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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1 20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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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6 201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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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65 201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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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54 2010-07-23
113 no image 교회도 자기자신을 부정하라!
장창수
2174 2013-12-11
사복음서 묵상(99) – 교회도 자기자신을 부정하라! 중세 이후 지금까지 일어난 대부분의 문제들은 교회론과 관계된다. 카도릭에서 교회는 말씀보다 높다. 그렇게 교회가 절대 권력을 소유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이 발생했다. 반면 개신교에서 교회는 말씀 아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여전히 주목의 대상이다. 맞는 듯 하지만 위험 요소가 있다. 교회의 영광이 강조될수록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종교적 권위도 덩달아 상승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즐겨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이다. 정말 교회는 영광스런 존재이다. 그런데 여기 생각할 것이 있다. 부활한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요, 만유의 주가 되었다(엡1:20-23절). 예수님은 인류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를 거절하듯 120명의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승천했다(행1:9-11절). 부활주의 ‘자기부정’이 여기 발견된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도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그리스도란 신분을 감추었다.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임이라면 그리고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체라면 교회도 예수님의 자기부정을 배워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거절한 세상 영광을 교회가 대신 누린다면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더구나 보이는 교회는 불완전한 인간 제직들에 의해 치리된다. 이들이 어떻게 부활주가 거절한 영광을 가로챌 수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교회론이 다시 묵상되어야 한다. 그 동안 기독교는 부활주의 영광만 추구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부활주는 재림 때 자신의 영광을 만인 앞에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도 그 때까지 부활주의 영광스런 몸이란 사실을 부정하고 낮아져서 교회의 사명 수행만 전념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교회사는 기독교 교회가 이런 노력에 실패했다고 증언한다. 교회가 자신을 부정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나 그 몸은 그리스도란 머리의 지시를 받는다. 머리 이외 지체들은 다 동등하며 지체들로써 맡은 직분만 수행하며 된다.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을 따라 지체들도 자신을 부정하며 맡은 직분을 수행할 것을 늘 원한다. 목회자가 갖는 교회의 대표성은 지체로써 맡은 직분이지 여전히 머리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이 때 그의 대표성은 유효하다. 지체들이 말씀에 따라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도울 뿐 지체들을 주관할 권리는 전혀 없다 (고후1:24, 벧전5:3절). 그렇다면 목회자도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항상 살아야 한다. 영적 권위가 주는 영광은 불완전한 목회자에게 아주 위험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진실성은 자기부정 노력에 있다. 그리고 교회는 부활주의 몸이다. 상식적으로 몸은 몸을 위하지 않는다. 특정할 활동과 사명을 위해 몸이 존재한다. 즉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교회는 자신을 부정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몸만 살찌우려는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모으는 목회와 보내는 목회에 힘써 하나님 나라가 인류 사회에 세워지고 확장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교회론의 내용 규명과 정의에 힘써 왔다. 몸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해서만 주로 연구한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교회란 몸이 무엇을 목표하며 활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교회들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이 덕분에 목회자가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 못지 않게 높아지는 비정상적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중세 유럽의 교회처럼 교회의 외형에만 몰두한다. 교인들을 양산하지만 하나님 나라 시민 양성에는 늘 실패한다. 보내는 목회도 늘 모으는 목회를 겨냥한다. 이 결과 목회자들은 목회 성공으로 그리스도가 누려야 할 영광과 존귀를 대신 누린다. 신천지를 비롯한 사이비, 이단도 결국 교회만 중요하게 보는 잘못된 교리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 성경이 강조하는 교회의 영광은 신학적(원리적) 관점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영광과 존귀를 받기를 잠시 보류시켰다. 역사적(적용적) 관점에서 그의 몸인 교회도 세상 영광을 부정해야 한다. 교회의 참 영광은 이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며 세상이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광은 오로지 재림 이후에만 나타날 것이다. 기독교의 교회론은 하나님 나라 신학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이 때 교회란 몸은 존재와 활동의 의미와 목표를 찾는다(마28:18-20절).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는 임시적으로 즉 한시적으로 존재한다.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에게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넘기면 보편적 교회도 그 앞에 굴복할 것이다(고전15:23-24절). 이 때까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자기를 부정하며 다른 한편 맡은 사명에 몰두해야 한다. 이 때 사이비 이단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 이단은 계속 창궐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이용하여 자기 백성을 택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영적 혼란과 어둠은 이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제 교회는 자신을 부정하고 본연의 임무와 사명에 몰두해야 한다. 결국 이것은 목회자들이 자신을 부정하는 결단과 노력에 달린다. 이 결단과 노력 여부가 진실한 목회자 여부를 가르는 갈림길이 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2436398
112 no image 하나님 나라와 인체 공학
장창수
2099 2013-12-03
창세기 이야기(75)/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6) - 하나님 나라와 인체 공학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립을 부탁하며 그 동안 모은 재물들을 주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기쁘게 헌신했다. 이를 보며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1절) 여기서 주목을 끄는 표현은 바로 주는 ‘만유의 머리’라는 것이다. 만유의 머리란 한 마디로 만유의 주 즉 최고 존재란 뜻이다. 그러나 성경 저자는 고의적으로 머리란 단어를 사용했다. 머리란 단어는 몸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단어가 저자의 의도를 암시하는 이유이다. 저자는 몸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머리란 단어를 사용하며 신론(神論: Doctrine of God)을 설명했다. 그럼 몸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萬有)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몸이고 창조주는 그 몸의 머리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이처럼 잘 설명하는 단어는 있을 수 없다. 몸은 머리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만물 가운데 미물(微物)이라도 머리의 지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우주에서 우연(偶然)이란 있을 수 없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된 만유의 머리란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관련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보편적 우주의 창조주로서 당연히 만물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은총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성취내지 완성될 때까지 베풀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자신의 통치 즉 나라를 자신의 피조 세계에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 나라는 보편적 성격을 잃고 제한적 그리고 특별한 나라로 바뀌었다(창3:15, 12:1-3절). 구속의 은총을 받은 인류에 의해서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이 은총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라 불린다. 놀랍게도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특별 은총 위에 세워진 교회의 머리와 몸이 부활한 예수님으로 설명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절) 그는 교회의 머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머리 즉 왕이다. 그 결과 그는 만물의 머리 즉 으뜸이다(엡1:20-22, 히1:3절). 또 다시 머리와 몸이란 단어들을 사용하여 사도 바울이 기독론을 설명한다. 구약과 차이는 여기 몸과 머리가 하나님의 특별 은총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와 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구원 사역에 대해 뭔가를 설명한다. 몸으로 설명된 보편적 세계나 특별한 하나님 나라 그리고 교회 모두 머리인 그리스도의 작정, 계획, 목적과 의지에 따라 존재하고 활동한다. 그리고 여기 작정은 이미 우주와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기 이전 즉 창세 전 하나님의 작정과 긴밀히 연결된다. 아니 이 두 작정(作定)은 사실 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작정을 예정과 선택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도록 정해진 무리를 양자 삼아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울 것이다(엡1:4-5절). 이들로 하나님의 가정이 세워질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의 가정은 바로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가정을 세움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이다. 이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창조했고(창1:26절) 그리고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여 자신의 형상을 되찾아 주었다(요1:12절).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절) 먼저 하나님의 가정에 속해야만 나중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가정 사이 관계는 이렇게 긴밀하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왕인 그리스도가 머리인 몸이다. 당연히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위해 세워졌다. 달리 설명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정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목적을 늘 의식하며 교회의 머리로써 교회를 세우고 치리할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함께 결코 잊지 말아야 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유감스럽게도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이 세계와 교회의 머리라는 신학과 교리가 그렇게 강조되지 못한다. 그 결과 불완전한 인간이 왕 노릇 하는 불행이 교회에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미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23:8-10절)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이다. 그 후 그는 만유와 교회의 머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제자들 앞에서 강조해야 했다. 당시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의 관행을 자신의 제자들이 배우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만유의 머리와 교회의 머리가 될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의 구속 사역의 목표를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두었다. 교회의 민주화는 성경적 의미에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유교적 권위주의는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구약의 열왕기는 다윗의 후손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다윗 왕국의 머리로 경외했는가에 여부에 따라 그들과 다윗 왕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기록한다. 이 점에서 그들과 목회자 사이 차이는 전혀 없다. 교회와 목회는 철저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활동하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임을 늘 확인해야 한다. 그럼 우리의 상급은 어떻게 결정될까? 교회의 주인인 부활주의 말씀에 따라 그의 종으로서 충성스럽고 진실했는가의 여부와 그 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머리란 단어로 설명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새롭게 그리고 깊이 묵상해야 한다. 성경적 리더십이 또한 발견되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1950155
111 no image 하나님 나라와 가정
장창수
2485 2013-12-02
창세기 이야기(74)/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5) - 하나님 나라와 가정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통치 지역이라는 구체적 개념보다 하나님의 통치 행위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영으로 무소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초월적(超越的) 그리고 미래적일 뿐만 아니라 내재적(內在的) 그리고 현재적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미래적이며 초월적 하나님 나라는 오늘 이 땅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왜 지금까지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천국으로 이해하며 초월적 그리고 미래적 성격만 강조하는가? 헬라 철학의 이원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이 기독교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을 저급한 신으로 보았고 그 결과 창세기 1-2장을 소홀히 다루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어떻게 세워질 수 있는가라고 교회는 생각했다. 하나님 나라는 구원 받은 신자들이 죽어서나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천국(天國)과 천당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이 전적으로 반대한다. 창세기 1-2장이 이를 증언한다. 영원히 자존하는 영인 하나님이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했다(창1-2장). 창조 행위는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므로 창조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 행위 자체였다. 즉 창조행위는 직접적인 신적 통치 행위의 시작과 출발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실현내지 완성시키고자 인간 창조를 결정했다(창1:26-28절). 그리고 선악과 규례(창2:1절)를 명함으로 자신의 통치가 바로 말씀 통치임을 인류 사회에 알렸다. 말씀 통치가 실현된 곳에 하나님 나라도 세워진다. 문화 사명(창1:28절)은 하나님 나라를 겨냥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류의 번성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가능케 할 것이다. 에덴 동산은 아담과 체결한 언약(창2:17절)에 근거를 두고 최초로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 장소 즉 하나님 나라였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질수록 하나님의 통치 영역 즉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점점 더 세상으로 확장되어 나갈 것이다. 에덴 동산은 최초의 사람 아담이 받은 기업이었다. 에덴 동산은 이런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그럼 왜 결혼 제도가 창설되었나? 결혼은 가정을 전제한다. 가정은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다. 가정에서 인류가 출생하고 자라며 그곳에서 성장한다. 가정에 속하여 인류 사회로 나가 문화 사명을 수행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하나님의 일군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가정에서 인류는 배우고 훈련 받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정이란 이렇게 중요하다. 최초의 가정은 삼중 모습을 갖는다. 정부이며 교회이고 학교였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출애굽 사건 전까지 가정은 이런 모습을 갖고 역할을 계속했다. 가장은 통치자, 제사장과 선지자라는 막강한 권력을 소유했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 후 선민에게 민족과 나라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정부의 기능이 사라졌다. 가정은 여전히 학교와 교회의 역할을 수행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유대인들의 회당이 세계 곳곳에 생기며 유대인 가정에서 교회의 기능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신약 시대 이후 회당은 교회로 대체되었다. 그럼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교회는 영적으로 중생한 신자들의 모임이라면 가정은 같은 혈통을 지닌 식구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이 둘 사이 관계 면에서 차이가 난다. 직접적으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그러나 가정은 인간 나라와 각각 관련된다. 창조 기사는 근본적으로 교회와 가정이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만 존재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고 증언한다. 문화 사명이 뜻하는 대로 초월적인 하나님 나라는 인류 사회에 세워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이를 잘 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구속을 성취시킨 후 승천 직전 교회에게 선교 사명(마1:18-20절)을 명했다. 그렇다면 교회와 가정은 동일한 목적을 공유한다. 이들은 서로 협력해야 한다. 이 둘은 서로 무시해선 안 된다. 이렇게 본다면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하나님 나라 신학과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을 준다. 창세기 신학은 교회론과 가정론이란 하나님 나라 신학에서만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증언한다. 교회와 가정 사이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가? 교회는 영적으로 출생한 신자들의 모임으로 그곳에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자라고 성장한다. 그러나 가정에선 이 땅의 시민들이 자라고 성장한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는 가정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킬 수 밖에 없다. 즉 교회는 신자와 기독교 가정을 통해 세상과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공동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을 위해 교회는 가정 제도를 이용해야 한다. 가정은 인류 사회의 최소 단위이면서 인류 사회로 나가기 전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훈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장소이다. 가정에서 기독교 윤리가 실천될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윤리적 훈련을 통해 불신자들과 죄로 가득한 세상을 어떻게 상대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인류사회에 이렇게 세워진다. 하나님 나라(또는 통치)는 가장 먼저 신자의 마음에, 그 다음 가정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 사회에 세워져야 한다. 이런 신자들과 가정의 수가 증가한다면 자연스럽게 인류 사회에서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결국 교회는 가정이 이런 역할을 잘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예배 드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의 목회는 예배, 양육, 교제, 전도와 행정으로 구성된다. 예배는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 행위라면 양육과 교제는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기르고 서로 협력하도곡 돕는 과정이며 전도는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전도는 말보다 윤리적 행위에 더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행정은 위에 언급한 4가지 목회 활동이 전략적으로 수행되도록 조정한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말한 구원의 목적이 잘 이해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절) http://blog.naver.com/rassvet/40201831226
110 no image 창조 기사가 증언하는 성경의 역사관
장창수
2261 2013-11-27
창세기 이야기(73)- 창조 기사가 증언하는 성경의 역사관 창세기 1장은 천지(天地)와 그 가운데 인간을 비롯한 만물(萬物)의 창조라는 하나님의 보편적 창조 역사를 기록한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이 모든 것들을 지었다.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첫째 삼일과 둘째 삼일 사이 창조 사역에서 유사한 면이 발견된다. 첫째 삼일의 첫 날: 원형적 우주와 초자연적 빛 둘째 삼일중 첫 날: 해와 달과 별들 둘째 날: 궁창이란 하늘과 바다 둘째 날: 날짐승과 물짐승 셋째 날: 뭍이라는 대지와 온갖 식물들 셋째 날: 뭍동물과 인간 첫 삼일 동안 주거 공간들을 그러나 둘째 삼일 동안 그 공간의 주인공들을 하나님이 창조했다. 첫 삼일과 둘째 삼일을 각각 주기로 본다면 첫 주기와 둘째 주기 사이 관계는 겉보기와 달리 아주 긴밀하다. 거주 공간의 주인공이 순서에 따라 창조되면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은 마침내 절정에 달한다. 다시 말해 6일이라는 기간 동안 두 주기가 반복되면서 창조 과정이 완성되었다. 여기 6일이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그러나 7일은 안식 즉 쉼을 의미한다. 6일 동안 하나님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행한 후 7일째 마침내 안식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완성되었다고 성경은 밝힌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출발된 하나님의 구속사가 동일한 방법으로 성취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을 성경은 계시한다. 창조 과정에서 보여진 첫 주기는 예비적 단계라면 둘째 주기는 완성적 단계이다. 이들은 반복되면서도 동시에 발전한다. 이것은 성경이 암시하는 역사관이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도 단번에 완성에 달하지 못했다. 마찬 가지로 인류 역사나 하나님의 구속사도 단번에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첫 주기는 둘째 주기를 위한 예비적 성격을 가질 것이다. 성경의 이런 역사관은 어떤 면에서 진화론과 유사하다. 그러나 진화론은 종말(終末)을 가정하지 않지만 성경의 창조론은 종말론을 전제한다. 성경의 역사관에서 첫 주기가 출발이라면 둘째 주기는 완성을 목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관은 종말을 전제한 반복과 발전의 성격을 갖는다. 이 점에서 성경의 역사관은 히브리인의 선형적(線形的) 역사관과 다르며 헬라인의 원형적(圓形的) 역사관과도 다르다. 성경의 역사관은 나선형적(螺旋形的)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역사관은 히브리적이면서 동시에 헬라적이다. 성경의 이런 역사관은 성경의 계시들과 약속들 또는 언약들도 나선형적 성격을 띨 것이라고 증언한다. 성경학자 게르하르드 보스는 계시의 점진성(漸進性: graduallity)이란 표현으로 설명했다. 여기 점진성은 반복과 발전을 모두 함께 공유하는 단어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다. 구약은 예비적 성격을 지닌다면 신약은 성취적 또는 완성적 성격을 띤다. 하나님도 자신의 구속사를 단번에 완성시키지 않았다. 예비적 단계를 거쳐 완성으로 가도록 하나님은 구속사를 진행시킨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두 인물을 통해 성경의 역사관을 설명했다. 첫 사람 아담과 둘째이며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롬5:15, 고전15:45-49절). 인류의 역사는 둘 – 아담으로 출발한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로 출발한 역사 - 로 나뉜다. 첫째 역사는 둘째 역사를 위한 예비적 단계이라고 성경은 설명한다. 그리고 둘째 역사로부터 세상 종말이 이미 카운트 다운되었다(막1:15, 갈4:4, 히9:26-28절). 이미 위에서 암시되었듯이 창조의 첫 주기는 불완전했다. 둘째 주기에 의해 완성되었다. 마찬 가지로 아담으로 출발한 인류의 첫 역사도 불완전하다. 예수 그리스도로 출발한 둘째 역사에 의해 첫째 인류 역사를 출발시킨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내지 완성될 것이다. 예수님은 둘째이면서 마지막 아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역사관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 역사를 새롭게 보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분명히 하나님 자신의 경륜에 따른다. 창조 행위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인류의 첫 역사는 불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역사를 통해 둘째 역사를 예언했고 대비했다. 즉 하나님은 불완전함을 통해 완전함이 무엇인가를 암시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인류 역사가 그렇게 진행되도록 허용했다. 인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명도 수많은 실수와 잘못 그리고 착오를 거치며 점점 더 발전하고 성장한다. 과거 인류가 범한 잘못과 실수 그리고 착오 덕분에 현재의 발전과 성장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단번에 완성에 달하도록 자연 만물을 창조하지 않았듯이 인류 역사의 주인인 하나님도 인류 역사가 단번에 완성에 달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아담의 타락 이전 이미 하나님은 예비적 단계를 거친 후 이 세상을 완성 단계로 이끌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예비적 단계는 더욱 혼란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구속사자를 약속했다(창3:15절). 이 약속은 하나의 인류가 둘로 나뉘어 다툴 것을 예언한다. 아울러 오로지 구속의 은총을 통해서만 성취내지 완성에 달할 것을 또한 예언한다. 성경의 역사관과 구속관에 따르면 기독교와 신자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허용된 인류 역사의 과오를 주인인양 비판하고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오히려 그 과오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미래의 성취와 완성 단계로 나아가도록 노략하라고 충고한다. 주인이 허용한 것을 종인 주제에 비판하고 현재를 부정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비신앙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신자는 성경의 창조론, 타락한 인간을 다루는 인간론 그리고 구속을 약속한 기독론에 근거를 둔 성경의 역사관에 따라 인류 역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저출산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10년 뒤 조국의 장래를 불안케 한다. 그러나 좌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과거를 볼모 삼아 현재를 부정함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결국 공멸이다. 왜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는가? 우리의 행위는 믿음에서 나온다. 어떤 믿음을 소유했는가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 믿음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면서 인본주의적 역사관으로 사는 모순적 자세를 버려야 한다. 개혁주의자라고 자처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1644584
109 no image 하나님 나라와 교회
장창수
2250 2013-11-22
사복음서 묵상(97) – 하나님 나라와 교회 신국론(Doctrine of God’s kingdom)과 교회론(Doctrine of church) 사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란 단어들의 용례를 살피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이란 단어는 주로 사복음서에서 사용된다. 전체 104번의 용례 중 18회만 제외하고 모두 사복음서에서 86회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 7회 그리고 사도의 서신들에서 겨우 11회 사용된다. 반면 교회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10번 사용된다. 사복음서에서 단지 2회만 사용되고 사도행전에서 20회, 계시록에서 19회 그리고 서신들에서 69회 각각 사용된다. 사복음서는 구약 예언의 역사적 성취를 기록한다. 그 성취는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역사적으로 건설되었고 출발되었음을 뜻한다(마13장). 사도들의 서신들은 사복음서의 역사적 성취에 대한 교리적 해설을 기록한다. 이 서신들에서 교회란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관심사 면에서 예수님과 사도들 사이 차이가 보인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사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와 서신들의 교회 사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에 분명하다. 성취와 그에 대한 해석 사이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여기 하나님 나라는 지정학적 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돼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며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으로 중생한 신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요1:12절).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 같은 곳이라면 하나님 나라는 니라 같은 곳이다. 그럼 신자는 누구인가? 복음으로 중생한 신자들은 교회의 회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 또는 백성이다. 교인은 한편 교회를 위하지만 다른 한편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된다. 가정(家庭: home, family)에서 출생한 자녀들(children)은 그곳에서 자라 나중 나라(country, nation)를 위해 일할 시민(citizen) 또는 백성(people)이 된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사이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문화 사명이 이를 잘 설명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고 이들이 낳을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창1:28절).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실현될 것이다(창1:26절). 이를 달성시키고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로 구성된 최초의 가정을 세웠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속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류가 잃어버린 옛 지위를 복구시키는 것을 목표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절). 구속의 은총을 받은 신자들은 교회가 전한 복음에 의해 거듭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육 받으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자라 하나님의 통치를 인류 사회에 실현시키는 일군이 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창조의 목적이다. 구속의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참여하도록 이들은 다시 부름을 받는다. 신자들은 교회에만 머물 수 없다. 사람들은 가정에서 안식한 후 사회에서 일하고 그리고 일한 후 가정에 돌아와 쉰다. 마찬 가지로 신자들은 교회에서 쉼을 얻은 후 사회로 나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활동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 쉰다. 칭의와 성화 사이 관계가 쉽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해된다. 칭의는 중생의 결과 교회의 회원은 물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됨(신분 획득)을 뜻한다.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삶의 과정(직분 수행)을 뜻한다. 기독교 신학은 늘 칭의로 지나치게 치우친다. 성화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독교 윤리가 기독교 신학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칭의는 주로 교회와 관련된다면 성화는 교회 밖의 삶과 주로 연결된다. 그러나 어떻게 세상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는 기독교 윤리가 그 동안 무시되었다. 현실 참여적 신앙 삶보다 현실 도피적 신앙 삶이 더 강하다. 맛을 잃은 소금을 기독교 교회가 양산한 결과가 되었다. 기독교 신학에서 신국론이 내세적 그리고 초월적 나라로 치우쳤기 때문이다. 성경이 강조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그리고 내재적 성격이 강조되어야 한다. 가정이란 인류 사회와 나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다. 가정이 건강하다면 인류 사회도 건강해진다. 그러나 가정이 병들면 인류 사회도 병든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도 동일한 관계가 성립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일군을 출생시키고 말씀으로 훈련시켜 양성한 후 다시 세상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열심히 일한 후 다시 교회로 돌아와 쉼을 얻는다. 이런 순환과정을 통해 교회는 건강하고 그 덕분에 인류 사회도 건강해지며 결국 하나님의 창조 목적도 달성된다.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한 목양 명령과 선교 명령이 이를 잘 증명한다. 어린 양들을 먹이고 다 큰 양들을 치리하며 또한 이들을 먹이라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명했다(요21:15-17절). 이 명령에서 예수님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 사이 관계를 분명히 염두에 두었다. 교회가 구원의 모태이고 훈련 장소이며 재충전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럼 목회 활동을 구성하는 세 과정들은 무엇을 위하는가?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한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으로서 세 가지 사명의 수행에 집중해야 한다. 세상 정치의 개혁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알리기 위해 교회와 목회는 존재한다. 세상 정치에 열심히 참여하려는 목회자들의 잘못과 실수가 분명히 지적된다. 그리고 선교 명령(마28:18-20절)에서 기독교는 주로 ‘가라’는 단어에 집중한다. 이 단어가 주동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가라’의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고 부활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이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교회가 복음을 동족과 이민족들에게 전하는 목적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데 있다. 교회는 이를 위한 특별히 세워진 하나님의 가정과도 같다. 그럼 신약 성경은 왜 교회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되는가? 부활주는 교회인 몸의 머리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 그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자신의 통치를 실현시키기 원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설명된다. 몸은 몸 자체를 위하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교회도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며 백성이다. 이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잘 세워지고 확장되도록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부름과 사명을 받는다. 이들의 사명 수행을 잘 돕도록 교회는 존재해야 한다. 결국 사도들이 열심히 설명한 교회론은 결국 예수님이 세운 하나님 나라의 효과적인 건설과 확장에 목표를 둔다. 사복음서와 서신들 사이 차이와 관계는 중세 유럽 교회와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 핵심과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국내 전도, 해외 선교 그리고 모든 목회 활동은 지역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달리 말한다면 모든 신학들은 신국론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어야 한다. 이 때 기독교 신학은 물론 기독교 교회도 계속 개혁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1341166
108 no image 예수가 아닌 교회가 중심에 있다.
장창수
2256 2013-11-20
사복음서 묵상(96) – 예수가 아닌 교회가 중심에 있다. 표제는 한국 교회의 현상과 문제를 두고 나온 말이다. 한국 교회에서 교회론이 기독론을 앞섰다. 아니 기독론이 무시된 교회론이 유행한다. 크게 잘못되었다. 그럼 이 둘 사이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기독론)이란 기초 위에 세워진다(마16:16-21절). 그리고 교회는 성령으로 중생된 신자들이라는 회원 또는 지체들로 구성된다(행2장). 교회론의 근거는 철저히 기독론과 구원론에 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란 몸의 머리로써 주인이다(골1:18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성경에서 교회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된다(엡1:23절)는 것이다. 결국 성경의 교회론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구원 받은 성도들이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라고 말한다. 교회란 머리의 지시를 받아 지체들이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이 교회론에 따르면 목회자라고 특별히 부각되지 않는다. 왜 교회가 몸으로 비유되는가? 무엇을 가르치는가? 상식적으로 보아도 몸은 몸 자체를 위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특정한 목표를 겨냥한 활동과 움직임을 위한다. 교회가 교회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표제가 암시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교회란 몸이 존재 목적을 잊고 자신만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잃고 자신만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서서히 교회는 비만 증상을 보인다. 의학적으로 비만이란 몸 안에서 혈액순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세포로 전달되어야 할 영양분들이 이곳 저곳 정체되며 지방으로 변해 남은 결과이다. 비만이란 의학 용어가 한국 교회의 고질병과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결국 한국 교회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 있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나?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는 천국 복음과 알곡 신자가 씨앗 형태로 심어지고 이들에 의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될 것을 예언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되는 나라이다. 알곡 신자들은 말씀 통치에 따라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말씀 통치가 활발한 곳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이기도 하다(창1:26-28절). 교회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 이 일을 하도록 부활 주님에 의해 세워진 조직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 즉 하나님 나라를 먼저 계시한 후 16장에서 앞으로 출생할 교회를 예언했다. 그리고 25장에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통해 자신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계시했다. 이 때까지 교회는 알곡 신자들이 늘 성령 충만한 가운데(25:1-13절) 맡은 직분을 잘 수행하도록 도와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14-30절). 이를 위해 종말론적 윤리가 어떤 것인지도 예수님은 밝혔다(31-46절). 그리고 부활 후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절) 그의 사역의 출발(마4:17절)도 그리고 마지막도 모두 하나님 나라였다. 그가 한 모든 사역의 목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바로 하나님 나라였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교회는 구원 받은 성도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스승의 본을 따라 자신의 지상 삶을 살아야 한다. 당연히 이들의 모임인 교회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 존재하고 활동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교회론이 재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론은 개념 위주의 연구에 의존했다. 교회란 무엇인가란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접근만 주로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을 잊은 교회론은 존재의 의미와 목표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본 교회론만이 비만이란 고질병에 갈린 교회를 치료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목회자도 자신의 야심이나 꿈을 위하지 않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기 위해 전력할 것이다. 이를 위해 말씀의 바른 전달과 신자들의 양육에 더욱 힘 쏟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목회자의 야심을 위한 개인 사업장이 된다. 이런 목회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며 자신을 위해 신자들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한다. 어떤 교회론에 따라 어떻게 목회하는가가 목회자의 진실성 여부를 알려준다. 누구나 성경적 교회론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도록 말이다. 이를 위해 신자는 구원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병사요, 일군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1081481
107 no image 농학(農學)으로 본 설교 행위
장창수
2131 2013-11-13
농학(農學)으로 본 설교 행위 농학의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5-9절) 복음 전파자 또는 설교자가 심는 자와 물 주는 이라는 농부로 비유된다. 심는 자는 씨를 밭에 뿌리는 자라면 물 주는 이는 밭에서 씨나 식물이 잘 자라도록 물을 주며 돌보는 이를 각각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심는 자와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씨나 식물이 자라게 한다. 여기 심는 자는 말씀의 씨를 마음 밭에 뿌리는 전도자나 설교자를 뜻한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말하듯이 말씀의 씨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설명하는 길가 밭, 돌짝 밭, 엉겅퀴 밭과 좋은 밭에 각각 뿌려진다. 그러나 심는 자는 씨가 어느 마음 밭에 심어질 지 전혀 모른다. 뿌려진 씨가 100% 결실로 나타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의하면 결실 맺을 수 있는 확률은 25%에 지나지 않는다. 설교자나 복음 전파자의 사역은 완전하지 않고 한계를 늘 보인다. 반면 바울은 하나님만이 자라게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고의적으로 지적한다. 고린도 교회가 아볼로파, 베드로파, 바울파 그리고 그리스도파로 분열된 원인은 심는 자와 물 주는 이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된 데 있었기 때문이다(고전1:12, 3:3-4절). 씨가 효과적으로 심어지려면 마음 밭이 사전에 기경(起耕)되어야 한다. 이 일은 주로 농부인 하나님의 몫이다. 인간의 마음 밭 스스로 기경되지 못한다. 누구의 마음 밭을 사전 기경할 것인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이다. 그리고 기후 조건이 맞아야 씨가 싹을 낸다. 마찬 가지로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도 하나님이 인간의 삶과 환경을 잘 조정할 때 싹을 낸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다면 씨는 자랄 수 없다. 물 주는 이도 마찬 가지다. 씨나 싹이 자라도록 농부가 물을 주듯이 복음 전파자와 설교자도 동일한 일을 한다. 땅 속에 있는 온갖 영양분들은 물에 녹아 뿌리를 통해 잎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햇빛이라는 열 에너지의 도움이 없다면 잎에서 광합성 작용은 불가능하고 식물은 자라지 못한다. 농부의 수고가 전부가 아니다. 인간 농부는 씨를 뿌리고 물을 줄 뿐 성장과 수확은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햇빛, 비와 바람의 량과 강약을 조절하며 식물이 튼튼히 자라도록 돕는다. 열매를 맺을 시기 하나님은 비를 충분히 주지만 결국 비는 멈추고 뜨거운 햇빛만 보내 열매를 익힌다. 이 일은 역시 하나님의 몫이다. 사도 바울의 설명대로 복음 전파자와 설교자는 심는 일과 물 주는 일로 끝난다. 그리고 전도와 설교 사역이 씨를 심는 일인지 물을 주는 일인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이것도 하나님이 결정할 문제이다. 인간 사역자가 맡은 전도와 설교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자인 목회자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강조되고 있다. 복음 전파자와 설교자는 심는 일과 물 주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 이상도 그리고 그 이하도 아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자기 일만 하면 된다. 이에 대해 나중 하나님이 상급을 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처럼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며 교회가 분열되거나 혼란에 빠지는 경우를 왕왕 본다. 심는다와 물 준다라는 표현은 전도나 설교를 통해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도 알려준다. 이 표현에서 씨와 물은 말씀의 씨와 말씀 형태의 물(신32:2, 욥29:22, 사55:10-11절)을 각각 가리킨다. 말씀만이 인간 마음 밭에 뿌려져 자라야 할 씨이며 그리고 말씀만이 마음 밭에 뿌려진 씨를 자라도록 돕는다. 감동적 간증과 이야기, 재치 있는 예화, 영웅적 행위, 철학과 사상 등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사도 바울이 지적한 대로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속한다. 이들을 듣는 신자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사람의 지혜에 있게 된다(고전2:1-5절). 이것이 고린도 교회를 분열시킨 원인이었다. 목회자는 자신의 사역이 심는 일이나 물 주는 일임을 알고 스스로 사역의 한계성을 인식하며 하나님 앞과 사람 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저자의 기록 목적에 따라 잘 해석하여 설교의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 이 이외 사도 바울이 지적한 목회자 사역의 한계는 오늘날 목회자의 유교적 권위주의가 전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님을 분명히 지적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0611828
106 no image 농학으로 본 성경의 구속사(2)
장창수
2577 2013-11-13
농학으로 본 성경의 구속사(2)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들 중 첫째와 둘째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아주 중요하다. 첫째 비유는 복음의 씨가 사람의 마음 밭에 심어지고(마13:18-23절) 둘째 비유는 알곡과 같은 신자들이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짐을(24-30절) 계시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 받은 성도들을 통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된 후 마침내 완성될 것을 이 비유들은 계시한다. 하나님 나라는 제일 먼저 성도의 마음에 그 다음 성도의 가정에 그리고 신자와 그 가정의 수가 증가하며 이 세상에 세워지고 점점 더 확장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한 알의 씨로 땅에 떨어져 먼저 죽어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지상 삶과 공생애의 목표는 인류의 구속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성취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맞는 해석이라면 조직신학의 각론들 –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종말론 – 은 모두 신국론을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각론의 제목에 대한 정의나 개념 정립에만 몰두하며 각론들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소홀했다. 즉 인간의 인식론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조직신학은 재정립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 처음부터 계시한 바이다. 창조 기사(창1-2장)는 우주와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 그에게 통치를 위임했다. 조건은 선악과 규례의 준수였다. 창조 기사도 말씀에 순종하는 인류의 참여를 통해 이 세상에 자신의 통치(나라)가 실현될 것을 증언한다(창1:26-28절).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즉시 메시아를 약속했다(창3:15절). 메시아는 죄인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세울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실현될 것이다. 이 약속 후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전략을 한 동안 고수했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 후(창11장)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렀다(창12:1-3절). 하나님의 전략이 바뀌었다.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을 세워 특정한 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운 후 점점 세상으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가나안은 이를 위한 전진 기지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산다면 가나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서서히 그 영역을 이웃 지역으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구약이 말하는 선교 전략은 그대로 신약 시대에도 적용된다. 신자와 가정을 거점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전략말이다. 이런 구속사에서 아담부터 야곱까지의 모든 신앙 위인들은 메시아의 혈통적 조상들로 하나의 씨와 같았다. 농학(農學)에 따르면 한 알의 씨는 집단적 단수의 의미를 가진다. 한 알의 씨에서 메시아의 조상인 다윗 왕국의 왕손과 하나님의 백성이 출현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하나의 민족을 형성했다. 그러나 노예였다. 가나안으로 가서 나라를 세워야 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상속이 농학적 관점에서 해석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시80:8절) 이스라엘의 멸망도 동일하게 설명된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사5:4-6절) 몇몇 성경 용어들이 이 사건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준다. 종이나 노예의 상거래에 사용되는 ‘사다’와 ‘팔다’(삿2:14,3:8, 4:2, 10:7, 시44:12절), 건축의 관점에서 ‘세우다’와 ‘허물다’ (단2:44절) 그리고 농사의 관점에서 ‘심다’와 ‘뽑다’. 이들이 혼합되어 사용된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1:10절, 렘24:6, 31:4, 28, 42:10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한 알의 씨와 같았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었고(고전15:20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성령을 통해 중생의 역사로 출생했다(행2장). 이들은 모두 한 알의 씨에서 나왔다.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은 구약 시대와 동일하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웠다. 그가 공생애 처음부터 천국 복음을 외치고(마4:17절) 하나님 나라의 일로 공생애를 마친 이유였다(행1:3절).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들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어떻게 세워지고 25장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를 각각 계시했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이 농학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함은 아주 타당하다. 한 알의 씨로 온 예수님은 처음으로 천국 복음을 외치는 순간부터 추수 이후 쉼까지 내다보며 공생애를 살았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농부인 하나님도 구속사의 출발지부터 종착지까지 내다보며 자신의 구속사를 인류 역사 가운데 진행시킨다. 이 점에서 창조 기사는 시초론만 말하지 않고 종말론도 암시한다. 그리고 농사에 땅이 필요하듯이 하나님 나라도 이 세상이란 밭이 필요하다. 성경의 구속사는 초역사적이 아니란 뜻이다. 에덴 동산이 이를 잘 증언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 동쪽에 낙원을 창설했다(창2:8절). 원어 성경엔 ‘창설하다’란 단어 대신 ‘심다’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먼저 실현된 곳이었다. 인류가 번성할수록(창1:28절) 에덴 동산으로부터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완성까지 내다보며 에덴 동산을 창설했다. 하나님의 구속사 또는 하나님 나라 신학은 농학적 관점에서 놀랍게 잘 설명된다. 당시 농사나 농업은 사람들에게 상식이었다. 하나님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자신의 계시를 농학적 용어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작정, 계획과 목적을 쉽게 전할 수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농사를 잘 모른다. 농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성경의 구속사나 하나님 나라 신학이 구체적으로 이해된다.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이 성경 해석에 유용할 수 있다. 신학과 성경을 전공한 후 지식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자기 전공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 계시를 억지로 특별 계시에 넣으란 말이 아니다. 자연 계시를 이용하여 특별 계시를 잘 설명하도록 이용하란 뜻이다. 신학은 자신의 지경(知境)을 넓혀야 한다. 삶을 또한 말하는 신학은 다른 학문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 추상적 논리 체계인 신학은 삶의 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0742271
105 no image 농학(農學)으로 본 하나님의 은총
장창수
2340 2013-11-06
사복음서 묵상(94) – 농학(農學)으로 본 하나님의 은총 하늘, 농부, 밭과 씨는 농업을 위한 4대 필수 요건이다. 인간의 관점에선 하늘이 제외되지만 성경의 관점에선 하늘은 절대적이다. 하늘에서 햇빛과 비를 주지 않는다면 농부의 수고는 소용없다. 농부는 농사를 최선을 다 해 지은 후 하늘을 쳐다 본다. 천수답(天水畓)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그랬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신11:10-12절) 밭과 씨는 농부의 수고에 의존하는 피동적 존재이다. 밭의 성질에 따라 농부는 씨를 선택하며 파종을 위해 밭을 갈고 돌과 잡초를 미리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농부는 계속 자라는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 농부와 달리 하늘은 밭과 씨를 위해 간접적으로 일한다. 햇빛과 비 그리고 바람이 밭에 뿌려진 씨의 발아, 성장과 수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농학(農學)이 설명하는 하늘과 농부는 결국 하나님의 직, 간접적 은총을 상징한다. 농부인 하나님은 직접 마음 밭을 갈고 말씀의 씨를 뿌린 후 발아와 싹 난 식물의 성장을 위해 은총을 베푼다. 이에 반해 하늘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은총은 환경과 여건을 통해 신자의 영적 성장을 간접적으로 돕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햇빛과 비 그리고 바람이 강약 그리고 다소에 따라 식물에게 유익하기도 또는 불리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조절하며(욥28:25-26절)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룬다.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 상에 이루려 함이라 혹 징벌을 위하며 혹 토지를 위하며 혹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구름으로 오게 하시느니라”(욥37:11절) 농업이란 자연 계시가 특별 계시에 속하는 구원 교리를 잘 설명한다. 비는 성장을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뜻한다. 이 점에서 비는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한다. 한 동안 하나님의 은총으로 신자들은 말씀을 먹고 묵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 이 때 신앙의 뿌리를 넓고 깊게 내리지 못한다면 신앙은 영양실조에 걸리며 자라지 못한다. 이런 시기 많은 비가 식물에 해롭듯이 초신자에게 많은 은총은 오히려 교만케 한다. 그런 은총은 악인에게만 베풀어진다.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욥10:3-6절) 햇빛은 탄소동화작용을 도와 식물의 성장을 돕는다. 봄 햇빛은 갓 싹 난 식물 위에 부드럽게 비춘다. 여름 많이 자란 식물에 강한 햇빛이 비추며 이 때 많은 비도 내린다. 햇빛과 비가 위협적이지만 이를 이용하여 오히려 더욱 잘 자란다. 초가을 열매가 나타날 즈음 많은 비가 내리다가 늦가을 비가 멈추고 햇빛만 살인적으로 내려 쪼인다. 식물을 메말라가지만 열매는 잘 익는다. 신앙 세계에서도 마찬 가지다. 신앙 삶 초기 하늘이 때에 맞는 은총을 보냄으로 신앙이 빠르게 자란다. 겉으로는 스스로 식물이 자란 듯하지만 농부와 하늘의 돌봄 덕분이다. 그럼 바람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식물이 자랄 때 또는 다 자랐을 때 바람이 불며 식물을 살살 또는 아주 세계 흔든다. 마치 식물을 쓰러트리려는 듯이 말이다. 이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려 한다. 식물은 자신의 뿌리를 땅 속 깊이 그리고 더 넓게 내리려고 노력한다. 이 덕분에 식물은 더 튼튼하게 자란다. 햇빛과 비는 긍정적 면에서 그러나 바람은 부정적 면에서 식물을 돕는다. 한 때 하나님은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돕지만 다른 때 마치 대적자처럼 대한다. 하나님의 양동 작전이다. 이런 연단을 받으며 신자는 강하게 자란다. 이 세상에서 출세와 성공만 추구하게 하는 번영신학은 비성경적이다. 농학이 설명하는 햇빛과 비 그리고 바람은 그대로 성경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잘 설명한다. 이런 방법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계시나 예언을 이해할 수 없다. 자연 계시에서 특별 계시를 찾으면 안 된다. 그러나 특별 계시에서 찾아낸 신학적 의미가 자연 계시에 의해서 잘 설명된다면 적극적으로 자연 계시를 이용할 수 있다. 자연 계시는 논리적이며 추상적이기 쉬운 신학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가 수많은 자연 계시들을 이용하는 이유이다. 성경 기록 방법은 논리적이며 추상적인 성경 연구 방법이 반드시 그리고 늘 옳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성경이 사용하는 자연 계시라면 적극적으로 연구할 필요 있다.
104 no image 왼편에 있는 염소
박종훈
2681 2013-11-02
왼편에 있는 염소 강수량이 풍부한 우리나라의 산야는 한 줌의 흙만 있어도 푸른 풀이 자리 잡고 있다 맨 땅을 싫어하는 흙은 하늘의 추상(秋霜)명령이 내리기까지는 열심히 푸른 풀을 내고 그 풀은 초식동물들의 먹이로 공급된다. 필자가 관리하는 밭과 둔덕에 온갖 잡초로 뒤덮여 있어 정기적으로 제거해야하는 품이 든다. 늘 ‘거침돌을 디딤돌’로 활용하려는 지혜를 구하는 필자에게 ‘꿩 먹고 알 먹는’ 방법이 생각났다. 바로 흑염소를 방목하여 사육하는 것이다. 마침 멧돼지 방지용으로 설치한 철망을 재활용하여 언덕에 설치하고 외양간도 만들어서 이웃마을에서 방목으로 키우는 중간 정도 자란 염소 한 쌍을 구입했다. 이들이 잘 자라서 번성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철망 안에서 자유롭게 다니도록 목줄을 메단 채 풀어 놓았다. 하지만 섣부른 실수였다. 그 날 해질녘에 목장에 갔다가 내 눈을 의심하였다. 설마 넘지 못하리라 여겼던 여섯 자의 철망을 어떻게 탈출하였는지 빈 우리만 보였다. 그 당시의 심정은 허망하기 그지없는 자책과 어리석음에 망연자실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도 목줄을 달고 탈출했기에 어디 걸려있으리라 여기고 다음날 뒷산을 헤매며 하루 종일 찾아 나섰지만 흔적도 찾지 못했다. 산 하나만 넘으면 전에 가져온 집이 있어 왔던 데로 갔을까 연락해봤지만 오히려 미숙한 관리에 핀잔만 들었다. 엄마 찾아 삼만 리가 아니라 염소 찾아 그동안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뒷산 정상과 그 주위를 진돗개와 같이 찾았지만 허탕이었다. 사흘이 지나서 포기할 쯤 염소를 마을 입구도로에서 봤다는 연락이 왔다. 높은 데로 올라갈 거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덮고 낮은 산에서 지냈던 것이다. 이미 목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두 마리는 바위 중턱에서 얌전히 있었던 것이다. 사람보다 빠른 걸음이기에 놓치면 또 잡을 길이 없지만 이웃 주민들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룬 지금은 설령 우리 밖에 내 놓아도 자기 집으로 알고 들어오는 길들여진 상태이다. 이제는 두 번의 새끼를 낳고 점 점 수가 불어나고 있다. 때를 따라 울타리 밖으로 내 놓을 경우가 있을 때는 어미만 줄을 메달아 쇠말뚝을 박아 놓는다. 그러면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으로 어미 주위에만 있어 자유롭게 놔두어도 멀리 도망가지는 않는다. 이 과정에서 염소의 생리를 모르면 애를 먹는다. 어린 시절 덩치 큰 황소를 끌고 풀을 먹이곤 하였지만 조금만 요령을 터득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코투레가 있어 사람이 이끄는 대로 따라와 주었다. 그러나 염소는 목줄에 의해 제어해야 하는데 그 힘이 만만치 않다. 줄을 잡고 앞서서 걸으면 녀석은 앞발을 뻗으며 거세게 버틴다. 절대 따라오지 않겠다는 똥고집으로 버티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다. 저에게 좋은 풀을 주겠다는 주인의 의도를 무조건 거역하며 온 몸으로 저항하는 염소를 강제로 끌어당긴다. 녀석도 괴롭고 나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서 인도하고자 이제는 반대로 염소를 앞세워본다. 그러면 염소는 겁이 많아 달아날려고 하기에 힘을 주지 않으면 주인이 끌려가든지 줄을 놓칠 상황이 된다. 완전 역전이 되어 염소는 사람을 막 끌고 갈려고 하고 사람은 천천히 가려고 버티는 형국이 된다. 주인하고 도저히 발을 맞추지 못하는 불편한 관계가 매일 벌어진다. 더구나 내리막길에서 염소가 앞서면 그 때는 억지로 달려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염소를 이길 힘이 없거나 달릴 수 없는 형편이면 염소를 끌고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 한 가지 염소의 버릇은 기회만 되면 높은 데로 오르기를 좋아한다. 어떤 곳이든 높은 곳이 있으면 그 자리에 올라서려고 한다. 우리 안에서는 사료를 담은 항아리 뚜껑위에 올라가 자기들끼리 그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기도 한다. 자기보다 서열이 낮으면 사정없이 받아 버리는 염소의 습성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가 실감나게 다가온다. 우리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살아온 삶에 대한 절대 주권자에게 평가를 받게 된다.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오른편과 왼편을 나누며 ‘때’를 언급한다. 굶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에 주인의 뜻을 알고 적절하게 마땅한 일을 한자는 오른편에 영생의 자리를 약속했고, 염소처럼 주인의 뜻을 모르고 자신의 기준대로 자신에게 맞는 인간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중심대로 모든 삶을 살았던 자들은 왼편에 자리로 구분시켜 놓았다. 양과 염소는 서로 비슷하다. 겉의 모습이 비슷하고 먹는 양식이 같고 거하는 환경도 같다 하지만 주인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양이라면 염소는 늘 자기중심대로 하려는 차이가 있다. 불순종으로 이 세상에 죄와 저주가 왔다면 순종으로 회복이 되는 것이 구원의 원리이다. 매사에 반대로 하려는 염소의 모습 속에서 비 올 때면 후회의 울음소리를 내는 청개구리와 같은 우리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며 나의 맘속에 불순종하려는 죄성이 때로는 나를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한다. 순한 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길 원하며 오늘도 하루를 뒤돌아본다. 희망은 있다. 처음에는 힘들게 한 염소가 이제는 길 들여져서 주인의 뒤를 졸 졸 따라오고 있다. 가끔씩 고집도 피우긴 하지만……. 활뫼지기 박종훈
103 no image 이원론(二元論)과 이분법(二分法)의 극복
장창수
2775 2013-11-02
개혁되어야 할 기독교 신학(1)- 이원론(二元論)과 이분법(二分法)의 극복 성경의 창세기는 근본적으로 일원론(一元論: monism)을 주장한다. 하나님이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했기 때문이다(창1:1절). 그러나 타락 후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단이 하나님을 대신한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이렇게 인류 사회에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 출발되었다.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타락의 결과이지 창조의 산물은 절대로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부정된 곳에서만 유행한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신자는 이원론을 버리고 일원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창조주와 구원주 하나님 이외 경배 대상은 절대로 없다. 인간, 물질과 돈이 신(神)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숭배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아주 크다. 영(靈)과 육(肉) 사이 이원론도 성경적 사고 체계가 아니다. 영인 하나님이 보이는 세상을 창조한 후 세상에 내재한다. 창조 행위를 통해 초월자가 내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내재자는 또한 초월자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이원론에서 나온 금욕주의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닌 이유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영(spirit)을 불어넣음으로 흙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창2:7절). 인간 안에 동물적 생명과 지정의의 좌소인 인격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영이 떠나면 생명도 그리고 인격도 함께 몸에서 사라진다. 성경은 헬라의 이원론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원론적 내용을 제거시켜야 할 이유이다. 종교적 이원론은 윤리적 이원론과 연결된다. 종교적 이원론은 선한 신과 악한 신 사이 영원한 갈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악한 신 사단은 영원한 불못에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계20장). 종교적 이원론은 선과 악 사이 영원한 대립을 주장하는 절대적 이분법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선(善)과 악(惡)을 나누는 윤리적 이분법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이기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악은 선의 결여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절대적 기준이 없이 나름대로 판단하는 사고 방식인 상대적 이분법이 또 있다. 옳고 그름, 호오의 정도, 량과 규모의 개념에서 나타난다. 미추(美醜)와 행불행을 느끼는 감정 사이 차이, 량의 다소, 규모의 대소는 상대적일 뿐 대립적 이분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옳고 아름답거나 많고 크면 좋고 그 반대는 나쁘다고 판단해 버린다. 이들은 성경적 사고 방식이 아니며 정상적 사고 방식도 아니다. 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더 존중 받는 식의 사고를 성경은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논리적 이분법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한 짝을 이루는 논리적 두 면을 뜻한다. 신학과 윤리, 신학과 역사, 믿음과 행함, 질료와 형상, 성장과 분배 그리고 전체와 부분 같은 짝들이다. 이 둘은 논리적으로 나누어질 뿐 실제적으로(역사적으로) 분리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들을 대립시켜 어느 하나를 버리는 식의 사고를 한다. 이것은 어리석음 자체이다. 헬라 철학에서 주로 나오는 이원론과 이분법의 찌꺼기를 기독교 신학에서 제거하는 것은 신학의 근본적 개혁을 뜻한다. 이것이 없이 기독교는 새로워질 수 없다. 이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을 요할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말이다. 이 때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102 no image 식물학이 설명하는 성경의 구속사
장창수
2639 2013-11-02
창세기 묵상(67)/사복음서 묵상(72) – 식물학이 설명하는 성경의 구속사 창세기 3장 15절은 원복음이라 불린다. 복음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원복음에서 앞으로 올 메시아는 ‘여인의 후손’(원본에선 ‘여인의 씨’)으로 소개된다. 왜 여인의 씨인가? 메시아는 여인에게서 나온 씨란 뜻이다. 여인에게서 나와 인간이지만 아버지의 혈통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담의 원죄와는 무관할 것이다. 원복음은 기독론을 이미 계시했다. 그만이 하와를 유혹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거의 죽게 할 것이다. 이 때 인류는 구원 받을 것이다. 뱀으로 상징된 사단이 인류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더 이상 대적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론과 신국론과 관련된 놀라운 계시가 원복음에 감추어져 있다. 그럼 왜 메시아가 씨로 소개되었는가? 씨가 가진 식물학적 기능과 역할이 하나님의 구속사와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과 내용을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우선 씨는 아주 작지만 생명력이 있어 여건이 맞으면 반드시 싹을 내고 자라 자신의 잠재적(潛在的) 모습을 반드시 현재화(現在化)시키는 능력을 소유한다(겨자씨 비유 참조). 씨의 이런 식물학적 기능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하나님의 섭리, 계시의 점진성 그리고 성경 해석 원리를 아주 잘 설명한다. 그리고 씨는 하나이지만 그 안에 동일한 씨들을 잠재적으로 수없이 품고 있다. 봄에 심겨진 옥수수 씨 하나는 가을 약 300개의 동일한 씨들로 수확된다(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런 과정이 매년 반복된다면 거의 무한대의 열매를 맺으며 번식할 것이다. 이런 식물학적 기능 덕분에 인류는 굶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씨에서 출발한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형통하고 번성할 것이란 확신을 준다. 씨의 이런 식물학적 기능은 “그리스도 안에서”란 사도 바울의 신학을 기가 막히게 잘 설명한다(엡1:4-6절). 그리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도 막힘 없이 설명해 준다. 식물학이 그대로 신학과 구속사를 직접 설명한다. 그럼 수많은 씨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의 씨로서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했다. 그렇게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되었다. 그의 부활로 맺어진 열매들인 구원 받은 신자들도 사실은 씨들이다. 이 씨들이 또 다시 열매를 맺어 주인을 기쁘게 하려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를 따를 것을 권했는가? 바로 씨가 가진 식물학적 기능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씨의 식물학은 기독교 윤리의 중요성도 잘 설명해 준다. 마태복음의 족보(마1장)도 씨의 식물학으로 설명된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에 걸친 족보 의 첫 부분(마1:2-6절)은 하나의 씨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브라함 이전의 조상들인 족장들도 모두 하나의 씨와 같다. 창세기의 족보는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보존되었다고 증언한다. 아브라함까지 누가 메시아의 혈통적 조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하나의 씨인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씨에서 이스라엘이란 백성과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란 인물이 나왔다. 이로써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 모두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창12:1-2, 17:5-6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지만 아직 왕국을 형성하지 못했다. 다윗이 이 사역을 수행할 것이다. 그 때 이스라엘은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족보의 두 번째 부분(6-10절)은 하나님 나라 다윗 왕국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흥망의 원인은 하나님의 법인 시내산 율법을 준수하느냐 여부에 달렸다.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이 시내산 율법을 준수하지 않자 이스라엘은 분열되었고 그 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렘7:23-34절). 하나의 씨는 가나안에 떨어져 큰 나무(이스라엘)로 자라 화려한 꽃들과 수많은 열매(다윗 왕국)를 보여주었지만 결국 망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12-16절)은 바벨론 포로 시대부터 400년간 계속된 중간기를 지나 예수님의 출생을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메시아의 혈통은 선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밀하게 메시아의 혈통적 씨를 보존하며 이어갔다. 이 점에서 이 시기는 구약의 족장 시대(창1-22장)와 같다. 마태복음은 메시아인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새로운 인류가 출현하고(아브라함) 그리고 그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그 백성을 친히 통치할 것(다윗)을 기록한다. 마태복음 16장 이전까지 예수님은 하나의 씨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렸다. 그러나 16장부터 갑자기 자신을 고난의 종으로 소개하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기 시작했다(마16:21절). 식물학이 가르치듯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한 알의 씨가 죽어야 할 때가 가까웠이기 때문이다. 예언대로 예수님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 그리고 승천했다. 구약 성경이 예언한 바였다. 유월절 어린양을 죽인 후 안식일 다음날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보리 한 단을 요제로 드려야 했다(레23:10-11절). 이 때 드려진 보리 열매는 그 땅에서 처음으로 수확된 첫열매였다. 이 첫열매는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기업이 되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부활한 예수님을 ‘첫열매’로 소개한다(고전15:20절). 첫열매란 단어는 부활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왕이 되었음을 설명한다(롬1:4절). 예수님의 승천 후 10일 뒤에 온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다. 이로써 이 지상에 신약 교회가 처음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성령 강림은 죄인을 중생시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기적이 마침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구약이 예언한 바였다. 보리의 첫열매를 드린 후 7주를 계수한 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수고한 결과 수확한 밀의 첫열매로 만든 유교병 2개를 성전에서 요제로 드렸다(레23:15-17절). 이것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모두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했다. 놀랍게도 세례 요한이 이를 잘 설명한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12절) 세례 요한은 자신의 시대 성령 강림을 이미 내다보았다. 그리고 베드로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2-33절). 이런 일은 추수와 관련된 타작 마당이란 단어가 암시하는 종말 시대에 벌어질 것이다. 씨의 식물학은 성경의 종말론도 설명한다. 그럼 구약은 구속사의 완성을 어떻게 식물학으로 예언했는가? 구약의 삼대 절기 중 초막절로 설명되는 수장절로 예언했다. 수장절은 연종(年終)에 지켜졌다(출23:16절). 초막절을 맞아 이스라엘은 그 동안 밭에서 얻은 각종 식물의 맏물들을 성전에 드리며 가나안을 마침내 완전히 기업으로 상속했음을 하나님에게 알리며 감사했다(신26:1-11절). 그 후 다음 해 봄까지 모든 일로부터 쉬었다. 씨로 설명된 성경의 종말론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지킨 삼대 절기는 씨가 가진 식물학적 기능으로 잘 설명된다. 구약 시대는 농업 사회였다. 당연히 하나님도 식물학, 생물학 또는 농업을 이용하여 앞으로 올 메시아와 그가 성취시킬 구원에 관해 계시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구약을 훨씬 잘 이해했다. 이스라엘은 삶으로 이들을 직접 체험하며 앞으로 올 메시아로 인해 성취될 구원 역사를 믿고 소망하며 가나안에서 살았다. 신약을 알려면 구약을 배워야 하고 구약을 배우려면 다른 학문들인 식물학, 생물학 또는 농업을 이해해야 한다. 이 때 성경 진리를 우리의 삶과 연결시켜 아주 구체적으로 해석하거나 설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사는 전혀 초월적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과 연결된 세속사이다. 이 덕분에 우리의 신앙 삶을 어떻게 세속사에 적용시켜야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성경에서 얻을 수 있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99493942
101 no image 농학(農學)이 풀어주는 예수님의 일생
장창수
2517 2013-11-02
사복음서 묵상(92) – 농학(農學)이 풀어주는 예수님의 일생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며 구약 성경이 증언하는 바라고 말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절) 구약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은 예언의 문자적 성취를 제자들에게 설명했다. 구약이 예수님를 가리켜 기록했다는 본문을 읽을 때 수긍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기록 당시의 문화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인류의 산업은 주로 농업이었다. 당연히 농업을 이용하여 성경 진리가 설명되었다. 사람들은 오늘의 우리들보다 훨씬 쉽게 진리를 이해했다. 농학(農學)에 관한 지식이 있다면 현대인들도 성경 진리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놀랍게도 구약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여인의 씨(국역에선 여인의 후손)로 소개한다(창3:15절). 또 놀랍게도 신약 성경은 부활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들의 ‘첫열매’라고 소개한다(고전15:20절). 사실 씨나 열매는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이다. 쌀이나 밀의 경우 열매가 바로 씨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성경은 사람인 메시아를 식물의 씨나 열매로 비유하여 소개하는가? 이 단어들이 갖는 식물학적 기능이 성경에서 그대로 신학적 원리를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성육하여 이 세상에 출생했다(마1장). 마태복음의 족보는 누가 메시아의 혈통을 이었는가를 구약이 알려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원복음(창3:15절)의 계시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아버지의 혈통을 받지 않은 ‘여인의 씨’였다. 농학으로 설명한다면 그리스도라는 씨가 성육신 즉 출생을 통해 이 세상에 심어졌다. 그러나 농부는 파종 전 땅을 먼저 기경해야 한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도 아들의 초림(初臨)을 위해 미리 준비했다. 이것은 아들의 출생이 아버지 하나님의 정한 때에 따른 결과라고 말한다(갈4:4-5절). 예수님은 로마 제국 시대에 출생했다. 로마 제국은 다민족과 다문화의 제국으로 도로와 우편 제도가 잘 발달되었다. 아들의 복음이 쉽게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는 여건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출생과 성장은 너무나 미약했다. 마치 씨에서 나온 싹이 쉽게 꺼질 수 있는 생명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2절) 출생 후 예수님은 30년 동안 동족 가운데 살며 자랐다. 예수님의 성장은 농학적 관점에서 볼 때 씨가 땅에 심어진 후 싹을 내고 자라 식물과 나무로 자라가는 과정이다. 이 성장 과정에서 예수님은 죄인 인간처럼 살며 죄와 죄값이 어떤 것인가를 직접 체험했다.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된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7-1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 세례 요한의 음성을 들은 예수님은 때가 된 것을 알고 공생애를 시작했다. 복음 선포, 가르침, 신유, 축사와 다양한 이적들을 행하고 보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메시아임을 증거했다. 농학으로 본다면 다 자란 식물이 맘껏 꽃들을 피우며 자신을 자랑함과 같다. 그러나 꽃은 사역의 목표가 아니었다. 농부인 주인이 바라는 것은 열매이다. 이런 때가 온 것을 안 예수님은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절)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씨가 떨어진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지상 삶과 공생애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삶은 자기부정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의 마지막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자기부정의 최절정이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열매를 맺으려면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영광스런 신분을 철저히 부인하고 멸시와 조롱의 상징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치욕적 죽음을 당해야 했다. 농학으로 설명된다. 열매를 맺으려면 꽃이 먼저 지어야하고 열매가 익으려면 식물은 물이 없는 상태에서 뜨거운 태양 아래 가을 내내 고통 당해야 한다. 식물의 잎들, 가지들과 줄기들이 서서히 마르며 죽어간다. 그만큼 더 열매는 익어간다. 만약 식물이 죽지 않으면 계속 영양분을 빼앗아 먹으며 열매가 자라지 못하거나 썩어버린다. 이를 피하도록 아버지 하나님은 그 동안 아들에게 내린 모든 은혜를 철수시키고 저주만 아들에게 내렸다. 아들이 철저히 자신을 버리도록 도왔다. 그가 인류의 죄를 짊어졌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해야 한다. 아들은 최악의 환경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철저히 자신을 부정하고 죽을 때만 부활이라는 영광을 얻을 수 있다. 농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들과 신학적 의미들이 얼마든지 설명된다. 죽음이라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고전15:20절)가 되었고 동시에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절). 첫열매는 동일한 추수가 곧 시작될 것을 알려준다. 50일 뒤 성령이 강림하며 120명의 제자들이 영적으로 거듭나며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했다(행2장). 이렇게 이 세상에 추수가 시작되었다. 이 추수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종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고 그의 재림으로 끝날 것이다. 지금은 중간기에 속한다. 이 기간 동안 추수가 계속되며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계속 확장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신자들을 통해 이 세상에서 자신의 통치를 이미 실현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2천년이 지났다. 농학은 무천년설이 성경이 지지하는 천년설이라고 주장한다. 세례 요한도 이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외쳤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12절)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의미하는 추수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그의 재림까지 계속될 것이다. 사도 요한이 증언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2-15절) 예수님의 설명처럼 구약은 여인의 씨로 올 예수님에 대한 예언집이다. 신약은 여인의 씨로 온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시켰고 그 완성을 계시했다고 증언한다. 신,구약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 달리 기록되었지만 통일성과 일관성을 한결같이 유지한다. 성경 기록 방식대로 성경의 본문들을 해석하고 설교해야 한다. 자연 계시에 속하는 농학은 특별 계시인 성경과 기독교 신학을 잘 설명한다. 특별 계시를 잘 이해한 후 자연 계시를 배운다면 성경 계시들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얻을 수 있다. 성경은 교회를 위해 자연 계시의 도움으로 특별 계시를 기록했다. 그리고 농학, 식물학과 생물학 같은 자연 계시는 성경 계시들을 인간의 인식론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잘 도와준다. 성경에서 이용하는 자연 계시들을 충분히 배우고 알 필요가 있다. http://blog.naver.com/rassvet/40200044524
100 no image 농학(農學)으로 본 성경의 구속사
장창수
2524 2013-10-31
사복음서 묵상(91) – 농학(農學)으로 본 성경의 구속사 화란의 성경 학자 ‘게르하르더 보스’는 계시의 점진성(漸進性: graduallity)을 주장한다. 성경의 계시들은 반복하면서 발전한다. 성경의 계시(啓示)들 사이 연속성(連續性)과 불연속성(不連續性) 또는 동질성(同質性)과 이질성(異質性)이 동시에 존재한다. 결국 성경의 구속사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하다가 종국을 맞을 것이다. 농학(農學)은 이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하늘, 땅, 농부와 씨, 이들은 농업에 필요한 4대 요소들이다. 땅과 씨 그리고 하늘과 농부라는 두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 전자는 피동적(被動的)이라면 후자는 능동적이다. 전자는 후자의 직,간접적 개입의 결과 활동하기 때문이다. 파종 전 씨는 장래의 형태와 결과를 모두 그 안에 이미 담고 있다. 씨가 밭에 심어지기만 하면 된다. 기후 조건이 맞으면 씨는 비로소 싹을 낸다. 씨를 뿌리기 전 농부는 땅을 미리 기경한다. 이 때 농부는 파종이라는 출발점부터 추수라는 마지막 도착점까지 미리 내다본다. 농부의 노동도 중요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햇빛, 바람 그리고 비가 없다면 수확은 거의 불가능하다. 농부는 직접적으로 그러나 하늘은 간접적으로 씨와 식물을 돌본다. 추수 후 농부는 비로소 쉰다. 다음 해 봄 이런 과정은 반복된다. 성경에서 사람의 마음(마13:19절)과 세상(마13:38절)은 밭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요12:24절), 하나님의 말씀(마13:19절)과 구원 받은 신자(마13:38절)가 씨로 각각 비유된다. 하나님(농부)은 하나님의 말씀(씨)에 기반을 두고 예수님(하나의 씨)과 중생한 신자(씨들)의 활동을 통해 인류 역사(밭) 가운데 자신의 구속사(농사)를 계속 진행시킨다. 성경의 구속사와 농업 사이 유비(類比)는 성경의 구속사도 농사처럼 반복하다가 종말을 맞는다고 증언한다. 파종(播種)을 목적한 기경(起耕)은 농부의 몫으로 성경의 구속사가 하나님의 전적 개입으로 출발됨을 그리고 싹을 내고 자라며 꽃을 피움은 하나님이 택한 자와 언약을 맺고 축복함을 각각 뜻한다. 열매 맺음, 추수와 수확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뜻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을 구원하고 악인은 멸망시킨다. 이렇게 하나님은 옛 구속사를 정리시키며 새 구속사를 출발시킨다. 이 때 하나님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다시 약속(새 언약)하며 새로운 구속사의 전개를 계시하며 예언한다. 언약이 주어질 때마다 구속사도 새로 출발한다. 이 때 언약과 구속사도 성경의 계시처럼 반복하면서 발전한다. 이들은 옛 것과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이다. 구약에 모두 6개의 언약들 - 창조 언약(창2:17절), 구속 언약(창3:15절), 보존 언약(창9:11-16절), 약속 언약(창12:1-3절), 율법 언약(출19장) 그리고 왕국 언약(삼하7장) – 이 기록된다. 언약에 따라 구약 성경의 구속사도 6단계의 구속사들로 나뉜다. 이들 구속사는 하나님의 전적 개입으로 늘 출발된다. 이후 하나님은 택자와 언약을 체결하며 조건부 축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약의 준수에 늘 실패한다. 하나님은 앞으로 올 메시아와 관련된 새로운 언약을 계시하며 추수 즉 심판을 행함으로 다른 구속사를 준비한다. 각 단계의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출발, 언약 체결, 인간의 불순종, 메시아 약속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스토리가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이들은 늘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 농사의 모든 과정들이 시간을 달리하며 발생하지만 늘 추수와 수확을 지향함과 같다. 다른 듯한 계시들이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듯 성경의 사건들은 이런 통일성과 일관성에 근거를 둔다. 마침내 구약에서 예언되고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가 씨(창3:15절: 원어에서 여인의 씨)로 나타났다(성육신, 지상 삶과 공생애). 그리고 땅에 뿌려졌고(죽음과 부활:) 첫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부활: 고전15:20절). 부활 후 50일 뒤 성령이 강림하며 초대 교회가 출생했다. 신자들이 말씀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거듭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첫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씨들이다. 농부인 하나님은 예수님(씨)의 지상 삶과 공생애을 통해 자신의 구속사(농사)를 전개시켰다. 이 구속사는 7단계에 속한다. 이 단계의 언약을 ‘성취 언약’으로 부르자! 이 단계의 구속사도 당연히 추수를 지향한다. 추수는 심판의 형태로 진행된다(마3:11-12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추수가 바로 심판의 출발을 알린다.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아 성령으로 인류 사회와 교회를 통치한다. 이렇게 8단계의 구속사가 지금 이 땅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 단계가 마지막 단계이다. 아들 이후 다른 메시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단계의 언약을 완성 언약이라 부르자! 이 언약은 복음의 형태로 주어진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그러나 안 믿는 자는 멸망을 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2천년 동안 복음이 전해졌다. 그러나 인류 사회는 또 다시 예수님을 거절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추수는 끝날 것이다. 이 추수는 하나님의 우주적 심판을 대동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창세 전 경륜을 인류 역사상 완성시키는 마지막 심판의 형태가 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초림은 추수의 시작을 그러나 그의 재림은 추수의 끝을 각각 의미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시작과 끝이다. 성령 강림으로 죄인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중생하며 그렇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비록 보이지 않지만 세워졌고 계속 확장되고 있다. 2천년 동안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활동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주적 심판을 대동하며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를 출발시킬 것이다. 무천년설이 성경적인 가르침일 것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성경을 주제별로 또는 개념적으로 즉 부분적으로 연구했다. 그러나 농학은 하나님의 경륜에 근거를 둔 스토리 텔링 식의 성경 연구를 권한다. 이것이 신학과 성경 사이 차이이다. 하나님의 경륜(전체)을 고려해서 부분(개념, 주제)을 해석하라! 달리 말한다면 인간의 인식론적 관점 위에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을 더해 성경을 연구하라! 이 점에서 8단계 구속사는 아주 유용하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33386234
99 no image 농학(農學)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
장창수
2667 2013-10-26
사복음서 묵상(88) – 농학(農學)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 성경의 문화적 배경은 농업이다. 당연히 농학(農學), 식물학 또는 생물학을 이용하여 진리가 설명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쉽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해했다. 이사야 선지자도 농학을 이용하여 남방 유다의 멸망을 초래시키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사28:1-22절).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8:24-29절) 파종과 추수라는 두 과정이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한다. 파종하려면 땅을 개간하고 흙을 갈아야 한다. 묵고 굳은 땅을 기경해야 비로소 씨를 뿌릴 수 있다(호10:12절).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은 옛 구속사를 정리시키고(기경) 새로운 구속사를 출발시키는(파종) 이중 역할을 한다. 심판은 창조적 파괴와도 같다. 그리고 수확하려면 도리깨, 수레 바퀴, 작대기와 막대기를 이용하여 열매들을 때려야 한다.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이라는 두 가지 기능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된다. 악인의 멸망은 옛 시대의 종막을 그러나 의인의 구원은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각각 의미한다. 늘 하나님의 심판은 옛 것의 끝과 함께 새 것의 출발을 가능케 한다. 사람들은 농사에서 땅, 농부와 씨만 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늘이 추가되어야 한다.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바람은 하늘이 준다. 이들이 없다면 인간의 노력은 무용하다. 농부는 최선을 다 한 후 하늘을 바라보며 좋은 수확을 꿈꾼다. 성경에서 땅은 사람의 마음(마13:19절)이나 세상(마13:38절)을 상징한다. 하늘도 비인격적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으로서 이들을 조정한다. 이 때문에 하늘은 환경과 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 일하는 하나님(섭리주)을 상징한다. 농부는 성경에서 하나님으로 흔히 소개된다(사5장, 시45:1, 요15:1, ). 여기 농부는 신자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며 은혜를 베푸는 인격적 존재인 하나님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신자의 삶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은 둘이다. 성령과 환경.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는 여건과 환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성령을 통해 직접적으로 신자에게 각각 전달된다. 알미니안은 하나님의 이런 직,간접적 은혜를 무시하는 잘못과 실수를 늘 범한다. 씨는 문맥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요12:24절), 하나님의 말씀(마13:19절)과 구원 받은 신자(마13:38절)들로 각각 비유 된다. 씨로 비유된 이들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관련하여 소멍고 사명을 갖는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로서 왕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수단이고 중생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에 비해 하늘과 농부는 이 씨들이 싹을 내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그리고 수확하는 과정을 직,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을 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예수님, 말씀과 중생자들을 통해 이 세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것이 맞는 해석이라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구원의 서정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마13:18-23절). 길가 밭, 돌짝 밭과 엉겅퀴 밭으로 소개된 마음의 소유자들은 천국의 성장을 방해하는 가라지 같은 존재들이며 좋은 밭은 알곡같은 신자들로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30배, 60배 그리고 100배 성장하여 방해자들로 인해 받은 받은 손실들을 극복하고도 남는다. 좀 더 자세히 좋은 밭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농부에 의해 선택된 밭이다. 농부는 씨의 종류 즉 수확물의 내용을 고려하고 흙의 성질과 주변 환경을 살핀 후 밭을 선택한다. 모든 대지가 밭이 될 수 없다. 즉 아무 데나 씨를 뿌릴 수 없다. 길가 밭, 돌짝 밭 그리고 엉겅퀴 밭이 이를 잘 증언한다. 그러므로 좋은 밭이란 천성적으로 성품이 좋은 인간을 절대로 뜻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농부의 수고가 헛되게 된다. 좋은 밭이란 농부인 하나님이 애써 기경한 결과 생긴 밭이다. 기경(起耕)은 세 가지 목적 - 굳은 흙을 잘게 부수고 잡초와 돌들을 제거함 – 을 이룬다. 자연 상태의 밭은 모두 길가 밭, 돌짝 밭 또는 엉컹퀴 밭 중 하나이다. 농부의 수고를 통해 이런 밭들은 좋은 밭이 된다. 비로소 농부는 씨를 뿌릴수 있다. 이 때 농부와 하늘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하늘은 뿌려진 씨가 싹을 내고 자라도록 따뜻한 기후와 햇볕 그리고 이슬비 같은 단비를 준다. 씨 안에 기적같은 생명력이 있어도 환경과 여건이 안 맞으면 씨는 절대로 싹을 낼 수 없다. 이 위에 농부도 뿌려진 씨에 부지런히 그리고 적당히 물을 준다. 뿌려진 씨는 하늘과 농부의 자상한 도움으로 마침내 싹을 낸다. 싹을 낸 식물은 처음 조그맣다. 농부의 직접적인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때 하늘도 잔잔한 바람을 보내며 슬슬 그리고 살살 식물을 흔든다. 또는 좀 더 강해진 햇빛 때문에 이제 겨우 자란 식물은 말라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식물은 뿌리를 땅 속 깊게 내리려고 온 힘을 쏟는다. 물론 이 때 농부도 물을 주며 도와준다. 이 덕분에 식물은 좀 더 강해진 바람에도 버티고 뜨거운 햇빛에도 마르지도 않고 잘 자란다. 햇빛 그리고 바람이라는 시험을 잘 이겨낸다. 잘 자란 식물은 여름을 맞으며 많은 비를 대동한 강한 바람을 맞으며 쓰러지지 않으려고 뿌리를 넓고 깊게 내리고 강렬한 태양 아래 땅 깊이 감추어진 물을 흡수한다. 그렇게 더욱 강하게 자란다. 이런 고난과 어려움이 식물을 더 튼튼하고 강하게 만든다. 이 때 농부는 식물 곁에서 그저 지켜 보기만 한다. 그는 식물 스스로 이겨내야 할 시험임을 잘 안다. 마침내 식물은 찬란하게 꽃을 피운다. 그리고 서서히 꽃들이 지며 열매가 나타난다. 이 때 가을비가 내리며 열매가 빨리 자라도록 돕는다. 그런데 열매들이 다 크면 비가 갑자기 멈추고 대신 태양만 강렬하게 내려 쬔다. 식물은 말라 죽을 것 같다. 식물의 줄기와 가지들은 서서히 말라가지만 열매들은 더 잘 익어간다. 이 때 농부도 열매가 달도록 도우려고 고의적으로 물을 끊는다. 열매가 다 익으면 농부는 낫으로 벤 후 햇볕이 많은 곳에 더 말린다. 다 말랐을 때 농부는 기구들을 사용하여 때리고 치고 밟고 바람에 까불리며 알곡을 모아 곳간에 저장하고 쭉정이는 모아 태운다. 이렇게 일년 농사가 끝난다. 겨울을 맞아 농부는 비로소 푹 쉰다. 지금까지 설명된 농사 방법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그리고 구원의 서정 또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정말 놀랍게 잘 설명한다. 씨로 각각 소개된 예수님, 하나님의 말씀과 중생자들은 하늘과 농부의 도움이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모든 과정들은 다른 시간대로 일어나지만 모두 동일한 목적 - 추수와 수확 - 을 지향한다. 농부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수확을 이미 내다보며 씨를 뿌린다. 이런 설명은 구원과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노력 결과가 절대로 아니라고 증언한다. 개혁주의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 초기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농학으로 설명된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했고 그대로 믿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게 믿어야 하지 않는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97283636
98 no image 천국 비유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경륜
장창수
2349 2013-10-21
사복음서 묵상(86)/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9) – 천국 비유들이 말하는 비밀과 교훈 마태복음 13장과 25장에 천국의 비밀을 설명하는 11개의 비유들이 기록된다. 이들은 배경 면에서 서로 다르다. 13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기(中期)에 그러나 25장은 말기(末期)에 각각 기록된다. 13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으로 인해 출발할 천국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성취와 성장 면에서 그러나 25장에선 천국이 앞으로 어떤 종말을 맞을 것인가를 완성 면에서 각각 예언했다. 사실 예수님의 주관심사는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였다. 특별히 25장의 비유들과 그 배경이 이를 잘 증명한다. 26장부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계시가 기록된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계시한(마16:21절) 자신의 죽음이 바로 코 앞에 다가왔다(마26:2절). 이 때 주어진 세 가지의 비유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부활과 승천 더 나아가 재림까지 내다봄을 계시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천국의 완성을 동반할 것이다. 25장의 비유들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모든 구속사적 사건들이 종국적으로 완성될 천국과 긴밀히 연결됨을 의도적으로 알렸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의 죽음 넘어 부활, 승천과 재림까지 미리 내다보며 당시 제자들이 가진 절망감을 극복하길 바랬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마태복음에만 사용된 천국은 물론 하나님 나라를 뜻한다(마19:24, 21:31, 43절). 천국은 땅의 나라와 비교되며 영원성과 초월성을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 나라와 비교되며 현재성과 내재성을 각각 강조한다. 사복음서는 다윗 왕국의 재출현을 바라는 유대인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했고 천국을 초월적으로 생각하려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천국 복음을 외쳤고(마4:17절) 부활 후 승천 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말했다(행1:3절).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처음과 마지막 사역이 내용상 동일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에 그 목적을 두었음을 잘 증명한다. 스승 예수님처럼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신자들도 무엇보다 먼저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에 주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럼 천국은 어떻게 성취되고 완성될 것인가? 놀랍게도 예수님은 씨가 갖는 식물학적 기능을 이용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을 한 알의 씨로 비유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절) 여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싹을 내고 자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비유된다. 이 구속사적 의미를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 처음으로 살아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로 설명했다(고전15:20절). 첫 열매는 곧 동일한 추수가 이어질 것을 알리는 전령 역할을 한다.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 뒤 강림한 성령에 의해 사람들이 영적으로 중생하며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이미 계시한 대로였다(요3:3, 5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이라는 두 사건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출발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알린다. 예수님은 이를 미리 내다보며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완성에 대한 비밀을 13장에서 비유들로 사전에 설명했다. 이 비유들 중 첫 번째 두 비유들은 기본적인 것으로 아주 중요하다. 이 비유들에서 씨가 천국 복음(13:19절)과 중생된 신자(13:38절)로 각각 비유된다. 하나님 나라는 오로지 천국 복음과 구원 받은 신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라고 이 비유들은 계시한다. 그럼 천국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을 구원시켜 교회로 불러들이는 목적은 무엇인가? 물론 지역 교회의 양적(量的) 성장도 아니며 구원 받은 신자 개인의 안녕(安寧)을 위함도 아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기 위함이다. 결국 교회론과 목회학 또는 선교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물론 교회, 목회 그리고 선교 자체를 위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시키기 위한 도구나 수단 또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신론, 인간론, 기독론과 구원론 자체가 바로 신국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국 복음과 구원 받은 신자들. 결국 전자가 하나님 나라라면 후자는 영적 중생자를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는 객관적 실체라면 영적 중생자는 주관적 존재이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으로 또 다시 압축된다. 신약이 압축해서 말하는 구속주 하나님과 인간은 구약의 창조 기사가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연상시킨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했는가?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세계를 자신의 피조물 인간에게 위임시키며 다스릴 것을 명했다(창1:26-28절). 이 위임으로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이 되었고 이 덕분에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찾았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대속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한 구속으로 인류가 타락으로 잃은 것을 되찾아 주었다. 왜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 중기, 말기 그리고 승천 직전까지 하나님 나라에 몰두했는지가 여기서 더 잘 이해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교회는 사복음서의 기록대로 설교하고 목회하여야 한다. 즉 지상 교회는 조직 신학의 모든 각론들이 신국론에 그 중심을 둔다는 것을 재인식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전념하도록 하는 교회론과 목회학의 재정립이 요한다. 이 때 지상 교회는 다시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목회자도 더 이상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중세 유럽 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가 늘 반복한 실수와 잘못을 영원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과 교회의 개혁이 어디서 출발되어야 하는 지가 분명해 진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9239564
97 no image 인류의 타락과 인간 수명
장창수
2431 2013-10-16
창세디 묵상(80) - 인류의 타락과 인간 수명 홍수 이전 인류는 거의 일천 년을 살았다. 노아도 950살을 살았다. 그런데 홍수 후 인간 수명은 놀랍게 줄었다. 노아의 장자 셈은 홍수 후 500년을 살며 602살에 죽었다. 노아의 손자요, 셈의 아들인 아르박삭부터 2대 지나 에벨까지 400살 대로 떨어졌다. 그리고 3대 - 벨렉, 르우와 스룩 - 를 거치자 200살 대로 낮아지더니 나홀과 데라와 아브람에서 100살 대로 더 떨어졌다. 노아부터 10 세대를 지나자 수명이 천 년에서 200년 이하로 아주 빠르게 낮아졌다. 홍수 후 겨우 400년 정도 지났을 뿐이다. 홍수 심판 자체가 갖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인류가 천 년을 산다 한들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하루 아침에라도 하나님은 인류를 전멸시킬 수 있다. 장수하느냐 여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느냐 여부가 인류에게 더 중요했다. 그럼 무엇이 인간의 수명을 줄였나? 홍수 후 인간 수명에 영향을 주는 변화가 생태계에 생겼다. 창조과학협회는 하늘의 물이 모두 지상으로 쏟아져 내린 결과(창7:11-12절)라고 주장한다. 인류에게 해로운 자외선을 차단하는 량이 갑자기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실이 있다. 홍수 전 하나님은 초식(草食)만 인류에게 명했다(창1:29-30절). 그러나 홍수 후 하나님은 육식(肉食)을 인류에게 허락했다(창9:3절). 생태학적 변화를 고려한 것인지 또는 타락으로 인한 저주의 결과(창2:17절)를 좀 더 강화시키기 위함인지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며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을 복합적으로 생각함이 더 좋다. 홍수 이후 발생한 생태학적 변화 때문에 육식은 인류에게 불가피했고 이를 이용하여 하나님은 인류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결국 육식은 하나님의 저주 방법이었을 것이다. 최근 인간의 수명에 관련된 책(바이러스 폭풍, 네이선 울프 지음|강주헌 옮김, 김영사)이 출판됐다. 바이러스 전문가가 쓴 병원균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바이러스는 병원균 중에 가장 작으면서 힘센 놈이다. 유전 물질(DNA나 RNA)과 단백질 막으로 이뤄진 바이러스는 독자 생존이 불가능해 다른 생명체에 기생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숙주 세포를 감염시켜야 한다. 바이러스를 비롯한 병원균에게 인간은 서식지일 뿐이다. 이 책은 병원균 세상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인류가 사냥을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냥과 도축으로 야생 동물에 잠복한 병원균이 다른 종(種)으로 이동할 고속도로가 뚫렸다. 다양한 종을 사냥하는 침팬지와 인간은 각자 다른 병원균을 몸에 축적해왔지만 서로 병원균을 교환하는 위험한 순간이 생겼다. 에이즈도, 말라리아도 야생 유인원으로부터 비롯된 재앙이었다. 이 책은 하나님이 왜 인류에게 육식을 허락했는지를 놀랍게 잘 설명한다. 성경도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다(출12장). 40년 동안의 광야 삶 후 이스라엘이 마침내 요단 강 동편에 진을 쳤다. 이 때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다시 설명했다(신1:1, 5절).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받을 저주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신28:60-61절) 선민이 하나님을 피해선 살 길이 없다는 뜻이다. 율법 책에 기록하지 않은 모든 질병과 재앙은 무엇인가? 바로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과 그로 인한 재앙을 뜻한다. 의학자들은 인류가 바이러스와 싸움과 전쟁에서 항상 패할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바이러스는 변신에 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항생제에도 곧 변종 상태로 또 다시 나타난다.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오래 걸리지만 바이러스는 쉽게 변한다. 항생제 처방을 너무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이를 명심해서 새겨들어야 한다. 인류가 초식만 했을 때 동물들로부터 오는 바이러스 침투는 일단 차단되었다. 조류 독감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쥐를 통해 감염된 흑사병 같은 것들을 인류 사회는 막을 수 없었다. 분명한 사실 두 가지가 있다. 인류가 거절할 수 없는 육식(肉食)이 바이러스 감염 경로를 고속도로처럼 열어 놓았다는 것과 인류 사회는 바이러스를 상대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학적 사실은 인류 사회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 낙원을 세울 수 없다고 증언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겐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를 가르치고자 하나님은 육식을 허락함으로 인류가 이미 받은 저주의 강도를 더 높였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다. 이 모두 타락으로 인해 받은 인류의 저주(창2:17절)와 관련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민에게만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스라엘이 육식을 하되 동물의 내장과 기름은 불에 태워 자신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은 명했다. 이 규율 때문에 이스라엘은 초식 동물의 지방이나 기름은 절대로 먹지 않았다(레3:17절). 고기를 삶아 기름은 버리고 단백질만 취했다(레8:31, 왕상19:21, 대하35:13, 겔24:10절). 이렇게 선민은 이방인들과 달리 비만이라는 만병의 원인을 피할 수 있었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비만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비만은 이미 국제적으로 사회적 문제이다. 하나님은 왜 선민에게만 이런 계율을 주었을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신자들만 장수의 복을 받을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신8:3, 마4:4절). 인류가 이미 받은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성경은 의학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뒤늦게 과학책들이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성경은 과학책은 아니지만 충분히 과학적이다. 그리고 성경은 인류에 관한 역사책은 아니지만 충분히 역사적이다. 인류 사회는 지식이 충분치 못하면서 성경을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과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설명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향한 선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9028593
96 no image 두 종류의 구원론
장창수
2334 2013-10-16
사복음서 묵상(85)/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8) – 두 종류의 구원론 구약 성경의 구원론은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된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애굽을 벗어나 가나안으로 떠났다(출3:8절). 이 결과 이스라엘은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유민이 되었다. 구약은 장소의 이전을 통한 신분의 변화라는 결과로 구원론을 설명한다. 장소라는 구체적 개념은 구약 시대의 구원을 실감나게 느끼게 만든다. 아주 효과적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구원론은 좀 다른 듯하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속사적 사건에서 장소의 이전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영적 신분의 변화만 언급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는 천국 백성이 된다. 이렇게 보면 신약 성경의 구원론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이다. 존재론적 변화는 유감스럽지만 하나도 실감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초기 기독교는 이원론적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보다 낮춰 보았고 육보다는 영, 땅보다는 하늘을 더 좋아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론은 한 쪽으로 심하게 치우쳤다. 육적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변한다. 죄인이 의인이 된다. 땅의 백성이 하늘의 백성이 된다. 이런 표현의 구원론은 주관적 그리고 존재론적 변화로써 구원자 하나님과 피구원자 인간 사이 수직적 관계와 땅에 속한 존재가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되었다는 초월적 의미만 강조한다. 신약 성경의 구원론은 이것이 전부인가? 물론 아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장소가 갖는 구체적 개념을 이용하여 회개와 복음을 언급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절)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라는 장소가 지적되며 거듭남이라는 구원이 언급된다. 사도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절) 아들이 행한 구속 곧 죄 사함의 결과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 결국 구속과 구원의 목표는 죄인을 중생시켜 하나님 나라라는 장소로 옮겨 살게 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도 구약 성경과 같이 장소의 이전에 따른 신분의 변화라는 결과로 구원론을 동일하게 설명한다. 신, 구약은 구원론에서 차이를 보일 수 없다.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구원과 구속을 받는 것이 신앙 삶의 목표나 목적이 아니다. 이들은 목표와 목적으로 이끄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장소로 옮겨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과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앙 삶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여야 한다. 그럼 장소의 이전이라는 구원론은 어떤 내용과 성격을 보이는가?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로 소개된다. 기독교 구원론의 중심이 구원 받은 인간에서 구원자 하나님에게로 방향 전환된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라는 객관적 실체와 연결된다. 주관적 구원론에 객관성이 추가된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성도가 들어갈 천국이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 활동하는 구체적 실체이다. 이 덕분에 기독교의 구원론은 초월적 성격만 아니라 수평적이며 내재적 성격을 또한 갖는다. 수평적이란 이웃과의 윤리적 관계를 그리고 내면적이란 인류 사회에 세워지고 확장될 하나님 나라를 각각 설명한다. 비로소 구원론에서 기독교 윤리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창1:26-28절)으로 하나님의 기쁜 경륜에 속한다. 구원론이 인간의 존재론적 관점에서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구원론은 주관적, 수직적, 존재론적 그리고 초월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수평적, 경륜적 그리고 내재적이어야 한다. 이 때 구원론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다. 이로써 기독교 신학의 성격과 내용은 헬라의 이원론에서 벗어나 비로소 성경이 말하는 히브리적 사고로 되돌아간다. 그 만큼 기독교 신학도 개혁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8997185
95 no image 사회성 지수와 목회자 파일
장창수
2602 2013-10-16
1. 사회성 지수(social equotient) 또는 영성 지수(spiritual equotient)가 IQ(지성 지수)와 EQ(감성지수)보다 더 중요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사회성 지수는 나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까지 생각하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헌신성 지수라 해석할 수 있다. 남을 위해 기부를 잘 한다거나 선행을 앞서 행하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사회성 지수를 보여준다. 학자들은 설문들을 통해 사람들의 사회성 지수를 알아낸다. 2. 목회자는 보통 사람 이상의 사회성 지수를 보여야 한다. 선행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선생이며 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고 모범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과 무관하게 착하고 믿음이 좋다면 교회는 쉽게 목회자로 세운다. 그러나 마음이 착하거나 믿음이 좋다고 반드시 사회성 지수가 높은 것은 아니다. 3. 과거 전력이 상식적으로 안 좋은 신자라도 일단 회개했다면 그리고 믿음이 있다면 한국 교회는 목회자로 세운다. 교회는 과거 전력은 물론 그의 인격과 성품도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 물론 믿음으로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인격이나 성품은 개종 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후 목회자가 되면 안 좋은 성품이 서서히 드러난다. 4. 이를 방지하려면 학자들이 하는 설문 조사를 통해 목회자 후보생의 사회성 지수를 사전 조사해야 한다. 먼저 그를 추천한 목회자도 설문을 통해 후보생의 사회성 지수를 평가하고 그리고 신학원도 같은 설문 조사를 통해 후보생의 사회성 지수를 알아낸다. 두 결과를 놓고 목회자의 자질을 평가해야 한다. 5. 왜 이런 조사가 필요한가? 개종 전 안 좋은 인격과 성품의 소유자는 개종 후에도 그렇게 신앙 삶을 산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은 개종 후 하나님의 특별 은총 아래서도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일반 은총 아래 형성된 훌륭한 인격과 성품은 특별 은총 아래서도 아주 유용하다. 6. 이와 같이 개종 전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조사한 후 목회자 후보생을 선발하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혼란과 어둠의 원인은 어디 있는가? 위에서 언급한 일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와 장래를 위해서도 이제부터라도 사회성 지수를 알아내 객관적으로 목회자 후보생을 선발하도록 하자! 7. 사도 바울도 외부에 의해 칭찬을 듣는 신자를 집사나 장로로 세우라고 권했다(딤전3:7절). 여기에 목사도 포함된다. 목회자는 가르치는 장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외부 사람들의 멸시와 무시를 받는다. 상식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수준만 아니라 상식 수준도 보아야 한다. 8. 이렇게 사회성 지수는 아주 유용하다. 한국 교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라! 수준 높은 목회자만이 한국 교회의 수준을 향상시킨다. 목양 수준은 목회자의 인격과 성품 수준 이상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존경 받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것이 한국 교회를 개혁시켜 살리는 방법들 중 하나이다.
94 no image 창조와 구속
장창수
2584 2013-10-12
사복음서 묵상(80)/창세기 묵상(70)/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3) – 창조와 구속 성경은 신,구약으로 구성된다. 구약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시작한다(창1-2장).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나머지 구약 성경의 기초이며 근본이다.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의해 성취될 인류의 구속으로 시작된다(사복음서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가 신약 성경의 기초이며 근본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성경을 받쳐주는 두 기둥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아들의 구속 행위이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 결과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와 아담으로 대표되는 자연인 인류가 그러나 아들의 구속 행위 결과 눈에 안 보이는 실체인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이 각각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럼 하나님의 창조와 아들의 구속은 서로 대립하는가? 그 동안 기독교는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 둘을 대립시켰다. 그 결과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무시되었다. 그러나 히브리 인의 사고에 의하면 영과 육은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의 존재 덕분에 흙에서 나온 육은 동물적 생명을 얻어(창2:7절)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 활동하고 움직인다. 영은 육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아들의 구속 행위의 목적과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아들의 구속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목표한 바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그럼 창조 행위가 목표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인간의 통치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이 지상에 실현시키고자 했다(창1:26절). 이를 위해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을 자신을 대신한 왕 즉 통치자로 세웠다. 즉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통치를 통해 실현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수록 하나님의 통치가 이 지상에 저절로 구현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대적자 사단이 인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일단 실패했다. 이를 복구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올 메시아 즉 구원자를 약속했다(창3:15절). 원복음은 사단을 물리치는 것이 인류의 구원을 초래시킬 것이라고 약속한다. 겉으로 보아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의 강림은 인류의 구속을 목적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사단을 물리침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통치 실현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목적한다 (골2:14-15절). 이렇게 아들의 구속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겨냥한다. 이 때문에 신약 성경은 헬라 인의 사고가 아닌 히브리 인의 사고에 의해 재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그리고 뜻을 밝힌다면 아들의 구속은 이들을 성취시킨다. 구약 성경은 이 세상이라는 모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어떻게 달성되었는지를 기록한다. 다른 말로 한다면 구약 시대 모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 그리고 뜻을 보여주며 인류와 선민이 이를 믿기를 바랬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의 성취와 완성은 아들 몫이다. 이 점에서 구약 시대는 그림자 시대였다면 신약 시대는 실체의 시대였다. 그림자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암시할 뿐이다. 그러나 실체는 모든 것을 밝혀준다.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보다 우월한 이유이다. 그러나 구약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그러나 신약은 안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신약의 하나님 나라를 알기 위해 구약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를 살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창조와 구속은 서로를 보완해 준다.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다. 창조는 구속의 목표와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구속이나 구원 자체에 목표를 두고 신학 활동이나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성경의 일차적 가르침이 아닌 이차적 가르침이다. 조직신학의 구원론에 속하는 구원의 서정은 구원 자체에 관심을 두고 신자가 누구인가를 설명한다. 구원의 서정은 신자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설명해 줄 뿐 신자가 무엇을 위해 구원을 통해 부름을 받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하나님의 경륜 차원에서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창조와 구속 중 구속으로 치우친 결과이다. 이 결과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 중심의 신학이 된다. 그리고 구원이 인간을 위한 기복적 관점에서 해석되며 번영 신학 같은 이기적 또는 비성경적 신학을 출현시킨다. 결국 창조와 구속 사이 균형을 보여주도록 기독교 신학은 재정립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에 신국론이 추가되어야 하며 신국론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학들이 재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아들의 구속 행위 사이 어떤 충돌이나 대립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교회와 신자는 아들의 구속 행위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신앙 삶을 살게 된다. 비로소 수준 높은 신자가 될 수 있다. 아들의 구속 결과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로 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거듭난다. 시민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이런 신자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인류 사회에 비록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실재한다. 그 결과 점점 죄악이 사라지며 인류 사회는 서서히 낙원으로 변한다. 자신의 눈으로 이를 본 인류 사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할 것이다(마5:16절). 하나님의 대적자 사단은 더더욱 인류 사회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물론 최종적 승리는 사단의 완전한 제거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 때까지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인류 사회를 시험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험을 통해 자기 백성을 부를 것이다. 구속에만 만족하는 신앙인이 되지 말라! 구속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위한 부름의 결과임을 잊지 말라! 이 때 기독교와 교회는 자신을 위해 활동하지 않게 된다. 구속에만 집중하는 구원론, 교회론 그리고 목회학에서 벗어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를 겨냥한 구원론, 교회론과 목회학을 재정립하라! http://blog.naver.com/rassvet/40198242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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