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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수
조회 수 : 5140
2012.10.17 (04:37:20)
1. 사도 시대와 초대 교부 시대 이신칭의 신학은 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카도릭 교회는 사람들의 선행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얼마 후 이행득구가 이신칭의를 대신했다. 이후 성자들의 행위들이 복음을 대체했고 이들의 유골들이 신성시되었다. 부패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대신했다. 이것이 중세 유럽 교회의 타락이며 암흑기의 원인이었다.

2. 루터는 이행득구의 잘못을 깨닫고 이신칭의를 다시 주장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루터의 이신칭의는 구원의 방법론에 치우쳤다. 이의 문제를 깨달은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학을 주장했다. 이로써 칼빈은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관심을 바꾸어 놓았다. 칼빈이 루터의 약점과 단점을 보완시켰다.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이신칭의와 달리 영광의 신학은 구원의 목적을 설명해 준다.

3. 구원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답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절) 여기 빛은 무엇인가? 착한 행실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모세의 시내산 율법 같은 역할을 한다. 다만 차이는 후자가 출애굽 사건 후 주어졌다면 전자는 구속 사역의 성취 이전 미리 주어졌다. 그러나 구속 받은 백성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내용 면에선 둘이 동일하다.

4. 구약의 모세 율법이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공통점은 구속을 전제하며 구원과 윤리를 분리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구원은 새로운 신분의 획득이라면 윤리는 새로운 신분에 맞는 삶을 뜻한다. 신분과 그에 맞는 삶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서로 맞지 않는다면 획득된 새로운 신분을 무시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둘을 절대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5. 이사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위선을 이렇게 지적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절) 윤리적 삶이 없이 드려진 예물과 제사는 하나님에게 가증스럽다. 신분과 삶이 일치하여 드리는 예배만 주님이 기뻐하신다(렘7:3-6, 미6:8절).

6. 이를 안 사도 바울도 구원의 방법과 목적을 동시에 설명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절) 9절과 10절을 연결시켜주는 접속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7. 문제는 이분법적 사고에 따라 신분과 윤리를 분리시켜 묵상한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논리적 영역에서 분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적(삶) 영역에서 분리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역사 영역에서 분리될 수 없는 둘이 논리 영역에서 서로 대립된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버린다. 신분과 삶,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있는가? 이런 논리적 오류가 신학적 주제에서도 흔하다.

8. 신분을 규명해 주는 신학적 진리를 먼저 분명히 한 후 나중 윤리적 삶을 주장하자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명쾌하게 신분을 규명한 후 즉시 윤리적 삶을 가르친다. 이사야 시대 이미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았다.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이방 나라와 구별된 삶을 보여줌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증명해야 했다(신4:6절). 그러나 행함이 없는 일방적 신학적 주장은 배타적 인상만 주며 종교간 갈등만 부추긴다. 그러나 신자들의 수준 높은 윤리적 삶은 불신자들과 구별되게 함으로 신학적 주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9. 성경은 구원을 전제하며 즉시 삶을 가르친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신학적 논쟁 자체만 즐긴다. 그리고 신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가르침에는 소홀하다. 이것이 하이퍼 칼빈주의의 문제가 아닌가? 삶과 동떨어진 하나님 신학만 논하는 칼빈주의자들. 기독교 신학의 이런 경향은 19세기부터 세상 과학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학에서 윤리가 분리된 데 있다.

10. 신학과 신앙이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신앙과 윤리도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의 구속 사역 결과 구원 얻은 신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는 진리 논쟁만 일삼는다. 진리만 주장하지 말고 진리에 맞는 삶을 살라! 그렇지 않으면 신학자들은 신학을 전문 지식 분야로 취급하며 학적 권위에 안주하며 세상 명예를 취하려는 세상 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11. 이 점에서 칼빈은 분명히 루터를 앞섰다. 그러나 칼빈이 주장하는 영광의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칼빈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참으로 많다.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만 자랑하려 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칼빈주의는 교회와 신자들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교회를 나누거나 분열시킨다. 이것은 칼빈이 가르치는 영광의 신학은 아니다. 칼빈은 많은 신학자들이 논쟁하길 좋아하는 구원의 방법이 아닌 모든 신자들이 달성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구원의 목적을 더 강조했다.

12. 칼빈주의자라 주장하고 싶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돕는 윤리적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연구하라! 신학적 논쟁은 교회를 분열시킬 수 있지만 윤리적 삶은 교회 밖 세상에서 예수님이 만유의 주임을 선전케 한다. 많은 기독교 인구만 자랑하지 말고 건전한 신학과 아울러 그에 맞는 성경적 윤리도 구체적으로 확립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 발달 장애자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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