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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5 (00:51:04)

(소제목: 구원은 이분법을 극복하게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15983490 에서 가져옴 

 

성경의 바벨탑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류가 문명과 문화 면에서 찬란한 금자탑을 세운 후 교만으로 인해 멸망의 과정을 거치는 것 ? 이렇게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동의한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왜 그리 방언들이 많은가 - 이에 대한 원인을 성경의 역사에서 찾아내 해석한다.  이를 믿는 사람들은 물론 적다.

 

위의 두 가지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 이외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는 구속사적인 해석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인문사회과학적인 해석이다.  이 해석들이 바벨탑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줄 것이다.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는 바벨탑

여기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라는 신학적인 용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는 것과 관계된다.  이 점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인류 역사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성경은 인류 역사의 주인도 하나님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인류 구원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류 역사 가운데 일하는 방법이나 그 결과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도 성경의 구속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역사와 무관한 신화(神話)나 전설(傳說)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경의 사건들이 오늘날 현실과 동떨어지게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주와 인류 사회의 실제적인 주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항상 인류 역사 가운데 발생했다.

 

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부합되는 획기적인 사건들만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이 때문에 성경의 사건들이나 본문들을 고립시켜 해석하면 안 된다.  전후 좌우를 살펴 즉 문맥(文脈: context) 을 고려하여 본문(本文: text)을 해석하여야 한다.  성경의 모든 사건들은 서로 유기적(有機的)으로 얽히면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 체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본인의 글 '혼란의 가장 자리' 의 결론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됨)

 

이런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벨탑 사건(칭11장)을 살핀다면 그 앞에 노아 홍수 사건에 관련된 것들이 기록된다(창6-10장).  그리고 바벨탑 사건 뒤에 곧바로 아브람의 소명(창12장)이 기록된다.  그럼 이 세 사건들은 서로 어떤 논리적인 관계를 갖는가?

노아 시대 일어난 홍수 심판으로 아담의 옛 인류는 모두 전멸 당했다(창7:21절).  노아와 그의 식구들만 남았다(창8:15-17절).  그럼 홍수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죄가 관영하며 하나님이 더 이상 인류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창6:5-7절).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노아와 그 식구들만 홍수에서 보존시켜 이들을 통해 새롭게 인류를 이 세상에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결정했다(창6:17-19절).

 

결국 홍수 심판은 이 세상을 재창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담의 후손들인 옛 인류는 이세상에서 사라졌고 노아의 새로운 인류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생명을 부여 받았다면 홍수 심판에서 보호를 받음으로 노아와 그 후손들은 생명을 새롭게 부여 받았다.

 

이 둘 사이 차이가 있지만 같은 면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보존된 노아와 그 아들을 하나님은 또 다시 축복해야 했다.  창조 후 하나님이 아담과 그 후손들을 축복했건 것처럼(창1:28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절)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새로운 인류가 출현했고 번성했다(창10장).  그러나 새로운 인류가 홍수 심판에서 구원해 준 창조주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배반했다.  이들은 홍수 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시날 땅에 바벨탑을 세우려 했다.  그 목적은 이랬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3-4절)

 

새로운 인류는 홍수에서 구원해 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길 거절했다.  그 대신 하늘에 닿을 정도로 아주 높은 탑을 쌓아 인간의 위대성을 하나님 앞에 알리고자 했다.  그렇게 새로운 인류도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이 세상에서 스스로 살 수 있음을 선언하려 했다.

 

이 점에서 노아의 새 인류도 아담의 옛 인류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인류의 악한 도모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창조주 하나님 없이 살려 했던 아담과 그 후손들의 그것과 정확히 동일했다(창3:5절).  이런 배반의 의미를 가진 바벨탑을 쌓음으로 새로운 인류는 또 다시 사단의 굴레 아래 기꺼이 자신을 맡겼다.  인류에게 종교적 중립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하면 인류는 사단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사건들은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 대신 인간의 통치 또는 인간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피조물 인간의 나쁜 의도를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것이었다(창1:26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실현 과정에 있었다.  즉 하나님 나라 신학은 창조 기사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렇게 두 범죄는 내용상 동일하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벨탑 사건은 심각한 의미를 가졌다.  바벨탑을 과학의 바벨탑 같이 상식적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이런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인류는 하나님 앞에 존재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저주하여야 했다. 

 

하나님은 아담을 저주했듯이 새로운 인류를 저주했다.  아담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의 언어를 수많은 언어로 쪼개 흩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함으로 쉽게 단합하여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의 인류는 언어 별로 수많은 부족들로 나뉘었다.  인류는 바벨탑 건설을 중단하고 각 곳으로 흩어졌다(창11:7절).

 

이 후 곧바로 노아의 장남인 셈의 족보가 기록된다(창11:10-32절).  그리고 그 족보는 아브람과 연결된다.  즉 셈의 혈통이 ‘아브람’까지 이어졌다.  이 족보는 원복음(창3:15절)에서 약속한 앞으로 올 메시아의 혈통적인 계통을 잘 보여준다.  결국 셈의 후손인 아브람이 앞으로 올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위해 선택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갈데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지시하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떠나야 했다(창12:1-3절).  이 믿음의 결단 덕분에 그는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  이렇게 타락 즉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구원 약속(창3:15절)은 아브람에게 이어졌다.  바벨탑 사건으로 새로운 인류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나온 불가피한 결과였다.

 

바벨탑 사건 전후(前後) 구속사에서 큰 차이가 발견된다.  이 이전까지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상대하여 자신의 구속사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이 이후부터 하나님은 아브람 개인 삶과 인생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구속사를 재출발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부름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또한 획기적(劃期的)인 사건에 속한다.  향후 그는 구원 받은 신자들의 조상이 될 것이다(갈3:29절).

 

바벨탑을 기점(起點)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선교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전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했다.  그렇게 인류는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에서 한 동안 제외되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석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0-33절)

 

이렇게 본다면 바벨탑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인류가 하나님을 어떻게 배반했는가를 설명하지만 다른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택해 계속 일할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언어의 흩어짐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다른 한편 인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될 것이다.

 

홍수 심판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옛 것을 끝내고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는 이중 결과를 가져온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벨탑 사건은 이런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문사회과학적인 의미를 갖는 바벨탑 사건

구속사적인 관점 못지 않게 인문사회과학적인 관점 또한 중요하다.  이 두 관점으로 바벨탑 사건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균형 있는 성경 해석과 아울러 균형 있는 신앙 삶도 가능할 것이다.

 

바벨탑 사건의 결과 하나의 인류가 언어 별로 그리고 부족 별로 흩어져 이 세상에 살게 되었다.  그럼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인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언어의 흩어짐으로 하나의 인류가 언어 별로 흩어졌다는 단순한 평면적인 사실만으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다름으로 인해 하나의 인류가 전세계로 흩어져 평화롭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해석도 있다.  하나님이 내린 저주 덕분에 인류는 할 수 없이 이 땅 곳곳에 흩어져 살며 하나님이 명했고 인류가 수행해야 할 문화 사명(창1:28절)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고 기독교 교회는 본다.

 

그러나 이것은 한 면만 본 것이다.  즉 다른 면을 보지 못했다.  바벨탑의 저주는 인류 조상 아담이 타락한 결과 받은 저주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 먹었다(창3:6절).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에게 불순종했다.  여기에 신학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실과를 먹음은 앞으로 인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겠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를 세워 살겠다는 것이다.  이 의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창1:26절)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창조주 하나님 없이 자기들끼리 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했다.

 

이 점에서 아담의 타락 사건과 바벨탑 사건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은 인류를 저주했다.  이 저주로 인해 아담의 불순종을 통해 인류가 이미 받은 저주의 강도가 더욱 세졌다.  새로운 인류도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사는 것 즉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를 세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격렬하게 체험하여야 했다.

 

인류가 앞으로 스스로 내리는 선악의 판단은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 방법(思考 方法: way of thinking)에 따라 사는 것을 뜻했다.  선(善)과 악(惡)은 서로 대립적(對立的)이다.  대립적인 이분법에 따라 산다면 인류는 결국 사물(事物)의 한쪽 면으로 늘 치우쳐 살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 인류는 가치와 윤리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 면에서 둘로 나뉘며 적대하게 될 것이다.

 

이미 원복음(창3:15절)이 이를 예언했다.  인류는 종교적 차원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으로 나뉘며 끝없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 다툼에서 상하는 자들이 생기며 인류 사회는 끝 없이 불행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였다.  이 뿐만 아니었다.  뱀의 후손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고 여인의 후손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즉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윤리와 가치 면에서도 서로 나뉘며 분열할 것이다.  선악의 판단들로 인해 한 집단 안에서도 이해 관계를 달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가정 안에서도 이런 분열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이 결과 인류 사회는 분열과 분당으로 인해 안정과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이분법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영원히 이 우주에서 다툴 것이라는 우주적 이원론(二元論)과 그 결과 선과 악도 끝없이 인류 역사 가운데서 다툴 것이라는 윤리적인 이원론을 낳았다.  창조주 하나님만을 믿는 일원론(一元論)을 견지하는 여인의 후손과 우주적 이원론을 견지하는 뱀의 후손 사이 끝 모를 투쟁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 삶의 방식도 전혀 다르다.  전자(前者)는 종말(終末)을 주장하는 선형적(線形的)인 역사관을 그러나 후자(後者)는 우주와 세계의 영원한 순환(循環)을 주장하는 원형적(圓形的)인 역사관을 지지할 것이다.  악한 신도 선한 신처럼 대등하게 인류는 섬길 것이다.  그렇게 죄와 악행도 정당화된다.  그리고 윤리적인 이원론은 체념적인 운명론을 인류 사회에 번지게 만들 것이다.  악이란 존재도 인류 사회에서 운명처럼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 모두 타락의 결과가 얼마나 인류 사회에 해로운지 잘 설명한다.

또 다른 문제는 인간의 선악 판단이 늘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 사회에 불행을 더욱 가중시킨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100%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나 근거도 늘 부정확하고 그 결과 항상 상대적(相對的)이다.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정해져도 인류 사회는 그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缺如)되어 있지만 남들을 판단하며 정죄(定罪)하여야 한다.  그리고 인류는 자신의 판단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의 이런 내재적(內在的)인 불완전함은 선악의 판단을 불완전하게 만들고 그 결과 인류는 늘 불필요하게 불행을 당하며 살아야 한다.

 

바벨탑의 저주는 이런 불행을 더 강화시켰다.  바벨탑 사건 이전 하나의 인류는 윤리와 가치라는 정신적인 면에서 서로 나뉘었지만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의 인류는 언어와 종족 별로 나뉘며 육체적으로도 서로 싸워야 했다.  이들 사이 이해 관계가 더욱 치열해 졌다.  이들이 각각 내세우는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들과 서슴없이 싸우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인류 역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들 부족이나 민족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만든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이 다 다르다.  윤리와 가치 면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이들의 가치나 윤리는 늘 상대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며 양보 없이 싸웠다.  이것이 인류 사회에 더 큰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이 명한 생육과 번성과 땅에 충만이라는 문화 사명(창1:28절)은 이런 인류 사회에 의해 더 이상 수행이 불가능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기 부족(部族)이나 민족의 보존을 위해 민족신을 만들고 그 이름으로 다른 부족들과 성전(聖戰: holy war)을 벌였다.  이 때문에 부족들과 민족들 사이 싸움은 더욱 잔혹해졌다.  오늘날도 이슬람을 반대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족이나 다른 민족을 거침 없이 살인해도 용인되는 이슬람 사회가 이를 잘 증명한다.

 

이런 인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구속사를 위해 어떻게 일할 것인가?  하나님은 많은 민족들 중 하나를 택해 자신의 구속사를 진행시켜야 했다.  그 민족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할 것이다.  이를 위해 아브람이 부름을 받았다(창12:1-3절). 

 

이 선택 때문에 원복음(창3:15절)의 예언처럼 선민 이스라엘은 앞으로 이방인들과 끊임없이 성전(聖戰)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원복음이 예언한 참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를 낳을 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머지 민족들은 서로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거나 막을 것이다.  이 점에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성전은 민족들 간에 벌어지는 전쟁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이를 구별시키기 위해 성경에만 이스라엘의 성전(聖戰)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결론

아담의 불순종과 바벨탑 사건은 모두 창조주와 구원주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叛逆)을 뜻한다.  이 반역의 진정한 내용은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고 인간의 통치를 세우는 것이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숨어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선 사물을 이해하는 통합적인 사고 방식이 가능했지만 인간의 통치 아래선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불가능했다.  이것은 인류 사회가 끊임없이 불행을 당하는 원인과 이유가 되었다.

 

물론 이분법적 사고도 유익한 면은 있다.  한 사물을 대립하는 서로 다른 두 면으로 보게 만든다.  그렇게 사물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죄의 영향으로 인해 두 극단적인 판단들 중 어느 하나에 머물며 자신과 다른 판단을 멀리하고 미워한다.  시간이 지나며 이 둘을 통합한 새로운 판단이 나오지만 어느 새 이 판단 이외 다른 판단을 또 다시 적대시한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관이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러나 한 사물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두 면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이 둘은 논리적으로 분리되지만 실제적(역사적)으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동전의 한 면을 동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 인류 사회는 논리적인 것을 강제로 분리시켜 한 면만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물론 이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를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인간의 다섯 손가락이 이를 잘 설명한다.  손가락들은 같은 손에 속하여 동일한 방향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위치들은 서로 다르다.  자세히 보면 엄지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과 반대되는 위치에 있다.  이 덕분에 손으로 물건을 쉽게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손은 그 기능을 상실한다.

 

창조를 통해 인류 사회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같은 공동체에 속했고 그 구성원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위해 존재했다(창1:26-28절).  타락 이전 인류는 같은 배에 탄 운명 공동체였다.  이들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들 중 몇몇이 반대 편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이들은 모두 살았고 단합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며 인류는 서로를 나누었다.  그리고 달리 보는 사람들을 분리시켜 멀리했다.

 

사실 한 사물을 좀 더 정확하게 보려면 다른 눈들이 필요했다.  한 사물에 다양한 면들이 있다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자신의 처지에 맞게 다르게 보고 판단한다.  서로 다른 판단들은 오히려 사물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달리 설명할 수 있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부분적으로 만지며 다 다르게 코끼리를 설명한다.  틀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많은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진 후 그 부분적인 느낌들을 모아 조립한다면 거의 비슷하게 코끼리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의견들과 판단들은 아주 중요하고 유익하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 따라 언어 별로 나누어진 민족들 사이 이해관계를 위해 서로 싸워야 했다.  인류 사회는 서서히 약육강식의 사회로 바뀌었다(창6:4-5절).  강자(强者)의 판단만이 중요하며 강압적으로 다른 판단들은 무시된다.  이렇게 사물의 극히 작은 부분만 보는 강자에 의해 인류 사회는 다스려졌다.  지도자의 옳은 판단은 인류 사회에 행복을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인류 사회는 함께 고통을 당했다.  이런 통치술이 인류 사회를 오랜 동안 지배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인간 나라의 참 모습이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에 속하는 인류 사회는 달라야 했다.  원복음(창3:15절)이 예언한 대로 앞으로 올 메시아에게로 인류가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복구시킴으로 이분법과 이원론은 극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총을 통해 비로소 인류는 유일한 주권자인 창조주 하나님(롬11:36절)에게도 돌아갈 수 있다. 

 

결국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을 유일한 구원주로 믿게 하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일원론적인 가치와 윤리에 따라 살도록 돕는다.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은 영원히 선하며 의롭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과 행함도 동일하게 언제나 선하고 의롭다.  인간이 보기에 모순된 하나님의 행위와 결정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숨어 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사단이 활동하도록 허용한 기록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목적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사단으로 인해 인류가 타락했다.  그러나 성도는 실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상 복귀시킬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단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위해 일하는 종에 지나지 않음을 믿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사단이 인류를 해하지만 하나님은 그 해악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도록 일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절)  이 성구에 의하면 믿음과 구원의 은총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서 대립적인 이분법은 그 의미를 잃는다.  행복도 불행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둠이 있기에 빛이 더욱 찬란히 빛난다.  고난이 있기에 더욱 구원주를 의지한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모든 것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구원 받은 성도는 대립적인 이원론과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과 바벨탑 사건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하나님의 저주는 오로지 구원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풀어지며 복으로 바뀐다.  이것이 원복음이 약속한 바였다.  성도들은 대립적인 이분법을 논리적인 이분법으로 환원(還元)시키며 사물들을 더 잘 이해한다.  서로 다른 두 면은 같은 사물의 두 면임을 알고 선후(先後)의 개념으로 사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원은 인문사회과학적인 분야에도 반영되어야 한다.  일원론에 근거를 둔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이 이를 돕는다.  그 결과 성도의 삶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사는 사회 전반에 걸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사는 신자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확대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한 성도가 맡아야 할 소금과 빛의 역할이다(마5:13-16절).  역할을 잘 수행할수록 그만큼 더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 사회에 실현된다.  실현 정도가 높을수록 인간 사회는 서서히 에덴 동산처럼 낙원으로 바뀔 것이다.

 

결국 이를 위해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한다.  기독교는 세상 정치와 경제에 직접 참여함으로 세상을 개혁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시민인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도록 양육하여 세상으로 보냄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방법은 바로 복음이다.  복음만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모이도록 돕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복음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인간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 정부를 돕는다.  교회와 정부는 동일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을 위해 서로 달리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바벨탑 사건은 인류가 거부한 것을 하나님이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선교 전략을 택하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첫 조치로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  그러므로 그의 소명은 오늘날 기독교에 큰 가르침을 준다.  구원을 받음으로 성도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의무와 책임을 부여 받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기도문처럼(마6:10절) 이 세상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가에 대해선 구속사와 인문사회과학의 도움으로 이미 살폈다.  구원은 세상 과학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는 결코 세상 나라와 결별되지도 않는다.  다만 구약 시대와 달리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나라가 성도들의 기독교 윤리와 가치관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가운데 세워질 뿐이다.  그 결과 세상 나라는 하나님과 부활주 예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런 최종적인 목적을 위해 성도는 구원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부름과 사명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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