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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자들을 향한 경고

| 신명기 8:11-20 |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목회자의 영웅적인 모습 앞세울 때 멸망당할까 조심해야”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납하실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교
만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자
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교만입니다.



우상숭배와 교만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아



우상숭배와 교만은 다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더 이상 하나님
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전에는 우상숭배나 교만을 결코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
다.
어떤 경우에도, 또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이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와 교만을 그토록 단호하게 처리하시는 연유입니다.

성경은 이 둘을 가리켜 부패하고 패역한 것으로 단정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패망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는 유혹에 직면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찾아 가는 우상숭
배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싶은 유혹에 직면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제치고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교만에 빠지
곤 합니다.

불신자야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
고 교만하게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 백성인 신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따라갈 수도 없고, 자신이 한
없이 높아져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는 신자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서조차 마치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하나
님 같은 대접을 누리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의 행태에서는 하나님은 볼 수 없고 인위적으로 부
각되는 카리스
마 넘치는 영웅적인 목회자의 모습만 부각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
니다. 교만의 극치를 보는 듯하기도 합니다. 그의 말은 무엇이나 옳고, 모
든 사람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에게 모든 권위와 옮음이 있고...
아마도, 목회자일수록 그리고 이 시대의 대형교회 목회자일수록 자신이 하나
님처럼 높아지고 있지 않은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같은 대접을 받
으며 군림하고 있지 않은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오래 전 친구인 목사님 한분을 우연히 만나서 한 이야기를 들었
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는 그 분 조카의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항공료와 경비를 부담하며 미국에 사는
젊은이들을 초청하여 그 교회에서 행하는 3일 동안의 수련회에 참석할 기회
를 주었는데 그 조카도 초청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 낮에 갑자기 그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삼촌 저 좀
여기서 데려가줄 수 있으세요?” 거기 더 이상 못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웬일인가 하여 가서 만났습니다. 그 조카는 자초지종 사연을 털어놓았습니
다. 공
항에 내리니 세 사람이 영접을 나왔는데, 차타고 오는 내내 그 교회
담임목사님 칭송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집회가 있기 전에 귀에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이 경호를 하며 리무진 한 대
가 도착하기에 아주 높은 관료가 방문하는가 했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내리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목사가 그런 모습으로 교회에 오는 것을
평생 본 적이 없는 그 청년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 날도 둘째 날도 몇분의 목사님이 나와서 세미나를 인도하는데 내내 그 교
회 담임목사님의 훌륭함과 목회 성공 사례와 그 목사님의 업적만을 늘어놓
고 성경을 말하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둘째 날을 지내면서 같은 방에 배치되었던 세 사람의 친구들은 담임목사 한
사람만 이렇게 집중적으로 높이는 것을 보고, 이 교회는 틀림없이 이단인 것
같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못왔다는 생각과 함께, 이
제라도 항공권을 돌려주고 여기서 떠나자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삼촌 목사님께 마치 구호요청 전화를 하듯이 연락을 한 것
이었습니다. 그 조카는 그렇게 둘째 날 삼촌 목사님 집으로 와서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다가 한국교회에 큰 상처만 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
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꿈과 소원이 성취되어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을 놓
고 그들이 성공적으로 가나안 입성을 이룬 이후에 대하여 염려하셨습니다.
소위 꿈을 이루어 성공하고, 그 성공이 일상적인 삶의 현장이 되었을 때 이
백성이 어떻게 멸망의 길로 빠져들 수 있는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14
절).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17절).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한 후에,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하나님을 제
치고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하고 하나님 대접을 받는 교만을 염려하신 것입
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염려가 아니라, 그러면 반드시 멸망하고 만다
는 경고였습니다(19절).



성공이 일상적인
삶의 현장일 때가 문제



오늘 날 우리, 특히 목회자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경고도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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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74)| 입을 다물고 눈과 귀를 열어야 할 때_정창균 목사 (18)
편집부
4006 2012-02-06
입을 다물고 눈과 귀를 열어야 할 때 하박국 2장 1-4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파숫군처럼 숨을 죽이고 긴장하여 잠잠히 기다려야 할 때 있어"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있는데,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역사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증거를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세력을 움켜쥐고 마치 역사는 자기들의 손에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온갖 악을 행하며 큰소리치고 있는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계시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약한 자가 당하고 악한 자가 잘 풀리는 역사 현장에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여겨질 만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해지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그러시는 하나님이 서운해지고, 그 서운함이 깊어져서 하나님께 대한 분노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로 가장 격렬하게 하나님께 따져 물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선지자 하바국일 것입니다(1장). 그는 불의와 부정과 간악과 패역과 겁탈과 강포가 판을 치는 현실 가운데서 살고 있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서 하나님의 법은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리고, 공의는 오히려 왜곡을 당하는 것이 그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한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현상을 종식시키고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소리쳐 하나님께 이러한 현장을 고발하고, 이렇게 악한 역사 현장에 개입하셔서 조처를 취하시기를 상당기간 동안 부르짖고 외쳤으나 여전히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실 뿐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야말로 역사 현실에 대하여 무관심하시며,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무응답하시는 분이라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과 부르짖는 기도에 대한 무응답, 그것이 하박국이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선지자는 대단히 화가 나서 불만에 찬 항의를 쏟아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이어지는 선지자의 두 번째 항변은 더 격렬하고 더 직설적이어서 마치 하나님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대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선지자는 갑자기 그의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2:1). 봇물 터진 듯 말을 쏟아내던 입을 다물고, 마치 초소에서 보초를 서는 파숫군처럼 긴장하여 눈을 열고 귀를 열어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듣고,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를 보는 일에 집중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입을 다물고, 대신 하나님을 향한 눈과 귀를 여는 '기다림'을 택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선지자의 마지막 결과는,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지고 내 삶의 현실이 어떻게 곤두박질을 칠지라도 나는 여전히 즐거워할 이유가 있고, 나는 여전히 기뻐할 근거가 있다고 승리에 찬 노래를 불러대는 대변화였습니다(합 3:16-19). 그리고 이러한 대 변화의 원동력은 역사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그의 영광이 충만히 드러나는 곳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으며(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는 말로 요약되는 역사관과 그러므로 의인은 세상과 현실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여전히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입을 다물고, 귀를 열고 눈을 열어 기다려서 받은 응답이 그것이었습니다. 봇물터진 듯 나의 말을 쏟아내던 입을 다물고, 이제는 귀를 열어 내 하나님이 내게 뭐라 말씀하실른지 기다리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처한 현장만 바라보느라 하나님에 대하여 감았던 눈을 열어서 내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보여주실른지 마치 성루에 올라 보초를 서는 파숫군처럼 숨을 죽이고 긴장하여 잠잠히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나라의 정치 현실이 이러하고, 교계의 흐름이 이러한데 하나님은 뭐하시는 것이냐고 하박국처럼 따져 물으며 항의하고 싶은 것이 많은 지금이 바로 그 때인지도 모릅니다.
20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3)| 회개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심판_정창균 교수 (3)
편집부
4641 2011-11-15
회개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심판 이사야 6:9-12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 두 부류가 있을 뿐” 하나님이 행하시는 가장 무서운 심판은 회개할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심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그 심판 선언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이 둔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한 가지였습니다. “내가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선지자가 두려움에 차서 물었습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망해버릴 때까지”였습니다. 못된 짓을 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한 짓을 계속하고 있는데도 아무 일이 없이 여전히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은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잘 풀리고 있다고 좋아하면서 간증을 할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착각하고 오히려 사람 앞에서 더 교만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더 방자해지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오히려 잘 풀리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큰 거침이 되고, 하나님께 항변이 되는 사람들이 성경에도 종종 있었습니다. 시편 73편의 기자가 그러했고, 하박국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일관된 대답은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시며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다시 가죽 채찍을 휘두르시고 강단을 뒤 엎으시며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분노할 만한 교회로 만들어 놓고도, 교회가 크게 부흥한다고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돈 거래를 하면서 교회연합기관의 단체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회개의 몸짓은 하지 않고 버티고 서서 온갖 비난과 욕설을 감당해내는 것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그런 일이 드러나면 즉각 그 자리를 떠나고 형식적으로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이 세상이 지켜온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교계의 지도자라면서 일 없다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은 일반 신자나 교회들에도 전혀 고와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뻔뻔하고 가증한 모습으로 비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교회가 도덕적으로 세상만도 못하다는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정상적인 교단들이 모두 이단이라고 판정지은 교파와 합하여 한통속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도 이를 지적하는 여러 비판에도 옴짝 않고 버티는 것은 관용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거룩한 모습하고는 턱없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실패하거나 실수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모두가 넘어지기도 하고, 미혹을 못 이겨내고 범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본성이 부정한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범한 잘못과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일에는 실패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연약함의 영역을 넘어, 악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것에 대하여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며 돌이키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범죄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범행을 인정하지도 않고 그래서 회개도 하지 않는 사람은 미워합니다. 사울이 그러다가 망했고, 가룟 유다가 그렇게 망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도 범하지 않는 중죄를 범한 다윗은 죽지도 않았고,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과 죄를 짓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과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사울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있고, 다윗처럼 납작 엎드려 고백하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아합이나 그의 아들 아하시야, 그리고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있고, 베드로처럼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고 돌이키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것은 죄라고 하는데 본인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여전히 심각하게 회개하지 않고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은 그가 지금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법으로 일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서 모두가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하고 두려워하는데, 본인만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주신 증거라고 간증거리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그가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는 증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19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2)| 선언적 개혁주의자와 실천적 개혁주의자_정창균 목사 (15)
편집부
4832 2011-09-20
선언적 개혁주의자와 실천적 개혁주의자 디모데전서 4:7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자기를 뜯어고치려는 몸부림 상실될 때 신학도 무너져” 제가 유학중일 때 아버지와 같은 저의 지도 교수께서 저를 앉혀놓고 수시로 하셨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것은 반드시 두 가지 방면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곧, 우리는 어떤 신학전통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가로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곧, 현재의 삶이 우리는 개혁주의자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가 물려받은 신학의 내용과 지금 살고 있는 삶이라는 두 날개로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꼭꼭 새겨두곤 하였습니다. 제가 그 어른의 이 가르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떠올리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만 내세워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우리의 모습을 너무 자주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혁주의는 주로 우리가 얼마나 성경적이고, 깊이 있고, 수준 높은 신학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부각시키는 자화자찬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니면 칼끝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비판하고 그러다가 조롱하며 비난하는 데로 나아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입을 열거나, 글을 쓰거나 첫 마디를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하는 몇몇의 사람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과 글의 핵심은 언제나 한국교회가 얼마나 반개혁주의적인가를 지적하고 개탄하는 것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감동하고 열광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는 개혁주의를 그들의 일상의 삶속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혁주의를 외치는 선언만 있지 실천이 없는 개혁주의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을 향한 매서운 비판과 매정한 정죄만 있지, 자기를 후려치는 자기 성찰이 없고, 자기를 뜯어고치려는 아픈 몸부림은 없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교회가 나타나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정통신학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정통신학으로는 안 된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각광을 받으며 등장한 소위 이머징 교회의 핵심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의 말처럼 정통개혁신학이 새로운 시대에는 적용력이 없어서 일어난 문제가 아닙니다. 개혁주의의 실패나 한계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의 실패와 한계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핵심에는 개혁주의자들이 개혁주의를 실천하지 않은 것이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신학의 내용에는 감동하지만, 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는 돌아서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전통의 내용이 무엇이고, 가치가 무엇이며, 그 요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보존하고 전수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러한 신학전통에 서 있음을 확고하게 주장하고 선언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저는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켜 나름대로 선언적 개혁주의자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반쪽짜리 개혁주의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개인의 일상의 삶이든지, 목회자의 목회 방식이든지, 노회든지, 총회든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떤 사고 방식과 원리로 일들을 처리하고 진행하는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일관되게 살아가는가, 무엇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고 일들을 결정하는가를 보고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개혁주의자와 개혁주의 해설자는 엄밀히 구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혁주의 해설자가 아닙니다. 개혁주의 실천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나름대로 실천적 개혁주의자라고 부르곤 합니다. 선언적 개혁주의자에서 실천적 개혁주의자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개혁주의를 말하는 사람과 개혁주의를 행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두 방면으로 입증되는 진정한 개혁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19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1)|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_정창균 목사 (21)
편집부
4292 2011-08-02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사도행전 4장 18-21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현실적인 실용성 앞세울 때 믿음의 본질도 상실하게 돼” 현대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든다면 그것은 신앙고백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말을 진술하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세 가지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첫째, 고백에는 사실에 대한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지 그 내용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가는 관심도 없고 인식도 없으면서 이 말을 백 번하면 병이 낫는다거나, 귀신이 쫓겨간다거나,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생각을 갖고 어떤 진술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최면이나 염불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둘째,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단순한 객관적 사실 진술이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과 나 자신과의 관계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제3자적 입장에서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를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셋째, 신앙고백이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진술하고 고백한 내용에 대한 전적인 헌신입니다. 그 고백을 수행하기 위하여, 혹은 그 고백을 보존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나 희생도 기꺼이 지불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순교의 길을 가는 헌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온전한 신앙고백에는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의 전적인 헌신이 언제나 수반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선언(statement)만 있지, 고백(confession)이 없는 것 같다는 의견을 사석에서 피력한 외국인 교회사 학자가 있었습니다. 선언은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이라면, 고백은 자신의 삶을 건 헌신입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하다는 것은 그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백은 단순히 진술(statement)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에게 신앙고백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그 말과 나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언어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사의 사건입니다. 그 고백 때문에 어떤 고통을 걸머지면서라도 살아남을 수도 있고, 반대로 그 고백 때문에 모든 부귀와 영화를 내려놓고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백은 신자의 능력이고 교회의 능력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 바로 이 고백으로부터 나옵니다. 참된 신앙 고백을 하며, 그 고백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뵈옵게 됩니다. 그것이 신자가 이 땅에서 누릴 가장 큰 위로요,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고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기독교인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여기 저기 교회 안팎에 널려있습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을 자꾸 강조하면 교회의 화합과 일치에 장애가 된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편협 되게 하고 외곬으로 만든다고 소리칩니다. 포용력을 갖고 폭넓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다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를 신앙의 본질로 삼지 않고,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실용성이 있는가를 중요한 관심사로 삼는 데서 온 병폐입니다.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본주의로 살기 시작하면서 초래된 참상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시작하면 결국은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올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고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결국 교회를 교회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신자를 신자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구주이심과 그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은 후 다시는 예수를 증거하지 말라는 위협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그 때 사도 베드로의 반응은 매우 단호하였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모르겠느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느냐? 우리는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사도들은 신앙고백 한 마디를 바꾸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고백한대로 살기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기개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사도들에게 나타난 즉각적인 변화였습니다.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이 고난을 당하고 죽기도 하는 것은 그들의 연약함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었습니다. 신앙고백을 팽개치고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명분을 내세우며 이런저런 전략이나 잔재주를 근거 삼아 신앙생활을 하고 또 교회를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반신앙적인 범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19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0)| 구원받은 사람의 아우성_정창균 목사 (17)
편집부
4191 2011-07-06
구원받은 사람의 아우성 - 로마서 8:35-39 -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구원보다 더 큰 것 없는데 또 다른 것 찾느라 세월 낭비하고 있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 엄청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기도 하고,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가장 확실한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가만히 살펴보면 때로는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흥분거리도 아니고, 더 이상 용기와 담력을 불러일으키는 근거이지도 않아 보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은 열일곱 살 청년 때 김용안 목사님이라는 분을 만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평생 그 분을 못잊어 하셨습니다. 저희 형제들이 어릴 때부터 자주자주 아버님께 들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들은 평생 김용안 목사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가를 신앙생활을 할수록 분명하게 깨달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을 예수 믿게 해주신 분이 바로 김용안 목사님이라는 생각 때문에 평생을 그 목사님을 마음에 품고 감사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평생 그 목사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은혜란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길로 인도해준 그 은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지 60여 년이 흐른 어느 해 설날 아침 온 집안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린 뒤 아버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장 복을 많이 받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를 물었더니 다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의 팔남매 자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들어온 사위나 며느리나 손자 손녀들, 그리고 내 동생들의 집안, 심지어 조카들까지 우리 집안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 그것이 당신이 가장 큰 복을 받았다고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해하는 이유였습니다.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높은 지위에 오른 적도 없고, 자식 가운데 무슨 장관이나 고급 관료가 나온 것도 아니지만 그분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면 그것이 가장 큰 복이고,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2개월 후 그분은 79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너무나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행복과 자랑과 용기를 모두 잃어버리고 다른 곳에만 한눈을 팔면서 불만에 찬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로마서 8장 35절부터 바울이 쏟아내는 흥분과 담력과 자신감에 찬 외침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에게 무엇을 보장하는 것인가를 매우 흥분한 어조로 그리고 결의에 찬 모습으로 외쳐댑니다. 그의 아우성은 그 내용이 너무나 분명하여 굳이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이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얻은 구원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어떤 험악한 일이라도 피하지 않고 당해내겠다는 결단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자신이 보장받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자의 확신에 찬 승리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얻은 구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흥분하게 하고, 삶에 자신감이 넘치게 하고, 승리의 아우성이 터져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귀한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며 뭔가 화끈한 다른 것을 두리번거리느라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19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69)| 복고열풍_정창균 목사 (21)
편집부
4173 2011-06-08
복 고 열 풍 -신명기 32:7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문화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야” 요즈음 가요계에는 7080 가요에 대한 복고열풍이 불고 있다 합니다. 70-8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들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흐름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7080 가요 콘서트가 곳곳에서 열리고, CD 매출이 급격히 올라가고, 악기점에서는 그 시대 음악의 상징이기도 한 기타를 찾는 손님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합니다. 7080 가요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 젊은 청년으로 그 노래와 그 문화에 흠뻑 젖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지금의 40-50대 층입니다. 이들은 그동안 정신 없이 사느라 잊고 지내왔던 30-40년 전 그 시대의 음악과 그 문화들에 다시 열광하고 있습니다. 젊은 한 때 자기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열광하며 불렀던 그 노래들과 그 분위기들에 문득 다시 눈이 띄고 가슴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 단절되었던 과거에 대한 회귀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과 훈훈한 추억, 그리고 그 노래들을 통하여 아직도 우리 세대가 있음을 확인함에서 오는 가슴 뭉클한 감동과 대견스러운 자기 확인을 그들은 그렇게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고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또 다른 주체는 10대 청소년들과 20대 청년들입니다. 이들이 7080 가요들에 대한 복고열풍을 일으키는 주역이라는 사실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즐기는 음악은 그야말로 신세대, 신세계의 것이어서 7080 음악과는 전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는데, 어떻게 이들이 7080 포크송에 그렇게 열광하며 복고열풍의 주역이 되고 있는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청소년과 청년들이 7080 가요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조사해보니 의의로 간단하였습니다. ‘아직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에서 느끼는 신선함’에 매료되어서라는 것입니다. 30-40년 전에 이 나라 젊은이들의 정서와 문화를 사로잡았던 음악들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신선함을 주는 아직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은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전통과의 단절과 전통과의 연결이라는 문제를 곰곰 생각해 보게 합니다. 아무튼 지금 이 나라의 중년층과 청년층에서는 7080 가요들에 대한 복고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교회현장에서도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현장에서 불고 있는 열풍은 복고열풍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시대 교회 한쪽에서 몰아치고 있는 열풍은 전통을 끊어내는 열풍입니다. 전통과의 단절이 앞으로 교회가 살아남을 길이라는 주장을 이곳저곳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새로움’에 대한 열풍입니다. 예배갱신 운동의 핵심도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배척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신세대의 문화와 의식과 기호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의 예배를 만들어내는데 열광합니다. ‘예배기획전문가’라는 이상한 전문직업도 그렇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이머징 교회 운동도 전통적인 교회에 대한 부정과 배격으로부터 교회론을 시작합니다. 신설교학 운동도 전통적인 설교론에 대한 배척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들 모두 전통적인 것으로는 미래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열풍의 실질적인 내용은 결국 문화운동으로 귀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시대의 교회가 교회이기 위하여 시급한 일은 ‘문화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전통은 끊어내고, 벗어나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야 되는 것이고 잇대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신학적인 전통일 때는 더욱 그리합니다. 전통을 내치는 운동은 언제나 “내용 곧 진리는 바뀔 수 없지만, 그릇은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웁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그릇만 바꾸고 있는가, 그들이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예배’, ‘새로운 교회’, ‘새로운 설교’가 과연 내용은 변함이 없고 그릇만 바꾸는 일에 머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곰곰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다음 세대 언젠가는 우리의 전통이 그들에게는 ‘신선함을 주는 처음으로 보는 새로운 것’이어서 복고열풍을 일으키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세가 자기는 들어 갈 수 없는 땅을 강 건너로 넘어다보며 그곳으로 들어갈 백성들의 앞날을 우려하여 행한 긴긴 설교의 마지막 즈음에 간곡하게 부탁했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19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68)| 선 생_정창균 목사 (1)
편집부
3955 2011-05-11
선 생 히브리서 13장 17절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선생과 학생의 충족 조건 각자 자기에게 따져보아야” 나는 졸업한 제자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선생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더 정겹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만 해도 학교를 졸업한 후에 불러보는 ‘선생님’이라는 말은 깊은 감회와 정감이 서린 특별한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생이라는 말에 대한 어감이 많이 달라져서 요즘 학생들에게는 자기를 가르쳤던 분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회상하는 것이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학교 선생님이나 입시학원 선생님이나 다를 바가 없고, 내가 돈 내고 나 배울 것 배우고 끝나면 되는 거래 관계처럼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그러나 곁에 손잡고 함께 있지 않아도, 눈앞에 얼굴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그 어른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르침이 되는 선생님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입니다. 그 선생님 생각이 나면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자기성찰이 되고,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지 하고 격려가 되는 어른을 우리가 사는 동안 다만 한 두 분이라도 마음에 품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한쪽에서는 요즘 세상에는 존경할만한 스승이 없다고 탄식을 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요즘 세상에는 스승을 존경하는 학생이 없어서 선생하기가 팍팍하고 힘들다고 불평을 합니다. 아마 양쪽 모두의 탓일 것입니다. 스승의 날이 되면, 한쪽에서는 선생들이 또 촌지를 받지나 않는가 의심의 눈초리를 치켜뜹니다. 그 비난과 모욕이 싫어 선생들은 아예 학교 문을 닫아버립니다. 혹시 방학중이라 하여도 스승이 날이 되면 모두 학교에 모여 그 날을 함께 보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학기 중인데도 그날이 되면 선생과 학생이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학교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를 쉬는 학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정상은 아닙니다. 아니 비극입니다. 첫 아이를 낳아놓고 우리 부부가 약속했던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절대로 아이들 앞에서 학교이건 교회이건 아이들의 선생님을 흉보거나 욕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아이들 셋이 다 클 때까지 지켰습니다. 부모가 그렇게 욕하고 무시하고 비난하는 선생님을 아이가 존경하거나 신뢰할 리가 만무하고, 그것은 결국 아이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어느 때는 내가 보아도 정말 선생님답지 않아서 화가 나는 그런 선생님들도 있었습니다. 입 밖에 터져나오려는 선생님에 대한 비난과 증오심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은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나의 아이를 생각해서, 혹시 나의 아이가 나 때문에 선생님을 무시하고 함부로 여기게 될까봐 꾹꾹 참곤 하였습니다. 나의 인격을 위해서도 아니고, 선생님을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나의 아이를 위해서였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나,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교회뿐 아니라, 교회 밖의 학교에서도 선생과 제자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분명한 것은 선생은 선생의 도리를, 학생은 학생의 도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들은 학생들이 순종하고 복종하는가, 즐거움으로 그들을 인도하도록 하는가를 판단해보고 그들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는 선생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동시에 학생들은 선생들이 학생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고 자기들이 학생들의 영혼을 위하여 대신 청산해야 된다는 심정으로 가르치는지 살펴보아서 그렇게 하면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고 또 그들이 즐거움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도록 학생의 도리를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학생은 선생이 선생다운지 따져보고, 선생은 학생이 학생다운지 따져본 다음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때 선생으로서 혹은 학생으로서 할 도리를 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선생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가는 선생이 자기에게 따져봐야 되는 것이고, 학생의 조건을 다하고 있는가는 학생이 자기에게 따져봐야 되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할 바를 제쳐두고 서로 상대방에게 제대로 하라고 따지고 요구하느라 정신을 쏟다가 끝내는 비난과 싸움으로 등을 지고 마는 경우가 많은 것은 커다란 비극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선생과 제자로 한 평생 인연을 맺고 애틋한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19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67)| 신앙의 전수가 단절된 시대_정창균 목사 (106)
편집부
6152 2011-03-23
신앙의 전수가 단절된 시대 [열왕기상 22:51-53]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하나님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3년쯤 전이었습니다. 평소에 존경하며 따르는 선배 목사님께서 혼자말로 중얼거리듯이 제게 말씀 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주제로 다음 세대와 대화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예요.” 신앙의 세대간 전수가 단절되고 있음을 염려하는 신음소리로 들렸습니다. 사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이 전수되는 것은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로 요약된 언약관계의 핵심의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출애굽 이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백성의 아버지들에게 일관되게 하신 말씀의 핵심은 “너희 자손에게, 자손의 자손에게” 여호와 신앙을 전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강가에서 모세가 품었던 가장 큰 염려도 그들이 여호와 신앙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그 백성과 함께 살던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품었던 가장 큰 근심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모세와 여호수아의 염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삿 2:10)라는 말로 이름 붙여진 여호와 신앙이 전수되지 않은 세대가 350년 이상 엮어 가는 역사가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여호와 신앙이 전수되지 않으면 그냥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불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배역이 전수됩니다. 불신앙이 전수된 세대가 이끌어가는 역사가 얼마나 참혹한가는 사사기를 보면 금방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여호와 신앙이 전수되지 않고 불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배역이 전수될 때 얼마나 비참한 상황이 초래되고 마는가를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도, 성경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선지자 엘리야가 한창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왕 노릇을 시작하여 아버지를 거쳐 3대째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오므리 왕이고 그의 아버지는 아합 왕입니다. 오므리는 그동안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다는 판결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합은 아버지의 기록을 깨고 다시 그동안의 모든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서 가장 악한 왕이라는 신기록을 수립한 사람입니다(왕상 16장). 그의 아들 아하시야는 단 2년 통치하고도 그의 아버지만큼 악한 왕이라는 판정을 받으며 가장 악한 왕 공동기록보유자가 되었습니다(왕상 22장). 이스라엘 왕실의 가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여호와 신앙에 대한 반역이 3대에 걸쳐 전수된 것입니다. 사실 오므리와 아합은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면서 나라를 융성하게 하는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 업적을 위하여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자들이라고 판정을 받을 만큼 철저하게 불신앙적이고, 반신앙적이었습니다. 아하시야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이방신을 의지하여 해결하려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세 번 씩이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불신앙과 배역으로 고집을 꺽지 않고 자기 길을 가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삼대에 이어지는 이 왕들은 영적으로는 가장 처참한 시대를 만든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어서 망정이니 그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아마도 4대째 불신앙이 전수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소위 교회 지도자라고 여기며 이런 저런 일들에 나서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지도자들은 다음 세대의 교회지도자들에게 무엇을 전수하고 있는지 두려움으로 자신의 처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교회연합단체장 선거에 동원되었다는 금권타락선거니, 교회단체의 지도자들이 권력기관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펼친다는 이런 저런 부정한 로비 활동이니, 이런 저런 모양의 야합이니 하는 소문은 다음 세대에 전수되어서는 안 되는 일들입니다. 신앙인의 가정에서 아버지들은 그리고 어머니들은 지금 자녀들에게 무엇을 전수하고 있는지 두려움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이 전수되지 않으면 반드시 불신앙이 전수되고 만다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 시대 신앙인들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호와 신앙의 세대간 전수가 단절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여호와 신앙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수할 것인가에 우리의 고민과 기도와 희생과 투자 등 모든 것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에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전수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19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66)| 고독한 몰입_정창균 목사
편집부
4996 2011-02-23
고독한 몰입 신명기 4:5-6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교회 지도자들에겐 영웅적 거동, 대중의 인기 필요 없어” 근래에 이런 저런 사고를 치며 교회 안팎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두고 비판과 조롱의 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 언론기관에서는 대형교회들이 보여주는 작금의 사태들은 80년대 중반부터 고속 성장을 경험한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겪는 ‘성장통’이라는 기사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성장통도 아니고 권력투쟁도 아닙니다. 교회의 세속화가 몰고 온 참상일 뿐입니다. 목회와 목회자의 세속화가 몰고 온 필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세속화의 가장 큰 축은 자기 중심과 실용성입니다. 온갖 비리와 독재와 반인권적인 일을 하면서라도 일단은 잘살아보는 것을 지상목표로 밀고 나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던 정치현실에서 한 수 배워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 도입하여 개교회주의와 성장제일주의 목회로 큰 재미를 보다가 이제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는 셈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수준과 도덕수준이 교회 안팎으로부터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상황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사자를 보내신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를 고민하다가 문득 엘리야가 떠올랐습니다. 엘리야는 특이한 시대 상황 가운데서 특이한 방식으로 등장하여 사역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가 등장하는 시기의 역사적 배경을 폭로하는 열왕기상 16장은 이스라엘 왕들의 죄목을 고발합니다. 그들의 죄목은 언제나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저들이 범죄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저들이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범죄케 하였다는 이 지적은 참으로 무서운 고발입니다. 지도자의 위험과 무서움이 이것입니다. 그 시대는 아버지 왕과 아들 왕이 대를 이어 신기록을 갱신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없는 그런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경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 “여호와의 사자” “언약의 사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우리 앞에 세우고 있습니다(말 3:1; 4:5-6). 참으로 제대로 된 지도자 한 사람이 중요한 시대에 엘리야는 그렇게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며 살아야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왕권에 정면으로 저항해야 되는 위험을 수반하였고 그 시대, 그 사회를 압도하고 있는 거대한 삶의 흐름을 거역해야 되는 무모함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왕권에 정면 도전하는 반체제 인사요, 온 나라에 비가 오지 않기를 구하고 그 저주를 쏟아내는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인 반동이요, 그 나라의 주류 종파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독선적 배타적 종교 운동으로 종교간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반사회적 인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시대의 주류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고 배격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사는 이유는 그것이 그 시대에 여호와의 사자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혼자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영웅적 거동도, 대중의 인기도 그에게는 없습니다. 아니 그가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권력으로부터도, 종교지도자들로부터도, 여론으로부터도, 심지어 같은 편이 될 것이라 기대함직한 백성으로부터도 그는 배척당하고 소외당하며 길을 가야합니다. 그는 스스로도 마치 세상에 자기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는 고독한 길을 가도록 보내진 사람입니다. 그는 단 한 가지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라고 한 곳으로 가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고 삽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에 몰입할 뿐입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그에게 많은 모험과 위험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현실적 고통을 짐지게 합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에게만 몰입합니다. 하나님을 사용하여 자기의 어떤 일을 성취하려는 데 몰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그는 멋진 후계자가 자기를 잇는 것을 목격하며 산채로 하늘 하나님께로 올리워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자기의 사자를 보내신다면, 그는 아마도 엘리야와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최고경영자의 안목에서 나오는 성공을 위한 방편이 됨직한 온갖 것에 대한 현란한 관심으로 분주한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이러한 고독한 몰입일 것입니다. 교인들은 소위 영적인 지도자들에게서 그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자기도 범죄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도 범죄케 하여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는 지도자로 한 시대를 사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이제라도 목회자가 목회자답고 신자가 신자다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가 교회 다와 지는 일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이 사회가 지금과는 달리 교회를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길만 집착하며 가는 ‘고독한 몰입’이 모든 해결의 열쇠입니다.
19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65)|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부모들에게_정창균 목사
편집부
5235 2010-12-08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부모들에게 신명기 6:4-9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신앙 희생하고 얻는 것, 결국 인생에는 유익 없어” 제가 목회할 때 알고 지내던 의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목이 자주 아프다보니 그 병원에 가끔 가곤 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 원장 선생님은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원장님은 자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는 진료비를 받지 않고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언제나 환자가 밀리는 병원이라 지쳐서 짜증이 나는지 제 앞의 환자에게는 짜증을 내다가도 제 차례가 되면 싹싹하게 대해주면서 여하튼 저에게는 잘해주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유 제가 목사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목사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건물 안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담배를 피우다가도 제가 보이면 얼른 감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의사 선생님이 자기 아버지를 두고 마치 남의 말을 하듯, “우리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예요!” 하고 한 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다소 황당하여 어색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는 저에게 그 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제가 고3이 되었을 때는 대학교를 잘 들어가야 하니까, 일 년 동안은 교회에 나가지 말고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후에는 고3이 된 다른 아이들에게 고3 수험생이니까 더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 의사 선생님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로 집안의 불신자 아들이 되었습니다. 저절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리게 될 만큼 어려운 고3 시절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책상 앞에만 앉아서 지낸 사람이, 이제는 무엇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대학시절에 교회를 찾을 리가 만무하지요. 그의 아버지인 장로님은 아들이 공부를 최우선으로 삼게 한 댓가로 서울대학교 출신 의사 아들을 얻었지만, 아들이 신앙을 희생하게 한 댓가로 불신자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둔 것입니다. 신앙을 팔아 서울대학교 입학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서울대학교 입학을 팔아 신앙을 사게 한 것이 아들이 평생 살아갈 인생을 위해서는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을 그분은 알아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다니며 그 아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지만, 정작 불신자 아들은 돌아다니며 장로 아버지를 가리켜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웃고 있는 줄을 알기나 하는지... 신명기 6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자녀 교육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자녀 교육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지침입니다. 그 내용은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라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마치 이 일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처럼 못을 박듯이 부모들에게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녀들에게 그 말씀을 그렇게 가르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모인 너의 손목에, 미간에, 문설주에, 바깥문에... 하고 이어지는 말씀의 핵심도 결국은 자녀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모의 모범을 보이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이 강조하고자 하는 자녀의 신앙교육의 요체는 이렇게 요약될 것입니다. “부모들이 먼저 신앙인의 삶을 살고,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서 부모처럼 살게 하라!” 부모가 먼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신앙교육은 잔소리 교육이 아니고, 시범 교육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를 잘못 키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결국 수지맞는 자녀교육인지 계산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희생하면서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결국 자녀들의 인생에 유익이 없습니다. 결국 헛 것입니다.
19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64)| 나그네의 자존심_정창균 목사
편집부
5721 2010-09-15
나그네 자존심 베드로전서 1장 1-6절 < 정창균 목사, 합신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우리는 갈 곳이 너무 분명하고 가는 곳도 확실해” 50대 이상 된 사람이면 한번쯤 들어보거나 혹은 불러보았을 한 때 유명했던 흘러간 노래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그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인생은 나그네라고 말하는 노래입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 가면서도 가는 곳을 모르는 나그네, 그래서 서러움이 많은 나그네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 제목이 ‘나그네 설움’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다 나그네입니다. 유명한 대중가요 가수만 인생은 나그네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도 인생은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불신자만 나그네 인생인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우리 신자들도 나그네 인생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신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자 붓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단어는 ‘나그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자기의 편지의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편지를 받는 당신들, 곧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인 당신들에게 내가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곳곳에 흩어져서 핍박 가운데 힘든 인생길을 가고 있는 이 나그네들이 실상은 어떠한 존재들인가를 사도는 차근차근 진술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가 총동원 하셔서 이루어낸 ‘택하심’을 받은 나그네들이요, 그래서 은혜와 평강이 보장된 나그네들입니다(2절).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삼아 주어진 살아있는 확실한 소망을 가진 나그네들입니다(3절).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유산이 확보된 나그네들입니다(4절).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 나그네들입니다(5절). 그러므로 사도는 지금까지의 말을 그렇게 끝맺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지금은 잠깐 근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나가고 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6절). 그리고 잠시 후에는 다시 그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8절). 사도는 나그네 설움이 아니라, 나그네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이 나그네들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가 말하는 그런 나그네하고는 전혀 다른 나그네입니다. 같은 말을 쓴다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겉보기가 같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산에 묻혀 있는 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돌이 아닙니다. 깨보면 그 속에 보라색으로 번쩍이는 자수정이 석류 알처럼 들어박혀 있는 돌이 있습니다. 나그네라고 해서 다 같은 나그네가 아닙니다. 사도가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신자들을 나그네라 부르면서 편지의 서두를 이렇게 감격에 찬 내용으로 시작하는 데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떠한 나그네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그네에 걸맞게 고난 가운데 사는 세상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힘든 인생길을 살고 있는 우리 신자들을 그렇게 격려하고 응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갈 곳이 없어서 떠도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나그네가 아니라, 갈 곳이 너무 분명하고 가는 곳이 너무 확실해서 이곳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삶이어서 설움이 많은 나그네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너무 귀하고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 너무 커서 근심거리 가운데서도 찬송을 불러대는 나그네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잠시 처한 현실적인 근심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갖게 될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습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을 여전히 유행가 가수가 불러대는 그 나그네로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신자된 우리의 나그네 자존심에도 걸맞지 않는 것입니다.
19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63)| 이율배반二律背反_정창균 목사 (97)
편집부
6845 2010-09-01
이율배반二律背反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교회는 어떤 좌절의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아”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첫 전도여행을 떠나 루스드라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말씀을 전하다가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지체장애인 한 사람을 기적을 행하여 고쳐주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여서 자기 발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고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본 무리들이 경의에 찬 소리를 지르며 모여들었고, 그곳에는 일시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신들이 오셨다! 신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바나바는 제우스신이고, 바울은 헤르메스신이라고 그들은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신이 아니었지만,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자 외곽지역에 있던 제우스신을 섬기는 신당의 책임자가 무리를 이끌고 소와 꽃다발을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가 머무는 집 대문 앞에 와서 이 두 신에게 제사를 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바나바와 바울이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이 지른 소리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짓을 하는가? 우리도 너희와 똑 같은 사람이다.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다른 신에게 제사하는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울과 바나바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그 짓을 못하게 하려고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전한 결과로 오히려 이런 짓이 일어나고 있다는 그것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즉석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자세히 설명하여 자기들에게로 집중되어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겨 놓기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바울과 바나바가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했다”(18절)는 말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자칫하면 헛된 일을 멈추게 하려고 시작한 일로 오히려 헛된 일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우스신을 섬기는 일을 그만두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은사와, 큰 교회를 가지고 제우스신을 섬기는 일을 그만 두고 목회자 자신을 섬기게 하는 일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휩싸일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설교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신격화된 대접을 받고자하는 목회자의 잘못된 풍조를 강하게 경고합니다. 그는 지극히 부당하고 어울리지 않는 존경이 오늘날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게 돌려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하나님께만 합당한 경의를 교회의 고위 성직자에게 돌려서는 결코 안된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설교자를 칭송하는 회중,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칭송을 은근히 기대하는 설교자는 모두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이라고 단정지어 말합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종이라는 것이 스토트의 입장입니다. 스토트는 설교자의 능력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설교자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능력의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설교자는 능력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능력이 필요한 자일 뿐입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리고 성령 안에 있으며 설교자가 이 능력을 힘입고 능력의 통로가 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조건은 거룩함과 겸손이라고 스토트는 결론 짓습니다. 이 나라의 어떤 목회자들에게는 “어떤 수를 사용해서라도” 교인들을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하듯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로 여겨집니다. 루스드라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했듯이 교인들이 경의에 찬 눈으로 목회자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자기 앞에 쩔쩔매며 엎드리는 것을 마치 자기의 목회능력인 것처럼, 자기의 영력인 것처럼 보란 듯이 과시하고 즐기는 것은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가 할 일은 아닙니다. 더우기 교인들이 자기를 그렇게 신처럼 높이며 대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거나, 심지어 은연 중에 그것을 조장하는 못된 짓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율배반입니다. 그것은 교인들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도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야 될 것을 가로채는 반역이기도 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에게서 몇 가지 특이한 행적과 수완을 본 결과로 ‘우리 목사님이야 말로 제우스신이고 헤르메스신’이라는 식의 생각으로 그렇게 높이고 대접하는 것인지, ‘목사님은 성경이 말씀한대로 우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는 분’이므로(히 12:17)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회자를 존경하고 높이는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그렇게 목회자를 높이고 따를 때에도, 여전히 우리가 그들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외칠 말은 그것입니다. “나도 여러분과 똑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18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62)| 여전히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_정창균 목사 (68)
편집부
6811 2010-08-03
여전히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교회는 어떤 좌절의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아” 때로는 우리의 목회가 끝도 없는 긴 터널같이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때로는 이쯤에서 이제 목회를 내려놓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운해지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내 자신이 서글퍼지고, 그러다가 멀리 서계시는 방관자 같은 하나님이 너무 서운하고 야속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가? 사실은 혼자 자기 도취에 빠져서 가는 실속 없는 길이면서, 하나님을 내세워 소명의 길이라고 억지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과 나의 하는 일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교회에 유익이 되고 있는 것인지, 배운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밧모섬에 갇혀서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한 때 잘 나가던 지도자 사도 요한도 간혹 그런 심정이 들지는 않았을까 궁금해지곤 합니다. 그곳에서 사도는 교회를 향한 비난과 핍박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는 소식을 간간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와 권력으로부터 받는 핍박과 위협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신앙을 버리고 생존을 위한 변절을 감행하는 사람들의 소문도 간간이 들었을 것입니다. 한 때는 복음이 그렇게 왕성하게 번져가고, 교회가 그렇게 힘 있게 진군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제자들은 무엇인가 세상을 바꿀 가능성과 자신감에 흥분했었을 법도 한데,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것으로 끝이 아닌가, 우리의 사역과 헌신은 한 동안의 덧없는 수고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그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주일 날, 나팔소리와 같은 큰 음성과 그 위엄에 찬 모습(계 1:10-16절)으로 밧모섬의 사도 요한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일차적인 목적은 아마도 그 당시의 교회들이 품었을 이러한 문제에 주님의 대답을 주시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요한 계시록을 통하여 주님은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회의 역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역사의 끝은 어떻게 되며, 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인가를 확실하게 밝히시려 한 것입니다. 현실의 삶 속에서 흔들리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교회들에게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그것을 분명히 확인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무엇을 하찮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우리의 안목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지를 주님은 가르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독려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보습을 보고 그 발 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러진 사도에게 주님은 오른 손을 얹고 그리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사도가 본 주님의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이 주님의 모습을 그렇게 보기를 원하셨습니다(1:20). 그리고 교회들도 주님을 그런 모습으로 이해하기를 원하셨습니다(2:1).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일곱 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일곱 촛대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혼돈이 없도록 친히 주석을 달아주셨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였습니다. 결국,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시오, 주님이 교회를 책임지신다는 선언을 주님은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 상황 가운데서 좌절과 회의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교회들에게 주님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드러내주심으로써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그러므로 주님이 교회를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이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생존과 영광이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교회로서 여전히 소망을 가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이 사회에서는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극렬한 비난과 조롱이 거의 보편화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의 교회에 대한 신뢰와 영향력이 터무니 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제 여기까지가 아닌가 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떤 좌절의 상황에 허덕이든지, 목회자가 어떤 무력감으로 절망하든지 결국 주님이 책임지시고, 주님이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이고, 우리가 교회의 사역자인 영광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난히 폭우와 폭염이 심했던 올 여름에도 지칠대로 지친 모습으로 여름 행사를 마치고 다소 의기소침해 있을지도 모르는 이 땅의 많은 사역자들이 생각납니다. 주님께서 오른 손을 얹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18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61)| 한 가지 제안_정창균 목사 (220)
편집부
6474 2010-07-07
한 가지 제안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 베드로전서 2장 23-25절 |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는 진리 외면 말아야” 설교는 무엇보다도 본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의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 설교 현실을 살펴볼 때 근래의 한국교회 설교가 보여주고 있는 압도적인 경향은 설교의 말씀(본문) 이탈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성경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급기야는 성경을 설교의 기본 텍스트로 삼지 않은 설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예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disuse), 성경을 잘못 사용하기도 하고(misuse), 성경을 남용(abuse)하기도 합니다. 설교의 본문 이탈을 부추기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말씀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씀에 대한 왜곡된 인식입니다. ‘말씀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그 안에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러한 생각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말씀의 충족성에 대한 불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현실적으로는 핍박받는 나그네의 고된 삶을 살아가는 그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여전히 말씀이 최고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듭나게 된 것도, 영혼을 깨끗하게 한 것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된 이 땅에서의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도 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사도는 단언합니다. 그 말씀은 살아 있고, 항상 있으며, 세세토록 있으며 이 말씀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는 안 되니 현실적인 필요를 위해서 이런 저런 다른 것들을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욱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에 놓고 집착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수련회나 캠프를 준비하느라 쩔쩔매는 사역자들을 보며 그 열정에 고마운 마음과 그 힘들어하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나를 사로잡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해서든지 아이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재미있고 기발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들이 때로는 너무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몇 초대형교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교회도 아이들이 교회 밖 어디에선가 누리는 재미보다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교회 안에서 제공하여 아이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재정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인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단순히 재미있기 위해서라면 아이들이 굳이 교회 수련회에 올 이유가 없는 상황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재미는 자기들만 통하는 다른 곳에서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교육부서 사역을 하는 제자들에게 간간이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과 진지하게 말씀을 나누어 당분간 부서에 아이들이 상당수 감소한다 할찌라도 모험을 해보기로 서로 의기가 투합하면, 교육부서의 수련회에서 모든 다른 오락성 프로그램을 없애버리고 성경수련회 혹은 성경 캠프로 운영해보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아이들의 기대나 현실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면 게임, 오락, 체험 등은 다른 곳에서 즐기라고 하고, 교회 수련회에서는 2-3일 동안 오직 성경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나누고 발표하고 그리고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담임목회자의 결단과 부서 담당 교역자의 치열한 기도준비와 교재준비 그리고 말씀 준비가 필수적입니다. 그런 식으로 수련회나 캠프를 진행하기에는 아이들이 아직 너무 어리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너무 무시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나아가서 말씀의 주인이신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일런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놀이의 아들과 딸이 아니라, 성경의 아들과 딸로 키워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시도해보니 아이들이 의외로 성경공부를 좋아하고 은혜를 받는다는 보고를 간혹 듣곤 합니다. 초등학생들이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그렇게 깊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는 보고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각 교육부서에서 ‘다니엘서 성경 수련회’ ‘요한복음 성경 캠프’ 등으로 이름 붙인 수련회나 캠프로 여름 행사를 바꾸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회들도 이제는 앞에 ‘특별’자를 붙인 무슨 무슨 집회나 이벤트보다는 차라리 ‘출애굽기 성경집회’ ‘하박국서 성경 집회’ 등으로 이름 붙여진 집회로 교회 행사들을 진행하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벤트 준비와 프로그램 진행을 위하여 쏟는 그 열정과 그 헌신과 그 수고를 말씀 연구와 준비와 실천에 쏟을 수만 있다면 이런 캠프나 집회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목회할 때 이 생각을 못하고, 이런 캠프를 시도해보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는 진리를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우리를 살리는 ‘살아 있고 세세토록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18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60)| 거짓말_ 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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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2 2010-06-09
" 거짓말 " |출애굽기 20장 16절| <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교회는 진실과 성실과 정직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률이기도 합니 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은 하 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계명은“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거짓말하 지 않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외형은 똑같아 보일지 몰라 도 그 본질은 판이하게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교양과 인품이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준법적 차원에서 다른 사람 에 대하여 거짓말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우리 신자들은 신앙적 이유 때문 에 거짓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거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짓말이 무죄한 한 사람에게 억울한 고통과 피해를 줄 수 있습니 다. 그런가 하면 죄 있는 사람을 불의하게 그냥 풀려나게 할 수도 있습니 다. 때로는 한 사람의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이 다른 사람에 대하 여 진실된 말과 성실한 태도로 사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에 대한 반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구 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 실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행하는 거짓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로 연결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참되신 분인데 우리는 거짓 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부인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결국 은 하나님이 참되신 분임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 에 대하여 거짓말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로 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거짓으로 대하는 것이 초래하는 치명적인 결과입니 다. 그것은 단지 그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치명적 인 손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조직적으로 형성된 안티기독교 단체들로부터 지탄과 비방과 조롱을 받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도 근원적으로는 우리 신자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실 패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말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생활이 하나님을 반영한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 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 사회에서 능욕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 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삶의 핵심은 거짓말입니 다. 한국기독교가 이 사회와 언론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핍박을 받고 있다고 불만 하기 전에, 적그리스도적인 세력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왜곡당하고 있다고 기 분나빠하며 그들을 상대할 그룹들을 세력화하기 전에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이 사회 안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 지 말라”는 이 계명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에 걸맞는 진실과 성실과 정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에게 시급한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영향력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권력을 가진 정계의 기독교인 지도자들 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일에 더욱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왜 우리의 말을 그렇게 믿지 않느냐고 개탄하기 전에, 우리가 처신을 어떻게 해왔기에 이 지 경이 되었느냐고 자탄하는 것이 더 시급해보입니다. 비록 소수일망정 이 나 라를 “거짓말... 불신 공화국”이라고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비극 입니다. 이 나라의 결정적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가지고 있는 신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Selected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9)| 성공한 자들을 향한 경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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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6 2010-04-28
성공한 자들을 향한 경고 | 신명기 8:11-20 | “목회자의 영웅적인 모습 앞세울 때 멸망당할까 조심해야”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납하실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교 만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자 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교만입니다. 우상숭배와 교만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아 우상숭배와 교만은 다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더 이상 하나님 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전에는 우상숭배나 교만을 결코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 다. 어떤 경우에도, 또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이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와 교만을 그토록 단호하게 처리하시는 연유입니다. 성경은 이 둘을 가리켜 부패하고 패역한 것으로 단정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패망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는 유혹에 직면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찾아 가는 우상숭 배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싶은 유혹에 직면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제치고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교만에 빠지 곤 합니다. 불신자야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 고 교만하게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 백성인 신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따라갈 수도 없고, 자신이 한 없이 높아져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는 신자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서조차 마치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하나 님 같은 대접을 누리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의 행태에서는 하나님은 볼 수 없고 인위적으로 부 각되는 카리스 마 넘치는 영웅적인 목회자의 모습만 부각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 니다. 교만의 극치를 보는 듯하기도 합니다. 그의 말은 무엇이나 옳고, 모 든 사람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에게 모든 권위와 옮음이 있고... 아마도, 목회자일수록 그리고 이 시대의 대형교회 목회자일수록 자신이 하나 님처럼 높아지고 있지 않은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같은 대접을 받 으며 군림하고 있지 않은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오래 전 친구인 목사님 한분을 우연히 만나서 한 이야기를 들었 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는 그 분 조카의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항공료와 경비를 부담하며 미국에 사는 젊은이들을 초청하여 그 교회에서 행하는 3일 동안의 수련회에 참석할 기회 를 주었는데 그 조카도 초청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 낮에 갑자기 그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삼촌 저 좀 여기서 데려가줄 수 있으세요?” 거기 더 이상 못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웬일인가 하여 가서 만났습니다. 그 조카는 자초지종 사연을 털어놓았습니 다. 공 항에 내리니 세 사람이 영접을 나왔는데, 차타고 오는 내내 그 교회 담임목사님 칭송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집회가 있기 전에 귀에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이 경호를 하며 리무진 한 대 가 도착하기에 아주 높은 관료가 방문하는가 했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내리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목사가 그런 모습으로 교회에 오는 것을 평생 본 적이 없는 그 청년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 날도 둘째 날도 몇분의 목사님이 나와서 세미나를 인도하는데 내내 그 교 회 담임목사님의 훌륭함과 목회 성공 사례와 그 목사님의 업적만을 늘어놓 고 성경을 말하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둘째 날을 지내면서 같은 방에 배치되었던 세 사람의 친구들은 담임목사 한 사람만 이렇게 집중적으로 높이는 것을 보고, 이 교회는 틀림없이 이단인 것 같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못왔다는 생각과 함께, 이 제라도 항공권을 돌려주고 여기서 떠나자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삼촌 목사님께 마치 구호요청 전화를 하듯이 연락을 한 것 이었습니다. 그 조카는 그렇게 둘째 날 삼촌 목사님 집으로 와서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다가 한국교회에 큰 상처만 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 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꿈과 소원이 성취되어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을 놓 고 그들이 성공적으로 가나안 입성을 이룬 이후에 대하여 염려하셨습니다. 소위 꿈을 이루어 성공하고, 그 성공이 일상적인 삶의 현장이 되었을 때 이 백성이 어떻게 멸망의 길로 빠져들 수 있는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14 절).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17절).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한 후에,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하나님을 제 치고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하고 하나님 대접을 받는 교만을 염려하신 것입 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염려가 아니라, 그러면 반드시 멸망하고 만다 는 경고였습니다(19절). 성공이 일상적인 삶의 현장일 때가 문제 오늘 날 우리, 특히 목회자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경고도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18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8)|혼자 남겨져도 혼자가 아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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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2 2010-03-31
혼자 남겨져도 혼자가 아닌 사람 | 요한복음 16:32-33 |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 문득 "나도 사람을 가르쳤다면 제법 가르쳤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던 고 박윤 선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제자다운 제자 되고자 결심해 30년전 남서울교회 교육관 지하 예배실에서 신학을 배울 때였습니다. 여든 을 내다보시는 선생님이 강의 도중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다 운 제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제자라고 가르쳤지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려울 때도 끝까지 제자로 남아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 고, 오히려 반대자가 되고 때로는 대적자가 되는 현실을 자주자주 경험하면 서 선생의 쓸쓸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시는 거라는 생각이 그 때는 들었습 니다. 그 어른은 이런 말씀도 두어 번 하셨습니다. "우리 교수들은 여러분을 지금 잘 가르쳐야 하고, 여러분은 지금 우리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목사가 되 면 너도 목사 나도 목사 하고 나오니 지금 잘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 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냥 사람 하나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한 사람을 교회 하나로 보고 가르칩니다." 그후 목사가 되어 십여 년 목회도 하고, 신학교의 선생이 되어 십수 년 가르 치기도 하는 동안 박목사님의 그 말씀을 같은 심정으로 경험하는 횟수가 점 점 늘어갑니다. 그리고 평생 가르쳐서 두어 사람이라도 제대로 키울 수 있다 면 그것도 큰 일 한 것이고, 평생에 두세 사람이라도 끝까지 정을 나누며 함 께 할 수 있는 사람을 가질 수 있으면 그것도 큰 복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많은 목회자들의 생각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언제나 사 람들 속에 묻혀있으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로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면 서 아픔과 외로움에 젖어들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혹시 결국 혼자 남도록 버려진다 하여도 혼자라고 생각하며 아파하거나 좌절하거나 서 러워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에게서 배 웁니다. 그것은 홀로 버려두고 떠난 그 사람들이 아니라, 혼자라고 힘들어하는 나의 책임일거란 생각을 하 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혼자로 남겨져도 사실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낸 마지막 공식적 인 모임 중에 하신 마지막 말씀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 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 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2절). 예수께 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긴긴 고별설교(요 14-16장)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 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고, 가르치고, 돌보았던 제자들도 다 떠나 버리고 혼자 남아 죽음의 길을 가야하는 현실을 직면하면서 하신 말씀이었습 니다. "나는 혼자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다!" 겉으로 나타난 현실을 놓고 보 면 혼자이지만 실제로는 혼자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혼자가 아니라고 선언할 수 있는 근거는 아버지와의 동행 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결국 예수님 의 사 역의 원리는 사람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동행의 누림이었 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사역에 나설 제자들이 사역의 현장에서 자주자주 직 면해야 할 상황이 사람들로부터 혼자 남게 되는 것임을 예수님은 아셨을 것 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이기도 합니 다(33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혼자됨의 환난을 극복하는 비결을 고별설교 의 마지막에서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 실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지금까지 함께했던 제자들마저 다 떠나가고 혼자 남게 되는 이 상황을 그렇게 극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는 이유가 제자들을 위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 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초기부터 내내 견지해온 사역철학이었습니다. 예 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베푸신 첫 기적과,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영웅적 인 사역으로 많은 사람 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며 따르고 있을 때 예수님이 취한 반응은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 으니..."(요 2:24-25). 결국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곁에 있을 때든지, 모두 떠나버리고 혼자 남겨 질 때든지 일관되게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 에 초점을 맞추며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 확신하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사람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 께 계심을 확인하고 누리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혼자 남겨지지만 그러 나 언제나 혼자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18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7)| 배교정치의 후유증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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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5 2010-03-03
배교정치의 후유증 열왕기상 12:25-33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배교적 처신이 문제" 솔로몬이 죽자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새 왕이 세워지자 백성들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큰 기대를 갖고 왕을 찾아와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풀어주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의 통치 아래서 주어졌던 버거 운 부담과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이제 가볍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감 높아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폭군정치를 선 언하였습니다. 왕이 폭군정치 노선을 선언하자 나라가 둘로 갈라져버렸습니 다. 열두 지파 가운데 열지파가 똘똘 뭉쳐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독립해버렸습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통치 기간 동안 망명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갑자기 새로 운 나라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왕권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 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문제였습니다. 성전이 그곳에 있으니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그곳에 자주 다닐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북왕국의 백성이 예배 때문에 남왕국 예루살렘을 그렇게 자주 다니다보면 그 곳에 대한 적대감도 약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다시 유다와 하나가 되기 위 하여 왕인 자기를 없애버리려고 할 것이라는 게 정치가 여로보암에게는 걱정 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 드리러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다가 그가 내놓은 묘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갈 필요가 없게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을 기울여 새 로운 정책을 펼쳤습니다.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두 곳에 두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제사하게 하였 고, 공사판을 일으켜 산당들을 짓고, 아무 사람이나 뽑아서 제사장으로 임명 하고, 유다의 절기와 비슷한 날을 잡아서 이스라엘의 절기로 명명하였습니 다. 그는 그 모든 일들을 "자기 마음대로"(33절)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제사 드리자고 굳이 예루살렘에 까지 가 는 수고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 나 가리지 않고 행한 셈입니다. 여로보암이 왕으로서 펼친 정치의 본질은 한 마디로 배교정치였습니다. 결과 적으로 자기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고, 백성들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 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거짓과 술수를 동원하며 이러한 배교정치를 일삼은 가장 중요한 동기는 자신의 정권의 안정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이러한 행태에 대하여 본문은 간단하게, "이 일이 (하나님께)죄 가 되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하여 펼친 이러한 배교정치가 얼마나 무서운 후유증을, 얼마나 오랫동안 이스라엘에게 초래하였는가를 성경은 끈질기게 증거합니다. 여로보암과 그 이후의 왕들이 얼마나 악하였는가를 말하기 위하여 성경은 일 관되게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나아갔다"거나 혹은 "그 아비의 길로 나아갔 다"는 한 마디로 결론을 짓습니다. 성경은 여로보암이 갔던 배교의 길을 지 칭하기 위하여 이 말들을 거의 관용어나 전문용어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 가 되는 배교정치를 펼친 그 왕들이 다스린 나라의 형편은 참혹 하였습니다. 19명의 왕이 통치한 208년 동안, 부자간의 왕위 계승은 단 10차 례에 그치고, 왕위가 공석이 되어 왕 없이 지낸 것이 두 번에 결쳐 20년이었 습니다. 19명의 왕 가운데 7명만이 수명대로 살다가 자연사하였고, 한 명은 하나님 의 징벌을 받아 죽었고, 두 명은 전투에서 전사하여 죽었고, 한 명은 자살하 여 죽었고, 한 명은 2층에서 떨어져 죽었고, 여섯 명은 살해당해 죽었고, 한 명은 포로로 잡혀가 죽었습니다. 19명 가운데 한 명은 6개월, 한 명은 1 개월, 어떤 왕은 단 일주일간 통치하기도 하였습니다. 19명 가운데 10명이 큰 전쟁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결국 여로보암 왕으로부터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은 당시 가장 잔인하고 포 악하기로 소문난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배교 정치의 결과였습니다. 그 명분이 무엇이든 신자가 자기의 잇속을 충족시키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집착하는 것은 "여로보암의 길"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수도 있다는 무 서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하나님을 많이 말하고, 이 곳 저곳에 성전도 지어대고, 제사장들 을 세우고, 절기들을 만들어 지키는 데도 그렇게 하는 숨은 목적이 무엇인 가 때문에 외견상 지극히 신앙적이어 보이는 그 행동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등지는 배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의적 신앙이 하나님 등지는 배교 그 누가 되었든 간에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배교적 처신은 반드시 참혹 한 후유증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18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6)| 하나님이 확인하고 싶으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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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5 2010-02-03
하나님이 확인하고 싶으신 것 - 여호수아 3장 8절 - "일상에서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어느 정도나 신뢰하고 있는지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록 하나님은 그 믿음이 거창한 구호나 비장한 각오의 외침으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확인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행위 요구돼 하나님께서 확인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 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신뢰 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나 요구가 우리의 합리성이나 상식이나 경험에 턱없 이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결단을 말합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성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강을 두 번 건너야 했습니다. 430년의 노예생활에서 풀려 나 드디어 애굽을 벗어나려 했을 때는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홍해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40년의 광야생활을 마무리 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려 할 때는 요단강이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요구하 신 행동은 두 경우가 확연히 달랐습니다. 출애굽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의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세가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내어밀라고 요구하 셨습니다. 모세는 그대로 하였고, 그러자 강이 갈라져 강 가운데 마른 땅 길 이 났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강이 갈라져 길이 났음을 확인하였고, 그러므 로 홍해에 들어서도 물에 빠져 죽을 염려가 없음을 미리 확인하고 안심하며 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입성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의 문제를 놓고는 홍해를 건널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요구를 하셨습니다. "너희가 요단에 이르거든 들어서 라!" 넘실 거리는 강물에 들어서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본능적으로도, 상식적으로 도 그리고 경험적으로도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모두가 물에 잠겨 목숨을 잃게 되고 인생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게 된다는 사 실을 사람이라면 모를 리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런 사전 대책 없이 그냥 그 강에 들 어서라는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물론 후에 여호수아를 통하여 말씀하는대로 들어서면 하나님께서 강물을 갈 라지게 하고, 그래서 역시 마른 땅 길로 그 강을 건너 결국 가나안 땅에 드 려놓고야 말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일이 고, 우선 당장 백성에게 주어진 요구는 넘실대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냥 들어 서서 가나안 땅을 향한 진군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의 백성들에게는 그것은 가나안 땅을 향한 진군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어 실패하고 마는 좌절의 자살행위로 여겨질 수 밖에 없 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긴긴 세월동안 애굽의 노예로 막노동을 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경험 하고 그리하여 믿음이 자랄 기회도 없이 지내온 것이 출애굽 백성입니다. 그 러므로 출애굽을 시작으로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의 편이신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크고 능하신 분이신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를 계속 배우고 확 인하고 체험하면서 요단강 앞까지 온 가나안 입성 백성은 같은 수준의 사람 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두 경우를 놓고 이렇게 판이하게 달리 요구하시 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는 백성에게 "요단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고 요구하 시는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그 백성을 향한 약속을 지키시고야 마시는 분이 라는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라는 요구이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절 대적인 신뢰를 눈으로 확인하시고자 함일 것입니다. 요단에 들어서면 다 죽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저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 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니, 여하튼 결국 저 땅은 우리 것이 될 수 밖에 없 다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하나님 앞에 내놓으라는 요구인 것입 니다. 홍해는 미리 갈라 놓고 건넜다면 요단은 들어가서 가르고 건넜습니 다. 두 번 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그 기적에 이르는 양상은 달랐습니다. 수준에 따라 요구하는 양식 달라 새해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사는 언약백성이라 는 사실을 말이나 구호나 비장한 결심으로가 아니라, 일상에서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드러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8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5)| 삶으로 드리는 예배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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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2 2009-12-17
삶으로 드리는 예배 로마서 12:1-2 "삶으로 드리는 예배 없는 의식적 예배는 가치 없어" 성경은 예배를 단순히 하나의 신앙공동체가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모여 서 함께 드리는 의식으로 이해하는 데서 그치고 있지 않음을 주목해야 합니 다. 성경은 신앙공동체가 흩어져서 살아가는 현장에서의 삶 자체를 가리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장의 삶 역시 예배로 제시해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 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 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말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1절 말씀은 이러한 삶을 가리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 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즉, 우리의 몸을 하나 님께 드리 는 제사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즉 우리의 몸을 드리는 제사가 있는데 그것 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예배이며, 그렇게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의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 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사는 것 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예배는 의식 혹은 예전으로 드리는 예배(요 4:23-24) 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롬 12:1-2)가 있으며, 성경은 이 두 예배를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이 생활현장에서도 수시로 시간을 내어 예 배시간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원리와 자세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를 매우 강조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 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는 수단이 바로 예 배입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예배의 종류는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 배"와 "생활의 현장에서 자기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자에게는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시간에 드리는 예배와 흩어져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독립 된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의 교회 안과 주간의 교회 밖이 똑 같이 예 배의 현장일 뿐 아니라, 둘은 필연적으로 깊은 상호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의 성패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성패와 깊이 관련되 어 있고,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성패가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의 성패와 깊 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성공할 힘과 근거와 지침을 얻는가 하면,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로 돌아갈 근거와 이유를 확인합니다. 이사야서 1장 11-17절의 말씀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실패하면서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로 모든 것을 떼우고 스스로 만족에 빠지는 신자들의 행태가 얼 마나 하나님께 무서운 책망을 받을 만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 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때를 따라 열심히 드리는 의식 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거부할 뿐 아니라 그것을 예배로 인정도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선언합니다. 근래에 우리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위기는 삶의 현장에 서 드리는 예배, 곧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실패와 그로 말미암은 후유증일 것입니다. 교회 안팎에서 터져나오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작금의 신랄한 비난들은 사실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여전히 열심인데,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철저히 실패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실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말미암아 그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은 정도를 놓고 보면 한국인 4-5명당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지금이 조선 인 1만 명에 한 사람 정도가 그리스도인일 때보다 훨씬 못미치고 있다는 사 실에 우리는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 실패가 문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예배갱신 운동이 아니라 예배회복 운동일 것입니 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회복 말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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