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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00:20:19)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3)/창세기 묵상(86)/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3)

기독교 신학이 타락 기사(창3장)로부터 출발한다면 이 세상과 역사에 대해 소극적, 피동적 그리고 비관적이다. 그러나 창조 기사(창1-2장)로부터 시작한다면 반대로 적극적, 능동적 그리고 낙관적이다. 전자의 신학은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그러나 후자의 신학은 현실 참여적 신앙 삶을 각각 제공한다.

전자의 신학이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라면 당연히 지상 삶,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도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교회 안에 머물며 수도원적 신앙 삶을 사는 것이 신앙 삶의 전부가 된다. 교회는 더러운 세상 가운데 유일하게 거룩한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신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적극적 소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예수님은 신앙 삶의 터전이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신자들은 사회의 악과 그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 역할을 해야 하고 악을 몰아내고 선과 의를 모든 곳에 알리는 빛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런 역할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현실 도피적 또는 소극적 신앙 자세는 성경적이지 않다.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신자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 한다. 이를 겨냥하며 피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자기 발전을 위해 신자들은 노력해야 한다. 창세기 1-2장의 신학이 이를 요구한다. 창조 기사가 요구하는 신앙 삶은 근본적으로 4 가지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 하나님과 나, 나와 나의 인격, 나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나와 자연.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5465474 )

이들 관계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하나님과의 보이지 않는 종교적/영적 관계는 나의 인격(심리적), 이웃(윤리적/정치적) 그리고 자연(물질적/경제적)과의 관계들을 통해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창조 신학의 신앙 삶은 종교와 윤리를 절대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웃 사랑 실천은 자연과의 관계도 요구한다.

두 가지 명령으로 구성된 문화 사명(1:28)이 이를 잘 설명한다. 전반부는 인류의 생육, 번성과 땅에 충만을 명한다면 후반부는 자연과 그 가운데 만물의 통치를 명한다. 이 명령을 수행하려면 인간과 자연을 연구해야 한다. 전반부는 인간학(
人間學)에 그러나 후반부는 자연과학에 각각 속한다. 그리고 인간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만나며 사회과학이 나타난다. 전반부의 명령이 목적하는 바는 후반부의 명령을 수행함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창조 기사의 인간론(2:7)은 인간이란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자연에서 나온 산물들에 의존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실존(
實存)이다. 그렇다면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산물들의 분배는 인류의 생육, 번성과 땅에 충만를 결정하는 중대한 사회적 문제이다. 자연의 산물들을 형평성 있게 분배하도록 연구하는 정치, 경제, 사회라는 사회과학이 필요하다.

결국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라는 학문들은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돕는 중요한 방법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 학문 활동의 정신은 바로 사랑이어야 한다. 이런 사랑 실천은 교회 안이나 기도원에만 머물러선 불가능하다.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문제는 타락 기사(3)에 근거를 둔 기독교 신학은 창조 기사에 근거를 둔 신학과 달리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권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신학의 내재적 문제가 기독교 윤리는 물론 과학적 활동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인류의 문화를 구성하는 인문학, 사회학, 자연과학과 윤리가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인류의 모든 활동은 종교적이며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창조 신학은 주장한다.

달리 말한다면 종교적 그리고 윤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 인간 활동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창세기 1-2장은 주장한다. 문화의 근저에 종교가 자리한다는 학자들의 주장은 정확하다. 당연히 그 종교는 창조 기사를 말하는 기독교여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 신학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창세기 1-2장의 신학은 신앙의 중심이 사람의 인격이며 신앙 삶의 터전이 바로 가정과 사회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인류의 활동 무대이다. 물론 이웃 사랑이 활동의 정신과 자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신앙 인격의 성숙을 돕고 가정과 사회에서 신앙 삶을 잘 하도록 신자들을 훈련시켜 보내는 곳이다.

결국 기독교 신학은 윤리학, 인문학, 사회학과 자연과학을 인도하는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 신학은 자기 영역을 확실히 한 후 경계선을 허물고 이들 과학의 도움으로 신학과 윤리의 내용을 넓고 깊게 즉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학은 실천이 없는 신학적 지식으로 끝나며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의 신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바이다. 창세기 3장으로부터 출발하는 기독교 신학은 창세기 1-2장의 신학으로 되돌아가 내재적 문제를 속히 풀어야 한다. 헬라적 사고가 아닌 히브리적 사고만이 이 문제를 해결시켜 준다. 헬라 철학의 잔재를 색출하여 몰아내는 방법 밖에 없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개혁이며 아마 제 2의 종교개혁일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6159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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