워진 석비가 발견되었는데 이 석비에 기록되어 있는 글씨를 해독한 결과 그가 어떻게 차남으로서 왕위에 올랐는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투트모세 4세가 어린 왕자시절 기자지방으로 사냥을 나갔다. 당시에 기자에 세워져 있던 스핑크스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체 모래더미에 묻혀있었다. 그가 정오가 되어 피곤이 엄습해와 스핑크스 옆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 이때 호레마케트(Hamachet)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투트모세 4세야 내가 모래더미에서 묻혀서 고통을 당하는데 나를 모래더미에서 벗어나게 하여 준다면 왕위에 오르게 하여 주겠다”는 꿈이었다. 이때 그는 일어나 군사들을 동원하여 모래를 치웠다. 이러한 결과로 그가 왕이 되었다는 기념 석비를 스핑크스 양 다리 사이에 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비는 그의 형이었던 위벤세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그가 장남이 아닌 차남의 위치에서 왕이 된 사실을 기록하여 놓은 역사적 증거는 이 석비 밖에 없다(Delia Pomberton, The Glories of Ancient Egypt Treasures of the PHARAOHS, 「파라오 이집트의 영광」 김희상 역, 서울:2006. 74) 그렇다면 호레마케트는 어떤 존재인가? Hamachet는 지평선 위의 호루스인데 그리이스 어로는 하르마키스(Harmachis)이다. 이는 스핑크스 앞에서 매년 올리는 큰 제사를 드리는데 쓰여진 이집트의 우상신화에 나오는 이름이다(Idid., 74). 투트모세 4세는 아버지 아멘호텝의 뒤를 이어 1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당시의 종교적 도시는 요셉이 제상으로 있을 때 통치하였던 지역인 온의 헬리오폴리스였으며 호레마케트는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의 아들이었다. 그가 출애굽당시 10대 재앙으로 인하여 그의 형이자 장자인 위벤세누가 세상을 떠난 뒤 이집트 왕조의 뒤를 이어 받은 왕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스핑크스 앞의 석비인 것이다. 또한 그의 통치시기에 재무장관을 역임하였던 소벡호텝(Sobekhtep)의 무덤속에 (TT 36) 그려진 벽화에는 이집트에 조공을 바쳤던 아시아계에 속한 근동에서 온 사신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왕에게 황금과 상아를 공물로 바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형적인 시리아 풍의 복장과 턱수염 등이 그려진 아시아 귀족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Ibid., 75). 이러한 묘사들은 아시아인들에 대한 피해 의식이 출애굽 역사로 인한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그가 통치하던 시대에 아나톨리아 지방의 히타이트가 동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미타니는 히타이트에 의해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미타니는 이러한 히타이트의 위협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투트모세 4세와 동맹을 맺기로 결의한다. 미타니 왕은 동맹의 조건으로 그의 딸 무타무야(Mutemwiya)를 투트모세 4세와 정략으로 결혼시킨다. 이 여인을 바로의 정통왕비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당시의 관습상 파격적이었다. 투트모세 4세와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후일에 바로가 된 아멘호텝 3세(Amenhotep Ⅲ, 1386-1349 BC)이다(Peter A. Clayton, Chronicle of the Pharaohs, 「파라오의 역사」 정영목역 서울:까치 2009. 147. 또한 Christian Uaca, L' Egypt des Grands Pharaons, 「파라오 제국의 파노라마」 임헌역, 서울:시아출판 2001. 216-17). 그의 통치 10년기간 동안 아시아 원정을 떠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시기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동편(Trans Jorden) 지역을 방랑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특별히 그의 부친이었던 아멘호텝 2세가 갈릴리 지역까지 원정을 갔으며 팔레스타인에서 포로로 잡아온 아시아인들은 아피루(Apiru)라고 표현하여 그가 통치하였던 수도 멤피스(Memphis) 기념 석주(石柱)에도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이러한 아피루에 대하여 올브라이트 교수는 이러한 언급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아피루족의 역할과 성경 초기의 자료에 기록된 히브리인들의 역할 사이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유사성이 있어서 양자간의 관계를 의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W.F. Albright, ‘The Smaller Bath Shan Stele of SethosⅠ(1309-1290 BC)’,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No. 125(February 1952), 32). 만약 하비루와 히브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면 기원전 14세기에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였다는 것과 아마르나의 편지(Amarna Letters)나 그 당시의 다른 문헌들이 가나안 족속들에게 비친 자신들의 곤경을 묘사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자료로는 바로 앞으로 다급한 편지를 보낸 예루살렘의 왕 압두헤바(Abdukheba)와 게셀왕 말키루(Milkilu)와 그 외의 가나안 왕들의 편지들이다. 그 문서들에 의하면 침공하여 오는 하비루(히브리족) 족속들이 점점 강대하여 지자 그는 그와 다른 가나안 통치자들이 그들과 싸울 때마다 패배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바로에게 군사적 원조를 강조하였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내주 왕들은 이 땅을 하비루 족속의 손에서 지켜주소서. 그렇지 아니하면 내주 왕은 우리의 종들이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우리를 데려갈 병거를 보내어 주소서.” 압두헤바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지 못함을 이렇게 원망조로 탄원하는 글을 보낸다. “어찌하여 당신은 하루비 족을 좋아하시고 당신의(충성된) 종들을 좋아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당시 히브리인들에 의해 쫓겨난 가나안 왕 하름합(King Harmhab, 1353-1319 BC)은 이렇게 무덤의 부조에 세겨 놓았다. “외국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땅으로 쳐들어와 우리들을 멸망시키고 성읍을 황폐케 하였느니라.” 이 시기가 투트모세 4세가 통치하던 시기였다(Siegfride H. Horn, Light from the Dust Heaps, 「성서 고고학 입문」 오강남, 장수돈 공역, 서울:대한기독교 서회 1965. 62-63).
565 |성경시대 역사탐방<56> | 출애굽 당시 이집트 왕 아멘호텝2세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96)
편집부
25747 2012-03-20
출애굽 당시 이집트 왕 아멘호텝2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건축 일을 하는 목공들(아멘호텝2세 시대 _ 카이로 박물관) “모세가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대면했던 파라오는 아멘호텝2세” 투트모세 3세가 재위 말년에 이르렀을 때 하셉슈트의 강력한 섭정 아래서 오랜 고난의 세월을 보낸 탓이었는지 후계 체제를 더욱 결속하게 하기 위해 아들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53-1419 BC)을 자신과 동급의 신분으로 격상시켜 공동통치를 실시하였다. 아마 후계 체제를 빈틈없이 하기 위한 사전 계획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설의 입장에서 볼 때 투트모세 3세는 계모 하셉슈트에 의해 계승될 바로의 지위를 히브리인 모세에게 빼앗길 뻔 한 위기를 일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왕자였던 아멘호텝 2세는 어릴 때부터 체력 단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들을 보면 그가 운동에 몰입하고 있는 부조 상을 많이 발견할수 있다. 50년이 넘는 장기 통치를 하면서 이집트 영토의 국경 변방을 확장한 투트모세 3세가 145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아시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여기저기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투트모세 3세의 뒤를 이은 아멘호텝 2세는 재위 2년 4월 육로를 통하여 민첩하게 지중해변을 따라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부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였으며 마주치는 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제압하여 나갔다. 시리아 오론테스강을 건너 아버지 투트모세 3세가 정복한 땅을 이집트 국경지역으로 확고하게 만드는 신속함을 재위 초기에 보여 주었다. 아마 이 지역 반란의 중심지는 두로 지역이었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James Bakie A. History of Egypt. NY:Macmillan Company (1929) 236). 강력한 통치자로서 지도력을 보여 주었던 아멘호텝 2세는 반란 세력들을 신속하게 제압한 후 속주지역의 반란 주모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였으며 반군의 수장들을 처형하고 이들 시신들을 테베의 성벽에 전시하였다. 그리고 7번째 수장의 시신은 누비아 지방의 나파타(Napata)로 가져가 성벽 위에 전시하였는데 이는 남부지역이 국경지대였으므로 만약 누구든지 이집트에 대항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렇게 처참하게 처단한다는 경고였을 것이다. 아멘호텝 2세는 선왕을 본받아 테베에 많은 신전들을 건축하였다. 특별히 카르낙 신전(Temple of Karnak)과 나일 서쪽의 장제 신전을 아름답게 건축하였다. 그는 34년 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의 무덤은 일찍 도굴 당한 흔적이 있으나, 그의 미이라는 왕의 석관에 그대로 보존되었다(KV35호). 성경에서는 모세를 추방한 바로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에 미디안에서 목동생활을 하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준다(출 2:23). 이 시기는 투트모세 3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로 모세 역시 미디안 40년의 망명생활을 끝낼 무렵이었다. 이때 모세는 떨기나무에서 불에 타지 않는 신비한 불꽃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다(출 3:3-22).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왔을 때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협상의 대상자였던 당시의 바로 아멘호텝 2세와 대면을 시작한다. 당시의 아멘호텝 2세는 전차를 동원한 전술의 명수로 군인 정신이 투철한 통치자였다(ML; Bierbrier. The Tomb-builders of the pharaohs. British Museum Press:London(1989)). 무인형의 군주 아멘호텝 2세(일명:Amenopis)는 기원전 1450년경 1차 원정을 아시아로 떠났으며 통치 제7년경(1446 BC)에는 2차 원정을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출정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해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한 해였다. 그렇다면 이 출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기 위한 성경 외의 기록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E.H Merrill, ibid., 76) 아멘호텝 2세를 출애굽 당시의 바로로 추측할 수 있는 상당한 근거는 제18왕조 시대의 대부분 제왕들이 모두 하이집트 델타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테베에 거주하였지만, 특별히 아멘호텝 2세는 하이집트지역 종교수도인 멤피스(Memphis)에 왕도를 정하고 오랫동안 이곳에서 이집트를 통치하였다는 점이다(Hayes, ‘Internal Affairs’ in Cambridge Ancient History, 2.1, 333-34). 이 지역은 고센 땅에 가까운 지역이었으며 모세와 아론은 이 지역에서 통치하고 있던 아멘호텝 2세를 쉽게 찾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출애굽시대를 제18왕조 시대로 보는 또 하나의 증거는 모세가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돌아온 사실이다.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미디안으로 이주하였고(1486 BC) 목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훈련을 40년 간 받았다. 후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의 지도력에 항거하는 10명의 지파 대표자와 대부분의 백성들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온유한 지도자 상은 미디안에서 자신을 버리는 훈련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출 14:5-19). 아브라함이 말년에 그두라를 통해 낳은 자손(창 25:2)의 후손인 미디안 족속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목민으로 살았다. 이곳에서 모세는 이드로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얻는다(출 18:3-4).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40년 유목생활을 끝낼 즈음 애굽의 새 왕 아멘호텝 2세가 즉위했을 때 그를 이집트로 인도하였다. 강퍅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이주를 허락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은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을 예비하시고 장자를 죽이는 심판을 내리신다. 이 10가지 재앙은 이집트인들이 섬겼던 다양한 신들에 대한 심판이었다(첫째 재앙 : 나일강의 피는 나일강의 신 하피(Hapi)에 대한 징계; 둘째 재앙 : 개구리 머리를 한 신 헤크드(Hagt)에 대한 징계; 셋째 재앙 : 이는 공중의 여신 하돌(Hadol)에 대한 징계; 넷째 재앙 : 파리는 공기의 신 슈(Shu)에 대한 징계; 다섯째 재앙 : 가축의 질병은 소의 신 아피스(Apis)에 대한 징계; 여섯째 재앙 :독종은 온역진압의 신 세크멧(Sekhmet)에 대한 징계; 일곱째 재앙 : 우박은 땅의 신 셉(Sep)에 대한 징계; 여덟째 재앙 : 메뚜기 재앙은 메뚜기 재앙을 정복하는 신 세라피스(Serapis)에 대한 징계; 아홉 번째 재앙 : 흑암은 태양의 신 라(Ra)에 대한 징계; 열 번째 재앙 : 장자 심판은 수호신 아몬(Amom)에 대한 징계). 이것은 우상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출 7:14-11: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하시고 홍해를 도강하여 인도하실 그 시기 즈음(1446 BC) 아멘호텝 2세는 네게브 사막을 가로질러 갈릴리 바다 지역까지 출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재위 9년째였다(Peter A.Clayton, ibid., 145). 아마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추격하려했던 집념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564 |성경시대 역사탐방<55>| 이집트 나폴레옹이었던 투트모세 3세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253)
편집부
21679 2012-03-06
이집트 나폴레옹이었던 투트모세 3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모세와 함께 자란 투트모세 3세(룩소르박물관) 출애굽기 연대를 1446년으로 추정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1526년으로 추론할 수 있다.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 직전에 모세의 나이를 80세로 언급하고 있고(출 7:7)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의 나이가 120세였다고 신명기서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신 34:7). 이집트 제18왕조 시대의 여걸 하셉슈트가 모세를 기른 양모로 본다면 당시에 하셉슈트에 의해 정치적으로 일시 권좌의 위치에서 추출당한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1504-1480 BC)가 모세의 정치적 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투트모세 2세와 시녀 이시스 사이에 태어난 투트모세 3세는 54년을 통치한 바로였다. 그는 통치기간동안 이집트의 영토를 오늘날 터키 국경지대까지 확장한 군주였으며, 모세는 이 시기에 미디안으로 추방당하여 40년 간 족장 이드로의 사위로 광야 속에 묻혀 살면서 후일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끌 지도자 수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모세의 생애 전반부 40년은 이집트에서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지도자 수업을 이집트 궁전에서 받았다면 미디안 광야 40년의 삶은 자신을 비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격적 수업을 쌓는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출 2:15-22). 투트모세 3세 통치 초기인 첫 20년은 의붓어머니 하셉슈트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하셉슈트가 갑자기 몰락한 후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실질적인 전권을 다시 찾은 투트모세 3세는 그의 통치 첫해(1504 BC)에 치른 카데쉬(Qadeshi) 전투와 미타니(Mittani) 전투에서 승리한다.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투트모세 3세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양모 하셉슈트를 정적으로 몰아 폐위시켜 명실상부한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바로 왕족의 혈통을 계승하기 위한 정략 결혼의 대상으로 하셉슈트의 딸이자 의붓동생인 네페루레(Nepherure)를 아내로 정하고 왕비로 삼는다. 그러나 네페루네는 공동통치 11년 전에 세상을 떠나 그가 왕위에 오를 때는 아내가 없었다. 실질적인 바로로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그는 왕녀 메리트레(Merytre)를 제1 왕비로 맞아들였고 그녀를 통해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53-1419 BC)를 얻었다. 한편 투트모세 3세가 역사의 무대에 동참하기 이전 하셉슈트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을 때 모세는 최고의 지도자 수업을 양모의 보살핌 속에서 받고 있었으며, 투트모세 3세는 많은 시간을 최전선에서 군대와 함께 보낸 것으로 보인다. 하셉슈트가 이집트를 다스릴 때에는 시리아를 비롯한 레바논 지역의 지방제후들이 미타니 왕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투트모세 3세가 단독통치를 한 이후부터 이 지역까지 그의 통치가 미치게 되었다. 하셉슈트는 기원전 1483년경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여왕으로 제18왕조 전성 시대의 한 페이지를 남겼던 그녀의 죽음은 처절한 권력 낙마의 희생물이었다. 왜 그렇게 처절하게 사라져 이집트 왕조 역사 속에 문헌적 자료조차 지워졌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모세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역 현장의 감독자 이집트 관료를 죽인 모세에 대한 정보가 테베에까지 전달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정보를 듣고 투트모세 3세는 그의 의붓어머니를 탄핵하였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지도자 모세를 키워낸 인물로서 하셉슈트의 정치 생명은 이집트 역사에서 영원히 잊혀져야 할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투트모세 3세에 의해 하셉슈트라는 이름은 모든 유적과 기록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그동안 그의 미이라는 발견되지 않은 체 20세기 초였던 1920년 그녀의 빈 석관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1903년 하워드 카터(H. Carter)에 의해 왕들의 계곡 제60호 무덤에서 발견된 성명 미상의 여성 미이라를 최근 CT촬영을 통하여 부러진 치아 상태를 발견하게 되었고, 하셉슈트의 이름이 새겨진 빈 석관에서 우연히 발견된 부러진 치아와 내장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치아와 성명 미상의 여성 미이라의 빠진 어금니와 일치하는지 정밀하게 조사를 한 결과 정확하게 일치하였으며, 상자 속 내장의 DNA 검사 결과와 미이라의 DNA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하와스(Hawass) 이집트 최고 유물위원회 사무총장은 이 성명 미상의 미이라가 ‘하셉슈트의 미이라’라고 공식 발표를 하였다(최현묵, “이집트 전설의 여왕 파라오, 미이라를 찾았다”, 조선일보 2007. 6. 28일자). 출애굽 역사 15세기설을 주장하는 유진 H. 메릴(Eugene, H. Merrill)에 의하면 모세의 미디안 유배는 그가 40세가 되는 해였던 1486년이었다고 한다. 그후 투트모세 3세는 18년간 보좌에 앉아 있었으며 나이 많은 하셉슈트는 더 이상 자기의 사위이자 조카인 왕을 제거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오랜 유배 생활을 끝내고 이집트로 돌아올 때 투트모세 3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출 2:23; 4:19). 투트모세 3세는 1450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Amonhotep Ⅱ)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1450 BC, Eogene H. Merrill, Kingdom of priests, “제사장의 나라” 곽철호 역, 서울:CLC, 2005, 74-75). 투트모세 3세의 재위 기간 동안 내정에 임하는 그의 지도력은 주도면밀하였다. 그는 여러 곳에 신전을 세우고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가지고 신전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투트모스 3세는 그의 재위 50여 년 동안 17번의 원정을 하였으며 19개 지역의 왕들을 정복한 군주로 이집트의 황금기를 이룬 바로였다.
563 |성경시대 역사탐방<54>| 역사에서 사라진 하셉슈트Hatshepsout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462)
편집부
16444 2012-02-07
역사에서 사라진 하셉슈트Hatshepsout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하셉슈트(모세의 양모) 여왕의 군사들 <여왕의 장제전의 벽화> “하셉슈트 기록과 함께 모세의 기록도 사라져” 왕위의 정통을 이은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1457-1436 BC)가 나이가 어렸던 탓으로 하셉슈트 여왕(Hatshepsout, 1498-1483 BC)이 왕국을 다스리는 섭정왕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바로가 되었다. 그녀는 하이집트의 경제 수도인 멤피스(Mempis)에서 왕위에 오르고, 종교의 도시 헬리오 폴리스에서 태양신 라(La) 앞에서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공식 취임식을 올렸다(Christian Jacq. L Egypte Ancinne av jour Le Jour, “나일강 위로 흐르는 빛의 도시” 우종길 역, 서울:영림카디널, 1999, 146). 공동통치자 하셉슈트의 얼굴은 섬세하였고 걸음걸이는 우아하였고 당당하였으며 의지가 강한 여인으로 자신의 통치 철학에 반(反)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셉슈트 통치 초기에는 남편 투트모세 2세라는 위대한 왕의 아내로 일컬어지는 것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의 권력에 대한 집념은 공동 통치자로서 투트모세 3세가 후일 권좌에 앉는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투트모세 3세는 그녀의 남편 투트모세 2세와 시녀 이시스(Isis) 사이에서 출생한 서자였기 때문이다. 하셉슈트의 아버지였던 투트모세 1세는 장군으로서 군대를 편성하고 조직할 때전차병들을 다루는 기마 전차병을 양성하였는데 이러한 전차기술의 도입은 힉소스 족(The Hyksos)을 통해서였다. 병거(Chariot)는 힉소스 군인들의 첨단무기였다(Siegfried H. Horn:Light from the Dust Heaps, 「성서고고학 입문」 장수돈, 오강남 공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7, 55). 기원전 1518년 투트모세 1세가 세상을 떠나자 셋째 왕자였던 투트모세 2세가 왕위에 오르고 그의 누이이자 아내였던 하셉슈트와 함께 14년을 통치한 후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투트모세 3세는 이집트 왕실전통에 따라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재위 3년에 하셉슈트가 투트모세 3세로부터 바로의 직위를 찬탈하였다(P.A. Clayton, p. 130). 그녀는 왕위찬탈 이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섭정하면서 서서히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사망한 남편의 연인이었던 이시스(Isis)에 의해 태어난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오른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대상자에 담겨 떠내려온 어린 모세를 발견하고 양자로 삼아 모든 정성을 아끼지 아니하고 길렀을 것이다(출 2:3-10). 이러한 정황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였으며, 아브라함을 통하여 예언하신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창 12:2; 13:14-18; 15:13-14; 50:24). 순교자 스데반은 모세가 성장하는 배경을 이렇게 설교하였다.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이 능한지라”(행 7:21-22).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언급하기를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 11:24)라고 하였다. 하셉슈트는 남편의 통치 11년에서 12년이 되는 해에 네페루레(Nepherure)라는 이름의 딸을 출산했다. 한편 투트모세 2세는 부인이자 배다른 누이인 하셉슈트의 지나친 야심을 미리 알고 그가 죽기 전에 아들 투트모세 3세를 후계자로 선포함으로써 그녀의 야심을 꺾으려고 하였다. 결국 투트모세 3세는 어린시절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의 계모이자 고모인 하셉슈트가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함으로써 실질적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투트모세 3세 재위 2년이 되던 해에 하셉슈트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교묘한 정치적 공작에 의해 의붓 아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말았다(G.Dreyer, Eine Studue ThutmosisⅡ aus Elephantine, SAK 11, 1984. 489-99). 이러한 시기를 전후로 하여 하셉슈트는 모세를 양자로 삼았으며 이집트의 최고급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최대한 조치를 취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재위 기간에는 상이집트 변방 지역에 있는 문명국가 푼트와의 교역을 증대하였으며, 그녀의 딸 네페루레를 위하여 시나이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하토르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시종일관 정책보좌 역을 맡아 하셉슈트 치세를 빛내 주었던 재상 세넨무트(Senenmut)가 있었다. 그녀는 시나이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구리광산을 개발하여 국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파노피(Paophi) 달의 15일에서 26일까지 나일강의 범람초기가 지난 후 두 번째 달의 열 하루에 걸쳐 오페트(Opet) 축제를 주제하는 대대적인 절기행사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버지 투트모세 1세를 공경하였으며 아버지를 위한 예배소를 별도로 건축하기도 하였다(H.E.Winlock. Noets on the Reburial of Tuthmosis Ⅰ, JEAXV. 1989. 66). 하셉슈트는 힉소스 지배시기에 퇴락하였던 신전건물 개축뿐 아니라 기념물이 파괴된 체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었던 지역을 복구하는데 최대한 노력을 집중하였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오랫동안 힉소스 지배 아래에서 이완되었던 민심들을 수습하기 위하여 민중들 속에 파고들어 왕실과 소통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정치적 지혜들은 민중들의 세세한 불만 사항들도 경청함으로써 여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많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다. 이런 점에서 민중을 위한 정책이 하셉슈트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셉슈트 치세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 투트모세 3세는 베두윈들의 침략이 잦은 시나이로 원정을 떠나 그들을 몰아내고 돌아온다. 그리고 하셉슈트 집권이후 22년의 치세기간이 끝날 무렵 그녀는 역사 속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그녀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이 기록이 마지막이다. “치세 22년 페르트 절기 두 번째 달 제10일.” 그리고 투트모세 3세에 대한 원정기록 속에 그가 이집트를 지배하였다는 기록이 시작된 때를 기록으로 남긴 문자에는 치세 22년 페레트 절기 네 번째 달 제16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 이후 하셉슈트의 치세에 관한 기록과 문헌들은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이 파괴된 기록 속에 미디안으로 추방당한 모세의 기록도 이집트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으로 유추된다.
562 |성경시대 역사탐방<53> | 출애굽 시대의 이집트 역사 배경_장인수 박사 첨부 파일 (1368)
편집부
63268 2012-01-30
출애굽 시대의 이집트 역사 배경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The Biblical-Historical Backgrounds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하셉수트 (모세의 양모) “이집트 신왕국 시대부터 이스라엘 압제 시작”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집트학의 권위자이자, 출애굽을 15세기 연대설로 추론할 때 모세의 양모로 추정되는 하셉수트 여왕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Christiane Desroches Noblecourt)가 ‘미스터리의 여왕 하셉슈트’(La Reine Mysterieuse Hatshepsout)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그 책에 따르면 1829년 샹폴레옹이 이집트의 대표적인 유적지 다이르 알 바흐리(Deir el Bahri) 신전의 잔해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폐허더미에서 나온 고대의 문헌들 속에 하셉슈트 여왕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찾아내어 해독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하셉슈트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집트 여왕으로 20년 넘게 이집트 전역을 통치하였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리에트(Auguste Mariette, 1821-1881)는 샹폴레옹의 신성문자 해독을 바탕으로 이집트 고고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이집트학의 권위자로 프랑스 브루고뉴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던 마리에트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이집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이집트에 최초로 박물관을 건립하고 고대 이집트 유물을 해외로 반출하는 밀거래를 중단시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은 고고학자였다. 마리에트는 언어학자 샹폴레옹이 다이르 알 바흐리 유적에서 하셉슈트 여왕에 대한 고대 문헌을 해독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 지역의 두 번째 남쪽 주랑 지점에서 폐허의 일부분을 발굴하였는데 이곳에서 여왕의 재직 시기에 전설의 나라 푼트(Punt)와 무역을 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100m이상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위치한 이 유적의 북쪽에는 하셉슈트 신전이, 남쪽에는 멘투호테프 2세 (Mentuhotep Ⅱ, 2060-2010 BC)의 신전 폐허가 남아 있었다. 이 유적이 체계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주랑 부위의 부조와 일부만 무사한 신전 내부의 모습들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왕가의 계곡에 남아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 반면, 유독 하셉슈트 여왕(Hatshepsut, Queen, 1498-1483? BC)과 관련된 조형물들과 문헌들만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체계적으로 여왕의 통치시대에 관한 흔적을 지워버렸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되었다. 그밖에도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과 상이집트에 그녀가 세웠던 다른 기념물에도 처참하게 파괴되고 동일하게 조직적으로 훼손한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이러한 파괴를 조직적으로 명령한 이집트의 바로는 다름 아닌 그의 양자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1504-1450 BC)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생전의 하셉슈트는 의지가 강한 여왕으로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세력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 투트모세 2세(Thutmose Ⅱ, 1518-1504 BC)는 제18 왕조시대(1570-1293 BC)의 제4대 바로였다. 과거 18왕조의 창시자 아흐모세 1세(Ahmose Ⅰ, 1570-1546 BC)는 셈족의 통치자 힉소스족을 몰아낸 영웅이었다. 투트모세 2세는 150여 년의 힉소스족 지배 아래 있던 이집트를 해방시키고 강한 이집트를 만들기 위하여 강력한 이집트 건설을 국정수행의 최고의 지표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 세케넨레 2세(Seqenenre Teo, 1574 BC?)는 힉소스와 치열한 전투 끝에 치명상을 입고 전사한 흔적이 그의 미이라에서 발견되었다. 세케넨레 2세의 미이라는 1881년 다이르 알 바흐리의 왕실 보관소에서 발굴하였는데 그의 미이라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흔적이 남아있었다(P.A. Clayton, Chronicle of the pharaohs, Thomes and Hudson Ltd. London, 1994, 122). 그 미이라는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아들 아흐모세 1세에 의해 강력한 제18왕조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힉소스족이 이집트에서 축출된 다음 같은 셈족 계열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출 1:8). 그리고 당시 바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출 1:9-10). 이집트 역사 왕조사 중에서 이 시대를 신왕국시대(New kingdom 1570-1070 BC)로 분류한다. 아흐모세 통치 기간은 25-26년 간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25년 4개월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들 아멘호텝 1세(Amenhotep Ⅰ, 1551-1524 BC)는 25년을 통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이집트 고고학계의 정설이다. 그의 미이라는 1881년 왕실 미이라 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하셉슈트의 아버지 투트모세 1세(Thutmose Ⅰ, 1524-1518 BC)는 선왕 아멘호텝 1세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았던 군인이었다. 그는 아멘호텝 1세의 통치 말기에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였는데, 아흐모세 1세와 네페르타리 왕비(Nepertari Queen) 사이에서 태어난 아흐모세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왕위 계승을 위한 정략 결혼으로 보인다. 투트모세 1세는 약 6년 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는 아비도스(Abydos)에 있는 그의 커다란 석비에 그곳에서 벌였던 광대한 건축 사업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나는 해가 지는 땅 끝까지 이집트의 경계를 넓혔다. 그리고 이집트를 모든 땅 가운데 가장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그 후 투트모세 1세가 기원전 1518년 사망하자 왕권을 계승한 이는 그의 3번째 왕자인 투트모세 2세였다. 그는 선왕과 서열이 낮은 무트네페르트 공주(Mutnefert, Princess) 사이에서 난 아들로, 그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왕위 계승자였던 두 왕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투트모세 2세는 자신의 취약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투트모세 1세와 아흐모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인 배다른 누이인 하셉슈트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즉 근친 결혼을 한 것이다. 이들의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자신의 짧은 통치기간 동안에 전적으로 건축에 매진하였다는 역사적 자료를 볼 때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자신의 재임 기간에 건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출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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