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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30 (21:26:31)

(부제: 상이한 구원론)

 

칼빈주의 또는 개혁 교회는 받은 구원을 절대로 상실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교지 러시아의 교회들은 상실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리적으로 러시아 침례 교회는 알미니안 쪽으로 기울어진 웨슬리안에 속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시대 즉 70년간 지속된 무신론(無神論) 시대 잘 믿던 신자들이 교회와 신앙을 버렸다.

 

서로 다른 구원론

인간론에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또는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주장한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며 인간은 자신이 받을 구원에 간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구원론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칼빈주의는 받은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알미니안은 잃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차이는 관점 상 차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러나 알미니안은 사람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각각 논한다.  달리 설명한다면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논리(論理)에서 본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시간의 변화에 무관한 진리로써 구원론을 말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 구원을 결정한다면 구원은 절대로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얼마든지 능히 이룰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神)이기 때문이다(사46:10-11, 엡1:11절).

 

그러나 알미니안은 인간 역사(歷史)의 지평(地平)에서 구원론을 본다.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의지와 다르게 다양하게 반응하고 변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구원론을 말한다.  실제로 교회 역사는 신자들이 신앙을 버리는 많은 사례들을 증언한다.  그리고 교리 면에서 알미니안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구원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본다.

 

구원론을 윤리로 바꾼다면 칼빈주의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규범 윤리라면 알미니안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상황 윤리이다.  결국 칼빈주의는 변할 수 없는 원리(原理: principle)에서 그러나 알미니안은 역사에 다양하게 나타난 적용(適用: application)에서 구원론을 각각 다르게 말한다.

 

구약은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말하는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거의 2백만에 가까웠다(출12:37절).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민26:65절).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한 약속(시105:11절)에 따라 출애굽 사건은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모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가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한 안식에 이르는 데 실패했다.  그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있었다.  이런 기록은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구원 받은 후에도 불순종한다면 구원을 잃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고 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증거이다.”

 

그러나 다른 질문이 생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다.  그럼 이들이 모두 천국에 이르지 못한 것인가?”  반드시 긍정할 수 없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천국에 들어간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도 마찬가 가지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불순종 때문에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라는 혼란기를 겪었다(삿2:1-3절).  애굽의 노예 삶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방 민족의 속박 아래 또 다시 살아야 했다.  이 뿐만 아니다.  나중 그곳에 세워진 다윗 왕국은 둘로 나뉘었고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들에 의해 각각 멸망 당했다.

 

이런 기록들은 구원 후 순종의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고전10:6절).  그렇지 않을 경우 받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구약은 경고한다.  구약 성경은 가나안의 안식(히4:8-11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이용하여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 대로 구약의 이 가르침이 반드시 성경적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구약의 역사(歷史)는 신약 시대 성취될 구원 역사를 상징적으로 또는 모형적으로 예언해 주는 역할을 한다(눅24:44절).  모형과 상징을 이용하여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경고했을 뿐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광야 40년 동안 살다 그곳에서 죽었다 해도 이스라엘 중 상당 수는 얼마든지 천국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칼빈주의의 구원론이 틀리고 알미니안의 구원론이 맞는다고 결코 증언하지 않는다.

 

잃은 구원의 복구 가능성도 기록한 구약

놀랍게도 구약 성경은 잃은 구원의 복구 가능성도 기록한다.  사사 시대 베들레헴에 살았던 엘리멜렉 가문이 좋은 예이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하기 위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갔다.  그러나 이방인의 땅에서 엘리멜렉은 물론 두 아들은 후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었다(룻1:1-7절).

 

이 당시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은 선민의 일원이란 증거물이었다(민26:53-54, 사60:21절).  신약 식으로 말한다면 교회의 회원이라는 증표로써 구원의 증거이다.  그러나 후손이 끊긴 엘리멜렉 가문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기업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  신약 식으로 말한다면 구원의 방주인 교회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

 

이 때 비로소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을 반기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오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룻1:20-21절)

 

정말 인류는 풍족할 때 하나님을 떠난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 때 하나님께 불순종했다(창3장).  나오미의 고백은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증언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잃은 구원의 복구 가능성을 또한 고백했다.  하나님이 준 고난과 역경 때문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과부 나오미는 혈통만 이스라엘에 속할 뿐 하나님의 언약과 완전히 무관한 이방인과 같았다(엡2:11-13절).  어떻게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을 것인가?  이를 위해 어떻게 끊어진 자손을 되살릴 것인가?  그녀의 며느리인 모압 여인 룻이 이 일을 해냈다. 남편의 근족(近族)인 보아스가 이들의 구원자였다.  그가 룻을 취함으로 나오미는 마침내 그에게서 후손을 얻었다(룻4장).  그리고 보아스가 남편의 잃어버린 기업을 다시 사 복구시켜 주었다.  엘리멜렉의 가문은 기사회생되었다(룻4:13-15절).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덕분이었다(롯4:14절).

 

알미니안의 주장대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상실했다.  그러나 칼빈주의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 덕분에 잃은 구원이 회복되었다.  더 놀랍게도 나중 엘리멜렉 가문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 출생했다.  이 모든 일들을 종합한다면 하나님의 장대한 계획이 드러난다.

 

먼 날 세워질 다윗 왕국을 목적하며 이스라엘의 혼란기인 사사 시대 하나님은 엘리멜렉 가문을 선택했다(룻1:1절).  이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이었다.  그리고 이 은총은 견인(牽引)의 은총으로 엘리멜렉 가문에 나타났다.  이 은총이 망한 가문을 복구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늘 하나님의 구원 은총 아래 살았다.

 

구원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모압 여인 룻을 통해 끊어진 후손을 얻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모압 여인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 줍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룻2장).

 

그러나 만약 엘리멜렉 가문이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  엘리멜렉의 불신앙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그의 가문을 영원히 버렸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간단하고 공의롭다.  이들은 믿음에 따라 살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버렸다.  이들이 원하는 대로 잘 먹고 잘 살도록 하나님이 물질적인 복을 조금 더해 준다면 이들은 이방 땅 모압에 영원히 남았을 것이다.  그것은 곧 구원의 영원한 상실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렇게 돌보지 않는다.

 

창세기도 구원의 상실과 북구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아담은 낙원 에덴에서 사는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그는 스스로 에덴 동산을 잃었다(창3장).  이를 안 후 하나님은 잃은 구원을 되찾아 주겠다고 곧바로 약속했다(창3:15절).  그러나 약속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 여인의 후손에 속한 인류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의지가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알미니안의 주장도 맞는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구원 문제에서 인간의 의지가 최종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이로써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선 인간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정과 의지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만약 그의 작정이 실패할 수 있다면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이 좌지우지되면 안 된다.  그런 신에게 인류가 어떻게 자신의 구원 문제를 맡길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나 인간의 관점에서나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상실될 수 없어야 한다.

 

신약 성경의 구원론은 무엇인가?

그럼 왜 구약 성경은 구원의 상실과 복구 가능성을 모두 기록하는가?  그것은 신구약 사이 기록 방법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원리를 여러 인물들과 그의 사역을 통해 설명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예수라는 한 인물과 그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논리가 모두 설명된다(히1:1-2절).

 

달리 말한다면 구약은 앞으로 성취되고 완성될 하나님의 약속들을 예언의 형태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신약은 이 약속들이 아들 예수님에 의해 이미 성취된 것으로 기록한다.  예언과 성취 사이 차이는 구원론에 있어 신구약 사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예언 형태로 기록된 구약 성경에선 구원의 상실과 복구 가능성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이미 성취된 구원에 대해 기록한다.  그러므로 이미 성취된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말할 수 없다.  이런 가능성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불완전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아들의 사역에서 실패가 있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아들의 실패는 곧 아버지 하나님의 실패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창세 전 이미 세워진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과 선택을 무용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작정을 반드시 이루도록 허락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과 약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성, 이 둘을 또한 거짓으로 만든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 설명했듯이 구약도 구원의 상실성을 말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신구약 사이 동질성과 연속성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럼 신구약 사이 구원론에서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39-40절)  여기 이 사람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지칭한다.

 

구약의 신자들은 믿음으로 산 결과 앞으로 받을 구원의 증거는 받았다.  그러나 그 증거가 지목하는 약속은 아직 역사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구약 시대 성도들은 믿음 덕분에 앞으로 성취될 구원을 미리 앞당겨 받았다(선취된 구원: salvation received in advance).  구약 시대 믿음은 바로 그런 증거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구약 성도들은 신약 성도들과 완전히 다르다.  신약 성도는 역사적으로 이미 성취된 구원을 문자 그대로 약속의 형태로 받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은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자신의 구원이 완성될 날을 소망하며 기다린다.  이 때 구원을 앞당겨 받았든지 아니면 성취된 구원을 받았든지 이 둘 사이 차이는 있을 수 없다.  구원은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동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 받은 구원의 상실 가능성과 복구 가능성을 말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좋은 예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창12:1-9절).  그러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 때 부인 사라가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혼자 애굽을 떠날 수 없었다. 

 

만약 하나님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애굽인으로 영원히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가 받은 구원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전 이미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했다(창12:1-3절).  그의 후손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을 성취해야 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꿈을 통해 애굽의 바로를 두렵게 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안전하게 가나안으로 돌아갔다(창12:15-20절).  이런 은총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 덕분에 아브라함은 애굽에서도 하나님의 선택 은총 안에 계속 머물렀다.  하나님이 한번 은총을 주기로 작정했다면 스스로 취소할 수 없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서 견인의 은총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시105:12-15절).

 

신약 성경도 이를 잘 증언한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모두 스승 예수님을 버렸다.  그러나 이들 사이 큰 차이가 있다.  가롯 유다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이미 버림 당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이미 받았다.  부활 후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을 찾았으나 가롯 유다에게는 그런 은총이 없었다.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신구약 모두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구원의 취소 불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의 구원론보다 칼빈주의의 구원론이 더 성경적이다.

 

동일한 구원론을 주장하는 성경

신약 성경에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성구가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4-8절)

 

먼저 문맥을 살펴야 한다.  이 본문 앞에서 ‘도의 초보’에 대한 언급이 두 번 있다(히5: 12, 6:1절).  그리고 5장 마지막 부분에서 ‘젖을 먹는 자’, ‘어린 아이’ 그리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는 표현들이 또한 등장한다(히5:13-14절).  이런 문맥(context)에서 본다면 이 본문(text)에서 언급된 신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자들이다.  분명히 이들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 본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의의 말씀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자로서 장성한 자도 아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단단한 식물을 먹을 줄 모르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할 줄 아는 자들이 아니라고 지적된다(히5:13-14절).  한 마디로 말해 이들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수신 신자들은 이들보다 앞선 자라고 지적되었다(히6:9절).  그렇다면 본문은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무관하다.

 

그럼 영적 미성숙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이 겨우 한 번만 비췸을 받았다는 데 있다.  그 덕분에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지만 그것은 한 때 잠깐이었다.  이들은 거듭난 성도들이 아니었다.  거듭남이 없이도 잠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얼마든지 맛 볼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동사 - 비취다, 맛 보다 그리고 참여하다 - 가 이를 잘 증명한다.  헬라어나 러시아어 문법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완료 동사이다.  동사가 지시하는 행위가 반복되지 않는다.  ‘한번’이란 단어가 이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행위들은 신앙 삶 중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이 때 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결과 선악을 분변할 수 있는 장성한 성도가 될 수 있다.

 

그럼 이들은 어떤 신자들인가?  구약에선 가인 같은 자(창4장), 에서 같은 자(창25:31-34절), 성령의 감동으로 앞으로 올 메시아를 예언한(민24:17절) 거짓 선지자 발람 같은 자(유1:11, 벧후2:15-16절), 엘리 대제사장의 두 아들 같은 자(삼상2:12절) 또한 사울 왕 같은 자(삼상15:11-23절)이다.  그리고 신약에선 예수님의 산상수훈 마지막에서 언급된 거짓 선지자들(마7:22-23절)이다.  예수님의 12 제자들 중 하나였던 가롯 유다(요6:70-71절) 그리고 초대 교회 시대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절)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 보았다.  그러나 한 때 잠깐 맛 보았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반복적으로 이들 인격과 삶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계속 멸망의 길로 갔다.  왜 그런가?  이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은총의 비는 계속 내린다.  그러나 마음의 완악함이 이들로 하여금 은혜의 비를 받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종교 지도자들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거의 날마다 예수님에 대해 수많은 소식을 들었고 그의 말씀도 전해 듣거나 직접 보고 들었다.

 

은혜의 비가 소나기처럼 아무리 많이 쏟아졌지만 이들에게는 소용 없었다.  이 이유가 성경에 이렇게 설명된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절)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부터(사6장) 유대 나라를 멸하기로 이미 작정했다.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에 예수를 알게 하는 빛을 비추어 주지 않았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절)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은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구원론이 틀렸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이렇게 증언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7-39절)

 

결론

성경 해석을 위해 특정 본문만 살피면 안 된다.  즉 본문은 다른 성구들과 단절되면 안 된다.  문맥을 살피며 본문의 해석을 돕는 성구들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들도 얼마든지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과 사실들은 다양하다.  때때로 이 사건들 사이 모순이 발견되는 듯 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 그리고 목적은 늘 변함 없이 동일하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양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다.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흐르는 일관된 논리에 따라 본문들을 해석하여야 한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의 구원론에도 조심할 점이 있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하나님만이 누가 진정 구원 받는지 여부를 정확히 안다.  그러나 교회는 이에 대해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엔 안주하여 버린다면 칼빈주의자들은 율법폐기주의자로 드러날 수 있고 그렇게 오해 받을 수 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아직 영화(榮華: glorification)에 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 이후 반드시 필요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 과정에 진력해야 한다.  하나님도 이를 위해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를 시험한다.  참 신자를 연단시켜 합법적인 상속자로 세우기 위함이며 동시에 거짓 신자를 타락시키기 위함이다.

 

칼빈주의 구원론은 자칮 하나님의 시험의 의미와 신자의 성화 노력을 무용하게 만들거나 거짓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우습게 만들 수 있다.  피로 값 주고 산 바 된 성도의 구원이 ‘값싼 구원’으로 비웃음 받게 한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현상을 사도 바울은 보았다. 

 

그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은 영원하지만 그 중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했다(고전13:13절).  사랑 실천은 바로 구원 받았다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갈5:6절).  이 때문에 율법 폐기론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칼빈주의 구원론과도 전혀 무관하다.  히브리 수신 교회에게 준 가르침에 주시해야 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3-25절)

 

반면 알미니안은 율법주의자가 될 수 있다.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 달린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에게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나타난다.  신앙 삶을 잘 한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 깊이 좌절하며 절망한다.  그러나 이를 감추기 위해 위선적인 신앙 삶을 산다.  이것이 율법주의자의 모습이다.  구원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한 노력에 의존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관점이 원리(原理)로 나타나면 항상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도 사단과 악이 활동하므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작정이 실패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만 아시지만 진실한 성도들의 성화 노력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세워지고 서서히 확장된다.  이를 위해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마침내 승리한다.

 

그리고 구원론은 중요하다.  구원론은 구원 받은 신자의 존재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구원론의 내용에 따라 존재에 대한 설명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어떤 구원론을 지지하느냐가 신앙 삶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것이 본 글을 쓴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지지하는 구원론을 늘 견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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