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조회 수 : 2563
2011.04.08 (17:53:10)

 

(부제: 전통 종교에 뿌리 한 교회의 개혁2)

   
제목의 주제들은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토착 종교와 기독교로 제목을 바꾼다면 그 관계가 이해된다.  이 둘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원에 있어 기독교가 하늘에 뿌리를 둔다면 다른 종교들은 땅에 둔다.  이 차이는 너무나 크다.  기독교의 차별성을 위해 교회에 남아있는 전통 종교의 잔재를 제거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기독교가 어떤 면에서 토종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유교의 덕치(德治)

유교는 본래 종교가 아니라 예의(禮儀)와 통치(統治)에 관한 철학이다통치에 대한 유교 철학은‘덕치(德治)’를 주장한다덕치란 군주(君主)의 덕()과 인()에 의존하는 통치를 뜻한다군주는 성인군자(聖人君子)로서 모든 일에 절대적으로 옳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충신(忠臣)들은 죽을 각오하며 덕()과 인()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늘 간한다.  

군주의 명령이 틀려도 백성은 일단 순종해야 한다.  달리 말해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權威)가 통치의 중요한 수단이다.  유교 문화권(文化圈)에서 아랫사람들인 백성(百姓) 은 윗사람인 군왕(群王)을 비롯한 귀족(貴族)들의 은총 아래 산다이 문화의 특징은 해바라기성이다.  이런 곳에선 생존을 위해 줄을 잘 서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는 성격상 수평적(水平的)이기보다 종속적(從屬的)이다.

유교의 은총(恩寵) 문화는 서구 사회의 평등한 성격의 계약(契約) 문화와 완전히 다르다.  이런 문화권에서 전제 정치(專制政治)나 독재 정치의 가능성이 더 높다이런 나라에선 윗사람들의 범죄(犯罪)나 비리(非理)가 잘 징벌되지 않는다만약 필요하다면 2선에 잠깐 후퇴시킨 뒤 나중 다시 등장시키면 그만이다.

그럼 유교의 통치 철학의 문제는 무엇인가불완전(不完全)한 인간인 군왕(群王)을 완전한 성인군자(聖人君子)로 본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 성경은 인간이란 부패(腐敗)한 존재로 본다(3:10-18).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면 부패한 인간에게 완전한 덕()과 인()을 바라며 나라의 통치를 완전히 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더구나 불완전한 인간 군주(君主)가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절대(絶對) 권력을 누린다면 더 문제다.  그의 통치(統治)가 부패(腐敗)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그러나 유교는 인간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과 인간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人本主義)에 근거를 두고 군왕의 덕치(德治)를 계속 주장한다.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동북아시아 제 나라에서 지도자의 부패 문제는 끊임없이 언론에 부각된다.  이들 나라 중 가장 선진적인 일본의 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통치자에게 전적으로 맡기지만 그를 견제하는 장치가 늘 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덕치의 한계이다.

 

기독교의 법치(法治)

기독교의 통치 철학은 유교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구약의 율법(律法)이 잘 설명해 준다.  유교권에선 인간 군왕이 입법자이며 재판장이지만 이스라엘에선 하나님이 입법자이며 재판자이다.  유교권에서와 달리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며 법의 적용에서도 예외는 없다기독교 성경은 철저히 법치(法治)를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 통치자의 불완전함, 게으름, 나태성과 부패성을 잘 안다.  이를 감시하고 불필요한 권력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하나님은 선지자를 택해 보냈다.  선지자들은 주저 없이 그리고 가차 없이 왕과 대제사장의 비리(非理)와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悔改)를 요구했다.

이 당시 왕이나 제사장들은 보수 세력으로 기득권 층에 속했다.  혈통적 (血統的)으로 신분이 이들에게 보장 되었다.  이들은 자자손손 왕과 제사장이란 신분을 누리며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사회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이런 권력을 이용하여 이들도 얼마든지 부패할 수 있었다참 왕인 하나님은 이들을 견제해야 했다.

이를 위해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왕이나 제사장과 달리 기득권에 속하지 않아 권력의 부패(腐敗)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이들은 왕의 정치적인 부패와 제사장들의 외식적인 종교의식을 자유롭게 비판했다.  물론 이 당시 왕에게 아부하며 세상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거짓 선지자들도 있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왕의 통치, 제사장의 종교적인 권위 그리고 선지자의 비판 활동, 이 모두 철저히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근거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법치(法治)’의 개념이다.  기독교의 법치는 법의 적용에서 늘 제외되는 군왕의 덕치(德治)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이런 법치에 의해 자신의 통치를 가나안 땅에 실현하고자 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택함을 받은 이유였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법치(法治)의 중요성이 그리 인식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부터 삼 천년 전 이미 가나안 땅에 법치에 근거를 둔 선진적인 정치 제도가 이스라엘에 의해 세워졌다.  이 사실은 유교의 통치 철학과 비교할 때 기독교의 철학이 얼마나 위대한 인류의 자산인가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인류 사회는 늘 창조주 하나님을 떠남으로 자신의 통치를 스스로 실현하고자 애쓴다.  바벨탑 사건(11)이 의미하듯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인간 나라를 늘 세우고자 한다.  그럴수록 인류는 서로 분쟁하고 다툴 뿐이다.  인류 사회의 끊임없는 전쟁 역사가 이를 잘 증언한다.

 

신약의 동역자 의식

신정정치(神政政治)가 깨어진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통치 철학에는 변함이 없다.  교회의 참 주인(主人)은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이다그렇다면 목사를 포함한 모든 제직들과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모두 주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하다.  이 점에서 신구약 사이 차이가 전혀 없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 의식(同役者 意識)이 잘 증명한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었다교인들은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각각 주장하며 교회가 분열되었다(고전1:11-12).  교리적 (敎理的)으로 이것은 틀렸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다(고전1:13).  이를 위해 바울은 아볼로를 언급했다(고전3:4-9).

바울과 아볼로는 주()께서 준 은사(恩賜)대로 일한 사역자에 지나지 않았다 (5).  바울이 심었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게 한다 (6).  결국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요, 다만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8).  이 때문에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며 동시에 서로에게도 동역자가 되었다(9).

유교적인 권위의식(權威意識)이나 사도(使徒)라는 특권의식이 바울에게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바울과 아볼로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 (語不成說)이다바울은 부활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택함을 받은 사도라면 아볼로는 그냥 신자에 지나지 않았다(18:24-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볼로를 자신과 같은 사역자라고 주저 없이 소개했다.

그의 동역 의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양자(養子)로 삼은 디모데를 자신의 동역자라고 말했다(16:21).  옥중에서 개종한 노예 오네시모의 주인(主人)인 빌레몬을 또한 자신의 동역자라고 소개했다(1:1).  이 이외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와 누가도 자신의 동역자라고 자신의 서신에 기록했다(1:24).  그리고 함께 천막 일을 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자신의 동역자라고 기쁘게 말했다(16:3). 

바울은 디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8:23)  디도는 바울을 통해 개종한 후 그의 제자가 된 헬라인이었다 (2:3, 1:4).  그러나 아들 같은 디도를 그는 아낌없이 칭찬했다.  남녀노소 (男女老少)를 불문하고 자신을 도와 주()의 일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그의 동역자였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동역자 개념이다그러므로 유교의 가부정적인 권위의식과 계층 적 또는 계급적인 직분 개념은 기독교의 동역자 의식이나 개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믿음의 주관자가 아닌 사도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안 후 사도 바울은 몹시 초조했다(고전1:11).  빨리 달려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원했다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고 대신 서신을 써 보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3-24)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이용하여 사도로서 권위를 과시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영적 나태함을 뜻하는가?  결코 아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을 주관(主管)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하나님임을 그는 잘 알았다.  그는 교인들과 같은 동역자였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서 맡은 사역을 수행하고자 했다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믿음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가 서둘지 않았는가? “그들 앞에 나서면 사랑의 말보다는 책망과 비판의 말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이미 믿음에 서 있는 주의 동역자들을 절망케 하거나 상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주 앞에서 아름답지 않았다.  이를 안 바울은 자제(自制)했고 서둘지 않았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서 바울은 그들을 진실로 아끼고 싶었다.

그의 목회 자세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성구가 또 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柔順)한 자 되어 유모(乳母)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2:7)  유모(乳母)는 종으로서 주인의 자녀(子女)를 친어머니처럼 기른다.  젖이 풍성(豊盛)한 여인(女人)만이 유모가 될 수 있다.  부드럽고 따뜻한 유모로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영적(靈的)으로 길렀다.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그의 사도직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유교권에서 이런 덕성은 군왕이나 지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한국 교회에선 권위적인 부성적(父性的) 목회만이 유행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비권위적인 모성적(母性的) 목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상은 유교의 권위주의와 다르다.

목회자는 주인의 양들인 신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유모 같은 종으로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목회자는 주인의 자녀인 교인(敎人)들을 자기 양들처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자신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풍성(豊盛)한 말씀의 젖으로 먹이고 기를 의무와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승천(昇天)하기 전 부활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부탁한 목양(牧羊)도 같은 맥락이다 (21:15-17).  목양을 위한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 먼저 부활주인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에 바탕을 두고 주님의 어린 양()들을 잘 먹이고(말씀 사역) 다 자란 양들을 치고(목회) 동시에 계속 먹여야 한다(말씀 사역).  주님을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면 목회가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실패란 뜻이다.

오늘날의 목사(牧師)는 권위주의자(權威主義者)이기보다도 유모(乳母)같은 교사(敎師) 여야 한다달리 말해 목사(牧師)는 교회 행정가 그리고 교회 경영가라는‘목회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이고 잘 돌보는 유모로서‘목자’여야 한다이것이 가능하도록 장로와 집사라는 항존직 직분이 교회에 있다.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專念)해야 한다(6:4).

성경 어디에도 목회자의 특권(特權)보다 의무(義務)와 책임(責任)만이 더 강조된다.  주인의 양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 문화권(文化圈)에 속하는 한국 교회에선 동역 의식이 완전히 무시되고 목사는 피라미드의 정점(頂点)에 서도록 허락하는 성직제도만 고집한다이 점에서 한국의 개신교는 로마 카도릭과 다를 바 없다.

 

결론

예수님의 삶과 사역도 또한 성경적인 목회자상을 지지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만물의 주인이지만 피조물 인간을 섬기려 왔다고 말했다(20:28).  이를 증명하듯이 십자가 상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제자(弟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본을 보였다(13:14-16). 

앞으로 12제자들은 신약 교회의 12 기둥 같은 사도들이 될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사랑의 섬김에서도 앞 장 서야 했다예수님의 제자들은 섬김을 받는 특권층(特權層)이 아니라 사랑의 섬김을 실천해야 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유교의 권위주의(權威主義)와 계급의식은 전혀 비기독교적이다.

부활주 예수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다.  이 이외 몸의 모든 지체(肢體)들은 주 앞에서 동등하다(고전12:12-27).  이런 지체이론에 근거를 두고 한국 교회는 철저히 개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제직들은‘섬기는 직분(職分)’임을 기독교의 윤리 강령에 넣어야 한다.

교회의 행정(行政)은 교회 조직(組織) 자체를 위하지 않고, 목회 프로그램 자체를 위하지도 않고 그리고 교회의 수적(數的) 성장 자체를 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지상 교회는 지체(肢體)들인 신자들의 질적(質的) 성장을 위해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섬김과 봉사의 조직이기 때문이다(4:11-16).

성경의 지체이론(고전12:12-27)이 이를 또한 지지한다.  지체들은 크고 작은 것으로 비교될 수 없다.  또는 은사의 위대함 정도로 비교될 수 없다.  지체들이 가진 역할과 기능은 몸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지체 이론은 유교의 권위의식과 계급 의식이 비성경적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유교의 출세주의와 태양은 오로지 하나라는 지도자 철학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잘 드러난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16:26)도 이를 잘 지지한다.  남녀노소 그리고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영혼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귀하다.  한 영혼이라도 잘 돌보라고 교회에 목회자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한국 목회자들의 중대한 관심사인 교회가 크냐 작으냐, 교인 수나 헌금 액이 많나 적나 그리고 신자들이 부자들이냐 가난하냐 등등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도 없다.  한국 교회를 지배한 양적 성장론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잘 드러난다.

 

기독교가 유교와 다른 면이 또 있다.  유교는 계율(戒律) 자체를 위해 살아있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유교의 권위 의식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고려하지 않고 규례의 준수만 고집하며 무조건적(無條件的)인 복종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주의 (律法主義)의 심각한 문제이다.

유교의 이런 영향을 받은 한국 목회자들도 진리(眞理)에 대한 서술(敍述)보다 규례에 대한 명령(命令)을 강대상에서 더 자주 언급한다.  목회자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 목회자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성경의 율법을 잘못 이용한다.  이런 율법주의를 기독교 성경은 배척(排斥) 한다.  기독교 성경은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13:8,10, 5:14).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가 잘 발달된 나라들에선 개신교가 매우 왕성하다.  기독교의 복음은 어디서나 민족과 사회를 개방시키고 그 결과 각 방면에서 발전을 가져다 준다.  복음의 빛은 모든 어둠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북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대한민국은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야 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이를 부인한다.  국민 윤리 분야에서조차 우상과 잡신으로 들끓는 일본보다 대한민국이 한참 뒤진다.  한국 교회가 유교적(儒敎的)인 요소들에 의해 극복 당했기 때문이다.  언제 이것이 극복되는가?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주 안의 동일한 형제(兄弟)처럼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동역자처럼 존중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는 계속 천상천하 유아독존적(唯我獨尊的)인 존재로 남을 것이며 기독교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도 마다하지 않는 미신으로 취급되고 목회자는 무교의 무당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결국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사이비 집단으로 비웃음 당할 것이다.  물론 그런 교회에는 영적(靈的) 생동감(生動感)도 없을 것이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 그의 말씀인 법을 버린 결과일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3 사실과 의미로 본 성경 본문(2) 첨부 파일
장창수
2256 2011-05-26
32 자유도 부정할 수 있는 자유
장창수
2454 2011-05-22
31 성공 후에도 자유자가 되라!
장창수
2264 2011-05-22
30 먼저 자유자가 되어라!
장창수
2212 2011-05-20
29 사실과 의미로 본 성경 본문 첨부 파일
장창수
2901 2011-05-08
28 일과 쉼(1)
장창수
2660 2011-04-25
27 성경의 지혜로 살려면 첨부 파일
장창수
2846 2011-04-12
26 무교와 교회 개혁 첨부 파일
장창수
2471 2011-04-08
Selected 유교와 교회 개혁 첨부 파일
장창수
2563 2011-04-08
24 불교와 교회 개혁 첨부 파일
장창수
2957 2011-04-08
23 지도자가 넘어야 할 시험
장창수
4072 2011-04-02
22 구원은 상실될 수 있는가? 첨부 파일
장창수
3891 2011-03-30
21 죽어야 단 것이…… 첨부 파일
장창수
2498 2011-03-21
20 자연 재난은 경고함으로 회개를 요구한다! 첨부 파일
장창수
2359 2011-03-16
19 모세가 경험한 두 문화 첨부 파일
장창수
2586 2011-03-14
18 문제는 교회의 정치 세력화이다. 첨부 파일
장창수
2492 2011-03-05
17 경기서노회 신흥교회 개발로 위기에 처함
유병도
2859 2011-02-28
16 바보야!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야! 첨부 파일
장창수
2725 2011-02-19
15 교회 개척을 하신다고요? 첨부 파일
장창수
2923 2011-02-11
14 기초를 다시 쌓자! 첨부 파일
장창수
4558 2011-01-21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