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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6 20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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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2 201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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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5 201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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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59 2010-07-23
211 no image 슬퍼하시는 하나님 - 추수감사절(주일) 유감
박인철
5497 2014-11-17
수십 번의 추수감사주일을 지냈다. 해마다 처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지나기도 한다.그런데 최근들어 어느 해는 아예 추수감사절(주일)이 없는 해를 보내기도 했고 추수감사주일이라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추수감사와는 상관이 없는 듯한, 그냥 (일반)감사주일로 보내기도 해보았다. 새시대(?)인 요즘의 이런 현상은 어느 교회라 할 것 없이 보편적인 현상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회들이 추수가 끝난 때로 정하여 추수감사주일로 지켰는데 특별한 추수감사의 개념을 상실하고 이렇게 된 것은 변질이며 과거와 그 과거에 근거하여 내려 온 전통(날자)뿐 아니라 교회와 교회 일들의 매사에 개혁자들에 의하여 수천 수백년 간에 성경에 근거하여 정돈되고 정리되어 세워진 정통성을 상실해가는 정체성 포기로 일반(세속)화, 다원화해 가는 요즘 교회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추수감사절(주일)은 성경에 초실(맥추)절, 수장절을 지키라(지금도 그 때와 똑같이 첫 추수도 하고 연종추수는 저장한다) 함에 근거할 것이며 그 날을 11월 중의 셋째나 넷째 주일로 하는 전통은 대한 예수교(기독교) 교회들이 우리나라의 결실기, 추수기 환경과 미국 추수감사절의 전통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100여년간을 지켜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교회들이 성경의 명을(출23;16)을 무시하고 멋대로 추수감사주일 날짜를 바꾸기도 하면서 추수감사주일이라 하지만 그 내용이 실제로는 추수감사가 아닌 일반 감사축제로 하여 말씀 뿐 아니라 찬양(축제)의 내용도 추수감사, 또는 감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도 한 단순 축제가 되기도 한다. 성경이 명하신 초실절, 수장절과 이 명을 따르는 청교도의 추수감사절은 앞으로 한해동안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할 양식을 거두어 저장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임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우리 모두가 지난 수십 년 간에 그런 초실절 맥추감사와 수장절 추수감사를 명령으로 알고 설교와 감사행사로 지켜오며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성경에는 오히려 성탄절, 부활절 지키라는 명이 없다! 매 主일이 주예수 부활(생명) 기념의 날이기 때문이라면 초실절, 수장절은 특별한 감사의 날로 창조의 날로부터 오늘도 똑같이 천지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심이 성경에 명백하다. 교회들이 너도나도 다 자기 맘대로 하면서 개혁교회라 한다. 하나님이 각별히 축복하여 남겨 주신 땅, 금수강산 이땅은 어느 나라, 어느 지역보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초실 추수, 수장 추수하는 시기가 분명한 나라다. 11월 말로 김장 채소까지도 다 거두며 일년 농사를 저장하여 농사꾼들이 겨울에는 넉넉하고 풍성한 식탁으로 먹고 안식하는 시기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농사를 않는 이들도 온 나라 금수강산 방방곡곡 곳간에 가득 저장하게 하신 오곡과 백과로 앞으로 일 년 동안 우리의 식탁의 음식이 풍성할 것을 보면서 기쁨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추수감사 찬송을 부름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개혁(?)을 부르짖는 교회들이 더 앞장서서 곡식은 물론이고 대다수 가을 과일을 수확하기에도 절대 이른 시기인 소위 우리 민족 중추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주일이라 하며 그냥 먹고 마시는 축제로 만들기도 하며 교회로서의 정통성과 전통을 세상에 맞추어가며 빛을 잃어가는 교회들이 되었다. 성경에 분명하게 알리시고 지시한 것을 단지 전통이라 하며 무시한다. 선대들의 순교신앙의 지혜로 거저 받은 것들을 다 버린다. 참 악하다. 심지어 일부러 추수감사주일을 아예 없애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주기도의 일용할 양식은 육의 양식이라 하면 안 된다. 영의 양식이다 (원어로 성경을 연구하는 어느 평신도신학연구원과 똑같은 말)'라 하며 천지의 주재 하나님을 한갖 유령같은 반쪽의 불완전 존재, 정체불명의 관념의 하느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반쪽은 내가 열심히 해서 성공해서 벌은 것으로 내 식탁에서 풍성히 먹는다. 그렇게 추수감사는 사라지고 그냥감사(막연한 구원감사)만 남는다. 창조를 믿지 않는 신신학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하느님 신앙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이시대에는 이런 자들이 기독교 개혁언론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쉼 없이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교단의 내노라 하며 이름 내려는 신세대들의 실제 목회 현장이다. 이런 곳에는 하나님과 교회 정체성의 파괴만 있을 뿐이다. 수십년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된 이들을 순식간에 자기 교회, 내 것으로 만들려고 서슴없이 하나님도 내 것으로 새로 만든다. "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앞으로 일 년 간의 늘상 감사도 무수한 풍파 중에도 또 한해의 먹을 것들을 풍성히 추수하여 이땅 곳곳의 곳간마다 가득 채워주신 것을 보는 자들이 할 것이다. 늘 (식탁 때마다) 감사 ! 어느 교회의 어제 추수감사주일 오후 축하예배 설교 본문 일부를 소개한다. "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 성도라면 세상의 빛, 敎會라면 그 빛으로 높은 곳에서 세상바다에 비추어 세상을 인도하는 등대!
210 no image 모본적 교회 - 개혁교회 / 정통 장로교회의 분별 기준
박인철
6013 2014-10-23
이 글은 신앙간증의 경우와 같이 사실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평생을 돌이켜 보니 어느 교회의 교인으로 신앙생활 했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구원과 그 구원으로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 나라와 그 구원을 이 땅에서 충족되게 이루어 가는 반열에 동참했는가 하는, 신앙의 본질, 결과와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천주교회나 통일교로는 예수교의 구원이 없다면 그 교회들로는 즉, 그 교회의 교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천주교회 간판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 ‘전능하신하나님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달았어도 그 강단에서 진리가 없는 사랑이나 화평, 기쁨이 말해지고 있다면 그 교회를 통하여는 구원의 길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어느 길에 서 있는가는 구원자의 은혜적 전권이다. 하늘의 전권자께서 누구를 구원하시려 한다면 그를 진리 없는 사랑과 평화(화평), 다원론적 -실체 없는 막연한 하느님 구원을 말하는 천주교, 통일교, 하나님의교회, 급진 신교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걸은 어떤 그런 교회들에서 나오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요즘 세상의 대다수)에게는 본질적으로 종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 즉,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 하니 굳이 어떤 것이 사람이냐 원숭이냐를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가장 흡사한 머리 모양과 어린 아이 정도의 지능, 앞다리와 발을 사람의 팔과 손처럼 사용하는 침팬지를 원숭이류보다는 사람에 가깝다 하여 유인원이라 하는 그들은 어떤 존재가 굳이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지려 않고 그냥 머리가 더 좋고 나쁘거나 또는 몸을 더 잘 쓰고 아니고만 구별한다는 것이다. 이 속사정은 기독교 간판아래 교회를 하지마는 그들 대다수가 결국 예수의 부활이나 전능자의 천지창조를 믿지 않는 부류들도 똑같다는 것이다. 사람이냐 아니냐를 굳이 분별하지 않으려는데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는 더욱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진보 자유주의신학, 해방신학을 기반으로 교회를 하는 자들이 대부분 다 그렇다. 이들이 우리와 다름은 얼굴 생김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 種이 다른 것임인데도 누구도, 스스로 신학자라고 하는 이들까지도 이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기는 태초에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우리가 種(씨)으로서 어떤 것이 사람이냐 아니냐를 분별하는 하는 직감적 분별력을 주셨다. 얼굴과 몸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직감적 분별력은 본능에 주신 진리적 직감의 분별력이다. 시대나 지역 상황에 따라 교회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것이 예수교회냐 아니냐는 강단에서 진리가 선포되며 교회에 그 행함이 있는 교회냐로 직감적으로 분별이 되는 것이다. 평생에 몇 번은 이사를 가거나 또 다른 이유로도 부득이 교회를 옮기기도 한다. 우리 가족이 같이 한번 교회를 옮겨야 했을 때에 가장 가까운 곳에 (칼빈주의에 입각한)개혁적 바른교회, 즉 바른 설교와 행함이 있는가를 기준하여 잠시 살핀 후에 등록하였다. 여기저기 기웃거림이 없이 이 교회로 바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교회를 통하여 나와 내 가족, 자녀들이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으며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에 동참해 왔다. 교회를 옮길 당시에 담임목사에 의해 오실 예수와 오신 예수, 그리고 그의 피의 속죄가 구원의 도리로 강하게 지속적으로 선포되고 있었다. 70년대 말로부터 대한나라에 강하게 몰아부친 미국발 신복음, 여의도발 순복음 성장주의로 교회마다 버스를 경쟁적으로 구입하고(그때 급성장한 교회들 중에 안 그런 교회 있었는가?) 심지어 임차운영까지 하며 전국(?)의 우리교인들을 모셔오기 시합하는 때에 “이사가면 버스타고 이 교회 올 생각 말고 이사 간 곳의 가까운 교회로 가라 ” “집을 두채 갖고 있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집값을 올리는 일이고 집값을 올려 자기가 이익보는 그 액수만큼 집한채 사야 하는 없는 이들을 손해보고 어렵게 하는 것이니 회개하고 살집만 남기고 즉시 처분하라”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다 각기 직분에 따른 (작은)목회자이다” " 예배당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구제, 협력등의 명목으로 사업장화 되면 안된다 - 구체적으로, 삼일 밤등에 지하 교육관 등에서 행하라- 예배당이 공연장, 친교장이 되면 안되는 뜻도) 그리고 위 말씀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담임목사, 당회, 제직회와 교회 전체가 실천하는 모본을 모든 성도가 보며 알았고 그렇게 배우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성장해 왔다. 특히 이 교회를 통해 예수 믿고 인가귀도 되어 대를 잇는 교인들은 교회란 다 이런 줄로 아는 교인들로 굳게 성장해 왔다. (물론 위 내용들에 별 관심도 없는 친목 교인들도 꽤 있다) 주보 앞면에 기재 된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 그냥 구호가 아닌 이 교회 존립의 근간이 되는 실천 과제로 목회 되고 있음을 개혁적 교회를 찾아 이곳에 온 이들이나 이 교회에서 예수 믿고 성장한 성도들이 다 알고 있었다. 나에게도 이 교회가 모본적 교회로, 바른 교회로 지각이 되고 있을 때에 설교등으로 방문한 여러 목사님들이 주저 없이 이 교회는 모범, 모델교회라 하는 말을 들으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받았다. 그리고 사역의 일로 잠시 다른 교회에 봉직할 때에도 복귀 할 날 만을 기다렸다. 예배당에 꽉 차는 주일밤찬양예배, 힘있는 찬송소리, 세례.입교하는 꾸준한 숫자, 세대간 연령대가 균형 있고 또 예배참석 성도의 남녀간 비율이 4.5 : 5.5 정도를 계속 유지(성가대의 남녀비율과 동일) 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 모본 교회의 틀에 나도 일부가 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교회의 특정 사역을 담당하는 동안에 당연히 나도 작은 목회자라는 사명감으로 교회의 목회에 맞추는 것에 집중력을 가졌다. 바른 개혁교회를 찾아 수평 이동해 온 교인들도 있었지마는 ‘교회는 카톨릭 - 공동교회다’ 라는 정신으로 다른 교회에서 온 교인들도 그 경력에 따라 바로 교회의 사역들을 맡기는 목회의 소문을 듣고 바르지 못한 나쁜 생각으로 자기가 속한 교회를 맘에 안든다고 쉽게 떠나 이동해 온 자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교인들은 상당히 재주도 있고 아주 능동(?)적이며 활발하여 어느새 교회의 새 중추 세력들로 자리 잡게까지 되었다. 그러면서 장로들도 된 일부 그 세력은 그룹을 형성하며 미래의 이 교회의 주인의식으로 충만하여 여전히 개척목사님의 목회 중인데도 주일낮, 오후 등에 다른 교회의 소위 열린예배를 순회 참관해 가며 새교회로의 대 변혁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가 오자 ‘나는 평생의 목회를 실패했다’고 선언(?)한 원로인 어느 사업목사와 또 목사의 인간적 겉모습만 보는 또 다른 어느 원로의 강력 추천으로 새 후임목사를 전격적으로 부임케 하여 불과 일년만에 교회를 360도 엎어 놓았다. 오로지 바른교회와 바른생활 교인들로 훈련된 이들은 대책 없이 마치 그냥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이 일들을 보고만 있게 되었으나 결국은 후임자와 그 세속적 세력의 교만이 교단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데까지 이르니 결국은 간섭하시는 하나님께서 노회의 주의 종 된 이들을 통하여 두 번이나 연거푸 이 일들을 정리하여주셨다. 이 교회가 연거푸 어지러운 일을 당할 때에는 이 교회에 남아 있는 정신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으나 위와 같이 개척 초임 목회자에 의해 뿌리 깊게, 확신 있게 심겨져 교회의 주춧돌 같이 된 바른교회 정신은 앞으로도 이 교회를 주님 오실 때까지 대를 이어 이어 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굳건한 주류의 정신으로 건재할 것이다. 생각지도 알지도 못했던 두번의 일을 연거푸 겪으면서 이 교회의 평신도들은 박윤선의 교회헌법 주석을 공부하게까지 되었다. 우리가 어떤 이들의 입은 옷이나 모습은 좀 달라도 금방 건강한 사람임을 아는 것처럼 이 교회가 완벽할 수는 결코 없겠으나 그런대로 제법 건강한 모습의 교회로 자녀, 후손들이 믿고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해야 할 교회로 세우심을 소망하게 하는 교회이다. 이교회와는 좀 다른 모습이었던 예수의 군병과 같이 씩씩한 모습으로 하나님나라를 지켜 나가는 어느 교회. 17년쯤 전이다. 성가대 사역으로 잠시 합동측 어느 교회를 섬기는데 밤7시 찬양예배를 마치고 2차 성가연습을 10시에 마치던 때의 일이다. 소천되신 전임목사님 후임으로 좀 젊은 분이 담임목사로 있을 때였다. 전임목사님은 칼빈주의 정통 신앙, 신학에 입각한 책도 몇권 출간하셨지마는 그야말로 칼 같은 분이어서 교리적으로는 두말할 것도 없고 교인 간의 교제에서도 교회의 직분을 따라 말하는 것 외에는 교회와 성경에 대하여 일체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지 않도록 책에 쓴 내용대로 교인을 훈련시키셨다 하였다. 급작히 소천되시면서, 전임 목사님의 칼같은 훈련에 힘들어 하던 대다수 장로와 직분자들의 의견으로 후임자는 그 교회에 부교역자를 거쳐 간 이 중에서 인품이 가장 온화하였던 이를 기억하여 수소문하여 택하여 세웠다. 신학박사 과정도 하며 누가 보아도 참 드물다고 할 만한 훤칠한 키와 신사적 기품과 온유한 인품의 소유자임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전임목사의 영향인지 서울의 먼 외곽이면서도 교인의 주류가 상당한 지식층이었는데 위 부교역자이었던 이가 새 담임목사로 부임 얼마 후에 부근에 원어로 성경을 연구한다는(전단지) 평신도신학연구원에 이 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등록을 하고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작은 파장이 일게 되었다. 장로 부인이 포함 된 4명이 등록하여 공부하였는데 이들 중 둘은 주일예배 때마다 설교를 영어, 독일어로 동시 번역하여 기록하고 있었다. 장로 부인 외 셋은 성가대원, 대장이며 구역장이며 강단 꽃꽂이 담당 등등으로 출석교인 400여명의 교회에서 한창 나이로 가장 열심 있는 이들로 거의 30년만의 새 교회당 건축을 앞두고 미래의 교회의 기둥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평신도신학연구원에 등록하여 공부하면서 몇 개월이 지나자 한없이 온유하지만 교리에 정통한 담임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사석에서 하는 것들이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참 신사적 인품인 담임목사는 이 사실을 장로들에게서 상세히 보고 받고도 언급 자체를 피하였다. (설교와 행함의 불일치- 당회장 직무유기) 참다못한 장로들(여덟 중 여섯)이 담임목사에게 연이어 강력하게 요구하여 당회 이름으로 그들에게 평신도신학연구원을 자퇴 하도록 권면하였으나 장로 부인만 최종 권면에 돌이키고 나머지는 받지 않으므로 결국 출교조치를 취하고 교회에 공포하여 변두리인 그 지역의 교회들이 다 알게 되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교회는 신천지 등은 얼굴도 비치지 못할 교회로 소문이 자자하며 새 교회당을 잘 건축하였다. 이 교회의 주류된 정신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전임 목사에 의해 십수년간, 장로와 교인들에게 강력하게 전수된 바른신학, 바른교회로 당대에서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정신임이 분명하다. 이 정신의 소유자들이 숫자와 상관없이 이 교회의 참 주류된 자들이다. 이들은 전임 목사님의 생전에 그 훈련에 힘들어 하고 불평을 하였으면서도 이일로 더욱 전임목사를 존귀히 여기는 마음들이 되었으며 급작히 홀로 된 사모와 자녀의 생활, 교육을 전적으로 감당해 나가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교회전통으로 세워졌다.(지금도 내 안에, 내 정신에 그 교회의 감동들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 이런 모본적 교회와 교인들은 무슨 이론 없이 직감적으로 노략자와 / 거짓 선지자와 / 삯군을 분별하도록 훈련되었다. 개혁교회의 제자들로 훈련되었다. 가르친 이들은 세월이 지나며 교회가 커지거나 교회적 여러 상황이 달라지면서 자기 욕심에 그동안의 가르침과 달라지는지 모르겠으나 순종하는 신도로, 어려서부터 배워 익혀 바른교회 신자로서의 체질이 된 이들은 그리 쉽게 그 배운 정신을 놓지 못한다. 후임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쉽게 생각하는 만큼, 그 교회에서의 후임자로서의 목회는 결국 실패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소위 큰교회 목사들은 하나같이 변질되었다. 수십년 간이나 온나라 교회들에 그렇게 영웅목사로 자신을 띄워 놓고는 이제 와서 세상 언론에 대고 “나는 평생의 목회를 실패했다” ....?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합신의 수준. 기준 / 바른교회가 기껏 이런 것이었는가? 분당의 어느 교회 이목사는 수차례나 세상 언론에도 드러나는 독단적인 교회운영 말썽을 내놓고는 갑자기 세상 언론에 대고 회개한다 고 하며 교회에 욕칠을 하더니 또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언론들을 불러 “아직 당회에도 말하지 않은 것인데 나는 교회를 더 이상 키우지 않고 축소하려고 교회의 이런 저런 건물을 팔려고 한다” ......? 자기가 키웠으니 자기 맘대로 판다? 그러면 당회,제직회,교회, 회중은 다 자기의 예속물 ? 하나님의 것은 어디에? 이 사람이 정통장로교단이라는 합동측 교회 담임목사이다. 자기 영웅주의, 자기가 하나님 됨에 함몰된 자임이 분명하다. 이런 것을 우상시 하는 그 교회와 교인은 최소한 바른교회, 바른 교인들은 아니다! 합동측의 많은 여러분들이 이 교회를 정통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말을 전한다.
209 no image <동료목사의 교회폐쇄의 소식을 듣고 >
송아지
5520 2014-10-17
<동료목사의 교회폐쇄의 소식을 듣고 > 6개월에 한번개최되는 노회에 참석을 하고 돌아왔다. 오랜 20년간의 함께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지내왔던 모 동료 목사가 보인질 않는다. 그리고 촬요에 그는 교회의 페쇄신고를 하엿고 또 담임목사직을 사면 청원을 한 기록을 보았다. 감짝 놀랐다. 신학교의 동기이기도 하고 20몇년간 오고 가고 친교를 하였는데 요즘근래 뜸하였던터... 무엇보다 노회에서 신임도 있어 노회장도 역임을 한 분으로 내 아들의 주례까지 부탁했던 친구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성실하게 어떤 모임에도 성실하게 참석하였고 또 누구도 사람을 모나게 대하거나 차별하거나 하지않고 성실하면서 진실하고 인상과 마음이 선하고 좋은 그런 분이었다. 자녀도 특히 딸을 온갖 정성을 다해서 좋은 대학을 뒷바라지 하면서 음악인으로 키워내는 것을 보았고 아들도 총신으로 보내어 목사로 임직할 단계에 있기도 하다. 공부는 몰라도 아들이 목사의 뒤를이어 목화자가 되겟다고 간다는 자체가 사실 쉽지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에서 그는 나보다 휼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충격으로 닥아 온 것이다. 노회의 석상에서도 저으기 충격이 되어 갑론을박 하면서 결국 그 분의 말할 수 없는 고충으로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시찰회가 알고 있었다고 보고했지만 26년이나 된 교회가 문을 닫기까지 이렇게 모르고 있었고 아무런 대책한번 취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려하던 한국교회교계의 무너지는 실상이 현실로 성큼 닥아와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회기에도 이런 비슷한 폐쇠한 교회가 잇었다. 그 목사도 부노회장을 하던중에 그러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당장 전화를 하였다. 그는 항상 맑은 음성으로 태연히 "무능해서 그렇지요" 교회로 있던 상가가 가치가 떨어지고 지역도 점점 노화되고 하는중에 이자돈을 값지 못하고 적체되어 건물이 경매 직전에서 그나마 팔게 되었는데 얼마안되는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도 일을 나가야하는 직장에 걸려있 다고 하였다. 아마 생활고에 어쩔 수 없어서 사모도 목사도 일을 나가고 있는것 같다. 나는 물어 보았다. "목사님 만약 2년간 정도 한달에 40만원정도의 지원이 있었다면 유지될 가능성은 있었을까요?" "그럴 수 있을 것이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아는 목사님에게 말해 보았다. "목사님 병원에서도 죽어가는 사람에게 링거도 맞게하고 피도 수혈하고 재활운동도 시키고하여 살려내는 노력을 하는데 어떻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나의 목회지옆에는 신도시화처럼 아파트가 들어 서면서 몇십억들여 교회를 지어 들어오지만 교인들은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교단 큰교회에서 신축아파트단에 앞에 수억(5억)의 돈을 대어주어 땅을 사주고 목사를 보내어 금방 부흥하는 교회(우리교단)도 있다. 그것도 부흥이인지 모른다. 그러나 줏어 담기식의 부흥은 부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미가 새끼는 낳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기업발상적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이제는 빈사상태에 있는기존 교회들을 수혈하여 살리는 일이다. 그런 미자림 교회가 전국에 7-80%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신학교화 신학생 목사들은 차고 넘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교회는 폐쇠중에 있는 교회 경매로 도는 매물로 나오는 건물들이 줄을잇고 있는데 왜 건물을 또 짓고 옆교회옆에 또 교회를 세우고 있는가? 교회숫자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있는 교회가 부흥하도록 도와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부실기업은 없애고 살릴기업 살리듯이.... 다이어트를 해야한다. 귀한 헌금이 이자돈으로 너무도 많이나가고 잇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없이 가슴을 앓으면서 목사는 단상에 엎드려 온식구가 밀려오는 먹장구름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지 않을까? 빈사상태로 죽어가는 교회가 얼마일까? 나는 민족복음화 를 외치던 때가 엇그제같은데 가슴이 아려 온다. 아니 눈물이 날지경이고 나의 목회후반기에 이런 시대를 보고 마감하려니 너무도 슬프고 화가난다.. 이제 곧 교회는 아무리 외쳐도 지옥천국을 외쳐도 있는교인들이 떠나 갔으면 갔지 들어 오지않는다. 뿐아니라 자생으로 주일학교도 청년도 늘어나지 않는다. 노인만 남는 노쇠하고 줄어드는 교회는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때이다. 이런 저런 온갖 전도방법을 쓰보지만 약발은 더이상 듣지 않는다. 그 이유도 자명하다. 교회가 신뢰를 잃고 소금과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소리치지 말아야한다. 이제는 조용히 관계전도를 하면서 신뢰 프로세스를 전국적으로 실시해야 모두가 산다. 나는 사실 6년전에 교통사고도 사고이지만 이런 분위기가 올 것이라는 예견도 하였기에 가장 낮은곳 가장 잃은 양이 많은 곳, 어두운 곳 ,낮은 곳에 내려가서 목회를 하자는 사명을 가지고 늦게나마 "홈리스 극빈 구제 선교 목회"를 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하라는 분명한 싸인이 있기도 하였다. 작은 반딧불이라도 되기를 바라고 잇다. 어쨌던 나는 친구요 동료목사인 사람좋은 목사의 이 사실을 보면서 사람이 좋다고 되는 것도 아닌가? 착하고 경건하다고 되는것도 신학을 성경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것도 아니고 열정만가지고 오직 믿음이것으로 다 되는것인가? 어떤이는 경영법성공법을 도입하여 부흥만하면 된다고 하는 자도 있다. 인테리어 마케팅목회가 제일 잘되는 시대인가? 돈만 잇으면 되는가? 아니면...무엇이 문제인가? 개인인가. 시대의 희생인가?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 귀를 더 기울여야 할 때이다. 남이야 죽던 말던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목사는 주님이 책망하실 것이다. 여기에 노회와 연회의 협력목회 연대책임의식도 가져야한다. 한돌 한돌이 빠지면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208 no image 온 우주 격변의 예고자(단 10장)
이상록
4534 2014-09-28
우주 공상 과학 영화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화는 괴이하며 공포스런 장면으로 가득차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우주의 미래는 희망과 웃음 보다는 비관과 암울한 상황들이다. 다니엘도 장차 일어날 대격변들을 파노라마로 훑어 보고는 낙담하고 아연실색하며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혼돈스런 미래 상황을 알리섰을까? ​ ​본문은 장차 발생할 인간의 위기 세상과 신앙 세계의 대격변을 알린다. 지식과 정보를 알리시는 성품을 지니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자신의 일을 알리시지 않고는 행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행적을 분멍히 전달하시므로 자신이 지혜롭고 불변하신 진정한 신이심을 증거하신다. 나약한 인간을 만나시며 찾으셔서 교제하는 진정한 파트너가 있기에 사람들은 행복하다. 신자와 관련된 상황들을 소상히 알고 계시며 그 일들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조정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세상 정세와 교회 상황들을 알리신다. 구원주의 신분과 활동 특성을 공포하셔서 사람들이 신뢰하고 믿게끔 하신다. 1. 미래의 대격변 다니엘은 예루살렴 성이 중건되고 바벨론 포로 시대가 끝나면 구약의 종교가 재건되며 새로운 평화 시대가 도래하리라고 기대한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수난이 끝나지 않을 것 임을 알리신다. 또한 하나님의 관심사가 이스라엘의 미래에 제한되지 않고 온 우주의 장래임을 교훈하신다. 특히 구원주가 직접 세상에 오셔도 세상의 적개심과 심한 갈등이 종식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혼돈 중에도 하나님의 사역은 지속된다고 알리시면서 신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준비, 믿음의 각성을 주신다 ​ ​ 븐문에서 다니엘의 관심사와 연관된 정보들을 하나님이 제공하신다. 다니엘은 포로 신세로 전락한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 고심하였다. 이 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정보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를 넘어 근동 지역 정세와 온 세계의 모든 역사를 포괄하는 거대한 플랜이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방대하며 위대하다. 자신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을 온 역사를 통해 드러내신다. 온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관리, 통치하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상 경영 정황을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알리신다. 이 상황들은 다니엘 뿐 아니라 이사야서 후반부, 에스겔서, 스가랴서에서 전하고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그리고 디모데 후서와 데살로니가 후서, 베드로 후서, 요한 계시록에서 전한다. 이 계시들은 일관되게 유기적 통일성 있게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와 영적 세계를 주도하심을 알린다. 다니엘은 바라보고 예언할 뿐 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실행하신다. 인간들은 듣고 보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수행 능력이 없다. 종말 계시 전달의 목적은 창조주 이시며 통치자인 하나님께서 어떤 시대에서도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상황들을 살피시며 관할하심을 알리는 데 있다. 세상을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바사군의 방해를 무릎쓰고 미가엘의 도움으로 인자가 오셨다는 언급은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과 믿음 세계를 주관하심을 달린다. 평화나 전쟁이든, 구원이나 심판을 절대 군왕이나 강대국이 주관할 수 없다. 지금은 인간 지식과 지혜가 발전하여서 세계의 불행과 격변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예방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부심은 우발적 사건과 자연 재앙과 잇달은 전쟁과 무자비한 폭력과 교묘한 술수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다니엘이 절망한 이유는 자신이 도저히 손댈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정치 사건들과 믿음의 위기 상황들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2. 상징 내용 ; 우리 시대의 특징 본문의 상징은 다니엘 시대에서 예수님의 초림, 그리고 세상 종말과 재림 시기에 발생할 사건들의 묘사이다. 본문의 내용은 BC 2 세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 성전을 모독하던 시대 정황과 예수님의 도래 시기, 더 나아가 세상 끝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고도 포함한다. 신자들이 시기마다 정쟁과 갈등들의 회오리에 휘말려 고통당함을 알린다. 믿음을 유지하기 힘들며 은혜 받기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세상 역사의 수레바퀴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전쟁과 난리가 잇달아 발생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며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설명하셨다. 바울은 믿음이 식고 재물 옥심이 많으며 저마다 자기를 사랑하는 암흑 시대를 예고했으며 사도 요한은 괴물 용과 독재자, 폭군들과 악한 영들이 교회를 핍박하는 저주스런 시대 상황을 알렸다. 특히 요한이 계 11~13 장에서 집중적으로 예언한 한 때, 두 때, 반 때와 1260일 예고는 단 12장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언급한다. 이 시대는 종말 시기인데 위정자들과 사람들의 폭력, 배신. 잔인, 무력함, 무계획, 무절제, 무통제 상황들과 하나님 구원 사역의 의외성, 필연성, 확실성이 대조된다. 하나님은 불변하게 자신의 구원 사역을 계속 수행하시지만 인간들이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무시하기에 구원읜 의외의 사건으로 돌빌적인 현상으로 이해된다. 3. 위기 시대의 위로자 본문의 묵시는 상징 문학 형태로 전달되었다. 알기 쉬운 일반 문장이 아니라 해석하기가 난해하고 까다로운 환상과 꿈으로 구성된 문체이다. 이와달리 예수님은 비유 형식을 사용하셨다. 비유가 상징보다는 내용도 쉽고 이해하기도 용이하다. 이런 차이는 전달자의 차이에 기인한다. 예언자들은 인간으로서 지식, 지혜가 부족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모두 이해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초등학생에게 대학 전공자의 지식을 기대할 수 없듯이. 하지만 예수님은 신으로서 모든 상황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셨으며 사건의 조정 방향도 바꿀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모든 지식을 아시며 파트너인 인간들의 마음과 반응도 헤아릴 수 있기에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상황마다 좀더 사실에 가깝고 정확한 정보를 주셨다. 예언자들이 상징을 사용한 이유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전달받은 계시 내용을 수용할 만큼 믿음 지식도 크지 못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상징을 통해 계시하신 이유는 미래 흔적의 예고를 통해 신자들을 준비시키는 데 있다. 신자들은 계시받은 모든 지식을 이해할 수 없지만 구원 사역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헤아릴 길 없는 사건들 가운데서도 구원 사역은 진행되니 너무 염려하거나 겁먹지 말고 살아야 한다. 인자가 절망하고 체념한 다니엘을 여러 차례 위로했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자로 다가오신다. 세상살이에 지치며 불신 세력에 둘러쌓여 신음하는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주신다. http://blog.naver.com/sangrlee
207 no image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
김대웅
4787 2014-09-26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 딤전 3:15 오늘의 말씀은, 교회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 주며, 목회자의 책임과 사명을 알려 주고, 성도의 신앙생활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1.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집이다. 흔히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거나 축사, 권면을 할 때 ‘하나님의 집’을 예배당에 연결시켜 오용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예배당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다. 입당이나 헌당을 할 때, 예배당이라고 하지 않고 성전이라고 하며 이 성전이 곧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을 들은 교인들은 대개 다 분별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독교 선교 역사 130년이 되었음에도 이 부분이 수정되지 않고 오용, 남용되고 있다. 건물을 성전이라고 고집하니 여기에서 크게 몇 가지 폐단이 일어난다. ➀예수님을 영접한 성도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 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강력한 선포이다. 미지근한 설득이 아니다. 성도의 몸이 성전이므로 성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통해 더욱 거룩해져야 한다. 건물을 성전이라고 강조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의 의미를 오해하게 만든다. 성도들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온전한 삶에 대한 추구와 애착을 그만큼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고차원적인 교회관이 정립 되지 못하고 성전 자체만을 중요시 했던 구약 백성들 같은 경향을 보이게 된다. ➁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의 먹 보다 검은 죄, 주홍 같이 붉은 더러운 죄를 사해 주신, 보혈의 공로, 구속의 풍성한 은혜가 묻히게 된다. 구약의 성전에서 짐승 잡아 각을 떠서 번제단에서 태워 올리고 피를 뿌렸던 그 제사가 십자가에서 끝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지고 몸이 번제물이 되어 우리가 사죄의 은총을 입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성전제사, 짐승의 피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의미가 바로 성도의 몸을 성전이라고 한 말씀 안에 있다. 우리 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가 재현 되었다는 말이다. ➂오순절에 성령님이 불같이 바람같이 강림하셔서 내주 하시는 복음 시대의 영광스러움이 드러나지 않게 된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던 예수님, 벳세다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시던 주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던 주 예수님, 골고다를 향하여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우리 주님, 비틀거리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몇 걸음 가시다가 또 쓰러지신 주님, 마지막 십자가에 높이 달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시던 예수님, “다 이루었다.” 외치시던 주님,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 그 예수님은 지금 우리 곁에 안 계시니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외롭다. 두렵다. 무기력하다. 소망이 없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바로 그 분의 영,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보혜사로 계신다. “이제는 다시 떠나지 않으신다.” 약속 하시며 우리 안에 계신다. 그래서 성도의 몸을 바로 그 성령님을 모셨다 해서 성전이라 한다.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는 개념은 신비하고 신령하며, 영광스러운 것이다. 어떻게 낮고 천한 인간의 몸에 하나님을 모신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은혜 중의 은혜요 복 중의 복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아무리 귀하다고 강조해도, 흔히 말하는 ‘만물의 영장’ 정도 이상은 말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모신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그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건물을 성전이라고 고집함으로써 이와 같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선포가 약화될 뿐 아니라 희미해진다. ➃건물을 성전이라고 고집하니 아직도 참 성전 된 제 몸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 몸을 제 맘대로 해도 된 줄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종종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 십일조 생활, QT를 비롯한 제자 훈련까지 하고, 교회 활동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한 것처럼 보였던 기독 청년들이 마치 헌신짝을 버리듯이 목숨을 버린다. 수십 년 교회 생활을 하고 교회 중직을 맡았던 중직자 들이 자살한다. 최근에도 모 대형교회 재정을 오랫동안 총괄했던 재정 장로님이 자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존귀한 ‘그의 집’ 교회를 다스리는 사명을 맡겨주신 청지기들이다. 가장이 가족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다면 매사에 신중히 주의를 기울이며, 원만하고 성실하게 책임을 감당하기 원한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밤낮 없이 가족을 보살피느라 초조하고 분주하게 일한다. 사람들에게도 그 정도의 관심을 가져야 된다면 하물며 하나님께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리켜 그의 집으로 부르는 이유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어 자녀 삼으시고 친히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이다. 2.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이 진리는 무슨 진리인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구속의 진리이다. 이 진리보다 더 거룩하고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없다.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 동원된다 해도 하나님의 진리, 지혜의 가치와 비교하지 못한다. 이 하나님의 진리, 지혜는 오늘날 교회의 정상적인 사명 감당으로 보존 된다. 따라서 그처럼 측량할 수 없는 존귀한 보화를 간직한 교회, 목회자와 성도의 책임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교회가 그 의미의 위대함을 바로 알고 신실하게 경외감을 가지고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가 그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세상의 빛이요, 인간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영광인 본래의 사명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경성해야 한다. 자다가 깨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교회가 진리의 기둥인 것은 그 사역을 통해 진리가 보존되고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구원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천사들에게도 맡기지 않으셨다. 목사와 성도로 구성 되어 있는 교회에 이 일을 맡기셨다. 여기에 교회의 위대함과 존귀함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주님을 영접한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➀교육하고 ➁격려하며 ➂힘을 주어 ➃사명을 잘 감당 하도록 해야 한다. ➄영화로운 자리까지 이르도록 힘쓰고 애써야 한다. 교회가 힘 있게 사명 감당 하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전하고 가르치고, 생명들을 이 진리로 살려내는 거룩한 일은 쉼 없이 진행 되어야 한다. 교회가 복음에 대한 정상적이며 정당한 교육을 하고, 전도를 통해서 진리가 흑암의 세력에 묻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신, 이단, 사이비가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마치 알곡을 잘 관리하여 가꾸지 않으면 잡초만 우거진 것과 같다. 하나님의 진리를 높히고 명백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집으로서, 진리의 기둥과 터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교회들이 반드시 되어야만 한다.
206 no image 지도자의 부패가 주는 교훈(삿 13장)
이상록
3995 2014-08-30
본문을 살펴보면 무려 40 년 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식민지였다. 블레셋과 사사건건 갈등이 일어나고 삼손 등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비분강개했을 것이다. 모든 생활에서 감시가 심해지자 삼손은 블레셋 여성과 혼인하며 대항할 틈을 노린 듯하다. 이런 의도를 하나님이 인정하섰나? 1, 미인계 본문의 흐름이 매우 산만하다. 시대가 무질서한 혼란상을 그대로 알린다...중략... 그러나 삼손이 톡톡이 대가를 지불했듯이 불신자와의 결혼은 심각한 불안과 갈등을 초래한다. 믿는 사람끼리의 결혼에서도 잦은 갈등을 피할 수 없다. 하물며 마음 바탕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합은 가시밭길이다. 삼손 역시 개인적으로 불행을 자초하고 신앙 공동체를 구하려는 사명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다. 결혼이든 사회 생활이든 육적인 조건이나 기준을 만남과 선택의 기초로 삼지 말아야 한다. 삼손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첫 교훈이다. 물질 숭배와 세상 정신에 물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이다. 2. 전방위 비상 구원 사역 하나님은 삼손의 이런 비신앙적이며 부도덕하고 지탄받는 상황도 사용하셨다.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라는 표현은 삼손이 원하지 않을 때 계획하지 못한 상황에서 주의 능력이 갑자기 임했음을 알린다. 미력한 개인에게 사명을 주신 특수한 사례이다. 하나님은 종종 인간의 예상을 벗어나서 은혜의 샘물을 여신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 상황이 아니어도 하나님은 자신의 권세를 드러내신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죄수, 탕자, 기생들을 통해 거룩한 계획을 실천하신다. 육신의 정욕에 물든 삼손을 이십 년 동안 사사, 믿음 공동체의 지도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선택은 비상 수단이었다. 불행에 빠진 자신의 백성을 구하려는 특심한 열정으로 하나님은 불신 세력도 사용할 수 있고 돌이나 자연계도 이용할 수 있다. 믿는 공동체를 보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삼손의 불같은 다혈질도 사용하셨다. 삼손 사생활의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내신 뜻은 하나님이 언제나 교회를 보호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앙 공동체의 수난과 고통을 애처럽게 여기시고 때가 찰 때 반드시 구원하신다. 다만 삼손은 한 때 공동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손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언제나 모든 지도자가 삼손과 동일한 상황일 수 없다. 삼손은 당시 신앙 공동체가 얼마나 타락했으며 지도자의 신앙 앙심이 어느 수준까지 마비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주변의 온갖 사신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에게는 부패했던 삼손의 역할도 감지덕지한 것이었다. 언제나 타락한 평신도와 지도자의 부패는 정비례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을 받았다(고전 3장). 이스라엘과 지도자인 삼손이 좀 더 경건하고 더욱 순결을 유지했으면 유래없이 길었던 고난의 시간과 고통의 심도가 훨씬 감소했을 것이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교계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대단한데 연일 재정, 이성, 불법, 독선, 이단 연루 문제가 세상 매스컴의 이슈가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황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에서 보여준 그의 청빈과 신앙 양심이 모든 교인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녕 삼손과 같은 지도자를 원하고 그런 정도의 인물에 만족해야 하는가? http://blog.naver.com/sangrlee 
205 no image 예배학적 측면에서의 교회 안에서의 음악
박인철
3871 2014-08-23
성가대방 토론의 글 - 오 이기쁨님처럼 오랫동안 교회와 성가대를 섬겨오신 분들은 나름대로 예배학적인 조예가 깊으시라고 생각됩니다. 저의 입장에서 그동안 배우며 연구하며 가지게 된 생각을 간략하게 해보겠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속죄제,속건제는 제외) 먼저 나팔소리를 울리고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먼저 하늘로부터 나팔소리가 울려나고 직접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말씀의 시작 전에는 물론, 말씀이 계속되는 내내 나팔소리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봉독 - 성가대 찬양 - 설교 /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는 - 나타나시는 - 하나님 ) 회막예배(제사)에서 정착하여 국가를 세우고 다윗을 통하여 성전예배가 30년간 준비되면서 성가대와 악단의 대원은 레위인으로만 어려서부터 훈련을 시켰지요. 드디어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제일 먼저 성가대와 악단의 찬양가운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므로 제사를 순서대로 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찬양예배가 되었지요. 다윗은 성가대 석을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오는 성전제단의 동편에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제단에 관하여는 에스겔서등 여러 곳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성전(실내 회당) 예배의 모범입니다. 구약이나 율법은 폐기가 아니라 신약으로 완성되는 것임은 우리가 다 아는데 요즘의 목회자들이 구약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예배에서의 성가대의 역할도 무시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예배당을 지으면 좁아도 성가대석부터 마련하면 자연히 대원이 생기고 성가대가 시작되었었지요. 힘든 성가대를 만들거나 유지하지 않고 쉬운 찬양팀으로 예배를 때우려는 것이 요즘 목회자들의 일반적인 행태인 것 같습니다. 구약에 제사 때에나 예배에는 노래로만 찬양을 하였지 춤을 추거나 박수치며 찬양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찬양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복합적 의미로 씌여지는데 찬송부르기, 박수, 춤 등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서는 성가대, 또는 찬양가대가 노래 찬양만 하는 것이 성경의 정통이지요. 찬양대, 또는 찬양단, 찬양팀이라 하면서 율동이나 춤을 추는 것은 예배찬양이라 할 수 없지요.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주일학교나 유치부에서 조차도 예배찬송을 부를 때에는 어떤 율동도 안했습니다. 찬양팀으로 대체하면서 노래하다가 팔을 흔들며, 흥분하면 몸도 흔들어 가며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예배와는 상관 없는 행위이지요. 요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를 사람들의 문화축제로 만들면서 사람들끼리 즐기는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사람의 문화놀음예배 로 만드는 것이 현대 신세대 목회자들에 의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제가 나름대로 분석하는 요즘 교회들의 예배와 성가에 대한 분석입니다. 최근의 어느 보수교단의 교회는 그동안의 敎會라는 성경의 번역은 잘못된 것이고 交會가 맞다고 공식 선언하고 예배란 공동체의 문화축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속 교단이 그 交會의 치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다들 비슷한 생각이라 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4 교황의 방한을 본 후기 파일
송은근
3850 2014-08-21
교황의 방한을 본 후기 4박5일간 의 교황의 방문 내한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국내모든 것의 중심서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잠시 우리의 걸음을멈추고 그의 온화한 얼굴의 미소와 사제복의 경건함과 거룩함의 모습과 여유있는 모습은 이 속세의 복잡함과 진흙탕에서의 난투와 같은 세상을 잠시나마 멈추게하고 훈풍을 불어넣는 역활을 하였다. 온 백성이 마치 정치의 이전투쟁, 종교의 이질적인 난맥의 소리들, 경제적인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잠재우며 온 국민이 구세주를 기다림으로 손을 뻗어 무엇을 갈구하는 기원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교황의 방문을 보면서 개신교회의 목사로서 편견없는 감정을 적어 보려한다. 첫째로 전체를 끌어 안으려는 통합의 힘을 강하게 보여 주었다. 이 사회는 분열의 난맥상이 얽히고 설켜있다. 모두가 이기심과 질투와 미움 분열과 분쟁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의 분열과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평화를 강조하고 전쟁을 쉬게하고 형제의 하나됨을 강조할 때 감동을 아니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은 뭣보다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갈등하고 또 종교적으로 얼마난 피가 터지게 싸우고 있는가? 그런 상황에서 종교적인 통합을 주장하고 끌어 안으려는 모습을 세상사람들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은 어찌되었던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기도 하고 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나의 신이 한 종교로 한 민족형제 한 인류로 형제공동체연합을 추구하고 나아가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이상과 뜻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분열을 거듭하는 모습은 반대급부로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고 카토릭종교가 더 성숙하고 좋은 종교라는개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는 이런 점을 배워야한다. 우리는 분쟁과 타툼을 세상에 예사로 노출시키는 어리석음으로 지탄을 받고 애써 전도하고 키운 양무리들을 떠나고(빼았기고) 있지는 않는가? 아마 역사의 깊이가 아직 얕아서 소아기적 수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태생적으로 교리의 잘못일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사랑의 부족일까?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가 되자는 카토릭교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전인류와 전 교회를 끌어안으려는 최대의 바티칸의 교회가 자신의 정통성고 우월성을 전재하에서 개신교와 타종교를 끌어 안으려는 노력은 무위에 그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주전 607년경 카토릭의 교황권 수장설의 교리와 로마제국에서의 정치와 연합하면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라는 종교안으로 모우기 위해서 뿌리깊은 바벨종교의 여러 형태를 받아들여서 통합하려하여 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 이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하는 유일신경배는 쇠퇴하고 태양신을 받아들이고 마리아 숭상과 교황숭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진리는 음녀의 종교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통합과 평화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는 순수성을 찾아 통합보다 새로운 진리를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이 더욱 옳은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끊임없는 대화와 동시에 연합하려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더욱 지키고 승화하되 모든 세상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되려고 하는 노력은 멈추어선 안될 것이다. 둘째로 가난하고 낮은자 소외된자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번에 교황은 집중적으로 탈북민, 세월호 참사를 당한 사람, 이주민 자들. 정신대 할머니들 이런 사회적 약자인 어려운 자들을 끌어 안는 일에 집중하였다. 이런 일, 이런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교에 있어서나 전도에서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접근하기 좋은 방법은 바로 낮은 자 섬김의 방법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제 식민지에서나 건국초기에서 보여준 선교사에서 이런 선교방식은 세계유래가 없는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갈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자들은 이 사회 저변에 언제나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에 그런 사람들이 또다시 일어나서 상층위로 올라가고 역사의 순환을 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다수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낮은데 처한 자들이 따르고 천국은 이런자의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사회는 통합과 평등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지고 공고하게 된다. 우리 개신교회들도 사랑에 앞장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는 있지만 스포트는 받지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나친 개인복음전도 개교회적이고 이기적인 난맥성은 아닐까? 셋째로 그들은 개인전도보다 민족전도 교황전도 문화전도(전교)통합전도를 하고 있다. 이번의 교황의 방문으로 대통령이 마중을 나가고 온갖 언론의 보도를 하고 아시아 전역의 청년모임과 전 카토릭신자들 뿐아니라 전국민적 모임을 광화문광장에 모이는 것을 보았다(시복식-복을 내려준다는 식) 전체를 아우러고 영향을 극대화하는 일을 하였다. 20년전 교황 바오로 2세의 방문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으로 인한 대대적인 영향으로 많은 카토릭 신자들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는 소문이다. 그들의 오랜 전통적인 방식으로 내려온 것으로서 큰 행사를 통해서 그리고 위에서 정치적인 힘과 이념과 도덕적인 것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좋은 인식을 통해 한번에 카토릭의 영향권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보편적 전도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해 개신교는 개인전도를 각개전투식으로 하고 잇다. 어느 것이 옳고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개인전도를 하더라도 보이지않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카토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통해 종교개혁의 비판점을 개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강화조치를 취하여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공의회의 적자로서 근래의 성추문등 비판적인 천주교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일거에 바꾸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반대로 개신교회는 오랬동안 공든복음의 노력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진리 본질에서 먼 카토릭 이면의 이질성이 이런 것으로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이 나닐 것이다. 언젠가 그들의 대화, 그들의 통합, 그들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개신교회를 용해하려는 정책을 우리는 잊어선 안되며 더욱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복음의 眞意,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세상에 전하여야 하겠다.('14,8,18, 참진교회 송은근목사 씀)
203 no image 교황의 방한을 본 후기
송은근
12383 2014-08-21
교황의 방한을 본 후기 4박5일간 의 교황의 방문 내한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국내모든 것의 중심서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잠시 우리의 걸음을멈추고 그의 온화한 얼굴의 미소와 사제복의 경건함과 거룩함의 모습과 여유있는 모습은 이 속세의 복잡함과 진흙탕에서의 난투와 같은 세상을 잠시나마 멈추게하고 훈풍을 불어넣는 역활을 하였다. 온 백성이 마치 정치의 이전투쟁, 종교의 이질적인 난맥의 소리들, 경제적인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잠재우며 온 국민이 구세주를 기다림으로 손을 뻗어 무엇을 갈구하는 기원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교황의 방문을 보면서 개신교회의 목사로서 편견없는 감정을 적어 보려한다. 첫째로 전체를 끌어 안으려는 통합의 힘을 강하게 보여 주었다. 이 사회는 분열의 난맥상이 얽히고 설켜있다. 모두가 이기심과 질투와 미움 분열과 분쟁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의 분열과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평화를 강조하고 전쟁을 쉬게하고 형제의 하나됨을 강조할 때 감동을 아니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은 뭣보다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갈등하고 또 종교적으로 얼마난 피가 터지게 싸우고 있는가? 그런 상황에서 종교적인 통합을 주장하고 끌어 안으려는 모습을 세상사람들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은 어찌되었던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기도 하고 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나의 신이 한 종교로 한 민족형제 한 인류로 형제공동체연합을 추구하고 나아가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이상과 뜻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분열을 거듭하는 모습은 반대급부로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고 카토릭종교가 더 성숙하고 좋은 종교라는개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는 이런 점을 배워야한다. 우리는 분쟁과 타툼을 세상에 예사로 노출시키는 어리석음으로 지탄을 받고 애써 전도하고 키운 양무리들을 떠나고(빼았기고) 있지는 않는가? 아마 역사의 깊이가 아직 얕아서 소아기적 수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태생적으로 교리의 잘못일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사랑의 부족일까?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가 되자는 카토릭교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전인류와 전 교회를 끌어안으려는 최대의 바티칸의 교회가 자신의 정통성고 우월성을 전재하에서 개신교와 타종교를 끌어 안으려는 노력은 무위에 그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주전 607년경 카토릭의 교황권 수장설의 교리와 로마제국에서의 정치와 연합하면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라는 종교안으로 모우기 위해서 뿌리깊은 바벨종교의 여러 형태를 받아들여서 통합하려하여 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 이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하는 유일신경배는 쇠퇴하고 태양신을 받아들이고 마리아 숭상과 교황숭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진리는 음녀의 종교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통합과 평화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는 순수성을 찾아 통합보다 새로운 진리를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이 더욱 옳은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끊임없는 대화와 동시에 연합하려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더욱 지키고 승화하되 모든 세상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되려고 하는 노력은 멈추어선 안될 것이다. 둘째로 가난하고 낮은자 소외된자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번에 교황은 집중적으로 탈북민, 세월호 참사를 당한 사람, 이주민 자들. 정신대 할머니들 이런 사회적 약자인 어려운 자들을 끌어 안는 일에 집중하였다. 이런 일, 이런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교에 있어서나 전도에서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접근하기 좋은 방법은 바로 낮은 자 섬김의 방법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제 식민지에서나 건국초기에서 보여준 선교사에서 이런 선교방식은 세계유래가 없는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갈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자들은 이 사회 저변에 언제나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에 그런 사람들이 또다시 일어나서 상층위로 올라가고 역사의 순환을 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다수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낮은데 처한 자들이 따르고 천국은 이런자의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사회는 통합과 평등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지고 공고하게 된다. 우리 개신교회들도 사랑에 앞장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는 있지만 스포트는 받지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나친 개인복음전도 개교회적이고 이기적인 난맥성은 아닐까? 셋째로 그들은 개인전도보다 민족전도 교황전도 문화전도(전교)통합전도를 하고 있다. 이번의 교황의 방문으로 대통령이 마중을 나가고 온갖 언론의 보도를 하고 아시아 전역의 청년모임과 전 카토릭신자들 뿐아니라 전국민적 모임을 광화문광장에 모이는 것을 보았다(시복식-복을 내려준다는 식) 전체를 아우러고 영향을 극대화하는 일을 하였다. 20년전 교황 바오로 2세의 방문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으로 인한 대대적인 영향으로 많은 카토릭 신자들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는 소문이다. 그들의 오랜 전통적인 방식으로 내려온 것으로서 큰 행사를 통해서 그리고 위에서 정치적인 힘과 이념과 도덕적인 것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좋은 인식을 통해 한번에 카토릭의 영향권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보편적 전도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해 개신교는 개인전도를 각개전투식으로 하고 잇다. 어느 것이 옳고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개인전도를 하더라도 보이지않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카토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통해 종교개혁의 비판점을 개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강화조치를 취하여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공의회의 적자로서 근래의 성추문등 비판적인 천주교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일거에 바꾸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반대로 개신교회는 오랬동안 공든복음의 노력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진리 본질에서 먼 카토릭 이면의 이질성이 이런 것으로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이 나닐 것이다. 언젠가 그들의 대화, 그들의 통합, 그들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개신교회를 용해하려는 정책을 우리는 잊어선 안되며 더욱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복음의 眞意,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세상에 전하여야 하겠다.('14,8,18, 참진교회 송은근목사 씀)
202 no image 말로 안 되면 행동으로 보여 줘야지..
박종훈
3738 2014-08-12
말로 안 되면 행동으로 보여 줘야지.. 사택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털이 무성한 잡종 발발이를 키우고 있다. 잔디마당에 작은 집을 두고 목에 끈을 달아서 제한된 범위에서 활동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주 순한 개다. 이웃동네 할머니가 세례기념으로 분양해 준 강아지다. 성품 좋은 원 주인을 닮아서인지 오고가는 사람들을 봐도 짖기 보다는 그저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사실 교회이기에 너무 짖으면 키우기가 곤란하지만 다행히도 분위기에 맞는 주제 파악을 잘하는 괜찮은 녀석이다. 먹는 것도 보통 개들이 좋아하는 고기나 생선보다는 사료를 더 좋아한다. 조금 많이 준다 싶으면 먹이가 남아있어 적당량을 자연적으로 알게 되었다. 지나가며 한 번씩 눈길을 마주치며 밥그릇을 늘 확인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릇에 검정콩알만 한 것들이 먹다 남은 사료와 함께 들어있다. 궁금하여 자세히 보니 털이 있는 동물에 기생하며 피를 빨아먹는 진드기였다. 온 몸 곳곳에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는 진드기를 몇 마리 잡아서 자기가 먹는 밥통에 넣어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근래 식욕도 저하되고 마른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 녀석은 자신의 피를 빨아대며 병을 옮기는 이 진드기 퇴치를 위해 얼마나 괴로웠을까? 목줄이 없이 자유롭다면 아마 진흙탕에 가서 뒹굴던지 아님 물속에서 목욕을 해서든 진드기를 없애려고 했을 것이다. 밭에서 키우는 흑염소도 진드기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울타리 안에서 방목하기에 자유롭게 움직이며 몸에 붙은 진드기를 울타리 철망에 비비면서 퇴치하는 모습을 종 종 보게 된다. 하지만 이 개는 제한된 장소에서 마땅히 스스로 해결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주인과 말이 통한다면 진드기를 없애 달라고 하소연 했었겠지만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아 나름대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평소 주인이 자주 보는 모이통에 진드기를 잡아서 넣어둔 것이다. 필자가 그제야 개의 몸을 자세히 보니 사방 군데에 진드기가 판을 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대로 뇌두면 죽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몇 번에 걸쳐 분무기로 살충도 했지만 워낙 많아서 결국 가축병원에서 사 온 주사요법으로 치료를 했다. 사람과 동물이기에 말로 의사가 전달치 못하지만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알려준 발발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의 목회사역을 뒤돌아본다. 이 곳 궁산에 내려와서 태어난 막내가 이제는 군대복무를 앞두고 있는 시간이 흐른 지금은 제 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문화와는 거리가 먼 개척이 되다보니 말이 통하지 않는 많은 어려움을 늘 느낀다. 더구나 배움이 없는 노인들은 알기 쉬운 용어도 무슨 말인 줄 몰라 괜한 오해도 하고 웃음을 자아내는 일들이 많았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며 처음 알고 배운 것만 전부로 알고 변함없이 고수하는 그들에게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그럼에도 때와 상관없이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다. 아마 모든 농어촌 교회 목회자들이 느끼는 어려움이라 여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전하는 방법은 있다. 바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동네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장소도 그렇지만 시골 자체가 서로를 너무 잘 알 수박에 없는 구조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같은 골목에 살기 때문이다.유리로 지은 집 같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 동안 좋은 본이 되지 못한 미숙한 부분도 많이 있었지만 더 나은 선한 본을 보이려고 노력을 하는 중임은 사실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인줄 아는 그들에게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아껴주며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것을 드러내며, 지나친 노동으로 몸을 상하는 그들에게 쉼과 여유를 통하여 즐거운 인생의 사는 모습을 알려주고자 했다. 흔히 지나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전통의 가치를 외면하는 그들에게서 전통을 활용한 건축과 친환경 에너지 절약형 집과 정원으로 보여주고 있다. 관행농법으로 해마다 점 점 힘들고 어려운 농사법에서 자연을 활용한 농법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없는 가운데서도 나눠주며 오는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모두 다 자기 일에 바쁜 중에도 동네와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수고하는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고 있다. 지금은 비록 바라만 보고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젓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언젠가는 좋은 본이 자연스럽게 같이 동행하는 교회와 마을 공동체가 되리라 소망한다. 어쩌면 깨달아서 뭔가 느낄 때는 이미 동네가 고령화로 마음만 따라오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성급한 마음으로 좌절하지 않고자 한다. 내 생애에 선한 기초만 놓고 가도 누군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날이 오리라 여긴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는 말이 있듯이 이 마을에 성경적인 문화가 곳 곳 에 스며들길 소원한다. 말로는 안 되지만 행동으로는 보여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고 소망의 끈이 있기에 오늘도 인내하며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주님은 작은 개를 통하여 위로해주고 깨닫도록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는 것 같다. 활뫼지기 박종훈
201 no image 가정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왜 그리 중요한가?
장창수
3707 2014-07-23
가정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왜 그리 중요한가?(2) 부제: 하나님 나라와 나/신학과 사회학 창조기사(창1-2장)의 절정은 인간 창조(창1:26-28절)이다. 우리는 단순히 인간 창조라는 관점에서 묵상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핀다면 이들의 창조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 아담과 하와라는 인격체의 창조, 남편과 아내의 창조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창조를 각각 또한 의미한다. 창조기사는 4가지 관점들로 인간 창조를 묵상하라고 요구한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다. 이 점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 차이가 없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대등한 존재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근거를 둔 성경의 인간론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 신학은 항상 인간 즉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빈부귀천과 남녀노유에 불구하고 그리고 언어, 관습과 문화와 종교 사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무시되어선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의 보편적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인류를 대하며 선인에게든지 악인에게든지 햇빛, 물과 공기를 동등하게 제공한다. 이 점에서 종교가 다르다고 다른 인종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십자군 운동은 절대로 성경적이 아니다.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며 차별해선 안 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성, 기질과 성품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자는 이성적이라면 여성은 감성적이다. 이 덕분에 사람들은 사물을 이성적으로는 물론 감성적으로 볼 수 있다. 남자는 외향적, 추상적, 적극적, 능동적 그리고 공격적이라면 여자는 내향적, 현실적, 소극적, 수동적 그리고 수비적이다. 가정과 자녀를 돌보려면 여성적 안정은 너무 중요하다. 여기서 다름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니다. 서로의 다름은 동일한 사물을 다른 관점과 국면에서 보도록 돕는다. 이로써 사람들은 더 깊고 넓으며 다양한 지식과 이해를 얻게 된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지은 이유였다.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 다름을 이상하게 보거나 무시해선 안 된다. 성경은 이것이 정상이라고 말한다. 신자는 성경의 이런 인간론을 잘 이해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인격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들. 창조주 하나님 버금가는 인격체.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기능과 은사 면에서 본 것이라면 아담과 하와는 인격 면에서 본 차이이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을 닮은 인격체이다. 인격 면에서도 여자는 절대로 남자들의 무시, 조롱,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격 면에서 동등하지만 인격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성품과 기질, 기호, 습관, 생각, 가정 환경과 교육, 친구 관계, 학교 교육과 사회 교육 등등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주변에 아주 많다. 이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가 또한 인격 형상에 아주 중요하다. 이 점에서 아담과 하와는 서로 완전히 다른 인격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다름도 틀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동등한 인격체란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인격적 다름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서로 존중해야 한다. ​ ​ ​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동등한 인격체란 사실은 여자도 남자 못지 않은 지력과 능력의 소유자란 뜻이다. 다만 육체적 힘에서 남자에게 밀릴 뿐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대등한 반려자로 대해야 한다. 오늘날 사회가 개방될수록 여성의 사회 진출이 더욱 두드러진다. 사회가 선진화되려면 남성의 인력만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회 삶이란 남성으로만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중매로 이들이 만나 결혼을 하며 부부(夫婦)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다른 모습이다. 결혼 전 이들은 서로 모든 면에서 다르다. 그러나 부부가 됨으로 한 몸이 된다. 이로써 서로 이질적인 존재들이 한 몸이 되며 같은 삶과 인생을 공유한다. 동일한 목적을 위해 다름을 극복하며 협력하고 살아야 한다. 이 때 서로의 다름은 결혼 생활과 부부 생활에서 절대로 문제가 되어선 안 된다. 서로에 대한 사랑은 다름을 극복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1보다 1+1은 2 이상의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다. 당연히 부부 삶의 근본적 기초는 사랑이다. 여기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도록 돕는 힘이다. 이로써 부부는 인생을 더욱 깊고 넓게 맛보며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위기도 손쉽게 극복한다. 그러므로 부부 생활은 사랑으로 한편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고 다른 한편 시너지 효과를 얻어 인생을 풍요롭게 살도록 노력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남편과 부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이다. 가정은 처음 부부만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행복한 부부 생활이 가정 삶의 근본이며 기초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부부 삶이 불행하다면 가정은 세워지지 않고 무너진다. 이들로부터 태어날 자녀들이 가정의 또 다른 구성원이 된다. 이 때 남편과 아내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이름을 얻는다. 남자와 여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부모가 사랑으로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녀들은 보고 자란다. 자녀들도 모든 면에서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형제애로 얼마든지 다름이 극복됨을 배우고 체험한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건설 역군으로 자란다. ​구약 시대 가장은 가족들의 생사 여탈권을 가진 왕, 대제사장과 선지자 역할을 했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대제사장은 백성 편에서 그리고 왕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 중보자로서 일했다.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알려주고 가르치며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도고 기도하고 왕같은 존재로 가정과 나라를 치리했다. 이것이 남편의 역할이었다, 이에 반해 아내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돌본다. 가정은 공의와 사랑을 겸한 곳이어야 한다. ​ 이런 가정에서 잘 훈련 받은 자녀들은 사회 삶에도 잘 적응한다. 옆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위로는 상사들을 존경할 줄 아는 자녀들이 배출된다. 이렇게 인간의 창조가 갖는 신학적 의미는 다양한 사회학적 의미를 또한 갖는다. 남자와 여자, 아담과 하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럼 이들은 모두 무엇을 목표하는가? 물론 하나님 나라와 인류 사회의 건설과 확장이다(창1:26-28절). 하나님은 인류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 아버지는 가정의 가장으로서 외향적이라면 어머니는 집에 남아 가정과 자녀들을 돌본다. 여성은 당연히 내향적이다. 장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 일군을 잘 돌보아야 한다.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과 아머니의 자애로운 돌봄이 자녀들을 행복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는다. 이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인류 사회와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더욱 확장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가르침이 발견된다. 아담과 하와라는 남자와 여자는 개인이지만 종국적으로 항상 인류 사회와 하나님 나라 건설과 연결된다. 이들은 가정을 매개로 인류 사회는 물론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로 참여한다. 창조 기사는 단순히 아담과 하와란 개인 인격체의 창조만 말하지 않는다. 이들의 개인적/주관적 입장은 하나님 나라라는 객관적 사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기사의 신학적 가르침은 인간이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회학적 존재가 아니라고 증언한다. 사람은 가정을 구성하고 가정은 최소 단위로서 인류 사회와 하나님 나라의 구성 요소들이다. 국민은 개인적으로 존재하지만 나라와 민족 그리고 사회라는 공동체와 결코 결별될 수 없음과 같다. 이것은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개별적 존재로서 구원 받은 자이지만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이 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갈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살아야 할 나라이다. 그러나 헬라 철학의 이원론은 하나님 나라를 초자연적/초월적 나라로 이해하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모른다. 이런 신자들은 흔히 성화 노력에서 지극히 미약하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다가 죽어 천국가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이를 증언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말기까지 계속 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쳤는가? 하나님 나라는 눈에 안 보일 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세상 나라의 시민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이어야 한다. 이 때 성화도 가능하며 신자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세상 나라의 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법대로 사는 신자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새워지고 그리고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통해 신자들이 받은 하나님의 소명이며 사명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인격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다음 가정에 그리고 사회와 나라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도록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란 개인, 가정과 사회 그리고 하나님 나라 사이 관계를 성경의 가르침대로 잘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다. 주관적 신앙 삶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칭의 삶에 성화를 더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신자는 부끄러운 구원을 피할 수 있다. ​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445 홍정길 목사의 회한 ​http://blog.naver.com/rassvet/220042124736 가정론은 왜 중요한가?(1)
200 no image 복음은 항상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가?
장창수
3559 2014-07-23
복음은 항상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가? 얼마 전 본인이 사역하는 교회가 러시아 침례 교단(공인)에 가입했다. 그 후 흑해 지역의 목회자 모임에 참석했다. 이들이 토론한 주제는 영적 각성운동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였다. 러시아에서도 복음의 열정이 식은 지 이미 오래다. 신자들도 그냥 전통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교회에 출석한다. 교회 성장도 거의 없다. 시베리아에서 흑해로 선교지를 이전한 후 '크라스노다르스키 끄라이'주에 속하는 '베르흐니바깐스키' 읍의 조그만 교회에서 5년째 사역하고 있다. 뭔가 활발하게 교회가 움직이는 듯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장은 없다. 러시아 어디를 가나 마찬 가지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들의 고민만은 아니다. 선교 초기 즉 1997년 경 제 1차 사역 교회에서 사역할 때 주일마다 50여명 정도 회집했다. 삼일 저녁 예배도 그랬다. 일년 동안 사역하고 나니 120명으로 늘어났다. 이 때만해도 개방과 개혁 후 러시아 인들의 마음에 영적 갈증이 있어 전도하기 쉬웠다. 말씀을 사모하며 삼일 예배도 열심히 참석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지금까지 그렇다. ​ ​이런 문제로 본인도 고민했다. 이들의 고민을 이해하기에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한 때 하나님은 복음 전도가 잘 되도록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지만 다른 때는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놔둔다. 영적 어둠이다. 한 때 사역은 너무나 수월하지만 다른 때 너무나 어렵다. 어려울 때 사역자들은 절망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인가라고 생각하며 자책할 수 있다. ​​ ​러시아 목회자들은 대부분 알미니안 목회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노력이 부족해서 영적 침체 현상이 온 것은 아닌지 그리고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야 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이사야 출현 이후 다니엘까지 250년 동안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 예언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미 말했다. 선민이 완전히 망해 그루터기만 남을 때까지 선민의 마음은 완악할 것이다(사6:9-13절).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당시 선지자들은 인기 없는 사역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열심히 예언 활동을 했다. 이 때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분명히 이해한다면 하박국 선지자처럼 절망 대신 기뻐할 것이다(합3장). ​​ 선지자들이 절망을 극복하고 계속 사역해야 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는 당시 남은 자들인 소수의 진실한 신자들이 계속 신앙으로 살도록 돕고 보호해야 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나중 행할 악인과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에서 자신의 공의를 마련해야 했다. 이사야에게 주어진 예언은 예수님 당시에도 적용되었다(마13:15절). 결국 7백년 넘게 선민 유다의 마음은 완악한 상태에 있었다. 이런 시기 사역은 너무나 힘들다. 결국 선민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십자가에 죽게 했다. ​​ 놀랍게도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3년 넘게 스승 예수님을 따랐다. 이 세상에서 그리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웠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 이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나중 이렇게 말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절) 예수님도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기까지 하나님이 제자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한다면 그 때 진리를 깨달을 것을 알았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정한 때와 앞으로 올 성령의 사역에 맡기고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역에만 몰두했다. 승천 후 이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사역할 것이고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꼭 보낼 것이다(행2장).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사역 자세는 오늘을 사는 목회자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크다. 목회자는 설교나 목회의 결과에 관심을 두지 말고 열심히 해라! 그냥 열심만 아니라 설교를 잘 준비하라! 말씀만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이다. 먼저 목회자가 말씀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잘 먹여야 한다. 이 덕분에 힘을 얻게 되고 그리고 그 힘과 능력으로 설교해야 한다. 몸이 뜨거운 암탉만이 알을 품고 병아리를 낳게 한다. 마찬 가지로 먼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맛본 목회자만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신자들과 나눌 수 있다. 그 다음 설교나 목회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 목회자는 말씀을 심거나 심어진 말씀이 잘 자도록 물을 주는 역할로 끝이다. 자라게 하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이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0611828 농학으로 본 설교 행위) 이렇게 본다면 목회나 설교의 결과로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목회자의 마땅한 자세가 아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뜨겁게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라!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돌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양적 성장론은 크게 잘못되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4밭들 중 오로지 한 밭만이 열매를 냈다. 100명의 신자들 중 겨우 25명만이 진실하다는 뜻이다. 이것도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은 신자들을 소금에 비교했다. 바닷물은 3.5%의 소금 덕분에 짠 맛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진실한 신자의 수는 겨우 3.5%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도 좁은 길로 끝까지 가는 신자가 극히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눅13:24절). ​​ 3.5%가 맞다는 뜻이다. 천 명의 신자가 있는 교회에서 경우 35명만이 진실한 신자들일 수 있다. 좁은 길을 끝까지 가는 신자는 그 만큼 적다. 3.5%의 진실한 신자들 때문에 다른 신자들도 좋은 영향을 받고 이 결과 교회와 목회가 사는 것처럼 보인다. 3,5%가 더 성경의 가르침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에 낙망할 것 없다. 3,5%의 신자들이 언젠가 맺는 열매는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확률을 보인다. 그 동안 하나님 나라가 잃은 손실이 모두 복구된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누구를 보고 목회할 것인가? 1000명의 신자들인가 아니면 35명의 신자들인가? 물론 후자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절망치 말고 사역을 계속해야 한다. 그 열매가 언제 나타날 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러나 문제는 1000명의 신자들 중 누가 3.5%에 속하는 신자들인가를 목회자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결국 어느 누구를 상대하든지 진실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목회와 설교 활동을 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의 탈란트 비유가 말하듯이 진실성과 성실성만 그가 받을 상급을 결정할 것이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목회자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결론적으로 목회자는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성실하게 목회에 임해야 한다. 이런 목회는 대형 교회보다 중소형 교회에 더 적합하다. 대형 교회는 그냥 대중적 목회와 설교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소형 교회에서 인격적 만남과 접촉을 통한 목회가 가능할 것이다. 신자들은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220031555786 사도 바울의 목회 ) 그리고 대형 교회의 위험은 목회자에게 불필요한 자부심, 자긍심 그리고 교만을 준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목회 성공에 서서히 영적으로 타락한다. 한국의 성공한 목회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처신이 비성경적 그리고 비상식적인 이유이다. 대형 목회는 피해야 한다. 다른 한편 진실한 신앙 삶을 원한다면 신자들도 대형 교회에서 손쉬운 신앙 삶을 하려 하지 말고 중소형 교회에서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와 인격적 교제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http://blog.naver.com/rassvet/40181810102 복음은 항상 위력적인가(1)
199 no image 하나님의 뜻이다
장창수
4179 2014-07-23
하나님의 뜻이다 1.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표현이 자주 인용된다. 문제가 되기도 한다. 문창극 장로가 한 설교 중 이 표현 때문에 국무총리 후보 자리에서 자진 사퇴했다. 일제 식민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신앙인들은 이해되는 데 불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일제 식민사관을 지지한다고 보며 언론은 기독교도 싸잡았다. SNS에서 이런 언론을 이렇게 평한다. 예수가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한 것을 보고 한국 언론은 "예수, 매춘부 옹호 발언 파장. 잔인한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 던지라고 사주."라고 트집 잡는다. 그리고 예수가 위선적 바리새인들에게 분개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꾸짖은 데 대해 한국 언론은 "예수, 국민들에게 X새끼 발언 파문"으로 보도한다. 이것은 전형적 좌파의 비판 방법이 아닌가? 불신자의 관점(역사적)에선 이 세상의 주인은 인류이다. 이성과 상식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현상만을 보고 평한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성경적)에선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절) 교회와 신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해야 한다. 그럼 사도 바울이 말한 성구는 일제 식민사관을 지지하는가?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고난을 당하도록 일제 식민을 동의한다는 식의 주장은 성경 어디서도 지지하지 않는다. 거룩한 하나님은 스스로 불의를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류 사회에 대해 보편적 부성을 늘 보여준다(마5:45절).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듯 인류 사회를 징계 내지 징벌한다는 것을 또한 뜻한다. ​ ​ ​ 그럼 하나님은 인류 사회를 어떻게 징벌하는가? 거룩한 하나님이 직접 징벌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단이란 존재를 이용한다(욥1-2장). 사단은 하나님의 승인 아래 인류 사회의 악과 불의를 징계한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해 더 불의한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을 몽둥이로 사용했다. 이 때 민족적 불행 원인은 하나님이나 사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선민 사회 자체에 있었다. 그 후 이 제국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또한 멸망 당했다(렘25:12절). ​ ​ 이 때 선민은 조국의 멸망을 지켜보며 하나님이나 바벨론 제국을 절대로 원망하지 않았다. 멸망의 원인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사24:5절)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호8:1절: 말2:8절 참조) ​ ​​​ 이씨 조선 시대 한국 사회도 이미 말기적 증상을 보였다. 약육강식의 시대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푼 일본이 약해진 한국 사회를 가만 놔둘 리 없다. 하나님은 징계를 위해 일본을 몽둥이로 들어 사용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해석은 일제 식민을 하나님이 지지했다는 것을 결코 뜻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를 징벌하기 위해 더 악한 일본 제국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일본 제국을 또한 징벌하기 원했다. 하나님의 일본에 대한 징벌은 일본 식민사관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2. 그럼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표현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창조 후 에덴 동산을 창설한 후 그곳에 선악과를 심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지시켰다(창2:17절). 그러나 아담이 따먹었다. 이것은 인류 사회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겠다는 뜻이었다. 이 선택에 따라 하나님은 인류가 자의적으로 행한 악과 불의에 대해 주인으로서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은 징벌이나 징계할 수 없다. 매번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에 인류 사회란 한 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악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정한 후 이 법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은 인류 사회의 악행과 불의를 참거나 또는 심판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주인으로서 자신의 창조 세계의 질서를 계속 유지내지 보존한다. 이를 하나님의 알반 은총론이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자신의 창조 목적(창1:26-28절)을 달성하기까지 인류 사회와 자연 세계는 계속 보존되고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제 식민은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잘못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이다. 하나님이 그 동안 베풀어 준 은총을 선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의 원인은 한국사회 자체에 있었다. 당시 사회의 악행과 불의가 도를 넘어가자(창18:18-21) 하나님은 일본을 징계의 몽둥이로 사용하여 한국 사회를 징벌했다. 3. 이 결과에 대해 한국 사회가 취해야 할 지혜로운 자세는 무엇인가?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관점에서 한국을 침략한 일본에 대해 무조건 분노하고 미워하기보다 먼저 자신에게서 민족적 불행과 비극의 원인과 이유를 찾아야 한다. 당시 국제적 상황에서 볼 때 어느 나라든지 약해진 한국을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우리의 잘못으로 한국 사회가 분열되고 무너지며 약했다. 이런 때 우리보다 훨씬 강했던 일본이 한국인에게 자비와 선을 베풀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가? 역사적 관점에서 물론 그들의 침략성을 원망할 수 있지만 성경적 관점에선 그리 지혜롭지 못하다. 남 탓만 해선 성장할 수 없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들은 이런 단순한 지혜를 버리고 일제 식민사관의 역사적 정당성의 문제로 동족끼리 치고 박고 여전히 싸우고 있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리석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이런 불필요한 논쟁으로 얼마나 많은 국력을 분산시키고 낭비시켰는가? ​​ ​ ​ 물론 해방 후 일제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정말 유감이다. 이것도 한국 사회의 잘못이었다. 해방 후 정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본 제국의 앞잡이였던 순사들과 형사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이 이를 허락했다.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이승만 정권은 이북의 공산주의와 이에 동조하는 남한 사회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나라를 하루 속히 안정시켜야 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갓 해방된 조국을 분열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 또한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무엇보다 먼저 나라를 지켜야 했다. ​ ​ ​ 물론 나중에라도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과 협의하며 일제 청산을 분명히 해결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일에 실패했다.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친일파였고 연이어 625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 후 한편 공산주의 잔당을 물리쳐 사회질사와 안정을 찾아야 했고 다른 한편 국가 재건에 국력을 모아야 했다. 당시의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상황이 일제 청산을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하나님이 일제 청산을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 하나님은 한민족을 연단했다(삿2:21-23절). ​ ​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달리 생각함으로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좌파들은 이 문제를 이용하여 한국 사회를 여전히 분열시키고 있다. 놀랍게도 김대중과 노무현의 좌파 정권이 10년 동안 대한민국을 다스렸지만 일제 청산 문제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다. 국민이 기회를 이들에게 주었지만 말이다. 일제 청산은 그 만큼 골이 깊은 사회적 문제란 뜻이다. 이를 잘 아는 좌파는 여전히 이 문제를 보수 정권에게 계속 묻는다. 이 요구는 정당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잘못과 실수였다.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보수나 진보나 다 같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 ​ ​4. 그럼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계속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달리 극복할 것인가? 우리의 지혜와 의지에 달린다. 이를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거나 징계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법과 원칙을 스스로 어기면서 만물을 주관하지 않는다. 인류 사회의 반응을 보며 축복내지 징벌을 결정한다. 이 때 하나님의 결정과 심판은 늘 공의롭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성경의 표현은 인간의 악행을 승인내지 동의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일제 식민사관을 절대로 지지할 수 없다. 일제의 무자비한 식민 통치는 인류의 양심에 비추어 보아도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제 식민이라는 불행한 사건 이면에 한국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감추어져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려면 옛 시대를 닫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창조적 파괴와 같다. 물론 이 때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패러다임의 급격한 물리적 변혁은 흔히 고통과 고난을 동반한다. 진화론적 역사관도 얼마든지 용인하는 해석이다. ​ ​ ​ 오늘날 대한민국을 보라! 민족적 불행과 비극을 극복하고 국력이 세계적으로 10위 안팎에 머물고 있다. 하나님은 민족적 불행을 통해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어 세웠다. 하나님 앞에 대한민국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기독교 세력이 가장 강한 나라 그리고 선교사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송한 나라이다. 민족적 불행을 비관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결국 불행이나 비극 앞에서 국민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조국에 대한 자학적 역사관은 그리 좋지 않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성경의 표현은 역사학적 관점에서도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기독교가 신학적 관점에서 달리 설명할 뿐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동일하다. 인류 사회의 불의가 불행의 원인이다. 이 원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언론이 이를 문제 삼고 트집 잡는다면 역사에 대한 상식 빈곤을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다. 언론은 교회 안의 신학적 표현을 가지고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 5. 반면 목회자와 신자들도 이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다.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사람의 지은 죄를 용인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지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은 호되게 꾸짖었다. 아무리 디윗이라해도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인할 수 없었다. 다윗이 회개하자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죄를 즉시 선언했다. 그러나 그에게 죄에 대한 징계 내지 징벌은 면제되지 않았다. 나중 아들들 사이 왕권 문제로 다윗이 가슴을 치게 하는 불행과 비극이 가문에 발생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죄인 다윗까지 멸망시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도 인류의 죄를 짊어지겠다면 하나님은 예외 없이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해야 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죄값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지 지불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죄를 미워하되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타락 후 죄인 인류를 미워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낼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성경의 표현은 인간이 지은 죄도 못 본체 한다는 뜻이거나 죄인을 무조건 용서한다는 뜻도 절대로 아니다. 6. 지금 한국 교회에서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들이 자주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용서를 선언한다. 그리고 의인인 체 위선이란 죄를 추가시킨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지은 죄가 하나님의 어떤 뜻에서 나왔는지에 대해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두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다윗의 경우처럼 그가 피택자라면 책망과 교정 그리고 교훈을 위해 죄를 짓도록 하나님이 막지 않고 허용할 수 있다. 그를 낮추기 위함이다. 이 때 회개를 조건으로 죄에 대한 용서는 가능하지만 징계는 절대로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공적 기관에서 분명히 자신의 죄에 대해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징계를 겸손하게 받아야 한다. 이것이 그가 피택자란 증거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를 유기시키기 위해 그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허용할 수 있다. 이들은 말씀과 양심을 어긴 후에도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하며 스스로 용서를 선언하고 의인처럼 행할 것이다. 교회와 교인들도 기쁘게 동의한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나가고 잘 되기만 한다. 그는 분명히 버림 받은 자이다. 그가 회개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교정하도록 하는 징벌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반드시 징계하기 위해 매를 든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다"란 표현은 변명의 방법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징계 또는 징벌한다. 그리고 이 표현은 하나님이 모든 악을 저지른 장본인임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아울러 이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한 체 하나님의 주됨을 부정하는 신학도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주로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스린다. 그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220029831407 일 식민지 하나님의뜻 논쟁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3148 ​'사람 낚는 목사'와 '사람 잡는 목사'
198 no image 예수님의 자기부정
장창수
3849 2014-07-23
예수님의 자기부정 마태복음서를 읽으면 16장을 기준으로 기독론의 내용이 달라짐을 본다. 16장까지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쳤고 이런 과정에서 이적들을 행했다.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3년 넘게 증거했다. 이 덕분에 16장에서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했다(16절). 그러나 이 때부터 예수님은 갑자기 자세를 달리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기 시작했다(20-21절). 예수님은 자신을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난의 종'(사53장)으로 제자들에게 새롭게 소개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 그리스도로서 고난의 종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예수님의 초림 목적은 자신의 고난을 통한 인류의 구속에 있었다. 예수님은 이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은닉'을 잘 설명한다. 한편 이적들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를 감추는 이상한 처신을 예수님이 보였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고난의 종'으로도 믿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영광의 그리스도임을 잠시 잊고 고난의 종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어린양으로 보아야 했다. 이 고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것이다(롬1:3-4절). 그러므로 초림주인 예수님은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닌 '고난의 종'으로 끝까지 살아야 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교리적으로 잘 설명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4-6절)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났다. 그리고 그는 율법 아래 살아야 했다. 그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함에 있다. 구속과 양자란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수행해야 했다. 양자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이미 예정했기 때문이다(엡1:4-5절). 아버지의 예정에 따라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아담의 원죄를 유전적으로 받지 않으려면 그는 여자에게서 출생해야 했다. 출생 후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지만 죄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에게만 주어진 율법과 무관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 아래 살았다. 그가 인류의 죄를 짊어지려 한다면 율법이 정한 대로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철저히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 맺어진 '영원한 구속 언약'에 따랐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왕궁에서 출생하지 않은 이유였다. 죄인 인간처럼 그도 인생의 모든 고초를 그대로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그는 목수 요셉의 집에서 자랐지만 가난했다. ​예민한 청소년 시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돌을 금으로 만드는 이적을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다. 혈기가 왕성한 청년 시기 일년에 3번 예루살렘 성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그곳에서 행해지는 종교적 불의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이 때마다 분기탱천하며 종교 지도자들을 지탄하지 않았다.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이적을 행함으로 자신을 그리스도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74308472 30년과 3년 ) 이것은 오늘날 좌파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불의와 죄를 방관함으로 불의에 참여한 잘못된 청년이었다. 좌파 기독인들은 왜 이런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는지? 그러나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는 철저히 율법 아래 살아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좌파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30살 되기까지 그는 방관자의 삶을 철저히 살았다. 마침내 그는 메시아 사역을 시작했다. 이 때 광야에서 40일 굶주린 후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았다. 유혹의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이적을 행하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단은 자신에게 절하면 모든 세상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하며 고난 없이 영광에 달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사단은 속죄의 고난을 수행하지 말라고 예수님을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그러나 속량 받은 자들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이를 위해 아들은 고난의 종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다. 이를 잘 안 예수님은 모든 시험에서 사단을 단호하게 거절하여 물리쳤다. 그리고 공생애 중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이적을 행하여 신적 권세를 보여주며 유대인들을 강제로 굴복시켜 경외 받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손 쉬운 길을 버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부인한 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힐 때도 그는 천사들을 보내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붙잡히는 수치와 멸시를 택했다(마26:53-54절). 모욕적인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도 그는 어린양처럼 입을 다물었다(사53:7절). 그는 결국 십자가에서 죽었다. 고난을 당할 때도 마취제 역할을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맛보기만 하고 그는 전혀 마시지 않았다(마27:34절). 그는 죄값으로 온 저주를 철저히 받아야 했다. 물론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두 우리의 구속과 양자를 위함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요3:16절)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렇게 그도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고난의 죽음을 선택했다. 이로 보아 아버지의 구속에 대한 작정과 아들이 성취시킨 구속의 원인은 모두 사랑에 있었다. 이 사랑이 아들의 자기부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창세 전 선택 목적이 이를 잘 설명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마침내 세우게 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결국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은총의 원천이다.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도 기약된 영광에 이르기 위해 먼저 고난에 참여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후사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먼저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 삶의 원리이다. 그러나 번영신학과 양적 성장론은 이를 부인하고 먼저 영광에 들어가 그것을 모두 누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비성경적 신앙고백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의 그리스도로 드러나는 순간 즉시 자신이 고난의 종임임을 제자들에게 밝혔다.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의 그리스도란 사실에 제자들이 도취되지 말고 정신 차리라고 권면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영광스런 신분과 구원의 영광스런 면에만 도취되어 불필요한 자부심과 자긍심에 바져 교만하기까지 하다. 겸손을 찾을 수 없다. 당연히 이들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부인한다. 이런 거짓 복음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많다. 이런 복음은 모두 자기부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부정이 없는 복음과 신학은 비성경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생명에 이르는 자가 극히 소수라고 말한 예수님의 언급은 정말 맞다(눅12:32, 13:23-24절). 우리 주변에 교회들과 신자들은 많지만 그들 중 과연 얼마나 천국에 이를 것인가? 바다를 짜게 만드는 소금은 겨우 바다 물의 3.5%라고 한다. 아마 나머진 교회 문턱만 닮도록 왔다갔다했지만 천국에 못 이를 것이다. 이 얼마나 억울한가? 대부분의 신자들은 구원의 찬란한 면만 기뻐한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져오게 한 고난의 과정을 묵상하기 싫어한다. 이것은 바른 신앙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절)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처럼 우리들이 종국적인 영광에 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를 부인하는 번영 복음과 신학이란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패배한 결과임을 주시하자! 30년과 3년(1) http://blog.naver.com/rassvet/40174308472
197 no image 구원의 4중 모습
장창수
3505 2014-07-23
구원의 4중 모습 사도 바울은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절) 구원을 사도 바울은 달리 설명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절) 먼저 성구는 개인적 관점에서 그러나 나중 성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구원을 각각 설명한다. 구원은 주관적 면과 객관적 면 모두 갖는다. 달리 말해 전자는 신자 개인의 영적 변화로 그러나 후자는 장소의 이전 또는 소속의 변화로 구원이 각각 설명된다. 신약 성경은 개인의 주관적 변화와 영적 신분의 변화로 구원을 소개한다. 이 설명에 문제가 발견된다. 구원이란 주로 '무엇으로부터' 구출, 해방, 구속을 뜻한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1:4절) 문제는 from이란 관점에서 본 구원론은 금욕적, 도피적, 소극적, 피동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구원이 무엇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언급만 있지 어디를 향해 가는가에 대한 설명이 약해서이다. 흔히 기독교 신학은 구원 이후 신자의 목적지가 천국 또는 천당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자는 구원 받자마자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남겨진다. 자연스럽게 신자는 자신을 이 세상의 나그네로 생각한다. 신앙이 좋을수록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좋아한다. 그럼 구약 성경이 주장하는 구원론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구약을 잘 아는 히브리인 사도였다. 구약과 완전히 분리된 개념의 구원을 그가 주장할 리 없다. 초대교회의 유대인 신자들도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할 것이라고 이해했다(행1:6절). 구약의 대표적 구원론은 출애굽 사건으로 설명된다. 출애굽 사건은 장소의 이전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신분의 변화를 초래시켰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목적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다. 애굽을 떠난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후손이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애굽도 그리고 가나안도 모두 이 세상에 속하는 지정학적 장소란 것이다. 즉 구약의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식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진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된다. 신약의 구원과 다른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틀릴 리가 없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이 지금까지 잘못 해석한다. 신약의 구원도 애굽 같은 세상을 벗어남과 아울러 동일한 세상 안에 눈에 안보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목표한다. 이 점에서 신, 구약 성경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설명하는 구원은 4중적 의미와 모습을 갖는다. 구원은 애굽 같은 세상으로부터(from) 벗어나는 것으로 출발한다. 구원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through) 훈련 받으며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 구원은 가나안에 들어가(into)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toward) 영화란 완성을 소망하는 삶과 같다. 첫째 의미는 애굽이라는 거대한 세상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첫째 구원은 거듭남으로 가능하다. 한편 신자는 애굽의 모든 삶과 사고, 그리고 그 방식과 가치관에서 벗어난다. 다른 한편 신자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구원으로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 구원 이후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세상의 온갖 지식과 과학보다 즉 이성보다 믿음에 의존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둘째 의미는 이 세상을 광야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광야에선 인간의 지혜와 힘은 무력하다. 하나님이 매일 보내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이 때도 율법이 정한 대로 일용한 양식만 취해야 한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삶을 사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로써 신자는 절제, 자제, 겸손과 낮아짐과 자기부정을 배운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삶을 익히는 과정이다. 셋째 의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목표이다. 애굽 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세워야 한다. 그곳에선 하나님의 율법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완전히 다른 선진적 사회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 영광을 받을 것이다(신4:5-6, 마5:13-16절). 이것이 바로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다. 넷째 의미는 이 세상이 결국 하나님의 불 심판으로 멸망 당할 것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한다. 구원은 이 이후 완성될 것이다. 재림과 심판은 신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형통과 번영, 출세와 성공에 집착하지 못하도록 돕는다.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신앙 삶을 살아야 하지만 소극적 자세도 치해야 한다(고전7:29-31절). 이 점에서 신자는 이 세상의 나그네와 같다. 사도 바울은 첫째와 둘째 의미의 구원을 '믿음의 역사'로, 셋째 의미의 구원을 '사랑의 수고'로 그리고 넷째 의미의 구원을 '소망의 인내'로 요약하여 각각 설명한다(살전1:3절). 진실한 믿음은 삶과 사고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이에 계속 노력한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이다.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사랑을 실천하고자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 때 사랑 실천은 자기부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재림 후 완성될 구원을 소망하기에 범사에 인내하고 참으며 산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셋째 의미의 구원을 죽음을 통해 지상에서 천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실수와 잘못을 범한다. 이런 구원론으론 하나님의 창조 목적(창1:26-28절)인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울 수 없다.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 생긴 불상사이다. 반면 앞의 금욕적 신앙 삶을 부정하고 쾌락적 신앙 삶을 추구하도록 가르치는 번영신학, 양적 성장론과 이와 유사한 신학들은 첫째, 둘째 그리고 넷째 의미의 구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기독교 신학, 교회와 신자는 4가지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이 세상은 애굽과 같아 하루 빨리 벗어야 할 죄악 세상이다. 이 세상은 성도에게 광야와 같아 영적 훈련장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곳이다. 이에 따라 성도는 인류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언젠가 불심판으로 멸망 당할 것이다. 신자는 이 세상에 절대로 올 인(all-in)하지 않는다.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4가지 세계관은 부정적/비관적 세계관(애굽과 멸망 대상)과 아울러 긍정적/낙관적 세계관(광야와 가나안)을 동시에 가르친다. 신앙 삶은 적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소극적 면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 그러나 신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님의 시험이다. 삶의 정황에 따라 신자는 4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를 택해 적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성도는 버리는 훈련(애굽)과 새로 습득하는 훈련(가나안)에 늘 열심히 받아야 한다(광야).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는 세상 방식이 아닌 하나님 방식을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가나안). 그 동안 교회는 구원의 4가지 국면을 보지 못하고 어느 하나만 취하고 나머진 버리는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첫째와 넷째에 치우친 구원론을 보여준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둘째와 셋째에 치우친 구원론을 보여준다. 번영과 성공을 바라는 기복적 신학은 셋째 구원론을 잘못 이해한 체 세상을 가나안으로 본다. ​그러나 균형 잡히고 성숙한 신앙인 4가지 신앙 삶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신앙 초기 신자는 첫째와 둘째에 치중해야 한다. 출세와 성공을 한 기존 신자라면 넷째 방식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가난한 성도도 넷째 방식으로 자신의 곤고함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 삶은 다양한 국면을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 종류는 크게 4가지 신앙 방식들로 나뉜다. 이들로 신앙을 자가진단할 수도 있다. ​​신약 성경의 구원론이 첫째와 넷째만을 주장하는 듯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것은 헬라 철학에 익숙한 교부들이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으로 구약의 신학과 신앙을 잘 이해했다. 그는 구속과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방법으로 이해했다. 그의 구원론과 교회론은 결코 신국론을 무시하지 않는다. 신국론을 배제한 신학은 방향과 목표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경륜을 잘 알았다. 창조기사(창1-2장)에 바탕을 둔 즉 신국론에 근거를 둔 신학적/교리적 성경 해석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론과 교회론이 신앙 삶의 중심이 되며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주인 노릇할 것이다. 교회 중심의 신학은 성경적이지 않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66098379 요단 강에서 본 가나안
196 no image 마지막까지, 깨어 있어라(막 13장, 연시)
이상록
3420 2014-07-19
195 no image 교단에 만연한 민중, 해방 신학사상들 - 인본주의
박인철
3692 2014-07-15
독자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언론의 속성으로 인하여 작은 자나 그들의 일보다는 큰 자들의 일들과 말들이 크게 보도되므로 그에 대한 보도들이 그 큰 자가 속한 교단이나 신학교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 민중 독자들은 따르고 숭배하고 싶은 인물의 보도에 환호한다. 한 때에 소위 한국교회 복음주의4인방 이라는 말을 공적으로까지 사용하며 그들에 의하여, 그들을 이용하여 지면을 채워 가던 한국교계 신문들이었다. 독자들은 그들 4인방을 우상으로 하며 그들과 그들의 방식을 절대시하여 좇아다니며 흉내내며 따라하며 남에게 전파하는 것으로 자기 성취감을 만족하는 때가 있었다. 심지어 순복음의 조 모목사 같은 자까지도 그 우상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과 그들이 만들고 행하는 것들을 빼어 놓고는 설교나 강의나 대화를 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된 때도 있었다. 이렇게 자신이 어디, 누구로부터 왔으며 자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된 이들에 의하여 한국 장로교회, 칼빈주의는 무너져 내렸으며 자취를 잃어버렸다. 오직 부흥, 신복음주의에 의하여 이렇게 순식간에 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성경과 하나님과 예수는 내 필요에 의하여 뒤적일 때에 그 필요 충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일 뿐이고 머리속은 사람,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머리 속에 꽉차서 그를 지배하는 의식은 어떤 사람우상을 벗어난 예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철저한 인본주의자로 훈련되었음이다. 세상이 말하고 인정하는 종교는 다 기독교의 5-10계명의 내용에 충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종교로 취급 받는다. 이 땅은, 천상천하에 오직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그 창조 원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과 종교인들에게는 이 5-10계명이 경전이 되기도 하고 절대적 도덕율로 자리매김한다. 그 가운데에서 특별히 구분하여 택함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 5-10계명뿐 아니라 먼저 1-4계명을 잘 지키도록 배우고 훈련된다. 세상은 기독교의 5-10 계명의 내용이면 충분하다. 우리 기독교는 1-4 가 없이 5-10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1번 없는 2번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수 많은 교회들이 5-10계명으로 존재한다! 기독교, 예수교의 간판을 걸고 있다. 가르침과 훈련의 敎會가 아니라 사람들의 교제로 사람을 구원(?)시킨다는 소위 가정교회. 교회를 交會의 조직체로 만든는 교회들. 인민, 민중을 틀과 울타리와 속박에서 해방하여야 하고 사회를 통합하여 구원해야 한다고 한다. 사회구원을 위한 통합을 위해서는 예수만 구원자가 아니고 부처나 다른 신들로도 (5-10계명)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 민중 해방, 사회구원, 통합을 방해 하는 것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이들에게는 통합, 통일의 대상들이 부처냐, 공산주의자들이냐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 모든 것들과 함께하는 해방, 통합을 반대하는 것은 모두 적이고 제거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인간중심, 인간해방, 민중해방, 사회구원, 통합, 통일 ! 이 모토들은 인본주의 신학사상의 핵심적 공통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고 행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생각과 말이 정치적이며 권력에 대항적이다. 그들의 행위와 말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교회는 하나의 종교이고 그 활동의 발판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1-4계명은 없다. 그들에게는 5-10계명이면 충분하다. 손양원, 주기철목사는 오직 예수, 오직 진리뿐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예수를 전했을 뿐이다. 순교하거나 살아 남은 순교자들이 신사참배 하지 않은 것은 일본제국에 대한 반대표시로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하나님께 경배 외에는 할 수 없음을 행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땅에 남한을 준비하시고 해방을 주신 것은 해방운동 때문이 아니라 일제가 패망을 앞두고 마지막 발악으로 8.17일, 그동안 신사참배 반대 등, 속을 썩인 자들 리스트에 올랐던 주의 종들과 참 그리스도인들을 일거에 검거하여 재판 없이 처단하려 했던 것에서 주의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함인 것은 해방 후에 명백한 자료들로 드러났음이다. 6.25 전후, 이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봉기하여 반기독교, 공산정권에 대항하지 않고 고향의 모든 것을 버리고 월남한 것은 그들을 피하여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땅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함이엇다. 청교도들이 영국정부에 대항하지 않고 다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피한 것은 오직예수,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악한 정권, 로마에 대항하지 않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 또 피하여 숨어서 수백년을 카타콤에서 신앙생활 한 것은 오직예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땅과 하늘의 전능자의 아들 예수께서도 가이사 정권에 대항하지 않으시고 그의 것은 그에게 주고 달라는 세금을 주라 하신 것은 하늘에서 이루신 뜻을 이땅에서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그의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칭찬 받은 라합의 거짓말은 악한 자들과 그 정권을 피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 받기 위함이었다. 이런 행위들이 민중해방신학 사상가들에게는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무조건의 통일, 통합에 반대하는 정권이면 악한 정권이며 이는 꼭 대항하거나 거꾸러뜨려야 하며 통일과 통합하려면 어떤 자들과도 화합하여야 하는 것이다. 결코 피하거나 도망하거나 나누면 안되는 것이다. 다른 곳보다도 합신교단 안의 가정교회파. 해방신학 / 민중신학파들의 생각과 행적은 거의 모든 것에서 일치하며 동시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교단, 교파의 개념이 없으니 교리의식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런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그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유주의 교단인들과도 손잡으며 WCC에 앞장서기도 하며 동조한다. 심지어 종파 의식조차도 없는 자들은 단군우상의 북조선과도 그냥 통일만 외쳐대며 절간과도, 모두와 손잡고 통합을 외친다. 그들에게도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화합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속에 들어가서 김부자, 부처님 찬양을 먼저 한다. 그리고 예수사랑을 전한다고 한다. 무조건, 모든 것에 통일, 통합이라며 일을 만들며 외치며 돌아다니며 교계 어느 신문에 어떻게 기사가 났는지 살핀다. 이런 해괴한 신학자(?)들이 그간에 합신과 교단의 주류로 행세해 왔다. 그들의 유명세 때문에 다른 교단에도 그렇게 알려졌다. 합신과 합신교단이 최근 수년간에 보수교단의 자부심이 아니라 걱정거리가 되었다. 이들에게는 1-4계명은 없다! 오로지 5-10계명만 있는 인본주의자들의 표본이다. 속을 들여다 보면 그들에게 하나님은 없다. 오로지 인간에 관한 것 뿐이다. 그들은 언제나 똑같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께 붓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사람이 우선이다. 사람을 우선으로 선을 베푸는 척 하지만 결국은 그 전대에서 따로 돈을 떼어먹는 자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것을, 선을 베푸는 명분을 붙여 결국은 자기들의 자리를 위한 것으로 쓴다. 보면 다 보인다. 첫번 째 없는 두번째만을 전부로 말하는 자들의 전형이다. 탈을 쓰고 있어도 가롯유다는 처음부터 가롯유다이다. 사도에서 제하여 버리든지, 그런 자들의 세력이 크면 떠나든지 이다. 교회 안에서 1 -4 계명!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말해지는 5-6계명은 인간교제를 위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일 뿐이다. 바른생활의 얘기들이 마치 바른신학, 바른교회인 것으로 그럴듯하게 종교의 본질로 왜곡되어 개혁주의목회로 합신 교정에서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외쳐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소리 높이는 그들 교회의예배나 운영 등, 실상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오히려 큰 걱정거리 교회인 것이다. 그들의 바른생활교회의 결국은 인간 자신들의 이름이나 입지를 위한 민중해방, 사회구원 신학사상으로 가는 것이다. 
194 no image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
박종훈
3383 2014-07-13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 필자가 속한 전북노회의 교역자회로 이번에는 군립공원인 순창 강천산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각 교회를 돌아가며 예배와 서로의 형편을 나누며 기도하는 교제를 가지지만 참여율은 반절을 넘지 못한다. 공적으로나 사적인 많은 일들이 모임을 어렵게 한다. 필자도 현실적인 환경을 봐서는 참석하기 쉽지 않는 형편이다. 별로 큰 도움이 안 되는 부업인 농사지만 이것저것 심고 가꾸는 농작물의 종류가 다양하게 주인의 손길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석하는 편이다. 친절한 네비 아가씨는(?) 넓고 쉬운 고속도로로 추천하지만 일부러 국도를 선택하고 길을 나섰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오월의 신록(新綠)의 풍경을 만끽하며 두 고갯길을 넘어가는 조금은 험난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으로 보상해주었다. 필자가 사는 곳은 비교적 중산간지대여서 사방을 둘러봐도 낮은 곳은 논이고 조금 높은 곳은 밭으로 펼쳐진 농토이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해안 쪽은 낮은 평야지이고 동쪽은 높은 산간지대로 형성되어 하늘의 위성지도로 보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금수강산이다. 땅에서는 고개를 넘어가면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다. 흔히 인생을 ‘길’이라고 표현을 많이 한다. 힘들고 고통스런 오르막길이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운 내리막길이 있으므로 인내하며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또 다른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그 외줄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게의 중심을 평형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도 사실 균형을 무시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좁게는 선박의 수용능력과 실제 적재량과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고 넓게는 국민들의 경제적 번영의 풍요와 달리 원칙과 준법정신이 뒤따르지 못한 후진국형 재난으로 기억되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농촌 교회를 섬기며 늘 부담이 되는 문제는 평생 미자립이란 현실과 환경적 요인이다. 같은 시골이라해도 리 단위 지역은 가장 밑바닥의 낙오지나 다름없다. 어언 만 20년을 넘게 개척하여 선교하였지만 노인들과 장애인들이 대부분이다. 날마다 달마다 늘 물질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에 스스로 낙심도 하며 그런 중에서도 채워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늘 체험하며 살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을 위하여 고민하는 것은 부업으로 농사를 짓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농사일에 빠지다 보면 본질을 놓치는 경우 둘 다 실패하는 예를 많이 보고 들어왔기에 그 동안 망설이고 주저했던 것이다. 이제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이 년 전부터 농사일을 조금씩 시작했다. 작지만 가족 농으로 친환경 순환 농법식이다. 흑염소를 사육하면서 농산물 부산물로 먹이를 제공하며 가축에서 나오는 거름을 활용하여 다시 밭으로 되돌리는 옛날 선조들이 해왔던 방법이다. 일에 얽메이지 않으면서도 기존 농부들처럼 지나친 간섭과 돌봄으로 농사일이 힘든 과정이 아닌, 최대한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과정을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목회자이기에 총회나 노회의 여러 공식 모임도 자주 참석하는 편이다. 때로는 3일간 집을 비우는 경우라도 가축들이나 작물들이 지내는데 아무 지장 없도록 여유 있게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특히 총회적인 모임은 강의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목회자의 재교육 차원에서 배우며 본질을 다시 찾아가도록 하는 유익을 준다. 더불어 나와 다른 지역의 풍경과 삶의 방식을 경험하며 일상을 벗어나서 아내와 같이 남이 해주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도 누린다. 집에 있으면 환경이 늘 바쁘게 돌아가지만 밖에 나오면 여유로움을 누리게 한다. 좀 더 멀리 넓게 깊게 보는 시야를 가지는 유익을 얻는다. 아프리카 격언에 ‘빨리 가고 싶다면 홀로 가라.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인생길은 멀리 가는 길이다. 더불어서 천천히 그러나 조화(調和) 이루며 가고 싶다. 주위를 돌아보며 나 자신을 볼 줄 알며 나를 통하여 주위가 유익이 되었으면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금 늦게 도착하니 먼저 온 동역자들이 준비해온 김밥으로 점심을 나누고 있었다. 오고가는 대화중에 저마다 나름대로 어려운 현실을 들으며 서로 위안과 용기를 갖게 하는 교제이다. 식사를 마치고 걷기 좋은 평지로 숲과 개울이 어우러진 길을 걸으며 모든 것이 적당한 질서와 절제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자연의 풍경을 피부로 느꼈다. 아니 조화와 균형이 아니면 이 자체가 유지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숲길을 따라 만나는 탐방객들의 모습 속에서도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볼 수 있었다 에너지를 채우는 것과 소비하는 것, 받는 것과 주는 것, 노동과 쉼을 위하여 이 자리에 오는 사람들이라 여긴다. 산책길의 숲 쪽에는 방부목으로 만든 인공적인 길을 만들어 놓았다. 좀 더 숲에 가까우면서도 걷기 편한 길이지만 이 공사를 위해 땀 흘렸을 노동자들의 수고가 느껴진다. 과정을 전혀 모르면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십여 년 이상을 건축공사를 해 본 필자로서는 보기만 해도 눈에 그려진다. 흐르는 시냇물이 소리를 내는 것은 잘 정비된 하천이 아니라 장애물에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이다. 우리의 인생이 평탄하다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낮과 밤이 교차하듯이 음표에 높낮이가 있어야 노래가 되듯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 즐거움을 주듯이 살아가는 인생길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영원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생활을 벗어나 동역자들과 자연과의 만남을 통하여 또 새로운 힘을 주고 받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활뫼지기 박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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