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조회 수 : 2724
2011.02.19 (23:05:27)

바보야!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야!

 

남자에게도 갱년기가 찾아온다.  이 때 남자는 감성적으로 여성화 현상을 보인다.  예전과 달리 드라마를 보면 너무 쉽게 감동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를 본 가족들이 의아해 한다.  이 때부터 남자들은 과거를 뒤돌아 보며 가족과의 관계에서 큰 변화를 보인다.  이 때쯤 부인은 남성화된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다.

한국에서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목회자의 아들이 이미 고인(故人)이 된 아버지에 대해 쓴 글(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89322&logId=5318654)을 얼마 전 유심히 읽었다.  목회자인 나도 집에선 그랬다라고 동감했다.  목회자의 가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때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오며 이런 한탄이 절로 나왔다.  이 바보야!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야!  동시에 그래! 맞아!라고 응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30대 중반 넘어 때늦게 신학 공부를 했다.  빨리 배워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있어 아내의 가정 일에 전혀 무관심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시기 아들을 거의 방기했다.  그러지 말아야 할 목회자로서 가정 목회에 소홀했다는 아픔이 나중 생겼다.

 

글 제목은 교회나 목회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를 전혀 갖지 않는다.  다른 쪽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늘 한 쪽으로만 치우쳐 있었다는 깨달음과 그로 인한 때늦은 한탄에서 나온 제목이다.  흔히 목회자는 교회 목회와 가정 목회 사이에서 늘 방황하면서도 가정 목회에 소홀하다.  목회자 자녀가 아주 잘 되거나 아주 못되거나, 둘 중 어느 하나란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그러나 교회와 가정 사이 관계를 대립적인 이분법(二分法)에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가정이 본래 갖는 역할을 찾아내 교회 목회와 가정 목회 사이 조화내지 균형을 어찌 하든지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온 글 제목이다.  이 점에서 나의 한탄스런 깨달음은 기독교와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경고일 수도 있다.

 

보완되어야 할 조직 신학

그 동안 기독교 신학은 가정(家庭)의 중요성을 그 다지 깊게 연구하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학문간의 분리 현상 때문에 윤리와 도덕이 기독교 신학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동안 기독교 윤리가 약화되었다.  신학(神學)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  조직신학(systematical theology)에는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라는 각론(各論)들이 있다.

그 동안 신앙 삶은 이들 각론 제목(subject, view)의 내용들에 따라 좌우되었다.  조직신학에서 구원론 다음 교회론이 온다.  그 결과 구원 이후 교회 삶이 중요하다고 목회자와 신자들은 당연히 생각한다.  목회 의식과 신앙 삶이 늘 교회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 이유이다.  특별히 동양인 목회자들에게 이런 현상은 더 심하다.  이들은 공()을 위해서라면 사()를 기꺼이 희생시킬 준비가 늘 되어 있다.

놀랍게도 교회론 다음 곧바로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이 온다.  어찌 보면 각론의 순서들이 이원론적(二元論的)이다.  이런 신학에 근거를 둔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은 목회자와 신자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등지게 만든다.  이런 신학적 성향은 이원론적인 동양 문화권의 목회자와 신자에게 당연히 현실 도피적인 신앙 삶을 유도한다.

그러나 신자는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발을 디디며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  어떻게 이 세상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신자들에게 필요하다.  성경도 교회란 구원 받은 신자들을 출생시키고 양육시켜 다시 세상으로 보내는 성스러운 조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5:13, 14, 13:38, 24:14, 4:42, 17:18).

이런 문제를 피하려면 교회론과 종말론 사이 가정론(家政論)과 신국론(神國論: theolog of Gods kingdom)이 추가되어야 한다.  구원 받은 성도는 가정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이들이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 때 기독교 윤리는 이원론에서 탈피하며 구체적이며 실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바뀐다.  이런 윤리만이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도록 잘 도와준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가정

성경의 창조 기사(1-2)는 놀라운 사실을 지적한다.  인간 창조는 곧바로 결혼과 부부 그리고 가정에 대한 제도의 창설이었다(1:26-27).  이 제도들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문화 사명(1:28)을 잘 수행하도록 돕는 수단과 방법이다.  그리고 문화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목적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의 가정론은 신국론과 깊이 관련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행위를 통해 만물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이로써 그의 보편적인 통치(統治)는 이미 실현되었다.  우주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는 지구(地球)에 관한 자신의 통치권을 인간에게 위임했다(1:28).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 인간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인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만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도 세워질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결혼과 부부와 가정에 관한 제도를 창설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성스런 제도로써 수단과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보편적 창조 사역, 인간 창조, 결혼, 부부 그리고 가정 제도, 문화 사명과 하나님 나라는 각각 독립된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의미상 또는 논리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유감스럽게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이들 중 하나의 관점으로 창조 기사를 연구했다.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라는 남녀는 최초의 가정을 구성했다.  이 가정은 앞으로 형성될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써 최소 공동체였다.  그렇다면 가정과 인류 사회는 서로 긴밀하다. 기초 단위가 무너진다면 인류 사회도 더 이상 세워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가정이 모든 면에서 건강해야 인류 사회도 건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의 가정관이다.  왜 그런가? 

이 때 최초의 가정(家庭)은 바로 교회였고, 학교였으며 그리고 나라였다.  가정 안에 교회, 학교 그리고 나라가 존재했다.  가장(家長)인 아담은 목사요, 교사요 그리고 통치자였다.  아담의 가르침과 지도 그리고 통치 아래 그의 후손은 가정에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훈련 받아야 했다.  가정이 인류 사회의 최소 공동체라면 이곳에서 어떤 훈련을 받느냐가 앞으로 형성될 인류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은 뻔하다.  이렇게 본다면 가정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가정은 출애굽 사건 전까지 적어도 2500년 동안 그 역할을 계속 유지했다.  하나님은 구원 계시들을 가장(家長)에게만 주었다.  교회가 가정 안에 있었다.  교회는 가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  가정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서도 그 역할이 하나님 앞에 그 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타락 사건(3)으로 최초의 가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가정에서 하나였던 종교와 문화가 서로 분리되었다(3:15).  아담과 그 후손이 창조주 하나님 대신 사단을 새로운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 중 메시아의 혈통을 지정했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로 나뉘었다. 

여인의 후손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믿고 소망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뱀의 후손은 사단 아래 자신의 문화를 세우는 일을 할 것이다.  그 결과 여인의 후손인 셋의 자손들이 형성한 가정은 세상 문화와는 무관했다.  이들은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  이 때 교회는 가정 안에 그대로 보존되었다.  구원에 관한 계시가 이들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뱀의 후손인 가인의 자손들이 형성한 가정은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된 가운데 인간의 나라를 세우는 문화 사명을 수행했다(4:16-26).  시간이 지나면서 셋의 후손도 자신의 성스런 소명과 사명마저 포기했다(6:1-2).  모든 가정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자신만을 위해 존재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목적한 문화 사명을 수행할 하나님의 일꾼들이 전혀 배출되지 않았다.  가정 안에 교회가 사라진 결과였다.  그 대신 자기 욕망을 따라 살며 싸우길 좋아하는 용사들만 나타났다(6:4).  점점 세상에 악이 관영했다(6:5).  그런 세상은 하나님 앞에 존재 의미가 없었다.

홍수 심판으로 하나님은 옛 세상을 모두 멸해 버렸다(7-8).  경건한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손 가정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6:2).  이들은 결혼을 통해 불경건한 사람들과 같이 되며 창조주 하나님과 앞으로 올 메시아에게 둔 믿음과 소망을 버렸다.

 

홍수 후 새 세상이 나타났고 창조 후 옛 세상처럼 한 가정으로부터 출발되었다.  또 다시 종교와 문화가 하나인 가정에서 인류 문화와 사회가 시작되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가정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음으로 새로운 인류도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을 버렸다(11).  참 종교와 문화가 또 다시 분리되었다. 

하나님은 새로운 가정을 세워야 했다.  이 목적에 따라 아브람이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12:1-3).  이 후 출애굽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800년간 족장 시대는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구원 계시는 여전히 족장인 가장에게만 주어졌다.  이 때 가장(家長)은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라는 세 직분을 한꺼번에 소유했고 가족에 대한 생사여탈권이라는 절대권력을 가졌다.  이 시대에도 교회는 가정 안에서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 때 족장들의 가정은 가나안에서 겨우 발 붙힐 수 있는 땅만 얻어 간신히 연명했다(7:4).  이들의 가정이 문화 사명을 수행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의 꿈이었다.  이를 목적하며 하나님은 가장인 족장들에게 약속의 언약(12:1-3)을 주었다.  이 언약에 의하면 족장들의 후손은 하나의 민족을 형성할 것이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나라를 세울 것이다.

드디어 출애굽 사건을 통해 특별한 민족이 출생했다.  종교와 문화가 전혀 분리되지 않은 민족과 나라 그리고 백성의 출현이었다.  하나의 가정이 마침내 민족으로 바뀌었다.  이 후 선지자, 제사장과 왕이라는 삼직분도 가정에서 벗어났고 또한 나뉘어졌다.  구원에 관한 계시들은 주로 선지자들에게 주어졌다.  교회가 비로소 가정에서 분리되었다. 

정복 전쟁 후 이스라엘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다윗 왕국을 세웠다.  그렇게 종교와 문화가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가 가나안 땅에서 세워졌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일차적으로 이 지상에 성취되었다.  그 동안 가정 안에 있었던 교회가 나라라는 보다 더 큰 영역으로 옮겨졌다.  나라와 교회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시민들이 형성한 가정들로 구성되었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법 제도를 갖춘 나라이면서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때도 가정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다.  율법의 요구대로 가정들은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23:14, 34:22, 16:16).  아니면 속죄를 위해 올라갔다.  특별히 이들 절기는 조직신학이 말하는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을 상기시킨다. 

(년초)에 치러지는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통한 새로운 출생(칭의), 여름(년중)에 행해지는 초실절, 칠칠절 또는 오순절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출발(성화)을 그리고 가을(년말)에 지켜지는 수장절과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구속이 완성되었음(영화)을 각각 상징했다.

이렇게 절기를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을 감사하고 더욱 확고히 했다.  절기들을 지킨 후 선민 이스라엘은 각각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렇다면 이 당시 신앙 삶의 무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선민이 사는 곳이었다.  삶의 터전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러므로 가정이 선민에게 여전히 신앙 삶의 중심이었다.  매 안식일 가정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했다.

 

출애굽 사건 이후에도 가정의 역할과 그 중요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 왕국의 흥망성쇠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율법 교육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다윗의 장남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에게 행한 간음 사건(삼하13:1-19), 이로 인해 발생한 암논의 죽음(삼하13:28-29), 압살롬의 반란(삼하15), 그가 아버지의 첩들과 대낮에 동침한 사건(삼하16:22), 솔로몬의 다첩(왕상11:1-5) 등등은 모두 아버지 다윗의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삼하12:9-12)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다윗의 후손 왕들이 소개될 때마다 모후(母后)가 누구인지 소개됨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를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창조론적 가정관에 의하면 가정 교육이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  성경의 이런 가르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강조되지 않았을 뿐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시내산 율법이 이를 잘 증언한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한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이었다.  당연히 선민은 구속주를 창조주로 경배해야 했다(20:2-11).  이것은 창조주의 가르침(1-2)대로 사는 신앙 삶을 뜻했다.  이 가르침들만이 속량 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목표와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창조론적 가정관은 구속 후 주어진 시내산 율법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구약 시대 가정에서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지 않았다.  가정이 종교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이런 가정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이스라엘의 영역이 확장되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 영역도 증가하며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 이후 교회는 가정에서 분리되었다.  성경의 이런 가정관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계속 이어졌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가정

겉으로 보아 신약 시대 가정보다 교회가 더 강조된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의 가정관은 구약 성경의 그것과 다른가?  신구약 성경은 내용상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구속사적인 무대가 달라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졌다.  구약의 모든 예언과 약속은 메시아의 강림으로 성취되었다.  그가 구속사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신분과 사역이 기록되어야 했다.  아울러 이들의 신학적인 의미도 설명되어야 했다.  그를 통하지 않고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구원에 관한 계시들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이를 교회에 전달했고 교회는 신자들을 가르쳤다.  교회와 가정이 분명히 분리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가정의 역할과 중요성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전령인 세례 요한이 제사장 집안 출신으로 그의 부모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고(1:5-6) 기록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모도 유다 지파 출신으로 경건한 자들이었다(1:19, 1:38).  소년 예수가 성장할 때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의 명대로 매년 3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2:41).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이 경건한 가정을 배경 한다고 성경은 보고한다.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지만 한결같이 부모에게 효도했다(2:51).  일찍 죽은 아버지 요셉을 따라 가업을 물려받고 목수로서 가족을 돌보았다.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적어도 10년 이상 가장(家長) 역할을 수행했다.  예수님도 가정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30년과 3이란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22492971).

공생애를 시작하며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이적들을 많이 행했다.  이들 중 첫 이적은 바로 혼인집 잔치 자리에서 행해졌다.  포도주가 떨어져 난처해진 신혼 가정을 위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2:1-11).  이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다.  창세기 1-2장이 말하듯이 아버지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 결혼, 부부 그리고 가정에 관한 제도를 창설했는지 아들 그리스도도 잘 알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았다.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19:26-27).  인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는 힘겨운 순간에도 예수님은 가정을 돌보았다.  자신의 공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은 가정을 돌보았다.  결국 공생애의 시작과 끝은 가정에 관련된 사역이었다.  아들은 사역 초부터 마지막까지 몸소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했다아들도 창조론적 가정관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아들이 이 세상에 온 것은 타락으로 상실된 것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첫 이적이나 십자가상에서 보인 효도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고 그 뜻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럼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16:31)  여기 집은 가정을 뜻한다.  종교와 문화가 하나인 가정의 복구, 이것은 구속과 구원의 결과이다.  이런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 후 승천 직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선교 사명(28:18-20)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  향후 예수님의 제자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지키는 신자들이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럼 어디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여야 하는가?  물론 가정에서부터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무엇보다 먼저 신자의 가정에 실현되어야 한다.  모든 식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 가정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게 식구들은 가정에서 공동체 훈련을 받아야 한다.  식구들은 인류 사회의 일원으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앞으로 살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인의 가정에서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어선 안 된다.  이 지상에 하나님 나라는 종교와 문화의 옷을 입고 인류 사회에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신앙에 근거를 둔 문화 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 후 명한 문화 사명(1:28)과 예수님의 구속 사역 이후 명해진 선교 사명(28:18-20)은 목적상 동일하다.  가정이 출발점이 되어 문화 사명과 선교 사명이 수행되면 그 결과 하나님의 통치가 종국적으로 이 땅에 실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도 가정의 역할을 절대로 축소되지 않는다.

구약의 문화 사명은 선교 사명으로 얼마든지 수행되기 때문이다.  죄인이 구속의 은총으로 새 삶을 부여 받고 새로운 윤리로 살아간다.  이렇게 신자의 가정이 새롭게 되고 이런 가정의 수가 증가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저절로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된다. 

 

그렇다면 문화 사명과 선교 사명의 관점에서 교회와 목회는 재정립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 존재 자체를 목회의 목적으로 삼아선 안 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섬기는 성스럽지만 일시적인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통치가 먼저 교회에 실현되어야 한다.  그곳에서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미리 맛볼 수 있어야 한다(14:17).

그럼 교회와 가정 사이 관계는 무엇인가?  교회는 구원의 모태(母胎)이자 신자들의 양육 장소이다.  그리고 신자들을 가정과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성도의 가정과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예배와 교육에 잘 참석하도록 교회는 신자들을 권면한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이 일을 위해 신자들은 세상에서 날마다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 전쟁에 승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승리자는 자만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그리고 실패자는 더욱 격려하여 용기를 얻게 한 후 다시 전쟁 용사로 세워야 한다.  이 일은 교회의 위대한 사역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결론

교회 역사는 목양(牧羊)을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 앞에 자주 실패했음을 증언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중세 유럽의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이다.  실패 원인은 어디 있는가?  종교가 주는 영광과 권세 그리고 성공으로 인해 종교가 사업으로 변질되며 이를 즐기려는데 있다.

그렇게 주인의 포도원을 종교 지도자의 개인 사유물로 알고 취한다(21:38-39).  그리고 종교사업 영역을 더 크게 확대하고자 이들 악한 지도자들은 신자들이 비성경적인 교회 프로그램에 많이 참여하도록 늘 그리고 계속 강요한다.  그리고 그 안에 교주처럼 안주하며 거드름 피운다.  교회라는 목양지가 개인의 야망이나 비죤 또는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바뀌었다는 예수님의 고발이 이를 잘 증언한다(21:13).

 

공생애 말기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이를 전혀 알지 못한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은 이 무리를 뒤돌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6-27)  그리고 망대 건축(14:28-30)과 전쟁(31-32)을 비유로 들었다.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안 되었다면 그만 중단하라고 예수님은 경고했다.  나중 부끄럼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 경고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겨냥했다.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고 부패한 인간인 예수님의 제자들도 헛된 영광을 추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제자들을 경계했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각오가 없는 목회자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이들에 의해 교회는 본래 존재와 사역의 목적을 잃는다.  이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고(딤전6:5) 신자들도 그렇게 본다.  영적으로 가정이 잘 서도록 돕기보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신자들을 교회에만 모이라고 늘 강요한다.  이런 탐욕스런 목회로 인해 성도들의 가정은 영적으로 피폐화되고 가정 목회는 실패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민족 사회에 세워지지 않는다.

세계에서 제일 큰 10대 교회들 중 다섯 곳이 한국에 위치하지만 한국의 목회자들과 성도의 수준은 아주 낮다.  종교적인 사업은 번성하는데 비해 영정 성숙은 눈에 띠지 않는다.  교회를 살찌우는 목회 프로그램만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젠 사람 즉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와 목회자가 신자의 가정이 잘 세워지도록 사랑으로 섬길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 목회자에게 자기부정이라는 노력이 부단히 요구된다.  이 점에서 목회자는 누구와 같은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자신을 낮추고 죄인을 섬긴 예수님의 비하(卑下)를 배워야 한다.  사도 바울도 구체적으로 이에 대해 말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고전9:1)  사본에 따라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 로도 표현된다.

그의 자기 소개에 의하면 바울은 사도이기 이전에 이미 자유자였다.  그리고 사도가 된 후에도 여전히 자유자였다.  여기 자유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진정한 자유자는 스스로 모든 이들에게 종이 되어 준다고 바울은 말했다.  그 목적은 오로지 더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돕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7:16-19)

여기 열매는 찬란한 목회적 은사를 뜻하지 않는다.  이런 은사는 예수님이 모른다고 선언한 불법자들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7:21-23).  그러므로 여기 열매는 성숙한 신앙 인격과 그에 따라 나타난 열매를 뜻한다.  그러나 이 열매는 눈으로 찬란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제 목회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자신의 목회 목적, 내용과 결과를 엄밀하게 살펴야 하며 다른 한편 신자들은 목회자의 인격적인 열매를 보고 그의 인격과 목회의 진실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다고 말했다(3:10).

교회나 목회 자체에 목적을 둔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목표하며 가정 목회를 살리려고 하는 노력 -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증거이다.  이는 자기 만족이 아닌 자기 희생에 근거를 둔 헌신과 섬김을 요구한다.  !  이 바보야!  이젠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란 말이야!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3 사실과 의미로 본 성경 본문(2) 첨부 파일
장창수
2256 2011-05-26
32 자유도 부정할 수 있는 자유
장창수
2453 2011-05-22
31 성공 후에도 자유자가 되라!
장창수
2264 2011-05-22
30 먼저 자유자가 되어라!
장창수
2212 2011-05-20
29 사실과 의미로 본 성경 본문 첨부 파일
장창수
2901 2011-05-08
28 일과 쉼(1)
장창수
2660 2011-04-25
27 성경의 지혜로 살려면 첨부 파일
장창수
2846 2011-04-12
26 무교와 교회 개혁 첨부 파일
장창수
2471 2011-04-08
25 유교와 교회 개혁 첨부 파일
장창수
2563 2011-04-08
24 불교와 교회 개혁 첨부 파일
장창수
2957 2011-04-08
23 지도자가 넘어야 할 시험
장창수
4072 2011-04-02
22 구원은 상실될 수 있는가? 첨부 파일
장창수
3891 2011-03-30
21 죽어야 단 것이…… 첨부 파일
장창수
2497 2011-03-21
20 자연 재난은 경고함으로 회개를 요구한다! 첨부 파일
장창수
2359 2011-03-16
19 모세가 경험한 두 문화 첨부 파일
장창수
2586 2011-03-14
18 문제는 교회의 정치 세력화이다. 첨부 파일
장창수
2492 2011-03-05
17 경기서노회 신흥교회 개발로 위기에 처함
유병도
2859 2011-02-28
Selected 바보야!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야! 첨부 파일
장창수
2724 2011-02-19
15 교회 개척을 하신다고요? 첨부 파일
장창수
2923 2011-02-11
14 기초를 다시 쌓자! 첨부 파일
장창수
4558 2011-01-21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