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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 |성경시대역사탐방<35>|페르시아의 황금시대와 유대인 귀환_장인수 박사 파일 (301)
편집부
24002 2010-09-08
페르시아의 황금시대와 유대인 귀환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황금기 코스모폴리탄 정책으로 재건된 제2성전” 고레스(CyrusⅡ The Great, 558-547 BC)는 메대왕국을 정복한 이후(559 BC) 제국을 더욱 확장시켜 나갔다. 그 이후 페르시아 제국을 아케메네즈 왕조(The Achaemenian Empire)라고 불렀다. 이때 고레스 2세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소왕국 리디아(Lydia)를 정복하고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546 BC). 리디아는 풍부한 금과 은의 생산지였고 이러한 자원을 기반으로 하여 상업적으로 부요한 재원을 소유한 왕국이었다. 세계 최초로 화폐를 주조한 왕국이기도 하다. 그리이스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텔레스(Thales)의 탄생지이기도 한 이 나라가 고레스 2세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리디아가 고레스 대왕에 의해 정복당한 배경은 당시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에수스(Croesus, 560-546 BC)가 잘못된 정치적 판단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을 침공한 것이 원인이었다. 고레스가 크로에수스를 화형에 처하려고 하자 그는 과거에 철학자 솔론(Solon)과 나누었던 대화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왕이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오. 솔론이 말하기를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였소. 이제 이땅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그대의 것이오”라고 하자 고레스 왕은 크로에수스를 살려주고 약탈을 중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G.E. Vean, Aegean Turkey, London : The Bath Press, 1989. p. 220). 고레스의 관용 정치(cosmopolitanism)는 바벨론을 정복한 후 신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onidus)를 포로로 잡았지만 그 이듬해 그가 사망할 때까지(539 BC) 제왕으로서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보니두스가 사망하였을 때에는 국장을 치러주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후 예루살렘이 페허가 된 사실을 직시한 고레스왕은 당시 4만 명 이상의 유대유민(Free Men)들의 귀환 요청을 제가하였으며 압류시켰던 성전 기물들과 그들의 재산들을 가지고 귀환하도록 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 재건까지 허락하였다(538 BC). 고레스의 피정복민들에 대한 관용정책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로 인해 통합된 제국으로서의 결속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547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유목 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던 고원국가 페르시아가 제국으로서의 번영을 누리는데 기여한 교통망 확충을 위하여 도로를 건설하였으며 특히 그중 가장 유명한 도로가 ‘왕의 도로’(Royal Road)로서 그 길이가 약 2,600Km에 달하였다. 이 도로는 페르시아만 수사(Susa)에서 리디아의 수도 사데(Sardis)까지 뻗어 있었다. 이러한 왕의 도로는 왕의 전령사가 밤낮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 일주일 이내에 제국의 전 지역에 칙령을 전달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레스 2세와 다리오 1세의 지속적인 관용정책은 후일 로마제국의 황제들을 비롯한 로마의 지도층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로마 전체의 지도층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E.M 번즈는 주장하였다. 이후 세계의 제국으로서 관용적 사상은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하여 제왕들의 정치적 지도자상으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고레스 대왕 사후 캄비세스(Cambyses Ⅱ, 530-522 BC)의 통치기간은 페르시아 제국이 위기의 기간을 보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집트 정복과 에디오피아 정벌은 많은 군사를 잃은 실패의 전쟁이었다. 결국 그는 원정 기간에 왕의 죽은 형제와 외모가 비슷한 가우마타(또는 Bardiya)의 반란 소식을 듣고 귀국 길에 수리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522. BC) 이 기간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중단된 시기였다. 그가 계승자 없이 사망하자 아케메네즈 왕조의 궁정 고관이었던 다리오 1세(DariusⅠ, The Great 522-486 BC)가 왕위에 오른다. 가우마타가 제거된 후(522 BC) 그는 즉시 아케메네즈 가문과 결혼하였고 그의 가문은 아케메네즈 가문의 정통성을 물려 받았다고 선언하였다. 즉 캄비세스의 동생으로 추정하는 바르디아의 미망인이었던 아토사(Athosa)와 정략 결혼한 것은 이러한 정통성을 물려받았다는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성경에 언급된 다리오 1세는 당시 중단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고 칙령을 내린 대왕이다(스 6:1-4). 이때가 기원전 520년 9월 21일(학 1:4-15)이었다. 공사가 재개된 후 완공된 기간은 4년 3개월이었으며, 후일 헤롯 대왕(Herodes Ⅰ, The Great, 37 BC-AD 4)때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된 두 번째 성전이 완공되었지만, 주후 70년 로마의 티도(Titus)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성전 외부의 흔적 잔해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다리오의 통치 초기에는 제국 전 지역의 속주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통치력으로 제국을 번성되게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제국에 협조하는 속주에게는 관용을 베풀었으나 반란을 일으킬 때에는 가차 없는 보복을 감행하였다. 이때 제국을 향하여 반란을 주도한 지역은 소아시아의 밀레도(Miletos)였다. 그러자 다리오는 반란을 주도하였던 밀레도의 지도층 인사들과 용사들을 체포하여 거세를 하였고 페르시아 하렘의 환관들로 만들어 버렸다. 반란 이후 페르시아는 당시의 이오니아 지역인 이곳의 주민들에게는 가혹한 박해를 가하였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에수스가 이 지역 신전의 신상들을 향해 사제 계급에게 신탁을 의탁하여 페르시아를 공격하도록 주도한 지역이 이곳 이오니아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사도 요한이 7교회에 보낸 편지에 소개된 지역이기도 하다(계 2:1-3:12). 이오니아 지역이 반란의 동기가 되어 이들과 동맹관계 속에 있었던 헬라의 아테네와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즉 페르시아와 아테네와의 마라톤 전쟁(499-386 BC)이 발발한 동기를 제공한 지역이 바로 이오니아였다(M. Lang, “Heoodotus and the lonian Revolt”, Historia, 17(1968), pp. 24-36). 아케메네즈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다리오 1세 치세 기간에는 왕의 도로를 통하여 궁전으로 유입되는 수많은 금은 보석과 각종 진귀한 물품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이스인들은 이러한 페르시아의 풍요를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부인 페르세폴리스와 수산궁에서는 신년축제 때에나 다른 축제일이 다가오면 15,000여 명이 넘는 귀빈들과 외국 사절들을 초청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가 되면 매일 수천 마리의 가축들을 잡아서 잔치를 배설하였고 엄청난 양의 술을 제공하는 향연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연회가 열릴 때면 귀빈들은 왕을 볼 수 없지만 왕은 연회장에 초대된 귀빈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궁전 예절은 엄격하여 왕 앞에 설 수 있는 자들은 지극히 소수였다. 왕은 이러한 귀빈들을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높은 왕좌에 앉아 그들의 알현을 받았다. 왕의 측근에서 신임을 받는 신하들은 3가지의 무술에 능하여야만 하였는데, 승마와 궁수, 그리고 지략이었다. 즉 지성을 가진 용사들 중에 국가관이 확고한 사람들을 엄격히 조사하여 왕의 측근 신하로 등용하였다. 총독 느혜미야는 이러한 인물중 한 명이었다(느 11:11-2:8).
540 |성경시대 역사탐방<34>| 총독 스룹바벨과 다리오(다리우스)대왕_장인수 박사 파일 (426)
편집부
17965 2010-09-01
총독 스룹바벨과 다리오(다리우스)대왕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수사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전사(불사대不死隊:Amrtaka -정예부대) 부조 일부 <루브르 박물관 소장> “지역민들 방해 속에서 제2성전 건축은 놀라운 역사” 솔로몬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의 느브갓네사르에 의해 파괴되었다. 느부갓네사르(Nebuchadnezzar, 626-539 BC)는 신바벨론 제국의 통치자로 제국을 43년간 다스렸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느브갓네사르에 의해 철저하게 응징당하였고 그는 소경이 되어 쇠사슬에 묶인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유다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왕하 25:5-7; 렘 39:4-8; 52:8-11). 황폐해진 예루살렘에는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만 남겨두었다(왕하 25:8-9; 대하 36:17-20; 렘 39:9-10; 52:12-13). 맹인이 된 시드기야는 바벨론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왕하 25:7). 이후 70년이 지나 고레스(키루스) 칙령에 의해 귀환한 유대인들이 기원전 536년 두 번째 성전의 기초를 놓기는 하였지만 공사는 반대에 부딛혀 20년간 공사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는다(스 4:1-5). 이때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선지자를 세워 백성들이 공사를 계속하도록 격려하셨다(스 5:1). 기원전 520년 8월 29일, 학개가 말씀을 선포한 지 두 달 후 스가랴 또한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선포하였다(슥 1:1). 성전건축 공사는 다윗계보의 여호야긴 왕의 손자이며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에 의해 진행되던중 반대자들에 의해 중단되었고, 이러한 성전공사 중단 시기는 고레스 2세 통치후기(530 B.C)에서 다리오 1세(다리우스 1세) 통치 제2년(520 B.C)까지로 그동안 공사는 아무런 진척도 없었다. 이 기간동안 예루살렘에 귀한하였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거처할 집들을 짖는 데 분주하였다. 당시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자들은 총독 닷드네(Tattenai)와 스달보스네(Shethar Bozenai)였다(에 5:3). 학자들에 의하면 이들은 왕족(王族) 가문의 총독 스룹바벨에 대하여 후일 유대인들이 스룹바벨 주도로 유다 국가를 제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하며 반대를 하였다. 스가랴 4장 10-14절에 나오는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암시하는 인물들은 암스타드(Olmstead)의 주장에 의하면 스룹바벨과 예수아이다. 그러나 다리오 1세(DariusⅠ the Great, 522-486 BC)는 이들이 모함하는 공문서를 무시했다(스 5:6-17). 다리오는 고레스(GyrusⅡ The Great, 558-547 BC)가 남긴 조서의 원본을 문서 창고에서 발견하고 모든 페르시아의 관리들에게 성전건축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지원해 주라는 고레스 칙령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스 6:1-12).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성취된 결과였다(슥 4:9). 성전이 완성되고(516 BC) 낙성식 잔치와 함께 스룹바벨은 성경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스 6:16; 느 12:47). 페르시아 아케메네즈 왕조(Achaeminian Empire)는 다리오 1세 치세 기간동안 최대의 황금기를 누렸다. 다리오 대왕은 약 40년간(522-486 BC) 통치하였으며 영토를 인도까지 넓혔고 그리스 접경 지대까지 진출하였으며 동유럽까지 뻗쳤다. 그는 스키타이인들을 정복하기 위해 다뉴브강을 건넜지만 이곳까지는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세력들에게는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다리오 대왕은 뛰어난 행정가로 원정 중에도 효율적인 행정제도의 법률을 제정하여 질서 있고 번영하는 제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건축예술의 꽃이라고 일컫는 페르세 폴리스를 건축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수도 시설의 도시 계획을 확립하였으며, 표준 화페를 주조하고 완벽한 도로망을 확충하여 왕실 우편제도를 체계화 시켰고, 급행우편을 배달하는 조직체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건물화재를 미리 예방하는 경보 통신 체계도 확대 조직하였다. 그는 페르시아를 더욱 견고한 제국으로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제도를 법제화 시켰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박트리아와 인도는 연간 360텔런트, 이집트는 700텔런트, 바벨론은 1000텔런트와 어린 환관 500명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콜키스에는 소년소녀 100명씩 바치도록 하였고, 에티오피아는 정련되지 아니한 금과 흑단나무 200그루와 상아 20두를 바치게 하였다. 다리오 대왕은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관용 정책이라는 아케메네즈 왕조의 정책을 충실하게 존속시키는데 있어 아낌없는 정책을 폈다. 그는 ‘온갖 혈통을 보존하는 민족들의 왕’이라는 칭호를 제국내의 속주국가들에게 들을 정도였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은 여러개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공문서(公文書)는 그리스어, 바빌로니아어, 이집트어, 리디아어로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국내의 다양한 언어들을 통역하는 통역관을 세워 제국 전체에 왕의 칙령을 전하게 하였다. 고레스 2세에서 다리오 1세의 통치기간 동안에 이들 제왕들은 죠로아스트교를 믿으라고 페르시아의 국교를 강요하지 아니 하였다. 그 결과 다리오 치세 아래에서 통치를 맡은 총독, 즉 사트라프(Satilpy)들은 해당 지역의 종교예식과 그들의 신앙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고레스(KyrusⅡ The Great, 558-547 BC) 시대에서 다리오 1세 치대 당시의 페르시아에는 불사대(不死隊:Amrtaka)라는 1만명의 정예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금으로 장식된 옷을 호화롭게 차려 입었으며 행군할 때에는 수종드는 여인들과 노복들 그리고 낙타 등에 많은 일용품을 싣고 다니게 하였다. 이 시대에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였던 스룹바벨(Zerubbable)의 말년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성전 건축 완공에 참여한 인물들 중 스룹바벨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스 6:14) 다리오 1세에 의해 총독직에서 해직되어 모함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A.D 6세기 경의 유대 연대기(年代記)에는 성전완공 후 바벨론으로 귀한하여 유대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승에 따르면 스룹바벨은 후에 다윗 계열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견해가 우수하다. A.D 13세기의 미드라쉬에는 메시아 사역을 감당한 ‘에덴동산의 하나님의 일꾼’으로 표현한다. 많은 학자들은 관용정책의 대명사인 다리오 1세가 스룹바벨을 유다왕국을 제건하려 한다는 모함으로 처형시켰다는 학설은 정설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J.H. Hertz, The Authorized Daily Prayer Book, New York: Bloch Publsihing Co; Inc). 역사가 요세푸스는 스룹바벨이 다리오의 ‘옛 친구’였다고 언급하고 있다(Antiq. ,ⅲ).
539 |포토에세이| 바닷길 열어가는 용두암_전우식 장로 파일 (1)
편집부
6597 2010-09-01
538 |성경시대 역사탐방<33>| 성전 재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_장인수 박사 파일 (231)
편집부
10843 2010-08-18
성전 재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닷드네의 모함에도 고레스 칙령 재발견 되어 성전 재건돼”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다윗 계열의 자손을 일으키는 날을 예언하였다(렘 23:5-6). 그리고 다윗의 후손 총독 스룹바벨은 스가랴에 의해 이렇게 예언 되어 있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슥 4:9)며 그의 정통성을 기록하고 있다. 스룹바벨이란 이름의 뜻은 ‘바벨론에서 난 싹’을 의미한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김의 장남 스알디엘의 아들이다(학 1:1; 12-14; 마 1:12). 그러나 또 다른 아들 브다야의 아들로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스알디엘이 자손 없이 세상을 떠나자 브다야가 그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낳았거나 동명(同名)의 아들로 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대상 3:17-19). “스룹바벨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 왕의 영광을 얻고 그 왕좌에서 다스릴 것이라”는 스가랴의 예언과 달리 그 뒤에는 이러한 언급이 있는데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앉으리니, 이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고 하였다(슥 6:13). 그리고 선지자 스가랴에 의해 언급된 제사장은 여호수아(예수아)인데 그는 제1성전 시대의 마지막 제사장의 손자로서 제2성전의 사독계열의 첫 대제사장이었다. 학개, 스가랴 선지자들에 의해 인정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성전재건의 역사를 이루는데 있어 핵심적인 지도자로 부상한다.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을 위기로 여겼던 총독 닷드네와 그의 동관들은 이러한 상황을 보고 받고 이들을 향하여 항의하였다. 너희가 무슨 권한으로 성전을 재건하느냐 하는 것이다(에 5:3). 그러나 그들은 고레스(Cyrus Ⅱ, 558-530. BC)의 칙령에 의해 건축한다고 답변하였다. 총독 닷드네는 유프라테스 서쪽 영지 아바르-나하라 지역의 총독이었음이 기원전 502년의 설형문자를 통해 실존 인물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방해 공작은 성전건축의 도움 제공을 거절한데 분개한 사마리아인들의 배후 방해 공작과 연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느 4:7-23). 총독 닷드네는 이러한 성전 건축 재개에 대하여 페르시야 제국 당국에 보고하였고 이러한 공사 재개에 대한 유대인들의 주장을 조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고레스 2세가 작성한 문제의 칙령은 다리오 왕의 명령으로 엑바타나의 기록 보관소를 조사하였고, 문서 보관소에서 고레스의 칙령을 발견하였다. 엑바타나(Apadana)는 메대의 옛 수도였으며 당시의 페르시야 왕들의 여름 궁전이었다. 여기서 발견된 고레스의 칙령은 모든 원조를 아낌없이 하여 주라는 내용의 칙령이었다. 고레스 2세는 기원전 539년 신바벨론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유대 유민기 생활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종말을 맞이한다(대하 36:21). 당시 유다의 첫 번째 총독 세스바살은 여호야긴의 아들이었던 네 번재 아들 세낫살과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H. Tadmor). 세스바살은 스룹바벨과는 전혀 다르게 한번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고 있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에스라서 5장 14절에 세스바살이라는 이름한 자라고 기록하므로 거리를 둔채 언급하고 있다. 고레스 2세가 전사한 기원전 530년 이후 페르시야를 통치하였던 캄비세스 2세(CambysesⅡ, 530-522 BC) 통치시기에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중단된 시기였다. 그의 통치기간에는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반란세력들을 제압하는 국가적 변란기였다. 이 기간은 페르시야 정부와 유대공동체 사이의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 수가 없다. 캄비세스 이후 다리오 1세(Darius Ⅰ 522-486 BC) 시대가 도래하면서 고레스 1세의 칙령을 발견하므로 이로인하여 성전건축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성전 기구의 반환과 이러한 성물들이 옛 규정에 따라 거룩한 예식에 사용되도록 조치되었다. 이렇게 기원전 520년경 여름부터 성전재건을 시작한 유대 지도자로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스 5:1-2, 6:14, 학 1:-2:) 당시의 페르시야 제국은 반란을 기도하였던 가우마다의 징벌이후 제국의 기틀을 흔드는 징조만 보여도 민감하게 대처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정황을 생각하여 보면 다리오 1세의 성전 건축 재개의 허락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아닐수 없다. 이처럼 다윗의 자손 스룹바벨과 힐기야의 자손 여호수아라는 두 지도자에 의해 성전건축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리오 1세 집권 초반이었던 기원전 522년 12월 22일부터 521년 6월까지 신 바벨론의 느부갓네사르 3세에 의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바벨론에 머무르고 있던 다리오 1세는 바벨론 속주 민족 가운데 하나인 유대민족이 다리오에게 착실한 충성을 보여 주고 그들의 도움으로 유대지역을 페르시야의 영향권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줌으로써 이집트 정복이후 허리의 위치와 같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로서 정치적으로도 안정된 완충지대를 확보함으로써 제국의 전체적 이익을 고레스 1세는 깊이 생각하였을 것이다(A. Kuhrt).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희망사항은 무엇이었을가? 다윗 왕조 계열의 여호야긴과 그의 직계는 포로기 유민시대라는 오랜 침묵의 기간동안 그들의 구심점이요, 미래에 회복하여야 할 국가재건의 기대가 함축된 신앙적 이데올로기였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고레스 2세의 칙령 발견과 더불어 다리오 1세에 의한 고레스 2세의 칙령 문서를 재확인하는 명령이행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불가능한 정황이었다. 그 후 다리오 1세는 여호야긴의 손자였던 다윗의 자손 스룹바벨에게(대상 3:9) 페르시야 총독(Satrap)직의 권한을 부여하였다는 것은 다리오1세 초기에 다윗왕조의 회복에 대한 유대민족의 소망에 많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속주지방의 왕조가 계승되도록 허가한 지역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길리기아와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들과 구브로(사이프러스)에도 왕족들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F.Bianchi). 기원전 520년 초 귀환한 스룹바벨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해 8월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다리오 1세는 유다인들의 성전재건 허락이후 스키타이인과 엘람인들의 반란을 진합한다. 선지자 학개에 의하면 스룹바벨은 여호와 소유의 인장반지였으며 코스모 폴리탄(Cosmopolitan) 시대의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다(슥 4:1-6, 10:14). 위기 시기인 기원전 519년 다리우스 통치시기의 황금시대를 맞이할 즈음 페르시야는 예루살렘의 상태를 위험지대라고 인지하고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인 닷드네에게 그곳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라고 명령하였다(스 5:3-17). 이러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고레스의 칙령대로 성전이 건축되었고 하나님의 성전은 드디어 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던 것이다(스 6:16-22).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그 누구도 중단 시킬 수 없는 대역사(大役事)였던 것이다.
537 |성경시대 역사탐방<32>| 조로아스트교의 본산지 야즈드(Yazd)_장인수 박사 파일 (286)
편집부
11394 2010-07-21
조로아스트교의 본산지 야즈드(Yazd)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선과 악을 신적 존재로 정립한 조로아스트교의 발상지” 카비르(Kavir) 사막과 루트(Lut) 사막 사이에 위치한 야즈드(Yazd)는 실크와 직물 그리고 카펫을 생산하던 중심지였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인도로 통하는 무역상들(caravan route)의 거점지였다. 마르코폴로는 이 길을 지나면서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이며 상업의 중심지”라고 하였다. 야즈드는 사막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고온 건조한 기후 조건으로 인하여 통풍을 위해 공기의 내부 순환이 잘 되도록 건축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더워도 집 안에 들어서면 더위가 가시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건축형태의 주거지를 페르시아인들은 바드기르(badgir)라고 불렀다. 그리고 안뜰 중앙에 풀(pool)이 있어서 필요한 식수뿐 아니라 집안 공기를 시원하게 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힘들지 않게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카나트(qanat)라고 부르는 지하수로(水路)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곳은 배화교(拜火敎)라 일컫는 조로아스트(Zoroaster)교의 불의 사원인 아타쉬가타(AtashKadah) 사원이 있는 곳이다. 이 사원은 불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 아후라는 ‘신’, 마즈다는 ‘위대한’이라는 뜻)를 주신으로 섬기고 있다. 조로아스트교의 삼대 교리는 ① 좋은 생각(Pendar-e Khob) ② 좋은 말(goftar-e Khob) ③ 좋은 행동(kerdar-e Khob)으로 삶을 추구하는 종교이며 페르시아의 과거 국교였던 조로아스트교의 기본 교리였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1951년에 그린 교주 조로아스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 안에는 유리창으로 가려진 방이 있고 커다란 화로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이 불은 처음에 나히테 파르스(Nahid-e Pars) 신전에서 아가다(Aghda) 지역으로, 그후 1174년에는 아르데칸(ArdeKan)으로 옮겨져 300년간 있었으며, 1474년 이곳 야즈드로 옮겨진 후 지금까지 타오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란 정부 정책은 조로아스트교의 포교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어서 이곳 신자들이 외국으로 이주하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조로아스트란 뜻은 아스테르(aster), 즉 별을 상징한다. 이 말은 점성학의 상징으로 불려진 단어이다. 창시자 조로아스트의 이름은 ‘낙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이 말은 유목민의 단어였다. “오랜 전승에 의하면 조로아스트는 피타고라스를 가르쳤고 메시야를 예언하였던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고 헤르츠벨트는 말한다(E. E. Heazfeld : Zoroaster and His World, 2 vols, Princeton : Princeton Univ. Press. 1947). 18세기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볼테르(Voltaire)는 진리를 기독교 밖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으로 조로아스트교를 언급하였다. 니체 또한 그의 대표작으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트를 가리키며 그가 ‘기독교 교리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조로아스트의 가르침이 페르시아에서 처음부터 즉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한 저항에 부딪쳤는데 오랜 옛날부터 페르시아인들은 아나히타(Anagita : 물의 신)와 미트라스(Mithras : 빛과 진리의 신)등을 숭배하였던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후일 조로아스트교가 국교가 되었을 때 이 신들은 아후라마즈다를 도우는 신의 존재로 변형되었다. 후일 기독교 이단의 원줄기였던 영지주의(gnosticism) 사상의 기원이 헬라(그리스) 철학의 이데아(Idea)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헤롤드 브라운(Harold O.J.Brown)은 기독교 영지주의의 특징 가운데 그 전래가 고대 근동사상을 기반한 복잡한 우주론과 사색적 사상의 헬라적 요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을 가미한 형태라고 정의하였다. 특별히 가현설(Docetism)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며 그의 육체적 인간임을 부정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초기 이단의 영향을 끼친 헬라의 이데아 사상은 기독교 초기 시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영지주의의 교주는 케린투스(Cerinthus)였다. 이에 대항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요이 1: 7). 이러한 영지주의적 요소의 그 기원을 네델란드의 역사학자 루카드불로와(Lukas De Blois)는 고대 근동의 신비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헬라의 종교중 일부라고 하였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적 이분법 사고는 조로아스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승(tradition)되어 오는 사모스 출신 피타고라스(pytagoras)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n)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볼 때 페르시아의 신비종교인 조로아스트교가 그 기원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L.de Blois & R.J.Van der spek. 윤진역, 서양고대문명의 역사, 서울:다락방, 2003. pp. 98-99). 또한 문화적으로도 고레스 2세 통치시기에는 많은 그리스 장인들이 페르시아의 건축물 장식을 만드는데 유입되어 파사르가데, 페르세폴리스 궁전 등을 건축하는 데 참여하게 되어 오랫동안 페르시아와 교류하였다. 조로아스트교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는 약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① 성스러운 예배의식에 관한 규정 : 야스나(Yasna), ② 작은 아베스타라는 뜻의 기도의 글 : 쿠르다흐 아베스타(Khurda Arestoy), ③ 기원과 제사 재도에 대한 비스프라트(Visp-rat), ④ 악마를 물리치는 정결의식 : 벤디다스(Vendidad), ⑤ 죽은 영혼에 관한 내용 : 하독스크 나스크(Hadoxst Nask) 그 외에도 젠드 아베스타(Zend Avesta) 경전이 있는데 이 경전은 아베스타 경에 대한 요약과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그러나 교주 조로아스트가 직접 저술하였다고 알려진 것은 ‘야스나’ 안에 들어있는 ‘가타스’라는 송가뿐이다. 후 시대에 큰 영향을 끼친 조로아스트교는 윤리적 유일신적 요소가 있으며 우주에는 선과 악, 거짓과 진실,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며 거짓이 있고 진실이 있으며 죽음이 있고 이러한 선악 속에서 대립하여 싸운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예로 ‘야스나’ 45장 2절에는 이러한 언급이 있다. “두명 가운데 거룩한 영이 다른 한 영에게 말했다. 우리는 생각, 가르침, 뜻, 신념, 언어, 내면의 모습 등 그 어느 것도 일치하는 것이 없고, 서로 완전히 분리된 존재이다”(나종근 편저, 조로아스트, 서울: 시공사, 2006, 3쇄. p.34).
536 |포토에세이| 한려해상의 소매물도 등대섬 파일 (75)
편집부
7431 2010-07-21
535 |성경시대 역사탐방<31>| 엘람(Elam)의 중심지역 초가잔빌(Choqa zanbil)_장인수 박사 파일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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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36 2010-07-07
엘람(Elam)의 중심지역 초가잔빌(Choqa zanbil)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엘람은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들이 세운 왕국” 엘람은 바빌론 동쪽 페르시아만 북쪽 평지의 서남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다. 현지명은 초가잔빌이다. 고원지대인 이곳에 엘람인들이 거주하게 된 배경은 카룬(Karun)강과 케르카(Kerka)강의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유리한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람인들이 거주하였던 주변 지역에는 기원전 4000년 후반부터 거주하고 있던 수메르, 바벨론, 앗시리아인들과 그후 페르시아(바사)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엘람인들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엘람왕들의 역사 기록문서에는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주로 이들의 기록 토판은 수사(Susa)에서 발견되었다. 엘람족의 설형문자는 수메르(Sumer)의 문자와 혼용되어 사용되었으며 수메르를 정복하고 아카드 왕조시대를 연 사르곤 1세(SargonⅠ, 2360-2180 BC) 시대가 도래하면서 엘람어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사르곤 대왕의 손자 나람신(Naramsin)과의 조약문서에서는 이 엘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엘람인들은 그들의 언어대신 바벨론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엘람족의 시조는 앗수르, 아르박삭, 룻, 아람과 함께 셈의 자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창 10:22). 그리고 에스라 4장 9절에 보면 엘람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베히스툰(Bisotun)석비에 기록되어 있는 고레스 1세의 칭송 기록은 바빌론, 고대 페르시아어와 엘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 엘람의 중심지역인 초가잔빌은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국제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특별히 이곳에 우뚝 서 있는 지구랏은 기원전 13세기 중반 엘람왕 운타시갈(Untash Gal, 1250 BC)이 건축한 도시이다. 이 지구랏은 기원전 640년경 앗시라이의 침공으로 멸망한 이후 폐허로 남아있다. 옛날 아모리족들이 다스리던 시기(1894-1595 BC)에 구 바벨론 통치자는 법전으로 유명한 하무라비왕이다. 엘람왕국의 전성기 시기는 그돌라오멜(창 14:1-17)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기원전 740년경 엘람 족속은 앗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이 이들을 진멸할 때까지(640 BC) 바빌론과 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를 침공한 앗시리아 군대 중 용병으로 출정한 엘람인들이(사 22:6) 바빌론을 침공한 궁수를 언급한다. 그후 페르시아(파사)의 고레스왕 휘하의 엘람인들을 이사야 선지자는 언급하고 있다(사 21:2). 에스라서 4장 9절에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페르시아(바사) 정부의 관리로서 르홈과 심새와 함께 수산인과 엘람인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성전재건을 반대한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티그리스 강 하류계곡을 향하고 있는 이란고원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엘람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안에서만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이 역사의 기원은 첫 번째의 시기가 기원전 1800년대 시기이며 두 번째 시기는 1800-1100년의 기간까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1100-645년까지로 나눌수 있다. 고대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아완, 얀산, 시마슈, 수사의 네 지역이 엘람의 주요도성이었다. 1차 시기는 엘람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엘람은 우루크(Uruk) 제1왕조의 루갈(Lugal), 도무지(Dumuzi), 길가메쉬 통치자들을 공략하여 우르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근 100년 동안 엘람왕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였다. 그후 엘람이 수메르 우르크에서 철수한 시기는 아다브시(市)의 루갈랄네문드와 키시의 왕 에안나툼과의 전쟁에서 패하였기 때문이었다(2400 BC). 엘람인들은 수메르인들에게는 항상 골칫거리였다. 이러한 공포의 대상이었던 엘람족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몰아낸 인물은 고대 위대한 정복자 사르곤 1세였다(2333-2279 BC). 사르곤 대왕은 엘람을 응징한 전과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러나 엘람인들은 항상 기회만 주어진다면 수메르와 우르왕조를 정복할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우르 왕조는 슐기의 아들 압비신 때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이시비 아르아(Issbi-Erra) 장군의 반란으로 왕조의 세력이 양분화되는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을 때 엘람은 이 기회를 틈타 우르 제3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도 수사를 정복하였으며 우르 3왕조의 마지막 왕 압비신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아마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하란으로 이주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엘람에 의해 우르 왕조가 패망한 이야기는 기원전 2000년기 중엽의 추모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엘람왕은 숙갈마(Sukkalmah)였다. 기원전 18세기 말 바빌론의 함무라비가 국력을 키워 세력을 확장하자 엘람왕들은 바빌론과 대치하며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 국익에 손해가 온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바빌론과 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한편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던 유목민의 후예들인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엘람을 침공하기로 하였으나, 엘람왕 할루슈(Hallushy)는 오히려 이 기회를 역 이용하여 산헤립(Sennacherib, 704-681 BC)의 아들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엘람은 내부 분쟁에 의해 멸망하고 엘람의 귀족과 지식인들과 주요 인물들은 기원전 639년 사마리아로 이주하였다. 신약시대 오순절 절기 때 예루살렘에 온 엘람인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로 추정할 수 있다(행 2:9).
534 |성경시대 역사탐방<30>| 페르시아의 황금시대 연 다리오I세_장인수 박사 파일 (295)
편집부
12442 2010-06-23
페르시아의 황금시대 연 다리오I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성전 재건 반대하던 적대자들에게 엄하게 경고해” 고레스 2세(CyrusⅡ, 558-547. BC)의 원통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새겨져 있다. “나는 고레스(키루스)이다. 세계의 왕이며 위대한 왕이며 강력한 왕이며, 바벨론의 왕이며 수메르의 왕이며 아카드의 왕이고, 캄비세스(cambyses)의 아들이다. 캄비세스는 위대한 왕이고 안샨(Anshan)의 왕이며 테이스페스(Teispes)의 후손이다. 테이스페스는 위대한 왕이며 아케메네즈 왕조의 시조이다. 벨(Bel)과 나부(Nabu) 신이 이 가문의 지배를 원하였고 그 후예들이 왕이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기뻐하였다.”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Ⅱ, 530-522 BC)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다. 페르시아(바사) 제국 내에서도 그의 기록에 대한 자료 역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제2 성전 재건은 중단되고 있었다. 페르시아 역사 학자인 존 하트(John Hart)는 그를 강력한 폭군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이집트를 침공함으로써 근동을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연 군주였다. 그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 계속 남진하여 이디오피아(Ethiopia)도 정복하였다. 기원전 522년 봄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 중에 있을 때 페르시아에서 온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페르시아 심장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가우마타(Gaumata)라고 하는 조로아스트교 승려가 캄비세스의 잃어버렸던 동생 바르디아(Bardiya)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바르디아는 캄비세스가 이집트로 출정한 후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모의를 하였었는데 이것이 구테타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캄비세스는 급히 귀국하던 중 시리아 하맛(Hamath) 근교에서 준마 위에 올라타려고 하다가 칼집 덮개가 벗겨지면서 칼집에서 빠져나온 칼이 그의 허벅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고 3주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로도투스를 언급하면서 캄비세스가 다메섹(Damascus)에서 죽었다고 주장한다. 캄비세스가 사망한 이후 페르시아에서 왕으로 집권한 가우마타는 집권 후 수 주가 지난 뒤에 다리우스(성경 명칭은 다리오)에 의해 기원전 522년 9월 29일에 암살되었다. 이로써 정통 아케메네즈 왕조(Achaemenian Empire)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캄비세스 2세의 뒤를 이어 다리오(DariusⅠ, 522-486 BC)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다리오’의 페르시아 이름은 다라야-바후-마나(Daray-Vahu-manah)이다. 다리오란 명칭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이름이다(슥 1:1, 7; 7:1; 스 4:5, 24; 5:5). 헤로도토스의 역작 <역사>(Historiae) 제3권에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다리우스(다리오)는 제국을 20개의 주로 나누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이 주를 사트라피아(Satrapia, 총독령)라고 하였는데 사트라피아마다 한 사람의 총독이 있었고, 백성들은 그에게 조세를 납부하였다.” 다리오의 통치 시대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꽃피우게 되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를 파라다이스(Paradise:낙원)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아케메네즈 왕조를 파라다이자(Pairidaeza), 즉 파라다이스로 고쳐 불렀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 수도 페르세 폴리스에는 다양한 장인(匠人)들이 이주하고 있었다. 엘람에서 온 서기관, 리디아에서 온 장인 목수, 이오니아에서 온 석공, 사데에서 온 대장장이, 메데에서 파송된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고문관, 그리스의 의사, 페니키아(베니게)에서 파견된 해군 용병을 비롯한 리비아의 전차병, 그리고 시리아의 기병과 이디오피아, 박트리아, 소그디아 등에서 차출된 수 십만의 보병들로 구성된 군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 내에서 조공으로 바쳐진 파르티아의 낙타, 앗시라이에서 조달된 양, 아르메니아의 군마, 가바도기아의 노새, 누비아에서 온 얼룩말, 인도의 코끼리, 리디아의 야생염소, 바빌로니아의 물소들이 들어왔으며 제국에는 51만 8000평방km의 사냥터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os)는 이 다리오 치세 기간을 페르시아의 황금시대라고 불렀다. 이 황금시대를 연 다리오도 그리스를 침공함으로 말미암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 이 불씨로 말미암아 그가 죽고난 후 150년이 흐른 뒤 엄청난 전쟁에 페르시아가 휩싸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예전에 솔로몬의 화려하였던 성전이 느부갓네사르에 의해 파괴된 것은 기원전 586년이었다. 그후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기원전 536년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제2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하지만 성전 재건 공사는 주변 이방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20년간 중단되고 있었다(스 4:1-5). 이때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백성들이 공사를 계속하도록 격려하셨다(스 5:1). 기원전 520년 8월 29일을 기점으로 선지자 학개는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 공사를 재개하도록 세 번에 걸쳐 격려를 하였다. 선지자 학개가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지 두 달 후에 선지자 스가랴가 이러한 선언에 동참하였다(슥 1:1). 성전 재건 공사에는 다윗 계보인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재개하였다고 하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또 다시 유대인들은 시련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때에 유브라데강 건너편 총독 닷드네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스 5: 3). 이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은 유프라테스강 건너 편에 있던 총독의 방해를 극복하고 그들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성전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슥 5:5). 후에 다리오는 성전 재건을 반대하던 적대자들을 향하여 엄하게 경고하였다.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變改)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 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열왕이나 백성이 이 조서를 변개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저희를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스 6:11-12). 이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사건이었다. 장대한 페르시아의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나타난 시기였다.
533 |포토에세이| 세월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_전우식 장로 파일 (66)
rpress
5859 2010-06-09
532 |성경시대 역사탐방<29>| 크세노폰에 의해 재조명 된 고레스2세 파일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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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6 2010-06-09
크세노폰에 의해 재조명 된 고레스2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페르시아는 기록 남기지 못해 역사 속에서 잊혀져” 크세노폰(Xenophon, 430-354 BC)은 그리이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 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아끼는 제자 중 하나였다. 플라톤(Platon)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크세이폰의 성장 배경이나 사상이 그리 이스의 전통을 잇는 플라톤의 철학적 접근 방법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흐름이 그리스적인 전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 계보에 반하 여 다른 시각에서 철학사를 이어온 철학자가 크세노폰이었다. 크세노폰은 기 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장군이 되었고 정치가로서도 활동한 경력을 가지 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험과 배경을 바탕으로 역사적, 철학적 저작을 기술하 였다. 이러한 배경은 플라톤과 서로 다른 극적인 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문제 의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좋은 삶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이데아(Idea)와 이상국가라는 철학적 교의를 앞세워 심화 시켰다. 반면에 크세노폰은 좋은 삶이란 정치적, 실천적인 삶이며 정치 세계 에서 절대 필요한 명제를 실천 정치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에 두었다. 이런 점에서 크세노폰은 좋은 삶이란 정치적인 삶이라고 정의하고, 정치 세계에 서 진정 필요한 인물은 ‘정치 교사’가 아닌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였 다. 이러한 크세노폰의 철학사상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친 두 번째 인물 은 고레스 대왕(CyrusⅡ The Great, 558-530 BC)이었다. 고레스는 온건하면 서도 포용적인 정복 정책으로 페르시아(Persia)를 대제국으로 이끌었는데 크 세노폰은 고레스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실천적 정치인 의 모델로 삼았다. 고레스는 캄비세스 1세(CambysesⅠ, 640-600 BC)의 아들이었으며 구약성경 에 나타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대하 36:22-23; 스 1:1-8; 사 44:28; 45:1; 단 1:21; 6:28; 10:1). 고레스는 바빌론을 정복한 이후 바벨론에 유민 으로 끌려와 있던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칙령을 발표한 군주였 다. 이러한 고레스를 세속 역사 속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다시 조명하는데 있 어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크세노폰이었다. 지금의 그리스 지역인 고대의 헬라스(Hellas)라고 불렸던 곳에는 그당시 정 착하여 사는 인구가 많지 않았다. 집단 이탈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상업도 활발하지 못했고 해로나 육로를 통한 소통의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척박한 땅을 경작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또한 자본도 열악한 상태였으며 메마른 땅에 과일나무조차도 심기가 어려웠었다. 그것은 그만큼 외부의 침략자들이 언제든지 기습적으로 들이 닥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 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크세노폰은 헬라스의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대안으로 고레스의 능력과 자질 그리고 지도력의 유형을 그 모델로 삼았다. 이러한 정치력이 위대한 그리스의 부활을 꿈꾸는 크세노 폰의 대안이었다. 하지만 후일에 그리스로 돌아온 크세노폰은 스승 소크라테 스의 고향 사람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354 BC). 고대 아케메네스(Achaemenes) 제국으로 불려지던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역사 를 기술하지도 않았고 단 한편의 문학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오늘날 문자 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페르시아 왕들의 비문이 전부였다. 바위벽에 새겨 진 몇몇 비문들은 그들이 당시 하나의 제국을 다스렸다는 치적만을 기록으 로 남기고 있을 뿐이다. 물론 아직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상으로 우리가 찾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페르시아에 대해 1935년부터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착수된 이후 페르 세폴리스에서 수천 개의 작은 점토판들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유물들 이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역사를 푸는 열쇠를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다만 제 국내의 행정체계를 일부 알아볼 수 있는 몇 가지 정보만 접할 수 있을 뿐이 다. 페르시아는 찬란한 고대 그리스 문화와 쌍벽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 구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언급된 부분이 많이 있다. 서구세계의 역사관은 당시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와 철학 그리고 정치 등이 서구의 학 자들에 의해 문명의 구심점으로 부각되어 있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페르시 아 문명은 역사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단지 크세노폰에 의해 페르시아 의 장구한 역사 속의 한 단면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의 역 사적 전기인 고레스의 교욱(Cyropaedia)은 전집으로 두 권을 차지하는 방대 한 저술로 후대에 남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페르시아의 거대한 역사가 자기들의 언어로 자신의 역사를 남기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하여 단편적인 역사의 줄거리로 이어가는 흐름을 짚어볼 뿐이다. 후대의 이슬람 사관에서는 자신들의 역사 인 페르시아의 역사를 악의 축으로 보는 이란의 역사학자들도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본 페르시아인들은 자기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문화언어 인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야만족일 뿐이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한편으로는 페르시아 군주들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비판적인 관점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적 지도자의 모델로 평가하고 기술하고 있다. 마케도니야의 알렉산더에 의해 철저하게 패망의 길을 걸어갔던 다리우스 3세 (Darius Ⅲ, 336-330 BC) 시절의 그리스 저작물들은 페르시아를 철저한 악 의 제국으로, 잔인한 폭군들이 군림하였던 고원지대의 야만족으로, 혹은 폭 력과 야만이 활개치는 비이성적인 국가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헬라스, 즉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야만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서구 중심적 이분법에 따 라 오늘날에도 역사를 그와 같은 시각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 학계의 주된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 속에서 고레스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고레 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 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 가 놓여지리라 하는자니라”(사 44: 28).
531 |성경시대 역사탐방<28>|에스더의 애환이 깃든 수산성_장인수 박사 파일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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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6 2010-05-26
에스더의 애환이 깃든 수산성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다니엘과 에스더의 숨결 지금도 느낄 수 있어” 수산궁을 안고 있는 수사(Shush)는 이란 남서쪽에 있는 아와즈에서 북서쪽으 로 117km쯤 떨어져 있는 곳이다. 수사는 선사시대에서부터 페르시야 제국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야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다. 페르시야 문명 중심지 ‘수사’ 수사는 특히 사르디스(사데), 엑바타나(악메다), 페르세폴리스로 가는길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수사에는 왕들의 국가 가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느헤미야 1장 1절과 에스더 1장 2절은 수산궁 (susa the capital)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다리우스 2세는 그가 기록한 비문에서 궁정 건물을 건축한 자재에 대하여 이 렇게 언급하고 있다. “목제는 레바논과 간다라 카르마니아에서 가져왔으 며, 금은 사르디스와 박트리아에서, 유리제품은 소그디아에서, 터어키옥은 코리스미아에서, 은과 흑단은 이집트에서, 벽의 장식품은 이오디아에서, 그 리고 상아는 이디오피아에서, 돌기둥은 엘람에서 들여왔다.” 궁전을 건축하는 장인(匠人)들로서는 이오니아의 사르디아 석수장이들을 비 롯해 메대와 이집트에서 온 금 세공사들, 이집트와 사르디아의 목수들, 바빌 론에서 온 벽돌굽는 인부들이었으며 이들을 동원하여 웅장한 궁정을 건축하 였던 장소가 수산궁이었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1세(아르닥크세르크세스 1 세, Artaxerxex, 465-424 BC)의 통치기간 동안 화제가 일어나 전소되었으며 그후 아닥사스다 2세(ArtaxerxesⅡ, 404-325 BC)가 제건하였다. 수산궁은 여러 강에서 물을 공급받았는데 서부로 흐르는 강이 케르케강 (Kerkhen)이다. 앗시리아인들은 이강을 우크누(Uqnu: 유리빛, 하늘빛)강이라 고 불렀다. 그리이스인들은 이 강을 코아스페스(Choaspes)라고 불렀으며 키 루스대왕은 오직 이 강의 물만 마셨다고 알려져있다(Herodous Ⅰ. 188). 수사의 동부로는 아베디즈(Ab-e-diz)강이 흐르는데 이 강은 때때로 수로에 의해 케르케강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엘람인과 앗시라인들은 이 강을 이디 데(Idide)강이라고 불렀다. 수사궁 자체의 위치는 샤우르(Shaur) 동쪽 강가 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수로를 성경은 올래(Ulai)강이라고 불렀다(단 8:2). 수사에는 4개의 중요한 작은 언덕들이 있는데 아크로폴리스와 아파타나 (Apadana), 빌레로얄(Ville Roylae), 빌레데스 아르티산스(Ville des Artisans)라고 불렀다. 아크로폴리스와 아파타나 동쪽지역에는 상인들과 예 술인들 그리고 법정관리인들이 거주하였던 언덕의 거주터 폐허가 남아있다. 1165년 스페인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투델라 벤쟈민이 이곳을 방문하 여 7000여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던 지역의 폐허와 14개의 회당터를 발견 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이 수사였다는 사실을 발굴 결과 증명한 사람은 영국 인 헤리 처칠(Harry Churchill)과 윌리엄 토프루스(Willaim K. Loftus, 1850 년)였다. 1853에서 그 다음해까지 이들은 아케메네즈왕조의 계단식 극장을 발굴하였다. 프랑스 고고학자 마르셀(Marcel)과 진네듈라포이(Jeanne Dieulafoy)는 1884년에 발굴을 시작하여 2년후 마칠 때까지 접견실 궁전자리 의 위치를 발굴하였다. 수사의 황금시기는 아케메네즈왕조(Achaeminian Empire)가 통치하던 시기였 다. 그리고 기원전 324년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이곳 수사에서 약 80명의 그 리이스인들과 1만명의 군인들이 페르시야의 처녀들과 합동결혼식을 올린 것 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현재 수사에는 소위 예언자 다니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남아 있는 데 다니엘은 시아파 무슬림들이 공경하는 예언자로 지금도 숭배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고대 엘람인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엘람인들의 시조는 엘람으로 창 세기 10장 22절에는 셈의 아들로 언급되어 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동방의 왕들로 팔레스타인을 공격한 그돌라오멜(Chedoralaomer)이 엘람의 왕이었다 (창 14:1). 다니엘은 올레 강변에서 환상을 보았으며 또한 올레강변에서 사 람의 목소리를 들었다(단 8:16). 이 수사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役事)을 만들어 내신 사건이 에스더서 에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야의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Ⅰ, 486-456 BC)는 왕비 와스디가 자기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크게 노하여 왕비 의 직을 박탈하여 버린다. 그 자리를 대신할 왕비를 간택하게 되는데 베냐민 지파의 유대소녀 에스더 가 간택된다. 그녀의 사촌오빠 모르드게는 그녀의 부모가 세상을 떠날때 그 녀를 양녀로 삼았다(에 2:5-7). 그녀가 오빠 모르드게의 명대로 유대인임을 숨기며 왕비가 되었다. 그후 그녀의 오빠이자 보호자였던 모르드게가 아각의 후손 하만의 적의를 사 게 된다. 하만은 왕을 선동하여 제국내의 모든 유대인들을 섬멸하기로 계획 을 세운다. 하만은 유대인들의 율법이 다른 모든 민족들과 달라서 그들이 왕 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면서 왕을 설득시켰던 것이다(에 3:8). 모르드게가 이 음모를 알게 되고 에스더에게 알려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 고 촉구하자 에스더는 왕의 부름없이 왕에게 나아가면 왕의 노여움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자 모르드게는 경고와 격려로 에스더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자 에스더는 왕의 부름없이 왕에게 나아가 왕의 칙령이 유대백성은 물론 이요 에스더 자신도 죽이려고 계획한 하만의 음모임을 폭로한다. 그 결과 하 만은 모르드게를 교수하기 위하여 마련해 놓았던 교수대에 자신이 매달려 처 형되었고, 유대인 모르드게는 신임총리가 되었으며, 에스더 왕비는 같은 민 족 유대인들의 집단처형 위기에서 그들을 구원시킨 여인이 된다. 이스라엘의 ‘부림절’ 시원지 이때부터 원수의 손에서 민족을 구원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부림절 (Purim)이라고 부르는 민족절기를 지키게 되었다(에 9:17-32).
530 |성경시대 역사탐방<27>|관용의 정치인 키루스 2세_장인수 박사 파일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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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8 2010-05-12
관용의 정치인 키루스 2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적극 후원한 이방 통치인” 키루스 실린더(cylinder)에 새겨 있는 비문을 해독한 결과 다음과 같은 기사 가 실려 있었다. 역사 속 인물로 조명된 키루스 “나는 키루스, 세계의 왕, 위대한 왕이신 캄비세스의 아들이며 … 키루스 의 손자이며 타이스페스의 후손이며(중략) 나는 오랫동안 황폐되어온 성소들 과 그 안에 있는 신상들을 티그리스강 저편에 신성한 도성들로 귀환시켰으 며 그들을 위하여 영구적인 성소들을 지어 주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모 아서 저들의 거주지로 귀환시켰다.” 전승에 의하면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 파사르가대 입구 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 앞에 당도했을 때 키루스 2 세 대왕의 지석을 발견하였고 그 지석에 새겨진 글을 읽고 그의 망토를 벗 어 대왕의 무덤에 덮어주며 머리를 숙여 경배하였다고 한다. “그대가 오리라고 예상하고 오래전부터 여기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나 라는 내가 이룩한 것이며 너는 내 무덤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 정복자는 정복자를 알아보는지 시대를 초월한 영웅의 무덤 앞에 영웅이 서 있었다. 아 리아누스(Arrianus: 고대 역사가)의 글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은 키루스 2 세를 향하여 필로쿨로스(Philokuros), 즉 친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사르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째 되는 해인 기원전 556 년 나보니두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 바빌론을 지배 한 마지막 재왕이다. 나보니두스(Nabonidus, 555-539 BC)가 왕위에 오늘지 5 년의 세월이 흐른후인 기원전 612년 니네베가 함락되면서, 바벨로니아와 함 께 앗시리아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였던 메디아 왕국은 이웃이자 속국인 페르 시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Astyages, 556-549 BC)는 자신의 외손자 키루스에게 배신당하여 멸망하고 만다. 이러한 비극적 역사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전 설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헤로도로스의 글에 나오는 전설 이다. 아스티아게스(Astyages, 550-549 BC)에게는 만다네(Mandane)라는 딸이 있었 다. 한번은 그가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그녀로부터 솟아오른 물줄기가 수도 를 완전히 물속에 잠기게 하더니 전 아시아로 범람하는 것이 아닌가? 이 꿈 이야기를 들은 술객은 그에게 해몽을 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들은 아스티아게스는 깜짝놀랐다. 그는 딸이 결홀할 적령기가 되 자 그 꿈이 실현될까 두려워 사윗감을 메디아 인에게서 구하지 아니하고 캄 비세스(Cambyses, 640-600 BC)라는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켰다. 만다네 공주가 캄비세스에게 시집간 바로 그 해에 아스티아게스는 환상을 보 았는데 그녀의 뱃속에서부터 자라난 포도나무가 아시아 전체를 뒤덮는 꿈을 꾼 것이다. 그는 즉시 술객을 불러 해몽을 하게 하였다. 해몽을 들은 그는 사람을 페르시아로 보내어 그녀를 불러왔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로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아스티아게스는 아이가 출산하면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왜냐하면 술객의 예 언은 태어난 아이가 메디아를 멸망시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이 름은 키루스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신복 하르파쿠스를 은밀하게 불러 서 지시를 내린다. 딸이 아이를 낳거든 비밀리에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그러 나 하르파쿠스는 명령을 어기고 양치는 목동에게 아이를 맡겼고 그 덕택에 키루스는 목숨을 건졌다. 그리이스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 431-355 BC)은 그의 역사 소설 “키 로파이디아”(Cyropaedia:키루스의 교육)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칭송을 아끼 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제국을 장악하는 동안 결코 폭력에 의존한 적이 없 었으며 유명한 관용주의와 더불어 한번 결단을 내린 정책은 빈틈없이 수행하 였던 그의 탁월한 리더십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코스모폴리타니즘 (Cosmopoiltanism)의 대명사로 불리운다. 그는 기원전 553년 메디아의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하고 조부 아스티아게스를 축출한 다음 메디아를 페르시아 에 통합시켜 버린다. 이렇게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면서 바빌로니아와 아나톨리아와 리디아와 그리 고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소아시아의 리디아왕 크로에수스(Croesus)가 통 치하고 있는 사르디스(Sardis)를 기원전 546년 점령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539년 키루스의 신복 장군이었던 고브리아스(Gobryas)가 바빌론을 점령하였 고, 레반트에서 셈족의 지배를 종결하였으며 메디아, 앗시리아, 리디아, 바 빌론을 페르시아에 복속시켰다. 키루스는 기원전 537년 유대유민들에게 자신의 본토로 돌아가 성전을 제건하 라는 칙령을 내렸다. 성경에는 섭정왕 바빌론의 벨사살이 페르시야에 점령당 하였던 사건을 상세하고 기록하여 놓고 있다(단 5:1-7). 벨사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원통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명분을 해독하였 다. “나의 자식 큰 아들 벨사살의 가슴에 당시의 숭고한 신성을 두려워하 는 마음을 심어 주셔서 죄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 서.” 바빌로니아를 향한 전투개시 1년 후 페르시야 왕 키루스는 개선 왕으로 당당 하게 바빌론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히타이트, 카시트 그리고 앗시리아인들 이 페르시야에 복속되었다. 키루스 실린더(Cylinder)에는 이러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내가 평온한 가 운데 바빌론에 입성하여 온 백성의 환호 속에 왕자들이 사는 별궁에 거처를 정하였다(중략). 나의 군대는 바빌론 전역을 평화롭게 순찰하였고 수메르와 아카드의 모든 지역에서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 맡아 성경은 키루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 (키루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 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대하 36: 23).
529 |포토에세이|계절을 여는 꽃길_전우식 장로 파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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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9 2010-05-12
528 no image |포토에세이| 고향의 봄_전우식 장로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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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0 2010-04-28
527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26>| 하나님의 목자牧者로 불리운 키루스 2세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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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89 2010-04-28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65jang.jpg하나님의 목자牧者로 불리운 키루스 2세 |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정복지의 문화, 역사, 종교 포용 정책 펼쳐” 이사야 49장 6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를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 지 이르게 하리라.” 성경에서 예언된 키루스 2세 이렇게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였듯이 기원전 539년 10월 11일에 키루스 2세 (The Great Cyrus Ⅱ, 558-529 BC, 개역성경은 ‘고레스’)가 바빌론 제국 을 정복한 후 그해 10월 29일 2시에 무혈입성하였다. 이로써 키루스가 통치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로소 이때부터 바빌론에서는 고달픈 유 민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향 을 그리워하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키 루스 대제는 유대 유민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는 칙령을 발표한 바 있다(대하 36: 22-23). 키루스가 바빌론 전국 각지를 진격할 때마다 모든 성읍들이 그에게 통치권 을 이양하였다. 당시 섭정왕으로 있던 벨사살(Belshazzar)은 페르시아 군인 들이 바빌론으로 입성할 때에 죽었다. 바빌론의 통치자 나보니두스(Nabonidus)의 통치 기간동안 그의 절대종교정책 으로 말미암아 바빌론은 분열될 위기 속에 있었다. 왜냐하면 나보니두스는 달신 난나(Nana) 만을 인정하였고 태양신 마르둑(Marduk)을 경멸하는 종교정 책을 지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바빌론 제국 내에서는 종교분쟁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 고, 이것은 키루스의 바빌론 정복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는 동기가 되었 다. 반면에 키루스는 여러 도시들이 주신으로 삼았던 마르둑(Marduk) 신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바빌론의 상류계급을 페르시아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다(537 BC). 이렇게 해서 키루스는 바빌론에서도 그 정통성을 인정받은 제왕이 되었다. 이처럼 키루스의 관용정책(Cosmopolitanism)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이러한 정책적 종교관용주의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정체성 을 일깨우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후 키루스 대왕의 정복전쟁은 계 속 확장되어 갔다. 박트리아(Bactria)와 스키타이의 지역까지 정복지를 확대 하였다. 키루스 2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 과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 제10권에 ‘답사’라는 소제목이 붙은 제1장에 크로에소스와 키루스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 기록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극히 단편적인 내용들이 그리이스인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올 뿐이 다. 역사 제4권에는 미트라다테스의 집에서 보냈던 키루스의 소년기 이야기 가 기록되어 있다. 헤로도토스는 키루스가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가 낳았다고 하는 출생의 내용 등 오랜 전승을 근거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 는 키루스 사후 1세기의 세월이 흐른 뒤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서 자료들 을 수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자 료는 그리스 궁정 의사였던 크테시아스의 단편적 기록이 있다. 그는 다리우스 2세와 아드닥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Ⅱ, 404-359 BC) 밑 에서 일했던 인물이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17년 동안 살면서 왕실 기록 을 접하였던 사람으로 페르시아의 역사를 저술하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분실 되고 일부만 보존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키루스가 크로에수스와 나보니두스 를 정복한 사실보다는 제국의 동방 지역들과 벌였던 전쟁을 훨씬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그밖에 키루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로는 9세기 비잔티움 의 대주교 포티우스가 남긴 작품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리이스 원전들은 라틴 어로 번역되고 주석이 달려있다. 키루스 대왕은 그의 통치력의 비범함을 바탕으로 군사 전략가로서 탁월한 지 도력을 발휘하였다. 메디아를 정복한 키루스는 제국을 더욱 확장시키는 정책 을 계속 추진하여 나갔다. 아나톨리아의 리디아(Lidia)를 정복할 때에는 페 르시아 군대의 낙타부대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크로에수스(Croesus)의 기병 대를 물리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우수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키루스는 에게해의 그리이스 도시 국 가들을 차례대로 정복하였고 동쪽으로 는 박트리아(Bactria)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정복한 나라들을 다루는 데도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키루스는 포로로 체포한 바빌론의 왕 나보니두 스를 정중하게 예우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나보니두스(Nabonidus)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국장을 치러 예우해 주었다. 키루스는 유대 유민(Free Man)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바빌 론이 탈취하여 왔던 성전 기물들을 되돌려 주었으며 성전 건축 비용까지 아 끼지 않고 국고에서 충당하여 주었다(스 6:13-15). 이러한 키루스를 유대인 들은 해방자로 여겼다. 키루스의 또 다른 탁월한 리더십은 그가 정복한 정복지의 문화와 역사 그리 고 종교를 페르시아보다 우월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는 승자의 언어와 종교 를 피지배자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각 지역의 토속신 숭배와 종교적 제의 를 경외하였고 그들의 통치적 가치관을 역시 존중하였다. 메디아에서 도입한 사트라프(Satrap: 총독)가 통치하는 체제에 대하여는 메 디아의 방식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앗시리아의 필경사(서기관)들의 전문 지식 인들을 활용하는 정책과, 페르시아의 국방전략을 정책에 적용하는 지혜를 발 휘하였던 인물이 키루스 대왕이었다. 그는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면서 측근들을 적재 적소에 등용하였는데 그들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또한 키루스는 상대의 약점도 이용할 줄 알았 다. 그는 소아시아의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지역 관리들의 타락 을 역이용함으로써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다민족 포용하는 리더십 발휘해 키루스는 또한 이란 남부의 일부인 수사와 파사르가대와 같은 새로운 수도 를 지명하면서도 메디아의 옛 수도인 엑바타나도 수도로서의 중심 도시 기능 을 상실하지 않도록 번영하게 하는 정책을 수행하였다.
526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25>| 파사르가데와 페르세폴리스_장인수 박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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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9 2010-04-14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64jang.jpg파사르가데와 페르세폴리스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고레스 대왕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돼” 고대의 페르시아 제국이었던 이란의 현재 공식 명칭은 ‘이란 이슬람 공화 국’(Islamic Republic of Iran)이다. 국토의 면적은 1,648,000㎢로 우리나 라 한반도의 약 7.5배이며 인근 이라크의 약 4배에 달하는 넓은 영토를 가 지 고 있다.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제국 이란의 인구는 약 7,000만명으로 1인당 국민소득은 약 3000불 되는 평범한 서남아 국가 중 하나이다. 이란은 동서로 유럽과 아시아 남북으로는 동구권 과 아프리카를 잇는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하여 많은 정복과 침략의 역사도 가지고 있다. 이란의 종족 비율을 보면 페르시아계 60%, 아제르바이잔 계 17%, 쿠르드족 8% 그리고 소수 민족인 터키계,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등 다양한 인종이 어울 려 살아가고 있다. 언어는 페르시아(Farsi)어이며 각기 소수민족은 토착언 어 를 사용하고 있지만 도시지역에는 영어도 어느정도 통용되는 나라이다. 이란의 종교는 전체의 약 95%를 차지하는 이슬람교이다. 이슬람교에는 크게 두가지 분파가 있는데 마호메트의 조카인 이맘알리(Imam Ali)를 정통후계자 로 여기는 시아파(Shia)와 이러한 정통을 인정하지 않고 4대 칼리프만을 후 계자로 인정하는 수니파(Sunni)가 있다. 유일하게도 이란은 시아파가 85%를 차지하고 있는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란에는 시아파가 존경하는 12인의 순교자(Iman, 聖子)의 탄생지이며 이들 모두의 무덤이 있다. 테헤란 공항에서 쉬라즈(Shirz)로 가는 국내 비행기를 타고 페르세폴리스 (Persepolise)로 향했다. 테헤란에서 약 1000km떨어진 이란 남동부에 속해 있 는 도시이다. 페르세폴리스는 쉬라즈에서 약 40km 떨어져 있다. 페르세폴리 스는 페르시아 문화재 중 최초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제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화려한 영광을 펼쳤던 키루스(CyrusⅡ The Great, 558-530 BC) 대왕은 성경에는 ‘고레스’로 기록하고 있다(대하 36:22-23, 사 44:28; 45:1; 단 1:21; 6:28; 10:1). 기원전 558년에서 547년까지는 얀 샨 (Anzan)의 왕으로, 기원전 547에서 530년까지 얀산의 왕이자 페르시아군의 군주로 군림한 왕이었다(Faramarz Ghani, persepolis Tehran, Iran 1998). 그의 재임기간 동안 파사르가대(Pasargadae)나 엑바타 그리고 바빌론으로 왕 도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후 다리우스 1세(DariusⅠ, The Great 552- 486B.C) 는 바빌론에서 수사(Shush)로 천도를 하였으며 다시 파사르가대 근교에 있 는 페르세 폴리스를 건축하였다. 쉬라즈(Shirz) 북쪽 130km 지점에 있는 파사르가대를 들러가기로 한 우리 일 행은 역대 페르시아 왕조인 아케메네즈 왕조(The Achaemenian Empire)의 즉 위식을 거행하였던 페르시아 제국의 역대 왕들의 권위와 위엄이 서려있는 지 역을 찾았다. 즉 아케메네즈 왕조 창업의 땅이 바로 우리가 가고 있는 파사 르가대이다. 파사르가대라는 말은 파사의 정원이란 뜻이다. 넓은 평원이 자리잡고 있고 멀리는 높은 산지를 이어주는 산맥이 병풍을 두른듯 진을 치고 있다. 파사 르 가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그 옛날 대제국을 호령하던 키루스(고레스) 2세 의 무덤이 위용을 자랑하듯 우뚝 서 있다. 1971년 팔레비 왕이 페르시아 왕 조 창업 2500년주년을 기념하여 행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키루스 대왕의 무덤은 중국의 동북지역 집안현에 있는 장군총의 모습과 흡 사 한 모양을 띠고 있었는데 6개의 계단형의 피라미드 형식으로 쌓아올린 다음 그 위에 4각의 석실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문은 석실 정면에만 뚫려 있고 나 머지 3면은 모두 막혀 있다. 석실상단은 모두 박공으로 처리된 상태로 보존 되어 있었는데 밑변의 크기는 사방 10m, 높이는 9.5m 정도이다. 키루스(고레스) 대왕은 바빌론을 정복한 이후 하나님을 대적한 상징처럼 웅 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던 바벨탑의 폐허를 보고 그 탑에 매료되어 바벨탑 을 파괴하지 말 것과 바벨탑을 본떠 자신의 무덤을 만들라고 신하들에게 명 령하였다는 전승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필자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 앞에서 깊은 감회에 젖는 시간을 가졌다. 성경 속 에 그의 이름이 나와 있고 하나님께서 대왕을 지칭하실 때 “그는 나 의 목 자 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사 44: 28)고 하셨으며, 이사야서 45장 1 절에는 덧붙여 이렇게 언급하셨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부음 받은 고레 스(키루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 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서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묶상하며 한동안 감회에 젖어 보았다. 키루스 2세는 그의 치세기간 동안 일부 피지배 민족들에게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였으며 고유한 문화와 종교 그리고 민족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 적 특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538년에는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들 의 귀환을 허용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재건을 허용하였다(스 1:5-11; 5:13- 15). 이때 유대인들은 약 42,000명이 귀환하는 대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꿈 에 그리던 예루살렘 본토로 귀환하게 되었다. 당시 유대 지도자는 다윗가의 귀족출신이며 바빌론식 이름을 가진 세스바살(Scheschbazzar, 스 1:8)이었 다. 키루스는 성전 재건 허용뿐만 아니라 느브갓네사르가 약탈하여 갔던 성 전 기물도 되돌려 주었다(스 6:3-5). 바벨론 포로에서 해 방시켜 특별히 1879년 발견된 “키루스 실린더”에 새겨진 문자가 해독되었는데 점 토에 구운 실린더는 길이가 약 23cm이고 그 모양이 원통형으로 되었기 때문 에 실린더(Cylinder)라고 부른다.
525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24>| 아케메네즈 왕조의 중심도시 페르세폴리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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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28 2010-03-03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61jang.jpg성경시대 역사탐방 아케메네즈 왕조의 중심도시 페르세폴리스 이란의 두 번째 도시 이스파한(Isfahan)으로 가는 도로 동쪽 40km, 그리고 수도 테헤란(Teheran)에서 약 560km 떨어진 곳에 자비의 산으로 불리우는 쿠 메라마트산이 병풍을 치듯 주위를 두르고 있다. 알렉산더에 의해 파괴된 페르세폴리스 끝없이 펼쳐진 이란 고원 위에 세워진 당시의 최고의 석조물이었던 곳이 알 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침공 이후 가장 잔인하게 파괴되었던 페르시야의 중 심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이다. 이 페르세폴리스를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파르사(Parsa)라고 불렀다. 이곳에 서 발견된 비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대왕이며 왕중의 왕이다. 모든 땅의 왕이며 이 왕궁을 건축한 아케메니안 히스타스페스 (Hystaspes)의 아들인 다리우스(다리오)이다.” 페르세폴리스 동편에는 세 방향으 로 산사태를 막기 위하여 옹벽을 만들어 놓 았다. 서편에는 웅장한 이중 계단이 있어서 111단의 완만한 돌 계단을 두 번 오르면 근처 산에서 떠온 암회색의 화산암으로 구축한 웅장한 건물터가 오랜 세월의 연륜에도 그때의 영화를 반영하듯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이러 한 화산암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차곡차곡 쌓아올려 놓았는데 그 놀라운 석제 가공술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볼 때 놀라울 정도로 평가하고 있 다. 특별히 관심을 끌게 하는 곳이 아파다나(Apadana)로 알려진 접견실(Apadana) 이다. 이 접견실은 다리우스 1세(DariusⅠ, 522-486 BC)에 의해 건축되었으 며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Ⅰ, 486-456 BC)에 의해 완성된 건물이다. 아파타나 내부는 13개의 거대한 원기둥이 남아있는데 그 높이는 20m이다. 원 래는 72개의 원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는데 주두(柱頭)는 황소와 뿔이달린 사 자머리로 장식되어 있었고, 아파다나에 오르는 계단 측면 벽면에는 23개국 사신들이 일렬로 서서 왕에게 조공을 드리러 올라오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 다. 이 부조는 당시 오리엔트 건축미를 집대성한 것이었다. 또한 기록문서소에서 발견한 점토판 문서들은 약 2만개 정도가 발굴되었는 데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척도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 고 있다. 이 접견실의 큰 방에서는 다리우스 대왕의 글씨 비문도 발견되었 다. 크세르크세스의 기념관문에는 2개의 원기둥이 서 있고 3번째 원기둥은 깨어 진 조각들을 모아서 그곳에 다시 복원시켜 놓았다. 그리고 접견실 오른쪽에 는 100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어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던 중앙홀이 자리잡고 있다. 크세르크세스 1세 치세때 시작하여 아낙사스다 1세(Artaxerxes 1세, 465- 424 BC)에 의해 완공된 중앙에 있는 홀은 아파다나(접견실)보다 훨씬 규모 가 컸다. 그 입구에는 황소를 새긴 기둥들이 있고 그곳에 새긴 비문에는 판 독결과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말하노라. 아후라마즈다(Ahuramaxda : 조로아스트교의 빛과 지혜의 신)의 은혜로 나는 모든 나라들을 초빙하기 위하여 이 대문을 건축하였노라.” 그리고 바로 옆 홀에 있었던 보물창고에는 막대한 금은 보 화가 쌓여 있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이 보물들은 약탈되었다. 동쪽산 언덕 위의 무덤은 아르 닥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Ⅲ, 359-338 BC)의 무덤이다. 그리고 보물창고 옆에는 아르닥크세르크세스 3세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고 그 옆에는 후궁들의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구약성경 에스더 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Ahasuerus)왕은 페르시아제국의 4대왕 크세르크세 스 1세이다. 그는 약 21년간 페르시아를 통치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127도의 영토를 다스리던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도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의 그리이스 침공에서 큰 실패의 분 기점이 되었던 살라미스 해전(Salamis, 480-479 BC)의 참패로 서서히 몰락하 기 시작한 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기원전 330년의 일이었다. 그리이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에 의하면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Shush)에서 시작하여 아나톨리아(Anatolia)를 거쳐 에게해에 이르는 왕 의 도로(Persian Royal Rord)는 총연장 2,400km였는데 왕의 전령은 눈이나 비 그리고 더위와 어두운 밤에도 이어 달리는 방법으로 9일 안에 전구간을 달렸다고 한다. 우리는 이 웅장한 고도(苦道)를 순례하는 기회를 잊 을 수 없 었다.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페르시아의 역사와 언어분야의 전문가인 에른스트 헤르 츠벨트(Ernst Herzfeld)는 1924년 이란정부로부터 페르세폴리스 폐허의 발 국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고대근동 분야에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던 헤르츠벨트에게 발굴의 모든 책임을 위임한다는 통 보를 받은 후 발굴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고고학자 피에르 브리암(Pierre Briant)은 헤르츠벨트에 대하여 이렇 게 언급하였다. “고고학 역사의 전설이 되어 버린 헤르츠 벨트의 연구 결과 들은 그 방대한 규모와 박식함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그 학문적인 규모를 판 가름할 수가 없다.” 헤르츠벨트는 미국 시카고 대학의 원조아래 1931년부터 발굴에 들어갔다.이 후 3년간에 걸쳐 건축가 프리츠 크레프트(Fritz Kreftor)의 지원을 받아 아 파다나의 거대한 동쪽 계단을 발굴하였다. 인상적인 부조인 프리즈(윗부분 에 조각된 띠모양의 장식)가 새겨진 계단이었다. 크레프트는 프리즈의 세부 그림을 그렸을 뿐 아니라 헤르츠벨트와 공동으로 페르세폴리스의 당시 모습 을 재현해내었다. 이로써 페르세폴리스의 웅장한 자태 는 그림을 통하여 세상 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헤르츠벨트는 1933년 발굴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 발굴을 중단한 후 2년의 세 월이 흐른뒤 3년동안 재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는 옥상 테라스 북쪽 지역에 서 3만점이 넘는 점토판을 발굴하였는데 다리우스 1세 치세 13년에서 28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3만점이 넘는 점토판 등 유물 발견돼 기원전 458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방화때 불타오르는 뜨거운 열기에 점토판 은 더욱 견고하여져서 2,500여년의 세월을 견딘 후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 게 된 것이다.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524 no image |포토에세이| 하늘과 어부_전우식 장로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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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5 2010-03-03
523 no image |성경시대 역사탐방<23>|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멸망_장인수 박사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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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0 2010-02-17
http://www.rpress.or.kr/files/culture/560jis.jpg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멸망 “페르시아는 이란의 파르스(Fars) 지방에서 시작해” 마케도니아의 젊은 정복자 알렉산더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Darius Ⅲ 336-330 BC)의 역사적 분기점이 된 길리기아의 이수스 전투 장면은 다음과 같이 전설이 되어 전해진다. 역사에 남은 ‘페르시아 제국’ “기병대가 우익을 포위하고 있던 병력을 돕기 위하여 앞으로 진격한 결과 페르시아군의 선두대열에 빈틈이 생겼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그 빈틈을 향하 여 전열을 강화시켰고 배치되었던 밀집대형의 군대의 일부와 컴패니언 기병 을 쇄기꼴 대형으로 정렬시켰다. 그는 그 대형을 이끌고 곧장 다리우스를 향 하여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육탄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알렉산더가 직접 이끄는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페르시아군을 향하여 몸을 던지며 맹렬하게 돌진하여 창으로 적의 얼굴을 찔렀다. 한 편 마 케도니아 밀집형 군대는 긴 창을 곤두세우고 역시 적을 향하여 공격을 퍼부 었다. 다리우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완전한 공포로만 보였다. 그래서 다리우 스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등을 돌리고 도주하였다.” 이 고대 전쟁사는 AD 2세기 그리이스의 역사가 아리안(Arrian)의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의 분기점을 이루었던 기원전 333년 이수스(Issus) 전투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기원전 6세기 이전의 페르시아인에 대한 역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황금기의 시기에 마침표를 찍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은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가 그리이스의 찬란한 문명과 역사 를 제패하려고 하는 오만함을 역사의 저편으로 밀어내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 었다. 그리이스의 폴리스(Polis)에서는 시민사이의 빈부 격차가 심하여 내부의 반 란이 줄을 이었고 하층민 계급은 생활이 어려워 페르시아의 용병들이 되는 젊은이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한심스런 현실을 개탄하던 그리 이스의 지식인이었고 정치평론가였던 이소크라테스(IsoKrates)는 이렇게 외 쳤다. “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켜 아시아를 정복하고 이 지역에 많은 폴리스를 건 설함으로써 빈민들과 유랑민들을 이주시켜야 한다.” 이는 당시 그리이스인들이 가지고 있던 정서를 대변해 주고 있다. 당시의 그 리이스 시민들의 페르시아에 대한 분노는 시대의 영웅 알렉산더를 역사의 무 대에 등장하게 한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수스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Darius Ⅲ 336-330 BC)의 대군을 격파한다. 그리고 이집트를 무혈입성한 후 다시 발길을 돌려 페르시아 제국 의 심장부인 바빌론, 수사, 엑바타나와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를 정 복하고 18만 탈렌트에 달하는 금은보화를 탈취한다. 그리고 흥분한 그리이 스 군대는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그 화려한 궁전을 파괴하였다. 정복자 알 렉산더에 의해 페르세폴리스 왕궁은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기원전 230년 제 국의 화려한 영광을 자랑하던 아케메네스(Achaemenid)왕조는 멸망하게 된 다. 오늘날 이란(Iran)인이라 불리우는 인도 유럽어족(성경에는 야벳족)에 속하 는 종족들은 기원전 2000년경,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출현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비옥한 초승달 지역 (The Fertile Crescent)을 제패하여 페르시 아 제국 시대를 열었던 아리안인의 땅(The Land of the Aryans)이란 뜻의 ‘이란’은 어떠한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가 추적해 보기로 하자. 페르시아란 명칭은 이란 남서부지방의 옛 명칭인 파르스(Fars)에서 비롯되었 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가 된다. 기원전 815년경 이란 민족 의 한 지파가 우르미아호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수사의 동북방향에 있는 고원지대인 파르슈마슈에 정착하면서 국가형태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후 기원전 700년경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아케메네스(Achaemanes)가 수장(首長)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Teispes ? 670-?630 BC)는 파르슈마슈(Parsumash)와 파르스(Parsu) 지방을 통치하며 안 샨(Anshan)왕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손자 키루스 2세(Cyrus Ⅱ 559-529 BC)는 메데(Medes)왕국의 수도 엑티바나를 점령하여 대 페르시아 제국을 건 설하는 초석을 다지게 된다. 그의 제국은 고대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하는 대전과를 올리며 영토를 이집 트, 리디아와 그리이스의 여러 도서지방을 정 복하고 식민지를 삼는다. 그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무혈입성하고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유대민족 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칙령을 발표한다(대하 36:22-23; 스 1:1-2). 그는 실로 위대한 왕이었다. 변경의 소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대제국으로 건설 한 군주였다. 그리이스 사가(史家)들은 이 키루스 2세를 모범적 군주로 평가하며 묘사하 고 있다. 그리이스의 정치가이며 철학가였던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 (Xenophon)은 그를 계몽적 군주로 기록하고 그의 통치력은 실로 대왕의 풍모 를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캄비세스 때 광대한 제국 이뤄 키루스 2세는 리디아의 왕 크로에수스(Croesus)와의 전쟁 중에 장렬하게 전 사한다(547 BC). 그후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vyses Ⅱ 530-522 BC)는 이집트를 원정하여 정복하였고 서진하여 지중해 지역의 키레네(Cyrene)의 항 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던 제왕이었다. 반면 그리이스의 역사가 헤로도토 스(Herodotos)는 캄비세스를 “알콜 중독자였으며, 잔인하였고 이집트의 신 들을 경멸하였다”고 부정적으로 기록했다. 장인수 박사(D.Min, Ph.D ) 성지학술연구소장 (Bible Land's Research Institute) biblelands@paran.com
522 no image |시| 봄비 속에 그리운 임_오동춘 장로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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