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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2901
2011.02.11 (17:40:03)

 

교회를 개척하신다고요?  

 

안녕하세요!

동료 목사로서 경험과 느낌을 나누고 싶군요.



한국에서 개척교회와 부교역자 경험이 있지요.

향후 목회를 위한 기초를 깔아주었습니다.


그 후 선교지 러시아의 현지인 교회에서 담임목사 사역을 했습니다.

시베리아에서 15년 동안

출석 회원이 100여명 넘는 교회, 300명 된 안정된 교회 그리고 개척한 교회,

세 곳에서 사역했습니다.

 

후임 목회자를 세우고 사역한 교회를 은퇴 목사처럼 떠나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흑해에선 개척교회 같은 조그만 교회에서 담임목사 사역을 합니다.


러시아 목회지에서 발견한 것은

한국 목회자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가부장적 권위를  

러시아 목회자들에게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교회들이 대체로 작아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유럽에 속해서인가 대부분의 성향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목회자들은 미국의 실용주의 목회를 싫어하지요.
러시아가 유럽에 속해서인가 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한국 목회자의 권위주의적인 자세가 비성경적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만나면 나이나 선후배 등으로 먼저 우열을 가립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대화 분위기도 결정, 좌우됩니다.

이들이 보기에 참 유치합니다.


구속함을 받은 신자들은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하나님 앞에 동일한 동역자요, 동료입니다.

이런 낮아진 의식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부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형제라고 불렀지요(20:17)!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그 본을 보였지요.
 
이런 훈련이 안되면

목회 성공 후 바로 타락과 멸망의 길로 가지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듯이 예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지요.

예수님이나 말씀을 자기 이익을 위해 억지로 사용합니다.
 

소탈함이 좋습니다.
알아도 모른 체 하는 자세.
성도들을 대할 때 윤리적인 판단을 일단 보류하고 다 안아주는 자세.
그리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대드는 선생 같은 자세를 버리고 

모든 이들을 주 앞에 같은 형제로 대하는 낮아짐과 겸손이 요합니다. 
 
혹 다른 교회에서 설교 초청을 받는다면
사역하는 교회에서 이미 수고비를 받으니 사례금을 일체 받지 마세요!
아무리 멀어도 교회 비용으로 찾아가 봉사하시지요.

물론 미국 같은 먼 나라의 초청은 다를지 모르지만

사례금만은 거절하시지요.

 

유명한 목사들과 부흥사들이 사례금으로 타락했습니다.

자꾸 받다 보면 사례를 위해 밖으로 나가려 하지요. 

그렇게 목회자가 아니라 목회꾼이 됩니다.
 

경건한 목사님의 경우 방문 교회에서 여행도 삼가더군요.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만 방문한 교회에 불필요한 대접을 피하려는 의도지요.

그 정신은 배워야 합니다.

 
설교할 때 특정 주제나 개념으로 하는 식의 주제 설교는 피하시지요.
성경은 구속사로 구성되어 있어 역사적인 사실에 신학적인 의미를 감춥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인 주제들이 사건 속에 서로 연결되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종합적인 가르침 즉 의미를 주지요.

 

이를 가르쳐야지 본문의 특정 단어가 가진 주제에 몰두한다면
역사성이 없는 논리적 설교로써 적용을 상실한 설교가 되지요.

목사님은 이를 잘 아시지요.
 
성경의 본문은 구속사적인 사건을 기록했지 특정 신학적 주제를 기록하지 않지요.

물론 정해진 시간 특정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강의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요즘 성경 책에 주제별 성구들을 모아 논 부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의어 성구 사전도 있고

컴퓨터의 도움으로 주제별 성구들을 모으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보와 지식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시대를 삽니다.

논리력이 있는 신자라면 얼마든지 혼자서 주제별 연구가 가능합니다.

구태여 목회자에게 주제별 강의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다르지요.

성경은 구속사, 신앙 삶과 생명이라는 유기체를 다루는데
이들은 하나의 관점(view, subject)으로만 해석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신학이 자꾸 개념적인 논리적 설교를 하도록 유도하지요.

이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색에는 3 가지 그리고 맛에는 5 가지가 있습니다.

이들 색과 맛이 서로 어울릴 때

아름다운 색깔과 기묘한 맛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이들 기본 색과 맛은 조직신학의 각론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본문은 

이들 기본 색과 맛이 서로 어울리며

그 시대와 문화에 맞는 구속사적인 가르침을 던져 줍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색이나 맛(각론: 주제, 관점)으로만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무미건조합니다.

이들이 구속사적인 사건을 통해

어떻게 서로 어울리며 어떤 찬란한 색과 기이한 맛을 드러내는지

목회자는 알아내 먼저 보고 맛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린 성경 해석학을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신학들은 성경 해석이나 설교를 위해 존재하지

신학 자체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나 목회와 결별된 신학은 이론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배운 신학들을 이용하여

성경 본문에서 여러 가지 신학적인 주제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는지 알아내 통합적인 가르침을 찾아내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 저자의 바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흔히 설교할 때 유식한 말들을 많이 하지요.
그렇게 세상 지식이나 지혜와 상식을 전하려고 하는데 참 웃기지요.
자유주의나 현대신학자들처럼

책을 많이 읽은 목회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입니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 말씀을 덮지 말고 이런 것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진리를 더욱 찬란하게 드러내야지요.
이런 것들을 장시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성경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 잠깐 말하고 말씀 해석과 설교에 전력해야 하지요.
 
목사님은 말씀에 충실하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지식 자랑이라는 유혹만 극복해도 하나님 앞에 신실한 종으로 남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 말씀에 감추어진 진리들이 너무나 많고 다양함을 깨닫습니다.
이를 파는 것만도 시간이 부족한데
일시적으로 솟는 샘물(2:13)과 같은

세상 철학, 지식과 지혜 그리고 상식이나 감동적인 간증을 소개하는데
설교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니요.

 

물론 이들이 성경 본문의 해석에 깊이와 넓이와 폭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 본문은 구속사로 드러난 세속사를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에 속하는 모든 내용들이 성경 본문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성경에 기록된 세속사는 그냥 세속사가 아닙니다.

구속사를 설명하기 위해 선별된 세속사이지요.

그러므로 인문사회과학이 아닌 신학에 근거를 두고 구속사를 해석하여야 합니다.

 

흔히 모압 여인 룻이 효도의 전형으로 설교되지만

사실 그는 신앙 때문에 시어미 나오미를 끝까지 따른 것입니다.

신앙에 근거한 효도였습니다.     

효도 때문에 그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정치와 사회의 비리와 불의를 비판했습니다.

이 점에서 현대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이 맞는 듯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율법(경외)을 버렸기에

사회적인 불의가 선민 사회에 팽배함을 지적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 선지자의 역할은

교회가 불신 사회에 대해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는 선민 사회의 불신앙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불신 사회 가운데 존재합니다.

사회적 또는 신앙적 배경이 완전히 다릅니다.

구약의 선지자 역할이 오늘날 교회의 역할과 같다고 주장할 수 없지요.

 

이 모두 신앙이나 신학보다 세상 학문을 우선시하여 성경을 해석한 결과입니다.

성경 기록의 특성을 잊은 잘못된 결과입니다.

세상 상식으로 성경 본문을 해석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거꾸로 성경의 가르침으로 세상 상식을 평가해야 합니다.

 

이성으로 믿음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성을 해석하여야 합니다.

달리 말한다면

아테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도록 놔두면 안됩니다.

예루살렘이 아테네를 인도해야 합니다.
 

만약 성경 본문을 세상 지식과 상식에 근거를 두고 계속 해석한다면 

설교는 강연이나 강의와 구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설교의 상식화, 일반화입니다.

아니 설교의 타락입니다.
 

이런 류의 강연에서 강연자는 전문가라면

목사는 비전문가이지요.

어설픈 상식을 말하다간 

이를 잘 아는 성도들이나 불신자 전문가의 비웃음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강대상의 문제입니다.

 

개척 교회는 조그맣기에 목회자가 혼자 다 하게 되지요.
그러나 신자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조직화하여

재정에서 얼른 손을 때야 합니다.

 

초기부터 교회 재정을 목회자 혼자 그리고 마음대로 다루는 것이 습관되면
나중 목동에 있는 교회의 ㅈ목사처럼 교회 돈을 횡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척교회 때 이미 그런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처럼 권력을 분산시킬수록(1:28)

목회자는 말씀 사역에 전력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신자들 얼마나 유식한가요? 
재능 많고...
그런데 왜 목사 혼자 다 하려 하나요?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은 선포와 가르침과 병 고침으로 나누어지지요.
예전부터 교회 예산을 아래와 같이 네 곳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전 생각했습니다.


전도, 교육, 구제와 행정(교회 자체를 위한 비용)

각각 25%씩 분배하여 교회 재정을 사용한다면
재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크게 제고될 것입니다.

물론 개척 교회에선 이들 사이 비율이 동일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 재정 사용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가 제공됩니다.
 
이미 첫 목회 경험에서 많은 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나눈 것입니다.

이 정도로 기분 나빠할 목사님은 아닐 것 같은데......

 

목사님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았기에 이런 글을 드려봅니다.
다 알지 모르지만 동료로서 경험을 공유하자는 차원에서......
 
평안을 빕니다. 
 
러시아 흑해에서……
장창수 선교사 드림

 

* http://blog.naver.com/rassv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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