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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축복이라는 단어 속에 말씀의 향을 담기를 바라며...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목회자와 신학자의 차이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신학교에 다녔던 집사님이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서 긴장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목회자의 말이라면 항상 믿고 따랐던 집사였기 때문에 100% 이해는 안 되는 것 같았지만, 그동안 쌓아 놓았던 은혜의 힘으로 넘어가는 듯이 보였었다. 하기야 신학에 입문하게 되면 먼저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는 기도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직면하면서 갈등을 하게 된다. 성경에서 축복이라는 단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시기에 하나님께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축복이라는 단어를 너무 남발하고 있는 것을 신학자들의 강의를 통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진리의 사도들처럼 180도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축복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게 되면 잘못 사용하고 있고. 목회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강력하게 부각시켜 난처한 입장이 되게 된다. 목회자들이 과연 복과 축복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의 복과 축복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문제 제기가 맞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세상적인 축복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복을 잘못 사용하여 기복신앙으로 흐르고 있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으로 큰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기복적인 신앙상태와 성도들이 육적인 축복을 구하고 찾고 있는 신앙 양태를 신학자들이 목소리를 내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제기들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 중요한 일이고 좋은 지적이 된다. 신학생들도 문제의 지적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어 한국교회를 위한 마음으로 예민해진다. 그래서 제기되는 문제나 진리에 관한 문제로 충돌이 되게 되면 강력하게 나서서 자기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에 대해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언제나 늘 있어 왔던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상태가 영적으로 어리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외적 신앙의 양태라 열심으로는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내적인 은혜나 영적인 신앙으로는 어린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천국의 복을 육적인 복이나 세상적인 복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같은 신앙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신학생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면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성경적인 관점을 받고 변화되는 모습이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서 활동하는 언어의 힘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문자와 언어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특별히 주신 선물이 된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족속들이 무언으로 약속하여 통용하고 있는 언어와 기호문자들이다. 언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지식의 풍성함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기술과 재능 그리고 부요한 삶이나 능력의 삶이 그냥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요함은 풍성한 지식을 습득함으로 이루어지기에 발버둥 치며 분투노력하여 성과를 내거나 열매 맺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이제는 기독교가 이 시대를 잘 알아야 하고 사람들의 지식수준을 앞서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수천당식의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갈고 닦지 못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되었고 수준이 되고 말았다. 목회자와 신학자는 세상이나 사람들에 비해 지식 부분에서는 상당히 앞서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감사하면서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분야를 발전시키고 개발시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사람만이 만들어 가는 정신적인 분야의 복된 길이다. 그것은 문화인이 되어 앞서게 되는 것이고, 후세를 위해 길을 닦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누구든지 따라갈 수 있는 복된 길이 되는 것이다. 그 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이고 누구를 막론하고 따라가야 하는 약속된 길이 된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축복이라는 단어의 축은 빌 "축"자이고 복은 복 "복"자이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단어는 복을 빈다는 뜻이 된다. 그 뜻을 풀어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빌어 주는 것이고, 위에서 주시는 복을 풍성하게 받기를 빌어주는 마음이다. 그것을 교회에서 목회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해서 성도들에게 축복을 빌어준다면,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풍성한 복을 주시기를 빌어 주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 뜻 그대로 문자적으로 풀어 보면 하나님 위의 신 즉,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 되시는 가상적인 다른 신에게 복을 내려 주시도록 빈다는 뜻이 되고 만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하거나 하나님을 아는 학문으로 복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 얼마나 황당한 뜻인가를 알게 된다. 이렇게 지식의 힘은 큰 것이다. 그래서 룰을 지키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게 되면 엉뚱한 길을 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지식이 높은 사람들에 의해 언어는 발전되어져 왔고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나 문자의 기본적인 틀이나 뜻을 무시하고 바꾸거나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나 신학자가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가 어떠하든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축복 속에 담겨져 있는 기본적인 의미

 

언어의 기본적인 틀을 무시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문자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문자의 기본을 무시하면 무식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오랜 시간 교육을 받고 인간 사회에서 약속된 기호문자의 룰을 지키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문자의 기본적인 약속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호문자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고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 내용과 의미는 문자의 기본적인 내용과 뜻에 대해 먼저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문자의 사용상에서 본래의 뜻이나 기본을 무시하면 안 된다. 성경에 복이라는 단어가 표준 새 번역에 1000여 번 가깝게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축복이라는 단어는 약 66번 정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복이라는 글자는 "복" 복자이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나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것이 복이라는 단어를 문자적으로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축복”이라는 단어는 복을 빈다는 뜻이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축복이라는 단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복을 빌 때 사용하는 말씀으로 나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연약한 성도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축복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는 성경 말씀대로 번역자들이나 성경학자들이 “복”과 “축복”이라는 구별된 단어로 분류를 잘해 놓은 것 같다. 그래서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한테는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무지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일부러 사용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도 있다. 그때 신학적인 관점이 있는 성도나 문자적인 뜻에 예민한 성도가 있다면 분명히 귀에 거슬릴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목회자의 수준이 낮다고 판단하게도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 중에는 본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기는 성도도 있게 된다. 이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다툼이 되어 왔던 한국교회의 문제가 된다. 

  

한국교회가 뒤쳐진 지식의 문제로 세상에 약점으로 잡혀 있다.

 

이제 한국교회와 신학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한국 교회를 정상적으로 본다면, 어린 수준의 교회가 아니고 청년기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세계교회의 역사에 비하면 극히 짧은 한국교회의 역사이지만, 한국교회의 성장은 놀라우리만큼 발전되었고 자라왔다. 그래서 작은 나라에서 한국교회가 부흥되어 이제는 세계선교에서 세계2위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신학계나 세계교회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위상이 높아져 있다. 그런 반면 한국교회가 이 나라에서는 멸시를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실정에 처해 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지적하는 것은 교회 문제라든가 목회자들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지식기반 사회를 넘어 정보 전문화의 시대에 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은 사람들의 죄 성이 간교한 활동으로 자신보다 무식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건건 무시하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지적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무시하고 있기에 교회 문제나 목회자 문제를 들고 질타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본질의 문제는 감추고 본질과는 다른 외적인 문제로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는 항상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이래 많은 발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어 우리가 사용하고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국어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기호문자의 변천사를 통해 살펴보면 무수히도 많은 변화 속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오늘의 글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될 것이다. 이렇게 문자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 노력은 그 시대 상황에 맞추어 문자를 발전시켜 모든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수정하고 고쳤던 것이다. 그 시대마다 사람들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 국어학자나 한글학자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도 많은 언어학자들이 있는데 기독교에 맞게 문자를 발전시켜 사용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좋게 수정할 수가 없어서 그냥 이대로 사용해야 옳은 가이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목회자들이 사용함에 있어서 문자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틀렸다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학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아무리 무식해도 기독교의 신앙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데 하나님 위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교회가 발전하고 성숙하게 되면 목회자의 단편적인 면만을 보지 않게 된다. 목회자가 오랜 시간을 준비한 신학적인 관점과 목회철학적인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본질적인 이 부분은 감추고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면 모르게 된다. 그래서 전문가적인 눈이나 신학적 관점이 없으면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고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야 하고 성경적 관점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순수한 한글로는 빌 축자가 아니라 베풀 축이나 내릴 축으로 사용해야 한다.

 

축은 빌 "축"자이다. 그래서 축복하면 복을 빈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빌어주는 마음이다. 부모가 자식에게나 나라님이 신하에게 복을 빌어주는 단어가 축복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이 다 종교성이 강했다. 우리나라의 고구려 시대는 불교가 왕성한 나라였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유교가 들어와 500년 동안 유교 문화 속에서 살아오게 된 선조들이었다. 그 종교성의 여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영향아래 들어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당연히 문화인이기에 문화를 먹고 살게 되어 있다. 문화는 그 시대에 활발했던 종교문화를 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된다. 그래서 복을 빈다는 것은 문자적이나 철학적인 의미를 넘어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글자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축복과 같은 단어는 특별한 단어이기에 이러한 단어들은 종교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단어라고 하는 특별한 단어에는 그 시대에 왕성했던 종교의 내용이나 의미가 담겨 있게 된다. 문자는 객관적 사실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철학이나 종교적 의미가 콩고물처럼 묻게 되고 담겨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100년이 훨씬 넘은 한국교회가 무속적이거나 불교와 유교의 문화가 담겨 있는 축복이라는 단어 그대로 사용해야 옳은가? 기독교에 맞게 말씀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베풀다, 내리다, 주다라는 동사들을 붙여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이라는 단어는 명사이기에 동사나 다른 품사를 달아 설명해야 분명한 내용이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축복이라는 단어는 똑같은 명사이지만 설명이 담겨 있는 단어이다.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다는 뜻도 기본적으로 담겨 있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단어는 간단명료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목회자들이 축복이라는 단어 사용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에게 더 많은 복을 받게끔 해주고 싶은 사랑의 발로이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더 힘이 들어가고 더 많은 복을 주실 것 같은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은연중에 축복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중시해야 하는 신학자들이지만, 목회자는 성도들 편에 서게 되고 성도들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객관적 중립을 지키기가 어려운 문제임을 통감한다. 그렇다고 심각한 문제가 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증언함에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고 하나님 편에 서야 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이와 마찬가지의 믿음을 가진 자녀들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나 원론적인 문제들이 아니고 적용의 문제인 것이다. 목회자들도 객관적 관점을 준비하기 때문에 객관적 중심에는 흔들림이 없이 지켜 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용면에서는 상대 입장에 서기 때문에 주관적인 적용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학자들이나 학생들이 보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축복이라는 한 글자만이라도 기독교 향기가 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축복이라는 글자는 객관적으로 잘 세워놓아야 적용하는 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아무런 문제없이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약속을 하고 규칙을 세워 놓아야 한다. 그것은 축복이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인 하나님의 복을 담아 놓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축복이라는 단어의 뜻을 수정하는 것은 은혜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야 한국교회에서 은혜롭게 사용할 수 있고 세상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축자를 빌 축자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릴 축으로 발전시켜 사용하는 것이다. 빈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로 위로 향하여 신을 찾아가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것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여 신을 찾아 나선 인류의 발자취가 그려진 종교적인 마음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만나 주심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공동체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찾아오신 말씀의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린다는 의미나 베푸신다는 뜻이나 주신다는 뜻을 꼭 담아놔야 한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던 세상적인 관점의 의미를 위에서 아래로 하나님 중심의 원리로 변화시켜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을 하나님나라의 것으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복을 베푸시거나 내리시는 하나님을 축복이라는 한 단어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래의 빌 “축”자는 지상에서 하늘로 향해 소원하여 비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자라는 기호문자의 뜻이다. 그래서 한자를 진서로 높이는 사람들이야 그대로 사용하기를 바라겠지만, 우리 고유문자인 한글자체에 담겨있는 의미는 위에서 아래로 내린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내리는 것이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은 풍요로움이 담겨있는 글자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베푸시고, 쏟아 부어 주신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영적인 언어감각이 있어서일 것이다. 글자를 자세하게 분석하기보다 대략적으로 간단하게 분석해 보기로 한다. 축이라는 글자에서 “추”와 “ㄱ”가 합해져 있는 글자이다. 추라는 문자는 대표적으로 가을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계절의 중심으로 꼽는다면 가을이다. 왜냐하면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계절인 반면 열매로부터 시작하는 계절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열매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열매란 곧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양식은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양식은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계절의 중심으로 보거나 또는 시작하는 출발로 보게 된다. 그리고 “ㄱ"는 문자는 위에서 아래로 쏟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해를 돋기 위해서 ”ㄴ"이라는 글자는 ㄱ와 반대 모양을 취하고 있다. “ㄴ”는 문자는 안이라는 뜻과 담긴다는 뜻이요, “ㄱ”이라는 문자는 쏟아낸다는 뜻과 붓는다와 내린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축자는 가을을 쏟는 즉 열매가 쏟아지거나 부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는 글자이다.

 

한국교회에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한국 교회가 이 축복이라는 한 글자만이라도 복을 빈다는 뜻에서 복을 주신다는 뜻으로 변경하여 사용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우리의 글이 아닌 한문이 걸어온 문자의 길을 따르던 길에서 바꿨으면 좋겠다. 기독교만의 본질적인 뜻인 하나님의 축복을 가득담은 글자로 변화시켜 사용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축복이라는 글자가 종교적인 의미로 땅에서 시작하는 미완성적인 글이 아니라, 하늘에서 시작하는 하늘의 복이 담긴 글자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한 단어만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베풀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 주시는 뜻으로 사용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멘.

 

목사 박홍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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