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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47 2010-07-23
33 no image 사실과 의미로 본 성경 본문(2) 파일
장창수
2329 2011-05-26
(부제: 사실을 자세히 관찰하라!) 성경은 기록 시대에 속하는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신구약 시대 사람들은 농경 사회에서 살았다. 성경도 농경 문화의 옷을 입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의미들이 식물학적 용어들에 의해 전달된다. 그 의미들이 놀랍게도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전달된다. 원복음(창3:15절)에서 약속된 메시아는 ‘여인의 씨’(국역에선 여인의 후손)로 소개된다. 출애굽 사건 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처음 열매로 소개된다(렘2:3절, 롬16:5, 약1:8절 참조). 남방 유다를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심판은 씨를 심기 위한 기경(起耕)과 알곡을 거두는 추수(秋收)라는 농사로 설명된다(사28:23-29절). 세례 요한도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성령 강림 사이 관계를 추수 개념으로 설명했다(마3:11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12절) 예수님은 멍에라는 농기구를 이용하여 칭의와 성화를 설명했다(마11:28-30절). 천국의 비밀을 알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복음은 씨로 그러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피택자는 씨로 각각 설명된다(마13장).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은 첫열매로 소개된다(고전15:20절). 농학(農學)이나 식물학(植物學)이란 과학을 이용하여 성경은 구속사적 의미를 설명한다. 영적(靈的) 의미가 농경 문화나 식물학에 실려있다. 이로써 구속사적인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 순수하게 영적 의미만 추구한다면(조직신학적 방법) 성경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성경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다. 조직신학이 갖는 문제이다. 성경 신학이 이를 보완해 준다. 그러나 성경 신학도 주제별 연구에 치중하며 성경의 풍성한 의미를 충분히 알아내지 못한다. 풍성한 이해를 위해 영적 진리(眞理)를 담은 용기(容器)인 문화와 역사도 잘 관찰해야 한다. 복수(複數)의 의미를 띤 단수(單數)의 씨 씨는 하나이다. 그러나 그 안에 수많은 동일한 씨들이 잠재적으로 숨어있다. 한 알의 씨앗이 250개의 낱알을 가진 열매를 네댓 개 맺는 옥수수로 자란다. 결국 한 알이 일 천 개의 씨앗들로 나타난다. 뿌려진 한 알과 수확된 씨들 사이 질적 차이는 전혀 없다. 한 개의 씨앗은 단수로되 복수의 의미를 가진다. 씨의 이런 식물학적 역할과 기능은 원복음(창3:15절)의 내용을 잘 해석해 준다. 천적(天敵) 사이인 여인의 씨와 뱀의 씨는 각각 한 알이지만 때때로 복수의 의미도 갖는다. 어느 때는 여인의 씨가 원복음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올 메시아를 소망하며 사는 많은 신자들로서 그의 혈통적인 조상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특정한 때 이 씨는 뱀 자체와 싸워 승리할 메시아를 뜻한다. 그의 대표적인 승리는 그 안에 감추어진 수많은 씨들의 승리가 될 것이다. 이 점에서 한 알의 씨는 집합적 성격 때문에 ‘대표적 단수’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역할과 기능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그대로 적용된다. 예수님은 혼자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뒤 부활했다. 그러나 이 때 그 안에서 성도들도 함께 죽고 부활했다(롬6:5절). 이 점에서 신약 성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in Christ’라는 표현은 ‘with Christ’라는 표현과 같다. 그러나 전자는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 수직적 관계를 그러나 후자는 수평적 관계를 각각 뜻한다. 수직적으로 예수님은 대표자로서 구속주라면 수평적으로 그는 맏형으로 구속 받은 형제들과 같이 혈과 육을 입었다(롬8:29절). 원복음에서 앞으로 올 메시아가 ‘여인의 씨’로 소개된 것은 처음부터 성경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였다. 농경 시대 ‘씨’보다 메시아를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장래 나타날 모습을 감춘 씨 사람들은 씨들을 살 때 초라하고 조그만 모습을 보지 않는다. 그 씨의 다 자란 모습과 그 열매를 미리 알고 있다. 씨의 이런 식물학적인 역할과 기능을 성경은 이용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앞으로 올 메시아를 이렇게 예언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2절) 본래 연한 순과 줄기는 고운 모양도 없고 그리고 풍채도 없다. 마찬 가지로 원복음이 약속한 메시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를 기다린 선민조차 그에게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이사야는 미리 예언했다. 신약 시대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선민은 나사렛 출신 청년이라고 말하며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 행하는 일을 보고 선민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어야 했다. 더구나 그는 앞으로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하나의 초라한 씨로 출발했지만 예수님은 나중 자신의 찬란한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창세 전부터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오랜 동안 선민에게 이미 계시되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지상 삶과 공생애에 대해 기록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5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1:10-11절) 나중 예수님도 천국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로 비유하며 설명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절) 흠모할 만한 모양도 없는 나사렛 예수님에 의해 출발된 하나님 나라는 놀랍게도 초라함 속에 찬란하고도 영광스런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씨들은 그 안에 고유의 모습을 지닌다. 이 점에서 씨들은 다 다르다. 시작은 다 같아 보인다. 그러나 나중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처럼 벌어진다. 사도 바울이 이를 설명했다.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15:37-38절)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그리고 아들의 부활이 식물학의 도움으로 사도 바울에 의해서도 아주 훌륭하게 설명되었다. 바울도 구속사가 식물학을 이용하여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음을 알았다. 이런 방법으로 신학적인 주제(의미)는 쉽게 소재(사실)를 통해 설명된다. 이렇게 이론적이며 논리적인 조직 신학의 한계와 단점은 극복될 수 있다. 기적적인 생명력을 소유한 씨 피라미드에서 일 천년 동안 밀의 씨가 발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이 씨앗을 심자 싹을 내고 자랐다. 씨는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이 맞지 않으면 씨는 절대로 발아하지 않는다. 때와 시기를 기다리며 생명력을 감춘다. 씨의 이런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된다(사55:10-11, 벧전1:23절). 씨의 식물학적인 기능을 이용하여 예언과 성취가 잘 설명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준 예언과 계시의 말씀을 먼저 준다. 그러나 성취와 완성을 위해 하나님은 환경을 섭리하고 조정한다.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대소선지자들은 주전 8세기부터 남북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건설을 동시에 예언했다. 이 예언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 40년 정도 지나 문자적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 약 800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곧 선지자 시대가 끝났고 그리고 신구약의 중간기 450년 정도 지난 후 예수님이 출생했다. 이 동안 약속의 말씀인 씨는 싹을 내지 않고 생명력만 유지했다. 이 싹이 발아하여 자라려면 주어진 여건이 변해야 했다. 이에 대해 이사야가 예언했다.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6:11-13절)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망한 남북 왕조의 백성들은 전세계로 흩어졌다. 흩어진 곳에 이들은 회당들을 세웠다. 나중 이 회당들은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중 세계를 제패한 로마 제국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군사용 도로를 만들었다. 모든 길들은 로마로 통했다. 나중 이 도로망은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우편 제도가 되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 아래 모든 민족들이 자유로이 이동하며 교제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여건을 “때가 차매”란 표현(갈4:4절)으로 설명했다. 이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출생했다. 신약 시대 로마 제국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최대한 이용하며 복음은 전세계로 쉽게 퍼졌다. 마침내 주후 313년 로마 제국은 그 동안 핍박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씨의 생명력은 무엇을 목적하는가? 수확 즉 열매를 목적한다. 하나님도 뿌려진 복음의 씨를 통해 실패 없이 열매를 거둘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제 시간에 맞춰 은혜의 단비를 주며 빈틈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일할 것이다. 그러나 열매를 거두려면 먼저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심어져야 하며 그리고 땅 속에서 썩어서 죽어야 한다. 예수님 자신이 설명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절) 식물학적 기능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를 놀랍게 설명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의 성취 및 완성 등등을 씨의 식물학적 기능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성경은 구속사를 설명하기 위해 식물학이라는 자연 과학을 잘 이용했다.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세상의 초등학문이 이용된다. 과학도 하나님의 창조 결과이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믿음과 상식은 대립적 이분법이 아닌 논리적 이분법에 속한다. 첫열매의 식물학적 기능 한 알의 씨앗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사흘 뒤 부활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부활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0절) 유감스럽게도 러시아 성경은 ‘장자’로 번역했다. 그러나 장자보다 첫열매가 훨씬 더 신학적인 의미를 풍성하게 전달한다. 잠자는 자들이란 앞으로 올 메시아를 믿고 소망하며 살다가 죽은 성도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들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뒤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동일한 부활이 곧 시작될 것을 알리는 반가운 신호와 소식이었다. 마찬 가지로 ‘첫열매’란 표현과 용어도 식물학적으로 그런 의미를 갖는다. 여건이 맞으면 땅에 심겨진 씨는 반드시 싹을 내며 자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부활했다고 기록된다(롬8:11, 고후13:4, 엡1:20절).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애초부터 부활을 겨냥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죽음과 부활은 분명히 두 사건이지만 논리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신약 성경도 유월절과 무교절을 같은 절기로 기록한다(눅22:1,7절 참조). 신구약 성경도 3일이라는 시간 간격으로 이 두 사건들을 하나로 연결시켰다. 그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구속(엡1:7-12절)의 결과는 어떻게 성도들에게 개인적으로 전달되는가? 오순절 강림한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은 하나의 논리에 속한다. 이를 알리기 위해 신구약 성경도 50일이라는 시간 간격으로 두 사건들을 긴밀히 연결시킨다. 성령은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고 앞으로 이들이 받을 기업의 보증 역할을 한다(엡1:13-14절). 이를 구약 성경의 절기들이 설명한다. 유월절과 무교절 사이 3일이란 간격이 있다. 그리고 이 절기들 사이에 낀 안식일 다음 날 이스라엘은 보리의 첫 열매를 수확하여 단으로 엮어 성전에서 요제로 하나님께 드렸다(레23:9-11절). 이 때 보리의 첫 열매는 그 해 처음 수확한 그 땅의 열매이다(레23:10절). 히브리어로 ‘레쉬트’인데 ‘첫째(first)’, ‘시작(beginning’, ‘최고(best)’와 ‘우두머리(chief)’란 뜻이다. 이 수확물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마침내 얻었다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첫열매로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했다. 구약에서 이런 의미를 갖는 첫열매가 부활한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수님도 안식일 다음날 즉 일주일의 첫날 부활했다(마28:1절). 첫열매를 드린 후 50일 뒤 또 다시 밀의 첫 수확물로 만든 두 개의 유교병을 이스라엘은 하나님 전에서 첫 요제로 드렸다(레23:15-17절). 이 첫 수확물은 이스라엘이 기업을 얻은 후 직접 농사를 지어 처음으로 거둔 밀의 맏물이다(출23:16,19절). 히브리어로 ‘비꾸르’로써 ‘맏물’이란 뜻이다. 이 맏물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자신의 기업을 마침내 상속받았다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의미가 그대로 신약 시대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의 사역에 적용된다. 성령을 통해 선민은 물론 이방인들이 위로 거듭나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요3:1-15, 행2장). 이 점에서 신구약은 다르지 않다. 구약의 절기들처럼 예수님의 공생애(요4:35절), 죽음과 부활, 성령 강림 사건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사건은 모두 추수와 연결된다. 추수란 심음의 결과이며 목표이다. 이 점에서 성경에서 추수는 종말론을 뜻한다. 종말론적 추수는 예수님의 부활로 출발하며 오순절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이 세상의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추수는 가을의 절기인 수장절을 지킴으로 완전히 끝났다. 이 때 온갖 열매들의 맏물들(비꾸림)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졌다(신26:1-11절). 그렇게 한 해가 끝났다. 이런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 삼대 절기들은 매년 이스라엘에서 반복적으로 지켜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한 명령이었다(출34:23-24절). 이렇게 구약의 절기들은 신약의 종말론을 예언했다.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복음은 전세계로 전파될 것이다. 이로써 계속 추수는 전세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언젠가 추수가 끝날 때 세상의 종말도 그 종막을 고할 것이다(마24:14절). 종말론에서도 신구약 사이 차이는 전혀 없다. 다만 추수 장소에서 차이가 있다. 구약 시대 가나안에서 벌어진 추수가 신약 시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진다. 결론 성경에서 사용된 농경 시대의 용어들과 단어들은 구속사의 설명을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 저자에 의해 선택되었다. 성경 진리를 이해하려면 사고 방법을 디지털 식에서 에너로그 식으로 되돌려야 한다. 즉각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접고 인내력을 갖고 옛 농경 문화의 내용을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 방식은 특별 계시가 자연 계시에 속하는 세상의 학문과 과학을 무시하지 않음을 말한다. 특별 계시가 자연 계시에 실려 전달되듯이 성경의 구속사도 세속사를 통해 표현된다. 그렇다면 믿음이나 신앙은 세상 상식이나 과학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 계시, 세속사, 과학과 상식이 특별 계시를 무시한다면 이들은 역으로 특별 계시의 해석을 방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설교할 때 자연 계시들을 무작정 인용할 수는 없다. 성경 저자처럼 세심하게 자연 계시를 선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특별 계시의 신학적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조직신학(의미 중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의미를 추구하는 방법도 병행해야 한다. 성경은 사실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을 자세히 관찰함으로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알 수 있다. 성경의 기록 방법대로 본문을 해석함이 최고의 방법이다. 성경 본문의 사실을 더욱 자세히 관찰하라! * http://blog.naver.com/rassvet
32 no image 자유도 부정할 수 있는 자유
장창수
2530 2011-05-22
(부제: 자유마저 부정한 사도 바울) 예수님은 자유에 대해 말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절) 사도 바울도 말했다.“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절) 예수님은 자유를 얻는 방법에 대해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유의 적용 방법에 대해 각각 말했다. 사도 바울이 자유에 대해 더 말한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9:1절) ‘자유’라는 추상명사를‘사도’라는 구상명사와 관련시켰다. 자유라는 원리에 의해 사도라는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고 그가 말한다. 진실로 그는 자유자의 상태에서 사도가 되었고 사도가 된 후에도 여전히 자유자로 살았다. 목회자나 지도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그가 잘 설명해 준다. 성공과 출세가 가장 큰 가치이며 인생의 목적인 유교 문화권에서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성공이 가져다 준 달콤한 열매를 즐겨야 한다는 이기적인 소원이 지나치게 강하며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권위와 권세를 초법적 또는 탈법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이런 잘못된 노력과 자세는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역력하다.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국방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자녀들만은 이 의무에서 면제시키려 한다. 이들은 사도 바울의 자유를 완전히 비웃는다. 이런 통치자와 지도자는 흐르는 시간과 함께 가진 권력으로 인해 서서히 부패한다. 자기 부정을 모르는 소치이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갔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절) 그는 진정한 자유에 이른, 다시 말해 완숙한 신앙 경지에 이른 성도이며 동시에 사도였다. 목회자를 포함한 성도라면 누구나 이런 신앙 경지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정도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을 잘 알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자신의 권리를 유보시킬 수 있는 자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보다 한발 더 앞서 갔다.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 위에 대속물로 드렸다.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도 자유자였다. 그도 예수님처럼 한 걸음 더 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마저 부인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함이었다. 유교 문화권의 통치자나 지도자는 도저히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신앙의 최고 경지에 달했다고 생각할 때 흔히 목회자를 비롯한 성도는 마치 다 끝난 듯이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때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과 칭찬을 주고 그는 이를 즐기며 은근히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수양(修養)을 통해 최고의 도덕적 경지에 달함을 전혀 목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인은 진리의 깨달음을 최고의 경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본(本)을 따라 자신이 도달한 자유의 경지마저 부인했다. 그리고 기쁘게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 주었다. 더 높은 차원의 헌신과 봉사로 나가기 위함이다. 이것은 성숙한 신앙 경지와 그것이 주는 만족감 자체를 부인하고 자신을 낮춤으로 비로소 가능하다. 그럼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자유를 부인하고 스스로 종이 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자기부정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면 성도들이 그 만큼 영혼 구원에 소홀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런 성도 자신이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에 장애 내지 방해될 수 있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자신을 낮추며 기꺼이 종이 되어주었다. 그는 율법주의자에게 그와 같이 되었고 그리고 율법폐기주의자에게도 그와 같이 되어주었다(고전9:20-21절). 그리고 할례자에게 그와 같이 되었고 무할례자에게도 그렇게 되어주었다. 그는 예수님을 철저히 배우고 실천했다(빌2:6-8절). 주 안에서 얻은 자신의 자유마저 부정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신앙과 윤리의 최고 경지이다. 누구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사도 바울이 답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자의 종이 되려면 자유마저 부정할 수 있는 자유를 소유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주님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의 헌신과 봉사가 가능하다. 이렇게 자기부정은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이다.
31 no image 성공 후에도 자유자가 되라!
장창수
2341 2011-05-22
(부제: 사도 바울의 자유) 바울은 사도이기 이전 먼저 자유자였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9:1절) 사본에 따라 이 본문은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라고도 고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바울은 사도로서도 자유자였다. 사명을 받은 후에도 지도자 또는 목회자는 계속 자유자로 남아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여기 있다. 자유자였던 바울은 먼저 자유를 누린 후 사명을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사도로서 자유자인 바울은 직분을 맡은 후에도 계속 자유자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즉 지도자나 목회자는 사명을 맡기 이전이든지 이후이든지 자유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높은 직분일수록 누릴 수 있는 권세와 영화는 그만큼 더 커진다. 그러나 성공은 성공자로 하여금 도덕적 경각심을 느슨하게 만든다. 가진 권력을 자신을 위해 오남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바울이 권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유혹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구약 시대 삼손이 그러했듯이 미국의 클린턴 전대통령, 불란서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유력한 IMF총재 그리고 두 번이나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일한 전직 유명한 배우는 공직 중 성적 불륜을 각각 저질렀다. 권력은 돈과 여자를 끌어 모으기 때문이다. 인격적 성숙이 지도자에게 중요한 이유이다. 고린도 전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성도가 실족하지 않도록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보여 주었다. 교리라는 지식 면에서 자신을 자제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9장에선 좀 다르다. 베드로처럼 사도 바울도 교회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이 권리를 유보(留保)시켰다(고전9:12절). 당연한 권리와 권세를 유보시키는 자유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9:12절)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15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16절)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18절) 사도로서 바울은 정말 사려 깊게 자신의 사역을 수행했다. 이런 사려와 자유가 오늘날의 지도자와 목회자에게도 필요하다. 내용상 위에 언급된 이유들은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 둘로 나누어진다. 이기적인 이유들은 자신의 자랑이 헛된 데로 돌려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과 앞으로 받을 상급을 크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타적인 이유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과 복음 전파란 자신이 부득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도 사도의 권리를 기쁘게 유보할 수 있는 자유자였다. 사명이 주어지기 전 성도는 누리는 것이 적어 비교적 자기를 쉽게 부정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명이 높아질수록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영화도 그만큼 더 커진다. 이럴 때 자유자로 산다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그리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까지 지도자 스스로 유보한다는 것 자체도 그리 쉽지 않다. 그렇게 하면 바보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지도자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소유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소명 차원에서 주님과 복음을 위해 그리고 소망 차원에서 자신의 상급을 크게 하기 위함이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좋은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대의(大義)를 생각하고 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라고 사도 바울은 충고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신자를 비롯한 목회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코 앞에 보이는 이익에 집착하고 몰두한다. 눈에 안 보이는 내세(來世)보다 현재 눈에 보이는 현세(現世)가 이들에게 더 매력적이다. 화려하게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거절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오늘날 지도자나 목회자에게 자기를 부정하려는 노력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실패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큰 망신과 수치 그리고 부끄럼을 당할 것이다. 한번 맛들이면 끊을 수 없고 잘못된 습관이 길어지면 반드시 꼬리가 잡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명 이전보다 이후 더 철저히 자기부정에 힘써 자유자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에 실패한다면 성공 후 망한다. 역시 자기부정은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24039230
30 no image 먼저 자유자가 되어라!
장창수
2284 2011-05-20
(부제:자유자 바울)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9:1절) 놀랍게도 자신의 사도 직분을 자유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그가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사본(寫本)에 따라 자유자와 사도가 뒤바뀐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이 두 사본들은 모두 다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자유자가 사도라는 직분보다 먼저 기록된 사본은 바울이 자유자로서 사도가 되었다고 증언한다. 사도가 되기 전 바울은 자유자였다. 사도로 부름 받기 이전부터 자유자로서 그는 신앙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사명을 받기 이전 먼저 자유자여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성공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를 지배한다. 우리는 성공에 이르는 과정을 고통으로 생각한다. 그 과정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보며 즐길 마음의 여유를 갖질 못한다. 삶에 자유가 없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일단 성공하면 그 결과 얻어진 모든 열매를 그 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알고 마음껏 누리고자 한다.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장래를 위한 성장도 멈춘다. 서서히 성공자는 이기적인 공인(公人)으로 드러난다. 성공 후 추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이다. 그러나 만약 실패하면 깊은 좌절에 빠지거나 자살한다. 고진감래라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가치가 인생에 반드시 다양하게 발생하는 행불행에 대한 대응 능력이나 회복 탄력성을 낮춘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이유이다.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목회자는 주의 양들인 성도들을 목양(牧羊)해야 한다. 목회자는 모든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되기 전 즉 성도 시절부터 이런 자유를 소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신을 영멸에서 구원시켜준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를 알고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자유는 신앙 삶에 기본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를 배우지도 못하면서 직분을 받을 수 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 사람은 사명 맡을 준비가 전혀 안 된 지도자이다. 그런 목회자는 목회를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는 항상 자신을 위해 일하면서 교회의 화목보다 분열을 조장한다. 나라의 지도자가 출세지향적인 인물이라면 큰 불행이다. 그럼 사도 바울은 어떤 내용의 자유에 대해 말하는가? 고린도 교회에 우상 제물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고전8:1절). 믿음이 크고 강한 교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우상 제물을 마음대로 먹었다. 그러나 믿음이 작고 약한 교인은 이를 떠라 하다가 그만 실족했다. 우상 제물을 먹는 소위 믿음이 좋은 신자가 교리적으로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덕을 세우는 면에서 이들이 잘못했다고 사도 바울은 보았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절) 여기 우리를 위한 가르침이 발견된다. “바른 신학이나 교리 그리고 그에 따른 행위만 과시하듯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그런 과시가 혹 형제를 실족시키지는 않는지 잘 살펴라!” 사도 바울은 바른 지식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식에 따른 행동이 다른 성도를 실족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지식과 그에 따른 행위를 유보(留保)시켜야 한다. 이 점에서 지식은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아니면 그 지식이 교만케 한다. 바울도 충분히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믿음과 지식을 소유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보다 지식과 믿음을 유보시켰다(고전8:13). 위에서 언급된 자유자란 바로 이런 자유의 소유자이다(고전9:1절).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도는 무엇보다 먼저 이런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러나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에게 이 권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들은 리더십이나 목회를 주로 은사나 재주로 생각한다. 이들이 인격 성숙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학위만 획득하면 그리고 자신의 능력만 충분히 보여준다면 충분히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식이나 은사는 지도자를 교만하게 만든다. 유감스럽지만 지식은 사랑과 별개이다. 지식이 은사라면(고전12:8절) 사랑은 인격적 성숙에 속한다. 은사는 성숙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마찬 가지로 지식도 사랑에 의해 견제되어야 한다(고전13:2절). 이 때 자신의 지식과 이론적인 옳음이나 정당함을 유보시키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런 자유는 자기부정에서 나온다. 이웃 사랑은 항상 자기부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고전13:4-7절). 자기부정이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인 이유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
29 no image 사실과 의미로 본 성경 본문 파일
장창수
2984 2011-05-08
(부제: 성경 기록대로 설교하라!) 사실(事實: fact)과 의미(意味: meaning)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들은 철학에서 말하는 질료(質料: material)와 형식(型式: form) 또는 틀 사이 관계와 같다. 내용인 질료는 항상 형식이라는 틀의 제한을 받는다. 형식을 통해 질료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의미(질료)도 사실(형식)을 통해 전달된다. 학문 연구의 편리성을 위해 학자들은 때때로 이 둘을 분리시킨다. 이 둘 사이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런 분해와 분석을 통해 의미도 또한 잘게 분석된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논리적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실제로 사실(역사적인 사건)과 의미(교훈적 가르침)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맞물린 톱니 바퀴처럼 그 사이가 유기적(有機的)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실 자체도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사람의 몸은 여러 가지 뼈들과 살 그리고 각종 장기들로 구성된다. 이들 사이 유기적인 관계가 있고 그 덕분에 사람의 생명은 잘 유지된다. 마찬 가지로 인류의 역사, 인간의 삶이나 인생은 어느 한 개념, 주제 또는 관점으로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며 통합적이다. 정치, 사회, 경제와 문화 등등, 이들이 복합적으로 서로 얽혀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자기의 관심 분야에 입각하여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사실 사물의 한 부분만 본 것이다. 시계를 연구한다면서 자신이 관심 갖는 부품 즉 부분만 연구한 셈이다. 부품들로 구성된 시계라는 연구 대상을 놓친다. 이런 분석적인 연구 방법 때문에 물리학은 위기를 만났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과학적 방법이 선호된다. 연구 대상이 부분들의 합임을 비로소 과학자들은 인식했다. 이 부분들의 합은 하나의 조직적 구조(systemic structure)를 형성한다. 당연히 부분들은 이 구조 안에서 서로 유기적이다. 통섭의 방법으로 물리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연구 방법은 학문 간의 경계선을 허물고 서로를 아우르며 과학을 한 단계 높게 발전시켰다. 우선 창의성이 살아났다. 예전 온통 기계 덩어리였던 자동차가 이젠 40% 정도의 전자 부품들로 구성된다. 훨씬 성능이 좋은 자동차 생산이 가능했다. 학문과 기술 사이 경계선이 허물어진 결과이다. 이제 통섭적인 연구 방법이 학계의 대세이다. 유기적 성격의 신학과 인문학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의 신학들은 각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자신의 경계선 안에서 학문적 권위를 즐기려 한다. 그러나 실천신학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알려주는 조직신학,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 진리를 연구하는 성경신학 그리고 어떻게 성경 진리가 교회사에 반영되는가를 연구하는 역사신학, 모두의 도움을 요구한다. 성경 본문이 하나의 유기체(有機體)와 같기 때문이다. 첫째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적인 사건들이 말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어느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주제(thema)들과 개념(concept)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문장의 구조와 문법의 도움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런 성격의 본문을 통해 저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이 가르침은 복합적이다. 그리고 신앙 삶 자체도 그렇다. 그러므로 신학들 사이 경계선을 허물고 서로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계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예수에 대한 논쟁은 역사적 예수와 교리적 예수, 둘로 나뉜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교리적 예수에 그러나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집중한다. 전자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기독론을 정립시키려 한다. 그러나 후자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아래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고자 한다. 교리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는 충돌될 수 없다. 예수님은 신(神)이면서 동시에 인간(人間)이기 때문이다. 물론 논리적으로 이 둘을 나누어 연구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적 예수(질료, 내용)가 한 동안 역사적 예수(형식, 틀)에 의해 제한을 받았을 뿐이다. 시계를 부품으로 본다면 시계란 존재는 사라진다. 부분들이 합쳐질 때 비로소 시계는 존재하고 그 목적과 기능도 살아난다. 둘째 하나님은 역사와 문화의 옷(사실)을 입혀 자신의 의지와 뜻(의미)을 구체적으로 계시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는 진공 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이나 설교에서 신학적 가르침만으로 불충분하다. 인문학적 관점이 더해져야 한다. 출애굽 사건이 이를 잘 설명한다. 고집스럽게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로 계속 묶어두려 했다. 이의 원인이 둘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출4:21, 7:3, 9:12, 10:20, 27, 11:10, 14:4, 8절). 다른 한편 바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출7:13, 22, 8:19, 9:35, 13:15절). 전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신학적 결론이다. 그러나 후자는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결론이다. 그리고 이 원인들이 바로 인문학적이다. 신정정치의 시대 바로는 당시 최강의 제국인 애굽의 왕이면서 동시에 신적 존재였다. 종교적으로 애굽인의 신들이 히브리 노예의 신에게 굴복할 수 없었다(출5:2절). 정치적으로 애굽의 바로가 노예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출5:4-5절). 경제적으로 노예인 이스라엘은 두 도시의 건설을 위해 애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이었다(출1:11절). 그리고 국방 차원에서도 애굽을 지키려면 점점 강성해지는 이스라엘의 세력을 꺾어야 했다(출1:10절). 이런 인문학적인 요인들이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모세를 대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두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결과였다. 그리고 바로가 그렇게 가도록 하나님은 주인으로서 허용했다. 그러므로 성경이 기록한 두 가지 원인은 모두 맞는다. 이들은 전혀 충돌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허공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인문학적인 요인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문사회과학이 아닌 신학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관심사와 강조점이 다르기에 기록 방식에서 인문사회과학과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고 성경이 인문사회과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창조 기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인간을 창조한 후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 세계에서 살라고 명했다(창1:28절). 이 문화 명령의 목적은 인류가 하나님이 만든 자연을 이용하여 하나님 나라(통치)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창1:26절). 이런 활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라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도 이를 잘 설명한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 것이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영역(인문학)에서 하나님의 통치(신학)가 실현되도록 이스라엘은 노력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세속사는 바로 구속사이다. 선민의 구속사에도 신학에 근거를 둔 인문사회과학적 활동이 보인다. 신학에 바탕을 둔다면 세상 과학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오히려 유용하다. 유감스럽지만 기독교 교회는 지금까지 신학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신학과 신앙은 반드시 역사(시간)과 문화(공간)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즉 신학과 신앙도 진공(眞空) 상태를 싫어한다. 이 때문에 인류와 사람의 삶과 결별된 신학적 이론도 생명력을 잃는다. 그리고 실천신학 자체도 신앙 삶에 신학을 적용시키는 것을 목표한다. 신학의 존립을 위해서도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은 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자신을 다양하게 계시한다(히1:1절). 그러므로 성경 연구는 통시적 방법(의미로 본 사실)만 아니라 공시적 방법(사실로 본 의미)도 요구한다. 사실로 본 의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이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같은 속도(의미)도 위치(사실)에 따라 다른 속도감을 준다. 시속 60킬로로 달리는 차 안에서 사람들은 항상 그 속도를 느낀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차가 온다면 그 차의 속도를 더한 만큼 빠른 속도감을 갖는다.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면 두 차의 속도 차이만큼만 속도를 느낀다. 그러나 사실 그 자동차는 항상 60킬로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성경의 영원한 진리(의미)는 역사(시간)와 문화(공간)를 달리하며 다르게 설명된다. 구약에선 공의의 하나님이 그러나 신약에선 사랑의 하나님이 보인다. 신구약 사이 하나님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더 강조된 것뿐이다. 그렇다고 다른 속성을 무시하면 절대로 안 된다. 다른 좋은 예가 있다. 공사 현장에서 동료에게 ‘벽돌!’이라고 외친다면 “벽돌을 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나가는 행인에게 외친다면 그것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동일한 외침(의미)도 어느 곳(사실)이냐에 따라 달리 이해된다. 같은 의미도 장소와 시간을 달리하며 강조점이 변하며 달리 느껴질 수 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율법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 성도들은 은혜 아래 있다. 그렇다고 율법과 은혜 또는 율법과 복음은 서로 충돌하는가? 다음 성구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절) 절대로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강조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구약의 율법은 앞으로 올 메시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율법은 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대속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이 예수님을 믿는다. 시대를 달리하며 율법과 은혜가 달리 표현되었을 뿐 구원자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데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리고 구약 시대 율법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형식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신약 시대 은혜는 ‘하라!’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형식으로 이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다. ‘사랑하라!’는 시대를 초월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며 실천 방법 상 신구약 사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겉으로 보아 대립하는 것 같은 단어들과 표현들이 성경에 많이 있다. 사실 이들은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립적 이분법이 아니라 논리적 이분법에 속하는 짝들이다. 예컨대 믿음과 행함이다.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행함은 믿음에 원인을 두고 나타난 결과이다. 그리고 질료와 형식이라는 관계로도 설명할 수 있다. 믿음이라는 질료가 행함이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된다. 원인과 결과 그리고 질료와 형식, 이들은 대립적이 아닌 논리적인 이분법을 구성한다. 달리 설명된다. 믿음의 결과 새로운 신분을 획득한다(칭의). 그렇다면 그 신분에 걸 맞는 새로운 삶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성화). 즉각적인 영적 변화로 생긴 새로운 신분은 새로운 삶이라는 외적 변화로 서서히 나타난다. 인격과 삶 또는 신분과 직분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믿음과 행함도 마찬 가지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 사이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는 논쟁은 지극히 소모적이다. 의미를 제한하는 사실 결국 사실과 의미는 역사(歷史: history)와 논리(論理: logic)로 바뀐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통해 전달되는 신학적인 의미들은 성경에서 무질서하지 않고 정연한 논리 체계를 이룬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은 완전한 통일성을 보여주는 인격체이다. 다만 역사라는 형식이 논리라는 질료를 제한할 뿐이다. 교리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 두 진영으로 나누어진 기독론 논쟁은 아주 유익하다. 그러나 한 쪽에 서서 다른 쪽이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지극히 소모적인 논쟁이 된다. 이 둘 중 어느 한 쪽에 서서 논리적으로 예수님을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무대에서 예수님의 신인성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 기록에서 역사적 사실과 논리적 의미도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 해석에서 아주 중요하다. 성경 해석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경 진리가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알 것을 요구한다. 이를 알아낸다면 두 가지 유익이 따른다. 하나는 성경 본문 자체가 훌륭한 예화가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의미)을 오늘에 적용(사실)하도록 잘 도와준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장식품처럼 걸어놓고 하는 주제 설교와 제목 설교가 유행한다. 성경 본문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은 완전히 무시된다. 그리고 성경 밖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내 설교에 억지로 집어넣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지식을 전한다. 성경 해석이 금하는 ‘감정이입 식’ 설교이다. 역으로 성경 본문 자체에서 가르침을 끄집어내야 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 두 가지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성경 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 성경 본문이 구속사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이들 작업은 참으로 유익하다. 이로써 설교자에게 설교의 내용, 방향 그리고 목표가 분명해짐으로 자의적(恣意的)이며 주관적(主觀的)인 해석과 설교를 할 수 없다. 이를 위해 문맥과 함께 본문을 깊이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여야 한다. 관찰을 잘 할수록 그 만큼 형상화(形象化) 과정이 용이하며 그 후 추상화(抽象化) 작업도 더욱 쉬워진다. 달리 말한다면 정밀한 관찰 덕분에 구속사적인 무대와 기록 당시 역사와 문화라는 배경 아래 눈을 감고도 본문이 하나의 그림처럼 머리에 형상화된다. 이 때 비로소 설교자는 추상화 작업, 즉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가 쉽게 정해진다. 유용한 8단계 구속사 본문이 속한 구속사적 위치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의 구속사를 기록한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은 처음부터 목적한 바를 마지막까지 일관성 있게 구속사를 통해 보여준다. 이 덕분에 성경의 신학적인 가르침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논리적 흐름을 보여준다. 이 구속사에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계시처럼 구속사도 반복하면서 그 내용이 점점 더 풍성해지며 계속 발전한다. 이 덕분에 하나의 긴 구속사를 보다 짧은 단계별 구속사들로 나눌 수 있다. 아래의 8단계 구속사가 그것이다. 단계별 구속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성격, 내용과 논리적인 흐름을 잘 알려주며 성경 본문이 구속사의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 쉽게 알도록 도와준다. 1. ①창조 후 아담 ②창조 언약 ③아담의 타락 ④여인의 후손 ⑤실낙원 2. ①실락 후 아담 ②구속 언약 ③셋 후손의 연혼 ④노아 ⑤홍수 심판 3. ①홍수 후 노아 ②보존 언약 ③니므롯의 바벨탑 ④셈 ⑤흩어진 인류 4. ①아브람 소명 ②약속 언약 ③요셉을 판 형제들 ④유다 ⑤애굽 삶 5. ①모세 소명 ②율법 언약 ③사사 시대 ④룻기의 보아스 ⑤실로 성막 파괴 6. ①사무엘 소명 ②왕권 언약 ③분열 왕국 ④제 2의 다윗 ⑤솔로몬 성전 파괴 7. ①세례 요한 ②성취 언약 ③유다 민족의 거부 ④부활주 ⑤스룹바벨 성전 파괴 8. ①지상 교회 ②완성 언약 ③적그리스도의 활동 ④재림주 ⑤불 심판과 새예루살렘 강하 (*①은 하나님의 시작, ②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언약 체결, ③은 인간의 불순종, ④는 구속주의 약속 그리고 ⑤는 하나님의 심판) 예컨대 구약 성경의 룻기는 5단계 구속사에 속한다. 4단계 이하의 유구한 구속사는 이미 전개된 상태로 룻기의 역사적인 배경이다. 그리고 6단계 이상의 구속사는 앞으로 놀랍게 펼쳐질 획기적인 사건들로 구속사를 미리 내다보도록 돕는다. 가까이 본다면 룻기가 속한 5단계 구속사는 출애굽 사건을 배경하며 앞으로 곧 왕정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한다. 좀 더 가까이 본다면 룻기는 사사 시대를 배경하며 이 혼란의 시대는 실로 성막의 파괴로 끝날 것이다. 이것이 룻기의 구속사적인 배경이다. 그러나 룻기 자체에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따로 있다. 베들레헴에 사는 유다 지파 출신의 엘리멜렉과 모압 여인 룻 그리고 유다 지파에 속하는 보아스, 이들이 배경을 구성한다. 이들에 의해 펼쳐지는 삶(사실)에 의해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된 신학적인 가르침(의미)이 잘 설명된다. 반면 룻기의 구속사적인 배경은 혼란의 시대인 사사 시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들의 삶이 결국 다윗에 의해 본격적으로 열린 왕정 시대와 긴밀히 연결될 것을 알려준다. 이 때문에 룻기의 기록은 세속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이 점에서 룻기는 구속사와 무관한 세속사와 완전히 구별된다. 룻기가 효도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효도는 신앙에 기반을 두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윤리이다. 그러므로 룻기를 효도 차원에서만 설교한다면 이미 신학적인 가르침을 놓친 것으로 상식적인 설교가 된다. 이런 실수는 룻기가 갖는 구속사적인 배경과 의미를 무시한 데 있다. 결론 성경 해석과 설교를 위해 두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늘 익숙한 성경 본문(사실)에서 감추어진 신학적인 가르침(의미)를 찾아내는 훈련과 신학적인 가르침(의미나 주제)을 구체적인 상황(사실)에 연결시켜 설명하는 훈련. 전자가 소재에서 주제를 찾는 능력이라면 후자는 주제를 소재로 연결시키는 능력이다. 달리 말한다면 흔히 아는 것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능력과 귀한 것을 흔히 아는 것으로 바꾸는 능력을 말한다. 이 두 능력을 얻으려면 먼저 사실과 의미 사이의 논리적 이분법을 이해해야 하며 그 다음 성경 본문을 깊이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관찰을 위해 성경 본문을 신학적인 주제들에 따라 논리적으로 분리,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적인 가르침이 어떻게 인문학적인 사실과 연결되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런 분석 후 특정 주제만 설교한다면 그것은 주제 설교이다. 아니다. 본문에 있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이 방법은 창의적인 해석을 하도록 도와준다. 그 다음 해체된 본문을 복원시켜야 한다. 설교의 내용이 성경 본문의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발견된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묵상함으로 내면화시키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이런 과정은 성경 진리를 되씹게 함으로 진리들을 새롭게 또는 더 깊게 깨닫게 하고 진리의 다른 면을 발견토록 돕는다. 이 때 흔히 설교자는 자신의 죄성과 부패성을 더욱 깊이 깨달으며 아픈 신음 소리를 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새롭게 한다. 이런 내면화 과정이 없다면 발견된 진리는 가슴으로 내려가지 못한 체 머리의 지식으로 남는다. 바람직한 신학 훈련이 있다. 2년 동안 신학을 공부한 후 나머지 일년 동안 위에서 언급된 성경 본문의 분해와 재조립 방법을 철저히 체득한다. 전공별로 구성된 팀은 이 훈련의 능률을 더 높여준다. 인문계, 이공계 그리고 예술계라는 전공 별로 또는 조직신학, 성경신학 그리고 역사신학이라는 전공별로 팀을 구성한다. 아니면 이 두 분야를 하나로 묶어 팀을 구성한다. 가장 바람직하다. 성경 본문은 인류 역사, 인간 삶 그리고 인간 생명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인문계, 이공계 그리고 예술계라는 세 분야의 관점에서 성경 본문도 관찰되어야 한다. 그리고 조직신학, 성경신학 그리고 역사신학이라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성경 본문 또한 관찰되어야 한다. 관찰 결과를 종합한다면 바로 이것이 통섭적 신학 연구이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과 설교는 어느 특정 주제나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성도들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통섭적인 가르침을 준다. 종래 개별적인 신학 연구 때문에 통섭적인 방법이 지금까지 불가능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종래 방법을 새롭게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개혁은 힘든 노력과 많은 시간을 요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가진 권력과 권세를 분산시킴으로 더욱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 개혁을 위한 목회 개혁이 요한다. 물론 설교의 개혁을 통해 목회의 개혁도 뒤따른다. 이 두 종류의 개혁은 한국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http://blog.naver.com/rassvet
28 no image 일과 쉼(1)
장창수
2745 2011-04-25
(부제: 안식일과 주일)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天地)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했다(창1장).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했다(창1:27절).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였다. 피조물 중 인간만 성삼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이 덕분에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대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창1:26, 28절).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또는 나라)는 인간의 통치 행위를 통해 이 세상에 문자적으로 실현될 것이다(창1:26절).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 나라 신학과 관련된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인간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잘 설명한다. 이 목적과 의미가 다른 피조물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미천한 인간을 하나님 앞에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욥7:17, 시8:4-6절).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사는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인간이다. 문화 사명(cultural mandate)(창1:28절)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존재이다(시49:20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 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전3:18절)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자신의 일(창1:28절)을 하고자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창조의 마지막 날인 6일은 거의 끝났다. 그 날 저녁부터 하나님이 거룩하고 복되다고 선언한 안식일이 이미 시작되었다(창2:3절). 안식일 다음 날로 문화 사명의 수행을 이들은 미루어야 했다. 먼저 쉬면서 자신을 존재케 한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며 안식일 그를 경배하고 찬양해야 했다. 이것이 창조 안식일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일과 쉼 사이의 관계도 설명된다.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 창조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모든 창조 사역을 이미 마쳤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인간은 생존하기 시작하면서 곧 창조 안식일을 맞았다. 하나님에게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이 인간에게는 일주일의 첫 날이었다. 인간이 처음 맞이한 첫째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다. 안식일 제도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인류는 하나님이 명한 문화 사명(창1:28절)을 수행하기 전 하나님 앞에 쉬면서 그를 경배해야 한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준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쉬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자연 세계를 인류는 먼저 구체적으로 맛보아야 한다. 이 때 마음에서 저절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우러나온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주어진 삶을 살며 사명을 수행할 것을 인류는 굳게 결단할 수 있다. 이것이 안식일 제도를 세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러나 안식일 제도는 쉼만 강조하지 않는다. 안식일 먼저 쉬는 것은 나머지 6일 동안 문화 사명(창1:28절)을 잘 수행하기 위함이다. 결국 쉼은 일을 위한다. 이 점에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 차이는 거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도 일주일의 첫 날이다. 신약 성도들도 일주일의 첫 날 먼저 주 안에서 쉬어야 한다. 이런 원칙에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은 동일하다. 안식일 제도는 또 다른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6일 동안 하나님은 모든 창조 사역을 마쳤다. 그 결과 인류는 제 7일을 맞으며 곧바로 안식에 들어갔다. 인류는 하나님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그저 누릴 뿐이었다. 결국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이 창세 전 세운 모든 작정이 완성될 때 비로소 인류는 영원한 안식에 이를 것이라고 계시하고 예언한다(히4:1-11절). 이 점에서 성경의 처음 책인 창세기와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 사이 차이가 없다. 창세기는 창조 사역 후 안식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계시록은 우주적으로 행해질 하나님의 심판 후(계20장) 새 하늘과 새 땅에 새 예루살렘이 세워질 것이다(계21-22장). 곧바로 승리한 성도들만 영원한 안식에 이를 것이다. 이로써 창세 전 세운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완성될 것이다. 그럼 만약 인류가 안식일이나 주일을 무시하고 일에만 몰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간은 끊임없이 일할 수 있는 기계나 로봇이 아니다. 쉼이 없이 일만 한다면 긴장과 스트레스가 쌓이며 정신과 몸도 견디지 못한다. 삶의 자세에서 여유로움을 서서히 잃는다. 이 뿐만 아니다. 일에 묻혀 창조주나 구원주를 경배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마저 잊는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도 잃는다. 그렇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현세(現世)를 최대한 즐기며 살자는 허무적인 쾌락주의이다. 어떤 유명한 목회자는 한국에 공휴일이 많다는 것에 유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주님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 쉴 틈이 없다고 말하며 은근히 자신을 자랑한다. 그는 일 중독자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지도자들이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대부분 이들은 매우 열정적으로 일한다. 그러나 이들의 열정은 때때로 아래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쉼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결과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지도자일수록 자신의 열정과 열심을 일주일 한번 정도라도 내려놓고 자신 앞에 나와 먼저 쉬라고 요구한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나 신약의 주일 제도는 사명과 일에 대한 인간적인 열정과 열심을 잠시 내려놓고 인류가 하나님 앞에 먼저 쉴 것을 말한다. 진심으로 내려놓기 위해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이런 자기부정만이 성도로 하여금 성화(聖化)와 목회(牧會)의 최절정에 달하도록 돕는다. http://blog.naver.com/rassvet
27 no image 성경의 지혜로 살려면 파일
장창수
2919 2011-04-12
(부제: 원수를 사랑하라!) 공생애 초기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절)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마5:43-47절)의 결론으로 주어진 말씀이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해를 비추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모두 비를 내려준다(마5:45절). 하늘 아버지처럼 신약 성도가 자기 원수에게도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했다(마5:45-47절). 예수님의 산상 수훈(마5-7장)은 출애굽 사건 후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율법(출20-23장)을 연상시킨다. 출애굽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돕는 법이 필요했다. 산상 수훈도 그런 목적을 띤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존재와 활동을 통해 이미 이 땅에 임했다(마12:28, 마13장). 그러나 그 나라의 백성은 3년 뒤에 있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출생할 것이다(고후5:17절). 이 때로부터 시작하여 영적인 출애굽 사건이 우주적으로 발생할 것이다(골1:13-14절). 나라와 민족과 언어를 초월하여 거대한 무리가 하나님 나라에 편입될 것이다. 미리 이를 내다보며 그 나라의 왕으로 온 예수님(요18:37절)은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산상 수훈에서 말했다. 물론 구약 시대와 차이를 보인다. 구약 시대 율법은 해를 받은 만큼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허용했다(출21:22-25절). 그리고 원수를 미워할 수 있었다(마5:43절). 그러나 신약 시대 성도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온전함을 배우기 위함이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악인들도 할 수 있다(마5:46절). 예수님은 이런 가르침도 주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절) 악을 선(善)이 아니라 악(惡)으로 갚으려 한다면 성도의 마음이 먼저 악해져야 한다. 먹물로 남을 더럽히려면 먼저 자신의 입을 먹물로 더럽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려면 성도는 무조건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롬12:17,21절).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 유대인은 이제부터 독일인을 용서하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이유를 묻는 자녀들에게 마음의 악을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마음에 품은 악은 언젠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벧전3:8-12절 참조). 성도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도덕적, 수양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신학적(神學的)인 이유가 있다. 악인(惡人)들도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잠16:4절). 이를 믿는다면 성도는 원수를 함부로 미워할 수 없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염두에 두고 오히려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이유도 있다. 하나님은 미래 언젠가 악인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이 믿음은 성도가 원수에게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준다(히10:30절). 사도 바울도 이렇게 충고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절) 악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도가 미움의 감정만으로 대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의 존재를 이성적(理性的)으로 인정하고 존중함을 뜻한다. 이 때 성도는 비로소 악인을 객관적으로 살피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성도로 하여금 원수 앞에서 더 지혜롭게 행하도록 돕는다(시119:98절). 결국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 한국인은 대외적인 협상에서 약하다고 한다. 이성보다 감정에 따라 섣불리 말하고 행하며 쉽게 자제력을 잃고 자신의 감정을 금방 노출시킨다. 노련한 외교관들은 적대적인 나라와의 협상에서 싫은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상대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그 나라 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철저히 관찰하고 조사한 후 협상에 임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감정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이성적 그리고 의지적 영역까지도 포함하여 적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왜 이 명령이 성도에게 중요한가? 교회의 안과 밖에, 즉 이 세상에 항상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것은 피할 수 없다. 요압은 겉으로 보아 다윗에게 대단히 충성스런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충성은 자기의 부귀와 영화를 위한 것이었다. 이를 안 다윗이지만 평생 그를 옆에 두었다(삼하3:39절). 그리고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가롯 유다를 공생애 동안 그를 제자로 남겨 두었다(요6:70-71절). 원수나 배반자는 내부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시41:9, 눅22:21절). 또한 인격의 성숙 정도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과 신자들이 나타나며 나와 다른 사람들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나와 다르다고 이들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싫다는 감정만으로 성도들이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살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감정을 잘 통제하고 관리하는 방법 밖에 없다. 만약 성도들이 미움이나 혐오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면 큰 유익이 따른다. 존중하는 자세로 반대자의 말이나 의견까지도 잘 경청할 수 있다면 반대자들은 물론 찬성자들의 의견에 감추어진 단점이나 약점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찬성자나 반대자, 모두가 찬성하는 의견과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이런 노력에 의해 공동체나 조직은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이 때 성도는 몇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반대자도 하나님 앞에 귀중한 존재이다. 달리 말해 그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냄을 받는다. 그리고 그도 또한 같은 공동체에 속한 다. 반대자의 말이 반드시 해롭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찬반(贊反) 활동을 통해 성도는 더 지혜로워질 수 있다.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잠20:18절) 믿음으로 이를 수용할 수 있다면 성도는 놀라운 인내력과 넓은 포용력을 소유할 수 있고 그 결과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생각의 탄생’을 쓴 루트번스타인은 예술을 즐기고 다른 문화와 다른 언어를 배울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들 덕분에 성도는 더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미움과 싫음의 감정을 극복하고 원수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주라는 뜻이다. 진실로 자기부정은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에 달하게 한다.
26 no image 무교와 교회 개혁 파일
장창수
2542 2011-04-08
(부제: 전통 종교에 뿌리 한 교회의 개혁3) 무교는 한국의 전통 종교들 중 가장 오래되었다. 나중 들어온 불교나 유교가 무교를 흡수하는 듯 했으나 무교에 흡수되었다. 그 만큼 무교는 한국인의 정서(情緖)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근대에 들어온 기독교도 요즈음 혼합주의 모습을 보인다. 기독교의 어디에 무교적인 요소가 있는지 알아내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 무교의 기복성(祈福性) 무교(巫敎)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나 원칙이 없으면서도 종교(宗敎)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현세(現世)의 복(福)을 추구한다. 이런 인간의 이기적 탐심을 잘 충족시켜 주는 것이 무교이다. 무당이나 점쟁이는 자신들을 찾는 사람들의 윤리에 무관심하다. 복채(卜債)만 넉넉히 준다면 굿을 해주고 점을 쳐준다. 사람들도 이들이 신들을 얼마든지 달래 인간에게 복을 주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신관(神觀)은 구약 성경에서도 발견된다. 거짓 선지자 발람은 영력(靈力)이 대단한 무당 같은 존재였다(민22:6절). 모압 왕 발락은 그를 초청해 애굽을 떠나 가나안 으로 가는 이스라엘을 저주(咀呪)하라고 요청했다. 이를 위해 발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달래야 했다. 하나도 아닌 일곱 제단들을 세워 그 위에 제물을 올렸다(민23:1-2, 4, 14, 29-30절). 발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도 우상 신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호와는 만물(萬物)의 창조주(創造主)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구원주 하나님으로 물질(物質) 세계를 초월하는 신(神)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의 요구대로 행할 리가 없었다. 여호와의 지시를 받아 그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했다(민23: 5, 11, 12, 14, 18-24, 24:1,2,10절). 구약 시대 가나안 땅에 농업 신 바알이 있었다. 가나안에서 대부분의 밭은 하늘의 비에 의존하는 천수답이었다. 원주민들에게 하늘의 비는 생명이었다. 비를 얻기 위해 남신(男神) 바알을 성적(性的)으로 자극하여 여신(女神) 아세롯과 성적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고 이들은 믿었다. 신전에서 벌어지는 의식 때마다 성전의 창남, 창녀가 성관계를 가졌다. 풍성한 추수를 위해서라면 이들은 불의(不義)도 서슴지 않았다. 무교나 발람의 종교 그리고 바알 종교, 모두 오로지 현세의 복에만 관심을 두고 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우상 종교의 공통된 성격이다. 종교들은 인간의 탐심을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 신약이 증언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절) 한국인의 변칙성 오랜 동안 무교가 한국인의 의식 세계를 지배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사회는 대체로 부정직하다. 이익(利益)을 위해서라면 원칙(原則)보다 변칙(變則)을 기꺼이 택한다. 이것을 한국인의 적당주의(適當主義)라 한다. 고속철 공사를 하는 한국의 시행사는 수 억 원의 손해를 감수하며 다시 공사 해야 했다. 감리(監理)를 맡은 독일 회사가 한국인의 적당주의를 봐주지 않았다. 예전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때 거리에서 보도(步道)블록 공사를 보았다. 독일인들은 반 미터 이상의 땅을 파서 모래로 덮고 깊이 20센티가 넘는 단단한 블록을 깔았다. 공사 후 보도(步道)는 깔끔했다. 예전 서울의 거리를 걸을 때 여기저기 깨어지거나 부서진 보도 블록들을 보았다. 부실 공사 탓이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外國人)들이 이런 거리 모습을 본다면 과연 이들이 한국의 수출 제품을 신뢰(信賴)할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았다. 왜 한국 사회는 늘 총체적인 비리와 부패 현상을 보이는가? 모든 사회 분야에서 원칙은 있지만 이익을 위해 자신에게 편리(便利)한 원칙에 따라 일한다. 그렇게 진실성, 성실성(誠實性) 그리고 정직성(正直性)이 사회 전반적으로 결여된다. 지켜야 할 진리가 없어 변칙에 따라 살도록 우리를 길들인 무교의 영향이리라! 이런 잘못된 변칙성은 목회에서도 나타난다. 진리가 성경에 밝히 드러나 있지만 목회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목회한다. 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15-23절) 불분명한 윤리 의식과 잘못된 이분법 무교에 따르면 불행(不幸)은 귀신(鬼神)의 노염을 산 결과이다. 귀신의 노염을 풀기 위해 한국인들이 무당을 찾는다. 결국 불행의 원인은 자신 탓이 아니다. 자기를 성찰함이 없이 무당의 도움으로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격(人格)과 윤리의 성숙함은 기대할 수 없다. 기독교 성경은 기독인의 불행을 달리 말한다. 인간의 불행에 세 가지 원인들이 있다. 인간 자신의 죄(罪) 때문에(창2: 17절), 죄와 무관하게 성도를 연단 (鍊鍛)시킬 목적 때문에(욥1-2장) 그리고 하나님이 세운 자연법(自然法) 또는 상식을 어기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의 이런 가르침을 쉽게 간과한다. 고난 당한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더 그렇다. 고난(苦難)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위해 기도해 준다. 또는 육체적인 질병에서 즉시 고침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빌기만 하면 복을 준다고 이들은 믿는다. 이 점에서 기독인들은 무교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들은 복 받은 신앙인이란 불행(不幸)과 같은 고난을 전혀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그리고 유복하게 사는 성도라고 생각한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도 불행을 모르며 살기를 원한다. 예전의 전통 종교에서 배운 습관대로 수복강령을 위해 교회를 찾아 예수님에게 정성껏 기도한다. 기독교와 무교 사이 차이가 없다. 기독교 교인들 사이에서도 연단을 목적하며 보낸 하나님의 고난이 자연스럽게 또는 무의식적으로 무시된다. 오히려 이들은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이상한 눈으로 본다. 행복은 좋고 불행은 나쁘다는 식의 잘못된 이분법에 따라 인생과 삶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들에게서 신앙의 성숙(成熟)은 기대난망이다. 예전‘아담 킹’이라는 한국계 미국인 아이가 프로야구 개막식에서 시구(始球)를 했다. 미국 가정에 입양되기 전 아이의 부모는 그의 두 다리가 썩어 들어감을 보고 그를 버렸다. 그러나 미국인 양부모는 아이의 처지를 알면서도 입양했고 알루미늄으로 튼튼한 두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걷게 했다. 그는 양부모와 함께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을 버린 조국을 다시 찾았다. 이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야구장에서 시구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아이는 한국인들에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를 보며 한국인들은 미국인 부모에 대한 존경심과 아울러 그를 버린 부모에 대한 부끄럼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수치스런 부분을 보는 듯 부끄러워했다. 불행을 무조건 피하려는 한국인의 정서에서 무교의 심각한 영향을 우린 발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들의 삶에 발생하는 불행도 합력(合力)한 선(善)을 이루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롬8:28절).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출생할 때부터 장님인 사람을 만났다. 이 때 누구의 죄 때문인지 스승에게 물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답했다(요9:1-3절). 불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게는 만드는 아주 좋은 기회란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信者)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불행을 신앙 성숙의 기회로 삼으려는 적극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감정이 진리보다 앞서는 신앙 신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한국인은 합리적(合理的)이기보다 감정적(感情的) 이다. 무교에는 진리(眞理)가 없다. 모든 종교의식(宗敎儀式)은 보다 더 많이 시청각에 의존한다.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신의 강림이나 임재를 알려야 했다. 이를 위해 'singing and dancing'이라는 자극적인 제의가 중요하다. 이런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예배를 축제로 생각하며 심리적(心理的)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심리적 상태를 성령의 역사(役事)로 해석한다. 이런 예배 방식은 진리의 체계적인 설파(說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배가 인간의 감성적, 심리적 작용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요4:24절). 여기 신령과 진정이라는 표현도 무교적 색갈이 지나치게 묻어난다. 원어로 신령은 영(靈)을 가리키며 그리고 진정은 진리(眞理)를 말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와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따라 나오는 마음의 감격과 감동으로 하나님에게 예배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인 말씀을 무시하고 가벼운 심리적 감동만을 추구한다면 기독교 예배는 동양의 신비주의적(神秘主義的) 제의와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에 따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수반하는 감정적 동요와 의지적인 결단이 보여지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신앙 삶과 분리된 일상 삶 기독교는 진리(眞理)와 비진리를 따진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무교(巫敎)와 근본적 (根本的)으로 다르다. 진리대로 살면 의(義)와 평강 그리고 생명(生命)에 이르지만 비진리대로 산다면 파멸에 이른다고 성경은 말한다. 진리에 근거를 두고 나와 남 그리고 세계를 생각한다. 구약의 율법(律法)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막(聖幕)이나 성전(聖殿)을 제조하는 방법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계시했다(출25:40, 민8:4, 대상28:12, 히8:5절).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 따라 선심 쓰듯이 성전 기구들을 만드는 것을 하나님은 철저히 금했다. 이 때문에 성전이나 성막 또는 그 기구들을 만들 때 적당주의는 절대로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사용 제물들도 성소(聖所)에 보관된(출30:24절) 척량 기구에 의해 정확하게 잰 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례23:13절). 이런 정확성은 상거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세의 법은 상거래를 위해 이스라엘이 정확한 척량(尺量) 기구들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恩寵)으로 종(從)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救援)을 얻었기 때문이다 (례19:36절). 깨끗한 상거래 습관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장수하게 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했다(신25:15절). 그리고 부적절한 척량 기구들을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증(可憎)스럽기 때문이었다(신25:16, 잠20:10절). 상거래에서 정확한 척량 기구들을 사용하는 것도 신앙 삶 자체였다. 하나님의 율법(律法)에 근거를 둔 이스라엘 사회가 이방인 사회에 비해 경제적(經濟的)인 불의(不義)와 비리(非理)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였다. 율법이 정치 면에서 견제와 균형을 제공했듯이 경제면에서 같은 효과와 결과를 주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사회의 경제와 정치면에서 적당주의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게 일상 삶은 곧 신앙 삶이었다. 바로 이런 신앙 훈련은 이스라엘 인으로 하여금 성경적 원칙에 따라 철저히 살아야 한다는 사고(思考)와 삶의 자세(姿勢)를 길러주었다. 이스라엘이 우상 종교를 택한 이방 민족과 달리 모든 면에서 훨씬 앞서 발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국가들이 기타 종교 국가들보다도 전반적으로 발전한 것도 이런 신앙 정서(情緖) 덕분이다. 구약이 이를 잘 증언한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3-14절) 오늘날 국제화(國際化) 시대를 맞아 모든 기업 활동들은 투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품이 팔리지 않고 필요한 자금 조달도 불가능하다. 평상시 정직하게 기업 활동을 한 회사들은 불황 때에도 이익을 낸다. 이를 생각한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얼마나 선진화된 사회였는지 능히 짐작된다. 그럼 대한민국이 중진국에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가 왜 그리 힘든가? 오랜 동안 한국인의 의식 세계에 나쁜 영향을 준 무교의 종교적 정서가 만들어낸 적당주의와 변칙주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애통스럽게도 한국 교회가 무교의 기복주의 신앙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 기독인들이 현세(現世)의 복을 위해서라면 진리나 원칙을 쉽게 무시한다. 그러나 기독인들에게 신앙(信仰)과 윤리(倫理)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良心)을 가지라고 디모데에게 충고 (忠告)했고 착한 양심을 버리면 믿음의 파산자(破産者)라고까지 말했다(딤전1:19절). 외형적 과시 현상 무교의 또 다른 영향이 있다. 현세적인 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물질적인 부요(富饒)를 과시하기 좋아한다. 이 점에서 한국인의 졸부(猝富) 근성도 무교의 영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면에서 한국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의 외적(外的) 성장을 몹시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을 잘 돌보기보다 교인들이 모이는 건물에 더 많이 투자한다. 교회의 모든 행사들과 프로그램도 교세와 목회자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본질을 놓치고 비본질적인 일에 더 열심이다. 목회자들과 신자들도 이 땅에서 영광(榮光)과 명예(名譽) 그리고 칭찬(稱讚)을 누리며 살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所望)이 확실하다면 헛된 일에 분요하지 않고 자랑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딤전6:17). 그리고 진실한 목회자와 성도는 개인의 헛된 명분(名分)보다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보다 더 실리적(實利的)인 일을 택한다(갈5:25-26절). 결론 종교와 신앙 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 사이 차이는 엄청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창조주로서 유일한 신이다. 그러나 이방의 신들은 우상들이다. 전자는 참 신을 섬긴다면 후자는 거짓 신을 섬긴다. 기독교 성경이 우상 제조와 숭배를 금한 이유이다. 이들 사이 차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상을 섬기는 민족들은 부패한 인간의 상상(想像)에 따라 만들어 놓은 우상 이상으로 신(神)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신의 전부이다. 이 점에서 우상 신은 자연이나 물질을 초월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계시(啓示) 즉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그 계시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자신을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계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만물을 초월(超越: transcendence)하면서 동시에 내재(內在: immanence)한다. 자연(自然)과 인간 사회를 자신의 뜻대로 경영하고 그리고 이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룬다. 이런 계시들을 읽으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무한(無限)함을 늘 묵상했다. 이렇게 신론(神論)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결과는 무엇인가? 자연(自然)을 뛰어넘어 무한한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이스라엘인들의 사고력(思考力)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 이상 신의 존재를 사고할 수 없다. 이스라엘인의 창의력(創意力)이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의 창의력보다 월등히 앞선 이유이다. 오늘날 약 15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산다. 수적으로 이들은 대단히 미약하다. 그러나 이들이 세계 역사와 인류 사회를 이끈다. 그 원인이 이들의 신앙 삶 자체에 있음을 우리는 본다. 종교와 그에 따라 형성된 종교적 정서가 어떻게 국민의 사고력(思考力)과 창의력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스라엘은 잘 설명해 준다. 지금까지 개인과 사회의 문제들도 특정 민족의 종교 정서(情緖)와 무관하지 않음을 또한 본다. 불교는 교리(敎理) 면에서, 유교는 교회 정치(政治) 면에서 그리고 무교는 신앙 삶 면에서 한국 기독교에 부정적(否定的)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기존 종교들이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부작용(副作用)이 엄청나게 컸음을 우리는 본다. 오늘날 한국의 국회에 기독인 의원이 35%를 넘는다. 그러나 정치 개혁(改革)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은 기독인 대통령을 4번이나 가졌지만 정치 분야는 여전히 후진국(後進國) 수준이다. 그 원인은 한국의 전통 종교들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 기독교 자체에 있음이 암시된다. 한국인의 의식 세계에 각인된 전통 종교의 신앙 정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교회 개혁(改革)도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이룬 물질적, 경제적 성장을 뒷받침해 줄 정신과 사상 면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한국 민족의 번영이 일시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 민족을 위해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한다. 성경의 말씀에 기초한 한국 교회의 진정한 거듭남만이 한국 민족의 살 길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개혁이 없이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만을 외식적으로 주장한다면 한국 교회는 속 빈 강정과도 같을 것이다. 하나님도 결국 촛대를 옮길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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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수
2637 2011-04-08
(부제: 전통 종교에 뿌리 한 교회의 개혁2) 제목의 주제들은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토착 종교와 기독교로 제목을 바꾼다면 그 관계가 이해된다. 이 둘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원에 있어 기독교가 하늘에 뿌리를 둔다면 다른 종교들은 땅에 둔다. 이 차이는 너무나 크다. 기독교의 차별성을 위해 교회에 남아있는 전통 종교의 잔재를 제거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기독교가 어떤 면에서 토종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유교의 덕치(德治)ㅇ 유교는 본래 종교가 아니라 예의(禮儀)와 통치(統治)에 관한 철학이다. 통치에 대한 유교 철학은‘덕치(德治)’를 주장한다. 덕치란 군주(君主)의 덕(德)과 인(仁)에 의존하는 통치를 뜻한다. 군주는 성인군자(聖人君子)로서 모든 일에 절대적으로 옳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충신(忠臣)들은 죽을 각오하며 덕(德)과 인(仁)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늘 간한다. 군주의 명령이 틀려도 백성은 일단 순종해야 한다. 달리 말해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權威)가 통치의 중요한 수단이다. 유교 문화권(文化圈)에서 아랫사람들인 백성(百姓) 은 윗사람인 군왕(群王)을 비롯한 귀족(貴族)들의 은총 아래 산다. 이 문화의 특징은 해바라기성이다. 이런 곳에선 생존을 위해 줄을 잘 서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는 성격상 수평적(水平的)이기보다 종속적(從屬的)이다. 유교의 은총(恩寵) 문화는 서구 사회의 평등한 성격의 계약(契約) 문화와 완전히 다르다. 이런 문화권에서 전제 정치(專制政治)나 독재 정치의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런 나라에선 윗사람들의 범죄(犯罪)나 비리(非理)가 잘 징벌되지 않는다. 만약 필요하다면 2선에 잠깐 후퇴시킨 뒤 나중 다시 등장시키면 그만이다. 그럼 유교의 통치 철학의 문제는 무엇인가? 불완전(不完全)한 인간인 군왕(群王)을 완전한 성인군자(聖人君子)로 본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 성경은 인간이란 부패(腐敗)한 존재로 본다(롬3:10-18절).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면 부패한 인간에게 완전한 덕(德)과 인(仁)을 바라며 나라의 통치를 완전히 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더구나 불완전한 인간 군주(君主)가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절대(絶對) 권력을 누린다면 더 문제다. 그의 통치(統治)가 부패(腐敗)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유교는 인간이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과 인간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人本主義)에 근거를 두고 군왕의 덕치(德治)를 계속 주장한다.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동북아시아 제 나라에서 지도자의 부패 문제는 끊임없이 언론에 부각된다. 이들 나라 중 가장 선진적인 일본의 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통치자에게 전적으로 맡기지만 그를 견제하는 장치가 늘 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덕치의 한계이다. 기독교의 법치(法治) 기독교의 통치 철학은 유교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구약의 율법(律法)이 잘 설명해 준다. 유교권에선 인간 군왕이 입법자이며 재판장이지만 이스라엘에선 하나님이 입법자이며 재판자이다. 유교권에서와 달리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며 법의 적용에서도 예외는 없다. 기독교 성경은 철저히 법치(法治)를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 통치자의 불완전함, 게으름, 나태성과 부패성을 잘 안다. 이를 감시하고 불필요한 권력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하나님은 선지자를 택해 보냈다. 선지자들은 주저 없이 그리고 가차 없이 왕과 대제사장의 비리(非理)와 죄(罪)를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悔改)를 요구했다. 이 당시 왕이나 제사장들은 보수 세력으로 기득권 층에 속했다. 혈통적 (血統的)으로 신분이 이들에게 보장 되었다. 이들은 자자손손 왕과 제사장이란 신분을 누리며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사회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이런 권력을 이용하여 이들도 얼마든지 부패할 수 있었다. 참 왕인 하나님은 이들을 견제해야 했다. 이를 위해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왕이나 제사장과 달리 기득권에 속하지 않아 권력의 부패(腐敗)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들은 왕의 정치적인 부패와 제사장들의 외식적인 종교의식을 자유롭게 비판했다. 물론 이 당시 왕에게 아부하며 세상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거짓 선지자들도 있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왕의 통치, 제사장의 종교적인 권위 그리고 선지자의 비판 활동, 이 모두 철저히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근거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법치(法治)’의 개념이다. 기독교의 법치는 법의 적용에서 늘 제외되는 군왕의 덕치(德治)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이런 법치에 의해 자신의 통치를 가나안 땅에 실현하고자 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택함을 받은 이유였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법치(法治)의 중요성이 그리 인식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부터 삼 천년 전 이미 가나안 땅에 법치에 근거를 둔 선진적인 정치 제도가 이스라엘에 의해 세워졌다. 이 사실은 유교의 통치 철학과 비교할 때 기독교의 철학이 얼마나 위대한 인류의 자산인가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인류 사회는 늘 창조주 하나님을 떠남으로 자신의 통치를 스스로 실현하고자 애쓴다. 바벨탑 사건(창11장)이 의미하듯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인간 나라를 늘 세우고자 한다. 그럴수록 인류는 서로 분쟁하고 다툴 뿐이다. 인류 사회의 끊임없는 전쟁 역사가 이를 잘 증언한다. 신약의 동역자 의식 신정정치(神政政治)가 깨어진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통치 철학에는 변함이 없다. 교회의 참 주인(主人)은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렇다면 목사를 포함한 모든 제직들과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모두 주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하다. 이 점에서 신구약 사이 차이가 전혀 없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 의식(同役者 意識)이 잘 증명한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었다. 교인들은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각각 주장하며 교회가 분열되었다(고전1:11-12절). 교리적 (敎理的)으로 이것은 틀렸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다(고전1:13절). 이를 위해 바울은 아볼로를 언급했다(고전3:4-9절). 바울과 아볼로는 주(主)께서 준 은사(恩賜)대로 일한 사역자에 지나지 않았다 (5절). 바울이 심었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게 한다 (6절). 결국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요, 다만 일한 대로 자기의 상(賞)을 받을 것이다(8절). 이 때문에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며 동시에 서로에게도 동역자가 되었다(9절). 유교적인 권위의식(權威意識)이나 사도(使徒)라는 특권의식이 바울에게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바울과 아볼로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 (語不成說)이다. 바울은 부활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택함을 받은 사도라면 아볼로는 그냥 신자에 지나지 않았다(행18:24-2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볼로를 자신과 같은 사역자라고 주저 없이 소개했다. 그의 동역 의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양자(養子)로 삼은 디모데를 자신의 동역자라고 말했다(롬16:21절). 옥중에서 개종한 노예 오네시모의 주인(主人)인 빌레몬을 또한 자신의 동역자라고 소개했다(몬1:1절). 이 이외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와 누가도 자신의 동역자라고 자신의 서신에 기록했다(몬1:24절). 그리고 함께 천막 일을 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자신의 동역자라고 기쁘게 말했다(롬16:3절). 바울은 디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8:23) 디도는 바울을 통해 개종한 후 그의 제자가 된 헬라인이었다 (갈2:3, 딛1:4절). 그러나 아들 같은 디도를 그는 아낌없이 칭찬했다. 남녀노소 (男女老少)를 불문하고 자신을 도와 주(主)의 일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그의 동역자였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동역자 개념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가부정적인 권위의식과 계층 적 또는 계급적인 직분 개념은 기독교의 동역자 의식이나 개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믿음의 주관자가 아닌 사도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안 후 사도 바울은 몹시 초조했다(고전1:11절). 빨리 달려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고 대신 서신을 써 보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3-24절)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이용하여 사도로서 권위를 과시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영적 나태함을 뜻하는가? 결코 아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을 주관(主管)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하나님임을 그는 잘 알았다. 그는 교인들과 같은 동역자였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서 맡은 사역을 수행하고자 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믿음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가 서둘지 않았는가? “그들 앞에 나서면 사랑의 말보다는 책망과 비판의 말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이미 믿음에 서 있는 주의 동역자들을 절망케 하거나 상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주 앞에서 아름답지 않았다. 이를 안 바울은 자제(自制)했고 서둘지 않았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서 바울은 그들을 진실로 아끼고 싶었다. 그의 목회 자세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성구가 또 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柔順)한 자 되어 유모(乳母)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2:7) 유모(乳母)는 종으로서 주인의 자녀(子女)를 친어머니처럼 기른다. 젖이 풍성(豊盛)한 여인(女人)만이 유모가 될 수 있다. 부드럽고 따뜻한 유모로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영적(靈的)으로 길렀다.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그의 사도직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유교권에서 이런 덕성은 군왕이나 지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한국 교회에선 권위적인 부성적(父性的) 목회만이 유행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비권위적인 모성적(母性的) 목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상은 유교의 권위주의와 다르다. 목회자는 주인의 양들인 신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유모 같은 종으로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목회자는 주인의 자녀인 교인(敎人)들을 자기 양들처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자신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풍성(豊盛)한 말씀의 젖으로 먹이고 기를 의무와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승천(昇天)하기 전 부활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부탁한 목양(牧羊)도 같은 맥락이다 (요21:15-17절). 목양을 위한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 먼저 부활주인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에 바탕을 두고 주님의 어린 양(羊)들을 잘 먹이고(말씀 사역) 다 자란 양들을 치고(목회) 동시에 계속 먹여야 한다(말씀 사역). 주님을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면 목회가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실패란 뜻이다. 오늘날의 목사(牧師)는 권위주의자(權威主義者)이기보다도 유모(乳母)같은 교사(敎師) 여야 한다. 달리 말해 목사(牧師)는 교회 행정가 그리고 교회 경영가라는‘목회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이고 잘 돌보는 유모로서‘목자’여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장로와 집사라는 항존직 직분이 교회에 있다.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專念)해야 한다(행6:4절). 성경 어디에도 목회자의 특권(特權)보다 의무(義務)와 책임(責任)만이 더 강조된다. 주인의 양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 문화권(文化圈)에 속하는 한국 교회에선 동역 의식이 완전히 무시되고 목사는 피라미드의 정점(頂点)에 서도록 허락하는 성직제도만 고집한다. 이 점에서 한국의 개신교는 로마 카도릭과 다를 바 없다. 결론 예수님의 삶과 사역도 또한 성경적인 목회자상을 지지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만물의 주인이지만 피조물 인간을 섬기려 왔다고 말했다(마20:28절). 이를 증명하듯이 십자가 상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제자(弟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본을 보였다(요13:14-16절). 앞으로 12제자들은 신약 교회의 12 기둥 같은 사도들이 될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사랑의 섬김에서도 앞 장 서야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섬김을 받는 특권층(特權層)이 아니라 사랑의 섬김을 실천해야 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유교의 권위주의(權威主義)와 계급의식은 전혀 비기독교적이다. 부활주 예수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다. 이 이외 몸의 모든 지체(肢體)들은 주 앞에서 동등하다(고전12:12-27절). 이런 지체이론에 근거를 두고 한국 교회는 철저히 개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제직들은‘섬기는 직분(職分)’임을 기독교의 윤리 강령에 넣어야 한다. 교회의 행정(行政)은 교회 조직(組織) 자체를 위하지 않고, 목회 프로그램 자체를 위하지도 않고 그리고 교회의 수적(數的) 성장 자체를 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상 교회는 지체(肢體)들인 신자들의 질적(質的) 성장을 위해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섬김과 봉사의 조직이기 때문이다(엡4:11-16절). 성경의 지체이론(고전12:12-27절)이 이를 또한 지지한다. 지체들은 크고 작은 것으로 비교될 수 없다. 또는 은사의 위대함 정도로 비교될 수 없다. 지체들이 가진 역할과 기능은 몸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지체 이론은 유교의 권위의식과 계급 의식이 비성경적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유교의 출세주의와 태양은 오로지 하나라는 지도자 철학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잘 드러난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마16:26절)도 이를 잘 지지한다. 남녀노소 그리고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영혼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귀하다. 한 영혼이라도 잘 돌보라고 교회에 목회자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한국 목회자들의 중대한 관심사인 교회가 크냐 작으냐, 교인 수나 헌금 액이 많나 적나 그리고 신자들이 부자들이냐 가난하냐 등등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나 가치도 없다. 한국 교회를 지배한 양적 성장론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잘 드러난다. 기독교가 유교와 다른 면이 또 있다. 유교는 계율(戒律) 자체를 위해 살아있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유교의 권위 의식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고려하지 않고 규례의 준수만 고집하며 무조건적(無條件的)인 복종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주의 (律法主義)의 심각한 문제이다. 유교의 이런 영향을 받은 한국 목회자들도 진리(眞理)에 대한 서술(敍述)보다 규례에 대한 명령(命令)을 강대상에서 더 자주 언급한다. 목회자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 목회자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성경의 율법을 잘못 이용한다. 이런 율법주의를 기독교 성경은 배척(排斥) 한다. 기독교 성경은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롬13:8,10, 갈5:14절).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가 잘 발달된 나라들에선 개신교가 매우 왕성하다. 기독교의 복음은 어디서나 민족과 사회를 개방시키고 그 결과 각 방면에서 발전을 가져다 준다. 복음의 빛은 모든 어둠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북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대한민국은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야 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이를 부인한다. 국민 윤리 분야에서조차 우상과 잡신으로 들끓는 일본보다 대한민국이 한참 뒤진다. 한국 교회가 유교적(儒敎的)인 요소들에 의해 극복 당했기 때문이다. 언제 이것이 극복되는가?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주 안의 동일한 형제(兄弟)처럼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동역자처럼 존중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는 계속 천상천하 유아독존적(唯我獨尊的)인 존재로 남을 것이며 기독교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도 마다하지 않는 미신으로 취급되고 목회자는 무교의 무당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결국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사이비 집단으로 비웃음 당할 것이다. 물론 그런 교회에는 영적(靈的) 생동감(生動感)도 없을 것이다.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 그의 말씀인 법을 버린 결과일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
24 no image 불교와 교회 개혁 파일
장창수
3029 2011-04-08
(부제: 전통 종교에 뿌리 한 교회 개혁1) 헬라 인들은 이원론(二元論)에 바탕을 둔 철학을 말했다. 종교 면에서 순수한 영적 존재로서 물질을 초월하여 초연하게 존재하는 선한 신(神)과 물질을 창조한 저급(低級)한 악한 신을 말한다. 두 신(神)들은 영원히 대립한다. 이들 선한 신과 악한 신 사이 대립이 인류 역사에 반영되고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에 따라 인류 역사가 영원히 순환한다는 원형적(圓形的)인 역사관을 견지한다. 인간론에서 이들은 영(靈)과 육(肉)이 항상 대립(對立)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금욕주의(禁慾主義)와 쾌락주의(快樂主義)라는 극단적인 철학(哲學)이 헬라 사상에 모두 나타났다. 헬라의 이런 사상이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미쳐 영지주의 (靈知主義)나 기독교 신비주의(神秘主義)로 나타났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편입됨으로 자연스럽게 헬라 철학의 이원론과 금욕주의(禁慾主義)가 기독교 교회(敎會)에 파고 들어왔다. 사도 바울이 서신(書信)들을 쓴 목적 중 하나는 이런 헬라 철학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골2:6-23, 딤전4:1-8절). 사도 바울은 구약에 바탕을 둔 헤브라이즘을 헬레니즘과 비교하며 차이를 지적해야 했다.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예전의 종교적인 관행(慣行)이나 사상(思想)이 개종 이후의 신앙 삶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한 민족이 예전 가졌던 종교적 정서가 새로 도입된 기독교 교회의 형성에 다각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말한다. 서구 유럽의 기독교 역사는 거의 2천 년에 가깝다. 이 동안 교회가 배출한 위대한 설교가들이나 사상가에 의해 서구인의 잘못된 종교 정서나 그에 바탕을 둔 의식구조 (意識構造)가 서서히 개조(改造)되었다. 물론 지금도 헬라 철학의 영향이 로마 카도릭과 그 외 사상가 (思想家)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본다. 그러나 개신교(改新敎) 교회들은 끊임없이 헬라 철학에서 벗어나고자 성경(聖經)을 깊이 연구해야 했다. 이 덕분에 헬라의 잘못된 사상들이나 철학에서 벗어났고 성경의 가치관에 의해 세워진 개신교 국가들이 세워졌다. 이들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보다 더 잘 발달했다. 오늘날 세계 역사(歷史)를 이끄는 나라들이 개신교 국가들임을 우리는 본다. 여기서 이런 가정(假定)이 나온다. 한 민족의 발전은 이방(異邦)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기독교적인 가치관(價値觀)에 의해 그 나라 국민의 의식(意識)이 얼마나 개조되느냐 여부에 달린다.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기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을 것이란 신명기의 주장(28:13-14절)은 이 가정의 정당성(正當性)을 증명해 준다. 그러므로 특정 민족의 종교 정서가 그 민족의 장래와 미래를 결정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종교 정서는 하나의 틀을 제공하며 이 틀에 준거(準據)하여 한 민족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이 가치관에 의해 사회의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약 130년 전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왔다. 그 이전 한국 사람의 종교 정서는 불교(佛敎), 유교(儒敎) 그리고 샤마니즘인 무교(巫敎)에 바탕을 둔다. 무엇보다도 샤머니즘이 한국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종교 정서라고 말한다. 나중 들어온 불교나 유교도 샤머니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흡수되었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는 과연 한국인의 이런 종교 정서를 극복하고 한국 국민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는가? 어떤 점에선 극복했지만 다른 점에선 극복 당하기도 했다. 달리 생각한다면 기독교가 한국 민족의 종교 정서(情緖)를 극복하고 개조하기에는 아마 130여 년의 세월이 짧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고유의 종교적 정서가 한국 기독교 교회에 어떤 식으로든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예전 종교들이 한국 기독교에 준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한국 사회와 교회가 어느 면에서 개혁(改革)되어야 할 것인가도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불교의 성속 개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 한국의 불교는 산 속이 아니라 도시 속에 위치하고자 한다. 그러나 불교는 이원론에 바탕을 둔 해탈(解脫)을 목적하므로 근본적으로 금욕주의적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려고 세상을 등지는 수행(修行) 방법을 택한다. 불교 철학은 보이는 현상 세계를 허상(虛像)으로 보며 종국적으로 이 세계를 부정(否定)함으로 해탈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불교의 철학은 ‘무(無)의 철학’ 또는 ‘부정(否定)의 철학’이라고 불린다. 자연스럽게 불교는 한국인에게 성속(聖俗)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생각과 사상을 제공한다. 한국인에게도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속세(俗世)를 떠난 거룩한 사람들과 다르다. 세속인 들은 세상을 즐기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퇴폐적(頹廢的)이며 허무적(虛無的)인 쾌락주의가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러나 중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는 금욕주의적인 삶의 자세를 택한다. 이 둘 사이 중립(中立)이나 타협(妥協)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기독교가 말하는 이웃 사랑이 한국인에겐 쉽지 않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 맹목적인 사랑을 할 수 있고 아니면 이웃에 무관심한 체 자기 수양(修養)에만 전념할 수 있다. 이런 금욕적인 종교 심성(心性)은 한국 교인들에게도 금욕적 또는 쾌락적인 신앙 양태를 갖도록 영향을 준다. 대부분의 한국 목회자들은‘보내는 목회(牧會)’ 보다는‘모으는 목회’에 치중한다. 속세(俗世)의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개종(改宗) 시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세상(世上)으로 다시 보내기보다 교회 안에 신자(信者)들을 모아두기를 더 좋아한다. 교회는 세상과 비교할 때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다. 제자 훈련은 예수님의 선교 명령(마28:19-20절)에 근거를 두고 신자를 그리스도의 제자(弟子)로 만드는 양육 프로그램이다. 제자 훈련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제자로 만드는 것이 제자 훈련의 근본 목적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제자 훈련은 개인 목회자에게 충성케 함으로 개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전락한다. 근본적으로 양육 목적이 왜곡(歪曲)되었다. 부활주 예수님의 선교 명령(마28:18-20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자 함에 있다. 이 목적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福音)을 전해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분부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게 함으로 가능하다. ‘모으는 목회’경향은 불교의 이원론적인 영향이 무의식적으로 목회자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신자들을 위험한 세상으로 보내기보다 교회 안에 남아 세상을 잊고 안전하게 예배(禮拜)와 기도(祈禱) 또는 교회 일에 힘쓰기를 바란다. 그리고 강대상에서 세상 것을 버리라고 잘못 강조한다. 한국 교인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도피적인 그래서 미성숙한 사람들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 성경은 이원론(二元論)이나 금욕주의(禁慾主義) 철학에 바탕을 두고 이 세상을 보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마6:10절).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세상에 더 이상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요17:11 상반절)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절) 부활 후 예수님도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절) 승천 이전 예수님은 강림할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지도 설명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절) 기독교 국가에서 교회가 왜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하는가?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나라에서 신자들은 눈을 감지 않고 기도한다. 그러나 동양인 신자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비로소 영적(靈的) 일에 몰두할 수 있다. 동양인들에게 현실과 신앙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한 신앙인일수록 종교적 삶을 위해 현실을 떠나야 한다는 충동을 늘 받는다. 외국의 유명한 목회자들은 한국 신자들의 이런 신앙 성향을 보고 예배와 기도에는 뜨겁지만 세상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늘 지적한다. 한국 교회가 수(數)에서 우월하고 종교적 열심(熱心)에서 탁월하지만 질(質)에선 떨어진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이 결과는 당연하다. 한국 교회에 만연된 교회 성장론은‘보내는 목회’보다는‘모으는 목회’를 위한 성장 전략(戰略)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두 불교의 종교적(宗敎的) 정서(情緖)가 한국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불교의 주관적 성향 불교의 종교적 정서에 따르면 진리(眞理)는 늘 상대적(相對的)이며 지극히 주관적(主觀的)이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진리가 결정된다. 신라 시대의 고승인 원효 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어느 날 밤 산에서 오랜 여행으로 곤히 잠 들었다. 밤 중 갈증을 느낀 그는 일어나 물을 찾았다. 옆에 물이 가득한 바가지를 발견하고 흡족하게 마셨다. 그리고 다시 잠 들었다. 아침 일어나 보니 물 바가지는 없었고 놀랍게도 해골이 하나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밤에 자신이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았다. 해골에 괸 물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은 "모든 깨달음은 마음속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했다. 즉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참선을 계속하면서, 그가 깨달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애썼다. 이 일화는 한국 불교가 객관적인 진리보다 주관적인 인식에서 더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불교의‘무의 철학’이나‘부정의 철학’자체가 절대 진리를 포기(抛棄) 한다. 불교의 이런 종교적 심성(心性)은 오랜 동안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했다. 이런 종교적 심성은 한국인 목회자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신학적 그리고 교리적인 혼란(混亂)을 가중 또는 초래시키는 원인이다. 기독교의 신학과 교리는 적어도 2천 년이란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 충분히 검증을 받으며 교회의 공적(公的)인 확인을 받고 형성되었다. 그러나 한국 목회자들은 이런 교리나 신학을 쉽게 무시하고 자신이 느끼고 깨달은 것을 진리인양 외친다. 나라는 작지만 한국에서 거짓 메시아들이 나왔고 온갖 사이비(似而非)나 이단(異端)들이 참으로 많이 나타났다. 많은 교주(敎主)들이 나타나 새로운 계시(啓示)를 주장하며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을 진리로 포장하여 선포한다. 그리고 다른 목회자의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신자들을 단속한다. 객관적인 진리가 무시된 곳에서 흔히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종교적 현상이다. 그 만큼 한국 목회자들에게 주관적(主觀的) 성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특히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들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성경과 동일시하여 강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원효대사처럼 자기의 깨달음을 진리로 둔갑시킨다. 세계적으로 빠른 교회 성장으로 유명한 한국 교회가 늘 시끄러운 이유이다. 자신이 말씀인 예수님의 종임을 이들이 쉽게 잊기 때문이다. 영적 교만은 그들로 하여금 파멸의 길로 가게 만든다. 스스로 거짓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열매로 어떤 나무인지 분별해야 한다. 결론 이렇게 한국인의 무의식 세계에 불교의 지나치게 대립적인 성속(聖俗) 개념과 끈질긴 인식적 주관성이 새겨져 있다. 이것들이 한국 기독교에 비성경적인 잘못된 종교 관행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한국 목회자들의 의식세계에 각인된 불교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가치관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고치는 것이 바로 한국 교회가 시급히 해야 할 개혁일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
23 no image 지도자가 넘어야 할 시험
장창수
4366 2011-04-02
(부제: 헤브론과 예루살렘) 성경은 다윗의 왕정(王政)에 대해 말한다.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 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삼하5:4-5절) 다윗이 죽고 왕위가 솔로몬에게 이양(移讓)된 후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치리한 날짜는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치리하였더라.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상29:26-28절) 이들 기록에서 두 장소 헤브론과 예루살렘이 대조되며 7년과 33년도 또한 비교된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죽었다(삼하1:1절).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삼하2:8-10절). 이 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사울을 대신하여 왕이 되도록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공개된 비밀이었다(삼하3:9-10, 17-18, 5:2절). 이스보셋을 강제로 밀어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이 이스보셋의 비정통성을 주장하며 자신의 정통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다윗은 아주 조심스럽게 처신했다(삼하2:1절). 이스라엘의 참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시글락에서 다윗이 묻자 하나님은 헤브론에 가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될 것을 허락했다. 아무 말 없이 다윗은 순종했다(삼하2:2-4절). 시간이 지나면서 사울의 집은 서서히 망해 갔지만 다윗의 집은 날로 흥해갔다(삼하3:1절). 모든 이스라엘도 이를 보았다. 얼마 후 이스보셋 정권의 후원자인 아브넬이 죽임을 당하고 그 뒤 이스보셋도 암살 당했다(삼하4:8절). 이스보셋은 겨우 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다(삼하2:10절). 그 후 5년 동안 통치자 즉 왕이 없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사사 시대처럼 살았다. 이상하게도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다윗을 왕으로 초청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때도 다윗은 조심스럽게 처신하며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다. 헤브론에서 마지막 7년째 통치할 때 마침내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모여와 다윗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삼하5:1-2절). 이 때부터 선민의 공식적인 왕으로 유다와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을 33년간 다윗은 통치했다. 만약 사울처럼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참 주인으로 믿지 않았다면 세 번이나 스스로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다윗에게 있었다. 시글락에서 헤브론으로 가기 직전, 헤브론에서 첫 2년 동안 그리고 그 다음 5년 동안. 그러나 다윗은 이들 기회를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 첫 기회 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헤브론으로 갔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선 그냥 참으며 조용히 기다렸다. 누가 보아도 바보 멍청이같았다. 이 정도로 그의 경건은 참으로 탁월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윗에게도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첫 2년 기간보다 다음 5년 기간 동안 특히 더 어려웠을 것이다. 마지막 5년 동안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찾아와 왕이 되라고 권하며 얼마나 많이 그를 유혹했을까는 넉넉히 짐작된다. 이런 권면으로 차기 왕의 호의를 얻고자 아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으리라! 이 점에서 선민 사회라고 이방인 사회와 별 다르지 않다. 이를 감안하면 다윗의 자제와 절제 그리고 자기부정은 참으로 놀라웠다. 다윗은 진실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인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종이었다(왕상9:4절 참조). 다윗의 충성은 조직 신학의 내외적(內外的) 소명(召命)을 잘 설명한다.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내적 소명을 받았다. 내적 소명은 외적 소명을 받기까지 사명을 준비해야 함을 뜻한다. 달리 말한다면 이 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혹독한 연단을 받아야 한다. 이 동안 다윗은 믿음으로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외적 소명은 주변 환경을 통해 드러난다. 다윗의 경우 두 번 외적 소명이 나타났다. 첫 소명에 따라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둘째 소명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첫 소명 이후 둘째 소명을 받기까지 그에게 정말 어려운 시험 기안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확실한 소명이 있기까지 기다릴 것인가? 마음대로 왕이 되어도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 시험에 승리했다. 두 번째 외적 소명이 확인되자 다윗은 주저 없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기름 부음을 받은 후 공식적인 왕이 되었다(삼하5:3절). 그러므로 그의 즉위식은 내적 소명부터 둘째 외적 소명까지 모든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이후 33년 동안 다윗은 내외치(內外治)에 성공했고 그 결과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헤브론의 7년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의 33년이 가능했다. 모든 지도자들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내적 소명을 받는다. 젊은 시기에 비죤을 품든지 혹은 소명을 확신하며...... 이 후 외적 소명을 받을 때까지 다윗처럼 자신을 준비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연단을 목적하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시험은 힘들 수 있다. 사실 연단이 힘들수록 보다 성숙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 향후 언젠가 그에게 선거나 임명을 통해 외적 소명이 나타난다. 목회자의 경우 노회의 안수례로 드러난다. 안수례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외적 소명의 증거이다. 이런 외적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 교회와 노회는 내적 소명을 받은 예비 목회자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외적 소명을 받은 후에도 지도자와 목회자는 한 동안 참으로 힘들고 외로운 시험에 노출된다. 주어진 권력을 자기를 위해 또는 교회와 나라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시험이 자주 온다. 여기서 승리한 지도자만이 나머지 기간 동안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의 경우와 같이 사회 활동이나 목회 활동에서도 이런 시험은 얼마든지 나타난다. 말씀 묵상과 기도를 하며 또는 자기 확신에서 지도자는 계획을 세운다. 이 때 그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지도자일수록 인내력을 잃고 자신의 야망을 강압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처럼 지도자와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이 주변 사람들의 의지(意志)를 통해 나타나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얻으려면 그 만큼 그 계획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반대에 부딪힐 경우 계획을 좀 더 검토할 기회로 삼는 지혜를 지도자와 목회자는 가져야 한다. 이 때까지 목회자와 지도자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받는다.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느냐 아니면 강압적으로 관철시키느냐? 전자의 경우 지도자는 무능력하게 보인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처럼 보인다. 대부분 후자의 유혹에 잘 빠진다. 그러나 이 때 외적 소명의 목적이 교회나 하나님 나라 또는 민족과 나라를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면 후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누가 하나님 앞에서 참 승리자가 될 것인가가 드러난다. 유교의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권위의식에 익숙한 지도자는 이런 시험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목회자도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출세욕과 권세욕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다. 자기부정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다윗의 예는 큰 도움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 주인이라는 믿음에 따라 다윗처럼 처신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이 세상과 교회의 주인이 부활한 예수님임을 믿고 바르게 처신해야 한다. 예수님은 구원주와 만유의 주님이다. 흔히 전자만 고백하지만 성화를 위해 신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후자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믿음만이 자기부정과 인내를 가능하게 한다. 교회에서 민주주의는 비성경적이라고 일부 목회자들이 말하지만 참으로 허무한 주장이다. 다윗의 모범은 오늘도 자기부정이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임을 말해 준다.
22 no image 구원은 상실될 수 있는가? 파일
장창수
4185 2011-03-30
(부제: 상이한 구원론) 칼빈주의 또는 개혁 교회는 받은 구원을 절대로 상실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교지 러시아의 교회들은 상실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리적으로 러시아 침례 교회는 알미니안 쪽으로 기울어진 웨슬리안에 속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시대 즉 70년간 지속된 무신론(無神論) 시대 잘 믿던 신자들이 교회와 신앙을 버렸다. 서로 다른 구원론 인간론에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또는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을 주장한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며 인간은 자신이 받을 구원에 간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구원론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칼빈주의는 받은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알미니안은 잃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차이는 관점 상 차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러나 알미니안은 사람의 관점에서 구원론을 각각 논한다. 달리 설명한다면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논리(論理)에서 본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시간의 변화에 무관한 진리로써 구원론을 말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 구원을 결정한다면 구원은 절대로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얼마든지 능히 이룰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神)이기 때문이다(사46:10-11, 엡1:11절). 그러나 알미니안은 인간 역사(歷史)의 지평(地平)에서 구원론을 본다.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의지와 다르게 다양하게 반응하고 변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구원론을 말한다. 실제로 교회 역사는 신자들이 신앙을 버리는 많은 사례들을 증언한다. 그리고 교리 면에서 알미니안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구원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본다. 구원론을 윤리로 바꾼다면 칼빈주의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규범 윤리라면 알미니안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상황 윤리이다. 결국 칼빈주의는 변할 수 없는 원리(原理: principle)에서 그러나 알미니안은 역사에 다양하게 나타난 적용(適用: application)에서 구원론을 각각 다르게 말한다. 구약은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말하는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거의 2백만에 가까웠다(출12:37절).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민26:65절).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한 약속(시105:11절)에 따라 출애굽 사건은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모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가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한 안식에 이르는 데 실패했다. 그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있었다. 이런 기록은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구원 받은 후에도 불순종한다면 구원을 잃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고 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증거이다.” 그러나 다른 질문이 생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다. 그럼 이들이 모두 천국에 이르지 못한 것인가?” 반드시 긍정할 수 없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천국에 들어간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도 마찬가 가지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불순종 때문에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라는 혼란기를 겪었다(삿2:1-3절). 애굽의 노예 삶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방 민족의 속박 아래 또 다시 살아야 했다. 이 뿐만 아니다. 나중 그곳에 세워진 다윗 왕국은 둘로 나뉘었고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들에 의해 각각 멸망 당했다. 이런 기록들은 구원 후 순종의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고전10:6절). 그렇지 않을 경우 받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구약은 경고한다. 구약 성경은 가나안의 안식(히4:8-11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이용하여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 대로 구약의 이 가르침이 반드시 성경적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구약의 역사(歷史)는 신약 시대 성취될 구원 역사를 상징적으로 또는 모형적으로 예언해 주는 역할을 한다(눅24:44절). 모형과 상징을 이용하여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경고했을 뿐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광야 40년 동안 살다 그곳에서 죽었다 해도 이스라엘 중 상당 수는 얼마든지 천국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칼빈주의의 구원론이 틀리고 알미니안의 구원론이 맞는다고 결코 증언하지 않는다. 잃은 구원의 복구 가능성도 기록한 구약 놀랍게도 구약 성경은 잃은 구원의 복구 가능성도 기록한다. 사사 시대 베들레헴에 살았던 엘리멜렉 가문이 좋은 예이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하기 위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갔다. 그러나 이방인의 땅에서 엘리멜렉은 물론 두 아들은 후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었다(룻1:1-7절). 이 당시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은 선민의 일원이란 증거물이었다(민26:53-54, 사60:21절). 신약 식으로 말한다면 교회의 회원이라는 증표로써 구원의 증거이다. 그러나 후손이 끊긴 엘리멜렉 가문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기업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 신약 식으로 말한다면 구원의 방주인 교회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 이 때 비로소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을 반기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오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룻1:20-21절) 정말 인류는 풍족할 때 하나님을 떠난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 때 하나님께 불순종했다(창3장). 나오미의 고백은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증언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잃은 구원의 복구 가능성을 또한 고백했다. 하나님이 준 고난과 역경 때문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과부 나오미는 혈통만 이스라엘에 속할 뿐 하나님의 언약과 완전히 무관한 이방인과 같았다(엡2:11-13절). 어떻게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을 것인가? 이를 위해 어떻게 끊어진 자손을 되살릴 것인가? 그녀의 며느리인 모압 여인 룻이 이 일을 해냈다. 남편의 근족(近族)인 보아스가 이들의 구원자였다. 그가 룻을 취함으로 나오미는 마침내 그에게서 후손을 얻었다(룻4장). 그리고 보아스가 남편의 잃어버린 기업을 다시 사 복구시켜 주었다. 엘리멜렉의 가문은 기사회생되었다(룻4:13-15절).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덕분이었다(롯4:14절). 알미니안의 주장대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상실했다. 그러나 칼빈주의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 덕분에 잃은 구원이 회복되었다. 더 놀랍게도 나중 엘리멜렉 가문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 출생했다. 이 모든 일들을 종합한다면 하나님의 장대한 계획이 드러난다. 먼 날 세워질 다윗 왕국을 목적하며 이스라엘의 혼란기인 사사 시대 하나님은 엘리멜렉 가문을 선택했다(룻1:1절). 이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이었다. 그리고 이 은총은 견인(牽引)의 은총으로 엘리멜렉 가문에 나타났다. 이 은총이 망한 가문을 복구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늘 하나님의 구원 은총 아래 살았다. 구원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모압 여인 룻을 통해 끊어진 후손을 얻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모압 여인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 줍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룻2장). 그러나 만약 엘리멜렉 가문이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 엘리멜렉의 불신앙을 이용하여 하나님은 그의 가문을 영원히 버렸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간단하고 공의롭다. 이들은 믿음에 따라 살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버렸다. 이들이 원하는 대로 잘 먹고 잘 살도록 하나님이 물질적인 복을 조금 더해 준다면 이들은 이방 땅 모압에 영원히 남았을 것이다. 그것은 곧 구원의 영원한 상실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렇게 돌보지 않는다. 창세기도 구원의 상실과 북구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아담은 낙원 에덴에서 사는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그는 스스로 에덴 동산을 잃었다(창3장). 이를 안 후 하나님은 잃은 구원을 되찾아 주겠다고 곧바로 약속했다(창3:15절). 그러나 약속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 여인의 후손에 속한 인류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의지가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알미니안의 주장도 맞는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구원 문제에서 인간의 의지가 최종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이로써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선 인간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정과 의지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만약 그의 작정이 실패할 수 있다면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이 좌지우지되면 안 된다. 그런 신에게 인류가 어떻게 자신의 구원 문제를 맡길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나 인간의 관점에서나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상실될 수 없어야 한다. 신약 성경의 구원론은 무엇인가? 그럼 왜 구약 성경은 구원의 상실과 복구 가능성을 모두 기록하는가? 그것은 신구약 사이 기록 방법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원리를 여러 인물들과 그의 사역을 통해 설명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예수라는 한 인물과 그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논리가 모두 설명된다(히1:1-2절). 달리 말한다면 구약은 앞으로 성취되고 완성될 하나님의 약속들을 예언의 형태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신약은 이 약속들이 아들 예수님에 의해 이미 성취된 것으로 기록한다. 예언과 성취 사이 차이는 구원론에 있어 신구약 사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예언 형태로 기록된 구약 성경에선 구원의 상실과 복구 가능성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이미 성취된 구원에 대해 기록한다. 그러므로 이미 성취된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말할 수 없다. 이런 가능성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불완전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아들의 사역에서 실패가 있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아들의 실패는 곧 아버지 하나님의 실패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창세 전 이미 세워진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과 선택을 무용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작정을 반드시 이루도록 허락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과 약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성, 이 둘을 또한 거짓으로 만든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 설명했듯이 구약도 구원의 상실성을 말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신구약 사이 동질성과 연속성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럼 신구약 사이 구원론에서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39-40절) 여기 이 사람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지칭한다. 구약의 신자들은 믿음으로 산 결과 앞으로 받을 구원의 증거는 받았다. 그러나 그 증거가 지목하는 약속은 아직 역사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구약 시대 성도들은 믿음 덕분에 앞으로 성취될 구원을 미리 앞당겨 받았다(선취된 구원: salvation received in advance). 구약 시대 믿음은 바로 그런 증거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구약 성도들은 신약 성도들과 완전히 다르다. 신약 성도는 역사적으로 이미 성취된 구원을 문자 그대로 약속의 형태로 받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은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자신의 구원이 완성될 날을 소망하며 기다린다. 이 때 구원을 앞당겨 받았든지 아니면 성취된 구원을 받았든지 이 둘 사이 차이는 있을 수 없다. 구원은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동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 받은 구원의 상실 가능성과 복구 가능성을 말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좋은 예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창12:1-9절). 그러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 이 때 부인 사라가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혼자 애굽을 떠날 수 없었다. 만약 하나님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애굽인으로 영원히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가 받은 구원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전 이미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했다(창12:1-3절). 그의 후손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을 성취해야 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꿈을 통해 애굽의 바로를 두렵게 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안전하게 가나안으로 돌아갔다(창12:15-20절). 이런 은총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 덕분에 아브라함은 애굽에서도 하나님의 선택 은총 안에 계속 머물렀다. 하나님이 한번 은총을 주기로 작정했다면 스스로 취소할 수 없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서 견인의 은총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시105:12-15절). 신약 성경도 이를 잘 증언한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모두 스승 예수님을 버렸다. 그러나 이들 사이 큰 차이가 있다. 가롯 유다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이미 버림 당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이미 받았다. 부활 후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을 찾았으나 가롯 유다에게는 그런 은총이 없었다.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신구약 모두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구원의 취소 불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의 구원론보다 칼빈주의의 구원론이 더 성경적이다. 동일한 구원론을 주장하는 성경 신약 성경에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성구가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4-8절) 먼저 문맥을 살펴야 한다. 이 본문 앞에서 ‘도의 초보’에 대한 언급이 두 번 있다(히5: 12, 6:1절). 그리고 5장 마지막 부분에서 ‘젖을 먹는 자’, ‘어린 아이’ 그리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는 표현들이 또한 등장한다(히5:13-14절). 이런 문맥(context)에서 본다면 이 본문(text)에서 언급된 신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자들이다. 분명히 이들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 본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의의 말씀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자로서 장성한 자도 아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단단한 식물을 먹을 줄 모르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할 줄 아는 자들이 아니라고 지적된다(히5:13-14절). 한 마디로 말해 이들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수신 신자들은 이들보다 앞선 자라고 지적되었다(히6:9절). 그렇다면 본문은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무관하다. 그럼 영적 미성숙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이 겨우 한 번만 비췸을 받았다는 데 있다. 그 덕분에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지만 그것은 한 때 잠깐이었다. 이들은 거듭난 성도들이 아니었다. 거듭남이 없이도 잠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얼마든지 맛 볼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동사 - 비취다, 맛 보다 그리고 참여하다 - 가 이를 잘 증명한다. 헬라어나 러시아어 문법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완료 동사이다. 동사가 지시하는 행위가 반복되지 않는다. ‘한번’이란 단어가 이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행위들은 신앙 삶 중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이 때 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결과 선악을 분변할 수 있는 장성한 성도가 될 수 있다. 그럼 이들은 어떤 신자들인가? 구약에선 가인 같은 자(창4장), 에서 같은 자(창25:31-34절), 성령의 감동으로 앞으로 올 메시아를 예언한(민24:17절) 거짓 선지자 발람 같은 자(유1:11, 벧후2:15-16절), 엘리 대제사장의 두 아들 같은 자(삼상2:12절) 또한 사울 왕 같은 자(삼상15:11-23절)이다. 그리고 신약에선 예수님의 산상수훈 마지막에서 언급된 거짓 선지자들(마7:22-23절)이다. 예수님의 12 제자들 중 하나였던 가롯 유다(요6:70-71절) 그리고 초대 교회 시대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절)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 보았다. 그러나 한 때 잠깐 맛 보았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반복적으로 이들 인격과 삶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계속 멸망의 길로 갔다. 왜 그런가? 이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은총의 비는 계속 내린다. 그러나 마음의 완악함이 이들로 하여금 은혜의 비를 받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종교 지도자들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거의 날마다 예수님에 대해 수많은 소식을 들었고 그의 말씀도 전해 듣거나 직접 보고 들었다. 은혜의 비가 소나기처럼 아무리 많이 쏟아졌지만 이들에게는 소용 없었다. 이 이유가 성경에 이렇게 설명된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절)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부터(사6장) 유대 나라를 멸하기로 이미 작정했다.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에 예수를 알게 하는 빛을 비추어 주지 않았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절)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은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구원론이 틀렸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이렇게 증언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7-39절) 결론 성경 해석을 위해 특정 본문만 살피면 안 된다. 즉 본문은 다른 성구들과 단절되면 안 된다. 문맥을 살피며 본문의 해석을 돕는 성구들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들도 얼마든지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과 사실들은 다양하다. 때때로 이 사건들 사이 모순이 발견되는 듯 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 그리고 목적은 늘 변함 없이 동일하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양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다.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흐르는 일관된 논리에 따라 본문들을 해석하여야 한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의 구원론에도 조심할 점이 있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하나님만이 누가 진정 구원 받는지 여부를 정확히 안다. 그러나 교회는 이에 대해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엔 안주하여 버린다면 칼빈주의자들은 율법폐기주의자로 드러날 수 있고 그렇게 오해 받을 수 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아직 영화(榮華: glorification)에 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 이후 반드시 필요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 과정에 진력해야 한다. 하나님도 이를 위해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를 시험한다. 참 신자를 연단시켜 합법적인 상속자로 세우기 위함이며 동시에 거짓 신자를 타락시키기 위함이다. 칼빈주의 구원론은 자칮 하나님의 시험의 의미와 신자의 성화 노력을 무용하게 만들거나 거짓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우습게 만들 수 있다. 피로 값 주고 산 바 된 성도의 구원이 ‘값싼 구원’으로 비웃음 받게 한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현상을 사도 바울은 보았다. 그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은 영원하지만 그 중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했다(고전13:13절). 사랑 실천은 바로 구원 받았다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갈5:6절). 이 때문에 율법 폐기론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칼빈주의 구원론과도 전혀 무관하다. 히브리 수신 교회에게 준 가르침에 주시해야 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3-25절) 반면 알미니안은 율법주의자가 될 수 있다.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 달린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에게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나타난다. 신앙 삶을 잘 한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 깊이 좌절하며 절망한다. 그러나 이를 감추기 위해 위선적인 신앙 삶을 산다. 이것이 율법주의자의 모습이다. 구원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한 노력에 의존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관점이 원리(原理)로 나타나면 항상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도 사단과 악이 활동하므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작정이 실패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만 아시지만 진실한 성도들의 성화 노력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세워지고 서서히 확장된다. 이를 위해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마침내 승리한다. 그리고 구원론은 중요하다. 구원론은 구원 받은 신자의 존재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구원론의 내용에 따라 존재에 대한 설명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어떤 구원론을 지지하느냐가 신앙 삶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것이 본 글을 쓴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지지하는 구원론을 늘 견지해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
21 no image 죽어야 단 것이…… 파일
장창수
2583 2011-03-21
(부제: 자기부정이 최고의 신앙 덕목) 성경의 히브리 문학은 같은 사실을 서로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여 설명한다. 이 덕분에 성경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시편에 이런 성구가 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절) 누군가 주(主)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서 성령을 거둔 결과라고 성구는 설명한다. 성구의 전반부는 유기(遺棄)의 결과(結果)를 그러나 후반부는 유기의 원인(原因)을 각각 설명해 준다. 결국 성령의 임재(臨在) 여부가 사람의 구원을 결정한다 (창6:3절 참조). 여기 성경의 성령론과 구원론이 동시에 설명된다. 히브리 문학의 이런 특징은 성경 해석에 참으로 유용하다. 이 특징은 사사기에 기록된 삼손의 수수께끼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는 자신의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참석한 블레셋 사람들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다음의 퀴즈를 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삿14:14절) 여기 먹는 자는 강한 자를 그리고 먹는 것은 단 것을 가리킨다. 먹는 자가 강한 자가 되면 먹는 것인 단 것을 낼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러나 삼손의 퀴즈는 자신의 강함과 그 유익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을 썩은 냄새처럼 풀풀 풍겨냈다.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士師)로서 활동한 삼손은 늘 사자처럼 강한 자였다. 어느 날 삼손은 사자를 맨 손으로 죽였다(삿14:8절). 얼마 후 자신이 죽인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발견했고 기분 좋게 단 맛을 보았다. 하나님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에게 뭔가 가르치고자 했다. “늘 강하기만 한 사자 같은 삼손이 자신을 부정할 때만 선민 이스라엘을 위한 유익한 사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의 퀴즈를 통해 자신의 강함을 은근히 자랑하고자 했다. 그는 잘 생겼고 체격도 좋았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그는 얼짱이며 몸짱이었다. 이 위에 하나님이 준 초능력적인 힘을 소유했다. 그는 그 시대의 영웅이었다. 자연히 그를 유혹하는 여자들이 주변에 많았다. 쉽게 그는 육욕(肉慾)에 빠졌다. 이스라엘을 위해 사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동족(同族)에게 때때로 짐이 되었다. 이 모두 사자처럼 강한 자인 삼손이 자제하고 절제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는 자기부정에서 대단히 약했다. 이스라엘의 사사(士師)로서 그는 매일 모세의 율법을 묵상하며 말씀이 자신을 다스리도록 훈련해야 했다(시1편). 그리고 초능력적인 은사를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사용하도록 자신의 소원과 육욕을 거부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이 때 성숙한 인격(人格)에 의해 기능적인 은사(恩賜)가 통제되며 사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진정한 강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삼손은 지도자로서 자기를 부정하며 자기 십자가를 질 줄 몰랐다(마16:24절). 그는 밀림의 사자와 같았다. 사자는 살아있는 동안 해치기만 하지 결코 단 것을 줄 수 없다. 단 것을 주기 위해 사자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오랜 동안 기다리며 참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다른 조치를 내려야 했다. 다른 짐승들을 해치기 좋아하는 사자 같은 삼손을 길들여 십자가를 지게 해야 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삼손의 약점을 이용했다. 어느 날 삼손은 소렉 골짜기 들릴라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늘 그녀와 함께 했다(삿16:4절). 삼손은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다. 이를 잘 안 들릴라는 그에게 간청하여 초능력적인 힘의 비밀을 마침내 알아냈다(삿16:4-21절). 그녀에 의해 머리 털이 밀렸고 삼손은 힘을 완전히 잃었다(삿16:15-17절).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다. 삼손은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다. 두 눈도 뽑힌 채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삿16:21절). 하루 아침에 삼손은 모든 것을 잃었다. 이제 더 이상 육체의 정욕대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 때야 비로소 그는 뭔가 깨달았다. 자신을 드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기로 굳게 결심했지만 이미 늦었다. 장님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다. 삼손을 그들의 손에 붙인 다곤 신에게 감사하며 기뻐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쯤 그의 머리털도 어느 정도 자랐다. 삼손은 블레셋에게 원수를 갚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께 힘을 되돌려 주십사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집의 기둥을 두 손으로 붙잡고 무너뜨렸다. 그곳에 모인 모든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삼손도 죽었다(삿16:22-31절). 성경에 그의 죽음이 이렇게 기록된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16:30절) 20년 동안 살았을 때보다 한 순간 죽었을 때 더 큰 업적을 그가 남길 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 죽음이 단 것을 냈다. 그의 죽음은 자기부정만이 자신과 사회와 나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도 같은 신학적인 의미를 준다. 삼손의 퀴즈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 그리고 사회와 민족을 위해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잘 가르친다. 진실로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은 자기부정에 있다. *http://blog.naver.com/rassvet
20 no image 자연 재난은 경고함으로 회개를 요구한다! 파일
장창수
2437 2011-03-16
(부제: 자연 재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의 일부 목사들은 섣불리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 되면 정치인들이 그러듯이 자신의 말을 언론이 왜곡시켰다고 변명한다. 먼저 그런 빌미를 제공한 것을 잊고 나중 남 탓으로 돌리며 빠져 나간다. 잠언에 이런 말이 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28:26절) 이들 목회자는 목회 성공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지혜에 따라 말해야 한다. 얼마 전 일본이 만난 자연 재난이 이번에도 예외 없이 이들의 설교 재료가 되었다. 설교 시간 재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여의도의 ㅈ목사와 강남의 ㄱ목사가 말했다. 이것이 또 다시 사회적인 시비와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사실 이들의 언급은 진리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진리는 당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이 선민에게 외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관계된다. 예컨대 요나 선지자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성에 앞으로 발생할 심판을 사전(事前)에 경고하여 회개토록 하라는 사명을 받았다(요나서). 그러나 이들은 그런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전에 그런 계시를 이들에게 줄 리 없기 때문이다. 자연 재난이 발생한 후 이들은 정통한 시사 평론가처럼 설교 중 말했을 뿐이다. 조심성 없이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성경은 이런 가벼운 행동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잠17:5절) 자연 재난을 통해 가난하게 된 자들을 이들이 조롱한 셈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난 재난이라고 굳게 믿는다면 이들은 더 잠잠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나 되는 것처럼 쉽게 말하며 행동한다. 물론 이들도 재난 당한 일본인들을 기뻐할 리 없다. 그러나 이들은 재난의 원인을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언급은 일본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들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일본이 과거에 한국에 행한 수많은 잘못들이 많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일본을 도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자!” 일본인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두 민족을 화해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하게 언급을 함으로 그만 기독교를 실추(失墜)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시비(是非)를 일으켜 한국 사회는 물론 일본 사회의 반기독교 정서만 키웠다. 복음을 전해야 할 목사 스스로 복음에 장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류 스타들은 무조건 일본을 돕자고 말한다. 한류 스타들보다 목회자들이 한 수 아래 모습을 보였다. 기독교는 자연 재난에 대해 지혜롭게 말해야 한다. 불신 사회로 나가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충고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절) 만약 교회와 신자들이 이에 실패하면 향후 복음 전파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그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을 말했다(눅13:1절). 이들이 이를 말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동기를 감출 수 있었다. 큰 무리에 의해 메시아로 추종 받는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임을 이들은 알았다. 로마 총독에 의한 동향인의 억울한 죽음을 말함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충동질하여 로마 제국과 투쟁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아니면 예수님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눅12:54-59절)을 들은 후 재난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은 산 사람들의 의로움을 증명한다는 식으로 이들은 주장하고 싶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위선과 외식(外飾)을 알아챈 후 이렇게 답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2-3절) 갈릴리 인들이 당한 죽음은 나쁜 통치자로 인해 온 재난이었다. 즉 인재(人災)였다. 여기 예수님의 논조 셋이 분명히 발견된다. 죄는 재난을 불러들일 수 있다. 그러나 재난으로 죽임을 당한 자가 산 자들보다 반드시 더 죄가 많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재난은 산 자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이다. 이 가르침은 그대로 일본인이 당한 자연 재난에 적용된다. 일본인들이 지은 죄들은 무수하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만난 자연 재난은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암시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두 목회자의 평론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그럼 한국인과 일본인들 중 누가 더 하나님 앞에 죄가 많은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겉으로 드러난 재난 자체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이 판정은 참 재판장인 하나님의 권세에 속한 것으로 인간 목회자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두 목회자는 어느 덧 하나님의 재판 자리에 앉아 일본인을 정죄하는 교만 죄를 범했다. 이런 실수와 잘못을 우린 곧잘 범한다. 두 목회자에게 다른 잘못이 발견된다. 예수님의 논조에 따르면 일본인이 만난 자연 재난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으면 한국인도 멸망 당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위에 언급한 두 목회자들처럼 생각한다. 남이 당한 불행을 보면 마치 자신이 의로워서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은 생각하며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죄이다. 그러나 이런 위선적인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동일한 재앙을 만날 수 있다고 성경은 이미 경고한다. 그러므로 이젠 재난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 “남의 불행은 곧바로 나 자신을 살피라는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들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사실 진작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했어야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까지 살려두었고 이런 가운데 다른 사람의 불행을 목격하게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했다. 아마 지금까지 이런 경고가 수도 없이 우리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남의 불행을 통해 하나님은 수없이 자비와 긍휼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다. 우린 진작 하나님 앞에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거꾸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의(義)를 자랑하려는 악한 종자에 지나지 않는다(사1:4절). 계속 이런 마음의 완악함을 고집한다면 갑자기 우리들도 재난을 당해 망할 수 있다. 이를 설명하려고 이전과 달리 예수님은 자연 재난(災難)을 예로 들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4-5절) 예수님의 논조에 의하면 상기의 두 목회자들을 비롯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위선자였는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이런 위선(僞善)을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지에 대해 비유를 들어 예수님은 설명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눅13:6-9절) 경계경보는 한없이 울리지 않는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 40년 지난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유대와 예루살렘은 완전히 망해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예수님을 버린 유대를 긍휼히 보았다. 정말 하나님은 오래 참는 사랑의 신이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공로자가 될 수 있다고 쉽게 주장할 수 있는가? 지난 3월 11일 일본인들이 만난 엄청난 자연 재해를 보면서 한국 교회도 위에 언급한 두 목회자들처럼 안이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 교회가 이번에도 하나님 앞에 마음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징계가 반드시 올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나타날까? 물론 안 알려졌다. 그러나 결정적인 마지막 심판까지 하나님은 인내하면서 기다리면서 동시에 마음의 완악함을 계속 고집하는 목회자들을 개별적으로 심판할 것이다. 아직도 한국 교회가 하나님 앞에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다는 전제 아래서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교회를 정결케 해야 한다. 일본의 자연 재난은 한국 교회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하며 그리고 고난을 당한 이웃 형제를 돕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원수를 사랑으로 품는 넓은 가슴을 보여야 한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 결과 우리 주님의 이름만이 드높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이여! 일본이 만난 자연 재난을 통해 한국 교회가 갱생하도록 자비와 긍휼을 베푸소서!”
19 no image 모세가 경험한 두 문화 파일
장창수
2687 2011-03-14
(부제: 타락한 세상 문화에 휘둘린 한국 목회) 모세는 히브리 인이었지만 애굽의 바로 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랐다. 40 세가 되었을 때 그는 말과 일에 능한 왕자였다(행7:22절).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 때 모세는 원정에서 돌아온 승전 장군으로 바로의 후계자였다고 한다. 그는 만인(萬人)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이 모든 것들을 잃고 애굽이 아닌 미디안 광야에서 그는 살아야 했다. 미디안 광야는 당시 최고의 문명국이며 선진국이었던 애굽과는 완전히 달랐다. 광야는 인간 문명을 거부하는 죽음의 땅이다. 애굽에서 천군만마를 지휘했던 모세는 이곳에서 말 못하는 양들의 목자가 되었다. 40년 동안 살면서 모세는 말에 어눌한 사람이 되었다(출4:10절). 이렇게 모세는 80년을 전, 후반기로 나누며 완전히 상반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애굽과 광야 사이 차이를 이해하여야 한다. 애굽은 오늘날 미국 같은 최고 문명국이었다. 매년 반복되는 나일강의 범람 덕분에(렘46:7-8절) 물과 자연 비료가 풍부했다. 애굽 인들은 힘들이지 않고(신11:10절)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매년 대풍(大豊)을 맞으며 애굽은 낙원 같은(창13:10절) 곳이었다. 애굽은 농경(農耕) 문화의 최절정에 달한 정착(定着) 사회였다. 농경 문화는 인간의 힘으로 자연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한다. 그리고 인류의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만큼 농경 문화는 자연보다 인력(人力)에 더 의존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신의 도움이 없어도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宗敎)는 농경적인 정착 사회에서 그 힘을 점점 잃고 인본주의(人本主義) 사회로 바뀐다.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로 넘어갈수록 이런 무신론적 성향은 인류 사회에서 더 분명해진다. 이렇게 농경 사회에서 신(神)보다 인간이 더 주목을 받는다. 지혜와 힘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영웅 또는 왕으로 숭배되며 그를 중심으로 정착 사회가 형성된다(창10:8-9절). 농경 문화가 특색인 정착 사회는 당연히 공간(空間) 개념에 의해 다스려진다. 이곳에서 토지(土地)와 그 산물(産物)들은 생존(生存)에 절대적이다.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많이 소유하려 한다. 정착 사회에서 사람들의 소유(所有)에 대한 집착은 대단히 크다. 자연스럽게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복(福)이 강조되고 인간의 이런 탐심을 채워주는 기복적(祈福的)인 종교가 농경 사회에서 발전한다. 농경 사회에서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 사이 자연스럽게 계급이 형성된다. 최고의 권력자인 왕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적인 통치가 나타난다. 그의 통치력에 의해 제국이 번성하고 확장되면 그는 신(神)이 된다. 이렇게 전재 정치나 독재 정치는 농경 사회의 산물이다. 그리고 불교, 유교와 무교도 농경 사회의 산물이다. 농경 문화는 사상적으로는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를, 정치적으로는 전재 정치를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물신주의(物神主義: mammonizm)를 만들어 냈다. 이로써 정착 사회의 특징과 성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고대 바빌론의 바벨탑(창11장)이나 애굽의 피라미드는 이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40년 동안 모세가 살았던 미디안 광야는 죽음의 땅이었다. 그곳은 인간의 힘이나 지혜를 거부한다. 생존을 위해 유목민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이들은 자연 앞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깨닫고 신(神)의 존재를 더 생각한다. 종교 사학자들은 이런 환경 아래 유일 신을 섬기는 유대교와 회교가 나왔다고 말한다. 광야에서 유목민들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때를 놓쳐 풀을 얻지 못하면 모두 잃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유목민들은 이동(移動)하기 쉬운 방법으로 광야 삶을 살아야 한다. 정착민처럼 땅에 집착하면 이동(移動) 시기를 놓칠 수 있다. 이 때문에 유목민들은 꼭 필요한 재산(財産)만 소유하려 한다. 소유(所有)에 대한 집착력이 약하다. 이렇게 유목 사회는 공간 개념보다 시간(時間) 개념에 의해 지배 당한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광야 같은 곳에서 유목민처럼 살았다(창46:32, 47:3절). 이 사실은 이들의 삶과 신앙이 공간 개념보다 시간 개념에 따라 살았음을 증언한다. 겉으로 보아 재물을 많이 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광야의 유목 사회에서 사람들은 가족처럼 귀한 존재들이다. 농경 사회와 달리 인력(人力)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인 하나를 형제들이 공유하며 이렇게 낳은 자식을 구별치 않고 함께 양육한다. 그리고 광야에선 목축도 한 가족처럼 대단히 귀중하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의식주(衣食住)문제가 목축으로 해결된다. 짐승의 배설물조차 땔감으로 사용될 정도로 매우 유용하다. 농경 사회에 비한다면 유목 사회는 훨씬 더 민주적이다. 유목 사회의 통치술은 정착 사회의 종속적인 ruler-ship과 달리 평등성과 개별성이 강조되는 pastor-ship 즉 목양술에 있다. 광야라는 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광야에선 낮과 밤의 기온 차가 극히 심하다. 낮은 아주 뜨겁지만 밤은 매우 춥다. 삶 자체가 이들에겐 훈련이며 연단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어릴 때부터 이들은 어떻게든지 살아남는 훈련을 배운다. 유목민들이 농경 사회의 정착민 들보다 훨씬 강한 이유이다. 자연 환경과 정치적 변화로 생존에 위협을 느낄 때 유목민들은 농경 사회를 침략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멸망했고 정착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역사상 스키타이족과 훈족과 몽골족의 이동이 이를 설명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정착적인 유목 사회는 정착적인 농경 사회와 완전히 다르다. 모세는 애굽의 농경 문화와 광야의 유목 문화를 모두 경험했다. 하나님은 모세가 두 문화에서 40년씩 살게 하여 두 세계를 철저히 경험하도록 했다. 이 덕분에 모세는 두 세계, 두 문화 그리고 두 사회를 모두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애굽의 지도자 훈련만으로 부족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성격상 비정착적인 유목 사회의 지도자와 비슷하다. 모세 이전 족장들이 왜 정착 사회를 떠나 광야에서 장막 삶을 살았는지 이해된다(히11:9-10절). 그리고 왜 이스라엘이 정착 사회인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착 사회를 세웠는지에 대해서도 이해된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정착민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도 비정착민들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와 선민 이스라엘은 상이한 문화와 사회를 모두 경험했다. 이들의 경험은 신약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기독교의 목회자와 신자들이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기독인들에게 농경적인 정착 사회의 삶 양식보다 유목적인 비정착 사회의 그것이 더 잘 맞는다. 성도는 이 세상의 순례자이기 때문이다(레25:23, 벧전2:11절). 또한 영적(靈的) 관점에서 이 세상은 성도들에게 광야와 같다(요17:14-16절). 그리고 출애굽 사건 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품꾼으로 불렸다(레25:55절). 품꾼은 시간 단위로 일하는 노동자로 계약된 시간이 지나면 일을 잃는다. 성경은 이 세상이 신약 성도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 곳이 아니며 곧 역사적인 종말(終末)을 맞을 곳이라고 말한다(고전10:11절). 이를 안다면 성도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과 밖에서 목회자들을 비롯한 성도의 사고 방식은 공간 개념이 아닌 시간 개념에 의해 철저히 지배 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소유(所有)보다 나눔에 힘쓰고 그리고 축재의 삶보다 청지기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탐심 많은 신자로 드러나 나중 수치를 당할 것이다(눅12:16-21, 딤전6:9-10, 약5:1-5절). 이것을 피하려면 땅에 것을 부인하고 위에 것을 더 소망해야 한다(골3:1-5, 딤전6:17-18, 히12:1절). 이렇게 자기부정은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에 달하게 한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도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말했듯이 기독인들은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소유한 후 그것에 안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하는 인간이다.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들은 성공을 위해 노력한 만큼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와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노력이 부족하여 한국 교회가 혼란에 빠져있다. 성경이 말하는 목회학이 정착 사회의 leader-ship이나 ruler-ship이 아니라 유목 사회의 pastor-ship임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경고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8-10절)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게 7가지 저주가 내려졌다 이 저주들은 그대로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경고는 이미 충분히 이들에게 내려졌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이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위는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잘 증명한다. 이들의 불의와 부패로 인해 지나치게 불평,불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
18 no image 문제는 교회의 정치 세력화이다. 파일
장창수
2558 2011-03-05
(부제: 정교분리는 지켜져야 한다) 예전 보수주의에 속하는 교회들이 진보주의에 속하는 교회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았다. 보수 교회들이 현실도피주의적 신앙 자세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 하지 못했고 국가를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주관함으로 독재 정권을 오히려 옹호했다고 진보 교회들은 그 동안 주장했다. 그래서인가 요즘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이 지나치게 정치에 참여한다. 참여가 활동적이다 보니 기독교 나라인 미국에서도 잘 지켜지는 정교분리(政敎分離)가 최근 지켜지지 않는다. 이들 목회자는 기독교 단체를 만들어 놓았고 기독교 교리에 안 맞는다면 공개적으로 정권과 통수권자를 비난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폭언도 강대상에서 서슴지 않고 한다. 과연 이것이 맞는가? 물론 상식적으로도 틀렸다. 우선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정교 분리를 위배했기 때문이다. 정교 분리는 초대 교회 시절부터 철저히 지켜졌다. 이 당시 기독교 신자들은 사방에서 온갖 위협을 받았지만 정치 세력화하여 로마 제국에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목회자는 목회 성공 후 뭔가 부족한지 정치에 참여하려 한다. 대한민국 국민은 납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비난한다. 대한민국 속담대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보고 뭐라 한다는 식으로 국민은 이해한다. 유감스럽지만 지금 한국 기독교는 더 이상 빠져 나오지 못할 정도로 더러운 시궁창에 빠져있다. 새삼스럽게 일일이 이를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3-5절) 지금 한국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남을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 불의와 부패를 청결 시킴으로 자신을 개혁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급선무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성경이 금하는 바를 하려고 대든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낙타를 억지로 삼키려고 무리수를 이들은 두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한국 교회는 한 발 물러나 자기 입장을 털고 좀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보다 큰 그림이 보이면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지가 분명해 질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보아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난 백 년 동안 놀랍게 성장했다. 이런 성장을 이룬 나라와 국가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복음 전파가 필요하다. 전체 개신교 인구가 크게 잡아 7백만으로 본다면 전체 국민의 1/7만 기독교로 개종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기독교 나라가 아니다.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 이외 다른 종교들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 퍼져 있다. 이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기독교인들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그렇다면 특정 정치적 안건은 기독교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기독교 이외의 사람들의 이해에도 관계된다. 한국 기독교가 몰아붙이듯이 자기 주장만 하며 다른 이들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면 안 된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가 무례하다는 인상을 한국 사회에 준다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 교회는 더욱 수적으로 위축될 것이며 복음 전파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럼 정치적인 사안 때문에 복음 전파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정치적인 이익을 버려야 하는가? 그 답은 분명하다. 왜 기독교가 정치에 초연해야 하는가도 분명하다. 그리고 예수님이 로마 제국을 상대로 왜 정치적인 투쟁을 하지 않았는가도 여기 밝혀진다. 물론 정치 문제보다 영혼 구원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정치에 참여할 경우 영혼 구원 문제가 소홀해 질 수 있음을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초대 교회는 잘 알았다. 그리고 이제 1/7 밖에 안 되는 한국 기독교가 무리하게 전체 판을 흔들려 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명한 이웃 사랑 실천도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웃의 인격을 존중해 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원수가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라고까지 명했다. 이렇게 이타적이어야 할 기독교가 특정 정치 사안에 이기적인 자세를 보인다면 상식 있는 불신자들이 비웃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은 종교에 무관하게 모든 국민을 품에 안는 국부(國父) 같은 존재여야 한다. 왜 그가 기독교 조찬 기도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가? 왜 그렇게 자신은 대통령으로서 기독교 신자임을 과시해야 하는가?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아마 뜨거운 신앙심과 사명감이 그로 하여금 대한민국 모든 국민을 품어야 할 아버지 같은 존재임을 잊게 만든 모양이다. 대한민국의 최고통수권자라면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 종교적인 모임에 참석하면 안 된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도 그를 초청하여 함께 기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면 안 된다. 왜 그를 기도회에 참석시켜 기독교는 세를 과시하려 하는가? 이 때 다른 종교인들과 불신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대통령이 나왔다면 뒤에서 기도만 해주고 대외적으로 기독교는 숨을 죽여야 한다. 불필요한 오해를 줄여 복음 전파에 방해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섣부른 정치적 언급이 기독교 출신인 대통령의 통치 행위에 누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상식이며 기독교 교회가 보여야 할 겸손이다. 그러나 세를 과시하듯이 그를 기도 모임에 초청했고 그로 하여금 무릎 꿇고 기도하도록 한국 교회는 요구했다. 마치 기독교가 중세의 카도릭처럼 모든 세속 권세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었고 일국의 대통령인 이명박씨가 이런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음을 애써 강조하려 했다. 물론 초청에 응한 이명박씨에게도 잘못은 있다. 그러나 이 모두 다종교 사회인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못한 결과였다. 기독교 밖 사람들의 눈에는 1/7이 무례하게도 대한민국 주인 노릇 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한 이웃 사랑도 아니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겸손도 물론 아니다. 보이지 말아야 할 우월감과 교만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 MB정권은 기독교의 신세를 지고 출생했기에 기독교의 눈치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기독교 밖의 국민의 이해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지금도 때는 늦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 조심할 것이 있다. 뜨거운 신앙심 때문에 자신의 정권과 권세를 이용하여 이 땅에 기독교를 더욱 진흥시키겠다는 결단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은 온 국민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료 선임은 신앙이 아니라 철저히 능력 본위여야 한다. 신앙인 각료의 실정(失政)은 곧바로 기독교에 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잘못하면 대한민국은 자칫 레바논 같은 종교적 분쟁지가 될 수 있다. 사회가 통합되지 않은 가운데 이런 종교적 분쟁이 발생한다면 나라와 민족은 망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종교간 평화가 잘 유지된 모범적인 나라였고 세계인들은 이를 칭찬했다. 이것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에게 유익하다. 나라가 혼란하면 복음을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해를 받는다. 초대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불필요한 비난과 비판을 가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관점에서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를 보아야 한다. 왜 그런가? 설사 수쿠크라는 경제 법안이 앞으로 한국에 해를 끼칠 여지가 있다 해도 한국 교회는 이 법안을 정치권에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그 이유는 세계 선교를 위해서이다.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인종을 초월하여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한국 기독교가 교리 관점에서 회교의 수쿠크를 극렬하게 반대한다면 세계 선교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회교권도 자기의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자기 나라 안의 기독교 선교 행위를 반대할 수 있는 핑계를 얻는다. 이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공개적으로 이 법을 반대하면 안 된다. 우선 선진국들도 경제 논리에 따라 회교의 수쿠크를 받아드려 중동의 석유기금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이 자금이 테러와 연결되었다면 이들 나라가 이를 받아들일 리 없다. 이웃 나라 일본도 받아들였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그리고 정확한 정보도 없이 이 법안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그렇고 이들 선진국이 속으로 우스워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 나라의 세속화(世俗化)는 당연한 것이다. 온갖 세속화 과정은 구약 시대부터 있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도 아니다. 거침없이 몰려오는 세속화 과정을 어떻게 강압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수쿠크 때문에 세속화가 더 앞당겨지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는 다른 차원에서 이를 막아야 한다. 대한민국 전체 국민을 상대하지 않고 교회에 적을 둔 신자들을 대상해서 말이다. 왜 그런가? 구약 시대와 달리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는 영적(靈的)인 차원에서 이 세상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 윤리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 나라(통치)는 눈에 안 보이는 형태로 이 세상에 확장될 것이다. 기독교가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할 이유이다. 복음으로 사람들이 구원을 얻어 새사람이 된다면 새로운 윤리(기독교 윤리)에 따라 살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그 만큼 불신 사회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며 하나님 나라가 저절로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혈육(血肉)이 아닌 영(靈)에서 벌어진다. 그러나 수쿠크에 직접 반대하는 것은 혈과 육의 방법에 속한다. 만약 이 법안이 마음에 안 든다면 교회는 가르침을 통해 신자들이 회교의 석유 자금을 사용하지 않도록 단속하면 된다. 하나님 나라와 세계 선교를 염두에 둔다면 수쿠크 법안은 지극히 작은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이 법안이 승인된다면 한국 기독교는 회교권 나라에 대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헌법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요청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 스스로 회교 선교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정치적 발언을 하는 목회자들은 모두 큰 교회 목회자들로서 세계 선교에도 헌신한다. 그러므로 수쿠크로 인해 세계 선교에 장해 요소가 생기는 것도 이들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리고 성경도 지지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선지자들은 조국이 멸망해야 비로소 새로운 이스라엘이 나타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동족이 싫어하고 미워해도 조국에 대한 비관적인 예언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도 국지적이며 소아적인 입장을 버리고 조국과 민족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대국적으로 보아야 한다. 나라가 사회적으로 안정되어야 교회도 계속 존재하며 예수님이 맡긴 복음 사역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 다른 고려 사항이 있다. 지금도 이북의 공산당은 계속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며 사회적 혼란과 분열을 책동하고 있다. 이런 때 한국 기독교가 정치 세력화하여 사회적 혼란을 부추긴다면 누구에게 유익인가? 아직도 이북을 추종하는 좌파 정치인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 이들이 보수 층의 분열을 이용한다면 또 다시 좌파 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 진정 기독교 대통령을 사랑한다면 기도만 하고 그가 마음대로 민족을 위해 일하도록 맡기자! 반면 한국 기독교는 아직도 소수임을 명심하고 그 동안 교회 성장이 준 헛된 자만감을 버리고 자정(自淨)을 통한 교회 개혁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 후 기독교의 현실 참여도 목회자가 아니라 신자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적인 삶 활동을 통한 신자들의 현실 참여는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목회자의 참여는 사회적인 분열과 혼란을 초래시키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란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점에서 영원한 진리이다.
17 no image 경기서노회 신흥교회 개발로 위기에 처함
유병도
2943 2011-02-28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7구역이 개발로 인하여 신흥교회가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신흥교회는 이용근목사님이 천막교회를 시작하여 3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2대목사인 민경택목사 담임하고 있으며 우선관리처분대상으로 인하여 예배당이 헐리게 되었고 보상은 50%만 해주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도당동은 공장지대와 서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대책위원장인 주님의교회 김형원 목사님과 신흥교회 담임목사인 민경택목사는 10일째 부천시청 시장실 입구에서 진을 치고 항의를 하고 있지만 해결책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시장실입구에는 경찰들이 막고 있으며 시민들은 시민이 시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부천시청 입구에는 시민이 시장이라고 하지만 정작 시민의 말은 전혀 들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민경택목사를 만나러 다녀왔는데 경계가 심하고 어디가는냐고 경찰이 막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5층까지는 막아둔상태이고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에는 농성중인 시민들이 어디서 왔냐 누구만나러 왔냐 합니다. 5층시장실입구 복도에는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고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시장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계란투적하고 음식물 쓰레기 등 신문지등 온갖 쓰레기로 뒤엉켜 있습니다. 얼마전 용산사태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2의 용산사태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시는 시민에게 권리를 주고 시민의 수용을 알아주어야 할것입니다. 개발이라는 것으로 수십년 살아온 정든 고향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다/. 지금 부천시는 이일로 700여개의 교회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16 no image 바보야!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야! 파일
장창수
2790 2011-02-19
바보야!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야! 남자에게도 갱년기가 찾아온다. 이 때 남자는 감성적으로 여성화 현상을 보인다. 예전과 달리 드라마를 보면 너무 쉽게 감동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를 본 가족들이 의아해 한다. 이 때부터 남자들은 과거를 뒤돌아 보며 가족과의 관계에서 큰 변화를 보인다. 이 때쯤 부인은 남성화된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다. 한국에서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목회자의 아들이 이미 고인(故人)이 된 아버지에 대해 쓴 글(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89322&logId=5318654)을 얼마 전 유심히 읽었다. “목회자인 나도 집에선 그랬다”라고 동감했다. 목회자의 가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때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오며 이런 한탄이 절로 나왔다. “이 바보야!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야!” 동시에 “그래! 맞아!”라고 응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30대 중반 넘어 때늦게 신학 공부를 했다. 빨리 배워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있어 아내의 가정 일에 전혀 무관심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시기 아들을 거의 방기했다. 그러지 말아야 할 목회자로서 가정 목회에 소홀했다는 아픔이 나중 생겼다. 글 제목은 교회나 목회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를 전혀 갖지 않는다. 다른 쪽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늘 한 쪽으로만 치우쳐 있었다는 깨달음과 그로 인한 때늦은 한탄에서 나온 제목이다. 흔히 목회자는 교회 목회와 가정 목회 사이에서 늘 방황하면서도 가정 목회에 소홀하다. 목회자 자녀가 아주 잘 되거나 아주 못되거나, 둘 중 어느 하나란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그러나 교회와 가정 사이 관계를 대립적인 이분법(二分法)에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가정이 본래 갖는 역할을 찾아내 교회 목회와 가정 목회 사이 조화내지 균형을 어찌 하든지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온 글 제목이다. 이 점에서 나의 한탄스런 깨달음은 기독교와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경고일 수도 있다. 보완되어야 할 조직 신학 그 동안 기독교 신학은 가정(家庭)의 중요성을 그 다지 깊게 연구하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학문간의 분리 현상 때문에 윤리와 도덕이 기독교 신학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동안 기독교 윤리가 약화되었다. 신학(神學)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 조직신학(systematical theology)에는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라는 각론(各論)들이 있다. 그 동안 신앙 삶은 이들 각론 제목(subject, view)의 내용들에 따라 좌우되었다. 조직신학에서 구원론 다음 교회론이 온다. 그 결과 구원 이후 교회 삶이 중요하다고 목회자와 신자들은 당연히 생각한다. 목회 의식과 신앙 삶이 늘 교회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 이유이다. 특별히 동양인 목회자들에게 이런 현상은 더 심하다. 이들은 공(公)을 위해서라면 사(私)를 기꺼이 희생시킬 준비가 늘 되어 있다. 놀랍게도 교회론 다음 곧바로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이 온다. 어찌 보면 각론의 순서들이 이원론적(二元論的)이다. 이런 신학에 근거를 둔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은 목회자와 신자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등지게 만든다. 이런 신학적 성향은 이원론적인 동양 문화권의 목회자와 신자에게 당연히 현실 도피적인 신앙 삶을 유도한다. 그러나 신자는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발을 디디며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 어떻게 이 세상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신자들에게 필요하다. 성경도 교회란 구원 받은 신자들을 출생시키고 양육시켜 다시 세상으로 보내는 성스러운 조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마5:13, 14, 13:38, 24:14, 요4:42, 17:18절). 이런 문제를 피하려면 교회론과 종말론 사이 가정론(家政論)과 신국론(神國論: theolog of God’s kingdom)이 추가되어야 한다. 구원 받은 성도는 가정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새롭게 배우고 이들이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 때 기독교 윤리는 이원론에서 탈피하며 구체적이며 실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바뀐다. 이런 윤리만이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도록 잘 도와준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가정 성경의 창조 기사(창1-2장)는 놀라운 사실을 지적한다. 인간 창조는 곧바로 결혼과 부부 그리고 가정에 대한 제도의 창설이었다(창1:26-27절). 이 제도들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문화 사명(창1:28절)을 잘 수행하도록 돕는 수단과 방법이다. 그리고 문화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목적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의 가정론은 신국론과 깊이 관련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행위를 통해 만물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이로써 그의 보편적인 통치(統治)는 이미 실현되었다. 우주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는 지구(地球)에 관한 자신의 통치권을 인간에게 위임했다(창1:28절).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 인간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인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만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도 세워질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결혼과 부부와 가정에 관한 제도를 창설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성스런 제도로써 수단과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보편적 창조 사역, 인간 창조, 결혼, 부부 그리고 가정 제도, 문화 사명과 하나님 나라는 각각 독립된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의미상 또는 논리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유감스럽게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이들 중 하나의 관점으로 창조 기사를 연구했다.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라는 남녀는 최초의 가정을 구성했다. 이 가정은 앞으로 형성될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써 최소 공동체였다. 그렇다면 가정과 인류 사회는 서로 긴밀하다. 기초 단위가 무너진다면 인류 사회도 더 이상 세워질 수 없다. 다시 말해 가정이 모든 면에서 건강해야 인류 사회도 건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의 가정관이다. 왜 그런가? 이 때 최초의 가정(家庭)은 바로 교회였고, 학교였으며 그리고 나라였다. 가정 안에 교회, 학교 그리고 나라가 존재했다. 가장(家長)인 아담은 목사요, 교사요 그리고 통치자였다. 아담의 가르침과 지도 그리고 통치 아래 그의 후손은 가정에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훈련 받아야 했다. 가정이 인류 사회의 최소 공동체라면 이곳에서 어떤 훈련을 받느냐가 앞으로 형성될 인류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은 뻔하다. 이렇게 본다면 가정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가정은 출애굽 사건 전까지 적어도 2500년 동안 그 역할을 계속 유지했다. 하나님은 구원 계시들을 가장(家長)에게만 주었다. 교회가 가정 안에 있었다. 교회는 가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 가정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서도 그 역할이 하나님 앞에 그 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타락 사건(창3장)으로 최초의 가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가정에서 하나였던 종교와 문화가 서로 분리되었다(창3:15절). 아담과 그 후손이 창조주 하나님 대신 사단을 새로운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 중 메시아의 혈통을 지정했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로 나뉘었다. 여인의 후손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믿고 소망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뱀의 후손은 사단 아래 자신의 문화를 세우는 일을 할 것이다. 그 결과 여인의 후손인 셋의 자손들이 형성한 가정은 세상 문화와는 무관했다. 이들은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 이 때 교회는 가정 안에 그대로 보존되었다. 구원에 관한 계시가 이들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뱀의 후손인 가인의 자손들이 형성한 가정은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된 가운데 인간의 나라를 세우는 문화 사명을 수행했다(창4:16-26절). 시간이 지나면서 셋의 후손도 자신의 성스런 소명과 사명마저 포기했다(창6:1-2절). 모든 가정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자신만을 위해 존재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목적한 문화 사명을 수행할 하나님의 일꾼들이 전혀 배출되지 않았다. 가정 안에 교회가 사라진 결과였다. 그 대신 자기 욕망을 따라 살며 싸우길 좋아하는 용사들만 나타났다(창6:4절). 점점 세상에 악이 관영했다(창6:5절). 그런 세상은 하나님 앞에 존재 의미가 없었다. 홍수 심판으로 하나님은 옛 세상을 모두 멸해 버렸다(창7-8장). 경건한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손 가정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창6:2절). 이들은 결혼을 통해 불경건한 사람들과 같이 되며 창조주 하나님과 앞으로 올 메시아에게 둔 믿음과 소망을 버렸다. 홍수 후 새 세상이 나타났고 창조 후 옛 세상처럼 한 가정으로부터 출발되었다. 또 다시 종교와 문화가 하나인 가정에서 인류 문화와 사회가 시작되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가정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음으로 새로운 인류도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을 버렸다(창11장). 참 종교와 문화가 또 다시 분리되었다. 하나님은 새로운 가정을 세워야 했다. 이 목적에 따라 아브람이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창12:1-3절). 이 후 출애굽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800년간 족장 시대는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구원 계시는 여전히 족장인 가장에게만 주어졌다. 이 때 가장(家長)은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라는 세 직분을 한꺼번에 소유했고 가족에 대한 생사여탈권이라는 절대권력을 가졌다. 이 시대에도 교회는 가정 안에서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 때 족장들의 가정은 가나안에서 겨우 발 붙힐 수 있는 땅만 얻어 간신히 연명했다(행7:4절). 이들의 가정이 문화 사명을 수행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의 꿈이었다. 이를 목적하며 하나님은 가장인 족장들에게 약속의 언약(창12:1-3절)을 주었다. 이 언약에 의하면 족장들의 후손은 하나의 민족을 형성할 것이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나라를 세울 것이다. 드디어 출애굽 사건을 통해 특별한 민족이 출생했다. 종교와 문화가 전혀 분리되지 않은 민족과 나라 그리고 백성의 출현이었다. 하나의 가정이 마침내 민족으로 바뀌었다. 이 후 선지자, 제사장과 왕이라는 삼직분도 가정에서 벗어났고 또한 나뉘어졌다. 구원에 관한 계시들은 주로 선지자들에게 주어졌다. 교회가 비로소 가정에서 분리되었다. 정복 전쟁 후 이스라엘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 다윗 왕국을 세웠다. 그렇게 종교와 문화가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가 가나안 땅에서 세워졌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일차적으로 이 지상에 성취되었다. 그 동안 가정 안에 있었던 교회가 나라라는 보다 더 큰 영역으로 옮겨졌다. 나라와 교회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시민들이 형성한 가정들로 구성되었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법 제도를 갖춘 나라이면서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때도 가정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다. 율법의 요구대로 가정들은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출23:14, 34:22, 신16:16절). 아니면 속죄를 위해 올라갔다. 특별히 이들 절기는 조직신학이 말하는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을 상기시킨다. 봄(년초)에 치러지는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통한 새로운 출생(칭의)을, 여름(년중)에 행해지는 초실절, 칠칠절 또는 오순절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출발(성화)을 그리고 가을(년말)에 지켜지는 수장절과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구속이 완성되었음(영화)을 각각 상징했다. 이렇게 절기를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을 감사하고 더욱 확고히 했다. 절기들을 지킨 후 선민 이스라엘은 각각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렇다면 이 당시 신앙 삶의 무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선민이 사는 곳이었다. 삶의 터전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러므로 가정이 선민에게 여전히 신앙 삶의 중심이었다. 매 안식일 가정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했다. 출애굽 사건 이후에도 가정의 역할과 그 중요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은 다윗 왕국의 흥망성쇠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율법 교육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다윗의 장남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에게 행한 간음 사건(삼하13:1-19절), 이로 인해 발생한 암논의 죽음(삼하13:28-29절), 압살롬의 반란(삼하15장), 그가 아버지의 첩들과 대낮에 동침한 사건(삼하16:22절), 솔로몬의 다첩(왕상11:1-5절) 등등은 모두 아버지 다윗의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삼하12:9-12절)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다윗의 후손 왕들이 소개될 때마다 모후(母后)가 누구인지 소개됨은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지를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창조론적 가정관에 의하면 가정 교육이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 성경의 이런 가르침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강조되지 않았을 뿐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시내산 율법이 이를 잘 증언한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한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이었다. 당연히 선민은 구속주를 창조주로 경배해야 했다(출20:2-11절). 이것은 창조주의 가르침(창1-2장)대로 사는 신앙 삶을 뜻했다. 이 가르침들만이 속량 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목표와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창조론적 가정관은 구속 후 주어진 시내산 율법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구약 시대 가정에서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지 않았다. 가정이 종교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이런 가정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이스라엘의 영역이 확장되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 영역도 증가하며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 이후 교회는 가정에서 분리되었다. 성경의 이런 가정관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계속 이어졌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가정 겉으로 보아 신약 시대 가정보다 교회가 더 강조된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의 가정관은 구약 성경의 그것과 다른가? 신구약 성경은 내용상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구속사적인 무대가 달라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졌다. 구약의 모든 예언과 약속은 메시아의 강림으로 성취되었다. 그가 구속사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그의 신분과 사역이 기록되어야 했다. 아울러 이들의 신학적인 의미도 설명되어야 했다. 그를 통하지 않고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구원에 관한 계시들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이를 교회에 전달했고 교회는 신자들을 가르쳤다. 교회와 가정이 분명히 분리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가정의 역할과 중요성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전령인 세례 요한이 제사장 집안 출신으로 그의 부모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고(눅1:5-6절) 기록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모도 유다 지파 출신으로 경건한 자들이었다(마1:19, 눅1:38절). 소년 예수가 성장할 때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의 명대로 매년 3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눅2:41절).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이 경건한 가정을 배경 한다고 성경은 보고한다.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지만 한결같이 부모에게 효도했다(눅2:51절). 일찍 죽은 아버지 요셉을 따라 가업을 물려받고 목수로서 가족을 돌보았다.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적어도 10년 이상 가장(家長) 역할을 수행했다. 예수님도 가정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30년과 3년’이란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22492971). 공생애를 시작하며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이적들을 많이 행했다. 이들 중 첫 이적은 바로 혼인집 잔치 자리에서 행해졌다. 포도주가 떨어져 난처해진 신혼 가정을 위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요2:1-11절). 이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다. 창세기 1-2장이 말하듯이 아버지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 결혼, 부부 그리고 가정에 관한 제도를 창설했는지 아들 그리스도도 잘 알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았다.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요19:26-27절). 인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는 힘겨운 순간에도 예수님은 가정을 돌보았다. 자신의 공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은 가정을 돌보았다. 결국 공생애의 시작과 끝은 가정에 관련된 사역이었다. 아들은 사역 초부터 마지막까지 몸소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했다. 아들도 창조론적 가정관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아들이 이 세상에 온 것은 타락으로 상실된 것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첫 이적이나 십자가상에서 보인 효도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고 그 뜻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럼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절) 여기 집은 가정을 뜻한다. 종교와 문화가 하나인 가정의 복구, 이것은 구속과 구원의 결과이다. 이런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 후 승천 직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선교 사명(마28:18-20절)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 향후 예수님의 제자는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지키는 신자들이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럼 어디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여야 하는가? 물론 가정에서부터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무엇보다 먼저 신자의 가정에 실현되어야 한다. 모든 식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 가정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게 식구들은 가정에서 공동체 훈련을 받아야 한다. 식구들은 인류 사회의 일원으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앞으로 살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인의 가정에서 종교와 문화가 분리되어선 안 된다. 이 지상에 하나님 나라는 종교와 문화의 옷을 입고 인류 사회에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신앙에 근거를 둔 문화 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 후 명한 문화 사명(창1:28절)과 예수님의 구속 사역 이후 명해진 선교 사명(마28:18-20절)은 목적상 동일하다. 가정이 출발점이 되어 문화 사명과 선교 사명이 수행되면 그 결과 하나님의 통치가 종국적으로 이 땅에 실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도 가정의 역할을 절대로 축소되지 않는다. 구약의 문화 사명은 선교 사명으로 얼마든지 수행되기 때문이다. 죄인이 구속의 은총으로 새 삶을 부여 받고 새로운 윤리로 살아간다. 이렇게 신자의 가정이 새롭게 되고 이런 가정의 수가 증가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저절로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된다. 그렇다면 문화 사명과 선교 사명의 관점에서 교회와 목회는 재정립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 존재 자체를 목회의 목적으로 삼아선 안 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섬기는 성스럽지만 일시적인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통치가 먼저 교회에 실현되어야 한다. 그곳에서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미리 맛볼 수 있어야 한다(롬14:17절). 그럼 교회와 가정 사이 관계는 무엇인가? 교회는 구원의 모태(母胎)이자 신자들의 양육 장소이다. 그리고 신자들을 가정과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성도의 가정과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예배와 교육에 잘 참석하도록 교회는 신자들을 권면한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이 일을 위해 신자들은 세상에서 날마다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 전쟁에 승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승리자는 자만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그리고 실패자는 더욱 격려하여 용기를 얻게 한 후 다시 전쟁 용사로 세워야 한다. 이 일은 교회의 위대한 사역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결론 교회 역사는 목양(牧羊)을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 앞에 자주 실패했음을 증언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중세 유럽의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의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이다. 실패 원인은 어디 있는가? 종교가 주는 영광과 권세 그리고 성공으로 인해 종교가 사업으로 변질되며 이를 즐기려는데 있다. 그렇게 주인의 포도원을 종교 지도자의 개인 사유물로 알고 취한다(마21:38-39절). 그리고 종교사업 영역을 더 크게 확대하고자 이들 악한 지도자들은 신자들이 비성경적인 교회 프로그램에 많이 참여하도록 늘 그리고 계속 강요한다. 그리고 그 안에 교주처럼 안주하며 거드름 피운다. 교회라는 목양지가 개인의 야망이나 비죤 또는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바뀌었다는 예수님의 고발이 이를 잘 증언한다(마21:13절). 공생애 말기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이를 전혀 알지 못한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은 이 무리를 뒤돌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절) 그리고 망대 건축(눅14:28-30절)과 전쟁(31-32절)을 비유로 들었다.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안 되었다면 그만 중단하라고 예수님은 경고했다. 나중 부끄럼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 경고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겨냥했다.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고 부패한 인간인 예수님의 제자들도 헛된 영광을 추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제자들을 경계했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각오가 없는 목회자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이들에 의해 교회는 본래 존재와 사역의 목적을 잃는다. 이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고(딤전6:5절) 신자들도 그렇게 본다. 영적으로 가정이 잘 서도록 돕기보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신자들을 교회에만 모이라고 늘 강요한다. 이런 탐욕스런 목회로 인해 성도들의 가정은 영적으로 피폐화되고 가정 목회는 실패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민족 사회에 세워지지 않는다. 세계에서 제일 큰 10대 교회들 중 다섯 곳이 한국에 위치하지만 한국의 목회자들과 성도의 수준은 아주 낮다. 종교적인 사업은 번성하는데 비해 영정 성숙은 눈에 띠지 않는다. 교회를 살찌우는 목회 프로그램만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젠 사람 즉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와 목회자가 신자의 가정이 잘 세워지도록 사랑으로 섬길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 목회자에게 자기부정이라는 노력이 부단히 요구된다. 이 점에서 목회자는 누구와 같은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자신을 낮추고 죄인을 섬긴 예수님의 비하(卑下)를 배워야 한다. 사도 바울도 구체적으로 이에 대해 말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고전9:1절) 사본에 따라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 ”로도 표현된다. 그의 자기 소개에 의하면 바울은 사도이기 이전에 이미 자유자였다. 그리고 사도가 된 후에도 여전히 자유자였다. 여기 자유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절) 진정한 자유자는 스스로 모든 이들에게 종이 되어 준다고 바울은 말했다. 그 목적은 오로지 더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돕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7:16-19절) 여기 열매는 찬란한 목회적 은사를 뜻하지 않는다. 이런 은사는 예수님이 모른다고 선언한 불법자들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마7:21-23절). 그러므로 여기 열매는 성숙한 신앙 인격과 그에 따라 나타난 열매를 뜻한다. 그러나 이 열매는 눈으로 찬란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제 목회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자신의 목회 목적, 내용과 결과를 엄밀하게 살펴야 하며 다른 한편 신자들은 목회자의 인격적인 열매를 보고 그의 인격과 목회의 진실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다고 말했다(마3:10절). 교회나 목회 자체에 목적을 둔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목표하며 가정 목회를 살리려고 하는 노력 -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증거이다. 이는 자기 만족이 아닌 자기 희생에 근거를 둔 헌신과 섬김을 요구한다. “야! 이 바보야! 이젠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란 말이야!”
15 no image 교회 개척을 하신다고요? 파일
장창수
3008 2011-02-11
교회를 개척하신다고요? 안녕하세요! 동료 목사로서 경험과 느낌을 나누고 싶군요. ? 한국에서 개척교회와 부교역자 경험이 있지요. 향후 목회를 위한 기초를 깔아주었습니다. 그 후 선교지 러시아의 현지인 교회에서 담임목사 사역을 했습니다. 시베리아에서 15년 동안 출석 회원이 100여명 넘는 교회, 300명 된 안정된 교회 그리고 개척한 교회, 세 곳에서 사역했습니다. 후임 목회자를 세우고 사역한 교회를 은퇴 목사처럼 떠나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흑해에선 개척교회 같은 조그만 교회에서 담임목사 사역을 합니다. 러시아 목회지에서 발견한 것은 한국 목회자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가부장적 권위를 러시아 목회자들에게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교회들이 대체로 작아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유럽에 속해서인가 대부분의 성향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목회자들은 미국의 실용주의 목회를 싫어하지요. 러시아가 유럽에 속해서인가 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한국 목회자의 권위주의적인 자세가 비성경적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만나면 나이나 선후배 등으로 먼저 우열을 가립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대화 분위기도 결정, 좌우됩니다. 이들이 보기에 참 유치합니다. 구속함을 받은 신자들은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하나님 앞에 동일한 동역자요, 동료입니다. 이런 낮아진 의식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부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형제라고 불렀지요(요20:17절)!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그 본을 보였지요. 이런 훈련이 안되면 목회 성공 후 바로 타락과 멸망의 길로 가지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듯이 예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지요. 예수님이나 말씀을 자기 이익을 위해 억지로 사용합니다. 소탈함이 좋습니다. 알아도 모른 체 하는 자세. 성도들을 대할 때 윤리적인 판단을 일단 보류하고 다 안아주는 자세. 그리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대드는 선생 같은 자세를 버리고 모든 이들을 주 앞에 같은 형제로 대하는 낮아짐과 겸손이 요합니다. 혹 다른 교회에서 설교 초청을 받는다면 사역하는 교회에서 이미 수고비를 받으니 사례금을 일체 받지 마세요! 아무리 멀어도 교회 비용으로 찾아가 봉사하시지요. 물론 미국 같은 먼 나라의 초청은 다를지 모르지만 사례금만은 거절하시지요. 유명한 목사들과 부흥사들이 사례금으로 타락했습니다. 자꾸 받다 보면 사례를 위해 밖으로 나가려 하지요. 그렇게 목회자가 아니라 목회꾼이 됩니다. 경건한 목사님의 경우 방문 교회에서 여행도 삼가더군요.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만 방문한 교회에 불필요한 대접을 피하려는 의도지요. 그 정신은 배워야 합니다. 설교할 때 특정 주제나 개념으로 하는 식의 주제 설교는 피하시지요. 성경은 구속사로 구성되어 있어 역사적인 사실에 신학적인 의미를 감춥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인 주제들이 사건 속에 서로 연결되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종합적인 가르침 즉 의미를 주지요. 이를 가르쳐야지 본문의 특정 단어가 가진 주제에 몰두한다면 역사성이 없는 논리적 설교로써 적용을 상실한 설교가 되지요. 목사님은 이를 잘 아시지요. 성경의 본문은 구속사적인 사건을 기록했지 특정 신학적 주제를 기록하지 않지요. 물론 정해진 시간 특정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강의할 수 있지요. 문제는 요즘 성경 책에 주제별 성구들을 모아 논 부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의어 성구 사전도 있고 컴퓨터의 도움으로 주제별 성구들을 모으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보와 지식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시대를 삽니다. 논리력이 있는 신자라면 얼마든지 혼자서 주제별 연구가 가능합니다. 구태여 목회자에게 주제별 강의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다르지요. 성경은 구속사, 신앙 삶과 생명이라는 유기체를 다루는데 이들은 하나의 관점(view, subject)으로만 해석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직신학이 자꾸 개념적인 논리적 설교를 하도록 유도하지요. 이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색에는 3 가지 그리고 맛에는 5 가지가 있습니다. 이들 색과 맛이 서로 어울릴 때 아름다운 색깔과 기묘한 맛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이들 기본 색과 맛은 조직신학의 각론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본문은 이들 기본 색과 맛이 서로 어울리며 그 시대와 문화에 맞는 구속사적인 가르침을 던져 줍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색이나 맛(각론: 주제, 관점)으로만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무미건조합니다. 이들이 구속사적인 사건을 통해 어떻게 서로 어울리며 어떤 찬란한 색과 기이한 맛을 드러내는지 목회자는 알아내 먼저 보고 맛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린 성경 해석학을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신학들은 성경 해석이나 설교를 위해 존재하지 신학 자체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나 목회와 결별된 신학은 이론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배운 신학들을 이용하여 성경 본문에서 여러 가지 신학적인 주제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는지 알아내 통합적인 가르침을 찾아내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 저자의 바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흔히 설교할 때 유식한 말들을 많이 하지요. 그렇게 세상 지식이나 지혜와 상식을 전하려고 하는데 참 웃기지요. 자유주의나 현대신학자들처럼 책을 많이 읽은 목회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입니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 말씀을 덮지 말고 이런 것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진리를 더욱 찬란하게 드러내야지요. 이런 것들을 장시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성경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 잠깐 말하고 말씀 해석과 설교에 전력해야 하지요. 목사님은 말씀에 충실하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지식 자랑이라는 유혹만 극복해도 하나님 앞에 신실한 종으로 남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 말씀에 감추어진 진리들이 너무나 많고 다양함을 깨닫습니다. 이를 파는 것만도 시간이 부족한데 일시적으로 솟는 샘물(렘2:13절)과 같은 세상 철학, 지식과 지혜 그리고 상식이나 감동적인 간증을 소개하는데 설교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니요. 물론 이들이 성경 본문의 해석에 깊이와 넓이와 폭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 본문은 구속사로 드러난 세속사를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에 속하는 모든 내용들이 성경 본문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성경에 기록된 세속사는 그냥 세속사가 아닙니다. 구속사를 설명하기 위해 선별된 세속사이지요. 그러므로 인문사회과학이 아닌 신학에 근거를 두고 구속사를 해석하여야 합니다. 흔히 모압 여인 룻이 효도의 전형으로 설교되지만 사실 그는 신앙 때문에 시어미 나오미를 끝까지 따른 것입니다. 신앙에 근거한 효도였습니다. 효도 때문에 그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정치와 사회의 비리와 불의를 비판했습니다. 이 점에서 현대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이 맞는 듯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율법(경외)을 버렸기에 사회적인 불의가 선민 사회에 팽배함을 지적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 선지자의 역할은 교회가 불신 사회에 대해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는 선민 사회의 불신앙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불신 사회 가운데 존재합니다. 사회적 또는 신앙적 배경이 완전히 다릅니다. 구약의 선지자 역할이 오늘날 교회의 역할과 같다고 주장할 수 없지요. 이 모두 신앙이나 신학보다 세상 학문을 우선시하여 성경을 해석한 결과입니다. 성경 기록의 특성을 잊은 잘못된 결과입니다. 세상 상식으로 성경 본문을 해석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거꾸로 성경의 가르침으로 세상 상식을 평가해야 합니다. 이성으로 믿음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성을 해석하여야 합니다. 달리 말한다면 아테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도록 놔두면 안됩니다. 예루살렘이 아테네를 인도해야 합니다. 만약 성경 본문을 세상 지식과 상식에 근거를 두고 계속 해석한다면 설교는 강연이나 강의와 구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설교의 상식화, 일반화입니다. 아니 설교의 타락입니다. 이런 류의 강연에서 강연자는 전문가라면 목사는 비전문가이지요. 어설픈 상식을 말하다간 이를 잘 아는 성도들이나 불신자 전문가의 비웃음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강대상의 문제입니다. 개척 교회는 조그맣기에 목회자가 혼자 다 하게 되지요. 그러나 신자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조직화하여 재정에서 얼른 손을 때야 합니다. 초기부터 교회 재정을 목회자 혼자 그리고 마음대로 다루는 것이 습관되면 나중 목동에 있는 교회의 ㅈ목사처럼 교회 돈을 횡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척교회 때 이미 그런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처럼 권력을 분산시킬수록(창1:28절) 목회자는 말씀 사역에 전력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신자들 얼마나 유식한가요? 재능 많고... 그런데 왜 목사 혼자 다 하려 하나요?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은 선포와 가르침과 병 고침으로 나누어지지요. 예전부터 교회 예산을 아래와 같이 네 곳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전 생각했습니다. 전도, 교육, 구제와 행정(교회 자체를 위한 비용) 각각 25%씩 분배하여 교회 재정을 사용한다면 재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크게 제고될 것입니다. 물론 개척 교회에선 이들 사이 비율이 동일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 재정 사용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가 제공됩니다. 이미 첫 목회 경험에서 많은 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나눈 것입니다. 이 정도로 기분 나빠할 목사님은 아닐 것 같은데...... 목사님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았기에 이런 글을 드려봅니다. 다 알지 모르지만 동료로서 경험을 공유하자는 차원에서...... 평안을 빕니다. 러시아 흑해에서…… 장창수 선교사 드림 * http://blog.naver.com/rassvet
14 no image 기초를 다시 쌓자! 파일
장창수
4946 2011-01-21
(부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요즘 인문학(人文學)의 인기가 높아 문학(文學), 역사(歷史)와 철학(哲學)에 관련된 책들이 잘 읽힌다. 20세기까지 과학과 그에서 나오는 기술의 개발에서 앞장 선 나라와 기업이 세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객들은 단순히 기술 좋은 제품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제품들은 다른 기술들과의 융합에서 나오고 이 위에 사용자의 문화, 관습과 정신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21세기 들어 그 동안 무시당했던 인문학이 더 중요해졌다. 요즘 나오는 신약(新藥)들의 70% 이상은 물리, 화학 그리고 생물이라는 기초 과학에서 나온다. 자연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원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도록 돕는다. 비행 원리도 새의 비행 원리를 이해함으로 가능했다. 결국 획기적인 신제품들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에서 나온다. 21세기 들어 응용 과학보다 기초 과학이 더욱 중요해졌다. 목회와 신학의 기초 모든 학문에서도 기초가 대단히 중요하다. 기초를 무시한다면 더 이상 성장과 발전은 없다. 이것은 목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요즘 목회도 응용적인 또는 은사적인 면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진리 자체가 무시되거나 신앙 인격 양성에 소홀하다. 겉으로는 교회와 목회 현장이 대단히 활발한데 뭔가 근본적인 것을 상실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세계의 대형교회들 중 50% 이상이 한국에 소재하지만 그에 맞게 진실한 목회자들의 수는 지극히 적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언한다. 빛 좋은 개살구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12 제자들을 부른 목적에서 찾아진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5절) 여기 두 가지 목적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짝과 같다. 이들은 먼저와 나중이라는 유기적(有機的)인 이분법(二分法)에 속한다. 즉 둘 중 어느 하나를 버리게 하는 대립적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다. 분명히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제자 소명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이에 앞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먼저 스승 예수님을 알고 배우는 체험이 은사적 목회보다 앞서야 한다. 이 점에서 전자는 후자 즉 은사적인 목회에 반드시 필요한 기초와 같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 활동은 자기만족으로 끝난다. 이 기초를 무시하면 목회는 그만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된다. 신앙 삶과 신학에도 이런 기초가 있다. 시편이 이를 잘 알려준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절) 여기 악인(惡人)은 하나님을 가볍게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이다. 죄인은 그런 것이 삶의 관습이 된 사람이다. 그리고 오만한 자는 어떤 징벌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심판주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시10:4, 14장)이다. 시편은 신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어떻게 오만한 자가 되어가는가를 잘 설명한다. 처음 악인의 꾀를 따르고 그 다음 죄인의 길에 선다. 그리고 마침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므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살잔5:22절). 언약의 다른 표현인 하나님의 율법 이를 피하려면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주야(晝夜)로 묵상해야 한다고 시편은 주장한다. 그럼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준 가르침(토라)이다. 이런 가르침들은 구약 성경에 많이 기록된다. 그러나 이 가르침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 명기라는 다섯 책들에 집중적으로 기록된다. 이들은 모세오경이라 불린다(눅24:44절).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의 율법이다. 모세오경 즉 하나님의 율법은 십계명과 시민법으로 구성된 시내산 율법(출20-23장)만 뜻하지 않는다. 시내산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세오경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를 기록한다. 역사적인 사실(fact)에 근거를 두고 신학적인 의미(meaning) 즉 하나님의 가르침(teachings, 토라)이 주어진다. 이 덕분에 하나님의 율법은 역사적이며 대단히 실천적이다.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 또 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언제나 언약(言約: covenent)에 근거를 둔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바로 언약의 다른 면이란 것이다(출31:16, 34:28, 신4:13, 9:9, 스10:3, 시78:10, 호8:1절). 이사야 선지자가 잘 설명한다.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사24:5절) 율법의 준수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언약을 지키는 것은 바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는 6개의 중요한 언약들이 있다. 이들은 구속사의 무대가 달라질 때마다 새롭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참조 글: 혼란의 가장자리 http://blog.naver.com/rassvet/40115347541 ) . 아담의 창조 언약(창2:17절), 아담의 구속 언약(창3:15절), 노아의 보존 언약(창9:11-16절), 아브라함의 약속 언약(창12:1-3절), 모세의 율법 언약(출19-24장) 그리고 다윗과 맺은 왕국 언약(삼하7장), 이들이 그들이다. 놀랍게도 마지막 왕국 언약을 제외하고 모든 언약들이 모세오경에 기록된다. 다윗 언약은 앞선 언약들의 역사적 성취이기 때문이다. 또 다시 놀랄 일은 모세의 율법 언약을 제외하고 나머지 언약들이 창세기 한 권에 모두 기록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세오경과 그 중에서도 창세기는 구약과 신약의 기초이다. 시편 기자가 모세오경을 읽고 묵상하라는 이유가 여기 또 발견된다. 그러므로 구속사에서 중요한 시기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언약들은 갱신(更新)되어야 했다(수24:25-28, 왕하11:4-17, 23:3, 대하15:10-12, 29:2-10, 스10:3절). 신명기도 요단 강 건너편에서 갱신된 언약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지 않고 율법을 준수하도록 이스라엘을 돕기 위함이었다. 모세오경의 가르침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는 모세오경은 창조(창세기)로부터 가나안 입성 전(신명기)까지 기록한다. 그럼 모세오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창세기는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의 창조(창1장)와 인간과 맺은 언약(창2:17절)에 대해 기록한다. 우주에서 창조주 하나님 이외 다른 신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 목적(창1:26절)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무엇인지도 암시된다.이로써 인간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도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은 인류의 존재와 삶의 기초로 아주 근본적이며 기본적이다. 이 가르침은 인간 삶의 원리여야 한다. 성경의 창세기 이외 어디에서 이런 가르침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매일 묵상해야 하는 중요성이 강조된 이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과 인류는 모든 면에서 기초와 근본을 잃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잠1:7, 9:10절)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나머지 기록은 인류의 반복된 불순종과 아울러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거듭된 노력을 말한다. 이런 기록들은 성경이 말하는 신론(神論: theology), 인간론(人間論: anthropology),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과 신국론(神國論: theology of God’s kingdom)을 잘 설명한다. 이런 가르침들은 바로 신앙 삶의 근본적인 기초와 원리를 제공한다.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은 전체 인류가 아니라 한 민족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구속사를 전개해 나갔다고 기록한다(창12:1-3절). 결국 선민의 부름은 인류 구원을 목표한 하나님의 전략적인 변경 또는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출애굽 사건(출12장)으로 선민은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 복락의 땅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함이었다(출19:4-6절). 가나안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사를 전세계로 펼쳐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했다. 시내산에서 율법(출20-23장)이 주어진 이유였다. 그 후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훈련시켰다(민수기).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광야 삶이 끝났을 때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목적을 또 다시 알려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 모압 평지 즉 가나안 동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재해석해 주었다(신명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해야 함을 모세는 가르쳤다. 가나안은 낙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법치(法治) 즉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세 오경은 이미 현세적인 신국론(神國論)을 주장한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려면 이스라엘은 구속주 하나님(출애굽기)을 늘 기억해야 했다(신5:15, 7:19, 8:2, 8:18, 9:7, 15:15, 24:18, 24:22, 25:17, 32:7절). 이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며 열심히 하나님의 언약인 율법을 준수할 것이다. 그렇게 신국(神國)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세워질 것이다. 성경의 두 기둥들 이렇게 본다면 모세오경의 가르침은 창조와 구원이라는 두 기둥에 근거를 둔다. 이 기둥들이 없다면 신앙의 집은 더 이상 세워질 수 없다. 이렇게 모세오경은 선민이 여호와를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으로 동시에 경외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 가르침에 따라 인류와 선민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도 가르친다. 이 모든 가르침은 인류 사회와 기독교에게 가장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가르침을 제공한다. 이 기초를 잃는다면 인류 사회와 기독교는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을 읽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된 자이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3절)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이런 복된 삶을 살아야 했다. 다시 말해 악인과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의 삶을 살지 말아야 했다. 이를 위한 모세는 이렇게 명했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11:26-29절)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질 신앙 삶의 기초도 하나님의 율법인 모세오경에 있었다. 여호수아서부터 구약 성경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이를 잘 증언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준수할 때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 나라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에 실패했고 그 결과 가나안 땅에서 망했다. 부활 후 승천 직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절) 창조 사역을 마친 후 창조주 하나님은 문화 명령을 주었다(창1:28절). 마찬 가지로 인류의 구원을 성취한 후 만유의 주가 된 예수님도 선교 명령을 남겼다. 이 명령에 따르면 제자들은 복음을 전해 모든 열방들에게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선교 명령은 내용 면에서 문화 명령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질수록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는 그 만큼 이 지상에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신구약 사이 차이가 있다. 구약 시대는 혈통에 근거를 둔 하나님 나라를 그러나 신약 시대는 혈통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확장을 주장한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주야로 묵상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했다. 모세오경은 모든 성경 책들의 기초와 근본을 제공한다. 그 기초가 튼튼하다면 그 위에 얼마든지 높은 층을 쌓을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은 신앙 삶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시편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인 모세오경은 구원이 믿음으로 가능함을 늘 말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해 아담은 이미 에덴에 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계속 살기 위해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선악과(창2:17절)를 따먹지 말았어야 했다. 시내산 율법도 출애굽 사건 이후 주어졌다. 구원의 은총을 계속 누리기 위해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선민 이스라엘은 율법을 잘못 이해했다. 율법은 이행득구(以行得求: justification by law)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율법이 복음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대치되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할 것을 강조했다. 모세오경 이외 어디서도 신앙 삶의 기초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오늘날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고전2:1-2절)이 한국 교회의 강대상을 지배하고 있다. 세상 지혜와 상식이 설교의 주내용이다. 신학의 기초 또는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을 상실한 까닭이다. 이를 피하려면 하나님의 율법인 모세오경을 읽고 주야로 묵상하라고 시편은 권한다. 하나님의 율법인 모세오경도 결국 메시아의 강림을 예언하기 때문이다(눅24:27절). 그리고 신약 성경도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노력에 힘쓰라고 충고한다. 예수님만이 율법 아래 살면서 어떻게 율법을 성취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의 율법인 모세 오경의 핵심도 마찬 가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절) 율법의 핵심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려 했다. 예수님의 이런 삶을 배우는 것은 그대로 신앙 삶의 기초가 된다. 이 기초 위에서만 성화 과정은 열매로 연결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절) 마태도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절) 한국 교회의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새롭게 배워야 한다. 그렇게 기초를 다시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버려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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