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왕궁.jpg<성경시대 역사탐방 19>

앗시리아 제국의 제2 수도 니므롯(Nimrud)



<장인수 박사(D.Min Ph.D)>


"앗시리아의 역사는 성경 시대와 맥을 같이하고 있어"





기원전 1274년 왕위에 오른 앗시리아의 제77대 왕 살만에셀 1세
(Shalmaneser 1265-1235 BC)가 칼루라고 불리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구약
성경에는 칼루를 칼라로 기록하고 있다(창 10:11-12).



칼루를 수도 니므롯으로 재건해



앗시리아의 히브리음은 앗수르이며, 그리이스 음은 앗시리아인데 성경에는
앗시리아의 국민들과 나라 이름과 영토까지 일컬어 앗수르라고 불렀다(창
10:22; 대상 1:17; 왕하 15:19; 16:7-8; 대하 28:16-21; 느 9:32; 시 83:8;
사 7:17; 렘 2:18; 겔 16:28; 호 5:13).
오랜 세월이 흘러 기원전 885년에 왕위에 오른 앗시리아의 제101대 왕 앗수
르 나시르팔 2세(Asshur-nasirpal . 883-859 BC)는 칼
루를 재건하고 후일
앗시리아 제국의 보고가 된 앗수르 나시르팔 왕궁을 건축한 다음, 수도를 이
곳 칼루로 일컬어진 니므롯으로 옮기게 된다.
앗수르 나시르팔은 잔인무도한 군주로 수천명의 포로로 잡힌 적국의 포로민
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이러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반
면에 그는 지혜로운 행정가로서 하층민들을 향한 복지정책에도 심혈을 기울
였다. 신전들을 건축하고 곡물창고를 지었으며 운하를 건설하고 각종 과실수
들을 심었다. 그리고 군대의 조직과 제도를 개편하고, 이 새로운 수도의 이
름을 칼라니므롯으로 칭하였다.
그는 이곳에 화려한 궁전을 지었으며, 각국에서 포로로 끌려온 예술인들을
이용하여 수려하고도 웅장한 건물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정복한 나라에서 수
탈한 수많은 보물들을 보관하는 수장고도 건축하였다. 그의 이 화려한 궁전
은 고고학자 레이야드(Layard)에 의해 발굴되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화려한 궁전의 입구를 장식하는 성문 맞은 편에는 망대를 세웠고, 그는 앗시
리아에 반기를 든 반란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며 가죽을 벗기고 망대의 기둥
에 걸어놓았다.
그의 후계
자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858-824 BC)가 등장하여 한편으
로는 그의 부친이 확장하여 놓은 영토를 수호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국을 확
장하기 위한 영토 확장 계획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정책의 지표를 잡
기 시작한다. 항상 군사 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였고 신무기 개발에도 끊
임없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살만에셀은 정복 야욕의 방향을 아람나라에 촛점을 맞추었다. 비트아디니
(Bit-Adini)를 정복한 후 세 번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곳을
완전하게 정복한다. 그후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기 위하여 발하닷(Barhadad)
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때(성경에는 벤하닷으로 기록함. 렘 49:27; 대하
16:2-4) 이스라엘 왕 아합을 비롯한 12왕의 연합군대와 부딪히게 되었다.
이 전쟁은 승부가 나지 않는 치열한 전투였다. 아합왕이 라못길르앗(Ramoth-
Gilead)에서 사망하고(853 BC) 또한 하사엘(Hazzael)이 발하닷(Barhadad)
을 암살하여 서쪽지역의 연합군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살만에셀은 아람고원
지역을 비롯한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와 길리기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다. 그후 12년의 세월이 흐른 뒤 살만에셀
에게 세금을 바쳤던 수 많은 식민
국가 가운데 이스라엘의 왕 예후의 기록이 석비에 남아 있다(왕하 9-10장).
살만에셀 3세의 연대기에 기록된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
다. "나의 통치 18년되던 해에 나는 유브라데 강을 16번이나 도강하였다. 다
마스쿠스(다메섹)의 하사엘은 수많은 자기의 병사들을 신뢰하고 있었으
나.... 나는 그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요세화된 부대의 군대 16000
명의 적들을 무찔렀다. 나는 그에게서 1,121대의 전차를 파괴하였으며, 470
마리의 말과 막사를 전리품으로 소유하였다....나는 두로인에게 시돈인에게
그리고 오므리의 후손인 예후에게서 조공을 받았다."
이러한 비문 기록과는 달리 구약성경은 앗시리아에 대하여 부정적인 묘사로
기록하고 있다(왕하 8:9-13). 칼루의 성읍이 니므롯으로 불리워진 데는 다음
과 같은 그 기원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
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
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
라"(창 10:8-12).
레센으로 추측되는 지역은 모술남쪽 28km 지점에 있는 산등성이 큰 돌들이
높이 200m의 산정상에서 500여m 거리까지 뻗쳐 있다. 하지만 그 옛날 견고
한 성읍의 폐허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황량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니므롯의 지형은 사다리형 모양으로 그 주위에는 8km의 성벽이 있었으며 인
구는 63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강물의 물길이 4km 물
러가서 흐르고 있는데 당시에는 티그리스강이 니므롯 도성 중앙을 향하여 흐
르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앗시리아의 운명은 디글랏 빌레셋 3세(Tigalath-Pileser 744-727
BC)와 함께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앗시리아는 수도 니네베가 함락당한
기원전 612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한지 110년만에 앗시리아는 신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앗시리아의 최고의 신은 아슈르(Asshur)였는데 이 우상을 자신들의 주신(主
神)으로 섬겼다
. 한 무리의 여사제들이 여신을 섬겼는데, 이들은 공물을 바
친 남성들에게 성관계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오늘날로 보면 창기들과 다
름이 없었다.



신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돼



왕을 위한 의식으로 시작된 점술과 점성술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운명을 예
언하기도 하였다. 마르둑(Marduk)의 아들 나부(Nabu)는 학자들과 각 도시의
서고를 주재하는 신(神)으로서 행정의 신으로 섬겼다.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521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22>| 메소포타미아 지역 역사탐방을 마치고 (200)
rpress
10321 2010-02-03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59jang.jpg메소포타미아 지역 역사탐방을 마치고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일찍이 그리스인들은 이라크 지역을 ‘두 강(티그리스, 유프라테스)사이의 땅’이라는 이름의 뜻을 갖고 있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로 이름 지었 다. 그리고 이들은 인류 초기 역사의 눈길을 근동(Near East) 메소포타미아 로 포커스(focus)를 맞추었다. 문명 꽃피웠던 메소포타미아 수많은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아픔과 영욕의 세월을 견디어낸 지역으로 인류 문명의 꽃을 피웠던 그리고 최초의 설형문자를 창안하였던 메소포타미아 지 역의 답사를 이제 마무리하고자 한다. 호주의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가 ‘도시혁명’이란 명칭을 붙였던 인류 최초 의 도시국가 수메르(Sumer)가 있었던 지역, 그리고 일반은총 속에서 하나님 께서 허락하여 주신 보편양심의 법전인 우르남무의 법전이 만들어진 지역이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이다. 수메르인이 세운 도시국가 라가쉬(Lagash)와 움마(Umma)의 왕이 키쉬(Kish) 의 왕 메슬림(Meslim)의 중재 아래에 국경분쟁의 종식에 합의하였다는 최초 의 국가간 분쟁을 타협한 문서의 기록을 남긴 지역이 또한 이곳 이라크 지역 이다. 수메르를 통합한 셈계의 아카드왕국인 우르의 제3왕조시대의 황금기를 이룬 우르남무(Urnamu)시대에 아브라함이 고향친척을 떠나 북쪽 스텝지역인 하란 (Haran)으로 여행을 떠난 출발지이기도 하다(2100 BC). 함무라비법전을 남긴 아모리인들, 바빌로니아의 전통문화를 계승한 카사이트 (Kassite) 왕조(1530-1150 BC)가 기원전 1220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609년 신바빌로니아로 역사의 바톤을 넘겨주었던 앗시리아인 들은 ‘공중정원’이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유적을 남겼다. 찬란한 문명 을 꽃피웠던 신바빌로니아는 기원전 586년 남 유대왕국을 정복하고 지도급 유대 유민(Free Man)들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이렇게 숱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오랜 역사의 주역들로 이 땅을 주름잡았던 흔적들을 남겼던 지역이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이다! 기원전 539년에는 신바 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인들이 이곳을 지배하였다. 이라크 지역의 역사 탐방을 끝낸 이후 필자는 고대 아리안(Aryan)인들로 불 리웠던 페르시아의 찬란한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려고 한다. 메데와 페르시아 가 처음으로 역사의 기록에 나타난 때는 카스피해(Caspian Sea)지역에 대한 샴시-아다드 5세 원정기록이다. 오랜 세월동안 페르시아와 그리이스의 전쟁의 상흔은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 서 영욕이 교차하는 흔적들은 이 지역에 남겨놓았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부 관 셀류쿠스 1세 니카드(Seleucus Nicator. 312-65 BC) 장군에 의해 이 지역 은 그리스의 셀류쿠스 왕조시대를 열게 된다(312-65 BC). 셀류쿠스 왕조시대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제 국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고 그후 동, 서 로마로 분리되면서 이 지역의 기 독교는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안(Nestorian) 파의 지역으로 남는다.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정복한 것은 7세기경이다. AD 632년 무하마드가 창시 한 이슬람은 빠르게 근동지역을 정복하였고, 이 지역도 그들의 지배 아 래 들 어가게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2대 정통파 칼리프 우마르(AD 634-644)는 AD 637년 이란의 사 산왕조를 정복하면서 바그다드 남쪽지역인 카디시아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 다. 페르시아 남부지역인 바스라(Basra)는 우마르가 638년에 건설한 도시이 다. 이어 657년에서부터 88년 동안은 무하마드 이후 이슬람제국의 통치권을 둘러싼 치열한 내전을 치르게 된다. 압바스조(朝) 치하에서 이슬람화 되었던 이라크는 1258년 징기스칸의 몽골군 에 의해 초토화된다. 징기스칸의 손자 훌라구(1217-1265)는 압바스조의 수 도 바그다드를 침략하고 압바스조를 정복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이때 몽골군 의 침략 아래 대학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1253년 가을, 몽골 고원에서 출발한 몽골군은 1255년 가을 사마르칸트를 거 쳐 1258년 2월 바그다드를 초토화시킨다. 이슬람 왕조의 역사는 정통 라쉬 둔 왕조(Rashidun Caliphate),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의 역사로 나뉜다. 만약 네스토리안(Nestorian)파 의 단성론자들이 이 지역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더라면 역사의 흐름은 달라졌 을 것이다. 아브 라함의 고향이 있던 우르지역과 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의 유민들이 제사 장 중심의 유대교(Rabbinic Judaism)로 계약신앙의 성전중심 사상이 토라중 심의 언약신앙으로 한 단계 발전하였던 시기를 제공하여 준 지역이 이곳 바 빌로니아이다(586-516 BC). 바빌로니아 유민 이후, 유대인들의 신앙은 제사장들에 의해 전통을 유지하 며 계약신앙의 맥을 이어왔다. 그들의 위치는 페르시아(Persia) 제국에 의 해 그 정통성이 인정되었고 페르시아 시대가 종말을 고한 후 하나님의 섭리 는 코엘레 시리아(Coelesyria)의 지배자가 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인 헬레니즘 왕조의 통치자들의 관용주의(Cosmopolitanism)의 사상으로 말미암 아 유대민족의 정통신앙을 말씀중심의 계약신앙으로 승화시킨 동기를 만드셨 던 것이다. 유대 땅의 지배를 기원전 198년까지 통치하였던 프톨레미 왕조시대에는 70인 경(Septuagint)으로 알려진 그리이스어 역본(Koine Greek)이 있어서 당시의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시대에 구약성경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구약성경 사이의 중간기 역사는 신약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가치 를 평가하는데조금도 인색할 수가 없다. 중간기 시대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 들로는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Manetho),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를 비 롯해 폴리비우스(Polybius)의 역사서, 유대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와 필로(Philo)의 저서들 그리고 유대교의 외경들과 위경들이 있 다. 또한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발견된 사독의 문서들(Zadokite documenth)도 있다. 신구약 중간시대 역사자료 풍부 메소포타미아의 여행을 마치고 이제 다음호부터는 페르시아 역사탐방의 세계 에 들어가 보자!
520 no image |포토에세이| 옛이야기-노부부(老夫婦)_전우식 장로 (76)
rpress
6949 2010-02-03
519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21>| 니네베(Nineveh)와 앗시리아의 멸망 (100)
rpress
11703 2010-01-13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58janginsu.jpg|성경시대 역사탐방| 니네베(Nineveh)와 앗시리아의 멸망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니네베의 계절적 약점은 1년내내 서쪽에서 심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이 다. 이러한 계절적 약점을 이용한 갈데아 메데 연합군들은 니네베성의 서문 밖에 마른 풀을 산같이 쌓아올리고 불을 질렀다. 갈데아는 화공으로 니네베 공략해 강열한 불길은 니네베성 안으로 불기 시작하여 맹렬한 기세로 성읍을 불바 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원전 612년 니네베성은 완전히 연합 군 에 의해 멸망당한다. 지금도 니네베성 서문과 그 주변은 성벽이 불에 타 검 게 그을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니네베성 함락 이후 앗시리아 영토는 니네베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메데 왕 국, 남으로는 신 바빌로니아 제국으로 분리되었다. 지금도 이곳에 메데의 후 예들인 쿠루드족이 거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에도 메데의 후예인 쿠 루 드족과 갈대아인들, 즉 길다니안(Childaeanian)으로 불리우는 그들의 우호 관 계는 계속되고 있다. 니네베가 함락된 후 앗시리아인의 유민들은 하란(Haran)으로 이주하여 앗수 르의 발리트를 왕으로 세워 명맥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세운 지 3년후 신 바 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사르에 의해 기원전 609년 완전히 멸망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현재 앗시리아인들의 후손들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가? 오랜 역사의 풍상 속에서 살아남은 앗시리아인들은 소수이지만 남아 있다는게 사실 이다. 현재 앗시리아와 유럽 그리고 미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오늘날 이라크 북부 도시 모술 북부지역에 아슈리안으로 살고 있으며 이들 중 대부 분은 기독교 신앙을 독실하게 지키고 있다(아르메니안교). 니네베는 고대 도시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니네베는 이라크의 수 도 바그다드에서 서북쪽 약 35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니네베에는 두 개 의 언덕이 있다. 하나는 큐우닉 언덕이고 또 하나는 텔네비 유누스 언덕이 다. n 큐우닉 언덕의 발굴은 1820년부터 1932년까지 계속되었다. 발굴이전까지만 하여도 니네베에 대한 서구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성경안에서만 기록되어 있 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842년 보타(Botta)에 의해 니네베 북쪽 끝 지역 코르사밧에서 사르곤 2세의 궁전폐허가 발굴됨으로 성경의 기록(사 20:1)이 사실이라고 증명되었다. 강을 끼고 고대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일구어 내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앗 시리아의 유목민들에 의해 근동의 부대가 등장함으로써 서서히 약화되기 시 작한다. 북방 고원지대에서 발원한 앗시리아 문명은 문명사회였던 기존 농 경 문화의 중심부를 정복하면서 세력을 확장한다. 이들이 이렇게 역사의 무대 에 등장하게 된 것은 준마가 이끄는 가벼운 전차의 개발에서부터 시작하였 다. 유목민들의 장점은 이동문화의 발달과 폭넓은 시야를 바라볼 수 있는 정보 망의 다양성이 농경문화를 앞서게 되었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강력한 집단 의 장점을 소유하고 있었던 정착문화의 잇점을 알고 있던 유목민들은 그들 의 약점인 집단성을 공유하기 위하여 길을 닦았으며 신속한 군사이동을 위 하여 전차 를 개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차전의 기술을 급속하게 발전시켜 파죽지세로 약소국들을 정복하여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앗시리아인들은 정 복한 다수의 지방농민들 중에서 전투병을 징집하여 원활하게 국토를 확장하 는 군사력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이들은 그들의 장점과 농경문화의 좋은 조직과 제도를 융합하는 정책 을 앗시리아의 역대 왕들은 활용하였다. 그리고 기마병을 훈련시켜 신속하 게 군사작전을 민첩하게 이용하는 기술도 앗시리아는 개발하였다. 기마혁명 의 기원을 이룬 제국이 앗시이아였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87대 왕 디글랏 빌레셀1세(Tiglath pileser Ⅰ, 1157-1077 BC) 는 앗시리아 북쪽 아르메니아와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의 모든 도시들과 남쪽의 바빌론을 정복하여 명실공히 앗시리아 제국으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되 었다. 그러나 기원전 612년 갈대아 왕국인 신바빌로니아의 공격을 받아 멸 망함으로써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황폐화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앗시리아의 마지막 시대의 제왕 앗슈르바니팔(Ashurbanipal, 668-629 BC)은 역대 앗시라의 왕중 가장 온순하고 지적인 왕이었다. 역대왕 중 가장 문학 에 조예가 깊었으며 앗시리아 왕들 중에서 드물게 고어(古語)에도 능통하여 과거의 역사를 탐구하는 학자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부친 에살핫돈 (Esarhaddon, 681-669 BC)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날 때 그에게 모든 국정을 위임할 정도로 지도자 수업을 철저하게 받았다. 부친이 사망하였어도 커다 란 정변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경험이 크게 바탕이 되었을 것이 다. 당시 바벨론 속주 지방 총독으로 있었던 그의 이복형 샴미시슘 우칸이 반란 을 일으켜 제국의 중심부에 정치적 치명타를 입히자 아슈르바니팔은 형에 대한 신뢰가 증오로 변하게 되었다. 곧 바로 형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3년 의 장기전을 치르게 된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샴미시슘우칸은 스스로 자결 하여 버리고 만다(649 BC). 이러한 전쟁의 상흔은 앗슈르바니팔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주었고 결국 지도력을 상실한 그에게 아라비아 나바테아 카타르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국력은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722년에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포로로 잡아간 북 이스라엘의 10개 지파의 후예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아마 그들은 이교도들인 앗 시리아인들 및 토족들과 잡혼을 하고 신앙을 버리게 됨으로써 언약민족에서 영원히 사 라져버리고 말았다. 북 이스라엘 왕국 후예들도 사라져 앗시라아는 기원전 1813년 샤마시아다드 1세(Shamash Adad, 1813-1781 BC) 를 마지막으로 장구한 유목민 지배는 역사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518 no image |포토에세이| 태양과 나팔소리_태양과 나팔소리 (73)
rpress
7121 2009-12-29
517 no image |포토에세이| 서 설_전우식 장로 (7)
rpress
5530 2009-12-02
516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20>| 앗시리아 제국의 제4수도 니느웨_장인수 박사 (198)
rpress
13643 2009-11-04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53sung.jpg성경시대 역사탐방 앗시리아 제국의 제4수도 니느웨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모술에서 니네베 서문 북쪽으로 18km를 지나 넓은 구릉지대에 있는 지하 1m 정도의 아래에는 방치된 채 폐허로 남아있는 옛 왕궁 터가 있다. 이곳이 앗 시리아의 제3의 도시 코르사바드(Khorsabad)이다. 이곳은 앗시리아 왕들의 이름이 기록된 왕명록이 발견된 곳이다. 앗시리아 제3수도 코르사바드 왕궁터에서 조금 떨어진 구릉에는 땅속에 묻혀있는 성체에서 떨어져 나온 석 재 유물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앗시리아의 사 르곤 2세(Sargon Ⅱ, 722-705 BC)가 기원전 706년 세 번째로 도읍지를 옮긴 지역이다. 옛날 수도의 원지명은 ‘두르-사르킨’(Dur-Sarkin)이다. 앗시리 아 제국의 번성 을 기대하면서 사르곤이 건설한 제3의 수도였다. 그러나 그는 이곳으로 도읍을 정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아다톨리아의 신흥 세 력인 김메리아 부족들을 토벌하던 중 전사하여 버리고 만다. 성경에는 고멜 로 나오는 지역이다(창 10:3; 대상 1:5-6; 겔 38:6). 사르곤 2세는 전사하기 7년전 수도를 칼라로부터 두르-사르킨으로 옮길 계획 을 세웠다(713-707 BC). 그리고 칼라에 세워진 수도와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 도록 건축하였다. 머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조각하였으며 몸체는 황소의 모습 으로 조각한 석상이 성문에 수호신처럼 늘어서 있었고 2,400m나 늘어선 웅대 한 성벽은 설화석고로(Alabaster) 장식하였다. 이후 사르곤 2세는 사마리아, 즉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722 BC) 이스라 엘 지도층 인사들 27,290명을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방의 하볼강가로 강재 이 주시켰으며 그후 더 먼 곳인 메대와 할라(왕하 17:6)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후 이들에 대한 역사는 잊혀져 버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떠나버린 사마 리아 지방에는 시리아 오론테스강 유역에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시리아인들 과 구다와 바빌로니아인들이 강제로 이주되어 살았다. 후대의 고고학자들이 앗시리아 유적을 발굴하던 중 독특한 상자 하나를 발견 하였다. 발견된 상자는 상아빛과 적갈빛의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상자 속에는 밀랍으로 만들어진 예언서가 들어 있었다. 글씨는 설형문자로 쓰여 져 있었는데 사르곤 2세때 기록된 것으로 시의 독창적인 문체로 기록되어 있 었다. 사르곤 2세가 9차 원정을 끝낸 이후 앗수르 신에게 서신형식으로 보고 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사르곤 2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제국 각 지역의 반감을 일으키는 동기 가 되었다. 특별히 사태가 심각하였던 지역은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 지역이 었다. 당시 이집트는 여러 지역과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는 갈데아인들이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있었던 때였다.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어 켄나케리브(Sennacherib, 704-681 BC, 성경은 산헤 립으로 기록함)이 왕이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그를 악인으로 묘사하고 있으 나 아이러니 하게도 힐렐 학파에서는 힐렐을 가르친 스승의 조상이라고 불렀 다. 성경에는 그를 하나님이 쓰신 도구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기록하고 있으 며 이집트 전투에 승리한 것도 하나님의 작정이 라고 언급하고 있다(왕하 19:20-25). 켄나케리브에 의해 앗시리아의 수도는 다시 니네베로 옮겨진다. 그는 이곳 에 인공호수를 건설하고 티그리스 강물을 끌어들여 이 물길이 성내로 흐르도 록 하였으며 퇴락한 도시 곳곳을 개축하고 방이 71개나 되는 자신의 왕궁도 건설하였다. 니네베 주위에는 길이 12km의 성벽을 쌓았는데 이성의 구조는 잘 다듬은 돌 을 성벽 바깥 면에 쌓고 안쪽에 진흙벽돌을 15m-45m로 받쳐 쌓아 올렸다. 그 리고 성위로는 성곽을 따라 도로를 만들고 이 도로를 한 바퀴 돌면 니네베 성을 다 조망하여 볼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위치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며 평지에 세워진 동쪽과 북쪽 성 벽의 높이는 10여m에 이르나 티그리스강이 앞을 막고 있는 남쪽과 하천이 흐 르던 서쪽성벽의 높이는 그보다 다소 낫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벽을 따 라 8m마다 망루를 세웠고 성문은 모두 15곳을 건축하였다. 니네베의 전성기 에는 인구 12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으며 당시의 최강국 앗시리아 제 국의 도읍으로 근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켄나케리브, 즉 산헤립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는 지역을 평정하 고자 원정군 을 이끌고 소아시아인 아나롤리아 일대를 정복하고 지중해 연안을 따라 시 돈, 두로, 아쉬켈론 등 지중해 연안 도성을 차차 정복하며 그들을 앗시리아 제국의 식민지로 합병시켜 나갔다. 연이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중 의 역병으로 인하여 공격을 포기하고 철군하여 니네베로 귀환한다. 이 사건 을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앗시리아 군대 18만 5000명을 치셨다고 기 록하여 놓고 있다(왕하 18:13; 19:35). 산헤립에게는 아랍여인인 왕비 나키아(Naquia) 소생의 에살핫돈이란 출중한 왕자가 있었다. 그가 후일 왕위에 올라 앗시리아를 통치한다. 왕위에 오른 에살핫돈(Esarhaddon, 680-669 BC)에 대한 성경기록은 열왕기하 19장 36절 에 기록되어 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룩의 신전에 서 경배하던 도중 아드람멜렉과 사례셀이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땅으 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후 에살핫돈의 뒤를 이은 제113대 왕 앗수르바니팔(Ashrubanipal, 669- 629 BC) 은 멀리 이집트를 원정하 여 반란을 진압하고 엘람을 불태우며 제국 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전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신바빌로니아의 갈데아(Chaldea) 지도자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625- 605 BC)와 메데(Mede)의 카악사르레스(Cyaxares)의 연합군의 세력에 의해 앗 수르와 니므롯은 패망하고 말았다. 갈데아 나보폴라사르에 패망해 이로써 오랜 세월의 영욕을 거듭하였던 유목국가 앗시리아 제국은 역사를 뒤 로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Selected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9>| 앗시리아 제국의 제2수도 니므롯_장인수 (19)
rpress
7797 2009-10-21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왕궁.jpg 앗시리아 제국의 제2 수도 니므롯(Nimrud) "앗시리아의 역사는 성경 시대와 맥을 같이하고 있어" 기원전 1274년 왕위에 오른 앗시리아의 제77대 왕 살만에셀 1세 (Shalmaneser 1265-1235 BC)가 칼루라고 불리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구약 성경에는 칼루를 칼라로 기록하고 있다(창 10:11-12). 칼루를 수도 니므롯으로 재건해 앗시리아의 히브리음은 앗수르이며, 그리이스 음은 앗시리아인데 성경에는 앗시리아의 국민들과 나라 이름과 영토까지 일컬어 앗수르라고 불렀다(창 10:22; 대상 1:17; 왕하 15:19; 16:7-8; 대하 28:16-21; 느 9:32; 시 83:8; 사 7:17; 렘 2:18; 겔 16:28; 호 5:13). 오랜 세월이 흘러 기원전 885년에 왕위에 오른 앗시리아의 제101대 왕 앗수 르 나시르팔 2세(Asshur-nasirpal . 883-859 BC)는 칼 루를 재건하고 후일 앗시리아 제국의 보고가 된 앗수르 나시르팔 왕궁을 건축한 다음, 수도를 이 곳 칼루로 일컬어진 니므롯으로 옮기게 된다. 앗수르 나시르팔은 잔인무도한 군주로 수천명의 포로로 잡힌 적국의 포로민 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이러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반 면에 그는 지혜로운 행정가로서 하층민들을 향한 복지정책에도 심혈을 기울 였다. 신전들을 건축하고 곡물창고를 지었으며 운하를 건설하고 각종 과실수 들을 심었다. 그리고 군대의 조직과 제도를 개편하고, 이 새로운 수도의 이 름을 칼라니므롯으로 칭하였다. 그는 이곳에 화려한 궁전을 지었으며, 각국에서 포로로 끌려온 예술인들을 이용하여 수려하고도 웅장한 건물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정복한 나라에서 수 탈한 수많은 보물들을 보관하는 수장고도 건축하였다. 그의 이 화려한 궁전 은 고고학자 레이야드(Layard)에 의해 발굴되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화려한 궁전의 입구를 장식하는 성문 맞은 편에는 망대를 세웠고, 그는 앗시 리아에 반기를 든 반란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며 가죽을 벗기고 망대의 기둥 에 걸어놓았다. 그의 후계 자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858-824 BC)가 등장하여 한편으 로는 그의 부친이 확장하여 놓은 영토를 수호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국을 확 장하기 위한 영토 확장 계획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정책의 지표를 잡 기 시작한다. 항상 군사 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였고 신무기 개발에도 끊 임없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살만에셀은 정복 야욕의 방향을 아람나라에 촛점을 맞추었다. 비트아디니 (Bit-Adini)를 정복한 후 세 번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곳을 완전하게 정복한다. 그후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기 위하여 발하닷(Barhadad) 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때(성경에는 벤하닷으로 기록함. 렘 49:27; 대하 16:2-4) 이스라엘 왕 아합을 비롯한 12왕의 연합군대와 부딪히게 되었다. 이 전쟁은 승부가 나지 않는 치열한 전투였다. 아합왕이 라못길르앗(Ramoth- Gilead)에서 사망하고(853 BC) 또한 하사엘(Hazzael)이 발하닷(Barhadad) 을 암살하여 서쪽지역의 연합군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살만에셀은 아람고원 지역을 비롯한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와 길리기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다. 그후 12년의 세월이 흐른 뒤 살만에셀 에게 세금을 바쳤던 수 많은 식민 국가 가운데 이스라엘의 왕 예후의 기록이 석비에 남아 있다(왕하 9-10장). 살만에셀 3세의 연대기에 기록된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 다. "나의 통치 18년되던 해에 나는 유브라데 강을 16번이나 도강하였다. 다 마스쿠스(다메섹)의 하사엘은 수많은 자기의 병사들을 신뢰하고 있었으 나.... 나는 그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요세화된 부대의 군대 16000 명의 적들을 무찔렀다. 나는 그에게서 1,121대의 전차를 파괴하였으며, 470 마리의 말과 막사를 전리품으로 소유하였다....나는 두로인에게 시돈인에게 그리고 오므리의 후손인 예후에게서 조공을 받았다." 이러한 비문 기록과는 달리 구약성경은 앗시리아에 대하여 부정적인 묘사로 기록하고 있다(왕하 8:9-13). 칼루의 성읍이 니므롯으로 불리워진 데는 다음 과 같은 그 기원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 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 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 라"(창 10:8-12). 레센으로 추측되는 지역은 모술남쪽 28km 지점에 있는 산등성이 큰 돌들이 높이 200m의 산정상에서 500여m 거리까지 뻗쳐 있다. 하지만 그 옛날 견고 한 성읍의 폐허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황량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니므롯의 지형은 사다리형 모양으로 그 주위에는 8km의 성벽이 있었으며 인 구는 63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강물의 물길이 4km 물 러가서 흐르고 있는데 당시에는 티그리스강이 니므롯 도성 중앙을 향하여 흐 르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앗시리아의 운명은 디글랏 빌레셋 3세(Tigalath-Pileser 744-727 BC)와 함께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앗시리아는 수도 니네베가 함락당한 기원전 612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한지 110년만에 앗시리아는 신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앗시리아의 최고의 신은 아슈르(Asshur)였는데 이 우상을 자신들의 주신(主 神)으로 섬겼다 . 한 무리의 여사제들이 여신을 섬겼는데, 이들은 공물을 바 친 남성들에게 성관계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오늘날로 보면 창기들과 다 름이 없었다. 신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돼 왕을 위한 의식으로 시작된 점술과 점성술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운명을 예 언하기도 하였다. 마르둑(Marduk)의 아들 나부(Nabu)는 학자들과 각 도시의 서고를 주재하는 신(神)으로서 행정의 신으로 섬겼다.
514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8>| 앗시리아 제국의 제1수도 앗수르 2_장인수 (90)
rpress
10562 2009-09-23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50janginsu.jpg성경시대 역사탐방 앗시리아 제국의 제1수도 앗수르 2 앗시리아의 제1수도 앗수르(칼라의 폐허) “견고한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요새화 돼”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메소포타미아(Mesoportamia) 북서쪽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앗시리아는 전쟁 을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이들의 본거지는 자그로스(Zagros) 산맥을 중심으 로 터전을 삼았던 셈족 계열의 종족들이었다. 앗시리아는 셈족 계열의 종족 이들의 신앙은 태양신인 아카드의 사마쉬(Shamash)와 더불어 밤의 신 신 (Sin), 그리고 이쉬타르(Ishtar) 등 별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천상신앙이 아 카드 종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기원전 16세기 말경 이들은 자기들을 앗수르 엔시(Assaur ensi)라고 불렀 다. 앗슈르 나라리 1세(Asshur nirari I )의 기록에서 이러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의 외적 자료라고 볼 수가 있다. 자기들의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던 앗시리아인들은 왕족의 족보를 소중 한 가치로 생각하였다. 이 앗시리아 왕들의 명단을 보면 구약성경의 사건들 에 대한 연대를 참조할 수 있다. 카사이트(Kassites)라고 불리워졌던 근동의 한 종족은 기원전 1750년경 앗시 리아와 오랜 전쟁을 치렀으며, 기원전 1211년까지 539년간 끊임없는 패권 전 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고센에서 정착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후 출애굽시대, 가나안정복시대 그리고 사사시대를 지나서 초기왕정시대 가 명실상부한 중앗시리아제국이 출현하는 살만에셀 1세(Shalmaneser I)의 통치시기였다. 그들의 제1수도는 칼라(Calah)였다. 현재 이 지역은 모술에서 티그리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0Km 내려가면, 칼라앗 쉐르캇(Qala'at Shergat)이라는 폐허가 나타난다. 이 유적이 고대 앗 시리아의 첫 번째 수도 앗수르(Asshur)이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북쪽 으로 264km 떨어진 지점이다. 앗시리아의 공식 수도인 이곳에서 그들의 주신 (主神)으로 앗수르 신(神)을 섬겼던 신전의 신탑(ziggurat)의 폐허가 버려 진 채로 남아 있다. 앗수르는 페르시아와 지중해 연안간의 교역로의 지리적 잇점을 안고 동서교 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앗수르의 이러한 위치는 상권 확장과 교역로 확보 의 잇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충분 한 군자금과 광범위한 정보통신망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유목생활에 서 오는 이동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분열왕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집트, 바벨로니아, 앗 시리아의 패권전쟁에서 유대땅은 항상 긴장을 멈출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하 게 된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섭리 속에서 주(主)만 의지하게 하시 려는 언약사(言約史)의 섭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앗시리아의 제1수도 앗수르는 북으로 티그리스강이 강폭 500m의 넓은 물줄기 가 20m 높이의 절벽으로 인하여 물길이 막혀 동남쪽 방향으로 위치를 바꾸 어 흘러가고 있다. 강 건너에는 또 다른 평원이 끝없이 전개되고 있다. 서 쪽 절벽 아래로는 운하처럼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으며, 강 건너편 으로 쉬르캇(Shergat) 평원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또 다른 한쪽 동남쪽 방향은 푸른 초장이 넓게 전개되고 얕은 구렁지대는 방 어의 취약지대이기에 도성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견고한 외 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요새화된 벽돌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강을 건너 온 상선을 비롯한 배들이 접안할 수 있는 선착장을 건설하여 사람이나 말 등 많은 무역품목들을 수입할 수 있었고 속주들의 조공을 유입하는 통로로 도 사용되었다. 배에서 내린 화물은 긴 계단을 통하여 성내로 들여왔다. 그리고 북문을 통과 하면 앗수르 주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곳은 높이 60m의 지구라트(神塔)가 그 위용을 자랑하며 자태를 들어낸다. 피라미드 모양의 이 벽돌신탑의 정상에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서 천문을 관 측하고 도시 주위를 파수하는 역할도 감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신탑은 현재 26m 높이의 폐허로 남아있다. 앗수르는 도시 규모가 3.5km로 국가가 더 욱 왕성함에 따라 도읍지의 한계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후일 수도를 3번 이나 옮기게 된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1451-1426 BC) 이전 중앗시리아 제국의 아 슈 르-나딘-아헤(Ashur-nadin-ahhe. 1393-1384 BC)는 이집트의 아메노피스 3세 (Amenophis Ⅲ 1386-1349 BC)에게 대사를 파송하였고, 특별히 아나톨리아 지 방의 히타이트의 팽창을 견제하겠다는 보상으로 아메노피스 3세에게 금 20달 란트를 예물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앗시리아 군대는 미탄니 왕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후리족의 아르타타마 (Artatama)의 군대와 연합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정복한 이후 전리품을 나누는 공존정책을 사용하였다. 그후 앗수르 우발리트 1세에 의해 앗시리아 제국의 중왕국의 새시대를 연 다. 당시에 이집트 파라오는 일신교의 숭배자 아케나텐(Akhnaton 1350-1334 BC)이었고 그가 아마르나에 도읍을 정한 이후 앗시리아와 우호 조약을 체결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투트모세 4세(Thoutmose Ⅳ 1419-1386 BC)로 출애굽 당시 의 아메노피스 2세(Amenopis Ⅱ. 1453-1419 BC)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이는 장자 제앙 때 큰 아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던 것이다. 성경 시대와 긴밀한 관계 맺어 징계를 받은 증거는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앞에 있는 꿈의 비석이 이를 증 거하고 있다. 이 시기는 앗시리아 제국의 황금기였다.
513 no image |포토에세이| 가을을 꿈꾸며_전우식 장로 (1)
rpress
4950 2009-09-17
512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7)|앗시리아 제국의 제1수도 ‘앗수르_장인수 박사 (60)
rpress
7697 2009-09-03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48act.jpg앗시리아 제국의 제1수도 ‘앗수르’ 앗시리아 제국의 신탑의 폐허 “지형적 약점을 조직적인 군사력으로 극복해” 고대 근동지역에서 가장 강성하였고 동서로는 아라비아 해에서 그리이스 에 개해까지, 남북으로는 아르메니아에서 이집트까지의 넓은 판도를 차지하며 기원전 14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까지 약 700여 년에 걸쳐 중동아시아 일대 를 석권하였던 나라가 앗시리아였다. 한때 근동 최대 강국이었던 앗시리아 제국 성경에는 앗수르(Asshur)라는 명칭이 도시의 이름으로, 사람(왕)의 이름으 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셈의 아들 중에는 앗수르가 있었고(창 10:22; 대상1:17),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름도 볼 수가 있다. 즉 니므롯 이 차지하였던 땅이 앗수르였다(창10:11). 오늘날 이곳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북쪽 264km 떨어진 칼랏쉐르캇 마을 로 가야한다. 이 마을에서 동쪽으 로 돌아 2km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티그리 스 강변을 끼고 20m 정도의 높이 우뚝 솟아 있는 작은 산이 바로 고대 도시 앗수르의 폐허이다. 현지명은 아슈르(Ashur)로 불리운다. 앗수르는 소아시아 일대를 장악하여 강대한 앗시리아(Assyria) 제국을 건설 하였던 유목민들로, 앗수르인들이 그들의 주신(主神)인 앗수르 신을 모신 성 지였다. 즉 앗시리아 제국의 요람지였던 곳이다. 역사는 이곳을 앗시리아 제 국의 첫 번째 도읍으로 기록하고 있다. 앗수르는 북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요충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페르시아와 지중해 연안간의 교역로에 위치한 지리적 잇점을 안고 동서 교역을 접할 수 있었다. 앗수르는 길이가 약 1.5km이며 폭이 1km 정도 되는 큰 성읍이었다. 북쪽과 동쪽으로 티그리스 강이 흐르면서 자연적 방어망의 역할을 해주었 다. 앗수르 주변 지역의 토양은 기름졌다. 강변을 끼고 있는 농경지는 양질의 곡 물을 생산할 수 있었으며, 강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는 동서로 만 나는 십자로에 있었기에 교통과 교역이 활발하였다. 앗수르의 이러한 지정학 적 위치는 상권의 확장과 교역로를 확보하는 잇점을 가져 다 주었다. 이것은 당시 국제교역의 중심지였던 앗수르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잇점이 아니였던 가 필자는 생각한다. 클라우디우스 제임스 리치(Claudius James Rich, 1786-1821)는 동인도회사 (the East India Company)를 위하여 바그다드에 거주하던 인물이었는데 그 는 바빌로니아의 폐허 지역을 돌아보고 이 지역을 발굴하기로 결심하고, 이 를 실행에 옮겼다. 처음 발굴 시도 후 약 9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모술에서 체계적인 발굴을 시도하여 고대 니느웨 성읍의 큰 언덕을 조사 연구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서 판과 벽돌 등 글씨가 새겨져있는 유물들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원통 모양의 석인(石印) 등을 수집하였다. 이 유물들 가운데 유명한 느부갓네사르와 산헤 립의 원통 석인은 비명(碑銘) 연구가였던 그로테펜트(Grotefend)를 통하여 해독하게 하였다. 헨리 레이야드(Henry Layard)는 1845년에 님루드(Nimrud)를, 그리고 그 후에 는 니느웨를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양각(陽角)으로 뒤덮힌 왕궁과 니느 웨에서는 사르곤 2세의 손자였던 위대한 앗슈르바니팔(Asshurbanipal)의 도 서관을 발굴하였다. 앗시리아인은 바빌로니 아인들보다 기질이 강직하였고, 호전적이었으며, 독립 심이 강하였다. 그러나 문화는 뒤떨어져 있었다. 정치적인 능력은 셈족들 중 에서 가장 뛰어나 바빌로니아도 이들을 따르지 못하였다. 앗시리아는 주변 에 강한 나라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투쟁을 끊임없이 해 야 했다. 전반적으로 앗시리아 전체 지역은 지형 자체가 산지와 고원지대로 이루어져 있기에 비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약점을 군사력으로 극복하 였다. 특별히 투석구로 불리우는 슬링(Sling)은 중심에 탄환을 싸는 가죽이 나 천이 있고, 양쪽으로 줄이나 끈을 매달아 돌이나 무거운 쇳덩이를 투척하 는 공격 무기의 일종을 다루는 특수훈련을 받은 군인들로 전선의 전방에 배 치하였다. 이 무기는 돌맹이와 같은 탄환을, 줄이나 양쪽 끈으로 잡고 머리위에서 빙 빙 돌리다 적을 향하여 한쪽 끝을 놓으면 원하는 목표물에 명중을 시켜 전 쟁 초기에 적들의 전력을 흩어놓는 전술 무기였다. 대부분의 슬링은 1m를 넘 지 않는 길이와 0.3kg을 넘지 않는 단순한 구조로 만든 무기였다. 아마 다윗 과 골리앗의 싸움을 연상시키는 무기라고 보아야 할 것 이다(삼상17:31-49). 유목생활을 하는 지역에서 흔히 사용하는 무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였던 사 람들이 앗시리아인들이었다. 기원전 13세기경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앗시리아는 투석병(돌팔매병)을 창병, 궁수와 함 께 보병의 3대 축으로 운영하였을 정도였다. 특별히 디글랏 빌레셋 3세(Tiglathpileser Ⅲ)는 이전까지 각 단위 부대에 서 산발적으로 운용되던 돌팔매병을 정규군으로 편입시키고 적극적으로 활용 한 최초의 앗시리아 왕으로 기록된다. 생활 무기를 군사적으로 극대화시켜 앗시리아 군대는 기원전 3000년 이후 요새화 된 도시를 공격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고도로 훈련받은 투석병들을 최전방에 투입하여 전쟁시 고원 지대의 투사로 활용하였다. 장인수 박사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511 no image |포토에세이| 휴 식_전우식 장로 (2)
rpress
5381 2009-08-19
510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6)| 태양의 도시 하트라(Hatra)_장인수 박사 (257)
rpress
11416 2009-08-19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47jainsu.jpg태양의 도시 하트라(Hatra) 하트라의 미란신전 장인수 박사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팔레스타인의 주권 두고 유대와 헤롯 가문의 암투 벌어져” 이라크의 동북쪽 모술과 사마라 중간 지점에 하트라(Hatra)가 있다. 하트라 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 후 3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간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지나가는 실크로드의 교역도시였다. 메소포타미아 무역 중심지 하트라 지형적 이점을 가진 하트라는 페르시아의 문화를 지중해로 연결하고 지중해 와 수리아에서 가져온 문물을 동양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즉 중개무 역이 이 도시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무역도시로 발전한 하트라는 엄청난 부 를 축척할 수 있었다. 바그다드에서 북쪽 1번 국도를 따라 315km를 지나면 왼쪽 방향으로 들어가 는 얕은 구렁과 더불어 황야를 27km로 달리면 아랍어로 헷다르(Hdehar)라고 도 일컫는 하트라 유적지를 만나게 된다. 하트라 유적지 입구에는 4, 5층 규 모의 국영관광호텔이 들어서 있다. 이 교역도시는 파르티안 왕국에 속한 번 영된 도시 중에 하나였다. 로마와 오랫동안 영토분쟁을 겪었던 파르티안의 도시 하트라는 정략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로 부상하였다. 이 하트라의 건물 건축양식은 그리이스의 코린트식의 열주와 건축형태의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이 지역 이 셀레우쿠스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던 역사적 시대를 지나온 증거이기도 하다. 초창기 하트라는 셀레우쿠스 왕조(The Seleucids Dynasty, 312-95 BC)의 영 향력 속에 있었다는 증거를 건축양식을 통해 볼 수 있다. 하트라는 원형으 로 배치된 도시로 직경이 1.6km이며 두겹의 방벽으로 성체를 이루고 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의 위대한 통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양자 부르투스와 카시우스에 의해 암살당한 후 4년의 세월이 지났 을 때 근동지방에서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파르티안 제국과 로마 사이에 서 영토주권 분쟁에 시달리게 되는 시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요한 힐카누스 2세(John Hurcanus Ⅱ)와 아리스 도블루스 2세(Aristobulus Ⅱ)와의 권력 투쟁이 한창이었다. 요한 힐카누스 2세는 신흥 로마를 지지하였고 아리스도블루스 2세는 파르티안을 지지하였 다. 때문에 파르티안은 아리스도블루스 2세를 지원하면서 헤롯 가문을 제거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로마와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던 헤롯 가문의 수장으로서 후일 헤롯 대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터를 제거하기 위하여 코엘레 수리아를 공격했다. 당시의 수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은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심복 안토니우스 (Antonius)가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수리아 주둔군 사령관 안 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알렉산드리아에 가 있었 다. 이 기회를 놓칠리 없는 파르티안의 오로데스(Orodes) 왕은 코엘레 수리 아를 공격하였고, 이곳을 침략한 후 물밀듯이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40년이었다. 파르티안과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의 관계는 뿌리 깊은 악연이었다. 그 이 유는 안티파너가 항상 친 로마적인 정치적 사고와 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가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수리아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그는 로마의 집정관 카 이사르를 지지하고 있었다. 크라수스(Crassus)는 파르티안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카이 사르와의 권력 투쟁에서 참패한 후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하려 갔으나 그곳에 서 암살당한다. 이때 안티파터는 그의 민첩한 정치적 계략으로 카이사르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이집트 침공에 적극 협조한 댓가로 로마 원로원은 안티파터에게 로마 시민권과 각종 세금면제와 최고의 영예인 우정의 영예(rex socivs et amicus populi Romani)를 하사하였다. 그 이후 안티파더의 가문은 대를 이 어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Phasael)과 헤롯(Herod)에게 팔레 스타인 두 지역을 관할하는 행정관으로 임명하였다. 파사엘은 예루살렘을 관 할하는 수비대장으로, 헤롯은 갈릴리 지역의 행정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러 나 이러한 헤롯가문의 비극은 안티파터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1년 후 사마 리아와 유대 사이에 있는 도성 고프나(Gophna)에서 파 르티안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약화된다. 이 시기를 틈탄 파르티안은 파죽지세로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파르티안을 등에 업은 아리스도블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친로마파인 힐카누스 2 세를 납치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게 두 귀를 잘라서 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리므로 제사장 신분을 잃게 만들어 버린다. 이때 파르티안의 왕은 오로데스(Orodes)였다. 이렇게 승리를 거둔 직후 오로데스는 아들 프라테스 4세(Phrates Ⅳ)에게 암 살당하는 정변이 발생했다. 프라테스는 형제를 죽이고 장남을 살해하는 만행 을 저지른다. 팔레스타인에는 파르티안에 의해 축출된 힐카누스 2세를 대신 하여 아리스도 블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Antigonus, 40-37 BC)가 하스 모니안 마지막 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안티고누스는 파르티안의 프라테스 4세에게 헤롯 가문을 축출하 면 이 지역의 모든 주권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파사엘은 자살하 고 헤롯은 천년 요세 마사다로 피신하였다. 유대와 헤롯 가문 분쟁 배경 되기도 고대 오리엔트의 패권자가 되려 고 하였던 전략적 무역도시가 바로 이곳 태양 의 도시 하트라이다. 그 영광의 역사를 뒤로 한 체 하트라는 현재 폐허로 남 아 있다.
509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5)|파르티안의 수도 크테시폰_장인수 박사 (43)
rpress
7538 2009-07-08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44jang.jpg성경시대 역사탐방 파르티안의 수도 크테시폰(Ctesipon) 파르티안의 수도 크테시폰의 유적지 “파르티안은 신구약 중간기 역사 주역으로 등장해” 장인수 박사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6번 국도를 따라 동남쪽 방향으로 30km를 가게 되면 알 마다인으로 갈라지는 지방도로에 접어들고, 다시 남쪽 8km를 들어가 면 티그리스강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알 마다인 읍에 도착하게 된다. 페르시야의 재건 꿈꾼 파르티안 제국 알 마다인에서 티그리스 강변 방향으로 1km 거리를 들어서면 길이 1.5km 폭 1km 규모의 살만 파크라는 공원이 있다. 이곳 살만 파크를 중심으로 한 알 마다인(Al-Mada'in) 일대에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하여 지중해 연 안과 아르메니아까지 지배하며 로마와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였던 사산왕조 의 겨울철 도읍지 크태시폰(Ctesiphon)이 있다. 살만파크 경내로 들어서면 하늘 높이 솟아있는 10여층 건물의 높이를 자랑하 는 웅장한 벽돌아치가 나타난다. 이 지방 사람들로부터 타카스라(Taqkisra) 고 불리우는 크테시폰 아치로서 이 아치는 왕궁의 정문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다. 파르티안 제국(Parthian on Empire, 240 BC-AD 277)은 오늘날 이란(Iran)의 구라산(Khurasan) 지역에서 옛 페르시야의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건국한다. 이 세력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박트리아(Bactria) 왕국을 정복하고 이란 전 지역과 바빌로니아 전 영토까지 포함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의 전성기는 마르라다테스 1세(Mithradates I. 71-138BC) 치세시대였 다. 이 때 이곳 크테시폰에 도읍을 정하고 동진정책을 폈고 이 지역을 정벌 한 파르티아는 서진(西進)정책으로 로마와 대결하여 로마제국에 무서운 세력 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왕조는 아케메네스(Achaemenid)왕조의 아르닥 크레 르크세스 2세(AntaxerxesⅡ. 404-359 BC)의 후손으로 자처하며 왕중의 왕 (king of king)으로 호칭하였다. 마카비 혁명기 시대(168-135 BC)의 팔레스타인 땅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신 흥 로마세력과 파르티안 제국과의 영토 분쟁의 혼란기를 맞는 시대였다. 이 러한 혼란기에 헤롯가문의 시조 헤롯대왕의 조부 안티파터 1세(AntipaterⅠ) 는 이두메 지역의 실력자로 있었다. 그가 후일 유대지역의 실력자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마카비 혁명의 영웅 시몬 마카비(Simon Maccabaeus 142-135 BC)의 아들 요한 힐카누 스 1세(John HyrcanusⅠ.135-104 BC)의 치세 때였다. 이 시대의 이후 왕조 를 하스모네안 왕조(Hasmonean dynasty) 시대라고 한다. 안티파터는 유대 전 지역을 그의 지배하에 두기 위한 영토확장 정책을 계획 하고 실천에 옮긴다. 그는 에돔(Edom)의 영역인 이두매(Idumea)지역 주민들 을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고 유대교로 개종시킨다. 그리고 그 지역을 유대 의 땅으로 선포한다. 이때 안티파터 1세는 힐카누스에게 협조를 하므로 신임을 얻는다. 그후 힐카 누스의 뒤를 이어 아리스도 블루스(Aristobulus 104-103 BC)의 짧은 통치가 끝난 후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103-76 BC)가 등장한다. 얀네우스의 아내 알렉산더 살로메(Alexander Salome 76-67 BC)에게 는 두 아 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확장한 유대왕국(서쪽 지중 해 연안에서부터 동쪽 트란스 요르단:Trans Jorden 지역까지)의 통치의 주도 권을 잡기 위한 아들들의 권력투쟁이 일어난다. 힐카누스 2세(장남)에게는 대 제사장직을, 그의 동생 아리스토 블루스 2세에 게는 왕직을 모친 살로메가 분할시켜 주었지만 두 형제의 권력 투쟁은 계속 되었고 그후 아리스토 블루스 2세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였다. 아리스토 블루 스 2세는 후원국가로 파르티아제국을 의지하였고, 힐카누스 2세는 당시 새로 운 세력으로 팔레스타인에 등장하는 로마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헤롯대왕 부친이었던 안티파터 2세는 키프로스라는 패트라의 왕녀와 전 략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힐카누스 2세(63-40 BC)를 지지하며 로마의 도 움을 구한다. 안티파터(Antipater)는 힐카누스를 지지하므로 후일을 도모하 는 음모를 꾸민다. 안티파터는 나바테안 왕국의 아레타스 3세(Aretas Ⅲ)에게 원조를 청하게 되 고 힐카누스는 안티파터의 도움으로 작전상 수도 페트라(Petra)로 피신하며 은신하면서도움을 구하고 아레타스 왕의 절대적 후 원을 얻게 된다. 그의 이 러한 협상의 조건으로 나바테안 왕국의 변방에 있는 열두 성읍을 나바테안에 게 넘겨주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1차 삼두정치의 한 사람이었던 폼페이우스(Pompeiyus)가 그 의 부관 스카우르스(Scaurus)를 파송하여 다마스쿠스에서 유대땅의 권력 투 쟁의 소식을 듣고 유대권력 투쟁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후일 유대 지역을 차 지하기 위한 침략 투쟁의 당사국이 파르티안과 로마로 역사의 무대에서 등장 하기 시작한다. 유대 지역의 패권 놓고 로마와 싸워 이러한 역사의 중심에 선 파르티안의 수도가 바로 이 크테시폰이다.
508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4)| 셀류키아와 크테시폰(Ctesipon) (96)
rpress
9217 2009-06-24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43janginsu.jpg셀류키아와 크테시폰(Ctesipon) -알렉산더 대왕과 셀류코스 왕조- 사진_알렉산더 대왕,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소장 “아리스토텔레스 영향받은 융합된 하나의 세계 건설해” 필자는 바빌론을 떠나 셀류코스 왕조의 수도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을 답사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 헬레니즘 시대 열어 근동지역(Near East)을 헬레니즘 문화로 융합시킨 인물은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 336-323 BC)이다. 그는 세계 문명의 발상지인 근동지 역을 정복하고 융합된 하나의 세계(Cosmopolitanism)를 가져오게 한 인물이 다. 그의 동방원정은 페르시야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으며 헬레니즘 (Hellenism) 시대의 세기를 열게 된 동기가 되었다. 헬레니즘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 역사학자 트로이젠(Johann Gustav Droysen, 1808-1884)이다. 그는 알렉산더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헬라적 정신과 동방의 사상을 융합한 하나의 문화를 탄생 시켰으며, 이러한 문화는 통합된 세계를 이루고자 했던 그의 세계관에 있었 다.” 그는 이 시대를 헬라의 문화, 즉 헬레니즘 문화(Hellenistic Culture) 라고 하였다. 후일 역사학자들이 트로이젠의 사관(史觀)의 시기를 구분하기를 알렉산더 사 후의 시기(323 BC)에서 시작하여 로마의 지중해 세계 통일까지의 시기(64 BC)를 헬레니즘 시대(Hellenistic age)라고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Aistoteles, 384-322 BC)였다. 그는 그의 스승 플라톤(Platon)의 이상적(理 想的) 이데아(Idea)사상을 배격하고 실용적(實用的) 이데아 사상을 도입하 여 실천적 학문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43년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더의 가정교사로 초빙을 받는다. 그는 9년 동안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지내다 아테네로 돌아왔 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면 행복 추구를 위한 실천학문을 주장하 였는데, 진정한 행복추구는 상대가치를 존중하는 융합사상이라고 하였다. 왕자 알렉산더는 부왕 빌립 2세가 암살당하자 약관 20 세의 나이에 제왕의 자 리에 오른다(336 BC). 이때 그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나는 권력이나 영 토 확장보다 선(善)에 대한 지식(知識)에서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다.” 필자 가 보기에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융합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 로 본다. 아테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Lykeion)이란 학원을 세웠을 때 알렉산더가 스승의 연구 활동을 위하여 800탈렌트(약 400만 달러)의 돈 을 기부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스콜라 신학 (Scholar Theology)의 모체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사상은 그의 저 서 니코마스 윤리학에 잘 나타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외에 알렉산더는 4명의 영웅을 정치철학의 모태로 삼았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즐거움, 헤라클레스의 힘,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 스의 군사적 리더쉽, 페르시야의 고레스 2세의 관용사상(寬容思想)이었다. 그의 동방원정은 과거 헬라를 침공하였던 페르시야를 정복하고 그곳에 헬라 의 헬레니즘 문화를 심으려고 하였다. 한 마디로 융합된 하나의 세계였다. 인도의 힌두쿠쉬를 정복한 이후 부관들에게 “후일 아테네인들 이 나를 어떻 게 평가할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후 323년 바빌론에서 갑작스런 열병으 로 세상을 떠났을 때 페르시야가 지배하던 전 지역은 셀류코스 1세 (SeleucosNicatorⅠ, 312-280 BC) 장군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그의 부친은 빌립 2세 휘하의 장군 출신으로 안티오쿠스였다. 현재 이라크 지역에는 셀류코스 왕조(Seleucid Kingdom, 312-95 BC)의 유적 이 산재해 있다. 초대 왕 셀류코스 니카놀(Seleucos Nicator)이라는 말은 전 승자(戰勝子)라는 뜻이다. 셀류코스 1세는 왕조의 수도를 바빌론에서 동북쪽 70km 떨어진 티그리스강 서쪽 지역에 새로운 도시 셀류키아(Seleucia)를 건설했다. 그후 시리아까지 도 자신의 영토로 영합하고 지중해 해변에는 자기의 아버지 안티오쿠스 장군 의 이름을 딴 안디옥이란 도시를 건설하였다. 셀류코스가 알렉산더 제국 계승해 안디옥은 후일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이방 지역을 향한 복음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도시이기도 하다(행 13:1-3).
507 no image |포토에세이| 호수가의 낚시터_전우식 장로 (3)
rpress
4838 2009-06-24
506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3>| 바빌론(Babylon) 유적지를 가다(4) (480)
rpress
38941 2009-06-11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42sbbilon.jpg성경시대 역사탐방 바빌론(Babylon) 유적지를 가다(4) 바빌론 성터 : 신 바빌론 제국 도성 상상도 바그다드 국립 박물관소장 “유다 멸망은 메시야 도래 완성을 향한 발판” 세계 최초의 융합주의 정책(Cosmopolitan-ism)을 쓴 신(新)바빌로니아의 제 왕 느부갓네사르의 3번째 속주 지역이 유다 지역이었다. 갈데아 왕은 이 지 역에 총독 그달리아(Geodaliah)를 임명하였다(581BC). 그러나 그달리야는 총 독이 된지 두 달 만에 이스마엘에 의해 암살당한다. 바벨론의 속주로 전락한 유다 친 이집트 정책을 실시하였던 유다왕 시드기야(Zedekiah)는 이집트의 파라 오 프삼메티쿠스(PsammetichusⅡ)와 아프리에스(Arpies)와 공모하여 갈데아 를 대적하므로 이에 격분한 느부갓네사르는 자신에 의해 왕위에 오른 시드기 야를 철저하게 응징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눈물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며 호소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던 시기였다(애 2:11). 갈데아 왕 느부갓네사르는 시리아 주둔군 시위대장을 선봉장으로 삼아 1년 6 개월 만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587년 1월-586년 BC). 시드기야는 예루살 렘을 황급히 빠져나와 여리고로 도주하다 평원에서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왕자들은 살해당했다(왕하 25:7). 느부갓네사르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파괴하였고 예루살렘은 가시와 찔레가 무성한 황무지가 되어버렸다(렘 39:8;40:7;왕하 25:22-24). 이때 성 전 안의 금은 보화는 물론이고 성전 기물인 놋쇠 기구와 놋쇠 기둥뿐 아니 라 솥과 화로, 부삽 같은 하찮은 물건까지 약탈해갔다(왕하 25:13-19). 그러 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갈데아 왕을 대적하지 말라고 예 언하게 하셨는데 이는 유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섭리로 보아야 할 것이 다. 그렇다면 느부갓네사르는 어떠한 군주였는가? 먼저 그의 정책은 고대 바빌로 니아 제국을 웅장하게 건설하는 것이었다. 대제국 수도로서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도성으로의 면모를 과시하는 대대적인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는 바 빌론 건축을 위하여 많 은 벽돌을 사용하였는데, 흙벽돌을 사용하지 아니하 고 불에 구운 오지벽돌을 사용하였다.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을 연결하 는 인류 최초의 돌다리를 건설하였으며, 교통로를 다원화하기 위하여 운하 를 건설하였다. 남쪽 지역에는 견고한 성체를 건설하였으며, 삼중으로 된 성 벽을 만들어 바빌론 성(城)을 요새화하였다. 성벽 뒤에는 50m 간격으로 망루를 축성하고 내측 벽에는 360개, 외측 벽에 는 250개의 망루를 세웠다. 그리고 왕비를 위하여 건축한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은 도성의 아름다움을 더하게 하였다. 이렇게 화려한 공중정 원의 흔적들은 1879년 콜데바이에 의해 발굴되었다. 느부갓네사르의 영토 확장 야욕은 계속되었고 정복한 지역에서 많은 전리품 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상류계급에 속한 지역 포로민들을 바빌론으로 이주시 켰는데 주로 페르시야, 이집트, 리디아, 유대 유민들이었다. 그리고 조선 공, 목공, 석공 등의 장인들은 페니키아의 사르밧, 두로, 예루살렘에서 이주 시킨 자들이었는데, 이들을 통하여 화려한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리고 이집 트의 원숭이 조련사들을 이주시켜 향락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한 강 제 이주 시킨 젊고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제국의 먼 미래를 부강하게 만들 정책 을 국정 운영의 지표로 삼았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여호와의 섭리 속에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제1성전제의(cult) 중심에서 율법(Torah) 중심주의로의 언약공동체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언약(Covenant)의 역 사(歷史)는 회당제도(institution of the synagogue)를 통하여 여호와 앞에 예배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의식제의 전환은 유대 공동체가 읽고 묵상하는 전통예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제사장들 중에는 율 법을 깊이 연구하는 랍비(Rabbi)로서의 사역의 전환을 가져오는 시대이기도 하였다(Rabbinic Judaism). 성전중심에서 율법중심으로전환돼 바빌로니아 제국 내의 종교 다원주의는 유대인들의 절대 신앙을 보존 전승 (tradition)하는 동기가 되었으며 국가 공동체에서 우주적 계약 공동체로 정 치, 경제, 사회 문화를 뛰어넘는 메시야 도래의 구속사적 완성을 향한 하나 님의 정지 작업이었음을 필자는 고대 바빌론 지역을 순례하면서 느낄 수 있 었다. 장인수 박사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505 no image |포토에세이| 세월을 담는 장독대_전우식 장로 (1)
rpress
5060 2009-05-13
504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2)| 바빌론(Babylon) 유적지를 가다(3) (18)
rpress
6447 2009-05-13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40babyl3.jpg바빌론(Babylon) 유적지를 가다(3) 사진_옛 바빌론 궁전 복원 모습 장인수 박사_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의 백성들에게 위로 주셔” 유대왕 요시야(Josiah, 640-609 BC)는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살해된 부왕 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다. 급격히 몰락한 유대 왕국 선지자 예레미야(Jeremiah)는 요시야가 태어나던 해에 예루살렘에서 동북쪽 으로 약 4.8km 떨어진 아나돗의 한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의 환경속에서 신앙적 분위기에 젖어있던 전통적 신앙의 규범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절기와 축일 때마다 요시야 왕의 신앙 적 헌신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요시야는 20세 되던 해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그의 통치 13년의 시기 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렘 r 1:2). 요시야의 통치 말년, 즉 주전 612년 메데와 바빌로니아 군대가 앗시리 아의 수도인 니느웨(Nineveh)를 함락시키므로 고대 근동의 패권은 앗시리아 에서 바빌로니아로 이동하게 된다. 니느웨가 함락된 이후 앗시리아는 앗수르 우발릿 2세(Assuruballit Ⅱ, 612- 609 BC)를 중심으로 수도를 하란(Haran)으로 옮기고 바빌로니아에 대한 저항 을 계속하였으나, 하란 역시 주전 610년에 함락되었다. 그 다음해 앗시리아 는 하란을 탈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멸망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유대 민족의 바빌로니아 강제 이주는 주전 605년과 597년 사이에서 시작하 여 536년에 이주가 끝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당 시 초기 이주민(移住民)들은 빠른 시일 내에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 을 갖고 있었다. 이 초기 이주 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그대로 있었던 때였 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거짓 선지자들을 믿지 말고 가옥 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이주한 그 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할 것을 계획하라고 말하였다(렘 29장; 겔 17:11-24). 그러나 실망의 때가 있었다. 기원전 586 년. 성전은 무 너지고 예루살렘이 황폐하여 버리자 이주민들은 하나님께서 선 민들을 버리신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후 여러 해가 지난 뒤 포로로 끌려갔던 여호야긴(Jehoiachin)에게 느부갓 네사르(Nebuchadnezzar)는 왕권을 회복시켜주었으나 3개월이 지난 후 느부갓 네사르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때 유대인들은 포로생활이 끝난 줄 알았으나 그 희망이 좌절로 끝나버렸다는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민족적인 아픔을 겪 고 있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 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 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닐진대 내 혀 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 137:4-6)라고 당시의 상황을 읊었다. 이러한 때 바빌론 유수기의 위대한 선지자 에스겔(Ezekiel)은 유민들을 위로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지자였다. 이사야 40-60장은 여호와를 경 외하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그 모든 포로민에게 위안을 주려는 특별한 목 적으로 기록된 배경의 말씀이다. 또한 직책 때문에 귀환을 하지 못한 다니엘 (Daniel)같은 인물 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희망찬 미래를 예 비하시는 여호와의 은총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소망삼고 있었다(단 12:1- 3). 이렇게 바빌론 포로기 시대는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으나(겔 36:16- 21) 또한 유수기의 삶은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 속에서 메시야 도래를 바라보 는 정지 작업을 예언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겔 36:23-28; 미 5:7). 느부갓네사르 왕이 그렇게 많은 건물을 건축하였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주전 562년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에월므로닥(Evil-Merodach)이 재위에 오 른다. 그의 통치 첫 해에 여호야긴을 가택 연금에서 풀어주고 머리를 들게 하고 포로로 잡혀온 다른 왕들보다 예우를 갖춰 대우해 주었다. 메시아 바라보며 포로기 보내 그러나 그가 왕이 된 2년 후 살해당하고 주전 556년 나보니두스(Nabonidus) 는 60세가 되어 왕위에 올라 9년 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아들 벨사살에게 섭 정을 맡기고 사막의 한 오아시스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이로써 신바벨론 제 국도 서서히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다.
503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11)| 바빌론(Babylon) 유적지를 가다(2) (134)
rpress
9597 2009-04-29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39jang.jpg성경시대 역사탐방 바빌론(Babylon) 유적지를 가다(2) 사진_이쉬타르 성문 복원 장인수 박사 성지학술연구소장(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바빌론 기록은 20세기 초에 역사적 신빙성 얻어” 고대 그리이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Historiai)의 기록과 성경에 서만 언급되어 있는 바빌로니아 제국은 우르 제3왕조의 멸망 직후인 기원전 19세기 족장 스무아붐(Sumuabum)에 의해 건국되었다. 스무아붐에 의해 건국된 바빌로니아 강대한 권력을 자랑하였던 바빌로니아 제국 시기는 하무라비(Hammurabi 1792-1750 B.C)왕의 제위 때였다. 하무라비는 바빌론에 화려한 궁전과 신전 (神殿) 그리고 신탑(神塔) 등을 건축하였다. 그의 제국은 페르시아 만에서 오늘날 아나톨리아 국경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제왕이었다. 저 유명한 하무라비 법전도 이때 편찬되었다. “정의(正義)를 나라 안에 빛내기 위하여”라고 시작된 이 비문은 정의가 당 대 윤리의 최고 가치였으며, 동시에 정의가 부패한 인간의 죄의 습성으로 인 하여 시련을 받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높이 2.25m의 검은 섬록암에 아카드어로 기록된 이 비문은 구약성경의 율법(Torah)과 함께 로마 의 법전, 나폴레옹의 법전과 함께 유명한 법전으로 알려져 있다. 바빌론에 관한 기록은 19세기 말까지는 그 역사적 의미의 신빙성이 의심되어 져 왔으나, 20세기 초 독일의 고고학자 콜데바이(Robert, Koldewey)에 의해 광택 벽돌로 장식된 성문(城門) 발굴로 인하여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속으로 몰아넣었다. 콜데바이는 성경에 기록된 근거를 기초로 하여 바빌론 발굴 계획에 착수하였 고, 유프라테스 강 동쪽 가르스 구릉에서 발굴을 하기 시작하여 길이 2.5km, 너비 1.5km의 옛 바빌론 도성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가운데 가 장 완벽한 형태로 발굴한 이 유물이 이쉬타르(Ishtar) 성문이었다. 이쉬타르 성문을 중심하여 경내로 계속 발굴을 시도하여 판석 위로 깔린 20m 내의 대로(大路)가 나타났고 이곳에서 발견된 석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 n었다. “바빌로니아 왕 나보폴라살의 아들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사르인 짐은 바빌론 도로를 마르둑(Marduk)신의 행렬을 위하여 사각 판석으로 포장 하였느니라. 신이여! 마르둑신이여! 영원한 생명을 주옵소서.” 그리고 길 왼쪽으로 황토색 벽돌로 쌓아올려 지은 거대한 남 궁전(宮殿)을 발굴했다.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 때에는 500개의 방을 보유한 정궁(正宮)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방을 구획하는 내벽은 없고 단지 전체를 표시하는 외벽만 허물 어진 채 발견되어 지금은 그 외벽을 복원하여 놓고 있다. 그후 페르시아 군에 의해 파괴된 지 2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정복 길에 올랐다. 바빌로니아에 도착한 알 렉산더는 이곳 폐허를 바라보고 감회에 젖었으며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고 한다. 인도와 힌두쿠쉬를 정복하고 돌아온 대왕은 이곳 남 궁전에 머무르 다 열병에 걸려 사망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약관 33세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곳에 있었던 공중정원(hanging garden)을 사랑하였는데 이 공중정원은 온통 푸른 수목으로 뒤덮인 5층 구조의 건축물이었다. 대왕 은 이집트 신전에서는 볼 수 없는 기둥과 높은 계단이 정면을 장식하고 있 는 빼어난 건축미를 감탄하며 감상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바빌론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부정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대상 9:1; 대하 32:31; 사13:1-4; 행7:43; 계14:8). 열왕기하 24:13-14에 보면 “저가 여호 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 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 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바빌로니아에 포로(Free Man)로 잡혀간 유다인들은 노예의 삶을 산 것 이 아니었다. 포로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다니엘은 왕궁에서 왕과 귀족들과 함 께 생활하였고 바빌로니아 제국의 학문과 문물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을 허락 받았으며 이곳에서 높은 신분과 직위도 누렸던 인물이었다(단 1:1-4, 17- 21). 알렉산더 대왕도 감탄한 공중정원 다니엘은 도서관에 있는 방대한 메소포타미아의 문서들을 볼 수 있는 특권 을 누리기도 하였으며 왕의 총애도 받았던 인물이었다.
502 no image |포토에세이| 부모의 은혜_전우식 장로 (6)
rpress
4844 2009-04-29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