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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4:38:48)

(부제: 성경 기록대로 설교하라!)

 

사실(事實: fact)과 의미(意味: meaning)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들은 철학에서 말하는 질료(質料: material)와 형식(型式: form) 또는 틀 사이 관계와 같다.  내용인 질료는 항상 형식이라는 틀의 제한을 받는다.  형식을 통해 질료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의미(질료)도 사실(형식)을 통해 전달된다.

학문 연구의 편리성을 위해 학자들은 때때로 이 둘을 분리시킨다.  이 둘 사이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런 분해와 분석을 통해 의미도 또한 잘게 분석된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논리적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실제로 사실(역사적인 사건)과 의미(교훈적 가르침)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맞물린 톱니 바퀴처럼 그 사이가 유기적(有機的)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실 자체도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사람의 몸은 여러 가지 뼈들과 살 그리고 각종 장기들로 구성된다.  이들 사이 유기적인 관계가 있고 그 덕분에 사람의 생명은 잘 유지된다.  마찬 가지로 인류의 역사, 인간의 삶이나 인생은 어느 한 개념, 주제 또는 관점으로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며 통합적이다.  정치, 사회, 경제와 문화 등등, 이들이 복합적으로 서로 얽혀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자기의 관심 분야에 입각하여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사실 사물의 한 부분만 본 것이다.  시계를 연구한다면서 자신이 관심 갖는 부품 즉 부분만 연구한 셈이다.  부품들로 구성된 시계라는 연구 대상을 놓친다.  이런 분석적인 연구 방법 때문에 물리학은 위기를 만났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과학적 방법이 선호된다.  연구 대상이 부분들의 합임을 비로소 과학자들은 인식했다.  이 부분들의 합은 하나의 조직적 구조(systemic structure)를 형성한다.  당연히 부분들은 이 구조 안에서 서로 유기적이다.  통섭의 방법으로 물리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연구 방법은 학문 간의 경계선을 허물고 서로를 아우르며 과학을 한 단계 높게 발전시켰다.  우선 창의성이 살아났다.  예전 온통 기계 덩어리였던 자동차가 이젠 40% 정도의 전자 부품들로 구성된다.  훨씬 성능이 좋은 자동차 생산이 가능했다.  학문과 기술 사이 경계선이 허물어진 결과이다.  이제 통섭적인 연구 방법이 학계의 대세이다.

 

유기적 성격의 신학과 인문학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의 신학들은 각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자신의 경계선 안에서 학문적 권위를 즐기려 한다.  그러나 실천신학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알려주는 조직신학,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 진리를 연구하는 성경신학 그리고 어떻게 성경 진리가 교회사에 반영되는가를 연구하는 역사신학, 모두의 도움을 요구한다.  성경 본문이 하나의 유기체(有機體)와 같기 때문이다.

 

첫째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적인 사건들이 말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어느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주제(thema)들과 개념(concept)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문장의 구조와 문법의 도움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런 성격의 본문을 통해 저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이 가르침은 복합적이다.  그리고 신앙 삶 자체도 그렇다.  그러므로 신학들 사이 경계선을 허물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계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예수에 대한 논쟁은 역사적 예수와 교리적 예수, 둘로 나뉜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교리적 예수에 그러나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집중한다.  전자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기독론을 정립시키려 한다.  그러나 후자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아래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고자 한다.

교리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는 충돌될 수 없다.  예수님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人間)이기 때문이다.  물론 논리적으로 이 둘을 나누어 연구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적 예수(질료, 내용)가 한 동안 역사적 예수(형식, )에 의해 제한을 받았을 뿐이다.  시계를 부품으로 본다면 시계란 존재는 사라진다.  부분들이 합쳐질 때 비로소 시계는 존재하고 그 목적과 기능도 살아난다.

 

둘째 하나님은 역사와 문화의 옷(사실)을 입혀 자신의 의지와 뜻(의미)을 구체적으로 계시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는 진공 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이나 설교에서 신학적 가르침만으로 불충분하다.  인문학적 관점이 더해져야 한다.  출애굽 사건이 이를 잘 설명한다.

고집스럽게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로 계속 묶어두려 했다.  이의 원인이 둘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4:21, 7:3, 9:12, 10:20, 27, 11:10, 14:4, 8).  다른 한편 바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7:13, 22, 8:19, 9:35, 13:15).  전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신학적 결론이다.  그러나 후자는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결론이다.  그리고 이 원인들이 바로 인문학적이다.

신정정치의 시대 바로는 당시 최강의 제국인 애굽의 왕이면서 동시에 신적 존재였다.  종교적으로 애굽인의 신들이 히브리 노예의 신에게 굴복할 수 없었다(5:2).  정치적으로 애굽의 바로가 노예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5:4-5).  경제적으로 노예인 이스라엘은 두 도시의 건설을 위해 애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이었다(1:11).  그리고 국방 차원에서도 애굽을 지키려면 점점 강성해지는 이스라엘의 세력을 꺾어야 했다(1:10).

이런 인문학적인 요인들이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모세를 대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두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결과였다.  그리고 바로가 그렇게 가도록 하나님은 주인으로서 허용했다.  그러므로 성경이 기록한 두 가지 원인은 모두 맞는다. 이들은 전혀 충돌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허공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론 성경은 인문학적인 요인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문사회과학이 아닌 신학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관심사와 강조점이 다르기에 기록 방식에서 인문사회과학과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고 성경이 인문사회과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창조 기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인간을 창조한 후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 세계에서 살라고 명했다(창1:28절).  이 문화 명령의 목적은 인류가 하나님이 만든 자연을 이용하여 하나님 나라(통치)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창1:26절).  이런 활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라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도 이를 잘 설명한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 것이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영역(인문학)에서 하나님의 통치(신학)가 실현되도록 이스라엘은 노력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세속사는 바로 구속사이다.  

선민의 구속사에도 신학에 근거를 둔 인문사회과학적 활동이 보인다.  신학에 바탕을 둔다면 세상 과학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오히려 유용하다.  유감스럽지만 기독교 교회는 지금까지 신학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신학과 신앙은 반드시 역사(시간)과 문화(공간)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즉 신학과 신앙도 진공(眞空) 상태를 싫어한다.

이 때문에 인류와 사람의 삶과 결별된 신학적 이론도 생명력을 잃는다.  그리고 실천신학 자체도 신앙 삶에 신학을 적용시키는 것을 목표한다.  신학의 존립을 위해서도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은 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자신을 다양하게 계시한다(1:1).  그러므로 성경 연구는 통시적 방법(의미로 본 사실)만 아니라 공시적 방법(사실로 본 의미)도 요구한다.

 

사실로 본 의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이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같은 속도(의미)도 위치(사실)에 따라 다른 속도감을 준다.  시속 60킬로로 달리는 차 안에서 사람들은 항상 그 속도를 느낀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차가 온다면 그 차의 속도를 더한 만큼 빠른 속도감을 갖는다.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면 두 차의 속도 차이만큼만 속도를 느낀다.  그러나 사실 그 자동차는 항상 60킬로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성경의 영원한 진리(의미)는 역사(시간)와 문화(공간)를 달리하며 다르게 설명된다.  구약에선 공의의 하나님이 그러나 신약에선 사랑의 하나님이 보인다.  신구약 사이 하나님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더 강조된 것뿐이다.  그렇다고 다른 속성을 무시하면 절대로 안 된다.

다른 좋은 예가 있다.  공사 현장에서 동료에게 벽돌!이라고 외친다면 벽돌을 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나가는 행인에게 외친다면 그것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동일한 외침(의미)도 어느 곳(사실)이냐에 따라 달리 이해된다.  같은 의미도 장소와 시간을 달리하며 강조점이 변하며 달리 느껴질 수 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율법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 성도들은 은혜 아래 있다.  그렇다고 율법과 은혜 또는 율법과 복음은 서로 충돌하는가?  다음 성구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  절대로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강조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구약의 율법은 앞으로 올 메시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율법은 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대속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이 예수님을 믿는다.  시대를 달리하며 율법과 은혜가 달리 표현되었을 뿐 구원자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데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리고 구약 시대 율법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형식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신약 시대 은혜는 하라!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형식으로 이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다.  사랑하라!는 시대를 초월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며 실천 방법 상 신구약 사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겉으로 보아 대립하는 것 같은 단어들과 표현들이 성경에 많이 있다.  사실 이들은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립적 이분법이 아니라 논리적 이분법에 속하는 짝들이다.  예컨대 믿음과 행함이다.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행함은 믿음에 원인을 두고 나타난 결과이다.  그리고 질료와 형식이라는 관계로도 설명할 수 있다.  믿음이라는 질료가 행함이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된다.  원인과 결과 그리고 질료와 형식, 이들은 대립적이 아닌 논리적인 이분법을 구성한다.

달리 설명된다.  믿음의 결과 새로운 신분을 획득한다(칭의).  그렇다면 그 신분에 걸 맞는 새로운 삶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성화).  즉각적인 영적 변화로 생긴 새로운 신분은 새로운 삶이라는 외적 변화로 서서히 나타난다.  인격과 삶 또는 신분과 직분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믿음과 행함도 마찬 가지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 사이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는 논쟁은 지극히 소모적이다.

 

의미를 제한하는 사실

결국 사실과 의미는 역사(歷史: history)와 논리(論理: logic)로 바뀐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통해 전달되는 신학적인 의미들은 성경에서 무질서하지 않고 정연한 논리 체계를 이룬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은 완전한 통일성을 보여주는 인격체이다.  다만 역사라는 형식이 논리라는 질료를 제한할 뿐이다.

교리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 두 진영으로 나누어진 기독론 논쟁은 아주 유익하다.  그러나 한 쪽에 서서 다른 쪽이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지극히 소모적인 논쟁이 된다.  이 둘 중 어느 한 쪽에 서서 논리적으로 예수님을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무대에서 예수님의 신인성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 기록에서 역사적 사실과 논리적 의미도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 해석에서 아주 중요하다.  성경 해석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경 진리가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알 것을 요구한다.  이를 알아낸다면 두 가지 유익이 따른다.  하나는 성경 본문 자체가 훌륭한 예화가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의미)을 오늘에 적용(사실)하도록 잘 도와준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장식품처럼 걸어놓고 하는 주제 설교와 제목 설교가 유행한다.  성경 본문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은 완전히 무시된다.  그리고 성경 밖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내 설교에 억지로 집어넣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지식을 전한다.  성경 해석이 금하는 감정이입 식 설교이다.  역으로 성경 본문 자체에서 가르침을 끄집어내야 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 두 가지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성경 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 성경 본문이 구속사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이들 작업은 참으로 유익하다.  이로써 설교자에게 설교의 내용, 방향 그리고 목표가 분명해짐으로 자의적(恣意的)이며 주관적(主觀的)인 해석과 설교를 할 수 없다.

이를 위해 문맥과 함께 본문을 깊이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여야 한다.  관찰을 잘 할수록 그 만큼 형상화(形象化) 과정이 용이하며 그 후 추상화(抽象化) 작업도 더욱 쉬워진다.  달리 말한다면 정밀한 관찰 덕분에 구속사적인 무대와 기록 당시 역사와 문화라는 배경 아래 눈을 감고도 본문이 하나의 그림처럼 머리에 형상화된다.  이 때 비로소 설교자는 추상화 작업, 즉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가 쉽게 정해진다.

 

유용한 8단계 구속사

본문이 속한 구속사적 위치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의 구속사를 기록한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은 처음부터 목적한 바를 마지막까지 일관성 있게 구속사를 통해 보여준다.  이 덕분에 성경의 신학적인 가르침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논리적 흐름을 보여준다.  이 구속사에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계시처럼 구속사도 반복하면서 그 내용이 점점 더 풍성해지며 계속 발전한다.

이 덕분에 하나의 긴 구속사를 보다 짧은 단계별 구속사들로 나눌 수 있다.  아래의 8단계 구속사가 그것이다.  단계별 구속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성격, 내용과 논리적인 흐름을 잘 알려주며 성경 본문이 구속사의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 쉽게 알도록 도와준다.

 

1. ①창조 후 아담 ②창조 언약  ③아담의 타락      ④여인의 후손 ⑤실낙원

2. ①실락 후 아담 ②구속 언약  ③셋 후손의 연혼   ④노아        ⑤홍수 심판  

3. ①홍수 후 노아 ②보존 언약  ③니므롯의 바벨탑  ④셈          ⑤흩어진 인류

4. ①아브람 소명  ②약속 언약  ③요셉을 판 형제들 ④유다        ⑤애굽 삶

5. ①모세 소명    ②율법 언약  ③사사 시대   ④룻기의 보아스    ⑤실로 성막 파괴

6. ①사무엘 소명  ②왕권 언약  ③분열 왕국   ④제 2의 다윗     ⑤솔로몬 성전 파괴

7. ①세례 요한    ②성취 언약  ③유다 민족의 거부 ④부활주      ⑤스룹바벨 성전 파괴

8. ①지상 교회  ②완성 언약  ③적그리스도의 활동 ④재림주 ⑤불 심판과 새예루살렘 강하

(*①은 하나님의 시작, ②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언약 체결, ③은 인간의 불순종, ④는 구속주의 약속 그리고 ⑤는 하나님의 심판)

 

예컨대 구약 성경의 룻기는 5단계 구속사에 속한다.  4단계 이하의 유구한 구속사는 이미 전개된 상태로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이다.  그리고 6단계 이상의 구속사는 앞으로 놀랍게 펼쳐질 획기적인 사건들로 구속사를 미리 내다보도록 돕는다.  가까이 본다면 룻기가 속한 5단계 구속사는 출애굽 사건을 배경하며 앞으로 곧 왕정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한다.  좀 더 가까이 본다면 룻기는 사사 시대를 배경하며 이 혼란의 시대는 실로 성막의 파괴로 끝날 것이다. 

이것이 룻기의 구속사적인 배경이다.  그러나 룻기 자체에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따로 있다.  베들레헴에 사는 유다 지파 출신의 엘리멜렉과 모압 여인 룻 그리고 유다 지파에 속하는 보아스, 이들이 배경을 구성한다.  이들에 의해 펼쳐지는 삶(사실)에 의해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신학적인 가르침(의미)이 잘 설명된다.

반면 룻기의 구속사적인 배경은 혼란의 시대인 사사 시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들의 삶이 결국 다윗에 의해 본격적으로 열린 왕정 시대와 긴밀히 연결될 것을 알려준다.  이 때문에 룻기의 기록은 세속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이 점에서 룻기는 구속사와 무관한 세속사와 완전히 구별된다.

룻기가 효도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효도는 신앙에 기반을 두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윤리이다.  그러므로 룻기를 효도 차원에서만 설교한다면 이미 신학적인 가르침을 놓친 것으로 상식적인 설교가 된다.  이런 실수는 룻기가 갖는 구속사적인 배경과 의미를 무시한 데 있다.

 

결론

성경 해석과 설교를 위해 두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늘 익숙한 성경 본문(사실)에서 감추어진 신학적인 가르침(의미)를 찾아내는 훈련과 신학적인 가르침(의미나 주제)을 구체적인 상황(사실)에 연결시켜 설명하는 훈련.  전자가 소재에서 주제를 찾는 능력이라면 후자는 주제를 소재로 연결시키는 능력이다.  달리 말한다면 흔히 아는 것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능력과 귀한 것을 흔히 아는 것으로 바꾸는 능력을 말한다.

이 두 능력을 얻으려면 먼저 사실과 의미 사이의 논리적 이분법을 이해해야 하며 그 다음 성경 본문을 깊이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관찰을 위해 성경 본문을 신학적인 주제들에 따라 논리적으로 분리,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적인 가르침이 어떻게 인문학적인 사실과 연결되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런 분석 후 특정 주제만 설교한다면 그것은 주제 설교이다.  아니다.  본문에 있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이 방법은 창의적인 해석을 하도록 도와준다.  그 다음 해체된 본문을 복원시켜야 한다.  설교의 내용이 성경 본문의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발견된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묵상함으로 내면화시키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이런 과정은 성경 진리를 되씹게 함으로 진리들을 새롭게 또는 더 깊게 깨닫게 하고 진리의 다른 면을 발견토록 돕는다.  이 때 흔히 설교자는 자신의 죄성과 부패성을 더욱 깊이 깨달으며 아픈 신음 소리를 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새롭게 한다.  이런 내면화 과정이 없다면 발견된 진리는 가슴으로 내려가지 못한 체 머리의 지식으로 남는다.

 

바람직한 신학 훈련이 있다.  2년 동안 신학을 공부한 후 나머지 일년 동안 위에서 언급된 성경 본문의 분해와 재조립 방법을 철저히 체득한다.  전공별로 구성된 팀은 이 훈련의 능률을 더 높여준다.  인문계, 이공계 그리고 예술계라는 전공 별로 또는 조직신학, 성경신학 그리고 역사신학이라는 전공별로 팀을 구성한다.  아니면 이 두 분야를 하나로 묶어 팀을 구성한다.  가장 바람직하다.

성경 본문은 인류 역사, 인간 삶 그리고 인간 생명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인문계, 이공계 그리고 예술계라는 세 분야의 관점에서 성경 본문도 관찰되어야 한다.  그리고 조직신학, 성경신학 그리고 역사신학이라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성경 본문 또한 관찰되어야 한다.  관찰 결과를 종합한다면 바로 이것이 통섭적 신학 연구이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과 설교는 어느 특정 주제나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성도들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통섭적인 가르침을 준다.  종래 개별적인 신학 연구 때문에 통섭적인 방법이 지금까지 불가능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종래 방법을 새롭게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개혁은 힘든 노력과 많은 시간을 요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가진 권력과 권세를 분산시킴으로 더욱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 개혁을 위한 목회 개혁이 요한다.  물론 설교의 개혁을 통해 목회의 개혁도 뒤따른다.  이 두 종류의 개혁은 한국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http://blog.naver.com/rassv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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