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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0 20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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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48 2015-01-05
Notice 신문 원고 작성과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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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79 2010-12-23
Notice 기고 제언 게시판 이용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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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31 2010-07-23
11 no image 우리교단 이대위는 폐쇄적이고 권력이다.
나두산
3594 2011-01-18
우리교단 이대위는 폐쇄적이고 권력이다. 한기총 대표회장선거(2010년12월21일)을 앞두고 갑자기 약 3개월전부터 과거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하 이대위)에서 활동하던 몇몇 인사들로부터 정당한 한기총 이대위 활동에 대하여 사실이 아닌 주장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포퓰리즘이 시작 되었었다, 그리고 한기총 이대위 위원들을 [이단옹호자]로 몰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작금에 이르러 필자를 한기총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전력을 문제 삼아 교단 이대위를 소집하고 교단 신문기자와 교단과 상관없는 교계신문(교회와신앙)기자를 불러 참석 시키고 언론플레이를 하였다. 그리고는 노회나 총회에는 이단옹호자로 징계하라는 기소문을 보내지 않고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 또한 교단 상임위가 노회의 청원서 없이 저질른 불법이다. 지금까지 교단의 30년 역사상 초교파적인 신문기자를 불러 모아놓고 자교단 인사를 징계 운운한 적은 없다. 뿐만아니라 이번 필자의 건처럼 이대위는 징계하려고 한자들을 불러 경청하지 않고 늘 폐쇄적으로 그들만이 모여 결정하고 발표하는 형태를 띄웠었다. 민주적인 정치형태를 가진 장로교에서 이런 권력이 어디 있는가? [나두산목사의 이단관] 우리교단의 ㅂ목사 처럼 "한번이단은 영원한 이단이다"라는 논리를 가진 이단관과 나는 틀리다. 이단은 크게 나누어 두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단은 통일교, 전도관, 신천지등과 같이 팩트가 분명하다. 그래서 건전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둘째로 사이비가 있다. 그래서 교단 이대위는 명백하게 이단과 사이비를 분별해주고 그 밖에 것에 대하여는 우리교단 신학과 이런 점이 다르고 저런 점이 다르다라고 표명해 주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교단의 이대위는 [이단. 사이비, 위험한 사상, 경계및 참여금지, 참여 및 교류금지, 신학적 입장 천명, 불 건전함, 신학적 오류및 이단성, 목회적 적용금지, 이단성심각, 이단성 있어 교류금지, 비성경적 비기독교적,참여금지,이단내지 이단성짙은 주장,관계금지, 이단성제기,경계집단, 사이비성농후, 예의 주시, 단호대처,이단의혹제기, 위험한 신비주의, 비성경적 사이비,위험한 사상]등과 같이 25가지 죄목을 달아 정죄해 왔다. 무엇이 기준이 되어 이런식으로 하였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필자는 92년도[시한부 종말론]이 기승을 부릴때 [세대주의적 종말론괴 이단사설]이라는 소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단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현대종교]편집위원으로 10년을 봉사하고 [한국 기독교와 이단의 실체]라는 강의록을 만들어 신학교에서 여러해 강의를 해오면서 나름대로 이단에 대한 정의와 연구방법론 그리고 이단의 실체에 대하여 분명한 관을 가지고 있다. 교단 이대위가 이단옹호자라고 한 근거에 대한 반론 1)녹산 교회 유복종목사에 대한 자료는 현대종교 85년에서 89년까지의 자료가 전부이다. 당시 그는 순복음 교단사람으로서 [시한부 종말론 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후 방학동에 거대한교회을세우면서 근처 주민및 교회들과 마찰이 빚어 지면서 나와 현대종교는2년동안 잠입하여 취재하였으나 당시와 같은 이단적요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화하면서 25년이상이 지난 '지금은 시한부종말론적이단이 아니다 '라고 한것이 이단옹호자인가? 2) 장재형목사 건은 우리교단에서 2008년11월27일 장재형목사 조사 청원서(총회장 이선웅목사, 이대위 위원장 : 조병수목사)가 한기총에 접수되어 조사한 것이다. 이 사건은 초기부터 이미 우리교단 박 형택목사가 한기총이대위 전문위원으로 활동 하면서 소위원회 위원과 위원장 되어 조사하여 2004년(길자연목사) 2005년 (최성규목사) 2007년( 엄신영목사)시절에 무협의 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왠일인지 2008년11월27일 우리교단을 통하여 청원하였고(총회장 이선웅목사, 이대위위원장 조병수교수) 박형택목사가 장재형목사 조사 소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조사하다가 2009년에 한기총에서 퇴출되어 유한건으로 2010년에 넘어온 청원문서로서 2010년에 다시 조사하여 역시 장재형목사가 '구제주다'라고 한 증거 불충문으로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우리 교단 이대위가 필자가 소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해제시켜 주었다고 하는데 나는 소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리고 현재 한기총 이대위는 각 교단의 [총대위원]과 추천받은 [전문위원]이 무려 40여명이 있다. 한명의 말에 의하여 우지좌지 되는 곳이 아니다. 합신교단에서 청원 하였고 한기총 이대위에서 내린 결론인데 이것이 이단옹호인가? 3) 변승우목 사건에 대하여 필자는 철저하게 반대한 사람이다. 필자는 변승우건의 그들이 말한대로 소위원회 위원도 아니다. 그러나 전채 회의에서 친구인 서울신학대학교의 박문수교수와 함께 A4용지로 15패이지 불량으로 변승우 목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목회 선상에서 일어나는 그의 문제점을 철저하게 지적한사람이다.(누구든지 변승우목사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면 보내주겠음) 그런데 이단 옹호자인가? 현재 우리 교단 이대위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필자를 몰아 붙혀서 명예를 훼손한부분에 대하여 반드시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초기 선배들은 교단신학을 수호하며 헌신하여 합신 교단을 대외적으로 정직하고 개끗한 교단으로 표출 되도록 만드는데 공헌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대위는 엄청난 권력이 되어 자신들의 뜻대로 판단하여 아무나 정죄하면서 포퓰리즘으로 몰아가는 이대위에 대하여 교단적 차원에서 손질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교단 이대위는 노회에서 파송한 [총대 위원]과 추천을 받은 [전문위원]으로 구성하여 정치적인 방어와 함께 전문성이 갖추어진 이대위로 거듭나야한다. 그리고 이단을 정죄 할 때 통합측 교단은 5명의 교수 싸인이 있어야 하며 합동측은 3단계을 거쳐서 정죄한다. 우리교단도 이부분에 대하여 심사숙고 해 볼만한 문제이다.
10 no image 구원은 신앙 삶의 최종적인 목적인가? 파일
장창수
2763 2011-01-07
구원은 신앙 삶의 최종적인 목적인가? 기독교가 영멸(永滅)로부터 영생(永生)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종교라고 교회와 신자들은 주장한다. 신약의 사복음서의 저자들인 마태와 누가가 이를 잘 증언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절)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절) 그리고 사도 바울도 말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절) 이런 주장은 주후 15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결과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이신칭의(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칭의는 믿음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결과 얻은 구원의 상태를 뜻한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유럽 교회는 교부 시대로부터 항상 헬라의 이원론적(二元論的: dualistic)인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 교회도 늘 이분법(二分法: dichotomy)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헬라의 철학에 따르면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 세계를 창조한 저급한 신(神)이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영적 차원에서 해방이라는 구원을 주는 고급한 신(神)으로 여겨졌다. 신약의 거룩한 하나님은 죄 많은 세상을 주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유럽 교회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신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창세기 3장부터 기록된 타락 사건과 그로부터 구원을 약속한 원복음(창3:15절)에만 집착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신앙 삶도 현실도피적이며 금욕주의적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수도원이 한 때 유행한 이유였다. 구약을 경시하고 신약을 중요하게 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신(神)이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으로까지 생각했다. 물론 신구약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성취로 이해하는 것도 구약을 무시하는 일에 일조(一助) 했다. 그럼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성격상 정말 상반되는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시켜 준다. 우선 구약은 창조 기사(창1-2장)를 통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만 아니라 보이는 물질적 세계의 주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신약에서 영적 차원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들과 예언들이 어떻게 인류의 역사 가운데 성취되었는지를 구약은 생생하게 설명해 준다. 신약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구약은 가르친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영(靈)과 육(肉) 또는 물질(物質)은 분리되거나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영(靈)인 하나님이 보이는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창1:1절).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에서 먼저 성취되고 완성되기를 창조주 하나님은 원했다(창1:28절). 인간 창조 방법도 이를 잘 증언한다. 물질에 지나지 않는 몸에 하나님이 생기(生氣)를 불어넣으니 비로소 인간은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창2:7절). 여기 생령은 영적, 정신적, 동물적 그리고 물질적 면들로 구성된 인간 자체를 뜻한다. 인간 영은 정신과 물질인 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영과 정신은 육 또는 물질과 서로 반대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들 사이 유기적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 관계를 대립적인 이분법으로 이해하는 이분법이나 삼분법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성도들이 대립적인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여부가 신앙 삶의 내용과 성숙 정도를 결정한다. 이 극복은 현실 도피적이며 금욕주의적인 신앙으로부터의 탈출을 돕는다. 자연과 인간 사회가 이를 잘 증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동양 철학에서 양(陽)으로 취급되는 태양과 음(陰)으로 여겨지는 달을 모두 창조하여 지구의 낮과 밤을 주관하게 했다(창1:14-19절). 이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맡은 기능과 역할이 다를 뿐이다. 서로 다른 은사와 직분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동일한 목적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타락의 영향으로 인류 사회는 이 둘 사이 관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그 순환 운동도 대립적인 이분법에 따르지 않는다. 서로 반대되는 둘 사이 조화와 군형을 통해 자연 질서는 유지된다. 예컨대 원운동(圓運動)에서 상반(相反)되는 두 힘 즉 원심력(遠心力)과 구심력(求心力)이 모두 동시에 작용한다. 이 덕분에 우주의 수많은 천체들은 자신의 궤도를 유지하며 계속 돈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그 힘을 잃는다면 우주의 질서는 무너진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유지 수단인 물도 두 가지 서로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구조는 고작 20∼40조분의 1초라는 찰나에 깨졌다 생겨났다 한다. 이로써 물이라는 성격이 유지되고 보존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상반되는 것들이 만남으로 더 많은 유익을 인류 사회에 준다. 난류(暖流)와 한류(寒流)가 함께 만나는 바다에서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잘 잡힌다. 그리고 하늘에서 한류와 난류가 만남으로 농사에 유익을 주는 비가 내린다. 깨끗한 곳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땅에서 뒹굴면서 자란 아이들이 더 건강하다. 후자의 아이들이 전자의 아들보다 면역성이 더 강하다. 온실 속보다 바람과 비가 세차게 불고 내리는 들판에서 자란 식물들이 더 강하다. 이것은 동물의 짝짓기에서도 잘 증명된다. 짐승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짝을 구해야 더 우수한 새끼들을 얻을 수 있다. 본능적으로 이들은 근친간의 짝짓기를 피한다. 아프리카 밀림에서도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을 찾는다. 인류 사회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보수와 진보가 자기 자리만 고수한다면 영원히 대립하며 투쟁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여 절충한다면 새로운 사상과 정책이 나오며 인류 사회를 더 발전시킨다. 그리고 인류 문화도 서로 이질적(異質的)인 것들의 교류에서 찬란하게 발전한다. 동양으로부터 발전된 문화를 받은 서구 사회가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며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자동차에도 전진력과 제동력이라는 상반된 힘들이 서로 작용한다. 이 덕분에 운전자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힘만 작용한다면 자동차는 늘 사고를 내거나 제 자리에 항상 서있을 것이다. 인생에도 행복과 불행, 건강과 질병, 기쁨과 슬픔 그리고 성공과 실패라는 상반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한다. 이로써 하나님도 인류 사회나 성도의 삶을 얼마든지 조종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할 수 있다(엡1:11절). 서로 반대되는 것들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 동일한 구조나 조직에 함께 속할 수 있다. 태양과 달이 우주라는 동일한 세계에 속한 천체들이다. 동양 철학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이들을 대립시킨다. 물론 이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먹이사슬이 말하듯이 천적(天敵) 관계를 가진 생물들이 동일한 자연에 속하여 산다. 이들이 서로 대적함으로 자연은 균형을 유지한다. 아무리 미천한 생물이라도 인류 사회는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된다. 사람의 뇌 구조도 마찬 가지이다. 논리를 주관하는 왼쪽 뇌와 정서를 주관하는 오른 쪽 뇌가 같은 머리에 속한다. 맡은 역할을 다르지만 이들은 씨줄과 날줄과 같아 서로 얽혀가며 다 다른 인생사를 사람들에게 허락해 준다. 그리고 사람의 몸도 이를 잘 설명한다. 대칭을 이루는 지체(肢體)들은 서로 반대 편에 위치한다. 이 덕분에 눈은 더 멀리 그리고 더 많이 보고 귀는 반대 방향으로부터 오는 소리들을 들으며 손은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고 그리고 발은 몸의 균형을 유지시켜 더 멀리 걷게 한다. 이들은 싸우지 않고 서로 돕는다. 위치만 다르지 역할과 기능은 같다. 사람 손도 이를 잘 설명한다.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들은 서로 반대의 위치에 있지만 같은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이루게 한다. 창조의 관점에서 성경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라는 세계 즉 거대한 구조를 창조했다. 그 구조에 속하는 것들은 어느 하나라도 헛되이 창조되지 않았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역할과 그에 따라 기능들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기능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동일한 목적을 수행할 뿐이다. 다음 성구가 이를 잘 증명한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1절) 하나님이 만유의 머리라면 만유는 그의 몸인 셈이다. 만유라는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유기적일 뿐만 아니라 그 몸의 지체들로써 머리의 지시를 받는다. 그러므로 인류 사회는 자연 만물을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 문화 사명(창1:28절)이 뜻하는 바이다. 부활주인 예수 그리스도도 만유의 머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절) 원문에 따르면 밑줄 친 부분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합시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골1:18절). 부활주도 만유의 주(主)이기 때문이다(엡1:20-23절).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은 종래에 가졌던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이 세상과 그 문화를 보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때 부활 주님이 만유의 주임을 증언하는 삶이 가능하다. 이렇게 기독교 성경은 대립적인 이분법에 따라 교회와 성도들이 사물을 이해하거나 성경의 기록을 해석하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맡은 역할과 받은 은사 또는 수행해야 할 직분이 서로 다를 뿐 모두 동일한 목적을 위해 일한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단도 창조주 하나님의 허용 아래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위해 일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욥이 잘 증언했다. 하나님의 허락 아래 사단은 욥과 그 가족에게 비극과 불행을 일으켰다(욥1-2장). 그러나 불행을 겪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절)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절) 그는 사단을 하나님과 동일 선상에 놓고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고백은 유일한 주권자 하나님을 믿는 일원론(一元論: monism)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기독인의 성화의 삶이란 결국 일원론적 사고 방식의 결과이어야 한다. 성경의 구속사가 그렇게 증언한다. 창조 기사는 구원의 목적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역은 작정(作定)과 창조(創造) 그리고 섭리(攝理)로 나뉘어진다. 창세 전 이미 세워진 작정을 실현시키기 위해 만물을 창조했고 그리고 보존(保存)과 협력(協力)과 통치(統治)라는 신적 행위들을 통해 오늘날도 만물을 섭리한다. 사도 바울이 정확히 말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엡11:36절) 하나님의 인간 창조 계획은 하나님의 작정이 무엇인지 잘 설명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성삼위 하나님이 모여 인간 창조를 합의했다. 그 목적은 인간 대리자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성취하고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미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은 그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분명하다.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인류 사회의 이상(理想)이어야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인류의 일이 되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할 것이다. 거룩한 영(靈)인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적인 세상에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여기 이원론적인 이분법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인류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문화 명령(창1:28절)이 이를 잘 증명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주인이지만 피조물의 통치를 인류에게 위임했다.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문화 명령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류가 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함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땅에서 난 존재인 인간은 땅을 떠나 살 수 없고 땅에 의존하며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 문화나 문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문화를 통해 찬란하게 꽃 피울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세상 문화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의 통치는 인류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규례(창2:17절)를 준 이유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문화 창달은 하나님 앞에 그 의미를 잃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이에 실패했다(창3장). 이에 따라 하나님도 잠시 실패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인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새로운 주인인 사단을 위해 사는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롬6:16절). 하나님은 자신을 떠난 인류를 다시 돌아오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 메시아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 이를 원복음(창3:15절)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구원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류가 문화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나님 앞에 종으로 다시 불러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구속이라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구원은 구속의 결과라면 구원은 창조 목적의 성취를 겨냥한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불순종의 결과 인류가 에덴 동산을 잃었다. 에덴 밖에서 저주스런 삶을 살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가 장소의 이전(移轉)으로 설명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를 상실했다. 그러나 원복음이 약속한 메시아는 에덴으로 복귀시켜줄 구세주일 것이다. 여기서도 구원의 은총이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된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구될 것이다. 그러나 에덴 동산 안이나 밖은 모두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같은 세상에 속했다. 타락으로 인해 위치의 변화가 발생했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문화 사명의 실현 장소로 남았다. 이것은 구속사가 계속 보여주는 진리이다. 노아의 선택도 잘 증언한다. 에덴 동산을 잃은 인류는 앞으로 올 메시아(창3:15절)를 소망하며 세상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인류는 이를 거부했다. 우선 가인이 아벨을 살인함으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버렸고 아비의 집을 떠났다(창4:1-15절). 그리고 하나님 없이 인류 최초의 고대 문명과 문화를 창설했다(16-24절). 셋의 후손도 서서히 메시아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버리고 가인의 후손과 연혼함으로 그들처럼 세상 삶을 살았다(창6:1-2절). 그 결과 세상에 죄가 관영 했고 이를 본 하나님은 한탄했다(5-6절). 인류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존재할 목적과 이유를 갖지 못했다. 홍수 심판으로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인 옛 인류를 멸하기로 했다. 그 대신 새로운 인류를 세우고자 노아와 그 가족을 선택했다(8-22절). 홍수 심판의 결과 아담으로 대표되었던 옛 세상은 사라졌다. 노아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상이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명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창9:1-2절). 홍수 심판은 인류가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버린다면 하나님도 인류를 버릴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이 심판에서 살아남게 한 구원의 은총은 노아와 그 후손인 새로운 인류가 메시아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야 함을 가르쳤다. 심판주이며 구원주인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인 통치의 실현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홍수 전후(前後)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발견된다. 노아도 아담처럼 인류의 새로운 대표자였다. 노아의 후손도 결국 아담의 후손으로 그의 원죄를 물려받은 인류였다. 사람만 바뀐 것이지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었다. 그리고 홍수 후에도 인류는 여전히 문화 명령의 수행자였다. 홍수 전처럼 새 인류도 이 세상 삶을 살아야 했다. 다른 점이 발견된다. 노아와 그 식구들은 심판의 대상인 ‘옛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킬 무대인 ‘새 세상’으로 옮겨졌다. 옛 세상이나 새 세상이나 모두 같은 지구의 일부였다. 여기서도 구원의 은총이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 짐승들과 곤충들은 인간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 사명 수행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을 뜻했다. 유감스럽게도 새로운 인류도 홍수 후 100년도 안되어 또 다시 만물의 창조주이며 홍수 심판에서 구해준 구원주 하나님인 여호와를 버렸다. 이들은 시날 땅에 바벨탑을 세움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인간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다(창11:4절).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또 다시 실패에 봉착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략을 바꾸어야 했다. 장소의 이전은 신분의 변화를 동반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창11:31, 수24:2-3절).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지시했다(창12:1-3절).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은 더 이상 인류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 대신 아브람을 택해 그의 후손을 민족으로 세워 자신의 통치를 가나안 땅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전해야 했다. 하나님의 소명이 아브람에게 장소의 이전을 가능케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베푼 구원의 은총이었다.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됨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그 결과 아브람의 후손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장소의 이전은 신분의 변화를 초래시킬 것이다. 그러나 갈데아 우르나 가나안은 모두 지정학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구약의 구원은 신학적으로 3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인간이 통치하는 곳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곳으로 이전한다(새로운 소속).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던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사는 새로운 사람이 된다(새로운 신분). 그 목적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새로운 윤리). 이런 의미를 갖는 구원은 구속사(救贖史)에서 계속 반복된다. 하란에서 살았던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버지 이삭이 사는 가나안 땅으로 귀향해야 했다(창32장).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다면 그는 하란에 붙잡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선택을 받았고(창25:20-23절) 그 덕분에 족장의 언약을 상속받았다(창28:11-15절). 그리고 야곱의 식구들은 요셉 덕분에 세계적인 기근을 피해 애굽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430년 후 모세의 주도 아래 일어난 출애굽 사건 후(출12장) 광야를 통해(민수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정착했다(여호수아서). 기독교 교회는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세 장소들을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과 관련시켜 해석한다. 노예에서 해방된 곳인 애굽은 칭의(justification)까지, 광야는 성화(sanctification)와 견인의 은총으로 그리고 가나안은 최종적인 단계인 영화(榮華: glorification)로 이해된다. 이것은 복락의 땅 가나안을 성도들이 들어가 마침내 안식할 영원한 낙원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이 해석 방법에 따르면 이 세상은 애굽과 광야와 같아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할 장소와 나그네 삶 또는 순례자의 삶을 살 곳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교회가 세상을 비관적이며 부정적으로 본 이유였다. 그 결과 기독교 교회는 현실도피적이며 금욕주의적인 신앙 삶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가나안은 애굽과 같이 이 세상에 속한 장소였다. 하나님이 애굽을 버리고 가나안을 택했다는 차이만 있다. 아브라함의 소명에 따르면 그의 후손은 가나안 땅에서 민족을 이루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소명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과 긴밀히 연결된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안식할 곳이 아니라 하나님 통치를 실현시켜야 할 사명의 장소였다.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시내산 율법을 재해석했다(신명기). 이 때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든지 망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신4:25-26절) 가나안 땅에서도 율법 준수가 강조된 이유였다. 가나안은 완전한 낙원이 아니라 여전히 시험을 받아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전은 혈육적인 전쟁과 싸움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려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도 이런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런 영적 전쟁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사사기는 가나안 땅에서 지역적으로 벌어지는 전투는 족장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 계속 수행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에 팔아 노예로 전락될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약 시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구원 받은 신약 성도들도 노예처럼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안식의 땅 낙원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가나안 땅에 세워진 다윗 왕국에 의해 마침내 실현되었다(삼하7장). 그리고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완공됨으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왕상7장). 이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었으며 여호와는 왕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거했다. 이것은 언약의 문자적인 성취였다(레26:11-12, 겔37:27절). 그러나 다윗 왕국은 족장 언약의 국지적(局地的)이며 부분적인 성취였다. 인류의 일부만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홍수 이전처럼 보편적인 인류를 대상하여야 한다. 다윗 왕국도 가나안이 낙원일 수 없음을 증언한다. 가나안은 하나님 통치의 기점으로 그곳으로부터 계속 확장시켜 나가야 할 출발점과 근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한편 다윗 왕국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신약 시대 메시아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계시해 주었다. 다윗 왕국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망했고 그렇게 인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 후 약 400년이 지나 메시아가 강림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전세계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 그의 통치도 구약 시대처럼 유대 나라를 기점으로 삼을 것이다. 결론 구약 성경은 신분의 변화를 수반하는 장소의 이전으로 구원을 설명했다. 에덴에 사는 것이 구원이었다면 이곳에서 쫓겨나는 것은 구원을 잃은 것이었다. 그러나 에덴 안이나 밖은 모두 이 세상에 속한 곳으로 둘 사이 차이는 전혀 없었다. 구원의 서정을 잘 설명해 주는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세 장소들도 마찬 가지였다. 다만 차이란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존재 여부에 있었다. 이 은총이 없다면 죄인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임한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점점 더 세상으로 확장되어 나가야 한다. 그렇게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특별 은총) 아래 놓일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구약과 다른 내용을 보여주는 듯 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록내용이 메시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구약 사이 연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구약은 메시아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그러나 신약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메시아가 누구인지에 대해 기록한다. 신약 성경도 구약과의 연결성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절) 그러나 같은 내용을 마가는 달리 기록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절) 이로 보아 마태의 천국은 하나님 나라를 뜻한다. 누가 복음도 천국을 하나님 나라로 소개한다. 마태복음의 천국 비유들(13장)에 의하면 천국은 현재 이곳에 임한 하나님 나라이다. 처음 복음의 씨로 시작하여 마침내 천국은 이 세상에서 찬란히 꽃을 피울 것이다. 세상 문화의 옷을 입고...... 구약의 다윗 왕국과 달리 천국은 눈에 안 보일 것이다. 천국은 말씀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영적 통치가 실현된 곳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와 긴밀히 연결됨을 증언한다. 요한복음도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절)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죄인 인류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냈다. 여기 ‘세상’은 헬라어로 'cosmos'로써 우주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죄인 인류가 사는 곳을 가리킨다. 그럼 왜 하나님은 죄인 인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우주적으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조 목적인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으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무대인 세상까지 포함한다. 이 성구의 문맥이 이를 잘 증명한다. 니고데모는 구약의 다윗 왕국의 재건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찾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혈육적인 다윗 왕국이 아니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거듭나야 한다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했다(요3:3, 5절).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도록 예수님이 속죄 사역을 수행할 것임을 예언했다(9-15절). 대속죽음의 결과인 중생 즉 구원과 하나님 나라 사이 관계가 아주 긴밀하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다면 신앙 삶은 균형을 상실한다. 그렇다면 종래의 구원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영혼 구원이라는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관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구원론은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 때 신앙 삶에서 개인적이며 이기적인 성격이 사라진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구원주이면서 동시에 만유의 주(主) 또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 삶은 실천적으로 바뀐다. 아울러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는 장소라는 구체적 개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주(主)의 영(靈)인 성령이 임재한 곳에 바로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기 때문이다(고후3:17절). 이 때문에 거듭난 성도의 참여로 세상 문화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세상 문화는 주체자에 의해 그 성격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성도의 신앙 삶에 균형과 조화가 나타나며 성숙한 신앙 삶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성경적인 세계관이 정립되어야 한다. 구약 성경은 이 세상을 애굽으로, 광야로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설명한다. 결국 성경적인 세계관은 삼중적이다. 성도에게 이 세상은 애굽과 같다. 이 세상은 성도가 속히 버리고 떠나야 할 곳이다. 이 세상은 사나운 짐승과 무서운 도적들이 숨어 사는 광야와도 같다. 그런 열악한 곳에서 성도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며 사는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가나안과 같다. 물질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남아야 할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할 곳이다. 그럼 무엇을 위해 애굽을 버리고 광야에서 훈련을 잘 받아야 하는가?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적인 세계관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는다. 이 세상은 계속 버려야 할 애굽이면서 동시에 계속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한다. 이 세상은 결국 불로 심판 받아 멸망 당할 곳이다. 이 세상을 광야로 알고 열심히 훈련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가나안처럼 보아야 하지만 그런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성도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되도록 노력하여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이 불로 파멸된 후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이 가르침은 아주 중요하다. 일부 기독교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완전한 형태로 세워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 신학의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대적자 사단과 그 추종자들이 유황 불에 던져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 이전 인류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이 세상에 완전한 낙원을 세울 수 없다. 이 세상은 시험 무대이기 때문이다. 시험과 연단을 위해 하나님은 사단이란 존재가 에덴 동산에서 활동하도록 허용했다. 여기 시험은 누군가에게는 파멸케 하는 무서운 유혹으로 드러나고 다른 이들에게는 연단케 하는 유익한 훈련으로 나타난다. 누가 어느 시험에 속할 것인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다. 타락 이전 에덴 동산에서 시험이 있었다. 구원 받은 이후에도 마찬 가지이다. 구원의 결과 성도들은 영적으로 타락 이전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 이후에도 성도들에게 시험은 계속된다. 이 세상은 완전한 낙원이 아니라 시험과 연단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출애굽 사건 이후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이유이며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율법 준수가 중요함이 강조된 이유였다. 이것은 그대로 신약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 삶만이 받은 구원이 참된 것임을 밝혀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삶을 뜻한다(빌1:27절). 그런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다. 성도는 이런 통치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들의 삶 방식이다. 그러므로 구원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4중적 의미를 갖는 성경적인 세계관은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예배론의 내용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구원의 기쁨과 확신에 근거를 두고 어떻게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도 ‘모으는 목회’뿐만 아니라 ‘보내는 목회’에도 힘쓸 것이다. 이 때 비로소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이 말한 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고 성도가 성도답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 교회도 개혁될 것이다. 주님! 한국 교회를 이렇게 축복하소서! 아멘! * 관련 글들(글 제목을 클릭하시지요!) 요단에서 본 가나안(1) 요단에서 본 가나안(2) 요단에서 본 가나안(3) 요단에서 본 가나안(4) 요단에서 본 가나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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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수
3094 2010-12-03
타성의 함정(소제목: 목회 성공 후 왜 실패하는가?) 영국의‘도널드 설’은 포천이 선정한 '비즈니스분야 大家'이다. 그는 한 때 크게 성공한 기업이 시간이 지나면서 왜 망하는가를 연구했다. 그 원인은‘활동적 타성’에 있었다. 활동적인 타성(active inertia)이란 과거 성공을 가져다 준 경영 방식이 기업 조직을 지나치게 지배함으로 새로운 기업 환경에 민첩하게 적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타성(惰性)을 뜻한다. 망해 가는 기업에는 이런 타성이 대단히 활동적이며 이를 알리는 신호 세 가지가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첫째 CEO가 비즈니스 잡지의 표지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그 기업의 모든 직원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 된다. 둘째는 경영 구루(guru)들이 그 CEO에 대해 책을 쓴다. 이 기업이 최고이니 다른 기업들도 따라야 할 모델이 된다. 그리고 셋째는 CEO가 저술 활동을 한다.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모델로 등장한다. 이런 타성을 심리학 용어로 바꾼다면 성공이 가져다 준 자만, 우월감과 교만이다. 이런 심리들은 자신의 성공 방식만을 고집하게 만들어 항상 변하는 기업 환경을 잘 살펴 민첩하게 적응하려는 시도나 노력을 반대하거나 방해한다. 그렇게 한 때 성공한 기업은 서서히 망해 간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비지니스 분야에서도 맞는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타성의 함정과 이를 알리는 신호 세 가지가 그대로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들에게서도 예외 없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목회에 성공한 미국의 목회자들이 유명한 기독교 잡지의 모델로 등장하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실용주의 성향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들을 칭송하며 연구한다. 이런 기사를 접한 한국 목회자들도 이들을 숭배하며 마치 성지(聖地)나 되는 듯이 이들의 교회를 매년 방문한다. 그리고 이들 목회자가 쓴 책들은 어떤 주제이든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수백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 셀러가 된다. 그렇게 이들의 목회 방법이나 철학이 전세계로 퍼져 나간다. 특히 한국 목회자들은 이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는다. 이들의 목회 방법은 곧바로 한국 교회에 도입된다. 그리고 한 동안 이들의 글이 교회의 칼럼을 지배한다. ‘도날드 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목회 성공자들이 기독교 교회에 어떤 해악을 줄까? 우선 이들의 목회 방법이나 책들이 주장하는 바가 그대로 다른 교회들에 적용된다. 이로써 지교회들이 당연히 보여주어야 할 다양성이 사라진다. 미국과 한국 사이 민족성, 신앙 기질, 문화와 관습에서 너무나 다양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에 따라 목회 환경과 여건은 나라와 민족에 따라 그리고 같은 나라와 민족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 다르다. 이들의 목회 성공 원리나 방법은 참고 자료는 되어도 그대로 다른 민족 교회들에 적용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적용시키려 한다면 목회 환경의 특수성과 다양성이 희생된다. 그리고 부분적인 목회 원리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모델 원리가 됨으로 지교회가 갖는 독특한 목회 환경에 따른 목회 전략을 찾지 못하게 만든다. 이들의 목회 성공 방법이 모든 기독교 교회가 따라야 할 모델이 된다면 이것처럼 위험하고도 무서운 타성은 없을 것이다. 성경도 이에 찬성하지 않는다. 성경 기록 방식이 이를 잘 증명한다. 동일한 신약 성경에 신앙의 강조점이 서로 다른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가 함께 기록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지역 교회들의 영적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는 위험한 성향을 보였다. 이를 고치기 위해 이신칭의 교리가 강조되어야 했다. 그러나 야고보서 수신 교회는 이신칭의만 말하며 행함이 부족했다. 이를 고치기 위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임을 강조해야 했다. 이렇게 지교회들은 많은 면에서 다양하고 그리고 특수하다. 어느 특정한 신앙이나 목회 원리가 모든 교회에 다 통하지 않는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들에 보내는 서신들도 이는 잘 증명된다. 이 교회들은 모든 면에서 다 달랐고 이에 따라 이들에게 주어지는 교훈이나 가르침도 다 달라야 했다. 그러나 소위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들은 ‘도널드 설’이 경고한 세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최대한 알리려 한다. 그들의 교회에서 목회에 성공했기에 다른 목회자들도 자신을 따르라고 선전한다. 그렇게 전세계의 기독교 교회들은 미국 교회나 또는 특정 교회를 닮아가며 특수성과 다양성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들의 목회 철학이나 원리는 그 교회 상황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객관적인 목회 원리가 될 수 없다. 예컨대 한국에서 대단히 유행한 여의도 ㅈ목사의 형통 신학과 양적 성장론 그리고 강남의 ㅇ목사의 제자훈련도 마찬 가지이다. 전자는 성경의 부분만을 가르침으로 신학적 균형을 상실한다면 후자는 유식한 중산층이 집중된 강남이라는 특수한 지역 정서에 제자훈련이 잘 맞기 때문이다. 이들이 한 동안 성공했다고 성경을 대신할 정도로 영원한 목회 원리는 절대로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지교회들은 다양성과 특수성을 상실하며 다른 영적 상황에서 실패할 수 있다. 현대의 유전공학이 이를 잘 설명한다. 자연에는 같은 종이라도 지역에 따라 적응하면서 생긴 다양한 특성을 보이는 식물들이 많다. 유전공학은 몇 가지 장점들만 모아 새로운 식물을 개발하여 농가들에 대대적으로 보급한다. 한 동안 풍년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뜻밖에 대흉년을 맞는다. 다양한 품종들이 심어졌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불행한 결과이다. 기후나 기업 환경은 언제나 동일하지 않고 늘 변한다. 이를 대비하려면 다양한 경영 원리가 필요하다. 목회나 신앙 삶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어느 특정 신앙 또는 목회 원리가 모든 교회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의 상황을 보아가며 루터를, 칼뱅을 그리고 요한 웨슬레를 시대를 달리하며 각각 보냈다. 그리고 이를 깊이 깨달은 개혁자들도 개혁 교회란 날마다 개혁해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다. 기독교 교회가 타성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적 타성의 위험에 빠진 무리였다. 당시 이들은 존경과 명예,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선생, 지도자와 아비였다. 이들은 이를 탐닉했다.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였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3:8-11절) 사실 이 경고는 신약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준 것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구약 시대의 이들과 완전히 달라야 했다. 예수님의 경고대로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인 목사는 사람들 앞에서 선생, 아비 그리고 지도자로 불리우면 안 된다. 도널드 설의 주장대로 목회자들도 영적 차원에서 타성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만이 교회에서 유일한 선생과 지도자이며 하늘의 아버지만이 유일한 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회에 대단히 성공한 목사라 해도 예수님을 대신한 모델이 절대로 될 수 없다. 이것은 성공한 목회자의 목회 원리나 방법 또는 그의 가르침 자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신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와 목회자는 유교의 가부장적인 권위 아래 자랐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통치자, 선생과 아버지는 절대적인 권위자이다. 예수님은 이런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했지만 한국 목회자들은 이런 권위에 쉽게 안주하며 즐기고 있다. 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부활주 예수님만이 교회의 유일한 주인으로서 만유의 주라고 강조하며 설명하는가?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주인인 교회의 지체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목회자들은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눈을 감고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다. 한국 신자들도 유교 문화에 따라 목회자들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유교와 그 가르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목회자들은 교회의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 노릇을 한다. 부패한 인간 목회자가 예수님을 대신한다면 그 교회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는 불 보듯 뻔하다. 오늘날 질병처럼 많은 목회자들 사이에 번지는 비리, 불의, 부패와 성적 타락이 이를 잘 증명한다. 대부분 예수님이 경고한 타성의 함정에 빠져 있다. 도널드 설의 주장은 물론 예수님의 경고는 특정한 때 또는 특정한 지역에서 성공한 목회 원리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기독교에 위험한지 잘 설명한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상식적으로도 그리고 영적 관점에서도 모두 실패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가들이 말했듯이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이나 인간의 가르침이 부활한 예수님이 주인인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는 늘 경성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들일수록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많이 알리려는 소원과 노력을 늘 버려야 한다. 이것이 목회자의 자기부정이다. 또한 목회자들은 성공한 목회자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성실하게 전하는 대언자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딤후2:15-17절) 그리고 이런 노력에 게을렀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한다.
8 no image 혼란의 가장자리에 처한 대한민국 파일
장창수
3039 2010-11-29
(소제목: 위기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시킨다.) 혼란의 가장자리(edge of chaos)는 물리학 용어이다. 물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다른 형태로 바뀌려면 외부의 물리적인 압력에 의해 물의 분자 구조가 깨어져야 한다. 이 임계점(臨界點)에서 고체는 기체로, 기체는 액체로 그리고 액체는 기체로 변화한다. 이 임계점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인 압력 즉 온도의 상승 또는 하강은 계속된다. 이 임계점을 ‘혼란의 가장자리’라고 부른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런 혼란의 가장자리에 놓였다. 북한은 연평도를 포격함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했다. 신문도 대한민국이 공격을 당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쟁 상태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한민국이 어떤 대책도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보복 공격을 하자니 확전(擴戰)으로 이어질까 걱정이다. 잘 나가는 대한민국 경제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북한은 이를 이용하여 갈짝갈짝 대한민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모든 면에서 훨씬 앞서가고 경제 규모가 훨씬 큰 대한민국이 조그만 북한의 손 안에서 농락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유화 정책을 쓰자니 너무나 나약한 정권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리고 유화 정책은 햇볕 정책이 보여주듯이 북한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대안이 마땅치 않다. 사실 그 동안 북한이라는 물리적인 압력은 점점 더 커져 갔지만 대한민국은 평화 무드에 젖어 변화에 대비하지 않았다. 과거 10년 동안 두 정권이 조성한 평화에 대한 거짓된 환상, 통일은 대한민국을 더 힘들게 만들 것이란 전망 그리고 전쟁 나면 대한민국이 나락에 떨어질 것이란 예상이 빚어난 결과이다. 새로운 변화를 강요 당하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이에 소홀했고 지금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지금의 문제를 정치적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처한 혼란의 가장자리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정치 현상 넘어 하나님을 보도록 유도한다. 교회의 머리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야 할 이유이다. 인간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예들이 성경에 기록된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남방 유다 왕국을 치고자 했다. 이에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했다. 그리고 이렇게 간구했다.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20:6, 12절) 여호와는 그와 온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었고 적국들 사이 내분이 일어나게 만들어 서로 치게 함으로 모두 멸망시켰다(대히20:22-23절). 그리고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이 히스기야를 공격했다. 하루 아침에 남방 유다는 풍전등화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나라와 민족도 앗수르 제국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히스기야는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기도하며 선지자 이사야에게 신하를 보내 하나님에게 도움을 간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자신도 이렇게 기도했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왕하19:15-19절)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주었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승리를 예언해 주었다(왕하19:20-34절). 그 예언대로 하루 밤 사이 앗수르의 모든 군사들이 죽었고 앗수르 왕 산혜립도 니느웨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아들에 의해 암살 당했다. 만군의 여호와 앞에 앗수르가 지나치게 교만했기 때문이었다(왕하19:28절). 물론 구약의 두 사건은 오늘날 곤경에 처한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되진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통치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장로교 신자이며 그의 내각의 장관들 중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이며 국회의원들의 35% 이상이 기독교 신자들이고 대한민국에는 700만을 상회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전세계로 파송 했다. 무신론 국가인 북한과 비교한다면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 참 마음으로 회개하고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이 위기를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신론 나라인 북한이 아시아에서 가장 기독교 활동이 왕성한 대한민국을 이기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다. 엘리 대제사장 시절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했다. 이스라엘은 패전의 원인이 하나님의 언약괘를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약괘를 앞세워 전쟁에 임했지만 완전히 패전했다(삼상4장). 언약괘까지 블레셋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 원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종교적인 격식만 차리면 승리할 것이라 잘못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한국 교회가 그 동안의 잘못을 진실로 회개하지 않고 기독교 교세나 언급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외형을 보지 않고 회개하는 마음의 동기를 보고 은총을 베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인본주의적인 흐름을 완전히 차단시키고 교회 개혁에 돌입하여야 한다. 그 동안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버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갔기에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징계하여야 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이북이라는 몽둥이 또는 가시를 늘 준비해 두었다. 이를 암시하는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남겨 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삿3:1-4절) 한국민과 교회는 그 동안 북한을 6.25라는 민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원수처럼 보았다. 그러나 위의 성구는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가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 북한을 일부로 남겨둔 옆구리의 가시와 몽둥이일 수 있다는 암시를 준다. 이제부터 북한이란 존재를 한국 교회는 달리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하며 향후 교회 개혁에 힘써야 한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이 하루 아침에 공산주의 통치 아래 떨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로 민족이 하루 아침에 멸망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 왕은 나라의 위기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왕하19:3절) 북한의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두 사건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한민국이 훨씬 그리고 너무나 허술한 나라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동안의 경제 번영과 그로 인한 만족과 자만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기강이 전반적으로 해이해 졌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그 결과 아이(개혁과 변화)를 낳고 싶어도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에 은총을 베풀어 도와준다면 아이를 해산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기쁨은 해산의 고통을 당한 만큼 아주 클 것이다. 연평도 포격으로 민족적인 위기를 만났지만 이를 잘 극복한다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위기는 전화위복이라는 위대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느냐 여부는 한국 교회의 회개와 개혁 의지에 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민족을 위해서도 회개하여야 하며 교회 개혁을 도모하여야 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도움을 간절히 구합시다!
7 no image 목회 성공 후 타락하는 이유 파일 (126)
장창수
5847 2010-11-18
소제목: 탐심은 죽어야 비로소 사라진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이 비유가 신자들의 신앙 상태를 설명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비유의 목적이 아니다.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질문은 좋은 밭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다. 러시아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의 삶을 이해할 목적으로 텃밭을 사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아내 선교사가 식물 돌보는 일을 워낙 좋아한다. 그녀를 돕기 위해서라도 할 수 없이 텃밭에서 땅을 뒤엎어야 한다. 그러나 유익도 많았다. 농사(農事)를 이해할수록 성경 진리가 더 잘 이해되었다. 자연 계시가 특별 계시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좋은 밭에 대한 이해도 생겼다. 농부는 수확물에 따라 밭을 달리하며 씨를 뿌린다. 이 때문에 모든 땅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무는 너무나 기름 진 땅에선 잎사귀만 무성하고 뿌리가 부실하다. 같은 배추라도 따뜻한 곳보다는 좀 추운 곳에서 잘 자라는 종류도 있다. 놀랍게도 포도 나무는 물이 잘 빠지는 낮으막한 언덕 같은 곳에 심어지며 물을 품으려는 흙보다는 배수를 잘 돕는 잔돌들이 많은 곳에서 단 포도를 맺는다. 이렇게 농부는 수확물의 종류에 따라 밭을 선택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농부로 곧잘 비유된다(사27:3, 렘2:21, 요15:1절). 하나님도 자신이 원하는 씨의 종류에 따라 흙의 성격을 보고 밭을 선택한다. 광활하게 널려있는 대지(大地)가 모두 밭이 될 수 없다. 농사(農事)에 관련된 사실이 곧바로 신학적인 의미를 설명하도록 성경에서 차용된다. 이렇게 자연 계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농부가 밭을 골랐다고 밭에서 수확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농부의 수고가 따라야 한다. 우선 밭을 개간하여야 한다(사5:2, 눅13:8절). 밭의 돌들과 잡초를 제거한다. 이런 과정에서 단단한 흙을 부셔야 한다. 뿌려진 씨앗은 단단한 흙에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흙 밑에 공기와 수분이 충분히 잘 통하도록 흙을 엎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농부는 흙 밑에 숨어있는 잡초의 뿌리들도 뽑아낸다. 이렇게 쟁기질과 삽질은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한다. 농부의 손이 가지 않으면 자연 상태의 밭은 절대로 옥토(沃土)로 변할 수 없다. 처음 쟁기질 하는 밭의 흙은 너무나 단단하고 그 동안 자란 잡초들이 땅 속 깊이 자라잡고 있다. 흙을 완전히 뒤집어 놓지 않으면 길가 밭처럼 못쓸 땅으로 영원히 남는다. 농부가 매년 쟁기질이나 삽질을 해야만 밭은 옥토로 계속 남아 씨앗을 품고 잘 자라게 한다. 가을 수확이 끝나면 농부는 곧바로 땅을 뒤엎는다. 땅이 숨을 쉬고 물을 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다음 해 봄 농사까지 흙은 부드러워진다. 비유에서 말하듯이 말씀의 씨앗은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다. 그렇다면 농부인 하나님의 돌봄이 없이 사람 마음에 복음의 말씀인 씨앗은 절대로 심어질 수 없다. 이 이전 하나님은 마음 밭에 쟁기질을 해야 한다. 교만이라는 돌과 욕심인 잡초를 마음 밭에서 먼저 제거해야 한다(호10:12절). 이 때문에 갑자기 뜻하지 않은 고난이나 불행이 그에게 닥친다. 이에 대해 이사야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사28:24-25절) 이미 앞에서 유다 왕국을 멸망시킬 하나님의 심판(22절)이 예언되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의 멸망만 목적하지 않는다. 새롭게 말씀의 씨앗을 뿌리기 위한 목적을 감춘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전략이다. 유다를 멸망시키는 심판은 참으로 혹독할 것이다. 이 심판을 통해서만 선민의 완악한 마음은 부드럽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시대의 남은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감추고 있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 후손도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다. 그 마음에 돌들과 잡초들이 무성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가 심어질 수 없다. 인류는 출생 순간부터 전혀 밭갈이가 없었던 길가 밭과 같다. 자연 상태에서 옥토가 없듯이 보편적인 인류 가운데 스스로 구원을 받을 만큼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는 뚯이다. 매년 봄 밭의 흙을 갈아 엎을 때마다 목격되는 사실이 있다. 잡초의 뿌리가 땅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농부는 쟁기질을 깊이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 제거되지 않는다(창3:17-19절). 경험상 잡초를 모두 제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농부는 잘 안다. 잡초가 나타날 때마다 뽑을 수 밖에 없다. 잡초의 뿌리처럼 탐심의 뿌리도 인간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뿌리는 수양(修養)이나 윤리적 삶 또는 개종(改宗)과 그 후에 따를 성화(聖化) 노력만으로도 모두 제거되지 않는다. 성화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탐심의 뿌리는 언제든지 그 머리를 내밀려 한다. 목회 성공 후 많은 목회자들이 타락하는 이유가 여기 설명된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스승을 따라야 한다(마16:24절). 자기부정은 신앙 삶에서 이렇게 중요하다.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사실이 또 있다. 하늘에서 비가 한번 내리면 그 다음 날 잡초가 또 다시 나타난다. 농부가 밭에서 끊임없이 일하는 이유이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신앙 삶에 진력(盡力)할 때 탐심과 교만이 거의 사라진 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신앙 삶에서 열매가 찬란하게 나타날 때 또 다시 탐심과 교만이 그 머리를 내민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주님의 이름이나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한다. 역설적으로 신앙 삶이 성공적일수록 실패의 가능성도 그 만큼 더 커진다. 목회 성공자들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신앙과 목회에서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그 좋은 예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은 그를 사단이라 부르며 호되게 책망했다. 그의 놀라운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일보다 인간의 일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마16:16-23절). 혹자는 신앙심이 뜨거울수록 교회와 신자들은 이웃에게 더 위험한 존재로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세 유럽 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종교 재판을 행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이천만 명 정도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지(聖地)를 회복시키겠다는 미명 아래 유럽 교회는 수많은 무슬림들을 살상했다. 그러므로 성화 삶에서 자기부정은 아주 중요하다.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은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 영화(榮華)에 달하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이 십자가를 내려 놓으면 안 된다. 탐심과 교만의 뿌리는 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안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를 메라고 권면한다(마11:29절). 일할 때 멍에가 더더욱 필요하다. 멍에는 자행자지(自行自止)하려는 잘못된 의지를 제어해 주면서 동시에 멍에를 멘 자의 몸을 보호해 준다. 신자나 목회자가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할 때도 마찬 가지이다. 주님의 멍에는 말씀대로 행하도록 잘못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제어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잘못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를 보호한다. 목회에 성공할수록 더더욱 주님의 멍에는 필요하다. 이를 싫어한다면 남은 구원하되 자신을 파멸시키는 불행과 비극을 당할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자기부정이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임을 증언한다. 구원 이후에도 마음 속이 감추어진 탐심의 뿌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파멸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며 스스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끝까지 순례자의 삶을 가야 한다.
6 no image 다윗의 간음 사건, 어떻게 볼 것인가? 파일
장창수
4192 2010-10-25
다윗의 간음 사건, 어떻게 볼 것인가? 구약 성경의 기록은 너무나 솔직하다. 믿음의 위인들로 존경 받는 인물들의 실수와 잘못이 하나도 숨김 없이 기록된다. 이 점에서 기독교 성경은 허물을 가능한 한 덮어버리려는 다른 종교들의 경전들과 완전히 다르다. 구약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들이 당황하는 이유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거룩한 성경에 기록되지?” “믿음의 위인들도 우리와 성정(性情)이 너무나 비슷하구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들도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구원의 반열에 계속 남았다. 하나님의 은총이 강조되도록 이들의 윤리적인 실수와 잘못이 성경에서 크게 부각되어 기록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기록 당시의 문화와 관습에 근거를 두고 이들의 삶과 생활이 기록된다. 예컨대 믿음의 위인들에게 부인들과 첩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세상 문화의 문제를 알지만 이를 막지 않고 허용(許容: tolerance, allowance )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금욕주의는 하나님 앞에 위선(僞善)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약 시대 축첩을 오늘날 그대로 용인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다. 오늘날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는 이미 인류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실수와 잘못은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이들의 실패가 승리에 이를 수 있는 신앙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에서 목회자의 간음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 기독교계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문제는 미국 목회자와 달리 한국 목회자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유교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관습에 젖어있어 존경 받는 지도자와 스승은 완벽해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감이 있어서이다. 이 때문에 한국 목회자들은 자신의 간음 사건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빠져나가려 한다. 이로 인해 교계의 혼란은 더 가중된다. 이들은 어떻게든지 빠져나가려고 다윗의 간음 사건을 자주 인용한다. 다윗도 간음죄를 범했지만 용서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간음 사건은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리고 목회자의 간음 문제는 하나님이 직접 다룰 문제이므로 신자들은 잠잠해야 한다는 식이다. 아니면 자신은 유혹을 받아 죄를 짓게 되었다고 상대 여성도에게 뒤집어 씌우는 비겁함과 치졸함을 보인다. 목회자답지 않다. 간음은 쌍방간 합의가 없으면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또는 신천지 교회의 전략에 의해 희생 당했다는 식으로 빠져 나가려 한다. 상대가 누구이든지 의지적으로 간음 죄를 범했으면서도 말이다. 목회자들이 자주 인용하며 핑계 되는 다윗의 간음 사건은 신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다윗의 간음 사건은 목회자의 간음 사건을 용인하는 성구인가 라는 황당스러운 질문이 생긴다. 물론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다윗과 오늘날의 목회자를 동일 선상에 놓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과 목회자 사이 동질성과 이질성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간음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함이다. 비슷한 점들 다윗(대상11:2, 겔37:24절)도 그리고 목회자(요21:15-17, 벧전5:4절)도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받는다. 하나님의 양을 치는 사명은 주인인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윗과 목회자 사이 아무 차이도 없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부름을 받았다면 목회자는 지교회의 목자로서 부름을 받는다. 이를 위해 다윗은 이스라엘 앞에서 공식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반면 목회자는 총회의 인준 아래 노회에서 안수례를 받음으로 목사로서 목양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이란 점에서 아무 차이도 없다. 이 둘 사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재미있는 사실은 다윗이 통치에 대성공을 거둔 후 간음죄를 지은 것과 같이 오늘날도 목회에서 크게 성공한 목회자가 간음죄에 빠진다는 것이다. 성공 이후 존경 받는 유명인이 되면 따르는 무리가 생긴다. 이들은 특히 여성도들은 성공한 목회자에 대해 피동적으로 그리고 순종적으로 대한다. 무조건 이들을 존경해야 하며 무엇이나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이들의 마음과 머리에 자리잡기 때문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유혹할 때 그녀가 어떤 저항을 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마찬 가지로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과 목회자와 여신자들 사이 조성된 영적 친근감과 신뢰감은 간음 사건을 용이하게 만든다. 영적 친근감은 쉽게 육적 유혹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목회자가 여성도를 유혹할 때 하나도 저항하지 않는다. 너무나 존경하고 좋아하는 인물인지라 이상한 요구를 해도 선한 뜻이 있겠거니 믿고 응해준다. 이런 이유로 인해 목회자와 여성도 사이 간음은 마치 친부모와 자식 간의 그것과 유사하여 나중 엄청난 죄책감을 수반한다고 전문 상담가는 말한다. 성공한 목회자일수록 자기부정에 약하면 그만 실패자로 드러날 수 있다. 불필요하게 여성도들과 접촉하며 사탕 발림의 말을 목회자가 즐기는 것은 불경건이다. 만남이 불가피하다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만나야 한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원만치 못한 여성도는 존경하는 목회자를 이상적인 남편으로 보고 무조건 추종할 수 있다. 이 때 목회자는 이를 좋아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본능적인 욕정이 신앙의 형태로 감추어져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여성도와의 관계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도, 목회자도 간음 죄를 범했다. 이것이 우리를 혼란케 만든다. 물론 다윗도 목회자와 같이 인간인지라 죄를 지을 수 있다. 다윗이 용서를 받았다면 간음죄를 지은 목회자도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우기는 이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다윗의 간음죄를 불의와 악행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간음죄를 덮으려고 살인죄를 추가시켰다. 이 두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을 무시한 결과라고 나단 선지자는 그를 책망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삼하12:9-10절) 마찬 가지로 목회자의 간음죄도 다윗의 간음죄와 같이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심각한 죄악과 악행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하나님 자신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목회자도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속죄하는 과정을 공식적으로 가져야 한다. 기도 중 하나님이 용서했다는 개인적인 확신만으로 부족하다. 목회자는 교회가 초빙한 공식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점들 지금까지 구약의 다윗과 신약 시대 목회자 사이 동질성에 근거를 두고 간음 문제를 다루었다. 이제부터 다윗과 목회자 사이 이질적인 것들을 살피고자 한다. 엄밀히 살핀다면 이 둘 사이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다윗은 축첩(蓄妾)이 용인된 구약 시대 인물이라면 목회자는 이것이 금지된 신약 시대를 산다. 이 때문에 다윗의 간음 죄는 시대적으로 쉽게 용서될 수 있었지만 목회자의 간음죄는 쉽게 용서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용서를 구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할 목회자가 시대의 문화와 관습을 거슬리는 용감한 무식(無識)을 보이는 꼴이 된다. 문제는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다윗이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의 간음죄 뒤에는 이런 무서운 죄가 숨어있었다.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단을 보내 다윗을 책망한 이유였다. 이 때야 다윗은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자복하고 하나님의 사죄 은총을 구했다. 그러나 동일한 죄를 지은 오늘날의 목회자는 사죄라는 결과만 주장하지 그 과정을 일부러 생략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목회자가 더 추하게 행동하고 말한다. 그도 간음죄를 짓기까지 신앙 양심을 거역하며 수많은 죄들을 은폐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그에 따른 책임 질 줄 모르는 몰 양심을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더 큰 죄이다. 자세히 살피면 다윗과 목회자 사이 신분상 차이가 또 있다. 다윗은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정치와 경제 면에서 통치자로서 목자(pastor)였다. 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며 종교적인 면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목회자는 한 지역의 교회의 영적 지도자에 불과하다. 자신을 다윗 같은 선상에 놓고 위대한 인물인양 취급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유교의 가부장적인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흔한 착각이다. 세속 통치자보다 영적 지도자가 더욱 금욕주의적이어야 함은 상식이며 만인이 동의하는 바이다. 오늘날도 미국의 빌 클린턴 전대통령의 간음 문제가 보여주듯이 정치 지도자의 간음 문제는 서구 사회에서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 나라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간음은 비교적 철저히 파헤쳐진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세속에 살아야 하는 다윗의 간음 죄는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아야 할 목회자의 그것과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 죄를 지은 목회자가 더더욱 공개적으로 회개하며 속죄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심각한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앞으로 올 메시아의 모형이었다면 목회자는 부활로 인해 만왕의 왕과 만유의 주(主)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종(從)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왕권 언약에서 분명해 진다(삼하7장). 다시 말해 목회자에게는 다윗 언약 같은 언약이 없다. 목회자는 그 언약에 속하여 언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혜자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윗과 취소 불가능한 왕권 언약을 맺었다. 그 결과 다윗의 왕국은 구약의 모든 예언들과 약속들이 지상적인 요소들로 실현된 성취였다. 그리고 이 성취는 신약 시대 예수님에 의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모습을 미리 예언해 주었다. 이런 언약 체결 후 다윗은 그만 간음죄를 지었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한 후 계속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야 했다. 이를 위해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를 책망했다. 결코 변할 수 없는 왕권 언약에서 나오는 은총에 따라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냈고 그를 책망했다. 이것은 죄를 지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다. 나단의 책망을 통해 이를 깨달은 다윗은 즉시 회개했다. 그러나 목회자가 간음죄를 짓는다면 다윗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총이 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윗과 목회자 사이 구속사적인 사명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부여했다. 이 덕분에 그들의 언행은 실수와 잘못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하고 신약 성경을 기록해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이들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목회자들은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에 근거하여 목양해야 한다. 사도들에게 준 동일한 특별 은총이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맡은 사명 면에서 다윗과 목회자 사이 또는 사도들과 목회자들 사이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간음죄를 오늘날의 목회자가 자신의 간음죄와 동일시하는 것은 무식(無識)의 소치이다. 이런 무지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간음죄를 다윗의 그것과 비교하며 쉬운 용서를 구하는 것도 무식이 낳은 지혜롭지 못한 담대함이다. 이 때문에 목회자가 간음죄를 짓고도 떳떳하게 자신의 사죄를 주장하는 것은 몰양심적이며 하나님 앞에 엄청난 불경건이다. 간음죄를 지은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속죄 은총을 받았다고 확신하며 주장하는 것도 교회를 속이려는 사기죄에 속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선지자를 보내 그를 책망하거나 사죄를 선언하지도 않았다. 회개와 속죄 과정은 교회 앞과 노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인적인 확신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초기에만 가능했던 하나님의 계시가 오늘날도 유효하다고 하는 무식한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와 노회와 총회라는 기구들과 조직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그 결과 기독교 교회에 무질서가 초래되고 더 많은 신자들이 멸망의 길로 인도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개인적인 확신은 비성경적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의 간음 문제가 윤리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논의되거나 토론되었다. 이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고 문제의 해결을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 말씀을 함부로 해석하며 아전인수 격으로 답을 찾아 말한다는 것이다. 잘못 해석한 결과 죄를 지은 목회자들이 오히려 성경 본문을 자신의 간음죄를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사용한다. 이렇게 기독교 교회와 목회자들은 스스로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는 이유이다. 성경 분문과 오늘 시대 사이 차이와 같은 점을 분명히 이해할 때 보다 분명한 성경 해석이 가능하다. 본 글의 내용을 통해 목회자의 간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지만 해결을 주는 답이 있음을 알았다. 앞으로 조금이나마 목회자의 간음죄가 더 줄어들어 교회가 개혁됨으로 한국 사회로부터 다시 신뢰를 회복하길 모든 기독인들은 바랄 것이다.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http://blog.naver.com/rassvet
5 no image 기독교를 기만하는 번영 신학 파일
장창수
4133 2010-10-21
소제목: 번영 신학은 현대판 바알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자기 만족(滿足)을 위해 끊임없이 욕심을 낸다. 이 욕심이 감추어진 체 종교들도 만들어진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 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절) 탐심(貪心: greedy desire)이 온갖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종교의 원인이요 뿌리란 뜻이다. 인간의 이런 타락한 이기심을 가장 잘 만족시켜 주는 종교가 바로 무교(巫敎: shamanism)이다. 무교는 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종교는 인간의 탐심을 잘 채워주기에 인류 사회를 오랜 동안 지배한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종교들 즉 불교나 유교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무교에 흡수 당했다. 종교의 세속화이다. 이 점에서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소개한 ㅅ교회의 ㅈ목사와 그의 동역자였던 ㅊ여목사에 의해 기복주의적인 신학 즉 번영 신학이 한국 교회에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 병 고치는 기도에서 출발되었다. 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번영 신학이 주장되었다. 이를 지지하는 성구가 요한일서 1장 2절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번영 신학은 4중 복음으로도 설명된다. 구약 시대에도 기복적(祈福的)인 종교가 있었고 이 때문에 선민 이스라엘은 항상 조심해야 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직전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요단 강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이스라엘에게 미리 경고해야 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8:12-14절)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고 안식을 얻은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를 맞았다. 이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종교였던 남신 바알과 여신 아스타롯을 섬기기 시작했다(삿2:11-13절). 이 신들은 농업 신들로 구약 시대의 배금 종교(拜金 宗敎: mammonizm)였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 우상(偶像)이라는 헛된 것을 섬기는 것은 모세 율법이 금했다(출20:4-5, 신32:21, 삼상12:21절). 그러므로 사사(士師)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은 늘 바알 종교와 끊임없이 다투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도 가나안의 기복적인 종교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타락하며 멸망 했다(렘2:8, 19:4-5절).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보다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연유한다. 말씀의 종교가 물질숭배 종교로 바뀌자 선민 이스라엘도 영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부패하며 내부적으로 서서히 무너졌다. 이 때 외부의 공격은 쉽게 이스라엘을 쉽게 무너트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상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기독교에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사회로부터도 불신(不信)을 당하고 조롱 받고 있다. 세계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 교회의 부흥기는 지났고 복음이 들어온 지 100여 년 조금 지나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빨리 탄 불이 빨리 꺼지듯이…… 이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에 있다.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 종교인 무교를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기독교와 한국인의 종교적 정서’라는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55475613) 번영 신학이 어떤 점에서 비성경적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로써 그 동안 한국 교회를 기만한 번영 신학 즉 4중 복음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바알인 형통 신학 즉 번영 신학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진 기독교를 새롭게 세우기 위함이다. 번영 신학은 신구약 성경 사이 존재하는 계시 방법과 내용상 차이를 전혀 모른다.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출발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이를 위한 조건으로 하나님은 선악과 규례를 인간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보존됨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법치(法治) 즉 말씀 통치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종하면 아담과 하와는 낙원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한다면 이들은 낙원을 잃을 것이다.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며 그 나라 안에서 누리는 복도 물질적(物質的)일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에 실패하여 낙원을 잃었다. 그리고 에덴 밖에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어렵게 살아야 했다. 타락 전후(前後) 하나님의 은혜와 복(福)은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복의 성경적인 관점은 족장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가나안 땅에 세우기 위해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상에서 그를 불러내 보이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게 했다. 마침내 가나안에 살았지만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다. 그 조건은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살면 물질로 표현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소명 목적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했다. 그 목적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애굽의 노예로 고생한 이스라엘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함이었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는 다윗 왕국이라는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형태로 가나안 땅에서 실현되었다.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와 구별되어야 했다. 그 구별은 하나님의 율법에 있었다. 율법에 따라 산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일등 나라가 될 것이다. 일등 나라라는 증거는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서 일어날 것이다(신4:6, 28:1-14절). 이렇게 보이는 형태로 하나님은 구약 시대 자신의 백성을 축복했다. 여기엔 다른 목적도 있었다. 원복음(창3:15절)이 약속한 메시아에 의해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예언해 주기 위함이었다. 신약 시대 세워질 하나님 나라도 법치에 근거할 것이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복이 결정될 것임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미리 계시해 주었다. 다윗 왕국이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윗 왕국은 결국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참이 아니었다. 참이 아닌 것은 곧 올 참 것을 위해 무너져야 한다(히7:18-19, 8:13절).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은 멸망해야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한 동안 사라졌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복을 앞으로 외형적(外形的)인 것으로 더 이상 표현 또는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신약 시대를 연 예수님이 그 좋은 예이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궁이 아닌 목수의 집안에 출생했다. 창조주가 이 세상에 누울 것이 없어 말 구유에 탄생한 이유였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하늘의 복은 세상 것과 완전히 달라서 세상 것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왕궁에서 왕자로 자라지 않았고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력이나 부귀영화를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나라는 구약 시대와 달리 세상 나라에 더 이상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요18:36절). 그러므로 세상 나라 방식으로 즉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나 권세를 표현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약 시대 계시의 방법과 내용이 구약 시대와 달리 완전히 바뀌었다. 이에 따라 신약 시대 하나님이 복을 주는 방법도 달라졌다. 눈에 보이는 방식에서 안 보이는 방식으로…… 산상수훈(마5-7장)의 팔복(八福)은 이를 잘 증명한다(마5:3-10절).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복을 받을 대상은 이 세상에서 그리 사랑 받지 못할 사람들일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등등…… 이들은 구약 시대 찬란한 믿음의 영웅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처럼 어디에도 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다. ㅈ목사가 4중 복음의 증거로 내세우는 성구 요일1:2절이 비교적 구약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단 한번만 신약 성경에 기록되는가? 아주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한번의 기록을 보고 구약과 같은 복을 지지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번영 신학은 몇 가지 성구들로 지지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관련 성구들만 주장한다. 예컨대 눅4:18-19절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위해 그가 행할 이적에 대한 기록이지 절대로 번영 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 롬8:28절에서 언급된 ‘합력한 선’(善)은 앞뒤 성구들을 살핀다면 물질이나 경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인 영화(榮華: sanctification)와 관계된다(롬8:29-39절). 그리고 히11:1절을 근거 성구로 들이댈 수 있다. 역시 앞뒤 성구들을 살피면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믿음으로 산 생애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설명하는 성구일 뿐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대속 죽음과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구세주와 만왕의 왕이 되었다. 번영 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마침내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활한 예수님은 이 위대한 성공과 그 결과를 만인 앞에서 보여주며 누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昇天)했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권세를 부활한 예수님은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그의 부활로 인해 이 세상에 미쳐질 하늘의 복은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헛된 탐심을 품지 못하도록 부활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영화와 영광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본(本)을 따라 이 땅의 성도들도 세상 것을 부정하며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은 신약 시대 철저히 부정되었다. 그러나 반영 신학은 아직도 구약 성경에 연연하다. 그렇게 구약 시대 임시적으로 표현된 그림자 같은 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추구는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로 이미 성취된 참 복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이다. 재림 이후에만 나타날 영화를 소망하며 이런 거짓된 복을 거부하여야 하지만 번영 신학은 여전히 거짓 복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런 거짓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진실한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경고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7:29-31절) 번영 신학은 성경 진리의 반(半)만 고집한 결과이다. 기복주의적인 번영 신학의 문제는 대립적인 이분법(二分法)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오래 수(壽)를 누리고 복을 받으며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지만 그와 반대되는 것은 안 좋다. 즉 행복은 좋지만 불행은 나쁘다. 또는 성공은 좋지만 실패는 안 좋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을 번영 신학은 보인다. 구약 시대 이런 사고가 맞는 듯이 보인다. 족장들의 경우처럼 믿음이 좋은 신앙인들은 마지막까지 수복강령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땅의 나그네로 살았다. 나그네는 정착 삶이 아니다. 항상 떠돌아 다녀야 했다. 어디를 가나 정착 사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기근 때는 오히려 약탈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시105:12, 행7:4-6절). 이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성공과 강함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에게도 약한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이 세상에 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히11:9-10절). 물질적인 복을 누린 것을 사실이었지만 나그네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복적인 번영 신학은 이들이 마치 이 세상에서 거부(巨富)처럼 산 것처럼 과장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번영 신학은 의미를 잃었다. 구약 시대 선민 이스라엘 사회도 부패했다. 이 때 의인(義人)들은 진실한 신앙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이지만 이런 사회에서 믿음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시대 의인들은 고난을 기쁘게 받았다. 행복은 좋고 불행은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이 이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뻐했다(시34:19절). 고난이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됨을 알았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7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절) 그리고 구약 성경은 고난 자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다고까지 말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시77:19절) 고통을 주는 멍에를 오히려 기뻐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27-33절) 예수님도 말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절) 이런 성구들은 구약 성경이 번영 신학을 지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대립적 이분법의 문제는 많고 적음, 크고 작음 그리고 높고 낮음 같은 수준과 정도 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수준과 정도에서 클수록 좋은 것이며 작을수록 안 좋다고 번영 신학은 생각한다. 예컨대 일억 원보다 십억 원을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은사나 능력 면에서도 나타난다. 작은 은사나 능력보다 더 큰 은사나 능력을 이들을 더 선호한다. 이에 따라 믿음의 등급과 목회자의 등급도 매겨진다. 하급자는 상급자를 지극히 존경한다. 교회 안과 목회자들 가운데 차별이 생긴다. 하나님의 은사인 능력은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봉사하고 섬기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이분법에 근거를 둔 은사론은 기독교 내에 상하계층을 만들어 목회자들을 계급화시켰다. 사도 바울이 설명한 지체이론(고전12:4-27절)의 신학적인 의미를 이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나 능력은 작은가 큰가의 문제라기보다 충성의 문제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탈란트 비유가 이를 잘 증언한다(마25:14-30절). 하나님의 평가는 번영 신학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하나님 앞보다 사람들에게 과시하기를 더 좋아한다. 더 나아가 번영 신학은 믿음의 정도가 물질적 그리고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성공과 출세의 정도가 믿음의 정도로 이해된다. 이들이 구약 식으로 믿음과 복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안 보이는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측량하려 한다. 결국 믿음과 무관하게 부자 신자라면 좋은 믿음의 소유자로 칭찬받는다. 이렇게 기독교와 그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킨다. 이들의 성경 해석에 크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분법에 따라 번영 신학에 안 맞는 성구들을 모두 폐기된다. 강대상에서 전혀 설교되지 않는다. 그렇게 이들은 성경의 반 쪽만 갖고 신앙 삶을 기꺼이 살려 한다. 이렇게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파괴시킨다. 자기 마음에 드는 성구들만 설교하기 때문이다. 번영 신학은 결국 성경 말씀을 더 하거나 빼고 해석한 결과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4:2, 12:32, 잠30:6, 계22:18-19절). 그리고 번영 신학에 또 다른 문제가 발견된다. 번영 신학은 예수님의 구속의 결과만 누리려 한다. 그 복된 결과를 가져온 과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구속의 결과 얻은 복만 강조하려 함으로 그 복을 초래시킨 예수님의 고난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의 복을 주려고 스스로 십자가에 죽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영생의 복을 얻기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번영 신학은 성공과 복만 추구함으로 복음을 위한 고난과 헌신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과정보다 결과를 즐김으로 신앙의 성숙이 없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삶의 모든 결과는 예수님 재림 이후 나타나고 이를 위해 성도는 복음을 위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재림 이후에 받을 복을 미리 앞당겨 이 세상에서 누리려 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한다(마10:38, 행14:22절). 그러나 구원 이후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선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리고 그에게 향한다면(롬11:36절) 무엇이든지 예수 안에서 ‘아니요’가 아니라 ‘예’가 된다.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은 어느 때는 복을 그러나 다른 때는 화를 보낸다. 이 때 성도는 화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참 좋은 예는 죽음이다. 성도는 죽음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불행 자체이지만 성도에게는 축복 자체이다. 이렇게 구원 받은 성도에게 대립적인 이분법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점에서 대립적인 이분법에 근거를 둔 번영 신학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번영 신학은 이 세상에 관심을 두게 만들며 재림 이후 완성될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世俗化)이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영리(營利)를 목적하는 세상 조직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부유한 자는 웃고 가난한 자는 우는 그런 곳으로 변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보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4-26절) 결론 번영 복음은 반쪽 진리이다. 아니 거짓 진리이다. 복음이 말하는 두 면을 모두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번영 신학이 잘못된 그리고 비성경적인 세계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같아 4 가지 모습을 지닌다 (‘요단에서 바라본 가나안’이란 글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098073224). 이 세상은 애굽처럼 빨리 벗어나야 할 곳이며 동시에 광야처럼 훈련을 받아야 곳이다. 그리고 가나안처럼 하나님 나라를 세우야 할 곳이면서 아울러 앞으로 불로 심판을 받아 사라질 세상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세계관은 결국 두 면, 즉 낙관적인 것과 비관적인 것을 모두 보여준다. 이 세상이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야 할 곳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곳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이 세상은 빨리 벗어나야 할 애굽과 같은 곳이며 그리고 언젠가 불로 사라질 곳이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낙관적(樂觀的)인 세계관만 견지한다. 한 쪽으로 치우쳤다. 그 결과 균형 잡힌 신앙 삶을 가르치지 못한다. 현세(現世)에만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잘 언급하지 않는 이유이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야만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마찬 가지로 번영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자신들의 것을 모두 앗아갈 예수님의 재림을 싫어한다. 그 동안 한국 목회자들이 번영 신학의 영향을 받으며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했다. ㅅ교회의 ㅈ목사 탓만이 아니다. 자신의 건전하고도 참된 성경적 신학을 버리고 그의 실용적인 신학을 많은 목회자들이 추구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이것이 탐심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기초는 서서히 무너졌다. 이젠 신자들이 목회자 못지 않은 신앙 수준을 길러야 한다. 성도의 수준이 높아져야 비로소 목회자들이 긴장하며 그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신자들에 의해 개혁되어져야 한다. 마라나타!
4 no image 인문사회과학의 도움으로 본 바벨탑 사건 파일
장창수
3468 2010-10-15
(소제목: 구원은 이분법을 극복하게 한다.) * http://blog.naver.com/rassvet/40115983490 에서 가져옴 성경의 바벨탑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류가 문명과 문화 면에서 찬란한 금자탑을 세운 후 교만으로 인해 멸망의 과정을 거치는 것 ? 이렇게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동의한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왜 그리 방언들이 많은가 - 이에 대한 원인을 성경의 역사에서 찾아내 해석한다. 이를 믿는 사람들은 물론 적다. 위의 두 가지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 이외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는 구속사적인 해석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인문사회과학적인 해석이다. 이 해석들이 바벨탑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줄 것이다.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는 바벨탑 여기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라는 신학적인 용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는 것과 관계된다. 이 점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인류 역사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성경은 인류 역사의 주인도 하나님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인류 구원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류 역사 가운데 일하는 방법이나 그 결과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도 성경의 구속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역사와 무관한 신화(神話)나 전설(傳說)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경의 사건들이 오늘날 현실과 동떨어지게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주와 인류 사회의 실제적인 주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항상 인류 역사 가운데 발생했다. 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부합되는 획기적인 사건들만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이 때문에 성경의 사건들이나 본문들을 고립시켜 해석하면 안 된다. 전후 좌우를 살펴 즉 문맥(文脈: context) 을 고려하여 본문(本文: text)을 해석하여야 한다. 성경의 모든 사건들은 서로 유기적(有機的)으로 얽히면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 체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본인의 글 '혼란의 가장 자리' 의 결론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됨) 이런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벨탑 사건(칭11장)을 살핀다면 그 앞에 노아 홍수 사건에 관련된 것들이 기록된다(창6-10장). 그리고 바벨탑 사건 뒤에 곧바로 아브람의 소명(창12장)이 기록된다. 그럼 이 세 사건들은 서로 어떤 논리적인 관계를 갖는가? 노아 시대 일어난 홍수 심판으로 아담의 옛 인류는 모두 전멸 당했다(창7:21절). 노아와 그의 식구들만 남았다(창8:15-17절). 그럼 홍수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죄가 관영하며 하나님이 더 이상 인류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창6:5-7절).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노아와 그 식구들만 홍수에서 보존시켜 이들을 통해 새롭게 인류를 이 세상에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결정했다(창6:17-19절). 결국 홍수 심판은 이 세상을 재창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담의 후손들인 옛 인류는 이세상에서 사라졌고 노아의 새로운 인류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생명을 부여 받았다면 홍수 심판에서 보호를 받음으로 노아와 그 후손들은 생명을 새롭게 부여 받았다. 이 둘 사이 차이가 있지만 같은 면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보존된 노아와 그 아들을 하나님은 또 다시 축복해야 했다. 창조 후 하나님이 아담과 그 후손들을 축복했건 것처럼(창1:28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절)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새로운 인류가 출현했고 번성했다(창10장). 그러나 새로운 인류가 홍수 심판에서 구원해 준 창조주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배반했다. 이들은 홍수 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시날 땅에 바벨탑을 세우려 했다. 그 목적은 이랬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3-4절) 새로운 인류는 홍수에서 구원해 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길 거절했다. 그 대신 하늘에 닿을 정도로 아주 높은 탑을 쌓아 인간의 위대성을 하나님 앞에 알리고자 했다. 그렇게 새로운 인류도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이 세상에서 스스로 살 수 있음을 선언하려 했다. 이 점에서 노아의 새 인류도 아담의 옛 인류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인류의 악한 도모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창조주 하나님 없이 살려 했던 아담과 그 후손들의 그것과 정확히 동일했다(창3:5절). 이런 배반의 의미를 가진 바벨탑을 쌓음으로 새로운 인류는 또 다시 사단의 굴레 아래 기꺼이 자신을 맡겼다. 인류에게 종교적 중립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하면 인류는 사단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사건들은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 대신 인간의 통치 또는 인간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피조물 인간의 나쁜 의도를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을 통해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것이었다(창1:26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실현 과정에 있었다. 즉 하나님 나라 신학은 창조 기사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렇게 두 범죄는 내용상 동일하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벨탑 사건은 심각한 의미를 가졌다. 바벨탑을 과학의 바벨탑 같이 상식적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이런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인류는 하나님 앞에 존재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저주하여야 했다. 하나님은 아담을 저주했듯이 새로운 인류를 저주했다. 아담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의 언어를 수많은 언어로 쪼개 흩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함으로 쉽게 단합하여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의 인류는 언어 별로 수많은 부족들로 나뉘었다. 인류는 바벨탑 건설을 중단하고 각 곳으로 흩어졌다(창11:7절). 이 후 곧바로 노아의 장남인 셈의 족보가 기록된다(창11:10-32절). 그리고 그 족보는 아브람과 연결된다. 즉 셈의 혈통이 ‘아브람’까지 이어졌다. 이 족보는 원복음(창3:15절)에서 약속한 앞으로 올 메시아의 혈통적인 계통을 잘 보여준다. 결국 셈의 후손인 아브람이 앞으로 올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위해 선택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갈데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지시하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떠나야 했다(창12:1-3절). 이 믿음의 결단 덕분에 그는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 이렇게 타락 즉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구원 약속(창3:15절)은 아브람에게 이어졌다. 바벨탑 사건으로 새로운 인류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나온 불가피한 결과였다. 바벨탑 사건 전후(前後) 구속사에서 큰 차이가 발견된다. 이 이전까지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상대하여 자신의 구속사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이 이후부터 하나님은 아브람 개인 삶과 인생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구속사를 재출발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부름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또한 획기적(劃期的)인 사건에 속한다. 향후 그는 구원 받은 신자들의 조상이 될 것이다(갈3:29절). 바벨탑을 기점(起點)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선교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전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했다. 그렇게 인류는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에서 한 동안 제외되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석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0-33절) 이렇게 본다면 바벨탑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인류가 하나님을 어떻게 배반했는가를 설명하지만 다른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택해 계속 일할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언어의 흩어짐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다른 한편 인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될 것이다. 홍수 심판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옛 것을 끝내고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는 이중 결과를 가져온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벨탑 사건은 이런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문사회과학적인 의미를 갖는 바벨탑 사건 구속사적인 관점 못지 않게 인문사회과학적인 관점 또한 중요하다. 이 두 관점으로 바벨탑 사건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균형 있는 성경 해석과 아울러 균형 있는 신앙 삶도 가능할 것이다. 바벨탑 사건의 결과 하나의 인류가 언어 별로 그리고 부족 별로 흩어져 이 세상에 살게 되었다. 그럼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인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언어의 흩어짐으로 하나의 인류가 언어 별로 흩어졌다는 단순한 평면적인 사실만으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다름으로 인해 하나의 인류가 전세계로 흩어져 평화롭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해석도 있다. 하나님이 내린 저주 덕분에 인류는 할 수 없이 이 땅 곳곳에 흩어져 살며 하나님이 명했고 인류가 수행해야 할 문화 사명(창1:28절)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고 기독교 교회는 본다. 그러나 이것은 한 면만 본 것이다. 즉 다른 면을 보지 못했다. 바벨탑의 저주는 인류 조상 아담이 타락한 결과 받은 저주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 먹었다(창3:6절).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에게 불순종했다. 여기에 신학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실과를 먹음은 앞으로 인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겠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를 세워 살겠다는 것이다. 이 의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창1:26절)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창조주 하나님 없이 자기들끼리 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했다. 이 점에서 아담의 타락 사건과 바벨탑 사건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은 인류를 저주했다. 이 저주로 인해 아담의 불순종을 통해 인류가 이미 받은 저주의 강도가 더욱 세졌다. 새로운 인류도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사는 것 즉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를 세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격렬하게 체험하여야 했다. 인류가 앞으로 스스로 내리는 선악의 판단은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 방법(思考 方法: way of thinking)에 따라 사는 것을 뜻했다. 선(善)과 악(惡)은 서로 대립적(對立的)이다. 대립적인 이분법에 따라 산다면 인류는 결국 사물(事物)의 한쪽 면으로 늘 치우쳐 살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 인류는 가치와 윤리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 면에서 둘로 나뉘며 적대하게 될 것이다. 이미 원복음(창3:15절)이 이를 예언했다. 인류는 종교적 차원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으로 나뉘며 끝없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 다툼에서 상하는 자들이 생기며 인류 사회는 끝 없이 불행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였다. 이 뿐만 아니었다. 뱀의 후손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고 여인의 후손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즉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윤리와 가치 면에서도 서로 나뉘며 분열할 것이다. 선악의 판단들로 인해 한 집단 안에서도 이해 관계를 달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가정 안에서도 이런 분열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이 결과 인류 사회는 분열과 분당으로 인해 안정과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이분법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영원히 이 우주에서 다툴 것이라는 우주적 이원론(二元論)과 그 결과 선과 악도 끝없이 인류 역사 가운데서 다툴 것이라는 윤리적인 이원론을 낳았다. 창조주 하나님만을 믿는 일원론(一元論)을 견지하는 여인의 후손과 우주적 이원론을 견지하는 뱀의 후손 사이 끝 모를 투쟁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 삶의 방식도 전혀 다르다. 전자(前者)는 종말(終末)을 주장하는 선형적(線形的)인 역사관을 그러나 후자(後者)는 우주와 세계의 영원한 순환(循環)을 주장하는 원형적(圓形的)인 역사관을 지지할 것이다. 악한 신도 선한 신처럼 대등하게 인류는 섬길 것이다. 그렇게 죄와 악행도 정당화된다. 그리고 윤리적인 이원론은 체념적인 운명론을 인류 사회에 번지게 만들 것이다. 악이란 존재도 인류 사회에서 운명처럼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 모두 타락의 결과가 얼마나 인류 사회에 해로운지 잘 설명한다. 또 다른 문제는 인간의 선악 판단이 늘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 사회에 불행을 더욱 가중시킨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100%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나 근거도 늘 부정확하고 그 결과 항상 상대적(相對的)이다.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정해져도 인류 사회는 그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缺如)되어 있지만 남들을 판단하며 정죄(定罪)하여야 한다. 그리고 인류는 자신의 판단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의 이런 내재적(內在的)인 불완전함은 선악의 판단을 불완전하게 만들고 그 결과 인류는 늘 불필요하게 불행을 당하며 살아야 한다. 바벨탑의 저주는 이런 불행을 더 강화시켰다. 바벨탑 사건 이전 하나의 인류는 윤리와 가치라는 정신적인 면에서 서로 나뉘었지만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의 인류는 언어와 종족 별로 나뉘며 육체적으로도 서로 싸워야 했다. 이들 사이 이해 관계가 더욱 치열해 졌다. 이들이 각각 내세우는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들과 서슴없이 싸우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인류 역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들 부족이나 민족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만든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이 다 다르다. 윤리와 가치 면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이들의 가치나 윤리는 늘 상대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며 양보 없이 싸웠다. 이것이 인류 사회에 더 큰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이 명한 생육과 번성과 땅에 충만이라는 문화 사명(창1:28절)은 이런 인류 사회에 의해 더 이상 수행이 불가능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기 부족(部族)이나 민족의 보존을 위해 민족신을 만들고 그 이름으로 다른 부족들과 성전(聖戰: holy war)을 벌였다. 이 때문에 부족들과 민족들 사이 싸움은 더욱 잔혹해졌다. 오늘날도 이슬람을 반대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족이나 다른 민족을 거침 없이 살인해도 용인되는 이슬람 사회가 이를 잘 증명한다. 이런 인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구속사를 위해 어떻게 일할 것인가? 하나님은 많은 민족들 중 하나를 택해 자신의 구속사를 진행시켜야 했다. 그 민족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할 것이다. 이를 위해 아브람이 부름을 받았다(창12:1-3절). 이 선택 때문에 원복음(창3:15절)의 예언처럼 선민 이스라엘은 앞으로 이방인들과 끊임없이 성전(聖戰)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원복음이 예언한 참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를 낳을 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머지 민족들은 서로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거나 막을 것이다. 이 점에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성전은 민족들 간에 벌어지는 전쟁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이를 구별시키기 위해 성경에만 이스라엘의 성전(聖戰)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결론 아담의 불순종과 바벨탑 사건은 모두 창조주와 구원주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叛逆)을 뜻한다. 이 반역의 진정한 내용은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고 인간의 통치를 세우는 것이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숨어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선 사물을 이해하는 통합적인 사고 방식이 가능했지만 인간의 통치 아래선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불가능했다. 이것은 인류 사회가 끊임없이 불행을 당하는 원인과 이유가 되었다. 물론 이분법적 사고도 유익한 면은 있다. 한 사물을 대립하는 서로 다른 두 면으로 보게 만든다. 그렇게 사물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죄의 영향으로 인해 두 극단적인 판단들 중 어느 하나에 머물며 자신과 다른 판단을 멀리하고 미워한다. 시간이 지나며 이 둘을 통합한 새로운 판단이 나오지만 어느 새 이 판단 이외 다른 판단을 또 다시 적대시한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관이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러나 한 사물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두 면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이 둘은 논리적으로 분리되지만 실제적(역사적)으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동전의 한 면을 동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 인류 사회는 논리적인 것을 강제로 분리시켜 한 면만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물론 이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를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인간의 다섯 손가락이 이를 잘 설명한다. 손가락들은 같은 손에 속하여 동일한 방향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위치들은 서로 다르다. 자세히 보면 엄지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과 반대되는 위치에 있다. 이 덕분에 손으로 물건을 쉽게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손은 그 기능을 상실한다. 창조를 통해 인류 사회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같은 공동체에 속했고 그 구성원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위해 존재했다(창1:26-28절). 타락 이전 인류는 같은 배에 탄 운명 공동체였다. 이들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들 중 몇몇이 반대 편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이들은 모두 살았고 단합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며 인류는 서로를 나누었다. 그리고 달리 보는 사람들을 분리시켜 멀리했다. 사실 한 사물을 좀 더 정확하게 보려면 다른 눈들이 필요했다. 한 사물에 다양한 면들이 있다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자신의 처지에 맞게 다르게 보고 판단한다. 서로 다른 판단들은 오히려 사물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달리 설명할 수 있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부분적으로 만지며 다 다르게 코끼리를 설명한다. 틀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많은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진 후 그 부분적인 느낌들을 모아 조립한다면 거의 비슷하게 코끼리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의견들과 판단들은 아주 중요하고 유익하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 따라 언어 별로 나누어진 민족들 사이 이해관계를 위해 서로 싸워야 했다. 인류 사회는 서서히 약육강식의 사회로 바뀌었다(창6:4-5절). 강자(强者)의 판단만이 중요하며 강압적으로 다른 판단들은 무시된다. 이렇게 사물의 극히 작은 부분만 보는 강자에 의해 인류 사회는 다스려졌다. 지도자의 옳은 판단은 인류 사회에 행복을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인류 사회는 함께 고통을 당했다. 이런 통치술이 인류 사회를 오랜 동안 지배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인간 나라의 참 모습이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에 속하는 인류 사회는 달라야 했다. 원복음(창3:15절)이 예언한 대로 앞으로 올 메시아에게로 인류가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복구시킴으로 이분법과 이원론은 극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총을 통해 비로소 인류는 유일한 주권자인 창조주 하나님(롬11:36절)에게도 돌아갈 수 있다. 결국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을 유일한 구원주로 믿게 하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일원론적인 가치와 윤리에 따라 살도록 돕는다.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은 영원히 선하며 의롭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과 행함도 동일하게 언제나 선하고 의롭다. 인간이 보기에 모순된 하나님의 행위와 결정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숨어 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사단이 활동하도록 허용한 기록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목적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사단으로 인해 인류가 타락했다. 그러나 성도는 실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상 복귀시킬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단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위해 일하는 종에 지나지 않음을 믿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사단이 인류를 해하지만 하나님은 그 해악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도록 일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절) 이 성구에 의하면 믿음과 구원의 은총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서 대립적인 이분법은 그 의미를 잃는다. 행복도 불행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둠이 있기에 빛이 더욱 찬란히 빛난다. 고난이 있기에 더욱 구원주를 의지한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모든 것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구원 받은 성도는 대립적인 이원론과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과 바벨탑 사건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하나님의 저주는 오로지 구원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풀어지며 복으로 바뀐다. 이것이 원복음이 약속한 바였다. 성도들은 대립적인 이분법을 논리적인 이분법으로 환원(還元)시키며 사물들을 더 잘 이해한다. 서로 다른 두 면은 같은 사물의 두 면임을 알고 선후(先後)의 개념으로 사물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원은 인문사회과학적인 분야에도 반영되어야 한다. 일원론에 근거를 둔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이 이를 돕는다. 그 결과 성도의 삶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사는 사회 전반에 걸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사는 신자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확대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한 성도가 맡아야 할 소금과 빛의 역할이다(마5:13-16절). 역할을 잘 수행할수록 그만큼 더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 사회에 실현된다. 실현 정도가 높을수록 인간 사회는 서서히 에덴 동산처럼 낙원으로 바뀔 것이다. 결국 이를 위해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한다. 기독교는 세상 정치와 경제에 직접 참여함으로 세상을 개혁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시민인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도록 양육하여 세상으로 보냄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방법은 바로 복음이다. 복음만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모이도록 돕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복음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인간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 정부를 돕는다. 교회와 정부는 동일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을 위해 서로 달리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바벨탑 사건은 인류가 거부한 것을 하나님이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선교 전략을 택하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첫 조치로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 그러므로 그의 소명은 오늘날 기독교에 큰 가르침을 준다. 구원을 받음으로 성도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의무와 책임을 부여 받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기도문처럼(마6:10절) 이 세상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가에 대해선 구속사와 인문사회과학의 도움으로 이미 살폈다. 구원은 세상 과학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는 결코 세상 나라와 결별되지도 않는다. 다만 구약 시대와 달리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나라가 성도들의 기독교 윤리와 가치관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가운데 세워질 뿐이다. 그 결과 세상 나라는 하나님과 부활주 예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런 최종적인 목적을 위해 성도는 구원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부름과 사명을 받는다.
3 no image "모교 유감" 에 대하여 - 감사하며
김종렬
3686 2010-08-20
L 목사님께 모교 유감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저도 깊은 공감과 우려를 합니다. 신령한 분별력을 상실한 목회자는 말세에 마귀의 궤략에 힘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교회에 그런 현상이 만연한 것이 비통한 일입니다. 목사님과 개혁주의에 대해 대화하고 싶은 마음으로 몇 자 적어 봅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20년이 되었고 개척 교회를 시작한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개혁 신학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긍정적으로는 개혁 신학이 내 안에서 적절하게 잘 녹아져 열매를 맺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 5월에 교역자 수양회 주 강사 목사님과 잠깐 대화를 했는데 제가‘목회를 하다보면 개혁주의 신학이 약해지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분은“결코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저는 개혁 신학의 기준을 강조했고 강사 목사님은 개혁 신학이 목회에 녹아들어 결실을 맺는 입장에서 답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골이 있고 그 뼈를 뜨거운 물에 장시간 녹여서 녹인 물을 사람이 마시고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기준이 뼈라면 우리가 마시는 것은 녹인 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의 입장 차이를 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한때 레너드 스윗 목사님 글을 긍정적으로 읽었고 개혁주의 신학으로 평생을 모범적으로 목회하신 존경하는 원로 목사님께 그분의 책 두 권을 선물한 일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내가 그토록 잘못된 책을 선물했는가? 하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죄송한 일입니다. 그러나 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의 분별력과 적용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레너드 목사님의 글 중에“우주적인 예수님”에 대해서 저는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지엽적인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고,“We가 Me”된다는 말에는 성도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면서 동시에 한 지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맛보고 느낀다”는 표현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기에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 이유이고 성령님을 통해 전 인격적으로 가슴으로 삶에서 뜨겁게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나요?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영감이 충만하고 완벽해도 성경만을 읽을 수 없고, 또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의 책만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 많은 날을 보내며 다양한 책을 읽습니다. 저는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영화 스포츠 산책 놀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 섭리와 충만한 지혜로 신앙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리고 삶의 풍요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요즘 예수님 안애서 생과 사에 대해 담대하고, 승과 패에 대해 열정 있으며 - 내가 승리하면 마귀가 패배하니 영광이고 내가 패배해도 주님이 승리하니 기쁨이라 - 십자가와 교회와 천국에 대해 통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개혁신학으로 무장을 했다 해도 성경 해석과 적용에 큰 결핍이 있고 또한 비판적이고 폐쇄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 그런 분을 많이 보았고 심지어 그런 교회도 봤습니다. - 그것도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기본에 충실해야 열매를 거둘 수 있듯이 개혁 신학은 목회자의 기본 정신입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의 의는 세웠을지 모르지만 다른 많은 부분의 결핍으로 인하여 목회의 바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실패가 없지만 저는 심지어 죽음도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옥토 밭에도 세 종류의 열매가 맺힙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든든하게 할 때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을 확실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씨가 밭에 완전히 녹아야 합니다. 개혁 신학이 교회 현장에서 또 나의 삶에서 또 나의 의식 깊은 곳에서 녹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그리고 사람과 소통하는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목회자의 목숨은 하나님의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내가 사는 이유가 사람을 섬기며 기도하며 목숨 바쳐 일 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주신 존귀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서 완전히 녹아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자랑하고 긍지를 가지기보다 그것을 활용하여 잃어 버린 양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의 기준은 참으로 옳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하고 L 목사님이 모교 유감을 통하여 더 알게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더욱 기본을 확인하고 든든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로 타락한 수많은 영혼을 개혁주의 신학을 주신 하나님의 넓고 은혜로운 품으로 인도하고 내 가슴에 품고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2 no image "합신의 가르침만은 변함 없기를" / 내용없음
rpress
4100 2010-08-09
1 no image 분별력의 성숙 방송 매체가 리더해야 한다.
박홍서
3877 2010-06-28
홍수처럼 밀려온 정보의 바다에 빠져 사는 오늘의 수 많은 사람들, 그 많은 정보로 인하여 내 영혼이 파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타락한 이 세상이야 썩고 부패하여 멸망으로 치달려 죽음으로 끝나는 곳이 세상이다. 그런 반면 교회는 물에 빠져 멸망하는 저들을 건져내려 발버둥치는 곳이다. 그리고 교회와 같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곳이 또 하나 있는데 기독교 방송사이다. 기독교 방송은 모든 신자에게 유익하고 또한 고통과 절망속에서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 즉,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간절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곳이다. 절박한 심정은 가난한 마음이요 빈 마음이기에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는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심령이 되기에 부정한 것은 받지 않는다. 위로를 받아야 할 절박한 심정이 다른 정보나 나쁜 지식에 끌리겠는가? 나에게 유익되는 필요한 말씀만 받게 되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교회를 오래 다녀 양심이 굳어졌거나 본래적으로 귀가 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의 영혼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고 단지 말하기 위한 요란한 사람이다.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약 3장 6절에 말씀하셨듯이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정제되지 않은 지식 정보로 공동체나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영적 미숙자들이다. 어느 한 권사를 통해 들은 말이 떠나지 않고 되뇌어 이 글을 작성한다. 어느 목사님이 세미나 강사로 나와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시기하는 목사님들한테, 그러면 교회가 부흥 안되는 것이 성경적이냐? 교회가 부흥되면 질이 나쁘고 교회가 부흥 안되면 질이 좋은 것이냐? 교회를 크게 지면 나쁜 교회고 교회가 작으면 좋은 교회냐?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을 성도들이 할 때는 교회나 자기 영혼에 해악을 주는 말이다. 목회자들도 조심해야 함은 신학적이냐 아니면 목회적 측면이냐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름으로 인하여 상처가 되고 다툼이 되어 교회 전체에 해가 된다. 구분이 안되는 목회자들도 문제가 되는데 하물며 일반 성도들이야 더 .... 모든 사람들은 육신의 나이로 구분 한다. 이것을 간과할 수도 간과해서도 안 된다. 또 신자들에게는 영적 나이가 있고 신앙의 수 많은 단계가 있다. 이것이 경륜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어린아이로 젖을 먹는 미숙한 어린아이가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청년이냐 아니면 성숙한 자로 장성했느냐를 구분해야 한다. 구분이 안되는 지도자나 리더자는 성경 하나님 말씀을 분별함은 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하나님 말씀을 분별해야 신앙의 단계도 분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방송사가 특별히 선별해서 교회의 좋은 모습만이 세상에 비쳐졌으면 좋겠다. 지식정보 매체가 활짝 열린 시대이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하지만, 목회자들끼리 함께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외부로 흘러 나가면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성도들에게는 나쁜 지식으로 교회에 해악을 주고 내면 세계는 곤고해지는 경우가 있다. 반 기독교인들에게는 한국교회의 부정적 모습으로 비쳐져 교회를 허무는 여우가 된다. 그래서 교회나 기독교 방송국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기독교 방송사의 좋은 프로그램들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보여줌으로 반 기독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목회자 세미나는 일반 성도들에게는 영적 유익이 안되는 것이 많다. 신학적이면 영적 미숙아들에게는 소화가 안되어 설사하게 되고, 목회적 측면이라면 목회자의 약점을 발견 누리꾼들의 말장난의 빌미를 준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 신앙이 성숙되지 않았다면 목회자의 약점만 들추려고 한다. 열린 사회라 해서 구별을 시키지 않는다면 교회와 신자의 삶에 해를 주게 된다. 그것은 방송 시청자의 규제와 구별이 없어서이다. 세상은 돈으로 규제를 삼지만 기독교는 돈이 아닌 간단한 양식으로 구별할 수 있다. 세상에도 규제가 있고 듣고 볼 수 있는 등급이 있는데 왜 기독교 방송은 없는가? 초대교회는 다 열어 놓고 시작하지만 오늘 한국교회는 내일을 위해 세밀해야 한다. 종말에 대비해 서로 가르치고 세워주고 이끌어 주는 리더자들이 다 되어야 한다. 그것은 두리뭉실 신앙으로 인도함이 아니라 수 많은 신앙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것을 기독교 방송이 먼저 실천하기 위해 철저한 등급과 규제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은 백성이 되었다고 세상을 잊어버리거나 등질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아래 있다고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속을 다 보이면 안된다. 히스기야가 생을 연장 받았다고 적에게 무기창고를 보여주고 나서 다 빼앗기고 말았다. 영적 전쟁터임을 실감하고 깨어 있어 영적 분별력을 키우며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집으로 비유하면 울타리를 만들고 첨단의 비상 장치들을 장착해 놓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방송 등급을 철저히 만들고 무엇보다 방송사가 깨어 있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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