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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6 2017-12-08
Notice 2015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홈페이지를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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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4 2015-01-05
Notice 신문 원고 작성과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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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89 2010-12-23
Notice 기고 제언 게시판 이용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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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69 2010-07-23
73 no image 내복과 교도소 그리고 복음 (232)
아름다운 고백
8597 2013-01-11
금년에 서울의 날씨는 27년만에 강추위라고 한다.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조금이라도 추위를 이기고자 몸을 움추리고 회사와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면 안스러워한다. 그래도 이들은 안식처과 있고,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기에 총총걸음은 행복해 보인다. 지금 영하 18이상의 추위에 온기가 하나도 없는 방바닦에서 패트병에다 더운 물을 받아 가슴에 않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경북 청송군 소재하고 있는 교도소의 수용자들이다. 금년에 몸시 춥다는 기상정보를 접하고 총회의 담당부서와 몇 분께 올 겨울에는 몹시 춥다고 하니 금년에도 교도소 내복 보내기에 동참을 동참을 부탁합니다. 라고 간곡히 호소를 했었다. 그런데 담당부서에서는 금년(2012년)엔 예산이 부족함으로 청송까지는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은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허탈했다. 그런 가운데 세 교회에서 지원하여 주어 약간의 내복을 마련하여 교도소에 기증을 하였다. 청송은 일명 새들도 피해 간다는 곳이다. 사회적으로볼 때는 통재가 불가능한 분이 갇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삶을 산 것은 바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이 평범한 가정과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과연 흉악무도한 삶을 살았을까? 아닌다 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래서 교도소에 복음을 전해야 하고 수용자들에게 사랑을 주어 이들의 심령 속에 있는 냉기를 녹여야 한다. 그런데 멀어서 올 수가 없고, 멀어서 후원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접하고 교도소에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써 가슴이 먹먹했다. 청송은 서울에서 4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인데. 교회와 서울의 목사들은 그럼 해외는 어떻게 가서 선교하고, 지원하고, 오시는지... 거기는 이름이 있고, 여기는 이름이 없기 때문인가? 교도소야 말로 선교지요, 전도해야 할 곳인데... 교도소 전도에 동참을 부탁하면 전화를 받지 않고,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 그저 웃음만 나올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교도소에서 내복 한 벌은 곧 추위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온기를 심어 주고 사랑을 알게 하는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총회와 교회들이 군 부대의 사역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군 선교 해야 한다. 그런데 총회적으로 교도소 사역에 관심을 보여 주시길 정말 부탁한다. 특히 청송지역에 있는 교도소에 관심을 가져 주시실 정말 부탁한다. 복음의 눈으로 보면 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는 영혼들은 전도의 대상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의 사랑을 주어야 하고, 교도소 선교하는 사역자와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출소자들이 교회에 나올 때 그들의 지난 과거를 보지 않고 그냥 받아졌으면 좋겠다. 교도소 사역자 이기학 목사
72 no image 왜 백발(white hair)이 노인의 영광인가? (178)
임석주
7920 2013-01-02
 모발색의 짙고 연한 정도는 멜라닌 색소로 가득 찬 멜라닌 소체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멜라닌(melanin)이란 말은 ‘검다’는 뜻의 헬라어 멜라스(Melas)에서 온 말입니다. 모발색이 점차 백발로 변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멜라닌 세포의 수가 감소하면서 멜라닌 세포에서 만들어내는 멜라닌 소체의 수가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의 자랑은 힘이요 노인의 영광은 백발(白髮 white hair)이다(잠 20:29 / 표준새번역).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담고 있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는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라는 그릇이 아니라 그릇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첫 창조는 새 창조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사람의 모발 색깔이 검정색(또는 금발)에서 흰색으로 바뀌는 것을 노인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먹보다도 더 검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엡 4:22-24)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 인생(노인)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노인의 영광이 백발이라는 말씀은 잠언 20장 29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을 잠언 20장 27-30절의 문맥에서 보면 네 절 밖에 안 되는 말씀 속에 ①사람의 영혼 ②사람의 깊은 속(내면세계) ③진리 ④인자함 ⑤악을 없이함 ⑥사람 속에 깊이 들어감. 이런 표현들과 더불어 노인의 영광은 백발이라는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발이 단순한 노화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발의 색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존재론적인 변화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같은 잠언 말씀에서 이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백발은 자연적인 노화현상으로 인해 나타나는 흰머리가 아니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공의로운 길을 의로운 삶으로 번역했습니다.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이며 의로운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다(잠 16:31 /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노인의 영광은 백발이라고 하실 때 백발은 의로운 길, 의로운 삶에서 얻어지는 존재론적인 변화와 성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우리의 옛 사람을 검은 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하얀 머리(white hair)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발은 옛 자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 진리를 살아가는 깨끗한 영혼을 의미합니다(벧전 1:22). 이것을 추구하는 인생,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변화와 성숙을 이루는 이에게 영광이 있고 면류관이 있다고 노인의 영광은 백발이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빌 2:6-10).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장에서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머리는 흰 양털과 하얀 눈(snow)처럼 흰 머리였습니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계 1:14).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며, 나 자신부터 욕심을 버리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좁은 길을 가면서 백발로 늙어가기를 기도합니다. 경남노회 창원 참좋은교회 임석주 목사
71 no image 기고합니다. 파일 (29)
인병국
4011 2012-12-29
70 no image 하나님 나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112)
장창수
5376 2012-12-03
전세계적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이혼한 부부들이 많고 자녀들은 홀부모 밑에서 자란다. 이혼 후 힘겹게 일하는 홀부모는 자녀들을 거의 방기한다. 도는 홀부모로부터 어릴 때부터 심한 폭력을 당한다. 서구의 경우 미혼모들이 홀로 자식을 키우기도 한다. 고학력의 남자와 여자들은 결혼에 얽매이기 보다 자유롭게 살길 바란다. 결혼 적령기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 가정의 중요성이 사라진 결과이다. 그렇게 인류 사회도 소리 없이 서서히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가정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가 잘 증명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인간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는 것이었다(창1:26절).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문화 사명(창1:2절)을 하나님은 인류에게 주었다. 문화 사명의 전반부는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을 명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류가 이 세상에서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저절로 실현되며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이다. 어떻게 인류는 생육하고 번성하는가?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를 통해 가능하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목적이다. 부부는 가정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다. 자녀들이 출생함으로 가정의 규모는 커진다. 식구 수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정은 사랑의 공동체로써 인류 사회의 최소 단위이다. 가정이 건강하다면 인류 사회도 건강해진다. 이 점에서 가정은 인류 사회를 위해 일군들을 양성하는 훈련장이 된다. 왜 그런가? 가정은 다면적 모습을 띤다. 인류 최초의 가정은 학교, 교회와 사회였다. 아버지는 가장(家長)으로서 선지자, 제사장과 왕 같은 존재이다. 아버지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제사장으로서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왕으로서 가정을 다스린다. 이렇게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최소 단위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은 가장으로부터 배운다. 이런 가정에서 잘 훈련 받은 자녀들은 사회에서도 협력할 줄 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도 인류 사회에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인류 사회와 마찬 가지로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성경적 근거도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가정을 뜻한다. 하나님의 가정에 속한 식구들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세 전 이루어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이를 잘 증명한다. 하나님의 예정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엡1:5절). 아들이란 단어는 아버지를 가장으로 한 가정(家庭)을 전제한다. 결국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의 가정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선택(엡1:4절)에 의해 구체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선택의 목적은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4절). 결국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만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은 신자들에게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반드시 가능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예정과 선택의 동인(動因)이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은총과 은혜의 원천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말했다(요일4:8절).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선택하게 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7:6-8절) 그럼 하나님의 가정도 근본적으로 사랑의 공동체이다. 인류 사회가 이를 배우도록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가정을 구성시켰다. 이런 가정에서 사랑을 주고 받는 훈련을 한 자녀들이 보다 큰 공동체인 인류 사회에서 훌륭한 일군이 된다. 이런 방법으로 인류 사회에 하나님의 가정 즉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가정이 무너진다면 인류 사회도 무너진다고 암묵적으로 주장한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렇게 중요하다. 가정은 율법과 기독교 윤리의 핵심인 사랑을 가장 잘 실천하도록 돕는 훌륭한 훈련장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과 교회는 가정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며 늘 강조해야 한다. 교회론과 목회학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교회와 목회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적하고 이를 위해 하나님 나라와 인류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잘 세워지도록 존재한다.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도 가정이다. 그러므로 목회학은 교회가 아닌 가정에서 신자들의 신앙 삶이 실천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신앙인의 양육장이다. 그러나 신앙 삶의 중심과 무대는 교회가 아닌 가정이며 사회여야 한다. 모든 신앙인들은 가정을 중히 여기며 가정에서 모범적 부모가 되기 위해 영적, 전문적 그리고 육적 조건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바로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목회자들이 강대상에서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가 더욱 분명해 진다. 성경의 가르침을 한 주제로 몰아쳐 가르치지 말라! 번영, 성공과 출세, 성장 그리고 긍정적 사고방식 같은 특정 주제에만 집중하지 말라! 신자들의 뇌를 단세포로 만들어 단세포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그런 신자들은 시대에 뒤쳐지기 마련이다. 오늘날 호되게 비판과 비평을 듣는 한국 교회가 이를 잘 증명한다. 교회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도 청년들이 늦지 않게 결혼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조직신학은 가정론을 포함한 신국론과 기독교 윤리로 보강되어야 한다. 이 보강으로 이론적 그리고 논리적 성격이 강한 기독교 신학은 보다 더 실천적이 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권위가 쉽게 부정된다. 일방적으로 선언된 신학적/교리적 주장보다 수준 높은 윤리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월등함을 증명해야 한다. *http://blog.naver.com/rassvet
69 no image 무엇을 소망할 것인가? (126)
장창수
4599 2012-11-25
1. 안철수의 사퇴로 인해 한국 정치판이 요동쳤다. 사람들도 흔들렸다. 그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던 모양이다. 물론 그의 등장과 주장은 한국 정치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기존 정당도 긴장할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퇴했으니 얼마나 실망이 큰가?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관점에서도 안철수는 훌륭한 인물이다. 어떻게든지 그가 살아남아 차기 대권에 다시 도전하길 바란다. 2. 세상은 항상 요동친다. 구약 시대 다윗 왕국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남방 유다도 몹시 흔들렸다. 그는 52년 동안 장기 통치하며 경제(대하26:10절)와 국방(대하26:9, 14-15절) 면에서 남방 유다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오랜 동안 유다는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좋은 시대도 끝났다. 그리고 앗수르 제국이 점점 강성해지면서 국제 정세도 불리해졌다. 유다 인들은 불안했다. 바로 이 때 이사야가 하늘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은 주(主)를 보았다(사6:1-4절). 3. 남방 유다는 인간 왕 웃시야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었다. 이 때까지 이스라엘이 웃시야 왕의 선정(善政) 덕분에 행복하게 산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도 이 점에서 잘못한다. 안철수처럼 훌륭한 인물이 나타나면 지나치게 기대한다. 그러나 그를 보낸 하나님을 더 바라보아야 하지 않는가? 4. 설상가상 이 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남방 유다의 멸망을 처음으로 예언했다. 이 때까지 이스라엘은 약 250년 동안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잘 살았다. 이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었는가? 잘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하며 이스라엘의 회개를 기다렸다. 이 동안 인간 통치자들이 선정한 덕분에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불신앙이다. 5. 웃시야 왕 이후 요담과 아하스가 남방 유다를 통치했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 때 전국에 걸쳐 종교개혁이 있었다(대하29:6-36절).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가 55년 동안 통치하면서 아버지에 의한 종교개혁 결과는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었다(대하33:1-9절). 이 때 하나님은 남방 유다의 멸망을 완전히 작정했다(왕하24:3절). 그러나 이후 요시야 왕에 의해 또 다시 전국적으로 종교개혁이 수행되었다(왕하22-23장). 그 후 남방 유다는 서서히 멸망 당했다. 6. 남방 유다의 이런 역사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하나님은 멸망의 심판을 이미 작정했다. 그러나 선한 왕들을 통해 종교개혁이 두 번 수행되도록 조치했다. 그 시대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선 심판으로 멸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상황이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한 동안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들이 놀랄 정도로 부흥했다. 그러나 1990년을 지나며 한국 교회는 오히려 사회의 비난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한 동안 계속될 것이다. 7. 이런 시대 어떻게 신앙 삶을 영위할 것인가? 무엇보다 먼저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어떤 믿음을? 인간 통치자들이 아닌 창조주와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유일한 통치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멸망은 이미 작정되었다. 다만 언제 이것이 올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8. 구약 시대 남은 자들은 구약의 계시와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작정을 미리 알고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 좋은 예가 다니엘과 그의 셋 친구들이다. 조국이 망할 때 이들의 실력은 출중하여 바벨론 제국의 황제에 의해 선발될 정도였다. 어떻게 이것이 이들에게 가능했는가? 이들은 모세오경에 정통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하나님을 버릴 것이란 예언을 익히 알았다(신30:18절). 이후 비로소 선민이 새롭게 세워질 것도 믿었다(신30:1-6절). 9. 이에 근거를 두고 다니엘은 웃시야 시대부터 시드기야 왕까지 남방 유다의 역사를 자세히 살폈다. 신명기의 예언대로 유다의 역사가 진행됨을 그는 확신했다. 비록 조국이 망해도 반드시 복구되리란 믿음이 생겼다. 이 믿음 덕분에 조국이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처해도 이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들은 영적,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분야에서 실력을 높이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멸망 후 복구될 조국을 이들은 미리 준비해야 했다. 10. 이들의 이런 모습은 나라를 잃은 일제 시대 한국 청년들의 그것과 대조된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보 같은 동족이나 조국을 멸망시킨 바벨론 제국을 원망하지 않았다. 모두 하나님의 심판 결과였다. 이 점도 우리 한국인과 너무나 대조된다. 나라를 잃은 것은 당시 집권자의 잘못이며 나쁜 일본 제국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빈약한 믿음은 현상만 보고 사람을 원망하게 만든다. 성경적 믿음이 없다면 정신적 성숙도 낮아진다. 11. 성경의 세계관에 의해 기독인들은 이미 이 세상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잘 안다. 그렇다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보고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다. 지금 주어진 상황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허용한 결과임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경건에 유익하다. 시대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수록 이런 경건 훈련이 필요하다. 하늘 성소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은 부활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사상 안에서 평화를 찾으라!
68 no image 루터와 칼빈 (67)
장창수
5151 2012-10-17
1. 사도 시대와 초대 교부 시대 이신칭의 신학은 분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카도릭 교회는 사람들의 선행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얼마 후 이행득구가 이신칭의를 대신했다. 이후 성자들의 행위들이 복음을 대체했고 이들의 유골들이 신성시되었다. 부패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대신했다. 이것이 중세 유럽 교회의 타락이며 암흑기의 원인이었다. 2. 루터는 이행득구의 잘못을 깨닫고 이신칭의를 다시 주장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루터의 이신칭의는 구원의 방법론에 치우쳤다. 이의 문제를 깨달은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학을 주장했다. 이로써 칼빈은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관심을 바꾸어 놓았다. 칼빈이 루터의 약점과 단점을 보완시켰다.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이신칭의와 달리 영광의 신학은 구원의 목적을 설명해 준다. 3. 구원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답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절) 여기 빛은 무엇인가? 착한 행실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모세의 시내산 율법 같은 역할을 한다. 다만 차이는 후자가 출애굽 사건 후 주어졌다면 전자는 구속 사역의 성취 이전 미리 주어졌다. 그러나 구속 받은 백성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내용 면에선 둘이 동일하다. 4. 구약의 모세 율법이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공통점은 구속을 전제하며 구원과 윤리를 분리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구원은 새로운 신분의 획득이라면 윤리는 새로운 신분에 맞는 삶을 뜻한다. 신분과 그에 맞는 삶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서로 맞지 않는다면 획득된 새로운 신분을 무시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둘을 절대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5. 이사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위선을 이렇게 지적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절) 윤리적 삶이 없이 드려진 예물과 제사는 하나님에게 가증스럽다. 신분과 삶이 일치하여 드리는 예배만 주님이 기뻐하신다(렘7:3-6, 미6:8절). 6. 이를 안 사도 바울도 구원의 방법과 목적을 동시에 설명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절) 9절과 10절을 연결시켜주는 접속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7. 문제는 이분법적 사고에 따라 신분과 윤리를 분리시켜 묵상한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논리적 영역에서 분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적(삶) 영역에서 분리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역사 영역에서 분리될 수 없는 둘이 논리 영역에서 서로 대립된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버린다. 신분과 삶,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있는가? 이런 논리적 오류가 신학적 주제에서도 흔하다. 8. 신분을 규명해 주는 신학적 진리를 먼저 분명히 한 후 나중 윤리적 삶을 주장하자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명쾌하게 신분을 규명한 후 즉시 윤리적 삶을 가르친다. 이사야 시대 이미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았다.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이방 나라와 구별된 삶을 보여줌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증명해야 했다(신4:6절). 그러나 행함이 없는 일방적 신학적 주장은 배타적 인상만 주며 종교간 갈등만 부추긴다. 그러나 신자들의 수준 높은 윤리적 삶은 불신자들과 구별되게 함으로 신학적 주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9. 성경은 구원을 전제하며 즉시 삶을 가르친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신학적 논쟁 자체만 즐긴다. 그리고 신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가르침에는 소홀하다. 이것이 하이퍼 칼빈주의의 문제가 아닌가? 삶과 동떨어진 하나님 신학만 논하는 칼빈주의자들. 기독교 신학의 이런 경향은 19세기부터 세상 과학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학에서 윤리가 분리된 데 있다. 10. 신학과 신앙이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신앙과 윤리도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의 구속 사역 결과 구원 얻은 신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는 진리 논쟁만 일삼는다. 진리만 주장하지 말고 진리에 맞는 삶을 살라! 그렇지 않으면 신학자들은 신학을 전문 지식 분야로 취급하며 학적 권위에 안주하며 세상 명예를 취하려는 세상 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11. 이 점에서 칼빈은 분명히 루터를 앞섰다. 그러나 칼빈이 주장하는 영광의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칼빈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참으로 많다.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만 자랑하려 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칼빈주의는 교회와 신자들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교회를 나누거나 분열시킨다. 이것은 칼빈이 가르치는 영광의 신학은 아니다. 칼빈은 많은 신학자들이 논쟁하길 좋아하는 구원의 방법이 아닌 모든 신자들이 달성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구원의 목적을 더 강조했다. 12. 칼빈주의자라 주장하고 싶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돕는 윤리적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연구하라! 신학적 논쟁은 교회를 분열시킬 수 있지만 윤리적 삶은 교회 밖 세상에서 예수님이 만유의 주임을 선전케 한다. 많은 기독교 인구만 자랑하지 말고 건전한 신학과 아울러 그에 맞는 성경적 윤리도 구체적으로 확립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 발달 장애자로 드러난다.
67 no image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칭의와 성화 (1)
장창수
3646 2012-10-05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칭의와 성화(1) 1. 칭의와 성화는 구원론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 두 용어를 창조론에 연결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구원론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칭의는 구속의 결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됨을 뜻한다. 구속이란 방법은 타락으로 잃은 아들의 신분을 되찾게 하고 그 결과가 바로 구원이다. 2. 그럼 어떻게 인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물론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서이다. 이 때 하나님은 어떤 조건도 붙히지 않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 귀한 생명을 얻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받았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3. 이런 은총을 받은 이후 인류는 선악과 규례(창2:17절)를 지키며 하나님이 준 문화 사명(창1:28절)을 수행해야 한다. 순종 여부에 따라 문화 사명 수행 결과도 하늘과 땅 사이 차이만큼 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 아래 복을 받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저주를 받아 사망을 당할 것인가? 창조론에선 인간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 4. 창조론도 구원론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 후 자녀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이 점에서 창조론과 구원론 사이 어떤 차이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창조론에서도 구원론처럼 칭의는 무조건적이라면 성화는 조건적이다. 칭의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라면 성화는 인간의 의지의 결과에 따라 복과 저주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성화는 칭의로 얻은 아들의 신분답게 사는 삶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신자는 늘 불완전함에 노출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에 의한 견인의 은총이 신자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이 점에서 창조론과 구원론 사이 다른 차이가 있다. 칭의 후 행복 여부가 창조론에선 인간의 의지에 맡겨졌지만 구원론에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6. 이것은 구원론에서 성화 이후 인간의 의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구원론은 성화를 무시하는 구원론으로 값싼 구원 또는 구원파의 율법폐기론적 구원이 된다. 그렇다고 성화를 지나치게 강조하기에 성화 내용으로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려는 자세도 문제 있다.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도 있기 때문이다(고전3:1절). 그리고 최종적으로 누가 구원 받을 것인가는 교회도 모르고 하나님만 안다. 7. 그럼 왜 성화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가? 칭의와 성화라는 단어들은 구원론의 이해를 위해 논리적으로 나눈 것이다. 신앙 삶에서 이 둘(논리)은 실제(역사, 삶)로 분리될 수 없다. 칭의가 신분 획득이라면 성화는 신분에 갈맞는 직분을 뜻한다. 왕이란 신분과 왕으로서 수행해야 할 직분은 실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화를 칭의에서 강제로 분리시키지 말라! 8. 구원 이후 신분에 걸맞게 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자녀이므로 그를 징계하며 사랑으로 끝까지 이끈다(히12:7절). 구속 이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또 다시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생자 아들의 피까지 흘려 구속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 은총은 피택자에게만 베풀어진다. 9.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된 인류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문화 사명을 수행하여야 한다. 사명 수행은 아들이 이미 된 증거이며 결과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명 수행은 아들이 되게 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창조주 아버지를 거역한다면 칭의와 성화는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10. 구원론의 칭의와 성화를 창조론을 쉽게 설명하며 이 둘 사이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은 줄여야 한다. 이 둘은 선후의 문제이지 대립적 이분법에 맞지 않는다. 칭의가 먼저이고 성화가 나중이다. 그러나 성화가 나중이라고 절대로 무시되면 안 된다. 신분과 직분은 인격과 삶의 관계처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11. 논리적 분리와 구분을 실제 신앙 삶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어리석음을 버리자! 바른 이해를 위한 논리적 분리는 통전적 삶을 요구하는 역사에선 절대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할 때 조직신학이 설명하는 ‘구원의 서정’도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칭의와 성화(2) 1. 창조론과 구원론은 칭의란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인 그리고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칭의 결과 창조론에선 인류가 하나님의 문화 사명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구원론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조직신학의 구원론도 칭의가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아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 려 하심이니라."(엡2:8-10절) 3.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심을 받은 자가 바로 칭의로 하나님의 아들된 신자들이다. 신자는 선한 일을 위한다. 그럼 선한 일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왜 구체적으로 이를 설명하지 않았을까? 신약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구약을 통해 이미 상식화된 내용을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유대적 배경이 없는 이방인 신자들은 선한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이를 알려면 창조 기사를 통해 인간의 창조 목적을 알면 된다. 하나님은 문화 사명(창1:28절)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시키길 원했다. 이를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창1:26-27절). 신자는 바로 이 선한 일을 위해 구속의 은총으로 새로 지음을 받는다. 구속이란 타락으로 잃은 인간의 사명(창1:28절)을 되찾아주기 때문이다. 5. 결국 신약의 신자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성화는 문화 사명 수행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론과 구원론의 공통적 목표이다.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 나라 복음인 이유이다(눅16:16절). 즉 구원론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 획득만 뜻하지 않는다. 조직신학의 구원론과 달리 창조론은 칭의와 성화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6. 결국 성화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삶의 과정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법인 말씀에 따라 사는 땅의 시민이다. 땅의 시민은 세속사에 속해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 이성과 상식을 따라 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시민은 구속사에 속해 하나님의 특별은총 아래 믿음에 따라 산다. 땅에 살면서도 땅에 속하지 않은 존재 - 신자란 참으로 역설적 존재이다. 7.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스려지는 곳이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곳에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통치에 따라 산다면 눈에 안 보이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 통치란 신자 측면에서 성경에서 나온 기독교 윤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8. 이런 신자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기독교 윤리가 이 세상에 퍼지며 세상에 영향력을 미친다. 그 만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확장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즉 기독교 윤리에 따라 사는 삶 즉 성화는 아주 중요하다. 신자들의 성화 수준이 높을수록 하나님의 말씀 통치는 그 만큼 인류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준다. 기독교 인구가 특정 사회에 15%만 되어도 선하고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9.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의 수준 높은 윤리를 칭찬하며 영광을 하나님과 예수님께 돌릴 것이다. 신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임을 설명하며 예수님도 이렇게 말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절) 10. 사도 베드로도 설명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절) 11. 이렇게 본다면 영과 육을 나누는 윤리적 이원론이나 교회와 세상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은 비성경적이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이를 증명한다.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됨으로 이원론과 이분법을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구약 성경은 이를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 12.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조직신학의 구원론은 창세기 3장부터가 아닌 창세기 1-2장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신자는 늘 현실도피적인 신앙 삶을 살며 빛과 소금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에 반한다. 13. 이제 기독교 신학은 성의 개념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성이란 이원론이 설명하듯이 세상 밖에서 고고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윤리면에서 세상과 구별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삶이 바로 성화의 삶이다. 이것이 창세기가 설명하는 칭의와 성화이다. www.blog.naver.com/rassvet
66 no image 인류 최초의 가정 (130)
장창수
7831 2012-10-03
1. 하나님이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했고 남과 녀를 지은 후 만물 통치권을 위임했다고 창세기는 기록한다. 이런 기록은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다. 아울러 이런 기록은 인류 사회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창세기 1-2장의 기록을 자세히 연구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곳에서 찾을 방법이 없다. 2. 그리고 성경은 창조 기사를 학적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창조 기사는 이야기처럼 서술된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은 학자들이 할 수 없는 훨씬 다양한 가르침들을 인류 사회에 남겼다. 학적 주장은 어느 특정 주제만 다루기에 한계를 지닌다. 이 점에서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narrative theology가 새롭게 성경을 해석하도록 돕는다. 3. 보는 국면에 따라 수많은 내용들과 가르침을 준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장점을 갖는다. 왜 구약 성경이 구속사라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지 이해된다. 학적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면 성경의 책들은 수백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 형식은 모든 가르침들을 간단하게 압축해 준다. 4. 창조의 배경 아래 가정이 성경에 소개된다. 창조 기사가 주는 신학적 가르침 아래 성경적 가정관이 세워져야 한다. 가장 먼저 주목 받는 사실은 가정이란 인간의 행복만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사람들이 갖는 가정관과 완전히 다르다. 5.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시킬 목적으로 문화 사명이 주어졌고(창1:28절) 이를 잘 수행하도록 하나님은 가정 제도를 창설했다(창1:27, 창 2장). 가정을 구성시키는 근거는 부부 사이 열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가정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받아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문화 사명을 수행케 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부부에게 새롭고 높은 차원의 사랑을 제공한다. 이 믿음과 사랑이 타락한 인간의 성본능에서 나오는 이기심으로 인한 온갖 폐해에서 결혼과 가정을 지켜준다. 6. 기독 젊은이들이 어떤 사랑관과 연애관을 가져야할 지가 분명하다. 만약 이런 믿음이 있다면 젊은이들은 문화사명 수행자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자신을 성장시킬 것이다. 이 믿음은 기독 청년들의 잠재력을 무한히 개발시킬 것이며 신실한 삶을 살려는 자세로 나타난다. 이런 기독 청년이라면 일등 신랑감과 신부감이 아닌가? 7. 하나님의 문화 사명 수행을 위해 가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가정이 살아야 인류 사회도, 민족도 그리고 나라도 살아난다. 이 점에서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는 철저히 징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가정과 식구들은 기본적인 복지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8. 그럼 가정은 교회와 무슨 관계를 갖는가? 하나님이 명한 문화 사명이 가정 단위로 수행된다면 당연히 교회는 이를 잘 하도록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놀라운 사실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가정에서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 가정 삶은 신앙 삶 자체였고 그리고 문화 사명 수행 자체였다. 이스라엘은 안식일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바벨론 포로까지 가정은 바로 신앙 삶과 세속 삶의 터전이었다. 9. 바벨론 포로 이후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였다. 사도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했다. 그리고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나타났다. 신자들은 안식일 대신 주일 가정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 모임이 커지자 교회는 가정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그렇다고 가정의 역할이 축소되었는가? 아니다. 10. 구속의 목적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창1:26-28절)을 위한다. 구속은 타락으로 잃은 창조의 목적을 신자들에게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도 구약 시대처럼 가정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11.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는 다음 순서대로 이 세상에 세워지며 확장된다. 먼저 구속 받은 신자 마음에, 구원 받은 신자들의 가정에 그리고 이런 가정의 수가 증가하면서 사회와 나라와 민족 가운데 비록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실현된다. 이렇게 구약의 문화 사명은 신약 시대 수행된다. 이런 사명을 위해 신약 성도들은 구속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또 다시 받는다. 12. 그럼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회 자체를 위하는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절대로 몸을 위하지 않고 머리가 지향하는 활동을 위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자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돕는 활동을 해야 한다. 13. 이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향후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 문화 사명을 잘 수행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에서 자라면서 식구간 협력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들이 사회에서도 잘 협력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할 것은 분명하다. 비로소 교회는 모으는 목회는 물론 보내는 목회도 할 수 있다. 14. 여기서도 다시 확인된 것은 바로 구원 받은 신자와 가정이 하나님의 주요한 관심사이며 신학과 목회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제도에 신자들이 희생되어서도 안되며 그리고 신학적 주장이 다르다고 사람들이 무시되어도 안된다. 기독교와 교회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세워주는 신학과 목회를 해야 한다. 15. 처음부터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으로 예수님은 이들을 끝까지 인도했다(요13:1-2절). 왜 우린 신학적 지식을 자랑하며 사람을 경시하는지? 그리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는지? 이 모두 하나님의 주요한 관심사가 사람 사랑이었음을 잊은 결과이다. 어디에서 신학과 목회가 개혁되어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65 no image 내가 구상하는 은퇴목사 마을/ 최일환 목사 (204)
최일환
9363 2012-04-26
내가 구상하는 은퇴목사 마을(隱牧村) 수원노회,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우리 교단도 점점 은퇴하는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이 많아지고 있다. 교단 창립주역들과 1, 2회 목사들이 이미 은퇴했거나 65세가 넘어서면서 은퇴시기가 다가오면서 은퇴목사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교단차원의 은퇴목사의 삶에 대한 연구와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아직 눈에 보이는 뚜렷한 대책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일찍이 필자가 구상하고 있는 은퇴목사 마을(은목촌)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런 은목촌을 교단차원이나 각 노회별로 계획을 세워 운영한다면 평생을 목회에 전념하고 은퇴하는 목사들의 노후가 아름다운 노후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수도권에서 두간 이내, 중소도시에서 최소 30분에서 1시간 거리에 한적한 시골에 농가주택을 건축할 수 있는 농지 3천~5천 평 정도를 구입해야 한다. 수도권에서 2시간 이내에 현재도 평당 10~15만 원 정도면 구할 수 있는 농지가 상당수가 있다. 특히 농촌인구의 급격한 노령화로 농촌 마을이 사라지고 있는데 소규모 마을 인근에 그런 농지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3억에서 5억 정도 드는 농지 구입비용이 엄청난 돈이기에 아직 내게는 기도하며 구상하고 있는 꿈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허락될 줄 믿는다. 마련된 농지에 큰 원형으로 도로를 깔고 도로변에 약 20평 규모의 조립식 전원주택 20채 정도를 빙 둘러 짓고 한 가운데 30평 규모의 예배당 겸 세미나실과 20평 규모의 조그마한 식당을 붙여서 짓고자 한다. 주택은 20평 규모의 동일한 모양의 조립식 주택으로 방 2칸(서재와 침실)과 화장실 그리고 응접실이 갖추어진 규모(약 5천만 원)로 하고, 20가정의 은퇴 목사 가정(부부)이 입주하고, 조립식 주택의 건축비는 입주자가 부담하되 건강상이나 또는 사정이 생겨 은목촌을 나갈 때는 후임 입주자에게 실비를 받아 나가는 개인 소유형태의 주택으로 하고 싶다. 그리고 은목촌 공동체의 규약에 따라 식사는 교회 식당에서 공동으로 취사하고, 예배도 은퇴목사들이 돌아가며 설교하되 주일 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뿐만 아니라 매일 새벽기도회, 저녁기도회를 돌아가며 인도하는 형태의 교회로 운영하고 싶다. 은목촌 전체 대표는 한분 섬겨야 할 것이고 은목촌 교회는 입주 목사들이 한 달 씩 돌아가며 당회장을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은퇴목사들이 각기 전문 주특기가 있으니 한 종목씩 책임을 분담 섬기면 좋겠다. 예를 들면 컴퓨터 수리, 전기 수리, 목공, 그리고 전원초목관리, 농사담당 등, 한가지씩 맡으면 되고, 식당은 봉사자 한명을 시골에서 고용하고 은퇴 사모님들이 조를 짜서 봉사하면 될 것이고, 난방비와 전기료는 기타 세금 문제는 복지 법인 형태로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목사가 은퇴하면 출석할 교회가 마땅치 않고, 설교할 기회가 없고, 친구가 없어 외로워서 문제가 되고, 식사를 해먹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은목촌이 세워지면 1)은퇴 후에 출석할 교회가 있어 좋고 2)은퇴 후에도 월 2, 3회 설교할 기회가 주어져 좋고 3)동료 목사들과 성경, 신학, 선교 등을 서로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외롭지 않고 4)미자립 교회 지역이나 미전도 지역에 전도행사에 나서서 지원할 수도 있고 5)매끼마다 식사 걱정을 안 해도 되어 좋을 것이다. 특히 배우자중 한분이 먼저 소천해도 살아갈 수 있고 6)지역의 소형병원과 조인하여 정기적인 의료검진도 한다면 좋을 듯하다. 필자는 이런 은목촌을 구상하면서 노회별로 이런 마을을 세우데 땅을 구입하는 비용과 예배당과 식당을 세우는 일은 노회 또는 대형교회가, 그리고 개인주택은 은퇴자들이 마련한다면 될 것이라 본다. 특히 대형교회들이 이런 일에 앞장서 농지와 교회당 건축에 앞서준다면 은목촌의 운영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기에 평생을 복음사역에 헌신하고 은퇴한 목사나 선교사의 삶이 보람 있는 삶이 될 것이라 상상해 본다. 이런 일에 동참할 교회나 후원자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다.
64 no image 합동(분리)에 관한 캘빈의 입장(기독교강요 4권에 나타난) (1)
김훈
3111 2012-04-21
 합동(분리)에 대한 캘빈의 입장(기독교 강요 4권을 중심으로) 한국장로교회의 모든 교단은 캘빈주의를 내세웁니다. 또한 캘빈을 장로교 신학과 정치체제의 창시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무슨 논쟁이 생기면 성경을 상고하고 토론하여 성경적이고,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해답을 찾아내는 과정을 밟기보다는 캘빈의 권위를 빌어서 자기주장을 정당화(正當化)하고, 상대주장을 부당화(不當化)하여 더 빠르고 쉽게(?) 승패를 가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캘빈의 이름으로 상대의 복종을 강요하던지, 아니면 ‘갈라져 나가게’ 하였습니다. 반대로 졌다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캘빈이 교회분리를 어떤 범죄보다 더 큰 범죄로 간주하고, 분리주의자(당시의 재세례파)를 로마교회보다 더 위험하고 큰 이단으로 간주하였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캘빈에게서 분리를 정당화하고, 불가피화(不可避化)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그 근거라는 것은 기존 교단 혹은 소위 주류파의 잘못을 최대한 많이 들추어내어 그들이 캘빈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내세워서 자기들의 분리하여 교단을 설립하는 것은 정당하고,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또 하나의 장로교단을 설립하는 과정을 밟아 왔습니다.그리고 그것이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되면 ‘거기에 있으므로’ 그들의 부당함에 동조하는 무리로 오해를 받는 것은 신앙양심에 어긋난다는 양심론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한 교회 안에서 다투는 것보다는 ‘거기에서 나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교회를 위하는 길이라는 건덕론(健德論)을 더하여 분리를 정당화, 불가피화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장로교는 교회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 곧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은 수의 교단을(1980년 이후 30년 동안에 설립된 장로교단만 150개 가 된다는 통게도 있음)세웠다는 비웃음을 교회 안팎에서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똑같은 구실로 분리 상태를 고착화하므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괴롭게 하고, 성도의 교제를 제한하고, 교회가 이교도와 불신자에게서 비웃을 받게 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캘빈주의를 표방하는 고신과 합신의 합동에 관한 찬반 논의에 앞서서 교회의 하나 됨에 관한 캘빈주의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캘빈주의는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덧붙여져 왔고, 서로 다르게 정의되고 있기 때문에 보통 목회자로서는 정확하게 이해하기도 어렵고, 조심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캘빈주의 학자들과 그들의 저서들이 아닌 기독교강요 4권에 나타난 캘빈 개인의 교회의 하나 됨(분리)에 관한 입장을 일반 목회자의 수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4권 전체의 제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4권 전체 제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교회)로 들이셔서 그 안에 있게 하시는(지키시는) 외적인 수단 혹은 목표’입니다. 캘빈은 그 전체 주제에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란 어떤 곳이며, 모든 신자를 그 한 교회 안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은 무엇인가를 밝힙니다. 그리고 교회를 분리하는 것과 그 고착화의 정당화, 불가피화가 인정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기존 교회가 중세 로마교회와 같이 된 경우뿐이라고 말합니다. 곧 그 기존 교회에서 말씀 사역과 성찬의 시행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집행할 교회 직원선출과 정치체제가 중세 로마교회와 같을 경우에만 교회 분리는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4권에서 한국장로교회의 분리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찾으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만일 찾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해(誤解)이거나, 왜곡(歪曲)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 제1장을 살펴보겠습니다.캘빈은 4권 첫 장에 “모든 경건한 자들의 어머니로서 연합을 유지해야 할 참된 교회”라는 주제를 붙여서 ‘참된 교회’와 ‘연합 유지’를 연관시킵니다. 그리고 하나 됨과 하나 됨을 유지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본질이며, 증거이며, 사명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캘빈이라면 정정당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사유로 교회를 분리하고, 그 분리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회 어느 교단도 참된(혹은 떳떳한)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1조에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하여 특별히 성례를 제정하였으므로 최소한 성례가 바로 시행되는 교회들 사이에는 믿음의 거룩한 일치가 성립되므로 분리하려 하지 말고, 연합을 유지하여야 할 것을 암시합니다. 2조에서는 참 교회 여부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인데 ‘교회의 통일성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지체들과 하나로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장차 주어질 기업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고 경계합니다. 곧 교회를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실 기업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와 관계가 있는 심각한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교회를 공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여러 조각으로 찢어지지 않으시는 이상, 두 개나, 세 개의 교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인데(고전1;13), 교회 분리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느냐’고 개탄합니다. 이어서 모든 상황이 교회가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거기에도 ‘이스라엘 가운데 남겨 두신 7천 명’처럼 하나님이 이적적인 방법으로 보존하여 ‘남기신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왕상19;18). 그러므로 엘리야 시대의 7천 명을 이스라엘 안에 ‘남기신 교회’가 아니라, ‘떠나게 하신 교회’로 보고 분리를 정당화하는 것은 오해나 왜곡이라 할 것입니다.3조에서는 사도신경을 들어서 “하나님이 모든 신자의 공통의 아버지시오, 그리스도께서 형제의 사랑 안에서 연합되어 있는 자들의 공통의 머리시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믿는다면” 성도의 교제를 끊는 분리를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이 자기에게서 갈라져 나가도록 하시지 않으며, 그의 지체들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허용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신데도 교회를 분리하는 것은 그러한 주님의 의지(意志)를 대적하는 심각한 행위임을 암시합니다. 7-9조에서는 참된 교회인 여부를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만의 특권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함을 아시고 그것을 위하여 참 교회의 표지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 사역과 그 사역을 공경함이 있고, 성례를 정당하게 시행한다면, 그 무리를 참 교회로 인정함으로써 마귀의 심성을 가진 자들이 항상 갈라놓으려 애쓰는 교회의 통일성을 보존하여야 한다.’고 합니다.따라서 참된 교회의 표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없다는 이유로 그 무리를 참 교회로 인정하려하지 않고, 분리하려는 것은 마귀의 심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10-16조에서는 ‘교회에 참된 표지가 있는 한 아무리 다른 결점들이 있더라도 거기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제를 통하여 이미 교회의 분리가 잘못임을 암시합니다. 10조에서는 그 교회에 참된 교회의 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성과 교제를 파괴하고 교만하게 교회를 떠나는 것은 반역이요, 배도’에 해당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행위이며, 더 없는 끔찍한 죄악’(엡5;23-32)이므로 하나님이 벼락을 내려 깨뜨리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12조에서는 그 교회에 온갖 결점들이 많고, 심지어는 교회의 표지인 교리나 성례시행에 다름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본질적이고, 신앙의 총체(總體)에 해가 되고, 구원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아닌 한, 그러한 이견(異見)을 분열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빌3;15, 고전14;30).캘빈에 의하면 한국장로교회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을 근거로 삼아 분열했다고 할 것입니다. 13조에서는 ‘도덕적인 결점도 분리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주제로 도나투스파와 당시의 일부 재세례파들처럼 말씀에 맞는 삶을 볼 수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고 판단하고,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교회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그 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은 오도(誤導)된 의를 향한 잘못된 열심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헛수고라고 책망합니다. 따라서 분리하면서 내세웠던 명분 곧 교회의 정결은 커녕 오히려 하향평준화가 된 한국장로교회 안에서의 분리는 모두 실패했다고 할 것입니다. 14조에서는 고린도교회가 이교도도 혐오하는 끔찍한 악행(고전5;1), 우상 숭배(고전10;14-22), 교회의 표지인 성찬을 오용하는 자(고전11;17-34), 복음의 핵심인 부활 교리를 조롱하여 복음 전체를 파괴하는 자들(고전15;12)로 거의 온 교회 전체가 오염되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그러나 거기서 말씀과 성례 사역이 부인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교인들을 교회와 성도로 인정하고 거기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려 하지 않은(고전1;2) 실례를 들어 도덕적인 문제로 교회를 분리하는 것은 성경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악행의 10분의 1도 없었던 한국장로교회에서의 분리는 정당성이 없습니다.15조에서는 고린도교회가 범죄자들에 대한 권징을 바로 시행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권징을 바로 시행하라고 권고한 것이 사실이지만(고전5;1-3. 고전10;9-13), 그러나 교회가 권징시행에 나태하다는 것 때문에 분리할 권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성경은 타인이 아닌 자신을 살펴보라고 했는데 자신이 아닌 다른 신자들과 교회를 살펴본 결과(고전11;28) 거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그 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은 악한 일이라고 경계합니다.16조에서는 분리를 선동하는 자들은 대개 자기가 제일 낫다는 것을 보여 주려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추종하게 하고, 그게 안 되면 교회에서 분열시키려 하는 ‘악의 자식들’이요, ‘진리의 빛이 없는 자들’이요, ‘망령된 자들’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자들이 많으므로 특정한 소수의 특정한 죄악에 오염될 수 있다는 구실로 분리하지 말고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17-22조에서는 그 교회에 거룩하지 못한 교인들이 있는 것을 분리의 구실로 삼지 말고, 오히려 서로 용서하는 기회로 삼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17조에서는 엡4;25-27을 인용하여 교회는 거룩한 동시에 주님이 날마다 주름과 흠을 없애셔야 할 만큼 불완전하고, 심지어는 거룩함의 증거가 거의 보이지 않는 때가 자주 있으나,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서 항상 특정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여 영광을 받으시므로(롬9;23), 거기에 거룩함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고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이 구별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도록 ‘그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18조에서는 선지자들의 예를 듭니다. 곧 선지자들이 당시의 예루살렘교회의 모든 백성과 제사장이 부패하여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될 정도였지만(사1;10), 그 때문에 자기들을 위하여 새로운 교회나, 단을 세우지 않았고, 어떻든지 주께서 그 말씀을 그들 중에 세웠고, 거기서 예배하도록 의식들을 제정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여, ‘그 가운데서’ 자기들의 정결한 손을 하나님께로 향하였던 것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온갖 악행들을 보면서도 그 교회에서 자기들을 분리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실례를 듭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모든 사람들의 도덕성이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거나 혹은 자기의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분리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교만한 행위라고 경고합니다.19-22조에서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에를 듭니다. 곧 당시의 교회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백성에게 만연된 불신앙과 방탕함을 아시면서도 그들과 같은 성전에 모이고 같은 의식에 참여하셨던 사실과 ‘그 교회 안에 가라지나 부정한 그릇들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그 교회에서 나와야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알곡이 되고, 금과 은그릇이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은 주님만이 하실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판단을 가지고 분리하려는 것이야말로 완고함과 경솔함과 교만함과 사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라는 키프리안의 말을 인용하여서 교회에 악행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시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 악행을 분리의 명분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이어서 주님이 우리 모두를 용서를 통하여 교회 안에 영원히 받아 주셨고, 교회 안에 보존하여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죄 지은 자들을 용납하지 않거나, 교회 안에 있지 않고 분리하려는 것은 우리를 교회 안에 받아 주셨고, 교회 안에 보존하시는 주님을 거스리는 교만이라고 책망합니다.23-29조에서는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말씀 하신 것(마6;12. 18;21-22)과 하나님이 범죄한 신자들(공동체로는 이스라엘과 고린도교회, 개인으로는 다윗과 베드로)에게 긍휼을 베푸신 실례를 듭니다. 그리고 용서와 긍휼이 교회의 특징이며, 또한 지극히 거룩하셔서 지극히 작은 악행도 묵인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어 천 년을 하루 같이 참아 기다리시므로 비록 그 교회가 최고로 부패했을 때의 이스라엘이나, 고린도교회와 같이 되었다고 하여도 거기에서 분리하려 하지 말고, 용서하면서 참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2장은 자기들의 분리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그것이 왜곡(歪曲)임은 다음과 같은 그 내용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1-2조에서는 신앙의 근본 교리와 정당한 성례를 폐기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 한, 그 밖의 다른 오류들은 용인하여야하며 그것 때문에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나 교황체제하의 로마교회는 성찬 대신에 신성모독(미사)을 도입하였고, 예배를 용납할 수 없는 미신으로 훼손하였고,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매장한 상태였으므로 교회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서 나온 것은 분리가 아니라 참된 교회를 보존하는 정당한 행위였다고 말합니다.캘빈이 볼 때는 최소한 교황체제하의 로마교회와 같이 된 적이 없었던 한국 장로교회에는 정당화할 수 있는 분리가 한 번도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5-6조에서는 ‘이단은 거짓 교훈으로 믿음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자들이고, 분리주의자는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성도와의 교제를 끊는 자들을 말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합니다. 곧 근본적인 교리와 참된 예배를 매장한 로마교회와의 분리는 이단과의 교제를 끊은 것에 해당하며, 그것도 개혁자들이 능동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가 개혁자들을 추방함으로 생긴 불가피(不可避)한 결과였으므로 그 책임이 로마교회에 있음을 밝힙니다. 장로교회 목사 모두가 존경하는 어거스틴과 캘빈에 따르면 한국장로교회의 분리에 관계된 분들(신학자, 목회자) 가운데 ‘분리주의자’라는 말을 피할 분이 없고, 분리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교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분의 말씀을 빌어서 자기주장을 내세우던 그 많은 지도자 교수와 지도자 목사님 가운데 ‘나는 분리주의자였습니다’라고 회개한 분이 없었고(정 규오목사님 외에 그런 분이 더 계시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그 많은 교단들 중에 자기들의 분리가 성경 말씀(엡4;2,3)대로 겸손, 온유, 인내, 관용의 부족한 탓이며, 또 하나의 교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 사실은 개혁을 위한 의지와 용기와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한 교단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장로교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워집니다. 또한 선대들이 만들어 놓은 분열로 생긴 배설물과 같은 기득권들을 잃게 될까보아 교단 보존에 급급한 후대들을 보면서 참담함과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7-11조에서는 고대 이스라엘 교회가 비록 우상숭배와 도덕적 범죄로 부패해 있었으나, 거기에 말씀인 율법이 있었고, 하나님이 세우신 직원들이 그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고, 율법에 기록된 의식들을 시행하고 있었고, 게다가 미신적인 행위에 참여하라는 강압이 없었으므로 하려고만하면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는데 비하여, 참 교회의 증거는 하나도 없고, 미신적인 행위에 참여하라는 강압만 있었던 로마교회로부터의 분리는 정당하다고 재차 강조합니다.따라서 캘빈이 볼 때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대다수의 목사가 그 말씀을 전하고, 주님이 세우신 성례만을 시행하고, 미신적 행위에의 참여를 강압한 일이 없었던 해방 후의 장로교회에 있었던 교단 분리는 모두 정당하지 못하였고, 또한 신앙고백과 예배모범과 정치체제가 같은 교단들이 서로 합동을 꺼리는 것도 부당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다음으로는 제3장에서 20장을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3-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목적과 그 사역의 의의와 특권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직분인 목사, 장로, 집사의 자격과 직무 그리고 직원을 세울 때 소명의 확인, 자격 심사, 회중이 선택하는 과정을 밟는 것이 성경적임을 밝히고(3장),이어서 고대 교회가 제정한 여러 법령에는 성경의 교훈과 다른 요소가 거의 없었다는 것과 그 시대의 정치체제가 사람이 주도권을 꿈꾸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앞으로 교황체제하의 로마교회가 성경은 물론 고대 교회와도 아주 다르다는 것을 밝힐 것을 암시합니다. 5장은 교회 직원 상황을 문제로 삼아 분리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됩니다. 캘빈은 당시의 로마교회가 성경과 고대 교회 전통과 반대로 교인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소명감과 자격을 확인하는 과정 없이 당파와 봉급 중심으로 직원을 임명하므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직원이 100명에 1명, 성직매매에 해당하지 않는 임직이 100번에 1회, 평생에 1회라도 강단에 올라가 본 경험이 있는 직원이 100명에 1명, 부패와 악행이 끔찍하여서 교회법에 따라 판단하면 출교나 파면을 당하지 않을 자가 100명에 1명이 될까 말까 할 정도였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원체제와 상황이 중세 로마교회와 다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최소 100명중에 70명은 정상) 상황인 한국장로교 안에서 있었던 모든 분리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6-7장은 교권의 소재를 문제로 삼아 분리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됩니다. 캘빈은 교황정치체제가 성경과 고대 교회에 없는 가설인 베드로 수위권을 근거로 조작된 것이고 게다가 그것으로 개인 양심과 교회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었으므로 교황은 적그리스도요, 로마교회는 거짓 교회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거기로부터의 분리는 정당하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교황과 같은 1인 독재자와 교황청과 같은 기구가 없는 한국장로교회에서 교권의 소재를 구실로 삼아 분리한 것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8-10장은 치리회의 횡포를 문제로 삼아 분리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됩니다.캘빈은 성경 해석권이 교황이 주재하는 공의회에 있다 하여, 거기에서 결정한 교리의 무류함을 주장하여 근본적 교리를 부패시키고, 성경에 어긋난 교회법을 만들어서 야만적인 횡포와 살육을 자행한 로마교회는 거짓 교회이므로 거기로부터의 분리는 정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치리권을 남용하여 근본적 교리를 부패시킨 적도 없고 야만적인 횡포와 살육 행위를 한 바가 없는 한국장로교회에서 치리회의 행사를 구실 삼아 분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11장은 직원의 치리권 오용을 문제로 삼아 분리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됩니다.캘빈에 따르면 그 교단과 직원들이 교황체제하의 로마교회 직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을 왜곡하여 자기들 뜻대로 고해, 출교, 재판권, 사면권을 행사하고, 교권을 이용하여 세속적 권세와 부귀와 영예와 면책특권을 비롯한 온갖 특권을 누리고, 국가와 세계의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데도 단순히 교권주의라는 구실로 분리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14-19장은 예배 형태와 의식을 문제로 삼아 분리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됩니다.곧 참된 교회의 표식인 성례를 미신적(화체설, 성찬물 숭배 행위, 일반 신자에게 잔을 금함 등)으로 행하고,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그 속죄의 은혜를 망각하게 하고, 성찬을 더럽히고,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하는 미사와 7성례와 같은 미신 행위를 강요하는 로마교회는 거짓교회이며 따라서 그 교회로부터의 분리는 정당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런 일이 없었던 한국장로교회에서 예배의식을 구실로 분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결론캘빈이 기독교강요 4권에서 밝히려고 한 것은 참된 교회와 그 표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표식이 말살된 로마교회는 교회가 아니든지, 거짓 교회라는 사실을 밝히고 그러므로 거기에서 개혁교회가 분리한 것은 정당했다는 것과 그 분리도 로마교회의 박해와 추방에 의한 불가피한 일이었으므로 로마교회가 개혁교회를 이단이나 분리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었습니다.교회 합동(분리)라는 주제만을 염두에 두고 본 기독교강요 4권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캘빈이라면 그 교회(교단)의 말씀사역과 성례를 포함한 예배 형태와 정치체제와 직원들의 형편이 중세의 로마교회와 같을 경우에는 거기로부터의 분리가 정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 분리가 나가는 쪽의 능동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기존 교회(교단)가 불법적인 권징행위(제명, 면직, 출교)로 추방하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불가피성) 것이 인정될 경우에만 분리를 인정하고 정죄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한국장로교회가 교단 설립 이후 100년 동안 많은 위기를 겪었고, 현재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최소한 교황제하의 로마교회와 같은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장로교회가 존경하는 캘빈선생님께서 볼 때에는 그동안 한국장로교회에서 있었던 모든 분리는 비록 이단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분리주의적인 행위임에는 틀림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잘못을 되돌리기 위하여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널 각오로 한국장로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진력하라." 하라는 권면을 할 것이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참고한 번역본은 김 문제. 혜문사. 1987년 7판과 김 종흡외 3인. 생명의 말씀사. 1993년 1판과 원 광연. 크리스챤사 2006년 초판이며, 문장은 비교적 현대어인 원 광연목사의 것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글은 번역본만을 볼 수 밖에 없는 목회자의 수준에서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신학자들이 볼 때에는 잘못 해석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부분에 대하 것이라면 조언과 교정은 받겠습니다. 그러나 글의 목적이 신학자들이 아닌 장로교단의 분열 현상에 대한 일반 목회자들의 생각과 견해를 나누고, 모으는데 있으므로 목회자들의 토론 형식의 글에만 답글을 드리려고 합니다.장로교회가 하나되어 북녁과 세계로 나아가기를 기원하는 평범 목회자 김 훈
63 사람의 다스림 받는 정원 파일 (19)
박종훈
2960 2012-04-11
사람의 다스림 받는 정원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항상 아쉬운 것은 집터가 작아 그 흔한 실과나무나 예쁜 꽃 하나 심고 가꿀 수 없었던 점이다. 마당은 있지만 한쪽에는 돼지우리가 차지하고 그 옆에는 두엄이 쌓여있다. 나머지 공간은 비어두어야만 가을에 벼를 탈곡하는 장소로 사용한다. 그나마 작은 화단이라도 조성할 수 있는 곳은 뒤뜰이어서 뭔가를 심어봤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다. 주변에 대나무 밭이 있고 초가집 그늘에 가려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이유였다. 당시에는 이 상식을 몰랐고 계속되는 실패에 집터가 작은 것만 불평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한 꿈이 심어졌다. 장차 내 집을 가지면 넓은 정원에 마음껏 꽃과 나무를 가꾸리라고……. 사람은 기본 욕구가 부족할 때 자연적으로 꿈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꿈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웬만한 것은 다 충족되는 시대에서 부족함없이 자라는 환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며 상가건물 옥탑 방에서 잠시 살던 때가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회색빛 콘크리트 모습이고 땅을 밟아도 신기할 정도로 흙이 묻어나지 않는 인공적인 길로만 다니게 되었다. 이럴수록 마음속에는 흙냄새가 그리워지며 하다못해 콘크리트 건물 사이로 악착같이 자라는 잡초라도 반갑게 느껴졌다. 자연을 사모하는 마음에 옥상의 한 구석에 스치로폴박스로 귀한 흙을 힘들게 준비하여 채소를 키웠다. 모종을 구해다 심고 돌보면 자라는 그 싹들이 얼마나 기쁨을 주는지……. 이렇게라도 해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될 것 같았다. 신학과정을 마치고 시골로 개척할 장소를 탐색하는 중, 지금의 자리를 보게 되었다. 다른 여러 조건도 맘에 들었지만 특별히 정원이 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먼저 살던 주인이 꽃과 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과일나무를 잘 조성해놓았다. 작은 텃밭과 아울러 돌담을 끼고 감나무, 사과나무, 석류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와 은행나무, 향나무, 벚나무등 다양한 꽃과 상록수가 심어져 있었다. 맘속에 그리던 정원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구입하기로 하고 귀촌하기로 결정했다. 사월 초에 이사 오는데 이미 여러 꽃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내와 한창 개구쟁인 큰아들 녀석과 이제 막 돌 지난 딸과 함께 그토록 바랐던 전원생활과 함께 농촌 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신나게 마음껏 심고 가꾸고 복음전하며 봉사의 즐거움을 누렸다. 사실 농촌교회 개척의 고통과 외로움과 여러 갈등은 항상 있지만 그런 중에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 다음은 정원을 돌보는 즐거움이 오래 인내하는 힘이 된 것 같다. 사람과 달리 노력하고 정성 드린 만큼 보답을 해주는 꽃과 나무들의 정직한 모습은 어떤 나무는 우산 모양으로, 어떤 나무는 무지개를 닮은 형태로, 다른 나무는 접시 같은 모습으로 또 다른 나무는 물결 형상으로 조금씩 멋을 이루어간다. 그렇게 십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들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 넓지 않는 터에 건물과 잔디마당을 포함하여 사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보도록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를 심다보니 자리다툼을 해야 했다. 지나친 크기는 다른 식물들에게 해를 주기 때문에 늘 적당하게 자르고 억제를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키가 큰 나무들은 클수록 세력이 강해지면서 손이 닿지 않아 관리가 어렵게 된다. 주인의 손질을 자주 할 수 없으므로 제 멋대로 자라면서 전체적인 균형을 깨는 것을 발견케 되었다. 그때서야 평범한 교훈을 주는 깨달음이 마음에 와 닿았다. 아무리 좋아도 적당한 제어를 받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 가치와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정원지기의 관리를 받아야만 나무들은 해가 갈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리라 여긴다. 마을 뒷산에는 외래종인 ‘리기다’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특징은 한국 소나무보다 훨씬 빨리 자라지만 적당한 간벌(間伐)이 안 되어 같은 소나무끼리 경쟁해야하고, 밑에는 여러 활엽잡목들이 치열하게 다투며 위협하므로 햇볕을 향해 자꾸 위로만 솟구쳐 오른다. 그로인해 상대적으로 뿌리가 약해서 심한 태풍이 오면 일시에 쓰러지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관리를 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모두가 공멸(攻滅)할 수 있는 위태함을 느낀다. 우리 인간의 삶에도 다스림 받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리라 여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성경말씀에도 성령의 일곱 가지 열매중 가장 마지막 열매는 ‘절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빠른 속도와 편리함을 자랑하는 고급 승용차라도 제동장치가 미흡하면 치명적인 결함이 되기도 한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크고 좀 더 편리한 그 어떤 문명의 혜택이 있다해도 제어할 수 없는 장치라면 오히려 더 큰 고통과 해로움이 될 것이다. 사람의 삶에도 절제하지 못하는 온갖 욕심은 결국에는 파멸로 이르는 역사적인 교훈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작은 정원이지만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만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에덴동산도 처음에는 아담의 다스림으로 인해 행복한 낙원이었고 또한 창조주의 본래 의도하신 목적이었다. 사람도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다스림 받는 것이 영원한 행복이건만 풍요한 중에서도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과, 그 욕심을 절제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므로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의 씨앗이 된 것이다. 앞으로 이 세상은 갈수록 더욱 풍요와 편리함과 만족케 하는 추세로 가겠지만 절제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합당한 미덕임을 작은 정원을 가꾸며 느껴본다. 나의 맘속에도 늘 주님의 다스림으로 인해 선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위해 오늘도 기도한다. 활뫼지기 박종훈
62 no image 목회자가 음악을 알아야 제사장적 직무를 다 할 수 있다 (89)
박인철
5015 2012-03-21
 성경과 만물에 계시된 음악을 알아야 온전한 목회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의하여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제사 시작 때부터 마칠 때까지 부는 나팔의 곡도 지정하고 백성들의 제사를 하나님이 온전히 받으시도록 백성을 인도하고 제사를 집행하는 목회자의 중대한 직무가 있다.  예배와 집회에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분위기와 성격을 지배하는 교회의 음악을 많은 목회자들이 신앙이 아주 일천한 지휘자나 철부지 싱어들에게 그냥 맡겨 놓고 말한마디 않거나 못한다. 이것은 제사장적 직무의 심각한 유기이다. 예로, 많은 정통교회에서도 소위 어버이주일에 성가대의 찬양곡의 가사가 전적으로 어버이(어머니)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북한의 공식 집회에서 김일성, 김정일 찬양가 부르듯이) - 작년의 경우 검색 35교회중 7교회 - 설교는 하나님편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부모님을 위로. 축복하거나 공경하는 성경말씀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예배에서의 찬송과 성가대의 찬양은 그 영광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이시다. "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 어버이의 일생을 인도하심을 주께 감사하는 품격 넘치는 찬양곡이 많이 있다(시23편 주제). 별도의 2부 순서도 아니고 예배찬송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찬송하는 것은 범죄이다. 이것은 음악의 문제도 아니고 일차적 가사의 신학적인 문제인데도 목회자들이 방치할 뿐 아니라 자신도 그런 예배찬송가를 별생각없이 찾아 교회가 부르게 한다. 분명히 제사장으로서의 심각한 직무오류이다 (20여년 전 보수교단의 새찬송가를 없애고 통일찬송가에 합류하면서 어머니를 찬양하는 아주 잘못된 찬송가가 섞이게 되었다) 예배는 신령해야 하고 당연히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주일이 거룩한 것은 주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예배가 거룩하고 신령해야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신령한 노래란 가사는 물론 당연히 곡도 신령해야한다. 다윗의 수금(음악)소리가 신령하지 않았는데도 악신이 도망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음악을 다윗은 정숙한 소리라고 말한다. * * * * 이 내용을 여기에 굳이 기고함은 최근 20여년 동안에 한국교회들이(보수교단이 훨씬 더) 사람만 많이 모이면 되는 미국 발 신복음주의에 몰입하여 주일예배찬송까지도 복음송 노래로, 그것도 신령함과 정숙함과는 거리가 먼 음악들로 교회에 채워짐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본인도 젊어서 주바라기 복음노래선교단으로 전도에 협력했으나 지금 같은 노래들은 없었다. 여기의 내용들은 지난 30년여년간 교회음악을 담당하면서 배우고 또 음악월간지등 몇 곳에 기고하거나 세미나에 강의 내용 중 두서 없이 간추려서 제시한다. 이 내용들은 단지 학문적이 아니고 실제 예배와 집회현장에서 내가 믿는 바대로 때로는 산이 들리어 바다에 옮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면서 나름대로 매순간 집중하여 힘을 다함으로 받게 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자 함이다. 오래전에는 신령한 교회, 신령한 목사님 등의 말을 많이 들었다. 무슨 이유일가? 요즘은 거의 듣지 못한다. 음악이 무엇인지, 신령한 음악이 무엇인지, 신령하지 못한 음악이 무엇인지 성경은 말씀하신다. 1. 음악의 시작 음악의 시작은 주로 느혜미야서, 욥기서, 이사야서, 에스겔서에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서 창세전의 음악과 천상의 음악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은 음악의 창조자시며 음악이 그분에게서 나오며 또 음악으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며 오직 자신만 그 영광을 받으려 하심이 명백하다. 또한 만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성을 볼때에 하나님 자체가 음악적인 분이심이 분명하다.  음악의 3대 요소는 리듬과 선율과 화음이다. 하나님은 3위이시며 천상의 노래는 항상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세번 노래한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만물(성경과 정통성가에서는 자연이라는 말이 없다) 에서 우리는 리듬과 선율과 화음을 선명하게 느낀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만물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신성이며 이를 몰랐다고 핑계치 못할 것이라 하심이다. 창세 전 하늘에서의 음악은 하나님이 계명성(Luci - 외경에 루시엘) 광명의 천사를 지으시고 그에게 소고와 비파를 들려주셔서 하나님을 찬송토록 하였는데 그의 역할은 달이 햇빛을 반사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자기의 노래로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다가 땅에 떨어져 하늘의 빛을 잃고 어둠의 사탄(Lucifer-빛을 잃은 자) 이 되었다. 그가 음악 담당 천사장으로서 자신을 노래하게 하던 일단의 천사들과 함께 떨어졌으니 요한계시록에 나타낸 바로는 천사의 1/3 이다. 그러하니 사탄과 그 많은 졸개 마귀들의 권세를 하나님의 신령함이 아니면 누가 당하겠는가! 창세 후의 음악의 시작의 기록은 가인의 4대손 라멕으로부터인데 가인과 그 후손은 불순종의 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피하여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유리하는 자가 되었고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하여 라멕은 자신과 자신의 악을 찬양하는 최초의 노래를 지어 부르고 아들 유발은 소고와 퉁소를 만들어 아버지 노래를 반주하며 자신과 자신의 악들을 노래와 악기로 찬양하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천상에서 소고와 비파(수금의 일종) 를 갖고 쫒겨난 사탄이 땅에서 가인혈통의 음악으로 하나님께 대적하게 되었다. 그러면 다른 혈통의 음악은 없었는 가? 기록으로는 아벨 대신 주신 셋의 가족들이 '여호와' 의 이름을 비로서 불렀다 하였으며 그의 3대손 이름은 '마할랄렐' (하나님께 찬송) 임을 볼 때, 이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셋혈통의 음악이 있었으니 이 음악이 만물에 계시된 하나님의 신성으로 나타내신 음악임을 살펴본다. 동물과 달리 사람은 태어날 때에 똑같은 음정의 첫 울음소리를 갖는다. 세상 모든 아기는 태어나서 내는 생명의 첫 울음소리를 모두 같은 음정 A(가)음으로 우는 것이다(440Hz) 그리고 이 음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온갖 희로애락으로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이 음정의 톤으로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걱정, 다툼없이 항상 기분 좋은 상태로만 살아 간다면 이 음정을 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전화기의 신호음까지도 기분 좋은 이 A음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이 A(가) 음정을 사람의 몸에 절대음정으로 넣어주셨다. 아기를 많이 낳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 단순했던 시대에 자연히 이 A 음정은 대를 이어 가장 큰 기쁨의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기준음이 되었을 것이다. (시편의 '셀라' 는 이 기준음에서 정해진 어떤 음으로 높이라는 뜻으로 본다) 이 A음정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끊기지 않고 전수되어 악기 없이 노래하는 이스라엘 민족음악이 되었고 칼빈의 종교개혁 초기에 타락한 교회안의 모든 음악을 없애고 초기 카타쿰 교회 때처럼 악기없이 단순하게 이 A음정으로 인도자와 성도가 시편을 서로 교송으로 찬송한 것이 지금의 시편 교독이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지금도 교회안의 모든 의식문 낭송에 이 A음정을 사용한다) 칼빈은 다시 기존의 교회선법(정해진 8곡-12곡)으로 시편가를 부르게 하고 또 성가학교를 세워 발전된 새 작곡으로 150편의 시편찬송가를 만들어 다시 오르간과 함께 부르게 한 것이다(쯔빙글리는 본래 오르간음악가였으나 개혁후에 끝까지 교회안에 음악을 허락지 않는 절대적 우를 범했다) 성경과 교회음악사적으로 음악의 타락은 항상 악기와 함께 한다. 그래서 초기의 교회음악은 악기없이 노래하는 아카펠라로 교회선법내에서 찬송을 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셋혈통의 음악을 이어 온 줄기이다. 2. 사운드와 노이즈(Sound & noise) 모든 악기는 온도와 습도등 여러 여건에 따라 음정이 변하는데 악기를 제작하거나 연주 전에 튜닝을 변하지 않는 사람의 절대음정인 A음에 맞추는 것이다. (연주시에 주로 피아노 A음에 맞추어 튜닝하는 것은 임시방편이며 그 피아노는 먼저 조율사가 자기의 음정 A를 기준하여 화음을 귀로 들어가며 아래 위의 음들을 모두 조율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만물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성으로 나타내시는 음악의 비밀이다. Sound는 " 울림이 있는 기분을 좋게 하는 소리" 로 음향으로 이해되는 소리이며 그 음향(사운드)의 기준음이 A음이다. Sound 의 음악은 말 그대로 즐거운 소리이며 듣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소리, 평화와 안식의 소리이다. 이 소리는 하나님의 신성을 따라 나오는 소리이다. noise 는 "울림이 없는 날카로운 소음, 잡음" 이며 기준음이 따로 없다. 노이즈는 사람을 피곤하고 짜증나게 하며 싸움과 다툼을 일으킨다. 이 noise는 사탄(루시퍼)이 준다. 지금 우리교회에는 Sound의 음악으로 신령함이 있는가? 아니면 noise가 가득한데 한쪽이 체념하고 참고 있는가? 본래 셋의 후손 이스라엘은 악기 없이 하나님을 찬송하였었는데 출애굽하면서 소고를 가지고 나와서 홍해를 건넌 후에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미리암이 손에 소고(음정이 없는) 를 잡고 춤을 추니 모든 여인들이 따라 소고를 잡았다.(미리암이 문제다) 얼마 후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시내산에 데리고 갔다가 돌판 계명을 받고 40일만에 돌아 올때에 백성들의 시끄러운 noise에 애굽의 경험이 없는 어리고 순전한 여호수아는 놀라서 모세에게 "진중에 싸움이 났다" 고 했으나 애굽의 40년 경험이 있는 모세는 그 싸우는 것 같은 noise 가 애굽식의 우상숭배하는 노래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 "내가 듣기에는 노래소리라" - 아론과 그 일당들이 애굽에서 우상찬양의 노래로(아마 괭가리도) 난리를 친 것이다. 이 소리가 모세만 따라다니며 경건훈련 받는 순진한 여호수아에게는 싸우는 소리로 들린 것이다! 모세는 내려와서 직접 보기전에 이미 멀리서부터 이 noise만 듣고도 분이 머리 끝까지 올랐을 것이며 내려와 참지 못하고 하나님이 직접 새겨주신 돌판을 던져 부수게 된 것이 아닌가! 사탄의 영들에게는 노래이며 음악인 것이 신령한 자들에게는noise로 들리는 것이다. 사탄의 영들의 음악은 그 특징이 항상 노래소리보다 훨씬 크고 시끄러운 악기를 동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악기는 애굽과 바벨론(특히 느브갓네살)등 이방에서 우상신을 섬기는 것으로 융성하였는데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과 또 이방과 섞이면서 점점 악기가 성하게 되었다. (모세가 구스여자를 얻은 것이 결코 잘한 것은 아니다. 노아의 술취한 추태가 잘한 것이 아닌 것처럼....... 단지 하나님이 구속사역을 위하여 묵인하였을 뿐이다) 3. 다윗의 악기와 음악 이방의 온갖 악기들이 들어오고 세월이 흘러 음악에 능통한 다윗도 수금을 즐겨 탓는데 다행이 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라! 그는 신령함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자이다. 그가 타는 수금의 소리는 공교하고 정숙한 소리로(시편) 그 Sound 에 악신이 도망하였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타는 신령한 수금 Sound 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으로 인하여 악신이 도망하였다. 음악이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이 내재하는 평안의 소리 Sound에는 싸움과 다툼의 noise를 음악으로 즐기는 사탄이 머물 자리가 없다. 이것이 성경과 만물이 계시하시는 음악의 이해이다. 교회안에서 누가 가사로 정면으로 하나님을 배척하겠는가? 사탄은 그리 어리숙하지 않다. 교회안에 무늬(가사)만 찬양인 노이즈 음악이 지배한다면 분명 악신들이 꼬여 뛰놀게 될 것이며 교회안에 사운드가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신이 충만 하리라! 우리가 영으로 예배한다고 하면 안된다. 사탄이 주는 영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신령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다윗이 성전제사를 찬양예배로 성가대와 악단을 30년이나 준비시키면서 나단선지자와 갓 선견자를 통해 하나님이 지시하여 만든 '여호와의 악기' 로만 연주하게 하였다. 이 나단과 갓을 통하여 지시하신 여호와의 악기는 여러번 언급되며 후에 이 악기들을 다윗의 악기 라고 하였다. 다윗은 셋혈통 음악의 계승자이며 하나님의 음악을 연구 발전시키고 집대성하여 찬양예배를 위한 이 음악의 기틀로 지금도 정통교회들은 시편가사의 찬송을 신령한 곡에 실어 부르는 것이다. 그는 성전이 지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는 해돋는 동쪽,  즉 제단의 동편에 성가대석을 지정하였다. (참고 : 성가대를 찬양대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찬양이란 노래, 춤, 시 등 모든 형태의 경배를 지칭하는 말이다. 굳이 쓰려면 찬양가대 라고 해야 맞는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아모스 선지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네 노래소리를 내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 리라" 배불러 침상에 눕듯이 하여 편안하게 자기들이 즐기기위해 부르는 노래를 집어 치라는 것이다.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마음에 합하고 자기가 짓지도 못할 성전봉헌을 위하여 30년을 정성으로 성가대와 여호와의 악기로 하나님 찬양을 준비한 자였으나 아마도 그가 전쟁마다 승승장구하여 살기가 꽤 넉넉하여졌을 때에 배를 두드리며 스카이 라운지에서 연회할 때에 악신이 물러가던 신령한 여호와의 악기 소리가 갑자기 고리타분하게 들리고 띠융띠융, 쿠다다다 신나는 소리가 나는 악기들을 따로 만들어 연주시키고 노래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물론 가사는 하나님 찬양이었겠고...) 그 음악소리가 신령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신이 떠나가고 띠융띠융, 쿠다다다 소리만큼 강력한 악신이 얼씨구 들어가서 벌거 벗은 밧세바가 눈에 보이고 도대체 우리가 아는 다윗으로는 상상도 안되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하게 된 것이리라. 이때 다윗에게 들어 온 악신은 졸개 마귀들이기보다는 그토록 교만했던 욥에게 갔던 사탄이 직접 들어갔으리라! 요즘 먹고 살만하게 된 한국의 성도들과 그들의 교회가 친목공동체交會로 모여 편안하게 오로지 즐기는 찬양과 그런 열린예배를 관람하고 있다는 생각에 참 안타깝다. 요즘 공동체교회들은 내가 어렸을 때에 그렇게 많이듣던 사탄, 마귀 얘기를 전혀 안하고 얼마나 사랑이 없기에 오로지 사랑 얘기만 한다. 사탄에 의해 사람과 사람의 모든 것은 계속 타락한다.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사람에게 주신 순수음악도 사람과 함께 계속 타락한다. 4.음악의 발전과 확산 셋(다윗)의 음악 그리고 가인의 음악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에서 풀리고 발전된 헬라찬송을 가져다가 활발하게 찬송음악을 연구하던 중에 교회안에서 7음계의 클래식 음악을 발견케 하시고 이 클래식 음악이 C(다) 음을 기초로 하는 신비한 화성음악으로 날개를 펴면서 - 이 7음정들은 온음들 사이사이에 반음들이 섞여 화음을 이루는 신비한 음정들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본래 존재하던 것을 교회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신비한 7음계중에 이 A(가)음은 소리공학적으로 440Hz인데 다른 6개음을 포함한 세상 모든 소리는 정확히 떨어지는 소리로 잡히지 않는다. 즉 소수점으로 떨어지지 않는 무한소수의 불안정한 소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A음 외에는 어떤 소리도 과학적 수치로 다시 똑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화기의 삐 - 하는 신호음을 A음으로 통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아기의 울음이 순간적 첫 발성 소리는 모두 똑같은 440Hz의 A음인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이 440Hz 전후의 리드미칼한 바이브레이션 소리(극세한 차이)로 우는 것이다. 이 소리는 생명의 소리이며 생명을 주신 창조주께 탄생을 신고하는 감사찬송하는 소리이며 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소리로 우리 하나님께와 아이를 축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리이다. 이 비밀은 A음을 기준으로 하는, 음악 3대요소에 충실한 Sound 음악으로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를 명백하게 한다 - 오르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한층 화려하게 드러내는 놀라운 화성음악으로 "천지창조" "메시아" 등으로 세상을 흔들며 서구의 모든 생활 음악 까지도 교회의 클래식 Sound 음악으로 가득하게 되어 서구는 민속의 유행음악 조차도 다 클래식화 되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 때에 루터는 급한대로 세속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 찬송가로 썼는데 이것이 무슨 잘못은 아니다. 그는 그 음악들이 교회에서 나간 Sound 음악임을 알기 때문이다. (음악 미개국의 노래는 3-4음계이며 우리 국악이 그나마 5음계를 쓰는 것도 이제 겨우 100년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술먹고 즐기는 사람들에 의하여 서구의 음악들도 점차 타락하게 되고 더욱 타락한 음악들이 신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역으로 교회에 들어와 교회에 혼란을 주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 한국은 기독교음악으로 세상에 전혀 영향력이 없을 뿐 아니라 30년전경부터 신복음주의 물결로 새로 예수믿고 교회에 들어 오는 성도들, 신학생들, 교역자들이 기존 교회가 감당할 수 없이 급격히 늘어 나면서 세속에서 익숙해진 음악들(noise 수준) 로 신학교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음악, 클래식 Sound를 다 밀어 내는 것이다. 미국발 신종 플루같은 신복음주의에 편승한 소위 CCM 복음송의 물결이 무섭다. 이것이 단순히 사람에 의한 물결은 아니다. 클래식 Sound 음악을 통한 그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에 접해 보지 않은 그들은 그 영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뿐 아니라 그러한 웅장한 영광에 참여해보는 것 조차도 부담스러워 하며 두려워하는 것 같다. 평화와 안식의 소리, 햇빛과 같이 찬란한 영광의 소리, 그 Sound로 인하여 처소를 빼앗길까 두려워 피하게하는 영은 누가 주는 영일까? 일찌기 예수를 믿고 교회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중대한 사명이 있다. 초대 교회에 믿음의 선진국의 선교사들을 통해 전수된 클래식 사운드의 찬송음악을 사명감으로 지켜내야 한다. 뒤늦게 신복음주의로 음악의 3요소가 파괴된 음악과 함께 예수를 알게 된 이들은 3요소가 충실한 음악이 하나님 3위의 신성이 내재하는 신령한 음악임을 잘 알지 못한다. 여러 임상실험의 결과, 영적 영향 아래 있지 않을 것 같은 식물들도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쪽으로 쑥쑥 자라고 도를 지나친 재즈, 그리고 팝, 락, 헤비메탈 음악을 들려주면 모두 소리의 반대쪽으로 자라며 그나마 죽정이 같이 자란다. 그것은 사탄이 내는 노이즈이기 때문이다. 개들에게도 이런 음악을 계속들려주면 얼마 안가서 스트레스를 받아 길길이 날뛴다. 사운드의 소리는 식물까지도 잘자라게 하며 젖소의 우유가 풍부해진다.(노이즈음악의 결과는 정반대)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음을 바울이 보았고 우리가 보는 증거이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은 특히 임신중에는 음악 3요소가 파괴된 noise 음악 대신 꼭 클래식음악으로 태교한다. 내 안에, 나의 음악 안에 하나님의 신이 거하든지 사탄의 영이 거하든지 이다. 다윗의 수금의 신령한 소리로 악신을 내 쫒든지 사탄이 좋아하는 noise 음악으로 악신을 부르든지 이다. 재즈음악, 락음악, 뉴에이지 음악 하던 자들은 다 일찍 죽는다. 영국의 유명한 비틀즈 4인방은 하나는 총맞아 죽고 하나는 마약으로 죽고 하나는 매독으로 죽었다. 미국 팝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는 42세에 마약으로 죽었다. (미국의 최초 복음송CCM대회 그래미상 최우수 수상자이다 - CCM측이 일부러 돈주고 끌어들임) 전세계를 열광시키던 마이클잭슨도 마약으로 요절했다. 최근에 어느 여자 록 가수도 마약으로 요절했고 그를 따르던 자들은 통곡을 한다. 유명하지 않은 모든 노이즈 가수들도 다 이렇게 죽는다. 이들의 몸에는 누구의 영이 있는가? 이렇게 바로 눈앞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의 사실들을 분명히 보고 들어 알면서도 교회들은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 안에 아무 제한의식 없이 심지어 주일예배에 까지 상용한다. 3요소에 충실한 Sound음악과 이를 파괴하는 노이즈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지면으로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한국 초대교회의 지도자, 성도들은 임상실험 결과도 없었고 달리 배운 것도 더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수십년간 클래식 사운드의 신령한 음악으로 예배하며 후대에 전수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한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며 순종함에서 신령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구약 제사의 나팔처럼 예배시작에 오르간이나 성가대의 웅장한 송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고 베드로 사도, 12사도들의 신앙고백, 즉 사도신경을 우리가 따라 신앙고백으로 아뢰며 공회가 정한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하는 이 모든 정통을 순종함으로 바른 정통교회가 대를 이으며 시온성과 같은 교회들로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이다. 요즘 신복음주의 교회들이 스스로 交會라 하고 또 실질적으로 그렇게 인식하는 자들은 살만해진 자들끼리 모여서 꼭 순종해야 할 말씀은 피하여 가르치지 않거나 왜곡하고 능력있게 회원들을 많이 모으는 친목회회장인 목사가 성경 한구절 골라 공동체 회원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멘트로 전하며 재밌는 노래로 지절거리며 워십댄스로 즐겁게 해주고 여러 이벤트로 사회성을 만족시켜주는 실질적 문화친목회이다.  - 예배시간에 찬송가 한장을 엄중하게 부르는 사람에게는 지절거리는 노래 부르지 말라 는 하나님의 말투가 참 적절하게 들린다 - (저들 교회의 성경에는 아마도 아모스서는 없을것이다) 5. 결 론 - 가르침과 순종으로 하나님과 음악을 알고 전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아기가 태어 날때 이 울음소리 A음정(피아노의 라음)은 부모와 가족과 소식을 들은 온 동네의 기쁜소리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소리이다. 설교자의 소리도 이 톤을 기준하여 리드미칼하게 선율적으로 오르내리면 듣는 이들에게 기분좋은 톤이 된다. 발성까지도 아기 울음소리와 같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설교할 수 있다면 목도 피곤치 않을 것이고 기원, 축도, 성경봉독, 대표기도, 특히 주기도, 사도신경, 시편교독(송) 도 이 A음정으로 통성하여 할 수만 있다면 기분좋은 소리가 될 것이다. 성가대가 목사님과 협력하여 이 A음정을 기준으로 통일하면 통성도 잘되고 예배분위기가 상당히 밝아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협력한다는 것은 성가대 전체가 예배인도 목사의 톤에 맞추는 것이며 인도목사는 가급적 A음의 톤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인데 하려고만 하면 바로 자리가 잡히고 쉬워진다. 이것은 추론이나 이론이 아니며 실제이다(시행의 결과). - 물론 회중 전체가 따라오는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성가대를 세우는 목적은 찬양곡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모든 음악, 즉 회중찬송가도 정확하고 힘있게 불러 리드하고 모든 순서에 예배인도위원으로서 힘을 다해 목사의 제사장 직무에 협력하게 함이다. 화목의 사운드 인간은 다 부족하여 6일동안 이 A음정을 잊고 살게되지마는 그래서 주일만이라도 인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과 그 주신 소리를 회복할 수 있는 날을 주신 것이며 본래 주신 기분좋은 Sound 의 소리로 예배하는 것을 원하실 것인데 문제는 화평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 기분좋은 소리를 내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형제와 먼저 화목하여 기분 좋은 소리로 예배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 종 경험적으로, 성가대석에서 옆의 형제자매와 끝까지 반목하는 사람은 시편교독하고 신앙고백할 때에 이 음정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신뢰하는 리더의 요구에 순종하여 이 음정의 소리를 억지로라도 같이 내어 신앙고백하고 시편교독하는 사람은 어느새 찬송가도 부르게 되고 성가찬양을 기쁨으로 하게되어 예배 마칠 때쯤에는 이미 그 마음에 반목이 사라지고 화평이 있음을 스스로 놀라 간증 한다! 부부싸움하고 마음에 별로 내키지 않게 힘들게 교회 와서 힘들지만 억지로라도 순종하여 따라서 이 A 음정으로 같이 신앙고백하고, 시편교독으로 통성하며 찬송부르며 예배하고 나면 참 기분 좋게 손잡고 집에 가게 되는 것이다. 내 마음에 있든지 없든지 순종하여 즐거운 소리에 합력하면 같이 즐거워지는 것이며 참 쉽게 화목과 화평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즐거운소리 Sound의 신비함이다. 6일동안 세상에서 찢기고 부서진 사람이, 먼저 화목하고 예배하라는 말씀대로 스스로 100% 부부와 또 남과 화목하고 온전함으로 예배하러 올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찟겨진 마음일찌라도 순종함으로 주일에 예배당에 와서 같이 예배하며 부르는 찬송에 하나님이 같이 즐거이 부르시며 화평의 복을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실제적 계시의 말씀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평생에 주일을, 생명을 주시는 명령의 날로 알고 지키며 주일마다 온전한 화평의 회복을 받는 가정이 어찌 망하며 그 복을 전하는 교회를 하나님이 어찌 기억지 않으시겠는가! 자기의 맘에따라 예배하는 가인과 사울의 불순종의 제사로는 결코 이 계시의 복을 가질 수가 없다! 제사장, 선지자의 직무 나와 여럿의 간증으로 분명한 것은, 예배를 마치고도 화목이 없다면 이는 억지로라도 순종의 예배가 없었고 자기의 마음 상태대로 예배를 마쳤다는 증거이다. 진실한 마음이 안생긴다고, 혹은 마음은 있다고 하면서도 주일예배에 빠지면 이것은 0 점이다. 진실한 마음이 안생겨도 순종하여 주일예배에 참석하면 50점을 얻는 것이고 또 순종하여 억지로라도 A음의 톤으로 신앙고백, 시편교독을 하고 나면 어느새에 나머지 50점은 은혜로 채워져서 100점 예배의 축복이 된다. 이 화평의 복을 성도들이 예배를 통하여 경험하며 간증하도록 먼저 순종의 복을 경험하고 이것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이 부여하고 부탁하시는 제사장, 선지자로서의 사명일 것이다. 명령을 전하는 일 인간 타락과 구속사역의 근원인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으면 꼭 죽으니 먹지말라 는 명령을 확실하게 전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어느 교단, 교회 할 것 없이 신종플루 같은 신복음주의에 감염된 교회들이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서 불순종하면 영원히 죽는다' 는 사실을 말하고 전하는 교회가 있는가? 사탄은 하늘에서 음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지음 받은 자였으나 그 영광을 가로채려고 자기의 노래를 부르다가 쫒겨나 땅에 떨어진 자이다. 그 사탄은 예수를 찾아가 세상과 사람의 영광을 주겠다고 꾀이며 똑같이 예수의 교회를 찾아가 꾀인다. 칼빈개혁주의의 최고의 가치는, 교회와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찬송음악이 사람에게도 은혜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찬송으로 하나님의 영광속에 들어감으로 맛보게 되는 은혜이다. 교회와 성도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행위가 예배일텐데 사탄은 끊임없이 오직 하나님께 향하여야 할 예배의 영광을 자기에게 사로 잡힌 자들을 통하여 그 영광을 가로채려 한다. 교회가, 성도들이, 예배에서 음악의 3요소를 상실한 noise 날라리 음악으로 즐기며 신령한 Sound 의 찬송가를 배척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순종을 상실한 교회라 할 수 밖에 없다. 어느 교회가 어떤 소리의 음악으로 예배하는가는 전적으로 목회자에게 있으며 목회자의 책임이다. 정녕 다윗의 정숙한 수금소리(가사가 아니다!) 를 거부하면 교회와 맡기신 성도들을 악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순종의 명령을 거부하는 회(會)는 사탄의 회이다 그들은 불순종하기 위하여 스스로 敎會 이기를 포기하고 交會라고 선언한다! 그들의 교회는 더이상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敎會가 아니다. 자기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의 댓가로 산 交會이다! 담임목사가 살아서도 하나님의 말씀(?) 전하러 무대에 등단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아 천상에서 쫒겨난 루시퍼(사탄)와 꼭 닮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더니 죽어서도 한달간을 스크린으로 무대와 나와 더 큰 박수의 영광을 받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라진다 (나갈 때에 죽은 목사 실물사진과 함께 꼭 사진찍고들 가라 한다. 뿌리 깊은 인간우상숭배의 무리들이며 사탄의 회임이 분명하다) 이들의 예배는 noise로 가득하다. 자기들끼리 즐기는 지절거리는 노래! 이 사탄의 회들은 공회가 정한 찬송가를 고리타분하게 여기며 배척한다. 지절거리는 노래 속에 어쩌다 찬송가 한곡 끼워서 부르더라도 기껏하여 자유주의자들과 함께하여 잘못 섞여진 사람을 위한 복음송이거나 어머니 찬양가일 뿐이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다 회원으로 모집하기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交會로부터 발진된 '경배와 찬양' 과 그 소위 '열린예배의' 물결이 신종 플루같이 20년 만에 한국교회들, 특히 보수교단을 강타하여 수천년간, 그리고 한국교회 100년 예배의 정통성을 헤집어 놓았다.. 그중에도 교단을 분립한 일로 그 정통의 뿌리가 현저히 약해진 합신의 신흥 교회들이 정신없이 몰입하는 것이 경배와 찬양의 열린예배이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문화행사로 예배를 빙자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며 즐기기 위하여 하나님과 예수를 폄하하여 인간의 드라마로 공연하며 끌어 내려 맞추는 사탄의 회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요란한 박수소리.....그리고 좀 미안한지 2차로 하나님에게도 영광의 박수를 하자고 하는 그자리에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신령함과 정숙함의 Sound는 없었다. 예수를 말한다고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지는 않는다. 사탄도 예수를 알고 굴복한다. 사탄의 음악으로 인하여 같이 죽은 자들이 모여 사탄의 영의 지배를 받는, 그들 자신의 말대로 예배를 문화로 만드는 인간문화 친목交會일 뿐이다. 개척 때부터 교회당을 종합문화 공연장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예수와 그 사역을 교묘히 폄하하고 개혁주의로 부터 이단적인 것으로 비판받는 온갖 신학사상을 혼합하는 교회인 것은 의식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것이고 담임목사는 혼자서라도 독립교회연합에 가입한 자인데 앞뒤 가리지 못하는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그를 무슨 한국교회의 4인방이니 하며 그를 우상화하며 칭송하며 따라하느라고 정신을 놓았다. 이것에 가장 열심인 자들이 바로 합신출신들이다.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본산 교단인 그 교회의 부목사로 줄을 서며 거기서 배우고 나온 자들이 합신출신이라고 다시 들어와 그 배운 것을 가지고 합신을 어지럽히는데(합신 교정에서 강사, 교단의 한자리 차지 등으로) 이들을 무슨 금그릇 같이 대접하며 받드는 것이 합신과 교단의 실제이다. 그중 하나는 이벤트를 잘한다고 그 교회의 전임목사에게 지명받아 후계자로 교단을 겁박하여 편법으로 승인을 따 냈다. 그리고 합신측은 이를 자랑스럽게 얘기들을 하며 특별 초청하여 합신 교정에서 총장과 인터뷰도 한다. 이것이 요즘의 합신 정신상태의 현주소이다!! 정녕 이제 합신교단에게는 경배와찬양, 열린예배만 보이고 진리의 계시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비밀이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 보이는 것에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가리는 악신이 지배하는 자들의 空會가 되어가는가? 신복음 혼합주의 문화센터로 성공하여 회원 수가 급성장한 대표적인 交會들이 합신의 모델이 되고 있으며 합신 1세대의 시온성과 같은 교회들을 골동품 취급하며 꺾으려 하며 회원 숫자의 힘으로 몰아내고 있다. 심판날을 위하여 사탄에게 공중의 권세를 허락하셨으니 이를 누가 막으랴! 신복음 혼합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어 놓고 노이즈 음악과 춤과 온갖 인간의 수단방법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기만 하는 허울 좋은 복음주의자들이다. 이들에게는 공동체의 친목회원들만 보이고 2천년 교회 역사와 공회와 그 헌법의 정신으로 지켜가야만 하는 것들은 그들에게는 복음(?)을 위하여 한낮 휴지조각만도 못한 무가치한 것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회가 아니고 친목연합회가 필요할 뿐이다 (목사 혼자서라도 실제로 독립교회연합에 가입도 하는데 모두들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것이 현실이다) 저들의 회원모임 숫자에 현혹되지 않고 맡기신 주의 양들을 천국까지 잘 인도하려면 이제는 내 마음의 생각보다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도 깊이 생각하신 성경의 내용들과 만물에 계시된 하나님의 신성과 또 현상들로 보여주시는 말세의 일들을 깊이 상고하고 묵상함으로 순종을 먼저 배워 이를 모범으로 양들에게도 전하여 순종을 꼭 가르치시기를........ 이렇게 순종을 배우며 가르쳐 영혼을 실제로 구원하며 교회안의 모든 악신을 물리치는 Sound의 우렁찬 찬송소리로 자기백성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敎會가 독생자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이리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 감사합니다.
61 no image 주인만 바라보는 진돗개 (1)
박종훈
3724 2012-02-10
 주인만 바라보는 진돗개 교회당 입구 쇠창살로 만든 집에 진돗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사택에서 문을 열면 주인의 모든 행동을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먹이를 주기위해 현관문을 여는 기척만 나도 귀를 쫑긋 세우며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다 음식이 확인되면 어서 달라며 좋아 죽겠다는 표현으로 꼬리를 흔들며 그 안에서 널뛰기를 한다. 작업을 위해 마당에서 왔다가는 중에 어쩌다 한 번씩 쳐다보면 진돗개 역시 나를 빤히 쳐다보며 혹시나 좋은 일이 있을까 기대하며 꼬리를 흔든다. 평상시 한두 번씩 간식도 넣어주기도 하며 잠시 놀아주기 위해 문을 열어주면 송아지기 외양간 밖에 나와 뛰놀듯이 좋아 어쩔 줄 모른다. 이런 행운이 찾아올까 기대하며 주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비록 동물의 본능이지만 주인만을 사모하는 그 모습 속에서 또 다른 주인을 모시고 사는 나의 모습을 살펴보게 된다. 종(從)이지만 엄청난 자유를 주고 마음껏 먹을 것을 선택하도록 공급하시는 주님을 그 얼마나 의식하며 쳐다봤는가? 주인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다가 주인이 조그만 손짓에도 좋아서 펄쩍 뛰며 반응을 보이는 진돗개도 있는데, 나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과 손짓에 얼마나 무디게 반응했는가를 생각해보니 마치 소가 닭 보듯 했던 것 같다. 주님이 주인이라고 늘 말로는 시인하면서도 내가 먼저 결정하고 나중에 기도하는 종과 주인의 위치가 뒤바뀐 삶이었음을 인정한다. 개보다 못한 종이라고 책망할까? 아니면 진돗개를 통하여 인자하게 가르치는 주님의 교육일까? 농한기인 겨울에는 거의 매일 진돗개와 마을 뒷산 산책길을 같이 동행한다. 이 시간은 진돗개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고 기다리는 즐거움이다. 산책에 나서기 위해 장화를 신고 모자를 쓰면 벌써 알아보고 같이 가자는 표시로 ‘낑낑’ 소리를 내며 준비운동을 한다. 생리적인 해결도 이 시간에 하려고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밖에 나오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볼일을 본다. 산책을 같이 하면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며 마음껏 자유를 누린다. 빨리 달려갔다가 오기도 하고 나의 손을 살짝 물기도 하며 무심코 발로 찬 돌멩이를 기어이 찾아서 물고 오기도 한다. 그동안 여러 마리의 개를 키워보며 느끼지만 산책을 싫어하는 개는 하나도 없었다. 진돗개는 다른 개와 달리 항상 지키는 원칙이 있다.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오며 자기 맘대로 멀리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전에 다른 개들은 어느 정도 길이 익숙하고 주인이 한눈판다 싶으면 살그머니 집근처로 내려가서 말썽을 부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진돗개 역시 마찬가지로 자유의 몸짓을 충분히 하고 싶겠지만 주인과 동행하는 충직함을 보여준다. 산책길에 먹을 것이 없고 친구가 없어도 주인과 같이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진돗개를 보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나는 주님과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가? 나의 원하는 기도가 응답이 안되고 현실의 여러 문제가 쌓여 있어도 진정 감사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주님이 아시리라 여긴다. 산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걷기 운동이고, 진돗개와 같이 가는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멧돼지의 두려움 때문이다. 천적이 없는 멧돼지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며 개체수가 늘어나서 인가(人家)근처에도 내려오고 있다. 산책을 하면서 늘 감사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숲을 오감(五感)으로 느낀다. 이 시간은 묵상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이기도 하며, 나의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게으른 자에게 개미에게로 가서 지혜를 배우라는 잠언서의 말씀처럼 충성스런 진돗개를 통하여 천지(天地)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종의 자세를 배운다. 개가 집 안에 있을 때는 주인만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오면 주인만 따르는 진돗개는 나의 친구이며 든든한 경호견이다. 요즘 비싼 샤료값 때문에 개 사육을 주저하는 추세이지만 우리 집 진돗개는 밥값을 충분히 지불하는 녀석이다. 활뫼지기 박종훈
60 no image 지적, 윤리적 올바름이 전부인가? (1)
장창수
3010 2012-01-09
부제: 성경의 리더십(43-45). 1. 믿음의 지도자에게 세속사적 관점과 아울러 구속사적 관점이 있어야 한다. 세속의 지도자는 세상 일을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그리고 옳음과 그름이라는 대립적 이분법에 따라 판단한다. 헤겔의 변증법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를 따르는 공산주의자는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반대자를 처리한다. 그러나 세상은 겉보기와 달리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에 의해 지배된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주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도자는 헤겔의 변증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악, 불의와 그름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들을 인류 사회에 허용한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먼저 그리고 늘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류 사회를 시험하기 위해 또는 징벌내지 징계하기 위해 악과 불의 그리고 그름이 사람들과 사회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둔다. 이 때 이분법에 따라 판단한다면 인류 사회는 더더욱 분열되며 혼란에 빠진다. 이것은 사단이 원하는 바이며 하나님이 징계나 시험을 위해 허용한 결과이다. 믿음의 지도자는 다른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징벌로 판단된다면 회개 또는 개선 및 개량하도록 사람들을 선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으로 판단된다면 믿음의 지도자는 올바로 지도하여 바른 선택을 하도록 대중과 신자들을 도와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반대자를 비평하고 판단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사회와 조직은 더욱 혼란과 분열에 처하게 된다. 흔히 이분법에 따라 사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징벌이나 시험 시기 자신의 올바름이나 선함을 증거하려고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반대자는 더더욱 그의 위선을 지적하며 대적한다. 그러므로 이분법에 근거를 둔 지적 올바름이나 판단력만으로는 혼란과 분열이 극복될 수 없다. 오히려 자신도 회개하거나 개선하려고 노력함으로 반대자를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상식적으로도 이런 좋은 지도자들이 있다. 그러나 믿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주됨을 항상 염두에 두고 세상사를 판단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믿음의 지도자는 세상의 지도자와 달라야 한다. 문제는 이런 믿음의 지도자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사회와 교회가 계속 혼란과 분열에 처한 이유이다. Normal 0 0 2 false false false MicrosoftInternetExplorer4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표준 표";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0cm;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0.0pt; font-family:"Times New Roman"; mso-fareast-font-family:"Times New Roman"; mso-ansi-language:#0400; mso-fareast-language:#0400; mso-bidi-language:#0400;} </style> 2. 창주 후 하나님은 선악을 판단하게 만드는 선악과를 먹지 말란 규례(창2:17절)를 아담에게 주었다. 타락 이전 인류가 준수해야 할 유일한 율법이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는 선악과 규례가 바로 윤리였다. 그리고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란 가르침(마7:1-5절)을 남겼다. 외식하는 자는 자신의 눈의 대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고 비판한다고 예수님은 설명했다. 여기 비판은 자신의 죄성을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정죄하는 행위를 뜻한다. 결국 예수님은 선악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는 하되 정죄하지 말라고 말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란 뜻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정적이나 반대자에게 무조건 돌리는 지도자와 목회자는 이 점에서 성경적인 리더는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리더들은 정말 유치할 정도의 수준을 보인다. 반대자와 정적도 대한민국이란 배에 탄 운명 공동체임을 잊고 그 배를 엎어 공멸을 자초하려는 비애국자이며 극히 어리석은 자이다. 이것이 한국 사회와 교회의 계속된 혼란과 무질서의 원인이다. 3.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인일 때 아들을 통해 대속 사역을 수행했다.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신자들도 같은 방법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도자나 목회자는 이분법적 사고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하지만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정적이나 반대자라도 신자 지도자는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이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백성인 피택자가 있기 때문이다. 신자 지도자와 목회자는 반대자라고 미워할 수 없다. 신자 지도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영역에서도 할 일을 잘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 은총 영역에서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세속사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우리들에게 충고한다(마5:39-44절). 누군가 오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주라고까지 예수님은 권했다. 신자 지도자와 목회자는 지적, 윤리적 올바름만 갖고 살 수 없다. 이를 자랑하지 말라!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강점도 부인할 줄도 알아야 한다. * http://blog.naver.com/rassvet
59 no image 10병동 1010호 /김승식 목사(인천노회 영광교회) (1)
최일환
3534 2011-12-21
(병상 에세이) 제10병동 1010호 인천영광교회 김승식 목사 성탄절과 년말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 때 나는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오래 전 부터 고생하던 발목수술을 하고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하던 중,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겨 재입원하여 벌써 보름 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다. 금방 치료가 되겠지 생각하며 2인실을 사용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염증을 잡지 못하여 치료가 더뎌지자 하루 십사만원짜리 병실사용은 만만찮은 짐이었다. 생각 끝에 한 주간 만에 6인실로 옮기기로 했으나 한두 가지 걱정에 사로잡혔다. 목사란 존재가 일반인들에게 노촐 되어 함께 지낸다는 것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고 오래 전 복막염으로 입원했을 때 일도 기억되어서였다. 당시 다인 실에 입원했다가 이틀 만에 독방으로 옮겨야했는데 문병객이 하도 많이 찾아오니 그것조차도 환우들에게도 폐가 되어서였다. 첫째 날. 휠체어를 타고 6인실에 들어서니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해서 조금은 멋쩍었다. 알고 보니 간병인 아주머니 두 분이 나를 맞는 것이었다. 다행히 창가 쪽 침대를 배정받을 수 있어서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 손가락 수술을 받은 환자가 한 명, 내일이나 모레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을 환자가 한 명, 그리고 장기 환자가 두 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나랑 입실 동기로 나보다 시차를 두고 입실을 했는데 무릎 수술을 받은 사람으로 이 분도 이인 실에서 다인실로 옮겨오는 경우였다. 이제 목사로써 이 병실에서 어떻게 처신을 할 것인가. 이것이 과제이다. 내 신분을 밝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기야 문병객들 때문에 내 신분이 곧 드러날 테지만 -. 이 병실 환자들은 어떤 환자들일까. 고고한(?)내가 다인 실에 연착 할 수 있을까? 우려 섞인 생각을 하면서 첫 날 밤을 맞게 되었는데 과연 밤늦도록 잠을 이룰 수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환자들의 신음소리. 밤새도록 틀어놓을 작정인양 꺼질 줄 모르는 텔레비전. 한 밤중임에도 들락거리며 혈압이며 혈당 수치를 재는 간호사들. 시도 때도 없이 북북 질러대는 방귀소리. 움직이지 못하는 중환자가 배출하는 대소변 냄새… 역시 만만찮은 날들이 되겠구나! 각오를 다져야했다. 황홀한 첫날밤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악몽 같은 밤이 이어졌다. 그것은 겨우 커튼 하나로 가림막을한 옆 침상의 노부부 때문이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기운이 다리에 있고 다음엔 허리로 올라오고 나중엔 입으로 올라와 입만 살아있고 죽을 때가 되면 눈만 살아 껌뻑인다더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77세 된 할아버지 환자와 간병 차 붙어있는 할머니가 아예 철야를 작정한 듯 잡담을 하는데 비쩍 말라빠진 노인네 환자와 할머니가가 어찌 그리 입심이 그리 좋은지! 새벽 두 세 시가 되기까지 그칠 줄 몰랐다. 그것도 계속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 5분 정도 잡담을 하고 10여분 간격을 두고 쉰다. 이제 끝났거니 생각하고 잠을 청해보지만 고장난 LP판 마냥 되풀이 된다. "저 노인네들의 잡담을 무시하고 잠을 자자 잠을 자!" 고 다짐하면 할수록 저들의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내 영혼 깊은 곳 까지 파고 들어왔다. 목소리나 곱다면 그런대로 참아주겠으나 가래 섞인 것 같은 탁 쉰 목소리를 들어줘야 하는 일은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아주 희한한 부부들이었다. 때론 제법 철학 냄새가 풍기는 말을 한다. "할아버이는 나와 맞지 않은 인생을 살아서 아직까지 내 말을 듣지 않는가 봐요. 그렇죠, 할아버이?" 사뭇 존대를 하며 제법 살갑게 말했다. "할아범 똑 바로 누워 봐요. 그렇게 구부리지 말고 똑 바로 누워 보라구요." 이렇게 부드럽게 나가던 할머니의 다음 말은 그 누구도 예측불허였다. "이 망할 놈 같으니라구… 이렇게 내 말을 안 들어 먹으니 츳쯔." 조금 전에 존칭은 온데간데없고 금방 말이 180도 돈다. "네 놈이 오늘 이 때 까지 내 말 들은 게 뭐 있어? 그러고도 뭐 잘났다고 지랄이야 지랄이" 평소 얼마나 잘못한 게 많은지 아니면 앙칼스런 할머니의 기세를 감당 못해선지 제대로 된 대꾸 한 마디 없이 할아버지는 "끄응" 하고는 꼬리를 내렸다. 이윽고 건너편 환자가 "끄응-" 하고 싫은 소리를 하는가하면 누군가 "거 잠 좀 잡시다" 거친 항의소리가 건너와 박혔다. 그러나 그 정도 항의론 노인들의 입심을 단 10분도 잠재우지 못했다. 한 30분 후에 대화도 계속 나를 웃기고 있었다. "할아버지, 병이 낫고 나면 뭐가 드시고 싶어요." 역시 부드러운 질문으로 시작됐다. "으응, 연안부두 가서 회를 먹고 싶기도 하고, 아님 보신탕…?" 할머니 제안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으로 탁 쉰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졌다. 그러자 이어진 할머니의 답변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이 미친 새끼 네 놈이 뭐가 이뻐서 사주냐? 꽤나 이뻐서 사주겠다." 개그 콘서트가 이보다 웃길 수 있을까? 생각다 못해 나는 mp3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이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허사였다. 그래도 거리가 좀 떨어진 침대에선 코고는 소리들이 들려왔으나 나만 홀로 노인네들의 잡담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으니 이거야 미칠 노릇이 아닌가. "주여,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주님 제가 어찌해야겠습니까?"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쌓이는지 이러다간 병 고치는 게 아니라 없는 병 까지 얻어서 나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밤은 깊어 가고 잠은 오직 않네" 윤형주 씨의 노래는 낭만이나 있겠으나 겨울밤은 깊어가고 나 홀로 야곱의 씨름을 벌리고 있어야 하다니! 그런 내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계셨는데 난 단 하루도 못 견뎌하다니! 얼마나 내가 부족한 놈인가? 주님의 도성인신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인실에서 다인실로 내려와 단 하루를 못 참겠다니! 또 한 가지, 복음을 전파하다 붙잡혀 모진 고초를 당하고 차가운 감옥에 내동댕이쳐졌던 믿음의 선조들과 비교해보니 병실에서 겪는 고난을 어찌 고난이라고나 하겠는가! 어느 덧 나는 은혜의 물결 속에 잠기며 잠이 들었다. 제대로 된 사건은 새벽 5시에 터지고 말았는데 사실 빌미는 어젯밤에 제공된 것이맞다고 본다. 밤새 노인의 잡담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건너편 이 씨의 시한폭탄 성질이 한계점을 맞아 폭발을 했는데 다치기는 엉뚱하게도 옆 침대 서 씨가 다쳤다. 병실에 불이 켜지고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양 무릎 수술 후 아직 화장실 출입을 못하고 누워있는 서 씨에게 채혈을 하러 왔다. "왜 피를 또 빼고 난리냐? 어제도 뺀 것 같은데." 간호사와 두런두런 주고받는 소리에 모두 잠이 깼다. 그러자 바로 옆 침대의 이 씨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x 같은 병원 같으니라구 - 무슨 놈의 병원이 채혈을 왜 한 밤중에 하나? 낮엔 뭐하다가 한 밤중에 이 난리냐구! 에이 xx 잠을 자게 해줘야 할 게 아냐." 그러자 서 씨가 뭐라고 반박을 했다. "뭐야 이 xxx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이후부터 이 씨와 서 씨가 치고받는 욕설은 어린 간호사가 듣고 있기엔 차마 어려운 말들이었다. 우리 병실뿐만 아니라 이웃 병실까지 다 깰만한 폭음이었다. "xx! 내가 많이 참는 줄이나 알아. 내 성질대로 하면 그냥 확 -." 눈을 부라리는 이 씨는 예순 두 살, 해병대 선임하사 출신 같은 외모를 했다. "야 이 xxx야, 니가 못 참으면 어떡할 건데?." 아직 하반신을 못 쓰는 서 씨는 예순 하나, 비쩍 마른 몸에 기운도 없어 보이는데 입씨름에서만큼은 결코 밀리지 않겠다는 듯 대들었다. 그러자 서 씨가 결정적인 KO 펀치를 날렸다. "이 xxx가 하반신도 못쓰면서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그냥 콱 짖밟아 버릴까 보다. xx xx." 그 결정타에 의해 승부가 판가름 나서 그 이후론 잠잠해 졌으나 마치 동물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주도권 쟁탈전을 보는 느낌이었다. 감방에서 짱이 있듯이 설마 병실에서도 주도권을 잡으려는 걸까, 설마 그건 아니겠지. 폭탄이 터진 후의 자욱한 연기는 시간이 좀 지나자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이 정도에서 멈추길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소등이 된 병실엔 정적이 감돌고 있었으나 한 시간여 남아있는 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이게 병실인가 아니면 전쟁터인가? 평생 소설에서도 본적이 없는 못한 광경이 겪고 나니 아직 수양이 부족한 나로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인간의 존재근원에 대한 염증이 느껴지고, 시궁창 냄새가 나는 듯도 하고 하더니 포연 자욱한 전쟁터가 연상되기도 했다. 아, 큰 일 이로구나! 이런 병실에서 목사인 내가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그 날 새벽엔 그 난리를 피웠으나 낮 동안은 불행 중 다행으로 별 다른 으르렁거림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나 2라운드는 다음 날 새벽 5시에 벌어졌다. 이번엔 욕설의 달인 이 씨와(어제 이후로 나는 속으로 그를 "욕설의 달인"이라고 명명키로 했다) 건너편 침상의 할머니가 한판 붙은 사건이었다. 욕설의 달인 이 씨는 무릎수술을 하고 발목보호대를 찬 환자로써 걷는 것이 불편했다. 휠체어가 필요했으나 병원에서 제공되는 휠체어는 턱없이 부족해서 나를 비롯한 장기 환자들은 개인적으로 렌트를 해서 사용하는 편이었다. 새벽에 화장실을 갈 요량으로 마침 혈압 체크 차 병실에 들린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부탁했나보다. 착한 간호사가 어디서 하나 구해다 줬는데 욕설의 달인이 오물이 묻어있다고 좀 투덜댔다. 그러자 내 옆의 할머니가 죄와 벌에 등장하는 수전노 노파 같은 쇤 목소리로 쓸데없는 참견을 해왔다. "휠체어는 보호자가 구해 오는 거지. 응응… 간호사 선생을 시키는 게 어딨나. 구해주면 감사할 일이지 불평은 왜 해?" 그러자 단 일초도 지나지 않아 이 씨가 거칠 것 없는 육두문자를 날렸다. "야 이 xx년아 뭐가 어때" 열 살도 더 되는 노인에게 저런 상욕을 하다니! 하도 어이가 없어 지켜보고만 있었노라니 산전수전 다 겪어온 할머니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뭐야, 이 xx놈이 말을 함부로 하네." 주저 없이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그만 병실은 어제처럼 욕설의 난무 속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사단이 좀 진정되자 병실에 불이 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꺼진 줄로 알았던 불씨가 30분 뒤에 다시 살아날 줄이야. 화장실에 다녀오는 욕설의 달인을 향해 할머니가 소총을 들고 먼저 시비를 걸었다. "왜 사람을 째려 봐?" 그러자 욕설의 달인답게 이 씨가 기관총으로 응수했다. "이 xx년이 왜 시비야 시비가. 내가 언제 널 째려봤다구그래. 째려보긴 네 까진 늙은이가 뭘 볼 게 있어서 째려보냐?" 잠시나마 잠을 청했던 사람들이 다시 깨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번엔 내 침상 건너편에 김 씨가 와락 성질을 내며 일어섰다. 그는 모 교회 집사라 했는데 오늘 낮에 손가락 수술을 받은 터였다. 식식거리며 일어나더니 텔레비전을 켜서 최대음량으로 올려버렸다. 자,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분 이게 뭡니까? 병실 분위기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나섰다가 자칫 저 무뢰한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병원 당국에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님 병실을 옮겨야 하나… 도대체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목사인데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힘이 없다니! 최선책은 상황 도피라는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어제 받은 은혜는 이미 바닥이 난 상태고 -. 고심 속에 하루를 지낸 나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저녁식사들 마친 나는 휠체어를 타고 병실 통로에 섰다. "여러분, 잠간만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보호자들, 간병인 까지 눈이 커졌다. "여러분 왜 이 병원에 오셨죠? 병 고치시려고 오셨죠? 그러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안정입니다. 의사선생님들이 누누이 강조 하는 게 안정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병실 분위기라면 안정은 커녕 없던 병도 생기겠습니다. 안정을 찾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이해입니다. 우리 모두는 환자들이라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잘못하면 폭발합니다. 그러므로 신음소리가 들려도 저 사람이 나보다 힘들겠구나! 이렇게 서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배려입니다. 여긴 내 집이 아니고 공동체 삶을 사는 곳입니다. 내 집에서야 내 맘대로 자고 싶으면 자고 깨고 싶으면 깨지만 이곳은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내야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말을 할 때도 작은 목소리를 내고 밤11시가 넘으면 텔레비전도 꺼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사촌입니다. 여러분 중에 무슨 일을 당하면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간호사실도 멀리 떨어져 있고 의사는 볼 수도 없습니다. 바로 옆의 환자가 도와줘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안정된 병실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빨리 퇴원을 해야죠. 여러분이 제 말에 동의하신다면 모두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짝짝짝 박수로 화답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이들이 내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과연 오늘 밤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날 밤 점수를 매긴다면 90점, 그 다음날은 100점을 줘도 모자라는 밤이었다. 그런 밤이 계속 이어졌다. 옆 침대 노인네들도 알아들을 수 없도록 아주 작게 소곤대더니 다음 날은 아예 정적을 유지하고 모두 포근한 잠에 빠졌다. 밤 11시가 되기도 전에 텔레비전도 꺼졌다. 욕설의 달인 부인은 교회 신실한 권사였는데 아침마다 병실에 출근하면 연실 감사의 말을 건넨다. "다 목사님 때문이예요. 목사님께서 기도 많이 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남편을 곁에 세워 두고도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제 남편 위해 기도해주세요. 이 사람이 욕을 잘해요. 어서 주님께 돌아와야 하는데." 하루 이틀 지날수록 어느 덧 모두 나를 향해 "목사님, 목사님" 하며 존경을 표하는 눈치다. 놀라운 일은 욕설의 달인 서 씨와 이 씨가 아주 화목하게 지내는 일이었다. 서로 음식도 나눠먹고 농담도 주고 받는다. 마치 십년지기 같아졌다. "목사님, 커피 한 잔 타드려요?" 그들이 청해오면 싫으면서도 무조건 "그러죠" 하며 다 받는다. 내가 그들보다 연상이지만 "이형, 서 형" 하고 불러주면 싫지 않은 표정들이다. "잘 들 주무셨습니까?" 아침 인사를 해도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식사시간이 되면 내가 먼저 "맛있게들 드세요." 한다. 지금 우리 병실은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수술 후 고통스러워하던 신음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아! 이렇게 평화가 찾아오다니 꿈만 같다. 낮 시간이면 나는 신기한 일을 보며 혼자 웃고 또 웃는다. 그렇게 막말로 치고받고 하던 두 사람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믿기지가 않아서이다. "이 사람아 자네처럼 그렇게 꼼짝 않고 누워만 있으면 안 돼. 일어나 앉아 책도 좀 보며 마음의 수양도 쌓고 그래야 병도 빨리 낫는거야." 욕설의 달인이 충고를 하면 한 살 아래 이 씨는 순순히 받아들인다. 욕설의 달인은 생긴 외모나 거친 입담과 달리 종종 책을 들고 있다. 알고 보니 두 사람 다 배와 관계된 직업을 가진 분들이라 그렇게 입이 거친 것이었고 의외로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요즘 나는 젊은 집사를 비롯해 두 남자에게 흡연 크리닉을 하는 중이다. "이번 기회에 병도 고치고, 흡연도 병이니 이 병도 고칩시다. 또 앞으로 교회도 나갑시다. 그리고…" 아직 퇴원 날자는 모르지만 오늘도 나는 목사인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느끼며 주님을 찬양한다.
58 no image 독자적인 신앙
장창수
3047 2011-12-07
목회의 목표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성도 각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도록 양육하는 것이다(엡4:8-15절). 성경의 기록 목적도 그렇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3:16-17절) 구약의 요셉은 좋은 예이다. 17세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해 들으며 그의 신앙은 자랐다. 하나님이 이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언약을 성취해 갔음을 그는 어릴 때부터 배웠다. 아버지 야곱이 그를 사랑하여 항상 자신 곁에 가까이 있도록 한 덕분이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소천했다(창25:7절). 이 때 이삭의 나이는 75세였고 야곱의 나이는 15세였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15년 동안 아브라함을 볼 수 있었다. 이삭은 180세에 소천 했다(창35:38절). 이 때 야곱은 120세였고 요셉은 30살이었다. 요셉도 할아버지 이삭을 17년 동안 볼 수 있었다. 그는 살아있는 증인들을 통해 족장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직접 들었다. 신약 시대로 말한다면 그가 어릴 때부터 성경을 잘 배웠다. 그러나 17년간의 배움은 13년간의 혹독한 연단을 기약했다. 어느 날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꿈을 두 번 꾸었다. 두 꿈의 내용은 형제들이 동생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더 받았다(창37:5-11절). 하나님은 이를 이용하여 강제로 요셉을 애굽으로 내보냈다(행7:9절). 애굽에서 혼자인 요셉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언약에 근거한 임마누엘의 은총이 그와 함께 했고 요셉도 이를 굳게 믿었다. 아버지 야곱이 하란에서 산 삶(창28-30장)의 이야기가 요셉을 굳게 붙잡아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범사를 축복했다(창39:2-3절). 절망은 그를 연단시켰고 그를 성장시켰다. 절망을 딛고 마침내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창41:38-40절). 성공과 출세는 족장에게 준 언약을 성취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요셉의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가능했다(시105:19절). 요셉이 야곱의 집 안에 남아 있었다면 이런 성공은 불가능했다. 성공해도 야곱 개인 가문의 경사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요셉이 어릴 때 꾼 꿈대로 더 큰 무대에서 그가 성공하기를 하나님은 바랬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과 돌봄으로부터 17세의 요셉을 강제로 단절시켰다. 13년 동안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만 의존하며 혼자 살도록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그는 애굽에서 성공했고 종국적으로 요셉은 세계적인 흉년에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구원하는 구원자 역할까지 수행했다(창45:7절). 오늘날 개인 성도도 바로 이런 독립적인 신앙을 소유하여야 한다. 부모의 돌봄과 무관하게, 자신이 자란 가정을 떠나서도, 자신을 성장시킨 교회를 떠나서도 그리고 자신의 조국이 아닌 타국에서도 변함없이 부활주 예수님만을 만유의 주로 고백하고 의뢰하며 살 수 있는 독자적인 신앙을 성도는 보여야 한다. 이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 역군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상황은 그 반대이다. 목회자들은 등록 교인들이 자기 교회에만 영원히 남아있기 원한다. 이들은 전능한 하나님의 손길에 신자들을 맡길 줄 모른다. 반면 신자들은 가장 큰 교회의 교인이라는 헛된 자부심과 존경 받은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인이라는 부질없는 자랑을 좋아하며 그 교회에 영원히 남길 원한다. 이렇게 성도들은 주 앞에서 독립적인 신앙을 소유하길 쉽게 포기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교인들은 지교회를 위해 충성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지 않는다. 또는 목회자에게 충성하지만 만유의 주되신 그리스도에게 충성할 줄 모른다. 이것이 양적 성장론의 문제이다. 이를 피하려면 목회자와 신자들은 지교회만 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나 보편적 교회를 보는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목회자는 이기적인 목회관을 그리고 성도들은 이기적인 교회관을 부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자기부정이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에 달하게 한다.
57 no image 정통 교회, 교회의 전통
박인철
3131 2011-11-15
굳이 이 글을 씀은 개혁신보에서 조차 예배에 대한 개념을 '관행' 이라는 말로 스스럼 없이 쓴 것등에 대하여 60여년을 합동측과, 이에서 분립한 합신측의 교회중에서도 나에게는 정통으로 각인 된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한 것을 기조로 하는 하나의 분명한 견해를 전달하고자 함이다. 합신측 분립의 가장 큰 명분이었던 바른신학, 바른교회냐 아니냐를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잣대는 교회의 예배일 것이다. 예배의 순서들과 그 내용들을 통해서 신학과 교회의 모습이 다 드러난다고 본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많은 장로교회들이 무언으로 인도하는 예배로 하였는데 찬송가나 성경을 빨리 못찾는 새신자 등을 옆의 분들이 찾아주면서 천천히 주보의 순서에 의하여 예배하였었다. 그러므로 주보의 예배 순서지는 누구도 함부로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성령의 인도로 교회가 하나님께와 성도에게 사전에 약속된 것으로 알고 엄숙하게 진행되었었다. 그 후 예배시간을 줄여가기 위해서 성도들이 빨리빨리하라고 예배순서를 구두로도 안내하기 시작하더니 특히 오후찬양예배 등에서는 예배사회자(?)들이 예배가 마치 자기의 것인 것처럼 온갖 사람의 얘기들을 늘어 놓다가 겨우 1, 2분을 줄이기 위해 말 한마디로 주보에 인쇄로 하나님과 수백명에 약속된 하나님께 찬송을 아예 빼거나 줄이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철저히 주보에 의한 무언으로 인도되는 예배로 하나님과의 신실하고 엄숙했던 관계가 예배인도자가 아닌 사회자에 의해서 예배가 그때 그때 분위기 잡아가는 사람끼리의 행사가 되어가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고 주일예배의 순서까지도 교회의 담임목사가 맘대로 빼고 넣고 할수 있는 분위기로 발전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예배의 무언인도는 바른(정통)교회의 본질인가, 아니면 그냥 전통일 뿐인가? 인도자가 유언으로 하더라도 바르게만 할 수 있다면 예배의 무언 인도는 그냥 전통일 뿐일 것이다. 정통 장로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정통 감리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요즘은 교리가 없어지고 교회가 굳이 분별하거나 가르치지 않으면서 어떤 감리교회가 '하나님 중심과 주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면서 오히려 더 칼빈주의 같고 어떤 장로교회는 예배 등, 실제에서 신인합일주의의 행태를 보이면서 감리교회보다 훨씬 더 알미니안인 경우도 본다. 이런 경우들은 각자의 정통성을 상실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정통' 이라 하는 것은 시작될 때의 본질을 말함이다. 실질적으로 '예배' 가 성경으로부터 왔으며 성경에 근거한 것이며 어떤 교회의 정체성을 알게하는 가장 확실한 것이라면 '예배'란 정통성으로 말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더라도 예배는 역시 전통이라는 말이 더 알맞는가? 아니, 그저 관행이라 함이 예배를 더 쉽게 하기에 편한가? 정통 기독교교회가 아닌 이단들과 사이비 교회들은 주로 교회이름에 다른 이름을 덧붙인다. 요즘은 정통 장로교교단에 소속되었으면서도 교회 이름에 'OO체교회' '견OOO교회' 등등 딴 이름을 덧붙이거나 교회라는 말 대신 사용하는 기묘한 교회들이 많다. 어차피 성경과 예수와 큰 상관 없이 '내 교회'로 내마음대로 운영되는 교회라면 이단이든, 사이비든, 기묘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예배란 예의를 갖춘 경배의 형식을 말함이라면 장로교회든, 감리교회든 예배를 바르게 하지 못하거나 흉내만 내는 교회를 정통교회라 할 수 있을 까? 나는 한국의 초대교회식의 정통장로교회라고 생각되어지는 교회에서만 생활하며 수천번을 넘는 예배설교와 수백번의 사경회 등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회에 대하여 알게 되고 또 정통예배를 습득하였다. . 내가 수십년 따라 다닌 장로교의 사경회는 회개가 없으면 은혜도 없다 하여 첫날은 영락 없이 회개와 눈물의 날로 정해져 있었다. 그것이 나의 체질이 되어 지금도 나는 달콤한 소리보다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려주는 설교에 훨씬 큰 은혜를 받곤 하고 그렇게 설교하는 분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은 어쩌다 하는 사경회도 첫날부터 좋은 얘기로, 또 심령파의 부흥회는 오로지 성령받으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익힌 정통 예배의 형식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예배는 사람의 생각대로가 아니고 하나님께로 부터라고 알기에 사람이 만든 전통이 아닌 정통성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예배' 라는 단어의 의미와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였거나 신령과 진정의 바른 예배를 통한 감격의 경험이 적은 이들에 의하여(성도들은 힘껏 찬송하는데 강단의자에 앉아서 주보나 들쳐보는 등) 언제부턴가 모든 집회를 다 예배라 하더니 예배는 다 같은 것(처음에는 다 중요하다는 선한 의미였겠지만) 이라 하면서 삼일기도회(주후 2011년 11월 세째주 삼일기도회 - 오일 구역예배 -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년,월,일 창조의 날에 맞추어 사용하고 교회달력에도 그렇게 표기했었다 ) 도 기도 중심의 집회였던 것을 수요예배라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손님으로 오는 목사님들을 설교하게 하고 주기도로 마치는 대신 축도를 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느날 부터 예배로 격상시킨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구분을 없애다 보니 심지어 새벽기도회 조차도 새벽예배라 하는 교회도 있게 되었고 이로써 예배의 구분은 자연히 없어지고 주일예배에 교회가 총력을 다하는 특별한 의미가 없어지고 힘든 성가대도 없애며 대충하게 된 것이다. 주일밤, 또는 오후예배를 주일찬양예배라 함은 주일예배의 연장으로 요시아가 하나님만 섬김을 회복하고 성일에 백성들을 모아 제사하고 저녁에 해가 질때까지 백성들을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송케함에 근거한 것이다. 새벽에 잠에서 깨자마자 잠옷 입은 채로 부모님께 문안 인사 올리고 받는 것이 잘하는 것이지만 이를 형식상 결코 예배라 할 수 없으니 예배란 예의를 갖추고 경배해야 하는 원리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새벽기도회도 예배라 하다보니 세월이 지나면서 결과적으로 생신날 아침에 경배하는 때에도 잠옷 같은 것으로 대충 입고 절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시끄러운 카세트 음악 틀어 놓고 흥얼 거리며 '부모님 생신 축하 노래' 한다는 꼴로 주일예배한다고 하는 부모님 경배도 자기 좋은대로 하는 못난 자식들 같은 교회들이 그렇게 많아진 것 아닌가! 그리고 주님 죽으심을 기억하며 예비일을 앞둔 날에 헌금도 하며 정식 예배로 하던 오일구역예배는 O모임이니, OO모임이니 하면서 날도 바꾸고 오로지 사람을 모아 교회를 부흥시키는 수단의 단순 친교모임 정도로 전락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서 교회 각 지체들의 분명한 자기 역할과 그 유기적 관계들을 무슨 친교회 조직처럼 OO팀이니 팀장이니 하며 교회의 모습을 친목 공동체로 전락시키고 있다. 모든 짐승은 날때부터 다 각기의 옷을 입고 태어난다. 사람은 본래 벌거 벗고 태어나 타락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로 따로 옷을 해입어야한다.(요즘은 부끄러움을 자랑하기 위해 옷을 입지만...)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 해 입은 옷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피흘림으로 지어주신 가죽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응답하여 그 앞에 설 수가 있고 그것이 바로 예배, 즉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가린 형식의 예배이다. 이것이 피흘림의 속죄를 통한 예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형식에 담아 나타내는 순종의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모든 종류의 제사법, 즉 속죄제, 속건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제사에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음악으로 하게 하며 아주 사소한 것 까지라도 하나님이 지시하고 인도하시는 대로 하지 아니하면 죽음뿐이었던 것은 지시한 형식대로 하는 것이 힘들더라도 곧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는' 순종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과실을 먹음으로 선과 악의 길을 나뉘어 가게 된 아담의 후손인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서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 짐승의 피흘린 가죽 옷을 입게하심으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응답하여 바르게 예배하는 길을 분명히 알려 주셨는데 아벨은 순종의 선한 길로 짐승을 잡아 피흘림의 제사로 예배하였으나 가인은 불순종의 악한길을 택하여 자기 멋대로 피흘림이 없는 곡식으로 제사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이것은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선을 행하는 순종이냐,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악을 행하는 불순종이냐의 행위의 문제이다. 나는 사경회를 통하여 예수의 피에 의지하여 회개하는 수많은 훈련으로 예배 때에 내가 신앙고백을 함으로써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실체적 존재의 예배자로서 유효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내 정신이 너무나도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예배의 공기도에서도 예수의 피의 공로에 의지하여 회개가 없는 기도는 무익한 기도로 배웠다. 마음으로만 예수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고 함석헌의 무교회주의가 바로 그런것이 아닌가! 하나님께 예배당으로 구별하여 봉헌된 장소에서 오직, 하나님이 주인이신 주일(성일- 여호와의 날이므로 거룩한) 의 해돋는 아침에(옛날에는 장소가 없어서 9시는 어린이 예배, 11시는 장년예배로 하였음) 강단의 동편에 성가대를 세우고 (얼마 전만 하여도 교회 개척하면 성가대석부터 마련하였는데 요즘은 성가대가 있는 교회도 아무데나 앉아 있다가 예배중에 부시럭 대며 앞에 무대에 나와서 공연하고 박수 받고 들어가며 심지어는 설교자도 무대에 나와 설교인지 강연인지를 하며 박수를 받기도 한다 - 이걸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라고 둘러 댄다 - 성경에는 분명 '하나님 말씀봉독'과 성가대의 '찬양' 후에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 예배시작에는 엄숙하고 장엄한 음악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고 한국교회가 합의하여 검증하고 선정하여 예배찬송으로 헌정한 찬송가(교단연합으로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로 정숙한 소리의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우리가 만든 찬송가의 부족을 채우기 위하여 시편 교독(원래는 시편 교송임- 칼빈은 시편찬송만 부르게 함)을 하고 예수의 피의 공로에 의지하는 회개의 목회기도를 하며 신앙고백으로 예배자들의 실체를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은 성경봉독으로 말씀의 실체로 응답하시고 성가대는 강단의 동쪽에서 잘 준비된 공교하고 정숙한 소리의 장엄한 성가로 하나님의 영광을 한껏 드러내면서 설교자는 봉독된 말씀을 잘 풀어 예배자들의 영을 살리는 축복을 전하고 이에 성도는 응답 찬송을 부르며 송영찬양으로 예배를 마침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도록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알려주신 방법대로 예배함이 아닌가! 칼빈주의 신학으로 배우고 칼빈주의 교단에 소속되었으면서도 신학과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며 궁극적인 표현의 행위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인 예배는 자기들 멋대로 하는가? 이것이 진짜 자유주의가 아닌가? 칼빈의 요구대로 시편 찬송을 부르든지, 또는 최소한 시편교독(송)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경의 절기주일 말고 하나님 만이 주인이신 주일을 일년 내내 온통 OOO주일, OO주일, OOO주일.....하며 사람을 주인으로 하여 이벤트예배하는 주일로 만들어 공동체 교회로 만들어 가는 것이 칼빈주의인가? 정녕 종교개혁 직전의 구교회가 주일을 온통 성자들의 축일로 만들고 그들을 추앙하던 날들로 돌아가는 것인가? 안식일이, 성일이 거룩함은 그날이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이다. 모 신학교 총장이 시무하는 교회의 스승의주일(스승이 주인인?) 주일예배 중에 교인들이 총장, 목사인 스승을 추앙하는 시를 앞다투어 읊어 바치고 화환을 바치고........(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칼빈주의를 공식 표방하는 한국 보수 장로교단들의 예배에 대한 개념의 현주소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면 그 번역도 당연히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야 복된 것이라 할 텐데 요즘엔 자고 나면 새번역이 나온다. 창조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말만 있다가 하와를 지으시면서 비로서 남자 여자라는 말로 구분되어 나누어졌다. 아담, 하와가 불순종하여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을 따로 말하지 않았다. 타락한 이후에는 사람의 영은 죽었다가 살리운 자로 하나님의 영과 구별이 되는데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을, 대부분이, 특히 청소년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영으로 생각하여 영으로 찬양한다고 자기중심적인 노래를 하는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해야 신령, 즉 예배의 대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진정, 즉 예배자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경배하는 것이 참예배라는 것이 나의 평생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의 정신에 각인된 바른 예배이다. 그러므로 나의 정신 속에 있는 예배는 절대적으로 성경에 의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들을 초대 교회의 많은 지혜자들을 통하여 정립하여 주신 정통예배라고 여기는데 (혹 성경에 다르게 보여 주신 형태의 예배가 있다면 개혁신보를 통해 알려주시면 새롭게 살펴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정통적 본질을 가진 예배가 아닌 가인처럼 자기들의 멋대로의 방법론으로 예배를 격하시켜서 예배의 본질을 훼손시키거나 교회나 예배나 성경에 관하여 없거나, 다르거나, 멋대로의 용어들을 사용하는 자들은(교회를 가르치는 뜻의 교회가 아니고 교제하는 뜻의 교회라고 하는 등 성경의 정통성 마저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거나, 기묘한 집단이라고 해야할 것이며, 합신교단이 아직도, 또 앞으로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예배와 교회와 성경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또 정면으로 훼손하는 행위들에 대한 권징을 당연히 행사해야 할 것이다.(교단의 원로들은 거의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56 no image 교회가 친교하는 공동체인가?
박인철
2808 2011-11-15
약 6년쯤 전에 동아일보 종교란에서 읽은 기사로, 같이들 모인자리에서 한 얘기가 생각난다. 그것은 당시 미국에서 한국이민자의 83% 가 교회를 다니는데 그들 중에 한국으로의 역이민자를 조사했더니 한국에 다시 와서는 87%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굳이 교회를 다닐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역이민자중의 13% 만 교회에 출석한다면 그들은 대부분 이미 한국에서부터 교인이었을 숫자인데 위 보도가 믿을만한 통계라면 미국에 가서 교회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당시 미국의 이민자들에게 교회란 어떤 의미이며 또 교역자들에게는 교회나 그들이 사용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무엇일까? 지금은 혹 미국의 한인 교회들에게서 그 의미가 달라져 있을까? 지금, 한국에서 강력하게 번져가는 교회의 공동체화는 미국의 한인교회들과는 본질이 다를까? 한국, 특히 합신 출신들에 의해 급속히 변환(?) 되어가는 교회의 공동체 의식과 공동체 조직화는 어디서부터 불어 온 바람일까?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열심하던 자들이 어느날 환경이 급히 바뀌고 세상 마지막의 징후가 강력히 나타나는 기독도로서의 좁은 길의 고통에 이르게 될 때에도 여전히 교인으로, 아니 성도로 남아 있을 사람은 과연 몇% 일까? 교회들은 급속히 본질과 모습들을 변화시키며 몸부림치는데 왜 여전히 교인 수는 급감하고 있을 까? 인구수는 줄지 않았는데........ 교회의 공동체화로 재밌는 교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주 유능한(?) 어떤 사람들의 교회는 세상의 어떤 동호회보다 더 재밌게 하여 꽤 사람들이 모여 성공하는 것 같지만 합신의 교회들 중에 내가 듣기도 하며 실제로 가 보기도 하여 경험한 여러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아니면 합치거나해서 잠간 명맥을 유지하는 교회들을 본다. 그 안타까운 교회들은, 한결 같이 예배당 실내를 중압감을 주지 않는 아주 편하거나 재밌는 분위기로 잘 꾸며 놓았으며 대부분, 예배 때에도 가정공동체등을 강조하며 묶음으로 모여 앉고 강단은 무대화 되어 주일예배에도 시작(?)전부터 찬양팀들이 점령하여 신나고(무당이 신내리라고 신나게 뛰는) 재밌는 노래들로 한껏 흥이 오르면 예배(?)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예배의 대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아주 편하게 진행되며 예배자들의 실체를 아뢰기 위해 공동으로 목소리를 잘 합하여야 하는 불편한 신앙고백도 없는 경우가 더 많고 하나님이 임하시고 거하실만한 정숙한 소리의 부담스러운 찬송가도 없고 하나님이 말씀의 실체로 임재하시고 나타내시는 엄중한 성경봉독이 없기도 하고 하나님(말씀)을 풀어 가르치는 설교는 회심을 일으키는 강력함보다는 수필같은 설교(?)제목과 재밌는 말로 어찌 그리 부드럽고 편안하게 들리는지.... 이렇게 쉽게 내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함의 원천은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전혀 관심없고 사람에게만 관심하면서 '내 교회' 이고 '우리 교회' 라는 관념 속에서 교회를 공동체로서 성공시키고자 함이 아닌가! 분명히 이런 견지에서 예배 때에 신앙고백도 안하면서도 꽤 그럴듯한 신학적 개혁(?) 논리에 붙인다는 것이 나의 양심에서 말하는 판단이다. 가정, 학교, 직장, 어느 사회단체나 국가나 교회나 다 공동체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것은 혼자냐 여럿이냐의 형태를 말함이지 결코 어떤 구성의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독 교회만 최근들어 교회라는 말보다는 '공동체' 라는 말로 대신하며 마치 교회의 본질이 공동체인 것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공동체를 교회의 본질화로 추구함에는 첫째가 편안함, 둘째는 사회성을 만족시키는 재미가 그 요소일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죽은자가 주일예배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무대의 스크린에 나와서 설교하고 사라지는 거대한 왕국과 같은 아주 재밌는 이벤트교회(?)가 한국의 정통 장로교회를 지난 20년간 큰 혼란으로 어지렵혀 왔건만 여기에 합신 출신들이 다투어 줄을서며 나와서 배운대로 하며 줄을 못댄 자들도 그 거대한 이벤트교회(?)를 따라하기에 여념이 없다.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시무했던 합신출신 담임목사가 있는 어떤 교회는 목사들이 설교에서 '교회는 가르칠 교의 교회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교제하는 뜻의 교회다, 즉 공동체가 맞는다' 라고 공언하는 것이 합신출신 목회자들의 실제이다. 이 공동체라는 개념에 맞추어 최신 유행하는 모형들이, 'OO교회' ' OO교회' ' OOOO.교회' 등등, 자고 나면 신조어가 생기는데 그들은 이것을 감히 개혁이라는 말로 크게 소리한다. 그리하여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나님의 노래(신령한 노래) 는 자기들이 즐기기 위하여 지절거리는 노래로 바뀌며 설교는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고 오로지 사람들을 즐겁게하는 재밌는 얘기로 바뀌고 있는 것인가? 정통성과 정체성을 상당히 잃어버린 미국의 장로교회들과 달리 오히려 교단이 개 교회들에게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미국침례교회는 철저한 신학교의 교육(가르침)을 통하여 그들은 목회 현장에서 한결같음을 유지하여 아직도 금주법을 갖고 있는 주가 더 많은 미국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들의 교회는 아이로부터 할아버지들이 주일예배에서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듣고 각기의 주일학교로 흩어져 성경공부를 한다. "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이제 남은 희망은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표방하고 있는 '기독교개혁신보' 뿐이 아닌가 한다.
55 "나가수"와 나의 목회
황대연
2664 2011-11-12
■ “나가수”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아들아이가 자랄 때, 또래 친구들이 TV에서 본 재미있는 개그맨들을 흉내 내며 유행어로 이야기를 할 때 혼자 생뚱맞아 왕따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긴 했었지만, 감사하게도 아이는 TV 유행어 아니더라도 잘 적응했고, 월드컵이나 올림픽 경기와 같이 중요한 것, 꼭 보고 싶은 것들은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서 볼 수 있으니까 큰 불편함 없이 살아오고 있다. 그러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모든 목양사역을 마치고 주일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잠들기 전에 일부러 검색해서 보는 동영상이 하나가 생겼는데, 그것은 “나는 가수다”(줄여서 “나가수”)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나가수”는 이미 자신의 음색을 담은 음반을 가지고 있고, 공연 필드를 가지고 있는 실력파 가수들에게 색다른 미션을 부여하고 수행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프로 가수들이 새로운 곡을 지정받아 일정 범위 내에서 편곡도 하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노래를 불러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탈락이 되기도 하는 서바이벌 룰은 긴장감을 팽팽하게 드리워 준다. 노래를 잘한다는 김건모나 이소라와 같은 가수들이 이미 초반에 탈락을 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수들이 탈락을 했다. 박정현과 김범수 외에는 끝까지 잘 마친 사람은 아직 없다. 관객들은 네티즌들에게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던 옥주현을 결국 탈락시키고 말았고, 가사 한 단어 틀린 김조한이나, 조관우 같은 사람들도 탈락하고 말았다. ■ “나가수”와 내 설교 나는 여기 등장한 가수들 중에 인순이와 자우림이 불과 3분 내지 5분 이내의 노래 한곡을 가지고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때로는 울컥 눈물을 쏟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도전을 받는다. 나 역시 늦은 밤, 서재에 혼자 앉아 동영상으로 인순이의 <서른 즈음에>를 보다가, 자우림 김윤아의 <가시나무새>를 보다가 눈물이 났었다. 그리고 인순이의 <난 괜찮아>를 보다가 정말 난 괜찮아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빙산의 일각처럼 보이는 그 한곡을 부르기까지 곡에 대한 해석과 수많은 연습들, 그리고 자신의 혼을 불어넣는 모습들... 나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숱한 설교를 들어왔지만,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을 만난 감동과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설교자를 만난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리고, 나 역시 설교자로써 그런 감동을 누군가에게 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런 대중가요와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그렇게 수평적으로 단순 비교는 할 수 없을 것이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차원이 다르니까... 그러나,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 노래건, 문학이건, 드라마이건 그 어떤 장르의 대중 예술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을 전하는데 우리 역시 목을 걸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 “나가수”와 나의 목회 가수는 모름지기 노래를 잘해야 한다. 가수의 진가는 노래인 것이다. 나가수가 등장하면서 노래 못하고 춤이나 율동등, 비주얼만 되는 어린 아이돌들은 일부만 제외하고 대부분 일회성으로 반짝이다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목사인 내가 교훈을 받을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는 모름지기 목회를 잘해야 한다. 어떤 이벤트나 행사를 잘하는 기획가가 아닌 것이다. 목회는 성도들을 향한 설교와 목회적 돌봄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영성 있는 목사, 실력 있는 목사, 잘 전달하는 목사의 자질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목사는 신학적인 실력, 성경적인 실력이 탄탄히 다져진 바탕위에 분명한 확신과 기도로 서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을 자기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메시지화해서 설교를 통해서든, 성경공부를 통해서든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일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전달능력, 즉 교수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위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야 하는 영적인 영역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을 갖추는 일에 게으름의 핑계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영성은 억지로 안 되고 하나님께서 부어 주셔야하는 부분이라면, 신학적인 실력이나 성경적인 실력, 그리고 메시지 전달의 능력은 본인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성경본문만 치면 각종 설교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요즘과 같은 시대는 일찌기 없었던 것 같다. 하긴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지다 못해 이제는 전자렌지에 잠깐 돌리기만 하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햇반”과 같은 밥들이 나오고 있을 정도니까... 설교자에게 있어 효율과 편리함으로 보이는 이렇게 쉬운 길은 재앙이다. 그만큼 말씀 묵상과 연구를 게을리 해도 어찌 어찌 넘어갈 수 있다는 마귀의 달콤한 유혹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편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는 마이너스 성장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복음과 구원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교회에 어린이들이나 청소년, 청년등 다음 세대가 사라져가고 있다. 목회자들이 보는 신문에는 과거 부흥과 성장의 시절 잘 지어놓은 시설좋은 예배당이 텅텅 비어 가고 있고, 부도난 예배당 매각 광고들이 눈에 띠게 자주 올라오고 있다. 교회들이 무너져가고 있는 조짐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다루는 설교자라면 더 이상의 매너리즘은 안 된다. 우물을 깊이 파듯, 자기 자신이 말씀을 읽으며 깊은 묵상가운데 방금 길어 올린 시원한 생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그 말씀이 비로소 청중들의 가슴을 시원케 하고, 묵은 죄악의 찌꺼기들을 통회 자복케 하며, 맑은 물로 씻어내듯 예수 십자가 보혈 안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헌신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황대연 목사 (경기 서노회 / 한가족교회)
54 내게 맡기신 교회
황대연
2581 2011-10-31
지금 한국교회는 정체를 넘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 교회 성장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각 교단 신학교들로부터 해마다 수천 명씩의 신학생들이 배출되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신학교 졸업생들은 요즘 같은 교회성장의 침체기에 과연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사역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일선에 뛰어드는 목회자들이 처음으로 현장에서 겪는 충격이랄까, 당황스러움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 이론"들이 정작 목회 현장에서는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실천적인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장목회자들도 사교육에 노출되어 있다.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훈련세미나", "전도폭발 목회자 임상훈련"과 같은 것은 아주 고전에 속한 편이고, 두 날개 셀교회 세미나, 가정교회 세미나, 설교 세미나를 비롯한 무슨무슨 컨퍼런스까지, 그런가하면 심지어 일반 세상에서도 하는 심리적 상담세미나에 코칭세미나까지... 그 종류 만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것들은 소위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목회 도구들(tools)인데, 이것을 배워보겠다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들을 들여가면서 구름떼와 같이 모여들고 있다. 나 역시 교회가 건강해지고, 부흥 성장할 수 만 있다면 양잿물인들 못 마시겠는가는 절박한 심정을 가진 이 땅의 흔하디 흔한 목회자들중 한 사람인지라 목회에 도움이 된다는 여러 세미나들을 쫓아다녀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위 목회 성공을 했다는 어느 발표자가 나와서 사례 발표를 하는 것을 듣고는 더 이상 이런 세미나를 다니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는 요즘 부흥하는 어느 목사님과 그 교회를 모델로 삼아 설교도 그의 것을 가져다가 그대로 하고, 교회의 모든 행정이나 양육체계도 그 교회를 그대로 베껴다 했더니 과연 그 교회처럼 성장하고 부흥하더라며 여러분들도 임의로 변경하여 짝퉁(?)처럼 하지 말고, 그 목사님과 그 교회처럼 똑같이 해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 사례 발표에 도전을 받았노라며 아멘을 외칠 때, 나 역시 정 반대 방향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신 것은 내게 주신 은사가 있고, 맡기실 양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국화빵을 구워내듯 남의 목회, 남의 설교를 카피해서 교인수를 늘려가는 소위 목회 성장을 이루어가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교인수가 많든 적든, 나를 목회자로 부르신 주님 앞에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던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본질,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에 충성하면 될 일이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며 배우려들지 않는 외골수적이고 경직된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남의 교회를 카피해서도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교회는 미국의 새들백 교회나 윌로우클릭 교회도 아니고, 사랑의 교회나, 온누리 교회도 아니며, 부산 풍성한교회나 안산 동산교회나 휴스톤 서울교회가 아니라 <한가족교회>이기 때문이다. 담임목사가 한 눈을 팔지 않고 말씀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에 착념하며, 깊이 있는 말씀 증거와 영혼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보며, 교인들을 양육한다면, 맡기신 그 교회는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해 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영적 성장은 세상을 향해 복음 증거의 열매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본질을 붙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 목회를 놓고 새벽마다 무릎을 꿇는 요즘, 언젠가 내 소명을 다하고 저녁 노을처럼 내 인생이 황혼의 노을로 물들여질 때, 교회의 크기를 떠나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목사로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을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저녁이다... 황대연 목사 (경기 서노회 / 한가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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