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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1 20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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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8 201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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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95 201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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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74 2010-07-23
153 no image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6)
장창수
2720 2014-03-01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21)/창세기 묵상(92) –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6) 왜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들어갈 천국으로 그 동안 이해했는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보이는 물질 세상과 아담의 불순종으로 타락한 세상을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할 더러운 곳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절) 그러나 다음 성구에서 그는 달리 말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5-10절) 바울이 버리라고 권한 것은 세상 자체가 땅엣 것 즉 땅에 속한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옛 사람의 삶과 사고 방식이다. 타락한 성품에 따라 사는 삶이다. 그러나 믿음에 의해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면 삶과 사고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존재의 변화는 반드시 삶과 사고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절대로 헬라 철학에 의존하며 자신의 서신들을 쓰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히브리 인이었다(고후11:22절). 창세기가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배운다면 바울의 말이 잘 이해된다. 흔히 하나님 나라가 지정학적 관점에서 세상 나라들처럼 이해된다. 이것은 전혀 맞지 않다. 우선 하나님은 영으로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통치 행위도 안 보인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 방식과는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한다. 국경선이라는 지정학적 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 행위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영으로 눈에 안 보이지만 무소부재하고 우주 곳곳에 편재한다. 우주와 세상 전체는 이미 그의 통치 아래 있다. 우주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실재한다는 뜻이다. 언제 이런 보편적/우주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이 우주에 세워졌는가? 하나님이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음으로 그의 나라가 출발되었다(창1장). 하나님의 창조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 행위의 일환이었다. 창조 행위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곳에 하나님 나라도 함께 존재한다. 자유주의자나 현대신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는 창조 행위를 통해 이 우주에 이미 출현했다. 이것이 헬라 철학과 다른 신국론이다. 창조기사는 다른 종류의 하나님 나라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창조한 후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했다. 그 목적은 인간이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시킬 은총, 기회, 사명 또는 직분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성삼위 하나님 사이 동의와 합의가 먼저 있었다(창1:26절). 이에 따라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했다(27절). 그리고 하나님은 인류의 생육과 번성과 땅에 충만 그리고 만물 통치를 인간에게 명했다(28절). 여기 하나님 나라는 우주적/보편적 하나님 나라와 다르다. 지구적/제한적 하나님 나라이다. 전자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완성되었다면 후자의 하나님 나라는 향후 인류의 참여로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후자의 하나님 나라 건설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창세기 2장이 연이어 기록되었다. 안식일 제도(2:3절), 아담의 창조(4-7절), 에덴 동산 창설(8-16절), 선악과 규례(17절) 그리고 하와의 창조(18-25절).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결혼과 부부 제도 그리고 가정 제도의 창설을 뜻했다. 인류의 생육과 번성은 이들과 이들이 세운 가정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정에 거하면서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그곳의 땅을 갈 것이다(2:15절: 문화). 물론 이들은 안식일을 준수하고(종교) 선악과 규례를 지킴(신앙과 윤리)으로 가정 삶을 살 것이다. 가정의 식구들이 늘어난다면 그 만큼 에덴 동산의 영역도 더 넓어질 것이다. 저절로 인류 사회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영역도 더 확장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창1:26-28절)이었다. 타락 이전 하나님 나라와 인간 나라, 종교와 사회 그리고 신앙과 윤리는 모두 하나였다. 인류 사회 자체가 하나님 나라였다. 이들 사이 이원론에 근거를 둔 대립적 이분법은 성립되지 않았다. 타락하자마자 상황이 달라졌다. 아담의 불순종은 문화사명(창1:28절)을 수행하는 인류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인간 나라의 건설에 있음을 선언했다.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인간 나라가 출현했다. 원복음(창3:15절)이 증언한다. 하나의 인류는 여인의 씨와 뱀의 씨, 둘로 나뉘었다. 이 둘 사이 싸움은 뱀이 상징하는 사단이란 존재가 파멸 망하기까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사단이 다스리는 인간의 나라 사이 싸움도 계속 벌어질 것이다. 싸움 방식은 둘이다. 한편 타락한 인류의 삶과 사고 방식에 대해선 소극적 자세를 취해야 하며 다른 한편 하나님 나라의 삶과 사고 방식에 대해선 적극적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 세상 자체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류가 둘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인의 씨를 내세워 창조 목적(창1:26-28절)대로 이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 할 것이지만 뱀의 씨는 이를 계속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일시적이며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단은 반드시 징벌을 받아 영원히 패할 것이다. 이 싸움을 이용해 하나님은 여인의 씨인 자신의 백성을 연단시키며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울 것이다. 이것은 창조기사(창1-2장)에 따른 것으로 헬라의 이원론이나 이분법적 사고에 전혀 맞지 않는다. 두 나라는 어떤 식으로 싸울 것인가? 구약 시대 혈과 육의 방식이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 땅의 나라와 같은 방식으로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통치되는 이스라엘과 인간의 말씀에 따라 통치되는 나라 사이 육적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실상 영적이며 가치관적 충돌이었다. 선민의 뒤엔 창조주 하나님이 그러나 이방 나라 뒤엔 사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 육적 그리고 물질적 싸움의 형식은 지나갔다. 구약 시대에 이어 눈에 안 보이는 영적 그리고 가치관적 싸움이 계속 진행된다. 이를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위엣 것과 땅엣 것 사이 차이를 윤리와 가치관 면에 두었다. 그가 헬라의 이원론과 이분법을 따른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육과 혈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초월적이면서도 동시에 내재적이다. 현세적이면서도 동시에 내세적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성취된 나라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창조(창1-2장) 때부터 그랬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 시대에도 이 세상에 이미 침투했다. 하나님은 원복음의 약속대로 메시아의 혈통적 후손에게만 구원 계시가 계속 전달됐고 그 후손을 일군으로 택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이를 잘 증언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메시아의 조상 즉 예수님의 혈통적 조상이었다. 이들 사이 혈통적 후손은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세울 다윗의 조상이었다면 다윗 이후 후손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린 실제적인 왕들이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망한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메시아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방식대로 로마 제국과 전혀 싸우지 않았다. 그의 구속 사역은 육적 해방, 물질적 번영 그리고 경제적 형통이 아닌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을 목표했다. 그의 구속의 결과 인류는 다시 하나님 나라를 세울 일군(창1:26-28절)으로 부름과 세움을 받는다. 신약 시대 신자들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는가? 문화사명(창1:28절)이 권하는 대로 신자들은 인류의 문화를 형성하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영역에서 선교사명(마28:18-20절)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사상, 철학, 가치관과 윤리 영역에서의 싸움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모든 종교들이 동등하게 여겨진다. 이들 사이 가치관, 윤리와 사상 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신자들이 예수님이 말한 대로 자기 사회에서 소금과 빛 역할을 잘 한다면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에 서서히 실현된다. 신약의 이런 가르침은 구약의 창조기사(창1-2장)로부터 출발된다. 개념적으로 설명되는 산상수훈을 구약의 가르침들을 이용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신, 구약 사이 아름다운 조화가 아닌가? 구약을 무시하는 신학은 이미 헬라 철학의 나쁜 영향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교회와 신자는 보이는 영역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영적 용사들이다. 이들을 잘 세우는 것이 교회의 사명 중 하나이다.
152 no image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5)
장창수
2257 2014-03-01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20)/창세기 묵상(91) –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5) 하나님은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타락의 원인이 뱀에게 있음을 알았다(창3:13절). 제일 먼저 뱀을 심판하면서 이렇게 저주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절) 뱀 즉 사단에게 내린 저주는 인류 사회에겐 복음이었다. 유혹자인 사단을 영원히 제거한다면 인류가 또 다시 유혹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뱀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가 성경의 모든 약속들의 뿌리인 원복음(原福音: protoevangelism)이 되었다. 원복음은 여인의 씨(국역 여인의 후손)와 뱀 사이 싸움에서 뱀이 머리를 상하지만 여인의 씨는 발꿈치만 다칠 것을 예언했다. 그럼 여인의 씨는 누구인가? 이 씨가 여인이 낳은 후손이라면 그는 분명히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초자연적 존재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가? 그는 사단보다 더 강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사단보다 더 강하다. 결국 원복음은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으로 출생할 것을 예언한다(사7:14절). 그리고 그의 승리는 인류의 구원을 성취시킬 것이다. 타락 사건 이전 창조기사(창1-2장)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암시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인간의 참여로 반드시 건설되고 확장될 것이다. 조건은 인류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계획과 목적에 둘째이며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포함시켜야 했다(고전15:45-49절). 타락 사건이 그의 성육신을 재촉했을 뿐이다(롬5:14절). 하나님은 성육신을 위해 아들 그리스도에게 한 가지 조건과 두 가지 약속들을 제시했다. 조건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이 미천한 죄인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이 조건에 응한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고 그의 백성도 구속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언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영원한 구속 언약’(eternal covenant of redemption)이다. 언약의 준수를 위해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죄인 인간이 되어야 했다(자기와의 내적 싸움). 그리고 사단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사단과의 외적 투쟁).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두 싸움에서 모두 승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일부를 구속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았다고 증언한다. 최종적 승리를 위해 메시아인 예수님은 세 번 사단과 싸웠고 또 싸울 것이다. 첫 번째 싸움은 세례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 동안 굶주린 후 사단으로부터 받은 시험이었다(마4:1-11절). 이 시험에서 승리함으로 사단이 주인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예수님이 얻었다. 가버나움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진 기지를 세웠다(12-16절).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이미 임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기 시작했다(17절). 십자가 상에서 치러진 두 번째 싸움에서 예수님은 승리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해석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2:13-15절) 이 싸움에서 승리는 부활로 증명되었다. 부활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었고(행2:36절) 그를 믿는 신자들은 죄와 사망에서 구속되었다(마1:21절).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행2장)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거듭났다(요3:1-16절). 사도 바울의 해석이 증명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절) 이로써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면모를 완전히 갖추었다. 구원 받은 신자들은 지상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승천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을 위해 일할 것이다. 지상에서 신자들은 창조기사(창1-2장)가 말하는 문화사명(창1:28절)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류는 둘로 나뉘었다(창3:15절). 이들 사이 싸움은 지금도 계속된다. 신자들도 한편 전투하면서 다른 한편 하나님 나라를 세계 곳곳에 세우고 확장시켜야 한다. 이 전투에서 신자들이 용사이며 복음으로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창조기사(창1-2장)의 문화사명이 신약 시대 선교사명(마28:18-20절)으로 대체되었다. 선교사명은 두 가지 사명 수행을 명한다. 하나는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신자들에게 그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두 방법으로 세워지며 확장될 것이다. 이들은 천국 비유에서 복음의 씨(마13:16-23절)와 중생자(24-30절)란 씨로 소개된다. 이 전투에서 교회는 복음으로 중생자를 무장시켜 훈련시키는 훈련소와 같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싸움은 예수님의 재림 때 치러진다. 이 싸움에서 사단은 패하며 영원히 유황불에 갇히고 더 이상 인류를 유혹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를 타락시킨 장본인(창3장)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다(계20장). 불 심판 후 에덴 동산(창2장)이 모형 한 새 예루살렘이 새 하늘 아래 새 땅 위에 내려올 것이다(계21장).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옛 세상(창1장)을 통해 이미 계시된 참 하나님 나라가 완성 형태로 등장할 것이다(계22장). 결국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됨으로 창조와 구속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에 따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창조(창1:26-28절)에는 이런 놀라운 경륜이 감추어져 있었다. 창조기사(창1-2장)가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이어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때 인간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 세워질 것이다.
151 no image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4)
장창수
2560 2014-02-27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9)/창세기 묵상(92) –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4) 타락기사(창3장)는 창조기사(창1-2장)가 밝혀준 하나님의 뜻, 의지와 목적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잠시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실패 때문에 창조기사의 신학적 가르침들은 더욱 분명해진다. 3장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1-7절), 창조주 하나님의 방문, 심문과 심판(8-19절) 그리고 심판을 실행한 하나님(20-24절)이란 내용들로 구성된다. 놀랍게도 낙원 에덴 동산에 사단이 뱀을 통해 간접적으로 등장하고 활동했다. 사단은 하나님의 대적자로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늘 방해한다. 이런 사단이 없었다면 아담도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사단이 인류를 시험하도록 허용했을까? 창조주 하나님은 죄악과 불의를 전혀 알지 못한다(욥34:10절). 하나님을 대신해 사단이 악역을 맡아야 했다(욥1:12, 2:6절).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사단은 하나님의 종으로 한 동안 활동할 것이다. 다른 가르침이 있다. 사단의 존재는 선악과와 함께 에덴 동산이 참 낙원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시험을 위한 임시 낙원이었다. 에덴 동산에서 출발한 하나님 나라도 시험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기독교 성경의 세계관이다. 번영신학은 이를 모르고 이 세상에서 형통과 출세 그리고 성공을 추구한다. 그리고 교회 성장론도 성경의 세계관을 이해 못한 결과이다. 이 둘은 한결같이 이 시험에 걸려 넘어진다. 믿음의 순종으로 시험을 통과한 인류만 참 하나님 나라와 참 낙원에 들어갈 것을 가르친다. 선악과는 자기 백성을 선택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결국 선악과 규례는 창세 전 이미 세워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엡1:4-6절)을 역사적으로 성취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보여준다. 이 이외 선악과 규례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질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 규례를 준수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실현되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 나라도 세워진다. 그러나 준수하지 않는다면 말씀 통치는 불가능하고 그곳에 인간의 나라가 세워진다. 이 시험과 순종 여부로 하나님은 자기 나라의 백성을 선택할 것이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여부가 선악과 규례라는 가장 간단한 율법의 준수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선악과 규례는 성화를 위해서도 율법 준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 덕분에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은총이었다. 이 때문에 인류는 선악과 규례를 준수해야 한다. 준수 여부는 누가 하나님의 참 자녀인지를 밝혀준다. 창조기사는 조직신학의 칭의와 성화 사이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칭의 후 성화 여부에 따라 누가 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창조기사(창1-2장)와 타락기사(창3장)는 성화를 무시한 칭의가 비성경적이라고 증언한다. 아담과 하와는 성화에서 그만 실패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다. 성화를 무시한 문화 사명의 수행은 인간의 나라만 세울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났다. 이로써 하나님 앞에 존재의 의미와 목표도 잃었다. 아무리 이들이 고귀하게 지음 받았지만 멸망하는 짐승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시49:12, 20절).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타락 기사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불순종으로 인류는 죄와 사망 아래 놓인 죄인이다. 그러나 창조 기사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선 인류는 불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종의 자격을 상실한 자이다. 전자는 존재론적(칭의적) 관점에서 그러나 후자는 언약적(성화적/관계적) 관점에서 타락한 인간을 각각 설명한다. 두 관점은 구원의 두 면을 잘 설명한다. 성경에서 구속은 존재의 변화로 그러나 구원은 직분의 회복으로 해석된다. 구속은 구원의 원인이라면 구원은 구속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변화는 반드시 직분의 회복을 동반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구속 즉 존재의 변화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은 잃었던 직분의 회복 즉 구원을 종국적으로 목표함을 강조해야 한다. 불순종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창조기사(창1-2장)가 설명하는 4가지 관계들- 창조주 하나님과 나, 나와 나의 인격, 나와 이웃 그리고 나와 자연 – 을 철저히 파괴시켰다. 그러나 훌륭한 신앙 삶이란 종교, 인격, 이웃 그리고 자연이라는 4가지 영역 사이 유기적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5465474). 물론 하나님과 나 사이 관계가 가장 근본적이다. 불순종은 신앙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우선 자신의 벌거벗음을 이들은 부끄러워 했다 (창3:8,10절). 이들의 인식 세계에 나쁜 변화가 생겼다. 이것은 인격 분열의 증거이며 결과였다. 이들은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을 피하려 했다(8-10절).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가 깨졌다는 증거이다. 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아담은 하와와 그녀를 준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을 변호했다(12절). 하와는 뱀에게 전가시켰다(13절). 이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한결같이 고백할 줄 몰랐다. 이것도 인격 분열의 분명한 증거였다. 그리고 이들 부부 사이 관계도 예전과 달리 깨졌다. 이 때문에 앞으로 남편은 부인을 불신하며 다스리려고 할 것이다(16절). 이 뿐만 아니다. 불순종으로 자연도 저주를 받아 인간을 거역할 것이다(17-19절). 남자는 평생 땀을 흘리며 노동하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 다시 미천해질 것이다. 신앙 삶의 근거인 4 가지 관계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구속이란 불순종 때문에 저주를 받아 다시 흙으로 돌아간 죄인을 거듭나게 함으로 양자 삼는 것이라면(존재론적 변화) 구원은 그를 다시 하나님의 일군(언약적 변화)으로 세워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의 결과 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5:17절). 그의 신앙 삶은 믿음의 순종으로 깨어진 4가지 관계를 정상화시키며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사명을 수행하는 삶을 뜻한다. 사도 바울이 이들을 잘 설명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절) 그럼 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구속과 구원을 성취하고 완성시킬 수 있는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일단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 계획과 목적대로 인간의 참여를 통해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의지를 보여주고자 하나님은 원복음(창3:15절)을 주었다. 원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여인의 씨로 출생하여 사단과 직접 대결하여 승리할 것이다. 광야 시험에서 승리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전초 기지를 다시 마련했다. 그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아담의 타락 때문이 아니라 창조기사가 밝힌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타락 이전 아담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불완전한 조상이었다. 첫째 아담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모형이며 상징이었다(고전15:45-47절). 타락 사건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앞당겼을 뿐이다. 역시 기독교 신학은 타락기사가 아닌 창조기사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때 성경의 구속사는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훨씬 넓고, 깊게 그리고 높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개혁이다. 이때 구속사나 구원사란 신학적 용어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 같은 새로운 용어로 대체될 것이다. 구속이나 구원이란 단어는 이미 타락 기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7379620
150 no image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3)
장창수
2366 2014-02-27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8)/창세기 묵상(91) –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3) 창세기 2장에 다섯 기사들 - 안식일 제도(1-3절), 아담의 창조(4-7절), 에덴 동산 창설(8-15절), 선악과 규례(16-17절)와 하와의 창조(18-25절) - 이 기록된다. 2장은 1장의 반복 같지만 내용상 발전이 있다. 1장 26-28절에서 언급된 인간의 창조를 더 자세히 기록한다. 그리고 2장은 1장의 결론(26-28절)에서 언급된 하나님 나라가 향후 어떻게 건설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해 준다. 창조 사역(창1장)은 완벽했고 하나님은 지극히 만족했다(창1:31절). 사역은 창세 전 계획과 목적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제 7일을 맞아 하나님은 안식했다. 창조 사역으로 보편적 그리고 우주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참여를 통해 세우고자 하는 특별한 그리고 제한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창1:26-28절)는 막 시작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 사역(창1장)은 후자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의 출발에 지나지 않았다. 창조 방식이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은 6일이 상징하는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앞으로 계속 일할 것이다. 그리고 완성될 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은 영원히 완전한 의미의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안식일 준수는 이런 믿음과 소망에서만 가능하다. 아담의 창조(창2:7절)는 인간의 근본적 구성 요소가 영(靈: spirit)인 하나님의 생기(욥32:8절)와 흙이란 물질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생기가 불어넣어지자 몸 안에 인격과 동물적 생명이 생겼다 (욥33:4절). 물질에 지나지 않던 몸이 살아 움직였다. 이 사람을 생령(生靈: living soul)이라 부른다. 영이 속사람이라면 생령은 겉사람이다. 심리학은 영을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 말한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세울 일군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 덕분에 탄생했다. 속사람인 영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그러나 겉사람은 이웃과의 교제와 자연의 통치와 관계된다. 인간은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자연히 인류 사회에서 종교와 문화는 분리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인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세워지길 원한다. 창조 기사는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가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 실재임을 주장한다. 인간 창조 방식에 따르면 인간은 철저히 흙에서 난 존재이다. 지구와 자연을 떠나 인간은 살 수 없다. 이런 실존적 한계를 갖는 인간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과연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가란 질문이 나온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했다(고전15:50절). 타락과 무관하게 인간은 거듭나야 한다(49절). 이 사실은 창조 기사(창1-2장)에서 아담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이해한 후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아담이라고 소개했다(고전15:45-47절). 다시 말해 아담의 타락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육신 사건은 창세 전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목적에 따랐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과의 교제 장소이면서 인류의 사회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이었다 (창2:15절).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가 세운 최초의 가정은 인류 최초의 사회이면서 동시에 최초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하나님 나라였다. 이곳으로부터 땅끝까지 인류 사회는 물론 하나님 나라가 그 영역을 점점 더 넓혀나갈 것이다. 에덴 동산은 이를 위한 전초 기지와 같았다. 선악과 규례는 아담과 하와가 앞으로 세울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가르친다. 이 규례를 지킬 때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불순종 행위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불순종한 인류는 인간 나라를 세우기 위해 문화 사명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질문이 나온다. 아담과 그의 후손 인류는 선악과 규례를 지킴으로 모두 에덴에서 끝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지극히 부정적이다. 선악과 규례는 아담이나 인류가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라고 증언한다. 아담이 아니라도 그의 후손 중 누군가 반드시 따먹을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인류는 둘로 나뉠 것이다. 결국 선악과 규례는 시험을 통해 선택된 자기 백성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조치할 것이란 하나님의 작정을 암시한다. 그리고 하와의 창조는 아담의 문화사명 수행을 도울 반려자의 출현을 뜻한다. 남자와 여자, 결혼, 부부 그리고 가정은 모두 종국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목표한 문화 사명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한다. 이들이 구성한 가정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군들이 출생하고 성장하며 부모의 인도와 가르침 아래 문화 사명의 수행을 위한 훈련을 받는다. 당시 최초의 가정은 교회, 학교와 사회였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부인 그리고 가장과 반려자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달리 문화 사명 수행한다. 그렇게 수명 수행을 서로 보완시켜 준다.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녀 교육에 정말 유익하다. 여자는 남자의 이성적 면에 감성적 면을 더해준다. 반려자는 가장의 추진력이 힘을 발휘하도록 뒤에서 정리해 준다. 남자가 보지 못한 것을 여자가 보고 추가시켜 준다. 성격과 기질이 다른 것은 틀린 것이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공동의 목표를 보다 완전하게 달성하도록 서로 보완해준다. 결국 2장의 가르침은 이렇다. 인류 사회는 일주일 한번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이다(종교). 이것이 정신과 육체에 진정한 쉼을 준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가 명한 일(창1:28절)과 영원한 안식을 잊지 않도록 돕는다. 이 때 삶과 인생의 이유, 의미와 목적을 인류는 재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평상시 삶에서 늘 선악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 사랑(신앙)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다(윤리). 안식일과 선악과의 규례들을 지킬 것인가 여부는 인류 사회에 항상 시험거리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이런 종교적/신앙적 그리고 윤리적 행위와 시험은 무엇보다 먼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최초의 가정은 최초의 인류 사회로써 출생, 성장, 양육, 훈련과 실천을 위한 장소이면서도 시험 장소이다. 가정에서 배우고 훈련 받은 대로 가정 밖 에덴 동산에서 활동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가정은 너무나 중요하다. 결국 가정은 창세기 2장의 결론이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 나라는 인류 사회에게 비전과 목표를 제시해 준다면 창세기 2장의 가정은 그 목표를 이룰 방법을 구체적으로 습득하도록 돕는 곳이다. 창세기 2장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더욱 발전된 내용을 보여준다. 유감스럽지만 기독교 신학은 창세기 3장으로부터 출발하며 인간 관점의 신학을 진술한다. 창세기 1-2장의 신학으로 돌아갈 때 기독교 신학은 개혁될 것이다. 다음 타락 기사(창3장)을 창조 기사(창1-2장)의 관점에서 해석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 타락 기사일 것이다. 이로써 구원론 중심의 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7309675
149 no image 하나님의 영과 그 역사하심이 따로 분리 된 유령의 세계가 아닌 증거들 1
박인철
2593 2014-02-25
 만물에 충만한 하나님의 신 / 그의 영 오직 사람만이 사탄이 준 불신의 영으로 빼앗긴 하나님의 생령, 불신으로 영이 죽은 간사한 마음들을 가진 육체들로 에덴에서 쫓겨나 그들이 살게 된 땅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땅이 되었다. 약육강식의 피흘림이 시작되었고 사람들끼리의 피흘림과 만물의 파괴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법도대로 운행되는 우주 만물의 세계는 지금도 변함 없이 그의 법을 따라 운행되며 그 법도의 찬란한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의 조화를 보는 영의 사람, 어떤 찬송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능력과 은혜 다 찬송하라 그 옷은 햇빛 그 집은 궁창 큰 우레소리로 주 노하시고 폭풍의 날개로 주 달 - 리신다 저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이땅 다 주의 조화 그 힘찬 명령에 터 잡히나니 저 푸른 바다는 옷자 - 락이라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 영으로 사는 자에게는 만물이 주의 조화로 보이나 죽은 영들은 만물에 드러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결단코 보지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시에는 클래식음악을 고리타분하다 하며 의도적으로 멀리하며 대부분을 재즈, 락, 랩등에 자기의 감각들을 몰입시킨다. 그런데 아주 타락한 인생이 아니면 태교할 때 만큼은 거부감 없이 좋은(?) 음악, 기어코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듣는다. 이것은 태아의 육과 혼, 정신이 그 몸에 발아되기 시작할 때에는 어미된 자로 본능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찾게되는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책들과 여러 경로로 소리와 빛에 의한 임상실험들의 결과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지식들을 결코 자신의 혼에 기억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의 영이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에 배인 리듬이 거부하며 혼(정신)에 배인 선율과 화성의 감각을 거부하는 영으로 숙성되었기 때문이다. 태교 음악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으심에 순응하는 모든 만물과 생물들은 빛과 소리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자라나는 식물에 사운드음악(클래식)과 노이즈음악을 듣게하는 실험, 소의 우유생산에 사운드음악과 노이즈음악을 들려주는 실험,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음악 치료를 하며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지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한 실험 결과의 사실들의 정보를 누구든지 한 두번은 다 접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이들은 이런 사실들을 아주 소중한 지식으로 삼아 자기 혼의 양식으로 삼고 어떤이들은 그런 지식 자체를 거부함으로 아예 잊어버린다. 모든 실험의 결과, 만물의 생물들이 다 싫어 하는 노이즈를 생령을 잃고 죽은 영으로 태어나는 아담의 후손들만 좋아한다. 죽고 못산다. 그렇게 그들의 영들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간다. 산이나 들에 가서 시내와 꽃을 보면서도 소주 생각나서 꺼내 마시고 병을 깨고 내려 오는 이들이 있고 평수와 땅값을 따져보는 이들도 있고 그냥 건강을 위해 열심히 땀흘리며 걷기만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들도 있다. 각각의 영이 다름이다. 산이나 들에 가서 냇가에 자리를 하고 누우면 흐르는 물소리, 새소리가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며 어느새에 단잠을 주기도 한다. 필살의 삶의 현장에서 잠시 도피시켜 안식과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폭풍의 물결을 볼 때에 그냥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가 살리신 영의 오감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만물을 느끼게 하는 5관의 감각기관을 주시고 그 5관의 감각들을 통하여 만물의 하나님의 신을 만나면서 우리에게 살리워 주신 영혼이 살찌우며 건강한 육체와 함께 예수의 영들로 자라게 하시는 것이다. 고등동물일 수록 사람과 유사한 머리와 신체를 가지며 머리 눈, 귀, 코, 입을 가지며 유사한 감각 기관을 가진다. 이것이 저급할 수록 사람이 잡아먹어도 될만한 수준 차이를 보인다. 소나 돼지는 잡아서 고기를 만들면 쇠고기, 돼지고기라 한다. 그런데 물고기는 산채로도 물고기라 하며 피가 거의 없는 물고기는 우리가 산채로, 회로 먹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등 동물일수록 확연해지는 머리와 눈, 입, 코, 귀 그외의 감각들은 누가 주셨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안다. 하나님의 만물의 머리되심, 눈, 입, 코, 귀, 손 등등. 하나님이 만물과 사람으로 인하여 겪으시는 희, 노, 애, 락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말씀하신다. 우리의 이모든 감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중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과 달리 동물에게는 명백하게 딱 하나 없는 것이 있으니 이는 옷이다. 하나님도 입고 계시다 하는 옷을 사람에게만 지어 입게 하셨다. 이 옷은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옷을 입혀서 태어나게 하시므로 그들에게는 부끄러움의 본성이 없다. 사람은 동물에게는 없는 이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깨달음(양심)으로, 그리고 영원에 대한 지각으로 갖게되는 두려움으로 절대자를 찾게 된다. 동물에게는 없는 이 두 지각으로 전능자를 찾게하시는 때에 택하신자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 영혼을 새로 살리워 그의 몸에 잉태시키신다. 그 때부터 그의 몸은 하나님을 아는 산자의 영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세계를 보며 들으며 창조주 그를 즐거워하며 찬양케 된다. 우리가 부모님의 생신날에 우리의 몸이 그에게로부터 나온 부모님을 직접 뵈옵고 예물을 드리며 절하여 경배함 같이 그날의 주인이신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을, 그분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하여 직접 뵈옴을 기다리며 예배를 준비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이는 또한 그분에게 우리 온 몸의 진정으로 산제사로 드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우리에게 주신 오감을 충분히 동원하여 그분을 직접 뵈옵고 또한 우리의 진정을 그분께 직접드리는 기쁨을 어디에 비교하겠는가! 평소에 떨어져 있어서 부모님을 간혹 생각하며 편지를 드리거나 전화를 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진정을 드리려고 최선을 다한 물질로, 몸으로 직접 대하여 드리며 함께하는 기쁨이다. 삼 원 색이동시에 하나로 된 빛갈이 없는 환한 빛 아래서 (결코 울긋 불긋 빛갈이 따로 따로 비취지 않는다) 다윗과 지혜의 선조들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장엄하고도 정숙한 소리의 팡파레 음악으로 천상천하에 홀로 거룩하신 그분의 모든 것을 느끼며 그분의 음성이신 말씀으로 그분을 들으며 그 앞에 예물과 경배로 예배하는 기쁨이란!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의 아침햇빛으로 임재하시는 제단의 동편에 자리한 성가대는 총력을 다하여 준비한 찬양성가로 그에 대한 감사와 영광의 찬송을 부르면 그분은 말씀의 상을 베풀어 먹이시고 우리를 축복하심으로 주일예배를 마친다. 그리고 우리는 좀 편한 옷들로 갈아 입고 다양한 - 그러나 경건한 모양을 잃지 않는 찬양예배의 순서들을 갖는다. 해가 질때까지! 이것이 성경으로 우리의 지각에 똑똑히 말씀하시어 들려주시는 주일의 예배이다. 이 신령과 진정의 거룩한 예배, 영광스러운 (햇)빛과 꽃꽂이 향내와 정숙한 음악소리와 거룩한 말씀을 듣는, 하나님이 주신 감각들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대하여 예배하며 거룩한 하나님이 진정의 예배자들과 함께 하나되시어 같이 즐거이 부르시는 거룩한 산 예배가 됨이다. . 이렇게 산 예배를 하는 자들이 산 영이다. 죽은 영들은 결단코 이렇게 산 예배를 할 수가 없다. 푹신한 자리에 몸을 푹 집어 놓고 재밌는 스크린 구경이나 하며 재밌는 노래나 흥얼거리며 신나는, 신내리는 춤이나 추고 열광하며 즐겁고 재밌는 인간說交 얘기에 박수나 치다 가는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을 오감으로 느끼고 갈 수가 없다. 결단코! 그들이 흡족해 하는 느낌은 결국 인간 자기들, 交회원들끼리, 사람들끼리 흥만 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며 한껏 모욕하다가 가는 交회일 뿐이다. 천만, 때로는 천이백만의 거창한 이름으로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다. 때로는 녹화와 위성으로, 심지어는 죽은 자도 스크린에 내세워 주일예배의 설교를 하게 하는 죽은자들의 인간찬양예배, 죽은예배일 뿐이다. 다윗이 타는 정숙한 수금소리는 그 소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신에 합한 음악소리로 악신은 도망하고 하나님의 신을 부르는, 하나님께 합한 그의 영, 신령하신 하나님을 잘 아는 그의 신앙 인격이 담겨 있는 영, 즉 그의 몸으로 타는 소리였음을 꼭 기억하여야 한다. 재즈, 락, 헤비메탈의 노이즈 음악을 계속 들려주는 식물들은 소리나는 반대편으로 숙여지며 죽정이 같이 되는 수많은 임상실험의 결과를 애써 왜면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이 주인이 된 주일예배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시며 사람들이 던져주는 무엇을 겨우 조금씩 얻어먹는 거지영이 아니시다. 오늘도 천지의 주관자, 대주재이신 하나님은 만물과 주일과 예배의 주인이신 천지에 충만한 영이시며 그의 백성들이 오직 신령한 예수의 영으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진정의 예물을 드리고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주인이시다.
148 no image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2)
장창수
2454 2014-02-25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7)/창세기 묵상(90) – 창조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2) 창조 기사(창1-2장)는 기독교 신학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성경 처음부터 기록된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언한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창조 행위를 통해 자신의 뜻과 의지 그리고 목적을 최초로 보여준다. 이들은 당연히 성경 마지막까지 관통할 것이다.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학적 가르침들은 당연히 기독교의 신학들의 기초와 근간이 된다. 창세기 1-2장의 신학들(1)이란 글(http://blog.naver.com/rassvet/40207115676)에서 시초론과 종말론 그리고 신국론이 창조 기사의 중요한 교리들이며 기독교의 세계관, 역사관과 물질관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창조 기사에 따르면 공간과 공간을 점하는 물질 세계는 철저히 시간에 의해 제한 받는다. 시간의 변화는 물질 세계에도 변화를 초래시킨다. 역사 연구는 시간의 변화를 감안해야 한다고 창조 기사는 말한다. 창조 기사가 성경은 물론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창조 기사는 또 다른 가르침을 준다. 창세 전 이미 세워진 계획과 목적에 따라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들을 창조했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이 세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인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기까지 계속 친히 창조한 세상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섭리할 것이다. 이 점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의 ‘머리’로 비유될 수 있다. 이를 잘 이해한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1절, 참조: 골2:10절) 다윗이 사용한 머리란 단어는 당연히 몸을 전제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인 만유는 그의 몸이란 뜻이다. 아니 만유는 이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다. 지체들은 철저히 머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결국 모든 피조물들은 아무리 작고 미세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 몇가지 중요한 가르침이 나온다. 우주가 몸이라면 우주를 구성하는 지체들은 머리를 중심으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우주나 세계를 연구할 때 지체 하나만 보지 말아야 한다. 지체들 사이 유기적 관계를 감안하며 연구해야 한다. 즉 과학 연구 방법은 분석과 분해만 아닌 통섭이어야 함을 성경의 창조 기사는 가르친다. 이에 따르면 우주학은 물론 인문사회과학(문학, 역사, 철학,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과 자연과학(물리학, 생물학, 화학과 수학)은 서로 분리된 학문들이 아니다. 이들 학문 사이 유기적 연결성을 고려하며 연구 활동을 해야 한다. 우주나 자연을 함부로 파손시킨다면 어떤 형식으로든지 우주란 몸은 손상을 당하며 결국 인류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준다. 그리고 아무리 적은 미물이라도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이 있다. 자연과 우주를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해 부여된 은사와 그에 맞는 직분에 따라 존재하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기적 관계 아래 생물들과 무생물 사이 관계도 세심하게 연구해야 한다. 문화 사명(창1:28절)은 이를 감안한 명령이다. 오늘날에야 과학계는 이를 이해한다. 그리고 만유란 몸에는 인류와 사회도 포함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류 사회와 인류 역사의 주인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구속사(redemptive history)는 물론 세속사(secular history)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구속사는 창조주 하나님이 그러나 세속사는 사단이 주인이란 이원론적 주장은 성경에 전혀 맞지 않다.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단도 하나님을 위해 한시적으로 봉사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잠16:14절). 사단을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취급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二元論: dualism)은 기독교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나 신학이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믿는 일원론(一元論: monism)을 주장한다. 이 때문에 이원론에 뿌리를 둔 이분법적 사고도 성경적 사고는 아니다. 이들은 선악과를 먹은 후 인류가 받은 저주의 일시적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타락 기사에서 출발한 기독교 신학은 유감스럽게도 창조 기사의 이런 신학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잘못과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창조 기사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절)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 이외 성경의 역사관이 어떤 내용과 성격을 갖는지도 또한설명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6일 창조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6일 창조를 요약한다면 하나님은 첫째 삼일 동안 물질로 구성된 거주 공간을 마련했고 둘째 삼일 동안 공간의 주인들인 거주자들을 창조했다(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1644584 ). 첫째 삼일과 둘째 삼일을 각각 주기(週期)로 본다면 이들 주기 사이 관계는 겉보기와 달리 아주 긴밀하다. 거주 공간이 마련된 순서대로 거주자들이 창조됨으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은 마침내 끝난다. 6일이라는 기간 동안 두 주기가 반복되면서 창조 행위가 완성되었다. 이 창조 과정은 첫 주기가 예비적 단계라면 둘째 주기는 완성적 단계라고 말한다. 이들 주기는 반복되면서 동시에 발전한다. 하나님의 주기적 창조 방식은 향후 전개될 성경의 구속사는 물론 인류 역사도 반복과 발전을 보여줄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서 단번에 완성에 달하지 않았듯이 인류 역사나 하나님의 구속사도 단번에 완성에 달하지 않을 것이다. 예비적 단계인 첫 주기에서 완성적 단계인 둘째 주기가 암시되거나 예언된다. 신,구약 사이 관계가 이를 잘 증언한다. 성경의 역사관은 어떤 면에서 진화론과 유사하다. 그러나 진화론에선 종말(終末) 개념이 없지만 성경의 창조론에선 종말론이 있다. 성경의 역사관은 종말을 전제한 반복과 발전을 계속 보여준다. 이것이 성경 역사관이 갖는 특징이다. 우주와 세계는 종말을 향해 치닫기만한다고 보는 히브리인의 선형적(線形的: lineal) 역사관도 아니며 세계는 반복하며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는 헬라인의 원형적(圓形的: circular) 역사관도 아니다. 성경의 역사관은 반복하면서 발전하다가 마침내 종말에 달한다고 보는 나선형적(螺旋形的: spiral) 역사관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역사관은 히브리적이면서 동시에 헬라적이다. 이에 따라 언약과 예언의 형태를 띤 성경의 계사들도 모두 과거를 연상시키는 반복적 성격은 물론 미래를 지향하게 하는 발전적 내용을 동시에 보여준다.(참조: 문장론으로 본 성경 http://blog.naver.com/rassvet/40133386234 ) 결국 창조 기사가 소개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과 주기적 성격의 역사관은 성경의 구속사를 탁월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시초론, 성경의 구속사(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종말론은 이렇게 설명된다. 시초론은 하나님이 창세전 세운 작정을 작동시킨 출발점이라면 종말론은 이를 완성시키는 도착점이다. 그리고 성경의 구속사(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 두 점들 사이를 이어주는 선과 같다. 이 선은 직선도 원형도 아니며 나선형으로 반복과 발전을 동시에 보여주며 점진적으로 전진한다. 성경의 구속사와 인류의 역사는 타락 기사가 아닌 창조 기사에서 이미 출발되었다. 기독교 신학이 타락 기사가 아닌 창조 기사로부터 출발되어야 할 이유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들인 계시들도 반복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성경 해석학에 아주 중요하고도 유익하다. 성경 묵상자는 본문에서 과거의 계시들과 연결된 반복적 의미는 물론 미래를 향한 발전적 의미도 찾아내야 한다. 즉 계시들 사이 존재하는 동질성과 이질성 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찾아내야 한다. 이 점에서 역사문법적 성경해석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성경의 창조 기사가 이런 가르침들을 준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의 나머지 교리들과 신학들을 인도하는 안내자 노릇을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7195048
147 no image 창조 기사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이다(1)
장창수
2445 2014-02-25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6)/창세기 묵상(89) – 창조 기사는 모든 신학의 기초이다(1) 창조 기사(창1-2장)가 성경 처음부터 기록된다. 창조 기사가 전체 성경의 기초이며 기반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잠1:7, 9:10절).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우연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이미 세워진 창조 계획과 목적에 따랐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창조 행위를 통해 계시되었고 완성까지 계속 견지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그 결과를 설명하는 시초론(始初論)은 세상 끝을 설명하는 종말론(終末論)을 이미 출발시켰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란 단어가 이를 증언한다. 이 단어가 '시간의 맨 처음'을 뜻한다면 당연히 시간의 끝도 전제한다. 하나님의 창조 덕분에 시간이 시작되었고 공간과 공간을 점할 물질 세계도 또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시간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정한 시간의 끝에 보이는 물질 세상도 끝날 것이다. 창조 기사는 기독교의 세계관, 역사관과 물질관을 잘 설명한다. 이를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절) '주에게서 나오고'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과거)를 '주로 말미암고'는 하나님의 보존과 섭리 행위(현재)를 그리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완전히 달성될 때를 각각 뜻한다. 이에 따라 성도는 현재를 살면서도 종말을 내다볼 줄 아는 지혜로운 안목을 소유해야 한다. 창조 기사를 통해 최초로 계시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성경의 구속사는 계속 전진하며 성취내지 완성될 것이다. 구속사의 성격과 내용도 창조 기사에서 암시된다. 구속사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연출자이며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배우들에 지나지 않는다. 믿음에 따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여할 것인가의 여부만 인간에게 달린다. 창조 기사는 성경의 구속사란 근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의 결론은 인간 창조(창1:26-27절)와 문화 사명(창1:28절)이다. 이들은 창세 전 이미 세워진 하나님의 기쁜 뜻에 따랐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었다. 그 나라의 건설은 반드시 인간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26절). 이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었지만 피조물 인간에게 통치를 위임했다(28절). 문화 사명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이 되었다. 이 영광과 은혜 덕분에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종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아들이면서 동시에 종이다. 이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류는 선악과 규례(창2:17절)를 지켜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 통치가 실현된다면 인류 사회 안에 하나님 나라도 세워질 것이다. 이것이 창조 기사가 말하는 신국론(神國論: the doctrine of God’s kingdom)이다. 이 신국론은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한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한 성전 같은 곳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최초로 실현된 곳이다. 타락 이전 성속(聖俗)의 구분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인류 사회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창세 전부터 창조주 하나님이 원하는 바였다. 그러나 아담은 이 일에 실패했다. 그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당연히 축출 당했다(창3장). 그 결과 하나님 나라와 인류 사회도 서로 분리되었다. 하나님은 실패를 만회하고자 곧바로 원복음(창3:15절)을 주었다. 앞으로 올 메시아는 ‘여인의 씨’(국역 여인의 후손)로서 자신에게 속한 여인의 씨를 구속할 것이다. 구속의 목적은 죄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일 것이다. 타락 이후 아담의 후손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울 하나님의 종은 없었다. 이 때문에 인류의 구속이 필요했다. 원복음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여인의 씨로 성육할 것이다. 아담으로 인해 실패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은 구속주 하나님이 되어야 했다. 창조와 구속 사이 차이는 무엇인가? 방법에선 서로 다르지만 목표와 내용에선 동일하다. 이와 같이 구약과 신약 사이에도 이런 동질성(반복적 연속성)과 이질성(발전적 불연속성)이 동시에 보인다. 타락 기사(창3장)는 창조 기사(창1-2장)에 근거를 두고 해석되어야 한다. 홍수 심판(창6-8절)과 바벨탑 사건(창11장)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했음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전략을 바꾸어 아브라함을 택함(창12:1-3절)으로 민족들 중 선민을 세웠다. 선민을 통해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마침내 다윗 왕국의 형태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졌다(삼상하). 시간이 지나며 다윗의 후손도 하나님의 법대로 통치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나라로 변해갔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다윗 왕국을 멸망시켜 지상에서 사라지게 했다(왕상하). 하나님 나라 건설을 망각한 인간과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존재 의미와 목적을 잃는다. 원복음 (창3:15절)의 예언대로 하나님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는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가 세울 하나님 나라는 이전의 하나님 나라(아담, 노아와 다윗의 시대)와 다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을 선포했다(마4:17절). 놀랍게도 그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구약 시대와 달리 땅의 나라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땅의 나라 형태를 완전히 부정했다. 하나님 나라는 일시적인 인간의 나라와 달리 영원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천국으로 불린 까닭이다. 그러나 그의 재림 때 하나님 나라(not yet consummated)는 밝히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때까지 하나님 나라(already fulfilled)는 실재하면서도 눈에 안 보이게 감추어질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되는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답한다. 천국 복음이라는 말씀의 씨(18-19절)와 알곡 신자라는 씨(24-30절)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복음과 복음으로 무장된 알곡 신자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 곳곳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문화 사명(창1:28절)과 원복음(창3:15절)이 예언한 대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성취한 구속의 은총을 받은 인류(여인의 씨)의 참여로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 때 교회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할 것이다. 몸의 주인인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이 세상에 왔다면 그의 몸인 교회도 당연히 주인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이렇게 창조 기사의 신국론은 성경 마지막까지 관통하는 주제이다. 창조 기사를 무시한 기독교 신학은 타락 기사로부터 출발하며 구속과 구원이란 신학적 주제들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한다. 이런 구원론은 구원 받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한다. 그냥 구원만을 기뻐한다. 이에서 벗어나려면 기독교 신학은 타락 기사로부터 창조 기사로 되돌아가야 한다. 전자의 신학은 헬라 사고에 그러나 후자의 신학은 히브리의 사고에 각각 지배된다. 창조 기사가 주장하듯이 성경은 당연히 히브리 식 사고로 해석돼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진정한 개혁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7115676
146 no image 구속과 구원의 목표
장창수
2966 2014-02-21
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5)/창세기 묵상(88)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고에 따라 성경을 연구하며 구원과 교회를 최우선시하는 교리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구원은 거듭남으로 성장과 삶을 전제한 출생이다(요1:12-13절). 출생은 삶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구원이라는 출생보다 성장과 삶에 보다 더 큰 관심을 두어야 했다. 구원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이지만 하나님 나라라는 객관적이며 객체적 공동체의 시민으로의 출생을 뜻한다.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 시민 역할을 하기 위한 출생이란 뜻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가 배제된다면 구원은 방향과 목표를 잃는다. 목표를 잃은 신앙 삶은 소극적이며 피동적일 뿐이다. 이것이 구원만 생각하는 신학에 내재된 문제이다. 그리고 교회는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예배, 교육, 교제, 전도와 선교 그리고 구제 등등으로 구성된 교회 삶은 성도들이 자신의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 시민 노릇을 잘 하도록 돕는 훈련과 양육 과정이다. 교회는 보내는 목회를 위해 모으는 목회에 힘써야 한다. 이때문에 예수님은 신자들이 교회가 아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말했다. 그 역할로 만인이 하늘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말한다(마5:13-16절). 예수님은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먼저 선포한 후 산상수훈을 말했다. 이 점에서 산상수훈은 시내산 율법과 비슷하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이미 광야에서부터 하나님의 법을 미리 지키며 살아야 했다. 율법은 가나안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법이었다. 신약 시대 예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 나라가 출발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도 법이 필요했다. 시내산 율법이 가나안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과 관계되듯이 산상수훈도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와 긴밀히 관계된다. 산상수훈이 교회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법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창세기가 처음부터 예언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출발시킬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법을 만들어 남겨야 했다. 그렇다면 타락 이후 성경의 구속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타락 기사에서 출발하는 기독교 신학은 구속사를 구원의 역사로 본다. 구속사란 단어 자체가 이를 증거한다. 그러나 창조 기사에 근거를 둔 기독교 신학이라면 구속사란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어떻게 실현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역사라고 볼 것이다. 차이는 전자의 신학이 구속만 말한다면 후자의 신학은 구속에 바탕을 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한다. 후자의 신학은 구원과 구속을 죄악 세상으로부터 해방이나 탈출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출발점으로 본다. 타락 이후의 구속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하나님이 원복음 (창3:15절)을 통해 메시아를 약속했다. 원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그의 구속을 통해 세워질 것을 예언했다(골2:15절). 타락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창1:26-28절)을 포기시키지 못했다. 죄인인 인류는 구속의 은총이 없이 하나님 앞에 종이나 일군으로 다시 설 수 없다. 이 때문에 메시아의 구속은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겨냥해야 한다. 셋의 후손은 처음 원복음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한 동안 살았다. 그러나 소망을 포기하고 사람의 딸을 취해 연혼했다. 하나님은 진노하여 아담의 후손인 옛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여 멸망 시켰다(창6-8장). 홍수 후 노아의 후손이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인류는 바벨탑을 쌓아 창조주와 구원주 되는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다. 하나님은 징벌로 민족과 언어 별로 인류를 흩었다(창11장). 그들 중 하나님은 하나의 민족을 택해야 했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이유였다 (창12:1-3절). 그는 메시아의 혈통적 조상인 셋(창5:3-32절)과 셈(11:10-32절)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소명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함이었다(창17:8절).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상속 받을 선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구속의 은총이 필요했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 하나님은 세계적 기근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냈다.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애굽인과 다르지 않았다. 차이는 출생 전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이들이 가나안 땅을 상속받기로 약속 받았을 뿐이다. 이것이 구약이 설명하는 예정과 선택(엡1:4-6절)이다.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이 작정을 실현시켰다. 하나님의 전적 개입과 어린양의 죽음으로 가능했다. 비로소 이스라엘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았다(출20-23장).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준수해야 할 하나님의 법이다. 이 법에 의해 통치된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세워질 유일한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통치란 방식에서 이스라엘은 인간에 의해 통치되는 이방 나라들과 완전히 달랐다(신4:5-6절). 그럼 성막과 성전 제도는 무엇을 위하는가? 성전은 하나님이 거주하며 통치하는 신전(神殿)이었다. 그곳에서 각종 제사도 이루어졌다.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은 계속 죄악을 저지를 것이다. 이의 사함이 필요했다. 죄 사함만이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 가능케 했다. 이스라엘은 구속의 은총 위에서만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였다. 이 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완전히 달랐다. 정착 후 사사 시대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절) 하나님의 법을 버리면 어떤 불행이 선민에게 오는지를 사사기가 잘 증언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율법을 시행시키고 재판할 통치자가 필요했다. 사울과 다윗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유였다. 사울은 통치자로서 율법 준수에 실패했지만 다윗은 성공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을 통해 명실공히 하나님 나라가 되었다. 이방 나라가 다윗에게 굴복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에게 굴복하는 것이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12절) 구약은 다윗이란 인물을 통해 메시아가 제 2의 다윗으로 올 것을 예언했다(겔34:23-24절). 유감스럽지만 다윗 왕국은 모형으로 앞으로 올 메시아가 세울 하나님 나라를 계시했다. 모형은 원형을 위해 물러나야 한다. 왕들의 불순종 때문에 다윗 왕국은 결국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왔는가? 구약의 예언대로 구속을 성취함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함이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것(마4:17, 막1:15절)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구약 시대와 달랐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가 세운 하나님 나라는 구약 예언의 성취와 완성 차원에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달라랴 하며 이 세상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예수님 재림 때 자신의 화려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 이전 하나님 나라는 눈에 안 보이는 실체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활동한다.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는 눈에 안 보이는 실체라면 교회는 지역마다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실체이다. 여기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 나라보다 교회가 늘 눈에 띤다. 당연히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보다 교회를 크고 아름답게 세우려고 늘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은 물론 성경 처음부터 보여진 하나님의 경륜에 반한다. 중세 유럽 교회가 실패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 일에 실패한다. 교회를 부활한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 있다. 몸이 몸을 위해 존재한다면 비만이란 못쓸 병에 걸려 스스로 죽는다. 교회란 몸은 하나님 나라를 대상으로 열심히 활동할 때 비로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성경만 아니라 상식도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락 기사(창3장)에서 출발한 기독교 신학은 창조 기사(창1-2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을 읽는데 실패하며 구원과 교회만 보도록 늘 가르친다. 두 신학은 서로 보완해야 한다. 전자의 비관적 세계관이나 후자의 낙관적 세계관, 모두 필요하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야 하지만 이 세상은 결국 불로 심판 받아 멸망 당할 것이다. 당연히 신앙 삶은 두 면을 띤다. 능동적, 적극적 현실 참여와 피동적, 소극적 현실 도피. 눈에 안 보이는 분야인 기독교 윤리와 가치관 면에서 적극적으로 세상 삶을 살아라! 그러나 눈에 보이는 분야에선 소극적으로, 피동적으로 그리고 비관적으로 처신하라! 이를 위해 눈에 안 보이는 성경의 가치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를 지배하도록 노력하라! http://blog.naver.com/rassvet/40206572317
145 no image 성경의 하녀인 신학
장창수
2300 2014-02-21
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8)/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8)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신학은 그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학문적 연구 결과이다. 성경은 완전하고 변함없는 진리를 말하지만 신학은 이를 불완전하게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신학자나 교회도 자신의 해석이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교회처럼 신학도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 특정 교단이나 교파의 신학이 완전할 수 없고 성경의 가르침에 비교적 가장 근접한 신학만 있을 뿐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했다(엡3:5절). 선지자는 물론 사도들은 구약 성경에 정통한 히브리 인들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인은 일원론자이다. 사도들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헬라 문화와 언어를 이용하여 사도들은 구약 성경에 이어 신약 성경을 기록했다. 이것은 신약 성경이 헬라 철학을 지지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이원론은 타락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시대가 끝나며 사도 시대도 끝났고 교부 시대가 왔다. 대부분의 교부들은 비히브리 인들로 헬라 문화와 철학에 익숙했다. 이들은 당시의 지배 세력인 헬라 철학에 의존하여 성경을 해석함으로 기독교 신학을 세웠다. 기독교는 히브리 사고를 보여주는 창조 기사(창1-2장)를 무시하고 타락 기사(창3장)로부터 신학을 출발시켰다. 앞으로 올 메시아에 의한 구속과 구원(창3:15절)만이 이들에게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사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에 따르면 구원은 영적 거듭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 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나 천당이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나그네와 객과 같은 존재로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산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조직신학적(연역적) 연구 방법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각론들이 전개된다.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종말론.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맞춰 성경을 분해하고 분석한 후 관련 성구들을 각론에 편입시킨다. 여기 몇 가지 문제가 발견된다. 이들 주제 이외 다른 중요한 주제들이 소홀히 다루어진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이다. 당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들어가는 천당 또는 천국 즉 내세로 보았다. 이것이 각론 중에 신국론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도 말한다. 이것이 간과되었다. 이런 천국 개념에 따르면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객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윤리학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죄악 세상 가운데 성별 된 곳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삶을 살면 그만이다. 그리고 조직신학은 성경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만을 주제별로 연구한다. 성경 본문의 역사성이 무시된다. 신자들의 삶은 시시때때로 변하지만 교회는 늘 동일한 진리만 전해준다. 이 점에서 조직신학의 교리들은 적용에 무관심한 원리주의 또는 원칙주의 같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방식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할 때마다 영원한 진리를 다른 국면으로 설명한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성경 신학이 20세기 초에야 비로소 발전했다. 역사성을 고려하며 성경을 연구하는 귀납적 방법이 기독교 신학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주제별로 성경을 연구한다는 점에선 성경신학도 조직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제별 연구 방법은 시계가 아닌 시계의 부품들을 연구하는 식이다. 한편 부품들을 잘 알게 하지만 다른 한편 부품들이 구성한 시계와 그 기능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즉 술어(術語)이 정의에는 탁월한 데 술어들이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연결되고 그 결과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냥 주제들이 진주 구슬들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들을 엮어 보화로 만들어야 한다. 이 일은 성경의 본문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종교개혁 이후 본문만 아니라 문맥을 감안한 성경 연구 방법이 나타났다. 칼빈의 역사문법적 성경 해석(historical-grammatical interpretation)이 좋은 예이다. 해석을 위해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문법적 구성을 연구하란 뜻이다. 성경 본문에서 조직신학의 주제들은 이렇게 저렇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문법적으로 서로 얽힌다. 이로써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일차적 가르침이 드러난다. 이 일차적 가르침은 신학적 주제들(2차적 가르침들) 사이 통섭적 관계에서 나온다. 물론 일차적 가르침들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밝히 보여준다. 이 일은 분석과 분해를 좋아하는 조직신학적 방법으론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에 내재된 약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조직신학의 각론들이 전하는 2차적 가르침들만 말하는데 만족한다. 다시 말해 술어의 정의와 내용만 전하는 식이다. 이는 극복돼야 한다. 각론들은 나름 성경 해석에 유용하다. 조직신학에서 신학적으로 잘 정의된 용어들은 성경 해석과 설교를 위한 기초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이 용어들은 성경 본문 안에서 서로 만나고 얽히며 융합적인 가르침을 준다. 분해된 부품들을 재조립하여 시계로 만드는 과정과 같다. 이 때 성경 본문의 역사적/문화적 여건과 상황은 이에 맞추어 선택된 신학적 주제들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이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신학은 성경 본문 안에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보편적 창조 기사를 보여준다. 6일 창조, 인간 창조 그리고 문화 사명이 기록된다. 이들은 수많은 2차적 가르침들(신학적 주제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1장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일차적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창1:28절)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며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2차적 가르침들은 1차적 가르침을 위해 봉사한다. 이런 연구가 잘 수행된다면 일차적 가르침들을 신앙 삶에 적용시키는 일이 참으로 용이해진다. 아울러 특정 역사적/문화적 상황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 삶과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려진다.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영원한 진리(조직신학)가 어떻게 달리 설명되는지도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신학원의 수학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각종 신학들 – 조직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과 실천신학 - 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먼저 성경 원어는 물론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친 후 3년째부터 두 신학을 이용하여 어떻게 성경 본문을 해석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해석의 결과는 역사신학의 도움으로 검토 받은 후 실천신학에 접목시킨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배운 신학들을 통섭적으로 성경 해석에 적용시키는 훈련은 아주 중요하다. 적어도 일년 동안 이런 훈련을 해야 비로소 성경과 신학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성경 해석 훈련은 구약의 모세오경과 신약의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제 5복음서)으로 시작함이 좋다. 모세오경은 성경 전체의 기초이며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구약의 역사적 성취이면서 동시에 신약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책들의 해석은 목회하면서 배운대로 스스로 하면 된다. 이런 성경 해석 훈련이 없다면 신학은 목회와 신앙 삶을 위해 무용지물이 된다. 성경과 신학이 따로따로 논다. 그 결과 성경은 지혜서, 교훈집 또는 옛날 이야기로 전락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성경보다 절대로 앞설 수 없다. 신학은 기독교의 전부가 아닌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들만 가르칠 것이 아니다. 신학들을 성경 해석에 이용하도록 반드시 훈련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학은 실천적 성격을 잃고 신(神)과 종교에 대한 전문적 지식인 종교학으로 전락할 것이다. 기독교도 구원의 종교란 지위를 잃고 종교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6918572
144 no image 예수와 사도들 사이 교리적 차이
장창수
2415 2014-02-21
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7)/사복음서 묵상(119) 사복음서와 서신들 사이 쉽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사도들의 서신서에 사용된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란 단어의 용례들이 사복음서에 비해 너무나 적다. 하나님 나라는 사복음서에서 53회 그러나 서신서에선 6회 각각 사용된다. 그리고 천국은 사복음서에서 36회 그러나 서신서에선 단 1회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 7회 정도 사용된다. 사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나 천국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한 복음서 당 평균 20회이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사복음서의 매장마다 평균 1회 정도 사용된다. 이에 반해 서신들에선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21권의 서신들에서 이 단어들의 용례들은 겨우 7회이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에게 거의 관심사 밖이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우리를 당황케 한다. 어떻게 스승 예수님과 제자들인 사도 사이 이런 차이가 나는가? 겉으로 보아 사도들이 스승을 전혀 따르지 않는 듯하다. 이 사실은 교회란 단어의 용례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신약 성경의 전체 110번의 용례들 중에서 사복음서에서 단 2회 그리고 서신서에 88회 사용된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선 20회 사용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 사복음서의 주관심사라면 교회가 서신들의 주관심이다. 스승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통치(나라)에 그러나 제자들인 사도들은 항상 교회에 관심을 두었다. 제자들이 스승에게 불순종했단 말인가?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교회를 중심에 둔 사도들의 사역이 결코 스승의 주사역인 하나님 나라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있다. 우선 복음서와 서신들 사이 구속사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복음서의 시대 교회는 아직도 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신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이미 출생한 교회(행2장)를 대상했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그리고 서신들은 교회에 관심을 둘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사도들은 부활한 스승 예수님으로부터 목양 사명(요21:15-17절)을 직접 받았다. 사도들은 중생한 신자들과 함께 모여 주일마다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께 예배하며 경배했고 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서로 교제케 함으로 성장을 도와야 했다. 이 모두 교회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앙으로 인해 핍박 받는 시대 고난 당하는 신자들을 교회가 잘 돌보도록 지도해야 했다. 이런 시대 자연스럽게 사도들은 교회 바깥보다 내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했다. 핍박 시대는 몇 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사도들의 일차 관심은 교회와 신자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럼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혀 잊었단 말인가? 결코 아니었다. 교회는 인류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전초 기지였다. 구약 시대 에덴 동산과 약속의 땅 가나안 같은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통치는 전초 기지로부터 점점 더 확산되어 나갈 것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전초 기지들을 세웠다. 나중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의 핍박은 예루살렘과 유대에 치우쳐 있던 복음을 소아시아로 전파되도록 도왔다. 어디서든지 복음을 듣고 거듭난 신자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이들이 사회에 나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 만큼 더 커진다. 서서히 인류 사회가 변하기 마련이다. 천국 복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초자연적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를 잘 안 사도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사역을 수행했다. ‘모으는 목회’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겨냥한 ‘보내는 목회’를 위했다.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복음 전파와 목회 사역을 했다. 이들은 히브리 인으로 창조 기사(창1-2장)의 신학을 너무나 잘 이해했다. 사도들의 교회관이 이를 잘 증명한다. 사도들은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 보지 않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엡1:23절) 그리고 그 머리는 부활한 그리스도 예수님으로(골1:18절) 보았다. 상식적으로도 몸은 몸 자체를 위하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하면 안 된다. 몸은 그 주인의 삶을 위해 그리고 그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이용되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인 부활주 그리스도의 주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이다. 교회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활동해야 함을 사도들은 너무나 잘 알았다. 부활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 사이 어떤 교리적 충돌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세 유럽 교회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사도들을 신학적으로 오해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보다 교회를 가장 중요한 사역 현장으로 생각한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론 그의 가르침을 저버린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신학과 사도들의 교회관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것은 히브리 인의 사고에 따라 기독교 신학을 세우지 못한 불행한 결과이다. 초대 교회 이후 대부분의 교부들은 이원론적 헬라 철학의 영향 아래 구약 성경보다 신약 성경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 세계를 창조한 저급한 신과 싸움의 신이라고 이해했다.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영의 세계를 창조한 신과 사랑의 신이라고 해석했다. 구약 성경의 기록과 그 목적이 경시되었다. 아울러 창조 기사(창1-2장)의 신학도 무시되었다. 큰 실수였다. 창세 전 세워진 하나님의 작정은 제일 처음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드러났다. 하나님의 행위는 이전 이미 세워진 계획에 따른 것임을 논리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창조 기사가 전하는 진리나 가르침은 당연히 구약 성경을 계속 관통한 후 신약 성경으로 넘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이를 증언한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4-35절) 사도 바울도 증언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5-27절) 예수님이 전한 것들은 이미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계시하거나 예언 한 바였다(히1:1-2절).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로 창세로부터 감추어진 것들을 밝히 드러냈다. 결국 선지자들도 구약 시대부터 창세로부터 감추어진 것들을 계시했다는 뜻이다. 창세로부터 감추어진 것들은 창조 기사를 통해 제일 처음 드러났다. 이 때문에 창조 기사는 아주 중요하다. 구약 성경의 계시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창세 전 비밀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교부 시대부터 구약은 경시되었다. 교부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달리 구약을 낮게 평가했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이 창조 기사(창1-2장)가 아닌 타락 기사 (창3장)로부터 출발했던 이유이다. 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는 여기에 기인한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한 사도 바울은 왜 자신의 서신들에서 전반부는 교리에 그러나 후반부는 윤리에 나누어 기록했는가? 윤리들은 교회 삶, 가정 삶, 부부 삶과 직장 삶에 관한다. 가정과 직장은 교회 밖의 영역에 속하며 가정과 직장은 인류 사회를 구성한다. 바울도 하나님 나라를 결코 잊지 않았다. 다른 사도들도 같은 신학적 자세를 견지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 교회 그리고 가정 사이 신학적 관계가 잘 정립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이 주사명임을 알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신자들을 잘 양육하고 가정에서 신앙 삶을 잘 실천하도록 도와야 한다. 가정이 건강하면 사회도 건강해진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워진 신자의 가정 수가 증가한다면 하나님의 통치(혹은 나라)는 인류 사회에 저절로 실현될 것이다. 이를 목적하며 교회는 전세계 곳곳에 지교회들이 세워지도록 전도와 선교를 한다. 이로써 창세기의 문화 사명(창1:28절)과 마태복음의 선교 사명(마28:18-20절)은 저절로 수행된다. 창조의 목적(창1:26절)과 구속의 목적(창3:15절)도 동시에 성취내지 완성될 것이다. 이를 위해 조직신학의 개편이 요한다. 신국론이란 각론을 새로 만들고 교회론과 종말론 사이 놓아야 한다. 신국론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 신학은 물론 가정론과 기독교 윤리학을 포함시켜야 한다. 기독교 윤리는 교회에서 가르쳐지지만 제일 먼저 실천되어야 할 곳은 가정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훈련 잘 받은 식구들은 지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 나라 시민만이 인류 사회에서 소금과 빛 역할을 할 수 있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6845693
143 no image 하나님의 영은 머리 셋 달린 떠도는 유령이 아니다.
박인철
2763 2014-02-20
 하나님의 영은 머리 셋 달린 유령(떠도는 영)인가? 평양신학교 출신 P목사 - 1. 모든 동물에게는 각혼이 있다. 사람에게 있는 각혼을 혼, 또는 넋이라 하고 정신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만 주셨던 영혼은 아담의 범죄로 죽어 사람은 다 영혼이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택하신 자에게는 영혼을 살려 거듭나게 하시고 육체가 죽을 때에 영혼은 분리되어 낙원에 이른다. 총신 출신 P목사 (현 합신측 S교회 원로) - 1. 삼위 하나님은 머리가 셋 달린 유령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만물에 안계신 곳이 없으신 그의 신은 각기 삼위의 역할로 일하신다. 위의 가르침은 오래 전에 예배설교로써 배운 내용들이다. 삼위 하나님의 신이 그로부터 나온 만물에 내재하지 아니하신 곳이 없다는 것을 실체적 존재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한계로 이해하는 소위 물질적인 것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보통은 하나님의 영, 사람의 영이라 하면 이는 마치 물질(육체)이 아니어서 실체가 없는 존재로 떠돌아다니는 유령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은 원한을 품은 어떤 죽은 자의 귀신이 떠돌아다니는 유령으로 나타나 실체가 없으니 직접 물질적인 흉기로 육체적 위해를 가해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고 무서운 그림자나 무서운 소리를 내어 사람을 놀라게 해서 원수를 갚는 그런 귀신으로 머리가 셋 달린 유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초에 땅이 혼돈할 때에 홀로 하나이신, 스스로 계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존재로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신은 혼돈의 모든 물질들을 명하여 각기의 일정한 성질을 갖게 하는 법칙의 질서를 세우시고 그 물질들의 변환, 순환, 대사의 법칙으로 모으고 조합하고 가르시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오늘까지 운행되게 하셨다 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주시는 지혜의 말씀과 과학(물리.화학.생물) 공부의 지각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하나님과 창조의 세계이다. 이 지각으로 그의 모든 창조 만물 속에 처음부터 그의 신이 같이 존재하시므로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것이며 우리의 머리털도 필요할 때에 순식간에 세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신 바 되신, 즉 만물과 항상 함께하시는 존재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계시는 전지하신 분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이라 함은 누구 기도의 요청이 있거나 필요하면 실체 없이 떠돌아다니던 하나님의 영이 어떤 것에 급하게 침투하거나 흔들어 놀라게 하는 능력을 행사하는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니고 우리가 간구하기 이전에 만물 속에 내재하셔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자로서 그의 뜻에 따라 그 만물 속에 이미 내재하시는 존재 자체의 근원이신 그의 신이 전능으로 행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즉 무소부재로 전지하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 영으로서 역사하신다 함은 우리가 이해하는 물질적 실체와는 별개의 존재로 따로 떠도는 영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그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간의 이동과 관여하심에 아무 제약도 받지 않고 역사하심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 대 비물질의 개념으로 구분짓는 애매한 개념의 틀로, 하나님의 영을 물질적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존재로서가 아니고 모든 만物이 그로부터 나왔기에 이로써 우리에게 확고하게 실체적 존재로 인식되는 만물과 같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신, 그의 영도 우리에게 실체적 존재로 인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해서 빛이나 공기가 실체도 없고 또 물질이 아니라 한다면 귀에 들리는 소리는 영인가? 그래서 떠도는 유령이 이상한 모양이나 무서운 소리로 원수를 갚는가? 빛의 입자도 물질이며 소리도 물질의 마찰로 발생되고 공기라는 물질로 전달되는 것은 우리가 다안다. 즉 빛도 소리도 다 물질적 존재인 것이다. 빛이 없는 공간도 물질적 실체이며 공기가 없는 진공상태도 같은 물질적 공간의 일부일 뿐인 것이다. 이것을, 영혼이 죽은 채로(육체로) 살며 영원한 죽음의 두려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그 마음의 두려움으로 때로는 빛이나 소리에 의한 것을 유령의 일로 생각하기도 하며 믿는다고 하는 이들 중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유별난 영(유령)의 세계의 일로 인식하기도 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코 물질과 또 다른 별개의 존재로 이분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창조주 하나님, 또는 그의 영이라 함은 스스로 있는 존재로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근원이 되시며 그에게서 나온 모든 만물의 존재와 그 순환과 변환과 대사를 지배하시는 근원적인 존재 자체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썩지않는, 즉 변하지 않는 존재 자체로 그로부터 나온 만물에 스스로 약속하신 불변의 질서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신실하심이 그의 본성임을 우리가 알게하심이다. 그의 본성이 신실하심이 아니라면 그는 우리 사람들처럼 그때 그때마다 그의 마음에 따라 수시로 유령처럼 나타나서 전능을 휘두르는 참으로 무서운 전능자이실 뿐일 것이다. 만물 중에 신실함 없이 조석으로 변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뿐인데 이는 에덴의 선악과와 만물도 하나님의 것이고 아담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만물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을 거부하고 둘로 분리시킨 것은 곧 사탄이 주는 불신을 받음으로 그 영이 죽어 하나님과 떨어지고 만물에서 따로 떨어진 사탄의 종이 되어 하나님 나라와 그 만물들을 사람이 자기들의 마음에 따라 파괴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온 우주의 모든 것은 만물이라는 물질적 개념으로 설명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 물질을 이해함에서 그 한계성에 스스로 갇혀 너무 쉽게 영의 세계를 물질세계에서 따로 떼어 유령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공중을 떠다니는 머리 셋 달린 유령이 되는 것이다. 불신으로 하나님의 세계에서 떨어져 땅의 육체가 되어 하늘의 온전한 세계를 보지 못하게 된 때문이다. 썩는다는 것도 물질의 변환, 대사, 순환의 법칙으로 물질의 질이나 형태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나 코의 냄새에 바뀌는 것일 뿐이다. 어느 물질이 썩거나 탄다고 해서 그 물질의 존재 자체가 결코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에 관하여 썩을 것이라 함은 죽은 영(영혼이 죽어 없는)들이 땅에 속한 육체로만 사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천지창조 이전의 하늘의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기초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심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 이 일에 그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전능하신 존재이신 분이 그 역할이 나누이신 삼위 하나님이시며 그렇게 삼위로 일하시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전능이신 그분이 간단히 말씀(물질의 법칙 =질서)으로 명하여 통합하고 나누어 천지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는데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성껏 흙을 빚어 물질의 변환을 일으켜 만드시고 그의 숨을 불어 넣어 생령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그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 지으신 바가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 지음 받은 본래의 아담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생령이 된 사람이 불순종, 불신의 범죄로 사람인 아담의 자유의지로는 결코 죄의 근원인 사탄을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영과는 구별되는 영적 존재임이 확인되었다. 즉 사람의 영은 조물주인 하나님으로 부터 그 생기를 받아 만들어진 몸(육체+영혼)으로서 조물주이신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만 그분의 질서 안에 거하는 생기를 지속적으로 받아 살게 된 영의 존재로 살아야 하는데 사탄으로부터 불신의 영을 받아 하나님께로 받은 생령이 죽어 에덴에서 쫓겨나서 오로지 육체의 사람으로 흙에 속하는 삶을 살게 되었음이다. 아담으로 인하여 영혼이 죽고 오로지 땅에 속한 육체로 태어나게 된 그 후손들은 오직 하나님이신 아들 예수의 영으로만 다시 살리워 장성해지면 주예수와 혼인함으로서 영원할 하늘나라에 입성할 영적 존재, 즉 다시는 분해되거나 변환되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지도 않을 하나님의 신실함의 본성을 받고 완전한 뜻의 영이라는 존재로 변화됨이다. 그러면,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 하는데 이렇게 땅에 매인 자로 태어나는 육체의 사람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면 그 영혼은 언제 아기의 몸에 들어가는가? 몸은 아기인데 영혼은 얼마마한 크기로 들어가는가? 엄마의 몸속에 착상하여 수태될 때인가? 6개월째일 때인가? 아니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인가? 아니면 엄마의 몸 밖으로 나와서 첫 숨을 쉬며 첫 울음소리로 하나님과 뭇 사람에게 탄생을 고할 때인가? 택한 자에게 성령이 믿음을 주신다는 것은 첫번 아담으로 인하여 영혼이 죽은 채로 태어 나는 사람의 죽은 영혼을 각각의 때에 따라 예수의 영으로 성령이 다시 살려 그 사람의 몸안에 잉태시키고 육체와 영혼이 한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서 그의 자녀로 장성하게 하신다. 거듭난 이들의 육체가 죽으면 그 영이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되어 육체는 땅에 잠자고 영혼은 낙원에 이르러 예수의 품에 안식한다. 이후에 예수 재림의 나팔 소리에 잠자던 육체들이 일어나 그의 영혼과 합하여 홀연히 온전한 몸, 즉 예수와 하나 되는 영으로 변화하여 이 땅의 사탄을 음부에 가두신 예수와 함께 천년을 왕 노릇하며 아버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원한 그의 나라에 예수의 신부로 입성한다. 본래 죽은 영으로 태어나서 예수의 영을 받지 못하여 거듭남이 없는 자들은 영혼이 없고 넋,즉 각혼만 있는 죽은 영으로 조물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동물과 같은 존재로 살다가 죽으면 둘째 사망으로 사탄과 함께 영원한 불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가르침과 성경공부로 지각하게 된 실체적 믿음이다. 세상, 아니 심지어 교회 안에서라도 아주 도덕적이며 선을 베풀며 열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하여도 그가 예수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죽은 자로서 사탄으로 죽은 영의 육체로만 사는 영혼이 없는 자일뿐이다. 아이들을 부추겨 영으로 뜨겁게 예배하라 하며 세속에 찌들어 만물보다 부패한 그들의 마음이 곧 영인 것처럼 생각하여 하나님의 성호를 망령되이 부르게 하는 죄를 교회들이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으로 예배한다 하면 대개가 아주 쉽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옷차림이나 그외의 보이는것들, 예배의 경건한 모양의 예전적인 모든 요소들을 똥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세속에 찌들은 자기의 마음이 내키는대로 예배하라는 식으로 오해하게 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경망스럽게 불러대며 망령되게 하는 죄를 범함이다. 이것이 사탄이 첫째 아담으로부터 결코 끊이지 않고 이시대의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행하는 악이다.교회에서의 이 모든 결과의 책임은 교회의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의 직분을 받은 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정판 개역성경이 영으로 예배하라 한 것은 사람에게 다시 살린 영혼을 주셔서 육체와 영혼이 하나로 온전한 몸이 된 예수의 영이 된 사람으로서 예배하라 함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개정판 성경이 점,획을 바꾸어 이렇게 복잡한 해석이 필요하게 하는 혼란과 이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여 일어나게 되는 말씀의 약화에 대한 중대한 책임의 심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높이고 찬양하는 행위의 최고 가치인 예배의 주객을 전도시킨 아주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먼저 앞서서 예배를 주관하는 주인이 되고 하나님은 예배의 객으로서 참석자, 보는 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이름으로 모이는 예배의 다수가 그러함이 실제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가 주인이신 주일이 거룩함과 같이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 즉 신령으로 예배하여야만 거룩한 예배가 되며 신령한 흰 예복을 입고 거룩하게 된 백성으로서 마음(혼.정신)과 뜻(의지)과 힘(육체의)을 다하는 진정으로 예배할 때에만 하나님이 예배자와 하나되어 같이 즐거이 부르시는 찬치가 됨이다. 이것을 우리가 다 알터인데 실제로는 거추장스런 신령함의 흰예복을 거부하고 그냥 내 맘, 내 이름의 편한 옷들을 입고 망령되이 부르짖는다. 이렇게 자기들을 위한, 자기들에 의한, 자기들의 예배를 만들고 있는 그 예배시간 동안에 하나님, 예수의 이름은 시장판에서 싸구려 떨이팔기로 팔려지듯이 망령되이 불려지는 모욕을 당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곧 그의 영은 공중을 떠돌아다니는 머리 셋 달린 유령이 아니다.즉, 하나님의 영이라 함은 하나님의 신적 존재로서의 전체, 소위 물질적인 것을 따로 떼어놓지 않은 온전한 하나인 총체적 의미로서의 존재인 하나님을 말함이며 그의 영이 역사하신다 함도 그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영, 또는 영혼도 육체와는 별개로 공중에 떠다니는 유령이 아니다. 예수의 영으로 다시 살리워 육체와 함께 우리의 몸에 있게 된 영혼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한 개체) 된 영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영이라 함은 하나인 그의 인격 전체를 말함이며 무슨 영이라 함은 하나인 그 존재의 총체를 말함이다. 이것이 선진들의 가르침이다.
142 no image 칭의와 성화 사이 관계
장창수
2645 2014-02-18
사복음서 묵상(118)/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6) 타락 기사(창3장)로부터 출발하는 기독교 신학에서 구원이라는 신학적 주제가 다른 주제들을 거의 지배한다. 인간은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이며 구원은 죄악스런 세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교회는 구원 받은 신자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재림 사건은 인간이 받은 구원의 완성인 영화(榮華: glorification)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구원은 좁은 개념 또는 하위 개념으로 성경이나 신학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성취시킨 구속의 결과이다. 구속은 사망과 죄의 노예인 인간을 해방시켜 하나님 앞에 자유인으로 서게 한다. 결국 구원(이신칭의)은 자유인이란 새로운 신분의 획득을 뜻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선 것이지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창조 기사로부터(창1-2장) 출발하는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가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하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라고 말한다. 두 신학들 사이 차이가 있다. 타락 기사의 신학은 예수님을 구원자(Savior)로 그리고 구원을 칭의 관점에서 주로 설명한다. 그러나 창조 기사의 신학은 예수님을 만유의 주(主: Lord )로 또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그리고 구원을 성화 관점에서 소개한다. 4복음서가 이를 잘 증명한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며 즉시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공개적으로 선포했다(마4:17, 막1:15절).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마4:23, 9:35절). 그가 행한 가르침, 기적과 신유는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 내지 임재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마10:7-8절).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10:9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절) 왕 자신의 임재와 말씀과 성령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 또는 임재를 증명한다. 결국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는 구원이나 구속보다 훨씬 상위 개념이다. 창조 기사(창1-2장)로부터 계시된 하나님 나라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윗 왕국에 이르기까지 실패의 역사로 점철한다(구약 성경).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하고 이 세상에 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다. 위의 성구들이 이를 증언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 중반을 맞으며 전한 천국 비유 7개도 증명한다(마13장). 이들의 목적을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5절)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는 창세로부터 성삼위 하나님 사이 합의되었고 감추어진 경륜에 따른 것으로 예수님에 의해 밝혀진다(롬16:25-26절). 이 비유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부터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초자연적 성격, 기적적 성장력과 찬란한 미래성을 계시한다. 출발이 초라하기에 쉽게 무시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절) 이 성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 또는 주인임을 전제한다. 자신을 믿고 회개한 자만이 중생함으로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1:12-13, 3:1-15절). 공생애 말기를 맞아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죽어야 했다. 구속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기 예수님은 또 다시 천국 비유 3 가지를 남겼다(마25장).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와 염소와 양 비유. 누가복음에 기록된 므나 비유는 이 비유들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눅19:12-13절: 마25:14절 참조) 곧 발생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은 하늘 아버지에게 왕권을 받으러 가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언젠가 그는 반드시 재림할 것이다(마25:31절). 그 목적은 초림과 재림 사이 구원 받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룬 성화의 정도를 재림부가 직접 보고 상급을 주기 위함이라고 이 비유들은 말한다.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나 므나를 받음으로 영광스런 종(칭의)이 된 것은 신앙 삶의 전부가 아니라 출발일 뿐이다. 칭의는 성화라는 선(線)이 인도하는 영화라는 목적지(도착점)를 가리키는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달란트 비유에서 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절)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할 때(창1-2장) 자연 세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별도로 예비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정식으로 출발했고 성화를 이룬 신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판정하는 임금은 재림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부활 후 처음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났다. 이 때 예수님이 보인 행동은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인간 창조 방식(창2:7절)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1-22절) 이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를 뜻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속사적 사건으로 인류의 구속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알렸다. 세례 요한이 이를 이미 예언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1:33-34절) 바울도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절) 무엇을 위해 예수님은 죄인을 되살려 주는가? 물론 아담의 타락으로 잃었던 지위 또는 직분인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군으로 다시 세워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주사역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목표와 결과인 하나님 나라이다. 이 때문에 부활한 예수님은 승천 전 40일 동안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려는 뜻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했다(행1:3절). 사역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주력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알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고(행20:25, 28:23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했다(행19:8, 28:31절).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친 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문화 사명(창1:28절)을 명했다. 마찬 가지로 새로운 창조 사역을 마친 후 승천 전 예수님도 교회에게 선교 사명을 명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18-20절) 문화사명이나 선교사명은 모두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을 목표한다. 구원론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4복음서를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타락 기사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은 예수님의 주사역이 하나님 나라임을 간과하는 실수와 잘못을 범한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가 설명하고자 하는 가르침에도 반한다. 이 두 비유들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과 재림 사이 신학적 관계를 밝혀주며 동시에 구속의 결과 성도들이 상속할 하나님 나라의 두 모습인 현재성(already fulfilled)과 미래성(not yet consummated)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들은 대속 사역의 결과인 인류의 구원을 이미 기정 사실로 보고 하나님 나라의 성취을 말하며 동시에 완성도 내다본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구원의 완성인 영화를 저절로 동반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안 사도 바울은 당연히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도 강조해야 했다. 서신의 전반부에서 신론, 인간론, 기독론과 교회론에 근거를 둔 구원론을 교리적으로 설명한 후 후반부에서 윤리를 비로소 강조한다. 구속의 은총을 받은 인간(이신칭의)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골1:13-14절). 당연히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한다(성화). 바울은 믿음과 윤리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천국 비유들의 교훈과도 일치한다. 초림과 재림 사이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 노릇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성령으로 무장한 후(마25:1-13절: 열 처녀 비유) 받은 은사를 사용하여 배 이상으로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14-30절: 달란트 비유). 그 여부는 윤리적 행위로 증거될 것이다(31-46절: 양과염소의 비유). 교회에서 이런 가르침을 받은 후 신자들이 실천할 수 있는 현장은 교회, 가정, 직장 그리고 사회이다. 바울은 윤리를 이들 분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한다. 신앙 삶은 실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교회 밖 인류 사회에 눈에 안보이지만 세워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은 창조 기사(창1:26-28절)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이 줄곧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6572317 : 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4)
141 no image 하나님 나라와 교회
장창수
2593 2014-02-14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4)/창세기 묵상(87)/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4) 창세기 1장의 절정은 문화 사명(창1:26-28절)이다. 이 사명은 인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의 절정은 가정 제도(창2:18-25절)이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가장 확실하게 실현시켜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내용을 더욱 심화시킨다. 유감스럽지만 타락 기사에서 출발하는 기독교 신학은 문화 사명과 가정 제도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죄악 세상으로부터 구원만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분석과 분해를 통해 성경을 연구하는 연역적 방법 때문이다. 이들 이외 다른 중요한 주제들을 그만 놓친다. 그 결과 역사적 사실들로 구성된 창조 기사라는 이야기가 전하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그만 보지 못한다. 이것 또한 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이다. 창세기 1장의 문화 사명과 2장의 가정 제도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도록 돕는 실천적 방법과 수단이다. 조직산학적 연구가 이런 목적과 방향을 잃는다면 존재가 무의미하게 된다. 일관된 흐름을 보지 못하고 부분에만 늘 머물기 때문이다. 문화 사명은 하나님 나라가 인류의 문화 영역에서 세워짐을 말하며 가정은 하나님 나라를 세울 일군의 출생과 성장과 훈련을 가능케 하는 장소라고 가리킨다. 이로써 신앙 삶의 터전은 교회가 아닌 가정과 인류 사회라고 창조 기사는 성경 처음부터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히 지적한다. 창조 기사의 신학은 타락 기사로부터 출발하는 기독교 신학과 달리 세상과 인류를 낙관적으로 본다. 그렇다면 창조 기사의 신학과 타락 기사의 신학은 서로 대립하는가? 헬라 인의 사고에 그렇지만 히브리인의 사고에선 절대로 그렇지 않다. 타락 기사가 말하는 구원론은 타락한 인류를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일군으로 다시 불러 세우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에 의해 역사적으로 성취된 구속의 의미를 사도 바울은 정확히 이해했다. 구속의 결과 얻은 구원은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뜻하며 이는 예전에 하나님의 정한 선한 일을 위함이라고 그는 증언했다(엡2:8-10절). 창조 기사(창1-2장)는 하나님이 창세전 계획하고 목적했던 바(엡1:3-6절)를 처음으로 밝혀주는 계시이다. 이 계획은 성경 끝까지 관통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신학의 각론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다시 설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과 교회론은 모두 그 자체에만 머물지 말고 창조 기사(창1-2장)의 신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문화 사명(창1:28절)의 내용은 이들 각론의 방향과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지적한다. 이 사명은 두 명령으로 구성된다. 전자는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에 그리고 후자는 인류 사회가 다스려야 할 자연과 만물에 각각 관련된다. 두 명령을 실천하려면 인류 사회는 인간은 물론 자연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인간학과 자연학이라는 두 과학들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두 영역이 만나는 곳에 사회학(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이 출현한다. 결국 인문사회과학(문학, 역사, 철학, 경제, 정치, 사회와 문화)과 자연과학(생물학, 물리학, 화학, 수학)이라는 두 영역은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을 가능케 하는 수단과 방법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과학 활동으로 수행된다. 그 정신은 무엇인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나뉠 수 없다. 그러나 신애(神愛)가 인애(人愛)보다 앞선다. 달리 말해 신애는 인애를 통해 표현된다. 이런 정신으로 과학 활동을 한다면 인류 사회는 발전하고 성장하기 마련이다. 아울러 인류 사회에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인류 사회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점점 더 흩어질수록 하나님 나라의 영역도 전세계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종국적으로 인류 사회가 곧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었다(창1:26-28절). 이를 쉽게 하도록 하나님은 가정 제도(창2:18-25절)를 창설했다. 가정은 인류 사회의 최소 단위이면서 동시에 최대 공동체인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공동체이다. 가정에서 사랑으로 잘 훈련 받은 식구들 또는 자녀들은 사회에서도 훌륭한 일군이 된다. 가정에서 가장의 지도아래 창조 신학, 안식일 제도와 선악과 규례를 준수하며 신앙 교육을 받는다. 아울러 문화 사명의 수행을 위해 필요한 인성 교육과 과학 교육을 가정에서 받는다. 결국 인류 사회의 미래는 가정의 역할에 달린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부부 관계, 결혼 생활, 가정 생활 그리고 가정 교육이 무너지고 있다. 부모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 학교와 교회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부모는 아이를 낳고 육적으로 양육하는 단순한 역할로 끝난다. 아니다. 성경은 가정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함으로 가장을 비롯한 부모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부모는 가정에서 영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선생이어야 한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 관계가 자녀들의 성격과 자질 그리고 미래까지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모와 가정에 관련된 가르침들이 교회에서도 참으로 희귀하다. 출세, 성공, 번영과 형통에만 교회가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가 성경을 부분적으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 기사로부터 출발하는 기독교 신학은 가정보다 교회를 더 강조한다. 가정들이 교회를 위해 희생 당한다. 기독교 신학은 교회를 나라, 사회, 가정과 개인보다 최상위에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 기사에 따른 신학은 교회란 가정을 도와 인류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돕는 방법과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사복음서에는 교회란 단어가 단 두 번 사용된다(마16:18, 18:17절).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란 두 단어가 사복음서의 전문 용어이다. 예수님의 주사역이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란 뜻이다. 반면 사도행전과 서신들에선 교회가 전문 용어이다. 이 둘 사이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사도들의 사역지인 교회는 스승 예수님의 사역인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구원론과 마찬 가지로 교회론과 목회학의 목표는 교회나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여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보다 교회를 더 많이 말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 후 출생한 개신교도 중세 유럽 교회의 실수와 잘못을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반복하고 있다. 예수님이 명한 선교 사명(마28:18-20절)도 잘못 해석된다. 이 사명은 분명히 교회에 주어졌다. 교회가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유감스럽지만 이 사명이 지향하는 목표는 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우라는 선교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주어 예수님의 제자로 삼은 후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 이것이 선교 사명의 목표이다. 이런 신자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자연스럽게 세워진다. 그러나 이 목표에서 빗나간 선교는 종교 장사를 한다는 오해를 늘 불러일으킨다. 선교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이기 때문이다. 몸은 자기 몸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활동해야 한다. 이 때 교회란 몸은 비만이란 못쓸 질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신학의 관심사는 성경의 관심사로 모아져야 한다. 다시 말해 신학의 주제들을 성경의 본문 안에서 살핌으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일차적 교훈을 찾아야 한다. 특정 주제만 놓고 학문적 토론을 하는 것보다 성경 분문 안에서 그 주제들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특정 주제 중심의 연구는 그 주제 이외 것들에 덜 관심을 두게 한다. 이 모두 기독교 신학 방법에 내재된 문제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6486828
140 no image 신앙, 윤리와 과학
장창수
2341 2014-02-09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3)/창세기 묵상(86)/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3) 기독교 신학이 타락 기사(창3장)로부터 출발한다면 이 세상과 역사에 대해 소극적, 피동적 그리고 비관적이다. 그러나 창조 기사(창1-2장)로부터 시작한다면 반대로 적극적, 능동적 그리고 낙관적이다. 전자의 신학은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그러나 후자의 신학은 현실 참여적 신앙 삶을 각각 제공한다. 전자의 신학이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라면 당연히 지상 삶,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도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교회 안에 머물며 수도원적 신앙 삶을 사는 것이 신앙 삶의 전부가 된다. 교회는 더러운 세상 가운데 유일하게 거룩한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신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적극적 소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예수님은 신앙 삶의 터전이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신자들은 사회의 악과 그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 역할을 해야 하고 악을 몰아내고 선과 의를 모든 곳에 알리는 빛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런 역할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현실 도피적 또는 소극적 신앙 자세는 성경적이지 않다.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신자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야 한다. 이를 겨냥하며 피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자기 발전을 위해 신자들은 노력해야 한다. 창세기 1-2장의 신학이 이를 요구한다. 창조 기사가 요구하는 신앙 삶은 근본적으로 4 가지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 하나님과 나, 나와 나의 인격, 나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나와 자연.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205465474 ) 이들 관계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하나님과의 보이지 않는 종교적/영적 관계는 나의 인격(심리적), 이웃(윤리적/정치적) 그리고 자연(물질적/경제적)과의 관계들을 통해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창조 신학의 신앙 삶은 종교와 윤리를 절대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웃 사랑 실천은 자연과의 관계도 요구한다. 두 가지 명령으로 구성된 문화 사명(창1:28절)이 이를 잘 설명한다. 전반부는 인류의 생육, 번성과 땅에 충만을 명한다면 후반부는 자연과 그 가운데 만물의 통치를 명한다. 이 명령을 수행하려면 인간과 자연을 연구해야 한다. 전반부는 인간학(人間學)에 그러나 후반부는 자연과학에 각각 속한다. 그리고 인간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만나며 사회과학이 나타난다. 전반부의 명령이 목적하는 바는 후반부의 명령을 수행함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창조 기사의 인간론(창2:7절)은 인간이란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자연에서 나온 산물들에 의존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실존(實存)이다. 그렇다면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산물들의 분배는 인류의 생육, 번성과 땅에 충만를 결정하는 중대한 사회적 문제이다. 자연의 산물들을 형평성 있게 분배하도록 연구하는 정치, 경제, 사회라는 사회과학이 필요하다. 결국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라는 학문들은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돕는 중요한 방법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 학문 활동의 정신은 바로 사랑이어야 한다. 이런 사랑 실천은 교회 안이나 기도원에만 머물러선 불가능하다.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문제는 타락 기사(창3장)에 근거를 둔 기독교 신학은 창조 기사에 근거를 둔 신학과 달리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을 권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신학의 내재적 문제가 기독교 윤리는 물론 과학적 활동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인류의 문화를 구성하는 인문학, 사회학, 자연과학과 윤리가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인류의 모든 활동은 종교적이며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창조 신학은 주장한다. 달리 말한다면 종교적 그리고 윤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 인간 활동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창세기 1-2장은 주장한다. 문화의 근저에 종교가 자리한다는 학자들의 주장은 정확하다. 당연히 그 종교는 창조 기사를 말하는 기독교여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 신학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창세기 1-2장의 신학은 신앙의 중심이 사람의 인격이며 신앙 삶의 터전이 바로 가정과 사회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인류의 활동 무대이다. 물론 이웃 사랑이 활동의 정신과 자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신앙 인격의 성숙을 돕고 가정과 사회에서 신앙 삶을 잘 하도록 신자들을 훈련시켜 보내는 곳이다. 결국 기독교 신학은 윤리학, 인문학, 사회학과 자연과학을 인도하는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 신학은 자기 영역을 확실히 한 후 경계선을 허물고 이들 과학의 도움으로 신학과 윤리의 내용을 넓고 깊게 즉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학은 실천이 없는 신학적 지식으로 끝나며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의 신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바이다. 창세기 3장으로부터 출발하는 기독교 신학은 창세기 1-2장의 신학으로 되돌아가 내재적 문제를 속히 풀어야 한다. 헬라적 사고가 아닌 히브리적 사고만이 이 문제를 해결시켜 준다. 헬라 철학의 잔재를 색출하여 몰아내는 방법 밖에 없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개혁이며 아마 제 2의 종교개혁일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6159680
139 no image 현실 참여와 현실 도피
장창수
2538 2014-02-09
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12)/창세기 묵상(85)/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2)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학은 창세기 3장으로부터 출발한다. 교회는 물질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을 무의식적으로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그리고 타락 결과 이 세상과 인류 사회가 하나님의 대적자 사단의 권세 아래 있다고 보았다. 이로부터 구원 받는 것이 교회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몇 가지 내재적 문제를 보여준다.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경륜이 무시된다. 경륜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한 주인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인간의 참여와 활동으로 가능할 것이다. 창조 기사(창1-2장)에 근거를 둔 기독교 신학은 창조주, 인간과 이 세상을 아주 긍정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타락 기사(창3장)에 근거를 둔 기독교 신학은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학의 세계관, 역사관이 비관적인 이유이다. 그 결과 현실 도피적 삶이 신앙의 전형이 되었다. 과연 이들은 성경적인가? 사도 요한은 이를 부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물론 그가 이렇게도 말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2:15-16절) 내용상 이 둘 사이 차이가 있다. 요한복음의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했다는 뜻이라면 요한 일서는 육신의 정육,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부패한 속성으로 구성된 세상을 사랑하지 말란 뜻이다. 이것은 타락의 결과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상과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타락 사건 후 즉시 하나님은 원복음(창3:15절)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약속했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은 세계관과 역사관에 대해 비관적인 면과 낙관적인 면을 모두 보여준다. 비관성은 타락 사건(창3장)에 그러나 낙관성은 창조 기사(창1-2장)에 각각 기인한다. 타락한 세상은 불 심판으로 멸망 당해야 하지만 그 후 새로운 예루살렘 성이 새 하늘 아래 새 땅 위에 세워질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이 세상과 인류 사회를 비관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아담의 타락으로 실패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성취내지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원복음(창3:15절)은 하나님의 이런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홍수 심판(창7-8장), 아브라함의 소명(창12:1-3절), 출애굽 사건(출12장)과 다윗 왕국(사무엘하권)이라는 사건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잘 증언한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며 처음부터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의 접근을 알렸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절)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 또는 현재성을 잘 증언한다. 창세기 3장에서 출발한 기독교 신학과 달리 창세기 1-2장의 신학은 교회와 신자들이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하나님 나라를 새우고 확장시키는 일에 전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이 명한 선교 명령(마28:18-20절)이 이를 정확히 증명한다. 이 명령에 의하면 성삼위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지켜야 한다. 이런 제자들에 의해 인류 사회에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말씀에 따라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들 앞에서 인간의 통치보다 훨씬 탁월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보다 우월함이 증명될 것이다. 이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하나님이 모든 신들 중 가장 높은 신으로 밝혀질 것이다(신4:5-6, 마5:16절).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창1-2장) 구원한(요3:16절) 목적이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증언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절) 기독교 신학은 창세기 3장이 아닌 창세기 1-2장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 때문에 아들을 보내 세상을 구속했고 구속의 은총을 받은 새로운 인류로 하여금 창조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하도록 하는 사명을 주었다. 이 사명이 바로 선한 일이며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한 것으로 구원 받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과 교회는 세상에 대해 현실 도피적이 아니라 현실 참여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물론 타락의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와 신자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참여적, 적극적, 능동적 자세를 보이면서도 동시에 도피적, 소극적, 피동적 자세도 보여야 한다. 종국적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이 불 심판으로 멸망 당한 후에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중적 성격을 띤 신앙 삶이 신자들과 교회에 어려움을 준다. 현실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항상 멸망케 하는 유혹에 놓인다. 이를 피하기 위해 현실 도피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특별한 부름을 받은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바지했는가에 따라 성도들이 받을 상급이 결정될 것이다. 이런 노력을 기울일 때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런 만큼 참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광을 누릴 것이다. 왜 세상에 대해 낙관적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곧 쓸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6116279
138 no image 조직신학의 구조적 문제
장창수
2753 2014-02-07
사복음서 묵상(116)/기독교 신학에 내재된 문제(1) – 조직신학의 구조적 문제 조직신학은 신론(doctrine of God), 인간론(anthropology), 기독론(Christology), 구원론 (soteriology), 교회론(doctrine of church)과 종말론(eschatology)이란 각론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순서대로 성경의 구속사를 그대로 설명하는 듯하다. 신론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인간론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 기독론은 구원자에 대해, 구원론은 신자의 구원에 대해, 교회론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임에 대해 그리고 종말론은 세상의 끝에 대해 각각 말한다. 그러나 이 구조는 성경의 구속사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오히려 몇 가지 신학적 오해를 제공한다. 구원론 다음 교회론이 나온다. 이것은 이원론적 성격을 띤 헬라 철학의 흔적이다. 헬라의 이원론은 선한 신과 악한 신 사이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말하는 우주론적 이원론과 영혼과 육체 사이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구성된다. 교회는 구원 이후 신자들이 당연히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 속해 살아야 한다고 설교한다. 현실 참여보다 도피를 지향하는 신앙 삶의 양태가 기독교 신앙의 전형이 되었다. 신자들은 천국을 향해 이 세상에 순례하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순례자의 삶은 개인의 종말을 맞을 때까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계속된다. 각론들의 순서상 교회론 다음 나온 종말론도 이를 잘 증언한다. 조직신학의 기존 체계와 구조에 따르면 신자들에게 세상 삶은 어떤 중요한 신학적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조직신학이 헬라 철학의 영향 아래 주제별로(연역적으로) 성경을 연구한 결과이다. 보이는 자연적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어도 타락 이후 죄악 세상으로 바뀌었고 이곳에서 구원 받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기독교는 늘 생각한다. 이 때문에 조직신학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창1-2장)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을 읽는데 실패한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자신의 걸작품인 인간을 참여시켜 자신의 통치를 자신의 세상에 실현시키는 것이었다(창1:26-28절). 하나님은 어떤 여건에서도 반드시 이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창조주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설사 인간의 타락으로 보이는 세상이 사단의 권세 아래 떨어져도(창3장) 이 달성에는 어떤 지장도 없다. 이런 의지를 하나님은 원복음(창3:15절)을 통해 분명하게 보였다. 여인의 씨인 메시아는 인류의 구속을 성취시킴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구속과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여전히 목표한다. 다시 말해 구원과 구속은 신앙 삶의 출발점이지 종착점은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본다면 조직신학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야 한다. 구원론과 교회론 사이 또는 교회론과 종말론 사이 신국론(doctrine of God’s kingdom)이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외친 복음이 그래야 한다고 증언한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절) 그리고 그의 구속 사역의 성취 덕분에 인류의 일부는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도록 구원의 은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부름을 받는다고 선교명령도 증언한다(마28:18-20절: http://blog.naver.com/rassvet/40205465474). 아울러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실체로서 인류 사회 가운데 존재하고 활동할 것임을 잘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는 천국 복음이라는 씨(18-23절)와 알곡인 신자라는 씨(24-30절), 이 둘을 통해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결국 창대할 것이다(31-33절). 이를 알고 신자들은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44-46절). 이런 방식으로 택자와 유기자가 갈릴 것이다(47-49절). 대속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한 천국 비유 3가지(마25장)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하며 그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림주를 위해 열심히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잘 수행한 신자들과 그렇지 않은 신자들에 대한 결과가 이들 비유에서 예언된다. 이 비유들은 구원 이후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현실도피적 신앙 삶을 살지 말라고 경고한다. 열 처녀 비유(1-13절)는 성령으로 무장한 후 주인이 맡긴 달란트의 증가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14-30절).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31-46절)는 달란트 증가를 위해 열심히 충성한다는 것이란 바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윤리적 선(善)에 힘쓰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이미 산상수훈에서 설명한 바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절) 천국 비유들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신국론은 기독교 윤리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론과 종말론 사이 들어가야 할 신국론은 물론 기독교 윤리가 조직신학 안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들어가야 한다. 신국론과 기독교 윤리는 교회론과 종말론 사이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가리키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의 새로운 체계와 조직에 의하면 신자들이 무엇에 보다 더 중요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인가는 아주 분명하다.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아닌 비록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를 인류 사회 안에 세우도록 모든 신자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체라고 설명한다(골1:18절). 몸은 몸이 아닌 활동을 위한다. 그 활동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겨냥한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중세 유럽 교회의 잘못을 반복하는 중요한 이유는 신국론에 기반을 둔 교회론을 재정립하는데 실패한 데 있다. 오늘날 목회에 성공한 목사들과 대형 교회의 비리와 불의가 이를 잘 증명한다. 몸이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잊거나 잃은 체 몸만 살찌우기 위해 살기 때문이다. 우리를 경악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멸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하는 돌이면서 동시에 파멸케 하는 걸림돌이기 때문이다(눅20:17-18, 벧전2:7-8절). 주인의 말씀대로 사느냐 여부가 영생과 영멸을 결정한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의 사역을 수행해야 할 이유이다.
137 no image 예수님을 다시 배우자!
장창수
2369 2014-02-05
사복음서 묵상(115) – 예수님을 다시 배우자!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지식은 풍부한데 반해 예수님처럼 사는 신자들은 극히 적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기독론적 지식은 풍부한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사역을 수행하는 자세, 방법과 목표에 대해선 잘 모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도 과정보다 결과만 중요하게 본다. 교회에 은연중 성공과 영광만이 회자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과 못지 않게 과정을 중요시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절) 기독교 신학은 부활과 승귀 그리고 영광스런 재림을 잘 증언하지만 이를 얻기 위해 예수님이 보여야 했던 자기비하 또는 자기부정은 아주 적게 증언한다. 구원이란 놀라운 결과만 보기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드러내는 일에 아주 신중하거나 조심했다. 반면 기독교 신학은 부활한 영광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한다. 자연스럽게 교회에 영광의 신학이 자리매김했고 목회자들은 영광의 그리스도의 종 즉 성직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신자들도 그의 영광스런 제자임을 기뻐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부활한 영광의 그리스도가 왜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내 만인의 영광을 받지 않고 그냥 승천했는지에 대해 전혀 묵상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세상에서 영광을 추구하려는 이유이다. 이런 경향이 기독교를 타락시켰고 썩은 냄새를 풍기게 한다. 기독교 신학과 신앙 삶이 고난의 그리스도보다 영광의 그리스도로 치우친 결과이다. 이들 사이 균형은 이리도 중요하다. 많은 목회자들이 사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 하지만 그를 인격적으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출세하려 하지만 그를 인격적으로 배워 자신을 낮추려 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가 신앙 삶의 승패를 결정한다. 기독교 교회와 신학은 예수님의 사역보다 인격에 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히브리서는 예수님 사역의 기초를 그의 인격에 둔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12:1-3절) 히브리서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주’와 ‘온전케 하시는 이’란 예수님이 구원 얻게 하는 믿음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구원자이며 동시에 그 믿음을 완성시켜주는 주님이란 뜻이다. 개척자가 보인 삶과 본을 신자들이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참은 예수님처럼 신자들도 앞으로 받을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보다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신앙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받을 내생의 영광과 기쁨보다 금생의 영광과 즐거움을 더 좋아한다. 이 점에서 히브리서의 수신자인 교인들과 오늘날 신앙인들 사이 차이는 전혀 없다. 히브리 교인들도 신앙 때문에 오는 고난보다 세상의 즐거움을 택하길 원했다. 이 때 신자는 예수님의 본에 따라 앞으로 받을 즐거움을 위해 세상의 즐거움을 택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행위를 보인 신자들만 온전케 하는 이인 예수님이 영광에 이르게 도울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지식보다 그를 인격적으로 배우고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사복음서가 신약 성경 맨 처음 자리한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서 신자들을 위해 믿음의 개척자와 완성자의 삶을 살았다고 증언한다. 사도 요한이 말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절) 신학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아들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 즉 예수님이 늘 따르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사역의 내용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이 12사도들을 부른 목적도 이를 잘 증언한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5절) 사도들은 무엇보다 먼저 즉 사역을 시작하기 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를 인격적으로 배워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을 알아야 했다. 기독교 신학은 결과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보다 그를 인격적으로 배우도록 신학 내용을 달리 해야 한다. 머리와 마음은 분리되어선 안 된다. 지식과 삶은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복음서를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다시 연구해야 한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신자들이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5908141
136 no image 치유와 회복의 고백 시
이상록
2455 2014-02-03
선교지에서 암으로 신음하며 회복의 은혜를 받은 아내(김연희 선교사, 한국시 등단)의 고백과 묵상이 담긴 시입니다. 치유의 주님(마 11 · 5~6) 치유의 주님을 만났네 눈 먼 소경 보게 하신 권세로 앉은뱅이 일으키신 하늘의 권능으로 문둥병자 깨끗케 하신 정결의 힘으로 넘어진 영혼에게 치유의 광선을 비추시며 어두운 귀를 여시사 회복의 말씀 주시네 상심하는 영혼 소생케 하시고 믿음 잃은 마음에 주의 사랑을 심으시며 하늘 열어 복된 은혜 쏟으시니 실족한 삶이 주의 빛 받아 거룩한 영광 누리네 은총의 손길(마 14 · 27~36) 출렁이는 물 위로 걸어 오라 하셔서 믿음으로 담대하게 주에게 가리니 도와주시고 구원하소서 은총의 손길 기다리니 주의 팔로 붙드소서 연약하고 의심 많은 마음에 찾아오사 붙드시며 말씀하시니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리 주의 옷 깃에 손 대리니 치유하소서 애타는 간구에 응답하사 병들고 아픈 영혼을 고치시니 다시 세우사 주의 뜻 이루시네 진솔한 고백(마 5· 43~48) 거룩한 제단 앞에 나와 화목의 제물 드리며 병들고 아픈 모든 삶 주의 제단 앞에 낱낱이 아뢰니 허물많은 자의 진솔한 고백을 받으소서 주의 말씀 따라 순종의 제사 드리며 분부하신대로 내 이웃을 사랑하고 깨닫게 하시므로 핍박하는 자 위하여 기도하리니 은혜의 선물 풍성히 받아 의로운 빛으로 옷 해 입고 주의 일 감당하며 온전한 사랑으로 하늘 영광 드러내게 하소서 응답하소서(마 6 · 17~18) 은밀한 간구에 귀 기울이사 진실한 고백을 들으시며 눈물의 소원에 응답하사 주의 뜻 이루게 하소서 기도의 소원을 아시는 주께서 기도의 그릇에 진실을 담게 하시고 간구하는 마음을 헤아리사 주의 뜻을 알게 하시며 응답하소서 머리에 기도의 향기를 뿌리사 환한 미소로 주와 대화케 하소서 주의 얼굴(마 7 · 6) 눈을 밝히 열어 주의 얼굴 보게 하소서 거룩한 숨결을 이 영혼에 담으소서 아름다운 진주를 이 생명에 달아 주소서 주를 찾아 대면할 때 닫혀진 천국 문 활짝 여시고 기쁨으로 주의 찬란한 영광 보게 하소서
135 no image 시험의 이중성
장창수
2177 2014-01-31
창세기 묵상(84)/사복음서 묵상(114) – 시험이냐 아니면 유혹이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절) 그러나 상반된 성구가 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22:1절) 성경이 스스로 모순된 듯 보인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신약의 야고보서가 말하는 시험과 구약의 시험 사이 큰 차이가 보인다. 전자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약1:14절)으로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부정적 의미의 시험이라면 후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 진실성과 성실성을 알아보고자 하는 긍정적 의미의 시험이다. 시험이란 단어는 같지만 그 내용과 성격에서 하늘과 땅 사이만큼 차이가 난다. 전자의 시험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유혹이라면 후자의 시험은 연단을 목적하는 시련이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마6:13절)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악을 유도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뜻이다. 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시험한 것은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신8:2-3절). 성경에서 시험과 유혹은 같은 단어에 속한다. 그렇다면 누가 시험하느냐에 따라 또는 시험 받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시험은 연단 또는 유혹이 된다. 사단은 예수님을 멸망시키고자 광야에서 시험했다. 이 시험은 유혹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은 파멸을 절대로 목적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를 부른 목적을 끝까지 달성하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선악과라는 시험하는 나무를 심었다(창2:17절).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이 의도하는 시험이라면 그 목적은 생명이었다. 인류에게 생명을 선택하도록 가르치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사망에 이르도록 하와를 유혹했다(창3장). 시험 방법은 동일하지만 누가 시험하느냐에 따라 시험의 내용과 성격 그리고 결론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피시험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시험 주체가 하나님이든지 사단이든지 무관하게 택한 자에게 주어진 시험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유혹이 절대로 아니다. 이 시험이 아무리 혹독해도 결국 연단을 이룰 뿐이다(욥23:10절). 사단은 하나님의 승인을 얻어 욥을 파멸시키도록 유혹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 안에 보호받으며 시험 즉 연단을 받았다(욥1:12, 2:6절). 불택자의 경우 하나님에 의한 시험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에 속해 연단을 통한 성숙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사단에 의한 시험이라면 유혹으로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른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서 인류 사회와 역사를 섭리하며 보호한다. 이런 시험은 자신의 구속사를 완성시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시험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중 어디에 속하든지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견인의 은총으로 돕는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적 존재인 인간이 초자연적 존재인 사단을 절대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 은총 영역에서라면 인류 사회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특별 은총 영역에서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이다. 시험에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성도의 신앙 정도와 마음의 중심을 알고자 하는 시험이라면 하나님은 그에게서 성령을 잠시 거둔다. 이 때 성도는 완전히 노출된 상태에서 홀로 시험을 받는다. 이런 시험이 히스기야 왕에게 있었다.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32:31절) 그 동안 하나님의 은총 아래 히스기야 왕이 받은 연단 결과와 성숙 정도가 이 시험에서 하나님께는 물론 그에게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 시험에 그는 실패했고 이를 안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 왕국이 앞으로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할 것을 예언했다(왕하20:17-18절). 물론 그는 구원의 반열에 그대로 남았지만 이미 작정된 다윗 왕국의 멸망이 아주 구체적으로 확정되었다. 성경은 시험에 관한 원리들을 자세히 가르친다. 그러나 이 원리를 적용함에 있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신약 시대 교회나 신자들은 직접적으로 시험하는 주체가 하나님인지 사단인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그리고 피시험자가 하나님의 택자인지 불택자인지도 교회나 신자들은 전혀 모른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배운 원리들에 의해 시험을 받도록 신자들은 노력해야 한다. 피시험자의 신앙 여부에 따라 시험이 파멸로 이끄는 유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택자도 자기 욕심에 유혹되어 사망을 이루는 악을 저지를 수 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원점에서 재출발해야 하는 고통과 불행을 당할 것이다. 이 때 시험 방법은 반드시 불행이나 고통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를 나태하게 만드는 형통, 성공, 출세와 부귀영화 등등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은 신자를 시험한다. 좋다 또는 나쁘다 라는 대립적 이분법에 의해 만사(萬事)를 생각하는 신자는 번영 신학에 침몰되어 시험에서 번번히 실패한다. 불택자라면 시험은 결국 유혹이 되며 결정적으로 파멸 당할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인간의 인식론적 호불호(好不好)에 무관하게 형통할 때 교만치 말아야 하며 불행할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는 삶의 여건과 조건에 무관하게 변함없는 믿음의 소유자여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절) http://blog.naver.com/rassvet/40205412631
134 no image 창세기 1-2장의 신학과 신앙 세계
장창수
2249 2014-01-31
창세기 묵상(83)/사복음서 묵상(108) – 창세기 1-2장의 신학과 신앙 세계 성경과 신학을 가능한 한 최소로 축소시킨다면 무엇이 남을까란 글(http://blog.naver.com/rassvet/40204809999)을 이미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세기 1-2장이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늘과 땅, 그 가운데 만물과 인간을 창조했다. 창조 기사의 주역들은 창조주 하나님, 자연과 인간이다. 성경의 많은 가르침들과 아주 복잡한 신학 체계를 넷 – 창조주 하나님, 나, 이웃과 자연 - 으로 결국 줄일 수 있다. 마찬 가지로 신앙 삶의 내용도 나와 창조주와의 관계(종교적/신앙적),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영적/인격적), 나와 이웃과의 관계(사회적/윤리적)와 나와 자연과의 관계(자연적/물질적)로 구성된다. 신앙 삶은 근본적으로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4가지 관계들이 나타난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근본적이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없었다면 나를 비롯한 인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인으로서 끝까지 계속 일할 것이다(롬11:36절). 그러므로 창조주를 부인한다면 인류는 모든 것을 잃는다.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는 속사람인 인격의 성숙과 관계된다. 개인 인격의 성숙 정도가 대신(對神) 관계, 대인(對人) 관계 그리고 대물(對物)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성경은 자연스럽게 개인 인격의 성숙에 대해 많이 기록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만 아니라 하와도 창조했다. 나 이외 다른 인격과의 관계도 또한 중요하다. 성경에 윤리적 관계에 대한 가르침들이 많은 이유이다. 그리고 대자연과의 관계도 있다.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서 가장 무시되는 관계이다.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물질 세계를 불결하게 본다. 그러나 히브리인의 사고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히브리 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믿는다. 이들에 따르면 창조주는 물질 세계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내재한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는 인류 사회가 활동하는 이 땅 위에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구성하는 4가지의 관계들은 마치 하나의 몸과 같이 분리될 수 없다. 이를 안 다윗이 말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1절) 머리란 단어는 몸을 전제한다. 4가지 관계로 구성된 우주는 하나의 몸과 같고 창조주 하나님은 그 몸의 머리이다. 대신(對神) 관계가 가장 근본적이지만 이 관계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이들을 유기적 관계에서 살피라고 말한다. 성경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그가 우주의 머리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의 몸인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도 통치한다고 증언한다. 성경의 창조 신학은 종교, 인간의 실존, 사회와 자연을 하나의 세계로 보라고 가르친다. 이들을 부분적으로 보고 문제의 답을 찾으려 하면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달리 말한다면 유일한 창조주를 믿는 종교를 무시하고 인류 사회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우주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고 성경은 주장한다. 종교에 치우쳐 다른 것들을 무시한다면 이 또한 잘못이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은 타락 사건 때문에 한 몸을 구성하는 4가지 관계들이 망가졌다고 기록한다. 창조주와의 관계가 깨지고(창3:9-10, 24절), 인격적 분열 현상이 나타났고(창3:5, 7절), 부부 사이에도 갈등과 분열이 생겼고(창3:12-13, 16절) 그리고 자연도 인간에게 순종하지 않았다(창3:17-19절). 하나님은 즉시 깨어진 관계를 복구시키기 위해 메시아를 통한 구속을 약속했다(창3:15절). 그러나 교회와 기독교 신학은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의 영향을 받아 타락한 세상을 죄악시했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기독교는 인류와 세상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했다. 현실도피적 신학과 신앙이 한 동안 기독교를 지배했다. 그 결과 기독교 신학에서 윤리가 거의 무시되었고 오늘날 인류 사회가 봉착한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 어떤 해석이나 평가 그리고 아무 답도 줄 수 없게 되었다. 창조 신학이 무시된 불행한 결과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은 창조 신학에 바탕을 두고 신학을 재정립함과 아울러 기독교 윤리도 세워야 한다. 여기 윤리란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 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류의 번성과 자연의 통치를 함께 명령한 이유였다(창1:28절). 그리고 자연 통치의 결과 나온 부산물들의 분배 문제는 정치,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인류의 공동 번영을 위해 신학을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성격과 목적은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창조 신학에 바탕을 둔 기독교 윤리로 무장한 신자들의 수를 늘리고 그들로 하여금 가정, 직장, 사회 그리고 나라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도록 함으로 가능하다. 승천 전 예수님이 명한 선교 사명(마28:18-20절)은 이 점에서 너무나 탁월하며 위대하다. 선교 사명이 명하는 복음 전파의 목적은 세례를 주는 것에 있지 않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의 수가 증가한다면 민족과 나라별로 사회 안에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이로써 주의 이름이 만방에 드높여질 것이다(신4:5-8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절) http://blog.naver.com/rassvet/40205465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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