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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8 2017-12-08
Notice 2015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홈페이지를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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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5 2015-01-05
Notice 신문 원고 작성과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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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76 2010-12-23
Notice 기고 제언 게시판 이용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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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33 2010-07-23
1 no image 지도력의 갈림길(1)
장창수
3705 2011-06-28
(부제: 지도력은 언제 어디서나 예측 가능해야 한다) 6.25 전쟁 이후 50년 만에 이룬 한국의 정치 발전과 경제 성장은 실로 기적적이다. 민주주의가 빠르게 정착했고 현재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2위이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설립자 가족의 경영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선진국의 기업들과 달리 의사 결정이 빨라 새로운 기업 환경에 신속히 적응하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룬 지금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지도력의 부재로 혼란하다. 지도자들이 부패해지며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다. 특히 정치, 교육 그리고 종교에서 더 심하다. 공교롭게도 이들 분야에서 유교의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위력을 잘 발휘한다. 이들의 지도자는 일인 지도력을 고집하며 손쉽게 권력과 권위에 안주한다. 이런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이런 지도력은 농업과 산업 시대에 맞고 경제 개발 초기 참으로 유용했다. 대부분의 백성은 무지했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선각자로서 지도자 노릇했다. 국민은 그를 무조건 따랐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원주의(多元主義) 시대에 산다. 많은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다. 지도력은 달라져야 한다. 기독교 성경은 오늘에 맞는 지도력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한다. 성경의 지도력은 지체(肢體) 이론(고전12:12-27절)에서 나온다. 몸에 머리는 하나이다. 그의 지체들은 다양하다. 그러나 지체들은 머리의 지시를 받으며 통일성을 지향한다. 몸의 지체들은 그 맡은 역할이 아무리 작아도 절대로 무시 당하지 않는다. 머리는 아무리 작은 지체라도 제 역할을 다하도록 도와줄 뿐이다. 몸은 다양성 중에 통일성을 그리고 통일성 중 다양성을 보여주며 튼튼하게 성장한다. 성경의 지체이론은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나라와 조직과 단체에 그대로 적용되는 탁월한 통치 철학, 지도력과 조직이론을 제공한다. 지도력이 어떤 것이며 지도자와 구성원 사이 관계가 어떤 것인지 잘 설명해 준다. 농업 시대의 유산인 유교의 가부장적 권위는 성경의 지체이론에 전혀 안 맞는다. 모든 지식이 공개된 정보화 시대 더더욱 그렇다. 제일 처음 인류 사회는 지체 이론에 따른 훈련을 가정에서 받는다. 가정은 인류 사회의 최소 단위로 사랑의 공동체이다. 서로 사랑으로 묶여진 가장(家長)과 가정(家庭)의 구성원들인 식구들은 몸의 머리와 지체들 사이 관계와 같다. 이들 사이 조화로운 협력과 협동으로 가정은 잘 보존되며 행복을 이룬다. 이런 가정에서 양육 받은 식구들은 큰 공동체인 인류 사회에서도 훌륭한 일군이 된다. 가정 교육은 이 만큼 중요하다. 인류 사회의 미래가 가정에 달린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유감스럽지만 오늘날 가정의 중요성은 여러 가지 사회적 원인으로 인해 점점 퇴색하고 있다. 기독교도 가정 목회보다 교회 목회를 더 중요하게 본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 기사는 모든 것들이 가정에서 출발됨을 말한다(창1-2장). 인류 사회를 위한 지도자와 지도력도 가정에서 키워진다. 야곱의 5 아들들이 이를 잘 증명한다. 맏아들 르우벤의 지도력 르우벤은 야곱의 첫 부인 레아의 첫 아들로서 야곱의 장자였다(창29:32절). 야곱은 그의 탁월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창49:3절) 장자는 아버지의 축복아래 가문의 후계자가 된다(창27:2-4절). 상속 재산도 다른 형제들보다 한 몫 더 받는다(신21:15-17절). 자연스럽게 장자 르우벤은 다른 형제들의 지도자 노릇을 했다(창37:21-22절). 아버지 야곱을 보필하기 위함이었다. 이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아버지의 신임과 신뢰를 얻어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장(家長)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험에서 자질과 능력을 충분히 증명하지 못한다면 탈락한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이에 실패했다. 어느 날 그가 아버지의 넷째 부인인 서모(庶母)‘빌하’와 동침했다(창35:22절). 빌하는 야곱의 둘째 부인 라헬의 몸종으로 둘째 첩이었다. 가장 젊은 빌하는 르우벤의 배 다른 동생들인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였다. 이 당시 야곱은 이미 백세에 가까웠다면 빌하는 30대에 속했을 게다.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10년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났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이들이 육체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이유는 짐작된다. 그러나 아들은, 특히 장자는 아버지의 첩과도 동침해선 안 된다. 인간 상식도 그리고 성경도 이를 금했다(레20:11, 신27:20절). 이를 분명히 알았지만 르우벤은 순간적으로 정욕에 이끌리어 서모 빌하와 동침했다. 이 행위는 고의적인 죄로써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장자라면 하지 말았어야 할 죄였다. 아버지 야곱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용서를 뜻하진 않았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신뢰를 일단 잃었다. 이것은 그가 장자권을 상실한 큰 이유와 원인이었다(대상5:1절). 사실 야곱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장자권은 언약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로 놓쳐선 안 되었다. 그러나 르우벤은 팟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에서처럼 어리석게 행동했다(창25:29-34절). 그의 어리석음과 경솔함을 아버지 야곱이 나중 이렇게 평가했다. “(장자 르우벤의)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창49:3-4절) 육체의 정욕은 마치 물의 끓음과 같이 허무하다. 물불을 안 가리고 끓는 욕정을 일단 채우고 나면 그 다음 엄청난 죄책과 후회가 따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행한다. 문제는 어떤 믿음이냐 이다. 르우벤의 경우 하나님이 족장들과 맺은 언약을 믿느냐 여부가 문제였다. 정욕을 채움으로 오는 일시적인 육적 쾌락과 장자권이 주는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비교하며 르우벤은 믿음에 따라 자제하고 절제해야 했다. 뒤엣 것보다 앞엣 것을 택함으로 그는 일시적 쾌락을 위해 성경의 믿음을 포기했다. 그의 믿음을 확인한 하나님도 그의 삶을 더 이상 축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을 때 윤리적 죄도 따랐다. 그리고 그의 근친상간은 하나님이 세운 성스런 가정 질서까지 파괴하는 큰 죄였다.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그의 지도력도 힘을 잃었다. 그가 장자권을 잃은 것은 당연했다.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요구에 따라 양들을 치는 형제들을 찾아갔다. 다가오는 요셉을 본 형제들이 시기와 질투에서 그를 죽이고자 했다. 이 때 르우벤은 장남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그 덕분에 요셉은 물구덩이에 던져졌다(창37:18-24절). 그러나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유다의 제안에 따라 형제들이 요셉을 대상(隊商)들에게 팔았고 요셉은 애굽에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다(28절).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불경의 죄를 지은 르우벤의 지도력을 지지하지 않은 결과였다. 제 자리로 돌아온 르우벤은 동생 요셉이 없음을 알았다. 달리 할 수 없어 르우벤도 형제들의 말대로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것처럼 꾸며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 보고를 해야 했다(31-32절). 가장 사랑한 아들을 잃은 야곱은 큰 슬픔과 비통에 빠졌다(33-35절). 이를 본 후 르우벤은 거의 20년 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았다. 장남으로서 아버지 야곱을 더 이상 정상적으로 대할 수 없었다. 르우벤의 불운한 지도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후 세계적 기근이 야곱이 사는 가나안 땅에도 왔다(창41:54-57절). 이 때 요셉은 이미 애굽의 국무총리였다. 그의 통치 아래 애굽에만 양식이 풍부했다. 각국 백성들은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려 갔다. 이를 안 야곱도 아들들을 촉구하여 애굽으로 보냈다(창42:1-4절). 이 때 르우벤은 장자로서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애굽에서 형들을 본 요셉은 자신을 감추고 형제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을 판 형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들을 시험하여 그 동안의 변화를 확인해야 했다. 요셉은 양식을 주었다. 그러나 시므온을 볼모로 애굽에 잡아 두고 자신의 동생 벤냐민을 데리고 올 것을 형들에게 요구했다. 20년이 지난 동안 아버지와 동생이 잘 있는지, 요셉은 확인하고 싶었다. 요셉의 요청은 형들과 야곱에게 감당하기 힘든 시험으로 큰 시련이었다. 아들들로부터 불행한 소식을 들은 야곱은 르우벤과 형제들을 탓했다.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42-36절) 르우벤의 지도력은 실패로 끝났다. 하나님은 그의 지도력을 축복하지 않았다. 야곱은 장남 르우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다. 이런 결과는 아버지의 부인과 동침한 데서 기인했다. 단순히 그리고 순간적으로 육적 정욕에 이끌려 범한 죄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지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제력 부족 때문이었다. 양심도 르우벤을 늘 질책했다. 죄책과 가책을 받으며 그는 삶을 살아야 했다. 아버지와 형제들과의 교제도 부자연스러웠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자신감도 잃었다. 자신도 신뢰할 수 없는 지도력은 다른 형제들에게도 확신을 줄 수 없었다. 하나님도 그의 삶을 축복하지 않음으로 그의 지도력도 완전히 빛을 잃었다. 지도자는 육적 정욕을 피하고 이를 위해 자제력과 절제력을 길러야 한다(롬13:14절).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양심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고의적인 죄를 범하게 된다. 아주 적은 일에서부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훈련(마16:24절)을 일찍 받아야 한다. 적은 일에 충성스런 성도만이 큰 일에서도 성실하다(마25:21절). 르우벤이 어디에서 실패했는지가 분명하다. 정욕은 자신의 욕구대로 살라고 늘 요구한다. 이기적인 욕구는 지도자로 하여금 권력을 남용하도록 항상 유혹한다. 그리고 몰래 먹은 떡은 더 맛있다(잠9:17절). 그러나 이에 맛들이면 언젠가 꼬리가 잡혀 망한다. 이기적인 권력 남용은 파멸의 원인을 제공한다. 지도자는 지도력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을 자제해야 한다. 권력은 자제될 때 참으로 아름답다. 유감스럽지만 르우벤 같은 목회자들이 한국 교회에 너무나 많다. 하나님이 그들의 지도력을 축복할 리 없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한국 교회의 혼란 원인이다. 이들 스스로 물러날 리 없다. 하나님이 이들을 어떻게 심판할지 지켜보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도 가까운 법이다.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의 지도력 시므온과 레위는 모두 장남 르우벤과 함께 레아가 야곱에게 낳아준 아들들이다.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로부터 신뢰감을 잃었다. 그도 자신의 지도력을 확신할 수 없었다. 서열에 따라 르우벤은 동생 시므온이나 레위에게 힘을 실어주어 아버지를 돕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의 지도력에도 이미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었다. 아버지 야곱은 이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벧엘로 올라가기 전 세겜 성 앞에 진을 치고 단을 쌓은 후 야곱은 하나님을 경배했다(창33:18-20절). 그에게 레아가 낳은 딸 ‘디나’가 있었다. 그녀가 호기심에 밖으로 나갔다. 그 땅의 추장 아들 세겜이 그녀를 보자 끌어들여 강간함으로 그녀를 욕되게 했다(창34:2절). 세겜은 그 아비 하몰에게 디나를 아내로 얻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이 모든 사실이 야곱에게 알려졌다. 그는 아들들이 목축에서 돌아오기까지 잠잠했다. 마침내 아들들도 돌아와 이 모든 것을 들었다. 세겜이 자신의 동생에게 행하지 말아야 할 수치와 모욕을 알았을 때 이들은 한편 근심하면서 다른 한편 심히 분노했다. 이들은 복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여동생을 달라고 요구하는 하물을 속여 말했다.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창34:14-17절). 이를 좋게 여긴 세겜 성의 모든 사람들은 추장의 아들을 위해서도 기꺼이 할례를 행했다. 할례 후 제 삼일 이들은 심하게 고통을 당했다. 이를 이용하여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나가 그 성의 모든 남자들을 죽였다. 이를 안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성에 들어가 노략질을 했다. 언약에 관련된 성스런 할례 제도가 살인의 수단과 방법으로 악용될 수 있다니…… 이들은 여동생에게 불행을 허용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려 하기보다 복수할 생각만 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 부족했다는 증거이다. 나중 이 모든 일을 들은 야곱은 심히 노하여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34:30절) 아버지 야곱이 보기에 이들의 잘못은 실로 컸다. 시므온과 레위는 복수심에 불타서 가문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것도 지도력에 치명적 결함이었다. 가문의 가장인 야곱이 심히 불안해 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이렇게 답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31절) 나중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5-7절) 이들의 칼이 잔해하는 기계란 표현은 혹독한 평가였다. 이들은 단순히 분노와 혈기대로 사람을 죽였다. 이들의 노염과 분기는 지나치게 맹렬하여 신앙심은 물론 이성적인 판단력도 잃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하마터면 야곱과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뻔했다. 이들의 지도력을 따르는 것은 불로 뛰어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르우벤 대신 이들이 장남 역할을 한다면 멸문의 위기를 자주 만날 수 있음을 야곱은 깨달았다. 가문의 장래를 위해 아버지는 시므온과 레위가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가 이스라엘 중에 흩어질 것이라 예언했다. 앞으로 두 지파가 이지러질 것이다. 르우벤의 실행(失行) 이전 차남 시므온과 삼남 레위는 이미 아버지 야곱의 신임을 잃었다. 활화산 같은 분노와 혈기 때문에 이들도 장자권이 의미하는 하늘의 축복을 스스로 버렸다. 이런 지도자는 흔히 옳고 그름이라는 흑백 논리에 따라 쉽게 흥분하며 혈기를 보인다. 자신만 옳고 정당하다는 듯이…… 지도자에게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아주 위험하다. 우선 이런 주관적인 논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것은 불신앙이다. 그리고 흑백 논리는 대내적으로 연합과 협력을 쉽게 망치고 지도자가 자칮 편가르기에 앞장 서게 된다. 스스로 조직을 해친다. 지도자는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살피고 또 살핀 후 한 번 입으로 말하는 신중함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속한 기구나 조직, 단체나 사회의 안녕을 늘 생각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극단적인 언행은 피해야 한다. 이 때 지도자는 대외적으로 신중히 처신한다. 그러나 지도자가 쉽게 분노하고 혈기대로 행하면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나중 불필요한 반대를 불러들여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이 때 조직도 대외적으로 위험에 처한다. 이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다. 시므온과 레위는 거룩한 할례 제도를 살인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단지 복수의 방법으로…… 이들은 자신의 불의한 생각을 위해 거룩한 제도를 기꺼이 악용했다. 한국 교회에 시므온과 레위 같은 목회자들은 많다. 이들은 영적 지도자라는 신분과 직분에 안주하며 유교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즐긴다. 교회의 제도는 모든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절대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 기독교는 사랑과 구원의 종교로 사람들을 살린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람을 해칠 수 있다. 기독교가 제도화 내지 조직화되며 화석화될 때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처럼 기독교도 율법주의로 서서히 굳어간다. 교리와 전통을 강조하는 만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공의를 잃는다(눅14:42절). 이 때 기독교는 권력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종교적인 경건을 자신을 위해 이익의 재료로 최대한 사용한다(딤전6:5절). 이들의 마음이 이미 부패하여 진리를 버렸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예컨대 교인들에게 예배 출석과 헌금을 집요하게 강요한다. 겉으로는 교인의 신앙 삶을 돕기 위한 것 같은데 실상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다.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과 그 지체들을 위한 것을 자신을 위해 도용한다. 흔히 이들은 교회에서 왕처럼 행한다. 자기 마음대로 즉 혈기대로 목회한다. 이들은 신자들의 불순종을 참지 못하고 쉽게 분노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 이익에 반한다면 교회가 무너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사도 베드로의 다음 권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1-4절) 유교의 가부장적 권위는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늘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의 지도력은 본(本)이 되기 위해 앞장 서 헌신하고 섬기라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성경의 이런 가르침을 목회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분명히 기독교인인데 여전히 유교인, 불교인 그리고 무교인처럼 행한다. 너무나 자주 이들은 수준 있는 불신자들보다도 못한 언행(言行)을 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처럼 이들은 몸으로는 애굽을 분명히 떠났지만 마음은 아직도 애굽에 남아있다. 이들에게 정신적 출애굽 사건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를 위해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게 시내산 율법이 주어졌다(출20-23장). 신약 시대에는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이 필요하다(요13:34절). 이웃을 사랑하려면 제일 먼저 자신을 자제시켜야 한다. 사랑에 근거를 둔 절제는 지도자에게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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