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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4)| 예배 갱신과 예배 변질_정창균 교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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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9 2009-11-18
예배 갱신과 예배 변질 요한복음 4:21-24 "예배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맞추어지고 있어야" 예배 형식은 지난 20여 년 동안 목회현장에서 '예배갱신'이라는 명분 아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온 대표적인 이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배 형식 집중적 관심받아 예배갱신 주장자들은 1) 예배의 문화적응의 필연성, 2) 예배의 선교적 기 능, 3) 예배의 치유적 기능 등을 예배갱신의 당위성과 필연성의 근거로 내세 우면서 다양한 방식의 예배를 시도해왔습니다. 예배의 '문화적응'이란 예배가 예배 행위의 주체인 회중의 문화를 반영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예배의 '선교적 기능'이란 예배가 불 신자 혹은 구도자들과 갖는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그들을 신자의 영역으로 끌 어들이는 역할 곧 선교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예배 의 '치유적 기능'이란 예배가 그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회중과의 관계에서 치유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 입각한 예배갱신 운동은 그 강조점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예배 형태를 개발하게 되었고, 그것은 '경배와 찬양', '열린예배', '예배 공 동체의 역동성이 발휘되는 예배' 혹은 '치유의 예배' 등으로 불리는 다양한 예배 형태로 표출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배갱신 운동과 함께 등장하게 된 새로운 형태의 예배는 전통적인 예배와 비교할 때 몇 가지 점에서 급격한 변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변 화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예배의 신학적 본질의 차원 보다는 다분히 현대 사회에 속해 있는 교회가 그 예배를 통하여 수행해야 할 기능적 차원에서 예배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예배의 형태와 진행 방식의 급격한 변화입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과 춤 그리고 드럼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악기, 드라마와 간증 등 문화적 인 요소가 예배의 중요한 항목으로 도입되고 음향과 영상 등 효과적인 최신 n미디어가 예배에 대거 도입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구성에서 이러한 순 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예배는 치밀하게 미 리 기획되고 그 기획에 따라 수행(performing) 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 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배는 점점 공연물화 하는 현 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예배는 '드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관람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러운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예배의 초점 변화입니다. 예배가 회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회중을 감 정적으로 감동시켜서 회중에게 어떤 경험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 추어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수단과 순서들이 예배에 자연스럽 게 동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 예배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었던 전통적 인 예배와는 달리 음악과 문화행사가 예배의 중심이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서, 하나님께 드리며, 왕이신 하나님 을 듣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에서 만나 예배의 장소 문제를 묻 는 여자에게 예수님께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참된 예배의 요건이 무엇인 가로 대답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예배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 다.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를 신령 과 진정으로 드려야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 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어 예배를 말씀하고 있지, 예배가 문화나 불신자나 다른 예배자들과의 관계에서 수행해야 할 기능에 입각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의 초점을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 옮겨놓는 현대예배는 예배의 갱신이 아니라 예배의 변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 다. 예배 갱신 운동과 함께 등장한 현대의 예배는 자칫 예배를 무대 위의 공 연물과 예배자들의 자기도취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이 문제 예배란 예배하는 자를 위한 것이기 전에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위한 것 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갱신은 예배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맞추어지 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 예배의 초점이 되도록 하는 데에 있 다 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18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3)| 하나님이 되고 싶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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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9 2009-11-11
하나님이 되고 싶은 사람들 창세기 3:1-7 "인간 차원을 초월하는 신비한 체험 추구는 무의미해" 사탄교에서 활동하다 이탈하여 교회로 돌아와서 이제는 기타 하나 들고 복 음 송을 부르고 간증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젊은 백인 아가씨를 제가 유학중이 던 90년대 중반에 만나 장시간 대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탄교에 빠졌던 사람 만나기도 그 아가씨는 사탄교도들이 모여서 행하는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 다. 그들의 의식은 주로 자기들의 능력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데, 고양이와 같은 짐승을 사용하여 의식을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양이를 가운데 놓고 둘러서서 의식을 행하는데 최대한 오랜 시간동안 최 대 한 심한 고통을 고양이에게 가하면서 서서히 죽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하 여 고양이가 죽어가면서 발산하는 힘을 자기들에게 흡수하여 들인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들 은 죽어가는 생명은 고통을 심하게 당할수록 큰 힘(power)을 발산하며, 그 힘을 흡수하면 초인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때는 어린 아이를 제물로 삼아서 의식을 행한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그 이후 사탄교에서 의식을 행하는 모습과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젊은 여 자 를 양쪽에 거느리고 다니는 지도자의 모습을 사진으로 본적도 있습니다. 제가 살던 도시에서는 사탄교도라고 밝혀진 한 여학생이 침대에 누워있는 자 기 어머니의 머리를 갑자기 쟁반과 냄비로 정신이 나간 듯 때려서 죽였다는 기사와 테이블 마운틴의 여기저기 계곡에서 구토물 등 사단교도들이 의식을 행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는 등 사탄교에 대한 보도가 심심 찮 게 나오곤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능가하는 초능 력을 소유하여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초능력을 지향하는 것은 사탄교만이 아닙니다. 인 간 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능력을 갖고 싶어 하는 열망과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는 인간에게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 리고 그 능 력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신적 존재가 될 수만 있다면 무엇 이라도 하겠다는 의욕을 품어왔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넘어진 시험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은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초인적 존재, 초능력의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 었 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처음 타락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 늘 날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망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적 의식을 통하여, 세력 확보를 위한 각종의 조직의 규합을 통 하여, 특별한 종류의 음악을 통하여, 깊은 명상을 통하여, 때로는 자기 최 면 을 통하여 인간의 차원을 초월하여 신적인 영역으로 옮겨가려는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차원을 넘는 초능력이나 신비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혹은 영성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 므로 능력 지향적이고 신비 체험 지향적인 신앙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러 한 경향을 경계해야 합니 다. 더 큰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려고 몰려드는 현상과 신비한 체 험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의 기도나 의식도 마다하지 않는 작금의 현상 들 의 한 가운데는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되고 싶은 욕구"가 도사 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열광하여 능력을 얻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영계를 감지하는 그 렇게 신비한 체험을 하여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왜 그러한 초능력이 그 렇 게 중요하며 그렇게 신비한 체험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보 아야 합니다. 그래서 얻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어느 종파 혹은 어느 소위 영성훈련 프로그램에서 영성이라는 명분 으 로 시도하는 하나님의 임재체험이라는 것은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이교도들 이 행해온 신접술과 방불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임재체험은 이교도적 행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통쾌한 능력의 구사와 인간의 차원을 초월하는 신 비 한 세계로의 진입 자체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지향하는 가치요 추구하는 목 적이라면 그것은 매우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합니다.
17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2)| 화합이라는 이름의 혼합_정창균 교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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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4 2009-09-23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52) 사도행전 3:13-21 화합이라는 이름의 혼합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배타적, 독선적 교리만은 양보할 수 없는 것” 근래 한국교회는 다양한 국면에서 도전과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도 가장 심각한 위기는 이 사회와 다른 종교로부터 받는 압력입니다. 실용적 화합 명분의 도전 심각해 그 압력의 핵심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우리의 신앙,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버리라는 강하고 과격한 요구입니 다. 이것은 다름아닌 반그리스도운동, 그리고 반유일신운동이기도 합니다. 재작년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비롯한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 한국의 종교대 표자 7명이 종교문화행사를 펼치면서 서로서로 다른 종교의 제의(가운)을 바 꾸어 입고 손을 꼭 잡은 모습의 사진이 주요 일간지에 높은 평가를 암시하 는 기사와 함께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 회가 이 사회와 다 른 종교로부터 직면하고 있는 도전입니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배타적 교리와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 님이라는 독선적 교리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화합과 평화, 종 교간의 화해와 상생의 장으로 나아와서 다른 종파들과 손에 손을 잡고 화합 하여 이 사회에 기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이러한 도전 은 생소한 것도 아니고, 치명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이 땅에 그 모습을 나타낸 이래, 교회가 교회이고자 할 때는 언제나 직면해야 했던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전으로 말미암아 무슨 큰 위기가 닥친 것처 럼 놀랄 일도 아닙니다. 정말 큰 위기는 그 도전 자체에 있지 않고 그 도전에 대한 교회의 반응에 있 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교인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제 우 리도 사회의 화합과 종교간 상생을 위한 이 사회의 요구들에 부응해야 하 며, 그것이 한편으로 기독교가 이 시대에 이 사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침체 와 소외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견을 스스럼없이 개 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사회의 윤리와 도덕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여러 종파들이 함께 협력하여 캠페인을 벌이고 계몽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빈곤 문제를 구제하기 위하여 종파를 초월하여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구제 사업을 펼치는 것은 가능할 뿐 만 아니라,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종파가 자기됨의 독특성을 포기하고 한데 섞여 혼합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논리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화합(reconciliation)이 아니라 혼합(syncretism) 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기독교적인 저항들에 대한 기독교의 이 미지를 개선하기 위하여 기독교만의 독특한 신앙고백이나 구원관을 버리든 지, 아니면 최소한 그것을 드러내놓고 강조하는 것을 삼가고 서로 화합하자 는 생각을 기독교인 자신들이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위기 상 황인 것입니다. 신앙은 도덕과 윤리의 증진을 언제나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부패는 반드시 도덕적 부패를 수반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윤리가 신앙은 아 닙니다. 그것이 도덕수준과 윤리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그것을 놓고 신앙수준 이 높다 고는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2013년에 열릴 WCC 제10차 총회를 한국에 유치하게 되었다고 일부의 교회지 도자들과 일부 기독교 언론들이 연일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 국교회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까지도 “온국민과 더불어 기쁘게 생각한다”고 축전을 보내면서 “국 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이미지를 높이고 국위를 선양하는 기회가 되기를”기 대하였습니다. 그러나 WCC 의 주장이 무엇이고, 어떤 입장들의 혼합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많은 염려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 그리고 그 이후 사도들이 전하여준 그리스도 예수의 복 음을 지키고 그 복음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다른 종교들에 의 하여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난받는 그 고백을 바꾸지 않기 위하여 자기 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백을 통하여 참교회의 역사를 진행해 오셨습니다. 본문 인 사도행전 4장에서 사도들이 목숨을 위협하는 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 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참교회 역사 결코 떠날 수 없어 실용적 화합을 빙자하 여 이루어지는 교리적 혼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 는 것이 이 시대에 진정한 기독교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가장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17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1)| 기회를 다스리는 지혜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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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5 2009-08-18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1) 기회를 다스리는 지혜 사도행전 3:1-16 정창균 교수_합신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위기 상황을 절묘하게 벗어나는 것도 기회” 기회는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회는 일단 지나가버리 면 다시 붙잡을 수 없으니 눈앞에 다가왔을 때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는 것 을 강조한 말일 것입니다.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이것이 기회다 싶으면 서슴없이 그것을 붙잡기 위하 여 진력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그것이 기회라고 받 아들이는가 하는 데 있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회 라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은 위기로 여기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상황이 기회인가를 판단하 는 근거가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것을 붙잡아 이용하는 것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이익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돈을 더 벌수 있는가, 더 유명 해질 수 있는가, 더 편해질 수 있는가, 더 높아질 수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가 등 자신의 욕구충족에 대한 기여 가능성을 근거로 하 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영달과는 다른 가치를 기준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이 붙잡아야 할 기회인가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0년 동안 한 번도 자기 발로 땅을 딛고 서 본 적이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뱅 이였던 사람을 성전 문 앞에서 고친 베드로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 니다. 베드로는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러 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기이히 여기며 베드로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베드로를 바라보는 그 군중의 분위기와 베드로를 향한 그들의 눈빛이 어떠하 였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따를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새로운 교주로 등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었 을 것입니다. 최소한 그 시대의 스타 지도자로 부상할 좋은 기회일 수 있었 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몰 려와서 영웅적인 기적을 행한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이 군 중을 보며 베드로가 즉각적으로 나타낸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 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손을 내저으며 우리가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고 펄쩍 뛰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그 기적을 체험한 이 고침 받은 앉은뱅이도 그들이 주목할 대상 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16절). 나도 아니고, 내 옆에 서 있는 이 고 침 받은 증인도 아니고... 자신의 인기나 권위가 급상승할 만한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취한 처신 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이 사건을 보면 우리는 적잖은 도전 을 받게 됩니다. 놀라운 사역을 수행하고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큰 호기 심과 기대를 가지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인가, 아니면 위기인가? 지금 베드로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자신이 돋보일 기회로 여기고 있지 않습 니다. 오히려 잘못했다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고 망해버릴 무서운 죄 를 범할 수 있는 위기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는 많은 사람이 출세 와 성공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할만한 것을 붙잡지 않고 다스리고 있 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아니라고 손을 내저은 베드로가 다음으로 하는 일은, 그러 면 누구인가를 명백히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곧바로 길게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의 핵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시선을 한 묶음로 묶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자기는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 에서 자칫하면 빠져들 뻔한 위기 상황을 절묘하게 벗어나는 베드로의 모습 을 보게 됩니다. 기회는 무조건 붙잡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붙잡아야 되는 기회인 가 피해야 하는 위기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기회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이 권력의 총수가 될 수 있는 기회인가, 온 나라에 망신을 당하 고 망가질 수 있는 위기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런 용납안 될 속사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기를 기회로 알고 덥썩 붙잡았던 한 사람의 모습을 얼 마 전에 보면서 받은 도전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기회인지 위기인지 분별해 야 기회는 어떻게든 붙잡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17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0)| 평생의 기도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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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3 2009-07-22
창세기 18:1-8 평생의 기도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10년쯤 전부터 제가 품고 있는 소원이 있습니다. 처음 2-3년 동안은 거의 매 일 새벽마다 그 소원을 품고 기도하였습니다. 지금도 종종 그 소원을 품으 며 기도하곤 합니다. 감각 없이 사는 사람들 의외로 많아 이후에도 우리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뵙게 되는 그 순간까지 그것은 저의 평생의 기도제목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하여 민감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 게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영적인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아니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분명한데, 하나님께서 내 귀에 대고 세상이 떠나 가게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감각 없 이 사는 나 자신을 보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니 상당수의 교인들이 자주자주 그렇게 살고 있었습 니다. 다른 사람은 지금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의 손이 지금 그에 게 임하고 있는 것이라고 다 알아차리는데 본인만 귀가 먹은 듯 듣지 못하 고, 눈이 먼 듯 보지 못하고, 감각이 없는 듯 알아차리지 못하는 교인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둘째 소원은 하나님께 민첩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신령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하나 님께 대하여 민첩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이런저런 이유와 명분을 내세우며 계 속 미적거리면서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알아차린 효과가 아무 것도 없이 그 냥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들었으면서도 못들은 척, 보았으 면서도 못 본 척, 하나님이라는 것을 감지했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 딴전 을 피우며 그렇게 살아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민감성은 눈치나 특별한 은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인 분별력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은혜로 주시는 지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과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자기가 노력하여 성취 한 정보의 양이라면,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지금은 무엇을 말해야 할 때이 고, 무엇을 말하지 않아야 할 때인가, 지금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 아야 할 때인가, 지금은 돌에 맞을지라도 일어나 말을 해야 할 때인가, 억울 해서 분통이 터질지라도 입을 다물고 골방에 들어 앉아 있어야 할 때인가를 분별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민첩성은 두둑한 베짱이나 화끈한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 다. 그것은 영적 결단력의 문제입니다. 영적 결단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에게 은혜로 주시는 용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절대 신뢰는 예를 들어,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 는 것이면 망하는 것이 잘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죽게 하시는 것이면 죽는 것이 잘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하 나님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앞뒤 계산을 맞춰볼 필요 없이 민첩하게 그것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해롭게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두 소원을 품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사람 셋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습니 다. 현장의 아브라함에게는 단지 길을 지나가는 사람 셋이 나타난 것 뿐인 데 그는 즉각 그가 하나님임을 알아보고 붙잡아 끌며 집으로 모셔들이고 은 혜를 구하는 민감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얼마나 민첩하게 움 직이고 있는가를 여섯 번에 걸쳐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달려나가”, “급히”, “속히”, “달려가서” 이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 은 어떻게 대하셨고, 어떻게 복을 주셨는가 하는 것이 창세기 18장의 남은 이야기입니다. 민첩하게 반응하는 자세 갖고 살아야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는 민감하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일에는 민첩한 이 시대의 우리 신자들과 우리의 교회들이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민감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민첩하게 되는 그것입니 다.
17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9)| 불행의 시작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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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7 2009-06-24
불행의 시작 “결국 그 사람 자신의 사람됨이 문제가 돼”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르호보 암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왕이 되자마자 두 그룹의 정치 자문단을 구성하였 습니다. 선택의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 하나는 아버지때부터 나라를 섬겨왔던 나이 많은 원로들로 구성된 자문단이 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친구들로 구성된 자문단이었습니 다. 새로 왕이 된 이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면 좋겠는지 이 두 그 룹의 자문단에게 각각 정책자문을 구하였습니다.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 어 백성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십시요. 그러면 백성들이 영영히 왕의 종 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원로들의 자문이었습니다(7절). 그러나 젊은 친구들의 자문은 달랐습니다. 더 무겁고 더 포악하고 더 심하 게 힘으로 다스리는 정책을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10절). 왕이 내심 원하 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로들의 자문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젊은이들에게 다시 자문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원로 자문단원들은 왕이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된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 고, 젊은 자문단원들은 왕이 백성들의 요구에 한번 물러서면 어디까지 밀릴 지 모르니 초반에 강하게 휘어잡아야 한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을 법도 합 니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의 자문을 택한 왕은 백성 앞에 서서 단호하게 선언을 하 였습니다.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 를 더 무겁게 하겠다.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다스렸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다스리겠다!” 이전 왕의 시대에 주어졌던 버거운 부담과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이제 가볍 게 해달라는 백성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폭군정치를 선언한 것입니다. 폭군정 치 노선을 선언하자 나라가 둘로 갈라져버렸습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 파가 똘똘 뭉쳐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독 립해버렸습니다. 이렇게 왕을 등지기로 결심하면서 백성들이 쏟아놓은 분노에 찬 저주의 말들 을 보면 왕이 폭압적 인 정치노선을 선택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 백성들이 얼 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 가 있느냐...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16절). 그들이 쏟아 붓고 있는 이 분노에 찬 저주의 말은 사실은 그들의 요청을 거 부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멸시하며 거부하는 무서운 말이었습 니다. 그리고 이 백성은 이후에 두고두고 그 책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자기들이 지금 얼마나 무서운 말을 내뱉고 있는가를 알 아차리지도 못한 채 왕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그렇게 소리 치며 각각 자기처소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새로 세워진 왕과 함께 펼쳐질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큰 기대를 가졌을 백성 들은 틀림없이 말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상처 를 새로 세워진 왕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결국 나라는 둘로 쪼개지고 말았 습니다. 그리하여 잠간 동안의 통일왕국 시대는 그렇게 끝나버리고 긴긴 분 열왕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주위에 두고 사는가,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들으며 사는가 하 는 것 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분열왕국의 시대를 연 르호보 암 왕의 문제는 단순히 자문단이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문단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원하였기 때문에 그 자문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 자신의 사람됨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인간의 보 편적인 상식으로 판단해보아도, 인간의 최소한의 도리라는 점에서 생각해보 아도, 더욱이 하나님을 아는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생각을 하면 더욱 그리해 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한 일을 서슴없이 그리고 당당하게 행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불신앙적 방자함이 불행 자초해 그리고 그가 그렇게 무모하게 왕권을 휘두를 수 있게 한 밑바닥에 둥지를 틀 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에 대한 이기적 집착과, 왕 위에 진정한 왕 이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적 방자함이었을 것입니다. 왕과 백성과 역사의 불행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7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8)| 제자와 사탄 사이_정창균 교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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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6 2009-04-29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48) 마태복음 19:15-24 제자와 사탄 사이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하나님마저도 자기 뜻대로 이용하려는 생각이 문제” 운전을 하다가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떠오르곤 하는 성경의 한 장 면이 있습니다. 어느 길바닥 위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 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일은 모든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일어났습 니다. 최고의 신앙고백을 보인 사도 베드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던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 말을 들으니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도 말하 고 저렇게도 말한다는데, 그러면 너희 자신에게는 내가 누구냐 하고 물은 것 이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마침내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 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대답에 예수님은 즉각적으 로 반응하셨습 니다. “시몬아, 네가 복을 받았구나. 네가 이것을 알게 된 것 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네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반석 위에 죽음의 세력도 이기지 못하 는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너에게 이 땅에서 맺고 풂으로서 하늘에서 도 맺고 푸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치 오래 준비되었던 선언문을 단숨에 선포하는 듯한 이러한 예수님의 반응 은,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 이 얼마나 만족하고 또 감격해하시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합니다. 그 의 고백으로 보아 이 순간 베드로는 완벽한 예수님의 제자요, 완전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을 확인하고서야 예수님은 마치 이제는 밝혀도 되겠다는 듯 이 지금까지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중요한 사실 하나를 처음으로 밝히십니 다.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다 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꼭 붙잡으며 단 호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주님, 안됩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주님께 일어나 서는 안됩니다!” 아마 제자들에게는 주님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보다는 고난을 받 고 죽는다는 말이 훨씬 분명하고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자 기 주장에 예수님께서도 다시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이 순 간 베드로는 예수님의 일에 걸림돌이 되는 “사탄”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곰곰히 생각하노라면 큰 두려움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경 험하게 되곤 합니다. 똑 같은 사람이, 똑 같은 장소에서 제자도 되고 사탄 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사건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염려하며 그것을 막아보려 하는 충정이 결과적으로는 사탄이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극단 적 변질의 한 가운데 무엇이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단정하시는 근거는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 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23절). 그리고 제자가 사 탄으로 전락하지 않고 제자로서 자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비결로 제시하 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24절). 제자가 사탄으로 전락하게 되는 근거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것이 고, 제자가 제자의 신분을 유지하는 비결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앞세 우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인 셈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자와 사탄은 존재론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 생각과 원리가 사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 을 지적함일 것입니다. 이 사건은 주님마저도 나의 판단과 요구에 따라야 되는 것으로 여기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우선적인 자리로 나아가는 순간 우리도 그리고 우리의 교 회도 언제든지 사탄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주님도 내가 하라는 것 을 해야 하고, 하나님도 내가 있으라는 곳에 있어야 하고, 주님도 우리 교회 가 판단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이 아무리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확보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에게 장애 물이 되는 사탄의 영역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가끔 생각납니다. “오늘 날 불 신자나 신자나 자기가 정해놓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 고 성공하고자 하는 데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이루고자 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그것을 이루려하는 것 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장애물이 될 수 있어 결국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과 요구의 한 가운데 언제나 자기 자신, 자기 의 이익, 자기의 생각이 자라잡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제자가 사탄으로 전락해가는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17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7)| 한국교회는 핍박 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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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8 2009-02-25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47) 출애굽기 19:4-6 한국교회는 핍박 받고 있는가?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적대감보다는 실망감에서 오는 비난이라는 사실 알아야” 한국사회 안에는 이미 반기독교운동을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펼치는 그룹들 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의 시민단체들이 교회를 개혁하겠다 고 소리를 높이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안티 기독교 세력 팽배해 그야말로 교회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능욕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닙니다. 단체들만이 아니라 개인들도 틈새만 보이면 기독교를 비방하 고, 멸시하고, 헐뜯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교회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들을 취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대하여 돌변해버린 이와 같은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많은 그리 스도인들은 한국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다고 분개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 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이러한 적대감의 근원을 살펴보면 이러한 현상을 통틀어서 핍박이라고 치부 해버리기 어렵습니다. 이 나라에서 확산되고 있는 조직적이고 과격한 반기독교적인 운동들은 다분 히 그동안 한국 기독교인들이 불신 사회에 대하여 보여준 윤리적 실패로부 터 기인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입 니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신자가 아닌 것처럼 살고, 교회들이 교회가 아닌 것처럼 처신을 해온 것에 대한 저들의 실망감의 표출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이러한 실망과 그 실망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어떤 점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이스라 엘이 다른 열국과 어떻게 본질적으로 다른가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출19:4-6). 온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열국 가운데서 도 하나님의 보물과 같은 존재요, 이스라엘이야 말로 하나님께 대한 (다른 열국을 위한)제사장 나라요, 이스라엘이야 말로 다른 열국과는 구별되는 거 룩한 나라라는 공식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본문은 얼핏보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언이지만 사실은 세상 모든 열국을 향한 공표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내 백성 이스라엘은 그 존재와 삶의 수준과 역할에 있어서 너희 열국들과 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내용을 우리 신자 들에게로 그대로 옮겨서 우리가 바로 그 이스라엘이라고 적용하였습니다(벧 전 2:9). 그러므로 열국과 불신 세상이 자기들은 태생적인 한계로 살아내는 것이 불가 능한 삶을 멋지게 살아내는 모습과 자기들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거 룩의 모습을 이스라엘에게서 그리고 신자들에게서 그리고 교회에게서 보고 싶은 기대를 갖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실망하며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에게서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기를 기대하고, 신자들이 그 기대를 충족 시켜주지 못할 때 실망하고 분노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백성은 너희들과 다르 다”고 그렇게 차별하여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여러 사찰이 아예 기도정가표를 붙여놓 고 대신 기도해주고 돈을 받 고 있습니다. 일일 기도는 만원, 일박 철야기도는 3만원, 수험생기도는 12만 원 하는 식입니다. 만약 어느 교회가 이렇게 기도 정가표를 붙여놓고 목사 가 기도를 해준다면 온 나라가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사찰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교회를 핍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는 다 그렇게 해 도 너희 기독교는 그런 수준의 종교가 되지 말아달라”는, 우리 기독교의 수 준에 대한 기대감의 발로일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핍박받고 있다기 보다는 비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난 의 근저에는 적대감보다는 우리의 신자답지 않음과 교회답지 않음에 대한 실 망감에서 오는 분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핍박하므로 우리도 순교의 각오로 뭉치고 대적하여 저들을 무찔러서 이 위기를 극복하려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해 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새롭게함의 초점은 신자답게 사는 모습, 교회답게 처 신하는 모습을 세상에게 보여주는 것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답게 사는 모습과 교회다운 처신의 핵심은 이 사회의 주류세력 이 되고 싶은 야망과 부와 번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고난과 가난에 시달리 면서도 믿는대로, 고백대로 묵묵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로서 살아가야 이 사회가 저절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때까지 그리해야 합니 다.
17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6)| 듣고 싶은 말과 해야 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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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7 2009-02-04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46) 열왕기상 22:1-39 듣고 싶은 말과 해야 되는 말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달콤한 말에 속아 아합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아”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선별적으로 듣는다고 합니 다. 즉 자기가 줄곧 생각해왔던 것을 인정해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 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합니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만 골라들어 그런데 자기 마음에 맞는 말만 골라 듣는 경향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습니 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곁에 두는 데 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다른 사람의 말을 골라서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 니라,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골라서 그 사람의 말만 듣는 데 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연유로 그 사람 곁의 사람으로 뽑힌 사람들은 자기를 뽑아준 그 사람 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를 기가막 히게 잘 파악합니다. 그래서 그 말 을 자주 해주게 됩니다. 그것이 정치인일 때는 모리배가 되고, 선지자일 때는 거짓선지자가 되는 것 입니다. 권력가는 듣고 싶은 말을 들음으로 일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고 또 모두가 자신이 맞았다고 따르고 있다는 확인에서 오는 만족과 위세를 누 립니다. 그리고 그렇게해준 이 사람들은 그 댓가로 생존을 비롯한 많은 것 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맺고 산 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단순히 개인차원에서가 아 니라 한 조직의 권력이나 국가 권력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는 그 파급 효과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숱한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입 니다. 열왕기상 마지막 장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비참한 최후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합왕은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연합군을 형성하여 아람 왕을 칠 것을 제안합니다.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지 물어볼 것을 요청합니다. 아합은 즉각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자문단을 소집하였는데, 선 지자 사백 명이 모였습니다. 아합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싸우랴, 말랴?” 사백 명의 선지자들이 즉각 대답을 합니다.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 이 왕이 듣고싶어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사불란하고 여출일구한 그들의 말이 미심쩍었는지 여호사밧은 혹시 다시 물을 만한 다른 선지자가 없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 왕은 의도적으로 자문단에서 제외시킨 한 사람이 있다며 미가야 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미가야를 자기의 자문단에서 제외시킨 이유를 밝힙니 다. “그를 통하여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 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합니다.” 말하자면 여호사밧은 자기에게 하나님이 복주실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사람을 찾는 왕이었고, 아합은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복 주실 일이라 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는 왕이었습니다. 사백 명의 선지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을 한 사람 미가야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념적으로 진보거나 좌파여서 가 아니었습니다. 왕과 얽힌 원한이 있어서도 아니었 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 그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을 했기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혀야 했습 니다. 진리를 말하는 한 사람보다 왕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아부하는 사백 명의 말 에 더 힘을 얻은 아합은 그 전쟁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고 그것이 그의 최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사백명이 이 길 것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백 명의 선지자들은 왕이 이미 전쟁을 하겠다고 결심했음을 알아차리고 그 상황에서 왕이 듣고 싶어하 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를 채고 그것을 말해준 것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자리에서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 사람 을 가까이 두려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우리는 잠깐 기분좋 자고 평생을 모리배나 거짓선지자에게 속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자리에서는 사실이야 어찌됐든 그가 듣고 싶어하 는 말을 잽싸게 알아채서 그 말을 해주어 그의 기분을 맞추어주려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잠시 이것저것 보장받으며 편하게 살자고 평 생 사람 눈치보며 비겁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r 자기 기분 맞추려는 유혹 벗어나야 아부로 기분 맞추어주는 사람을 측근에 두어 그를 높이 세우는 권력자도 아 니고, 아부를 일삼는 그 주위의 사람들도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17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5)| 불순종의 시대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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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 2009-01-14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5) 불순종의 시대 사도행전 8:26-40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빌립의 순종은 사마리아 대신 이디오피아를 얻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순종을 통하여 언약에 근거한 인격적인 관계를 확인하 시며,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진행해 나가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시 는 일이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들 생각을 초월해 어느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만큼도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 것 같다는 불만이 생기려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서운하고 야속하고 그러다가 원망 스러워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아요. 혹시 계신다 하여도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해요. 그래서 이제 교회 그만 다니려고요!" 목회하는 동안 이런 종류의 말을 가끔씩 듣곤 하였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이 아니 라, 현실에서 당하는 일을 놓고 하나님께 대하여 느끼 는 서운함과 아픔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어떤 말씀들은 받 아들이기가 참 어렵고, 어떤 요구들은 순종하고 따르기가 참 어렵습니다. 더 욱이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자기 행동 결정의 최우선의 기준으로 삶고 살아 가는 것에 익숙해 있는 이 불순종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이 마치 불을 붙인 듯 왕 성하게 확장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서의 그 놀라운 복음 확장 역사의 선두에 빌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빌 립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새로운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마 치 약도를 손에 쥐어주듯이 지명을 언급하며 사마리아를 떠나서 새로운 곳으 로 가라는 그 길은 알고 보니 광야였습니다. 복음은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런 데 불길처럼 복음이 확장되고 있는 황금어장과 같은 현장을 버리고 사람이 없는 광야로 가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이 주어진 것입 니다. 더욱이 빌립에 게 주어진 주의 명령은 가사를 향하여 가라는 방향지시만 있지 목적지가 어 디인지,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는 참으로 막연한 지 시였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일어나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27절). 이해할 수도 없고, 납 득할 수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이 명령, 전혀 현실 적이지 않아 보이는 바보스럽게 보이는 그 명령에 빌립은 순종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본문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인의 순종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의 내용의 합리성과, 타당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하시는 그분에 대한 신뢰 때문에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따라버리기로 작정을 하는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여 어리석게도 황금어장을 버리고 광야로 길을 떠난 그는 그곳에서 사 람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보니 단순히 사람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이디오피아라는 국가 하나가 거기 가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는 이디오피아라는 거대한 국가의 제 2인자였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지시를 따라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까지 주었습니다. 이 내시가 이디오피아에 돌아가서 무엇을 하였을까는 자명합니다. 이 권력자가 소위 "이디오피아 복음화"에 앞장섰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 고 이디오피아에 퍼지기 시작한 복음이 국경을 넘어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 까지 확산되어 갔을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한 일입니다. 지금도 심지어 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흑인 부족 가운데는 자기들이 크리스천 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이디도피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디오피아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디오피아에서 온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 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해놓고 보니 결국 빌립은 어리석게도 사마리아의 황금어장을 버리고 광 야 길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라는 한 동네를 놓고 아프리카라는 대륙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순종의 능력이고 순종의 결과 인 것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순종의 결과는 언제나 탁월해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 불순 n종의 시대에 주시는 말씀의 내용이 납득이 가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시 는 그 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순종해버리는 그 순종으 로 한해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17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4)| 사람을 책임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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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5 2008-12-30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4) 사람을 책임지는 일 창세기 1:26-30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행복한 성도들 많아지는 목회관 가지길" 목회는 사람을 책임지는 일입니다. 장소가 어디이든지, 규모가 얼마이든지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사람을 책임지는 일이 목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 가 된다는 것은 사람을 책임지는 일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목회란 사람을 책임지는 일 목회자는 크게는 세 가지 영역의 일로 사람을 책임지는 일을 수행합니다. 사 람을 치유하고(healing), 돌보고(caring), 세우는(building up) 일이 그것입 니다. 어떤 행사들을 멋있고 효과 있게 수행하고, 혹은 교회를 성공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목회인 것으로 알고 사는 목회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 나 목회는 근본적으로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 니다. 사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일관된 관심은 사람이었습 니다. 그것은 하나님 의 창조 사역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금방 드러나는 사실이기도 합 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먼저 지으셨 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얼마나 신경을 쓰셔서 얼마나 뛰어난 수준으로 만드 셨는지, 절대자의 기준으로 볼 때 좋을 만큼 좋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매 일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마지막 평가로 모든 창조사역 을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그냥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즉흥적으로 지으신 것 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기준을 가지고 지으셨으며, 지으신 다음에는 그 의 도대로 되었음을 확인하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 세상을 그렇게 신경을 써서, 그렇게 좋은 수준으로 만드신 근본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람을 지은 후에야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 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주노라..."(창1:28-30). 결국 사람에게 주려고 그렇게 하셨던 것 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만은 하나님과 공통된 부분이 있도록 만드셨습 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바가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하려고 하신 것 입니다(창1:26-27). 그야말로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일관된 관심은 사람에게 총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특별한 대우와 특이한 기대를 갖고 지으신 사람에게 서 받은 것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배신과 반역이었습니다. 그 렇게 특별한 대접을 받은 인간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은 뱀과 함께 공모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노리는 역적질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 이 하는 말로 하면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려차기를 해버린 것입니 다. 사실 역사상 최초의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습니 다. 하나님은 그 상처를 자신이 그렇게 각별한 관심과 큰 사랑을 쏟아 부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하신 일은 숨어 버린 사람을 찾아내어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그 인간을 죽음에서 건져낼 여자의 후손을 준비하는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자의 후손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반역자 인간을 구원 하시려는 역사를 지금도 진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의 첫 순간부터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은 그 관심을 얼마나 사람에게 집중하고 계시는가 하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목회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불림 받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 다. 하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그분이 직접 하실 일을 하는 것이 목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목회는 하나님이 직접 하셨더라면 품으셨을 그 마음과 그 원리로 하는 것입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마음과 원리는 모든 관심을 일이 아니라 사람에 게 맞추는 것이고, 그러므로 결국 우리의 목회도 그 본질이 사람을 책임지 는 일인 것입니다. 사람을 치유하고, 돌보고, 세우는 것입니다. 특정한 일이 나 사업의 성공적인 성취를 위하여 사람을 써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책임 지기 위하여 이런저런 모양으로 여러 일들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과 목적으로 여기는 것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 니다. 목회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인 교회 관이 현대의 기업관에 의하여 대체되고, 교인관은 고객관으로 바뀌고, 교회 리더십은 최고경영자(CEO) 리더십으로 바뀌고, 예배는 공연문 화로 바뀌어가면서 알게 모르게 교회론의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시대는 어쩌면 목회자들에 의한 또 하나의 하나님 을 향한 반역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창조의 첫 순간부터 그리하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 와 목회현장의 최대의 관심이 사람을 책임지는 일에 모아지는 참된 목회의 회복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목회관 회복 기대해 그리하여 치유되고 돌봄을 받고, 세움을 입은 우리의 교인들이 그 교회의 교 인인 것을 행복해 하고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을 만족하고 자 랑스러워하는 모습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17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3)|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사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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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5 2008-12-11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43)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사람 다니엘 5:18-28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역사의 교훈 망각하는 것은 멸망 초래할 뿐”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다른 사람이 당하는 상황을 마치 내가 당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내가 한 경험과 똑같이 공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타인의 경험 공유할 수 있어 아픔으로 고통 당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아픈 것처럼 그 아픔 을 공유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들을 내게 직접 한 말인 것처 럼 알아듣고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만이 가지고 있는 참으로 위대한 능력이기도 하고 지혜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직접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그것을 느끼고 내가 당사자인 것처럼 교훈을 얻어서 유익을 누릴 수 있는 능력과 지 혜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뛰어난 은혜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과거의 역사에서 오늘의 처신을 위한 원리와 모범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능력과 지혜를 따라 사는 것은 아니라는 데 우리의 불행이 있기도 합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이 말은 긍정적인 뜻보다는 부정적인 함축을 담아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니 시간이 흐르면 좋아질 것이라는 소망이 아니라 시 간이 흐르면 또 다시 나빠지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결국 그것이 그것이라는 절망 섞인 의미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망한 사람의 역사를 보았으면서도 자신도 다시 그렇게 하고, 저러한 방식으로 살아서 성공한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러한 방식으 로 살지 않는 것이 이러한 부정적인 역사 순환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역사 에서 배우지 않는 우매함이 문제인 것입니다. 벨사살은 본문대로만 하면 느브가넷살의 아들이요 그의 왕위를 이어받은 바 벨론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천여 명이나 되는 귀인들을 어전으로 불 어모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선왕 느부갓네살 때 예 루살렘 성전에서 탈취 해왔던 금과 은으로 된 모든 기명들을 가져다가 거기에 술을 따라 마시며 자 기들이 섬기는 신들을 향해서 만세를 부르고 열광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그 렇게 여호와를 한없이 능멸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했습니다. 열광하며 술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몸체는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나타나서 움직이더니 왕의 촛대 있는 맞은편 벽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 무슨 뜻인지 아무도 읽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 고 해독할 수도 없습니다. 파티는 중단되고 왕은 사색이 됐습니다. 그렇게 열광하며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게 만세를 부르며 찬양하던 무리가 죽은 듯이 조용해 졌습니다. 결국 다니엘이 왕 앞에 불려왔습니다. 글자 해독을 명령받은 다니엘은 글자 를 해독하는 대신 벨사살의 선대에 일어났었던 역사에 대한 긴 강의로 말을 시작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얼마나 방자하게 살다가 어떻게 끔찍하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었던가를 그 사건을 낱낱이 들추어내며 벨사살에게 확인을 시 켰습니다. 사실 그 내용은 벨사살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 서 다니엘은 벨사살의 결정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하였 습니다. “벨사살이여 왕은 느부갓네살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 였습니다.” 다니엘의 지적을 풀어서 말하자면 대충 이러한 말입니다. 벨사살 왕 당신은 당신의 부친 느브가넷살 왕에게 하나님이 모든 권세를 주 셨지만 그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인생의 뜻을 주관하시 는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제가 주인인 것처럼 그렇게 방자하게 행 하다가 어떻게 내쫓겨서 짐승처럼 비참하게 살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현장을 보았고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것 으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오히려 느브갓네살 이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도리어 마음을 낮추지 않고 스스 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했습니다.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그 영광을 횡령했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하나 님의 이 영광을 착 복했습니다. 당신의 더 결정적이고 흉악한 죄는 당신처럼 사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현장에서 보아놓고도 당신은 그 길로 간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끝났습니다. 당신의 나라도 끝났고 당신의 인생 도 끝났습니다. 벽에 쓰였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말은 인생을 이렇게 살아버 린 벨사살에게 그의 나라는 이제 끝났고, 그의 인생도 이제 끝났다는 하나님 의 심판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했습니 다. 그리고 끝났습니다. 이것이 벨사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선대의 역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삶을 산 것입니다. 역사를 알고서도 개선 없는 것이 문제 더욱 두려운 것은 우리가 때때로 서슴없이 벨사살의 후예들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이고, 우리는 그렇게 현대판 벨사살의 후예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16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2)| 하나님의 영광은목적인가 수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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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5 2008-11-20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42) 고린도전서 10:31-33 하나님의 영광은목적인가 수단인가?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미국에서 여론 조사를 해보니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 국민들에게 가 장 존경받는 대통령은 링컨 대통령이고, 최악의 대통령은 현재의 부시 대통 령이라고 합니다. 존경받는 링컨과 최악의 부시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같은 점은 ‘둘 다 기독교인’이라는 점이고, 다른 점 은 링컨은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기를 기도”했고, 부시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기를 기도”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부시 대통령의 행태가 못마땅한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러 나 “신앙”이라는 똑 같은 포장 안에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 내용이 담길 수 있는가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입에 올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부르짖는가에 있지 않습니 다. 우리의 신앙적 인 멋진 구호와 비장한 각오가 곧 우리의 신앙이 그러함을 드러내주는 것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착각이기도 하고 매우 무지한 오해이기도 합니다. 말을 신앙적으로 멋있게 하는 것과 실제로 신앙적으로 멋있게 사는 것과는 얼마든지 동과 서처럼 서로 각각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식으로도 알고 경험으로도 압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멋진 신앙적 구호와 헌신적인 비장한 각오를 표명하는 의도가 사실은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계산된 전략에서 나온 수사학으 로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도 우리는 현장에서의 숱한 경험을 통하여 확 인해오고 있습니다. 부시를 가리켜 “하나님이 내 편이기를 기도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조사 해 보니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가장 존경하지 않더라는 부시에 대한 빈정댐 의 진정한 속셈은 사실은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 하여 하나님을 써먹으려는 원리로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부시형 신앙인” 을 향한 비웃음과 도전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 할수록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 이 비웃음거리 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교회의 유익을 위 한다는 말을 입에 올릴수록 오히려 교회가 곤경에 빠지고 손상을 당하게 되 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신앙적 태도의 어떤 점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정치 적 손해를 감수한 결단에서 나온 순교자적 신앙고백이라고는 아무도 받아들 이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을 신경 써야 하는 다른 상황에서 그들이 취하는 행동이나 발 언을 보면 그가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그렇게 단호하고 수준 높은 신 앙인의 안목을 드러내는 발언을 한 것이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럴 바에는 정치 마당에서는 그냥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을 공표 할 필요 없이 정치에 열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흔 들림 없는 신앙인의 모습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정치적 이해득실을 계산할 필요가 없는 다양한 개인적인 활동영역에서 진솔하게 드러나게 했으 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여러 말을 길게 진 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의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 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0절).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는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리 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밥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반드시 주여 삼창을 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팔을 뻗고 외친 후 마시라는 말씀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일상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삶을 살라는 말씀 일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부여의 기준을 하나님의 영광과의 관련성 을 앞세우는데 두고 일상을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너의 먹는 것과 마실 것과 잇속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써먹지 말고 그 반대로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 는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혹은 교회에 거침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유 익을 끼치고, 그리하여 결국 다른 사람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을 알게 되 고,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씀인 것입니다(32-33 절).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어서야 “신자나 불신자나 삶의 목적도 추구하는 바도 똑 같은데 다만 세상은 세상 의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그것을 이 루고자 하는 것이 다를 뿐”이라며 오늘 날 신자들의 잘못된 신앙행태를 안 타까워하시던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아픔으로 떠오릅니다.
16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1)| 설교의 시대는 지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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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1 2008-10-22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41) 예레미야 20:9 설교의 시대는 지났는가? “설교자는 기획자나 연예인처럼 되지 말아야”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한 시대가 암흑기에 접어들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잠든 교회가 있고, 잠 든 교회가 있는 곳에는 잠든 교인들이 있고, 잠든 교인들이 있는 곳에는 반 드시 잠든 강단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 조하기 위하여 한 말일 것입니다. 잠든 교인 뒤에는 잠든 강단 있어 오늘 날 목회자들도 그렇게 설교의 중요성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 잘 모 르겠습니다.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약해져서이기도 하고, 시대의 변 화로 말미암아 목회자가 수행해야 할 사역의 영역이 다양화되기도 해서인지 목회자들이 설교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 다. 아마도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목회자가 설교에 전력을 투구하는 것은 물리 적으로 불가능하 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오늘 날 목회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온갖 사역들 그리고 교회의 서비스들을 보고 만약 그것들이 목회 라면 목회자가 반드시 목사일 필요는 없다며 빈정대듯 말하기도 하였습니 다. 설교를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면서 설교의 우선순위를 내려놓는 목회자들 이 흔히 하는 말은 설교만으로는 목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가 목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목회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설교가 목회의 전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관건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목회란 설교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도 사실이지만 설교의 성공 없이는 아 무 것의 성공도 불가능하다는 말도 사실입니다. 설교의 성공 없는 제자훈련 의 성공이란 허구라는 것은 제자훈련의 전문가들이 공공연히 인정하는 사실 이기도 합니다. 설교의 성공 없는 교인 사역훈련 프로그램은 장기적으로는 결국 지치고 곤고한 교인들을 만들어내고야 만다는 것도 현장에서는 다 아 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설교에 전력을 투구하지 않으면서 "설교로는 안 된다"는 변명을 내 세우며 다른 데로 눈 을 돌리는 것은 책임 회피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설교 는 나름대로 잘 하는 편인데..." 하면서 자신이 당연히 설교를 잘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것을 설교로는 안 된다는 증거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 은 교만이기도 합니다. 어떤 설교자들의 말처럼 "요즘 교인들은 설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 유로 내세우며 설교에 진력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교인들 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함이기도 합니다. 교인들은 설교에 식상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 같은데 설교가 아닌 것 에 대해서 식상해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교인들의 마음 한 복판에는 설교 를 듣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 게 될수록 그 소원은 더욱 확고해집니다. 아직도 많은 교인들에게 있어서 교회에 간다는 것은 설교 들으러 간다는 것 과 같은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모 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 하듯이(롬 8:19),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설교자들이 나타나기를 고대 합니다. 그러므로 설 교를 KBS의 "개그 콘서트"나 SBS의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 들)"에 보내도 손색이 없을 우스갯소리로 시종일관하거나, 설교자 본인 외에 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사변으로 채우는 것도 설교를 설교 아 닌 것으로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해석이 없이 청중을 휘어잡는 잘 전달된 설교는 감언이설이 되기 쉽 고, 전달이 안 되는 심오한 깊이가 있는 본문해석은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최고 경영자 같은 목회자는 점점 많아지고, 연예인 같은 목 회자도 많고, 이벤트 기획자 같은 목회자도 많으나 말씀에 목숨을 건 목회자 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 이다"는 구약 선지자의 가슴이 미어지는 호소나, "너는 말씀을 전파(설교)하 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신약 사도의 준엄한 경고에 우리 는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목숨걸고 하나님 말씀 힘써 전해야 예나 지금이나 여 전히 목회자에게는 결국은 설교가 문제라는 사실을 명심하 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때 교인들은 에스겔 골짜기의 마 른 뼈다귀 더미에서라도 일어나 군대가 될 수 있습니다.
16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0)| 헛 살아버린 인생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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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4 2008-10-01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0) 누가복음 12:15-21 헛 살아버린 인생 정창균 목사_합신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인생을 헛살아 버린 한 사람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 농부가 있었습니 다.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해는 그 사람이 사는 지역에 큰 풍년 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큰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풍요가 인생 성공의 척도일 수 없어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둔 수확을 쌓아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있는 창고를 모두 가득 채워도 곡식이 남아돌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물건 을 새로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물건들을 놓아 둘 곳이 없었습니다. 이 많 은 곡식을 어디다 보관하면 좋단 말인가? 이 많은 물건을 어디다 둘 것인 가? 여러 날 깊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던가? 창고 를 다 허물어 버리고 더 많이 더 크게 짓고 거기다 넣으면 될 것 아닌가! 그 래서 그 사람은 그렇 게 했습니다. 큰 공사를 일으켰습니다. 창고를 다 허물 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크게, 더 많이 창고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곡식과 새로운 물건들을 다 새로 지은 창고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이 부자가 뒷짐을 지고 창고들을 하나씩 둘러봅니 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 차고, 새로운 물건들이 거기에 넘쳤습니다. 흐뭇 해진 부자는 이제 인생이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이제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아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흉년이 들 어도 나는 끄떡없다. 가뭄이여 올 테면 오고 흉년이여 올 테면 오라. 나는 이제 몇 년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걱정 없다.” 그리고 이야기 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부터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인 생을 한번 즐겨보자꾸나.” 그런데 이 모습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는 이 말을 하 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이 밤 에(This very night), 오늘 이 밤에 네 생명을 도로 찾아 갈 것이니 그러면 너의 그 재산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 시 로 그 사 람은 죽었습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들 동화책에 나오는 전래 동화도 아닙 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 입으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또 비유로 다시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그 소출이 풍성하매 심 중에 고민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다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내 모 든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말하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러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이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 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다음 날 아마 이 부자가 간밤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창고를 짓고 그렇게 움켜 쥐고 그렇게 악착같이 끌어 모으며 살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구먼” 하고 혀 를 찼을 것입니다. 그중에 혹시 어떤 사람, 이 사람에게 설움이라도 당한 사람은 아마 “잘 죽 었네! ” 하며 그의 죽음을 통쾌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 은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 남기고 간 유산이 얼마 나 된데요?” 물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쌀 한 톨 가지고 가지 않았 고, 헝겊 한 조각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재산 모두를 그대로 놓고 갔습니다. 제가 만약 그 장례식을 따라 갔다면 제가 이 사람을 위해서 장송 곡으로 노래를 하나 불러주고 싶습니다. “아 바보처럼 살았군요. 아 바보처 럼 살았군요 아 바보처럼 살았군요.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이 사람은 인생을 바보처럼 산 사람 이었습니다. 아니 인생을 헛 살아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고 그 생명 을 빼앗겨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그 자랑스러운 소유가 어디로부터 왔 을까를 곰곰히 생각하는 지혜를 가졌더라면, 그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텐데... 다른 사람은 없는 것을 나는 가지고 있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조금만 고민 하는 지혜를 가졌더라면, 창고 짓느라 그 고생할 필요 없이 많은 다른 사람 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재산과 건강만 있으면 내가 얼마든지 내 생명의 주인일 수 있는가를 묻는 지혜를 가졌더라면 그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 었을 텐데... 그리하여 그는 그렇게 인생을 헛살아버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 데... 결국 그의 어리석음의 핵심은 하나님과 관련지어 자신의 인생을 보지 않은 것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무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의미 찾아야 그런데 인생을 헛 살아버린 이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천 년 후 의 우리가 움찔해지는 것은 아마 우리도 자주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기 때문 일 것입니다.
16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9)| 광풍 속에서 만난 주님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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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1 2008-08-13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39) 마가복음 4:35-41 광풍 속에서 만난 주님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언제라도 필요 따라 해결 받으려는 생각 버려야”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있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그렇게 말할 때 우리는 내심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 높아 집안에 에어컨이 있어서 아무리 더워도 스위치만 누르면 금방 찬바람이 나옵 니다. 그래서 시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필요하면 언 제라도 가서 스위치만 누르면 거기 그렇게 있다가 내 필요를 채워주는 에어 컨이라고 하는 것은 참 좋은 것이고 편리한 것이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예수님에 대해서도 에어컨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 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므로 나는 더울 일이 없어야 되고, 괴로울 일이 없어야 되고, 언제든지 그분 때문에 나의 문제가 척척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라도 찾아가 버튼을 누르면 되는 에어컨과 같은 편의품으로 예 수님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 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 길에 괴로움 이 닥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에 대하여 의심을 하기 시작합 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 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를 보호해 주시고, 형통케 하시고, 안전하게 하시기 위해 서 나와 함께 계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라도 버튼만 누르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런 용품으로 우리와 함 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나타 내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아가도록 자신 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려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님 의 참모습을 알고 그분과 더 깊고 차원 높은 인 격적 관계를 맺도록 하시려 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가 당하는 어 려움을 물리쳐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우리가 안 당해도 괜찮을 어려움을 일부러 당하게도 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목적은 우리 가 어려움을 당하는가 평탄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 을 제대로 알아갈 것인가, 그래서 더 깊은 관계의 경지로 들어가게 할 것인 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와 함께 있기 때문에 형통하게 될 것인 가에 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광풍을 동원해서라도 이 친구가 나의 이런 모습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관심의 차이 때문에 때로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 다. 때로는 우리에게 불평이 생기기도 하고, 예수님을 향한 원망이 생기기 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내게 불편한 어떤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것은 믿음의 극히 초보적인 단계이고, 그것 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깊은 경지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거침이 되는 것입 r 니다. 하루의 사역이 끝나자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는 예수님의 제안을 따라 제자들 은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저무는 바다를 떠났습니다(36절). 그 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절의 기록은 그 배에 광풍이 불어닥쳐서 모두가 생명의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입니다(37절). 틀림없이 마가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므 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순탄하고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 못이라는 것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떠난 길인데도 그 자리에서 제자들 은 생명을 위협하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혼쭐 이 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황당하다는 듯이 “이러실 수 있냐”며 분 노 어린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풍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눈이 다시 번쩍 뜨였습니 다.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놀라운 예수님의 모습을 광풍 속에서 드디어 알 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편에서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41절)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 생님이신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도 그의 말씀에 순종 해야 하는 메시아이심을 이렇게 해서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광풍 속에서 만난 주님이었습니다.
16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8)| 혼돈의 시대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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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5 2008-07-23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38) 예레미야 17:9-10 혼돈의 시대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신뢰 지키는 것은 이기심 성취보다 앞서야” 법이 이불 속까지 들어와서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며 현직 판사가 간통죄를 놓고 헌법소원을 냈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간통을 죄라고 한 현행 법은 헌법 위배라는 것이 그 사람의 주장이었습니다. 질서보다 개인 자유 우선하는 시대 며칠 있다가 간통죄는 정당한가를 주제로 밤늦게 벌어진 TV 토론에서 거침없 는 말재주로 열변을 토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개인위주의 삶으 로 나아가는 것은 현대사회의 추세이고, 현대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가 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단순히 가정의 일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명 분을 내세워 간통죄라는 수단으로 그 사랑을 억압하고, 그 사랑을 누리지 못 하도록 여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 는 것이 대충의 논 리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냥 단순하게 그 여인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당 신의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그 짓을 하고 다녀도 그렇게 여유 있고, 그렇게 철학적인 냉정한 논리로 포용할 수 있겠느냐고. 당신의 며느리가 당신의 아들이 아닌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해도 “그것은 너 의 권리니까 잘했다!” 할 수 있고, 당신의 딸이 당신의 사위가 아닌 다른 남자와 은밀히 몸을 섞으며 지내도 “현대사회의 흐름을 따라 사는 자랑스러 운 내 딸”이라고 할거냐고. 당신의 배우자가 그래서는 안되고, 당신의 며느리가 그러는 것은 견디기 힘 들 거고, 당신의 딸이 그러는 것은 용납 못할 것이면 다른 사람도 그렇지 않 겠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20년도 더 오래 전에 우리 모두의 정신적 지주로서 존경을 받 으시던 연로한 교수님께서 강의실에서 수시로 하셨던 성경 말씀이 한 구절 떠올랐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마음이라. 누 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누가 보아도 이 말씀 은 인간 자체가 얼마나 거짓되고 부패한 존재인가를 정 직하게 인정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실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 다는 경고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존재임을 의식하고 두려움으 로 하루하루의 삶을 살라는 요구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 의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삶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법이 이불 속까지 들어와서 간섭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는 그 판사에게 하나님의 법은 이불 속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까지 간 섭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지키는 것은 한 사람의 탈선한 이기 심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란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그 판사나, 그 여인이 내세운 것과 같은 논리를 내 세우며 인생을 살아가려는 사람이 드문 것도 아니고 그러한 원리가 주장되 는 것이 유독 그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태도는 어 쩌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화되어 있고, 그러한 삶의 원리는 이 시대의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할 만큼 강력하기도 합니다.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편의주의라는 이름으로,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다 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자기 만족 최우선이라는 명목으로 거의 모든 사 람을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이 초래하는 현상은 ‘혼돈’입니다. 각각 제 소견에 옳은 것이 최고의 삶의 기준이 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삶의 원리가 되는 혼돈인 것입니다. 결국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 는 무엇을 절대 기준과 최우선의 원리로 삼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혼돈은 가치관 상실이 가져온 결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 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어쩌면 이러한 혼돈의 시대를 살아야 할 우리 를 내다보며 하신 긴박한 경고일 것입니다.
16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7)| 엄중한 명령과 간곡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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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5 2008-07-02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37) 디모데후서 4:1-5 엄중한 명령과 간곡한 부탁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금기시되는 주제라도 과감히 설교해야”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들어야 하는 메시지는 사랑과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이며, 그러므로 그들을 더 피곤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설 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 팽배합니다. 설교에 제한된 영역 없어 그리하여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나 지옥에 대한 설교, 헌신을 도전하는 설교 등은 교인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금기시 되고 있습니 다. 이 시대는 절대권위를 절대 거부하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본질로 하는 시 대라는 인식을 근거로 가능하면 권위를 전제로 하는 메시지는 삼가야 한다 는 주장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높고 거룩하시며 초월적이고 심 판하시는 엄위하신 하나님보다는 우리의 친구와 같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내 곁에 계시는 이웃 같 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 다. 물론 교인들은 강단으로부터 위로와 소망과 격려와 복된 메시지를 들어야 합 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 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대한 말씀과, 헌신을 도전하는 말씀 과, 죄와 회개에 대한 말씀과, 하나님을 두려우신 거룩한 하나님으로 선포하 는 말씀들이 그 자체로 그들에게 부담이 되거나 부담을 주는 것도 아님을 알 아야 합니다. 교인들은 지옥을 말하는 설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설교를 지옥같 이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헌신을 메시지로 하는 설교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이 아닙니다. 헌신설교를 강도 만나 강탈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설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설교를 협박과 공갈을 당하는 것처럼 위협적으로 쏟아내는 설교를 싫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깊이 깨닫고 그분 앞에 서 통곡하며 회개할 때 비로소 가슴 깊은 곳,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 오는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깊은 평안 과 담대함을 드디어 경험하게 되는 것 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의하여도 자주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양심은 죄의식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죄와 회개의 메시지는 감추어버리고, 용서의 하나님이 계 시니 괜찮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니 담대하라고 외쳐대는 설교가 주는 것은 위장된 거짓 평화일 뿐이라는 사실 을 정직한 교인들은 머지않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초월성과 거룩성을 강조하거나,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설교하면 현대 교인들에게는 부담이 되고 저들의 꺼 림을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 시는 분,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위로의 하나님으로만 설교하 여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안심시키는 데에 주력하려는 것은 자기 스스 로 속는 어리석은 시도일 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왜곡과 실용주의에의 편승 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는 말은 “말 씀을 선포하라”(Preach the Word)는 한 마디였습니다(2절). 이것은 하나님 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분의 재림과 그의 나라를 내세운 엄중한 명령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6 절)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놓는 마지막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 사도가 그렇게 엄중한 명령과 간곡한 부탁으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 세대가 말씀 듣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습니다(3 절). 이 세대가 부담스러워하고, 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말씀을 설교하 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논리를 사도는 펴고 있는 것입 니다. 감성만 자극하는 설교가 문제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는 성공적인 설교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금기시되어 있는 여러 주제들을 과감하게 설교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16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6)| 혼자 살 수 없는 세상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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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1 2008-06-18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36) 히브리서 10:24-25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서로 협력하고 격려하는 기회 잃지 말아야”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환갑을 오래 전에 넘기고 60대 후반을 향하여 가고 있는 분을 잠시 알고 지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살게 되어 있지 않아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하여 회한도 없고,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대하 여 기죽을 일도 없이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가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래 에 대하여도 분명한 계획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저와 교제가 깊어지면서 어느 날인가 지나가는 말처럼 제게 한 마디를 하였습니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사람은 혼 자 살도록 지어진 것이 아니예요. 나는 그것을 너무나 늦게 알았어요! 내가 인생에 대하여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그 젊은 시절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도 절대로 평 생을 혼자 사는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십 년도 더 연하인 내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그분의 말 씀을 들으며 나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헤어지면서 제가 한 마디 하였습 니다. “혹시 제가 더 오래 남아있게 되고, 선생님께서 저보다 먼저 천국에 가시게 되면, 제가 뒤치다꺼리는 다 해드릴께요.” 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가슴이 뜨끔하였습니다. 그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위험한 말을 경솔하게 쏟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러나 뜻 밖에도 저의 그 말에 그 분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으로 걱정하지 말고 사세요. 저희 부부가 평생 친구가 되어드릴께요.” 저의 따뜻한 한 마디가 그분에게는 십 수 년 동안 해온 기도의 응답이었다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당당하였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혼자 사는 삶 이 가져다주는 왠지 모를 외로움이 벌써 오래 전부터 둥지를 틀고 있었던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어른의 말씀처럼 사람은 혼자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혼자”라는 말이 단지 혈육이나 가정이 없이 혈 혈단신으로 사는 것만을 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친구도 많고, 가족도 많고, 교인도 많 지만 마치 혼자인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다른 사람과의 관 계를 차단하고 혼자서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본인이 원하는 것은 아닌데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혼자이도록 버려두는 바람 에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사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동질감도 없이 마냥 자기 자신 만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지어지지 않은 것입 니다. 남편이 남처럼 느껴지는 외로운 아내들이 있고, 아내가 생전 처음 만 나는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남편들이 있다 합니다. 같은 집안에 살면서도 부모는 부모대로 세상에 자기 혼자인 것 같아서 외롭 고, 자식은 자식대로 버림받은 것 같아서 삶이 서럽고 힘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 합니다. 그 오랜 세월을 한 교회에서 지내면서도 줄 것도 없고 받을 것 도 없이 너는 너 살고 나는 나 살고, 네 것 너 먹고 내 것 나 먹는 식으로 제각각 혼자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 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결국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을 혼자 살려고 하지말고 함께 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짧은 문장을 온통 “서로 돌아 봄”, “격려함”, “함께 모임”, “(서로)권함” 같이 서로의 관계를 중요 하게 다루는 말들도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앞부분은 다른 지체의 필요를 알아보는 사랑과 그것을 채워주는 행동 을 격려함으로 서로를 돌아보라는 말씀이요, 뒷부분은 서로 협력하고 위로하 고 격려를 주고받는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것 을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그 날” 곧 주님이 오실 그날이 점점 가까워오 고 있음을 알고 사는 이 시대의 우리 신자들에게는 이 말씀이야말로 가장 절 실한 권면일 것입니다. 혼자 살려하는 것은 불신앙과 같아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을 혼자 살려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약속을 붙잡고(23 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25절) 우리 신자들에게는 단순히 외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불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16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5)| 제 잘난 맛으로 살다 망한 왕_정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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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7 2008-05-28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35) 이사야 39:1-7 제 잘난 맛으로 살다 망한 왕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빠뜨린 게 문제” 히스기야 왕은 지도력으로나 신앙으로나 매우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사람이요,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는 자”요, “그의 전후 어떤 왕도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인정을 받을 만큼 신앙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왕하 18:3-5). 출중한 칭찬 받던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광야의 불 뱀 사건이래 오랜 세월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으로 섬겨왔던 놋 뱀을 다만 놋 조각일 뿐이라며 때려부수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종교개혁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뛰어난 은혜 체 험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물 다섯에 왕이 되어 십 수 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 나이 40도 안된 한창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 선지자를 보내어 집안에 유언을 하고 죽을 준비를 하라고 하실 정도로 그 의 죽음은 확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보시고 그가 죽 지 않게 하셨습니다.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물러가게 하는 기적을 보증으 로 제시하시면서 까지 15년을 더 살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렇게 놀라운 은혜체험을 한 것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큰 은혜를 히스기야에 게 베푸신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다시 기사회생한 이 사건이 얼마나 놀랍 고 특이한 일이었는지 이 소문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마침내 바 벨론 왕에게도 이 소문이 들렸고, 이 소문을 들은 바벨론 왕은 축하의 글과 함께 선물을 준비하여 축하사절단을 히스기야에게 보내왔습니다(39:1절). 당대 최강국의 왕이 친히 사절단을 보내온 이 사실이 히스기야를 얼마나 기 쁘게 하였을 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히스기야는 기쁨에 차서 사절단을 대 접하였습니다. 그들을 이리저 리 안내하며 자랑이 될 만한 모든 것을 보여주 었습니다. 궁중의 보물들, 무기고, 보물창고, 궁중의 소유와 전국의 모든 소 유를 다 보여주었습니다(2절). 사절단이 떠나자마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대뜸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왔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이 어디서 온 사 람들이며, 그들이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바벨론 왕이 그 멀리 서 나한테 보낸 사람들이었지요!” 선지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들이 왕의 궁전에 와서 무엇을 보았습니 까?” 왕이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다 보았지요! 보일만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여주었지요, 뭐!” 감격에 차서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히스기야 왕의 면전에 대고 선지자는 하나 님께로부터 받은 무서운 저주의 말을 쏟아놓았습니다. “당신이 자랑스러워 하는 그 모든 소유는 바벨론에게 다 빼앗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손 가운데 일부는 바벨론 왕의 환관이 될 것입니다!”(3-7절). 그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인생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곤두박질을 칠 수 있는 것일까요? 히스기야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의 축하 사절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다 만 한 가지, 하나님만을 빼고. 그것이 히스기야의 치명적인 잘 못이었습니 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아도 하나님만은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 보 여주면서 하나님만을 뺀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 으면서도 끝까지 자기 잘난 맛으로 살다가 망해버린 것입니다. 큰 교회를 이루었다는 것을 내세워 나처럼 하면 된다는 식으로, 혹은 나처 럼 하지 않으니까 목회가 안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모든 면에서 자신의 말 이 바로 목회와 교회의 원리가 되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어떤 교인들과 지도자들을 보면서, 혹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곳저곳에 이런저런 거짓 말을 흘리며 다니는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히스기야를 떠올 리게 됩니다. 히스기야 증후군 벗어나야 그리고 제 자신도 “제 잘난 맛으로 살다 망한” 히스기야 증후군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위험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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