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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3 (14:51:13)

구원의 4중 모습

 

사도 바울은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 구원을 사도 바울은 달리 설명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3-14)

 

먼저 성구는 개인적 관점에서 그러나 나중 성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구원을 각각 설명한다. 구원은 주관적 면과 객관적 면 모두 갖는다. 달리 말해 전자는 신자 개인의 영적 변화로 그러나 후자는 장소의 이전 또는 소속의 변화로 구원이 각각 설명된다. 신약 성경은  개인의 주관적 변화와 영적 신분의 변화로 구원을 소개한다.

 

이 설명에 문제가 발견된다. 구원이란 주로 '무엇으로부터' 구출, 해방, 구속을 뜻한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1:4) 문제는 from이란 관점에서 본 구원론은 금욕적, 도피적, 소극적, 피동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구원이 무엇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언급만 있지 어디를 향해 가는가에 대한 설명이 약해서이다. 흔히 기독교 신학은 구원 이후 신자의 목적지가 천국 또는 천당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자는 구원 받자마자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남겨진다. 자연스럽게 신자는 자신을 이 세상의 나그네로 생각한다. 신앙이 좋을수록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좋아한다.

 

그럼 구약 성경이 주장하는 구원론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구약을 잘 아는 히브리인 사도였다. 구약과 완전히 분리된 개념의 구원을 그가 주장할 리 없다. 초대교회의 유대인 신자들도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할 것이라고 이해했다(행1:6절). 구약의 대표적 구원론은 출애굽 사건으로 설명된다. 출애굽 사건은 장소의 이전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신분의 변화를 초래시켰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목적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다. 애굽을 떠난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후손이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애굽도 그리고 가나안도 모두 이 세상에 속하는 지정학적 장소란 것이다.

 

즉 구약의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식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진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된다. 신약의 구원과 다른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틀릴 리가 없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이 지금까지 잘못 해석한다. 신약의 구원도 애굽 같은 세상을 벗어남과 아울러 동일한 세상 안에 눈에 안보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목표한다. 이 점에서 신, 구약 성경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설명하는 구원은 4중적 의미와 모습을 갖는다. 구원은 애굽 같은 세상으로부터(from) 벗어나는 것으로 출발한다. 구원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through) 훈련 받으며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 구원은 가나안에 들어가(into)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toward) 영화란 완성을 소망하는 삶과 같다.

 

첫째 의미는 애굽이라는 거대한 세상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첫째 구원은 거듭남으로 가능하다. 한편 신자는 애굽의 모든 삶과 사고, 그리고 그 방식과 가치관에서 벗어난다. 다른 한편 신자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구원으로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 구원 이후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세상의 온갖 지식과 과학보다 즉 이성보다 믿음에 의존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둘째 의미는 이 세상을 광야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광야에선 인간의 지혜와 힘은 무력하다. 하나님이 매일 보내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이 때도 율법이 정한 대로 일용한 양식만 취해야 한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삶을 사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로써 신자는 절제, 자제, 겸손과 낮아짐과 자기부정을 배운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삶을 익히는 과정이다.

 

셋째 의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목표이다 애굽 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세워야 한다. 그곳에선 하나님의 율법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완전히 다른 선진적 사회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 영광을 받을 것이다(신4:5-6, 마5:13-16절). 이것이 바로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다.

 

넷째 의미는 이 세상이 결국 하나님의 불 심판으로 멸망 당할 것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한다. 구원은 이 이후 완성될 것이다. 재림과 심판은 신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형통과 번영, 출세와 성공에 집착하지 못하도록 돕는다.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신앙 삶을 살아야 하지만 소극적 자세도 치해야 한다(고전7:29-31). 이 점에서 신자는 이 세상의 나그네와 같다.

 

사도 바울은 첫째와 둘째 의미의 구원을 '믿음의 역사'로, 셋째 의미의 구원을 '사랑의 수고'로 그리고 넷째 의미의 구원을 '소망의 인내'로 요약하여 각각 설명한다(살전1:3). 진실한 믿음은 삶과 사고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이에 계속 노력한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이다.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사랑을 실천하고자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 때 사랑 실천은 자기부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재림 후 완성될 구원을 소망하기에 범사에 인내하고 참으며 산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셋째 의미의 구원을 죽음을 통해 지상에서 천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실수와 잘못을 범한다. 이런 구원론으론 하나님의 창조 목적(1:26-28)인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울 수 없다.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 생긴 불상사이다. 반면 앞의 금욕적 신앙 삶을 부정하고 쾌락적 신앙 삶을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번영신학, 양적 성장론과 이와 유사한 신학들은 첫째, 둘째 그리고 넷째 의미의 구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기독교 신학, 교회와 신자는 4가지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이 세상은 애굽과 같아 하루 빨리 벗어야 할 죄악 세상이다. 이 세상은 성도에게 광야와 같아 영적 훈련장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곳이다. 이에 따라 성도는 인류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언젠가 불심판으로 멸망 당할 것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 절대로 올 인(all-in)하지 않는다.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4가지 세계관은 부정적/비관적 세계관(애굽과 멸망 대상)과 아울러 긍정적/낙관적 세계관(광야와 가나안)을 동시에 가르친다. 신앙 삶은 적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소극적 면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 그러나 신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님의 시험이다. 삶의 정황에 따라 신자는 4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를 택해 적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성도는 버리는 훈련(애굽)과 새로 습득하는 훈련(가나안)에 늘 열심히 받아야 한다(광야).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는 세상 방식이 아닌 하나님 방식을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가나안).

 

그 동안 교회는 구원의 4가지 국면을 보지 못하고 어느 하나만 취하고 나머진 버리는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첫째와 넷째에 치우친 구원론을 보여준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둘째와 셋째에 치우친 구원론을 보여준다. 번영과 성공을 바라는 기복적 신학은 셋째 구원론을 잘못 이해한 체 세상을 가나안으로 본다.


그러나 균형 잡히고 성숙한 신앙인 4가지 신앙 삶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신앙 초기 신자는 첫째와 둘째에 치중해야 한다. 출세와 성공을 한 기존 신자라면 넷째 방식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가난한 성도도 넷째 방식으로 자신의 곤고함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 삶은 다양한 국면을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 종류는 크게 4가지 신앙 방식들로 나뉜다. 이들로 신앙을 자가진단할 수도 있다. 


신약 성경의 구원론이 첫째와 넷째만을 주장하는 듯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것은 헬라 철학에 익숙한 교부들이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으로 구약의 신학과 신앙을 잘 이해했다그는 구속과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방법으로 이해했다. 그의 구원론과 교회론은 결코 신국론을 무시하지 않는다.

 

신국론을 배제한 신학은 방향과 목표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경륜을 잘 알았다. 창조기사(창1-2장)에 바탕을 둔 즉 신국론에 근거를 둔 신학적/교리적 성경 해석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론과 교회론이 신앙 삶의 중심이 되며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주인 노릇할 것이다. 교회 중심의 신학은 성경적이지 않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66098379  요단 강에서 본 가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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