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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5)


데살로니가전서 2:7-12

목자가 되고 아비가 되어

정창균 목사/합신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나로 하여금 우리 교인들에게 목자가 되고 아비가 되게 하소서. 목자의 마
음을 주시고, 아비의 마음을 주소서.”

아비의 마음으로 목회하기를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 동안 새벽마다 그리
고 틈만 나면 처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애원한 저의 기도였습니다. 걸핏하면
교인들에게 서운한 생각이 들고, 교인들이 야속하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들
고,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도 혈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고, 목
회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 목회를 그만두고 쉬고 싶다는 생각에 사
로잡혀서 허우적대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하고 부터였
습니다.
목회자라 할 수 없을 만큼 몹쓸 모습으로 변절해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는 이런 목사에게 기만당하고 있는 우리 교인들이 한없이 불쌍하다
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자신이 더없이 비참하고 서러워서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시작한 기도였습니다.
끝까지 그 모습 그대로 갈 것이라면 차라리 골목 한귀퉁이에 포장마차 차려
놓고 야식 우동을 팔든지, 아니면 들판에 나가서 쑥이라도 캐다가 노상에 펼
쳐놓고 팔면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수백 년 전 어떤 성
자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라며 차원 높은 기도를 했다는
데 저는 아직도 제 자신의 문제로 낑낑대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여
이제는 어떤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요 적지 않은 교회들이 앓고 있는 가슴
앓이의 원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요즘 이 나라 교회의 심각한 문제들 가
운데 하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리고 더 많은 목회 지망생들이 목자가 되고
아비가 되려하기 보다는 사장이 되고 최고 경영자가 되려하는데 있습니다.
헌신된 사역자가 되려하기 보다는 화려한 영웅이 되려는 데 온통 정신이 팔
려있는 데 심
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를 최고 경영자로 부추기고, 성공
한 영웅으로 안내하는 책들이 불티난 듯이 팔리고 금방 베스트셀러의 자리
에 올라갑니다. 그러다 보니 명칭은 목자인데 하고 있는 일은 전혀 목자가
아닌 현상들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려 깊지 못하게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꺼내서 목회자들을 매도하거나 스스
로 누워서 챔뱉자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고민을 함께 해보자는 충정일 따
름입니다. 교인들에게는 그들의 신음 소리와 노래 소리를 민감하게 구별하
고 그들의 필요를 미리미리 감지하여 살길로 인도해나가는 목자가 필요합니
다.
그들을 위험에서 건지는 일에 내 목이라도 기꺼이 내놓는 목자, 속 썩이고
딴 길로 가려고 기를 쓴 양이라도 기꺼이 품에 안고 기뻐하며 돌아오는 목
자, 그런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끝없이 사랑하되 무조건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아부하지 않고, 책망할 때와 권면할 때와 위로할 때를 분별하여 그들
의 유익을 위하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 아비가 교인
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실 교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목자처럼 아비처럼 신뢰
하며 따
를 수 있는 목회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되고 아비가 될 책임
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은 어떻게 그들을 목회하
였는가를 밝히고 있는 대목을 곰곰 살펴보면 참으로 큰 도전이 됩니다. 유모
의 심정으로 그들을 대하여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즐거움으로 내놓
는 사랑을 품고 목회를 하였다고 합니다(7-8절).
그 교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수고하고 애썼쓰며(9절) 교인들은 물론 심지어 하나님을 증인삼아 자신 있
게 말 할 수 있을 만큼 사도 자신이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내려
고 힘을 썼으며(10절) 아비의 분별과 절제를 갖고 때로는 권면으로,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책망으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11절).
그리고 사도는 말미에 자신이 그렇게 목회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를 암시하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교인관’입니
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와 자기의 영광을 그들에게 주시려고 그리
고 하나님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값이 나가는 삶을 살
게 하시려고 하나님께
서 친히 부르신 사람들이라는 눈으로 교인을 바라본 것입니다(12절). 결국
사도의 그러한 목회의 원동력은 그의 타고난 성품이나 성숙한 인격이 아니
라 그의 교인관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교인은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들

교인을 마치 고객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래의 많은 목회
전략들은 어쩌면 우리를 목회자가 아닌 것으로 끌고 가는 가장 큰 함정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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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4)| 따뜻한 마음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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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9 2008-05-07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34) 히브리서 13:16-17 따뜻한 마음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목사는 돌을 집어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해야 된다!” 목사 가 되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그 길을 말리며 하신 말씀이라며 어느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주 오래 전에 강원도에서 전심을 쏟아 목회하다가 어느 날 젊은 목사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쌀 한 바가지 배 려도 받지 못한 채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그 교회를 떠나야 했던 사모님이 었습니다. 목회자의 길, 쉽지 않아 “목사는 돌을 집어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해야 되는 것이라며 우리 어머니가 목사 되는 것을 말리시더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컥 하며 목이 메었습니다. 목사는 위장이 튼튼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길바닥 의 돌 밖에 집어먹을 것이 없을 만큼 어려운 생활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이 가슴에 사무쳐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 세상 떠나자 대책도 없이 교회를 떠날 그 때 초등학생이었던 그 아들 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대를 이어 그런 길을 가겠다 하니 이 어머니 의 심정이 얼마나 어렵고 착잡했을지 저는 금방 실감이 났습니다. 당신이 목 회의 길에서 당했던 그 서러움과 그 매정함을, 이제는 아들이 또 그 길을 가 며 당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아들이 많이 안쓰러웠을 것입 니다. 그래서 한 맺힌 가슴을 그렇게 털어놓았을 것입니다. “목사는 돌을 집어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해야 된다!” 지난 여름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더니 강사 목사님이 강의 중에 말씀 하셨습니다. “교회처럼 인정머리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말씀이 좀 지 나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분은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하신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결국 자기도 목사가 된 분이었습니다. 아마도 교회 안 에서 자라면서 본 것이 많아서 하는 이야기려니 하였습니다. 교회가 매정한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악한 죄입니다. 이 경우의 ‘교회’ 라 함은 대개의 경우 그 교회의 의사 결정을 대표하는 중직자 들입니다. 그들 의 사고 방식과 의견이 바로 그 교회의 풍토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할 때 저의 목회 현장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인색 하고 매정하여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몇 사람의 얼굴이 스쳐갑니다. 미움 과 증오가 활화산처럼 살아남아서가 아닙니다. 가슴에 한이 맺혀서가 아닙니 다. 그냥 그 매몰차고 차가움을 다시 접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 반응일 뿐 입니다. 차가운 공기야 불을 때어 덥히면 되지만, 사람이 따뜻하려면 그 마음을 덥혀 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매정한 것은 죄입니다. 어떤 이유를 둘러대며 그 럴듯한 변명을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최소한, 한없는 사랑의 빚 을 하나님께 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습니다. 2-3년 전 어느 토요일 오후, 히브리서 13장의 한 장면이 문뜩 떠올랐습니 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 이 기뻐하시느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 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 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묵상할수록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과 선명하게 떠오르는 한 단어 가 있었습니다. ‘따뜻함’이었습니다. 이것은 한편의 권리나 다른 한편의 의무를 말함이 아니라, 서로의 따듯한 마음과 그로부터 나오는 따뜻한 몸짓 을 말함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고 서로 사귀고 돕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교인들”(16 절).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살피는 지도자와, 그 일을 괴로운 마음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도록 배려하는 교인들”(17 절).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들의 마음이 따뜻한 때문이고, 마음이 따뜻한 이 들이 그런 모습으로 사는 곳에서는 누구에게나 ‘따뜻함’이 느껴지는 행복 한 곳일 거란 확신이 들면서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행복해지 는 것이었습니다. 매정한 마음, 갖지 말아야 갈수록 매정함과 자기 욕심으로 피차의 고통이 심해진다는 이 시대에 우리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그것 이 가능한 것은 우리 주님의 따뜻함을 이미 덧입은 성도들이기 때 문입니다.
16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3)| 위대한 결단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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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0 2008-04-16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33) 욥기 23:8-10 위대한 결단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절대적 믿음 앞에선 결코 흔들리지 않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닌데, 하나님이 여전히 역사하신 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없어서 깊은 좌절 의 늪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그만큼 혹독하고 참담한 상황에 던 져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혹독한 상황에 처한 어느 집사님 아주 오래 전 이었습니다. 한 여 집사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사업이 부도 나고 가정은 파탄 나서 사정이 너무 참담하고 현실이 너무 혹독하여 심방을 가서도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분이었습니다. 위로를 한다고 여러 말을 늘어놓는 것이 오히려 그분의 분노만 돋구고 약만 오르게 할 것 같아서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그냥 “힘내세요”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나 자신도 응답의 확신이 서지 않는 기도 몇 마디를 늘어 놓고 돌아오곤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 다. 그 분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다 망했고, 이제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습니다. 방법은 한 가 지 뿐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저는 죽고 싶은 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 다. 그런데 재수 없게 예수까지 믿어 가지고 맘대로 죽을 수도 없어요!” 저는 그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것은 그 집사님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만큼 자신의 현실이 아프다는 신음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 습니다. 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분을 보며 말했습니다. “집사님, 저는 목사지만 제가 집사님 같은 처지였으면 저도 그런 생각이 들 었을 거예요.” 나도 당신의 아픔을 함께 아파한다는 저의 중심을 그렇게 그 집사님과 나누 고 싶었습니다. 왜 그런 불신앙적인 말을 하느냐는 둥, 믿음을 굳게 지켜야 된다는 둥, 자살하는 것은 큰 죄라는 둥, 어떻게든 자살은 막아야 된다는 사 명감으로 호들갑을 떨며 그 집사님을 책망하는 것은 그 상황에서의 저 의 도 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저에게 많이 고마워하며, “아 무 것도 일이 해결된 것은 없지만, 마음은 많이 편안해졌다”며 고개를 많 이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 그분은 자살은 물론,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지 금은 그분이 누구였던지 기억도 가물가물 합니다. 그러나 한 성도가 그 혹독 한 현실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으며 자기의 삶을 살아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한동안 깊은 감동과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목회 초 년병 시절의 그 경험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욥은 자기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음에도 어느 날 닥쳐온 혹독한 고난 때문 에 참담한 현실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한 가지 소원을 품고 몸부 림을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 다면! 그 분이 계시는 곳까지 내가 나아갈 수만 있다면!”(3절). 그러나 욥은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하나님의 역사하 심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처한 고난의 상황보다도 더 참담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탄식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8-9절). 그러나 욥의 참으로 위대한 결단은 그 다음에 이 어집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10절).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며,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오리무중일 때도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 완벽한 계획을 가지 고 계시며, 하여튼 내 인생의 결과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내 현실에서의 증거와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되심에 대한 믿음 돈독해 우리에게 자주자주 필요한 것도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 근거한 결단입니다.
15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2)|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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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0 2008-03-26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절대적 평가 기준 하나님의 뜻에 두어야” 똑같은 사건을 같은 장소에서 같이 보았음에도 그것을 보고 내리는 결론이 나, 그것을 보고 취하는 반응들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 다. 같은 사건 보고도 평가 달라 1분 동안의 강한 지진으로 만여 명이 동시에 죽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현장을 보고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있다면 사람 을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다.” 한 쪽 에서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 하고 우주공학이 발달해도 하나님이 단 1분 동안 땅을 흔들어 버리니 수 없 는 사람이 대책 없이 땅 속에 묻혀 버리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살아야 한다.” 똑 같은 일을 똑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해 석과 반응은 정반대 였습니다. 한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로 삼 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 경고로 삼 은 것입니다. 큰 실패로 깊은 좌절과 상처 가운데 빠져있는 교인에게 “이제 다른 가능성 이 없겠네요. 소망이 안 보이는 상황이고만요”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신이 그 깊은 아픔을 경험한 것 때문에 당신은 그 아픔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치유할 실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능력자가 되는 것 입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제가 목회했던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판단은 정반대로 하는 이런 일들을 우리 주위에서 얼 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맺어내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크고 광대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들을 애굽 의 노예생활에서 구해내셨습니다. 그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던 중 바란 광야 라는 지역까지 왔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들어가는 땅이 정말 그렇게 좋은 땅 인지 미리 가서 확인을 해봐야겠다며 백성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 서 그리하시겠다 하셨으니 그리 될 줄 믿고 그냥 그곳을 향하여 열 심히 가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그것을 확인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 하여 열 두 사람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보내졌고, 40일 동안 가나안을 샅샅 이 돌아본 정탐꾼이 돌아와서 정탐한 것을 근거로 온 백성 앞에서 결과를 보 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열 두 사람이 같이 가서, 같이 다니며, 같이 보고, 같 이 돌아왔는데도 백성 앞에서 내리는 결론은 정반대의 두 패로 갈라졌습니 다. 그곳의 상황에 대한 인식은 모두 동일한데 그러한 상황에 대한 반응은 정반 대였습니다. 열 사람은 그곳에 들어갔다가는 다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 리는 그들과 비교할 때 마치 메뚜기같이 형편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었습니 다. 그러나 두 사람은 생각이 정반대였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메뚜기가 아 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가면 그 강한 자들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 뻔한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 좋은 것들이 있는 곳에 빨리 들어 가서 그것들을 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열 사람은 겁이 많은데, 두 사람은 겁이 없어서 가 아니었습니다. 열 사람은 비겁한데, 두 사람은 용감하고 베짱 이 두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열 사람은 계속하여 “그들”과 “우리”를 비 교하고 있고, 두 사람은 계속하여 “하나님”과 “그들”을 비교하고 있습니 다. 그들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다투고 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판단을 해주셨습니 다. 그 상황을 그렇게 본 열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멸시해서 그런 것이었고, 두 사람은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좇았기 때문에 그런 결론 을 내린 것이라는 게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하나님편에서 본질 파악해야 우리가 직면한 문제와 우리를 맞비교하면 우리는 언제나 문제들 앞에서 메뚜 기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문제 를 비교하면 그것은 우리의 밥일 뿐입니다 결국 현실의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어떤 눈으로 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15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1)|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녀로 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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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0 2008-03-12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31) 누가복음 2장 42-52절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녀로 키우기 위한 대가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부모는 자신의 희생 치르는 모범 보여야” 얼마 전까지 가까이서 알고 지냈던 의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환자들이 끊임 없이 찾아와서 기다리는 소문난 서울대 출신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제가 목사인 것을 안 이후부터 그분은 저를 깍듯이 대하며, 저의 진료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교회 출석 포기한 장로의 아들 그런데 그분 자신은 교회를 잘 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도 없었습니다. 남의 믿음을 제가 함부로 판단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한번은 장로이신 자기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이상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고3일 때는 대학에 가야하니까 교회를 쉬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하시더니, 그 이후 다 른 고3 아이들에게는 고3 수험 생이니까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된다고 한다는 것입니 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 의사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는 이상한 사 람”이라고 빈정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는 대학에 가기 위하여 교 회에 나오지 말고 공부하라고 해놓고는 남의 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 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사 선생님이 교회에 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 이 없이 인생을 살고 있는 깊은 원인을 알만 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품는 소원 가운데 하나는 자녀들이 하나님 보시기 에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하고 밤낮 기도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녀를 갖기 위하여 부모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한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 다. 하나님께 사랑스럽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 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 니다. 그리고 부모는 그것을 허 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가 하나님 께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사람이기 위하여 부모는 많은 것을 포 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인 생을 살도록 하는 것이 부모에게는 많은 아픔과 부담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 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2장 뒷부분은 예수님의 열두 살 어릴 적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 다. 부모가 열두 살 된 아들 예수를 데리고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 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사흘 만에야 겨우 아들 예수를 찾아냈는데, 그는 성전에 앉아서 선생들과 말씀을 토론하는 일에 몰 두해 있었습니다. 아들의 이 어이없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 마리아는 책망하 듯, 짜증내듯 한 마디를 하였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 하며 너를 찾았노라!” 당돌하고도 황당한 대답이 열두 살 아들로부터 되돌 아왔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마리아의 서운한 마음이 얼마나 깊었을까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그렇게 자라 가는 아들 예수를 놓고 본문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의 이 말, 어쩌면 부 모인 자기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법한 아들의 그 말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아들이 하나님께 사랑스럽기 위하여 어머니는 혼자서 아들에 대한 서운함을 삭이고 그를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 이 아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께 사 랑스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 어머니는 말로 다 할 수 없 는 많은 아픔과 여러 부담들을 말없이 견디어 내어야 했습니다. 미친 사람이 라고 소문난 아들을 찾으러 그곳으로 가야 했고,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 며 죽어 가는 아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고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스런 자녀로 키워야 자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사람이기를 원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이 최우선 순위가 되도록 많은 것들을 내려놓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 을 알아야 합니다.
15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0)|장로대통령! 교회의기회인가, 위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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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4 2008-02-27
(30) 사도행전 3:1-16 장로 대통령! 교회의 기회인가, 위기인가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교회는 장로 대통령 혜택 누릴 생각 버려야” 장로 대통령이 이끄는 정권의 탄생은 이 나라 기독교에 기회인가 위기인가, 아니면 서로 주고받을 것 없이 각각 제 길을 가면 되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 가? 새로 장로 대통령 시대 열려 대통령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이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보든지, 대통령 본인의 그간의 행적이나 신앙과 관련한 공적인 언사들을 보든지, 여러 교회 들이 지난 선거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드러낸 모습과 대통령이 발탁한 주변 의 비중 있는 인물들을 보든지, 아무도 정권을 잡은 대통령과 이 나라 기독 교회와는 아무 상관없는 관계라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들이, 아니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처 신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처럼 우리 사람이 정권을 잡았으니 이제 교회가 힘을 좀 펴 보자 하거나, 그동안 불리했던 이런 저런 일들의 국면을 전환하 고, 나아가서 교회가 직면한 여러 불편하거나 불리한 문제들을 대통령의 영 향력을 힘입어 순탄하게 처리해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치권 자와 특별한 관계임을 내세워 이런 저런 혜택을 누리며 쉬운 길을 가려고 한 다면, 그것은 장로 대통령의 탄생을 교회가 권력의 덕을 볼 수 있는 모처럼 의 기회로 여기는 데서 나오는 처사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유익을 빙자하여 권력과 줄을 대거 나 정권의 주변을 서성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교회가 유익을 보 아서는 안되어서가 아니라,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이 결국은 이 역사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넘기는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장로 대통령이 이끄는 정권의 탄생을 교회의 기회 가 아니라 위기로 여기고 긴장해야 합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전보다 더 불편하고 더 힘들기로 작정하고 다른 어느 때보 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드러내고, 차라리 먼 길을 돌아갈망정 정의와 진실을 구현하고, 그리고 대통령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살아 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러잖아도 틈만 있으면 교회를 폄하하고 비웃는 이 사회로 하여 금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다름을 인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이 사회로부터 “하나님을 내세운 같은 패거리끼리의 쑥덕공론과 특혜”라 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그 결과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능욕을 받 게 할 위기에 우리는 직면해 있다는 긴장감을 내려놓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날 때부터 사십 년 동안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디뎌 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를 말 한 마디로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기이히 여기며 솔로몬의 행각 베드로 앞으로 모여들었습니 다. 종교적 영향력과 강력한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무슨 일이든 한번 일으 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즉각적인 반응 은 손을 내저으며 우리가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고 펄쩍 뛰는 것이었습니 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 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리고는 이 일을 이룬 이는 우리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하고도 명백하 게 선언하면서 예수님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시선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자기는 빠지고 있는 것입니 다. 지금 베드로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새로운 교주로 등장하거나, 아니면 최소 한 수많은 자기의 추종자들은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는 무서운 죄를 범할 수 있 는 위기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마터면 빠져들 뻔했 던 위기 상황을 절묘하게 벗어나는 베드로의 멋진 모습을 보며 탄복하게 됩 니다. 하나님 영광 방해 말아야 교회가 권력의 혜택을 볼 수 있을 만큼 권력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은 기 회가 아니라, 위기라는 긴장감을 우리는 늦추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 든지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장로 정권 시대에 세상 은 교회에서 장로 대통령의 혜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볼 수 있 어야 합니다.
15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9)| 투자와 헌신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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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3 2008-02-13
(29) 창세기 22:16-18 투자와 헌신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반대급부 바라는 신앙은 헌신이라 할 수 없어” 투자와 헌신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혹은 누군가를 위하여 나를 희생한다는 점에서 외형은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투자와 헌신은 같은 것이 아닙니 다. 반대급부를 전제로 한 희생을 투자라 합니다. 그러나 반대급부에 대한 전제가 없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헌신이라 합니다. 헌신과 투자는 근본적으로 달라 되돌려 받을 대가를 전제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하여 나를 희생할 수 있는 것 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투자에는 희생에 대한 반대급부가 전제되어 있고, 헌신에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을 사랑 할 때에만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를 위하여 나의 귀한 것을 선뜻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난히 높은 이자를 주는 은행이 있어서 나의 모든 쓸 것을 포기 하며 돈을 마련하고, 심지어 남에 게 빚을 얻어서 까지 그 은행에 돈을 갖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아무도 나를 가리켜 그 은행을 위하여 크 게 헌신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투자를 잘했다고 말합니다. 높은 이자를 받 겠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진 일시적인 나의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절약할 뿐 아니라, 심지어 식당에 나가서 힘들게 일하여 자식의 학비를 대는 어머니를 가리켜 투자를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무속신앙에서는 언제나 자기가 받을 대가에 대한 전제가 행동의 원리 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희생은 신을 감동시켜 나의 원하는 바를 얻어내 기 위한 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가 되어서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 고 25년이 지나서야 평생의 소원 한 가지를 응답받았습니다. 아들 이삭을 얻 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 을 처음 만나고 45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 르며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찾 아오신 것입니다(창 22: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내놓으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아브라함에게 떨어졌 습니다. 숱한 고민과 번민이 있었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기로 결론을 내리고, 이삭을 데리고 정해진 산으로 가서 손발 을 묶어서 나무 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하여 칼을 들고 손을 내려쳤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며 그의 손을 멈추게 하셨습니 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서 확인하신 것이 무엇 인지를 두 번씩 반복하며 밝히셨습니다(12, 16절). “너는 네 아들 네 독자 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감 격에 차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16-18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내리신 결론대로 하면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 장 귀한 것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 면 그는 헌신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하나 님께 큰 복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복을 받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 다. 그는 투자를 한 것이 아니고, 헌신을 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헌신을 확 인하시고 그에게 축을 주신 것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 지 않아도 여전히 이삭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헌신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버티고 있는 것입 니다. 헌신의 바탕에 사랑 버티고 있어 우리의 신앙이 무속신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하 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행동의 원리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 은 언제나 나를 아끼지 아니하고 드리는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 다. 그런데도 오늘 날 교회 안에 헌신의 간판을 단 투자가 편만하고, 교회 안에 무속신앙이 판을 친다는 비판을 듣는 것은 부끄러울 뿐 아니라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15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8)|효경 백 번 읽고 아비 뺨치기_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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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7 2008-01-23
(28) 야고보서 1:22-25 효경 백 번 읽고 아비 뺨치기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조직적 반기독교 운동은 배신감에서 나와” 중국 속담에 “효경 백 번 읽고 아비 뺨친다”는 말이 있다 합니다. 효에 대 한 지식은 넘쳐나는데, 실제 생활은 그와 반대로 사는 사람을 비웃고 책망하 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성경 백 번 읽고 성경과는 상 관없이 행동하는 우리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가르침과 반대로 사는 사람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알고 지내온 청년이 있었습니다. 전문대학교를 졸업 하고 다시 간호사가 되겠다고 간호대학에 입학하여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 습니다. 간호사 시험에도 합격하고 이름 있는 대학병원 간호사로 바로 취직 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름대로 대견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였습니 다. 그 대학병원에서 직장생활을 행복해하며 지내고 있으려니 했는데, 얼마 후 확인해보니 한 달만에 그 만 두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물어보니 상사 간호사 때문에 도저히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생 전 들어보지도 못한 욕설을 퍼붓고, 발로 차기도 하고, 머리를 때리기도 하 면서 얼마나 함부로 하는지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입생 간호사들은 이틀이나 닷새를 못 넘기고 사표를 낸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병원 간호사 사회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마음은 아팠지만 그러나 크 게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악한 사람이 어디 에나 있다는 것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충격 이 되고 그러다가 분노가 된 것은 그 여자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근무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만나면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한다” 며 입버릇처럼 전도를 하고, 또 신앙생활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그 상사의 그와 같은 이중성 때문에 더욱 그 병원에 있기가 힘들어 서 한 달만에 뛰쳐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 안에는 이미 반기독교운동을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펼치는 그룹들 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 밖의 시민단체들이 교회를 개혁 하겠다고 소리를 높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교회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능욕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확산되고 있는 조직적이고 과격한 반기독교적인 운동들 은 다분히 그동안 한국 기독교인들이 불신 사회에 대하여 보여준 윤리적 실 패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신자가 아닌 것처럼 살고, 교회들이 교회가 아닌 것처럼 처신을 해온 것의 결과인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조직적이고 노골적인 홀대와 비난을 받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구호만 멋있고, 각오만 비장하지 실제 의 삶 속에서 그것을 볼 수 없다는 불만과 교인들이 신앙인에게 거는 최소한 의 기대만큼도 살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실망감과 배신감에서 온 것입니 다. 이것은 억울한 핍박이 아니고 당연한 질책입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도를 듣기만 할 뿐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속이 는 자라고 말씀합니다(22절). 그리고 나아가서 그러한 믿 음은 죽은 것이라 고 합니다(2:17). 효경 백 번 읽고 아비 뺨을 치는 자라면 효경에 능통한 것 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소위 신자가 믿음이 있노라 하고 그 믿음대로 사 는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단정을 지어버립니다(2:17). 효도를 가르치는 효경을 백 번씩 읽고 나서 아비 뺨을 치는 자식이나, 매주 예배드리고 성경말씀 읽으면서도 세상의 기본 윤리수준 만큼도 살지 못하는 신자는 둘 다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읽은 경전의 가르침 과, 자기가 예배한 신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에게로 나아 가려는 다른 사람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 막지 말아야 이 나라의 신자들이, 특히 소위 교회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시급히 해 결해야 될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15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7)| 인생을 사는 지혜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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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1 2008-01-09
(27) 룻기 1:14-18 인생을 사는 지혜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결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 기준 두어야” 인생은 고속버스에 올라타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저절로 부산에 도착 해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순간, 순간 크 고 작은 결정들을 내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떠 한 원리를 갖고 인생을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순간, 순간 결정해야 하는 인생 제가 어릴 때는 장난감이 많지 않았고 컴퓨터 게임이나 오락실 같은 것은 아 예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산에 올라가서 병정놀이 등을 하 며 놀곤 했습니다. 병정놀이를 하며 산길을 헤매다보면 자주자주 갈림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쫓길 때는 어느 쪽 길로 도망을 갈 것인가, 추격 할 때는 어느 길로 쫓아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이 사 용했던 길 선택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한쪽 손바닥에 침을 뱉은 후 다른 손 의 두 손가락으로 침을 탁 쳐서 그 침이 튀는 쪽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 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손바닥에 침 뱉어 놓고 두 손가락으로 쳐서 침이 튀는 쪽으로 나아가듯이 자신의 인생 문제를 그렇게 결정하는 것 입니다. 아이들의 소꿉장난이나 병정놀이에서야 그렇게 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어 차피 그것은 놀이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그런 식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고, 한번 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고, 결과에 대하여 책임져야 하는 인생이어서 그렇게 장난스 럽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살아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룻기에는 똑같은 문제로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섰던 두 여인, 룻과 오르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살던 한 가정이 흉년을 견 딜 수 없어서 이국 땅 모압으로 이민을 왔었는데, 룻과 오르바는 이스라엘에 서 이민 온 이 가정의 두 아들과 각각 결혼한 모압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 데 얼마가지 않아서 이 가정의 남자 셋이 차례로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 니다. 이제 과부 셋만이 달랑 남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남은 여생을 자기의 조국에서 보내려고 이스라엘로 돌아 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에게 통보하 였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각각 자기들의 길을 찾아 떠날 것을 권하였습니 다. 그리하여 두 며느리는 자기의 처신에 대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민과 갈등 끝에 오르바는 자기의 길을 갔습니 다. 자기의 조상과 자기의 민족이 섬기는 신들에게로 돌아 간 것입니다. 그 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룻과 오르바의 각각 다른 결단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외롭게 된 시어머니를 위해서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시어머니를 버리고 자기 편의대로 할 것인가의 인 륜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문제였습니 다. 룻이 계속 나오미를 붙잡고 늘어지며 밝히는,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서 함께 이스라엘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 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백 성이 섬기고 어머니가 섬기는 그 하나님, 그래서 나도 섬기게 된 그 하나님 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룻은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섰을 때, 어느 길이 하나님을 따르는 길인가를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아서 자기가 가야 될 길을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룻과 오르바는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선택의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러 나 서로 다른 결단을 내렸고, 그 결단에 의해서 서로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결 과를 맞아야 했습니다. 한 사람은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흔적도 없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늘과 땅 만큼 다른 결과 맞이해 숱한 선택의 갈림길에 직면할 때마다 무엇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가를 결정 을 위한 최우선의 원리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은혜로 우리 앞 에 열어놓으신 또 한 해의 인생을 이 지혜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15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6)|먹물로 지운 찬송가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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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0 2007-12-20
(26)요한일서 3:7-8 먹물로 지운 찬송가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유일신 하나님마저 거부하는 운동 일고 있어” 저에게는 종이가 거의 황토색처럼 바래고, 앞뒤 여러 페이지가 찢겨져나간 오래된 찬송가 한 권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왜정 때 사용하시던 찬송가 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니께서는 이 찬송가를 제게 보여주시면서 일제치하에서 어렵게 신앙생활 했던 경험을 말씀해주시곤 하셨습니다. 일제 때 먹물로 찬송가 가사 지우기도 아마도 70년 이상 되었을 이 찬송가를 넘기다 보면 이곳저곳에 가사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새까만 먹물로 지워진 곳들이 있습니다. 어느 찬송은 한 부분 을 지우기도 했고, 어느 찬송은 전체를 새까맣게 지우기도 하였습니다. 하나 님을 왕으로 높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찬양하는 내용의 찬송들을 부르지 못하도록 일본 정부가 강제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들을 먹물로 지 운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 절이면 가장 많이 불렀던 “기쁘다 구주 오셨네”도 가사 전체 를 먹물로 지운 찬송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가리켜 만백 성이 맞을 구주께서 오신 것이며, 온 세상의 죄를 사하고 다 구원하실 구주 께서 오신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일어나 다 찬양하 고, 이 세상의 만물들이 다 화답하고, 만국백성이 구주 앞에 다 경배하여야 한다고 성탄절의 깊은 의미를 온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분명하고도 단호하 게 선포하는 것을, 일본 천황이 신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일본정권은 견딜 수 가 없었고, 그리하여 이 가사들을 그렇게 모두 지워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아무도 하나님이 만물의 유일하신 주관자이시며, 예수님이 만백성 의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고 찬양하여도 그것을 못하도록 강압적으로 먹물로 지우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제 시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오늘날에도 여 전히 그 선포는 심각하게 지워지고 있고, 도전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러 니컬하게도 그 일이 일차적으로는 교회 자신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오신 의미를 확인하고 선포하며, 구세주로서 예수님을 r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일은 뒷전인 채, 이런저런 행사들로 들뜬 축제의 절 기로 변질시키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들 자신에 의해서 성탄절의 선포가 지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인류의 구원과 관계된 기독교의 독특한 메시지의 선포와 상관없이 단순히 하나의 성탄절 문화와 성탄절 상술로 왜곡하는 이 사회에 의하여 성 탄절의 메시지가 지워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근래의 반기독교 운동 에 의하여 성탄의 메시지가 먹물로 지워지듯 도전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 나라에서 확산되고 있는 조직적이고 과격한 반기독교적인 운동들은 그동 안 한국 기독교인들이 불신 사회에 대하여 보여준 윤리적 실패로부터 기인했 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 나 이 나라의 반기독교 운동은 반교회운동으로 나아가다가, 이제는 반그리스 도운동 그리고 반유일신운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 원자라는 우리의 신앙,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우리의 믿음 을 버리라는 강하고 과격한 요구를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8절).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누구이고, 마귀의 일은 무엇인가? 마귀의 일의 결과는 무엇이고, 예 수님은 왜 마귀의 일을 멸하셔야 하는가, 그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을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 이 마귀의 일을 멸하신 구체적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물음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마저 거부하고 있어 참으로 모순되게도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이 분을 감사하고 축하하고 기 념하고 즐거워하는 그 때에, 사실은 마귀의 일을 가장 극성스럽게 하는 일들 이 교회 안팎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비극이기도 합 니다.
15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5)| 위기 가운데서 부르는 노래_정창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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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6 2007-11-14
(25)하박국 3:16-19 위기 가운데서 부르는 노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신 가지고 있어야”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오래 전에 받았던 한 제자의 글이 생각납니다.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아내를 데리고 응급실로 달려갔더니 출혈인 것 같다하여 급히 수술을 했다 하였습니다. 3000cc나 되는 물이 배속에 차 있었고, 장기와 나팔관 주위 여 러 곳에 작은 좁쌀만 한 돌기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마음은 그렇게 편안하 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간절한 감사의 제목이 되더라는 이야기였습 니다. 살아 숨쉬는 것만도 감사해 아침에 눈을 뜨면서 또 하루의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가슴에 와 닿고,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 어 되는 일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창조자 하나님 앞에 서 겸손한 한 인간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 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감사 하고, 모든 것이 견딜만하게 됩니다. 바람 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누가 무엇을 한다 해도 다 괜찮게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해질 때, 우리의 영혼은 반대로 얼마나 커지고 넓 어지고 깊어지는지요!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질 때, 우리의 삶은 반대 로 얼마나 담대하고 활기차고 마냥 신바람이 나는지요! 여유, 참다운 삶의 여유가 그때에야 비로소 생기는 것입니다. 코앞에 닥쳐오는 환난을 바라보며 부르는 하박국 선지자의 여유에 찬 노래 가 생각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 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17-18절). 선지자가 여기서 없어도 좋다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들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견딜만한 악세사리나 편의품 들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양식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가상적으로 설정된 막연한 상황이 아니라 저 포악한 갈대아 사람들 이 유 다를 심판하기 위하여 쳐올라오는 환난의 날에 직면할 자신의 현실 상 황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포악성과 잔인성을 하나님도 인정하실 만한 갈대아 사람들이 쳐올라오게 되면 무화과 나무도, 포도나무도, 감람나무도, 곡식과 채소 밭도, 우리도, 소 외양간도 모두 쑥대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날은 대 환난의 날인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 므로 처음 그것을 하나님께 들었을 때 그는 극단적인 불안과 근심, 고통과 공포심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 는 것 같고, 몸이 떨리고...”(16절). 그런데 선지자는 이제 그날을 내다보며 묵묵히 기다리고 있습니다(16절). 그 리고 기다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를 인하 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8절). 그러므 로 이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비장한 각오가 서려있는 신앙의 노래 인 것입니다. 선지자는 어디에서 이러한 결단의 근거를 얻은 것일까요? 그러한 상황이 오 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항변을 거쳐(1장), 입을 다물고 하나님 의 대 답을 기다리면서 얻은 그 결론(2장), 곧 “(환난 가운데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2:4)는 그 진리의 확인이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 다. 선지자가 취하고 있는 이 모습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모습일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한 복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감격 넘치 는 확신이 버티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 감격해 그러기에 선지자는 그 지독한 환난의 날 앞에서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 여”,“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고, “여호 와는 나의 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시고,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과 여유 넘치는 멋진 찬송을 불러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15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4)| 급한 일과 중요한 일_정창균 교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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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6 2007-10-31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24) 마가복음 1:32-37 급한 일과 중요한 일 “급한 일은 평생 따라다니는 법입니다”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제가 아직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큰 아이가 열 두세 살 때이니 까, 우리 아이들 셋 모두 아직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 다. 세 아이가 평소에 다투거나 싸우는 일 없이 워낙 사이좋게 잘 지내주어 서 고맙게 여기고 있었는데, 하루는 응접실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 니다. 사연을 알아보니 녹음기를 가지고 서로 자기가 쓰려고 싸우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녹음기 때문에 다툰 아이들 가난한 유학생 형편으로는 상당히 값이 나가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다음 저는 녹음기를 들어서 응접실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습니다. 급히 아이들 싸움을 뜯어말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깝지만 녹음기를 부숴버려서라도 얻어내야 할 중요 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쳐간 것입니다. 비싼 녹음기 하나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그것을 기회로 한 가족으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빠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철학을 가지 고 살고 있는지를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알게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고 지금이 그 기회라는 생각이 난 것입니다. 아이들은 깜짝 놀라서 얼음동상처럼 굳어져버렸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 한참 동안 상당히 감동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녹음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면서 재미있게 놀 수가 없다면 그 녹음기를 때려 부숴버리고 사이좋 게 지내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아빠는 화가 나서가 아니라, 싸우는 너희 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래서 녹음기를 없애버린 것이라고 알아듣게 진지함 과 간곡함으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끝난 후 우리 가족은 모두 같이 밖에 나가서 아주 행복하고 재미있는 저녁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사건이 우리 아이들에게 한 가족으로 사는데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 신들의 인생철학을 세워가는 일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가끔씩 확 인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는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 람들은 자연스럽게 급한 일을 먼저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 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급한 일은 언제나 있습니다. 죽는 순간에 도 급한 일은 우리 앞에 닥쳐옵니다. 그러므로 급한 일 위주의 인생을 살다 보면 평생을 쫓기며, 내몰리며, 초조하게만 살다가 갑자기 마지막을 맞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급한 일을 먼저 하지말고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이 후, 예수님의 주위에는 거의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때로는 발에 밟힐 정도의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어깨를 서로 부딪히며 가야하는 큰 무리 였습니다. 시급히 병을 고침받기 위하여, 혹은 그 권위 있는 말씀을 듣기 위 하여 여러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때로 어디론가 혼자서 가버리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 느 때는 이 시급한 환자들을 조바심 나게 하시곤 하였습니다. 새벽이 되어서 야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책망과 원망 섞인 어 투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시급한 상황에, 이렇게 급한 일이 많은 판국 에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오시는 거냐고. 예수님에게는 환자들을 고쳐주어야 하는 급한 일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와 깊 은 교제를 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잠잠 히 자신을 드러내놓고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앞에 서는 것이 중요 주님은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시기 위하여 하루 저녁을 그 급한 자리를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당장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중요한 일을 먼 저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15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3)| 열 정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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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1 2007-10-17
열 정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누가복음 18:35-43 “온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 여리고 외곽 길가에서 평생 구걸을 하며 연명하는 소경 거지가 있었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뜻을 정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이다. 나도 나사렛 예수를 만나리라!” 나사렛 예수의 소문 들어 어느 날 많은 사람이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 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귀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래 서 아무 데나 대고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대답 을 들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시고 있네!” 그 순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곧 메시아이시다.” 그랬기에 그는 귀로는 나사렛 예수라고 들었 는데, 입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라 고 소리쳐 부른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다윗의 자손은 곧 조상 대대로 기 다려온 메시아의 별칭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그랬기에 그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며 서슴없이 자 신을 그에게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 믿음을 근거로 그는 오랜 소원과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나도 이 예수를 만나리라!” 그런데 그 오랜 소원과 뜻 을 실현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가 소리를 지른 것은 그 간절한 소원과 뜻 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즉석에서 그가 받은 것은 모욕과 함께 큰 좌절이었습니다. “입 다물고 조용히 하라!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남다른 장애가 있는 이들은 사소하게 보이는 일들에도 큰 상처를 받을 만큼 예민한 법입니다. 앞서 가 던 여러 사람들이 거침없이 퍼붓는 이 말이 이 사람 소경에게는 어떻게 들렸 을까요. 거룩한 뜻을 이루겠다고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이 깡그리 무 너지고, 한없는 모욕감과 분노를 일으키는 현실에 이 사람은 던져진 것입니 다. 분 노에 차서 실컷 함께 욕을 퍼붓고 끝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 니 그것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앞서가는 잘난 정상인들이 던 지는 굴욕적인 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에게 던져진 그 모든 경 멸에 찬 말들을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귀머거리가 아니라, 소 경이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 치명적인 장애가 되는 그 말들을 못 들어서 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들은 체를 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 리를 지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뜻을 자신의 자존심 상한 것에 의 하여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실천해 나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열정”이라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열정을 뜨거운 무 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정은 온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 니다. 펄펄 끓는 뜨거움이 아니라, 어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길 을 가고야 마는 불굴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열정은 흥분이나 열광과는 다른 것입니다. 새해를 준비하는 연말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이제는 성가대에서 주님을 찬양 하며 영적인 생활에 힘을 쓰겠다는 결심과 함께 새해를 시작한 분이 있었습 니다. 두어 달 열심히 성가대원으로 헌신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연습시간 에 앞에 앉아있던 다른 대원이 불쑥 말을 던졌습니다. “집사님은 목소리가 튀어나고 음이 자꾸 틀려요. 집에서 연습 안 하세요?” “그래, 목소리 좋 고 음 정확한 네가 다해!” 그리고 그분은 한동안 화를 못 삭여 씩씩거리다 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 소리치는 소경을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군중이 다 보는 앞에서 둘만의 대면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보고 싶습 니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자존심 대신 열정으로 만나 네가 낄 자리가 아니라던 소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의기양양하게 예수 님을 따르고, 이를 보는 백성은 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거룩한 뜻을 향한 열정의 결국은 그것이었습니다.
14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2)|포기하는 것과 다른 길을 찾는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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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7 2007-10-04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22) 사도행전 16:6-10 포기하는 것과 다른 길을 찾는 것 정창균 목사/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처칠이 언젠가 자신의 모교에 초청을 받아서 했다는 유명한 연설이 전해지 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Don't give up)!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Never give up)!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Never give up)!” 절대 포기해선 안 되는 일도 있어 이것은 연설이라기보다는 세 번 반복된 한 마디의 말일뿐입니다. 그런데도 이 짧은 연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어느 긴 연설문 못지 않은 힘으로 다 가오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삶의 장엄한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려주기 때문 입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포기해야만 되는 것도 있고, 포기해도 괜찮은 일들 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또한 있습니다. 어떤 목적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떤 특정의 방법 을 포기하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일입니다. 그런 데도 우리는 우리가 택한 방 법이 벽에 부딪힐 때 자연스럽게 그 목적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습 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취한 어떤 특정의 방법은 상 황에 따라 포기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방법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한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리스도 인이기를 포기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경우이 든지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방법으로 교회 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상처를 받고 좌절을 당하니 아예 신앙 생활 자체를 포 기해버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증거하겠다는 큰 뜻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우 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의 본질적인 사명이기도 합니다. 사도에게는 아 시아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로 가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것을 막으셨습니다(6절). 사도 바울은 아시 아로 가려는 그의 시도를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 시아에 가서 하려던 그 일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에 가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복 음을 증거하는 일은 본질적인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가 아니라면 그러면 어딜까 하고 고민을 한 것이 분명합 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비두니아라는 지방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곳으로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7절). 그러나 사도의 그러한 열심은 다시 좌절을 당하 였습니다.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7절). 성령이 아시아 에서의 복음 증거를 막고, 예수의 영이 비두니아에서의 복음 사역을 허락지 않은 구체적인 방식이 무엇이었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일을 수행할 수 없는 큰 장애물이 발생하여 그의 사역을 좌절에 빠뜨렸다 는 것입니다. 사도는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두 니아 지방에서 하려던 그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다면 어 디인가 고민하며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8절). 그곳에서 그는 그 유명한 환 상, 즉 마게도니아인이 손짓하며 부르는 환상을 보았습니다(9절). 그리고 사 도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 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것이 확실하다는 확 신을 갖고 그곳으로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10절).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정한 복음 증거의 방법에 결정적인 장애물을 만났습니 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좌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복음 증거 하는 일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가 확신하였던 방법은 상황의 전개에 따라 포기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하려던 그 일, 즉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일을 위한 다른 길을 끊임없이 찾은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이 드디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복을 받은 사건 뒤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근래에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은 사회로부터 많은 요구와 조직적인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옹졸하게 하나님의 구원만 주장만 하지말고 다른 종 파들처럼 서로 인정하며 화합하라고 합니다. 복음 전한다고 여기저기 다니 며 말썽부리지 말고 선교를 중단하라는 강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교 인들과 교회지도자들은 교회가 이 사회의 이러한 요구와 압력을 정당한 것으 로 수용하고 교회의 입장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견해를 취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길을 찾아서라도 복음 전해야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면 교회가 아닌 것으로 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어 서, 다른 길을 찾아서라도 계속해야만 되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4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1)|타임 아웃(Time Out)_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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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6 2007-09-13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21) 마태복음 25:1-13 타임 아웃(Time Out)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아주 오래 전이었습니다. 한 젊은 부인이 제 정신을 잃고 발악을 하듯 방바 닥을 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그렇게 보내지만 않았어도 이 렇게 원통하지는 않을 것을! 너무나 원통해! 너무나 원통해!” 그 여인이 그 렇게 통곡하는 데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원통하게 남편 보낸 아내 이 부인은 그 전날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이 되어 남편이 출근하는데 화가 나서 출근하는 남편을 일부러 거들떠보지 도 않고 그냥 누워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아내의 환송을 받으며 출근을 하던 남편은 그 날은 말없이 혼자 챙겨서 출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이 출근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을 두고 바닥을 치며 통곡하는 이 젊은 부인을 만나고 온 우리 교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 고 저도 마음이 횅하니 허탈하였습니다. 살다보면 어떤 일들은 이미 시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가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 해도 그 잘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여도 그 열심히 아무런 유익이 없 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마치 타임아웃이 되어버린 축구장에서 아무리 골대 에 볼을 차 넣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주어진 시간이 지나버렸기 때 문에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은혜와 구원에로의 초대만이 아니라, 지금이 지나 면 영영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는 하 나님의 자비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기회를 거부하고 나면 그 것으로 끝내버리고 말 하나님의 단호함에 대한 선포이기도 한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이야기입니다. 다섯 처녀를 슬기롭게 하고, 다른 다섯 처녀를 어리석게 한 결정적인 기준 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들의 무엇을 가리켜 이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고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는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의 지혜로움과 기름을 준 비하지 않은 다른 다섯 처녀의 어리석음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언뜻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 럼 준비하는 인생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 처녀들의 지혜와 어리 석음의 결정적인 요인은 “준비성”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두 종류로 분류된 이 다섯 처녀들은 사실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습니 다. 열 처녀 모두가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다가 오 는 시간이 늦어지자 모두가 다 잠을 잤습니다. 신랑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 가 울려 퍼지자 모두가 다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모두 같이 등불을 켜고 길 을 떠났습니다. 어느 정도 길을 가다가 다섯 처녀의 등에 기름이 떨어져서 불이 꺼져가기 시 작하였습니다. 혼비백산한 다섯 처녀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름을 준비하 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기름을 충분히 준 비하여 등불을 밝히며 왔 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 사이 에 차이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도 기름을 준비했고, 이들도 비록 늦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인생의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극단 적으로 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다른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 못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끝내는 그들도 충 분한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다만, 그렇게 애쓰고 고생해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때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타임아 웃이 되어버린 이후에 기름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비유 는 준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됩 니다. 기회는 지나가 버리는 것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너무 늦어버려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 외에는 달 리 할 일이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타 임아웃이 되어버리기 전에 지금 하는 것이 슬기입니다.
14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0)| 사랑의 증거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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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4 2007-08-29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20) 열왕기상 3:16-28 사랑의 증거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어느 교회 소식을 들으며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는 불 신자들도 다 아는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입니 다. 유명한 솔로몬의 아기 재판이야기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사흘 간격으로 각각 아이를 출산한 두 여자가 있었다 지요. 그런데 한 여자가 자기 아이를 옆에 뉘어놓고 자다가 그만 잠결에 아 이를 깔아서 죽였다지요. 자기 아이를 잃은 그 여자는 옆에 있는 다른 엄마 의 아이와 죽은 자기의 아이를 바꿔치기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아이를 바꿔치기 당한 엄마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래서 두 어머니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지 않습니까. 서로가 살아 있는 아이가 자 기의 아이라고 악을 쓰며 싸웠겠지요. 서로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겠지요. 서로가 하늘을 두고 맹 세컨대 자기가 옳 다며 자기 주장을 하였겠지요. 그러다가 결국 솔로몬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롭 기로 소문 난 이 왕은 지혜롭기는커녕 무지막지하고 포악한 판결을 내렸습니 다. “아이를 둘로 쪼개어 반반씩 나누어 가지라!” 그러자 한 어머니는 눈 물을 흘리며 사정하였습니다. “제발 그 아이를 쪼개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 어서 기르게 하십시오.” 그 아이를 위한 “불붙는 것 같은 마음”에서 나 온 자기 희생이었습니다(26절). 그것이 엄마인 그 여자의 “자식 사랑”이었 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어머니는, “좋다. 그렇게라도 하자” 하였습니다. “내가 갖지 못할 바에는 너도 갖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그 여자의 심보였습니다 (26절). 그것이 그 여자에게는 ‘공평함’이었을 것입니다. 이 순간에 이 왕 의 지혜가 빛을 발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아이를 포기한 저 여자다. 이 아이를 저 여자에 게 주라.” 진짜 엄마라면 자식에 대한 사랑의 증거를 대라는 것이 솔로몬 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진짜 엄마의 관심은 그 아이의 유익에 맞추어져 있었 고, 가짜 엄마의 관심은 자기 자 신의 유익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순박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한 재판 방법이 상대방의 의도를 미리 꿰 뚫고 한 수 위에 올라앉아서 사람을 요리하는 영악한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통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솔로몬이 이 사건을 처리하면 서 붙잡은 원리만은 만고불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그것 혹은 그 사람의 유익을 무엇보다도 앞세운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기꺼이 그를 위하여 자기 희생 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증거입니다. 지도자들 사이에 싸움이 붙어서 교인도 두 패로 갈라지게 되고, 교회는 점 점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다는 어느 ‘싸우는’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는 이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계속 생각났습니다. 서로가 ‘교회를 위해 서’라고 할 것이지만, 교회를 위해서 한다는 그 싸움 때문에 정작 교회는 가장 큰 손상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지만, 그 진실 하나 밝히자고 교회 전체 를 교회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보고나 있는 것 인 지요. 그간의 서운하고 억울한 내력을 밝히고 차제에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한 다고 할 것이지만, 자기의 억울한 사정 하나 풀자고 온 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이 사실을 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며,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되심을 확신한다고 기도 때마 다 힘주어 말은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의 혈기로 교회를 온통 물들이고 있다 는 사실을 감지하고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여 순교도 한다는데 우리는 교회를 사랑한다면서 도 자신이 당하는 작은 억울한 일 하나 바로 잡기 위해서, 자신이 당한 서운 한 일 하나 앙갚음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자신의 의견하나 관철시 키기 위해서, 그리고 왜곡당한 자신의 작은 정당성 하나 입증하기 위해서 아 이를 반씩 나누어 가져도 좋다는 식으로 나오는 가짜 엄마처럼 그렇게 교회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 이지요. 정말 교회를 사랑한다면 어떤 자기 희생을 치르면서라도 그 교회를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쪽을 택하게 될 것이지요. 솔로몬의 재판에서 진짜 어머니처 n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증거일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참된 증거 자식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키우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아이를 죽게 할 수는 없다는 그 어머니의 정신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 습니다. 솔로몬이 그 여인들에게 요구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 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4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9)|벼룩 잡자고 집에 불지르는 죄_정창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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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1 2007-08-16
창세기 34 벼룩 잡자고 집에 불지르는 죄 정창균 목사/합신 교수,남포교회 협동목사 “내가 전 재산을 날리고 망할지라도 반드시 너를 망하게 하고 말겠다!”라 며 분노에 가득 차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무서운 말도 있습니다. 원한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걸어서야 받은 상처나 쌓인 원한을 갚기 위하여 그 일에 나의 목숨을 거는 일은 정말 이지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욱이 신앙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악한 일 입니다. 야곱 일가가 세겜에 머무르고 있을 때입니다. 야곱이 레아에게서 난 딸 디나 가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디나가 강간 을 당한 이 일로 말미암아 야곱 가문에는 큰 근심과 분노가 들끓게 됩니다(7 절). 디나에게 마음을 빼앗긴 세겜은 자기의 아버지를 동원하여 야곱을 찾아 와서 디나와의 혼인을 간청합니다. 그리고 두 족속 사이에 통혼을 통한 연합 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 것을 약속하기도 합니다. 디나의 사건으로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야곱의 아들들은 혼인을 간청 하는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조건부로 혼인을 승낙합니다. 그들의 모든 남 자가 할례를 받으면 디나를 아내로 주고 두 민족이 하나로 연합하겠다는 것 입니다(15-16절). 말하자면 자기들의 종교적인 전통을 내세운 혼인 조건이었 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종교적 유산을 지키기 위한 신앙심에서 나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대의 남자들을 한 번에 몰살해버림으로 복 수를 할 기회를 얻기 위한 속임수였습니다.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이 제안한 혼인 조건을 흔쾌히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도록 주민들을 설득합니다. 그 들에게는 그들대로 또 다른 꼼수가 있었습니다(22-23절). 실상은 자기의 혼 인 때문이면서도 겉으로는 민족 연합이니 경제부흥이니 하는 구실을 내세워 할례를 받도록 주민을 속이고,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사실은 혼인을 한 다음에는 그들의 재산을 빼앗을 계략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온갖 특혜 와 호의 를 약속하는 속임수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야곱의 아들들에게 자신들이 결정적으로 속아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딤후 3:13).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의 고통이 가장 심하여 활동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 진 할례 제3일에 세겜 부족을 기습하여 부족의 모든 남자들을 몰살해버립니 다. 세겜 한 사람에 대한 복수를 그 성의 모든 남자들에게 갚아버렸습니다. 자신들의 복수심을 발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복의 언약과 신실하심의 징 표로 주신 할례를 역이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와 복수심에서 쏟아져 나 온 살인과 약탈의 현장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족속들에게 조건만 맞으면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방인과 합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도 얼마든지 던져버릴 수 있다는 자세를 표명한 것이었습니다. 누이 디 나가 더럽힘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에만 집착했지, 그 통쾌한 복수를 위하 여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더럽히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 다. 이방족속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더럽혔지만, 하나님의 백성 야곱 일 가는 하나님을 더럽힌 것입니다. 결국 벼룩 한 마리 잡자고 집에 불을 지르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런 류의 일들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을 우리는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깃발을 치켜세워서 불신 앙의 행위를 마음껏 저지르고, “하나님”이라는 간판을 내세워 하나님을 모 독하고, “교회의 유익” 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를 교회가 아닌 것 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는 한 가운데는 자주자주 자신의 욕심이나 혹은 자기가 받은 상처 에 대한 분노나 혹은 사리사욕과 한풀이 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벼 룩 한 마리 잡자고, 하나님이라는 집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야곱의 일가는 디나 사건을 계기로 차라리 자신들의 모습을 깊이 돌아봐야 했습니다. 사실, 디나가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어떻게 보면 야곱의 실수로 말 미암아 온 결과였습니다. 야곱은 세겜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아야 했습니 다. 하나님께서 야 곱에게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한 곳, 그리고 야곱에게 돌아가 라고 말씀하셨던 곳은 세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벧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31:3,13). 그러나 그는 웬일인지 6-9년 정도를 세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디나 사건은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화 근이 되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거룩한 목적 훼손하는 수단이 문제 하나님이나 우리의 신앙을 빙자하여 자기의 야심이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 시키는 것이나, 우리의 신앙을 버리고 타협하는 것은 언제나 악한 일임을 알 아야 합니다.
14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8)|이런 설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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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2 2007-07-25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8) 디모데후서 4:1-5 이런 설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설교는 삶의 매 순간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을 그 대상으로 합니 다. 우리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세상을 등지고 어느 산속이나 외딴 섬에 끼리끼리 모여 별천지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가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외면한 채 딴 세상의 말로 일관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설교’ 우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할 뿐 아니라 그것을 근거로 이들의 삶의 현장을 해석하고 분별하며 그리하여 가르치고 경고하며 또는 위 로하고 권면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연말 대선과 같이 온 나라가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설교자는 어떤 식으 로든지 일체의 언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 나 거기에 는 중요한 원리와 한계가 있음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 씀이 선포되는 교회의 강단이 정치판의 연설장과 같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 다. 3주 전에, 수만 명이 모인다는 장안의 한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설교가 선포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6절을 본문으로 하고 “만약 적화통일이 된 다면”이라는 제목을 붙인 설교였습니다. 서두에서 상당한 분량으로 공산주 의가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가를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분노에 찬 어조로 강조한 다음, 다음과 같은 전환 단락과 함께 설교의 본론으로 진입하였습니 다. “금년 말 대선이 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요, 그 전이 한나라당 의 경선 후보 결정하는 일입니다. 어쨌든 친공, 친북, 반미의 좌파가 다시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적화통일이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라고 묻고는 세 가지 대지로 나누어 부연 설명 과 함께 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6만 교회는 다 파괴되고 믿음 생활 을 못하게 됩니다.” “둘째, 대학살이 자행될 것입니다.” “셋째, 경제가 몰락하여 거지의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는 “적화통 일, 즉 붉은 용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지 않으려면 목숨 걸 고 기도해야 됩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구약성경에서 비장한 기도를 보여주 는 세 곳을 인용하며 기도를 주장한 다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설교의 결 론 부분을 구성하였습니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킴노박’이 합세하여 이명박을 죽이려 한다고 했 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가 합세하여 죽이기 작전을 편다는 것입니 다. 전에 이회창씨 죽이듯 온갖 계략과 거짓으로 공격하고 때리는 것입니 다. -중략- 좌우간 ‘차떼기당’이거나 ‘부동산투기’를 했던 간에 다시는 붉은 용의 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합심하여 기도해야겠습니다. 특별 히 하나님의 백성이 내밀 수 있는 최후의 히든카드는 금식기도입니다. 전자 개표기 조작이나 부정선거를 통해서나 친북, 친공, 반미 좌파세력이 정권을 잡아 적화통일을 획책하지 못하게 해야 되겠습니다. 친북 좌파 세력은 이명 박씨를 대선에 못 나오게 하고 다음에는 박근혜씨를 잡으려 들 것입니다. 기 왕이면 예수님 잘 믿는 장로가 되기를 기도해야겠고, 아니면 박근혜씨라도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설교자는 교회 앞에 “구국금식기도”를 선포하였습니다. “이 위 기를 맞이하여 구국금식기도를 선포하는 바입니다. 3일이 어려우면 하루라 도, 아니면 하루 한두 때씩이라도 금식하여 붉은 용의 세력이 이 땅을 짓밟 지 못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요엘서 2장 15-17절을 낭독 한 후 설교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끝맺었습니다. “적화통일이 되어 공산 치하에서 신앙생활 못할 바에는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5절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식하면서 사랑하는 사람 디모데에게 남긴 마지막 명령입니다. 사도는 말을 꺼내기 전 에 먼저 하나님의 면전과 그리스도 예수의 면전, 그리고 그의 심판과 그의 재림과 그의 통치를 근거로 이 명령을 하는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디 모데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1 절). 그리고 나서 사도가 하는 말은 한 마디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Preach the Word!)”(2절). 그리고는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하 는 설명을 자세히 하고 있습니다(3-4절). 이 시대의 정신과 흐름과 상황이 말씀과 반 대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사도는 다시 말을 바꾸어 같은 내 용을 강조합니다(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 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현실 왜곡하거나 호도해선 안돼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 주일 낮 예배 강단에서 스스럼없이 그런 내용에 그 런 말로 그렇게 설교를 할 수 있는 그 설교자의 초상식적 카리스마와 그런 설교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고 다시 그 강단이 찾아지는 교인들의 탈신학적 믿음이 부러운 것인지, 불쌍한 것인지 한 동안 마음이 착잡하였습니다.
14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7)| 목자 없는 설움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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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5 2007-07-11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7) 고린도전서 1장 10절 목자 없는 설움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흔한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요즘에도 싸우는 교회들이 종종 있습니다. 정치 판에 흔해빠진 표현대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교 회 안에서도 드러내 놓고 편을 가르고, 맞붙어서 충돌을 하는 그런 “쌈박 질”이 가끔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싸움은 대부분의 경우 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싸움이기 일쑤입니다. 교회 싸움 대부분은 지도자들이 원인 저는 역사가 꽤 오랜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사실은 아랫녘 지방에서는 역사 가 가장 오래된 교회입니다. 40년도 더 지난 60년대 중반, 제가 중학교 2-3 학년 때 우리 교회는 큰 싸움을 하였습니다. 일간 신문에 교회의 싸움이 중 계되고, 교회는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제가 중 2이던 여름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11시 예배에 갔 는데 가서 보니 그것은 예배가 아니 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기도를 시 작하려 하는데 어디서 난 데 없이 찬송이 터져나오고 한 젊은 집사님이 나와 서 손을 휘저어 지휘를 하면서 그 찬송을 인도하였습니다. 소위 ‘장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방해의 찬송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찬송을 마친 그분들이 기도를 하려하자 이번에는 또 다른 데서 찬송 이 터져나왔습니다. 소위 ‘목사파’로 분류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서로 자 기 파 사람들에게 찬송가 장수를 알려주기 위한 수신호가 오갔습니다. 시간 이 갈수록, 서로 상대방에 대한 악감정에서 터져나오는 여러 행동들이 행해 지고 예배는 모독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가 자기들 나름대로는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하는 어쩔 수 없는 일 들이었습니다. 차라리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러대든지, 아니면 “눈물 젖 은 두만강”을 불러댈 일이지 왜 이런 목적으로 찬송가들을 불러대는가? 분 노와 두려움이 범벅이 되어 석고상처럼 굳어있는 저를 저의 학교에서 윤리도 덕을 가르치시던 염 선생님께서 어깨를 툭툭치며 불러내시더니 “오늘은 그 냥 가거라” 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저는 왠지 서럽고, 분이 차서 통곡을 하며 눈물범벅이 되 어 걸었습니다. 중 2 어린 것이 뭘 알아서 그랬을 거냐구요? 저는 그랬습니 다. 그 충격이 그렇게 컸기에 40년도 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렇게 또렷이 그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 상당한 기간을 목사님이 안 계신 채로 우리는 지내야 했습니다. 물 론 머리 허연 연세 드신 목사님이 주일마다 손님 목사님으로 오시기는 하였 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와 같은 우리 목사님은 아니었습니다. 학교에 가 서도, 교회 연합행사에 가서도 나는 내놓고 이야기 할 “우리 목사님”이 없 었습니다. 목자 없는 교회 교인의 사무치는 서러움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 었던 목사님 사택에는 쥐가 질주를 하였습니다. 후에 미국으로 가신 최 선생님께서 우리 고등부 학생 몇 사람을 모아서 주 일 새벽이면 그 사택 방에서 개인적으로 가끔씩 코피를 쏟으시면서 성경공부 를 시켜주셨는데, 그 집에 들어갈 때마다 저는 목사님이 안 계셔서 비어있 는 그 집이 얼마나 썰렁하게 느껴졌던지…. 제가 고 2 때인가, 드디어 목사 님이 오셨습니다. 처음 목사님이 오셔서 강단에 서 시고 가족을 불러내어 교 인들에게 소개하실 때 제 속에서 터져나온 탄성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도 아버지가 있다!” 제가 담임목회를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외국에 갔다가 한 달만에 돌 아오니 여러 교인들이 “목사님이 안 계시니 주일날 교회를 와도 왠지 쓸쓸 하고 허전하고 그랬어요” 하면서 그렇게 반가와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의 그런 경험 탓인지, 저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 단기선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이번에 가서 피곤한 모습으로 우리 앞 에서 왔다갔다 하시는 목사님 장로님을 보면서 저 분들이 나의 아버지다 하 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고 간증하던 한 청년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저는 얼른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교회의 지도자들이 편이 갈리어 싸우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편이 갈리어 싸우는 교회를 향하여 정말 간곡 한 어투로 분쟁하지 말라고, 싸우지 말라고, 다투지 말라고 거듭거듭 말씀합 니다. 그리고는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시대 교회의 지도자일 수록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친 사도 바울의 교회 안에서의 다툼에 대한 염려 와 단호한 권면들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선 없어야 할 ‘분쟁, 싸움, 다툼’ 교회의 지도자 여러분. 싸우지 마십시오. 죄 없는 양들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고, 주인이신 주님의 이름은 당신들 때문에 세상에서 능욕을 당합니다.
14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6)| 기도 명령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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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6 2007-06-27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6) 요한복음 14:13-14; 16:23-24 기도 명령 정창균 목사/ 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막동이 녀석을 낳고 돌이 가까워 올 때였습니다. 저는 목수안수 일 년 차의 부목사로 그리 크지 않은 한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꼭 새벽기도 갈 시간이면 일어나서 울어 제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 는 새벽기도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 때문에 새벽기도 못나간 아내 우리는 부부가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불같았습니다. 아이 걱 정도 걱정이지만 셋방살이하는 주제에 그 새벽에 아이를 그렇게 울려대면서 집을 비운다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 였습니다. “이 아이가 새벽시간에 깨지 않게 해주소서. 그래서 부부가 함 께 안심하고 새벽 기도를 다니게 해주소서.” 한 달 남짓 기도했는지 모르겠 습니다. 하루는 은근히 베짱이 생겼습니다. “하루 새벽 운다고 아이가 죽겠 느냐, 하루 새 벽 아이 울렸다고 쫓겨나기야 하겠느냐... 그냥 한번 가보 자.” 한 달 기도 후 아내와 의기가 투합하여 하루 새벽에는 그냥 교회로 가 버렸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궁금해하며 허겁지겁 돌아 온 우 리 부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녀석이 물에서 건져낸 것처럼 축축하게 젖 은 기저귀를 빼서 머리맡에 던져 놓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그 비싼 종이 기저귀를 쓴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형편이 었습니다. 아이 허리에 노란 고무줄을 매어놓고 거기에 거의 영구적인 베 기저귀를 갈 아 끼워가며 쓰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도 바구니 가 득 쌓인 젖은 기저귀를 빨고, 그것을 방안 가득히 줄을 치고 널어서 말린 다 음 정해진 방식대로 접어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데 이 녀석이 기특하게도 그 젖은 베 기저귀를 빼어 자기 머리맡에 던져놓 고 계속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소원한 대로 새벽기도를 함께 다닐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미어지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좋 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그렇게 담대해졌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마음놓고 새벽 기도회를 같이 다녔습니다. 저야 어차피 거의 일년 내내 새벽 기도회 인도를 하다시피 하였으니까 당연히 다니는 새벽 기도 길이었지만, 제 아내와 같이 가는 그 길은 또 다른 힘과 재미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알레르기 비염이 심해서 새벽마다 두루마리 화장지 한통씩을 품에 안 고 새벽기도를 다녔지만 그래도 흐르는 콧물에 젖은 수북한 화장지를 양손 가득 들고 오면서도 아내는 부부가 함께 다니는 새벽기도를 즐거워하였습니 다. 돌이 임박한 어느 때부터 우리는 아이 머리맡에 갈아입을 내복 아랫도리 를 놓고 새벽 기도회를 갔습니다. 돌아와 보면 녀석은 젖은 기저귀를 빼놓 고 머리맡의 옷을 다리에 낀 채 잠을 잤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하시는 거의 모든 일들이 우리 같은 인생들에게는 믿기지 않 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감동이 되고, 그래서 재미가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 로 우리는 그렇게 많은 복을 누리는 부부 큐티를 시작하는 보너스를 얻게 되 었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찻상에 우유를 탄 인삼차 두 잔 을 놓고 마주 보고 앉아서 성경을 읽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 나누기를 시작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세 아이를 차례로 돌아가며 각각 머리맡에 앉아 서 자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고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은 붙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긴 고별설교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 15, 16장은 바로 예수님의 그 마지막 설교입니 다. 그런데 이 마지막 설교 각 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 의 응답을 반복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14장에서는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게 하는 일 과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별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서 다시 기도응답을 약속하시면서 기도가 우리의 충만한 기쁨과 직결되어 있 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응답에 대한 약속을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순히 기도에 대 한 응답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기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기도 가 명령이라는 사실은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도 합니다. 기도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십자가이거 나, 무거운 짐인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훈련 필요로 하는 기도 사도 요한에 의하면 기도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결정적인 실마리 이며(14:13), 우리에게는 충만한 기쁨 가운데 있게 하는 은혜의 수단인 것입 니다(16:24).
Selected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5)|목자가 되고 아비가 되어_정창균 목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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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3 2007-06-13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5) 데살로니가전서 2:7-12 목자가 되고 아비가 되어 정창균 목사/합신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나로 하여금 우리 교인들에게 목자가 되고 아비가 되게 하소서. 목자의 마 음을 주시고, 아비의 마음을 주소서.” 아비의 마음으로 목회하기를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 동안 새벽마다 그리 고 틈만 나면 처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애원한 저의 기도였습니다. 걸핏하면 교인들에게 서운한 생각이 들고, 교인들이 야속하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들 고,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도 혈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고, 목 회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제 목회를 그만두고 쉬고 싶다는 생각에 사 로잡혀서 허우적대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하고 부터였 습니다. 목회자라 할 수 없을 만큼 몹쓸 모습으로 변절해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는 이런 목사에게 기만당하고 있는 우리 교인들이 한없이 불쌍하다 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자신이 더없이 비참하고 서러워서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시작한 기도였습니다. 끝까지 그 모습 그대로 갈 것이라면 차라리 골목 한귀퉁이에 포장마차 차려 놓고 야식 우동을 팔든지, 아니면 들판에 나가서 쑥이라도 캐다가 노상에 펼 쳐놓고 팔면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수백 년 전 어떤 성 자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라며 차원 높은 기도를 했다는 데 저는 아직도 제 자신의 문제로 낑낑대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여 이제는 어떤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요 적지 않은 교회들이 앓고 있는 가슴 앓이의 원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요즘 이 나라 교회의 심각한 문제들 가 운데 하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리고 더 많은 목회 지망생들이 목자가 되고 아비가 되려하기 보다는 사장이 되고 최고 경영자가 되려하는데 있습니다. 헌신된 사역자가 되려하기 보다는 화려한 영웅이 되려는 데 온통 정신이 팔 려있는 데 심 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를 최고 경영자로 부추기고, 성공 한 영웅으로 안내하는 책들이 불티난 듯이 팔리고 금방 베스트셀러의 자리 에 올라갑니다. 그러다 보니 명칭은 목자인데 하고 있는 일은 전혀 목자가 아닌 현상들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려 깊지 못하게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꺼내서 목회자들을 매도하거나 스스 로 누워서 챔뱉자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고민을 함께 해보자는 충정일 따 름입니다. 교인들에게는 그들의 신음 소리와 노래 소리를 민감하게 구별하 고 그들의 필요를 미리미리 감지하여 살길로 인도해나가는 목자가 필요합니 다. 그들을 위험에서 건지는 일에 내 목이라도 기꺼이 내놓는 목자, 속 썩이고 딴 길로 가려고 기를 쓴 양이라도 기꺼이 품에 안고 기뻐하며 돌아오는 목 자, 그런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끝없이 사랑하되 무조건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아부하지 않고, 책망할 때와 권면할 때와 위로할 때를 분별하여 그들 의 유익을 위하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 아비가 교인 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실 교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목자처럼 아비처럼 신뢰 하며 따 를 수 있는 목회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되고 아비가 될 책임 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은 어떻게 그들을 목회하 였는가를 밝히고 있는 대목을 곰곰 살펴보면 참으로 큰 도전이 됩니다. 유모 의 심정으로 그들을 대하여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즐거움으로 내놓 는 사랑을 품고 목회를 하였다고 합니다(7-8절). 그 교인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수고하고 애썼쓰며(9절) 교인들은 물론 심지어 하나님을 증인삼아 자신 있 게 말 할 수 있을 만큼 사도 자신이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내려 고 힘을 썼으며(10절) 아비의 분별과 절제를 갖고 때로는 권면으로,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책망으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11절). 그리고 사도는 말미에 자신이 그렇게 목회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를 암시하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교인관’입니 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와 자기의 영광을 그들에게 주시려고 그리 고 하나님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값이 나가는 삶을 살 게 하시려고 하나님께 서 친히 부르신 사람들이라는 눈으로 교인을 바라본 것입니다(12절). 결국 사도의 그러한 목회의 원동력은 그의 타고난 성품이나 성숙한 인격이 아니 라 그의 교인관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교인은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들 교인을 마치 고객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래의 많은 목회 전략들은 어쩌면 우리를 목회자가 아닌 것으로 끌고 가는 가장 큰 함정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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