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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7.01 (00:00:00)
-여러 달 전 이었습니다. 은행 계좌 하나를 새로 만들 필요가 있어서 한 은행
에 갔습니다. 돈 20만원을 내밀며 통장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신청하였습니
다. 신분증을 내라고 하기에 지갑을 열고 운전면허증을 주었습니다. 실명 확
인을 한 다음 아가씨가 제게 제안 하였습니다. “골드 카드를 가지고 계시는
데, 저희 은행 카드도 하나 만드시지요?”제가 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낼 때 지
갑 다른 쪽에 나란히 꽂혀 있는 두 개의 저의 금장색 카드를 본 모양 이었습
니다. “카드가 이미 두개나 있어서 더 이상 필요가 없는데요.”쓰지도 않는
카드를 남발하기 때문에 경제적 낭비가 심하다는 신문 기사를 본 것도 생각나
고, 사실 더 이상 필요도 없고 하여 정중히 사양하였습니다. 아가씨는 포기하
지 않고 더 정중히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어차피 이 계좌를 사용하시려면
현금카드를 만드셔야 합니다. 그러니 만드시는 김에 서류 한장만 더 써서 골
드 카드를 갖는 게 좋으십니다.” 딴에는 그렇겠다 싶어서 승낙을 하고 아가
씨의 말대로 서류 한장을 더 작성하여 주었습니다
. 그런데 제가 작성해 준 서
류를 검토하던 아가씨가 난처한 모습과 미안한 모습이 뒤섞여 보이는 애매모
호한 표정을 지으며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이세요?”“예”여기서부터 문
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제가 목사인 것을 확인한 아가씨는 갑자기 얼굴색이 변
하면서 난처해 하는 것 이었습니다. 아가씨는 서류를 들고 뒤에 앉아 있는 높
은 분에게도 가보고, 혼자서 서성이기도 하면서 심사가 복잡해 하는 눈치였습
니다. 문득, 목사는 신용카드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
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싫다는 것 억지로 발급받으라고 권유해 놓고서 이제
야 안된다고 할 수도 없고하여 아가씨는 입장이 난처한 것이 분명하였습니
다. 저도 은근히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나서 모른 체하고 좀더 버텨볼까 하다
가, 그럴 일도 아니다 싶어 제가 먼저 아가씨를 불러 시침을 말했습니다.
“무슨 어려움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말씀드렸 듯이 사실 저는 골드카드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움이 있으면 취소해도 저는 상관 없어
요.” 아가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는 표정
같기도 하였습니다.
아가씨는 고개를 많이 숙여 인사를 하면서 친절한 한 마
디를 덧붙였습니다. “다음에 한번 더 신청해 주세요. 그러면 꼭 해드릴께
요.”저는 그 말을 내가 믿을 줄 아느냐는 듯 씽긋 웃고는 은행을 나왔습니
다. 그날 오후 내내 저는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는 안심하고
신용카드를 발급해주어도 괜찮을 만큼 신용이 있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여겨
지고 있는 이 현실이 서글펐습니다. 은행들이야 목사에게 돈 빌려줬다가 아
예 못받거나, 혹은 받아내느라고 속 썩은 경험이 많으니까 그런 대책을 세웠
을 터이지만, 그래도 서글픈 건 서글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서글픈 사실
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목회가 이렇게 되어버렸고, 어쩌다가 교회
들은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하는 서글픔이었습니다. 물론, 목사들이 빌려 쓰
고 못 갚는 그 돈들의 거의 전액이 사실은 교회의 자금을 목사의 명의로 빌
린 것일 뿐, 목사가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한 돈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아
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자신의 명의로 은행에서 돈을 끌어대며 목회
를 해야하는 현실도 서글프고, 교회가 그러한 돈들을 거뜬히 갚아낼 수 있는

n정도로 자라가지 못하는 위축된 현실도 서글프고, 상환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돈을 무리하게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다가 일을 벌여놓아야 되는 교회 운
영 자세도 서글프고... 이래저래 서글픈 하루였습니다. 그러면서 부인할 수
없이 분명하게 내려지는 결론 하나는, 어쨌든 우리의 책임이라는 사실이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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