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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7 20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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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56 201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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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87 201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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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41 2010-07-23
93 no image 새롭게 살펴보는 구원론(2)
장창수
2454 2013-10-12
사복음서 묵상(83)/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6) ? 새롭게 살펴보는 구원론(2) 구약은 장소의 이전을 통해 신분의 변화를 설명하는 식으로 구원론을 설명한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3:8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목적은 가나안 땅에 이르도록 함이었다. 여기서 구원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구원의 수혜자는 이스라엘임이 분명이 드러난다. 위의 본문은 구원자와 피구원자, 구원의 방법과 목적 또는 구원의 출발과 마지막을 함께 생각하며 구원론을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지금까지 피구원자, 방법과 출발에 중심을 둔 구원론을 설명한다. 구원론이 인간 중심의 주관적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치우친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이 번영, 성공, 심리적 카타르시스 등등 성경적이지 않은 신앙 유형을 낳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젠 구원자 하나님, 구원의 목적 그리고 구원의 마지막을 고려한 구원론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 때 하나님 중심의 객관적 그리고 경륜적 구원론이 정립되며 기독교 신학을 보완된다. 어떤 경륜을 위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시켰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구원론이 비로소 가능하다.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하는 구약의 구원론은 이런 큰 장점을 갖는다. 그리고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되는 구약의 구원론은 문화적 의미를 또한 갖는다. 장소의 이전은 신분의 변화를 초래시킨다. 애굽의 시민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신분의 변화 말이다. 이를 달리 설명한다면 출애굽 사건 후 이스라엘은 애굽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버리고 구원자 하나님이 요구하는 새로운 문화와 삶의 방식에 따라 가나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출애굽 사건은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민이 되었다는 실존적 사실만 말하지 않는다. 애굽의 옛 문화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새로운 문화에 따라 살아야 하는 새로운 윤리적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장소의 이전은 몸만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과 정신 면에서도 애굽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어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구약의 구원론은 신분의 변화만 말하지 않고 문화와 가치 그리고 삶에서의 변화를 또한 강조한다. 즉 구원은 신분의 변화만 아니라 윤리적 삶의 변화를 또한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다. 이 때문에 구약의 율법은 아주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성화를 돕는 방법이다. 물론 이 때 성화(윤리적 삶)는 칭의(새로운 신분 획득)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독교는 신분 변화만 강조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늘 주장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 율법의 역할이 감소되거나 축소되었고 결국 기독교 윤리가 기독교 신학에서 있을 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타락하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윤리적 삶이 없는 이론과 논리로 전락한 기독교 신학. 이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 상식적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출생을 통해 생명과 몸을 얻는다. 물론 출생을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출생은 성장의 과정을 거쳐 가문의 상속자로 자람을 목적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가나안 상속을 전제한다. 가나안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이 건설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으킨 출애굽 사건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출생 자체만 기뻐하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배타적 성격의 종교로 전락시킨 원인이 아닌가? 구원의 은총을 통해 자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했다는 사실만 신자들이 기뻐하고 강조하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구원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거룩한 일을 위한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이란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겸손치 않다. 교만하다. 항상 불필요한 우월감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유감스럽지만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삶과 문화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도록 저절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 시내산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만 성화가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율법과 기독교 윤리를 팽개친 지 이미 오래다. 서서히 기독교는 허울 좋은 종교로 전락해 갔다. 왜 사도 바울은 자시의 서신의 전반부는 신학이나 교리로 채우고 후반부는 윤리에 할당 했는가?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의 구원론에서 잘 설명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절) 바울은 또 말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절) 예수님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절) 지금까지 기독교는 윤리와 분리된 신학만 말했다. 그러나 이젠 신학과 윤리를 함께 설명해야 한다. 예수님과 구약 그리고 사도 바울의 구원론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 근거를 둔 기독교 윤리를 정립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개혁이다. 삶과 분리된 신학만 주장하기 좋아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는 이 점에서 비성경적이며 기독교를 오히려 해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8735882
92 no image 새롭게 살펴보는 구원론(1)
장창수
2483 2013-10-08
사복음서 묵상(82)/기독교 신학을 생각한다(5) ? 새롭게 살펴보는 구원론 사도 바울이 말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절) 사도 바울은 구속 곧 죄 사함이 무엇인지를 간결하게 설명한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냄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 놀랍게도 바울은 ‘장소의 이전’으로 구원을 설명한다. 흔히 구원은 ‘신분의 변화’로 즉 죄인이 의인됨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 등등으로 존재론적 관점에서 설명된다. 이것은 구원 받은 인간에 중심을 둔 구원론이다. 그러나 인간은 구원의 수혜자이지 구원의 주체자는 아니다. 장소의 이전이라는 사도 바울의 새로운 개념은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구원론을 바꿔 묵상하라고 요구한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구속의 결과 죄인은 객관적 실체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성경적 구원론은 그 중심을 인간의 주관적 그리고 존재론적 신분 변화보다 하나님의 객관적 그리고 경륜적 관점을 제공하는 장소의 이전 개념으로 이동해야 한다. 즉 후자에 근거를 두고 전자를 늘 묵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신분의 변화란 장소의 이전에 따른 결과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신분의 변화를 받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 은총 덕분에 사단이 주관하는 흑암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이 주관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결과 신분의 변화가 생긴다. 이것이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장하는 구원론이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한 새로운 세상에 출생했고 그의 백성이 되었다(창1-2장). 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 행위 덕분이었다. 인류가 받은 문화 사명(창1:28절)이 이를 잘 증명한다. 흙에 지나지 않은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결과였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홍수 심판에서 구원했다. 하나님의 심판 결과 옛 세상에서 새 세상으로 옮겨지며 새로운 인류가 나타났다. 홍수 심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뜻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제 2의 창조 행위와 같았다. 하나님은 새로운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또 다시 명했다(창9:1절). 이 모두 하나님의 기쁜 뜻에 따른 무조건적 그리고 일방적 은혜의 결과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했다. 출애굽 사건은 가나안 입성을 이미 전제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였다(출3:8절). 그러므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돕는 율법이 주어졌다. 신분의 변화가 전제된 율법 수여였다. 이 점에서 출애굽 사건도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유사하다. 장소의 이전 덕분에 신분의 변화가 가능했다. 사도 바울의 주장대로 예수님의 구속 행위도 또한 장소의 이전이 초래시킨 신분의 놀라운 변화라는 결과를 동반한다. 이 점에서 아들의 구속 행위도 새로운 창조 행위와 같다. 죄인이 의인이 되고 흙(땅)에 속한 인류가 하늘에 속한 인류가 된다.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절). 그러므로 장소의 이전은 반드시 존재론적 또는 실존적 변화를 동반한다. 새로운 장소에 살려면 새로운 실존 양식이 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말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절). 사도 바울도 말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절) 이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전제한 중생을 언급한다 성경의 구원론은 장소의 이전과 신분의 변화, 이 둘을 항상 함께 묵상하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둘 중 어느 것이 우선이야 하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거의 동시적이지만 그러나 성경은 장소의 이전을 전제한 신분의 변화를 주장한다. 논리적으로 볼 때 후자는 전자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후자에 근거를 둔 구원론을 주로 말한다. 인간 중심으로 균형을 잃는다. 그러나 장소의 이전에 따른 신분의 변화는 구원의 목표로 설명된 객관적 실체인 하나님 나라를 주목하게 한다. 사단이 주관자인 애굽에서 하나님이 주관할 가나안으로 그리고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것을 깨닫도록 돕는다. 그리고 신약이 주로 설명하는 구원은 근본적으로 영적 변화이다. 인식론적 변화만 강조된다. 그러나 구약이나 사도 바울은 장소의 이전으로 구원을 하나님 나라에 근거를 둔 윤리적 삶의 변화로 이해하라고 요구한다. 물론 사도 바울이 언급한 아들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로써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실재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장소의 이전에 따른 구원론은 신분의 변화가 주는 개인적, 존재론적 구원론의 한계를 털어낸다.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감을 주기 때문이다. 장소의 이전에 근거를 둔 구원론은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 윤리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결국 하나님 중심의 객관적 그리고 경륜적 구원론은 인간 중심의 주관적 그리고 존재론적 구원론을 보완시켜 준다. 전자는 후자와 달리 구원의 출발과 마지막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예수님(마4:17절)과 세례 요한(막1:15절)이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라는 장소적 개념을 이용하며 왜 복음을 외치며 회개를 사람들에게 요구했는지가 설명된다. 영적 분야에서 일어나는 신분 변화가 반드시 윤리적 변화를 전제함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신분의 변화만 아니라 장소의 이전에 근거를 둔 구원론을 기독교 신학은 늘 함께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이 때 기독교 신학은 인간 중심적 구원론에서 즉 기복적 성향의 신학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더욱 성숙한 신학으로 발전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8522967
91 no image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
장창수
2736 2013-09-15
사복음서 묵상(71) ?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 공생애 말기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았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들은 정확하게 신앙을 고백했다(마16:16절). 그러나 이들의 신앙고백는 동기 면에서 전혀 잘못되었다.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왕임을 알고 스승 덕분에 하나님 나라에서 출세할 것이란 기대감에 이들의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계시하며 예언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가 스승의 죽음을 말린 이유였다(마16:22-23절). 자신의 새로운 계시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가르쳐야 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등장하며 많은 민족들이 그리로 편입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할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먼저 배워야 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절) 이것이 첫 번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이다. 변화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산 아래 남아 있는 제자들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를 전혀 돕지 못하고 서기관과 무리에 의해 조롱 당함을 보았다(마17:1-16절).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함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했다(17절). 스승 덕분에 세상에서 출세할 것이란 헛된 꿈에 부풀어 있는 제자들은 당연히 축사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아들의 복음을 악용하지 말란 뜻에서 그들이 수치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중 예수님은 신앙의 동기를 바르게 갖도록 기도(막9:29절)할 것을 제자들에게 권했다. 그러나 스승 예수님의 계시와 권면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 누가 하나님 나라에 큰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토론했다(막9:34절). 이를 안 예수님은 이렇게 충고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하나님 나라에서 출세 방법은 세상 나라의 그것과 전혀 다름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나중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20:25-26절) 세상에선 집권자의 사랑을 받으면 출세할 수 있다. 어떻게 하든지 집권자에게 아부하고 아첨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선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출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이다. 어린 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고 보완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권력, 부귀와 영화 명예가 아닌 영혼의 가치를 보고 아무리 약한 자라도 무시하지 말고 영접하고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이 때 요한이 말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38절) 예수님의 답은 의외였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39-41절) 여기 세 번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가 언급된다. 제자들은 자신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금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제자들을 위한 사람이라며 반대하지 말라고 권했다. 우주적이며 보편적 하나님 나라는 불완전한 인간 무리의 주장, 가르침, 교리와 전통 같은 것에 의해 제한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을 신앙 고백한다면 하나님 앞에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신학과 교리, 교단과 교파, 인종, 언어 그리고 나라나 지역에 의해 수없이 나뉘어져 있다. 교회들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차이 때문에 서로 반대하며 배척한다. 이 점에서 개혁주의나 칼빈주의가 다른 주의나 신학을 배척하고 반대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즉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에 반하는 것은 아닌지? 신앙 고백이 일단 동일하다면 교리나 신학상 차이는 대범하게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율법주의자와 위선자로 드러날 것이다. 이 후 예수님은 소자(小子)라도 실족하는 경우가 없어야 하며(42절) 죄를 짓게 하는 손과 발을 자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다는 가르침(43-49절)을 더 했다. 이들은 위에서 이미 언급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에 대한 보완적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가 나왔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9:50절) 제자들은 사도들로서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복음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출세할 것이란 꿈과 소원에 계속 사로잡혀 있다면 그들은 제자로서 자격을 상실할 것이다.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윤리 세 가지로 무장한 후 사도 역할을 해야만 소금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제자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인식해야 하며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잘못된 꿈과 소원을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과 화목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곧 십자가에서 죽을 스승 예수님 그러나 부활로 인류의 구원주와 만유의 주가 될 예수님 그리고 이를 전혀 이해 못하고 세상 욕망에 사로 잡힌 예수님의 제자들. 여기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 그리고 신자들의 영적 상태가 그대로 설명된다. 이 모두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법과 윤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려면 하나님 나라 법에 따라 하나님 나라 시민 노릇을 계속해야 함을 모른 결과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새로운 윤리 사이 긴밀한 관계가 강대상에서 자세히 전파되지 못한 결과이다. 우린 성경과 신학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와 전혀 무관하다. 이 얼마나 억울한가? 그런 신학과 성경 지식을 자랑하며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 신학은 하나님 앞에 무용하다. 무엇을 개혁할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성경과 신학에 대한 지식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윤리와 함께 가야 한다. 그리고 이를 초래시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란 사건들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다시 배워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7167867
90 no image 누가 크냐?
장창수
2426 2013-09-10
사복음서 묵상(70) ? 누가 크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했다(마16:15-21절). 엿새 후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 자신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다(17:1-3절). 구두로 한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변화산에서 눈으로 분명히 확인되었다. 스승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확실하게 안 제자들. 이들은 출세의 꿈에 젖어있었다. 이 때 예수님은 하산(下山)하면서 그들이 본 것을 스승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9절). 이 말이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전히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곧 예루살렘에 임할 것이며 그 나라에서 우의정과 좌의정 할 꿈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갈릴리에 모였을 때 예수님은 한번 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계시했다(17:22-23절). 이를 듣고 제자들은 몹시 근심했지만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클 것인가에 대해 토론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꿈이 예수님의 계시 때문에 쉽게 무너지길 원하지 않았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길에서 무엇에 대해 토론했는지를 물었다(막9:33절). 제자들이 침묵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그리고 아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절) 예수님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런 권면을 제자들에게 남겼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침투해 들어갈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를 것이다. 나라가 다르면 법도 다르다. 하나님 나라에선 세상 나라의 법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은 이를 가르쳐야 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고 믿었다. 제자들이 출세하려면 하나님 나라의 권력자인 예수님을 붙좇아야 했다. 이것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방법이다. 권력자에게 줄을 대는 것 말이다. 결국 제자들은 3년 넘게 스승에게서 배웠지만 여전히 세상 방식대로 예수님을 따랐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 어린아이는 문자 그대로 지금 아무 권력도 소유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무리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주 안에 있어 언젠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될 것이다. 현재적 능력은 안보여도 잠재적 능력을 소유한 어린 아이를 아무 조건도 없이 사랑하고 돌보는 그런 제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것이다. 달리 말해 스승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왕임을 알고 이를 이용하여 세상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를 보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다. 안 한 것과 같다. 그러나 그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소자라도 아무 이해 관계없이 사랑하고 돌본다면 그는 예수님과 그를 보낸 하나님을 영접한 자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권면은 목회자가 어떻게 목회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높은 자가 되고자 함도 이미 비성경적이다. 다시 말해 목회를 성공과 출세의 과정 또는 방법과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님을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며 목회해선 안 된다. 세상에서 잘 난 사람들만 찾아 다니는 목회는 위선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목회해야 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고 권면했다. 수에 연연하는 목회를 하지 말란 뜻이다. 한 영혼을 귀중하게 보고 목회하란 뜻이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면 수에 연연하는 목회는 이미 비성경적이다. 상급의 기준은 얼마나 큰 목회를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한 영혼이라도 귀하게 보고 목회했는냐가 될 것이다. 목회자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옛 사고방식을 버리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본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 사건 후 예수님의 권면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목회자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이 가는 신학적 의미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 목회다운 목회를 위해서 말이다. 달리 말한다면 목회의 출발과 근거는 이들 세 사건에 있다. 그 신학적 의미를 잘 배운 후에야 비로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자세로 그리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함이 없이 복음을 사심 없이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의 본이나 가르침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결국 우린 예수님을 너무나 모른다. 사복음서를 자세히 묵상해야 할 이유가 아닌가? 수박 겉핥기가 아니라 내용으로 파고 들어가는 묵상이 요한다. 결국 우린 복음서를 너무나 모른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 연한다. 이 얼마나 가증한가? http://blog.naver.com/rassvet/40196663751
89 no image 예지와 예정
장창수
5166 2013-09-10
창세기 묵상(64) - 예지와 예정 예지와 예정 사이 신학적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알미니안은 예지론을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예정론을 각각 주장한다. 예정론은 흔히 이중 예정론으로 불리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어떤 조건도 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사람들과 영원한 죽음을 당할 사람들을 미리 정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의지가 무시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예지론은 예지예정 (豫知豫定)의 준 말로 하나님이 아무개라는 사람을 살펴보니 그에게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음을 미리 알고 그를 구원 (선택)하기로 예정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의 가능성에 의해 좌우되기에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이 의심을 받게 되고 아무개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낳게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야다’란 히브리어 단어는 ‘안다’와 ‘사랑한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절) 국역 성경은 ‘야다’를 ‘동침하다’로 번역했다. 그러나 많은 영역본들은 ‘안다’로 번역한다. “아담이 하와를 알았고 그 결과 잉태했다.” 물론 여기 안다는 사랑한다의 의미이며 그것은 곧 함께 잔다는 뜻이다. 이렇게 ‘야다’란 히브리 단어는 지식,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사랑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의미로 본다. ‘안다’는 이미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아담과 하와는 조건 없이 서로 사랑했다. 하나님이 부부로 연을 만들어 준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다’란 히브리 원어로 본다면 예지와 예정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의미에 속한다. 예정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작정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이 때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완전한 영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예지론과 예정론을 ‘대립적 이분법’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논리적 이분법’으로 보라!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지극히 당연하다. 사람들도 무언가를 할 때 먼저 추상적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구체적 계획을 세운다.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으로부터 온전한 영광을 받기를 작정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피조물 인간에게 주기로 했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이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통해 이를 자세히 설명했다(엡1:4-6절).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다. 자신의 자식과 다름 없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인간에게 위임시켰다(창1:26-28절). 이것은 무조건적 사랑이었다. 다만 선악과 규례와 사단의 존재를 허용함으로 인류 역사 속에서 피택자와 유기자를 가려낼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과 선택을 받은 무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영생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풀지만 이에서 제외된 무리는 시험에서 탈락할 경우 이 은혜에서 또한 제외될 것이다. 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세 전 작정대로이다. 이 작정은 타락 후 곧바로 드러났다. 아담이 시험에서 탈락하자마자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로 나뉠 것을 계시했다(창3:15절). 누가 이 둘 중 어디에 속할 것인가는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에 따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구속 은총도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 베풀어질 것이다. 타락의 결과 인간의 사고는 늘 분열 상태에 놓인다.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거절한 결과 사단이 인류 사회에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 영향을 받은 아담은 하와와 하와를 아내로 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비난했다(창3:12절). 모든 사랑을 베푼 창조주 하나님이 아담에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타락의 불행한 결과이다. 인류는 늘 대립적 이분법으로 사물을 해석한다. 이런 대립적 사고 방식은 타락한 인간에게 보여질 뿐이다. 그 결과 예지와 예정을 충돌시킨다. 그러나 창세 전 예지와 예정을 정한 하나님의 사고에선 예지와 예정이 하나도 대립되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다.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을 이해하려 하니 거의 불가능하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하는 대립적 이분법과 달리 논리적 이분법에선 짝을 이루는 둘은 선(先)과 후(後)라는 논리적 관계를 항상 갖는다. 먼저 작정(예정)하고 다음 사랑(예지)한다. 작정은 추상적 결심 또는 계획이라면 사랑 또는 앎은 이미 구체적 행위이다. 사람도 결심한 후 행하듯이 하나님도 마찬 가지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예정을 선택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두었다. 다만 경계할 것은 하나님이 모두 정했다고 인간의 의지가 전혀 무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잘못 가도 하나님은 무조건 은총으로 피택자의 삶을 섭리하며 견인해 간다. 그러나 유기자의 경우 이런 은총에서 제외된다. 그냥 멸망의 길로 가도록 허용한다. 인류는 이미 아담의 원죄와 본죄로 죄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알미니안의 문제는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보다 우월하게 둠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작정은 늘 불완전한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며 하나님은 참으로 무력한 신으로 드러난다. 이런 하나님을 우린 믿을 필요 없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능동적으로 인류 사회에 간섭하며 자기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는 전지전능하고 자신의 언약에 성실한 신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6582906
88 no image 성경과 신학3 파일
장창수
2553 2013-09-06
신학이 부품학이라면 성경은 자동차란 완성품으로 비유될 수 있다. 자동차는 수많은 부품들의 합으로 단순한 합 이상의 기능과 목적을 보여준다. 부품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하나로선 독자적으로 존재 의미와 목적을 갖지 못한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특정한 구조 아래 부품들이 조립되어 자동차를 위한 특정한 기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엔진은 수많은 부품들이 특정한 구조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런 구조를 가진 다른 브록들도 있고 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자동차를 움직인다. ?엔진이란 동력 장치, 이를 바퀴에 전달하는 장치, 전기 장치, 차제 등등은 모두 수많은 부품들로 구성되며 독립된 기능을 보여주고 그리고 이 기능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자동차를 움직이게 만든다. 자동차라는 완성품으로 비유된 성경도 ?수많은 신학적 주제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많은 가르침들을 제공한다. 이런 가르침들도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며 성경을 설명한다. 이렇게 신학적 주제들 즉 신학들은 자동차의 부품처럼 절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신학들, 즉 신학적 주제들은 부품학에 속한다. 신학들은 성경의 부분을 말할 뿐 전체를 말하지 못한다. 자동차에서 부품들이 특정 목적을 지향한 구조에 따라 서로 합치듯이 ?신학적 주제들도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성경 본문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제 1차적 가르침을 전달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반드시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이용하여 표현되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신학과 성경 해석은 이미 부분적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를 통해 본문이 전하는 1차적 가르침들은 모두 하나님의 경륜을 밝힌다. 이렇게 본다면 신학적 주제들인 2차적 가르침들 즉 신학들은 제 1차적 가르침을 찾도록 도와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초보적이며 기초적이다. 신학적 주제와 그 내용만 연구하고 전부인양 주장하지 말고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경륜을 찾아내라! 창세기 1-2장에는 수많은 신학적 주제들이 있다. 예컨대 세계관, 인간론, 신론과 기독론, 창조론, 율법, 가정론과 결혼관 등등이다. 그러나 창조 기사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이 아니다. 창조 목적을 알리기 위해 이들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리고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신의 통치 즉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창1:26-28절)이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창조 기사를 가장 바람직하게 해석하는 방법은 창조 기사가 밝히는 모든 신학들을 하나님의 경륜 아래 통합내지 통섭하는 것이다. 신학들을 개별적으로 독립시키지 말라! 지금까지 신학들은 개별적 연구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창조 기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경륜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이런 경륜을 무시하고 신학적 주제들에만 치중하는 성경 연구 방식은 극히 부분적 성경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완성품인 자동차와 같음을 잊지 말라! 신학적 주제들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하나의 구조에 속하여 특정한 가르침 즉 제 1차적 가르침들을 주고 이런 가르침들은 하나님의 경륜 아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며 성경 자체를 설명한다. 이런 방식으로 신학 체계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제 2차적 가르침들인 신학들을 충분히 배우라! 그리고 성경 본문에서 이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며 제 1차적인 가르침들을 주는지를 연구하라! 그러나 이런 작업은 그리 쉽지 않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 2차적 가르침인 신학들을 강대상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이유이다. 2차적 가르침들은 이미 잘 정리되어 있다. 유감스럽지만 오늘날 신자들은 인터넷의 도움으로 이런 자료들을 쉽게 접근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경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찾아 제 1차적 가르침을 전해주지 못한다면 신자들은 설교에 흥미를 잃게 된다. 성경이란 완성품은 자동차와 같아 부분이 아니라 부분의 합임을 잊지 말라! 부분의 합으로 성경을 설명할 때 성도들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신앙 삶에 적용 가능한 가르침을 강대상에서 얻을 것이다. ?성경은 역사란 구체적 상황을 통해 진리를 전하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6575074
87 no image 세금 앞에서 갑자기 성직자가 된 기독교 목사들
박인철
3228 2013-09-05
? '목사는 성직자인 종교인이니 세금을 안내도 된다' 하는 논리는 성직자 목사가 아닌 교역자들이나 사찰이나 기타 교회 종사자들은 세금을 내야한다는 논리이다 - 한장총의 (세금)정책간담회 법리론에 의하면 - 남자는 여자의 머리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가정과 교회의 원리는 같다. 한 가족은 그 가정의 생활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에 결코 사례를 받지 않는다. 따로 월급도 받지 않는다. (생활 활동에 필요한 용돈을 나눌 뿐이다 - 생할비를 타거나 나누는 것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은 없다) 사례를 받는다는 것, 월급을 받는 다는 것은 남을 위해 일을 하고 받는 대가로 발생한 소득이다. 이것이 다 아는 소득세 세무 법리이다.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 해도 세상에는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그런데 종교인 세금부과의 주 표적이 되는 종교가 기독교임을 다 안다. 세상법의 수입과 지출에 의한 교회 재정 기반의 원리는 신도들이 사회적 소득의 행위로 얻게 된 것의 소득세를 나라에 납부한 후에 종교행위로 기부한 생활 자금의 일부로 일종의 소비재정이다. 즉, 소득을 위한 활동으로 얻은 재정이 아니다. 기독교가 그 종사자들의 세금에 대하여 법리적으로 변론한다면 이런 이치밖에는 딱히 대응할 이론이 없다. 그런데 敎會의 交會화, 특히 좀 큰교회들의 사업장화로 세상과 경쟁도 하며 그 결과물로 성도들의 십일조와 헌금외에도 상당한 수입들에 의존하기도 하는 교회와 목사들로 비쳐지는 현실에서 위 소비재정의 원리만으로는 더이상 변론하기가 궁색하게 된 현실이다. 더구나 세상이 교회를 구별하여 존대할 만한 성스러움이나 신비스러움은 찾아 볼 수도 없으며 오히려 세상의 온갖 첨단 장비들을 갖추고 신나게 즐기며 잘 놀고 먹는 것에 세상에 결코 뒤지지 않고 교단은 신도들에게 세례교인 회비를 걷어 교회의 세상적 세력을 키우는 통합, 연합한다며 호텔을 전전하며 세상에 교회의 부를 자랑하면서 정교(政敎)분리라는 옛날 좋았던 시대의 망상적 용어로 세상에 대항하려 한다면 더욱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교회나, 심지어 교회들의 연합체인 교단마저 일반 언론사, 일반 학교(학과), 병원, 갖가지 문화사업장으로 소득을 올리고 건물을 세도 주며 또 교회가 땅값 오르면 팔고 개발 신도시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궁궐같은 교회당을 짓기도 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아 어떤 재벌도 부럽지 않을 만한 부자촌을 만들며 도대체 목사들이 가져 가는 월급과 돈이 얼만지도 모르는 형국에 정교분리이니 세금부과는 부당하다고 하면 매월 꼬박꼬박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월급에서 갑근세를 공제당하는 세상사람들에게 이말은 상당히 파렴치한 말로 들릴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작은 교회 목사, 교인들마저 너도나도 그렇게 커진 교회와 목사가 마치 교회들의 대표인 것처럼 자랑하듯 하니 세상이 교회들을 큰 부자로 알며 세금을 내라고 하게된 것은 교회의 자업자득이다. 요즘 교회들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이렇게 적나라한데 연합단체들은 연합 자체를 목적으로 하며 WCC 같은 것으로 세상신문에 선전하며 싸움질도 하는데 무슨 또 하나의 연합체의 명의로 돈에 관하여 세상에 대항하려는 것 같은 행태는 세상에 교회의 인식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합신교단 주도의 교회연합회라면 바른교회상 회복에 앞장을 서야할 터인데 반대로 자신의 정치적 성취욕과 입지 확대를 위하여 어줍잖은 세상이력을 내세우는 자들로 교회연합회라는 세력을 암시하며 세상에 대응하고자 교회를 더욱 부끄럽게하는 일에 앞장선다. 대한예수교 교회들이 성직자들의 생활비와 위로비, 교통비를 지급하던 것을 나라가 개입하여 그 명목을 사례비, 월급으로 바꾸고 세금내라 하지 아니하였다. 이로써 정교분리 얘기는 맞지 않는다. 교회는 신도가 이미 국가에 소득세를 낸 나머지 것 중에서 교회의 생활을 위하여 드린 십일조로 종사자들의 생활비(소비재정)를 제공하는 것이다. 십일조 외의 각종 헌금은 재정축적이 아닌 순수 선교목적으로만 사용되어져야 하는 기부금이다. 이것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옛 신자들이 옛 목사님들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거룩한 곳임을 스스로 포기하고 , 목사가 성직자임을 스스로 포기하고 생활비가 아닌 사례비나 월급으로 받으니 국가는 당연히 소득에 대한 소득세를 납부하라 하는 것이다. 세무상 사례비나 월급은 분명한 소득이다 - 명목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재정.재무 법리상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이 명목으로 교회나 국가는 재정의 성격과 용도의 일차 법리적 판단을 하는 것이며 회사의 노사 간에도 끝임없이 월급의 항목 명목 논쟁과 줄다리기를 하며 노동부와, 또 법률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개정한다 - 통상임금포함 여부 등. 요즘의 목사도 성직자인가 하는 것도 하나의 큰 명목(분) 분쟁의 소지일 수도 있다. 교회의 거룩성, 구별성의 정통을 유지하고자 힘쓰는 몇몇 교회들은 지금도 교역자들에게 지급되는 명목을 생활비로 하고 있는데 목사들에게 월급, 사례비를 주고 받는 교회들과 함께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같이 소득세를 내게 되었다. 어느 교회는 성경과 헌법에 잘못된 방식으로 담임목사를 단순 월급쟁이 삯군을 세웠다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직원들이 고 박윤선 목사의 헌법주석(정치.예배모범 - 영음사 간)을 각기 구입하여 공부하고 있다. 이 박윤선의 헌법 주석에서는 목사를 성직자로 명백하게 명시하며 성직자로서의 목사직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합신 졸업생들이 의도적으로 성직자 라는 말을 꺼리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하여 재차 삼차 확인한 바 재학3년 동안에 학교로 부터, 선대들로부터 '성직자라는 명칭을 들은 기억이 없다' 는 것을 확인 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느 목사에게서도 목사직이 성직, 목사가 성직자라 말하는 것을 들어 볼 수가 없는 것이 요즘 교회이다. 이것은 목사들이 스스로 그 직분을 여러가지로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성직자로 수행하지 않겠다는 뜻임을 우리의 양심들이 안다. 그런데 이번 합신인들의 한장총 (세금)정책간담회에서는 유독 성직자라는 말이 당연한 듯이 강조되며 사용되었다. 평시에는 무슨 이유로 성직자가 아닌듯이 하다가 나라가 세금을 요구하니 거침없이 성직자라 하며 대응논리를 펴는 것은 교회를 또 한번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세상은 교회들이 세상에 보여 주는 그대로 교회를 대하는 것인데 기독교 목사가 갑자기 성직자라 하며 세금 안낸다 하면 세상은 교회를 더욱 적대시하며 전도길이 더 막힐 것은 자명하다. 이번의 종교인 세금부과의 일은 기독교 때문이며 불교나 천주교만으로는 이렇게 급격히 종교인 세금부과 얘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다 안다. 그들은 불편한 옷이라도 승복, 신부복, 수녀복을 입고 스스로 성직자라는 폼이라도 잡고, 꽤 성스러워 보이는 불편한 예배형식이라도 보여주기에 세상이 그래도 성직자로 여겨주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국가가 월급이 아닌 생활비를 받아 사는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물리려 하겠는가? 교회를 거대한 부자촌으로 만들며 또 성경에 의거하여 수천년간 개혁자들과 교회들에 의하여 세워져 온 교회의 전통과 정통성을 쓰레기 취급하듯 깔깔(합신교회 주일예배 설교 시간에) 거리며 이것이 자기 잘난 것으로 여기저기에 광고하는 교회들의 자업자득이다. 교회연합회라면 세상과 다투는 세금얘기가 아니라 '요즘의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모양이라도 있는 곳인가? ' '요즘의 목사도 성직자인가? ' 라는 간담회부터 해야한다. 하나님께서 대한예수교로 세워주시고 교회를 통하여 이땅을 오늘의 대한국으로 세워 주신 것을 역사의 사실이 증언함을 다 안다. 수십년간 한결같이 방방곡곡의 예배당들이 날마다 새벽종으로 이 강산을 깨우며 새나라로 건국하고 흥왕케 되었음을 안다. 대한 나라가 교회와 교역자에게 세금부과는 커녕 오히려 각종 면세의 근거 법률로 교회를 세우는 데 조력하며 오래도록 교회들이 이 나라를 깨우고 세우는 빛이며 소금이기를 소원하였다. 교회를 성스러운 곳으로, 목사를 성직자로 경외하고 존중하였었다. 월급쟁이인가? 성직자인가? 사실대로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따라 먼저 답을 한 후에 세금 문제를 말하여야 한다. 이나라의 어둠과 질곡을 허물던 교회와 성직자와 신도들의 빛과 소금된 삶의 헌신이 요즘은 그 밝은 머리로 세상보다 더욱 이재에 밝고 부동산 투기에 앞장서며 주일예배 마치고 식당에, 휴게실에 모이기만 하면 무슨 주식, 어디어디 부동산, 어떤 어떤 옷 얘기들만 하는 것을 세상사람들이 다 듣게 되었다. 식당에 모여 서로 목사님, 목사님 하며 어디가 더 오를 것 같고 어디는 평당 얼마 얘기하는 것들을 세상사람들이 다 듣는다. 성직자와 신도들이 아니라 교회 경영인들이며 친목동호회원들이다. 세상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다 보고 안다. 세상에 비치는 교회는 더이상 성스럽거나 신비함이 있는 곳이 아니며 더더욱 가난하거나 청렴한 곳도 아니다. 너도나도 간판처럼 내세워 자랑하는 유능한 사업 수완가들 목사가 성공한 교회들은 어느 부자들의 것보다 더 화려한 건물과 최신 시설들과 재력이 넘치는 곳이다. 교회의 목사들은 자신들의 말대로 성직자도 아니며 단지 교사로서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월급쟁이 경영자로서 고급 근로자일 뿐이다. 돌이키기 힘든 사회적 상황에 이르렀음을 인정하고 성직자이거나 아니거나 예수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시비에 걸려들지 말고 차라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일로 교회를 다시 살리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유대교의 유전에는 강하게 질타하시며 그들의 돌팔매질은 피하신 예수께서 공권력 빌라도에게는 목숨을 피하지 않으시며 세상의 공법을 존중하여 다투지 않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길로 알려주신 길이다.
86 no image 창조 관점에서 본 사도 바울의 예정과 선택
장창수
2866 2013-09-04
창세기 묵상(63) ? 창조 관점에서 본 사도 바울의 예정과 선택 사도 바울은 성부 하나님의 선택(엡1:4-5절), 성자 하나님의 구속(7-11절)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침(13-14절)을 받은 신자가 신령한 복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고 소개한다(3절). 그리고 이런 복을 준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된다(6절). 바울은 성삼위 하나님의 개별적 사역을 절대로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성삼위 하나님은 사역 방법에서 각각 다르지만 사역의 목적에서 언제나 하나이다. 그러므로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본체론적 삼위일체론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역으로 후자는 시간 속에서 반드시 전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결국 창세 전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은 창세 후 아들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에 의해 성취내지 완성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아들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이 모두 성부 하나님의 작정 또는 경륜에 따를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렇다면 아들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 못지 않게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도 신학적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구속과 인침에 치우쳐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절) 헬라어 문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 행위는 하나님의 예정 행위 다음이다. 선택은 이미 구체적 행위로 당연히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보다 앞서는 예정이란 행위는 첫째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른 행위이며, 둘째 그 목적은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함이며 그리고 셋째 양자(養子) 행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예정은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드시 역사상 성취내지 완성될 것이다. 양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신의 가정을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가정이 점점 더 커진다면 결국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 가장인 하나님 아버지가 왕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 이것이 바로 예정의 감추어진 목적이다. 기독론과 구원론의 관점에서 설명된 예정론은 사실상 경륜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 나라를 목표한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선택 행위 덕분에 보다 더 구체화될 것이다. 선택은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둘째 선택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함이며 그리고 셋째 선택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아버지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될 것이며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예정의 목적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달성될 것이란 사실과 잘 대조된다. 분명한 가르침은 아버지의 사랑이 선택을 반드시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아들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사랑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들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도 아버지의 사랑에 근거한 결과이다. 달리 말해 아버지의 사랑이 이 둘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아들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은 아버지의 예정과 선택을 역사적으로 성취시킨다. 결국 아들과 성령의 사역도 종국적으론 하나님의 가정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목표한다. 그렇다면 모든 기독교 신학은 항상 하나님 나라에 최종적 목표를 두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협력해야 한다. 성삼위 하나님의 개별적 사역이 항상 하나님 나라를 겨냥하는 것과 마찬 가지다. 창세로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이런 경륜은 하나님의 창조 기사(창1-2장)를 통해 성경에서 제일 처음 밝혀진다.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 자체라면 인류는 그리스도의 형제들로 지음을 받았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이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것을 명했다(창1:26-28절). 이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질수록 하나님의 가정 즉 하나님의 나라가 그만큼 이 세상에서 확장될 것이다. 창조 기사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목적대로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하길 원했다고 증거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하나님 나라의 영역도 이 세상에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실패하자 하나님 아버지에게 아들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은 개별적이지만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마찬 가지로 기독교 신학들 ?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과 실천신학 - 은 영역에서 서로 다르지만 공동의 목표를 항상 의식하며 이의 달성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때로는 경계선을 넘나들어야 한다. 이 때 신학 연구에서 시너지가 생긴다. 자기 영역만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 때 신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성경을 좀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해석할 수 있고 그 덕분에 기독교 교리는 이원론적 성격에서 탈피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부분이 아니라 몸이나 가정처럼 유기체로서 ‘부분들의 합’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도 통섭적 연구 방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창조 기사를 통해 잘 설명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성경의 두 기둥인 창조와 구원은 공동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늘 의식한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할 때 이를 무시한다면 창조와 구원도 방향과 목표를 잃으며 기독교 신학은 금세에 묶여버린 반신불수의 신학이 될 것이다.
85 no image 가나안과 하나님 나라
장창수
2642 2013-09-01
창세기 묵상(57) ? 가나안과 하나님 나라 홍수 심판 후 인류는 아담의 후손에서 노아의 후손으로 바뀌었다. 아담의 불순종(창3장)과 그의 후손의 불순종(창6장)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아담 대신 노아를 인류의 대표자로 다시 세워 인류 역사를 새롭게 출발시켰다. 창주 후 아담을 축복한 것처럼(창1:28절) 홍수 후 하나님은 노아를 다시 축복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절) 새로운 인류는 동방으로 이동 중 시날 평지를 만나 그곳에 정착했다. 그러나 곧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창11:2-4절). 하나님은 앞으로도 인류가 이런 일을 계속 시도할 것을 알고 언어를 흩어 이들을 강제로 세계 곳곳에 흩어지도록 징계했다(6-7절). 그리고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내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조치했다(창12:1-3절).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본 아브람의 소명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큰 의미를 갖는다. 새로운 인류는 흩어져 살기보다 한 곳에 모여 자기 나라 즉 인간 나라를 세워 구원주이며 창조주인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했다(창11:4절).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피조물 인류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었다(창1:26-28절). 하나님은 창조 목적을 후퇴시킬 수 없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유가 여기 있다. 그를 대표자로 세우고 그 후손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건설 장소는 바로 가나안이 될 것이다(창12:1-3절). 하나님은 이런 원대한 목적과 계획 아래 아브람을 선택한 후 불렀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고대 바벨론 제국의 인간 통치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가나안에 왔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여전히 손이 없었다. 이에 불안해 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계시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절)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준 약속을 다시 언급하며 믿고 행할 것을 늘 요구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또 다시 믿었다(6절). 하나님은 언약식으로 이 약속을 확인시켜 주었고(8-11절) 그의 꿈에 나타나 기업의 상속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절) 이 계시에 의하면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 전 그 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간 살면서 고통을 당한 후 비로소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나안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베풀 구속의 은총 위에 세워질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속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통치가 가나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런 목적과 계획이 모세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15:13절)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15:17절) 그렇다면 성경은 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복락의 땅(출3:8, 17절)으로 소개하는가? 바로 이런 표현 때문에 기독교는 가나안을 애굽에서 출발한 순례자 길의 최종 목적지로 소개했고 설명했다. 그곳에 도달한 것은 소망의 성취내지 완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브람의 소명과 모세의 사명은 가나안이란 최종적 안식의 장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 그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시켜 나가야 할 전진기지 역할을 할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말씀이 이를 증언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절)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결국 망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400년 계속된 중간기를 지나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으로 출생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사명을 성취내지 완성시켜야 했다. 그러나 아들이 성취시킬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과 다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가나안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묶였다. 그러나 아들이 세울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들어가는 곳 어디에서나 세워지고 그곳을 중심으로 전세계로 계속 확장되어 나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구원은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을 목적한 하나님의 부름이다. 구원론과 신국론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서로 갖는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시적 또는 임시적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교회론과 목회학의 존재 목적도 바로 하나님 나라에 있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경에서 비유된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상식적으로 몸은 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목적한 활동을 위해 몸이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한 활동 ? 이것이 바로 교회와 목회의 존재 목적이며 동시에 존재 이유이다. 그럼 교회와 목회가 그 자체만을 목적한 활동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와 목회는 갈 방향과 목표를 잃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비만이란 병에 걸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종 질병들에 고통을 당하며 스스로 무너진다. 중세 유럽 교회가 이를 잘 증명하며 오늘날 한국 교회가 또한 잘 증언한다. 구원론, 교회론과 목회학은 신국론을 중심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아니 조직신학 전체가 재구성 또는 재편성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은 교회 자체가 아닌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 교회와 목회의 타락과 부패를 조금이라도 더 방지할 수 있다. 당연히 목회자의 타락도 예방될 수 있다. 목회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목회는 하나님의 영광은 극대화시키는 훌륭한 방법이 될 것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89427735
84 no image 믿음이 없는 세대여!
장창수
2964 2013-08-28
사복음서 묵상(67) ? 믿음이 없는 세대여! 변화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막9:14절).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무슨 일인가 물었다. 이 때 간질병 환자의 아버지가 나서서 설명했다(17, 20절). 귀신 들인 아들을 산 밑에 남아 있는 9명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축사를 요청했지만 능히 못했다고 그가 말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9절) 예수님은 누구를 보고 한탄했나? 세대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제자들만 가리키지 않았다. 간질병 환자의 아버지, 서기관들과 제자들 그리고 함께 한 무리를 가리키며 언급했다. 예수님이 산행 한 것을 안 서기관들은 이 틈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설득하여 산 밑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간질병 환자를 데려왔을 것이다. 아니면 서기관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산 아래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간질병 아들을 데리오 온 것을 우연히 보았다. 이 때 제자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를 이용하여 서기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비웃음으로 결국 이들의 스승 예수님을 조롱했을 것이다. 서기관들이 제자들과 논쟁한 이유였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12 제제들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스승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정확하게 고백했다(마16:1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귀신을 내쫓을 수 없었다. 이를 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를 보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했다. 여기 믿음은 물론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정확한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왜 제자들은 축사할 수 없었는가? 예전 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병자를 고치며 축사도 한 경험을 이미 가졌다(마10:1, 눅10:17-20절). 그런데 갑자기 왜 축사 능력이 이들에게서 사라졌는가? 분명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축사는 불가능했다. 이것은 역설이며 모순이었다. 이를 안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왜 그런가? 신앙고백은 정확했지만 믿음의 동기가 잘못되었다. 곧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 출세할 헛된 야망과 욕망에 제자들의 마음은 한껏 부풀러 있었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에 의해 믿음이 없는 세대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놀랍다. 잘못된 동기로도 얼마든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은 역설적이며 가히 충격적이다. 지상 교회는 입술의 신앙고백만 듣지만 하나님은 신앙 고백의 동기를 살핀다. 이 점에서 제자들은 크게 잘못되었다. 불신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조만간 제자들은 승천할 예수님을 대신하여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신앙의 동기는 바로 잡혀야 했다. 하나님이 축사의 능력을 이들에게 주지 않음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를 지적함으로 제자들을 지도하려 했다. 믿음이 없다는 점에서 서기관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도 마찬 가지였다. 그 동안 이들은 3년 넘게 예수님을 따르며 그가 행하는 이적과 표적을 수없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 서기관도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당시 누리는 종교적 영광과 부귀영화를 서기관도 몹시 사랑했다. 이를 예수님 때문에 빼앗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서기관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다. 하나님도 그렇게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게 믿음이 없음도 하나님의 심판 결과이다. 구약의 잔재인 유대 나라는 앞으로 전세계로 퍼질 아들의 복음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 잔재는 제거되어야 한다. 이 심판을 위해 하나님은 때가 되기까지 이들을 영적 어둠에 가두어 두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작정을 알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지칭함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선언했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유대인은 전세계로 흩어졌다. 오늘 우리를 위한 교훈은 무엇인가? 입술의 신앙 고백이 아무리 정확해도 신앙의 동기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 이런 신앙고백은 불신앙으로 취급된다. 바른 동기에 근거를 둔 신앙고백만이 예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교회는 신앙 고백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의 동기가 늘 바르도록 지도하고 가르쳐야 한다. 신앙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만이 교회 내의 가라지 수를 줄여 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신앙의 바른 동기는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만 아니라 고난의 종으로 고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즉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때 가능하다 (마16:23절). 세상의 일시적 영광과 영화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라! 그리고 이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한 고난의 과정에 기꺼이 동참하리란 결단을 늘 가져라!(마16:24-25절) 만약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예수님 당시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과 사두개인처럼 저주받을 것이다. 복음으로 먹고 살면서 이로 인해 오는 영광, 명예, 칭찬, 성공과 부귀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며 즐기려 한다면 이것은 신성모독이며 배역이다. 목회자들은 이런 시험에 늘 노출된다. 복음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코람데오’라는 ‘신전의식’을 늘 가지지 않는다면 멸망케 하는 유혹에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무리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들으면서도 오병이어의 기적, 치유와 축사 등등이 너무나 좋았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른 이유였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다. 예수님의 복음은 풍성한 데 내용이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4대 성인 중 한 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삶의 지혜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는 현자이며 성공과 반영을 받기 위한 기원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사회 복음이 주장하듯이 예수님은 경제나 정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정치적 메시아로 해석된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렇게 한탄한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창1:26-28절)에 따라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 그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천국 복음을 외치고 가르친 이유였다. 물론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는 말씀과 성령의 통치에 의해 인류 사회에 지금 이곳에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다는 예수님의 책망은 성육신 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경륜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경륜은 구약 시대를 통해 장기간 이미 예언되었고 약속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신학적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예수님을 폭넓게 신앙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과 구원의 개념을 개인과 현재의 영역에만 한하지 말라! http://blog.naver.com/rassvet/40196036893
83 no image 성경과 신학2 파일
장창수
2551 2013-08-24
신학원 졸업 후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의 무용을 주장한다. 그리고 목회 프로그램을 새롭게 배우기 위해 세미나에 열심히 참석한다. 분명히 신학은 목회 현장에서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데 왜 신학이 목회 현장에서 무시되는가? 신학 자체에 문제와 답이 있다. 신학은 영원히 변치 않는 보편적 진리를 가르친다. 신학은 원리만 전달한다. 그러나 교회의 목회 현장은 다양하다. 신학의 보편적 가르침에서 필요한 답을 즉각적으로 찾을 수 없다. 원인은 무엇인가? 신학은 시대의 변화에 무관하게 늘 한 가지 처방만 내려준다. 그러나 목회 현장은 늘 변한다. 의사들도 배운 대로 같은 병이라면 늘 동일한 처방을 한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다 체질이 다르다. 체질에 따라 약 처방을 달리 해야 한다. 아스피린이 맞는 환자가 있는 반면 안 맞는 환자도 있다. 그리고 암 수술 후 대부분의 한자들이 항암제 때문에 죽는다. 이들은 간 기능이 약한 환자들이다. 그러나 간 기능이 강한 사람은 이겨내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동일한 병에 대한 처방도 체질에 따라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의사들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체질을 소유한다고 보며 늘 같은 처방을 한다. 그 처방으로 사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단명 하는 환자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체질을 가졌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이다. 물리학에서 혼돈 이론(theory of chaos)이 나온 것도 물리학 법칙이 모든 상황에 다 맞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의 각론은 시간과 장소를 무시한 체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 즉 언제나 통하는 진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 당시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에 따라 영원한 진리를 다양하게 그리고 달리 설명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적용 가능한 진리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과 성경 사이 차이이다. 신학은 특별히 조직신학은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다양한 설명을 못한다. 반면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진리를 달리 전한다. 성경 진리가 신앙 삶에 적용 가능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을 닮은 주제설교나 제목 설교는 성경적이지 못하다. 조직신학은 기독론을 본체론적 관점에서 그러나 성경은 경륜적 관점에서 기독론을 기록한다. 본체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는 성육신 전후나 지상 삶과 공생애 중에도 그리고 부활 전후에도 늘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이다. 그러나 경륜적 관점에서 본다면 부활 전과 후 아들 신분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발견된다. 부활 전 예수님은 그저 상속 자격을 가진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이었다면 부활 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상속한 왕으로서의 영광스런 아들이다. 영광 면에서 이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 만큼 난다. 흔히 기독교 신학은 본체론적 관점에서 본 기독론을 강조한다. 이 결과 기독론은 영광의 신학으로 치우치며 고난의 신학이 무시된다. 조직신학의 교회론도 신학적 정의와 규명에만 치우쳐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본 교회론이 약하다. 전자에선 지상 교회의 영광스런 면만 강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임시적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 기사는 인간 창조가 하나님 나라 또는 통치의 실현에 있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창1:26-28절). 그리고 아들의 구속도 죄인을 구속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이를 잘 안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요3:5절). 이렇게 창조와 구속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건설 또는 하나님의 통치 실현에 목적을 둔다. 지상 교회는 이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일시적 그리고 임시적 기구이다.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교회론을 이해한다면 지상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크고 화려해야 한다. 결국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경륜적 관점에서 본 교회론은 교회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함을 말하며 교회의 외적 성장보다 내적 성장을 기하게 한다. 중요한 주제들을 논리적으로 잘 규명하고 정의를 내려주는 신학을 충분히 배우라!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신학이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알아내라! 이 때 신앙 삶에 적용 가능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칼빈이 주장한 역사문법적 성경 해석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신학원에서 신학을 배운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신학들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서 역사와 문화의 안경을 통해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되는지를 알아내는 훈련을 별도로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은 목회 현장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적용을 소홀히 하는 원리만 주장함으로 설교자는 원리주의적 율법주의자가 된다. 성경이 역사와 문화를 배경하여 다양하게 진리를 전한다면 그 방법대로 성경을 연구하라! 이를 위해 성경이 70% 이상 이야기 전달 방식으로 기록되었음을 이해하라! 그리고 이야기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가르침을 준다는 사실도 인식하라! 그 만큼 성경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성경의 이런 풍부함을 맛볼 때 비로소 적용 가능한 설교가 가능하다. ?참조: http://blog.naver.com/rassvet/40191272887 성경과 신학(1)
82 no image 양적 성장은 과연 하나님 은혜의 증거인가? 파일
장창수
2672 2013-08-21
양적 성장론은 교회의 양적 성장이 하나님 은혜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다. 예수님 당시 따르는 무리는 아주 컸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를 이용하여 무언가 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며 병든 자들을 고치는 일에만 몰두했다.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였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한다면 하나님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유일한 신임을 이방 나라 앞에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싫어하는 왕이 통치할 때도 그를 축복해야 했다. 그 전형적 인물은 바로 사울 왕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가나안 땅에 세워질 이스라엘의 왕이 유다 지파에서 나올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다(창49:8-12절). 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기다리지 못하고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다(삼상8:6절). 오랜 동안 사사 시대라는 혼돈의 시기를 거친 이스라엘이 지친 나머지 이방 나라와 같은 왕권 제도를 요구했다. 이 요구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아닌 인간의 뜻에 따라 세워진 통치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경고했다.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삼상12:20-21절) 처음 사울은 참으로 겸손했다(삼상10:16, 10:22, 11:12-13절). 그러나 통치하는 과정에서 만난 다급한 위기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사울이 직접 번제물을 드렸다. 이를 안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13:13-14절) 그러나 이 이후 사울은 나가는 전투마다 승리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삼상14:47-48절) 왜 그런가? 사울이 불성실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그를 지지해 주어야 했다. 여기서 우린 사울이 얻는 모든 승전들이 하나님이 그를 전적으로 지지한 결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조치 결과임을 본다. 물론 사울은 승전할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며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확신이었다. 신앙의 진실성이 결여된 거짓 확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명하여 아말렉을 진멸하란 명령을 주었다. 이 명령을 받았을 때 사울 왕이 기뻐할 수 있다. 아직도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하나님의 시험으로 그를 멸망으로 인도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은 승리하도록 그를 도왔다. 그러나 이 승리는 그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이 되었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진멸시켰다. 그러나 나중 하나님의 번제물로 드린다는 핑계 아래 짐승들 중 좋은 것들은 남겼다. 실상은 자신의 재물 욕심을 채우고(삼상15:18-19절) 백성의 인기를 얻어 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24절). 사울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과 재물을 의존했다. 예전 그를 버린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 그를 완전히 버렸다. 사무엘의 말이 증거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절) 하나님의 일하는 방법을 다시 보자! 목회자가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양적 성장을 줄 수 있다. 이를 목회자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목회자는 양적 성장을 목회 성공의 증거물로 이용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은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의 사역을 축복하여 승리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불의한 목회자를 멸망으로 이끄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양적 성장을 하나님의 은혜로 착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를 전율케 하는 성경의 진리를 지금 묵상하고 있다. 위의 사실이 성경이 주장하는 진리라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거짓을 참인 양 착각하며 살아왔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많은 목회자들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사울 왕 같은 위선적 존재들이 아닌가? 하나님이 준 축복을 자기 성공의 증거로 삼고 이것은 영원히 누릴 양 하나님의 말씀을 차 던져 버린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절망적일 정도로… 양적 성장이나 경제적 번영을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 삼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할 목적으로 얼마든지 양적 성장이나 물질적 형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적은 사울 왕 같은 존재를 탈락시키고 다윗 같은 진실한 신자를 찾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임을 잊지 말라! 사울 왕의 퇴진과 다윗의 등장으로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세워진 보이는 하나님 나라로써 최절정을 맞았다. 하나님의 이런 구속사는 오늘날에도 계속 진행되며 반복된다. 오늘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진리를 붙잡고 인내하며 기다리자! 새벽은 반드시 오리라! 그 때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더 일어설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절망할 것은 없다. 재림이 있기에… http://blog.naver.com/rassvet/40195633802
81 no image 성경은 부분이 아닌 부분들의 합으로 말한다. 파일
장창수
2671 2013-08-14
조직신학(systematical theology)은 중세로부터 근대까지 기독교 신학을 지배한다. 성경을 알기 위해 주제별 연구가 필요하다.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늘 규명해야 한다. 이 점에서 조직신학은 기독교 신학을 위해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계도 보인다. 조직신학은 전체 숲이 아닌 숲을 구성하는 풀과 나무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연역적(演繹的: deductive)으로 연구한다. 그리고 시간과 역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변함없는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ally)으로 연구한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즉 주제별로 이해하도록 돕지만 숲을 보도록 돕진 못한다. 그리고 영원한 진리를 배우지만 어떻게 진리대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적용 문제가 늘 남는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려고 성경신학이 근세에 출현했다. 역사와 문화를 감안하여 즉 귀납적(歸納的: inductive)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역시 주제별 연구이다. 문제는 성경이 부분적 지식을 전달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들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증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부분이 아닌 부분들의 합을 통해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시계의 부품들은 개별적으로 자체의 의미와 기능을 갖지만 시계를 구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면 시계의 부품들은 존재와 기능의 의미를 잃는다. 신학적 주제들도 마찬 가지다. 이들은 시계의 부품들과 같다. 그러나 시계와 같은 완성품인 성경은 역사와 문화의 성격과 배경에 따라 다양한 주제들이 문장 안에서 문법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얽히면서 중요한 가르침인 제 1차적 가르침 또는 교훈을 전달한다. 이 때 제 1차적 가르침이나 교훈은 어느 특정 부품 즉 특정한 신학적 주제만 말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이나 교훈은 통섭적이며 융합적이다. 이런 교훈들은 부분이 아닌 부분들의 합(合)에서 나온다. 시계의 부품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존재의 목적, 기능과 의미를 갖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는 특정한 주제의 신학적 의미라는 한계와 영역 안에만 머물면 안 된다. 이 주제들이 특정한 역사와 문화의 배경 아래 본문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그 결과 어떤 통섭적 가르침 즉 일차적 가르침을 주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성경 해석자와 설교자의 할 일이다. 이 때문에 조직신학의 각론들은 제 2차적 가르침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르침은 성경이라는 시계를 구성하는 지극히 작은 부품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와 교회는 지금까지 제 1차적 가르침들보다 제 2차적 가르침에만 몰두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부분적 지식 전달에는 성공하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역사나 신앙 삶 그리고 신앙 인격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일에는 실패한다. 역사, 삶이나 인격은 부분이 아닌 부분들의 합이라는 유기체적 성격을 띤다. 당연히 성경은 부분이 아닌 부분들의 합이라는 형식을 취해 기록되어야 한다. 성경이 story-telling 이라는 형식으로 기록된 중요한 이유이다. 성경의 story-telling 이라는 기록 방식의 장점은 시시각각 변하는 삶 자체를 이용하여 가르침들을 다양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들은 읽는 독자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반복하듯이 이 가르침은 특정한 주제만 말하지 않는다. 유기체적 성격을 가진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그런 통섭적 또는 융합적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이나 설교도 성경의 기록 방식에 따라 해야 한다. 부분적인 신학적 지식의 전달이 아닌 삶과 인격에 영향을 주는 그런 통섭적 또는 통전적 가르침이어야 한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삶과 인격에 감화를 준다는 명목 아래 세상의 온갖 예화들을 설교의 인용 자료들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은 구속사를 위한 가르침들이라면 세상 예화들은 새속사를 위한 초등학문 또는 상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속사의 특정 역사와 문화와 긴밀히 연결된다면 성경 본문 자체는 제 1차적 가르침을 잘 전달하도록 돕는 훌륭한 예화가 된다. 성경의 기록 방법을 무시하지 말라! 물론 사도들의 서신들은 해설적 성격이 강함으로 지극히 논리적이다. 그러나 이들도 특정 주제만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처한 그리고 수신 교회가 처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수많은 신학적 주제들이 서로 얽히며 그에 맞는 제 1차적 가르침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 방법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다면 흩어진 구슬들 같은 진리들을 엮어 목거리와 같은 아름다운 진리의 장식물을 만들 수 있다. 이 때 신자들은 어느 한 진리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에 비추어 부분을 볼 줄 아는 균형 감각을 갖는다. 이런 균형만 사이비와 이단을 기독교로부터 내쫓을 수 있다. 성경의 제 1차적 가르침들은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의 합에서 나온다. 주제별 가르침 즉 2차적 가르침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러나 목회자 자신이 제 1차적 가르침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사이비와 이단은 기독교 내에 항상 들끓을 것이다. 그리고 한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성장론이나 번영신학 같은 가르침들이 계속 유행할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기독교가 목회자의 게으름으로 제 1차적 가르침들을 알아내지 못한 불행한 결과이다. 그럼 제 1차적 가르침들은 무엇을 중요한 내용으로 삼는가? 두 가지 답이 있다. 이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히 연결된다는 것이다(눅24:27절).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입증된다(엡1:4절). 하나님은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늘 자신의 사랑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일용할 양식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 이 사랑을 매일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만 크고 마음은 메마른 신자가 된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교만케 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된다. 이들은 매일 구약을 묵상하면서도 예수님을 차 던져 버리는 위선자들이었다. 이 모두 성경 묵상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먹지 못한 결과이다. http://blog.naver.com/rassvet/40195088879
80 no image 여성목사 안수를 부추기는 정부에 협력하는 교단인들
박인철
3356 2013-08-07
? 2013 / 7/19일 박대통령은 교계 주요지도자 방지일목사, 김장환목사 외에도 합신교단의 증경총회장 김명혁목사(강변교회원로목사) 권태진목사 등을 초청하여 오찬을 나누며 국민대통합을 부탁하였다. - 기독교개혁신보 2013.8.10일자 보도된 이들의 이름은 다 교단 안에서 교단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것을 공급받을 때에는 한결 같이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이제는 모두 한결 같이 WCC에 앞장서며 자기가 몸담은 교단을 보수와는 관계 없는 옹졸한 교단으로 묘사하며 공개적이며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또 이모저모로 WCC에 협력하며 가면을 벗은 자기의 본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대통령이 부탁하기 전에 이미 국민 대통합에 앞장서기위하여 불종단의 법회에도 기꺼이 참여하며 부처가 예수보다 더 큰 사랑과 자비를 가진 구원자로 찬양하는 말도 서슴치 않는, 자신이 종교다원주의자임을 당당히 드러내는 지도자들이다. 교단의 총회장, 신학교의 총장만 하고 나가면 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어 대담하게 공표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다! 박대통령이 이들을 접견하고 여러 부탁의 말씀을 한 후에 정부는, 내년부터 군종장교에 일정 수의 여성을 배치할 것임을 공표하였다. 남자 대통령이었고 합동측의 누군가 있었다면 같은 남자인 대통령에게 본능적으로 목에 힘 좀주며 '여자 군목은 안된다' 고 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남자보다는 섬세, 세심하고 그 감정도 예민하여 창조주이신 주인의 말씀, 명령 복종의 질서보다는 자기 감정에 우선 반응하며 순응한다. 이로써 남편과 자식들을 살리는 살림을 하는 능력이 주어졌으며 뱃속의 태아를 예민하게 키우며 출산 후에도 남자는 생각지도 못할 세심, 예민함으로 갓난애를 돌보며 젖을 먹이며 키운다. 어떤 과일이나 먹을 것을 보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움을 금방 알고 남편(가족)을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잘 아는 사탄도 남자를 피하여 여자를 꾀이고 성공한다. 그리하여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여인의 후손과 원수가 되리라 하신다.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드시되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자기 감정, 감성이 앞서는 여자보다 명령 복종적인 질서의 공개념을 강하게 하신 남자에게 에덴동산의 질서를 명하시고 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먼저, 영원히 변치 않을 공법의 질서로 세상을 만드셨다. 그리고 다음, 그 지으신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돌보신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이 창조의 질서로 명하신다. 3위 하나님이 같이 사람을 만드셨으되 말씀하시는 이는 아버지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복음으로 전하신 이는 아들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그 말씀을 받들어 영으로 역사 하신다. 각기의 역할이다. 하나님나라의 이 질서는 이땅의 교회를 3직이 같이 이루어가지마는 헌법으로 강도는 목사에게만 허락함과 같다. (질서의 공개념이 약한 사람에게 목사 면허를 주면 안된다. 사탄의 꾀에 쉽게 넘어 가서 결국은 敎會와 敎團을 망하게 한다) 남자인 아담에게 하나님의 명을 여자에게 전하게 하시고 예배의 집례(제사장)로 성도를 하나님께 인도하게 하셨다. 세상의 온갖 사탄의 것들과 희희락락하며 사탄이 여자를 꾀인 말로 교회를 꾀이며 모든 것의 용납과 혼합, 통합을 주장하는 자들은 간사스러운 뱀과 통간한 여자의 여전히 더러운 후손들로 결국은 멸망할 자들이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또 교단의 지도자 노릇하며 지도자 소리 듣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라면 여성목사안수, 혼합, 통합하자는 말을 하면 안된다. 만일 그렇게 말하며 부추기며 앞장서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교단분열의 씨앗을 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조각내는 자이다. 그 근본이 파당의 형태로 여러 전적을 남겼으며 그나마 그 정체성마저도 포기하고 사업장이 된 交團과의 통합交團 획책에 사탄의 자식 된 자들의 구애에 연애하며 교단을 끌고 들어가는 자들에게 휘둘리며 교단의 위임 운운하면 이는 분명 교단분열책동이 될 것이다. 자신이 곧 교단이며 법으로 아는 자들은 결국 망한다. 그런 이들에게 교단이 이끌리면 교단도 망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交회운영하는 가짜 목사, 거짓선지자들! 이제는 정말로 저들을 분별하고 힘을 합하여 분리시키든지, 분립하든지 결단해야 할 때가 다가 온 것 같다. 안산홍만 '하나님의교회' 이름을 팔아 자기 교회를 하는 자들이 아니다. 요즘은 '전능하신하나님교회' 도 있다. 이들과 저들, 그리고 그들이 다 같은 자들이 아닌가 싶다.
79 no image 동산위의 저 소나무
박종훈
2940 2013-07-10
동산위의 저 소나무 활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중앙의 산등성에는 칡덩굴과 잡풀로 이루어진 동산이 있다. 그 중간에 60년은 넘어 보이는 한국 송 몇 그루가 서있다. 이곳은 원래 울창한 소나무로 땔감을 사용하던 시절에 마을의 주요 나뭇감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이십 년 전에 아래 밭을 경작하던 농부의 실수로 산불이 나는 바람에 수십 년 된 소나무들이 불타버렸다. 후에 소나무를 식목일 행사로 심었지만 사후 관리가 안 되어 칡덩굴을 비롯하여 다양한 잡풀만 무성한 곳으로 방치됐다가 5년전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이제는 무궁화동산으로 변모되었다. 무궁화를 심기 위해 작업을 하는 중 ‘복령’이 나온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래 된 나무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동산 중앙으로 마을 산책길이 지나가며 이중 가장 반듯한 소나무 밑으로 길을 만들고 보니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價値)를 발견하였다. 소나무 그늘을 의지하여 긴 의자를 설치하고 앉아서 고즈넉이 보이는 잔잔한 호수와 동네의 풍경은 온갖 시름을 잊게끔 한다.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풍경과 아울러 골목길에서 사람 사는 소리도 예상보다 크게 들려온다. 그동안 이 소나무는 마을의 소리와 삶의 모습을 말없이 보고 들었으리라 이 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산상설교를 확성기 없이 가능한 것도 지형적인 영향이라고 본다면 아마 이곳 무궁화동산과 같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소나무를 멀리서 보면 한국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편지를 묻는 소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이 소나무는 동물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주어진 현실에서 견디고 받아주고 공존하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혹독한 불 시험에도 용케도 살아남았고 자신을 의지하고 감고 올라오는 칡덩굴도 그대로 받아 주었고 가시나무들도 자리 잡고 뻗어와도 참고 견딘 것이다. 자세히 위를 쳐다보니 까치가 집을 지은 빈집도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푸른 잎을 유지하며 더디게 성장하는 변함없는 소나무를 보면서 나의 목회가 이 소나무처럼 닮아가고 있으며 또 닮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성남에서 이곳 궁산에 내려온 지 만 이십년이 지났다. 그 동안 주위 여러 목회자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떠난 것을 보았고 또 주위에 젊은 지인들도 도시로 가는 것을 아쉬워만 했었다. 마을 분들도 언제 발령(?) 나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받은 사명이 있어 지금까지 방황하고 곁눈질하기 보다는, 현실의 삶에서 깊이 뿌리 내리는 일에 전념하며 살아온 것 같다. 모든 삶이 그렇듯이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같이 내려온 아내가 먼저 하늘나라로 갔고 아버지를 비롯하여 여러 교인들과 이웃 주민들이 이 세상을 떠나간 것을 지켜보았다. 자녀들도 장성하여 집을 떠나 이제는 각 자의 길을 가고 있다. 해마다 새로운 신자도 늘어나지만 지나고 보면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초고령화되는 농촌에서 그들의 그늘이 되고 힘겨운 인생길에 쉼을 얻는 처소가 되었으면 한다. 그동안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인내’라고 할 수 있다. 늘 궁핍한 삶도 참아야하고 기독교문화를 이해 못하는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참고 더디게 자리 잡는 교인들의 신앙성장 과정도 오래 참아야 한다. 교회당을 손수 지으면서 재료와 건축비용이 제 때 공급치 않아 이 또 한 참고 기다리며 하다 보니 15년 만에 완공이 되었고, 부업으로 하는 농사일도 자연농법으로 하니 이 일도 오래참고 땅심을 기르는 인내가 필요했다. 인내에 대한 다양한 말이 있지만 ‘인내는 희망을 연상(聯想)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아직도 참고 견디는 많은 일들, 아니 삶 자체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항상 마지막은 행복이 올 줄 확신하기에 오늘도 이 길을 가리라 다짐한다. 동산위의 저 소나무가 누구도 관심 없는 나무였지만 이제는 필자가즐겨찾고 산책길을 찾는 이들에게 소중한 쉼터를 제공하는 장소가 되었다. 앞으로 우거진 무궁화나무를 보려고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소나무를 생각하며 나의 삶도 소나무처럼 같이 되고픈 마음으로 나의 주인 되신 그 분께 기도 한다. 활뫼지기 박종훈
78 노암교회를 소개합니다 파일
이창주1
3698 2013-06-17
노암교회를 소개합니다. 충청노회 노회장 이창주 목사 충청노회 산하의 농촌에 있는 한 작은 교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노암교회는 충북 증평군 도안면 인삼로 633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무현 목사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2000년 7월 13일 허름한 가정집을 얻어 교회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오직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지역 복음화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얼마 되지 않고, 인적인 자원, 물질도 늘 부족한 상태이지만 사명감 하나로 버티며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동안 노암교회는 지역 복음화를 위해 바나바 복음 집회를 열었으며, 지구촌교회를 비롯한 중동교회, 신석교회, 남서울은혜교회, 예수사랑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해마다 청년 여름아웃리치 사역을 펼쳤으며, 겨울에는 미용 및 한방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건물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가정집의 옹색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에 전도를 통해 마을 분들이 몇 번 출석하다가는 교회가 지어지면 출석하겠다며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하던 중 2005년 지구촌교회에서 5,000여만원을 헌금하여 예배당부지(노암리 734-1)를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 9. 29일 노암교회 신축을 위해 기공예배를 드렸으나 교회 건축 자금이 없어서 더 이상의 건축 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2009년 미국에서 사시는 김우월 권사님께서 5000불(한화 500만원 헌금), 노암교회 성도들이 600만원을 헌금하여 2009년 11월 노암교회 신축을 위한 기초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건축을 위한 자금의 부족으로 또 다시 오랜 세월을 기다리다가 노암교회 담임 목사인 경무현 목사가 3,500만원, 무명의 성도가 500만원, 그리고 성도들이 300만원을 헌금하여 2013년 3월 12일부터 4월 10일 기간에 걸쳐 철골조및 레미콘 타설 공사를 하여 사진과 같은 모습처럼 건축의 뼈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공사는 지붕과 벽을 마감하고, 내부시설을 마감해야 합니다. 노암교회의 가장 시급한 기도제목은 건축비가 없어서 중단된 예배당건축을 진행해야 할 일입니다. 예배당 부지는 2005년에 구했으나 건축 자금이 부족하여 2013년 현재까지 골조 공사만 하고 또 다시 건축을 위한 하나님의 재정적 도우심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경무현 목사는 ‘빚을 내서 건축을 하게 되면 성도 몇 되지 않는 농촌교회로서 현재도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헌금이 주어지는 대로 조금씩 공사를 진행하다보니 골조를 세우기까지 8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경목사가 처음 노암지역에 왔을 때는 아무도 믿는 사람들이 없었으나 지금은 비록 비좁은 예배당이지만 주일학교 학생들이 나오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노암교회는 그 동안 마을을 위해 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아웃리치사역으로 미용봉사, 의료봉사, 도배봉사, 일손 돕기, 마을잔치를 통해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예배당 부지를 구입할 때만해도 반대하던 마을 사람들이 마음이 녹아서 교회를 향한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오히려 ‘건축은 언제하냐?’며 빨리 건축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노암 1, 2, 3, 4구로 마을이 분산되어 있고, 약 140호의 가구가 있습니다. 농사는 주로 농업으로 인삼, 벼, 고추, 잡곡 등입니다. 이 지역 주민들의 영적상황은 무속종교, 샤마니즘, 유교, 불교 등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의 평균 연령대는 60-80세로서 인구의 90%이상이 노년층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자신도 농촌교회에서 약 13년간 목회를 한 바 있기에 농촌 교회의 사정을 잘 압니다. 농촌교회는 목회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 해도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 생존한 것처럼 그렇게 생존하고 있습니다. 농촌교회와 도시 교회가 서로 상부상조하는 일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도시 교회들이 농촌교회의 건축을 도와주시면, 농촌교회가 견고히 설 뿐 아니라 도시 교회 성도들이 어느 기도원에 갈 필요 없이 잘 지어진 농촌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가면 도시 교회 성도들과 농촌교회 목회자 및 성도들이 함께 세워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부디 노암교회 및 어려운 농어촌 교회들을 위해 많은 기도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계좌번호 : 우체국 300640-01-002268 예금주 :대한예장(합신)노암교회 경무현목사 연락처 : 교회 043-838-7274 휴 010-3427-1091
77 목사 70세 정년제(停年制)를 논(論)함 (30)
성희경
5929 2013-04-16
목사 70세 정년제(停年制)를 논(論)함 Ⅰ.서언 <글을 쓰게 된 동기(動機)> 목사의 70세 정년제(停年制)는 몇 십 년 동안 한국교회가 시행해 온 법(法)이다. 나 또한 별 생각 없이 받아 들였고, 단지 일반 직장인 보다 정년(停年)이 훨씬 길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 보면 정년제에 걸려 이를 피하기 위해 대형교회 일부 목사들이 편법(便法)을 동원하며 목회를 연장(延長)하거나 교단 탈퇴도 불사(不辭)하는 경우를 본다. 또 반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기 은퇴하는 그런 분들도 있다. 그리고 한편 시골 교회 같은 경우 정년제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표(表)하며 쓸쓸히 은퇴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이런 차제(此際)에 정년제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볼 기회(機會)를 가졌다. 다음의 글은 필자의 순수한 개인적 생각이다. 필자와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 분들의 생각을 충분히 존중(尊重)한다. 다만 필자의 글이 여기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足)할 뿐이다. Ⅱ.정년제란? 1.정년제에 대한 여러 장로 교단들의 헌법 조항(憲法條項)들 1)예장(합신)/우리 교단 제2조 교회의 평범한 항존 직원(헌법, p.269.) 5항 교회의 직원의 정년은 70세로 한다. 2)예장(합동) 제2조 교회의 항존직(恒存職)(헌법, p.152.) 3항 항존직의 시무 연한은 만70세로 한다. 3)예장(통합) 제4장 교회의 직원(헌법, p.179.) 제22조 항존직 항존직은 장로, 집사, 권사이며 그 시무는 70세가 되는 해의 연말까지로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우리 교단을 비롯하여 합동측과 통합측 모두 목사의 시무 연한(始務年限)을 만 70세로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교단들도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2.70세 정년제의 의미와 취지 목적(趣旨目的) 1)의미 70세 정년제는 말 그대로 목사의 지교회 시무는 만 70세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0세가 넘으면 임시 목사든 담임 목사든 더 이상 지교회를 맡아 시무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에 목사 정년제 도입을 주창한 임택진 목사는 그의 저서 “장로 교회 정치 해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항존직은 70세가 되면 정년이 된다. 정년이라는 것은 직분은 있으나 시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년은 만 70세가 되는 연말까지로 한다. 정년이 되어도 그 직분은 없어지지 않는다.”(Ibid., p.71.) 어떤 분들은 목사가 만 70세 이상이 되어도 사정에 따라 더 시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잘못 아는 것이다. 헌법에 제정된 정년제는 그런 법이 아니다. 만 70세가 되면 사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더 이상 시무를 할 수 없다고 못 박은 ‘강제 조항’임을 알아야 한다. 2)입법 취지와 목적 일반적으로 교회법을 제정할 때에는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묻고, 그 다음은 교회의 유익이 있는가를 묻는다. 정년제는 성경적 근거를 두고 만든 법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유익(有益) 차원에서 제정한 법이다. 임택진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항존직에 정년을 규정한 것은 시대적 차이와 후배의 양성과 자신의 휴식을 위하고 교회의 보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것이다.”(같은 책, p.71.) 이처럼 정년제란 그 입법 취지와 목적이 목회자에게 휴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교회의 유익을 도모(圖謀)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서 제정(制定)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목사 70세 정년제는 언제부터 시행(施行) 되었나? 장로교회에는 본래 정년제가 없었고, 종신제가 전통적으로 실시되어 왔었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더 이상 시무를 할 수 없게 되면 자연스레 시무 사면을 내고 은퇴(隱退)하였고, 노회는 다음 후임자를 청빙 절차를 밟아 정하여 교회를 이어서 시무토록 했던 것이다. J.A. Hodge 박사가 쓴 “ What is presbyterian law?" 를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인 곽안련 박사가 번역하였는데 원저(原著)와 번역서를 다시 참조하여 박병진(朴炳珍) 목사가 이를 ‘敎會政治問答條例’라는 이름으로 새로 발간하였다. 그 책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위임목사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토록 시무한다. 위임목사가 본교회를 떠나 1년 이상 결근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위임이 해제된다.』(상기서, p.48.) 이상에서 보듯이 장로교회의 목사 시무 전통(傳統)은 특별히 사면해야 할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종신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신제가 정년제로 바뀐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바뀐 것인가?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교회가 이를 빠르게 수용(受容)하기 시작하였다. ‘목사 70세 정년제’를 제일 먼저 도입한 통합측에 대한 신문 기사가 1969년 8월 20일 경향신문에 실렸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1969년 8월 20일자 경향신문) 알려진 대로 한국교회에 정년제를 최초로 도입한 분들은 통합측의 한완석 목사와 임택진 목사이다. 두 분은 이미 작고하였으나 생전에 존경 받던 분들로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정년제를 실천하신 분들이다. 임택진 목사의 경우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조기 은퇴(早期隱退) 하였다. 이 분들이 정년제를 주창하였을 때 한국 교회는 이를 좋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년제의 역사(歷史)는 근 40여년 정도 된다고 볼 수 있다. 4.목사 정년제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현재 한국 교회를 보면 목사의 시무 연한에 대해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개진(開陳)되고 있다. 그 주장들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정년제 찬성파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목사의 시무 연한은 70세면 적당하니 현행(現行) 헌법대로 계속 70세로 하자는 분들이다. 여기에 속한 분들은 대체로 정년제가 폐지(廢止) 되거나 시무 연한이 연장(延長)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목사의 정년은 사회적으로나 목회적, 신체적 상황을 고려할 때 70세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름의 분명한 논리(論理)와 이유(理由)를 가지고 있다. 2)‘임기제’ 주창파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70세 정년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70세 정년제’도 거의 종신제(終身制)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예 ‘70세 정년제’를 없애고 임기제(任期制)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다. 여기에 속한 분들은 ‘70세 정년제’가 교권주의(敎權主義)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분들은 교권주의를 근원적으로 뿌리를 뽑는 길은 ‘임기제’를 실시하는 것이며, 임기가 끝나 교인들로부터 재신임 받지 못한다면 목사는 그 즉시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제도를 현실적(現實的)으로 실시하고 있는 교단은 아직은 없다. 3)‘정년제’ 반대파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정년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대체로 시골교회나 영세한 도시 교회를 시무하는 목회자들이 여기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이 분들은 원로 목사는 고사하고 전혀 은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어떤 분들 중에는 ‘정년제’는 아무리 영성과 지도력이 탁월(卓越)해도 무조건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하니 교회적 손실(損失)이 크다고 말한다. 그래서 반대한다고 한다. 아마도 대형 교회 목회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5.사회적 개념으로서의 일반 정년제 본래 정년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논리(經濟論理)에 의해 고임금(高賃金) 근로자들을 합법적으로 해고(解雇)하는 제도이다. 물론 근로자들에게는 근로 기간 동안은 고용(雇用)이 보장되는 만큼 일방적으로 사용자에게만 유리(有利)한 법이라고 할 수 없다. 정년제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취업규칙(就業規則) 또는 근로계약에서 정한 일정한 연령(年齡)에 도달하면 근로자의 근로 계속의 의사 및 능력 여하에 불구하고 근로계약관계를 종료(終了)시키는 제도 내지 관행(慣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연공서열형(年功序列型) 임금제도하에서 장기근속을 한 연장자는 높은 임금을 받게 되는데, 이들은 일의 능률면에서 고임금에 상응하는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고용주는 고용인의 정년연한(停年年限)을 낮게 책정하여 직원의 고령화에 따른 작업 능률(作業能率)의 저하를 방지하고, 새로 진출하는 젊고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인건비의 절감과 생산능률(生産能率)을 높이기 위하여 정년제를 선호(選好)하게 된다. 종신고용제(終身雇用制) 및 연공서열형(年功序列型) 임금체계를 운영하고 있는 제도에서는 오히려 기업은 임금에 대한 부담(負擔)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기업은 비용부담을 줄이면서 노령화된 노동력을 신규 노동력으로 대체(代替)함으로써 기업경영을 합리화(合理化)하고자 하는 제도가 정년제이다. 정년제는 일종의 최종기한부의 근로 계약제(契約制)이므로, 사용자는 근로자가 기업에 대한 귀속의식(歸屬意識)을 갖게 하고, 근로자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고용을 안정(安定)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일반 직장의 경우 정년(停年)은 우리 목사들처럼 만70세인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60세 미만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우리 목사들을 일반 근로자들처럼 생각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餘地)가 있다고 본다. 분명한 것은 현재 교회 헌법(憲法)의 목사 70세 정년제는 목적(目的)과 취지(趣旨)는 일반 직장의 정년제와는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일반 세속 사회의 제도가 교회에 도입(導入)된 것만은 분명(分明)하다. Ⅲ.한국교회의 상황과 필자의 사유(思惟)의 조각들 1.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상황들 한국교회의 급성장기(急成長期)라 하면 70-80년대라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또 한국 경제의 부흥기(復興期)라고도 할 수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經濟發展)과 걸음을 같이 하며 나란히 성장(成長)하였다. 서울 남산에서 밤에 시내를 내려다보면 온통 붉은 네온싸인 십자가 천지(天地)였다. 다방 숫자보다도 교회 숫자가 많다는 말도 생겨났다. 교회는 여기저기 새로 생겨났으며, 교회가 세워지면 몇 년 안가서 교회는 부흥되고, 새로운 예배당(禮拜堂)이 근사(近似)하게 지어졌다. 또한 교회는 몰려드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로 인해 항상 생기(生氣)가 넘쳤고, 신학교 역시 젊은 목회 지망생(牧會志望生)들로 가득 찼다. 급기야 우리나라 기독 인구의 수는 선교 100여년 만에 1,200만을 육박하였다. 이런 한국 교회의 급성장은 세계 선교 사상 유래(由來)가 없는 일이었다. 세계 교회는 놀랐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크신 축복(祝福)으로 알고, 이는 순교자들의 피 흘린 덕분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였다. 그러나 마냥 갈 줄 알았던 이런 호시절(好時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교 교회의 성장은 주춤거리다가 급기야는 정체(停滯)와 침체(沈滯)의 길을 걷더니 현재는 교인 감소(減少)라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經驗)하고 있다. 지금은 그 원인을 논(論)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여기에 대해서는 언급(言及)하지 않겠다. 다만 이런 상황(狀況)으로 인해 생긴 목회적 현상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겠다. 한국의 대형 교회는 대부분 7-80년대에 생겨났다.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위시(爲始)해서 곽선희 목사의 소망교회 등 대형 교회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모든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교회의 양극화(兩極化)가 점차 심화(深化)되고 있었다. 개척교회나 소형 교회들은 과거처럼 쉽게 성장하지 않았고, 반면 중대형교회들은 초대형교회로 몸집을 불려갔다. 교인의 수평 이동(水平移動)이 불러온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를 더욱 악화(惡化) 시킨 것은 대부분의 개척이 목사 개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교회 분립에 의한 개척이 아니라 교회 설립이 목사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다 보니 대부분의 개척 교회는 영세성(零細性)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조금 성장하는가 싶다가도 어느 새 교인들은 이웃의 큰 교회로 이동(移動)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개척 교회나 소형 교회는 대형교회에 교인을 공급(供給)하는 공급처로 전락(轉落)하게 된 것이다. 대형 마트가 들어오면 주민들이 가격과 편리함을 이유로 발길을 집 가까운 마트에서 대형할인점으로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理致)다. 결국 한국 교회는 미자립 교회 70%라는 비정상적인 구조를 띠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비판(批判)의 목소리들도 심심찮게 들렸지만 목회자 개인의 역량(力量) 문제로 치부(置簿)되면서 무시(無視)되었다. 한국 교회의 목사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를 큰 교회로 만들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무리(無理)해서라도 예배당 건축(建築)을 시도하였다. 목회지망생(牧會志望生)들도 그런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신학교 문을 두드렸다. 수많은 신학생들이 계속해서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현실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개척(開拓)은 만만치 않았고, 이미 개척된 교회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문 닫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 하였다. 부교역자로 가고 싶어도 그런 자리도 쉽게 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적 상황(時代的狀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로 홍역(紅疫)을 앓고 있다.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대로, 소형교회는 소형교회대로 서로 다른 어려움이 있다.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認識)도 많이 나빠졌다. 전도(傳道)도 예전 같지가 않다. 신학생들은 많이 배출(排出)되지만 이들은 가난한 시골 교회에는 선뜻 가려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고, 자녀 교육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척(開拓)하려 해도 돈이 너무 많이 드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임지(任地)를 구하지 못한 전도사나 목사들이 많다. 시골 교회를 맡고 있는 목회자들 역시 고민이 많다. 나이 들어 은퇴(隱退)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 데 은퇴할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장년 30명 미만의 개척 교회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現實)이다. 이제 정년제와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 하였으니 필자의 생각을 피력(披瀝)하도록 하겠다. 2.70세 정년제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 견해 1)70세 정년제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70세 정년제는 성경적 근거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교회의 필요성(必要性)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다. 따라서 교회의 상황(狀況)이 바뀌면 이 법 또한 수정(修整) 혹은 폐지(廢止)될 수 있는 법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쉽다. 한번 제정(制定)하였다고 해서 진리 문제가 아닌 이상 영구(永久)해야 한다고 고집(固執)할 필요는 없다. 상황이 바뀌어 고쳐야 할 형편(形便)이 되면 고쳐야 하는 것이다. 2)신학생의 적체 현상(積滯現狀)은 정년제로 해결 되지 않는다. 교단 분열(分裂)과 신학교의 난립(亂立)은 한국 교회에 목회자 수급(需給)의 불균형을 초래(招來)하였다. 공급이 수요를 훨씬 뛰어 넘은 것이다. 마땅히 신학생 수를 줄여야 하지만 그것이 어디 말같이 쉬운 일인가? 신학교들이 입학생 수를 줄이든지, 학생들을 뽑지 말아야 하는데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은퇴하는 목회자는 배출되는 신학생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 다시 말해 근본적인 대책(對策)이 없는 한 정년제로는 신학생들의 적체 현상(積滯現狀)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학생 적체 현상을 정년제에 기대어 해결(解決)하고자 하는 것은 홍수로 범람하는 강물을 모래주머니 몇 개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3)시골교회 목사와 소형 교회 목사들은 은퇴에 대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다. 현재 5-60대 베이비붐 세대(世代)의 경우 노후 준비를 거의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민연금 외에는 별다른 노후 대책이 없다. 따라서 노후 준비가 전혀 안된 장수(長壽)는 축복(祝福)이 아니라 재앙(災殃)일 수밖에 없다. 일반인이 이를진데 시골 교회 목사의 경우는 이보다 더 열악(劣惡)하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정년제를 규정(規定)대로 무리하게 적용시킬 경우 곤란지경(困難之境)에 빠질 목회자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일 것이다. 우리는 이를 결코 모르는 척 해서는 안 된다. 교회 정부(敎會政府)인 당회나 노회나 총회가 이를 해결할 수 없다면 대책(對策)을 간구해야 한다. 본인 개인 문제이니 알 바 아니다는 식이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4)목사 정년제의 본래 취지와 목적은 범 교회적으로 적용(適用)시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임택진 목사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항존직에 정년을 규정한 것은 시대적 차이와 후배의 양성과 자신의 휴식을 위하고 교회의 보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목사 70세 정년제’는 4가지 이유에서 필요(必要)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4가지는 시대적 차이, 후배의 양성, 목사의 휴식, 교회의 더 나은 발전이 그것이다. 일리(一理)가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한국교회 모든 목사가 동의하기에는 보편성(普遍性)이 부족하다. 이 말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부류의 목사들은 최소한 중형 교회 이상의 목사일 것이다. 시골 교회 목사나 소형교회 목사들은 공감하기 어렵다. ‘시대적 차이’라 하지만 농어촌 교회의 교인은 일반적으로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시대적 차이를 느낄 리가 없다. ‘후배 양성’이라 하나 과연 자신이 은퇴하고 나면 젊은 후임(後任)이 쉽게 올지도 의문(疑問)이다. ‘목사의 휴식’이라고 말하지만 농어촌 목회라는 것이 정신없이 바쁜 것이 아니다. 목회가 경제적(經濟的)으로 어려워서 그렇지 휴식을 이야기 할 만큼 업무적(業務的)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다. 만일 은퇴 준비가 전혀 안된 목사라면 은퇴 후 그는 생활을 위해 노구(老軀)를 끌고 그가 평생 해 보지 않았던 훨씬 고달픈 생활 전선(生活戰線)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또 ‘교회의 발전’을 말하지만 농어촌은 자체적으로 구조적(構造的) 문제를 안고 있다. 농어촌에도 간혹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그러나 그 분들은 예외적일 만큼 소수이다. 그 분들을 예로 들면서 ‘왜 당신들은 이 분들처럼 못하느냐’고 타박해서는 안된다. 도시에서 목회를 한다고 다 중대형교회가 될 수 없듯이 모든 시골 교회가 다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는 없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은 누가 와서 목회를 하더라도 한계(限界)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젊은 후임(後任)이 온다고 해서 교회가 크게 발전한다는 보장(保障)이 없다. 오히려 나이든 목회자가 주민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면서 목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따라서 ‘목사 70세 정년제’는 모든 교회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무리한 법 적용(適用)은 오히려 여러 가지 부작용(副作用)을 동반(同伴)할 가능성이 크다. 5)정년제를 실시하지 않는 국내외 교단의 예(例) ①예장(백석)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예장백석) 총회의 경우 2012년 제 35회 총회에서 ‘목사정년제 폐지’ 헌의는 기각(棄却)됐으나, 헌법을 신설(新設)하여 “지교회의 형편상 목사가 시무를 계속해야 할 경우에 정년후에도 시무는 계속하되, 담임목사직 이외의 노회 및 총회의 공직은 맡을 수 없다”는 절충안(折衷案)을 만듦으로써 사실상 목사정년제의 폐지나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안자인 이승수 전 헌법위원장은 “정년을 그대로 적용했을 때, 시골에서 목회하는 분들은 교단 탈퇴(脫退)를 하겠다는 것이 우리 교단의 현실”이라며 “헌법에 나와 있는 70세 정년과 1회(3년) 연장 조항은 그대로 두되, 부득이 목회를 해야 하는 경우 정년을 열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입안 취지를 설명했다. 백석총회의 목사 정년은 만 70세로 당회가 결의한 경우 3년을 연장할 수 있다. 여기에 지교회 형편에 맞게 정년 후에도 계속 시무를 허락하고 있어 사실상 목사 정년을 완전히 폐지(廢止)한 것이나 진배없다. 우리 교단이 참고 할 만하다고 생각이 든다. 개혁총회의 경우에도 “목사, 장로 70세 정년제”를 2011년 제 96회 총회에서 폐지하였으나 이단으로 규정된 류광수 목사의 전도총회를 영입하고, 여성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등 비개혁주의적 성향(性向)을 띠고 있어 실례(實例)로 들기엔 적절치 않아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겠다. ②캐나다개혁교회의 경우 캐나다개혁교회의 경우에는 은퇴에 대해 연령 제한을 하지 않고 있다. 은퇴 후의 생활에 대해서도 마지막으로 시무했던 교회에서 지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홀사모나 목사의 직계 가족에 대해서도 동일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와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다. 캐나다개혁교회 교회질서 ‘제 2 장 직분과 교리의 감독 제13조’를 보면 이렇다. 『 제 13 조 목사의 은퇴 말씀 사역자가 나이 때문에 혹은 질병이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무능력으로 인해 자기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은퇴한다면, 그는 말씀 사역자의 영예와 직함을 보유해야 한다. 그는 또한 자신이 마지막으로 봉사했던 교회와 결속하여 자기의 직분을 보유하고 이 교회는 그에게 훌륭히 지원을 해 주어야 한다. 목사의 홀로된 아내나 그의 직계 가족들에게도 이런 동일한 의무가 실행되어야 한다. 목사의 은퇴는 확대당회의 승인과 노회와 지역 총회의 대표들의 일치된 조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캐나다개혁교회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은퇴 목사를 홀대(忽待)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리고 호주개혁교회의 경우도 이와 거의 동일하다. ③미국개혁교단의 경우 미국은 연령 차별(年齡差別)이란 이유로 사회적으로 아예 정년제가 없다. 그래서 법으로 정년제를 금하고 있다.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연령 제한을 하지 않고 있다. 보수적인 미국의 개혁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 헌법 규례(Article 18조)에 의하면 “목사는 65세에 은퇴하는 특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총회는 65세에 은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가 은퇴하기를 원한다면 그 특권을 허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경우도 은퇴의 특권은 허락하나 은퇴를 강요(强要)하거나 강제(强制)하지는 않는다. 이상에서 보듯이 외국의 개혁교회의 경우는 정년제를 실시(實施)하지 않고 있으며, 국내 개혁교단에서도 정년제를 폐지하는 교단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 교단이 목사 정년제(牧師停年制)를 하루 아침에 폐지하기에는 여러 가지 우려(憂慮)되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고, 이런 것에 대한 많은 고민과 토론(討論)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목사 정년제’란 상황에 따라 제정(制定)할 수도 있고, 폐지(廢止) 혹은 수정(修正)할 수도 있다는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 Ⅳ. 맺음 말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시골 교회에서 평생(平生)을 힘들게 목회하다가 은퇴할 아무런 준비(準備)도 못한 상태에서 법에 의해 떠밀려 쓸쓸히 은퇴(隱退)하는 목사들을 생각하며 이건 아니다 싶었고, 또 누군가가 여기에 대해 분명히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기본적으로 학자(學者)다. 신학 논문을 쓰고, 발표하는 신학자가 아니라 성경과 교리를 연구하는 성경학자(聖經學者)이다. 목사가 정상적으로 목회 활동(牧會活動)을 하였다고 가정할 때 목사 나이 70이면 실로 완숙(完熟)한 나이이다. 영적(靈的)인 면에서도 그렇고, 학식적(學識的)인 면에서도 그렇다. 비록 기억력(記憶力)은 젊을 때만큼은 못할지라도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說敎)를 하는 데는 전혀 지장(支障)이 없는 나이이다. 목사에게 있어서 70세란 단지 숫자일 뿐 퇴물(退物)로 넘어가는 경계선(境界線)이 아니다. 노(老)목사님을 존경(尊敬)하고 대접하는 분위기(雰圍氣)가 아쉽다. 우리 교단이 목사 정년제를 폐지(廢止)하기에는 아직 많은 고민(苦悶)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 역시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농어촌 목회자(牧會者)들과 가난한 목회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한 실제적(實際的)이고도 적절한 배려(配慮)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석 교단의 해법(解法)도 참고(參考)해볼 만하다. 외국의 개혁 교단 헌법도 판단(判斷)의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 교단이 ‘목사 정년제’를 당장 폐지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수정 보완(修正補完)하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이 문제를 해결(解決)할 수 있다고 본다. 그 구체적(具體的)인 방법은 총회(總會)의 몫이다. 나는 우리 교단의 현명한 판단(判斷)을 믿는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초원교회 성희경 목사
76 no image 예배와 정통 예수교 (21)
박인철
4854 2013-03-08
? 세상의 종교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어떤 예배를 단편적으로만 보아도 어느 종교의 예배인지 짐작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교회의 예배를 보아 그 교회의 교단이나 정통성을 짐작한다. 교회 간판이 '예수교장로회', 심지어 '하나님의교회' 일지라도 그 교회의 예배를 보면 따로 이야기를 듣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이단임을 안다. 두말할 것 없이 예배는 어떤 종교든, 기독교에서든 가장 가치 있는 절대적인 표시행위임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정통 예수교 교회의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도아래서 오랫동안의 신앙생활을 학습하고 성경을 배운 이들은 따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정통 교회의 현장을 통하여 평생 습득되고 배운대로 훈련된 몸과 정신의 감각적 판단, 분별에 의하여 논리적 논쟁 없이도 비정통 교리나 예배의식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한 예로써, 최근에 어느 성도는 멀리 떨어져 생활하게 된 한 자녀를 개인적 관계도 있고 우리교단 교회이므로 당연히 믿는 맘으로 어느 교회에 출석하게 하였으나 어느날 그 자녀의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나서 바로 그 자녀를 다른 교회로 옮기게 하였다. 같은 사람인데 얼굴 생김생김이 달라서 다른 느낌이 아니고 변형 유전자 같은 느낌의 다름을 말한 것이다. 가족인 합신의 교수에게 굳이 묻지 않고서도 확신 있게 그리 하였다. 어느 원로의 은퇴 후에 교단의 여러 교회를 주일예배 참석으로 둘러 보면서 갖게 된 큰 한숨의 깊은 탄식이 오늘도 이어지는 것은 신학교정과 여러 경로로서 내가 잘못 가르쳤다는 탄식으로 늦게나마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주일예배를 통하여 알게 된 교회의 흩으러진 정신을 말하며 고치려 하였으나 예배가 흩으러진 것 만큼 흩으러진 합신의 정신이 일부 후대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제는 합신의 선대가 된 같은 몇몇 원로들로 시작 되어 합신의 곳곳에 큰 흐름으로 고착되었음이다. 예배는 신앙인들에게 기독교의 교회인지 아닌지, 또는 이단인지를 바로 알게하며 정통 예수교회의 교회인지를 논쟁 없이 바로 알게해 준다.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을 표방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정작 바른 예배로 표시되지 않으면 어떤 구호나 외침도 아무 의미도 없고 힘도 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으시고 또 저희 죄에서 구원하심이 구원하신 자기 백성들로부터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며 그 찬송으로 영광 돌림의 확실한 표시가 예배이기 때문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음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장로교회들도 이제는 개인 구원과 교회부흥 자체를 목표로 예배를 수단화하는 신복음주의에 몰입되어 예배의 행태로는 비정통 교회들이나 심지어 이단과도 특별히 구분 될 것이 없어 보인다. 칼빈을 말하면서도 칼빈주의와 상관이 없는 장로교회들이 되었다. 오랫동안 너도 나도 앞다투며 박윤선을 말했지만 교단과 신학교에 정작 그분의 좁은 길, 힘든 길을 따르고 행하려는 이는 찾기 어렵고 그 이름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게하고 설 자리를 만들었을 뿐이다. 초대교회 된 아담과 하와로 순종예배의 영광을 원하셨으나 저들이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이 파괴되고 부득이 피의 제사로 예배를 받으시던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은혜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신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로 예배하게 하심이다. 초대교회는 하나님 말씀, 명을 따라서 일점의 착오도 없이 그대로 제사하는 순종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였을 진대 자기의 영, 곧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며 불순종의 제사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가인이며 사울이다. '오직 믿음으로' 라는 용어는 순종을 말하는 구약의 용어이다. 구약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지 않는다. 신약에서도 당연히 라합의 행위 자체가 곧 믿음이라 강하게 말한다.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를 '정성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와 함께 강조했을 뿐이다. 예수께서도 마음속에 이미 행위가 있음을 말씀하시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말씀하신 것인데 '오직 믿음으로' 를 은근히 왜곡하여 믿음과 행위를 다분히 의도적인 이분화로 교회와 예배를 자기의 생각대로 하려 하면 지옥간다. 구약에서 제사장과 그 옷과 제사의 세세한 절차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됨으로 하나님께로 연합하여 하나되는 표시이다. 그 표시로 또한 하나님이 함께 즐거이 부르시는 찬미의제사로 그 앞에 나아오는 바른 길을 알려주심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예의를 갖추어 경배하는, 즉 예전적 의식에 충실한 의전적 예식이다. 집안이 결혼식 등으로 모이면 어른을 상석에 모시고 또 식순을 통하여 어버이께 경배하는 예도 갖추지마는 그 결혼식이 부모님예배식은 아니다. 자녀가 결혼하는 예식이니 혼인(예)식이라한다. 그 자체로는 예배라 하지 않고 독립적인 별도의 의미를 갖는 성찬식, 세례식은 성례로 구분하는데 혹 예배와 함께 진행한다 할찌라도 성찬예배, 세례예배라 하지 않는다. 하물며 성례도 아닌 사람들의 졸업식, 결혼식, 취임식, 장례식 추도식에 예배라는 명칭을 혼합하여 합신졸업예배, 결혼예배, 취임(감사)예배, 장례예배, 추도예배라 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고 그대로 합신졸업식, 취임식, 결혼식, 장례식, (추도식)이라 함이 바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또 교회의 일이니 마땅히 아버지 하나님을 상석에 모시고 하나님나라의 방식인 기도와 찬송과 성경말씀에 비추어 식을 진행함이다. 그런데 인간에 관한 일들도 모두 예배라 함으로 예배의 개념이 무너지고 예배의 대상과 예배자의 개념이 소멸되면서 모든 예배. 주일예배까지도 단지 인간들끼리의 놀음으로 별의 별 형태의 교회가 생겨나는 중대한 원인이 되었음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교회들이 그리하지 아니하였다. 순+신복음주의의 급성장 파도 2-30년 만에 정통교회의 모든 것들이 파괴 되었다. 장로교헌법에 분명히 결혼예식, 장례식(입관예배, 하관예배는 잘못)이라 하였고 나의 평생의 교회들이 그렇게 행하였다. 어느 지교회 하나만도 못한 합신의 예배관으로부터 이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개혁신학, 바른신학이 구호로만 남고 그 진의가 상실된 까닭이다. 바른예배는 바른교회됨의 근본이고 표시인데 이를 위해 참 의미의 바른 신학이 있어야 함이다. 그동안에 덕스런(?) 연공서열등을 우선하여 총장과 교수로 세운 결과이다. 신학교의 본분을 충실히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른 신학자이며 교사된 자를 총장, 교수로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공회의 원칙이 되아야 하는 중대한 이유이다. 그러한 신학교를 하나님이 지켜내신다는 최소한의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더이상 바른 교회의 표시인 바른예배를 어느 지교회 만큼도 행할 수 없는 신학교가 되면 안된다! 속죄제 외에는 제사의 시작을 알리고 마칠때까지 나팔음악이 계속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백성에게 직접 나타나사 말씀 하실 때에는 하나님이심을 알리는 나팔 소리로 부터 그 소리 가운데에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울려 들리는 이 나팔 소리는 말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리는 소리이며 백성이 조용하고 엄숙한 묵상 가운데에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복하게 하심이다. 그들 이스라엘의 순복하는 찬송 중에 거하심이다. 예배를 묵상(보통 시편으로 기원)으로 시작함은 나단 선지자와 갓 선견자로 다윗에게 일러서 완성하신 여호와의 악기 소리의 신령한 정숙한 음악소리로 하나님의 신이 예배에 임하셔서 순종 없는 제사를 하는 사울을 괴롭히던 악신은 도망하고 하나님의 신이 인도하는 신령함과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진정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찬미의 제사를 함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 할 것이다. 수백천년간의 개혁자들로 정립된 최소한의 규례인 우리의 헌법 - 예배모범에서도 시와 찬미로 예배함이 예배자들의 책임이라 한다.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주께 노래하라 한다. 시는 시편(교독, 교송)을 말함이며 찬미는 예수님 때까지의 찬송가를 말함이며 신령한 노래는 예수님 이후에 신령함으로 만들어져 불리게 될 찬송가를 말함이라는 것이 대부분 개혁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며 특히 보수 음악신학자들이 이 견해를 공고히 견지한다. 이에서 지나가는 것은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자들의 끝없는 진보를 위한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들의 끝없는 타락에의 관점으로 이 폭을 더 좁혀서 시편찬송가로 제한하였다. 만물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는 사운드, 다윗이 말한 정숙한 수금 소리로 (하나님의 신을 임재케 하여) 우리에게 붙은 악신들이 도망하게 하며 이로써 신령한 음악으로 예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이 받으시는 신령으로 예배함이다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고 나팔소리와 함께 임재하시고 말씀하시는 뜻으로 예배순서 중, 말씀의 봉독과 강단 동편 성가대의 찬양과 설교가 연계되는 것은 그 의미가 깊다 하겠으며 이는 성경에 보이시고 또 수백천백년간의 개혁자들의 지혜를 통해 정립해 주셔서 수천만의 교회들이 이런 예배 순서로 행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요즘들어서 제 모두가 개혁가들이 된 것 같은 한국의교회들이 성가대 찬양을 따로 떼어 놓기도 하며 또는 이 세 순서 중간에 교제 순서도 넣기도 하여 성경- 찬양- 말씀으로 연계된 일정한 분위기를 깨고 예배를 산만하게 하게도 한다. 편하게, 산만하게 하는 분위기는 성가대의 찬양곡도 가볍고 편한 쪽으로 나아가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交회의 길로 들어서며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을 찾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잃게도 될 것이다. 사람의 감각 기관도 하나님이 주셔서 하나님의 예배에 이 감각 기관들을 동원하여 사용하시는 것이다. 성가대의 찬양은 꽃과 같다 할 것이다. 회중찬송에 비하여 교회가 총력을 다하여 장식하는 꽃이다. 성경봉독과 설교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엄중하고 빛나게 하는 영광의 꽃이다.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말씀하심이다. 순서 아무데에서나 대충 쉽게 편하게 하는 성가대의 찬양은 큰 의미가 없다. 성경봉독 - 찬양- 설교, 평생에 수십년간 똑 같았던 교회들의 예배가 이렇게 급변하게 된 것이 交회화 되어가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헌법 예배모범에도 명시된 성경책, 찬송가도 아예 없이 스크린과 철부지들이 하나님께(?) 예배의 인도자가 되어 온갖 사물 구경과 노래로 도취하여 예배를 하며 설교는 찬양과 섞어서 도우미 멘트로 하고 스크린 볼거리로 때우기도 하며 목사는 축도만 하면 예배라 하기도 한다. 특히 많은 교회들이 성년이 된 청년들을 상대로 예배를 따로 만들어 그들에게 인도도 맡기어 예배당에 귀청이 터질듯한 굉음으로 신내리게(신나게) 방방 거리는 굿거리로 무당짓들을 하게 하면서 이를 젊은이 예배라 한다. 이것이 요즘 완전 交회화된 교회의 목사들이 힘든 신령함의 짐을 벗기 위해 제사장직, 선지자직 사명을 모두 포기하고 인간문화친목놀음 交회의 운영자가 된 형국의 단면이다. 아예 예배의 대상이라든지 예배자라는 예배의 핵심 개념자체가 포기되어 있다. 세상의 질서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법까지도 통상 관례에 따른다. 그 세상의 예식들에는 사회의 관례가 되어 우리가 초대될 때에 예측하는 일정한 순서와 예전, 합당한 예복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결혼식이 그러하고 부모님 회갑축하연회식이 그러하다. 그런데 유독 요즘의 (개신)교회들만이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심으로 만왕의 왕 되신 단 한분이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식의 예배가 순식간에, 客으로 초대된 인간들이 각자의 소견들에 따라 제각각 마음대로 해도 되는 예식(?)이 되었다. 제사의 인도자 된 제사장이 자기 맘대로 하면 죽었다. 예배의 인도자 된 제사장은 예식에 초대한 主인의 충실한 종으로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변치 않는 절차에 따라 초대 받은 客들인 성도들을 하나님이 예식장 입구에 이미 준비해 두신 예수의 예복으로 갈아 입히는 안내를 하며 정해주신 모범 순서대로 인도하기만 하면 주인이신 하나님의 신이 인도하시는 신령으로 성도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게 하여 진정한 찬미의 제사로 하나님이 예배자와 하나되어 같이 즐거이 부르시는 예배가 될 것이다. 그동안에 한 지교회의 예배의식 수준 만큼도 갖지 못했던 합신은, 예배예식의 개념을 시급히 정립하여 본을 보이고 교단의 교회들이 정통 예수교회로서의 예배 의식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75 no image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새성경들 (22)
박인철
4313 2013-02-26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바울이 말함과 같이 하나님의 본성은 그의 창조물인 사람과 만물에 대하여 신실하심이라 할 것이다. 그는 그의 신실하신 본성에 기초하여 전지, 전능함으로 천지만물과 사람의 창조와 구속사역을 치밀히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그대로 행하시고 그가 삼위 하나님 되신 자신과 만물과 사람에게 약속하신대로 오늘날까지 한치의 착오도 없이 천지만물을 운행하시며 또 이땅에 교회를 두시어 그의 계획대로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게 하심이다. 그의 본성이 신실하지 않으시다면 그의 전지, 전능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모든 만물과 인생은 믿음 대신 두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천지에 전능한 그가, 어떤 형편과 상황과 때에 따라 약속과 상관 없이 자기의 교회와 자기 백성을 맘대로 할 자라면 아무도 그에게 의지하는 믿음생활 할 자는 없을 것이며 그는 단지 피해 숨어야 하는 두려움의 대상인 무서운 전능자일 뿐일 것이다. 우리가 그를 하나님으로 믿음은 천상천하에 불변하는 진리로 그분 하나뿐심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믿는다 함은 그의 신실하심을 알게하여 주신 믿음이다. 이 믿음은 그가 스스로 우리에게 진리로 주신 하나뿐인 약속을 변치 않을 것임을 성경으로 알게하심이다. 이 믿음을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은 그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증명한다. 보시기에 좋게 사람을 창조하시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그 약속의 말씀이 곧 신실하심이며 우리에게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을 말씀으로 사람에게 주셨는데 하나님 말씀보다는 훨씬 달콤한 말로써 사람을 꾀이던 사탄은 이제는 글로써 쓰여진 신약책, 구약책의 글들을 역시 달콤한 글로써 바꾸어 꾀이는데 사람을 하나님, 또는 그의 영과 동격으로 만들어 주는 교묘한 말의 달콤함으로 채워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글을 찾게 한다. 본래 하나님의 세계는 말의 세계이다. 즉 신실함의 세계이다. 아담, 하와에게 말로써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소리가 끝나자마자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말소리에 돌아서서 사람이 하나님과 동격이 될 수 있다는 달콤한 말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축복의 언약과 출애굽의 많은 구원의 기적들을 바로 다 잊어버리는 이스라엘에게 이번에는 글로써 돌판에 새기고 또 책으로 새기게 하시되 불로 돌판에 새김 같이 성령의 불로 쓰여 주신 성경을, 사람의 영을 하나님의 신과 동격으로 만드는 교묘한 달콤함으로 사람을 꾀어 점과 획을 바꾼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간단한 약속의 말씀을 지켜 에덴동산이 지켜졌더러면 새하늘, 새땅을 위하여 그렇게 자세하게 많은 글로 구약책, 신약책으로 주시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에덴동산의 사탄의 꼬임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구약, 신약책을 주시면서 일점 일획의 소중함을 말씀하시며 이는, 성경의 기록, 번역과 전도와 설교로 말할 때에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며 왜곡하여 말하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이지 않으실 것임을 경고하심이다. 믿음의 선진국들의 사회는 말의 약속으로 신용을 이루는 사회인데 이를 글로써 남기거나 서명하는 것은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기위한 하나의 보조수단이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서약서, 각서를 글로 쓰고 (인감)도장을 찍지 않은 것 - 말의 약속은 백마디도 큰 의미가 없는 사회이다. 지금 거의가 交會化 되어가며 또 완전히 交회가 되었거나 그렇게 선언한 교회들의 설교의 말들은 성경의 일점 일획이라도 불변함과 그 본성의 신실하심이 절대 불변하시는 진리의 말씀이냐 아니냐에는 상관치 않는 것 같다. 이런 강단에서 혹 하나님을 말하더라도 이로써 오직 진리가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하늘 아래 실존하는 모든 것이 곧 진리가 되며 그래서 하나님도 하느님으로, 인간과 그 생각도 이에 동등시되는 하느님의 세계를 말함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아담과 그 후손들을 끊임 없이 꾀여 죽음으로 인도하며 둘째 아담까지도 꾀여 함께 이루려던 사탄의 인본주의, 하늘님의 세계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백성이며 교회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성장한다.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된 교사로 전해주는 하나님의 양식을 먹는 자들은 그 양식이 좋은 꼴임을 안다. 좋은 양식을 오랫동안 먹고 자란 그리스도의 교회된 백성들은 참 꼴과 삯군이 주는 꼴을 바로 알아차린다. 혹 말의 실수는 있더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일획도 가감없이 그뜻대로 전하려고 애쓰는 참 목자가 전하여 먹이는 꼴인지 말꾼으로 交會된 문화친목 사업장의 회장으로 삯을 받는 삯군의 말인지 안다. 그리스도의 교회된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된이들은 다 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며 전능하심에도 결코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자기 맘대로 하시지 않는다. 스스로 예정하시고 삼위하나님 자신과 사람에게 하신 약속의 질서에 따라 천지를 창조하셨고 구속사를 진행하시며 오늘도 한치의 착오나 변함이 없도록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일하신다! 인간들에 의하여 크나큰 슬픔과 노여움에 처하실 때에라도 참으시며 스스로 만물과 인간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지켜내신다. 그래서 그 신실하심을 인하여 주신 소망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교묘히 더하거나 뺌으로 왜곡하여 인간중심으로 말하게 하는데 인간을 높이고 추키며 감싸는 달콤한 선동의 말을 한다. 사탄과 사탄의 일을 하는 자들은 성경의 일점, 일획도 이렇게 바꾼다. 하나님이 원천인 말, 그리고 글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바벨탑 때에 하나님의 하늘에 올라 하나님과 동격이 되어 그 영광을 가로채려는 세상의 사람들을 흩어 나누시기위하여 여러 말로 나누셨고 나뉜 말을 여러 글로 만들어 쓰게 하셨다. 하나님이 나누신 것을 일본제국주의가 그렇게 모질게 우리말을 없애고 합치려 했으나 못했다. 변함 없으신 신실하신 본성의 하나님이 주신 말과 그 뜻들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글에는 각기의 글에 합당한 글체, 문체가 있다. 성경이라 함은 거룩한 경전의 뜻이다. 법전이다. 하나님의 본성, 속성, 천지창조의 신비한 질서를 포함한 방대한 하나님 나라와 백성의 법전이다. 헌법이다. 언어의 발달에 따라 여러 글체, 특히 문학적 글체는 다양하게 될 수가 있다. 그러나 글자, 단어의 뜻을 중요시하는 한 나라의 법전의 글은 그렇게 쉽게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고등학생이 법전의 뜻을 다 이해 할 수 없다고 해서 법전의 글을 자주 바꾸지 않는다. 법전적 전문성으로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 많다. 법전은 소설책이나 수필이 아니다. 많은 부분을 해설집을 보든지 전문적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법전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년된 자녀, 백성의 길은 그렇게 해서 꽤 오래 걸리는 것이다. 불신자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이미 비밀이 아니다. 초신자가 성경을 읽는대로 다 이해 할 수 있다면 금방 교만하여 망한다. 40여년전에 설화집 같은 (실제로 천지창조나 예수의 성육신을 설화로 생각하는 자들에 의하여 번역된) 새번역성경으로부터 시작된 새성경 번역바람이 순복음+신복음 폭풍에 실려 자고 나면 새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경책은 하나님 나라의 법전, 경전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주석가도 필요하며 다시 이를 바탕으로 성도들에게 쉽게 전해주는 敎師가 필요하며 성경을 풀어 가르치며 배우며 훈련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敎會' 라 한다. 이에 다른 것을 우리는 이단(異端), 또 별도의 조직도 가졌다면 이단(異團)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은 '교회는 가르치며 배우며 훈련하는 곳이 아니고 삶들을 나누는 회' 라 하며 이렇게 스스로'交회' 라 선언한다. 예전의 새번역성경은 이런 '交회'의 회원된 이들이 누구나 쉽게, 편하게, 재밌게 읽게 설화문장의 책으로 만들었다가 스스로들 쓰레기로 폐기하였다. 이번의 개역개정판은 보수측의 개역성경과 WCC진보측이 이미 스스로 쓰레기로 버린 새번역성경과의 딱 중간 쯤이다. 지금의 찬송가도 옛 보수측의 새찬송가와 진보측이 스스로 버리려고 애쓰던 개편찬송가 수준과의 딱 중간 쯤이다. 점과 획들을 바꾼 그만큼,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멀어진 책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언어 수준이 아니고 새번역자들의 수준과 그들의 생각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그들의 용기! 이에 덧붙여서 각자가 자기들의 생각에 맞추어 필요한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자기 맘대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 일을 말하고 있다. 성경이 오직 하나(Only One)인 진리가 아니라 설교자의 수만큼의 여러 진리로 말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다원주의기독교, 종국적으로 종교다원주의로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하는 이들에게서마다 달라서 듣는 이들이 여러님, 곧 하느님으로 듣게 된다면 이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폐기된 예전의 새번역 성경이 한국의 종교다원주의 토대에 큰 몫을 하였다. 자기는 신학적 보수주의라고 큰소리하면서 어느 상황에서는 WCC 의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옳으며 한발 더 나아가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하는 것이며 또 그런자들의 교회가 급성장하는 것을 보며 그런 자들을 추앙하며 흉내내는 자들을 자기의 신학교 교단과 또 교회 강단에 세우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敎회를 交회로 만들어 성공하는 자를 신학교 교단에 세우는 것도 종교다원주의이다.
74 no image 통합, 합동이 연합, 일치, 하나됨과의 다른 점 (120)
박인철
6708 2013-02-14
언어의 시작과 근본은 말이다. 글은 말을 전달하거나 보존하는 보조수단이며 말해진 것을 글로써 나타냄에는 한계가 있다 할 것이다. 말이 노래 소리라면 글은 그 노래의 악보이다. 악보는 그 노래를 알리기 위한 기보일 뿐이다. 요즘 세상노이즈에 쩌들은 애들이 기도와 신령함으로 만들어진 찬송가를 재즈 리듬, 록 비트로 바꾸어 부르며 전혀 다른 망령된 노래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 노래와 악보, 말과 글 관계의 이치이다. 그래서 성경책의 성경됨의 근본이 성령의 감동임을 성경에 명백히 해 놓으셨다. 일점, 일획이라도 멋대로바꾸어 그 신묘한 뜻을 변치 못하게 함이다. 당연히 번역도 성령의 감동은 필수이며 근본이다. 그런데 말과 글의 홍수를 이르는 최근에는 자고나면 새번역이 나오고 오래 전에 통합측을 비롯한 자유주의교단들이 통합으로 만들었던 새번역성경은 일년, 수년, 또는 십수년을 사용하다가 스스로들 쓰레기로 버렸다. 개편찬송가도 스스로 개떡 찬송가라 하며 버리려고 보수측에 끝없는 밀애의 요구로, 크나큰 아픔속에 그들과 WCC로 갈라 서서 보수의 울타리를 쳤던 보수진영도 드디어 무너뜨리며 새찬송가를 버리게 하고 20여년 전에 결국은 통일찬송가를 만드는 것에 성공하고 최근에는 개역성경마저도 아주 그럴듯한 명분들을 붙여가며 포기하게 하고 개역성경과 이미 쓰레기가 된 새번역성경과의 중간쯤 되는 수준의 개역개정판 성경을 만들었다. 새통일찬송가의 수준이 개정판 개역성경과 꼭 닮은 수준이다 ! 찬송가는 성경에 의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기에 뗄 수 없는 필연적 관계이다. 석가의 설법을 들은 자들은 찬불가를 부르는 것이다. 통합 성경에서 정말 중요한 '신령과 진정의 예배' 를 '영과 진리의 예배'로 바꾸어 예배에 초대한 주인과 객을 바꾸고 애매한 뜻으로 만들었다. 통합 성경과 찬송가에서 핵심적 내용의 여러군데에서 소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소망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구원의 확신으로, 천국과 이땅에서도 나를,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새하늘, 새땅을 명백하게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심으로 어떤 환란중에도 낙심치 않게 하시는 당연한 신본주의 언어로 새찬송가에도 쓰여졌음이다. 개역성경에 희망은 육체적, 사람이 바라는 것을 말할 때에 구분하여 쓰여진 단어인데 개정판에 이를 혼동하며 이미 통일찬송가에서부터 새통일찬송가에 하나님찬송의 노랫말로 많이 집어 넣었다. 소망과 희망은 신학적 적용으로 구분한다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입장으로 성경과 찬송에서 분명하게 구분되어질 단어로 소망은 칼빈주의의 전용 용어이고 희망은 인본주의 알미니안 자유주의자들이 소망에 대적시키는 용어인 바, 그들의 언어적 수준이 평안과 편안도 구분 않고, 서게를 있게로 하며, 한테와 한테서도 섞어 쓰는 수준인데 이런 수준을 우겨서 기어코 보수측과 함께 통합으로 통일 성경과 찬송가를 만들어 낸다. 그들의 수준은 감동과 흥분의 단어 차이도 구분 못하는 수준이다. 여호와께 지극한 감사의 감동으로 성전을 짓기를 원하여 준비하고 간절히 원했으나 막으심으로 짓지 못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니 백성들이 흥분(하여 성전 짓기에 열심한 것)을 감동이라는 단어로 바꾸는 수준이다. 신약의 어떤 부분은 아예 문백의 뜻을 바꾼 것도 있다. 이렇게 통합의 수준이 보수로 어렵게 지켜 왔던 지혜와 지식의 근본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다시 사람의 수준으로 격하되게 함을 모르고 통합함이 좋다고 희희덕거린 결과물이다. 순수 물과 5급수 혼합물을 섞어 사람과 생물이 마시지 못할 3급수를 만들어 놓고 우리는 하나라고 희희덕거림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말씀이라 하심은 말만하시는 분, 말쟁이의 뜻이 아님은 다 안다. 그는, 우리가 보고 알 수 없는 작은 수치의 세밀함과 측량 할 수 없는 크기의 수치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는 예정 가운데에 그의 신실하신 본성에 의하여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하게 준비하심을 그 능력의 말씀으로 하셨다 함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할 수 조차도 없는 이 크고 비밀한 일들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그가 알려주신 말씀을 적은 것이 성경이 아닌가. 그런데 자고 나면 새번역이 나온다. 우리말처럼 뜻과 소리와 모양(혀, 입술)이 잘어우러져 ? 다양한 표현을 적절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ㅈ, ㅊ, ㅌ, ㅍ, ㅇ 등, 훈민정음대로 혀와 입술의 모양과 이(잇몸) 의 위치를 잘 만들어 충실한 발음을 하면 어떤 언어보다도 공명된 소리로 말할 수 있으며 세계 어느 말보다도 뚜렷한 아, 에, 이,오, 우 의 모음으로 가장 밝고 아름다운 발성의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이다.(다른 말의 모음들은 아,에,이,오,우의 발음이 뚜렷하지 않고 둥글어 탁하다) 즉, 이태리의 벨칸토 창법보다 더 맑고 강하며 투명한 소리, 독일의 덱쿵창법보다 더 깊이 있는 영감적 발성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말 노래이다. (그 일찌기 선대들이 최고의 말과 글로 만든 것을 어리석은 후대들이 천대하여 수준 낮은 상놈의 말로 되었다) 성가 노래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찬 양 이라는 말인데 ㅊ 자음의 발음은 글자모양 그대로 위,아래 이 사이에 아랫니에 혀끝을 붙이고 혀끝의 윗부분을 입천정에 댄 상태로 호흡을 주면서 순간 찰나로 입을 열어주게 되면 모든 발음 중에 가장 뚜렷하고 확실한 소리를 내며 모음의 ㅏ에 ㅊ음이 얹어져서 차 냐 -앙, 하며 가장 밝고 뚜렷한 발음, 발성의 힘찬 소리를 내개 된다. 찬 - 양, 찬 - 양 세상 모든 말의 발음에 이보다 밝고 힘찬 음색의 (노랫)말은 없다 ! !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우연은 없다! 찬 양 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 찬 양 하라 높으신 권세를 찬 양, 찬 양 찬 양 영원히 부르세 3위 하나님, 거 룩 거 룩 거 룩 ( ㅓ와 ㅜ의 모음으로 깊고 무게 있는 노랫말 소리 - 글자 뜻과 소리와 그 느낌이 일치하는 우리 말은 최고의 말, 언어이다.) 하나님...... ! 영어 성경에 Only One(하나님)은 간혹 표현된 말이다. 그런데 우리 성경, 우리 찬송가에는 시작부터 끋까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가장 보잘 것 없었던 민족을 일으키시어 본래 國歌로까지 그 큰 영광 받으시려고 특별한 성령의 감동으로주신 단어가 아닌가!. 천주교, 기장, 성공회..... 말할 때에 일부러 힘을 주어 하느님 이라하는 저들과 연합하여 일치되고 하나가 되야한다고 외친다. 이것이 합신측과 고신측의 통합주의자들이 교단을 벗어나기도 하며 멋대로 행하는 행태이다. 그들의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도 진리... 하느(늘)님도 진리....? 저들의 요구로 삽입 된 찬송가 대로 한 하늘 아래 인류는 하나이니 모두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진리? 저들이 입만 열면 말하는 사랑도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 하였건만.... 평생에 우리를 일깨우고 터득된 우리말의 느낌으로 통합이란 종족이나 사회, 정치체제가 다른 나라들을 합치는 느낌의 단어이다. 로마제국,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일본천황제국주의, 스탈린, 히틀러 등 사탄의 종들...... 이들은 자기의 욕심인 단지 온세계 통합의 통치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지어진 수천, 수억만의 생명들을 벌레만도 못하게 죽인 자들이다. 물론 김일성 일족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나누신 민족과 나라들을 자기의 힘으로 통합하려한 하나님을 전혀 알려하지 않고 두려워 하지 않는 자들로 세상을 통합으로 수중에 넣으려는 사탄의 도구가 된 자들이다. 통합의 욕심으로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마다 않는 자신이 하나님이 된 자들...... 통합........ 유럽도 통합하고 시,군도 통합하여 성인병동 같이 된 큰 덩치로 이익을 꾀하고 자랑하려는 끝 모르는 인간들의 욕심.... 합동......, 지방 분교의 합동, 교역자가 없는 작은 교회, 물질이 연약한 교회의 합동..... 좀 문제가 있어서 합치는 것 같은 안스런 느낌의 합동....! 사람끼리라도 다른 사람과 팔다리, 신장, 한 눈을 주고 받으며 몸을 합동해야 한다면 이미 그 들은 심각한 장애 상태에 있음이다. 어느 가정이 합동을 해야한다면(부모, 자녀) 그 두 가정은 그동안 크나큰 문제의 상처를 갖고 있는 가정이며 합친 후의 평안을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 문제는 성경에도 없는 것 같으니....... 합동하지 말고 지금의 그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신랑으로 의지하며 살면 소생하며 소성하는 힘을 얻을터인데..... 연합..... 성경의 언어대로 남.여가 연합하여 한몸! 하나님께 연합하여 하나 ! 그리고 우상과 사탄에게 연합하여 하나! 연합이란 서로 다른 몸들이 하나를 이룸이다. 질이 달랐던 것이 동질로 변하여 하나로 됨이다. 하나님의 구원, 그 속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하나됨이다 ! 사탄의 종되어 그와 하나로 연합되어 영원히 지옥에 있을 하나됨이다. 연합이란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 일치되는 몸과 정신과 육체로 한 가정, 한 교회, 한 교단이 되었음이다. 단 한분인 하나님께로 그 형상을 회복하여 동질로 하나가 되었음이다. 성도는 그렇게 교회로 예수와 하나님과 하나이다. 그분은 머리로 우리는 그와 하나된 몸으로 성도 하나 하나가, 작은 교회 하나 하나가 이미 그의 나라, 그의 교회로 하나이다. 우리의 몸은 머리이신 하나님께 붙은 유기체이다. 즉, 서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혈액과 신장, 심장, 팔,다리, 몸된 지체들의 유기적 연합체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질로 하나이요, 머리도 하나뿐이니 그 사명도 정신도 하나이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연합된 하나이다. 한 신학교라면 신학의 절대적 일치, 한 교회, 한 교단이라면 신앙의 절대적 일치는 필수이다. 순수 물인 진리를 끌어내려서 5급수와 섞어 3급수로 일치를 만드는 일치는 사탄의 것이고 참 일치는 특수 물로 세례 받아 변하여 순수 물인 하나님께로 일치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하게 성경언어로 말씀하시는 연합의 뜻이다. '가정교회'로 논쟁하는 신학교, 선교를 핑계로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집을 예수께서 직접 둘러 엎으셔야 할 수십년간의 난장판 장터로 만들고 구원을 구실로 3급수물로 세례주는 교단과 결코 하나 될 수 없다 ! 구원사역을 그런 세례를 주는 손들을 빌리시겠는가! 연합이란, 여러 동이들에 나뉘어 담겨 있는 순수물질인 물, 즉 생명수, 세례물들의 질적, 유기적 결합을 말함이다. 그 작고 큰 동아리의 물들은 제각기의 사명이 있다. 작은 동이일수록 오히려 보존이 용이하고 또 필요할 때에 빠르게 활동하여 죽은 자들을 살리고, 살린 자들을 온전히 소생케 한다. 아직 혼돈과 흑암 가운데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신은 水面에 운행하셨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한 순수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사탄의 종된 사람들로 말미암아 오염된 강물, 하수구 물들을 다 섞은 구정물로 집채만한 수조에 가득 채워 놓고 수천, 수만명에게 거들먹거리며 퍼주는 세례물은 그 세례를 받는 자들의 명을 재촉할 뿐이다. 하나님께로의 연합이 아닌 그냥 우리끼리의 연합은 통합이다. 통합으로 거대 몸집을 만듦이다. 성인병동인 커다란 몸집의 우두머리들이 되어 으시대고자 함이다. 통합에는 같은 質의 정신이나 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온 세상을 하나로 자기의 예속물로 만들려는 사탄 ! 성령에 이끌리신 예수는 이 첫 시험을 통과 하셨다. 이 승리자 예수를 머리로 우리가 한 몸일 때에만 우리는 참 하나된 자들이다. 교단, 신학교의 수장자리 하여 자기 만족과 이익을 위한 이용을 마치고나면 꼭 교단과는 딴길에 들어서서 자기의 더 큰 명예의 만족을 위하여 자기가 몸담았던 신학교와 교단과 그로 하나되었던 이들에게 거침없이 해악을 끼치는 자들...... 敎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가 아닌 무슨 삶을 나누는 친목交회로 만들고 敎단의 진리 보수와 거룩함의 성결을 지켜내는 본분에는 전혀 관심없이 친목.이익을위해 연합하는 交團의 통합으로 몰고 가는 자들을 계속 교단의 수장으로 받들고 줄서기 하는 이 어리석음을 잘라 내지 않고는 온 몸이 썩어 회복 불능이 될 것이 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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