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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쓸모없는 시대 히브리서 411-13

 

< 정창균 목사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교회와 민족을 살리는 설교의 부흥

 

설교할 기회가 자꾸 없어져 갑니다. 주일 밤 예배를 없애는 교회가 늘어가고, 수요 예배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교회가 늘어갑니다. 예배가 자꾸 없어지니 당연히 설교가 없어져갑니다. 그런가하면 교회가 자꾸 없어지는 바람에 설교할 곳이 자꾸 없어져 갑니다.

 

얼마 전에도, 이제 교회의 문을 닫는다는 제자 목사의 글을 읽었습니다. 엊그제도, 고생만 하다가 이제 한계에 이르러서 도리 없이 교회의 문을 닫는다는 후배 목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설교할 기회가 없어지고, 설교할 곳이 자꾸 없어져 가니, 설교는 점점 쓸모없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아우성치고, 설교를 잘해야 한다며 애를 쓰는 우리의 몸부림이 마치 허공을 향해 헛발질을 하는 것처럼 허망하게 생각되어 깊은 시름과 회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설교할 곳이 없어져 가니 설교가 쓸 데 없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설교가 난무 하니 결국 설교할 곳이 없어지는 결과가 온 것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주일 예배의 30분짜리 순서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단순히 목사의 수많은 일 가운데 한 항목이 아닙니다. 설교를 제대로 하기 위하여 진력하는 설교자는 그의 삶과 사역의 곳곳에서 그 정신이 배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과 교인들에게 은혜가 되어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게 됩니다.

 

사실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설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첫째는 강단에서 본문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설교는 본문을 이탈하게 됩니다. 둘째는 강단을 내려와서는 치열하게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일상을 살아냄으로써 강단에서 선포한 말씀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설교는 단순히 말장난에 가까운 연설이 될 뿐입니다.

 

설교에 대한 한국교회 교인들의 불만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설교에서 본문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불만입니다. 둘째는 설교자가 자기가 설교한 대로 살지 않는다는 불만입니다. 셋째는 설교자가 자기가 설교한 대로 목회를 하지 않는다는 불만입니다.

 

결국 잘하는 설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설교는 강단에서는 본문을 말하고, 강단 아래의 일상에서는 선포한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설교가 연설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단순히 연설에 그치는 것이 아닌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는 말씀은 모두가 말씀의 선포와 순종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가 예배의 성패를 좌우하고, 설교가 목회자의 모든 사역을 좌우합니다.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니 교인이 모이지 않고 오히려 떠나갑니다.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니 교인들이 세상일에 사로잡혀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할 곳이 점점 없어져 가는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설교의 부흥입니다.

 

교회의 부흥이란 사실은 말씀의 부흥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부흥을 이루는 근본적인 주체는 우리의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문을 닫는 시대라고 하여, 또는 설교가 점점 무력해지는 현실이라 하여 설교에 대하여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에 설교를 무엇으로 대체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오히려 설교의 부흥을 위하여 더욱 몸부림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힘 있게 선포되면 교회는 흥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가 병들었으며, 병든 교회는 그 사회가 암흑의 시대로 접어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지난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얻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한 시대가 암흑기에 접어들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잠든 교회가 있고, 잠든 교회가 있는 곳에는 잠든 교인들이 있고, 잠든 교인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잠든 강단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강단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장소가 어디가 되든지, 규모가 얼마가 되든지, 내가 서는 강단에서는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는 설교자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단으로 설교에 진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을 점점 더 크게 반역하고, 교회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몰아넣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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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13)| 감 사_정창균 목사
편집부
1146 2017-11-21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13) 감 사 사도행전 5:40-41 < 정창균 목사_합신 총장_설교학 > 감사는 모든 삶의 현상에 의미를 주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함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사는 특별한 현상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도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현상이 주어지면 저절로 우러나와서 자동적으로 표현되는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인생살이에 저절로 감사가 우러나올 만큼 신바람 나는 그런 경우는 그렇게 많지도 않습니다. 신앙인에게 감사는 감정의 열매가 아니라, 의지의 생산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감사는 어떤 조건을 내건 흥정이 아닙니다.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면 감사하겠다는 식이 아닙니다. 어떤 현상에 대한 반응도 아닙니다. 이렇게나 좋은 일이 일어났으니 감사하다는 식도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감사는 삶의 현장에서 직면하는 모든 현상에 담긴 의미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 의미 때문에 여전히 감사하겠다는 행위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감사는 경우의 수가 아니고, 언제나 가능한 상수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결정하는 기준은 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복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의 현장에 지금도 간여하시고 선하신 손길로 나를 이끄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러한 종류의 신뢰입니다. 그리하여 삶의 현장에서 직면하는 우리의 모든 상황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처한 현실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근거로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것은 감정의 움직임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근거와 이유가 분명해지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제 후배 목사의 처제는 40대 초반에 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젊은 집사님은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억울하고 원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투병하던 어느 날 깨끗한 봉투 하나를 준비하여 상당한 금액의 돈을 넣고 정성스럽게 봉투에 제목을 기록하여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치러질 자신의 장례식 감사 헌금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그 집사님은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죽음이 감사할 리가 없으련만, 그 분은 진심과 편안함으로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그 집사님은 하나님 안에서 죽는 자기 죽음의 의미를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죽음이 억울함과 원통함 대신 진실한 감사를 내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인기절정에 이르고 하늘을 찌를 자신의 카리스마를 휘두를 수 있었을 그 기회를 그들은 철저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기회로 삼았습니다. 복 받을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로 말미암아 두 차례나 체포되어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체포되었을 때는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채찍질을 당하며 풀려났습니다. 그렇게 흠뻑 얻어맞고 풀려나는 두 사도가 취한 행동은 세상의 상식이나 경험으로 볼 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기뻐하면서 자기를 채찍으로 후려친 무리를 떠납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0-41). 그들이 그렇게 기뻐했다는 말은 사실은 감사했다는 말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뻐하고 감사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매를 맞았다는 사실이 갖고 있는 의미 때문이었습니다. 혹독하게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할 인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매 맞는 것이 재미있거나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매를 맞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런 일도 당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인정을 해주셨다는 증거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채찍이 아니라, 그 채찍의 의미에 관심을 집중한 것입니다. 두 아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현실은 이를 악물고 참을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감사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런 비극의 현장에서 아홉 가지나 들어가면서 감사의 제목을 찾아 내놓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바보가 아니라,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1.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3. 삼남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4. 한 아들 순교도 귀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 (臥席終身)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하였으니 주님께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두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내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신앙인에게 감사할 이유는 언제나 있습니다. 때로는 거의 불가능할 만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통과해야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과 연관 지어 그 현실의 의미를 찾아 나서면 어느 덧 우리는 감사의 마음에 잠기게 됩니다.
24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12)| 친 구_정창균 목사
편집부
1486 2017-07-19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12) 친 구 요한삼서 1:13-14 < 정창균 목사, 합신 총장, 남포교회 협동목사 > 신학과 신앙생활의 철저함은 타인과 정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거나 금하지 않는다 대학 졸업하고 군에 갔다 온 다음 해, 나는 남서울교회 지하실에 막 둥지를 튼 합동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터라 아는 이도 없고, 신학이란 아무 것도 몰라서 끼일 자리도 없었습니다. 한 학기 내내 앞자리 앉아 강의만 듣고 말없이 그렇게 학교를 오갔습니다. 여름 방학 끝나고 2학기가 지나가고 있는데, 어느 날 왠 덩치 우람하고 얼굴 새까만 한 반 학생이 옆에 다가왔습니다. 말을 걸어주고, 이것저것 궁금해 하고, 이리저리 끼어주고...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고 맘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갔습니다. 그 친구가 대학 때 부터 가까운 또 다른 친구가 있어서 우리는 자연히 셋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35년. 그 세월 동안 우린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쏘다니는 세월이 쌓여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론 신학적 안목이 달라도, 취향이 달라도, 입맛이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서울 목사로 가고 지방 목회자로 가고 교수로 가면서 사는 바닥이 서로 달라도, 의견과 주장하는 바가 때론 달라도, 그것이 친하게 함께 놀며 지내는데 문제가 되지 않고 장애도 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해도 이해가 되고, 나 같았으면 하지 않을 생각과 행동을 해도 그냥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는 데까지 함께 왔습니다. 우리는 서로 깊은 정이 든 것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정든 사람이 있어야 살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린 서로를 정든 사람이라고 여겨줍니다. 아내들도 그렇게 여기며 함께 먹고 즐거워합니다. 우린 늙어갈수록 이 아까운 세월을 아끼는 맘으로 기회가 없으면 만들면서라도 자주 만나고 싶어 합니다. 나는 친구들의 그 따뜻한 맘결과 배려 때문에 행복합니다. 안병욱, 김형석, 김태길. 앞의 두 분은 대중 사상 강연으로, 마지막 분은 글로 한 시대 한국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들입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 분들의 강연을 쫓아다니며 들었습니다. 김형석 교수가 최근 98세가 되어 하신 강의를 들었습니다. 젊을 때는 일을 열심히 하느라 셋이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떠날 날이 가까워 오니 이제 자주 만나자는 제안을 안 교수님이 해왔다는 것입니다. 김형석 교수님은 좋은 생각이다 싶어 일 년에 네 번씩을 만나자고 일정을 정하여 김태길 교수님께 연락했습니다.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야 자꾸 만나면 떠나는 사람은 괜찮지만 남는 사람은 정든 마음 상처를 어떻게 하라고 그러느냐고, 마지막 혼자 남을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봤냐고 나무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는 사람 맘 아플 것 생각하여 늘그막에 정드는 일 하지 말자는 김태길 교수님의 말을 들으니 그렇겠다 싶어 일 년 네 번 만나는 계획을 없던 일도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김 교수님 떠나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다른 한분 떠나 이제 자기 혼자만 남았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도 혼자 남을 사람 맘 아플 것을 생각하여 그것을 참으며 만나지 않겠단 것은 이미 깊은 정이 든 마음일 테지요. 우리 셋은 새파란 청년 때부터 정들기 시작하여 그 정이 무르익고 깊어지고 농익어서 이제는 누가 세상을 떠나 헤어져도 그간 누린 정이 있어서 괜찮을 듯싶은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나이 이만큼 살아 보니, 사람은 업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겠습니다. 해놓은 일 되씹는 보람만으로는 사람이 살기에 부족합니다. 사람은 돈이 많으면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살아보니 알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외로움도 잊을 수 있는 건 늙어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옆에 정든 사람이 있어야 사는 법이란 걸 알아갑니다. 목적이 같으니, 사상이 같으니, 경제 수준이 비슷하니, 아파트 넓은 평수가 같고, 신학 사상이 같고, 목회하는 교회 규모가 비슷하니... 그런 건 조건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는 왜정 때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늘 준모 아저씨라 부르는 어른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준모 아저씨는 대학교 출신입니다. 그분은 그 시절 도청의 높은 분이어서 늘 검은 색 “찌푸차”를 타셨습니다. 나중엔 그 지역 선거관리를 책임지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를 종종 찾아오셨습니다. 두 분이 다소곳이 앉아서 담소를 하셨습니다. 제 아버지는 그분께 “예수 믿고 교회 다녀” 하고 권하시곤 했습니다. 한번은 그분이 아버지께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도청에 있을 때 차를 타고 나가면 직원들이 늘 나한테 절을 했는데, 도청 떠나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한테 절을 한 게 아니더라고. 내 차한테 절을 했어.” 높은 자리 떠나니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서운함이었을 것입니다. 아주 어릴 때 들었는데 지금도 그 말씀을 하시던 준모 아저씨 모습이 생생합니다. 말년의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다가 붓을 내던지듯이 이렇게 말하며 편지쓰기를 멈춥니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사도의 말이 내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편지 몇 줄 쓰는 것 가지고는 양이 차지 않는다. 너의 얼굴을 보고 싶다.” 사도 바울은 임종을 코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딤후 4:21). 사도의 이 말 역시 보고 싶다는 말로 들립니다. 정든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사람은 나이 들어갈수록, 정든 사람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 법입니다. 신학의 엄격함이나 신앙생활의 철저함은 다른 사람과 정들어가는 것을 결코 방해하거나 금하지 않습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의 지론처럼, 우리가 같은 신학의 울타리 안에 있고, 같은 교단의 울타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서로 정이 들어가야 합니다. 만나는 것이 반가워야 합니다.
23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11)| 예수님 기념_정창균 목사
편집부
1769 2017-04-05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11) 예수님 기념 고린도전서 11:23-26 < 정창균 목사, 합신 총장, 남포교회 협동목사 > 주님의 고난을 기억함은 죄의 참담함, 그 죄에서 해방됨, 그리고 종말론적 소망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 또 다시 고난주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을 보며 슬퍼하거나 마음 아파하곤 합니다. 채찍에 맞아 고통당하고 멸시당하고 뺨을 맞으며 조롱당하는 주님. 그리고 잔인한 모습으로 고통의 극치를 경험하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 얼마나 고통이 크셨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이 드셨을까, 얼마나 모욕적이고, 외로우셨을까. 그렇게 반응하는 근저에는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동정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불쌍하고 안됐다는 감정에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른 차원에서입니다. 고난주간에 행하는 성찬식은 교회가 예수님의 고난을 집중적으로 기억하는 대표적인 의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성찬식을 행해야 하는 근거를 예수님의 찢긴 몸과 흘리신 피에 연결합니다. 그리고 성찬식의 본질적 의미와 기능은 죽으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두 번씩이나 확언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한 추억이거나, 혹은 추모가 아닙니다. 성찬식은 예수님 추모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 죄의 참담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불쌍한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우리 죄의 끔찍함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는 병정들이나 그들에게 예수님을 내어준 빌라도나 또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에 대한 분노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하지 말자는 도덕적 교훈도 아닙니다. 주님이 당하는 혹독하고 참담한 고난을 떠올리면서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흉악한 죄인처럼 저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죽게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저렇게 죽여야만 그 값이 치러질 만큼 참담한 나의 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 죄가 끔찍해서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주님을 기념한다는 것이 갖는 두 번째 중대한 사실은 그 끔찍하고 참혹한 내 죄가 주님의 저 고통과 죽음 때문에 값이 치러지고 그 죄의 참혹함으로부터 해방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죄에서 풀려났다! 용서 받은 자가 되었다. 이제 해결이 되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을 보면서 주님을 기념하는 것은 언제나 양면성을 갖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죽게 만든 내 죄의 참혹함에서 오는 슬픔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 끔찍한 내 죄가 해결되었다는 희열과 기쁨입니다. 이런 점에서 수난일의 성찬식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엄숙하고 어두운 추모예배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성찬식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검은 양복을 입거나 엄숙한 표정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습니다. 내 죄를 생각하면 우울하지만, 내 죄가 저렇게 해결된 것을 생각하면 기뻐 뛰며 감사할 일이기도 합니다. 찢긴 몸과 흘린 피로 상징되는 그 주님을 우리가 기념한다는 것은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신자에게 이루어놓으신 미래에 대한 공동체적 소망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성도들이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친히 베푸시는 상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며 먹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사실은 그 소망을 갖고 함께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념한다는 것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 있는 신앙공동체의 종말론적 소망과 고백입니다. 온 교인이 참석하는 성찬식은 이 사실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신앙공동체에 속한 교인들에게는 큰 격려와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사실을 함께 기억하고 그 주님을 기념하는 현장에서는 언제나 서로를 향한 격려와 축복과 소망을 확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한 신앙공동체의 지체가 되어 같은 종말론적 소망을 갖고 살게 된 것을 확인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23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10)| 그래도 의인은 제 길을 간다_정창균 목사
편집부
2212 2017-01-10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10) 그래도 의인은 제 길을 간다 하박국 2:1-4 < 정창균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신자는 여전히 제 길을 간다” 신자로서 현실을 살다보면 때로는 하나님이 많이 서운할 때가 있다. 우리의 신학이 통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이 먹히지 않는 현실을 살아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서운하다. 서운함이 사무치면 하나님이 위로가 아니라 상처가 된다. 상처가 오래 되고 깊어지다 보면 때로는 하나님이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분노의 대상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져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랜 옛날에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낸 항변도 바로 그 문제였다. 그는 하나님께 격렬하게 항변하고 탄원한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그가 쏟아내는 항변의 핵심은 매우 간단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 현실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품과는 딴판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신다. 마치 못 보시는 분처럼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세상이 돌아간다.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조리하고 불의한 삶의 현실을 놓고 하박국은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울부짖음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못 들으시는 분처럼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도 안하신다.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 간절한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무응답! 이것이 선지자가 삶의 현장에서 직면하는 문제다. 그렇게 확실한 자신의 신학과 신앙이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전혀 통하지 않고,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신학과 현실 사이의 괴리, 신앙으로 고백하는 하나님과 일상의 현장에서 확인하는 하나님 사이의 불일치이다. 그래서 그는 괴로워하고, 번뇌하고, 황당해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따져 묻는다. “어찌하여 이러시는 겁니까?” “어느 때까지 이러실 겁니까?” 하박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고 있다. 성루에서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 파수대에서 말씀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말씀이 얼마나 확고부동한지 판에 새겨진 것 같다. 판에 새긴 것은 지울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또한 그 말씀이 얼마나 선명하고 분명한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것 같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죄인은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해석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담고 있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은 현실이 어떻게 뒤바뀌어도 여전히 믿음의 길을 간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에게서 배운다. 이 말씀을 풀어서 말하면 이런 말이 된다. “의인은 그래도 믿음의 길을 간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신자는 여전히 제 길을 간다!” 이 응답을 통하여 선지자가 분명하게 확인하는 사실이 있다. 두 가지 이다. 첫째로 역사는 어떤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곳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악한 세력이 맹위를 떨치는 현실에서도 그가 내리는 결론이 그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2:14). 상황이 이렇게 처참한 지금도 역사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그곳을 향하여 가는 중이다. 둘째는 역사는 지금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확신이다. 때로는 어떤 독재자나 재력가가 이 현실 역사를 제 맘먹은 대로 주무르며 이끄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갈대아의 등등한 위세가 현실이 되는 현장에서 하박국이 내리는 다음 결론이 그것이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2:20). 오늘 날 교회 밖 세상이건, 교회 안 세상이건,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정신 차리고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곳을 향하여 가고 있다. 역사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이 두 사실을 보는가 보지 못하는가의 차이이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현실 세상이 어떻게 잘못 돌아가고 있어도 휘둘리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변절하지도,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냥 자기의 길을 갈 뿐이다. 여전히 제 길을 간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여전히 믿음으로 오늘의 현실을 살아간다. 세상이 이런데 언제까지 이러실 거냐고 따져 묻는 하박국에게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되물으신 셈이었다. 세상이 이런데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악인들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을 때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주신 답은 그것이었다. “의인은 그래도 제 길을 간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신자는 여전히 제 길을 간다! 새해에 우리 각자가 그리고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이 바로 그 길이다. 그만 남 탓하고, 권력의 언저리를 그만 기웃거리고, 더러운 탐욕을 그만 가슴에 품고, 신자답게 그리고 교회답게 제 길을 가는 한 해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새해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또 한 번의 기회이다.
23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09)| 축복하는 자와 저주하는 자_정창균 목사
편집부
2037 2016-09-21
축복하는 자와 저주하는 자 신명기 33장 1, 29절 < 정창균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라는 사실 알아야” 모세는 말년 40년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가 광야 40년 세월을 함께 살았던 그 백성들은 모세에게 언제나 친근하고, 대견스럽고, 고마운 사람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원망을 쏟아내고, 밑도 끝도 없이 대들고, 때로는 인정사정없이 배은망덕을 일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백성 앞에 서고, 백성의 아픔을 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광야 40년 동안 백성들이 이 사람 모세에게 행한 태도를 성경은 몇 가지 단어로 요약합니다. 거역하고, 다투고, 시험하고, 원망하고..... 모세는 그 길을 다 간 후 모압 평지에서 행한 마지막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백성을 한 마디로 말하였습니다.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내가 안다.” 하나님께서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놓고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이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스데반은 광야의 그 백성들을 회상하면서, 광야 40년은 하나님이 그들의 소행을 참으신 세월이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모세는 그런 사람들과 40년 목회를 한 셈이고, 그런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마지막 순간에 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무슨 짓을 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방신들을 따르며 철저한 반역과 배교를 할 사람들이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신31:16-20). 그러나 모세가 이 백성을 향하여 경고와 부탁과 권면으로 가득한 긴긴 설교를 마치면서 한 마지막 행동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그가 모든 할 말을 마치고 죽음을 맞기 전에 한 것은 이 백성을 향한 축복이었습니다.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 땅에서 한 마지막 말입니다. 그것은 첫마디부터 마지막 말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33:1)가 첫 마디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긴 축복의 선포를 모세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모세가 이 백성을 그렇게 축복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랑스러워서도 아니고, 자랑스럽고 미더워서도 아니고, 그간의 소행이 감사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족속들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들을 축복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려 하신다는 사실 때문인 것입니다. 백성의 잘난 모습도, 모세 자신의 너그러운 성품도 그가 백성을 축복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를 놓고 사람들이 당당하게 큰 소리로 쏟아내는 말들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무서운 말들입니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한국교회를 정확하게 진단한다는 구실로 쏟아내는 말들은 비난일색이고 결론은 거의 저주성 막말 선언입니다. 세상과 불신 사회야 이 지경이 된 교회를 끝까지 비난하고 모욕하고 무시하는 것이 당연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놓고 “내가 보물로 여기는 나의 소유요,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라고 선포하신 것을 놓고 보면 세상은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고,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에 대하여 큰 기대감과 그에 상응하는 요구를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그동안 교회가 저질러온 현실이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할 만하니까요. 그러나 신자들이나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나라 교회의 잘못된 현실에 대하여 마음껏 비난하고 비판하고 분노하는 것보다는 더 큰 일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애정입니다. 사랑을 받을 만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련지어 교회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고, 그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진노 가운데서도 결국 다시 일으키시고 구속의 역사를 이 땅에서 계속 진행해나가실 것이란 확신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저주하는 자의 매서움을 넘어 축복하는 자의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23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08)| 정 직_정창균 목사
편집부
2251 2016-07-05
정 직 로마서 14장 11-12절 < 정창균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실수하는 것은 연약한 것이지만,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 제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에는 정부의 높은 사람이 TV 뉴스에 나와서 하는 판에 박힌 말을 자주 듣곤 하였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정부기관이나 권력을 가진 인사가 연루된 것으로 여겨지는 부정이나 범법행위로 여론이 시끄러워지면 으레 고위 관료 등이 언론에 나와서 국민을 향하여 하는 말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정부나 권력자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수사학적 어법이었습니다. 국민 다수가 정부의 책임이고 고위 인사의 소행이라고 심증을 굳히고 있을 때 한 인사가 나와서 그렇게 발표하고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한 세월 반복되면서 국민들은 정부 인사가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짓을 한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무서운 불신이지요. 그런 불신은 급기야 정부가 하는 일이나 말에 대한 그 시대 다수 국민들의 보편적인 정서로 확산되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물가는 절대로 올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발표하면 많은 사람들은 곧 물가가 오른다는 말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발 빠르게 사재기를 하였습니다. 한 때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말은 들을 수 없습니다. 대신 다른 말이 계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도도 없었고, 그것은 불법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일을 하겠느냐”는 발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라는 강요처럼 들립니다. 이런 상식적인 것도 모르고 우리를 의심하느냐고 국민을 은근히 깔보는 어법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위 당국자나 정치인이 여론이 들끓고 있는 문제를 놓고 그런 발표를 하면 그대로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양심으로 보나, 국가의 법으로 보나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 시대인 것을 알면서도 그 짓을 했다는 말이냐는 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할 의도도 없었고, 할 수도 없다는 말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그 발표는 오히려 그 짓을 했다는 말로 뒤집혀서 들립니다. 이전 시대에 속아본 경험 때문에 나타나는 단순한 외상증후군일까요? 나 혼자만 심사가 꼬이고 생각이 비뚤어진 못된 인간이어서 드는 생각일까요? 그런데 숱한 사람들이 발표한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이면 어떤 책임추궁을 당해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실수로 그 짓을 했으면 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직입니다. 왜 우리의 말을 그렇게 믿지 않느냐고 개탄하기 전에, 우리가 처신을 어떻게 해왔기에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자탄하는 것이 더 시급해보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할 정치판에서야 정직이 치명적인 장애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인과 교회는 정직해야 합니다. 이 시대 신자와 교회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다양하고도 참혹한 문제들의 핵심에는 부정직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치판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때를 따라 정직을 버리는 것이 지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특히 영적인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살아남지 못할지라도 정직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람은 죄 된 본성에 젖어있고, 게다가 연약하기 까지 합니다. 자기의 소원과 달리 잘못을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 잘못을 범하고 실패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인정하는 것을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실수하는 것은 연약한 것이지만,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의 언행은 단순히 인간 사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1-12). 신자는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께 직고해야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궁극적 대상은 사람들일지 몰라도, 신자들의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덕과 준법 차원에서 거짓말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신자들은 신앙적 이유 때문에 거짓말 할 수 없습니다. 외형은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그 본질은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신자인 우리에게 지금 절실하게 그리고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직고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정직입니다. 거기로부터 새로운 시작의 틈새가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23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07)| 절대소망의 기회_정창균 교수
편집부
2452 2016-03-15
절대소망의 기회 느헤미야 8장 1-6절 < 정창균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성경말씀 없는 설교는 교회의 심장이 아니라, 교회의 폭탄이 될 뿐” 교회의 부흥기에는 무엇을 하여도 교인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행사들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프로그램과 그 행사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고 속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여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그런 행사나 프로그램 때문이 아닙니다. 부흥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로그램과 행사에 몰두하는 와중에 교회는 교회대로,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점점 말씀으로부터 멀어져갑니다.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자연스런 현상이 됩니다. 결국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부재가 당연한 현실이 됩니다. 부흥은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일반화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회사가 되고, 목회자는 경영자가 되고, 교인들은 고객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몰락하기 시작하는 쇠퇴기에는 이율배반적이게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게 됩니다. 교회가 현실에서 존재감을 상실하고 변두리의 무기력한 그룹으로 위축되는 현실에서는, 말씀이 무슨 효력이 있냐며 말씀으로부터 더 달아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율배반적으로 교인들은 이 때야 말로 어느 때보다도 말씀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무런 불만 없이 은혜 받으며 잘만 들어오던 설교에 대하여 성경본문말씀을 설교하지 않는다며 그 설교 듣기를 고통스러워하며 불만을 토해내는 교인들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근래에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부쩍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본문을 말하지 않는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힘들다는 하소연입니다. 두어 주 전에도 한 제자 목사님이 걱정스런 얼굴로 지인 장로님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오랫동안 목사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몇 달 전부터는 정말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성경본문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목사님이 그동안 성경본문을 설교해오셨는데 갑자기 그렇게 변해버린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오래 전부터 해오던 설교를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장로님도 그동안 별 불만 없이, 그리고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별 탈 없이 잘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경본문을 말하지 않는 그 설교를 도저히 듣고 앉아있을 수가 없을 만큼 힘들어진 것입니다. 주위에 이런 고민을 안고 힘들어하는 교인들이 자꾸 늘어만 갑니다. 이러한 흐름은 머지않아 거센 물결을 이룰 것이고 누구도 그것을 거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에 대한 불신앙적 도전이 아니라, 소망을 주는 기회입니다. 오늘 날 한국기독교에 가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이야 말로 말씀으로 돌아갈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새롭게 살아날 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일에 능통해지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에 철저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은 설교자의 강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 성도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해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에 철저해지는 일에 목숨을 걸라고 불려내진 사람들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설교자의 다리 놓기는 본문에서 만나는 “낯선 신세계”와 청중이 살아가는 “지금 이곳”의 세계를 연결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을 일으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청중으로 하여금 말씀을 통하여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는 신비이기도 하고 기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가 조롱을 당하고 불신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나는 여전히 설교를 신뢰하고 설교의 회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말대로 설교야말로 “교회의 심장”입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언제나 성경말씀을 말하는 설교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는 교회의 심장이 아니라, 교회의 폭탄이 될 뿐입니다. 혹독한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성벽재건을 마치고 수문 앞 그 광장에 모였던 모습을 나는 자주 떠올립니다. 남녀 구별 없이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백성이 그 광장에 모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특설 강단이 세워졌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펴서 들고 그 강단에 서니, 모든 백성들이 일어섭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니,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합니다. 한국교회가 이제 들어가려고 하는 곳이 바로 이 광장입니다. 나는 한국교회에서도 이 광장의 모습을 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벨론 강변에서 수금을 나무에 걸어버리고 통곡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 때처럼 혹독한 우리의 현실을 통하여 그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지금 망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절명의 기회를 맞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3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06)| 목사는 공공의 적인가?_정창균 목사
편집부
2436 2016-02-16
목사는 공공의 적인가? 로마서 2장 24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요즘 목사라는 이유로 죄책감 사로잡히는 사회는 정상일 수 없어” 어디 가서 교회목사라고 말하면 불신자들도 예를 갖추어 대하는 때가 한 때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어디 가서 신자라고만 해도 그를 일단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정 반대로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의 공사나 다른 일을 맡길 때는 신자가 하는 업체에는 맡기지 말라는 말이 돌아다닌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야!”라는 말은 그 사람은 믿을만하다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빈정대고 모욕하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목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목사는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도 골칫덩어리로 여겨지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사에 대한 비난과 조롱과 모욕이 교회 안팎 여기저기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도도 점점 더 세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몇몇의 주장들을 들여다보면 사실 그 핵심은 목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이 사회에서 목사는 마치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목사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그동안 줄기차게 도덕적, 인격적, 법적 그리고 신앙적 비난의 한복판에서 표적이 되어온 몇몇 스타목사들의 영향이 결정적이기도 합니다. 비리와 범죄로 비난 받으면서도 그것을 멈추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뻔뻔스럽게 자기의 길을 가는 몇몇 목사들의 모습이 수많은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착한 목사들이 똑같이 목사라는 칭호로 불린다는 이유로 억울하게도 그들과 똑같이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에서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당하는도다”며 탄식하셨는데, 바로 그 일이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목사들은...” 하고 목사들을 비난할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큰 교회 목사이거나 혹은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한 행동이 당연히 한국교회 모든 목사들의 표본이나 대표가 된다고 전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실 15만 명 다된다는 한국교회의 목사들 가운데 절대 다수는 목사답게 그리고 신자답게 살고 목회해보려고 고생하는 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공공의 적이 아니라, 공공의 유익을 끼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신앙인 지도자들입니다. 목사들 가운데 자신의 사례비가 너무 많아서 그 내역이 밝혀지는 것이 싫은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절대다수의 목사들은 사례비가 너무 적어서 그것이 밝혀지면 당할 창피가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절대다수의 목사들은 은퇴사례를 더 받기 위하여 교회에 억지고집을 부리거나 추잡한 흥정을 벌이기는커녕 아예 은퇴사례 자체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의 5만여 교회 가운데 100명 이상 모이는 교회는 15% 미만이라는 통계만 보아도, 대부분의 교단에 미자립 교회가 80% 이상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현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부의 목사가 못된 짓을 하는 것이니 상관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잘못이고 다른 목사들은 책임도 관계도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았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사고뭉치 목사들이 벌이는 행각을 놓고 그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하여 곧이어 그가 목사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같은 목사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모든 목사에게 적용한 다음, 당연히 모든 목사가 그 사람이라고 단정을 지어 이제는 그 특정의 사람이 아니라, 목사라는 직임을 그런 것으로 규정짓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한 처사가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임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 부끄러움이 되고, 어디 가서 목사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거리낌이 되며, 사고가 터질 때마다 같은 목사라는 이유로 언제나 막연한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교회와 사회는 정상이 아닙니다. 지금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공공의 적이 되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직임이 공공의 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졸업시즌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곤 합니다. 3년 동안 데리고 지내다 이제 손에 졸업장 한 장 쥐어주며 길을 떠나보내는 저들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잘 가르치고 잘 갖추어주지는 못했지만 부디 공공의 적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독을 받게 하지 말고, 그 길을 목사답게 끝까지 잘 가기를 빌어볼 뿐입니다.
23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05)| 두려워 할 것과 말아야 할 것_정창균 교수
편집부
2369 2015-12-15
두려워 할 것과 말아야 할 것 마가복음 8장 38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세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비위 맞출 수 없어”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생각 있는 교인들은 심한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끝나는 것인가? 교회는 이렇게 몰락하고 마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은 근래에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교인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도가 더 이상 효과가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내 노라 하는 소위 교회지도자들이 연일 사고를 치며 교회의 위상을 끝없이 추락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너나 할 것 없이 교회를 향하여 비난과 조롱과 모욕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목회현실은 나날이 혹독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제는 말씀, 전도, 기도, 그 외의 어떤 것도 이 상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교회가 시도하는 어떤 대책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무력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현실과 장래에 대하여 깊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이제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해야 된다는 절박감을 갖고 여러 단체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만이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 됩니다. 하나는 교회의 대사회적인 이미지를 개선해보려는 다양한 시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회를 개혁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필수적이기도 하고 이런 일에 앞장서주는 것은 고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하면서 우리가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비난과 거부를 극복하려는 방안이나 ,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들이 자칫하면 교회의 본질을 살려내는 데에는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와 좋은 이미지를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실제로 교회가 이 사회에 어떻게든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오는 처신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복음과 성경의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의 세상이 싫어하는 것이나 사회로부터 책잡히거나 구설수에 오를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진리에 근거한 예언자적 선포를 해야 하는 교회의 진정한 본질은 사라지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살아남기 위한 온갖 비위맞추기에 교회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간음을 법적으로 정당화하여도 세상의 흐름이 그러하다는 명분으로 그에 대한 발언을 하지 않고,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면 또 세상이 들고 일어날까봐 몸조심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강하게 말해야 할 때 또 독선적이라고 비난 받을까봐 두려워서 입조심 하고, 정권에 아부하고, 문화적응이라는 이름으로 타협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상의 기우가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확인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교회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너무 깊이 갖고 있습니다. 이제야 말로 가장 분명하게 복음과 성경의 진리를 말해야 할 때 지금까지 해온 우리의 처신이 염치가 없어서 입을 다물기도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선포를 하는 것이 세상의 비위를 거스려 자칫 불 난 데에 기름을 붓는 일을 하지는 않을까 조심하느라 할 말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우리는 정말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느라고 정말 두려워할 것은 묻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에서 살아야 되는지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우리의 목적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인하면서라도 어떻게든 타협하여 살아남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했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했고,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이라 하셨습니다(막 8:34-35).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것은 무엇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23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04>| 고통의 때_정창균 목사
편집부
2670 2015-08-04
고통의 때 누가복음 7장 31-32절;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인정하고 지켜야 할 약속조차 무너지고 있어”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무엇으로 비유해서 말 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무엇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직접 던지신 바로 그 질문입니다. 질문을 던지신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비유로 들어 답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꼭 이 아이들 같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장터에 모여 두 패로 나누어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에는 그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게임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게임이 가능하게 하는 약속은 이것입니다. 한 쪽의 아이들이 잔치집의 노래를 피리로 불면 다른 쪽의 아이들은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쪽의 아이들이 초상집의 곡을 하면 다른 한쪽의 아이들은 우는 것입니다. 한 쪽의 아이들이 피리를 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의 아이들이 춤을 추지 않습니다. 피리를 분 아이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었으니까 너희들은 춤을 추어야 되잖아? 그런데 왜 춤을 추지 않는 거야?” 춤을 추지 않는 다른 쪽의 아이들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을 합니다. “네 잔치지 내 잔치야? 너 좋은데 내가 왜 춤을 춰?” 한 쪽의 아이들이 곡을 합니다. 그런데 울어야 할 다른 쪽 아이들이 울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의를 합니다. “우리가 곡을 하면 너희가 울어야 되잖아! 그런데 왜 안울어?” 울지 않은 아이들이 시큰둥하여 답을 합니다. “너희가 슬프지 우리 슬퍼? 네가 슬픈데 왜 우리가 울어? 네 자식 바다에 가라앉아 죽었지, 내 자식 죽었어?” 게임은 더 이상 작동을 하지 않고 거기서 끝장이 납니다. 게임을 이렇게 망쳐버린 한 복판에는 지독한 자기중심성과 이기적인 탐욕, 그것이 만들어내는 비정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가지고 이 세대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후 사도 바울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하면서 이 세대의 이 문제를 더욱 직설적으로 지적하며 들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이 세대”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말세를 포함하고 있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말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를 포함합니다. 사도는 이 세대를 가리켜 고통의 때라고 단정합니다. 그리고는 이 세대가 드러내는 고통의 양상을 다양하게 열거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며, 원한을 품으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고통의 종류도 다양하고, 고통을 유발하는 양상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가 고발하고자 하는 이 모든 현상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독한 이기심입니다. 냉혹하고 매정한 자기중심적 탐욕입니다. 아이들의 게임에서처럼, 한 사회에도 그 사회가 제대로 작동을 하고 성립하려면 그 사회의 일원 모두가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노래를 하면 춤을 추어주고, 곡을 하면 울어주는 약속입니다. 함께 살고, 더불어 살고, 상대방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양도보 하고 때로는 맞추어주기도 하는 멋스러움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사회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하여 모두가 인정하고 지켜야 할 약속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고통합니다. 이 세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각각의 고통을 걸머지고 살아갑니다. 모두가 자기에게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교회나 정치집단이나 모두가 이 원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묻고 답합니다. “너 그것은 다른 사람을 헤치는 것이니까 하면 안 되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해?” 고통하는 세대의 모두의 대답은 동일합니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또 묻습니다. “너 이렇게 해야 되는 거잖아. 그런데 왜 안해?” 고통 하는 말세를 사는 이 사회의 사람들의 대답은 모두 동일합니다. “내가 하기 싫으니까!” “만 명도 더 모이던 교회가 싸움통에 천 명도 안남았는데 왜 아직도 싸워? 교회가 없어지겠잖아?” “우리가 이겨야 하니까!” 자기 행동과 처신과 의사를 결정하는 최우선의 절대적인 기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호불호와 이불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만이 아니라, 점차 나 자신을 죽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사회가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무서운 자기 집착과 이기적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잔치 집을 위하여 함께 춤추고, 초상집을 위하여 함께 울어주어야 하는 사회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즐거운 놀이가 다시 작동할 수 있습니다.
23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03>| 요즘 생각_정창균 목사
편집부
2642 2015-06-23
요즘 생각 빌립보서 2장 4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이제는 함께 그리스도의 복된 나라를 이루어가자고 힘써 설교해야” 우리 동네에는 품위 있는 드립 커피를 마시며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주변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좋은 카페가 있습니다. “카페 융”입니다. 즉석에서 구워 녹차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주는 와플은 정말 기분을 좋게 합니다. 그런데 귀한 손님 오셨기에 모시고 오랜 만에 찾아갔더니, 아뿔싸! 없어져 버렸습니다. "영업 종료 안내" 팻말만 덩그러니 문에 붙었네요. 덕분에, 미국 간 우리 새끼들 오면 쓰려고 차곡차곡 아껴두었던 나의 적립금 일만 육천 원도 졸지에 종료되어 버렸습니다. 가만 보니 옆집에 있던 “LORO” 스낵 집도 없어졌습니다. 타로점 집이 그 옆에 들어왔는데 한 아주머니가 점은 안치고 텅 빈 가게 안에 서서 애꿎은 화분에 물만 주고 있네요. 살기가 많이 어려워진 게 분명합니다. 이 사람의 어려운 살아가기가 저 사람의 살기를 어렵게 만들고, 그 사람의 살기 어려운 것이 또 다른 사람의 살기를 어렵게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살아가기는 돌고 돕니다. 우리의 살아가기는 모두가 이렇게 얽혀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린 그걸 모르고, 저 사람을 궁지에 넣어야 내 살기가 편해진다고 믿고 그 헛되고 부질없는 제 욕심 챙기기에만 진력하는 걸까요? 어느 기관에선가 36개 국가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라는 뉴스를 얼마 전에 보았습니다. 청소년들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능력을 알아보는 설문이었다네요. 한국의 청소년이 주위의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36개국 가운데 35등 이었다네요. 부모들에게 설문을 했답니다. 자기의 자녀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가르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답니다. 한국의 부모가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자녀에게 가르칠 의향은 36개국 중 꼴등이었다네요. 유치원에 가기 전부터 경쟁에서 이기는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사회의 부모들이니 당연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나라 정치현실이 주는 스트레스는 도를 넘고 있습니다. 너는 내 편이 아니니 네가 하는 모든 것은 잘못됐고, 넌 내 편이니 네가 하는 모든 것은 다 괜찮고... 그것이 가능할까요? 정치꾼들이 나누어놓은 편 가르기에 휘말려서 늘 그들을 대신한 대리전에 동원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나요? 싸움은 그들이 내세운 논리에 놀아나는 우리들이 편을 갈라 대신해주고, 정치꾼들은 유권자끼리 싸움만 붙여놓고 뒤로 빠져서 구경한 다음 잇속만 챙긴다는 생각을 하면 억울하지도 않나요? 누구라도 잘못했으면 지적하고 비판하며, 누구라도 잘하는 짓이면 인정하고 칭찬하는 균형과 공평, 그리고 객관적 분별 의식이 우리의 보편적인 상식이 될 날은 영영 없는 것일까요? 정치꾼들이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수가 빤히 보이는 거짓말로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달라고 하면, 그것을 혼내주어서 그런 짓을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최소한 종교지도자들은 그래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야 이편에 섰건, 저 편에 섰건 결과적으로 모두가 다 행복하게 잘 살게 되는 길이 열리는 것 아닌가요? 사회가 너무 매서워지고 있고, 너무 매정해지고 있습니다. 잔인함과 결별해야 할 텐데, 점점 잔인함에 친숙해지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의 여유로움과 지는 자의 호탕함이 주는 멋스러움을 우리는 점점 등 뒤로 던져버리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기는 자는 방자함으로, 지는 자는 원한으로 모두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노려보는 무서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 만큼 살아서 다행인데, 우리 자식들이 살아야 할 세상은 어쩌고, 이제 태어난 저 손주 녀석들 세대가 살아야 할 세상은 어쩌나, 겁이 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각 개인의 복지를 넘어, 하나님 나라 공동체 건설을 지향하고 있는데, 우리의 강단은 이기심 가득한 개인복지와 개인 성공 외치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쯤은 모두 함께 얽혀서 사는 공동체로 그의 복된 나라를 이루어가야 된다는 사실을 힘써 설교해야 합니다. 문 닫은 카페 융이 아무래도 맘이 짠해서 간판이라도 다시 한 번 볼 양으로 하던 일 멈추고 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앗싸! 휑한 가게 안에 사장님이 혼자 물건을 정리하고 있네요. 문을 밀고 들어가 화들짝 놀라는 주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간 손해는 안보았어요?” “많이 손해봤지요!” “어제 왔더니 없어져버렸기에, 너무 서운해서 다시 한 번 와봤어요!” “감사합니다!” “어디를 가든 잘 사세요!” 감사하다며 꾸벅 절을 하는 사장님을 뒤로 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헤어져 돌아와 앉으니, 마음은 여전히 쓸쓸하고 짠합니다. 커피 집 문 닫았는데, 왜 교회 문 닫는 목사들 생각이 문득 날까요? 여기저기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교회 문을 닫았단 소식이 자꾸 들려옵니다. 그 지경인데 낼 힘이 남아있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힘을 내보세요.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순종할 길을 어떻게든 찾아봐야 할 텐데... 이래저래 수심만 깊어지는 세월입니다.
23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02)| 목사의 딸과 아버지의 딸_정창균 교수
편집부
3882 2015-03-17
목사의 딸과 아버지의 딸 고린도전서 4장 1-4절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박윤선은 율법주의, 기복신앙, 권위주의, 인간을 높이는 것 가장 싫어했던 분”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의 딸이 아버지 박윤선 목사님과 얽힌 가정사와 목사 박윤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서술한 수기형식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족들이 겪은 고생과 아픔에 대한 연민과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주를 위해서 살겠다는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로, 나라를 위하여 살겠다는 이들은 독립운동에 나서면서 그 와중에 그들의 가족들은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시절을 살아낸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그 고통과 고생을 담보로 맺어진 열매를 박윤선의 제자들과 한국교회가 누렸다는 생각이 들어 가족들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박윤선의 가족들이 어떤 고생을 하였으며 박윤선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품고 오랜 세월을 지냈는지 저는 나름대로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터였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하여 한 맺힌 분노를 품고 살았던 큰 아들 춘호씨가 2008년 77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마지막 5년 동안을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며 처절하게 회개하고, 그간 분노하고 증오하였던 여러 사람들을 찾아가서 혹은 전화로 일일이 사과하고 화해하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았는가, 특별히 새어머니인 이화주 사모님에게 어떻게 사죄하고 화해하며 지냈는가를 박은혜씨를 통하여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박은혜씨는 생전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가장 격렬하게 표출하였던 아들로 알려진 박윤선의 큰 아들 춘호씨의 딸이고 박윤선의 친손녀입니다. 이 부부는 미국에서 돌아와 3년 전에 신학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천안에서 매우 열악한 환경가운데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씨를 통하여 그의 삼촌이었던 다니엘 씨도 세상 떠나기 얼마 전에 그 부부를 통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얼마나 통렬하게 회개하고 눈물로 살았는지 들었습니다. 특히 평생 가장 증오했던 새어머니에게 전화로 통곡하며 사죄하였고 이화주 사모는 비행기로 날아오고, 후에 다른 이복형제들도 비행기로 날아와 화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은혜씨를 통하여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은혜씨는 자기 아버지 춘호씨에 대하여 해소할 수 없는 분노와 한을 품고 살았지만 마지막 5년 동안의 모습을 보며 자기 아버지를 용서하고 감사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내력을 알고 있어서인지 사실 박혜란씨의 ‘목사의 딸’은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박윤선과 상당 기간을 같이 보낸 여러 사람들이 그 책에 기술된 어떤 사실들에 대하여 사실성 여부를 갖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고 반론을 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진술들의 사실성 여부보다 더 충격적으로 제게 다가온 것은 그 책이 소개하는 박윤선에 대한 특정의 일화들에 대한 저자의 안목이었습니다. 책의 전편에 흐르는 저자의 분노에 찬 기운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생생하게 감지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이 많이 힘들었던 것은, 저자가 일관되게 분노에 찬 안목으로 자기가 소개하고 있는 각각의 사건들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른 자녀들도 이 사건을 이렇게 이해하고 해석할까 하는 의구심이 여러 곳에서 들었습니다. 저자는 목사의 딸이 아니라, 아버지의 딸로 맺힌 한이 많아 보였습니다. 박윤선이 주석 집필에 전념하느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많은 도리들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본인도 말년에 이르러 많이 아쉬워했던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는 합신에서 한 교수에게 자기는 학생들을 교육하는데 실패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주석집필에만 전념하느라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학생들과 관계를 맺고 돌보는 일에 소홀히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합신에서는 이제 그 일에 전념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하기를 애썼고 어느 때는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불러서 돈이 든 봉투를 건네주며 격려하였습니다. 거의 언제나 그와 동행했던 이화주 사모님의 두꺼운 수첩에는 제자들의 기도제목이 빼곡히 적혀 있곤 했습니다. 그가 가장 소리를 높이며 반대했던 것이 율법주의와 기복신앙과 권위주의, 그리고 인간을 높이는 태도였습니다. 그가 가장 힘주어 배격했던 것들을 놓고 그의 딸은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단정을 자신의 책에서 하고 있어서 그 점이 가장 의아했습니다. 박윤선은 어린 제자가 설교를 해도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아멘 아멘 하며 설교를 듣고, 그가 사회를 하고 강단을 내려오면 아무리 어린 제자라 하여도 설교자의 신발을 바로 놓아주며 자리에 돌아오는 모습은 수없이 목격된 일입니다. 죽기 직전에도 인간 박윤선의 의를 제거해달라고 소리쳐 기도했다는 증언, 평생을 바쳐 저술한 주석임에도 그것이 박윤선의 개인적인 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다 불살라 버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실 저는 박윤선의 설교를 연구한 설교학 박사 논문 하나를 지도해보려 해도 그의 설교 자료가 충분히 남아있지 않아서 포기한 상태입니다. 박윤선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면서 그의 유품 하나도 제대로 모아놓지 않은 그의 후예들에게 사실 저는 서운함이 많이 있습니다. 개인을 높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평생의 지론과 그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후학들의 지나친 조심으로 역사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오히려 큰 실수입니다. 그가 언어 실력이 없어서 중국어 번역 성경을 보았을 뿐이라는 진술은 박윤선을 알거나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율법주의자 기복신앙가 권위주의자 언어에 무식한 자이었는지는 딸이 그렇다하면 그런 것으로 결론이 나는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해석학적으로 학문적으로 논증이 되어야 할 일들입니다. 이미 숱한 학문적, 경험적 논의를 통하여 그는 그런 사람과는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논증되어온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책에서 피력한 이러한 단정들에 대하여는 다시 하나씩 검증하고 논증하는 일들이 합신이나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목사의 딸로서 쓴 글일는지는 몰라도, 30년 가까이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70대 중반의 딸이 아버지의 딸로 쓴 글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 이 책을 덮으며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오히려 박윤선이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이들에게 박윤선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좋은 기회를 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어서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동시에 20대 후반에 박윤선을 만나서 그의 제자요, 그의 신학과 사상과 인격으로부터 평생 영향을 받고 그로부터 유익을 얻으며 살아오고 있는 나로서는 그분 때문에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분의 딸은 물론 이미 세상을 떠난 대부분의 다른 가족들과 남아 있는 후손들에게 여전히 미안한 마음입니다. 박윤선을 지칭하는 것 같은 맥락으로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는 디모데전서 5장 8절을 인용한 이 책의 추천자에 대하여 저는 고린도전서 4장의 말씀으로 답을 하고 싶습니다.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22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01>| 벼랑 끝에 서는 신앙_정창균 교수
편집부
3443 2015-01-13
 벼랑 끝에 서는 신앙 여호수아 3장 8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신앙이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겁 없이 우리를 벼랑 끝에 세우는 것” 애굽을 벗어난 백성들이 홍해를 담대하게 건넌 것은 하나님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홍해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홍해 가에서는 현실적으로 안전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그 바다 한복판에 길이 이미 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아무리 바다로 달려 들어가도 거기 빠져죽을 일이 절대로 없었습니다. 이것은 굳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발동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저절로 확인되는 상식이고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빠져 죽을까봐 바다를 건너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바보천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단강 가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강물은 강 언덕까지 넘실댔습니다. 그 강에 그냥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그러면 모든 꿈은 허사가 되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은 한 순간에 끝장이 나고 만다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는 야속하고 매정할 만큼 단호했습니다. “너희가 요단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나님이 변심하신 것일까요? 심술이 나신 걸까요? 요단에 들어서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강 저편에 보이는 저 땅 곧 우리를 들여놓겠다고 하셨던 저 땅에 하나님은 약속대로 반드시 우리를 들여놓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어느 정도나 가지고 있는가, 지금까지 40년 동안 그 길을 지내오면서 경험하고 확인했던 그 하나님을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가를 행동으로 보이라는 요구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언약궤를 등에 멘 제사장들을 앞세워 넘실거리는 그 강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에 들어간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자살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을 그렇게나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벌어진 일을 성경은 이렇게 극적으로 기록합니다. “물이 그치고, 물이 쌓이고, 물이 끊어지고... 백성은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넜다!”(수 3:16). 갈라진 바다를 확인하고 안심하고 건넌 홍해 길을, 죽는 줄 알고 그냥 들어갔다가 이런 기막힌 현장을 경험하는 스릴 넘치는 이 길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만들어진 기적을 누리는 길과, 기적을 만들며 가는 길을 어떻게 같은 차원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안전하고 편안하고 남보다 나은 생활을 보장 받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안전보장이 아니라, 위험하고 힘든 길을 내질러 가는 모험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가 너무 분명하여, 그분을 믿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보고 싶고, 그분을 의지하고 땅 끝까지 나아가보고 싶은 모험입니다. 그리하여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넘실거리는 요단강 한복판에서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하는 스릴 넘치고, 감격 넘치는 모험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홍해 가에 있기를 바라고, 요단강 가에 서기를 두려워합니다. 홍해 가에 서서 지팡이의 기적을 학수고대할 뿐, 목숨을 담보로 한 믿음으로 출렁이는 요단에 들어서기는 싫어합니다. 홍해와 요단강 사이에는 광야라는 삶의 현장과 그 현장을 살아내는 40년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알아갔습니다. 평생 홍해 가에 서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곳은 드디어 광야라 불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 그리고 40년이라는 구체적인 세월을 살아내야 하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열심히 기도하고, 힘에 지나도록 헌신을 드려서 힘든 현실을 빨리 벗어나거나, 고통의 현장을 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체적인 현실, 그리고 계속되는 그 세월을 걸머지고 낑낑대고 울고 신음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때로는 따져 묻기도 하면서 점점 그곳에서도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며 은혜를 이루어 가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어 증거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에 겁 없이 우리를 벼랑 끝에 세우는 행위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며 넘실거리는 요단강을 원망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낼 기회로 알고 그냥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꺼이 자신을 벼랑 끝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 만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그 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새해에 한국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은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기 때문에 기꺼이 벼랑 끝에 서는 신앙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22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00)| 말씀 없이도 잘만 살아온 재앙_정창균 목사
편집부
3451 2014-11-18
 말씀 없이도 잘만 살아온 재앙 요한계시록 1장 3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강단에서 말씀의 회복과 말씀 부흥이 이 시대에 가장 급한 개혁” 한국교회는 지난 수십 년 긴 세월동안 말씀 없이도 교회는 부흥만 잘되고, 말씀 없이도 신자는 잘만 살아지는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잘되는 복 받은 한국교회를 세계에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그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렇게 살아온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흉은 한국교회의 말씀이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전에 이미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보려고 합니다. 말씀 이탈 현상을 주도한 가장 대표적인 현장은 다름 아닌 교회의 강단입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바로 설교자들입니다. 사실 그동안의 설교들은 말씀에 집착하여 신자와 교회의 성경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해왔습니다. 그래서 위로와 격려와 축복과 성공 등 소위 부와 건강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힘을 쏟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말하면서도 교회의 본질에 관한 성경말씀의 가르침보다는 일과 봉사 성장 등 교회의 기능이나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설교에 집중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설교는 점점 본문을 이탈한 설교로 변질하게 되었습니다. 신천지 이단의 파장이 이렇게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분별을 갖추지 못한 신자가 많아진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만희 자신도 신천지가 성경에 의한 참된 교회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정통교회의 이 점을 비난하며 비집고 들어옵니다. “요즘의 교회는 모두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천국복음을 가르쳐야 하는데도 세상 이야기나 하며 성도의 수를 불리는데 주력하고 있으니 세상 교회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이만희는 이 점을 간파하여 성경해석 문제를 자기의 주 무기로 들고 나오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성경을 제대로 풀어준다고 속이며 교인들을 미혹합니다. 한국교회는 말씀에 어긋나게 살고 있다는 것이 교회를 향하여 공격자들이 쏘아대는 화살인데, 우리는 그것을 되받아쳐낼 방패인 말씀을 잃어버린 셈입니다. 오랜 세월 성공과 축복과 위로와 격려와 간증, 그리고 우스운 이야기 등을 설교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근거로 한 심오한 가르침이라면서 다가온 내용들을 놓고 그것이 성경적인 것인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펴놓고 하는 그 말이 과연 신자나 교회에 대하여 맞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분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단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설교하고 신자와 교회의 성경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주는 성경적 설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어두워진 것이고, 교회가 어두워진 가장 심각한 원인은 강단의 말씀이탈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강단의 변절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의 한 가운데 설교자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임의로 바꾸어 말하거나, 말씀 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반역입니다.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요, 말씀을 기다리는 회중에 대한 반역이요, 말씀의 사역자로 불려내진 자기 자신에 대한 반역입니다. 설교자의 반역이 오늘 날 강단이 죽은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신자가 다시 살아날 길을 분명합니다. 철저하게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이탈과 말씀상실의 상황, 강단에서의 말씀의 침묵과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 정체성을 확인하는 근거는 성경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난 어디서도 우리는 신자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는 가장 확실한 방편은 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첫 마디도 말세를 사는 신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가치 있는 복은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행하는 자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이탈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곳이 강단이었다는 점을 의식한다면,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도 강단이 앞장서야 합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걸머져야 합니다. 성경책은 어디에나 나뒹굴고 있는데, 정작 그 안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수는 없는 시대를 더 이상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강단에서의 말씀의 회복과 말씀의 부흥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급선무입니다. 동시에 그동안 개인적인 차원에만 집중하여 온 설교에서 신앙공동체를 세우는 차원의 설교로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의 설교나 신앙적 관심은 지나치게 신자들과 하나님의 개인적 관계 문제에 집중되어 왔다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구속사의 궁극적 지향점도 하나님과 신자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구속받은 자들이 이루는 신앙공동체를 통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Selected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9)| 설교가 쓸모없는 시대_정창균 교수
편집부
3793 2014-09-23
설교가 쓸모없는 시대 히브리서 4장 11-13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교회와 민족을 살리는 설교의 부흥” 설교할 기회가 자꾸 없어져 갑니다. 주일 밤 예배를 없애는 교회가 늘어가고, 수요 예배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교회가 늘어갑니다. 예배가 자꾸 없어지니 당연히 설교가 없어져갑니다. 그런가하면 교회가 자꾸 없어지는 바람에 설교할 곳이 자꾸 없어져 갑니다. 얼마 전에도, 이제 교회의 문을 닫는다는 제자 목사의 글을 읽었습니다. 엊그제도, 고생만 하다가 이제 한계에 이르러서 도리 없이 교회의 문을 닫는다는 후배 목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설교할 기회가 없어지고, 설교할 곳이 자꾸 없어져 가니, 설교는 점점 쓸모없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아우성치고, 설교를 잘해야 한다며 애를 쓰는 우리의 몸부림이 마치 허공을 향해 헛발질을 하는 것처럼 허망하게 생각되어 깊은 시름과 회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설교할 곳이 없어져 가니 설교가 쓸 데 없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설교가 난무 하니 결국 설교할 곳이 없어지는 결과가 온 것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주일 예배의 30분짜리 순서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단순히 목사의 수많은 일 가운데 한 항목이 아닙니다. 설교를 제대로 하기 위하여 진력하는 설교자는 그의 삶과 사역의 곳곳에서 그 정신이 배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과 교인들에게 은혜가 되어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게 됩니다. 사실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설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첫째는 강단에서 본문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설교는 본문을 이탈하게 됩니다. 둘째는 강단을 내려와서는 치열하게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일상을 살아냄으로써 강단에서 선포한 말씀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설교는 단순히 말장난에 가까운 연설이 될 뿐입니다. 설교에 대한 한국교회 교인들의 불만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설교에서 본문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불만입니다. 둘째는 설교자가 자기가 설교한 대로 살지 않는다는 불만입니다. 셋째는 설교자가 자기가 설교한 대로 목회를 하지 않는다는 불만입니다. 결국 잘하는 설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설교는 강단에서는 본문을 말하고, 강단 아래의 일상에서는 선포한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설교가 연설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단순히 연설에 그치는 것이 아닌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는 말씀은 모두가 말씀의 선포와 순종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가 예배의 성패를 좌우하고, 설교가 목회자의 모든 사역을 좌우합니다.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니 교인이 모이지 않고 오히려 떠나갑니다.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니 교인들이 세상일에 사로잡혀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할 곳이 점점 없어져 가는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설교의 부흥입니다. 교회의 부흥이란 사실은 말씀의 부흥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부흥을 이루는 근본적인 주체는 우리의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문을 닫는 시대라고 하여, 또는 설교가 점점 무력해지는 현실이라 하여 설교에 대하여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에 설교를 무엇으로 대체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오히려 설교의 부흥을 위하여 더욱 몸부림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힘 있게 선포되면 교회는 흥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가 병들었으며, 병든 교회는 그 사회가 암흑의 시대로 접어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지난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얻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한 시대가 암흑기에 접어들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잠든 교회가 있고, 잠든 교회가 있는 곳에는 잠든 교인들이 있고, 잠든 교인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잠든 강단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강단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장소가 어디가 되든지, 규모가 얼마가 되든지, 내가 서는 강단에서는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는 설교자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단으로 설교에 진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을 점점 더 크게 반역하고, 교회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몰아넣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22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8>| 듣고 싶은 말과 들어야 할 말_정창균 목사
편집부
3835 2014-08-19
듣고 싶은 말과 들어야 할 말 열왕기상 22장 1-26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자기 욕심 따라 산 아합은 비참한 모습으로 최후 맞이해”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선별적으로 듣는다고 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골라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향이 병적으로 강하게 되면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에 대하여 이견을 내는 사람에 대하여는 자기 자신을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단정을 짓고 그를 적대시하곤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인정해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경향이 더욱 강합니다.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생각은 언제나 옳고 정당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재자가 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맞는 말만 골라 듣는 경향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골라서 듣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고르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곁에 두고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막고 곁에 둔 그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불통(不通)이 됩니다. 이런 경우 곁의 사람으로 뽑힌 사람들은 자기를 뽑아준 그 사람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계속해주게 됩니다. 정치판에서 오랜 세월 익숙히 들어왔던 김심(金心)이니 박심(朴心)이니 하는 말들이 생긴 연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그 사람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서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풍조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권력자의 곁에 있으면서 그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이 사람들은 그 대가로 생존을 비롯한 많은 것을 보장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를 맺고 산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사실은 서로 자기의 잇속을 챙기기 위하여 속고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일이 단순히 개인차원에서가 아니라 한 조직이나 국가 권력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는 그 파급효과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숱한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듣고 싶은 말을 헤아려 그 말을 해주는 일에 집중하며 사는 그가 정치판의 정치인일 때는 모리배가 되고, 선지자일 때는 거짓선지자가 됩니다. 그가 강단의 설교자일 때는 삯군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이 점에 있어서 매우 대조적입니다. 아합 왕은 아람 왕과 전쟁을 하겠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남북 연합군을 형성하여 전쟁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먼저 물어볼 것을 제안합니다. 아합은 400명의 선지자를 즉각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아합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또 다른 선지자를 데려다 들어볼 것을 요청합니다. 그때 아합 왕이 일부러 부르지 않은 한 사람의 선지자인 미가야가 불려오게 되고, 그는 400명의 다른 선지자들과는 정 반대의 예언을 합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일부러 따돌리고 부르지 않은 선지자였습니다. 아합은 미가야가 자신의 생각에 동조해주지 않을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아합은 미가야를 몹시 증오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 동조해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아합은 자기가 하는 일을 놓고 하나님이 복 주실 일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복 주실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사람을 찾는 왕이었습니다. 사백 명의 선지자는 정권을 잡은 아합의 편에 서서 언제나 왕이 맞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곁에 두고 그들의 말을 골라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왕의 생각을 거스려 아니라고 하여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념적으로 진보거나 좌파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왕과 얽힌 원한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말에 동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한 사람보다 왕의 기분을 맞추느라 아부하는 사백 명의 말에 더 힘을 얻고 자기 길을 간 아합은 그 전쟁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고, 그것이 그의 최후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자리에 있을 때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 사람을 가까이 두려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간 기분 좋자고 평생을 모리배나 거짓선지자에게 속으며 살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자리에 있을 때는 사실이야 어찌됐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어서 그의 기분을 맞추어주려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 이것저것 보장받으며 편하게 살자고 평생 사람 눈치 보며 비겁하게 살게 됩니다.
22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7)| 명의_정창균 목사
편집부
3082 2014-07-08
명의 - 고린도후서 11장 28-31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교회의 지도자들이라면 어떻게든 이 교회를 살려보려는 애정 품어야” 마치 교회를 비난하는 일에 경쟁이라도 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한국교회를 말하는 사람이면 거의 모두가 조롱에 찬 비아냥거림과 분노에 찬 비난으로 열을 올리기 때문입니다. 사회도 여론도 반기독교 단체들도, 교회 안의 신자도 교회 밖의 불신자도, 심지어 교회의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지도자들까지도 교회에 대한 비난과 가슴 섬뜩한 막말을 쏟아내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마음껏 비난하고 교회는 이제 끝나버렸다는 식으로 속 시원하게 최후 판정을 내리는 것이야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런 상태에 빠진 교회를 아직도 애정을 갖고 어떻게든 치유하며 되살려보려는 것이 어렵지요. 정당한 비평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비평은 사람을 정신 차리게 하고, 사리를 분별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에 애정이 달라붙으면 거기서 생명의 싹이 트게 됩니다. 그러나 비난은 비평과는 다릅니다. 비난에는 분노가 자리 잡고 있고, 비평에는 합리적 논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분노에는 감정이 작동하고, 논리에는 이성이 작동합니다. 명의는 진단을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절망적인 환자를 어떻게든 살려내고야 말기 때문에 명의입니다. 의학적으로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살릴 길을 찾아보려고 신음하며 애쓰는 것은 그의 의술 때문이 아닙니다. 망가지고 있는 환자의 생명에 대한 애착심과 책임감 때문입니다. 자신의 치료가 아무런 효험이 없는 환자를 만나면 밥맛도 잠도 없어지고, 그러다가 그냥 그대로 죽여 내보내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과 고통에 한동안 시달린다는 어느 명의의 말을 TV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명의는 의술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고통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에 된다는 것을 저는 그 때 알았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 그의 태도입니다. 최소한 자기 자신을 교회 지도자라고 여기시는 분들만은 제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신음하는 이 나라 교회에 대하여 예리하고 탁월한 심판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깊은 애정과 고뇌를 품은 명의가 되어 주십시오. 그래야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명의는 절대로 니코틴 중독으로 말기 폐암에 걸려 온 환자에게 그렇게 담배를 피워댔으니 죽어도 싸다고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죽어 마땅한 짓을 하여서 그렇게 되었어도, 일단은 살려내기 위하여 전력을 쏟아 붓습니다. 한국교회가 사방으로부터 우겨 쌈을 당하듯이 안팎으로부터 모욕과 공격을 받으며 이렇게 처절한 처지에 이르게 된 절대적인 원인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동안 신자는 신자답지 않게 살아왔고, 교회는 교회답지 않게 살아온 결과입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말을 들어도 답할 말이 없고, 무슨 비난과 책임추궁을 받아도 면목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이라면 몰라도 교회 안에 있는 신자와 지도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 교회를 살려보려는 애정을 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러므로 어떻게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를 규명해주고 책임을 묻는 것으로 끝나셨더라면 우리는 모두 심판 가운데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를 지적하실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우리를 살려내기 위한 대안을 내셨습니다. 그 대안이 바로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어떻게 철저하게 잘못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꾸짖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후에 그 교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고후 11:28-31). 막다른 길로 내몰리고 있는 한국교회 신자들과 신음하는 지도자들에게는 비아냥거림과 비난이 아니라 애정 어린 비평과 고뇌에 찬 대안이 필요합니다. 죽을병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애착심과 책임감 때문에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덤벼드는 명의가 필요합니다.
22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6)| 빈 무덤에서 갈릴리로_정창균 교수
편집부
3360 2014-04-15
빈 무덤에서 갈릴리로 - 마가복음 16장 1-4절 -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부활을 소유한 사람은 부활한 자답게 힘써서 오늘을 살아가야”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많은 이들이 갖게 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곧 부활의 감흥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오늘 같은 부활주일 아침만이라도 감격스러워지고 흥분이 되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해야 될 것 같은데 사실은 아무런 특별한 느낌도 없고, 저절로 우러나오는 아무런 증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부활절 감사헌금은 얼마를 해야 적당할 것인가 하는 고민만 하나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뭔가 감격스러워지고 흥분이 좀 되어보려고 노력을 해봐도 여전히 마음은 덤덤하고 냉랭하여 지난주나 오늘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부활신앙은 무엇인가 잘못된 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목회자는 부활주일임을 내세워 예배 분위기를 띄워보고자 하지만 부활주일이라는 사실만으로 예배 분위기가 뜨거워지지는 않는다는 현실을 확인할 뿐입니다. 아마 이것이 다수의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부활주일 아침에 겪는 곤혹스러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현장을 다루고 있는 복음서의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부활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의 그 현장에 대한 복음서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어느 곳에서도 부활을 저절로 우러나오는 흥분과 감격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날 첫 새벽에 예수님을 극진히도 사랑했던 몇몇 여자들은 극진한 정성으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향품은 죽은 시체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은커녕, 여전히 죽어있을 예수님의 시체를 생각하며 찾아간 것입니다. 빈 무덤 앞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놀라고, 떨고, 도망하고, 무서워서 말문이 막힌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속속 전해 듣는 제자들이 나타낸 반응에 대하여 복음서가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흥분하고 감격하고 좋아서 펄쩍펄쩍 뛰면서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등등에서 보는 것처럼 부활 신앙은 감정적 흥분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적 믿음의 문제임을 복음서는 이렇게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어지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갈릴리로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빈 무덤을 향해 온 이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주어지는 명령은 갈릴리로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내가 죽고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부활할 것이니 너희들은 갈릴리로 오라. 거기서 만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무덤으로 나아온 이 사람들에게 천사가 다시 다급한 어조로 재촉하는 것도 갈릴리였습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리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 28:7). “너희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주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라.” 마태복음 28장 10절에는 부활한 주님 자신이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온통 갈릴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갈릴리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곳, 예수님의 그 부활이 제자들에게 확인되는 삶의 현장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모여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는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라는 명령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의 현장이 부활을 확인한 자로서 살아야 하는 부활신앙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해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한 긴 말씀을 이러한 결론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결국 부활신앙은 생각만 해도 저절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격스러워지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그로 말미암은 나의 부활을 의지적으로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에 대하여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는 것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부활할 사람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문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사람들, 그래서 자신도 부활할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부활을 소유한 사람처럼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고 오늘을 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의 능력이고 요구입니다.
22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5)| 교리를 설교하지 않은 대가_정창균 목사
편집부
4542 2014-02-25
교리를 설교하지 않은 대가 디모데후서 4장 1-5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 교훈인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 해답” 한국교회가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위기적 상황의 양상도 다양합니다. 전도가 막히고 양적성장이 침체되고 있는 현실, 교회와 신자들의 도덕성 상실로 말미암은 교회 안팎으로부터의 불신과 비난, 기독교만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버리고 다른 종교와 함께 어우러지라는 사회와 타종교로부터의 반기독교적 혹은 종교다원론적 압력, 창궐하는 이단의 문제 등을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으로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양상이 무엇이든지 이 모든 위기적 상황의 공통된 본질은 바로 교회 혹은 기독교 신자의 정체성의 문제로 집약됩니다. 정체성이란 신자의 신자다움과 교회의 교회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극심한 핍박이나 유혹에 직면하여 때로는 억울한 비난을 당하기도 하고, 핍박을 자청하기도 하고, 당대의 사회로부터 한편의 소외그룹으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던 근저에는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 곧 교회가 교회 아닌 것으로 변절할 수 없다는 자기 인식의 확고함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교리에 의하여 형성됩니다. 교리는 우리가 신자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종말에 대하여, 그리고 영원에 대하여 중요한 신학적 이해와 안목을 갖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나아가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고백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살며, 어디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사는가 하는 신앙과 삶의 지침들을 확립하게 됩니다. 결국 신자는 교리를 통하여 자기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 사람들인가에 대한 확고한 기준과 지침을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는 교리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또한 확립하게 됩니다. 교리는 우리가 세상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보게 해주는 안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의 삶과 무관한 형이상학적 담론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구체적인 삶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와 명분으로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기피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강단에서도 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기피해온 것이 현대설교의 추세입니다. 교회성장이 목회의 궁극적 목적이 되고, 청중의 문제 해결에 부응하는 데에 설교의 초점이 맞추어 지면 강단에서는 문제해결(problem-solution)식 혹은 “how to” 설교 방식이 설교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강단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인 교리 설교가 사라지고 성공으로 이끄는 주제별 혹은 심리치료적 설교가 압도하는 현상을 빚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현장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설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게 되고, 그런 설교를 들어온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자신의 감정이나 자기중심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신자는 점점 신자가 아닌 것으로,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으로 변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단의 설교가 교리를 힘 있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기피하는 것은 신자와 교회를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가는 중대한 요인이 됩니다. 사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직면하는 이러한 위기상황의 핵심은 신자가 신자답지 않고,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보면 오랜 시간동안 교회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데 기인합니다. 교리를 설교하지 않은 대가인 것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교회사가로 알려져 있는 라토렛이 교회의 장구한 역사를 되볼아 보면서 한 말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에 대한 증언이자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 속에 얽매이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을 희생하고 주변의 환경에 순응하였던 교회들은 결국 자신들이 그렇게 순응했던 시대와 사회, 그리고 기류가 바뀌면서 모두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고 단언합니다. 이제 한국교회와 강단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첫 걸음은 다시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 교훈인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데로 시급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임종을 코앞에 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유언처럼 강력하게 명령하는 것도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른 교훈을 설교하라는 그것이었습니다(딤후 4:1-5). 이것은 하나님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분의 재림과 그의 나라를 내세운 엄중한 명령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놓는 마지막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바울의 그 명령과 부탁 앞에 있는 것입니다.
22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4)| 영문 밖의 교회_정창균 교수
편집부
3860 2014-01-14
영문 밖의 교회 히브리서 13장 12-13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되려는 순간 복음과 신앙 영향력 상실해” 교회는 세속적인 정치권력과의 연대를 통해서는 결코 세상 속에서 수행해야 할 교회의 본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위력과 영향력을 갉아먹을 뿐입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권력을 가진 중심 세력이 되면 복음의 영향력이 극대화되고, 세상 속에서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허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나 착한 인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이 속성상 자기 자신의 잇속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어서 교회의 선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그간의 교회 역사도 교회가 세상 속에서 권력을 가지게 되면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짧은 역사에서도 그것은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장로가 두 번씩이나 이 나라의 권력을 손에 잡았었습니다. 물론 교회들은 큰 기대를 갖고 환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교회지도자들과 교회 연합기관들은 어느 때보다 권력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한 동안은 국회의원의 반수 이상이 교회를 드나드는 교인들이고, 장관들 대다수가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그들이 중심이 된 교회단체들이 조찬기도회를 비롯한 갖가지 명분을 붙이며 뻔질나게 청와대를 드나들고 또 관공서를 드나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구호를 외치며 군중을 동원하는 거대한 모임을 주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부에서는 종교편향이라고 데모를 할 만큼 교회는 권력과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그동안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중심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가 이 사회의 권력과 우호적이고 때로는 이 사회의 중심세력인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시절을 지내오면서 한국교회는 조금도 더 교회다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는 데도 전혀 진전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권력과 가까이 지낸 몇몇 개인이나 단체들이 개인적 편익을 누렸을 뿐입니다. 오히려 수많은 작은 교회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신자들은 권력의 편애를 받고 있다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을 뒤집어쓰면서 더 고생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향력의 증대는커녕 전도는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권력과 부의 맛을 보며 편만해진 편의주의와 실용주의적 행태 때문에 이제는 수도 없는 사람들이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신자는 신자가 아니라고 드러내놓고 능멸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본질상 언제나 그 사회의 중심세력이 아니라, 변두리 그룹(marginal group)으로 존재합니다. 월터 브루그만의 말을 빌리자면 교회는 그 사회 안에서 외인(alien)으로 존재합니다. 교회는 속성상 세상 속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요, 따돌림 받는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과는 턱없이 다른 모습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교회의 진정한 능력과 영향력은 이렇게 해서 발휘됩니다. 별 것 아니어보여서 따돌림 받는 변두리 그룹의 사람들이 세상이 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세상이 할 수 없는 말을 담대히 하는 것을 세상이 보게 되고 그리하여 놀라고 신뢰하고 또 영향을 받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이 영향력입니다. 세상에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겠다는 명분 아래 세상 한복판에 자리 잡고 앉아서 너무나 세상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하고, 똑 같이 행동하고, 세상보다 더 잘되어서 세상의 중심이 되려고 애쓰는 동안 복음과 신앙의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억울한 누명과 배척과 거부와 능욕과 수치를 걸머지고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묵묵히 도성을 벗어나 영문 밖 고난의 현장으로 나가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된다고 권면합니다. 교회가 있어야 할 곳 그리고 나아가야 할 곳은 도성이 아니라, 영문 밖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로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이 사회에서 신뢰받는 소망의 공급자가 되기 위한 길은 이 사회의 중심 세력이 아니라, 영문 밖의 교회가 되는데 있습니다. 계속하여 이 사회의 주류 세력집단으로 남고 싶은 미련과 그동안 누려온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여 이곳저곳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벌이고 있는 추태를 이제 훌훌 털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영문 밖의 변두리 그룹으로 남아서 신자답게 교회답게 제대로 살아보다가 주님 만날 각오를 하는 것이 이 시대 우리의 지혜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위력은 영문 밖으로 나가는 교회가 될 때 발휘된다는 것을 성경도, 역사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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