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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19:21:22)

다윗의 간음 사건, 어떻게 볼 것인가?

 

구약 성경의 기록은 너무나 솔직하다.  믿음의 위인들로 존경 받는 인물들의 실수와 잘못이 하나도 숨김 없이 기록된다.  이 점에서 기독교 성경은 허물을 가능한 한 덮어버리려는 다른 종교들의 경전들과 완전히 다르다.  구약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들이 당황하는 이유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거룩한 성경에 기록되지?  믿음의 위인들도 우리와 성정(性情)이 너무나 비슷하구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들도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구원의 반열에 계속 남았다.  하나님의 은총이 강조되도록 이들의 윤리적인 실수와 잘못이 성경에서 크게 부각되어 기록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기록 당시의 문화와 관습에 근거를 두고 이들의 삶과 생활이 기록된다.  예컨대 믿음의 위인들에게 부인들과 첩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세상 문화의 문제를 알지만 이를 막지 않고 허용(許容: tolerance, allowance )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금욕주의는 하나님 앞에 위선(僞善)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약 시대 축첩을 오늘날 그대로 용인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다.  오늘날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는 이미 인류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실수와 잘못은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이들의 실패가 승리에 이를 수 있는 신앙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에서 목회자의 간음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  기독교계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문제는 미국 목회자와 달리 한국 목회자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유교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관습에 젖어있어 존경 받는 지도자와 스승은 완벽해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감이 있어서이다.  이 때문에 한국 목회자들은 자신의 간음 사건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빠져나가려 한다.  이로 인해 교계의 혼란은 더 가중된다. 

이들은 어떻게든지 빠져나가려고 다윗의 간음 사건을 자주 인용한다.  다윗도 간음죄를 범했지만 용서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간음 사건은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리고 목회자의 간음 문제는 하나님이 직접 다룰 문제이므로 신자들은 잠잠해야 한다는 식이다.  아니면 자신은 유혹을 받아 죄를 짓게 되었다고 상대 여성도에게 뒤집어 씌우는 비겁함과 치졸함을 보인다.  목회자답지 않다.  간음은 쌍방간 합의가 없으면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또는 신천지 교회의 전략에 의해 희생 당했다는 식으로 빠져 나가려 한다.  상대가 누구이든지 의지적으로 간음 죄를 범했으면서도 말이다.

목회자들이 자주 인용하며 핑계 되는 다윗의 간음 사건은 신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다윗의 간음 사건은 목회자의 간음 사건을 용인하는 성구인가 라는 황당스러운 질문이 생긴다.  물론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다윗과 오늘날의 목회자를 동일 선상에 놓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과 목회자 사이 동질성과 이질성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간음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함이다.

 

비슷한 점들

다윗(대상11:2, 37:24)도 그리고 목회자(21:15-17, 벧전5:4)도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받는다.  하나님의 양을 치는 사명은 주인인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윗과 목회자 사이 아무 차이도 없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부름을 받았다면 목회자는 지교회의 목자로서 부름을 받는다.  이를 위해 다윗은 이스라엘 앞에서 공식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반면 목회자는 총회의 인준 아래 노회에서 안수례를 받음으로 목사로서 목양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이란 점에서 아무 차이도 없다.

이 둘 사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재미있는 사실은 다윗이 통치에 대성공을 거둔 후 간음죄를 지은 것과 같이 오늘날도 목회에서 크게 성공한 목회자가 간음죄에 빠진다는 것이다.  성공 이후 존경 받는 유명인이 되면 따르는 무리가 생긴다.  이들은 특히 여성도들은 성공한 목회자에 대해 피동적으로 그리고 순종적으로 대한다.  무조건 이들을 존경해야 하며 무엇이나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이들의 마음과 머리에 자리잡기 때문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유혹할 때 그녀가 어떤 저항을 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마찬 가지로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과 목회자와 여신자들 사이 조성된 영적 친근감과 신뢰감은 간음 사건을 용이하게 만든다.  영적 친근감은 쉽게 육적 유혹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목회자가 여성도를 유혹할 때 하나도 저항하지 않는다.  너무나 존경하고 좋아하는 인물인지라 이상한 요구를 해도 선한 뜻이 있겠거니 믿고 응해준다.  이런 이유로 인해 목회자와 여성도 사이 간음은 마치 친부모와 자식 간의 그것과 유사하여 나중 엄청난 죄책감을 수반한다고 전문 상담가는 말한다.

성공한 목회자일수록 자기부정에 약하면 그만 실패자로 드러날 수 있다.  불필요하게 여성도들과 접촉하며 사탕 발림의 말을 목회자가 즐기는 것은 불경건이다.  만남이 불가피하다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만나야 한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원만치 못한 여성도는 존경하는 목회자를 이상적인 남편으로 보고 무조건 추종할 수 있다.  이 때 목회자는 이를 좋아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본능적인 욕정이 신앙의 형태로 감추어져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여성도와의 관계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도, 목회자도 간음 죄를 범했다.  이것이 우리를 혼란케 만든다.  물론 다윗도 목회자와 같이 인간인지라 죄를 지을 수 있다.  다윗이 용서를 받았다면 간음죄를 지은 목회자도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우기는 이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다윗의 간음죄를 불의와 악행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간음죄를 덮으려고 살인죄를 추가시켰다.  이 두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을 무시한 결과라고 나단 선지자는 그를 책망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삼하12:9-10)

마찬 가지로 목회자의 간음죄도 다윗의 간음죄와 같이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심각한 죄악과 악행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하나님 자신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목회자도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속죄하는 과정을 공식적으로 가져야 한다.  기도 중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개인적인 확신만으로 부족하다.  목회자는 교회가 초빙한 공식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점들

지금까지 구약의 다윗과 신약 시대 목회자 사이 동질성에 근거를 두고 간음 문제를 다루었다.  이제부터 다윗과 목회자 사이 이질적인 것들을 살피고자 한다.  엄밀히 살핀다면 이 둘 사이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다윗은 축첩(蓄妾)이 용인된 구약 시대 인물이라면 목회자는 이것이 금지된 신약 시대를 산다.  이 때문에 다윗의 간음 죄는 시대적으로 쉽게 용서될 수 있었지만 목회자의 간음죄는 쉽게 용서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용서를 구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할 목회자가 시대의 문화와 관습을 거슬리는 용감한 무식(無識)을 보이는 꼴이 된다.

문제는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다윗이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의 간음죄 뒤에는 이런 무서운 죄가 숨어있었다.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단을 보내 다윗을 책망한 이유였다.  이 때야 다윗은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자복하고 하나님의 사죄 은총을 구했다. 

그러나 동일한 죄를 지은 오늘날의 목회자는 사죄라는 결과만 주장하지 그 과정을 일부러 생략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목회자가 더 추하게 행동하고 말한다.  그도 간음죄를 짓기까지 신앙 양심을 거역하며 수많은 죄들을 은폐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그에 따른 책임 질 줄 모르는 몰 양심을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더 큰 죄이다.

자세히 살피면 다윗과 목회자 사이 신분상 차이가 또 있다.  다윗은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정치와 경제 면에서 통치자로서 목자(pastor)였다.  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며 종교적인 면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목회자는 한 지역의 교회의 영적 지도자에 불과하다.  자신을 다윗 같은 선상에 놓고 위대한 인물인양 취급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유교의 가부장적인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흔한 착각이다.

세속 통치자보다 영적 지도자가 더욱 금욕주의적이어야 함은 상식이며 만인이 동의하는 바이다.  오늘날도 미국의 빌 클린턴 전대통령의 간음 문제가 보여주듯이 정치 지도자의 간음 문제는 서구 사회에서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 나라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간음은 비교적 철저히 파헤쳐진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세속에 살아야 하는 다윗의 간음 죄는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아야 할 목회자의 그것과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  죄를 지은 목회자가 더더욱 공개적으로 회개하며 속죄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심각한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앞으로 올 메시아의 모형이었다면 목회자는 부활로 인해 만왕의 왕과 만유의 주()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왕권 언약에서 분명해 진다(삼하7).  다시 말해 목회자에게는 다윗 언약 같은 언약이 없다.  목회자는 그 언약에 속하여 언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혜자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윗과 취소 불가능한 왕권 언약을 맺었다.  그 결과 다윗의 왕국은 구약의 모든 예언들과 약속들이 지상적인 요소들로 실현된 성취였다.  그리고 이 성취는 신약 시대 예수님에 의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모습을 미리 예언해 주었다.  이런 언약 체결 후 다윗은 그만 간음죄를 지었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한 후 계속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야 했다.  이를 위해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를 책망했다.  결코 변할 수 없는 왕권 언약에서 나오는 은총에 따라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냈고 그를 책망했다.  이것은 죄를 지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다.  나단의 책망을 통해 이를 깨달은 다윗은 즉시 회개했다.

그러나 목회자가 간음죄를 짓는다면 다윗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총이 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윗과 목회자 사이 구속사적인 사명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부여했다. 이 덕분에 그들의 언행은 실수와 잘못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하고 신약 성경을 기록해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이들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목회자들은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에 근거하여 목양해야 한다.  사도들에게 준 동일한 특별 은총이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맡은 사명 면에서 다윗과 목회자 사이 또는 사도들과 목회자들 사이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간음죄를 오늘날의 목회자가 자신의 간음죄와 동일시하는 것은 무식(無識)의 소치이다.  이런 무지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간음죄를 다윗의 그것과 비교하며 쉬운 용서를 구하는 것도 무식이 낳은 지혜롭지 못한 담대함이다.  이 때문에 목회자가 간음죄를 짓고도 떳떳하게 자신의 사죄를 주장하는 것은 몰양심적이며 하나님 앞에 엄청난 불경건이다.

간음죄를 지은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속죄 은총을 받았다고 확신하며 주장하는 것도 교회를 속이려는 사기죄에 속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선지자를 보내 그를 책망하거나 사죄를 선언하지도 않았다.  회개와 속죄 과정은 교회 앞과 노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인적인 확신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초기에만 가능했던 하나님의 계시가 오늘날도 유효하다고 하는 무식한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와 노회와 총회라는 기구들과 조직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그 결과 기독교 교회에 무질서가 초래되고 더 많은 신자들이 멸망의 길로 인도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개인적인 확신은 비성경적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의 간음 문제가 윤리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논의되거나 토론되었다.  이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고 문제의 해결을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 말씀을 함부로 해석하며 아전인수 격으로 답을 찾아 말한다는 것이다.  잘못 해석한 결과 죄를 지은 목회자들이 오히려 성경 본문을 자신의 간음죄를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사용한다.  이렇게 기독교 교회와 목회자들은 스스로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는 이유이다.

성경 분문과 오늘 시대 사이 차이와 같은 점을 분명히 이해할 때 보다 분명한 성경 해석이 가능하다.  본 글의 내용을 통해 목회자의 간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지만 해결을 주는 답이 있음을 알았다.  앞으로 조금이나마 목회자의 간음죄가 더 줄어들어 교회가 개혁됨으로 한국 사회로부터 다시 신뢰를 회복하길 모든 기독인들은 바랄 것이다.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http://blog.naver.com/rassv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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