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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59 2010-07-23
133 no image 가정 - 기독교가 잃어버린 신학 분야
장창수
2420 2014-01-31
창세기 묵상(84) – 가정 – 창조기사에 감춰진 신학 분야 창세기 1장은 보편적 창조(창1:1-2:3절)를 그러나 창세기 2장은 인간이라는 특별한 창조(창2:4-25절)를 기록한다. 1장은 창조주를 그냥 하나님으로 지칭된다면 2장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불린다. 하나님이란 명칭은 신적 전능성을 보여준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인 인간과 관련된 명칭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창2:17절). 주목할 사실이 있다.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는 아담과 하와로 구성된 가정에 대한 기록으로 끝난다. 가정이 1-2장의 결론이란 뜻이다. 지난 번 '창세기 1-2장의 신학과 신앙 세계'(http://blog.naver.com/rassvet/40205465474)란 글에서 4가지 관계들 – 나와 하나님, 나와 나 자신, 나와 이웃 그리고 나와 자연 – 을 언급했다. 이 관계들도 가정과 긴밀히 연결됨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최절정(창1:26절)은 인간이었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었다(창1:28절). 그러나 창세기의 결론은 가정이었다. 무엇을 뜻하는가? 창세기 1장의 결론인 문화사명(창1:28절)은 창세기 2장의 결론인 가정을 통해 수행되며 그 결과 하나님 나라도 인류 사회에 세워질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은 앞으로 가정에서 출생하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 일군으로 훈련 받으며 자랄 것이다. 4가지 관계로 구성된 신앙 삶은 바로 가정에서 출발되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하도록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했고(창2:8절) 선악과도 심었다. 그리고 아담에게 선악과 규례를 주었다(창2:17절). 그 다음 하와를 아담의 갈빗대로 창조한 후 그의 반려자로 주었다(창2:18절). 창조주 하나님의 주례 아래 이들은 부부가 되었고 가정을 이루었다. 아담이 가정의 머리로서 가장(家長)이다.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으며 하와는 그에게서 나왔다.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반려자였다. 그리고 선악과 규례는 아담에게만 명했다. 아담은 가장(家長)으로서 부인 하와와 앞으로 출생할 자녀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돌보아야 한다. 우선 아담은 하와와 그의 자녀들이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선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임을 하와와 자녀들은 배워야 했다. 그리고 특이 사항은 이 당시 이들이 이룬 최초의 가정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 나라는 인류 사회에 어떻게 세워지는가? 아담의 식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가정에 실현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가 인류 사회 안에 세워질 것이다. 이런 식구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인류 최초의 사회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점 더 넓게 그리고 결국 세상 끝까지 확장될 것이다. 아담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하와와 자녀들을 잘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이들의 마음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 세워져야 한다. 그들이 모여 사는 가정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최초의 가정은 오늘날의 학교, 교회 그리고 행정부 같은 역할을 한다. 가장인 아담은 선생님, 목회자와 통치자였다. 구약 시대 아담을 비롯한 족장들이 선지자, 제사장과 왕 같은 역할을 한 이유였다. 창세기의 가정은 인류 사회와 하나님 나라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가정은 인류란 최대 공동체를 구성하는 최소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건강하다면 인류 사회는 물론 하나님 나라도 건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의 가정론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동안 기독교 신학은 창조 기사에 묻혀있는 보물과도 같은 가정론에 주목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이 창세기 1-2장의 신학을 무시하고 창세기 3장의 구속과 구원에만 집중한 불행한 결과이다. 마찬 가지로 그 동안 기독교 신학은 현재적 하나님 나라, 기독교 윤리와 자연과학이란 세 분야에도 너무나 소홀했다. 시간이 지나며 기독교 신학은 현실 삶에 적용될 수 있는 능력을 잃고 신비스런 종교 지식으로 전락했다. 창세기 1-2장의 결론인 가정은 이리도 중요하다. 창세기의 가정론은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심리학이나 가정 상담학은 문제의 성인들과 상담할 때 과거 어떤 가정 배경에서 성장했는지를 조사한다. 어떤 부모님 아래 어떤 형제자매들과 함께 어떻게 자랐는지를 묻는다. 가정에서의 성장 과정은 성인의 성격과 성품 그리고 가치관에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사회에 갖가지 파장을 일으킨다. 이것은 창세기의 가정론이 이미 주장하는 바이다.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도 건강해진다. 이 말은 상식이면서 동시에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이 가정에서 가장 역할을 잘 하도록 교회, 정부 그리고 사회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면 법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경제적 이윤만을 위해 가정을 희생시키는 사회적 제도와 관습은 비성경적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절대로 옳지 않다. 창세기의 가정론에 따르면 교회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신자들의 가정을 희생시킬 정도로 남편들과 부인들을 교회 활동에 몰아가는 식의 목회는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들이 가정과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돌보도록 성경적 가르침들로 잘 무장시켜야 한다. 이것이 더 바람직하고도 이상적인 목회이다. 왜 그런가? 한 목회자가 수백명, 수천명 또는 수만명을 어떻게 인격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가? 가장으로 하여금 가정에서 자기 식구들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잘 돌보도록 가르치라! 이것이 성경적 목회이다. 출퇴근이 분명하지 않은 한국의 후진적 사회 여건도 감안하며 지혜롭게 목회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희생이나 헌신을 강요하지 말라! 이젠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왕적 권세를 누리는 봉건적 목회 시대는 지나갔다. 성경의 가정론이 지시하듯 가장을 잘 무장시켜 가정을 영적으로 잘 돌보도록 돕는 수종적 목회 자세가 성경적이다. 그리고 강대상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성경 지식만 자랑하는 식의 목회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위선적이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23767077 이 바보야!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야!) * 고인인 옥한흠 목사(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89322&logId=5318654)와 작년 은퇴한 홍정길 목사(http://blog.daum.net/wcm001/1650849819)는 가정 목회에서 실패했음을 아프게 고백했다. 본인도 너무나 때늦게 창세기의 가정론을 깨달았다.
132 no image 이런 좌파는 멀리해야...
장창수
2114 2014-01-31
창세기 묵상(85) – 인간은 심판자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의 창조 기사(창세기1-2장)는 논리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귀결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사전 계획에 의한 것이다. 창조 행위는 달성하고자 하는 종국적 목적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창조주는 계속 인류 사회와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이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주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믿는다면 당연히 나올 수 있는 결론들이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절) 만물은 주로부터 나왔고(과거) 주로 말미암아 보존내지 유지되고(현재) 결국 주의 목적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다(미래). 만물 안에 인간도 포함된다.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날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뿐이다. 그가 창조주라면 끝까지 만물의 주인 노릇할 것은 상식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정확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경건한 무리도 있다. 이들에게 만물의 주인은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이들이 인류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은 완전히 성경과 다르다. 불완전한 인간이 신의 위치에 앉아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한다. 이들은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며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인정하길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잘못을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로 인해 발생한 손해와 손실을 보상해 주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극좌파는 손실 보상보다 현재를 부정하려고 무던히 애쓴다. 일제 청산이 잘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대한민국의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대한민국 헌정 자체를 부인한다. 이들은 모든 정권이란 완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완벽한 정권이 이 세상에서 가능한가?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죄인들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세상 정권도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이처럼 자라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범한다. 이것이 무신론적 진화론도 인정하는 상식이다.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은 많은 부분에서 공과(功過)가 있다. 그러나 극좌파는 공보다 과만 과장하며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으로서 인류 역사에 개입함을 말한다(삼상2:7-8, 단2:20-21절). 하나님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위해 위정자로 일하도록 허용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이들의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대한민국을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극좌파는 대한민국의 헌정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과거의 잘못만 지적하고 비판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이들은 그 때 자신들이 통치했다면 정권이 완전했을 것이란 식의 주장을 고집한다. 위선이다. 얼마 전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을 다룬 ‘나인’이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9개의 향을 이용하여 주인공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형님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그는 시간 여행을 통해 형님을 되살렸다. 그러나 그는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다. 그녀가 형의 입양 딸로 바뀌었다. 그 후 시간 여행을 통해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을 해결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가 자신의 형임을 알았다. 그는 몹시 괴로웠다. 시간 여행을 통해 하나를 고치면 그와 연결된 삶의 고리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와 운명을 전개시켰다. 마침내 그는 맨 처음 자신이 만난 운명이 최선임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다시 제 자리로 되돌리려고 마지막 시간 여행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그는 신의 영역을 지나치게 침범했다.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현재로 돌아갈 수 없었고 과거에 붙잡혀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오늘 우리는 이승만 정권을 통해 일제 청산이 제대로 되었다면 그리고 친일파인 박정희 정권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한다. 과연 그럴까? 이런 질문이 나온다. 만물의 주인인 하나님은 이승만이나 박정희보다 더 나은 선택을 찾지 못해 그들의 통치를 허용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통치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막연한 추측과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보다 더 정확할 수 있을까? 종북적 좌파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김일성 정권을 보라! 이 세상 더할 나위 없이 추악한 독재 정권이며 이북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다. 지나간 과거에 만약이란 가정(假定)을 세우고 허황된 주장을 하는 사상이나 철학은 어리석다. 상식적으로도 지나간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현명하다. 기독인은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왜 과거 그런 정권을 허용했는가에 대해 연구하며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지혜를 찾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다. 성경은 그 당시 그런 인물들이 통치하는 것이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만물의 주인인 하나님에게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선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또는 배를 파선시킴이 없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온 국민이 단합하여 노력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무너트리려는 적은 한국 사회의 분열을 목적하며 과거의 문제를 계속 들고나온다. 이것은 만물의 주인인 하나님과 그의 주권사상을 부인하는 인본주의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역사와 사회를 해석한다면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다윗과 그 왕국은 성경 기록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본주의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윗과 그 삶을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경륜을 위해 다윗을 용서했고 계속 통치하도록 했다. 물론 이에 대한 징벌은 그에게 참으로 혹독했다. 역사의 주인인 하나님은 잘못된 통치에 대해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충분한 징벌을 내렸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과거의 정권을 현재의 정권과 연결시켜 대한민국 정체를 계속 흔든다. 그러나 그들의 가정 – 이승만과 박정희 이외 인물들에 의한 통치 – 은 허황되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부패한 종자들이다.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며 하나님은 부패한 종자들 가운데 그래도 낫다고 보여지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선택해 이들의 통치를 허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과 그의 섭리를 믿는다면 목회자와 신자는 좌파의 허황된 주장에 연합하면 안 된다. 인류 사회의 변화와 개혁은 인간 속사람의 문제이지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란 겉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죄인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이상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통치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다.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가치관으로 살아야 할 이유이다. 오로지 복음만이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5656121
131 no image 성경과 신학을 최대한 축소시킨다면?
장창수
1942 2014-01-18
창세기 묵상(83)/사복음서 묵상(112) - 성경과 신학을 최대한 축소시킨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물론 신학과 신앙을 가능한 최대한 축소시킨다면 무엇이 남을까? 하나님과 인간이 남는다. 물론 더 줄인다면 영원히 자존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과의 교제를 위해 인격적 존재인 인간을 창조했다. 하나님도 홀로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교제는 관계 형성을 요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이 관계가 형성되었다(창1:26-28절). 결국 성경과 신학은 신과 인간 사이 관계라는 추상적 단어로 축소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계가 모든 성경의 가르침, 신학과 신앙의 근본이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은 창조주라면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관계가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 신학의 근거이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인 이유이다. 여기 창조주가 주인이라면 인간은 그의 종이다. 이 관계는 자연스럽게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경외, 경배와 순종을 하도록 요구한다. 주인 창조주의 뜻과 목적에 따라 종은 구체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이 때 하나님은 약속을 조건으로 행위를 요구한다(창2:17절). 이를 ‘언약’이라고 한다. 신과 인간 사이 관계는 언약의 형태를 취한다.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이 영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이 믿음이 부인된다면 창조주와 인간 사이 관계도 의미와 방향을 잃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의 말씀을 믿고 삶 속에서 순종하는 형태를 취한다. 믿음이 기독교 신학과 신앙 삶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믿음으로 그의 말씀인 언약을 지키는 것이 신앙 삶이다. 여기서 인간이란 인류를 뜻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란 주관적 관계가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 이라는 관계로 더 확장된다. 창조주와 나란 인격 사이 종교적/신앙적 관계가 사회적/윤리적 관계로 발전한다. 성경에서 종교와 사회 그리고 신앙(믿음)과 윤리(사랑)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성경의 가르침들은 결국 세 관계 - 하나님, 나란 인격과 이웃 – 에 집중된다. 성경은 나란 인격이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대하는가에 대한 가르침들로 가득하다.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학과 신앙 삶도 또한 나란 주체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대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 때 ‘나’란 주체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창1:26-27절)와 구속 행위(엡2:8-10절) 덕분에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 받는다고 기독교 성경은 말한다. 창조와 구속을 부인한다면 관계도 사라진다. 이들은 신과 인간 사이 관계를 존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인간의 참여로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 즉 자신의 나라를 인류 사회에 건설하고 확장시키는 것이다(창1:26-28절). 이것은 창조주가 피조물 인간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증명한다. 이 사랑만이 인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인류 사회는 하나님이 창조한 보이는 자연 세계에 세워진다. 자연은 인류가 사는 무대이자 곧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현장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계에 자연이라는 대상이 새롭게 추가된다. 신앙 삶의 내용과 범위도 좀 더 확대된다. 하나님과 나 사이 둘만의 관계는 하나님, 나, 인류 사회 그리고 자연이란 4자 관계로 발전한다. 이에 따라 신학과 신앙의 내용과 성격도 이웃만 아니라 자연으로까지 연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만 주로 다루었다. 이젠 윤리와 사회 그리고 자연도 포함시켜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며 성경이 요구하는 바이다. 사람들 사이 윤리학, 인간과 자연 사이 관계에서 파생되는 인문사회과학 그리고 자연 자체를 연구하는 자연과학, 이들은 신앙 삶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종교적 관계만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사회적 관계와 자연과의 물리적/과학적 관계도 요구한다. 이렇게 믿음은 통전적이며 통섭적 성격을 띤다. 하나님, 인간과 자연은 유기적 관계를 갖는 하나의 몸과 같으며 그 몸의 머리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대상29:11절). 성경은 항상 이런 전제 아래 기록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선 윤리는 물론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배제된다. 성경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성경의 구속사는 세속사의 중심으로 인류의 구속에 대한 부분만 기록한다. 성경과 구속사는 인류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인류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세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창조와 구속의 목표이다. 신학은 이를 지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독교 신학은 신국론을 중심으로 기독교 윤리학을 세운 후 인문사화과학과 자연과학을 인도해야 한다. 이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속한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다. 이제 기독교 신학은 그 영역을 확장시켜야 한다. 신학 안에만 머물지 말고 통섭적 연구 방법을 택해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4809999
130 no image 아직도 망령으로 남아있는 정치적 메시아관
장창수
3135 2014-01-09
사복음서 묵상(109) – 아직도 망령으로 남아있는 정치적 메시아관 예수님 당시 선민 유다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상태에서 고난 당한 것과 같았다. 당연히 선민은 앞으로 올 메시아란 모세처럼 유대를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해방시킨 후 일등 나라로 세울 것이라고 소망했다(암9:11-12, 행15:16-17절). 이들의 메시아관은 당시 유행한 종말론과 함께 완전히 정치적이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예수님은 한 동안 제자들 앞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침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과 영광의 그리스도로 증명해 보였다. 마침내 이들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했다 (마16:15-19절). 비로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21절). 이 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이 죽으면 안 된다고 말렸다(22절). 예수님은 그를 혹독하게 야단치면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지적했다(23절). 여기 사람의 일이란 예수님이 ‘영광의 그리스도’로서 민족을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과 제자들은 그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제자들의 신앙 고백은 전혀 순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스승 예수님이 ‘고난의 종’(사53장)으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다시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본 것처럼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 즉 ‘고난의 종’이어야 했다. 곧이어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24-25절).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람의 일을 부인하란 뜻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변화산 사건 후(마17장)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승천할 기약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눅9:51절). 가는 도중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자주 언급했다(마17:9, 23, 20:17-19절). 자신은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닌 고난의 종임을 계속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크냐 라는 논쟁으로 서로 다투기까지 했다(마18:1, 20:20, 24, 막9;34절). 이들은 스승과 동일한 길을 갔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죽음을 향한 고난의 길이었다면 제자들에게 출세를 향한 성공의 길이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이것은 제자들이 스승 예수님을 고집스럽게 정치적 메시아로 본 불행한 결과였다. 이 점에서 제자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적 메시아이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자여야 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이나 유대를 기피하고 갈릴리 가버나움에 자신의 거점을 두고 공생애를 시작한(마4:13,23절) 이유였다. 공생애 대부분을 종교와 정치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다면 예수님은 모세처럼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이를 피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사망의 저주 아래 있었던 갈릴리 지역의 백성에게(마4:13-16절) 먼저 천국 복음을 선포했다. 그의 천국 복음은 정치적 구원이 아닌 영적 구원을 계시했다(눅1:76-79절). 그리고 부활 후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에 선전포고를 선언하지 않은 체 그냥 승천했다. 비로소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하게 깨달았다(요21장). 문제는 오늘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본다는 것이다. 부활 후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와 만유의 주가 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교회는 당연히 세상사에 참여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잠깐 있다가 얼마 후 사라진 정치적 메시아라는 망령이 오늘날 교회에 여전히 남아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난 인류는 둘로 나뉠 것이라고 원복음(창3:15절)은 예언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들 사이 싸움은 세상 끝날까지 끊임없이 벌어질 것이다. 대부분 여인의 후손이 고통을 당한다. 이를 안 예수님도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13:24-30절)에서 추수하기까지 알곡이 계속 가라지로 인해 고난 당할 것을 계시했다. 어떻게 그리고 언제 여인의 후손이 승리할 수 있을까? 원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여인의 후손으로 옴으로 가능하다고 예언했다. 이 원복음에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했다(골2:15절). 그러나 자신을 인류 앞에 만유의 주(主)로 소개하지 않고 그냥 승천했다. 이 때문에 여인의 후손인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까지 뱀의 후손으로 인해 계속 고난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행14:22, 롬8:17절). 여인의 후손이 아직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복음을 전해 세상에서 죄인들을 불러내 구원시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세우는 일에 진력해야 한다. 여인의 후손의 신앙을 연단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가라지를 남겼다. 그리고 인류 사회의 전분야에 걸친 물리적 개혁은 현상적이며 표피적인 것에 속하고 뱀의 후손과 끊임없는 혈과 육의 싸움을 일으킨다. 그러나 만약 인류가 영적으로 중생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구되며 인류 사회의 근본적 변혁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예수님이, 사도들이, 초대 교회 그리고 그 이후 교회들이 정치적 개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이유였다. 인류의 문제는 불완전한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콘스탄찐 대제에 의해 국가 종교로 공인 받기까지 313년 동안 교회는 이런 자세를 한결같이 유지했다. 하나님과의 관계 복원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 이외 다른 방법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결국 복음 전파만이 이웃 사랑 실천을 위한 최상의 방법이다. 부활한 예수님이 만유의 주라는 신학만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세상 일에 간섭하려는 서투른 자세는 오히려 이웃 사랑을 망친다. 사회를 더욱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세상 나라 즉 인간의 나라 일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이 세상 나라의 일을 섭리한다는 뜻이다. 카도릭 교회처럼 개신교 목회자가 세상 일에서도 감 내라, 배 내라 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신성모독 행위이다. 그 대신 신자들을 복음으로 잘 무장시킨 후 세상에서 소금과 빛 역할을 하도록 돕기만 해라! 이것이 목회의 지혜이다. 이를 위해 믿음과 상식 사이 그리고 신학과 윤리 사이 균형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진리와 지식으로 목회자는 잘 무장해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4220523
129 no image 대한민국 / 조선인민국 , 이대로 통일하면 안된다.
박인철
2440 2014-01-09
어떤 정권이든지 직접적으로 하나님, 예수 믿는 것을 탄압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면 교회나 교회 공인의 이름으로는 결코 자기 나라의 정권에 대항하면 안된다. 신앙을 탄압하는 경우라도 무력적이거나 폭력적인 대항은 안된다. 로마가 이스라엘의 종교자치를 허락했기 때문에 예수(교회)께서는 유대교에 대하여는 하나님 나라의 주권자의 권세로서 강하고 분명하게 대하셨으나 국가 정권에 대하여는 일체 말하시거나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룸에 지장을 초래하는 오해 받지 않도록 달라는 세금을 주라고 하셨다.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에게 주라 하셨다. 국가적 역사의 평가는 동 세대 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다. 왕조실록도 다음 세대 후임자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다. 어느 역사학자가 동 세대 시대의 국가수반과 정부에 대한 평가를 어떤 형태로든지 하였다면 그는 전혀 역사학자의 자격이 없는 자이고 그에 의하여 기록되거나 기술 된 모든 역사의 사적은 무가치한 것이 되는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났더라도 동 시대의 이해 당사자였다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그 평가는 다음 세대가 하는 것이다. 한 세대란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어 자식을 낳게 되는 한 시대를 말함이다. 그리고 그 자식이 자라나는 또 한 대를 30년 주기로 하여 한 세대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세대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지 책임이 있는자가 자기 세대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자기의 유.무익에 편견하여 공정성이나 정당성을 보장할 수 없기에 조선왕조 실록도 후대가 기록한 것만이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한세대가 지나지 않은 것을 공식적인 자리나 공인이 공개된 자리에서 함부로 말한다면 그는 공인의 개념이나 역사에 대하여 문외한이고 글이나 말로 세상을 호도하는 무뢰한일 뿐이다. 정치가로서 공인인 자가 당세대의 전임 정부 정치에 대하여 '잃어버린 10년' 이라 했다면 그는 정치인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학자, 더구나 국사편찬에 책임이 있던 자가 당 세대의 직전 정권뿐 아니라 관련자 이름까지 거명하며 '사악한 자' 라고 했다면 그는 역사학자의 자격이 근본적으로 없는 자이며 그의 주도와 지휘하에 편찬되고 기록 된 우리 국사의 모든 사실들은 그 순간에 무효이다. 더구나 그런 공인의 자리에 있던 자가 하나님의나라 대한민국의 역사 알림에 심대한 고의적 거짓을 꾸미는 것에 관여하고 그 드러난 거짓에 대하여도 아무런 책임있는 말이나 조치가 없다면 이는 국가와 교회의 공인으로서 참으로 후안무치한 일이며 이러한 자에 의해 국가의 한 세대의 역사가 기록 / 정리되었다면 이는 참으로 우려할 만한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자가 어느 신학교나 교회에서 한국교회사로 한국교회가 WCC운동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라 했다면 이는 분명히 교회에서도 추방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역사학자라면서도 대한나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워주셨는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대한을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던 탈북자 신앙 청년들까지 호도했다면 그 죄과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정치인이 예수를 믿고 바른 정치 구현을 위해 애쓸수 있으며 기독교인이 정치가가 되어 나라를 바로 세워가는 데에 온 힘을 다하고 목숨을 거는 것은 격려할 일이다. 그러나 교회 이름으로, 예수 이름을 팔아가며 사회운동,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 해방신학이며 이는 대한예수교회가 말할 수 없는 아픔의 징계와 회개를 경험하며 지난 수십년간 그것을 인본주의라 하여 철저하게 배격하며 지켜 온 것이다. 예수교인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개인 의사를 표명할 수 있고 투표로 정견을 말할 수 있다.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석에서라면 대한국민으로서 법에 저촉되지 않고 대한국민적 사회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말들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사석이라도 공인은 교회의 덕을 위해 조심해야 한다. 새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한 탈북자가 약 이만 오천명이다. 해외 거주 대략 30만명이 훨씬 넘는 탈북자 중의 아주 작은 일부이다. 선교사들의 살신의 헌신으로 남한에 오게한 그들 마저도 대한민국이 따뜻하게 품어 스스로 대한국민답게 스스로 설 때까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울 마음이 없다면 통일을 운운해서는 안된다. 그들을 우리 골육, 동족, 민족으로 품을 마음이 없다면 절대로 통일을 운운해서는 안된다. 만일에 어느 정치인이 " 탈북자들은 변절자다. 돌아가라 " 라고 했다면 그를 정치인으로 용납하는 나라는 절대로 통일을 운운해서는 안된다. 그 상태에서 무슨 방식으로 억지 통일이 된다면 통일 후의 우리나라는 지난날의 역사로 볼 때에 명백하게 새로운 갈등과 피흘림에 직면하게 될 것임이기 때문이다. 확실하다. 만일 그러한 사람을 자기 당의 무슨대표로 국가에 내세웠다면 그 정당과 그를 세운 정치인은 통일을 말하면 안된다. 최초의 탈북자들이 된 부모님 세대는 끝이 보이지 않던 일제 탄압의 조센징으로 살면서 신사참배의 무자비한 길을 지나 새로운 광명의 시대를 맞고 환호하셨으나 그도 잠시, 신사참배를 결의한 불의한 예수교 공회로 인하여 당하는 징계로 저 북한 땅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채는 자들에 의하여 예수 믿는자들의 피로 붉게 붉게 물들여져 갔다. 그렇게 바랐던 해방! 고향의 모든 것과 모든 형제들, 친척을 두고 단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남한의 소문을 듣고 천신만고로 탈북하여 미지의 땅으로 월남해 와서 하나님의 주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며 대한나라 자유의 종을 쉴새없이 교회당 종으로 치고 또 치셨다. 옛날부터 교회당의 종소리는 해방과 자유가 있을 때에는 그치지 않고 치고 또 쳤던 것이다. 한 해, 그리고 또 한 해, 8.15일 그날 정오가 되면 남한 땅 온 천지가 교회당 종소리로 울리고 또 울렸었다. 그러나 북녘 땅의 붉은 깃발로 만족하지 못한 붉은 조선태양신 김일성 공산당의 물결은 결국 대한의 남한 땅 마저도 붉은 피로 물들였고 풍전 등화의 자리에서 예수교인들의 뼈저린 회개로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고 남한만이라도 평화의 땅으로 허락하셨다. 피비린내와 보리고개의 처절함을 나도 너도 어린 아기들도 함께 이겨내어 지금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고로 안락한 평화시대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 평화의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며 사는 국민이 이제는 대다수이다. 신사참배 같은 것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인지 신사참배에 열심이었던 자들의 자손과 후예들이 백년 전 친일 얘기를 다 아는 것처럼 함부로 만들어 들추며 오히려 남들을 정죄하며 대한민국 역사의 사실을 오욕으로 지어내기도 한다. 요즘 탈북자가 변절자 라면 초대 탈북 월남자들도 예수믿는 것 때문에 공개처형 당할 곳에서 도망쳐 나와 남한 땅에서 자유의 종소리를 그렇게 울려댔으니 극렬 반동분자이고 반역자이다. 예수 믿을려고 탈북하고, 또 그냥 배고파서, 배가 너무 고파서 먹을 것 찾아 탈북한 이들을 '굶어 죽더라도 조선의 태양신 김일성부자 아래서 죽어야지 탈출했으니 변절자' 라고 하는 자들이 정치인이고 그런 정치인들에 의하여 정부끼리 타협하고 통일 한다면 북조선 정부에 협력하며 탈북자를 변절자라고 하던 자들이 통일의 일등공신이 될 것은 자명하다. 그렇게 통일되면 바로 백년전 친일을 들추어 내는 자들과 함께 이런 통일공신 정치인들에 의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탈북자들은 변절자, 극렬반동, 반역자로 낙인되고 그런 자들의 지원으로 생겨날 무장, 무력세력에 의하여 벌어질 핏빛의 거리를 보게 될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지금 북조선의 뿌리 깊은 실제와 지난날들의 이땅의 사실들을 볼 때 정치적으로 정부끼리만 껍데기 통일하면 분열된 사상에 의하여 내적인 민족 분열과 충돌은 피할 수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정치적으로 합친 나라들의 결과로 보고 있는 세상의 피의 난리들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다. 정부끼리 통일? '조선(+)대한국" 으로? 절대 안된다.! 단군조선 우상의 굴레를 벗겨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과 대한이 얼마나 많은 피로써 보전해주신 나라인가! 마음과 정신이 통일되지 않은 통일은 안된다. 하나님이 살려 보내 우리 품에 안겨주신 겨우 이만 오천명에게도 변절자라 하며 조금도 그들의 파난처가 될 맘이 없는 자들에게 통일을 맡기면 통일 후에 탈북자들은 즉시 반동, 반역자로 낙인 된다. 그나마 이만오천의 탈북자들이라도 애국가를 감격으로 소리 높여 부르게 되고 대한국을 세우시고 오늘까지 보전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알게 한 후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 붉은 빛, 붉은 색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다. 남.북이 함께 아침에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석양 '만종' 의 종소리에 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같이 손잡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통일만이 우리가 바라야 할 통일이다. 하나님 만의 영광을 북조선태양신, 김일성 부자가 가로챈 붉은 빛이 섞인 통일은 절대 안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야 한다. 오천년 조선 우상의 나라가 단번에 대한(제)국으로 세워지면서 첫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나라로 애국가를 부르게 된 것이 사람의 일인가?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되었는데 태극 문양의 위는 빨강이며 아래는 파랑 문양이다. 어렸을 때에 곤충채집으로 태극기 문양이 뚜렷한 '태극나비' 도 잡았었다. 이 문양의 두 색갈을 옛날말로 간단히 빨갱이, 파랭이라고 한다. 붉은 색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파랑색은 이땅에 주시는 하나님의 평화, 은혜이다. 이 모든 일들이 그냥 우연인가? 몇몇 훌륭한 사람들의 일인가? 이땅의 붉은 빛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어야만 한다. 하늘 천사가 들려주는 노래 /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 하나님의 각별한 나라, 대한민국은 거대한 공산대륙의 끝자락에 남겨두신 은총의 나라, 동방의 하나님 영광의 나라이다. 오직, 하나님 영광의 신앙 과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의 나라이며 피난처이다. 오늘까지도 이 땅의 단지 3.5 % 의 신실한 자기 백성을 보사 대한나라로 보전하신다.
128 no image 하나님 나라는 창조와 구속(4)의 목표
장창수
2014 2014-01-08
사복음서 묵상(108)/창세기 묵상(82) – 하나님 나라는 창조와 구속(4)의 목표 창조된 세상과 구속 받은 세상 사이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 있는 보편적 세상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 아래 있는 제한적 세상이다. 이것은 타락의 결과이다. 원복음(창3:15절)에 따르면 하나의 인류가 둘로 나뉠 것이다. 그러나 두 세상은 존재 목적에서 동일하다. 창조와 구속의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를 지상에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창조 목적이 이렇게 기록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물론 하나님의 통치(나라)는 인간의 참여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 목적이 이렇게 설명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절)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통일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뜻한다(영역본들 참조). 아담이 실패한(창3장)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인간이 된 하나님 아들의 구속(사복음서)을 통해 이미(already) 이 땅에서 성취되었고 마침내 미래 언젠가(not yet) 완성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다. 사도 바울은 개인 영혼의 구원이 아들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의 주목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약의 구속 목표가 구약에 기록된 인간 창조 목적과 동일하다고 사도 바울은 해석한다. 그렇다면 영혼 구원에만 집중하는 기독교 신학은 뭔가 잘못되었다. 기독교의 조직신학의 각론들 –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종말론 – 은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신학적 체계여야 한다. 기독교 신학의 중심과 목표가 인간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져야 한다는 뜻이다. 신론과 인간론은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건설이라는 하나님의 작정 또는 경륜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의 who와 what의 문제를 각각 다루어야 했다. 기독론도 구속자의 자격과 직분을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기술해야 했다. 구원론과 교회론도 하나님 나라 건설을 겨냥한 신학적 설명이어야 했다. 종말론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란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했다. 왜 이런 실수와 잘못이 생겼나?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창조와 구속을 묵상하기보다 구속 받은 인간에 초점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 경향은 결국 시대를 달리하며 인간을 위한 신학들을 계속 발전시키도록 도왔다. 출세, 성공과 형통을 겨냥한 번영 신학, 긍정 신학, 기독교 처세술, 사회 복음 그리고 목회자를 위한 교회 성장론과 리더십. 그러나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기독교가 성경을 바로 해석했다면 개인 영혼 중심의 구원론을 그리고 교회 자체만을 위한 교회론과 목회자 중심의 목회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기독교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가 잘못한 바를 절대로 다시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패하기 쉬운 인간 성직자가 교회에서 주인 노릇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에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주(主: Lord) 이다. 그리고 인간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를 잃은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 성직자를 위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구원론을 하나님 나라가 아닌 개인 영혼 구원에 초점을 둔다면 교회는 세상과 격리된 기도원이나 수도원으로 전락한다. 지금이라도 기독교는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로 되돌아가야 한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임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된다. 이 가르침은 근본적인 것으로 성경 마지막 장까지 관통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3장은 요한 계시록 20-22장에서 역순으로 완성된다. 기독교 신학은 신국론을 중심에 두고 다시 신학적 체계를 세워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 일에 어떻게 참여하는가가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을 상속받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받을 상급도 결정할 것이다. 이로써 칭의와 성화 사이 불필요한 논쟁은 물론 율법주의와 율법 폐기론도 동시에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4155036
127 no image 과연 칭의는 구원에서 완전조건인가?
장창수
2078 2014-01-08
사복음서 묵상(107) – 과연 칭의는 구원에서 완전조건인가? 러시아에선 정교회 월력에 따라 1월 7일이 성탄절이다. 성탄절 설교를 준비했다. 이 덕분에 구원의 서정 즉 칭의와 성화와 영화 사이 관계를 달리 묵상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성탄은 세속사적으로나 구속사적으로나 획기적 사건이다. 인류의 년대가 성탄절을 기준으로 주전(BC)과 주후(AD)로 나뉠 정도이다. 그러나 이 사건만으로 인류 구원은 충분하게 또는 완전하게 성취될 수 없다. 아기 예수님은 성장해야 하며 공생애를 거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야 했다. 그리고 승천 후 미래 언젠가 재림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공생애, 죽음, 부활, 승천과 재림 – 이들은 모두 구속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이 덕분에 이들은 구속사에서 독립적 사건으로 각각 인정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어느 한 사건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들 사건은 인류의 구원을 성취내지 완성시키는데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탄은 기쁜 사건이지만 인류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구원을 위한 첫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원이 완성된다 해도 재림만 중요하지 않다. 이전 사건들 덕분에 재림은 자신의 신학적 의미를 유지한다. 구원을 위해 구속사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필요하다. 이들은 논리적으로 분리 불가능하고 유기적으로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이들은 구원이란 목적 아래 모두 하나이다. 구원의 서정도 마찬 가지이다.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 성화, 성도의 견인과 영화 – 이들은 구원의 완성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과정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지적해야 할 사실은 이들 사이 관계가 시간 개념으로 분리시킬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긴밀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처음부터 성화 전까지 6과정들은 칭의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 영적 차원에서 이들은 거의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과정들이 분석된 것뿐이지 역사적으로 이들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칭의는 성화와 영화를 전제한다. 칭의는 영적 중생의 결과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녀란 앞으로 합법적 상속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자녀는 성장한 후 아들 노릇을 잘 해야 한다. 칭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자의지적인 성장과 활동으로 자신이 법적 상속인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자임을 보여야 한다. 이런 노력을 기울일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고 견인의 은총으로 이끌어 영화에 달하게 한다. 결국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합법적 상속자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칭의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녀로 삼은 하나님의 뜻을 부정한 것으로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인정 받았다. 사도 바울이 말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절) 그대로 신자에게도 적용된다. 죄인이었던 신자가 이신칭의(以信稱義)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절).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의지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권면한 이유였다(마16:22-28절). 그래야 미래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받을 것이다(롬8:16-17절). 여기 하나님의 자녀란 앞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을 뜻한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아 그 나라의 합법적 시민이 되려면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시민 노릇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인류 사회에서 살고 행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미 산상수훈에서 말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이것은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하는 가르침이다. 에덴 동산을 창설한 후 선악과를 주며 아담에게 지킬 것을 하나님은 명했다(창1:2-17절). 출애굽 사건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출20:1-17절).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과 솔로몬은 여전히 율법을 준수해야 했다(왕상2:4, 대하6:16절). 율법 준수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믿음의 결과 또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자만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율법이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의인을 이렇게 소개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절)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 이신칭의는 달리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카도릭 교회가 이행득구를 교리화하여 가르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 자기 노력으로 의에 이르려 했다. 이를 비판함으로 종교개혁이 촉발되었다. 그렇다고 칭의 이후 행함을 부정한다고 본다면 성경이 주장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혀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being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doing을 무시하는 교리나 신학은 구원파의 율법 폐기론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논리적으로 이 둘을 어떻게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는가? 존재는 활동을 전제하고 활동이 없는 존재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계속 대립시켜 하나를 취하기 위해 다른 것을 버린다면 비성경적 이분법에 따른 사고 결과로 비상식적이기도 하다. 유아적 사고이다.
126 no image 하나님 나라와 신앙고백
장창수
2845 2014-01-05
사복음서 묵상(105)/창세기 묵상(80) – 하나님 나라와 신앙고백 사도행전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2절, 참조: 행9:22, 17:3, 18:5, 28절). 복음의 핵심은 인자 예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이라는 세 사건들에 배경을 두고 기록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은 구원자(Savior)와 동시에 주(主: Lord)로 소개된다. 로마서도 동의한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절) 놀라운 성구들이 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8:12절)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1절) 빌립 집사와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긴밀히 연결시켰다. 공생애를 시작하며 처음부터 예수님도 그랬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절)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중생의 관계를 자신의 대속 죽음과 연결시켜 예수님은 설명했다(요3:1-15절). 사도 요한도 마찬 가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절)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기까지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해 주었다(행1:3절). 죽음과 부활로 성취한 자신의 대속 사역이 하나님 나라와 밀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0일 뒤에 올 성령 강림을 예언했다(행1:5절). 성령은 중생케 하는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게 할 것이다(요1:12-13절). 그렇게 120문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것이다(요3:1-15절). 이들이 바로 초대 교회를 구성했다(행2장).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복음과 신앙 고백을 이해해야 한다. 복음을 처음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 영접하는 첫 신앙 고백은 칭의를 그리고 구세주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Lord)로 모시고 신뢰하며 사는 삶은 성화를 각각 가져온다. 이 때 칭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함(요1:12절)을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자라고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각각 뜻한다. 물론 영화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 받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 됨을 뜻한다. 유감스럽지만 한국 신자들은 신앙론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치우쳐 있다.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 신앙 고백함에는 아주 탁월하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주(Lord)로 고백함에는 지나치게 부족하다. 그 결과 한국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출생한 것만 기뻐하지만 성장을 멈추어버린 장애자가 된다. 외국의 신학자들은 이것을 한국 교회의 문제로 한결같이 지적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구원론이 신자 개인의 존재론적 변화로 치우치며 공동체의 의미를 가진 객체 하나님 나라가 쉽게 무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시민 노릇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란 죽어서 비로서 들어가는 천국 또는 천당 정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인의 전통 종교의 이원론과 기독교 교회를 지금까지 지배하는 핼라의 이원론 때문이다. 신학자와 목회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불결한 속세에 세워질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내재적 그리고 현재적 실체로 본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에 이미 실재한다. 장소라는 구상적 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창세로부터 이 세상에 존재한다. 다만 아담의 타락으로 죄인인 인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절) 여기 침노하는 자는 누구인가? ‘침노한다’라는 단어는 적극적이며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 나사렛 출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구세주로 신앙 고백한 후 그를 자신의 주로 모시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이 세상에 실현된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도 인류 사회에 자연스럽게 세워진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신앙고백은 반드시 두 면을 보여야 한다. 예수님을 구원자와 동시에 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 둘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전자가 없고 후자만 있다면 자유주의나 현대신학의 사회 복음이 되고 후자가 없고 전자만 있다면 보수적 신학의 피안적 복음이 될 것이다. 이 둘은 합해져야 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성경적 신앙고백은 사회 복음을 절대로 지향하지 않는다. 복음이나 신앙고백은 인간 사회란 보이는 실체의 개혁이 아닌 사람의 보이지 않는 실체인 영의 변화를 먼저 추구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인간에게 영(靈)이 가장 근본적이기 때문이다(창2:7절).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류 사회는 사단의 권세 아래 있어 근본적 변화가 전혀 불가능하다(창3장). 기독교 교회가 정치 참여보다 복음 전파에 매진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구원은 인류 사회 전체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다. 피택의 은총을 받은 무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신의 통치 즉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한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창1:26-28절). 그리고 구속(창3:15절)은 바로 이 목적을 복구시킴을 겨냥한다. 성경적 복음과 신앙고백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목표하기에 절대로 피안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의 물리적 변혁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들 영역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 안에서 아담의 후손인 인류 사회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세상 나라 이외 하나님의 나라는 둘째 아담에게 속한 새로운 인류에 의해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이로써 서서히 인류 사회의 변혁이나 개혁을 꾀한다. 여기서 기독교는 세 파로 나뉜다. 현실 도피적 신앙을 보여주는 보수파, 인류 사회의 물리적 변혁을 꾀하려는 신앙을 보여주는 진보파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인류 사회의 물리적 변화를 장기적으로 겨냥하는 가칭 복음파. 지금까지 전자의 두 파들이 주류이지만 성경파의 출현이 기다려진다. 세째 파만이 인류 사회를 분열시키지 않고 살리고 발전시킬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3939749
125 no image 성부 / 성자 / 성령 / 삼위 하나님과 그 창조의 세계
박인철
2573 2014-01-04
  성부 / 성자 / 성령 삼위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영광 생명 평화 의 빛 일 월 화 수 목 금 토 일 7일 중 주일은 하나님의 날, 예수로 생명의 날 , 안식의 평화 세상의 첫날 - 그리고 세상 완성의 마지막 천년 예수의 왕국 !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빨 7빛갈 중 햇빛의 빨간색은 굴절이 가장 적고 파장이 가장 길어 사람이 보게 되는 하루 해의 시작 - 지는 해의 끝의 기본 빛 매일의 시작과 끝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으로! ( 성 경 ) 빛의 삼원색 빨 초 파 는 다른 빛의 합성으로 만들어 지지 않는 근본 빛갈이며 그외 모든 빛갈은 근본 삼원색의 합성으로 만들 어짐. (아침의) 태양은 빨강 하늘(바다) 는 파랑 땅은 초록 (초목) - 태양 / 하늘(바다) 빛은 그대로 인데 ..... (사람에게 맡기신 땅은 사람의 피로 사는 사탄에게 접수되어 온통 흙빛과 핏빛!) 빨강색 - 감정 자극(영광,승리,기쁨, 환희) 초록색 - 눈의 피로를 풀어 줌 (생동력 - 비온 뒤의 초목의 소성) 파랑색 - 심리적 안정감을 줌(하늘/ 바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티) 도 7음계 중 도는 음의 시작과 종지의 기본 음 으뜸 3 화음은 도 미 솔 도 - 으뜸 3화음의 기본 음 미 - 으뜸 3화음의 안정감(안정 필수음) 솔 - 으뜸 화음의 소리의 색갈을 밝게 해주는 음 으뜸 3화음 일 때만 하모니(음의 너울) 가 자연 발생 7음계는 10세기에 로마 교회에서 체계적 질서의 음으로 발견되고 정리되어 급속하게 교회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세상의 클래식 음악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었다.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으로 하이든(천지창조 작곡자) - 바하( 음악의 아버지 / 경건한 바로크음악) 에 이어 베토벤을 음악의 악성이라 함은 본래 樂聖이 뜻이지마는 이런 표현은 비 기독교적이라 하겠으며 樂成이라 함이 신앙적으로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기독교 음악을 하기에 적합한 바로크 음악으로부터 보다 폭넓은 활발한 표현 음악으로 베토벤이 이룬 업적은 곧 하나님의 선물로 발견한 7음계 음악을 총체적으로 완성했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년의 " 하나님의 영광 " 곡은 이 단편적 성가로 창조 세상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 영광을 인간의 감성의 한계와 음악적 기술로는 최대한으로 폭 넓게 표현해 냈다는 평가이다. 베토벤 이후로 그동안 하나님 찬양음악 중심이었던 클래식 음악이 점점 과도하게 사람의 감정을 표현 하는 것에 집착하면서 본격적인 낭만주의 음악을 넘어 소위 현대 - 전위 음악으로 클래식 음악 형식을 파괴하는 음악까지도 클래식 음악의 범주에 넣기도 하며 심지어는 클래식과 팝송, 재즈의 구분도 없이 혼합하는 음악이 오늘의 대세이다. 소위 우리나라 굿거리장단 리듬은 3음계 음악에서 시작되었으며 4음계이던 국악은 20세기에 들어 와서 국악인들에 의하여 5음계로 발전 되었다. 우리가 가끔 촛불로 은은한 특별한 집회를 할 수는 있으나 주일예배 만큼은 최대한 하나님이 주신 7빛갈의 햇빛을 그대로 환한 곳에서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배에 맞다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7음계 클래식 음악과 그 형식을 마다하고 3-5음계의 미개한 음악이나 7음계 음악의 기본형식을 파괴한 비트는 엇박자의 연속, 불협화음의 반복 내지는 연속적 사용, 정법 화성의 진행을 무시한 화성은 결단코 하나님 예배 음악으로 사용되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3-5음계의 음악은 음계가 부족하여 클래식 음악적 선율이나 화성을 만들어 진행시킬 수 없으며 당연히 멜로디(선율)가 단순하여지므로 극단적으로 리듬에 치중하게 되는 음악이 되어 자연히 비트도 강해지며 신명나는, 신내리는 음악이 되는 것이다. 옛 교회음악은 리듬에 치중되는 방정맞은 음악을 방지 하기 위하여 교회선법이라는 찬송가 선율곡을 몇가지 정하여 놓고 모든 찬송가들을 그 지정 선율곡에서 골라 맞추어 불렀던 것이다. 클래식 7음계 가 발견되어 화성음악이 완성되기 전에는 A(라 - 우리계명 가) 음이 기준음이 되어 시편 송이나 아카펠라(반주 없는 교회노래) 찬송을 하였던 것이다. 악기가 발전 하기 전에 이 A음은 모든 음악의 기초, 기본 음이었다. 이 A음은 사람의 모든 종족의 아기가 세상에 태어 날 때에 우는 첫 울음소리의 음이다. 이 A음 (440Hz)외에 다른 음은 모두 진동 싸이클이 무한소수로, 매듭지어지지 않기 때문에 전화기의 신호음이나 전자 기기들의 신호의 기준음도 되는 것이다. 아기가 험한 세상에 자라며 이 A음을 점차 잃어버리지 마는 사람이 커서도 기분이 좋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A음의 톤을 중심해서 발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발성음은 악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연주 전의 모든 악기의 톤도 사람의 절대음정, A음에 맞추는 것이다. 모든 악기는 온도와 습도 등에 변화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피아노 음 조율의 진짜 전문가는 자기의 A음 - 440Hz 에 피아노 중간 옥타브 A음을 먼저 맞추고 아래 위로 자기의 귀로 체크해 가며 조율하는 것이다 ( 조율이 잘되어 갈 때에는 3개의 음을 으뜸화음조로 맞추어 누르면 그 화음 소리에 하모니 - 너울 - 가 발생되며 2개의 옥타브 음을 누르면 신비한 배음이 발생한다) 요즘, 편하고 빠르게 하여 돈을 빨리 벌려는 사람들은 기계나 기구를 최대한 사용하고 하모니나 배음을 사람의 귀로 정성껏 체크하지 않으므로 그 조율이 정확지 않고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음정을 가진 사람의 수준을 스스로 기계의 수준에 맞추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절대 지각으로 주신 절대음정을 포기하고 온도나 습도 등등, 환경에 변하는 사람이 만든 물질세계에 맡기는 결과이다. (얼마전 까지도 창조 이후 이스라엘의 악기 없는 아카펠라로부터 천주교의 모든 의식에 정확히 이 음정이 전수되어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기로 태어 났음을 하나님과 온세상에 알리던 A음의 생명의 기쁨의 소리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사람들을 대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있어야 하는 이땅에서도 쫒겨나기 전의 회복 된 에덴동산으로 천국을 이룰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탄을 분별치 못하고 함께하면 우리는 곧 붉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사회이든지 교회이든지 교단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핏빛으로 붉어질 수밖에 없다! 그 무서운 사탄은 창세전에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음을 받고 악기를 들려준 자인데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 그 음악으로 자기를 위하여 즐기려다가 쫓겨나서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안겨주는 것으로 꾀이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세계 중에 전 국민적으로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르는 나라들이 공산국가들이며 특히 북조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김일성 일가를 신격화 하는 최고의 수단과 그 징표가 김일성 부자 찬양가를 항상 부르게 하는 것이다. 집회 뿐 아니라 등하교 길, 음악 교과서에서부터 북조선의 일상의 노래 거의가 김일성 부자 찬양의 노래이다. 지금 남한과 남한 교회들에는 오로지 자기들의 감흥을 위한 망령된 노래들로 가득차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찬양 하기에 합당하게 지어 사람에게 주신 으뜸 3화음의 경건한 예배를 위한 클래식 음악을 파괴하여 악신들 내리는 음악으로 자기를 찬양하고 경배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목표이다. 하나님께 예배한다면서 예수 /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제3계명) 부르며 자기(의 감흥)를 위하여 노래하는 것은 사탄에게 자기의 붉은 피, 생명을 바치는 사악한 의식일 뿐이다!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 베드로 일지라도 사람의 생각을 말할 때에는 주 예수께서는 가차없이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예수를 ..)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 이 땅에서도 첫 아담의 에덴에서부터 역사하고 예수께도 사역 전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탄이 계속 괴롭히며 시험 하였고 신약에 수도 없이 사탄을 경계하였고 특히 계시록의 최후의 전쟁이 사탄과의 싸움인데 요즘 훌륭한 종교인들에게는 아예 사탄의 존재도 없다 - " 요즘 같은 웰빙 세상, 웰빙 교회에 웬 사탄 ? " 이것이 요즘 대한예수交회의 실상이다.
124 no image 윤리는 믿음의 성육 결과이다
장창수
1998 2014-01-02
늘 형님처럼 생각하는 사랑하는 목사님! 곧 새해를 맞습니다. 새해에도 주 안에서 하나님이 준비한 모든 복을 누리길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는 윤리란 믿음의 성육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믿음은 윤리적 삶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렇게 본다면 윤리와 분리된 신앙 또는 믿음은 가짜요, 윤리와 분리된 신학은 비성경적이란 뜻이 됩니다. 물론 윤리의 문제로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그리 쉽진 않고 그래서 금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의 중요성은 강조되어야 합니다. 윤리와 분리된 이신칭의만 강조하는 한국 교회의 오늘날 문제들이 그렇게 증언합니다.  신앙의 진실성 여부는 반드시 윤리적 삶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결국 윤리를 부정한 믿음 즉 이신칭의만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닐 수 있음을 봅니다. 종교 개혁 당시 상황은 이신칭의를 주장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신칭의만 주장하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도 신약 성경에 함께 있습니다. 시대 상황에 따라 강조해야 할 신앙의 국면이 달라진 것이지 성경 자체가 행함이라는 신앙의 다른 국면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습니다. 칭의만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에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이후 성장이 멈춰버린 자녀를 하나님은 과연 기뻐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가 합법적 상속자로 계속 자라길 바랍니다. 이 점에서 Being만으로 완전 충족하다고 주장하는 신학도 바르지 못합니다. doing과 분리된 being은 비성경적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논리적으로 분리될 뿐 역사적으론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윤리란 옷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윤리는 믿음의 성육 결과이다.” 칭의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출생을 뜻한다면 출생은 생명의 출발점입니다. 만물의 생명은 나름대로 생과 삶의 목적을 갖습니다. 이에 충성하며 열심히 삽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 자녀로 출생했다면 하나님이 생명을 준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신자들도 이 목적에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도 바울이 설명한 바대로 하나님 앞에 흠 없는 거룩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엡1:4-6절). 어떻게 출생만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자연적 생명의 원칙에서 볼 때도 이것은 잘못입니다.  출생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라가는 과정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윤리와 분리될 수 없으며 기독교 신학도 윤리학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을 분리시키면 생명은 무력해지고 삶과 인생은 의미를 잃고 죽습니다. 합해져야 생명과 삶이 제 모습을 띠며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분리한 것들을 다시 조립시켜야 합니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다루는 대상은 어느 하나도 예외 없이 수많은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특정한 구조를 이루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윤리는 믿음과 신앙의 성육 결과이다. 이 주장이 아직도 비성경적인가요? 의인은 오로지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좀 더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믿음은 칭의를 불러 일으키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살도록 돕는 믿음,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써 이 세상 윤리보다 훨씬 수준 높은 기독교 윤리를 뜻합니다. 믿음은 윤리나 가치관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리를 부정하는 믿음은 나무를 열매로 알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7:16-20절)을 완전히 무시하는 불신앙이 됩니다.  믿음과 윤리 그리고 신학과 윤리학은 건전한 신앙 삶을 유도하는 하나의 짝입니다. 물론 삶은 출생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 흠양하는 삶이 없는 출생은 100% 가짜일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 사이 불필요한 논쟁이 사라지고 건전한 신앙 풍토가 새해 한국 교회에 조성되길 소망해 봅니다.  그 때 조국 교회에 사아비와 이단도 줄어들 것입니다. 평안을 빕니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3682590
123 no image 왜 승리 또는 성공 후 타락할까?
장창수
1968 2014-01-02
창세기 묵상(79) – 왜 승리 또는 성공 후 타락할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했다(창22:1-2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삭이 언약의 상속자라고 분명히 계시했다(창17:15-19절).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약속을 깰 듯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 것을 명했다. 한 때 주었던 것을 하나님이 갑자기 거두려 했다. 아브라함은 혼란스러웠다. “하나님이 자신과 장난 하고 있나?” 라고 생각하며 어이없이 아브라함이 웃을 수 있었다. 아니면 하나님이 인정사정도 없다고 그가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의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졌다. 이 문제를 달리 해석해야 함을 그가 깨달았다. 아브라함이 75세부터 받은 수많은 시험은 항상 그의 후손 문제와 늘 관계되었다. 이런 시험들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에 대해 늘 신실하고 충분히 언약을 이룰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임을 배워 알았다. 100세에 출생한 이삭이 이 사실들을 잘 증명했다. 결론이 나왔다.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이 여전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지를 하나님이 알려고 했다. 이 시험을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이용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선물로 주어진 그의 가장 귀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선물을 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자신의 독자 이삭도 아끼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이 준 선물’이냐 아니면 ‘선물을 준 하나님’이냐 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약속을 반드시 이루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전지전능함을 믿고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기로 아브라함은 결심했다(창22:3,8절). ‘하나님이 준 선물’이 아닌 ‘선물을 준 하나님’을 택함으로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결국 승리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선물을 준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준 선물도 모두 얻었다. 이 승리는 약속을 준 하나님의 어떠함을 믿고 철저히 신뢰함으로 얻은 놀라운 결과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험은 ‘은혜를 준 하나님’과 ‘하나님이 준 은혜’ 사이 선택의 문제로 나타난다. 아담은 어떤 시험을 만났는가? 자신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과 하나님이 준 생명 사이 선택 문제였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준 하나님 자신을 선택해서 선악과를 먹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선물을 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준 반려자 하와를 선택했다. 가인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동생 아벨을 죽였다(창4:1-8절).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준 원복음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살기보다 육신의 삶을 위해 사람들의 딸들을 취해 연혼했다(창6:1-7절). 홍수 후 새로운 인류도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고 바벨탑을 쌓았다(창11장).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는 이런 배반의 역사로 점철된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시험에서 모두 실패했다고 증언한다. 솔로몬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이 준 부귀영화로 인해 결국 그도 타락하여 하나님의 명을 어겼다(왕상11:1-13절). 그렇게 그도 하나님이 은혜로 준 것들을 누리기 위해 은혜를 준 하나님을 버렸다. 지혜의 솔로몬은 결국 어리석은 왕으로 드러났다(전도서). 하나님이 준 선물로 부패해지고 타락한 솔로몬의 예는 오늘날도 계속 우리 주변에서 보여진다. 처음 순수한 동기로 목회를 시작한 목사들이 성공한 후 한결같이 상식과 믿음에 반하는 처신을 한다. ‘하나님이 은혜로 준 목회 성공’을 ‘그것을 가능케 한 하나님’ 자신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준 은혜는 일시적인 것이며 언젠가 썩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준 하나님은 영원히 불변하여 은혜를 한없이 베푸는 신이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결국 일시적인 것을 위해 영원한 것을 버린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절) 결국 하나님은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또는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선택하라는 시험을 준다. 하나님의 시험의 또 다른 성격이다. 하나님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마6:24절).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다. 보이는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택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는 신성모독으로 하나님은 진노한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축출된 이유이며 다윗 왕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이유이다.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이 은혜로 준 성공과 그 찬란한 결과를 부정해 버리는 것 - 이것이 성공한 목회자가 짊어져야 할 멍에이다. 이런 멍에만이 목회자를 성숙하도록 돕는다. 하나님 앞에 이런 진실한 목회자가 필요하다. 성공에 파묻혀 성공을 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성공과 그 영광스런 결과를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상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목회 규모를 목회자는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인 목회자는 300명 정도의 교인을 돌볼 수 있다. 이를 넘으면 목회자와 신자들 사이 인격적 교제와 양육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를 나누어야 한다. 이때 인격적 목회도 가능하며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이 양성된다. 그 만큼 하나님 나라가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에 쉽게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대형 교회가 아니라도 교회들이 모여 얼마든지 선한 사역들을 수행할 수 있다. 큰 교회와 성공한 목회자만 영광과 주목을 받는 일을 피할 수 있다. 그들의 교만과 타락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그리고 형제들의 연합하여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다. 이런 일들이 한국 교회에서 언제나 가능할까? 우리 함께 꿈을 꿉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3766869
122 no image 상식과 믿음 중 무엇이 신앙과 목회의 방법인가?
장창수
2442 2013-12-31
상식과 믿음 중 무엇이 신앙과 목회의 방법인가? 세상법과 상식을 쉽게 무시한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어둠과 혼란을 가중시킨 원인들 중 하나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믿음이 상식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상식을 아예 무시한다. 민주주의는 교회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목회하는 독재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목회자가 주관하는 자(고후1:24절)나 주장하는 자(벧전5:3절)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상식과 믿음 사이 관계를 대립적 이분법으로 이해한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나온다. 교회 헌금을 횡령한 목회자는 분명히 세상 법과 상식을 어긴 범죄자이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은 목회자의 죄란 세상 법이 아닌 교회 법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범죄한 목회자가 자기 사회에서 외교관만 누리는 치외법권적 존재가 된다. 참 어처구니 없다. 교회법으로 분명히 치리해야 하며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세상의 실정법으로 그 죄를 또한 물어야 한다. 목회자는 신자들의 본이 되어야 할 공인(公人)이다. 그가 지은 죄를 더 중하게 벌해야 한다. 이를 피한다면 목회자가 교회를 울타리 삼아 저지르는 범죄는 나날이 커질 것이다. 교회가 죄를 지은 목회자의 도피성이 될 것이다. 사회의 비웃음을 받기 마련이다. 상식과 믿음 사이 관계는 무엇인가? 상식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에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에 각각 속한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이 세상과 나라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달성되기까지 보존되고 유지되도록 돕기 위해 주인인 하나님이 베푸는 보편적 은총이다(시145:9, 마5:45절). 상식은 이 목적에 크게 이바지한다. 이 덕분에 아담의 타락 이후 부패한 인류 사회에도 아주 높은 수준의 덕(德)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은총은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인류의 일부에게만 베푸는 특별한 은총이다. 믿음은 이 목적에 크게 이바지 한다. 결국 상식은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방법이라면 믿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게 하는 방법이다. 과연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가? 동일한 하나님이 이 두 은총의 주인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서로 반대될 수 없다. 이처럼 상식과 믿음도 대립될 수 없다. 이 두 은총들은 서로를 돕는다. 세상 나라의 안정과 질서(일반 은총 영역)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특별 은총 영역)를 세우고 확장시키도록 돕는다(딤전2:2-4절).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 은총 덕분에 인류 사회는 더욱 찬란하게 발전한다. 복음이 들어간 나라와 민족의 사회는 계몽되며 전 분야가 찬란하게 발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은총만을 언급하며 일반 은총 영역을 무시한다면 그 결과는 불행하다. 인류 사회에 무속 신앙과 미신이 만연하며 암흑기가 온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이 이를 잘 증언한다.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상식과 믿음에서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상식을 무시한다면 어떤 기준에 의해 세상의 소금과 빛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세상의 상식으로 본다면 목회자와 신자가 성공한 만큼 그 대가를 받고 부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는 것이 용납된다. 그러나 목회자와 신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만 아닌 하나님의 특별 은총 영역에도 속한다. 이들은 세상 법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 상식이 허락한다고 모두 누릴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법인 믿음에 따라 신자들은 절제와 자제 그리고 자기부정을 해야 한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납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세금을 내라고 베드로에게 일렀다(마17:27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 법을 지켰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세상 나라를 멸하는 것이란 오해를 예수님은 피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이 세상에 실현되기 전까지 즉 재림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세상 법과 상식을 존중해야 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왕과의 전투에서 대승했다. 이를 인정한 소돔과 고모라 왕들은 노획물을 다 갖고 사람들만 돌려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사정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욕심을 버리고 사람과 노획물을 모두 다 돌려주었다(창14:22-24절).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유보시키는 자기부정(self-denial)을 보였다. 그는 상식 이상의 윤리를 보였다. 하만 때문에 유대 민족이 전멸 당할 수 있는 위기를 맞았다. 하나님의 은총덕분에 상황이 역전되며 하만, 그 가족들과 친족들이 거꾸로 유대인들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 때 왕은 그들을 멸하고 재산도 모두 차지하라고 유대인들에게 윤허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람만 멸하고 엄청난 재산에는 전혀 손 대지 않았다(에8:11, 9:16절). 물욕(物慾)에 의한 살육이 아닌 정의로운 행위였음을 이들은 증명해야 했다. 아브라함이나 유대인들은 상식 이상의 수준 높은 윤리를 행했다.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지만 자신을 부정하고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보여야 할 윤리적 삶을 가르쳤다.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목회자들이 목회 성공을 빌미로 이 세상에서 대기업의 CEO처럼 대우 받으며 살려 한다. 이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세상은 종교인들이 남달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상식 이상의 윤리를 보여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당연히 세상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을 보여야 한다. 예수님이 말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절)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신자들이 이 세상의 것을 모두 누리면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려 한다. 이들은 상식 이하의 처신을 한다. 이 때문에 사회가 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신자와 목회자는 영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유보시킬 수 있는 자유를 사도 바울처럼 소유해야 한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8-19절)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세상 상식을 쉽게 무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데 있다. 에스겔 선지자가 잘 설명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스려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 둘러 있는 열방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도 행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희 중에 벌을 내리되 네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내가 전무무하게 네게 내릴지라”(겔5:5-9절) 물론 한국 사회는 유대인 사회가 아니기에 예언된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 그 대신 한국 교회는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고난 당하는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사는 사회의 포로처럼 오랜 동안 멸시와 천대를 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를 것이다. 이런 여건에서도 계속 말씀대로 신앙 삶을 살 것인가를 시험할 것이다. 이로써 신실한 신앙인들이 가려진다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리라! 이런 시대의 남은 자들은 앞으로 열릴 새 시대를 위해 말씀의 씨를 뿌리고 뿌려진 씨가 자라도록 물 주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이 일에 나중 반드시 큰 영광이 있으리라! http://blog.naver.com/rassvet/40203633487
121 no image 신명 나는 교회 / 신 내리는 예배
박인철
2403 2013-12-23
 유일신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 그를 성신(聖神)이라하며 그의 필요로 지음 받은 하늘 세계의 일꾼을 천사라 한다. 하나님의 빛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지음받은 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올라 자기를 위하여 노래를 하려다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어 쫓기어 빛을 잃고 이땅 공중의 사탄, 마귀로 귀신 세계의 왕이 되었다. 천지를 창조하시며 에덴에 사람을 위하여 동산을 만드시고 일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으나 하늘에서 쫒겨나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 에덴에서 쫒겨났다. 이후로 사람은 다 죽은 자가 되어 사탄의 종으로 귀신의 영을 받아 살든지 또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어 예수의 영으로 다시 살든지 이다. 우리가 사는 이땅에 '신나는 교회 ' 이름으로 성공 한 교회들이 꽤 있다. 이름은 '기쁨의 교회' 라든지 다른 이름일지라도 실질적으로 '신나는 교회 ' 로 성공하고 이름을 날리는 교회들이 최근들어 아주 많아졌고 다수 교회들이 신나는 교회를 쳐다보며 사모하며 앙망하며 최대한 모방한다. 신난다는 말은 우리 오천년 귀신섬긴 단군조선민족으로서 얻은 말이다. 굿거리 장단으로 신명나게(내리게), 신 내리게 - 신나게, 금송아지 아론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애굽의 괴성을 지르며 방방 뛰다보면 어느새 신이 내린다. 그것을 신난다, 신내렸다 한다. 귀신이 내렸다는 말이다. 귀신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천년 귀신 민족, 단군 조선의 이름을 같은 조선왕조 중에 무슨 일로 단번에 끊어버리고 대한(제)국으로의 개명과 대한예수교 이름의 선물을 받았다(일제하에서는 대한 이름사용이 금지됬었다). 세계역사의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세워진 대한예수교회는 얼마전 까지는 신난다 는 말이나 그런 행위를 교회나 예배의 의식으로 행하지 않았다. 요즘은 순복음이 꽤 점잖아졌으나 30년전 초기에는 주일예배조차도 장로교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광란, 신내림의 현장이었다. 긍정, 긍정 - 그것을 신난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것을 예배라 하니 익숙치 않은 이들은 같이 앉아 있기도 힘든 경험이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 사람에 의하여 망가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것에는 하나님의 (성)신이 충만하다. 그것을 알지못하여 망한 자들이 핑계치 못할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 하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다. 창조 이전에도, 창세후에도 하늘의 천사들이 항상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감히 몸과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 삼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경건함을 신.구약 성경으로 명백히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남사당패 굿거리로 임재하시는 신나는 하나님, 재밌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우습게 대하며 멸시하는 마음이나 생각은 명백하게 사탄의 종된 사람의 체질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내찬송을 부름으로! 여호와의 정숙한 음악 소리로! 이다. 순복음이 아니더라도 소위 젊은이 예배로 연속되는 엇박자 리듬(비틀비틀 걷는)과 비트는 목소리, 드럼비트로 교회당이 떠나가게, 강단무대가 흔들흔들하도록 신나게, 재밌게 흔드는 온갖 짓을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는 교회들......... 장로교? 대한예수교? 목사가 훌륭한 설교하고 / 찬양대, 팀이 멋있는 노래 불러준다고 시도 때도 없이 신나게 박수치며 흥이나는 성도(?) 들의 예배(?) .... 귀신 내림으로 악신에게 예배하든지 하나님의 성신의 임재로 하나님께 예배하든지 이다! 다윗의 신령한 수금소리가 불순종으로 마귀의 종된 사울의 악신을 물리침같이 하나님의 신령으로 예배하는 거룩한 곳, 예배당 성전에는 악신이 들렸던 자도 나음을 입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리라! 주일예배에서의 예배의 부름은 곧 하나님, 성신의 임재를 부르는 것이다. 오르간이나 성가대의 첫 송영(내용이 영광만 찬송하는 음악)은 다윗이 연주하던 신령한 소리, 정숙한 소리로 성경에 보이신대로 하나님이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심이며 집례자의 기원은 하나님의 신령이 예배하는 곳과 그 회중들에게 임재하여 나타나심을 말씀(주로 시편)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예수교회는 이것을 신내림, 신난다 하지 않고 '임재를 기원한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신이 임재하여 즐거이 함께 노래할만한 경건한 예배는 신령의 예배라 할 것이다. 우리 교단 헌법 예배모범에는 이러한 뜻이 잘 담겨져 있음을 알고 우리예배의 머리가 됨이 마땅하여 선서하여 입교하였다. 헌법의 예배보범이 교회의 머리로 인정이 되지 않는다면 교단을 탈퇴하든지 헌법을 고치든지 하여야 할 것이다. 합신교단 교회들은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의 진노가 두렵다면 속히 합당한 자리, 정직한 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개혁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경건한 자로 항상 정숙한 소리나는 악기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까지도 물리치던 다윗이 승승장구하며 교만하여져서 자기 감흥을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여 연주하니 곧 악신이 들어와 도대체 하나님의 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다윗이 (쫒겨난 천상의 사탄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한 대가를 받고 용서 받은 후에는 주옥같은 시편들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소리가 나는 여호와의 악기들로만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성전예배의 모범으로 다윗의 악기로 학정한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의 악기 = 다윗의 악기 곧 신령한 소리 = 정숙한 소리 나는 악기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나단 선지자와 다윗을 통하여 명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노래, 신령한 음악의 노래로 찬송 받으시기 위하여,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며 찬송하게 하시려고 일꾼이 아닌,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자들로 자기 백성을 가족으로 삼아 천국에 들이신다. 일꾼 천사들은 이후에 하나님과 그들을 수종들 것이다. 이땅의 교회는 천국에 들일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하나님의 형상의 식구로 훈련하는 곳이다. 이땅의 교회를 통하여 신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세계를 맛보게 훈련하는 곳이다. 그런데 요즘은 유행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사람을 세우는 교회" 라고 큰 글자로 표어를 매단 교회도 많이 보인다. 천상천하에 유일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을 위하여, 사람의 공로, 사람의 의를 노래하도록 훈련된 자들을 천국에 들이실 리가 없다. 철저히 사람 제자로 훈련되어 예수 대신 머리 노릇하며 곳곳에서 자기 이름, 사람 이름으로 거들먹거리는 자들은 예수의 나라, 예수교, 예수 이름의 찬미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그런 자들을 일찌기 천상에서 내어 쫓으시고 하늘의 거룩한 나라의 뜻을 이루셨다. 영원토록 거룩한 성삼위 하나님의 영광만 노래할 것을 이땅의 교회로 타락한 인간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 찬미의 제사를 훈련하는 곳이다. 그 하늘의 나라는 하나님 찬송만 있다!
120 no image 예배 시작 종과 대한예수교회 개혁
박인철
3173 2013-12-19
 옛날 예배는 거의 강대상의 탁상종을 침으로 시작되었었다. 혹 어떤 교회들은 찬송가 선율의 촤임벨로 예배를 시작하였다. 대한나라로 수십년간, 주일이면 새벽기도회로 부터 시작하여 장년, 어린이주일학교 예배를 알리는 초, 재종으로 종탑의 뗑그렁 종을 열번을 타종하였었다. 지금같이 복잡한 소란도 없고 방음벽이 거의 없어 겨울 방 안에서도 밖의 새소리도 다 듣던 때에 날마다 새벽에, 삼일의 네번, 주일의 열번, 교회 종탑의 뗑그렁 뗑그렁 종소리는 동네 구석구석에 울릴 때에 그 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도심의 웬만한 교회 아니면 사찰도 없던 시대에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이것이 교회의 큰 사명인줄로 알고 새벽, 밤낮으로 한달이면 거의 백번, 한해면 천번을 넘게 힘들여 당겨치는 뗑그렁 종을 걸르지 않고 치고 또 쳤다. 이 종소리를 하늘의 하나님이 이세상 사람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부르는 소리로, 오늘은 주의 날이니 주의 백성들은 다 언덕의 예배당에 모여 찬송하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소리로 힘껏 쳤었다. 수십년간 사명으로 알고 매일 새벽마다 주일마다 그리하였고 세상의 지친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와 생명의 빛을 얻으며 대한예수교회는 그렇게 굳건해져 갔다. 온 대한나라에 이 종소리로 주일은 하나님의 날임을 알렸다. 이로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배당마다 9시는 어린이 주일학교, 11시는 장년예배인 것을 다 알았다. 종탑의 재종이 그치면 예배 집례자인 목사는 아무 말없이 강대상의 종을쳐 회중예배의 시작을 알리면 성가대의 입례송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집례자는 시편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기원하며 예배에 임하였다. 이 무언의 종소리(촤임벨)로 예배는 주보대로 각자 순서를 맡은 이들 - 집례인도자, 성가대(반주), 기도자, 헌금 담당자, 광고 담당자 각각들로 회중예배의 경건한 모양으로 하나님께로 드려졌었다. 이것이 수천년간에 정통 예수교회의 지혜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께의 회중예배의 질서이다. 이예배의주인은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백성을 초청하신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대한예수교회들은 신령한 예배의식으로 세상과는 다른 신비한 하나님 나라로 굳건해지며 장로회의 공화정치를 세상도 본받는 초석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발, 소위 신복음주의와 순복음에 급격한 경제발전이 맞물리면서 교회의 세가 여의도 중심으로 세상적 숫자의 표시로 과시되기 시작하고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유전자 변형 종자처럼 키우는 경쟁을 하면서 교회들이 스스로 교회 강단과 예배 질서와 정치를 무너트리며 교회는 더이상 세상에 대하여 특별하거나 신비함이 있거나 세상의 어떤 모본도아닌, 친교회, 사람위주의 대한사람교로 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예배의 주인이 된 사회자 목사는 맘대로 주일예배시간을 편의에 따라 조절하기도하고 심지어 없는 순서도 즉흥적으로 넣기도하고 빼기도 하며 사회권자로서 맘대로 하기도 한다. 오직 사람을 위하여 사람맘대로 하는 질서파괴의 대한사람교회가 되었음이다. 회중이 다같이 마음을 합해 정확하게 시작하는 것을 거부하고 각자 마음의 형편대로 적당히 편하게 하면서 무언은 커녕 예배인도자가 아닌 사회자로서의 이런저런 소리나 철부지들의 드럼소리나 스크린의 볼거리로 예배를 시작(?)하는 것이 최근에 보편화 된 보수교회들의 행태다. 오히려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교단이나 천주교는 옛 신비함이 지켜지고 있는 형편이다. 태초의 혼돈을 질서의 창조로 하늘과 땅을 구분하여 만드시고 해와 달로 낮과 밤을 구분하시고 , 연한과 시와 때와 시간, 분, 초, 몇만분의 일초까지도 정확히 하시어 창조이래 한치의 오차나 변함없는 똑같은 질서로 졸지도 않고 지켜내어 운행하시는 이 신비는 이땅의 하나님 나라의 근간이다.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하신 만물중에 에덴동산과 이땅을 계속 파괴하는 것은 사탄을 따라 조물주 하나님을 우습게 알며 불순종하는 인간들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사, 예배의 내용과 절차를 알려주신 것들을 무시하고 가인과 사울은 제멋대로 불순종의 제사를 드렸다. 떠오르는 동편의 해가 하나님의 영광임을보이시고 그 아침에 해의 영광을 동편에 두어 제단을 쌓고 제사하게 하셨다. 사람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표준하여 년과 날들의 시계가 돌게하셨고 만분의 일초까지도 정확한 시간 계산의 지혜로 인간이 감히 달까지도 직접 경험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 초정밀한 시간으로 운행되는 날들, 주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면서 강단의 종소리도 없애고 대충 이런저런 소리로 예배를 시작한다. 신복음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강대상의 종을 치는 것을 마치 미개시대의 미개인이나 하는 것으로 여러소리를 늘어 놓은 것이 보수교단 교회들이다. 예배당의 시계를 매주 정확히 맞추거나 그 시계에 맞추어 종치는 것이 귀찮고 힘들고 또 잘 안 맞는 시계에 맞추는 마음의 부담을 덜고 편하게 하려는 것이 본질임을 뒤로 감추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깊이 생각하심으로 세우신 만물과 세계의 질서에 힘을 다하는 정성을 웃음거리 쓰레기로 만드는 것을 마치 무슨 큰 개혁인 양, 여기저기에 큰소리로 과시한 것이다. 종치고 시작하는 것이 힘들고 귀찮으면 혼자 조용히 그렇게 하면 될 것을...... 토요일을 예비일로, 사찰도 없던 때에 목사와 성도들이 힘을 모아 주일의 모든 준비를 하며 종탑의 종을 점검하고 , 강대상의 종도 깨끗이 닦으며, 시계도 태엽을 감아주며 예배당 건물의 유리창도 닦고 정성껏 청소하며 마음과 정성으로 예배를 준비한 성도들에게 그 예배당은 당연히 성전이었으며 예배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었다.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도 다 그렇게 예배당을 성전으로 알았기에 여기저기에서 쉴새없이 울려대는 주일의 예배당의 종소리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 스스로 "교회는 특별한 곳도 아니고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라고했다. 자기 마음과 몸은 성전이라 하면서 정작, 자신을 성전이라 하는 성도들이 성일에 모여 성부 성자 성령께 예배하는 곳은 성전이 아니다 라며 일부러 소리높여 외치는 동안에 예배당은 어느새 성전이 아닌 交인들의 친교문화공연장이 되어있었고 이로써 세상은 당연히 문화친교시설 교회당의 종소리를 시끄럽다고 시비하게 되었다. 예배는 교회의 종합문화행사이고 예배당은 그 문화 행사장이며 강단은 그 행사 공연의 무대이며 강대상은 무대 공연시 이리저리 치이는 귀찮은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강대상 탁종은 강단과 함께 교회당의 쓰레기통에 힘껏 던져버렸다. 하나님께 소중한 예배시간은 어느새 사람교회 交인들의 취미문화활동의 재밌는 시간으로 바뀌어졌다. 하나님이 각별히 세우신 대한예수교회들이 이렇게 되었다. 합신교단의 사람제자교회들이 앞장섰고 오늘도 그런 것에만 관심하며 합신의 많은 사람제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무대강대에서는 딱딱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보다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고상해진 현대 지식으로 성경을 인용하여 주로 세상나라에 대하여 말한다. 성경과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데 합신교회마다, 강단마다 설교가 다르고 찬송 노래가 다르다. 교회가 交회가 되어 특정한 부류끼리 모이는 각각의 목장, 각각 다른 交회 형편에 맞추어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노래와 강연을 하는 친교회가 되었다. 보이는 교회에, 보이는 머리로 주신 교단과 헌법, 그 정신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을 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대신 자신들이 교단과 교회의 머리이다. 사람의 제자로, 스스로 머리되는 훈련을 받은 자들의 잘못된 정신이 뼛속에 깊게 된 결과이다. 새정부가 시작된 "올해 성탄은 기독교와 불교가 하나된 축복된 해" 라고 국영 방송이 논하였다. 그 으뜸 공로자가 바로, 우리 교단의 머리 노릇하며 교계 주요지도자 대우로 지난 봄에 청와대에 초청되었던 이다. 예수교회가 아닌 사람교회와 교단의 머리 된 자이다 대한예수교가 대한사람친교회로 대한조계종과 하나되는 길은 필연의 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보이신다. 조물주와 그의 나라 천국의 질서를 우습게 알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그 영광을 가로채려던 피조물인 천사(장-루시-엘)의 일단을 사탄(루시퍼)으로 내어 쫓으심으로 하늘에서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뜻을 이루셨다. 이땅에서도 하나님나라가 이루어 지게 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고 예수가 올라 가신 그대로 "나팔소리와 함께 " 구름타고 이땅에 다시 재림하시는 날에 여섯번째까지의 사람, 사람, 사람 천년의 세상을 끝내고 사탄과 그 종자들을 음부에 가두고 하늘에서와 같이 이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예수가 이땅의 왕으로 7번째 천년을 통치하실 것이다. 그 후에 구원한 자기 백성을 신부 삼아 혼인예식으로 영원한 나라의 왕, 하나님의 하늘나라에 오르게 하실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모든 질서를 우습게 알고 쓰레기 취급하여 하늘나라를 어지럽힐 자들을 다시는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이 땅의 교회들도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 그런 자들을 바울의 명대로 내어 쫓지 않으면 바른교회, 예수교회가 되지 못한다. 예수교회가 아닌 그런 것들은 이땅에 곧 이루어질 천년 예수나라에도 결단코 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119 no image 창조 기사와 하나님 나라
장창수
2455 2013-12-18
창세기 이야기(76)/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7) – 창조 기사와 하나님 나라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서 성경의 창조 기사가 덜 연구된다. 창조 기사는 너무나 중요하다. 창조 기사로부터 성경 자체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의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의 작정, 계획과 목적에 따른다. 그렇다면 창조 기사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작정을 보여주는 최초의 계시이다. 그리고 이 계시는 마지막까지 성경을 관통할 것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보편적 창조 기사를 그러나 2장은 창조주 하나님의 최고 걸작품인 인간에 대한 특별한 창조 기사를 각각 다룬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며 자신의 창조 행위의 목적 또는 계획을 처음으로 밝혔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절)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었지만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한 후 그에게 자신의 통치를 위임시킬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드러난 보편적 또는 우주적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통치란 형식으로 이 세상에 실현될 것입니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시켜 첫째 아담이 아닌 둘째 아담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성육신함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성취내지 완성될 것을 이미 암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기 2장에서 에덴 동산을 창설한 후 선악과 나무를 심었다. 특별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에덴 동산에 세워졌고 전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도 인류의 참여로 이 세상에 실현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우주적 또는 보편적 하나님 나라도 세워질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도록 하나님은 또 무엇을 했는가? 안식일 제도를 제정했고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세워 가정을 세웠다. 즉 안식일 제도, 에덴 동산 창설, 선악과 규례, 결혼 제도, 부부제도와 가정 제도를 하나님이 만들어 세웠다. 이 제도들은 모두 무엇을 목표하는가? 물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을 겨냥한다.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이들을 독립적으로 연구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 기사는 기독교 신학이 이들을 모두 합해서 통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다시 말해 분석적 방법이 아닌 통섭적 방법으로 말이다. 창세기 1장의 보편적 또는 우주적 하나님 나라나 창세기 2장의 특수한 하나님 나라는 모두 하나님이 명한 문화 사명(창1:28절)의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문화 사명은 이런 목적을 띤 문화 명령이다. 이를 위해 문화 사명은 위에서 이미 언급된 안식일 제도, 에덴 동산, 선악과 규례, 결혼 제도, 부부제도와 가정 제도의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안식일 제도는 인류 사회가 문화 사명의 수행을 위해 6일간 열심히 일하고 안식일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돕는다. 신앙과 문화, 사회, 정치와 경제와 전혀 분리되지 않는다. 에덴 동산은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며 동시에 인류의 사회적 활동이 출발되는 곳이다. 여기서도 종교와 문화가 전혀 분리되지 않는다. 선악과 규례는 인류의 삶과 활동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어야 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임을 가르쳐 준다. 신앙과 윤리가 하나이다. 선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신앙과 윤리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결혼, 부부 그리고 가정 제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세상으로 확장시켜 나갈 인류의 생육과 번성을 가능케 할 것이다. 남자와 여자란 부부로 구성된 최초의 가정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중요한 존재이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이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띠면서 동시에 인류 사회란 공동체의 최소 단위이며 가장 작은 공동체이다. 가정에서 인류는 모든 배움과 훈련을 받고 더 큰 공동체인 사회로 진출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과 윤리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다. 에덴 동산에서 안식일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선악과 규례를 지킴으로 일상 삶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배우고 실천한다. 하나님 나라는 인류 사회가 창성할수록 이 세상에 튼튼하게 세워지고 활발하게 확장될 것이다. 이런 모든 노력들은 가정에서부터 출발된다. 아담과 하와의 본을 따라 그들의 후손들도 그렇게 살고 번성할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는다면 인류가 자신에게 생명을 준 창조주 하나님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불신앙 행위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신의 나라 즉 인류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될 것이다. 그 순간부터 인류는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이 결과 사람의 인격에서 출발하며 부부 사이 그리고 가정에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 사회에 분열과 분리가 일어난다. 이것이 사망의 저주이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 나라 신학과 관련하여 종합적인 교훈들과 가르침들을 준다. 이들이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들의 기준이며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이 성취한 구속도 하나님 나라를 겨냥해야 한다고 창조 기사는 당연히 암시한다. 그리고 창조 기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부터 출발되었고 현재적이며 내재적이라고 증언한다. 기독교 신학들은 이런 하나님 나라 신학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2852198
118 no image 교회도 자기자신을 부정해라!(2)
장창수
1816 2013-12-16
사복음서 묵상(101) – 교회도 자기자신을 부정해라!(2) 교회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몸의 머리는 바로 부활주 자신이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2-23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절) 그렇다면 몸인 교회의 지체들인 신자들은 철저히 머리의 지시를 받아 신앙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의 뜻에 따라 신앙 삶을 사는 것은 곧 예수님이 이미 보인 본을 따라 사는 삶이다. 여기에서 난처한 문제가 교회와 신자들에게 생긴다. 예수님은 부활로 말미암아 역사상 인류의 구세주요, 만물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부활주 그리스도는 인류 사회 앞에 당당히 자신을 증명하며 만유의 주로 숭배할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사회에 알려질 것이다(마28:18-20절). 믿는 자만 영광을 부활주에게 돌리고 불신자들은 여전히 그를 무시할 것이다. 신학적(원리적)으론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요, 만유의 주이다. 그러나 역사적(문화적)으론 그렇지 못하다. 이에 따라 교회와 신자도 어정쩡한 위치에 놓인다. 하나님은 왜 그랬을까?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은 늘 그랬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한 후 자신의 통치를 인간에게 맡겼다. 그리고 선악과 규례를 주며 지킬 것을 명했다. 이런 시험을 통해 순종자들에게만 에덴 동산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은총을 줄 것이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이미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산 율법을 주며 지킬 것을 이스라엘에게 요구했다. 이런 시험으로 순종자들만 가나안에서 장수하며 살 것을 하나님은 약속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인류의 구속을 역사적으로 성취했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류 사회를 시험하여 믿는 자들만 구속 사역의 결과를 누리도록 조치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은 여전히 시험의 장소로 남는다. 바로 이 때문에 부활 후 예수님은 자신을 만인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렇게 부활한 예수님은 인류로부터 영광 받는 일을 잠시 보류시켰다. 하나님의 이런 경륜을 믿는다면 교회와 신자도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신자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당당히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예수님 재림 이후로 기꺼이 미루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 예수의 뜻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독교와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이해하지 못한 체 고난 대신 영광을 늘 택한다(롬8:17절). 다른 문제가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교회의 영광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늘에 속한 영적 복이다(엡1:3절). 그러므로 교회의 영광은 세상 것으로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리하게 세상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왕궁이 아닌 마구간에 출생했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서 우린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자주 보여진 메시아의 은닉(隱匿)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의 영광은 세상 식으로 표현할 수도 그리고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교회와 신자들도 자신들의 영광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받으려고 노력할 어떤 이유도 없다. 예수님의 이런 자기부정은 부활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참 영광은 재림 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골3:4절). 예수님을 진정 구세주와 만유의 주 그리고 교회의 머리로 믿고 신뢰하는가? 그렇다면 교회와 신자들은 예수님을 본을 따라 자기를 부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자기부정의 본을 공생애 중에도 그리고 부활 후에도 보였다. 교회도 늘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신학적 관점에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됨을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말라! 하나님이 왜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보류시켰는가를 알고 신학적 관점을 교회 내부에선 유지하되 세상에선 배타적으로 주장하지 말라! 그 동안의 교회사는 교회가 자신의 영광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는 순간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젠 자신의 영광을 세상으로부터 감추고 복음과 하나님 나라 시민다운 삶으로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임을 증언하라! 모든 권위가 부정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일방적 주장보다 윤리적 삶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다. 전도와 선교 전략에서 변혁이 요한다. 이를 위해 교회론을 비롯한 기독교 신학은 신국론을 중심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2690215
117 no image 한국교회가 축복이라는 단어 속에 말씀의 향을 담기를 바라며...
박홍서
2691 2013-12-12
한국교회가 축복이라는 단어 속에 말씀의 향을 담기를 바라며...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목회자와 신학자의 차이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신학교에 다녔던 집사님이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서 긴장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목회자의 말이라면 항상 믿고 따랐던 집사였기 때문에 100% 이해는 안 되는 것 같았지만, 그동안 쌓아 놓았던 은혜의 힘으로 넘어가는 듯이 보였었다. 하기야 신학에 입문하게 되면 먼저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는 기도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직면하면서 갈등을 하게 된다. 성경에서 축복이라는 단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시기에 하나님께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목회자는 축복이라는 단어를 너무 남발하고 있는 것을 신학자들의 강의를 통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진리의 사도들처럼 180도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축복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게 되면 잘못 사용하고 있고. 목회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강력하게 부각시켜 난처한 입장이 되게 된다. 목회자들이 과연 복과 축복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의 복과 축복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문제 제기가 맞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세상적인 축복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복을 잘못 사용하여 기복신앙으로 흐르고 있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으로 큰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기복적인 신앙상태와 성도들이 육적인 축복을 구하고 찾고 있는 신앙 양태를 신학자들이 목소리를 내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제기들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 중요한 일이고 좋은 지적이 된다. 신학생들도 문제의 지적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어 한국교회를 위한 마음으로 예민해진다. 그래서 제기되는 문제나 진리에 관한 문제로 충돌이 되게 되면 강력하게 나서서 자기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에 대해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언제나 늘 있어 왔던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상태가 영적으로 어리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외적 신앙의 양태라 열심으로는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내적인 은혜나 영적인 신앙으로는 어린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천국의 복을 육적인 복이나 세상적인 복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같은 신앙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신학생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면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성경적인 관점을 받고 변화되는 모습이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서 활동하는 언어의 힘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문자와 언어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특별히 주신 선물이 된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족속들이 무언으로 약속하여 통용하고 있는 언어와 기호문자들이다. 언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지식의 풍성함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기술과 재능 그리고 부요한 삶이나 능력의 삶이 그냥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요함은 풍성한 지식을 습득함으로 이루어지기에 발버둥 치며 분투노력하여 성과를 내거나 열매 맺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이제는 기독교가 이 시대를 잘 알아야 하고 사람들의 지식수준을 앞서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수천당식의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갈고 닦지 못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되었고 수준이 되고 말았다. 목회자와 신학자는 세상이나 사람들에 비해 지식 부분에서는 상당히 앞서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감사하면서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분야를 발전시키고 개발시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사람만이 만들어 가는 정신적인 분야의 복된 길이다. 그것은 문화인이 되어 앞서게 되는 것이고, 후세를 위해 길을 닦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누구든지 따라갈 수 있는 복된 길이 되는 것이다. 그 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이고 누구를 막론하고 따라가야 하는 약속된 길이 된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축복이라는 단어의 축은 빌 "축"자이고 복은 복 "복"자이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단어는 복을 빈다는 뜻이 된다. 그 뜻을 풀어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빌어 주는 것이고, 위에서 주시는 복을 풍성하게 받기를 빌어주는 마음이다. 그것을 교회에서 목회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해서 성도들에게 축복을 빌어준다면,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풍성한 복을 주시기를 빌어 주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 뜻 그대로 문자적으로 풀어 보면 하나님 위의 신 즉,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 되시는 가상적인 다른 신에게 복을 내려 주시도록 빈다는 뜻이 되고 만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하거나 하나님을 아는 학문으로 복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 얼마나 황당한 뜻인가를 알게 된다. 이렇게 지식의 힘은 큰 것이다. 그래서 룰을 지키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게 되면 엉뚱한 길을 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지식이 높은 사람들에 의해 언어는 발전되어져 왔고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나 문자의 기본적인 틀이나 뜻을 무시하고 바꾸거나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나 신학자가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가 어떠하든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축복 속에 담겨져 있는 기본적인 의미 언어의 기본적인 틀을 무시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문자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문자의 기본을 무시하면 무식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오랜 시간 교육을 받고 인간 사회에서 약속된 기호문자의 룰을 지키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문자의 기본적인 약속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호문자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고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 내용과 의미는 문자의 기본적인 내용과 뜻에 대해 먼저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문자의 사용상에서 본래의 뜻이나 기본을 무시하면 안 된다. 성경에 복이라는 단어가 표준 새 번역에 1000여 번 가깝게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축복이라는 단어는 약 66번 정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복이라는 글자는 "복" 복자이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나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것이 복이라는 단어를 문자적으로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축복”이라는 단어는 복을 빈다는 뜻이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축복이라는 단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복을 빌 때 사용하는 말씀으로 나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연약한 성도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축복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는 성경 말씀대로 번역자들이나 성경학자들이 “복”과 “축복”이라는 구별된 단어로 분류를 잘해 놓은 것 같다. 그래서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한테는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무지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일부러 사용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도 있다. 그때 신학적인 관점이 있는 성도나 문자적인 뜻에 예민한 성도가 있다면 분명히 귀에 거슬릴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목회자의 수준이 낮다고 판단하게도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 중에는 본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기는 성도도 있게 된다. 이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다툼이 되어 왔던 한국교회의 문제가 된다. 한국교회가 뒤쳐진 지식의 문제로 세상에 약점으로 잡혀 있다. 이제 한국교회와 신학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한국 교회를 정상적으로 본다면, 어린 수준의 교회가 아니고 청년기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세계교회의 역사에 비하면 극히 짧은 한국교회의 역사이지만, 한국교회의 성장은 놀라우리만큼 발전되었고 자라왔다. 그래서 작은 나라에서 한국교회가 부흥되어 이제는 세계선교에서 세계2위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신학계나 세계교회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위상이 높아져 있다. 그런 반면 한국교회가 이 나라에서는 멸시를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실정에 처해 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지적하는 것은 교회 문제라든가 목회자들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지식기반 사회를 넘어 정보 전문화의 시대에 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은 사람들의 죄 성이 간교한 활동으로 자신보다 무식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건건 무시하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지적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무시하고 있기에 교회 문제나 목회자 문제를 들고 질타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본질의 문제는 감추고 본질과는 다른 외적인 문제로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는 항상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이래 많은 발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어 우리가 사용하고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국어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기호문자의 변천사를 통해 살펴보면 무수히도 많은 변화 속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오늘의 글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될 것이다. 이렇게 문자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 노력은 그 시대 상황에 맞추어 문자를 발전시켜 모든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수정하고 고쳤던 것이다. 그 시대마다 사람들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 국어학자나 한글학자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도 많은 언어학자들이 있는데 기독교에 맞게 문자를 발전시켜 사용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좋게 수정할 수가 없어서 그냥 이대로 사용해야 옳은 가이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목회자들이 사용함에 있어서 문자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틀렸다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학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아무리 무식해도 기독교의 신앙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데 하나님 위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교회가 발전하고 성숙하게 되면 목회자의 단편적인 면만을 보지 않게 된다. 목회자가 오랜 시간을 준비한 신학적인 관점과 목회철학적인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본질적인 이 부분은 감추고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면 모르게 된다. 그래서 전문가적인 눈이나 신학적 관점이 없으면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고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야 하고 성경적 관점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순수한 한글로는 빌 축자가 아니라 베풀 축이나 내릴 축으로 사용해야 한다. 축은 빌 "축"자이다. 그래서 축복하면 복을 빈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빌어주는 마음이다. 부모가 자식에게나 나라님이 신하에게 복을 빌어주는 단어가 축복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이 다 종교성이 강했다. 우리나라의 고구려 시대는 불교가 왕성한 나라였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유교가 들어와 500년 동안 유교 문화 속에서 살아오게 된 선조들이었다. 그 종교성의 여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영향아래 들어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당연히 문화인이기에 문화를 먹고 살게 되어 있다. 문화는 그 시대에 활발했던 종교문화를 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된다. 그래서 복을 빈다는 것은 문자적이나 철학적인 의미를 넘어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글자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축복과 같은 단어는 특별한 단어이기에 이러한 단어들은 종교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단어라고 하는 특별한 단어에는 그 시대에 왕성했던 종교의 내용이나 의미가 담겨 있게 된다. 문자는 객관적 사실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철학이나 종교적 의미가 콩고물처럼 묻게 되고 담겨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100년이 훨씬 넘은 한국교회가 무속적이거나 불교와 유교의 문화가 담겨 있는 축복이라는 단어 그대로 사용해야 옳은가? 기독교에 맞게 말씀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베풀다, 내리다, 주다라는 동사들을 붙여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이라는 단어는 명사이기에 동사나 다른 품사를 달아 설명해야 분명한 내용이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축복이라는 단어는 똑같은 명사이지만 설명이 담겨 있는 단어이다.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다는 뜻도 기본적으로 담겨 있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단어는 간단명료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목회자들이 축복이라는 단어 사용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에게 더 많은 복을 받게끔 해주고 싶은 사랑의 발로이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더 힘이 들어가고 더 많은 복을 주실 것 같은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은연중에 축복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중시해야 하는 신학자들이지만, 목회자는 성도들 편에 서게 되고 성도들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객관적 중립을 지키기가 어려운 문제임을 통감한다. 그렇다고 심각한 문제가 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증언함에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고 하나님 편에 서야 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이와 마찬가지의 믿음을 가진 자녀들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나 원론적인 문제들이 아니고 적용의 문제인 것이다. 목회자들도 객관적 관점을 준비하기 때문에 객관적 중심에는 흔들림이 없이 지켜 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용면에서는 상대 입장에 서기 때문에 주관적인 적용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학자들이나 학생들이 보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축복이라는 한 글자만이라도 기독교 향기가 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축복이라는 글자는 객관적으로 잘 세워놓아야 적용하는 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아무런 문제없이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약속을 하고 규칙을 세워 놓아야 한다. 그것은 축복이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인 하나님의 복을 담아 놓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축복이라는 단어의 뜻을 수정하는 것은 은혜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야 한국교회에서 은혜롭게 사용할 수 있고 세상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축자를 빌 축자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릴 축으로 발전시켜 사용하는 것이다. 빈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로 위로 향하여 신을 찾아가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것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여 신을 찾아 나선 인류의 발자취가 그려진 종교적인 마음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만나 주심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공동체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찾아오신 말씀의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린다는 의미나 베푸신다는 뜻이나 주신다는 뜻을 꼭 담아놔야 한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던 세상적인 관점의 의미를 위에서 아래로 하나님 중심의 원리로 변화시켜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을 하나님나라의 것으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복을 베푸시거나 내리시는 하나님을 축복이라는 한 단어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래의 빌 “축”자는 지상에서 하늘로 향해 소원하여 비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자라는 기호문자의 뜻이다. 그래서 한자를 진서로 높이는 사람들이야 그대로 사용하기를 바라겠지만, 우리 고유문자인 한글자체에 담겨있는 의미는 위에서 아래로 내린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내리는 것이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은 풍요로움이 담겨있는 글자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베푸시고, 쏟아 부어 주신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영적인 언어감각이 있어서일 것이다. 글자를 자세하게 분석하기보다 대략적으로 간단하게 분석해 보기로 한다. 축이라는 글자에서 “추”와 “ㄱ”가 합해져 있는 글자이다. 추라는 문자는 대표적으로 가을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계절의 중심으로 꼽는다면 가을이다. 왜냐하면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계절인 반면 열매로부터 시작하는 계절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열매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열매란 곧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양식은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양식은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계절의 중심으로 보거나 또는 시작하는 출발로 보게 된다. 그리고 “ㄱ"는 문자는 위에서 아래로 쏟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해를 돋기 위해서 ”ㄴ"이라는 글자는 ㄱ와 반대 모양을 취하고 있다. “ㄴ”는 문자는 안이라는 뜻과 담긴다는 뜻이요, “ㄱ”이라는 문자는 쏟아낸다는 뜻과 붓는다와 내린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축자는 가을을 쏟는 즉 열매가 쏟아지거나 부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는 글자이다. 한국교회에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한국 교회가 이 축복이라는 한 글자만이라도 복을 빈다는 뜻에서 복을 주신다는 뜻으로 변경하여 사용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우리의 글이 아닌 한문이 걸어온 문자의 길을 따르던 길에서 바꿨으면 좋겠다. 기독교만의 본질적인 뜻인 하나님의 축복을 가득담은 글자로 변화시켜 사용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축복이라는 글자가 종교적인 의미로 땅에서 시작하는 미완성적인 글이 아니라, 하늘에서 시작하는 하늘의 복이 담긴 글자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한 단어만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베풀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 주시는 뜻으로 사용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멘. 목사 박홍서 올림
116 no image 가나의 혼인잔치와 성전 청소
장창수
2656 2013-12-11
사복음서 묵상(98) – 하나님 나라와 가정(2) (부제: 가나의 혼인잔치와 성전 청소) 성전 청소 기사는 공관 복음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지킬 때의 사건으로(마21장, 막11, 눅19장) 그러나 요한 복음에선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사건으로 각각 기록된다. 4복음에 의하면 성전 청소는 두 번 발생했다. 그러나 저자가 기록한 관점과 목적이 달라지며 한번 일어난 것처럼 기록된다. 요한이 첫 유월절 절기의 사건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주임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말3:1절).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말3:2-3절) 흥미로운 사실은 요한복음 2장에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 뒤에 예수님의 성전 청소 기사가 기록된다는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제일 처음으로 행한 사건들이다. 이들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분명히 증거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나란히 기록한 목적은 무엇인지? 이것이 궁금해진다.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이 분명히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모자란 포도주를 채워주기 위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했다. 혼인은 가정을 이루는 기쁜 경사이다. 이런 잔치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 부모와 그 식구들과 인척들 그리고 혼인한 부부가 위기를 맞았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함으로 이들을 구원해 주었다. 이적을 행함으로 예수님도 새롭게 출발하는 가정을 또한 축복했다. 공생애를 막 시작하며 예수님은 왜 혼인 잔치에서 자신의 메시아 됨을 증거해야 했는가? 이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그의 이적은 예수님이 가정을 중요하게 보았음을 증명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따르면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바로 남자와 여자를 부부로 세워 결혼시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가정(家庭)을 세우는 것이었다(창1:26-27절). 하나님은 창조 행위로 새로운 가정을 축복했다(창1:28절). 앞으로 인류는 아담과 하와로 구성된 가정에서 출생하고 그곳에서 자라고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이 명한 문화 사명(창1:28절)을 수행할 하나님의 일군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 이에 따라 아들도 아버지처럼 제일 먼저 가정을 축복해야 했다. 이 점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 성전 청소는 무엇을 뜻하는가? 성전은 하나님이 거한 거룩한 궁전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통치 정소이기도 했다(출25:22절). 아들은 참 성전이 되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기 위해 왔다(요1:14절).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아들을 통해 새롭게 출발될 것이다(마4:17절). 아들은 아버지가 세운 성전이 모세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면 이를 바로 잡아야 했다. 결국 이 두 기사는 창조 기사를 아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창조 기사에서도 하나님 나라와 가정 사이 관계는 너무나 긴밀하다. 당연히 아버지의 목적과 뜻을 이어받아 아들은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무너진 하나님 나라와 가정의 복구에 두어야 한다. 아들이 세상에 온 목적이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사도 요한은 혼인잔치 기사와 성전 청소 기사를 의도적으로 나란히 기록했다. 이로써 메시아인 예수님의 사역 목표와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요한이 분명하게 암시해 주었다. 그럼 공관복음은 이 둘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30년 동안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그가 외친 복음은 바로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님은 가정과 하나님 나라 사이 균형을 전혀 잃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와 가정, 이들은 창조론과 구원론에서 서로 나뉠 수 없다. 구원론은 창조론이 밝혀주는 하나님이 작정, 계획, 목적과 목표에 따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론에서 말하는 칭의, 성화와 영화는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출생, 하나님 나라 시민 삶과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은 상속이란 단계들로 각각 설명될 수 있다. 이를 돕기 위해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문화 사명(창1:28절)의 목적대로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복음 전파를 통해(마28:18-20절) 먼저 개인 신자의 마음에, 그 다음 신자들이 속한 가정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자들이 활동하는 인간 사회에 세워진다. 이 때 교회가 영적 차원에서 신자들을 돌본다면 가정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작은 공동체로서 훈련장 같은 역할을 한다. 기독교에서 가정은 이리도 중요하다. 교회가 기독교 가정을 잘 세우도록 가장을 양육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다. 가장은 가르치고 치리하면서도 제일 먼저 모본을 보여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 만약 신자들이 가정과 식구의 역할을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배운다면 결혼 삶, 부부 삶 그리고 가정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가정이 파괴된다. 이런 시대 기독교 가정들은 하나님 나라와 인류 사회를 위해 너무나 중요하다. 교회는 신학이나 예배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가정에 대한 가르침들을 제공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가정을 잘 세우도록 돕는 기독교 윤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 윤리 사이 그리고 교회와 가정 사이 균형을 잘 유지하는 일은 성숙한 신앙에 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2374738
115 no image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장창수
2102 2013-12-11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부제: 다윗의 마지막 왕손 여고냐의 영욕) 여호야긴(여고냐 또는 고니아)은 여호야김의 아들로 다윗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물론 그의 뒤를 이어 시드기야 왕이 11년간 통치했다. 그는 다윗의 왕손이었지만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족보에서 제외되었다. 시드기야 왕과 남은 백성에 대해 이렇게 예언되었다.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같이 버리되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그들로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로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케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렘24:8-10절) 그러나 바벨론으로 잡혀간 여고냐와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예언되었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24:6-7절) 시드기야의 통치는 의미가 없었다. 메시아의 혈통에서 벗어난 다윗 왕국은 하나님 앞에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바벨론 포로들로 미리 보냄으로 멸망의 심판을 피하도록 조치했다. 새로운 다윗 왕국은 이들에 의해 출발될 것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이를 잘 증언한다. 여고냐의 포로 삶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18세에 즉위한 후 3개월 동안 통치하며 그는 하나님을 거역했다(왕하24:8-9절). 그의 악행은 성인으로 지은 죄였다. 하나님은 그를 징벌해야 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 다윗 왕국은 무너졌고 여호야긴은 적군의 포로로 끌려갔다. 그곳의 삶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이월 이십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 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렘25:27-30절) 여호야긴의 삶은 셋으로 나누어진다. 18세까지의 삶, 37년간의 옥살이 그리고 55살 이후의 삶. 18세까지의 삶은 하나님 앞에 불경건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전에 정해졌다.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여 경건한 조상으로 세워야 했다. 그는 바벨론에서 37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적국에서 그는 치욕적 삶을 살았다. 옥에서 그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곳에서 비로소 그는 자기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했다. 비록 조국이 망했지만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 신임을 알았다. 그곳에서 모세오경을 자세히 읽고 묵상했을 것이다(시1편). 물고기 뱃속에서 사망을 체험한 요나가 회개한 것처럼 그가 옥에서 고통과 치욕을 당하며 회개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왕자나 왕으로 살 때 그는 불경건한 자였지만 옥에서 죄인의 삶을 살며 그는 낮아져 겸손해졌다. 모든 것을 가졌을 때 악인이며 죄인이었지만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는 의인이 되었다.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그는 옥에서도 늦게 회개했다. 그 만큼 그의 완악함과 강퍅함이 컸다. 그러나 절망감이 깊어갈수록 그의 완악함도 서서히 무너졌다. 이를 목적하며 하나님이 그의 옥살이를 연장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옥에서 일찍 회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즉시 그를 석방시키지 않았다. 10년도 아닌 20년 이상 옥에 있었을 것이다. 절망적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했다. 그곳에서 그는 은혜의 샘을 만나 하늘의 은택을 맘껏 누렸다(시84:6절). 마침내 그도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26-33절) 37년 동안 옥에서 그는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졌다. 그 만큼 하늘의 은총을 그가 맛보았다. 세상에서 그는 보잘 것 없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선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였다. 옥은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그를 다시 세워 연단시킨 훈련장이었다. 세례 요한도 생명이 없는 광야에서 어릴 때부터 자랐다. 그도 세례 요한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신앙 용장이 되었다. 55세 이후 삶이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그는 적국에서 포로였지만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왕하25:27-30절)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다른 왕족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렸고 그는 바벨론 제국의 왕족 취급을 받았다. 옥을 벗어나 세상 부귀를 누렸지만 그는 더 이상 타락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며 남은 삶을 살았다. 예전 그는 패역자였지만 말년 하나님 앞에서 승리자로 드러났다. 그의 인생과 삶은 구원 받은 신자들의 그것들과 겹친다. 이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덕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견인의 은총 덕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와 뜻 그리고 목적을 반드시 이루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며 동시에 언약에 충실한 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굴복시킴이 없이 자신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할 수 있는 전지전능의 신이다. 사도 바울의 영광송이 이를 증명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절) http://blog.naver.com/rassvet/40202305580
114 no image What to do와 how to do
장창수
1875 2013-12-11
What to do와 how to do 무엇을 하느냐와 어떻게 하느냐? 결과냐 아니면 과정이냐? 아니면 업적이며 아니면 인격이냐의 문제이다. 기독교의 조직신학의 각론들은 항상 who를 다룬 후 what을 논한다. 이렇게 신분과 직분 사이 관계는 아주 긴밀하다. 마찬 가지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칭찬하는 업적은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에 의해 행해진 결과이다. 요즘 한국의 대형 교회 목회자의 비리와 불의가 신문 지상에 보도된다. 그는 한 동안 존경 받는 목회자였다. 자신을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 그래함 목사와 비교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억 단위의 교회 헌금을 유용했고 여자 문제로 그의 말년은 너무나 비참하다. 그는 거짓 선생으로 드러났다. 결국 그는 주님이 아닌 자신을 위해 목회 성공에 힘을 쏟았다. 원인은 무엇인가? 과정보다 결과에 그리고 인격보다 업적에 치우친 데 있다. 예수님은 이런 목회자에 대해 말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절) 교회나 신학원에서도 목회자의 인격보다는 은사와 능력에 더 치우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보았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5절) 12제자들을 세운 목적이 셋으로 나뉜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둘째 보내 전도하게 하고 그리고 셋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갖게 함이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설교와 가르침을 의미한다면(막1:15, 행28:31절) 셋째는 축사(逐邪)의 권세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臨在)를 증거하는 것이다(마12:28절). 둘째와 셋째 목적은 제자들이 수행할 사역들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하나로 줄인다면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목적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수행할 이런 사역보다 앞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물론 그를 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를 보고 배우는 것이 없이 설교와 이적들을 수행한다면 예수님이 이미 지적했듯이 결국 거짓 선지자로 드러날 뿐이다(마7:15-29절). 그럼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는가? 그의 말씀과 인격과 삶 그리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되는 ‘하나님의 경륜’을 제자들은 배워야 한다(마7:21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설교하고 이적을 행하는가가 거짓 선지자 여부를 결정한다. 인체 공학이 이를 잘 증언한다. 몸의 지체들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 행한다. 손과 발이 행하기 전 머리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들은 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의 머리인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지체들인 신자들은 반드시 행해야 한다. 이 여부에 따라 거짓 신자와 거짓 선생 여부가 결정된다(마7:18절).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것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즉 무엇을 이루었는가 보다는 어떻게 이루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길이며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들은 졸부를 결국 비웃는다.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자를 사람들은 마침내 존경한다. 위에 언급한 목사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들이 존경 받는 지도자보다 멸시 받는 졸부의 길을 가고 있다. 성공, 출세와 명예와 부를 강조하는 번영신학 즉 캘리포니아 신학의 문제이다. 이 신학은 구약 시대 유행했던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바알 신앙의 현대판 변형이다. 기독교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 당연히 버림 받아야 한다. 은사와 재주 또는 능력을 자랑하지 말라! 이들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라! 이를 알 수 있다면 우린 지금도 거짓 선생 여부를 즉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즉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사는지 여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이력에 속지 말라! 그의 인격과 성품을 알아보아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2233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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