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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0 20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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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48 2015-01-05
Notice 신문 원고 작성과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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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79 201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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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31 2010-07-23
173 no image 공교회란 말은 틀린 말이다
박인철
3381 2014-04-17
? ?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은 그에게서 나온 만물과 사람 각각에게 들리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그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가 사람에게 주신 감성 - 보고 들으며 느끼는 모든 감각의 지각을 통하여 만물들 각각에게 가장 적절한 이름들을 짓게 하셨다. 그리고 그 이름하여진 만물들의 만사에 적절한 단어를 만들어 표현하게 하셨다. 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언어이다. 말로 하고 말로 전하여지던 것이 사람이 많아지고 흩어지게 되니 말의 전달에 틀림이 없도록 글을 만들어 보전하게 하는 지혜를 주셨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적은 글이므로 우리는 성경을 글이라 하지 않고 말씀이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대로 다른 글로 적거나 전달하는 자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한다. 어떤 보수(?) 신학자는 새사도신경이 많이 잘못되었는데 공교회라 개정한 것은 참 잘되었다 한다. 나라(국가) 라는 개념은 전체 백성이 합의하여 국경을 만들고 왕을 세워 그 통치에 따르는 가장 큰 단일 조직의 개념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하여 하나님이 명하시는 그대로 사사를 통하여 통치를 받던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왕을 거부하고 세상나라들처럼 보이는 사람왕을 요구하여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셔서 사울을 왕으로 하였으나 하나님 왕을 거부한 악에 진노한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이스라엘에 어떻게 내리실 것인가를 아주 극단적인 언어로 말씀하신다. 나라, 혹은 국가란 말은 그 자체가 최고의 공적 기관임을 말한다. 나라의 왕의 지시나 명령으로 모이면 그 집회는 공회이다. 즉 공적 집회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을 왕으로 하여 그의 통치를 받는 나라이다. 그는 왕이시되 그외에는 어떤 자도 견줄 자가 없는 왕 중의 왕이시다. 그의 나라가 나라 중의 나라인 것은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근원이신 존재이며 모든 존재를 그의 법칙에 따라 모으고 흩으시어 만물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에게 전해져 들리는 그의 말은 곧 공법이며 공의로써 그의 나라의 치리의 근간이다. 이땅에서 사람에게 보이는 그의 나라로 교회를 세우셨으며 이 교회는 그만이 왕이시며 그의 말씀을 법으로 하여 그의 통치를 받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나라로서 이땅에서 최고의 통치기관이다. 교회를 통하여 세상 나라의 통치 방법도 알리시고 인간의 문화와 도덕 규범까지도 세상에 전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치게 하고자 하신다. 사국가, 사나라, 사교회 란 말은 없다. 공국가, 공나라, 공교회란 말을 만든다면 참으로 어리석다 할 것이다. 국가. 나라, 교회라는 말 자체가 공적이기 때문이다. 공문서나 특히 나라의 법전이나 의전문에 공국가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작성자는 그 부끄러운 일에 면책의 길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세상을 선도하는 교회가 공교회란 말을 만들어 전례문이나 의식문에 넣었다면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이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성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모두 말하면서도 이렇게 한다. 카톨릭이란 말은 전체가 하나란 말이다. 그래서 구교 로마카톨릭은 전세계는 교회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데 그들은 개별 독립조직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로마교황청(교황)의 지배를 받는 카톨릭세계, 카톨릭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사여탈권, 천국의 입성 여부권까지 가진 사람교황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카톨릭교회란 공교회란 말이 아니고 공동교회, 共同체의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즉 모든 교회는 하나인 하나님나라로서의 같은 보편적 공동체로 사람교황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국가, 나라, 왕이 소집하여 모이는 곳은 당연히 공회이다. 통치자 하나님의 명으로 소집하여 모이는 곳은 당연히 공회이다. 그리고 소집하는 하나님은 악이 없으신 온전히 거룩한 분이시므로 그에 의하여 소집된 집회는 당연히 거룩한 공회이다. 거룩한 공회는 각 지교회들이며 또한 그 지교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보이는 지교회의 보이는 머리로 세우신 노회이며 총회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 통치를 즐겨하는 그의 백성들은 모여 예배할 때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거룩한 공회로서의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공교회란 말은 언어에 대한 몰이치한 감각의 극치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이렇게 새사도신경이 만들어 하나를 둘로 만들어버렸고 새개역성경이 만들어졌고 새통일찬송가가 만들어졌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며 다 제소견대로 다 제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옳다 하며 행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고 하느님, 여러님이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172 no image 시를 올립니다(마 25, 26장)
이상록
2668 2014-04-14
민들레(마 25 · 14~30) 따스한 봄바람 기름진 땅에 찾아오니 하루, 이틀 지나 파릇 파릇 새싹 돋아나네 어느새 노란 꽃잎이 기뻐 춤추며 소망을 노래하며 그윽한 꽃 향기도 바람결에 춤추며 찬양하네 봄날에 민들레 노란 꽃 잎이 노래할 때 숨바꼭질하던 하얀 씨앗들이 솜사탕되어 놀러온 봄바람과 손잡고 온 세상 여행하며 가는 곳 마다 기쁜 소식 품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네. 감격하네(마 25 · 31~46) 주린 자 먹이시고 목마른 이에게 물 주시며 헐벗은 사람 옷 입히시고 병든 이 돌보시며 옥에 갇힌 자에게 찾아오시고 떠도는 나그네에게 자비 베푸시니 그 사랑 감사하여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네 연약하고 죄 많은 악인이 주의 뜻 멀리하며 몸 가는 대로 마음 닿는 대로 살았으나 악인의 길에서 돌이키사 거룩한 삶으로 이끄시니 자비로운 주께 엎드려 통곡하네 주의 사랑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네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자이기에 바닷물보다 많고 하늘보다 높은 주의 사랑에 감격하네 말씀의 향기, 사랑의 향기(마 26 · 6~13) 주님 말씀의 향기 선하신 주의 마음처럼 달콤하네 우매한 자 기억하사 주의 뜻 알리시니 가난한 영혼이 부유해지네 주님 사랑의 향기가 작은 가슴에 가득차니 귀한 금이나 빛나는 보석보다 부드럽게 속삭이는 세상의 유혹보다 살며시 다가오는 욕심의 속삭임보다 주와 함께 걷는 발걸음이 더욱 아름답고 가볍네 회개하오니(마 26 · 17~25) 주를 모르는 체 하며 주를 외면하고 떠나고 세상의 보화를 사랑하여 은 삼십에 주를 넘겨 줄 자 누구일까? 주께서 말씀하시네 주를 외면하며 모른다 하고 세상 유혹과 욕심을 따르는 바로 네가 날마다 주를 버렸다. 오, 주여 ! 회개하오니 용서하소서 두 마음 내려 놓고 이제부터 순종하며 주를 따르게 하소서. 아내 김연희 선교사의 더 많은 시와 선교 소식, 신학생 대상 설교 등이 http://blog.naver.com/sangrlee (네이버 블로그, 기도의 뜰) 에 실려있습니다.
171 no image 찬송가는 왜 4(성)부 노래인가?
박인철
3332 2014-04-12
? 천지창조 목적의 때(앞의 글-삼위하나님과 창조의 세계 참조)가 이르러 기독교가 한창 융성하던 10세기에 로마교회 안에서 앞서가던 헬라찬송을 공부하던 귀도(Guido)가 음의 7계를 확인하고 정리하여 각 7음에 이름을 붙여 도 레 미 파 솔 라 티 (도) 로 하였다. 이로써 도 음이 처음과 나중이 되는 7음계의 3화음의 화성음악으로 급속히 발전되어 교회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온 나라들에 전파되어 그들 생활의 모든 음악이 7음계 클래식음악화 되었다. 이는 이땅의 완전한 빛인 햇빛의 3원빛의 합성으로 모든 빛갈을 만들어 내는 미술이 꽃피는 시대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로 만물에게 주신 원리를 마음껏 활용하는 이땅의 르레상스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는 또한 첫날을 당연히 하나님의 날로 여기며 일주일을 7일로 하는 창조에 온 땅이 순복하는 성3위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가 드러내는 시대에 이르렀다 - 그러나 이 하나님의 영광은 사탄의 꾀임으로 끊임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사람들의 르네상스가 되어졌다. 이렇게 클래식음악 시대가 열리면서 단성음악으로 단선율이던 친송가도 4성부 찬송가로 만들어져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창조의 원리로 힘을 얻어 세상까지 지배하게 된 교회는 예배와 교회의 모든 전례까지도 권력자 사제들의 전유물로 만들어 갔으며 융성했던 예배 회중찬송가 마저도 그들의 전유물로 만들어 예배시간에 사제들만이 찬양가(찬송)를 부르게 하고 그들이 찬송을 마치면 회중은 끝에 아 - 멘 만 하게 하였으며 그나마 찬송가들이 성자들을 찬양하는 노래로 가득하게 되는 교회 암흑기로 교회가 사탄에 거의 삼키운 시대에 이르렀다. 지금 어떤 찬송가들 끝에 붙은 '아 - 멘'은 하나님이 사람이 알아 듣는 음성으로 말씀하시거나 선지자가 대신 말씀하고 또 성가대가 찬양하면 회중은 아 - 멘으로 받던 구약의 초기시대로 돌린 것을 종교개혁으로 다시 회중찬송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끝에 굳이 '아 - 멘'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혹은 가사가 찬송의 내용에는 '아 - 멘' 을 하고 복음의 내용에는 '아-멘' 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현재 찬송가의 구성에도 맞지 않는다. 혹 성가대가 찬송가를 예배찬양곡으로 할 때에는 찬송가의 단조로움에 좀더 색갈을 넣어 마감하기 위해서 음악적으로 종지에 '아 - 멘' 을 만들어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연합으로 통일새찬송가를 만들며 아주 위태로워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모든 곡이 4성부로 되어 있다. 통일찬송가에는 소위 우리음악으로 우리찬송가로 작곡하였다 하여 미개한 5음계 음악으로 작곡해서 억지 화성으로 4부로 만들어 채운 곡들도 꽤 있다. 우리음악? 우리찬송가? 그러면 우리 하나님, 서양 하나님이 따로 있는가? 목청을 높이며 인류는 하나가 되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하나님은 없는 것 같다. 믿음의 선진국들에서는 7을 행운의 숫자라 한다. 신앙의 선대 현인들은 7은 창조주 하나님의 3위와 땅의 네 끝 - 동 서 남 북 - 의 4를 합한 수로 이땅의 완전 수라 하였다. 굳이 남이 말해서가 아니더라도 명백한 3위 하나님의 신앙과 또 온 사방의 하늘과 땅을 그가 창조하셨음에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얻게되는 지식일 것이다. 7일 중에 첫날은 붉은 표시의 날로 이날을 오직 하나님 영광의 날로 성수하는 자들에게 생명과 안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 신앙과 경험으로 알게 하신다. 7빛갈의 햇빛 중에 3원색의 빛은 각각 고유하여 다른 빛의 합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그 ?빨, 초, 파 3원빛으로 나머지 주황, 노랑, 남, 보라 의 4색과 모든 빛갈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안다. 마찬가지로 으뜸3화음은 화성의 기본음으로 모든 클래식 화음 노래의 시작과 종지(끝)는 물론, 화성의 진행이 이 3음의 으뜸화음으로 기초하여 색갈을 더하는 것이다. 모든 노래 중에 합창이 가장 값진 것임은 두말의 필요가 없다. 합창에도 4부합창이 이땅의 완전한 노래인 것이다. 4성부 화성의 값진 의미의 첫째는 3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도 미 솔 (도) 으뜸 3음의 화음인 것이며 두번째의 값진 의미는 남여 4성부는 동서남북에 사(4)방에서 모여온 모든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여 온 자들이 3화음 4성부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려는 최고의 노래이며 그래서 찬송가곡은 4성부의 정석화성법에 적절한가를 따져서 선곡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4성부로 노래하게 되는 구원의 목적이 이땅에 이루어질 때에 지체없이 주께서 재림하시리라! 어른으로 변성이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로는 남여 4성부 3화음의 노래가 안된다. 대한교회는 이력이 일천 하고 그나마 70년대 후반 이후로 스스로 질적 성장을 멈추고 순복음 + 신복음 시험에 걸려 양적 성장에만 매달려 갑자기 1200만 (交인)숫자만 자랑하게 된 한국교회가 주일예배시간에 한곡이라도 회중찬송을 제대로 된 4부성가로 하기란 꿈같은 일이다. 짧은 지면으로 4부합창노래의 회중찬송의 실제 가치와 왜 최고인가를 다 나타내어 말하기는 어렵다. 정신 성장이 갑자기 멈춘 비만증의 어린애 같이 되어버린 한국의 교회들은 그나마 예배자들이 멜로디만이라도 힘차게나 부르면 다행이다. 그나마 멜로디만이라도 찬송가로만 예배하는 교회가 거의 사라져 간다. 성가대가 4부성가 찬양을 하는 교회도 대원이 줄며 그것에 맞추려고 쉬운 3부 찬양곡을 주로 하는 세태다. 소프라노는 노래에 필수인 주멜로디로 도 미 솔 도 맨 위의 도 부분을 가장 높은 톤의 여성이 맡고 앨토는 낮은 톤의 여성부로 미음으로 화음의 안정감의 필수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빼지 않는 음이다. 테너의 솔은 화음의 색채를 밝게 해주는 음이며 아래 도는 화음의 필수인 베이스다. 이 4성부 각 파트의 색갈들로 하나님이 지으신 이땅과 하늘의 곳곳과 그 높고 낮음, 평탄함, 깊음을 나타낸다. 아름다운 여성의 소프라노의 소리는 하나님 솜씨의 아름다움을, 앨토로 평화를, 테너로 그의 높고 크심을, 베이스로 넓고 광대함과 전쟁에 능하신 그의 담대하심을 표현한다 할 것이며 이 4성부가 조화롭게 발성되는 실제의 소리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지으신 모든 만물과 우리에게 현존적, 항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나타냄이라 할 것이다. 모든 만물은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항시적으로 그의 조물주를 찬송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생명이 없는 못생긴 돌들도 물질의 변환, 순환의 법칙으로 그 자리에 있게 하셔서 그곳(땅)이 존재하게 하시며 풀, 나무도 각기 자태를 뽐내며, 각종 새들도 우는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여 하나님은 그것들을 보시며 들으시며 기뻐하시는데 주의 백성으로 살리운 자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소리의 노래는 커녕,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마저도 듣기에 짜증이 날법한 노이즈음악들로 오로지 나, 인간을 위한 노래, 춤으로 채우고 그렇게도 찬송을 싫어하며 부르기에 귀찮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귀를 막고 차라리 돌들의 찬양소리를 들으실 것이란 것이다. 내 앞에서 지절거리는 소리를 그치라. 내가 네 노래소리를 듣지 아니하리라 !
170 no image 하나님과 음악 / 사탄의 음악 / 그리고 악을 제하고 거룩함을 이룬 하늘나라
박인철
3101 2014-04-07
? 1. 거 - 룩 한 시 온 성 - 에 내 가 들 어 가 - 오 - 니 성 - 령 의 숫 - 불 - 로 나 를 깨 끗 - 게 하 사 모 든 악 을 다 제 하고 죄 를 사 해 주 - 시 - 사 주 의 나 라 위 하 - 여 부 름 받 게 하 - 소 - 서 위 노래는 본인이 오랫동안 교회의 남성중창단과 함께 하면서 애창하였던 수많은 곡들 중에서도 애창곡이었다. 평생을 참 정통교회음악인으로 사셨던 고 김두완 선생의 곡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 오거룩하신 주님 / 어지신 목자) 나의 평생에 이보다 멋진 남성중창곡은 없다. 엄숙한 심정을 일으키며 / 남성 음성의 힘이 실리어지는 장엄한 화음의 노래! 문자에 매이고 신령함을 거부하는 요즘 세태의 영으로는 결코 찾기가 쉽지 않은 노래이다. 혹 귀에 들리는 기회가 있다 해도 아무 감각도 없이 그냥 흘려버리기 때문이다. 합신 출신의 어느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에게서 신령이라는 단어 자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세상 끝날이 다가왔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신령하지 못한 것이 죄스러운 것이 아니고 신령만 찾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천사들 중에도 으뜸으로 그 손에 비파와 소고를 들려주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도록 하였던 천사가 하나님의 영화와 그 영광스러운 보좌를 탐내서 하나님의 보좌의 자리에 올라 자기 영광의 노래를 부르려다가 그를 추종하던 천사 1/3과 함께 땅에 쫓겨난 자가 되었다. 이렇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던 악을 다 제하고 거룩한 나라를 이루셨다. 이 땅위에서도 그 뜻을 이루시려고 예수를 보내시었고 마침내 재림하시어 사탄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음부에 가두시고 이 땅에 천년 동안 그의 신부 될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영광의 나라로 통치될 것이다. 아 - 멘 ! 음악의 재능을 받은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려는 악으로 땅에 떨어져서 사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말을 따르면 하나님과 같아지리라는 불순종의 악신으로 아담으로부터 사람들을 꾀어 이 땅의 모든 악이 자기에게 오도록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두 번째, 세번째 시험도 통과하시어 그에게는 본래 악이 없는 하나님에게 오직 순종하는 아들임을 보이셨으며 이로써 사역을 시작하셨다 ! 예수로부터 목회의 사명을 받았다면 그도 당연히 성령을 받고 이 시험을 통과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시험들을 이겨내야 끝내에는 성공하는 하나님의 종이 될 것임에 두말의 여지가 없다. 모든 악을 제하려는 이 시험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은 아니다 할 것이다. 그는 악신에 이끌리어 자기나라로, 자기들의 영광의 나라를 세우는 자들일 뿐이다. 자기교회, 자기나라를 세우는 자들의 악을 분별치 못하고 그를 따르던 자들도 다 함께 멸망하여 마지막 날에는 이 땅에서의 악도 다 제하여지고 거룩한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대로.... 순종 제사 셋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 찬송을 시작하였다. 불순종 제사로 하나님께 대항한 가인의 4대손 라멕은 자기 죄악을 찬송하는 노래를 불렀으며 그 아들 유발은 최초의 악기 - 수금과 퉁소를 잡고 그 아비의 노래를 반주(필자 첨부)하는 자가 되었다. 최초에 하나님이 피조물들의 손에 들려주었던 음악은 이렇게 악을 제하는 과정을 통하여 땅에 떨어진 사탄의 음악으로 가인 - 바벨론 혈통의 음악과 / 여호와의 음악으로 셋 - 다윗 혈통의 음악으로 나뉘어졌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모세는 찬송하고 미리암과 그 일단의 여인들은 (애굽의)리듬악기 북을 치며 춤을 춘 기록이 나온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비를 받아 내려 올 때에 아론의 허락을 받은 그 일단의 무리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광란의 신나는 리듬음악으로 찬양한다. 이 신내리라고 추는 신나는 음악의 악기들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거나 그대로 만든 우상찬양의 악기들임에 틀림없다. 이 광란의 음악소리는 모세에게서와 또 시내산 40일의 경건과 신령의 훈련을 받은 순전한 여호수아에게는 신령하지 못한 싸우는 소리로 들리어 놀래서 모세에게 고한다. 그러나 애굽을 40년간 경험한 모세는 " 내가 듣기에는 노래소리로다" 하여 그 소리가 애굽의 신내리라는 우상음악 소리임을 알고 화가 차올라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부모가 옆방 아이들이 심하게 싸우는 소리만 듣고도 화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신령으로 거듭난 이들에게는 싸우는 소리로 들리는 이런 노이즈음악들이 사탄의 영으로 오는 음악인가, 아니면 신령함으로 오는 음악인가? 신령한 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죽은 영으로 사탄(악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가고 처음 부리신 악신은 다윗이 수금을 탈 때에 떠나갔으나 그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악신을 힘있게 내리시니 다윗이 다시 수금을 탈 때에는 오히려 창을 던져 해하려 하였다. 악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자는 하나님의 신령한 음악은 곧 자기에게서 악신을 빼앗아 가는 적으로 알고 해하려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망령된 음악을 하는 자(아이)들과 옹호하는 이들이 그 음악을 질책하는 이들을 억누르며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으로 다시 살리움을 받지 못한 자는 신령한 음악을 알 수 없다. 또 악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자는 하나님의 음악을 파괴시킨다. 아버지 다윗의 믿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 지혜를 구한 솔로몬은 자기 생각의 지혜로 나라를 굳건히 하려고 세상의 온갖 우상나라들과 연합하므로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에 그들의 온갖 우상을 들여와서 그 우상들에게 찬양하고 제사하는 온갖 잡스런 춤과 음악들이 넘쳐나게 하여 하나님나라와 성전을 더렵혔다. 그리고 자신은 저주 받아 약속받은 장수도 못했고 이스라엘은 망하는 길로 가게 되었다. 나단 선지자와 갓 선견자로 다윗에게 지시되어 만들어진 ‘여호와의 악기’ ‘다윗의 악기’들은 솔로몬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신나는 악기들과 그 소리들로 이스라엘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망했다. 요즘 교회와 교회당들...... 심지어 주일예배에서까지 온갖 망령된 짓거리와 그 소리들로 넘쳐난다. 곧 망한다. 아니, 이미 망한 것이다. 몽골의 고산 어느 종족 중에는 글이 없으며 모든 교육을 노래로써 전수하는 종족이 있다. 선교사가 처음에 고심하다가 성경을 노래로써 가르치니 모두 금방 외우고 특히 아이들이 쉽게 복음화가 된다. 수십년 불러서 그냥 외워져서 부르게 된 하나님의 찬송가의 가사들 중에 별 뜻도 아닌 것을 찬송가를 외워서는 단 한 장도 불러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무슨 국문학자들에게 의지하여 한자씩 다 고치게 하여 찬송가책을 보면서도 외워진대로 틀리게? 부르게 하는 이것이 신령의 하나님으로 하나되게 하는 일인가? 아니면 악신으로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게 하는 사탄의 일인가? 사람이 글이나 악보에 매이면 생명을 잃는다. 말은 소리이며 살아 있는 생명체에 의하여 톤과 리듬을 수반하는 생명의 소리이다. 노래는 생명 있는 자가 하는 것이며 글이나 악보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성경은 사람의 귀나 마음에 들려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를 적은 것이며 그래서 번역하거나 전하는 자가 일점일획이라도 바꾸면 망한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전하여 가르치신 신령한 소리들은 다시 전하거나 받는 자들에 의하여 신령한 생명의 소리로 재생되야 하는 것이다. 신령한 소리의 음악에 실린 노래만이 신령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악신의 소리의 음악에 실린 노래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너희들 멋대로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신31:19 - 32:47
169 no image 트로트 가수 목사님에 대해...(2)
장창수
3089 2014-04-05
168 no image 트로트 가수 목사님에 대해…(1)
장창수
3654 2014-04-03
얼마 전 목회자 한 분이 방송의 가요 경연장에서 “참말이야”라는 노래를 트로트 식으로 맛깔 나게 불렀다. 노래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심사위원의 요청으로 그는 축복 기도까지 했다. 복음이 담긴 그의 트로트를 들은 이들의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세계 최초의 트로트 가수 목사의 출현을 알렸다. 하루 아침에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에 대한 논란이 목회자와 신자들 사이 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며 찬성하지만 심하게 반대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가 마음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가 목회자라면 이런저런 것을 다 생각하고 참가했을 것이다. 그가 불편을 느껴도 생각해 볼 점들이 있다. 그리고 싫든 좋든 그는 이미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가 한국 교회에 미칠 영향은 작지 않으리라! 그래서 더더욱 그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정통 찬송가와 복음 성가 사이 관계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찬송가는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 가요 식은 아니 되는가?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분명한 원칙은 있다. 찬송가는 예배 중 부르는 것으로 거룩성을 보여야 한다. 내용은 물론 리듬과 가락에서 예배의 찬송가들은 술집이나 바에서 부르는 유행가들과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들리는 가락이나 리듬으로 본다면 예배당인지 아니면 술집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예배도 거룩성 또는 구별성을 상실한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예배 중 찬송가는 거룩성을 띠어야 한다. 찬양을 받을 대상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양의 내용은 성경에서 나오며 신학적이다. 이 때문에 찬송가와 대중 가요 사이 작곡 동기와 목적 면에서 하늘과 땅 사이 만큼 차이가 난다. 대중 가요는 듣는 사람과 그의 감정을 고려한다. 가수나 청중의 감정선을 최대한 자극해서 기분을 끌어올리는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찬송가는 그런 작곡 기법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도록 유도하거나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도록 또는 신자의 마음을 주님께 기꺼이 헌신하도록 인도한다. 이 때문에 찬송가를 부를 때는 경건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대중 가요식 복음 성가를 부를 때 그만 몸이 들썩거리고 발을 구르게 된다. 대중 가요는 찬양의 대상과 내용보다 노래 부르는 자의 마음과 기분을 먼저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맞는다면 대중 가요식의 복음 성가는 예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흔히 대중 가요의 리듬과 가락은 반복적이며 지극히 자극적이다. 이 때문에 가사의 내용은 부르는 자나 듣는 자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리듬과 가락에 따라 몸을 맡기며 흥얼대게 되어있다. 이런 류의 복음 성가를 듣노라면 교회는 술집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대중 가요의 성격을 띤 복음 성가의 단점이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일반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나이든 장년 성도들을 위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뽕짝이나 트로트 식 복음 성가가 참으로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괘변이다.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룩하지 않은 수단과 방법도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 이런 식의 주장이 된다.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며 비상식적 주장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 양적 교회 성장론이 그렇게 주장한다. 알고 보면 공산주의자들도 그렇게 주장한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된다. 이런 주장은 상식적이지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다. 이런 마음 자세로 목회자가 성경의 내용을 트로트 식으로 작곡하여 직접 부른다해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목회자는 누구보다 먼저 성경 말씀에 준해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 앞에서 받겠다고 언급했다. 이것도 목회자가 해야 할 말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부활한 예수님이 세운 공교회의 충고나 권면을 전혀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목회자 스스로 교회를 무너트리겠다는 것이다. 공인인 목회자는 말을 경솔하게 해선 안 된다. 만약 그가 자신의 입장을 계속 고집한다면 거룩한 목적을 위해 거룩하지 않은 방법과 수단도 얼마든지 동원될 수 있다고 신자들을 가르치는 식이 될 것이다. 정말 곤란하다. 그럼 다음 시편의 성구는 무엇을 뜻하는가?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시33:3절) 여기 ‘공교히’는 ‘모든 기술을 다해’란 뜻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또는 신자들이 온 마음을 다해 주를 앙망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찬양자나 청중의 기분을 한껏 흥분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공교히’라는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찬양의 목적을 충족시키도록 모든 고상한 작곡 방법을 동원하란 뜻이다. 이렇게 찬송가의 작곡 동기와 목적은 대중 가요의 그것들과 완전히 다르다. 인간에게 흥분과 감동을 주려는 동기와 목적을 띤 대중 가요식 복음 성가는 예배 찬송으론 정말 적합하지 않다. 히브리 인들의 전통적 찬양은 리듬과 가락에서 단순하다. 찬양의 가사 내용이 찬양자나 청중의 마음에 즉시 와 닿도록 말이다. 그러나 대중 가요 식의 찬송은 그렇지 못하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귀신을 초청하려는 무당은 계속 반복되는 강한 리듬과 빠른 템포에 맞춰 몰아지경에 이르려 한다. 그들의 음악은 주로 이런 목적을 띤다. 그리고 한국의 '한' 문화에 따라 마음에 맺힌 한을 풀듯이 열심히 춤추고 노래한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는 무당의 초혼의식과는 완전히 다르고 찬양의 중심과 대상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리고 교회의 찬송은 예배 중 선포된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다. 말씀을 통해 전해진 진리가 머리와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 여기서 모든 치유가 가능하다. 그 결과 경건한 자세로 주를 찬양하게 된다. 물론 이를 위해 강대상의 설교가 살아 있어야 한다. 은혜로운 설교를 들은 청중은 저절로 주님을 찬양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교회 찬양의 성경적 원리이다. 말씀이 찬양의 원인이라면 찬양은 말씀의 반응으로써 결과이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제사에선 노래와 춤이 먼저이다. 반복되는 리듬과 자극적 가락에 맞춰 춤 춘다. 그들에겐 진리를 전할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흥분을 유도해야 한다. 즉 감정적 카타르시스가 제일 중요하다. 이것이 이교와 기독교 예배 사이 차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핀다면 교회가 대중가요 식의 찬송가나 복음 성가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목적을 들먹이며 수단을 정당화시키려는 주장은 지극히 성경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더더구나 이교도들이 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교회와 예배는 거룩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거룩성을 포기하려는 자세는 자신의 구원을 값싸게 취급하는 것과 같다. 목회자와 성도는 이런 자세를 버려야 한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존재로 본다면 말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9556096
167 no image 현대 문명의 붕괴를 막는 방법
장창수
2553 2014-04-01
현대 문명의 붕괴를 막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1인당 자원 소비가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감소하고 자원이 합리적으로공 정하게 배분되면 문명의 붕괴는 피할 수 있고 인구도 평형 상태에 도달할수 있을 것" ? 학자들의 이런 충고는 창세기의 다음 성구를 회상시킨다.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절) ? 인류가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자연을 잘 관리하고 형평성있게 배분하여 인류가 골고루 땅 끝까지 퍼져 살도록 하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 만명 분의 땅을 소유하는 것을 성경은 금한다. ? 이런 일을 막는 것은 인류 사회의 몫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본을 남겼다. ?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족 단위로 골고루 땅을 분배했다.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원의 균등한 분배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실현되었다. 분배 받은 기업은 이스라엘의 시민됨이란 정치적 의미도 갖는다. ? 시간이 지나며 선민 사회에서도 자원 분배에 왜곡이 생겼다. 이를 수정하려고 희년 제도가 하나님에 의해 명해졌다. ?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기며 이 명령을 안 지키자 자원 분배가 왜곡되고 선민 사회도 부패해졌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 시킨 원인이었다. ?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원인이 에스겔에 이렇게 기록된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겔16:49-50절) 1917년 발생한 공산주의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하루 아침에 망했다. 이 당시 러시아 정교회가 소유한 토지가 전체 러시아의 1/3이었다고 한다. 자원 분배에 왜곡으로 인해 인민의 고통이 심했다. 제정 러시아는 하루 아침에 유신론 국가에서 무신론 나라로 전락했다. 공산주의 혁명 후 레닌은 토지 분배를 약속했지만 인민을 집단 농장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토지는 나라의 것이었고 인민은 새로운 노예였다. 이런 자원 분배의 왜곡은 70년 동안 쏘련을 약화시켰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도 자원의 불공정한 분배에 있었다. 이씨 조선이 망한 이유도 그렇게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양반들이 지나치게 많이 토지를 소유하고 백성은 늘 수탈을 당하고... 나라의 국력과 민족의 결집력이 떨어졌다. 외부의 침략에 쉽게 무너지기기 마련이다. ? 이런 사회적 현상을 보고 오늘날 학자들이 자원의 분배 관점에서 재진술한다. 엘리트들의 절제를 통해 자원이 형평성있게 분배된다면 현대 문명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 학자들의 입을 통해 학문적으로 설명된다.? 그럼 신앙 삶이란 무엇인가? ? 자원의 균등한 배분이 실현되도록 신자들이 각 분야에서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기독교 윤리이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라고 말했다. 그 역할을 어떻게 하는가를 사도 바울이 윤리 부분애서 자세히 설명한다. ? ?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신학에는 이런 기독교 윤리학이 없다. 윤리학이 없는 신학은 성화가 없는 칭의와 똑 같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73807357 문화 명령의 사회과학적 의미 ) ?기독교 신학은 신국론을 중심으로 기독교 윤리학을 세워야 한다. ?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03/30/20140330002069.html?OutUrl=Zum “현대문명 수십년 내 붕괴한다” www.segye.com 인류의 현대문명이 빈부격차 심화로 인한 경제 불안정과 자원 고갈로 향후 수십년내 붕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인디펜던트 등 영국 언론은 수학자들이 이론적 모델
166 no image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장창수
3105 2014-04-01
사복음서 묵상(126) ? 하나님 나라와 교회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이다. 이 때문에 마태복음에선 하나님 나라가 천국으로 소개된다. 유대인들은 앞으로 올 메시아가 세울 왕국은 구약 시대의 다윗 왕국과 같은 지상 나라라고 믿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기대와는 달리 메시아인 예수님이 세울 제 2의 다윗 왕국이란 지상 나라가 아닌 천국이라고 주장한다. 메시아가 세울 제 2의 다윗 왕국이 땅의 나라와 같다면 그 나라 백성은 이방 나라 백성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땅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들에 의해 흔들리기 때문이다. 땅의 나라의 행복은 일시적이다. 예수님에 의해 제 2의 다윗 왕국은 천국으로 즉 하나님 나라로 대체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것들에 좌우되지 않는 완전한 낙원이다. 이런 나라가 있다면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의 시대부터 사람들은 그리로 침입할 수 있다(눅16:16절). 그러나 문제는 천국이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44절) 13장에서 밭은 세상을 가리킨다(13:38절). 천국을 알려주는 복음은 이 세상에서 만인에게 전해지지만 천국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지 않는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다. 누가 보화를 찾을 수 있는가? 비유 형식으로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계시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 11-13절) 이사야 시대 비슷한 예언(6:9-10절)이 이미 주어졌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절) 결국 유기자는 천국 복음을 들어도 듣는 귀가 없어(마13:9절) 못 알아듣는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피택자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이란 보화를 찾고 얻어 맘껏 누릴 것이다. 여기 보화는 너무나 귀하다. 발견자가 소유를 모두 팔아 보화를 감추고 있는 밭을 살 정도이다. 물론 이웃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고 조롱한다. 황량해서 전혀 쓸모 없는 밭을 샀다고 말이다. 그러나 밭을 산 자는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 혼자 기뻐하며 천국을 즐긴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는 천국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남긴다. 천국은 이 세상이란 밭에 감추어진 현재적 실체이다. 하나님 나라는 가격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보화 같다. 보이지 않지만 발견자는 지금 이곳에서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와 같기 때문이다. 보화를 감춘 밭을 산 주인은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자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거지라고 말하며 조롱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가장 귀한 보화를 소유했기에 마냥 그는 행복하다. 믿음으로만 가능한 행복과 기쁨이다. 이 비유는 왠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지금까지 가장 귀한 보화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값어치를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바보다. 천국이란 보화 이외 것들을 찾으려고 날마다 헛되이 애 쓴다. 자기 집이 서 있는 땅 밑에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원석이 감추어진 것도 모른 체 먼 나라로 다이아몬드를 구하려 간 어리석은 장사꾼 같다. 교회와 신자 그리고 목회자들이 이 어리석은 장사꾼과 같지 않은가? 천국이란 보화를 이미 소유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회를 외형적으로 화려하게 지어 자랑하려 한다. 진짜 모든 것을 소유한 신자들이 왜 그리도 어리석은 일에 헛되이 몰두하는지? 중세 유럽 교회가 그랬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그렇다. 교회는 예수님이 비유로 설명하는 천국이란 보화의 값어치를 전혀 모른다. 사람들이 감추인 보화인 천국을 찾아 기뻐하도록 돕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의 사명인데 이를 모른 체 사람들이 천국이란 보화를 찾는 것을 오히려 방해한다. 이 점에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다(마23:13절). 그럴수록 목회자와 신자들은 영적으로 굶주린다. 교회는 화려한데 신자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다른 것들을 찾아 만족하려고 한다. 이것은 교회와 신자의 타락 결과이다. 예레미야가 이미 말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절) 천국 이외 것을 찾는 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천국을 이 세상에 출발시켰고 천국의 왕이기 때문이다. 보화 같은 천국을 소유한다면 진실로 성도는 늘 행복하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이 행복을 대체 못한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천국이란 보화를 소유하도록 돕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의 할 일이 아닌가? 그러면 신자들의 자살율도 낮출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에 그리 분주한지? 결국 저축하지 못할 웅덩이만 열심히 파는 어리석은 자로 하나님 앞에 드러날 것이다. 우린 사복음서와 그 가르침을 너무나 모른다. 사복음서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이다. ? 참조: 하나님 나라와 교회 http://blog.naver.com/rassvet/40207890369
165 no image 구속사가 아닌 신국사
장창수
2952 2014-04-01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12)/창세기 묵상(96) ? 구속사가 아닌 신국사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는 하나님이 인류의 구속을 위해 세속사(世俗史: secular history)에서 어떻게 일했는가를 진술한다. 이 점에서 성경은 세속사에서 구속사만 기록한다. 그러나 구속사는 성경이 기록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기엔 부적합한 신학 용어이다. 구속이란 이미 타락과 그 결과를 전제한다. 구속사가 성경의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되는 이유이다. 구속사는 창세기 3장 이전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한다. 이것이 이 신학 용어의 단점이다. 구속사란 용어가 신국사(神國史: History of God’s kingdom)라는 용어로 바뀌어야 할 이유이다. 신국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지를 설명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하나님 나라라는 신학적 용어를 올바로 배워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나라 또는 땅의 나라가 아니다. 지정학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다. 우선 하나님은 영으로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처럼 분명히 실재한다. 그럼 하나님의 통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말씀과 성령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계시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령은 이 말씀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도록 돕는 초자연적 능력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자신의 뜻과 계획 그리고 의지를 보였고 아들은 이 모든 것을 역사상 성취시킬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받았다(요3:34-35절). 신자들이 아들에게 순종한다면 그를 보낸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36절). 이 때 성령은 하늘에 속한 지혜, 지식과 능력 등등 은사들을 제공하여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과 백성)로 살도록 돕는다. 이렇게 신자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실현된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당연히 임한다. 성경이 정의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갈 천국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 얼마든지 활동하는 실체이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8980685 )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불완전한 인간이 통치하는 땅의 나라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인간 나라에 속한 백성은 늘 행복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은 영원히 행복하다. 이 행복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덕분이며 또한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들과 곧 사라질 것들로 구성된 세상 것들에 의해 절대로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 덕분에 신자들은 이 지상에서 이미 천국의 기쁨과 평화를 맛볼 수 있다(롬14:17절). 이 세상에서 이를 미리 맛본 신자들만 승리자로 드러날 것이다. 바로 이런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성경의 창조기사(창1-2장)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창1:26-28절)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참여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는 것이다. 인간의 참여가 없다면 하나님 나라는 절대로 세워질 수 없다. 조건은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창2:17절)에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건설은 인류의 순종 여부에 달렸다. 인간이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이 세상에서 가능할 것이다. 에덴 동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행위가 시간과 공간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도 마찬 가지이다. 성경의 초월적 성격의 하나님 나라는 얼마든지 지금도 이 세상에 역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이해돼지 말아야 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다. 그의 불순종은 아담과 그 후손 인류가 하나님 나라 대신 자신의 나라 즉 인간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불순종한 인류의 수가 증가할수록 그 만큼 더 인간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확장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계획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 계획과 목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타락하자마자 곧 하나님은 메시아를 약속했다(창3:15절). 이를 원복음이라고 부른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7457424) 타락 후 하나의 인류는 둘로 나뉠 것이다. 메시아는 여인의 씨에서 출현할 것이다. 죽은 아벨 대신 출생한 셋이 여인의 씨의 조상이 되었다(창5장). 셋과 그의 후손은 원복음을 믿고 소망하며 세상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셋의 후손은 사람의 딸들을 취해 연혼했다(창6장). 연혼은 원복음의 약속을 믿지도 소망하지도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나님은 여인의 씨에 속하는 노아와 그 식구들을 재외하고 모두 홍수 심판으로 멸했다(창7-8장). 홍수 후 새 인류가 새롭게 생육하고 번성하기 시작했다(창10장). 그러자 시날에 바벨탑을 세워 새 인류는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을 거부했다. 하나님은 언어를 흩음으로 민족별로 전 세계에 흩어지도록 징계했다(창11장). 얼마 지나 하나님은 아브람을 택해 불러(창12:1-3절) 그와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님은 그곳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그의 개인적 소명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에서 흘러 나오는 깊은 경륜이 감추어져 있었다. 하나님 자신이 이를 계시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8-19절)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들도 이런 신국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시편 105편은 아브람부터 출애굽까지 일들을 해석해 준다. 시편 첫 부분에 나머지 성구들을 해석하도록 돕는 중요한 성구가 있다. “그는 그 언약 곧 천 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창105:8-11절) 그 후 발생한 각종 사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된다(19, 28, 42절). 그리고 마지막 성구에 하나님이 은총을 베푼 목적이 이렇게 기록된다.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105:44-45절)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곧 가나안에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을 뜻한다. 마침내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가나안에 다윗 왕국이 세워졌다.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와 달리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였다. 결국 다윗 왕국은 구약 시대 지상 나라 형태로 실현된 하나님 나라였다. 원복음이 약속한 모든 것이 구약 시대 일단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다윗 왕국은 원형을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원형을 위해 모형은 사라져야 했다. 솔로몬부터 다윗의 후손 왕들이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들처럼 인간의 나라로 서서히 바뀌었다. 다윗 왕국은 남북 왕조로 분열된 후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두 멸망 당했다. 하나님은 멸망 전후 그리고 멸망 과정 중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을 보내 선민의 멸망과 아울러 새로운 이스라엘의 건설을 예언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성육신 해야 할 이유는 두 가지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아들의 성육신을 이미 작정했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 결과 그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다. 이들을 구속하기 위해서도 아들의 성육신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 일에 하나님 나라가 구속보다 당연히 앞서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다.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왔지만 목적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그가 천국의 도래를 선포한 이유였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창1:26-28절)은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 강림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거급나며(요3:1-16절)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8866447 ) 마찬 가지로 복음(마13:18-23절)과 천국의 아들들(마13:36-43절)인 신자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 곳곳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선교 사명(마28:18-20절)의 수행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겨냥한 문화 사명(창1:28절)의 수행도 저절로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창조 목적이 완전히 성취될 것을 예언한다(20-22장).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2-4절)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속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다. 창세기의 창조기사(창1-2장)는 물론 타락기사(창3장)도 결국 그렇게 증언한다. 원복음이 약속한 구속(창3:15절)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할 뿐 목적 자체가 아니다. 그리고 구속사라는 신학 용어 자체가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의 결과라면 신국사는 히브리 사고에 따른 성경 용어이다. 이제 기독교 신학은 구속사를 신국사라는 새로운 신학 용어로 대체시켜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9115440
164 no image 마태복음 13장과 25장의 천국 비유들
장창수
4406 2014-03-24
기독교 신학을 다시 생각한다(22)/사복음서 묵상(125) ? 마태복음 13장과 25장의 천국 비유들 천국 또는 하늘 나라의 반대말은 땅의 나라이다. 전자의 나라는 초월적, 영구적 그리고 불변적이라면 후자의 나라는 내재적, 일시적 그리고 변화적이다. 천국은 땅의 나라와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의 출현 전 천국은 인류 역사에 없었고 땅의 나라만 있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출현하자 천국의 도래가 선언되었다(마3:2, 4:17절). 영인 하나님이 보이는 세상을 창조함으로 자신을 보여주었다.(창1-2장). 마찬 가지로 초월적인 천국이 보이는 세상에 도래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 못지 않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그가 직접 통치한다면 그의 나라는 땅의 나라와 달리 완전할 것이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며 천국의 도래를 선언한 데에는 이런 의미가 숨어있었다. 그의 천국 복음을 듣는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들은 구약에서 예언하고 약속한 두 번째 다윗 왕국은 지상 나라의 형태를 취할 것으로 믿었다. 식민 통치하는 로마 제국을 무너트리고 구약의 다윗 왕국처럼 이방 나라를 통치할 그런 막강한 나라를 기대했다. 이 기대는 전혀 잘못이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요3:1-16절)가 이를 잘 증명한다. 예수님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혈통, 육정 그리고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요1:12-13절). 육으로 난 자는 지상 나라에서만 살 수 있다.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나 천국은 혈과 육에 의존한 나라가 아닌 구속에 근거를 둔 나라이기 때문이다(요3:14-16절). 예수님은 공생애 중반(마13장)과 말기(마25장) 제자들에게 비유들을 통해 천국 비밀을 알려 주었다. 두 장의 비유들은 천국이 주제란 점에서 동일하지만 구속사적 관점과 내용 면에서 차이가 난다. 13장은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으로 출발한 초월적인 천국의 현재성을 주로 설명한다면 25장은 죽음, 부활과 승천을 바로 앞에 두고 천국의 미래성이 주로 강조된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이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의 실재와 성장과 긴밀히 연결됨을 줄곧 증언한다. 13장의 첫째 비유(18-23절)와 둘째 비유(37-42절)는 인자인 예수님이 씨를 뿌린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첫째에선 천국 복음이란 씨가 그러나 둘째에선 천국의 아들들이란 좋은 씨가 이 세상을 상징하는 밭에 각각 뿌려진다. 천국은 복음과 중생된 신자들에 의해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을 계시한다. 물론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는 저항과 반대를 만난다. 그러나 30배, 60배와 100배라는 기적적 비율로 성장할 것이다. 제자들은 이를 확신하며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다음 겨자씨 비유(31-32절)와 누룩 비유(33절)는 천국의 초자연적 생명력과 성장력을 가르친다. 처음의 초라한 출발과 마지막의 화려한 결과가 극적으로 대조된다. 제자들은 이를 믿고 확신하며 천국 복음 운동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두 비유들 즉 밭에 감추어진 보화(44절)와 진주 장사(45-46절)는 초라하게 출발한 천국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값어치를 증언한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천국이란 보화를 반드시 얻고 보존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천국이란 보화는 누구에게나 그 소재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물 비유(47-50절)가 소개된다. 세상 끝에 택자와 유기자를 가르는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마지막 때 가라지가 뽑히듯이 뱀의 씨인 유기자들이 드러날 것이다. 제자들은 마지막 승리를 확신하며 어떤 반대나 저항을 만나도 굴하지 않고 참음과 인내로 천국 복음을 계속 전해야 할 것이다. 이 비유들은 천국을 현재적 실체로 설명하며 천국의 내용, 성격과 모습이 계시된다. 죽어서 들어갈 천당이 아니란 뜻이다. 제자들은 천국의 현재성을 알고 기꺼이 수고하고 헌신해야 할 것이다. 13장의 비유들은 제자들에게 천국의 놀라운 비밀들을 알려준다. 결국 천국 복음과 천국의 아들들이 없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절대로 세워질 수도 그리고 확장될 수도 없다. 기독교 신학과 교회는 복음과 사람에 지대한 관심을 두어야 한다. 여기 천국 복음이란 결국 예수님이 성취할 인류의 구속에 관한 복된 소식이라면 천국의 아들들은 이 복음을 듣고 믿어 중생한 신자들이다(마28:18-20절). 이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그 만큼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더 확장될 것이다(창1:26-28절). 25장은 예수님에게 곧 일어난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과 멀리 재림까지 내다보며 비유 셋이 기록된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천국이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를 그리고 이 때까지 어떻게 천국이 이 세상에서 세워지고 확장될 것인가를 가르친다. 이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 즉 교회는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또한 가르친다. 달리 말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면 인류의 죄값이 지불되며 죄인은 중생된 후 천국의 시민이 될 것이다. 그 후 천국의 시민으로서 예수님의 재림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는 초재림 사이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가르친다(1-13절). 인간의 의지나 지혜가 아닌 성령에 의존하는 신앙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달란트 비유(14-30절)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은사에 따라 맡긴 사명을 충성스럽게 수행할 것을 가르친다. 이 비유에서 신자는 이 땅의 나그네라는 식의 소극적/비관적 설명은 전혀 없다. 소금과 빛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31-45절)는 이웃 사랑이라는 윤리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수단이면서 동시에 택자와 유기자를 가르는 심판 기준이 될 것을 계시한다. 13장의 천국 비유들은 예수님이 출발시킨 천국을 신자들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설명한다면 25장의 천국 비유들은 천국의 확장을 위해 교회와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놀랍게도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가 13장에 소개된 천국을 위해 25장이 설명하는 방법들로 사명을 잘 수행했다고 기록한다. 반면 사도들의 서신들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내용을 신국론과 세 분야들로 나누어 교리적으로 잘 해설한다. 교회와 신자들은 성령 충만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며(열 처녀 비유) 성령의 은사들로 무장한 후 맡은 사명을 수행하고(달란트 비유) 그 결과 성령의 열매인 윤리적 열매(양과 염소의 비유)를 맺어야 한다. 천국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13장과 25장의 비유들은 창조기사(창1-2장)가 목적하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위의 세 방법으로 문화사명(창1:28절)을 수행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참조: 신앙, 윤리와 과학 http://blog.naver.com/rassvet/40206159680 ) 결론적으로 13장의 천국 비유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그러나 25장의 천국 비유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거의 끝나갈 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각각 계시한다. 이 모두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목적을 띤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과 교회는 이 두 장에서 소개되는 하나님 나라에 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천국의 미래성만 아니라 현재성을 교회는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신국론은 모든 신학의 중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163 no image 하나님 나라와 예수
장창수
2876 2014-03-22
기독교 신학을 다시 생각한다(20)/사복음서 묵상(123) ? 하나님 나라와 예수 기독교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돼야 한다.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는 ‘영’으로 무소부재한 신(神)이다. 이 점에서 지정학적 개념으로 이해되는 지상 나라나 인간의 나라와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자유주의 신학자의 주장과 달리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함께 이미 이 지상에 출발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창조로부터 이미 이 세상에 존재했다. 이 때 하나님 나라는 내용과 성격 면에서 우주적 또는 보편적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특별한 하나님 나라를 원했다. 이 나라는 자신의 피조물 인간의 참여를 통해 이 세상에 실현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 (창1:26-28절).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창3장) 이 목적은 일단 실패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원복음(창3:15절)으로 앞으로 올 메시아를 약속했다. 메시아는 여인의 씨로 분명히 인간이다. 그러나 뱀으로 상징된 사단을 물리칠 인간이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된다는 예언이 원복음에 감추어져 있다. 아담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복음은 구속을 약속했지만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목적했다. 원복음이 약속한 메시아는 구속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왕일 것이다. 그의 구속으로 죄인 인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원복음은 구원론이 아닌 신국론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의 주관심사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계획 그리고 그것의 성취내지 완성에 있다. 타락기사(창3장)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을 잠시 지연시킨 등외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타락 후 에덴을 떠난 아담과 그 후손은 원복음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소망을 포기하고 사람의 딸들을 취해 연혼했다(창6장). 메시아의 구속을 무시한 인류는 하나님 앞에 멸망하는 짐승과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식구들만 제외시키고 홍수 심판으로 옛 인류를 모두 멸망 시켰다(창7-8장). 하나님은 창조 목적과 계획 그리고 원복음의 약속을 위해 앞으로 올 메시아의 혈통적 조상인 노아(창6:8절)와 셈(창11:10절)을 홍수 심판에서 보존했다. 새로운 인류가 시날 평지에서 번성하자(창10장) 바벨탑을 쌓아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 여호와를 또 다시 배반했다(창11장).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택해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로 했다(창12:1-3절). 그의 소명도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하나님의 원대한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애굽에서 민족으로 번성한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 광야 40년 삶, 정복전, 사사 시대와 왕정시대 그리고 마침내 다윗 왕국의 건설 ?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계획에 따랐다. 하나님은 인간의 참여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로 한 작정을 마침내 실현시켰다. 가나안을 기점으로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이방 나라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했다. 다윗 왕국이 하나님 나라 역할을 하려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율법 준수(법치)는 인간 왕에게 의존하는 이방 나라의 덕치와 완전히 구별될 것이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4:-6절) 이런 사명 수행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했고 출애굽 사건으로 구원의 은총을 베풀었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인 왕들이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와 전혀 구별되지 않았다. 다윗 왕국도 하나님 앞에 존재 의미를 잃었다. 다윗 왕국의 멸망과 제 2의 다윗에 의한 다윗 왕국의 재건이 새롭게 예언되었다(사16:5, 렘23:5, 30:9, 겔34:24, 호3:5절). 다윗 왕국 멸망 후 약 400년 동안 계속된 중간기를 거쳐 마침내 다윗의 후손 예수님이 출생했다(마1장). 수태고지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위를 이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다(눅1:30-33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될 운명을 띠고 탄생했다. 왕이 되려면 자기 백성을 또한 구속해야 했다. 예수란 이름이 그런 신학적 의미를 가졌다(마1:2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속과 구원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목표했다.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마4:17절).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과 계획(창1:26-28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왔음을 밝혔다. 구약 시대 실패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성취내지 완성시킬 것이다. 그의 신분, 존재, 직분과 사역은 모두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과 철저히 관련된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직접적으로 실현시켰다.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이지만 아들을 통해 이 세상에 왔고 존재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와 사역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내재성을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과 완전히 결별된 천국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복음서는 아들의 존재와 사역을 통해 이 세상에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를 열심히 증언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절). 그의 축사 행위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임재를 알리는 분명한 증거였다(마12:28절).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내재성이 이렇게 기록된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절) 천국의 현재성과 내재성을 강조하고자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 비유 7개를 말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알곡과 가라지 비유는 천국이 복음이라는 씨와 알곡으로 설명된 신자들에 의해 이 세상에서 30배, 60배 그리고 100배 성장할 것을 계시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적적 성장이 그리고 보화와 진주 장사의 비유를 통해 지금 이 땅에 실체로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진 보화와 같음이 각각 설명된다. 아울러 그물 비유는 지금 이곳에 세워진 천국을 통해 피택자와 유기자가 나뉠 것을 가르친다. 마태복음의 천국은 죽어서 들어갈 천당이 결코 아니다. 이 비유들 뒤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의 신앙 고백이 기록되고(마16:16-17절) 곧 이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비로소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계시되었다(21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제자들에게 자신을 구속주로 믿을 것을 새롭게 계시했다. 유사한 가르침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증언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계시한 후(요3:3-5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14-16절)을 언급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값이 지불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돕는 거듭남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였다(사53:10절). 예수님은 공생애 말기를 맞았다. 곧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다. 이를 앞두고 예수님은 세 가지 천국 비유(마25장)를 말했다.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얻기 위한 과정이며 왕으로 재림할 때까지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또한 가르쳤다. 그의 재림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 후 승천 전 40일 동안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명했다.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했다(행1:3절). 자신의 사역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갖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은 철저히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과 긴밀히 관계된다. 이것이 바른 해석이라면 사복음서의 증언대로 교회의 주된 관심사도 교회가 아닌 하나님 나라여야 한다. 교회가 부활한 예수님의 몸이라면 그 머리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몸은 활동을 위한다면 교회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활동해야 하며 이것은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심이기도 하다. 즉 신국론(神國論: doctrine of God’s kingdom)은 신학들의 중심 내용이다. 유감스럽지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보다 미래성이 주로 가르쳐진다. 이에 따라 교회와 신자들의 신앙 삶에 어떤 긴장감과 긴박감도 없다. 이 세상에선 그냥 나그네로 소극적으로 살면 된다는 가르침 때문이다.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 때 부활주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이 땅에서부터 교회의 주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때 신앙 삶에 긴장감과 생명력도 되살아난다. 이것이 개혁이다. 하나님 나라와 성령 : http://blog.naver.com/rassvet/40208866447
162 no image 성경 연구와 통계학(2)
장창수
2569 2014-03-22
부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주 예수 그리스도 신약 성경을 연구할 때 사복음서, 사도행전과 사도의 서신서들이 구속사의 어디에 속하는가를 안다면 참으로 유익하다. 구속사적 위치가 책들의 신학적 성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복음서는 죽음, 부활과 승천을 정점으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기록한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정점으로 성령으로 무장한 사도들의 활동을 기록한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 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반면 서신들은 구속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교리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이 없다면 초대교회는 교리적 혼란에 처했을 것이다. 오순절과 은사파 교회는 예수님과 성령의 이적적 사역에 관심을 많이 둔다. 구속사적 위치에서 본다면 이들 이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과 성령의 내주와 활동을 증거한다. 이로써 구약의 모든 예언과 약속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또한 증언한다. 그럼 이런 목적을 가진 이적들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가? 긍정적으로 답하겠다면 예수님의 주됨과 제 2의 보혜사인 성령의 임재를 증거함이지 목회자의 영적 능력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은사 활용을 좋아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이를 신학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은사적 활동에서 그는 절대로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무당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전기인 사복음서와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은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단독 사역은 인류의 구원을 역사적으로 성취시키는 것이라면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에 의해 이미 성취된 구속과 구원을 시간, 장소와 인종을 초월하여 개인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오로지 예수님의 사역을 증거하는 목적을 띤다(요14:26, 15:26절). 서로 다른 구속사적 배경을 가진 신약 성경의 각 책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설명할까? 공관 요한 행전 서신들 하나님의 아들(44) 20 6 1 17 인자(91) 70 12 1 8 그리스도(523) 43 19 28 433 사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인자와 그리스도로 골고루 증거한다. 사복음서에서 인자란 단어(70회)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20회)보다 2-3배 이상 훨씬 더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서신서에선 인자(8회)보다 하나님의 아들(17회)이 역으로 2배 이상 더 사용된다. 예수님을 사복음서의 저자들은 인자로 그러나 서신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각각 소개하길 원한다.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들은 원복음의 예언(창3:15절)을 각각 달리 해석한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여인의 씨 즉 인자(마1장)라고 증언한다면 서신들은 예수님이 인자로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었다(골2:15절)고 해석한다. 이들은 모두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잘 설명한다. 서신서들보다 훨씬 많이 사용된 이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아주 많이 사용된다. 사복음서의 용례가 62회라면 사도행전과 서신의 용례는 461회이다. 7배 이상 더 많이 서신들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포함한 서신들 사이 신학적 의미에서 차이가 난다. 사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단어는 앞으로 인류의 구속을 성취한 후 주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메시아라는 신학적 의미(마1:21절)를 갖는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그리스도란 단어는 구속 사역을 이미 성취한 후 하나님의 아들로 인침을 받은 그리스도이다라는 신학적 의미(롬1:3-4절 참조)를 갖는다. 그러나 용례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아들보다 그리스도란 단어가 부활한 예수님에게 더 적합한 신학적 용어이다. ‘구주’(Savior)와 ‘주’(Lord)란 단어들 사이에도 비슷한 차이가 발견된다. 공관 요한 행전 서신들 계시록 구주(24) 2 1 2 19 주 200 47 105 233 21 위의 통계치는 당황스럽다. 교회와 신자는 종래의 신앙고백대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이 두 단어들의 용례들은 예수님을 구주보다 주로 고백하라고 권한다. 용례로 본다면 신약 성경에서 구주보다 주가 20배 이상 더 많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을 구주보다 주로 더 많이 소개한다. 성경의 신앙고백은 신학에 근거를 둔 신앙고백과 차이를 둔다. 왜 그럴까? 구속과 구원의 의미를 알면 된다. 구속은 속량을 그러나 구원은 속량 받은 결과 또는 상태를 각각 뜻한다. 그리고 구원은 구속의 결과라면 구속은 구원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구속의 결과인 구원은 소명, 믿음, 중생, 칭의와 양자 등등을 총칭한다. 그리고 구원 곧 양자는 하나님의 아들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당연히 구속보다 구속의 결과인 구원을 더 강조한다. 공관 요한 행전 서신들 구속(16) 3 13 구원(157) 46 6 26 79 그리고 구원은 신앙 삶의 출발점이지 영화라는 도착점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신분 획득(이신칭의: 구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과정(성화: 주)의 출발점(칭의: 구주)에 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으로 상속자가 된 것(영화: 구주와 주)은 아니다. 당연히 구원 이후 신자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성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서신들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 많이 고백하기를 권한다. 아래의 통계치도 이를 잘 증명한다. 아래 예수님과 관련된 명칭들은 모두 구속 사역을 성취한 '구주'와 '주'인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이들은 대부분 서신서에서만 사용되며 예수님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6회)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72회)로 고백할 것을 강조한다. 후자가 전자보다 11배나 더 사용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는 이 세상에서 오늘날도 활동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왕이며 만유의 주이기 때문이다. 공관 요한 행전 서신들 계시록 구주 예수 그리스도(6) 6 주 예수 그리스도(72) 4 68 주 예수(4) 4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5) 5 예수 그리스도(65) 4 2 5 51 3 그리스도 예수(84) 1 83 이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럼 왜 기독교 신학은 예수님을 '주'보다 '구주'로 고백하길 더 좋아하는가? 기독교 신학이 창조기사(창1-2장)가 아닌 타락기사(창3장)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7115676 ). 이제라도 교회와 신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개혁이다. 이로써 신자의 신앙 삶도 내세로 치우치지 않고 금세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타락으로 인해 이 세상은 불로 심판 받아 멸망 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전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 나라(천년왕국)는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신자는 구원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성경의 세계관은 이중적 ? 낙관적/비관적, 적극적/소극적, 능동적/피동적 그리고 현실참여적/현실도피적 - 이다.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 후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마지막 때 예수님이 만유의 주로 등장할 것을 예언한다. 여기 주는 구원을 완성시킨 주라는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 http://blog.naver.com/rassvet/40208412264 성경 연구와 통계학(1)
161 no image 러시아 침례 교회의 치리와 징벌
장창수
2711 2014-03-22
러시아 침례 교회의 치리와 징벌 러시아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 시에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3번 현지인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선교 사역을 수행했다. 작게는 20명 정도의 교회에서 그리고 크게는 300명 정도의 교회에서 사역했다. 그리고 지금 사역하고 흑해 연안에 위치한 4번째 교회에는 약 20명 정도의 세례 교인들이 있다. 선교지 경험을 통해 배운 바는 러시아 침례교회에 ‘치리’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교회에서 간음과 음주는 출교의 원인이며 흡연은 징계를 받는다. 출교자는 물론 징계 받은 자는 매월 첫 주에 시행되는 성찬식에 참석할 수 없다. 출교자는 이방인 취급되며 안녕이나 안부의 말도 금한다. 그러나 징계 받은 신자가 회개했을 경우 안부 인사는 나누지만 그 이상은 없다. 그를 부끄럽게 만들어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살후3:14절). 징계 받은 신자가 고집 부리며 회개하지 않을 경우 출교자처럼 취급하며 안부 인사는 물론 말도 안 건다. 징계 받은 신자들은 목회자의 특별 관리 대상이 된다. 징계 기간은 보통 일년이다. 이 동안 그들을 자세히 살핀 후 복권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출교의 경우 공예배나 목회자 앞에 공식적으로 회개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복권의 기회는 없다. 시베리아의 현지인 교회에서 신자들이 출교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볼 수 있었다. 세례 교인으로 여성도가 이혼 후 교회의 권면을 따르지 않고 불신자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즉시 출교되었다. 그 이후 교인들은 여성도를 완전히 이방인 취급했다. 신자들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도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 예배에 출석했고 얼마 후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일년 뒤 복권되었다. 그들의 이런 전통을 처음 볼 때 인간적으로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고와 권면을 읽은 후 당연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치리가 너무나 빈약하거나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량적 성장론 때문에 교회는 말씀을 어긴 신자들을 치리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불신자와 다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말씀을 무시한 결과가 아닌가? 교회는 말씀 위에 존재하는데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말씀을 무시한다. 이 교회는 이미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말씀 선포, 성례(성찬과 세례)와 치리를 교회의 3대 지표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표지'란 교회가 교회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그럼 치리가 없다면 그 교회는 스스로 교회가 아니란 것을 증언하지 않는가? 러시아 현지 교회의 엄격한 치리를 보면서 안타까움으로 조국 교회를 보게 된다. 최근 사역하는 교회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수세를 위해 학습 공부하는 과정에서 장년 남자와 여자가 한 집에 살기 시작했다. 교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이들을 당연히 치리했다. 그리고 치리 받은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배웠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경고와 권면은 의외로 엄격하다(살후3:6절). 예수님도 엄격하게 경고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절) 그리고 이 목적은 출교자나 징계 받은 자를 다시 영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함임도 깨달았다. 말씀을 아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징벌도 당연히 엄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출교자나 회개하지 않은 자들과는 인사도 나누지 말라고 바울은 경고했다. 러시아 교회의 치리와 징계를 보면서 한국 교회에서 치리와 징계가 다시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라는 소망을 품어본다. 오직 말씀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목회하기 위함이다. 구호만 외치지 말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8660533
160 no image 가나안 정복이 갖는 사회학적 의미
장창수
2345 2014-03-17
1. 하나님은 종되었던 애굽에서 해방시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이 출생 전 이들의 족장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족장에게 이런 약속을 주었는가? 세 번에 걸친 인류의 배반 때문이다. 에덴에서 추방이라는 징벌로 드러난 인류의 조상 아담의 불순종(창3장), 홍수 심판으로 드러난 셋 후손의 불신앙(창6장) 그리고 바벨탑의 저주로 드러난 홍수 후 새로운 인류의 배반(창11장). 3.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한 후 인간에게 위임함으로(창1:26-28절) 자신의 통치 즉 나라를 인류의 참여에 의해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류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치하겠다는 즉 인간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와 뜻을 드러냈다. 4. 인류는 거듭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을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주인으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우르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도와 목적이었다(창12:1-3절). 이런 의도는 그대로 출애굽 사건의 목적이기도 했다. 5.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통해 즉 선민을 통해 자신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 이 때문에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이나 모형이 아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싸워 정복한 후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곳이며 그 후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영역을 점점 이방으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었다(출19:3-6절). 6. 이 점에서 가나안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는 애굽과 전혀 다를 것이다. 그 나라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습득한 삶의 방식대로 영위되는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 아래 가나안에서도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 것이다. 모세 율법대로 산다면 하나님은 이들에게 적시에 비를 줌으로 산물이 풍성하여 가나안은 낙원처럼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방식은 애굽 식이 아닌 광야 식이어야 한다. 7.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애굽식을 버리고 광야에서 습득한 삶과 방식으로 살기에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즉 애굽식의 삶을 지향하는 가나안 7족들과 싸워 정복함으로 광야 식의 삶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율법의 준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도 세워질 것이다. 8.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는 경제적 부와 물질적 풍요 가운데 이스라엘이 마치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늘 유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시험에 노출 될 것이다. 9. 복락의 땅 가나안에서 공간이 아닌 시간 개념에 지배 받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이성의 지도에 따라 살면서도 믿음의 나침반에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가나안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는 권력이나 성공 지향적 사고가 아닌 사랑의 수고라는 최고의 가치에 의해 지배될 것이다. 그곳은 종속적 사회가 아니라 평등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선민은 결국 이 일에 실패해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 당했다. 10. 신앙의 이런 원리와 방법을 잘 깨달은 사도 바울은 신약 성도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31절) 11. 결국 신약 성도의 세계관은 사중적이다. 이 세상은 애굽, 광야 그리고 가나안과 같으면서도 종국적으로 불로 심판 받아 멸망 당할 대상이다. 이에 따라 신약 성도의 삶도 다중적이다. 이 세상에서 능동적이면서도 피동적으로 살아야 하며 소극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이 세상과 관계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출세하고 성공해도 이 세상은 불로 심판 받아 파멸될 것임을 알고 이 세상 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12. 가나안 삶의 방식은 시간 개념에 지배받는 공간적 삶 방식과 이성의 지도를 최대한 이용하되 믿음의 나침반에 의존한 삶 방식을 뜻한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이렇게 신약의 구원론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샬롬 http://blog.naver.com/rassvet/40166098296
159 no image 광야 삶의 사회학적 의미
장창수
2174 2014-03-17
1. 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했는가? 일주일내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었지만 첩경인 왕도를 피하고 광야로 이스라엘을 인도했다(출13:17절). 광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할 훈련 장소였기 때문이다. 2. 우선 광야는 아주 험한 곳으로 경작이 불가능한 죽음의 땅이었다. 그리고 악한 자가 숨어살고 무서운 짐승들만 사는 것이었다. 시시때대로 변하는 광야라는 자연 앞에서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는 무용하고 무력하다. 사람들은 자연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이런 곳에 유목민들이 살며 이들은 미정착 사회를 구성하며 이곳저곳에 흩어져 산다. 3. 이들은 목축에 의존하며 산다. 초장을 따라 이들은 이곳저곳 이동하며 산다. 이들은 계절의 변화에 아주 민감하다. 즉 공간이 아닌 시간이 이들의 삶을 지배한다. 광야에선 이동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재물은 이동에 불편과 방해를 주며 이동의 시기와 때를 놓친다면 풀을 찾지 못해 생명과도 같은 가축들을 모두 잃을 수 있다. 농경 사회와 달리 유목 사회는 재물보다 사람이 더 귀하고 사람들이 평등하다. 4. 이렇게 광야는 농경 사회인 정착 사회와 완전히 다른 life-style과 way of thinking을 강요한다. 공간이 아닌 시간이 지배하는 사회 그리고 물질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보는 사회이다. 종속적 사회가 아닌 평등 사회이다. 그리고 목표를 정확히 지적해 주는 지도는 무용하고 방향만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더 중요하다. 5.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이 땅의 나그네와 거류자로 불린다(대상29:15절). 또한 하나님의 품군이다(레25:55절). 이들 신분은 모두 공간보다 시간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리고 성경은 이들에게 이성의 지도보다 믿음의 나침반에 의해 살 것을 요구한다(행11:8절). 이 점에서 신앙인의 life-style은 정착 사회인 농경사회보다 비정착 사회인 유목 사회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 6.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한 목적은 분명하다. 광야 삶을 통해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했다.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도 바울의 구원(고후5:17절)은 바로 애굽 식이 아닌 광야 식으로 삶을 사는 신앙인들을 가리킨다. 7. 애굽에선 누림이었지만 광야에선 절제가 요한다. 애굽의 권력과 성공 지향적 삶을 버리고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출16:4, 마6:11절). 이성보다 믿음에 더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공간 개념이 아닌 시간 개념에 따라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하고 누릴수록 때와 시기를 놓치며 즉 종말론적 의식을 잃으며 실패하거나 멸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8. 창조론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질과 공간의 창조는 시간의 창조와 함께 시작했다(창1:1절). 시간의 출발은 곧 시간의 종막을 또한 함의한다. 즉 창조 기사의 시초론은 이미 종말론을 의미한다. 창조론 자체가 공간 개념보다 시간 개념에 따른 기독인 신앙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 창조론적 시간관은 성겨 마지막까지 관통한다. 9. 애굽은 옛사람과 삶 방식을 뜻한다면 굉야는 새 사람과 새로운 삶 방식을 뜻한다. 이렇게 광야는 신약 시대 새사람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10. 광야 삶 이후 하나님은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을 요구한다. 결국 이 지상에 하나님이 원하는 정착 사회를 세우란 뜻이다. 종래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과 모형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이원론과 이분법에 따른다. 이에 따른다면 신자는 애굽이라는 세상을 버리고 광야라는 고립된 곳에서 금욕적으로 살다가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 천국으로 가야한다. 11. 그러나 구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가나안이란 장소는 광야처럼 그리고 애굽처럼 이 세상에 속한 특정한 장소였다. 이 사실은 신약 성도들이 광야의 삶 방식을 잘 습득한 후 가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라는 정착 사회를 이 세상에 세울 것을 요구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66098206
158 no image 출애굽 사건의 사회학적 의미
장창수
2489 2014-03-17
1. 출애굽 사건을 신약은 이렇게 해석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2. 그리고 이렇게도 해석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1:4절) 3. 그렇다면 구약의 애굽은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이를 안다면 구체적으로 상기 두 가지 성구들의 신학적 의미가 사회과학적으로도 이해될 것이다. 4. 애굽은 농업 국가로 정착 사회였고 지상 낙원이었다(창13:10, 신11:10절). 당시 최강국으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 면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였다. 그리고 애굽의 왕 바로가 인간 신으로 통치하는 제정일치의 신정 국가로 우상 숭배의 나라이기도 했다. 애굽에선 창조주 신앙이 부인되며 인간과 그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 역할을 했다. 5. 결국 애굽이란 사회는 농업적 정착 시회의 성격과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경제적, 물질적 번영과 정치적 권력을 성공의 가치로 알고 추구한다. 당연히 이런 정착 사회에선 땅을 많이 소유한 자가 권력과 부를 잡는다. 공간 개념이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지배한다. 6. 농업적 정착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높은 자의 은총에 의존하는 문화 구조를 취하며 사람 사이는 종속적이며 불평등하다. 권력과 땅의 소유 정도에 따라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7. 그럼 출애굽 사건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이스라엘이 상기에서 언급된 특성과 성격을 가진 애굽이라는 인간 사회에서 탈출했다는 뜻이다. 장소의 이전으로 이스라엘의 소속과 신분에 변화가 생겼다. 신약에선 옛사람을 벗어버라고 새사람을 입는다고 해석된다(엡4:21-24, 골3:9-10절). 즉 구원이란 애굽식의 life-style이나 사고 방식로부터 해방되는 것 또는 자유롭게 됨을 의미한다. 8. 이런 사회학적 의미들을 갖는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사도 바울의 구원론 -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얻은 것 - 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 준다. 9. 신약의 구원론이 갖는 신학적 의미는 사회학적 의미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달리 말해 신학적 의미를 갖는 구원론은 사회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신앙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있다. 10. 그러나 구원론을 영적으로만 설명한다면 그것은 신학이 이원론과 이분법에 바탕을 둔 잘못된 신학임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며 그리고 신자들에게 신앙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게 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런 실수와 잘못을 지금도 계속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11. 옛사람을 벗어버린다는 의미는 사회학적 의미도 갖는다. 그럼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애굽의 다음 단계인 광야의 정체를 밝힘으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66098083
157 no image 헬라어로 본 칭의와 성화
장창수
3875 2014-03-16
기독교 신학을 다시 생각한다(19)/사복음서 묵상(122) ? 헬라어로 본 칭의와 성화 니고데모와의 대화 끝에 이런 성구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그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 거듭남(3-7절)과 거듭난 사람의 상태 (6, 8절)를 설명한 후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자신도 들려야 한다(14절)고 말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이런 계시를 남겼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후 하늘로 들려야 비로소 성령이 강림하고 이로써 죄인들이 거듭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의 결론으로 위의 유명한 성구가 기록된다. 이 성구만 묵상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를 신국론이 아닌 구원론에만 제한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한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이다. 본문에서 신자 곧 믿는 자는 누구인가? 믿는다는 단어가 헬라어 문법에 의하면 완료 동사가 아닌 미완료 동사이다. 완료 동사라면 한번의 행동으로 끝난 동작을 그리고 미완료 동사라면 연속적 행동을 각각 의미한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반복되어야 할 행위는 즉 믿음 또는 신뢰는 먼저 믿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결과이다. 이 결단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위한 첫 믿음에서 비로소 나온다. 즉 첫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한다. 이 신앙은 헬라어 문법에서 완료 동사로 설명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13-14절) 여기서 “그 안에서 믿어”란 표현은 헬라어로 완료 동사에 해당한다. 그 결과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도 단 한번 일어난다. 인침은 계속 반복적으로 받을 수 없다. 이런 절차로 신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 다음 성구가 이를 잘 설명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절) 이 본문에서 ‘영접하다’의 헬라어 동사는 과거 완료 동사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행위는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난다. 그에게 제시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 그런데 위의 본문은 영접한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로 또한 소개된다. 이 때 믿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놀랍게도 미완료 동사이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미 영접한 자는 계속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설명된다. 여기 계속 믿는다는 말은 계속 그를 신뢰한다는 뜻이다. 이런 반복적 신뢰 행위는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난 영접이라는 결정적 행위의 결과이다. 영접이 ‘계속되는 신뢰’의 직접적 원인이다. 다시 말해 요한 복음 3장 16절과 1장 12절에서 언급된 믿는 자 즉 신자란 최초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계속 그를 신뢰하며 사는 의인이다. 구원론의 관점에서도 본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만드는 최초의 믿음은 칭의를 불러온다. 칭의는 중생과 양자를 뜻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예수님의 제자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신분의 획득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론의 전부가 아니다. 구주로 영접했다면 구주(Savior)를 주(Lord)로 계속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 칭의는 그를 계속 신뢰하며 살겠다(성화)는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칭의는 성화의 출발점이다. 칭의는 성화의 원인이며 성화는 칭의의 결과이다. 성화는 영화에 달하기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구원론으로 설명한다면 성화란 칭의로 새롭게 획득한 신분에 걸맞은 삶과 행함을 뜻한다. 헬라어 문법은 위의 두 성구가 언급한 신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소개한다. 성도란 칭의 후 계속 성화에 노력하는 신자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칭의는 구원의 출발점이라면 영화는 구원의 완성점이다. 칭의라는 출발점에만 계속 머물면 안 된다. 도착점을 향해 성화라는 선을 따라 계속 앞으로 가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란 성구(합2:4, 롬1:17, 갈3:11, 히10:38절)가 이를 잘 증명한다. 여기 의인은 이미 단 한번의 결정적 믿음으로 의인이 된 신자이다. 그는 계속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 믿음은 칭의를 불러오는 믿음이 아니다. 성화를 위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반복적인 신뢰 행위로써 예수님(여호와)을 주(主 Lord)로 믿고 순종하는 행위를 뜻한다. 한번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순종해야 한다. 이로써 의인은 살리라 즉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출발점에만 머무르는 신자는 신분에만 만족하며 자기 할 일 즉 의무와 책무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맹목적인 거짓 또는 어린 교인이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 헬라어의 문법을 이용하여 사도 요한은 신자 즉 믿는 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소개한다. 신자란 칭의에 기반을 두고 성화에 힘쓰는 성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화에 전혀 힘 쓰지않는 신자 즉 이 세상과 상식 이하의 윤리와 도덕을 보여주는 교인이란 미중생자(고전2:14절) 아니면 ‘주 안에 어린아이’ 신자(고전3:1-3절)이다. 신앙 삶에서 한번 일어나는 믿음이 아니라 일생 동안 반복되어야 하는 믿음을 신자는 계속 보여야 한다. 칭의만이 전부가 아니다. 성화도 당연히 강조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자주 언급하는 ‘값싼 구원’이란 성화가 없는 칭의를 가리킨다. 성화를 죽여버리고 칭의만 강조하는 구원론은 수많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목회상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게 했고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되게 했다. 이 점에서 구원파의 구원관 즉 율법폐기론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 이 모두 성화를 칭의에서 분리시킨 불행한 결과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한 후 아담에게 왜 선악과 규례를 주었는가? 그리고 구원주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 후 시내산에서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었는가?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을 통해 새롭게 부여 받은 신분에 따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율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율법은 시험을 또한 겨냥한다. 이 시험은 두 가지 목적을 띤다. 하나는 율법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에 맞게 살도록 이스라엘의 삶과 행위를 유도한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을 연단시켜 합당한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는 훈련과 학습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피택자와 유기자를 구별한다. 유기자는 계속 범법을 하도록 허용함으로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피택자의 경우 하나님은 그를 징계함으로 고쳐 세워가며 인도할 것이다. 이 모두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결과이다. 구원이 새생명의 출생을 뜻한다면 그 이후 생명(칭의)은 계속 자라(성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상속자(영화)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신분의 획득만을 기뻐하며 성화라는 고난의 과정을 기뻐하지 않는 교회와 신자들이 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칭의의 은총)만 원하고 아버지의 공의(성화)를 존중하지 않는 버릇 없는 아들과 같다. 칭의에 치우쳐 성화를 무시하는 구원론은 절대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며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교회는 칭의 후 성화 삶 즉 구원 이후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 신학은 반드시 기독교 윤리가 필요하다. 신앙 삶은 윤리 분야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이 지금까지 무시한 기독교 윤리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개혁이다. ?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4084671
156 no image 성경 연구와 통계학(1)
장창수
2528 2014-03-16
성경 연구와 통계학(1) 부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성경의 각 책이 구속사의 어디에 속하는가를 본다면 책의 신학적 성향도 알아낼 수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라는 사건(사복음서)에 배경을 둔다. 구약의 예언대로 인류의 구속이 역사적으로 이미 성취되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으로 인해 구속의 결과가 신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렇게 교회가 이 세상에 이미 탄생했음을 기록한다. 강림한 성령이 어떻게 초대교회에 역사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한다. 당연히 성령의 사역은 현장감이 넘치고 다이내믹했으며 성령의 은사가 특별히 강조된다. 성령의 강림과 내재적 활동이 증거돼야 했다. 그러나 사도의 서신들은 이 모든 구속사적 사건(구약,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뒤로 하고 이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해설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과 관련된 질문의 답들은 현장을 기록한 사도행전보다 신학적 해석을 주는 서신들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을 오순절과 은사파 교회들은 유의해야 한다. 예전 성경 각 책의 특정한 장의 내용을 묵상할 때 사용된 단어들의 용례를 자세히 살폈다. 사용 회수가 많은 단어들은 저자의 신학적 의도를 짐작하게 했다. 이런 방법으로 신학 공부 할 때 중요한 단어의 용례들을 살피며 성경 책들 사이 신학적 성향을 알아내기도 했다. 특정 단어가 왜 이 책에서만 유난히 많이 사용되는가를 살핀다면 그 책의 신학적 성향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중학교 수학 시간에 이야기 식으로 제기된 수학 문제를 수리화하여 정답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달리 말한다면 통계학처럼 통계라는 수치로 사회 현상을 파악하고 진단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빅-데이터는 이를 돕는 과학이다. 온갖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서술되는 성경의 책들을 이런 방법으로 연구하며 일목요연해진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성경의 단어들을 성경 책 별로 데이터 처리할 수 있다면 보다 수월하게 책의 내용이 이해된다. 동의어 사전은 이런 면에서 유용하다. 예컨대 공관 요한 행전 서신들 천국(37회) 36회 1회 하나님 나라(67회) 49 2 7 9 교회(110회) 2 20 88 이 자료에 근거를 두고 아래의 신학적 묵상이 가능하다. ‘천국’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 37회 사용된다.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1번 사용된 것 빼도 36번 모두 마태복음에서만 사용된다. 천국은 마태복음의 전문 용어이다.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이다. 이들은 제 2의 다윗 왕국을 세울 메시아를 오랜 동안 기다렸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이들은 믿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 통치 아래 고통을 당했다. 이들의 소망과 기다림은 너무나 간절했다. 어느 날 니고데모는 메시아로 활동하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는 밤중 예수님을 찾았다. 그들의 소망이 언제 이루어질지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 나라와 중생을 말했다(요3:1-15절).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그가 기대한 다윗 왕국 같은 지상 나라가 아니었다. 마태도 유대인의 소망을 잘 알았다. 그는 고의적으로 천국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 지상 나라가 아닌 천국이 올 것을 말했다. 천국은 지상 나라와 정반대이다. 예수님이 세울 나라가 그럴 것이라고 마태는 소개했다. 앞으로 올 메시아가 세울 나라는 출애굽 사건 후 가나안에 세워진 이스라엘이나 다윗 왕국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런 지상 나라가 아닐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이 또 있다. 마태복음을 제외한 나머지 공관복음서들은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 이들 복음서에선 천국 대신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사용된다. 신약 성경에서 67회 중 마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서 49회, 요한복음에서 2회, 사도행전에서 7회 그리고 서신들에서 9회 각각 사용된다. 이방인들은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 나라는 인간 나라의 반대어이다. 인간 나라에선 인간 통치자가 다스린다. 그의 통치 행위는 항상 불완전하다. 이로 인해 국민은 고통을 당한다. 인간 나라들 사이 통치력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에 따라 어느 나라 백성은 행복하고 다른 나라 백성은 불행하다. 예컨대 아프리카 인은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 불행하지만 잘 사는 서구인들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 나라에선 완전한 신이 통치자이다. 그의 통치는 늘 그리고 영원히 완전하다. 그 나라의 백성은 시간과 장소에 무관하게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눈에 안 보이는 영인 하나님의 통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하나님의 통치 행위는 이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것들에 의해 쉽게 흔들리는 인간의 나라와 비교할 때 이상향이다. 구약의 예언처럼 이런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의 초림과 함께 이 세상에 출발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소식은 선민에게는 물론 이방인들에게 복음 자체이다.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인류는 더 이상 불완전한 인간의 통치 때문에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 안에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주목 사항이 있다.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는 신약 성경에서 104회의 용례들 중 사복음서에 87회, 사도행전에서 7회 그리고 서신들에서 겨우 10회 사용된다. 사도들의 서신들은 사복음서들에 비해 약 1/9 정도의 관심만 하나님 나라에 둔다. 그 대신 서신서들은 교회에 보다 더 큰 관심을 둔다. 신약 성경에서 110회의 용례들 중 사복음서에 단 2회, 사도행전에 20회 그리고 나머지 88회는 서신서들에서 사용된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주관삼사인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보다 교회에 보다 더 큰 관심을 둔다. 구속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이것은 당연하다. 죽음과 부활 이전 교회는 없었고 예수님은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서신들을 쓴 사도들에게 스승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과거 사건에 속한다.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교회도 이미 출생했다.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라면 교회는 눈에 보이는 실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신자들은 교회의 회원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예배, 양육, 교제와 전도 그리고 구제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렇게 교회에서 잘 자란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다(마28:18-20절). 결국 예수님과 사도들 사이 사역 방법에선 달랐지만 관심사에선 하나였다. 신약 성경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과 교회가 천국이란 단어보다 하나님 나라를 마땅히 더 많이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주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나라와 대조되며 신자들에게 신앙 삶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준다. 실천력 있는 신앙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구속의 은총으로 잃은 옛 지위를 되찾은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창1;26-28절)대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 행위로 이해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비록 눈에 안 보이지만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실체이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신자들을 출생시키고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도들의 사역이 좋은 본이다. 결국 신약 성경이 설명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 관계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구속 목적을 이 세상에 성취시키고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 신자들은 구원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받는다. 신자들이 소명과 사명을 잘 수행한다면 덤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도 서서히 개혁되며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8337803 성경 연구와 통계학(2)
155 no image 어떤 목회자의 자살에 대해서…
장창수
2906 2014-03-10
어떤 목회자의 자살에 대해서… 개혁주의자 연하는 목회자가 심각한 우울증 때문에 몇 번에 걸친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의 설교가 너무나 좋아 교인들이 그의 영상 설교를 들으며 스스로 모여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자살과 아울러 예배 방식에 대해 말이 참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두 행위는 모두 성경 말씀에 빗나간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을 만나고 이럴 때 힘들고 오랜 기간 고통이 계속되면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된다. 심리학에서도 우울증 환자와 상당할 때 무엇보다 먼저 그와 동조해 주라고 한다. 얼마나 힘들면 자살을 생각했는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해와 동조는 치료를 위함이지 그의 병적 증상을 옳다고 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개혁주의자 연하는 목회자가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 목회자도 인간이지만 영적 지도자이다. 이 점에서 일반 신자들과 달라야 한다. 그가 설교를 잘 한 것은 분명한데 목회자로서 자살을 몇 번 시도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다.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그에게는 전혀 무력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황스럽다. 그의 설교에 진정성이 없었단 말인가? 그냥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짜깁기 식으로 설교를 했단 말인가? 이런 재주는 논리력이 있는 불신자라도 ‘일만’시간만 투자한다면 얼마든지 감동적 설교를 할 수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의 자살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해 준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럼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누구에게 무력한가? 성경의 대답은 피택자가 아닌 유기자이다. 사울 왕과 가롯 유다가 좋은 예이다. 유다는 3년 넘게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스승을 팔았고 이로 인해 자살했다. 우리를 더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그의 설교들을 교인들이 너무나 좋아하여 여전히 듣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정당한가? 그의 가르침이 아무리 성경적이라 해도 결국 그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 성경의 가르침과 그의 자살 사이 역설적 모순이 있다. 그의 자살은 그의 설교가 잘못된 것이라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살은 성경 가르침과 달리 인생이 참으로 힘들다면 신자도 얼마든지 자살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잘못 부여시켰다.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신자의 삶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남겼다. 이것은 정말 비성경적이며 큰 잘못이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죽었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도 생긴다. 과연 그는 과거 신앙 삶에서 연단을 받았으며 그 연단은 승리로 끝나며 칠전팔기의 믿음을 소유한 목회자였는가? 그랬다면 그는 결코 자살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이 증언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3-5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만난을 극복하도록 돕는 위로와 힘의 원천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절) 물론 신자들도 힘에 부칠 정도의 어려움이나 환난을 당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힘에 부치는 고난이 온다. 이런 고난은 신자들에게 또 다른 유익을 준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절) 하나님이 보낸 시험은 항상 선한 목적을 띤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비로워서 힘에 부치도록 우리를 시험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약속한다(고전10:13절). 시험 중 하나님의 선함을 믿는다면 얼마든지 인내와 참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 그럼 이런 시험에서 신자는 왜 실패하는가? 자기 힘과 능력으로 극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더 의지하려 한다. 물론 그 결과는 백전백패이다. 위의 성구들은 자살한 목회자가 영적인 면에선 절대로 정상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만약 성경의 이런 가르침들이 부인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전혀 무력하고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유감스럽지만 그의 자살은 그 동안 그가 한 설교가 내용적으로 아무리 탁월했다지만 결국 거짓이었다고 증언한다. 예전 대통령의 자살이 왜 우리를 좌절시켰는가? 온갖 인생의 만난을 극복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인물이 된 어른이 자살함으로 너무나 쉽게 생을 마쳤고 간단히 모든 책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의 최고 어른이 앞으로 자랄 청소년들에게 보여야 할 인생의 교훈은 아니었다. 어려움을 진실과 인내 그리고 참음으로 극복하라는 가르침을 전혀 주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대하는 자세다. 이 자세에 따라 그의 사람 됨됨이 평가된다. 자살은 어찌 보면 가장 편한 방법이다. 누구나 어려움에선 자살로 피해 나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남기며 자살을 방조하는 죄를 대한민국의 최고 어른이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의 어버이 같은 분이 보여야 할 본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이 점에서 실패자이다. 자살한 목회자도 마찬 가지다. 그는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병을 극복하는 아름다운 본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설교와 다른 길을 갔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 한 분도 저녁 수면제 몇 알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주님이 매일 주는 위로와 힘으로 극복하고 있다. 아마 잘못된 생활 습관 때문이리라! 오랜 동안 밤 늦게까지 성경을 연구하다보니 막상 자야할 때 못 자게 된다. 이 때문에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상식을 어긴 결과이리라! 목회 사명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다. 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이로써 목회로부터 오는 우울증과 스트레스 또는 자신을 교만케 하는 나르시시즘에서 해방될 수 있다. 평상시 신앙 삶에서 이를 매일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한다면 목회자는 결국 쓰러지고 만다. 자살한 목회자에 대해 이랬다 저랬다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지만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 앞에 훌륭한 본을 보여주진 못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9절) 그 동안 그가 무엇을 심었는가? 자살인 것을 보니 그는 바로 심지 않은 것 같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의 자살을 막지 않고 허용했는가? 그가 진실한 목회자였다면 잘못 가도록 하나님이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그의 삶과 목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깊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허용은 그가 목회자로서 실패자였다고 분명히 증명한다. 그렇게 그가 수치를 당하도록 하나님은 허용했다. 그 동안 그의 고집과 완악함이 하나님의 은총을 무력하게 만든 것에 대한 징벌이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를 완전히 버렸다고 단언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를 사망의 골짜기에 놓아 다시 구원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고린도 교회에 근친상간을 한 못된 신자가 있음을 알고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4-5절) 자살한 목회자에게도 하나님의 이런 동일한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고 본다. 다행스럽게 그는 복음을 알았다. 자살 후 숨이 끊어지는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죽음의 무서운 고통을 몸소 처절히 느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다시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 여부에 달린다. 피택자라면 그가 들은 복음은 이런 순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참조: 목회자와 우울증 http://blog.naver.com/rassvet/40207660884 ). 회개만 한다면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이 세상에 없다. 물론 그의 구원 여부는 하나님 앞에서만 알려질 것이다. 이제 그를 추종하는 교인들은 그의 자살이 비성경적임을 알고 비정상적 예배를 중단해야 한다. 교인들은 물론 불신자들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자살은 그의 탁월한 설교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그를 계속 추종하는 것은 많은 소문을 내게 함으로 그 목회자를 더 모욕되게 만들 것이며 아울러 성경과 기독교도 모욕을 함께 당한다. 물론 이 시대 들을만한 설교가 없다는 점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설교만 잘 하고 삶으로 본을 보여주지 못한 목회자를 따르는 행위도 비상식적이며 동시에 비성경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따르는 구세주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해 버리는 불신앙을 추가시킬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절)
154 no image 삼위 하나님이 유령이 아닌 실체적 존재로 역사하시는 증거2 (입신 경험)
박인철
2999 2014-03-06
30년쯤 전에 처음으로 동네 옆 감리교회의 심령부흥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사흘 째(목) 마지막 밤 집회로 ‘성령을 받아야 산다’ 였다. 부흥사는 당시 감리교 부흥사 강 모 목사로 한국과 미국교포 교회들은 다 아는 대로 여러가지로 유명한 목사였다. 그날 설교 후에 통성기도를 시켜놓고는 피아노에는 마이크를 대고, 오르간도 최대로 치게 하고 목사는 마이크를 입에 대고 찬송을 크게 불러대며 점점 그 강도가 세어지는데 정신이 없어 아예 기도를 못하고 있던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발생되었다. 갑자기 허리께의 밑 척추로부터 번개에 맞은 것 같이, 무수한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뜨거움이 점점 윗 척추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약 10초쯤 지나 목부분에 다다를 때에 큰 위기감으로 몸을 곧게 세우고 두손으로귀를 막고 심호흡(평소 훈련)을 하였더니 잠시 후 그 증세는 온데간데없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놀라운 증세가 머리에 올 때까지 그대로 있어보려 했으나 막판에 내가 이렇게 쓰러지면 여러 일들이 발생하고, 서로 아는 옆 장로교 교인이 입신했다고 소문 날 생각이 스치면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아랫 강단에서는 이미 난리였다. 그 후에 가끔, 이것이 내가 성령내림을 스스로 막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으나 지금에는 그것은 악신내림이 분명하다는 확신이다. 입신, 신내림을 정말로 경험할 뻔하였다. 아마도 그때까지 그런 무지막지한 난리 소리의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민감하게 그런 증세를 일으키며 자칫 큰 악신에 입신할 뻔 했던 것같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여의도 순복음이 대형버스를 본인이 출석하던 장로교회 근처에 대어 놓고 한달만에 교인 30여명을 꾀여가는 일이 벌어져서 순복음 주일4,5부예배, 금요철야 등을 한달간 계속 참석하며 탐구한 결과 그 예배와 간증의 순엉터리에 대한 확증을 얻게 되었다. 요즘 장로교회가 어디있으며 사경회가 어디 있으며 경건주의, 칼빈주의가 어디 있는가? 없다. 자복과 눈물의 통성기도가 어디 있는가? 요란한 악기 소리와 손,팔을 흔들며 연발로 소리지르며 중언부언하면 큰 기도한 것이다. 예수님 구속사역 앞에 사탄의 첫 시험인 순복음 괭가리부흥떡 / 신복음 인본주의떡 시험에 모조리 넘어가 정신나간 장로교회들이되었다. 모두 그렇다. 이런저런 악신들이 교회와 세상을 지배하도록 사탄에게 공중의 권세를 하나님이 허락한 시대이다. 사울왕도 하나님을 알고 경배한다고 하는 자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악신을 부리셨다! 그러면 악신이나 성신은 소리로도 역사하시는가? 그렇다. 성신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시며 아니 계신 곳, 그 섭리가 미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다윗이 수금을 탈 때에 악신이 떠난 것은 그 소리와 함께 성신이 임했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성신은 그에게서 나오는 사운드로 역사하시며 악신은 그에게 허락된 노이즈와 함께한다. 노이즈의 파장은 일정함이 없고 파형은 날카롭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지음 받았던 천사장, 광명(루시엘)의 새벽별이 그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노래 하려다가 땅으로 쫓겨나 사탄(루시퍼)이 되어 여전히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호를 빙자하여 자기들이 즐기며 영광 받는 음악으로 노래하도록 하는 것이다. 땅으로 쫓겨나 광명의 빛을 잃은 사탄이 가장 간교한 뱀에게 들어가 하와(여자)에게 갔음을 잊으면 안 된다. 보암직, 먹음직, 들음직 한 것들에 충실한 감정,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 찬양음악에 특히 조심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감정,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말씀 공부에 진력하면서 찬양음악을 해야 한다. 목회자, 목사를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영혼이 육체와 하나인 증거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어 거듭난 자로 살게 하시되 그 영혼은 육체 안에 거하며 함께 성화의 길을 걷는다. 그 영혼이란 육체로 하나인 혼, 넋, 정신으로 이루어 성장해 가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때에따라 알기 쉽게 마음이라 하신다. 이 마음은 그 몸의 어디가 너무 아프거나 힘들면 혼났다, 넋이 나갔다 한다. 마찬가지로 그 육체와 함께 형성 된 마음이 너무 아프면 육체도 같이 쇠잔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 때에 몸은 떼어 놓고 영혼, 마음만 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어린아이도 안다. 그런데 정작 예배드릴 때에는 '마음만 진실하면 된다, 마음으로 진실하게만 찬양하면 된다' 하며 마음만 강조하여 난잡한 예배를 하게 하는 것은 아주 무책임한 것이며 이것이 유령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복잡한 경우를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다. 다윗은 어린 막내로 들판에서 양치기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는 믿음의 노래를 하며 우는 사자의 입도 찢는 용맹함의 강건한 몸을 가졌고 그가 타는 수금소리에 악신도 도망하는 건강한 영혼을 가진 다윗의 얼굴과 눈은 빛났다.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맡기시고 새시대의 성전예배를 찬송예배의 기틀로 세우게 하셨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살리우신 영혼은 사람마다 각각 독특하게 뇌에 형성 된 물질의 실체로 그 마음, 혹은 정신으로 새로 살리심이며 그것이 육체와는 떨어진 존재로 실체 없이 공중에 떠 있는 유령이 아닌 것이다. 동물을 복제하는 수준에 까지 이른 막바지 과학으로 요즘은 뇌파로 여러 가지를 측정한다. 뇌의 생각에 따라 뇌파가 다르다. 머지않아 고단위 뇌파 측정기로 옆 사람의 생각도 알게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생각을 말 소리로 바꾸어 전화도 걸고 집 문도 연다. 즉 생각,마음을 말로 표현하여 소리로 바꾸어 차의 시동도 건다. 앞으로 손을 사용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차를 운전하게도 될 것이다. 생각의 뇌파를 전기적 무선 전파로 차에 전달한다. 세상의 모든 물질에 전기(전자)가 없는 물질은 없다. 빛(입자)으로도 전기를 일으킨다. 생각이란 뇌에 형성 된 물질의 전기적 활동(뇌파도 일으킴)이며 이를 신경계를 통해 입이나 몸에 전달하여 몸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소리로 변환시키고 그 소리 에너지(파장)를 다시 전기적 에너지로 변환시켜 전화도 걸고 차의 시동도 건다. 무소부재, 전지전능의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모든 존재하는 물질들을 질서로 모으시고 구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말씀이 사람에게도 직접 들리는 소리로, 눈에 보이는 글로 나타났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된다. 그 말씀이 예배시간에는 집례자가 잘 준비된 목소리를 가다듬어 봉독하여 우리의 귀에 들릴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롱하게 들려지며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은혜를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땅에 속하여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거나 그의 얼굴을 직접 뵈오면 죽는다. 구약에 들려주시던 하나님 말씀의 소리는 그로부터 나온 만물을 통하여 모두가 알아들을 방언의 소리이며 이는 우리가 각각의 지역, 처소에서 예배할 때에 세우신 자로 봉독하는 성경말씀을 알아듣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면하여 오심은 우리가 교회의 총력을 다하여 준비한 주일예배를 통해서, 총체적, 즉 밝은 햇빛(조명) 아래 경건한 분위기의 예배당, 그리고 오르간, 성가대, 집례자의 여러 인도하는 순서의 소리와 모습, 같이 모인 회중들의 모습과 통성의 고백과 찬송소리들에 현재적, 그리고 실재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다. 이것이 내가 평생에 정통교회 안에서 학습되어 확신하게 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예배이다. 이제 두 분 P목사님을 통해 성도들의 지각에 말씀하신 내용들을 마감한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고 생기를 불어 넣으실 때에 사람이 생령이 되었으나 범죄로 그 영혼이 죽어 땅에 속한 죽은 영의 몸으로 살다가 다시 성령의 살리심을 받아 영혼이 거듭나서 육체와 함께 산 영의 몸으로 살게 되었음이다. 그렇게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게 됨이다. 그리고 그의 육체가 잠시 죽을 때에 예수께서는 '잔다' 고 하셨으며 그 영혼은 따로 낙원에 이르러 예수의 품에 안식한다. 과학이 미천하던 시대에는 반딧불, 천둥소리나 번개까지도 무서운 유령세계의 일로 보았다. 지금도 영혼이 죽은 채로 육체로만 사는 자들의 넋, 혼, 정신은 유령을 두려워하며 돌부처를 만들어 놓고 또 나무신에 정성껏 빈다. 또 교회에 다닌다며 그런 혼으로 기도하고 찬양도 한다고 하는 모양들을 아주 많이 보게 된다. 예수의 영으로 거듭나 장성한 자는 하나님에 대한 실체적, 실재적 존재 인식으로 그를 경외하며 예배하며 어린 영들을 그렇게 가르쳐 인도한다. 그것이 敎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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