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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2 (20:09:27)

신앙고백 열왕기상 18:21

 

< 정창균 목사 >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신본주의 버리고 인본주의로 살기 시작하면서 신앙고백도 멀리해”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말을 진술하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세 가지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첫째, 사실에 대한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지 그 내용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가는 관심도 없고 인식도 없으면서 이 말을 백 번하면 병이 낫는다거나, 귀신이 쫓겨 간다거나,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생각을 갖고 어떤 진술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최면이나 염불일 뿐입니다.

 

둘째,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럼으로써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과 나 자신과의 관계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단순한 객관적 사실 진술이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제3자적 입장에서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를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도 “나는 .....을 믿습니다”라는 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이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진술하고 고백한 내용에 대한 전적인 헌신입니다. 그 고백을 수행하기 위하여, 혹은 그 고백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나 희생도 기꺼이 지불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의 전적인 헌신이 언제나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신앙고백은 그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게 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진술(statement)만 있지, 고백(confession)이 없는 것 같다는 의견을 사석에서 피력한 외국인 교회사 학자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진술은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이라면, 고백은 자신의 삶을 건 헌신을 수반합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하다는 것은 그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신앙고백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언어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사의 사건입니다. 그 고백 때문에 모든 고통을 걸머지면서도 살아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고백 때문에 모든 영화를 내려놓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신자의 능력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참된 신앙고백을 하며, 그 고백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뵈옵게 됩니다. 그것이 신자가 이 땅에서 누릴 가장 큰 위로요,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자들이 신앙고백을 단순히 언어행위로만 여길 뿐, 그것에 신자와 교회의 삶을 걸어야 되는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기독교인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여기저기 교회 안팎에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을 강조하면 교회의 화합과 일치에 장애가 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편협 되게 하고 외곬으로 만든다고 소리칩니다. 포용력을 갖고 폭넓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다고 불평합니다. 무엇을 믿는가를 신앙의 본질로 삼지 않고,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실용성이 있는가를 중요한 관심사로 삼는 데서 온 병폐입니다.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본주의로 살기 시작하면서 초래된 참상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시작하면 결국은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오게 됩니다. 신앙고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결국 교회를 교회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신자를 신자가 아닌 사람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산으로 모아놓고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왕상 18:21).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그 고백대로 살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들의 현실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알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 되었고, 그것은 곧 아합과 이세벨을 등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를 포기하는 것을 각오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와 신자들도 갈멜산에서 주어졌던 엘리야의 도전 앞에 심각히 자신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머뭇거리지 말고 반응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현실적으로는 망하는 길처럼 보인다 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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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3)| 시대의 징조_정창균 목사
편집부
3327 2013-12-17
시대의 징조 누가복음 13장 1-5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목회자는 교인들을 섬기고, 정권을 가진 자는 백성을 섬겨야” 예수님은 이 시대의 징조를 알아차리고, 그 징조에 부합하는 처신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인가를 매우 단호하고 긴급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눅 12:54-59).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대의 징조란 무슨 신비한 경험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름이나 바람의 방향만 보고도 그날의 기상을 미리 알아차리고 자연스럽게 그에 맞게 반응하며 살듯이,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 가운데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감지하는 영적 분별력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3자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징조를 알아차리지 않는 것은 무식이나 무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고 모르는 체 하는 외식의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이 시대가 계속 말해주고 있는 징조의 핵심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과 그러므로 그 심판이 임하기 전에 긴급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대의 징조를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때, 두어 사람이 나서며 충격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여러 명의 갈릴리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한 사람들의 의도가 빌라도의 악함을 드러내려는 것일 수도 있고, 죽음 당한 사람들의 죄를 강조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이 사건이 자기 자신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예수님은 이 사건은 빌라도는 얼마나 악한자인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빌라도에게 저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너희는 빌라도에게 죽은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이 사건을 접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들에게 주는 이 시대의 징조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건, 곧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은 사건을 소개하셨습니다(4-5절). 그리고 앞에서와 똑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서쪽에서 일어나는 구름이 혹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람들에게 날씨에 대하여 말해주는 징조가 되는 것처럼, 이 사건들이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징조는 그 사건을 당한 그들이 아니라, 그 사건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이 주는 시대적 징조의 핵심은 이 사건을 듣고 보고 있는 “너희”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가 치명적인 재앙(심판)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의 칼에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 그리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며 열여덟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죽지 않은 자기들은 그런 죄에서 벗어나 있다고 안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 사건들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면하고 살아있는 자들이 이 사건을 보고 깨달아 긴급히 회개하라는 시대의 징조라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너도 그렇게 죽고 망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경고였습니다. 결국, 그 사건들은 죽임당한 그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면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정이었습니다. 북한 천지를 호령하던 장성택이 피멍이 들어 두 손이 묶인 채로 군복 입은 두 사람에게 끌려가는 모습은 다만 그 사람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권력의 상징이던 장성택이 저렇게 처참하게 몰락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듣고, 생각이 있으면 깨달아 세상 권력이란 게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가를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매정하고 오만하고 방자한 처신을 긴급히 버리고 목회자는 교인들을 섬기고, 정권을 가진 자는 백성을 섬기라는 시대의 징조요 경고일 것입니다.
22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2)| 한국교회, 절망과 소망의 두 얼굴_정창균 목사
편집부
3893 2013-11-05
 한국교회, 절망과 소망의 두 얼굴 요나서 1장 1절-2장 10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이제라도 하나님 한 분 붙잡고 제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어” 작금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은 “비난 받는 한국교회”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사회도, 여론도, 각종의 반기독교 단체들도 교회에 대하여는 욕설 섞인 막말 비난을 쏟아내기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계의 어른이라 일컬어지는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어떤 이들은 하나 같이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난의 화살들은 대부분 목회현장의 지도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난과 비판들은 대부분 그럴만한 이유와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 지경으로 모욕적인 비난을 받게 된 현실에 대하여 부끄럽고 면목이 없어 하며 깊은 시름에 잠겨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기독교연합단체는 자기들의 처신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20여개의 신학교와 200명 가까운 신학자들에게 업무를 방해하고 명예를 훼손했으니 10억씩의 손해배상을 하라며 소송을 제기하는 기괴한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실정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하거나 그보다 더 치욕적인 지탄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꿋꿋이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뻔뻔스러운 몇몇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에 한국교회의 절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모욕당하는 기독교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하여 공동의 책임과 죄책을 느끼며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기독교는 이제 헤어 나올 수 없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전과 같은 교세의 확장과 재정적 풍요를 누리는 세상은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아니면 영영 다시 오지 않을 것이란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목 좋은 곳에 건물을 세워놓아도 교인이 저절로 몰려오는 세상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공적인 신뢰나 영향력의 실추를 만회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많은 신학교들은 닥쳐오는 생존의 위기를 의식하며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안목을 조금만 바꾸어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눈으로 이 현실을 들여다본다면 이 절망이 그 자체로 끝장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절망스러운 상황은 우연히 일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서 저절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아닙니다. 마치 반역한 선지자 요나를 폭풍으로부터 물고기 뱃속까지 몰아가시고, 다시 마른 박넝쿨 앞까지 몰아가셔서 결국 하나님께서 의도한 곳에 그가 이르도록 요나에게 집착하셨던 것처럼 지금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한국교회를 막다른 길로 내몰고 계시는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막다른 길로 내몰리면서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단시일에 대형교회가 될 수 있는 세상도 아니거니와, 대형교회라는 사실로 아무데서나 모든 일에 대하여 위세가 통하는 세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난 세월 얼마동안은 대형교회라는 이유만으로도, 혹은 대형교회로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이유만으로도 영웅이 되고 모든 것이 정당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대형교회들이 무너지고 있고, 대형교회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비난을 받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주특기를 개발하여 그것을 특성화함으로써 부각이 되어 위세를 떨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는 그것이 교회라는 사실 자체로 교회를 비난하는 세상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몰리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실감하는 교회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한 분 붙잡고 제대로나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이 결론에 이르도록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는 이런 야심 저런 욕구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신자다운 신자,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일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결론으로 우리는 내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훨씬 더 가난하게 살고, 훨씬 더 소외와 배척과 모욕을 당하면서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기로 작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절망의 긴 터널의 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새 역사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 후에야 이 사회는 다시 한국교회를 신뢰하고 교회에게 영향을 받고자 할 것입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신자의 목적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신자가 되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부흥하고 또 살아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닫고 망하는 한이 있어도 교회가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에 들어서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것이 절망적인 우리의 현실이 담고 있는 놀라운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21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1)| 사랑하는 부교역자 제자들에게_정창균 교수
편집부
3467 2013-09-24
사랑하는 부교역자 제자들에게 빌립보서 2장 1-5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내가 그 교회에 이용가치가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신학생 한 사람이 단순히 사람 하나가 아니라, 교회 하나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신학생 열 명을 제대로 가르쳐내면, 제대로 된 열 교회가 서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께서도, “우리 교수들은 여러분을 그냥 사람 하나로 보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한 사람을 교회 하나로 보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강의 중에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가르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없는 자괴감과 비애에 빠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쳐서 내보낸 한 사람이 나가서 한 교회를 망쳐놓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선생을 잘 못 만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 크겠지만, 그래도 그런 소식을 들으면 선생으로 살아온 교수들의 마음은 미어집니다. 얼마 전에도 무척 깊이 알고 지냈던 제자 한 사람이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교인들 여러 명을 챙겨서 인근에 따로 교회를 세우고 다른 교단으로 소속을 옮겨갔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갈 곳이 없고, 할 일이 없으면 차라리 길바닥에 나 앉아 들판의 나물을 캐어다 팔아서 연명하는 한이 있어도 그런 짓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학교에서 배운 사역자의 정신도 그것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그는 배운 바를 저버리고 그 짓을 하였고, 선생이었던 나와 우리 교수들은 또 그렇게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비록 이렇게 극심한 방식으로 교회에 소란과 분란을 일으키고 담임 목회자와 교인들을 깊은 상처에 몰아넣는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부교역자로서 도에 지나게 언행을 하고 처신을 하여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은 심심찮게 듣곤 합니다. 어느 때는 부교역자의 잘못된 처신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담임 목회자로부터 하소연과 함께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똑바로 가르치라는 투의 항의를 받기도 합니다. 부교역자들에게 들어보면 물론 자신의 처신에 대하여 사람마다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습니다. 부교역자들은 오히려 담임 목사님이나 교회의 처사에 서운함과 야속함을 품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교회나 목사님의 목회가 자신이 좋은 목회자로 자라가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불만을 품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불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언행을 발산하게 하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담임 목사님의 목회나 교회의 현상이 신학적으로 잘못되어서 신학양심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로 자신의 처신을 정당화 하는 하소연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교역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교회에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문제를 바로 잡아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 위하여 다소의 마찰과 소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문제를 일으키는 언행과 처신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자기기만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소란을 피워서 얻을 수 있는 유익보다는 소란으로 당하는 손해가 훨씬 크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분명히 증거합니다. 부교역자는 내가 좋은 목회자로 자라가기 위한 발판을 얻기 위하여 그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가 나에게 이용 가치가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그 교회에 이용 가치가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부교역자는 그 교회를 개혁시키고 잘못된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바로 잡아주기 위하여 그 교회에 부교역자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담임 목회자와 어떤 점에 있어서는 신학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그 교회를 떠날 이유는 될 수 있지만, 담임 목회자와 맞서 그 교회를 소란케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부교역자의 일이 아닙니다. 연약한 것은 별 수 없는 일이어서 차차 강해져야 할 일이지만, 악한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연약하여 넘어지고 실수하는 것과 성품이 악하여 일을 저지르는 것은 다릅니다. 무능한 것이야 다른 도리가 없지만, 거짓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비겁하게 핑계대거나 간교하게 술수를 부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말들을 합하여 한 마디로 요약해보려니 문득 사도 바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신앙공동체 안에서 행하는 각종의 일들을 어떤 마음과 어떤 자세로 수행할 것인가를 길고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빌 2:1-4), 사도는 그 한 마디로 그 모든 것을 결론적으로 요약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2:5절). 교회 안에서 담임 목사님이나 교인들과 정말 복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 하면서 멋지게 사역을 하는 부교역자들이 부지기수인데, 몇몇 소수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21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0)| 담임목회자들께 드리는 간청_정창균 목사
편집부
3814 2013-08-27
담임목회자들께 드리는 간청 <디모데후서 4장 2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역사를 이어간다는 차원에서 부교역자들에게 설교 기회 주시기를" 나는 감사하게도 설교를 많이 할 수 있는 교회에서 부교역자 사역을 하였습니다. 전임 전도사 시절부터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예배 설교는 물론 심지어 주일 오전 설교를 거의 정기적으로 하다시피 하였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예배 사회를 보시고 전도사인 내가 설교를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전도사 때부터 그렇게 설교를 잘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한국교회를 위하여 잘 준비된 목회자 하나를 키우시겠다는 뜻을 품고 일부러 그런 기회들을 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나는 목회현장에서 감당해야 할 교회의 모든 사역들을 경험해보는 배려를 받았습니다. 그 때 그 많은 설교들을 감당하면서 나는 설교로 몸부림을 치며 한편의 설교를 완성해내고, 다시 그것을 강단에서 외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설교에 대한 열정과 확신과 담대함을 갖추어가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려운 지역에 있는 크지 않은 교회여서 경제적으로는 늘 어렵게 지내야 했지만, 내게 베풀어지는 그 배려가 주는 은혜의 풍성함에 비하면 그것은 사소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나는 그런 배려와 열정으로 어린 나를 키우신 그 분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설교학 교수가 되어 목회자들을 상대로 세미나를 할 때도 간곡하게 부탁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즉, 비록 양이 안차고 또 교인들이 불만을 토로할지라도 장차 어느 곳에선가 하나님의 교회를 책임져야 할 목회자를 키우는 책임을 감당한다는 사명감으로 부교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많이 주시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위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담임하고 있는 그 교회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갖는 매우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맡고 있는 그 교회만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책임입니다. 내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가 내가 은퇴할 때까지 건강하고 복되게 잘 자라가게 하는 것으로 담임목사의 책임이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한 하나님의 교회요,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역사가 주님 오실 때까지 잘 진행되어야 한다는 교회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일하는 부교역자들은 언젠가 어디에선가 그 교회의 역사 진행의 한 토막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란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그 때 그들에게 맡겨질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의 한 토막을 책임지고 그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준비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담임목사가 걸머지고 있는 이중적 책임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로 자기 이후의 한 시대의 교회를 책임질 사람으로 인정하고 내세우는 데는 그간 사도의 이러한 배려와 인식이 이 두 사람 사이에 작용해왔을 거란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도 목회하는 동안 부교역자들에게 가능하면 설교의 기회를 많이 주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아무래도 목사님만 못해요” 하면서 부교역자들의 설교에 불만을 토로하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설교를 잘한다는 칭찬의 말이 아니라, “당신이 설교하라”는 압력인 줄을 내가 모를 리 없었습니다. 나는 두세 번에 걸쳐 설교 시간에 교회 앞에 부탁하였습니다. “그나마 이정도 라도 되는 저의 설교를 여러분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애송이 초년병 설교자였던 나의 설교를 참고 인내하면서 들어주었던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들을 것 없는 그 시절의 나의 설교를 참고 들어준 제가 부교역자로 있었던 그 교회 교인들의 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교역자들도 내가 지내온 만큼 세월이 지난 후에는 지금의 저보다 확실히 더 나은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섬기던 교회 교인들이 저의 설교를 인내하고 들어주며 기다려주어 여러분이 그 열매를 따고 있듯이, 이제는 여러분이 우리 부교역자들의 설교를 인내하며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월이 지난 후에 어느 교회에선가 여러분이 기다려주고 들어주었던 그 열매를 다른 교회가 다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후로 우리 교인들은 마음에 흡족한 정도야 차이가 있었겠지만 그러나 누가 설교하든지 겉으로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고, 듣기 힘들어 하지도 않고, 부교역자들의 설교에 이런 저런 트집을 잡지 않고 잘 들어주곤 하였습니다. 물론 부교역자 가운데 사람이 잘못된 이들이 종종 있어서, 담임 목사와 교인들의 이런 사려 깊은 배려를 배신하고 오히려 큰 상처와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나도 서운함과 배신감에서 오는 분노를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담임 목회자들께 나의 부탁을 간곡하게 드리고 싶습니다.
21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9>| 선지자의 미친 행동
편집부
3513 2013-07-23
선지자의 미친 행동 베드로후서 2장 15-16절 < 정창균 목사,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앞뒤 가리지 않고 억지 부리며 불법의 길 가는 것은 미친 행동”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성경에서나 역사에서나 언제나 두 종류의 도전에 직면하며 나아갑니다.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도전과 교회 안으로부터 오는 도전입니다.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는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대부분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으로부터 오는 도전이었습니다. 사실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핍박을 비롯한 이런저런 위기상황들을 교회는 의외로 잘 이기며 극복해왔습니다. 치명적인 것은 교회 안으로부터 오는 위기였습니다. 교회 안으로부터 오는 치명적이며 대표적인 위기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거짓 선생 혹은 거짓 지도자들이 활개를 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두 번째 보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 문제를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운을 뗀 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으로 거짓 선생들의 행위의 본질과 그들이 처할 운명을 한 마디로 단언합니다(1절). 그리고는 교회 안의 거짓선생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을 조목조목 길고도 자세하게 나열해나갑니다. 그러다가 사도는 구약의 선지자 발람을 들고 나와서 거짓선생들은 누구와 같은가를 실물로 생생하게 설명합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내고 있을 때의 선지자입니다. 민수기는 이 한 사람의 사건을 22-24장에 걸쳐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간단한 하나의 사건을 성경이 이렇게 길게 기록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튼 발람 사건의 내용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발람에게 복채와 함께 이 후의 큰 출세를 보장하면서 한 가지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복채와 출세 보장의 댓가로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은 발락의 요구가 분명히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선지자로서 결코 해서도 안 되는 일임을 즉각적으로 분명히 알아챘으면서도 그 복채와 보장된 출세에 대한 미련에 사로잡혀서 발락의 요청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물리치지 않습니다. 얼핏 신앙적이어 보이는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우며 시간을 끌면서 그들을 붙잡아 두는 일을 반복합니다. 발람의 중심을 간파하신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하여 발람을 책망하시면서 까지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막으시고 오히려 발락왕의 요청과 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신 것이 이 사건의 요체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말씀을 한창 진행하다가 느닷없이 발람을 들고 나오는 것은 교회 안의 거짓선생들의 본질이 바로 발람과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거짓선생들과 발람을 이렇게 직접 연결시켜버립니다. “그들(거짓선생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베후 2:15-16). 선지자 발람의 행동에 대한 사도의 평가는 한 마디로 미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친 행동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지자이면서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이 이런 미친 선지자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인 이유는 이들은 다 같이 복채와 출세, 곧 불의의 삯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것을 획득하는 것을 행동과 처신의 기준으로 삼고, 앞뒤 가리지 않고 억지를 부리며 그 불법의 길을 가려간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 단정은 지난 역사의 발람을 새삼스럽게 다시 비판하려는데 있지 않고, 오늘 날 교회 안에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을 책망하고 경고하려는 데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선생이 발람처럼 하는 것은 사도의 표현대로 하면 미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발람의 이야기를 광야에서 그 사건이 있은 이래 시대를 초월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여호수아, 느헤미야, 미가, 베드로후서, 유다서,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발람 사건은 발람의 길을 가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는 암시는 분명합니다. 이 문제가 그만큼 치명적인 문제라는 의미일 것이고, 그러한 일은 시대와 상관없고 사람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누구라도 쉽게 빠져들만한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할 위험성을 경계하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의 유명 혹은 무명한 지도자들이 받는 질타도,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연합단체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쏟아지는 질타도 바로 이런 문제일 것입니다. “불의의 삯”, 복채와 출세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 망하게 할 것을 은밀히 끌어들이는 것의 무서움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나귀도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선지자처럼, 예수를 모르는 세상과 불신자도 명백히 보면서 그리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라는 이들이 보지 못하고 오히려 나귀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선지자 발람처럼 계속 그 길을 갈 것을 고집하면서 억지를 부리며 버틴다면 그것은 분명 사도의 말처럼 교회 지도자의 ”미친 행동“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의 단정처럼 교회 안의 거짓 선생이 될 것입니다. 거짓 선생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별개의 집단일 때도 있지만, 훨씬 더 흔하게는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이 어느 순간 거짓 선생으로 변절해버려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들이 두려워하며 정신을 차려야 할 이유입니다.
21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8)| 예수를 팔아먹을 사람_정창균 교수
편집부
4174 2013-06-25
예수를 팔아먹을 사람 <마태복음 26장 24-25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심히 근심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해마다 이때쯤이 되면 6월 말에 돌아가신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박윤선 목사님입니다. 물론 그 어른은 오랜 세월 동안 교파를 초월하여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의 잊을 수 없는 선생님입니다. 합신 졸업을 앞두고 불광동 수양관에서 모인 사은회 전날 밤에 하신 그 어른의 설교를 잊을 수 없습니다. 설교하시다가 발을 잘못디뎌 넘어지시면서까지 목이 터지게 외치셨던 그 설교 장면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설교의 제목이 “예수를 팔아먹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 설교는 이미 테이프로도 발행이 되고, 최근에는 설교집으로도 출간이 되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른이 주님께로 돌아가신 날이 가까워오면서 그 설교를 현장에서 들었던 저는 그 분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다시 그 설교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어른은 설교의 첫 마디를 “사람마다 예수를 팔아먹을 위험성이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를 팔아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얼마나 그 짓을 할 가능성이 많은 위험성이 많은 존재들인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으려는 의식을 가지고 근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가슴에 불이 붙도록 열렬하게 외치셨습니다. 그 분에게 있어서 예수를 팔아먹는 다는 것은 반드시 가룟 유다처럼 현금을 받고 예수님을 누구에게 넘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야심과 어떤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내어주는 것이요, 자기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팽개쳐버리는 것이 곧 예수님을 팔아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 목적은 다른 데 있고 예수는 그것을 위해서 이용만 하는 모습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외식과 정치적인 술수와 거짓과, 성경에 능통하지 않고 대충 교역을 때워나가는 것 등이 바로 예수를 팔아먹는 구체적인 행위들이었습니다. 그 분이 이제 슬하를 떠나 목회현장으로 나가는 제자들을 마지막 보는 자리에서 그렇게 단호하고 엄하게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목회현장에서 그런 일들이 왕성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특이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다시 이러한 세상은 없을 것입니다. 외식이 너무 많고 정치가 너무 많고 거짓말이 너무 많고 이 교계에서 하는 일들을 보아도 너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깊게 느껴보지 못하고, 깊이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지시를 깊이 받지도 못하여 명백히 느끼지도 못하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그저 이렇게 저렇게 해나가는 이러한 교역이 얼마나 많은 줄 몰라요. 나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안 될 줄을 믿습니다. .... 우리는 다른 것은 에누리해도 성경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에누리 못합니다. .... 말로는 주여 주여 하고, 말로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만 그 말대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성경을 얼마나 아느냐 할 때에는 이것 문제가 된다 말이예요. 성경을 모르고서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성경을 모르고서 신자가 물론 될 수 없고, 성경을 모르고서 주님의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거예요. 주님의 일을 성경을 모르고 한다면 이것은 가짜요, 이것은 도적놈이요, 이것은 그야말로 예수를 팔아먹는 사악한 일꾼인 것이 분명하지요. 그 어른은 우리가 졸업장이라는 종이 조각 하나 가지고 학교를 나가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참 원통한 일이며, 그런 사람이 바로 평생 예수를 팔아먹을 사람이라고 엄하고 단호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예수를 팔아먹을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늘 인식하고 심히 근심하는 마음의 태도가 늘 있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강하게 던지신 말씀 한 마디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어떻게 비뚤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란 말이요!” 사람마다 예수를 팔아먹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예수를 순종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 위험성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는 예수를 팔아먹는 사람들,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고, 한편으로는 처참할 정도의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팔아먹을 위험한 존재이면서도, 주님 앞에서 그 사실을 근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를 팔아먹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두려움도 없고 돌이킴도 없이 계속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생각과 죄스러움에 오늘은 박윤선 목사님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21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87)| 설교자의 책임_정창균 교수 (10)
편집부
4304 2013-05-14
설교자의 책임 <디모데후서 4장 1-2절> < 정창균 목사 ,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 확고하게 해주는 성경적 설교 회복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힘 있게 선포되면 교회는 흥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가 병들었습니다. 병든 교회는 그 사회가 암흑의 시대로 접어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지난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얻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이런 점에서 포사이드의 말처럼 기독교는 설교와 함께 흥하였거나 설교와 함께 망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어두워진 것이고, 교회가 어두워진 가장 심각한 원인은 강단에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강단의 변절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의 한 가운데 설교자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지 않거나, 말씀을 임의로 바꾸어 말하거나, 말씀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반역입니다.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요, 말씀을 기다리는 회중에 대한 반역이요, 말씀의 사역자인 자기 자신에 대한 반역입니다. 설교자의 반역이 오늘 날 강단이 죽은 가장 큰 원인이라는 사실을 우리 설교자들은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그동안의 설교들은 말씀에 집착하여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가르치기보다는 위로와 격려와 복과 성공 등 소위 부와 건강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강조도 교회의 본질에 관한 성경말씀의 가르침보다는 주로 일과 봉사 등을 강조하며 교회의 기능이나 실용성 등 교회의 기능적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에 설교는 점점 본문을 이탈한 설교로 변질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 목회현장의 큰 흐름을 거스르는 부담을 걸머지면서도 말씀에 집착하여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며 강단을 지켜준 여러 설교자들이 한 없이 고마운 것이 사실입니다. 신천지 이단의 파장이 이렇게 크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멀어져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분별을 갖추지 못한 신자가 많아진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닙니다. 이만희 자신도 신천지가 성경에 의한 참된 교회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정통교회의 이 점을 비난합니다. “요즘의 교회는 모두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천국복음을 가르쳐야 하는데도 세상 이야기나 하며 성도의 수를 불리는데 주력하고 있으니 세상 교회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이만희는 이 점을 간파하여 성경해석을 주 무기로 들고 나오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성경을 제대로 풀어준다고 속이며 교인들을 미혹합니다. 그 전략이 통하여 엉뚱하고도 황당한 해석으로 성경을 마음대로 난도질을 하고 있는데도 성경 본문을 해석한다는 명분으로 지금과 같이 큰 파괴력을 한국교회 안에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성경본문이 젖혀진 채 성공과 복과 위로와 격려와 간증, 그리고 우스운 이야기 등을 설교에서 들어오다 보니 성경을 근거로 한 심오한 가르침이라면서 다가온 이단들의 가르침을 놓고 그것이 성경적인 것인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펴놓고 하는 그 말이 과연 신자나 교회에 대하여 맞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설교하고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주는 성경적 설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20세기의 위대한 교회역사가로 알려져 있는 라토렛이 그의 대작인 “기독교 확장사”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의 장구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한 말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에 대한 증언이자 경고입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 속에 얽매이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을 희생하고 주변의 환경에 순응하였던 교회들은 결국 자신들이 그렇게 순응했던 시대와 사회, 그리고 기류가 바뀌면서 모두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다만 예수의 유일성에 대한 핵심적인 진리와 역사상 발생한 사건으로서 예수의 탄생과 생애, 가르침,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계시와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예수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의 진리만이 영속적인 삶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사도 바울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말세의 현상들을 지적한 후에(딤후 3장)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를 근거로 엄히 명한 말씀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사도의 이 엄하고 절박한 말씀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의 책임을 이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까지 모든 설교자들이 이행해야 할 영원한 책임입니다.
Selected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6)| 신앙고백_정창균 목사 (163)
편집부
5797 2013-04-02
신앙고백 열왕기상 18:21 < 정창균 목사 >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신본주의 버리고 인본주의로 살기 시작하면서 신앙고백도 멀리해”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말을 진술하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세 가지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첫째, 사실에 대한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지 그 내용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가는 관심도 없고 인식도 없으면서 이 말을 백 번하면 병이 낫는다거나, 귀신이 쫓겨 간다거나,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생각을 갖고 어떤 진술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최면이나 염불일 뿐입니다. 둘째,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럼으로써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과 나 자신과의 관계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단순한 객관적 사실 진술이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제3자적 입장에서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를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도 “나는 .....을 믿습니다”라는 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이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진술하고 고백한 내용에 대한 전적인 헌신입니다. 그 고백을 수행하기 위하여, 혹은 그 고백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나 희생도 기꺼이 지불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의 전적인 헌신이 언제나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신앙고백은 그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게 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진술(statement)만 있지, 고백(confession)이 없는 것 같다는 의견을 사석에서 피력한 외국인 교회사 학자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진술은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이라면, 고백은 자신의 삶을 건 헌신을 수반합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하다는 것은 그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신앙고백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언어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사의 사건입니다. 그 고백 때문에 모든 고통을 걸머지면서도 살아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고백 때문에 모든 영화를 내려놓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신자의 능력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참된 신앙고백을 하며, 그 고백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뵈옵게 됩니다. 그것이 신자가 이 땅에서 누릴 가장 큰 위로요,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자들이 신앙고백을 단순히 언어행위로만 여길 뿐, 그것에 신자와 교회의 삶을 걸어야 되는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기독교인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여기저기 교회 안팎에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을 강조하면 교회의 화합과 일치에 장애가 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편협 되게 하고 외곬으로 만든다고 소리칩니다. 포용력을 갖고 폭넓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다고 불평합니다. 무엇을 믿는가를 신앙의 본질로 삼지 않고,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실용성이 있는가를 중요한 관심사로 삼는 데서 온 병폐입니다.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본주의로 살기 시작하면서 초래된 참상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시작하면 결국은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오게 됩니다. 신앙고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결국 교회를 교회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신자를 신자가 아닌 사람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산으로 모아놓고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왕상 18:21).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그 고백대로 살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들의 현실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알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 되었고, 그것은 곧 아합과 이세벨을 등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를 포기하는 것을 각오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와 신자들도 갈멜산에서 주어졌던 엘리야의 도전 앞에 심각히 자신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머뭇거리지 말고 반응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현실적으로는 망하는 길처럼 보인다 해도 말입니다.
21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5)| 롯은 자폐증 환자인가?_정창균 목사 (69)
편집부
6078 2013-02-19
롯은 자폐증 환자인가? 로마서 15장 4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계시적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 간과하지 말아야” 심리학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를 하고, 교인들을 이해하여 효과 있게 다가가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 대하여 과도한 심리적 해석을 행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본문의 의미나 의도와 상관없이 해석자가 자의로 성경 말씀에 의미를 주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경의 인물들에 대하여 이러한 현상이 자주 일어나곤 합니다. 물론 성경이 제시하는 인물들에 대하여 심리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심리적 해석, 혹은 심리학적 분석이론을 해석의 틀로 삼을 경우에는 성경인물에 대한 연구가 단순히 심리분석 이론에 근거한 하나의 사례 연구에 그칠 위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시중에서 새롭고 신선한 관점이라고 호평을 받으며 한 때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팔린 “성경 인물과 심리 분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성경 인물 열아홉 사람에 대한 심리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추론과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 혹은 분석 모델을 들이대면서 자신이 성경에서 선정한 인물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롯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사람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그는 결손 가정의 성인아이라고 단정합니다. 그가 후에 소돔 사람들에게 딸들을 내놓겠다고 제안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온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이 약했음의 증거라고 해석합니다. 저자는 롯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후에 할아버지를 잃고,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일들로 엄청난 “상실감”을 경험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러므로 롯의 심리 기저에는 슬픔과 우울이 늘 깔려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저자는 롯을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미성숙한 성인아이라는 심리적 분석을 견지하는 한편,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은 후 그 충격으로 자폐증 증상을 나타낸 것으로 분석합니다. 롯은 신앙으로 출발했지만 위기 경험 후에 불신앙으로 돌아선 뒤 자손들에게도 여호와 신앙을 전수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삶을 비극적으로 끝맺은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그럼에도 하나님은 롯의 후손 중에서 모압 여인 룻을 불러내셔서 아브라함의 가계에 접붙이는 은총을 베푸셨다”는 별로 연관성 없는 한 마디를 붙이며 성경 인물 롯의 이야기를 끝내고 있습니다. “성인아이” “자폐증 환자” 그리하여 인생을 비극적으로 끝맺은 사람. 이것이 그 책의 저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롯 이야기입니다. 모세에 대한 분석도 비슷한 양상으로 펼쳐집니다. 입양아로서 생모와 양모 사이에서 겪는 심리적 갈등을 가진 아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난 데서 오는 거절감과 강물에 던져짐에서 오는 유기감에서 온 “외상 경험”을 부각시킵니다. 그러한 분석을 근거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 동족을 구원하라고 부르셨을 때도 그가 선뜻 나서지 못한 부분적인 이유는 그와 같은 옛 상처들이 채 아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이후 모세의 일생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심리학의 이론에 근거하여 분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가 모세에 대하여 내리는 결론은, “모세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은 그가 과거의 여러 아픔과 좌절과 마음의 상처들을 딛고 일어서서 위기를 극복하며 한 단계 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느닷없이 “모세가 오늘의 우리가 아는 모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하셨음을 강조하는 말들로 마지막 단락을 마무리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의도로, 그리고 무엇을 근거로 앞에서 줄기차게 견지해왔던 모세의 심리분석에서 얻은 결론적 입장과 별로 상관없는 신앙적 발언을 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갑자기 하나님을 앞세우며 내놓는 진술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지나친 심리학적 해석에 근거한 인물 분석을 절대적인 근거로 삼아 행해지는 설교는 우리가 경계하는 전형적인 모범 설교나 도덕 설교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 인물의 해석은 본문이 그 인물을 제시하는 문학적(문맥) 정황과 신학적 의도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인물 혹은 사건들은 단순히 인간의 심리적 활동의 결과로써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진행에 있어서 계시적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마무리하려 하면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는 말씀은 성경을 아무 때나 필요에 따라 써먹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말씀을 하면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진행과 완성을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살 아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그리스도를 그 실례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이 등장인물 개개인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리적 갈등을 파헤치는 일이나, 오늘 날의 신자 개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리적 긴장과 갈등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데 집중할 경우, 그것은 필연적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침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점점 사라지고 심리학이 목회자의 강단과 교인들의 일상을 지배하게 됩니다. “말씀의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 모든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시급한 과제입니다.
21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4)| 찌르는 사람과 함께 있어주는 사람_정창균 목사 (9)
편집부
3654 2013-01-22
찌르는 사람과 함께 있어주는 사람 - 로마서 16장 1-16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찔러대는 교인들이 목회자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는 유익도 있어” 돌아가신 제 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우리 8남매에게 자주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목회에 거침이 되지 말아라. 목회에 거침이 되는 일에 가담하지를 말아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것도 자주 들어야 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게 되자 저의 자녀들에게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라며 어려서부터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목회를 해보니 교인들이 목회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지내는가라는 점에서 볼 때 그 양상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목회자와 대척점에 서서 주로 반대하고 트집 잡으며 목회자를 찌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목회자를 옹호하며 함께 있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에게는 이 둘 모두 유익을 줍니다. 교인들 모두가 목회자와 함께 있어주는 사람들이어서 언제나 편들어주고 찬성해주고 떠받들어주면 목회가 순탄하고 효율적이고 또 교회 분위기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만 지속된다면 목회자도 죄 된 본성을 가진 인간이어서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는 교인들을 대하는 언사가 달라지고, 처신이 방자해지곤 합니다.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여 망할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목회자가 하는 사역들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반대하고 또 목회자를 찔러대는 교인들이 있어서 목회자로 하여금 아파하게 하고, 더 기도하게 하고, 매사에 더 신중하게 하고, 그리하여 도리 없이 겸손하게 합니다. 찔러대는 사람들은 그렇게 목회자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교인 모두가 목회자와 대척점에 서고 목회자를 찔러대는 사람이 되면 목회자도 연약한 질그릇처럼 약한 존재여서 깨어져 무너져 내리고, 결국 목회 자체를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때 함께 있어주는 교인들이 있어서 버티며 힘을 얻고 지탱하면서 여전히 목회의 길을 갈 수 있게 됩니다. 함께 있어주는 이들은 그렇게 유익을 줍니다. 결국 목회자에게는 찌르는 교인이나, 편들어주는 교인이 다 유익하고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장로인 제 아버지는 평생 교인으로 살아가야 할 당신의 자식들에게 찔러서 유익을 주는 역할을 하지 말고, 함께 서있어 줌으로 유익을 주는 교인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나도 내 자식들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곰곰 생각해보면 사실 매우 위험한 요소를 그 안에 담고 있기도 합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맹종해야 된다는 잘못된 신앙체질을 분별해내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정당한 판단과 신앙양심을 갖고 반대하는 이들을 목회자를 찌르고 반대하는 부정적인 체질의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전자나 후자나 결국 교회와 신자와 목회자 전부를 망칠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로서는 찔러서 유익을 준 교인들보다는, 함께 있어줌으로 유익을 준 교인들이 더 애틋한 마음으로 기억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찔러서 유익을 준 사람들이 “나만이라도 목회자를 반대하고 가시가 되어드려서 모두가 찬성함으로 목사님이 잘 못될 위험을 막고 목사님에게 유익을 드리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목회자와 그가 하는 일이 맘에 들지 않거나 감정적으로 싫어서 반대하고 찌르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서신들 첫머리에서 자주자주 어떤 사람들을 떠올리며 기도와 축복과 감사의 제목으로 드러내어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 모두가 그의 사역에 함께 있어줌으로 유익을 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장에서 사도 바울은 스무 명도 훨씬 더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회사역에 함께 서 있어주는 사람들이었는지를 회상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이 사람들에게 문안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며 거대한 책 로마서를 마무리합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슴에 새겨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셈입니다. 인생의 연륜이 길어지고, 목회사역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이런 사람들이 가슴에 남아있는 목회자라면 아무리 힘든 길을 지내왔어도 목회자로 평생을 사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겼던 영적인 지도자에게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감사의 제목이 되는 교인이라면 그것은 놀랍고 감동적인 복일 것입니다. 훈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겨지는 잊을 수 없는 교인들이 있는 목회자로, 그리고 목회자의 가슴에 감사와 축복의 제목이 되어 가슴에 새겨지는 교인으로 우리가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함께 교회를 세워가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일 것입니다.
21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3)| 도덕성 회복인가, 신앙 회복인가_정창균 목사 (348)
편집부
8401 2012-12-26
도덕성 회복인가, 신앙 회복인가 출애굽기 1장 15-21절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한국교회는 도덕성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없어서 문제” 한국사회 안에는 이미 반기독교운동을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펼치는 그룹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 밖의 시민단체들이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소리를 높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확산되고 있는 조직적이고 과격한 반기독교적인 운동들이 한국기독교를 비난하면서 내세우는 문제점은 대부분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비난의 요지는 교회는 신앙단체이기 때문에 일반 세상의 단체들보다 훨씬 더 높고 고상한 도덕수준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닙니다. 불신세상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윤리적, 도덕적 수준에도 못 미치는 집단이라는 것이 교회에 대한 그들의 불만이고 분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한국 기독교인들이 불신 사회에 대하여 보여준 윤리적 실패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신자가 아닌 것처럼 살고, 상당수의 교회들이 교회가 아닌 것처럼 처신을 해온 것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러한 참담한 현상이 계속되면서 교회를 염려하는 의식 있는 지도자들과 단체들이 한국교회의 도덕성 회복을 위하여 다양한 방식의 운동을 펼치고 있기도 합니다. 교회재정의 투명한 운영, 목회세습반대운동, 구제활동의 확대, 사회복지를 위한 적극적 참여, 교회운영의 민주적 방식도입 등등 다양한 운동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들은 모두 한국기독교가 도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을 만큼 회복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성을 갖추고 사회적 효용성을 충족시키는 특정의 행동양식들을 실천하는 것에 궁극적인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신앙단체인 교회에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도덕수준이 높은 단체나 혹은 사회구호단체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날의 교회가 도덕적으로 이렇게 비난을 받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그것은 그동안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잘못된 것의 결과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자답게 살지 않고, 교회답게 행동하지 않아서 벌어진 현상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면 반드시 도덕성이 뛰어나게 되고, 구제활동이 활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덕성이 뛰어나고 구제활동이 활발하게 되면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질과 외형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외형이 아니라, 그 외형을 만들어내는 본질을 회복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1장의 산파들의 이야기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자들에게서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즉시 죽이라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15-16절). 그러나 그들은 태어나는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산파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왕명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이 휴머니스트들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었습니다(17절, 21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의 집을 번성케 하셨습니다(20절, 21절). 본문이 일관되게 우리가 주목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답게 사느라고 왕명을 어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남자아이들을 죽이지 않았고, 그들의 그러한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에게 남자 아이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도덕성이나 인간존중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신앙의 문제였다고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말려들지 않은 것도 그의 높은 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신앙의 발로에서 온 결과라는 것이 창세기 39장의 선언입니다(9절). 외형이 같으면 본질도 언제나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도덕성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신앙대로 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이 잘못되니 그 결과로 도덕성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전개해야 할 가장 시급한 운동은 신앙 회복 운동입니다. 도덕성 회복에 궁극적 목적을 두면 교회는 마침내 수준 높은 도덕단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구호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으면 교회는 자기희생적인 복지단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엇보다 신앙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본질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 생활의 회복은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자기희생적 나눔이라는 결과를 수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 별 것 아니라는 주장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회 복지와 구제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자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그것을 회복하는 운동에 주력하자는 제안입니다. 한국교회에 시급한 것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정립하고, 신앙인은 어떤 경우에도 신앙대로 사는 것을 회복하는 운동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21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2)| 힘들고 지친 이 땅의 목회자들에게_정창균 목사 (125)
편집부
5880 2012-11-27
힘들고 지친 이 땅의 목회자들에게 열왕기상 19장 3-21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담임목사라 불리며 목회현장에서 상당한 세월을 보내고, 지금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십 수년째 소위 선생으로 살다보니 험악한 사역 현장에서 안간힘을 쓰느라 힘들고 지친 이 땅의 목회자들이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떠오르곤 합니다. 뭔가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다가 문득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서 좌절과 허탈에 빠져 죽음을 생각하다 쓰러져 잠들어 있는 엘리야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지친 이 땅의 목회자들과 이 사람 엘리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엘리야는 특이한 시대 상황 가운데 특이한 방식으로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보냄을 받은 현장은 왕권에 의하여 이방신 숭배가 압도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왕과 아들 왕이 왕권을 세습하며 이스라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악을 행하는 시대였습니다. 왕실도, 백성도, 시대의 흐름도, 모두가 생존의 위협이 되는 상황으로 그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영웅적으로 그의 사역을 수행해 내었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합왕과 이세벨을 정면으로 대항하였습니다. 한 번의 기도로 비가 오지 않게도 하고 오게도 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는 불을 내리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는 손바닥만 한 구름 조각을 보면서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영웅적으로 사역을 수행해낸 바로 다음 순간 지금까지 자기의 보람이고 영광이고 가치이고 존재의미였던 사역지도, 동역자도, 백성도 모두 던져버리고 혼자서 광야로 도피하여 허탈에 빠져 나무 아래서 죽음을 생각하다 쓰러져 잠들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도 포기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이 선지자를 계속 위험하고 힘든 사역지로 보내시기만 하시던 하나님이 이제 자신의 천사를 절망에 빠진 이 고독한 선지자에게 보내십니다. 아니, 하나님 자신이 이 선지자를 찾아오시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쳐서 쓰러져 잠들어 있는 선지자를 위하여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준비하시고 선지자를 어루만지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일어나서 먹으라”(5절). 어떤 음성과 어떤 어투로 이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을까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광야의 지친 고독한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대면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친 선지자는 그것을 먹고 다시 쓰러져 잠들고, 하나님은 똑같은 동작, 똑같은 말로 이 선지자 곁에 다시 찾아오십니다(6-7절).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이 선지자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이미 배어나오고 있습니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여호와는 이 사람을 여전히 가게 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고독한 선지자를 찾아와 시작하시는 고독한 대면을 통하여 확인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 엘리야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이 사람에게 확인시키시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동행하고 있다!” 엘리야가 나무 아래 주저앉아서 털어놓은 불신앙에 찬 불평어린 말들에 대하여는 한 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4절).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절).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 찬 불평이 아니라, 인생이 너무 힘든 종의 신음소리인 줄을 하나님은 아셨음일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엘리야는 고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힘들어서 이제 그만하고 싶고 그만 살고 싶을 만큼 깊은 침체와 좌절에 빠졌을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힘들고 지쳐 절망 속에 나자빠져 있는 자신의 종에게 이 사실을 확인시키고 싶으셨습니다. 이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엘리야에게 “네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15절)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역사진행의 중요한 몫을 다시 맡기십니다(15-16절). 그리고 엘리야가 회리바람과 함께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함께 할 제자요 후계자인 엘리사를 붙여주십니다(19-21절). 험악한 사역 현장에서 지치고 쓰러진 이 땅의 힘든 목회자들에게 엘리야가 해주고 싶은 말이 이것일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효과도 없고 쓸모도 없는 사역자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위로하고 싶고, 맡기고 싶은 일이 여전히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209 no image |김학문의 묵상칼럼 <1>| “헌 신” (352)
편집부
11677 2012-11-13
“헌 신” < 김학문 목사, 고양제일교회 > “‘헌신’이라는 말을 할 때는 당연히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죽어져야” 교회에서 자주 쓰는 말 중 하나가 ‘헌신’이다. 그런데 자주 사용하다보니 그 참뜻을 모르고 막연하게 알고 쓰는 듯하다. 흔히 ‘헌신예배’라고 하면서 단지 예배 순서를 주관하고는 헌신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교회나 선교에 있어서 물질을 내어놓고는 교회를 위해 혹은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사전에서 말하는 헌신에 대한 정의는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이다. 단지 마음을 기울이고 애를 쓰는 정신적 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바치되,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성경은 더 정확하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제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인 소나 양을 죽여 각을 뜨며 내장을 전부 쏟아 내버리고 불에 태우곤 했다. 그래야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다. 신약에서는 헌신이라는 용어가 직접 쓰이지는 않았지만,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해서 그 의미를 예배, 즉 구약 제사와 관련해서 이해하도록 한다. 그 전형은 사도 바울에게서 엿볼 수 있다.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고 했던 사도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고 했다. ‘전제’라는 말은 ‘스펜도’(σπενδω)라는 말로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인데, 구약의 제물과 같이 온전히 주님께 바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빌 3:17)고 하면서 헌신은 진정 자기 목숨을 복음을 위해 다 내어놓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헌신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 말을 쓰는 것으로나 마음을 기울이고 물질적인 것을 내놓는 정도의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자기 자신을 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헌신이라는 말을 할 때는 당연히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죽어져야 한다. 그러나 헌신한다고 실제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는 죽지도 않으면서 죽어야 한다고, 또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헌신 예배’ 혹은 ‘헌신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교회는 헌신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고 추상적인 이해로 쓰고 있다. 물론 헌신한다고 우리는 구약의 제물처럼 실제로 죽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이다(롬 3:25). 히브리서 10:10-14에서는 이것을 보다 분명히 제시한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으므로 제사장이 매일 서서 섬겨야하는 것처럼 하실 필요가 없다고 한다. 앉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온전히 다 받으셨다는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날까지 성도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에 제사를 반복하실 필요가 없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헌신은 필요치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으셨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을 연단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 이심을,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함이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는 사람 편에서 준비한 제물 이삭은 거부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숫양을 번제로 받으셨다(창 22:1-14).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오래전 모세에게 계시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행 3:22-23).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4-38). 한마디로 헌신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교회에서 헌신을 말할 때, 물질을 내놓은 정도나 시간을 드리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한 성도의 헌신은 자기 자신을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복하여 사는 것이다. 말씀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순종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보여야 할 헌신이다(요 15:7-10). 요즘같이 교계가 혼탁한 시대가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열정에, 교회의 본질보다는 성장에 쉽게 눈이 어두워지고 있다. 교권 쟁탈전으로 치달아가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롱과 멸시에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온전한 헌신이다. 그와 같은 헌신의 참된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0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1)| 떠올리기만 해도 가르침이 되는 선생님_정창균 목사 (5)
편집부
3757 2012-10-30
떠올리기만 해도 가르침이 되는 선생님 빌립보서 3:18-19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책임 통감하며 바른 목회자 되기를 각오하며 살아야” 곁에 손잡고 함께 있지 않아도, 눈앞에 얼굴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그 어른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르침이 되는 선생님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입니다. 그 선생님 생각이 나면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자기성찰이 되고,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지 하고 격려가 되는 어른을 우리가 사는 동안 다만 한 두 분이라도 마음에 품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은 이 땅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지금도 그러한 선생님으로 남아있습니다. 특별히 그가 말년의 7-8년 동안 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합동신학대학원과 합신교단의 사람들에게는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야말로 그러한 스승입니다. 그는 허허 벌판에서 첫 발을 내딛으며 그 역사를 시작한 합신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리고 합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정신으로, 어디를 향하여, 그리고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가를 제시해준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가게 하는 버팀목이기도 하였습니다. 정암 박윤선을 제외하고 합신의 정신과 역사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정암은 합신의 형성에 절대적인 역할과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정암은 이미 30여년전에 한국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러한 모든 문제를 야기시키는 주범이 바로 목회자들이라는 진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른 목회자가 나타나는 것이 부패한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모든 것을 걸고 합신과 합신 교단을 통하여 이루고자 한 것은 바른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이야말로 정암 박윤선이 그렇게 죽기 살기로 외쳐대었던 그 가르침과 삶이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여전히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합신이 시작한지 32년이 되는 날이 다가오면서 어느 때보다 더 그 어른이 그리워지는 것은 이 현실 때문인지 모릅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향하여 교회 안팎에서 퍼부어지는 막말 욕설과 지독한 모욕은 한국교회의 현실이 얼마나 참담한가를 절감하게 합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성장의 침체도 아니고, 격변하는 문화의 도전도 아닙니다. 신자가 신자답지 않고, 교회가 교회답지 않음에 대한 교회 안팎으로부터 쏟아지는 공격과 비난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러한 비난과 모욕에 대하여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그러한 비난과 공격이 억울한 누명과 근거 없는 모함이 아니라, 면목이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현실이 한국교회의 진정한 위기인 것입니다. 이 사회의 일부에서는 교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 공격과 비난의 한 가운데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은 사실은 목회자들을 향한 비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에는 목회자가 가장 심각한 골칫덩어리이고, 교회가 신앙생활의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교회 때문에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이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목회자 때문에 교인들이 떼 지어 다른 교회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신앙생활을 그만두어버리는 교인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더 심해져서 이제는 아예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작금의 영향력 넘치는 소위 한국교회 지도자라는 일꾼의 목회자들의 행태는 이 사회를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고 자기 잇속만 있고, 회개는 없고 자기 고집만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목회자들과 교회를 막말로 욕하고, 교인들은 그들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봅니다. 목회자들이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의 주범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최우선 순위를 두고 사는 사람들, 하늘이 아니라 땅에 마음을 붙들어 매고 사는 사람들, 사실은 수치스러운 것을 오히려 영광스러워 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는 단순히 도덕과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문제가 됩니다. 정암 박윤선이 그렇게 죽기내기로 이루어내고자 하였던 바른 목회자가 되는 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에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누구누구를 비난하고, 나는 아니라고 항변할 필요 없이 우리 모두가 책임을 통감하며 바른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혹독한 시절을 각오하고 살아야 될 때입니다. 그것이 32년 전 합신을 시작하신 그 선생님의 가르침입니다.
20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0)| 아직 남겨놓으신 기회_정창균 목사 (6)
편집부
3680 2012-09-18
아직 남겨놓으신 기회 요나서 1:1-3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제대로 해보겠다는 결단에서 나오는 실천 있어야” 구약의 요나서를 대하면 첫 장면부터 매우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죄악의 도시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든 것이 아주 확고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모호함도 없고, 애매함도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라는 도시를 목적지로 정하고 길을 떠납니다. 다시스는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에 있었고, 거리도 니느웨까지의 거리보다 두 배만큼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갔다는 이 사실이 충격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낯익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나서의 첫 장면이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은 그 인물이 요나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요나는 불신자도 아니고, 초신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하나님을 불순종해도 선지자는 목숨을 내놓고라도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요, 또 기대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는 그렇게 확실한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가버리는 사람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장면 이후에 요나서에서 펼쳐지는 모든 장면이 은연중에 강조하는 것은 선지자 요나 외에는 모두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다의 바람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큰 폭풍을 일으킵니다. 도망가는 배위에서 벌어진 범인색출을 위한 제비뽑기에서도 제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요나에게 뽑힙니다. 바다 속의 큰 물고기도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리하여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지점에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떨어지는 요나를 삼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육지에 토해놓으라 하니 그대로 합니다. 불신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도 굵은 베 옷을 입고 순종합니다. 박 넝쿨도 순종하고, 박 넝쿨을 갉아먹은 벌레도 순종합니다.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요나서에 등장하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오직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만 불순종합니다. 그는 불순종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는 하나님께 분노하며 따지고 항의합니다. 요나는 이방인 선원들에게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고 질책을 당합니다. 요나가 그렇게 어이없는 행동을 하고, 오히려 화를 내고 분노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독한 자기중심성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판단은 언제나 맞는 것이고, 자기의 주장대로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자기 자신에의 몰입입니다. 한국교회에는 목회자가 가장 심각한 골칫덩어리이고, 교회가 신앙생활의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서의 첫 장면을 능가하고도 남는 충격이기도 합니다. 물론 상당부분은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퍼뜨리는 악의에 찬 공격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과 조롱이 절대로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우기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현실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배 위에서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를 비난하던 이방 선원들처럼 이 사회가 목회자들과 교회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충격적이게도, 어쩌면 우리는 현대판 요나들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교회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한 교회가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교회로 옮겨갔는데, 이제는 아예 교회에 발길을 끊고 신앙생활 자체를 중단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가 복음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한, 설교자가 복음을 말해도 그것은 반복음적인 것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았지만 책임을 져야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향하여 안팎에서 퍼부어지는 막말 욕설과 지독한 모욕은 우리 모두에게 특단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마당에 정작 필요한 것은 회개의 심한 통곡과 혀를 깨물면서라도 제대로 해보겠다는 결단에서 나오는 실천입니다. 강단에서 말 몇 마디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누구누구를 비난하며 핏대를 올려 의분을 토한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고, 내가 바로 그 범인이라는 자책으로 굵은 베옷을 입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책임을 통감하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안하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해야 되는 일은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 앞에서, 그리고 막말로 욕하며 비난하는 세상 앞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걸고 새로운 실천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에게 남겨놓으신 기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는 이 땅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그리고 이 사회에 우리는 그렇게 새롭게 등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에게 펼쳐놓으신 소망입니다.
20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9)| “네 아비에게 물으라!”_정창균 교수 (222)
편집부
12039 2012-08-07
“네 아비에게 물으라!” 신명기 32:7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한국 기독교는 다시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로 돌아가야” 초기 한국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외국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먼저 번역되고 보급되었다는 점입니다. 개신교 선교사가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84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성경 번역은 그 이전에 만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후에 일본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1882년에 누가복음, 1883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이 인쇄되었습니다. 1887년에는 신약 전체를 번역하여 3천부를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스 번역본”(Ross Version)입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누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5년 초에 미국성서공회에서 천부의 번역판을 인쇄하였습니다.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참여한 한국인 번역자들은 그 이후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을 국내에 들여와 열성적으로 보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가 1896-1940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성경은 총 2,062만여 권으로 매년 458,255권이 반포된 셈이며, 미국성서공회(ABS) 한국지부가 1901-1919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것은 총 266만권으로 매년 140,455권을 반포한 셈입니다. 한국의 성경 반포사업이 그렇게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데는 권서인들의 활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그것을 보급하고, 그 내용을 전하기 위하여 전적인 희생을 감수하였습니다. 1940년까지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의 성경보급의 약 85%가 권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1913-1918년의 미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성경보급의 약 98%를 권서인들이 감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 번역과 보급을 통하여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들은 처음부터 자기의 언어로 직접 성경 말씀을 접할 수 있었으며, 성경을 가지고 전도하며, 교육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한국교회 역사의 첫 순간부터 매우 중요하고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국기독교가 성경 중심의 성격을 가진 기독교로 정착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목도한 선교사들은 한국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Bible Lover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부르곤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마자 곧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이후의 한국교회가 그렇게 지독한 핍박 가운데서도 그렇게 힘찬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성경중심의 그 체질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고 싶은 열심이 국문공부 운동을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싶은 열정이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성경공부운동을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평양의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교인들은 압록강 변에서 300리 길을 걸어서 왔고, 전라도의 목포, 무안 지방에서 걸어오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자매는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 300마일을 걸어왔고, 다른 이들은 거기에다 아이들까지 업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손때 묻고 닳아빠진 성경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조목조목 밝혀주신 이만열 교수님의 지난 학기 강의안을 읽으며 저는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세계가 주목하고 부러워하는 한국 교회의 주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은 교회 초기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성경 중심의 교회로 세워졌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오랜 옛적의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설교는 무엇보다도 본문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설교의 본질에 입각하여 한국교회 설교 현실을 살펴볼 때 근래의 한국교회 설교가 보여주고 있는 압도적인 경향은 설교의 성경말씀 이탈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성경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급기야는 성경을 설교의 기본 텍스트로 삼지 않은 설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예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 성경을 잘못 사용하기도 하고, 성경을 남용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행사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고 교회 안팎으로부터 능멸에 가까운 심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까지 이르게 된 것도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강단에서 성경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제대로 된 설교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지내온 데서 온 묵은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는 “성경기독교”가 아니라, “성경을 덮어버린 기독교”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그 능력과 그 위대함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무엇이 일어났었는가를 역사에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기독교는 선교사들이 그렇게 불러주었던 대로 다시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로 돌아가야 합니다.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며 간곡하게 권면하던 모세의 마지막 설교 말미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20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8)| 죽을 운명에서도 살아남는 자_정창균 목사 (5)
편집부
3926 2012-07-10
죽을 운명에서도 살아남는 자 열왕기하 1:1-17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회개할 기회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범죄” 아하시야는 아합 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2년 밖에 왕 위에 있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했던 아버지 아합만큼 악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악행의 본질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자신이 당한 문제의 답을 하나님 밖에서 찾으려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직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무릅쓰고 이방신 바알세붑에게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제쳐버린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는 계속해서 주어지는 회개의 기회를 끝까지 거부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거듭된 경고에도, 하나님이 거듭 주시는 경고성 재앙에도 그는 자기의 고집을 굽히지 않습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주시는 경고가 듣기 싫어 그를 제거해버리려고 보낸 50명도 더되는 군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타 엘리야 앞에서 몰살을 당했을 때, 사실 아하시야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하여 군대를 다시 보내며 같은 일을 세 번씩 반복합니다. 오히려 엘리야 체포령을 받고 세 번째 보내진 오십부장은 왕의 명령을 던져버리고 엘리야 앞에 납작 엎드려 간청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몰살당할 운명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아하시야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납작 엎드려 간청하여 살아남을 기회를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끝까지 거부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진술은 이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상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했다는 오므리 왕과 그 아버지의 기록을 깨고 역사상 가장 악했다는 그의 아들 아합, 그리고 아합만큼 악했다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으로 이어지는 삼대에 걸친 이스라엘 왕가의 비참한 몰락이었습니다.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는 것은 어쩌면 천만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죽을 운명에서도 살아남는 자가 있는가 하면, 살아남을 기회에서도 죽음의 길을 가버리는 자가 있습니다. “회개”가 그 비밀입니다. 작금의 소위 한국교회 지도자라는 일군의 목회자들의 행태는 아하시야를 자꾸만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없고 자기 잇속만 있고, 회개는 없고 자기 고집만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목회자들과 교회를 막말로 욕하고, 교인들은 그들을 부끄러워합니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런저런 비리들과, 비리가 발각되어 강단에서 쫓겨나면서도 십수억의 위로금 흥정이 오가고,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수십억의 은퇴금을 요구하며 흥정이 오간다는 등의 소문들은 손가락 열 개도 채울 수 없는 몇몇 사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사실 이 나라의 14만 목회자와 5만여 교회들 가운데 다수는 사치나 호화는커녕 국가가 정한 노동자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활비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수년 전 통계에 의하면, 300명 이상 모이는 교회는 이 나라 전체 교회의 5% 미만입니다. 이 나라에는 정직하고 진실하게 말씀을 설교하며 주님께 부르심 받은 대로 목회에 인생을 바치다가, 때가 되면 그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려는 마음으로 세상 욕심 버리고 한 길을 가는 목회자들이 절대다수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목사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매도당하며 교회 안팎으로부터 쏟아지는 욕설과 모욕을 당해내야 하는 현실이 서운하고 억울합니다. “교회의 존재가 복음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한, 설교자가 복음을 말해도 그것은 반복음적인 것이 된다“는 현실을 경험하며 수많은 착한 목회자들이 이런 저런 서러움과 아픔을 안고 외롭게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복음에 어긋나게 살고 있다는 것이 공격자들이 자신 있게 쏘아대는 화살인데, 우리는 그것을 되받아쳐낼 방패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동안 저지른 이런저런 비리와 물의 때문에 해체 대상으로 지목받으며 안팎에서 온갖 지탄을 받고 있는 모 교회연합단체가 이번에 구국의 일념으로 6.25 행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하여 실추된 기독교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겠다는 야심찬 발상을 내세우며 일을 벌이고 나선 것은 전혀 신앙적이 아닙니다. 지금은 이념의 옷을 입고 권력과 결탁할 때가 아니라,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라도 이 나라와 교회가 사는 길은 주류세력이 되고 싶은 야망을 버리고 기꺼이 변두리 그룹이 되고,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털어버리고 바르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고생을 걸머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에 앞장 서야 할 가장 큰 책임은 이 나라에서 소위 “교회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 모든 목회자와 신자들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회개만이 우리가 “죽을 운명에서도 살아남는 자”가 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입니다.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그리해야 합니다.
20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7)| 건달이 되지 말고, 목회자가 되십시오!_정창균 목사 (19)
편집부
4255 2012-05-14
건달이 되지 말고, 목회자가 되십시오! 고린도전서 4:1-5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목회자의 길은 번영의 양지와 병립할 수 없어” 황우석 박사는 한때 온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영웅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6-7년 전, 황우석 박사가 어떻게 온 나라를 요동치게 만들고 참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몰락을 했었는지는 이 나라 국민 모두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수년이 흐른 얼마 전 한 기자가 그를 만나서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중에 몇 대목은 제게도 두려운 경고의 큰 함성처럼 들리며 한동안 제 가슴속에서 계속 메아리쳤습니다. 그가 그 치욕적인 값을 치르고 깨달았다는 그 사실은 바로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라는 생각 때문에 그의 말들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 돌이켜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과학자는 결코 양지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게 (과학자의) 숙명이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 양지란 뭐죠? “사회적 명예, 안락함, (한마디로)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거죠. 그것은 과학자의 길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아무 생각이 없었죠. 천지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둥둥 떠다녔던 겁니다. 철이 없었던 거죠... (당시) 나는 … 건달이나 다름 없었어요. 과학자가 아니었어요.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나오는 순간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 실험실 밖 세상은 좋던가요? “터널(실험실) 안에 있을 때는 춥고 어둡고 배고팠어요. 그런데 그게 진정한 행복이란 걸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찾았습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 달콤한 햇빛 근처에는 안 갑니다. 데어요. 화상을 입습니다. 따뜻한 곳에는 항상 불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1도 화상이냐, 저처럼 3도 중화상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지….” “당시 나는 건달이나 다름없었어요. 과학자가 아니었어요”라는 황우석 박사의 말은 지금도 저에게는 이렇게 바뀌어 되뇌어집니다. “나는 건달이나 다름없었어요. 목회자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이것은 이 시대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이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과 기도의 고독한 터널 안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며 그 결과를 들고 강단을 마주하고 있는 교인들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터널의 현장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길에서 벗어나고, 건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터널 안에 있을 때는 춥고 어둡고 배고팠어요. 그런데 그게 진정한 행복이란 걸 몰랐어요.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 달콤한 햇빛 근처에는 안 갑니다!” 수년 동안의 치욕과 몰락의 구렁텅이를 허우적거리며 이제야 깨달았다는 이 과학자의 교훈이 단순히 그 사람 개인이나, 과학자의 분야에만 해당되는 남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 목회자들도 본질이 같은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너지를 너무 밖에 많이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목회자의 길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느라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너무 허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디, 건달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황 박사의 말대로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찾아, 그 터널 속으로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목회자의 참 행복이 있습니다. 목회자 한 사람은 단순히 사람 하나가 아닙니다. 교회 하나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이 지경으로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별로 할 말이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책임은 교인들보다는 훨씬 더 우리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양지를 찾아서 터널을 떠나는 우리 목회자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권력의 주변을 서성거리지도 말고, 부와 번영의 양지를 넘보지도 말고, 주님께서 부르시고, 이 사회와 우리의 교인들이 기대하는 터널 안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과 정직과 진실과 공의와 고독의 터널 안에 있어야 합니다. 황 박사의 말처럼, 춥고 어둡고 배고파도 그 터널 안에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고 우리의 가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0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76)| 성경 문맹의 시대_정창균 교수 (137)
편집부
7329 2012-03-20
성경 문맹의 시대 아모스 8:11-13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성경 본문 말하는 설교를 듣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 역사적으로 신도들의 성경 문맹 현상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중세시대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사제들만 성경을 소유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법이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설교는 신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가와 상관없이 반드시 라틴어로만 행해져야 했습니다. 라틴어를 읽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사제들도 라틴어로만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신도들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가 해주는 말씀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성경말씀이라고 믿어야 했습니다. 교회만 성경을 가질 수 있고, 교회가 하는 설교는 성경말씀이라고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시대의 신도들은 실제로 성경에 대하여는 문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이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성경을 신도들에게 돌려주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성경에 눈이 뜨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은 누구나 자기의 언어로 된 성경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말로 행해지는 설교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성경 말씀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성경에 대하여 문맹이 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중세교회는 성경말씀을 갖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신도들을 성경문맹으로 만들었다면, 오늘 날은 설교자들이 성경말씀을 말해주지 않아서 교인들이 성경문맹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에 대하여 문맹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요즘 교인들에게는 성경책 자체가 낯설게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인이 몇 사람만 모이는 개척교회도 화면에 설교 본문과 설교 중 인용하는 모든 성경구절을 띄워주는 것이 보편화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는 유익도 있습니다. 성경을 찾느라 설교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일 없이 속도감도 있고, 다이나믹한 흐름도 끊어지 않고 성경을 인용하며 설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설교 시간과 예배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 구절을 화면에 띄워주는 친절함과 편의를 제공하는 과잉친절의 결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점점 성경책이 낯설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띄워주는 글자만 따라 읽으면 되다보니, 신앙생활을 오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상식을 갖추게 된 경우나, 혹은 교회에서 설교와 별도로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 그룹 혹은 성경읽기 그룹에 속하여 훈련을 받는 교인 외에는 성경 어느 책이 어디에 나오는지 순서도 모르고, 앞뒤의 문맥을 알아갈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더우기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신자가 곧 바로 교회의 성경공부 그룹에 참여하여 성경을 전체적으로 배우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회심하고 처음 교회출석을 한 이후 오랜 세월을 성경책을 한번 찾아볼 기회도 없고 앞뒤를 살펴볼 기회도 없이 그렇게 교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성경이 낯선 책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성경에는 문맹이라고 할 만큼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일상의 삶과 교회 안의 생활에서 신앙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니 매사를 신앙적인 원리와 분별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처신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개인의 삶을 위해서는 물론, 목회자의 목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교회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분열이 일어날 때 교인들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처신하지 않고,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처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단의 유혹이나 공격에 대하여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대비하지 못하고 쉽게 유혹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실례로 근래에 한국교계를 극심하게 어지럽히고 있는 신천지 이단은 성경으로 말한다는 미명 아래 터무니없는 황당한 성경해석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오히려 그것을 심오한 말씀이라며 쉽게 휘말리고 있습니다. 신앙적이고 성경적인 분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성경적인 분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성경 본문을 말하는 설교를 듣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그렇게 처절하게 지적했던 말씀의 기갈 현상은 바로 오늘 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대를 두고 한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책은 어디에나 나뒹굴고 있는데 정작 그 책 안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수 없는 시대를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걸머져야 할런지도 모릅니다. 강단에서의 말씀의 회복과 말씀의 부흥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급선무입니다.
20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5)| 눈물을 흘리며 권하는 말_정창균 목사 (13)
편집부
4480 2012-02-22
눈물을 흘리며 권하는 말 디모데후서 4:1-2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하나님 말씀 내려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무 것도 없어” 주일 저녁예배를 없애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예배가 자꾸 없어지니 당연히 설교할 기회가 없어져갑니다. 수요 예배를 다른 목회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는 교회도 늘어갑니다. 그래서 설교할 기회가 자꾸 없어져 갑니다. 그런가하면 교회 자체가 자꾸 없어지고 있습니다. 두어 달 전에도, 이제 교회의 문을 닫는다는 제자 목사의 글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큰 기대와 각오를 갖고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간 고생만 하다가 이제 한계에 이르러서 도리 없이 교회의 문을 닫는다는 후배 목사의 말을 엊그제도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설교할 곳이 자꾸 없어져 갑니다. 설교할 기회가 없어지고, 설교할 곳이 자꾸 없어져 가니, 설교는 점점 쓸모 없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한다고 신학생과 목회자들 앞에서 아우성치고, 설교를 잘해야 한다며 고뇌하는 우리의 몸부림이 마치 허공을 향해 헛발질을 하는 것처럼 허망해 보입니다. 그래서 깊은 시름과 회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설교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 설교는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별 효과가 없는 무용지물인 것인가? 번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설교할 기회가 줄어들고 설교할 교회가 없어져 가니 설교가 쓸모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설교가 난무 하니 결국 설교할 곳이 없어지는 결과가 온 것입니다. 설교가 예배의 성패를 좌우하고, 설교가 목회자의 모든 사역을 좌우합니다.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니 교인이 모이지 않고 오히려 떠나갑니다. 설교에 은혜가 없으니 교인들이 세상일에 사로잡혀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것이 시대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다보니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가 세워가는 교회에도 사람들이 무작정 오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흐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할 곳이 점점 없어져 가는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설교의 부흥입니다. 교회의 부흥이란 사실은 말씀의 부흥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부흥을 이루는 근본적인 주체는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문을 닫는 시대라고 하여, 설교가 점점 무력해지는 현실이라 하여 설교에 대하여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설교를 무엇으로 대체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오히려 설교의 부흥을 위하여 더욱 몸부림쳐야 합니다. 장소가 어디가 되든지, 규모가 얼마가 되든지, 내가 서는 강단에서는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는 설교자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단으로 설교에 진력해야 합니다. 지지난 주일 오후였습니다. 신앙생활을 막 시작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교회를 찾고 있는 사람과 그가 좋은 교회를 찾도록 도와주려고 함께 동행하며 이 교회 저 교회 주일 예배를 찾아다니던 한 친구가 강남의 유명한 초대형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제게 전화를 걸어서 심한 말로 그 교회 설교자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불만으로는 모자라는 듯 씩씩 거리며 분노를 쏟아내었습니다. 제가 한 설교도 아니고, 제가 가르친 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설교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죄로 그 친구의 좌절에 찬 분노를 제가 다 떠맡아야 했습니다. “성경이나 차근차근 말하지, 종교연설도 아니고 정치 연설도 아니고, 뭐 그런 설교가 있어요? 그런 것이 무슨 설교냐고요! 차라리 내가 해버리고 싶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을 점점 더 크게 반역하고, 교회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몰아넣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유언처럼 제자 디모데에게 말씀할 때 사도 바울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어느 때보다 실감이 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 편지에서 반복적으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을 했었나 봅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복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모든 설교자들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설교에 진력하며 흔들림 없이 설교자의 길을 가기를 눈물을 흘리며 권합니다. 또 다시 많은 제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으로 나아갑니다. 교회가 문을 닫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는 현장으로 그들을 내보냅니다. 안쓰러운 마음, 미안한 마음,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권해봅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그리고 기대를 가져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들로 이 시대에 우뚝 서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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