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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9 (00:00:00)
김병혁의 vivavox (4)

로마인가? 제네바인가?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지난달 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 매체들은 연
일 그에 관한 특종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가 전달되고
각 당 대표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해당 교파인 카톨릭 교회는 물론 정
치권과 각종 사회 단체 심지어 타 종교 단체에서조차 앞 다투어 칭찬과 기대
일색의 논평을 내놓고 있다.
과문한 탓에 또 한 명의 추기경이 과연 카톨릭 교회와 한국 사회에 어떤 긍정
적인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이번 추기경 서임을 두고 그리스도
의 몸된 교회요 형제 된 개신교인으로서 ‘국가적인 경사’로까지 여겨야 한
다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백도웅 총무의 호들갑스러운 권면은 왠지
찜찜하다.

1. 카톨릭 교회는 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번 일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중세 시대의 카톨릭 교회와 비교
해 볼 때 현재의 카톨릭 교회의 변신은 가히 성공적이다 할만하다. 중세의 카
톨릭 교회가 억압과 쟁투로 얼룩진 종교 난장판을 연상시킨다면 오늘날의 카
톨릭 교회는 관용과 연합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절대 권력과 절대 독재의
깃발 아래 천년의 역사를 지배해 오던 부패한 독재 종교가 어느덧 민주주의
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호소력 있는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카톨릭 교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분명 카톨릭 교회의
외관에는 큰 변화가 있었지만 정작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내용에는 전혀 변화
가 없었다. 돈으로 외모는 바꿀 수 있지만 마음은 성형할 수 없는 것처럼 말
이다.
새로운 추기경에 대한 관심과 기대만큼 염려와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이
다. 종교 개혁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개신교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역사적으
로 볼 때 카톨릭 교회 내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변화는 종교 개혁에 대한 일종
의 반작용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1540년대 시작된 트렌트 종교 회의를 비롯해
서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 회의를 통해 자신

들의 신학과 신앙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성경과 전승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승
된 대부분의 카톨릭 교회의 신학과 신앙은 많은 부분에서 반종교개혁적이며,
반성경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2. 카톨릭 교회는 반개혁주의적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변함 없
지만 늘 타락과 부패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그들의 주요 교리를 전통적인 장
로교회의 교의학 구도에 맞춰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론: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기록된 말씀 외에도 자연 세계
(일반 계시)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② 성경론: 카톨릭 교회는 신구약 66권 이외에 외경 일곱 권과 교회의 전승
과 전통에 관한 기록인 성전(聖傳, tradition)을 성경 범주에 포함시킨다.
③ 기독론: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서 무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한다.
④ 구원론: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일곱 성례(사)를 제정하셨는데, 이것 자
체는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에 참여하게 되는 수단으로 구원을 성취하는 은총
의 효력을 지닌다.
⑤ 교회론
: 교황은 베드로의 사도권을 잇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성경 해석
과 적용과 도덕에 관하여 오류가 없으므로 그에 대해 반박하거나 비난하는 것
은 반그리스도적이다.
⑥ 종말론: 신앙이 완전한 자들은 죽어서 천국에 이르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대부분의 신자들은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 곳에서의
기간은 신실한 자들의 기도와 선행에 의해 단축되어질 수 있다.

하지만 1960대 이후 카톨릭 교회의 이러한 전통 신학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
하게 된다. 카톨릭 교회는 구원의 영역을 타 종교에까지 확장한 포괄주의, 다
원주의 신학을 공식화함으로써 포용과 연합의 상징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명실
상부한 선두주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반종교개혁적 카톨릭 교회는 내적 변화 없는 외
적 변신을 통해 종교적 이미지를 극대화해 가는 반면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개신 교회는 내용과 외형에 있어서 심각한 변형이 나타나고 있
다. 카톨릭처럼 종교개혁적인 신학적 엄밀성을 포기한 채 할 수 만 있다면 인
간과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신학과 교회가 개신교 안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3. 우리의 냉엄한 현실과 냉정한 물음

그럼에도 오늘날 개혁주의를 추구한다는 교회와 신학교의 강단에서조차 이토
록 위험천만한 카톨릭 교회를 향한 확신에 찬 경계와 경고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뿐더러 카톨릭 교회와 불온한 동거 관계를 유지하는 개신 교회를 향한 냉
철한 반성과 절박한 충고의 메시지를 찾기 어렵다.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슬
픈 현실이다.
자문한다. 새 추기경의 로마 입성을 앞두고 환호작약하는 무리 틈에서 우리
의 갈 길을 돌아본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람들의 환호와 선
망만이 가득한 로마인가? 아니면 진리를 위해 고난과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
는 제네바인가? 진정 로마인가? 진정 제네바인가?
* vivavox(비바복스)는
‘살아있는 목소리’란 뜻의 라틴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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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4)| 우리들의 모순_정창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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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9 2007-05-30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4) 사도행전 11:1-3 우리들의 모순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수년 전,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서 방문 전도를 하면서 큰 충격과 상처를 받 은 적이 있었습니다. 충격은 교회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의외 로 많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상처는 그런 비난과 아픈 호소에 대하여 아무 런 대답할 말이 없을 만큼 우리 교회들이 세상 앞에서 초라해져버렸다는 사 실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앞에서 초라해진 교회들 교회 밖의 세상 단체들이 이제는 우리가 이 나라의 교회들을 개혁해 주겠다 는 기세로 달려들고, 교회는 기껏해야 세상이 달라졌다거나 우리가 새로운 형태의 핍박을 받고 있다는 궁색한 대답 정도 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을 목격 할 때마다 우리는 참으로 참담함을 느낍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당하는 불신과 치욕, 그로 말 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당하는 능욕, 우리 스스로의 자존감의 상실 등 우리 가 진통을 앓고 있는 이런 저런 아픔들의 핵심적인 문제는 결국 세상 때문 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곧 교회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관아에 고소를 당한 사람이 야소교를 믿는 사람이면, 포승줄로 묶어서 잡아 오지 않고 아무 날 아무 시까지 관아로 나오라는 통지만 보내면 될 만큼 신 자들이 신뢰를 받는 때가 있었습니다.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산 사람이 야소교 를 믿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에 발령이 나면 임지를 바꾸어 달라고 조정 에 청원을 할 정도로 신자들이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삶으로 유명한 때가 있 었습니다. 백여 년 전,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 온 초창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가 사회로부터 그렇게 신뢰를 받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때는 비율로 따지면 사람 일만 명을 모아놓고 예수쟁이 손들라면 단 한 명이 손을 드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길가는 사람 너 댓 명만 모아놓고 물어봐도 그 중에 한 명이 손을 드는 판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인을 늘리는 일과 교인으 로서의 삶을 사는 일이 얼마든지 아무런 관련 없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생 생한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겠다 며 나선 사람이 사실은 사람들이 교회로 나아 오는 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고, 교회를 위하여 살겠다고 나선 지도자가 사 실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 만큼 교회에 가장 큰 상처가 되고, 하나님 나라 의 영광을 이루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나선 교회가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 이 드러나는 일에 가장 큰 거침이 되는 모순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는 모순된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며 펼쳐지는 어떤 일들은 사실은 교 회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는 또 다른 형태의 교회 세속 화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교회지도자와 교회가 오히 려 교회의 교회됨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는 이러한 심각한 모순이 일어나 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11장 초두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것은 복 음이 이방인에게도 이르렀으며, 이리하여 땅 끝을 향하여 진군하는 복음의 역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인정되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확장 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큰 기쁨이 될 만한 획기적인 사건 이었습니다. 베드로도가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에 그 소문 이 먼저 와 있는 것을 보아도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1절). 그러나 이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형제들은 이 위대한 사역을 마 치고 돌아오는 베드로가 문에 들어서자마자 베드로를 향하여 책망을 쏟아 붓 습니다(2절). “힐난했다”는 말은 단순한 질책이나 이의 제기가 아니라, 적 대감을 갖고 정죄의 의도로 비난하고 논쟁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복음 진군의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 닌 이 사람들, 곧 복음을 땅 끝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나선 이 증인들이었던 것임을 본문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본문은 이들이 왜 베드로를 그렇게 힐난했는 지를 밝힘으로써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무섭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 들의 힐난은 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는가, 왜 이방인들도 구원받게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할례자로서 무할례자들과 먹었느냐?” 는 것이었습니다(3절). 결국, 복음의 진군에 인생을 걸겠다고 나선 복음의 증인들이 실제로는 복음 진군의 결정적인 장애물로 전락하는 이 모순된 삶의 뿌리에는 자신의 전통, 관습, 고정관념, 자신의 경험 등을 하나님의 일보다 더 우선순위에 놓는 사 고방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을 자기 중심과 자기의 이익의 원리에 따라 행 하는 것이 이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날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14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3)|또다시 어버이날을 맞으며_정창균 목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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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6 2007-05-09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3) 히브리서 10:23-25 또다시 어버이날을 맞으며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해마다 어버이날 즈음이 되면,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히 있지를 않고, 자식은 부모를 잘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를 않는 다”(樹慾靜而 風不持 子慾養而 親不待)는 옛 사람의 이 시구 한 구절이 마 치 깊은 신음 소리처럼 떠오르곤 합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는 부모님 저는 우리 부모가 얼마나 훌륭한 어른들이신가, 내가 부모님께 얼마나 큰 은 택을 입었는가를 늦게 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부모님께 고 분고분하고, 말상대도 해드리고, 목욕탕에 모시고 가서 등도 밀어드리고, 나 에게 일어난 일들도 소상하게 말씀드리고, 나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상의 도 드려서 부모님을 외롭지 않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 했을 때는 부모님의 남은 연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리 고는 얼마 안 있어 서 부모님은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부모 님께 잘 할 기회를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어버이날 즈음이 되 면 원망처럼, 탄식처럼 그렇게 그 시구와 함께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 는 것입니다. 특히 제가 아직 어렸을 적에 아버님께 저질렀던 한 가지 사건 은 지금도 종종 저의 아픈 기억으로 되살아나곤 합니다. 고등학교 1-2학년 사춘기 시절, 부모님에 대하여 심한 반항심을 품고 심한 대립을 하면서 지낸 때가 잠시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답답하고 말 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버님에 대한 저의 불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나 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발목을 잡아두려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내가 부모만 제대로 만났다면 굉장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우리 아버지 때문에 나의 무한한 가능성이 날개를 펴지 못한 채 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머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때 내가 꼭 하 고 싶어하던 어떤 일을 말씀 드렸습니다. 돈이 좀 필요한 일이었고, 아버님 은 이미 그것을 반대하고 계셨 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머니는 아 버지께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려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대뜸 내 입에서 한마디 말이 뛰쳐나갔습니다. “아버지하고 이야기하느니 차라리 산에 올라 가서 고목나무하고 이야기하는 게 낫지요!” 그리고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습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 의 그 말을 듣고 늬 아버지가 며칠을 우시더라.” 주무시는 것처럼 옆에 누 워 계시던 아버지께서 “아버지와 이야기하느니 차라리 산에 올라가서 고목 나무와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낫다”는 이 못돼 먹은 자식놈의 말을 들으신 것이었습니다. 자식이라는 놈이 아버지라는 분을 향하여 쏟아놓은 그 말이 사실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리고 얼마나 악독한 말인지를 저는 제가 부 모가 되어서야 절절하게 깨달았습니다. 아버님은 저의 그 말에 대하여 한 번도 어떤 내색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저를 사랑하셨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셨고, 다른 형제들이 드린 용돈 을 모아서 신학 공부한다고 고생하는 제 밑에 쏟아 붓곤 하셨습니다. 그러 나 내가 부모가 되어 곰곰 생각해 보니, 아무리 너그러우신 제 아버지라 하 여도 그 상처와 아픔은 평생 잊지 못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자식놈에게 들은 그 치욕적인 말이 큰 아픔이 되고, 지울 수 없는 상처 가 되어 문득문득 되살아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 생전에 고 등학교 시절의 그 짓을 사죄하고 꼭 용서를 받았어야 하는데... 그냥 그대 로 헤어져버린 것이 지금은 얼마나 후회가 되고 아픔이 되는지... 아버님 떠나시고 두어 해 지난 어느 날 예레미야 29:11-13절의 말씀을 읽다 가 저는 한동안 넋을 놓고 펑펑 울었습니다. “너희를 향한 내 본심은 내가 안다. 너희에게 재앙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절망과 좌절과 아픔 과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다. 내 본심은 너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요, 내 본심은 너희에게 평안을 주려는 것이다”(11절). 자기의 본심을 몰라주고 딴소리를 해대면서 숱한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자식 을 보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실감났던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 짖으며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 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12-13절)는 말씀을 읽으 며, “우리 한번 만나 서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자, 아비인 나의 마음이 무엇이고, 자식인 너 의 아픔이 무엇인지 우리 한번 만나서 이야기 해보자. 나는 너를 만날 준비 가 되어있다”고 그의 자녀들을 향하여 손짓하며 부르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 님의 안타까운 초청이 실감이 났던 것입니다. 언제나 자식 기다리는 부모님 그 날 아침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말이 마치 난생 처음 들어 본 말처럼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오랜만에 서로 깊은 마음이 통한 부자지간처 럼 하나님이 그렇게 친밀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한 번 터놓고 이야기 해 보자!”는 아버지의 초청이 제게는 언제나 힘이 됩니다.
13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2)| 우리에게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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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6 2007-04-18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2) 우리에게 필요한 것 히브리서 10:23-25 정창균 목사/합신 교수 사람은 무서운 비판과 날카롭고 예리한 지적을 받을 때보다 따뜻한 보살핌 과 격려를 받을 때 깊은 감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동 받을 때 사람은 의욕이 생기고, 용기도 생기고, 힘도 생기게 됩니다. 비판보다 격려가 더 감동돼 감정이 메마르고 만사가 오로지 자기중심적이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찬바 람이 쌩쌩불고 있는 이런 시대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훈훈한 감동입 니다. 그리고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서로 돌아보고, 서로 격려하는 이것입 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랑의 돌봄 그리고 깊은 좌절과 절망 가운데서도 다시 가능성을 보며 일어나게 하는 격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서 우리를 감시하듯 지켜보시다가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 할 때 매를 들고 갑자기 나타나서 비난하고, 독촉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분 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힘 들 때, 시련을 만났을 때, 좌절에 빠졌을 때, 실패하여 무너져 내렸을 때 주 님은 말없이 우리의 입장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처지에 함께 있어주셨습니 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기를 “그는 우리의 연 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라고 합니다(히 4:15). 심지어 우리가 죄 값을 치르느라고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마저도 마치 주님 도 그런 죄를 지은 자로 오해받을 만한 그런 상황을 걸머지셨습니다. 그래 서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는 없으시다!” 자기 책임도 아니고, 자기 죄 값이 아닌데도 마치 자기 책임이 고 자기 죄 값인 것처럼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 이것이 예수 님의 사랑의 돌보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수년 전 목회를 하다가 체력이 바닥이 나고 탈진 상태에 빠져서 가족 모두 가 위기의식을 느끼며 긴장 가운데서 지낸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인가 힘들게 예배를 인도하고 내려온 저에 게 상당히 중요한 직분을 가진 분이 정 색을 하고 똑바로 저를 쳐다보며 말하였습니다. “목사님이 힘들어하시니 교인들에게 은혜도 안되고 덕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힘들어하지 마시지요.” 물론 말의 내용이나 판단은 대단히 정확하 고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그 말은 제가 힘들어하지 않는 것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지금도 저의 지난 목회사역에 있어 서 아픈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힘들어 보이는 듯하면 종종 저를 자기 차에 태우고 이곳저곳 경 관 좋은 산길을 데리고 다니거나 다른 방식으로 저를 격려하곤 하는 교인들 이 있었습니다. 이제 목회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혼자 품었던 생각을 포기하 고 다시 일어날 힘을 준 것은 바로 그 교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돌보심과 격려를 현장에서 우리가 경험할 때 마음이 얼마나 감동 이 되고, 감격이 되는지. 그런 감동이 우리를 다시 무덤에서 끌어내듯이 일 으켜 세워 용기를 갖게 하고, 소망을 갖게 하고, 힘을 갖게 하고 다시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돌아보시고 격려하시는 분입니 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가 서로서로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것 을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 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한 마디로 다시 요약하면 이 렇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라!”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우리도 그렇게 서로 돌아보 아 격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3장 첫 마디에 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 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또한 우리가 이 예수님을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예 수님처럼 그렇게 서로 돌아보아 격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그렇게 다음 말을 잇고 있습니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 자!”(25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그분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 리는 이 계절에는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돌 아보며 격려해야 무서운 정죄와 매정한 이기주의와 논리 정연한 책임 추궁이 아니라 새 생명 이 약동하는 봄날의 햇살 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돌봄과 일으켜 세워주는 격 려가 넘쳐나는 이 계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13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1)| 울어야 하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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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6 2007-04-05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1) 누가복음 23:26-31 울어야 하는 진짜 이유 정창균 교수_합신 실천신학 3년 전 시중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기독교인들의 눈에서 눈물 을 쏟아내게 했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였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장면을 너무나 잔인 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리고 자극적으로 묘사한 영화였습니다. 인기 끈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 그 당시 그 영화를 보라고 권하는 말이나 그 영화를 본 소감의 공통된 핵심 은 영화를 보면서 모두가 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들도 그 영화를 보 고 울어서 눈이 벌개져서 나왔다는 둥, 여하튼 모두 울었다는 것이 그 영화 가 좋은 영화임을 말해주는 증거처럼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영화는 예수님이 잡혀서 넘겨지는 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얼 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잔인할 정도로 생생히 보여주고 있었습니 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런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왜 그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우는 것인지를 묻 거나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영화를 보니 우리 예수님이 저렇게 지독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 에 실감을 하고 그런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이 너무 불쌍하고 딱해서 나오 는 동정과 연민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끌려가면서 고난당하신 그 날의 그 현장에도 그렇게 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재촉하는 여론을 더 이상 거스를 용기가 없던 빌라도는 예수를 군중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끌려가며 예수 님이 당하는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서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님의 뒤를 많은 사 람들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군중 가운데에 일단의 어떤 여자들은 가슴 을 치고 슬피 울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 여자들은 왜 가슴을 치 며 왜 슬피 울고 있는가? “그를 위하여” 즉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을 위하 여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27절).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는데 고난당하며 멸시당하며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향 하여 가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을 향하여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 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절)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괴로워하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의 말씀대로라면 그들은 잘못 울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을 향하여 뒤돌아 선 예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울 고 있는 것이라면, 너희는 잘못 울고 있다!” 채찍에 맞아 고통당하며 멸시당하며 뺨을 맞으며 조롱당하는 주님, 잔인한 모습으로 고통의 극치를 경험하며 십자가에 달려버리는 주님을 보면서 그 주 님을 위해서, 그 주님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 울고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이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너무 안됐다고, 얼마나 고통이 크 셨겠냐고, 얼마나 괴로우셨겠냐고, 얼마나 모욕적이고, 외로우셨겠냐는 생각 이 우리의 마음을 압도하고, 그것이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여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래서 우리의 눈물 신경을 자극하여 흘리는 눈물이라면 그것 은 잘못된 울음이라는 것을 고난의 길을 가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서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정말 불쌍한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와 너희 자녀 들’이라고 이 사람들의 시각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볼 때마다, 생각 할 때마다 우리가 울어야 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심으로써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 고자 하시는 것인가? 주님이 당하는 혹독하고 참담한 고난을 보면서 무엇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흉악한 죄인처럼 저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죽게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저렇게 죽여야 될 만큼 참담한 나의 죄 때문에 울라는 말씀이 아닐까? 그리고는 주님이 당하는 고통 속에서 그 끔찍하고 참혹한 내 죄가 주님의 저 고통 때문에 값이 치러지고 내 죄가 해결되었다는 사실로 감사하여 울라 는 말씀은 혹시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직도 주님이 지불하신 저 고난의 대가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사 람들, 그리하여 기다리고 있는 그 끔찍한 마지막 상황(29-31절)을 향하여 겁 없이 나아가고 있는 내 주변의 그 사람들을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 아닐까? 정작 불쌍한 것은 우리와 이웃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돌아보며 울어야할 진 짜 이유를 발견하고 마음껏 주님을 붙잡고 울어보고 싶습니다.
137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0)|포기하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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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6 2007-03-22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0)누가복음 22:54-62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우리의 믿음이 자랄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 이 자란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진다는 말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 은 누구이시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갈수록 깊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고, 그 앞에 있는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절 실하게 확인하게 될수록 누구나 깊은 고민과 번민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 이 그러한 분이시고 그 앞에서 나는 이러한 존재라면 왜 나는 아직도 망하지 도 않고, 심판도 받지 않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잘 지내고 있는 것일까 하 는 번민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그의 거룩하심에 비추어본 자 기 자신은 얼마나 부정한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순 간 거의 본능적으로 탄식 을 쏟아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 음이로다!” 사도 바울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비추어본 자신의 모습을 확 인하는 순간 깊은 절망감에 빠져 소리를 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 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이러한 고민과 번민에 빠 진 사람은 누구나 없이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아직도 망하거나 심판을 받지 않고 오히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잘 살고 있는 것은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 때문이었구나!” 믿음이 없을 때는 나의 열심과 나의 능력과 나의 공로 때문에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이 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산을 제대 로 하여 잘한 것 잘한 대로 갚아주고, 잘못한 것 잘못한대로 벌주겠다고 작 정하셨으면 우리는 열두 번도 더 죽고 골백번도 더 망해야 했을 것입니 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 의 은혜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고 그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22장의 사건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가 얼마나 기가 막힌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했던 3년 동안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절대적인 신뢰를 공개적으로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너의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그런데도 예수님이 붙잡혀서 죽음을 향하여 끌려가는데 베드로는 구경꾼이 되어 멀찍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54절). 예수님이 체포되어 있는 법정이 있 는 바로 그 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씩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배반한 것입니다(55-60절). 다음 순간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고 회복 할 기회를 얻습니다. 베드로의 착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회 개와 돌이킴의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부인하는 순간 그에게 번 개처럼 스쳐가 며 생각이 난 한 마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나 를 세 번 부인하리라”던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61-62절). 예수님은 베드로가 누구보다도 뛰어난 충성을 장담하며 큰 소리를 칠 때 이 미 이 사람 베드로가 잠시 후에 자신을 세 번씩 부인하고 배신하게 되리라 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 를 준비하였나이다”며 큰 소리를 칠 때 그 장담을 받아 말씀하신 것이었습 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3-34절). 이 사람의 그러한 배반을 내다보며 세우신 예수님의 대책이 그것이었습니 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 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32절). 예수님은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배반하고 떠나가버릴 이 사람 베드로를 그렇게 무너져내리고 타락해 버린 상태로부터 다시 돌이키고 회복시킬 대책을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배신할 사람을 미리 제거해버 려서 배신을 모면할 대책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울 대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심지어 닭우는 소 리까지도 동원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함으로 다시 돌이 킨 회복 뒤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포기 하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여러 어려움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주님과의 관계 를 포기해버리며 힘없이 무너져내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포기하지 하지 않 으시는 주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 는지요! 배신할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던 그 주님이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지요! 배신하는 것까지도 대책 세워주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 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 믿음이 자랄수록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136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9)|죽지 않는다는 확신,죽어도 좋다는 각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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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7 2007-03-07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9) 다니엘 3장 14-18절 죽지 않는다는 확신, 죽어도 좋다는 각오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20년쯤 전, 제가 부목사로 섬기고 있던 교회에 김 집사님이라는 분이 있었습 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기 위하여 여러 해 동안 무진 애를 쓰시던 분 이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빤질거리는 개구쟁이 아이처럼 목사를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갖은 말대답과 나름대로의 논리를 들이대며 예수를 믿지 않던 당대 의 똑똑이 남편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 두었던 김 집사 그런데 간경변을 앓던 그 분이 어느 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후 별 로 길지 않은 동안을 저와는 참 다정한 관계를 즐기며 예수 믿은 것을 좋아 하면서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그분은 제게 던지 듯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이 고집쟁이를 이기셨습니 다.”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말을 고쳐 다시 하셨습니다. “아니지요, 하나님 의 은 혜지요!” 남편 돌아가신 후 김 집사님은 남편을 천국 보냈다며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 하고 즐거워하시는지... 그런데 남편 떠나고 일 년쯤 되었을 때, 김 집사님 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발 병을 하면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방바닥을 뒹굴기도 하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습니다. 저는 거의 이 틀에 한번 꼴로 심방을 가다시피 하며 집사님 을 붙들고 기도했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고, 병원에서는 원인도 찾아내지 못 하였습니다. 집사님 시댁 쪽으로 무속인이 있었고 그래서 시댁에는 그 쪽으로 가까운 사 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김 집사님이 이러한 병으로 고생한다 는 것을 알고는 자주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어서 그러는 것 이라고, 지금이라도 예수를 버리고 우리에게로 오면 당장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다고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제가 다시 심방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이 한 숨을 쉬며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아침에 또 전화가 왔어요. 예수를 버리고 지 금이라도 자기들에게로 오면 당장 병을 고쳐준다는 거예요.” 그리 고 나서 집사님은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이를 악물듯이 말 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그러나 내 병 고치자고, 하나님을 배반할 수는 없잖아요!” 그 분은 끝내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 고통과 빈정댐을 묵묵히 받아넘기면 서 하나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런 집사님을 보 며 유학을 떠났고 그후 얼마 안 있어 그 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소식을 머나 먼 외국에서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저는 다니엘 3장을 묵상할 때마다 김 집사님이 떠오 르곤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금칠을 한 장대한 크기의 신상 을 세우고, 그 신 상 앞에서 성대한 의식과 함께 기세도 당당하게 온 나라 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든 백성은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 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않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 으리라!” 모든 백성에게 그 신상에 절하는 것이 살고 죽는 문제가 된 것입 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친구는 국가 고위직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들은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왕을 격노케 하였습니다. 왕은 이 r 들을 회유하였습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줄테니 내가 세운 신상에게 절하 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 그리고 경고와 협박을 하였습니 다. “앞으로도 계속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신상에 게 절하지 않으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으리라.” 그리고 왕은 세 친구가 섬기는 하나님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빈정대었습니 다. “내가 너희를 풀무불에 던져 넣으면 그 어떤 신이 너희를 건져낼 수 있 단 말이냐!” 이에 대한 세 친구의 입장은 분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 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건져내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낼 것입니 다!” 느부갓네살이 섬기는 신과 세 친구가 섬기는 하나님과의 싸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세 친구는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도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죽 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 입니다. “왕이여,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지 않고 죽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 는 당신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 하고, 당신이 세운 금신상에게도 절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요!” 그들은 단순히 죽지 않는다는 확신으로만 왕 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있 었던 것입니다. 혹시 죽고, 망할지라도 나 잘되자고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 다는 결단이 그들의 신앙의 진수였습니다. 죽어도 좋다는 각오되어 있어야 죽지 않는다는 확신, 죽어도 좋다는 각오! 그들의 신앙은 바로 그것이었습니 다. 제가 김 집사님에게서 본 신앙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 병 고치자 고, 하나님을 배반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20년 전의 그 분의 모 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135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8)|경영학의 원리에서 교회의 원리로_정창균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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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5 2007-01-31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8) 사도행전 6:1-6 경영학의 원리에서 교회의 원리로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저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배우는 과목 중에 경제수학을 제외 하고는 모든 과목이 제법 흥미도 있고 관심도 있어서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 부를 하였습니다. 특히 경영조직론, 노사관계론 등 조직을 경영하고 사람을 다루는 일에 대한 공부는 더욱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택으로 공부한 행정학 분야의 과목들도 상당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경제, 행정학 분야 재미있어 이러한 공부를 하면서 교회를 보니, 당시 제 눈에 비친 교회라는 조직은 온 통 비능률과 비효율과 비합리성으로 뒤범벅이 된 엉터리 조직일 뿐이었습니 다. 저는 제가 전공한 경영의 이론들을 신학에 접목하여 이러한 비효율적이 고 비합리적인 교회의 행정을 바로 세우는 학문 분야를 개척하리라는 당찬 꿈을 품고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배우면 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게 되 자 저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경영조직이라는 것 과 교회라는 조직은 그 본질이 다른 것이었던 것입니다. 2학년 후반이 되었 을 때 신학교에 입학할 때 가졌던 포부를 미련 없이 던져버렸습니다. 교회 는 경제성의 원리와 합리성의 원리가 최고의 지배원리로 작용해서는 결코 안 되는 특수한 조직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 초두는 교회가 역사상 최초의 직분자를 선택하는 현장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원망의 문제가 생긴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리고 원망의 시발은 사도들의 행정적인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재산 을 팔아서 가져온 교인들의 헌금으로 빵을 사서 가난한 교인들에게 나누어주 거나, 때로는 구호금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다보니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데도 구호에서 누락되 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고, 우연히도 그 누락된 사람들이 외국에서 돌아온 재외 동포 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쪽 그룹 사람들이 원망을 시작 하였고, 그것이 교회의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즉각적으 로 회의 를 소집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일만 전담할 직분자를 선택하 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직분자들이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분명하였습니다. 재산을 팔 아서 가져온 헌금을 집계하여 관리하고, 나누어 줄 물건을 구입하고, 남은 재고를 관리하며, 때로는 돈을 나누어주고 그 내용과 잔액 등을 관리하는 일 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교회 안에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실, 세상 어 디에도 없고 오직 교회 안에만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상의 일과 구별 되는 교회의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황당한 것은, 이런 직무를 감당할 사람을 뽑으면서 이들에 게 요구된 자격 요건이 참으로 엉뚱한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3절), “믿음이 충만한 사람” (5절).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경리나 구매나 재고관리 분야 경력 소유자도 아니고,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 그리고 칭찬 받는 사 람이라니! 해야 할 일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런 일인데, 그 일을 담당할 사람에게 요 구된 자격요건은 그 일의 효율적 수행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영적인 조건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 는 것인가? 고민과 묵상 끝에 저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교회 밖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교회 안에서, 교회 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는 그 일의 본질이 영적인 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그 일을 할 사람에게도 영적인 조건이 중요한 것이며, 그 일들의 수행에 는 경제성의 원리가 아니라, 영적인 원리가 최우선의 원리로 적용되어야 한 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수많은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진정 한 원인이 무엇인가가 분명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회사에서 평생 그 분야에서만 30년을 근무했는데요, 그렇게 하는 것 이 아닙니다!” 교회가 하려는 일을 놓고 자신의 교회 밖에서의 경력과 경 험 등을 내세우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인가가 분명하여졌습니 다. 교회는 능률 최우선이나 합리성 최우선의 조직이 아니라, 덕과 사랑과 영적인 원리가 지배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교회의 직분자들이 알았으면 좋겠 습니다. 교회는 영적 원리가 지배해야 사도들이 제시한 이 해 결책을 모든 교인들이 좋게 여겨서 드디어 영적인 조 건이 갖추어진 일곱 사람의 직분자가 선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해결되었고, 교회는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 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7절). 교회의 직분자 선택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 었던 것입니다.
134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7)| 없으면 그립고, 안보이면 보고싶은 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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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6 2007-01-17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7) 요한3서 없으면 그립고, 안보이면 보고싶은 사람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짧은 시간 함께 지냈어도 오랜 세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오랜 세월 을 함께 했어도 함께 지낸 의미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애틋 한 정과 포근한 추억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고, 생각할수록 상처와 회한으 로 되살아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애틋한 정은 잊혀지지 않아 없으면 그립고, 안보이면 보고 싶은 사람! 나이 들어갈수록 그리고 세상살 이 연륜이 길어질수록 여기저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어야 그 세월 살아온 행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여러 사람들에게 안보이면 보고 싶 고, 없으면 그리운 사람이 되어주며 사는 인생이어야 이 세상에 그 만큼 머 문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노년의 사도가 너무나도 그리운 한 사람에게 그 심정을 토로하며 써 보낸 편 지인 요한삼서를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노년의 한 어른과 어쩌면 그의 제자 였을 한 사람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모 습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저는 어느덧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합니다. “사랑 하는 사람,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자네가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절히 바라네!” 가이오 를 그렇게 부르는 장로 요한이, 그리고 장로 요한에게 그렇게 불리는 가이오 가 저는 참으로 부럽습니다. 자기를 장로라 부르는 이 사도가 가이오를 생각하며 이렇게 마음 흡족해하 고 또 저절로 간절한 축복이 쏟아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사람 가이 오에 대하여 들려오는 소문들 때문입니다. 가이오는 진리를 따라서 진실 되 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칭찬어린 소문. 그것이 사도에게는 그렇게 큰 기쁨 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쁘도다!”(3절). 그리고 그렇게 사는 이 사람이 그렇게 사랑스 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 사도에게 는 믿음의 제자들이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가장 큰 즐 n거움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 다!”(4절). 개인적으로 용돈을 많이 주거나, 철 따라 양복을 맞추어 주고, 자동차를 새로 바꾸어주어서 그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복음과 복음의 다른 일꾼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진리를 따라 진실 되게 헌신하며 살기 때문입니다(5-8절). 사도는 이것을 선한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11절). 그러나 사도에게는 정반대의 이유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습 니다. 디오드레베. 사도는 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반드시 엄하게 책망을 하리라는 다짐을 불러일으키는 사 람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는 시 시하게 개인적인 감정문제로 한 사람에게 한을 품으며 사는 그런 사람이 아 닙니다. 디오드레베! 그 사람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진리 안에서 진실 되게 행하지 않 는 그의 행실 때문입니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생활을 “자기가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원리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자 기 자신을 내세 우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언제나 가장 우선적 인 행동의 원리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망령되게 폄론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지도 않 고, 끝내는 다른 사람의 선한 행실을 금하면서 교회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 게 만드는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입니다(9-10절). 사도는 이것을 서슴 없이 악한 것이라고 단정합니다(11절). 그리고 이런 악한 것은 본받지 말라 고 합니다.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을 생각하다 보면, 사도는 아마도 그와는 다른 모습으 로 살아가는 진실한 사람 가이오가 더 그립고 보고 싶어진 것이 틀림없습니 다. 한창 편지를 써 내려가던 사도는 마치 붓을 던져버리듯이 마지막 말로 편지를 맺어버립니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 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얼굴을 대면하며 말하리라.” 사도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내가 너에게 할 말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편지 로 몇 자 끄적이는 것 같고는 양이 차지 않는다. 네가 보고 싶다. 네 얼굴 을 보며 여러 말을 나누고 싶다!” 거짓이 없이 행하는 제자 가이오, 그리고 그것이 큰 기쁨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그를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선생 요한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지랑이 피 워 올리는 봄날 햇볕처럼 가슴이 훈훈해집니다. 훈훈한 사랑 할 수 있기를 간간이 들려오는 떠나온 교회의 뒷 소식을 귓전에 들으면서 저는 사도 요한 과 그의 제자 가이오가 한없이 부러워지곤 합니다.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부 르고 싶고, 누군가에게 나도 그렇게 불리며 늙어가고 싶습니다.
133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6)| 노년이 아름다운 사람_정창균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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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4 2006-12-27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6) 창세기 24:1-8 노년이 아름다운 사람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세월에 대하여도,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도 이제는 뒷모습을 많이 보이며 살 아야 할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게 됩니다. 다시 더 젊었 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옛날이 그리워지는 건 분명 아닌데 지나 온 세 월이 아쉬운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지나간 세월 늘 아쉬워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더 멋있고 어른스럽게 그 일들을 처리할 수 있 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가는 탓인지 이제는 이런 저런 것들이 미련 없이 포기되기도 합니 다. 마치 이삿짐을 싸면서 그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것들을 버리기도 하고 나 누어주기도 하며 정리하듯이 이제는 그렇게 그동안의 생각들이, 일들이 그리 고 품었던 꿈과 야망들이 미련 없이 정리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붙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들이 분별이 되기도 합니다. 저에게 이것은 서 글픔이나 무력감이 아니라 점점 성숙되어 가고 어른이 되 어 가는 징조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나이 들어가는 것과 나이 들어가는 사 람의 마음을 갖는 것이 즐거운 일입니다. 근래에는 교회당을 뛰어 다니는 어 린아이들이 그렇게 예뻐지는 것을 보며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 고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 이의 일을 버렸노라”는 사도의 고백은 단순히 인격적인 성숙과 영적인 성숙 만이 아니라 제대로 나이 들어감에서 오는 성숙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란 생 각을 해보곤 합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세월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뒷모습이 아름답고, 당 당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 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노년이 아름다 운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2-3년 전에 창세기를 묵상하다가 아브라함의 나이 많아 늙은 때의 모습 에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나이가 많아지면 “노년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 고 싶다는 소원을 품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노년의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 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절). 큰 감동과 함께 노년을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러나 그 진술이 끝나자마자 곧 이어지는 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구체적으 로 무슨 복을 어떻게 누렸는가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습니다. 며느리를 얻기 위하여 늙은 종을 불러 그에게 내리는 단호한 지시가 이어지 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며느릿감을 구하는 나이 많아 늙은 노년의 아브라 함이 보여주는 가장 멋지고 감동적인 모습은 노년이 되어서도 수십 년 전에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여전히 붙잡고 단호하게 그 말씀을 따라 사 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 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 여 아내를 택할지니라”(7절). 자기의 며느리를 얻는 일도 수십 년 전에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결 정적인 원칙을 포착하여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늙은 종에게도 “하 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한 후에야 길을 떠나보냅니다(3절). 말씀의 원리대로 며느릿감을 구하겠다는 맹세입니다. 마 침내 그는 며느리를 못 보았으면 못 보았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릴 수는 없 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늙은 종을 떠나보내는 것입니다(8절). 저에게 있어서 나이 많아 늙은 노년의 아브라함의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당당한 기개! 저에게는 그렇게 노년을 사는 그 모 습 자체가 이미 무엇보다도 귀한 복으로 여겨졌습니다. 당당한 기개 부러워 한 해를 다시 맞으면서, 한 살을 다시 더하면서 노년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은 소원을 다시 품어봅니다.
132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5)| 열심히 기도하는 이유_정창균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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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2 2006-12-13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5) 사도행전 12:1-17 열심히 기도하는 이유 정창균 목사_합신 교수 기도를 열심히 그리고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은 신앙인이면 누구나 아는 일입 니다. 그리고 누구나 사모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이 기도 를 열심히 그리고 많이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새벽기도 하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하는 부교역자들에게 저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하였 습니다. 기도하는 일 늘 중요해 “하늘의 별을 따오는 재주를 가졌어도, 나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신뢰하 지 않습니다. 기도 없이 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하늘의 별을 따오는 뛰어 난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헛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하거나 혹은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공은 아닙니다. 그 리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원리를 신봉하여 우리의 지성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를 열심 히 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가 중요한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인 교제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의탁의 방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기도를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단순 히 우리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기 위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야고보를 칼로 죽인 헤롯이 이번에는 베드로를 죽이려고 잡아 가두자 교인들 은 마리아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 께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5절).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 다”는 말은 틀림없이 베드로를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시기를 그렇게 간절하 게 기도하였다는 말일 것입니다. 천사의 기적적인 역사로 베드로는 그 살벌한 경계를 유유히 벗어나 감옥에 서 이끌려 나왔습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온 교회가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으로 갔고, 마리아의 집에서는 여러 사람이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12절).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로데라는 여자아이가 들었습니 다. 로데는 문을 두드린 사람이 베드로라는 사실을 그의 음성을 듣고 확인하 고는 문도 미처 열지 못하고 집 안으로 달려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외쳐댔습 니다. 베드로가 돌아왔다고. 베드로가 살아 돌아와서 문 밖에 있다고(14 절). 로데로부터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들은 집 안의 열렬한 기도꾼 들은 로데를 가리켜 미쳤다고 하면서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15절). 그들 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사람에게 그럴 리가 없다며 오히려 미 쳤다고 비방한 것입니다. 문밖에 서 있는 돌아온 베드로의 음성을 직접 들 은 로데는 참말이라며 열심히 그들에게 말합니다. 베드로의 안전 귀환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던 그들은, 이런 상황에 서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며 역시 자신들 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15절).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온 베드로는 문 밖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마침내 그 소리를 들은 그들이 우르르 대문으로 나가서 문을 열었 습니다. 그리고는 거기 문 밖에 베드로가 서 있는 모습 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이 기도한 대로 헤롯에게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 돌아와서 그렇게 서 있는 베드로를 본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이것이 자신들의 열렬한 기도가 응답된 것이 확인되는 그 현장에서 그들이 나타낸 반응이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절대로 믿지 않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들! 시종일관 자신들 의 기도 응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열렬하 게 합심기도를 시작하는 첫 순간부터 아예 기도 응답 같은 것은 기대도 하 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응답 기대해야 열심히 기도하는 것에 의의를 둘 뿐, 그 기도가 실제로 응답될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는 기도.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목적일 뿐, 그 기도의 응답에 대 하여는 오히려 부정적인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기도. 때때로 우리의 모습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31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4)| 제대로 듣기_정창균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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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7 2006-11-29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4) 누가복음 13:1-5 제대로 듣기 정창균 교수_합신 설교학 교실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코를 킁킁거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냄새야?” 그러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한 학생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OO가 도시락 까먹었대요!” 그런데 뒤 자리에 앉아있던 한 아이는 급히 일어나더 니 창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의 아이는 교실에서 음식 냄새가 나게 한 아이에 대한 비난으로, 뒤의 아 이는 선생님이 싫어하시는 냄새를 빨리 없애는 것으로 선생님의 말씀에 반 응 한 것이었습니다. 앞의 아이는 선생님의 “이게 무슨 냄새야?”라는 말씀 을 “어떤 놈이야?”하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고, 뒤의 아이는 “창문 좀 열 어 냄새를 빼자!”는 말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두 사람의 반응 달라 친구 셋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포장마차 앞을 지나면서 한 친구가 말했습 니다. “아이, 배고파!” 그 말을 들은 한 친구가 받아쳤습니다. “너는 속 에 거지 가 들어있냐? 금방 밥 먹었잖아!” 옆에 있던 다른 친구는 말했습니 다. “어떻게 하지? 나도 마침 돈이 하나도 없는데....” 이 친구는 배고프 다는 친구의 말을 포장마차에 들러 뭘 먹고 싶다는 말로 알아들은 것이었습 니다. 어느 해인가 공동의회를 앞두고 우리 교회 중직자 한 분이 제게 건의를 했습 니다. “교인들 가운데 OOO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미리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다 해요?” 제가 물었습니다. 잠시 그 분의 숨이 멎는 듯하더니, 한 마디가 터져나왔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있지도 않는 것을 거짓말로 말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시는데요. OOO 집 사가 그랬습니다!” 저는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교인이 그런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 어이가 없다는 말이었지, 그분이 거짓말 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목사인 제가 자기의 말을 신뢰하지 않으며, 자기가 하는 말은 못마땅해 한다는 선입견을 저에 대하여 가지고 저의 말을 들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어떻게 듣는가 하는 것은 때로는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 를 보여주는 표지판이기 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를 드러내주는 게시판이 되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거의 언제나 부정 적인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비판적인 사람은 거의 언제나 비난하 는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서 자주 당하신 답답함도 바 로 이러한 문제였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로 사용했다는 말을 그 시대의 신자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요? 아마도 그 사 람들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그런 죽음을 당했을까 를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너희는 죽임을 당한 이 갈릴리 사 람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 냐?”(2절)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 사 람들은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아마도 “치어죽은 그 사람들은 무슨 큰 죄 를 지었기에...” 하는 궁금증으로 생각이 돌아간 듯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은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4절). 말씀의 본의 파악해야 그 말을 듣는 그 사람들은 “우리도 다 죄인인데...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 면 망하고야 말 것이다”는 데로 생각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은 거듭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 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절). “너희에 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절). 망해버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람의 죄가 무엇이었을까 를 궁금해하는 데로 생각이 돌아가는 사람이 있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보며 회개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니라!” 귀의 종류를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과 태도와 관계의 종류를 말한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사람의 말이든지 제대로 듣는 귀를 회복 하는 이 가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phouse21@hanmail.net
130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3)| 착 각_정창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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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5 2006-11-08
착 각 정창균 목사_합신교수 2-3년 전, 저는 극도의 피로와 탈진으로 참 힘든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 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새벽 기도 시간에 자신도 모르게 한 고백이 저 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하루 “저녁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다음 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당연 한 일이 아닙니다. 저녁에 눈을 감고 잠이 들었으니 다음 날 새벽에 다시 눈 을 뜨고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직 또 하루의 생명을 연장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된 일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하 여 살게 된 이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게 하시니 주의 은혜가 넘치나이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온 그 아침 내내 저는 텅 빈 예배당에 앉아 감격의 눈물 을 흘렸습니다. 그 이후로 꼭두새벽에 교회에 나와 앉아서 하나님을 부르며 고개를 숙이면, “오늘도 또 하루의 삶을 더 사는 은혜를 하나님께 받았구 나!” 하는 생각이 실감나게 내게 다가오 고, 그 하루의 첫 시간을 이렇게 하 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한다는 것이 그렇게 감동이 되 고 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기도가 나오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생명이 촌각에 달려 있는 무슨 중병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니었 습니다. 다만, 그 날 새벽에 문득 한 순간 한 순간 숨쉬며 사는 것이 하나님 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되는 일이라는 이 평범한 진리가 단순한 지식과 원리 차원을 넘어서 나의 삶의 현장의 고백으로 실감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로 저는 하루를 더 살게 된 은혜에 대한 고백이 저절로 그렇게 나오 기 시작한 것입니다.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는 사 실이 언제나 당연한 진리의 되뇜으로서가 아니라 내 심장으로부터 터져나오 는 삶의 고백으로 경험된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에 대하여 중대한 착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이 있으니 당연히 내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내 일이 마치 나의 권리인 것처럼 알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 그 죽음은 어느 순간에라도 현실로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 서도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는 실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주셔야 사람은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자기가 지금 그 은혜를 입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실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가 언제나 계속 될 것이라는 중대한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순간의 삶을 더 살고, 하루의 생명을 더 연장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실감도, 감동도, 감사 도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그러한 착각을 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에 대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한 채 함부로 대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아내는 언제나 그렇게 나의 아내로 있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도 내 아내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 면 자다가도 잠든 아내의 손을 감사함으로 한 번 더 잡아보게 되곤 합니다. 자식이 언제나 그렇게 우리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자식이 내 곁에 있 는 것은 당연한 것도 아닙니 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 자식이 내일은 내게 없을 수도 있고, 오늘 당장 없게 될 수도 있는데, 감사하게도 오늘도 자식 이 내 곁에 있는 은혜를 우리는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착각하며 사는 우리가 한없이 가소롭다는 듯이, 이렇게 비 웃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 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그리고 자기가 인생 의 주인인 것처럼 이렇게 방자한 인생관으로 사는 우리를 한없는 두려움으 로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 은 다 악한 것이라”(16절). 그러므로 주의 뜻을 앞세우고, 주의 뜻을 살펴 서 살라는 것입니다(15절). 하루하루 사는 은혜 감격해야 오늘이 있으니 내일도 당연히 내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중대한 착각일 뿐 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내 것이었듯이 내일도 당연히 내 것이라는 생각은 심 각한 교만일 뿐입니다.
129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2)| 왠지 자꾸 눈물이 나던 날_정창균교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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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7 2006-11-03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2) 골로새서 1:24-29 왠지 자꾸 눈물이 나던 날 정창균 교수_합신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그들을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사역에 서 이러한 일이 잘 나타나지 않을 때는 목회자로서의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 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더욱이 교인 가운데 누군가가 이것을 문제삼 으며 우리 곁을 떠나겠다고 할 때면 참으로 참담해지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 한 곳에 치명타를 받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에게도 명암은 있어 남편이 오랫동안의 교회생활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고, 교회생활을 힘들어하여 집 근처의 가까운 다른 큰 교회로 옮겨서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 노라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나의 목회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 사람을 하나님의 면전에 그리스도와 연합한 온전한 사람으로 세 우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자괴심이 나를 괴롭게 하였습니 다. 차라리 교회가 작아서 못 있겠다고 한다면 저는 용수철처럼 더 힘있게 튀면 서 큰 교회로 어서 가시라 할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교인들끼리 싸우고 이제 떠나겠다고 한다면 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서 설득할 말이 많았을 텐 데... 남편이 은혜를 받지 못하여 교회를 옮겨서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데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없는 무력감, 실패하고 있다는 자괴감, 이 짓을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좌 절감. 그런 것들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내가 뭐가 대단한 목사라고 나와 함께 있는 모든 교인들이 다 은혜 받고 자라가야 된다는 교만함도 아니었습 니다. 누구보다도 헌신적이고 열심이었던 교인이 그렇게 나온 것에 대한 배 신감이나 서운함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에 있어서 나는 실패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오는 나 자신에 대한 아픔일 뿐이 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요일은 하루 내내 이유 없는 눈물이 자꾸 나오는 것이었습니 다. 왠지 슬프기도 하고, 왠지 쓸쓸하기도 하고, 왠지 서운하기도 하고, 왠 지 초라하기도 하고, 왠지 주인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그리고 긴 시간을 내색 도 못한 채 마음 고생을 하며 그렇게 아픈 고민을 했을 그 부부에게 면목이 없기도 하고... 그러다가 저는 골로새서 1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을 만났 습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하면 우리는 복음의 일군이요 교회의 일군입니다. 복음의 일군이란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말이고, 교회의 일군 이란 그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곧 교인들을 위한 일군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일군이라는 말이나 교회의 일군이라는 말은 결국 같은 실체 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23, 25절). 우리가 이러한 일군이 된 것의 결정적인 근거는 우리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 다. 경륜이란 하나님께서 사랑 어린 깊은 관심과 완벽한 계획으로 우리 인생 에 개입해 오신 것을 말합니다(25절). 이 일군이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일 일뿐만 아니라, 이 일군이 하는 모든 일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 를 드러내어 모든 지혜를 가지고 각 사람을 권면하고, 각 사람을 가르치고, 그리하여 각 사람을 하나님의 면전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온전한 사람으로 세 우는 일입니다(28 절). 그리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29절). 첫째는 일군인 우리 자신의 “힘을 다하는 수고”입니다.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괴로움일지라도 즐거워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고난 일지라도 내 육체에 담는 것입니다(25절). 둘째는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우리 주인님의 역사입니다. 사실 우리가 힘을 다하여 수고함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있 다 할지라도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는 우리에게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있어서 그런 놀라운 일을 이루어내기도 하고, 그 역사를 체험하는 우리가 한없는 신바람을 내기도 하 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4-29절에서 하신 말씀입니 다. 놀라운 능력 체험할 수 있어 저는 이 말씀을 그 수요일 저녁 예배에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 기를 냈습니다. “나의 힘을 다하는 수고” 그리고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 사하시는 이의 역사!” 평생 목회에 이런 일이 한두 번이겠는가! 그러기에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 는 주님의 역사”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 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를 미련 없이 부자 동 네의 큰 교회로 떠나보냈습니다.
128 no image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1)|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_정창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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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0 2006-11-03
본문으로 인도하는 묵상칼럼 (1) 마가복음 8:36-38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정창균 교수_합신 원숭이를 산채로 사냥하는 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장 IQ가 높다는 영 리한 원숭이를 사람들은 어떻게 산채로 잡을 수 있을까? 호기심이 발동하였 습니다. 그런데 영리한 원숭이를 생포하는 “원숭이 사냥법”은 의외로 원 숭이의 멍청함을 이용한 간단한 방법이었습니다. 원숭이 사냥법 관심끌어 나무에 간신히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설탕을 쏟아 놓습니다. 그러면 설탕을 좋아하는 원숭이가 용케도 그것을 알아차리 고 다가옵니다. 원숭이는 설탕을 가져가려고 그 구멍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설탕 한 움큼을 움켜쥡니다. 그리고는 횡재 만났다고 좋아라하며 돌아가려는데 손이 빠지질 않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냥꾼이 원숭이를 사로잡으려고 다가옵니다. 원숭이는 위기를 느끼며 달아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팔이 나 무에서 떨어지 지를 않아서 꼼짝 못한 채 허둥대기만 합니다. 사냥꾼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 며 자기 코앞까지 다가오는 걸 빤히 보면서도 원숭이는 나무에서 손을 빼지 않습니다. 설탕을 절대 놓지 않으려고 설탕을 한 움큼 움켜 쥔 주먹을 펴지 않으니까 팔이 나무에서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숭이는 자기 목숨을 향해 서 다가오는 위험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달아나지 못하고 결국은 붙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목숨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설탕 한 움큼 포기할 수가 없어서 더 중요한 자기 목숨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설탕 한 움큼과 목숨을 맞바 꿔버리는 길을 가버렸고, 결국은 설탕도 잃고 목숨도 잃어버리는 처지가 되 어버린 것입니다. 원숭이는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가 는 사냥군에게 붙잡혀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탕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서 눈을 빤히 뜨고도 죽는 길을 간 것입니다. 원숭이는 무식한 놈이 아니라 어리석은 놈이었습니다. 덜 중요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어서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그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 런데 의외로 인생을 이렇게 원숭이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덜 중요한가를 분별하지 못하거나 분별했음에도 불구 하고 덜 중요한 것에 대한 집착과 미련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빤히 눈을 뜨 고 잃어버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아무 긴장이나 부담 없이 동시에 가질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질 수 없어서 한쪽을 포기해야만 다른 쪽을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더 중요한 것을 붙잡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8장 36-38절의 예수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 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 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결국 예수님은 생명존중 사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 었습니다. 천하를 얻는 것보다는 목숨을 유지하는 것 이 더 중요하고, 목숨 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께 부끄러움을 당하 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목숨이고, 목숨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께 거부당하 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하를 얻었는데 목숨을 잃으면 손에 쥔 그 천하가 아무 유익이 없듯이 목숨을 유지하였는데 주님께 외면을 당하면 유지한 그 목숨이 결국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상에 잘 적응하고, 그렇게 해서 한 웅큼 움켜쥐고 잘 사는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던져버리는 것은 천하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 석은 일이라는 것이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중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과 맞바꾸어서 얻은 그 좋고 편한 것들이라면 결국은 아무런 유익이 없 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어 때때로 덜 중요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 어서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 리는 우리가 이 원숭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27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9) 옥석가리기(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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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6 2006-06-09
옥석가리기(1)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뉴스가 뉴스다워야 뉴스지~” 얼마 전 인터넷으로 요즘 한창 뜨고 있다는 모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관한 기사를 접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불량배들이 등장해서 뉴스를 진행하 는데 말끝마다 “뉴스가 뉴스다워야 뉴스지”라고 외친단다. 상황은 우습기 그지없지만 말은 바른 말이다. 아니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뉴스의 “뉴스 다움”은 사건의 정확성과 보도의 진실성에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담보 로 하지 않는 뉴스는 사회의 공해(公害)일뿐 공기(公器)가 되지 못한다. 정확성과 진실성 앞서야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상실한 교회는 진실한 교회로서 인 정받을 수 없다. 제 아무리 높은 첨탑 위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화려하고 넓 은 교회 건물을 자랑하고, 예배 시간마다 수많은 인파로 북적댄다해도 교회 의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교회는 사람을 위한 종교 기관일 수 있어도 진리의 터로서 교회는 아니다. 이것이 교회다움에 관한 신구약 을 관통하는 일관된 진술이며 종교개혁을 열망하는 경건한 무리의 통일된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교회다움에 관한 이해는 그 리 녹록한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단과 교회와 성도가 존재한 다. 신학과 교리와 역사적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언정 “교회가 교회다 워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드러내놓고 반대할 이들이 없을뿐더러 대부분은 자신들의 신앙과 신념에 대해 가장 성경적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성경에서 이탈한 교회나 이단의 속성이 강 한 집단일수록 이러한 종류의 확신은 더욱 자극적이며 광적인 모습으로 나타 나곤 하였다. 어느 역사를 막론하고 교회 안에 거짓 사도와 거짓 선생과 거짓 무리가 있어 왔다. 이들의 활동 근거지는 교회의 뜰 안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 에 도리어 심리적 평강과 육체적 안위를 선포하는 거짓 선지자로(렘 6장), 허망하고 거짓된 말로 백성의 마음을 빼앗는 거짓 예언자로(미 2장), 그리스 도안에 있는 참된 자유를 빼앗는 거짓 형제로(갈 2장), 사단의 능력으로 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로(마 24장), 멸 망케 할 이단을 끌어 들여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게 하 는 거짓 선생(벧후 2장)으로,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부활을 부정하는 거 짓 증인(고전 15장)의 모습으로 천연덕스럽게 교회 안을 활보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자면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는 자들이다(마 7장).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의 이름 으로 결국 주님의 교회를 농락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의 이 같은 교훈을 진실로서 받아들인다면 지상의 모든 교회를 아무런 기준 없이 주님의 교회라고 단정해서도 안되겠거니와 세상의 모든 교회더러 교회다워야 한다는 막연한 기대나 어설픈 환상은 버려야 한다. 교회의 교회 됨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확고부동한 인식과 냉철한 지식이 지 인간 중심의 이성과 감정이 아니다. 즉 참 성도로서 교회의 교회다움을 인식하는 일은 마치 옥석을 가리는 일만큼이나 신중하고 절제된 자세가 요청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거짓된 교회와 참된 교회가 공존(共存)하고 있 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개 혁교회의 대표적인 고백서 중 하나인 벨직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성실하고 주의 깊게 참 하나님의 교회 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 바인데 그 이유는 이 세상 에 모든 이단도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 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라고 부르는 온갖 이단들로부터 참 교 회의 하나됨이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벨직신앙고백서 29장 中).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분별, 즉 교회의 옥 석 고르기야말로 교회의 교회됨을 향한 진정한 출발점이요 중요한 준거점으 로 삼았다. 칼빈의 경우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4권 초두에서 이 사안을 매우 신중하면서도 대담하게 접근하면서 “‘교회’라는 이름에 속지 않기 위해서 (필자주, 단지 교회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고 해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 니므로) 우리는 ‘교회’를 자칭하는 모든 집단에 어떤 표준을 시금석으로 적용해야 한다”(기독교 강요 4.1.11)고 충고하고 있다.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언급한 교회의 교회됨에 적용할 어떤 표준을 가리켜 역사적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설교 (가르침)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성찬의 바른 수행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회의 정당한 치리(권징)를 거짓 교회와 참 교회를 구별하 는 세 가지 표지로 삼았다. 16,7세기의 종교개혁이 참된 교회 개혁의 절정이었다면 거짓 교회와 참 교회 를 구별하는 세 가지 표지는 교회 역사 속에 가장 찬란하게 빛날 보석이다. 하지만 이 보석을 돌처럼 여기는 자들이 있다. 칼빈은 교회의 표지 중 하나 라도 제거하거나 말살하려는 것은 사단의 최대의 음모라고 단언하였다. 불행 하게도 칼빈의 지적이 우리 시대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옥석 고르는 일에 대한 사단의 간계와 도전은 날로 거세지고 있지만 교회의 분별력은 점점 흐려가고 있다. 자칭 교회들과 자칭 선지자와 선생들 과 자칭 성도들에 의해 교회의 옥석을 면밀하게 고르는 일은 특정한 사람들 의 유별난 관심사인 듯 매도되고 있다. 교회다움 노력 아쉬워 하지만 옛적부터 지금까지 참된 교회라면 이 옥석 가리는 일을 간과하거나 포기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밭에 감추인 진주를 발견한 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옥석을 골라 낸 농부의 지혜와 진실이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시기이다. 참 교회의 참 교회다움을 위하여... * vivavox(비바복스)는 ‘살아있는 목소리’란 뜻의 라틴어입니다.
126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8) 부활절 용상 사건에 관한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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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0 2006-05-11
김병혁의 vivavox (8) 부활절 용상 사건에 관한 단상(斷想)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예수 다시 사신 날, 한국 교회는 갈라졌다.” 얼마 전 한국의 유명 포털 사이트 뉴스란에 내걸린 꼭지 뉴스 제목이다. 지 난 4월 16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2006년 부활절 연합예 배’ 단상에서 벌어진 소위 ‘부활절 용상 사건’에 관한 기사였다. 이날 설교자로 추대된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사모의 의자(피 해자측에서는 용상이라고 표현함)를 전례 없이 강단에 배치하려는 조 목사 수행원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측 예배 준비 관계자들 사이에서 볼썽 사나운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언론을 통해 이번 사건이 확대될 조짐이 일자 다음날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홍보국 명의로 사과문을 KNCC에 전달하였지만, KNCC측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기총) 대표회장과 조용기 목사의 공개 사과뿐 아니라 폭행 가담자들의 사 법처리를 요구 하며 강경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어느 언론 보도에 따르면 KNCC측은 이번 행사에서 폭력 사건말고도 조 목사 의 부활절 설교에도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적 돌출 발언 을 차단하기 위해 한기총과 KNCC의 사전 합의하에 작성된 을 그 대로 전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금번 연합 부활절 행사를 실제적으로 주도했다고 하는 손기 웅 한기총 일치위원장은 지난 4월 27일 이라는 주제로 열린 한 토론회에서 “2006년 부활절 연합예배는 한국 교회의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열었다”는 생뚱맞은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애초부터 필자는 신학과 신앙고백에 관한 깊은 고민 없이 합종연횡하듯 이루 어지는 한국 교회의 연합일치 운동에 반대하였지만 이왕에 한국 교회의 이름 으로 진행될 행사라면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는 오르내리지 않기를 바랐 다. 그런데 ‘예수 다시 사신 날’에 ‘한국 교회가 갈라졌다니’… 혹 떼 러 갔다가 혹 붙이고 온 꼴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화합과 상생의 장(場)을 만들어 보자고 특별히 마련 r 한 한마당 잔치 무대 위에서 의자 하나를 두고서 한 편의 목사들과 다른 한 편의 목사의 수행원간에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뒷골목 담화와 활극이 연출 되었다니 통탄할 일이다. 너무 부끄러워서 기억조차 하기 싫다. 하지만 결 코 쉽게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이번 사건은 한국 교회의 어두운 현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고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예고편에서 의자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모든 갈등을 연결하고 증폭시 키는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자신들의 교회에서 평상시 하던 대로 지극히 존귀한 목사의 부인을 위해 의자를 상석에 배치하려 했 고, 다른 한쪽에서는 행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뿐더러 목사(성직자)도 아닌 인물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연단에 의자를 반입하려는 측이나 그것을 거부하는 측이나 의자를 바라보는 해석은 달랐지만 의자를 향한 집착만큼은 대동소이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의 자는 더 이상 물리적인 객체가 아니다. 연단에 놓여질 의자는 특별한 사람에 게만 허용되는 권세와 존귀의 상징물이었던 셈이다. 부활절 오후, 의자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니 한편 의 성경 스토리가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 날 일에 대해 예고하셨다. 때마침 예수님의 설교는 예루살렘에서의 받으실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소망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 있 던 야고보와 요한이 뜬금 없는 요구 사항을 늘어놓았다. 주의 영광 중에 하 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그것은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 나섰던 그들의 본심이었다. 그들의 관심사 는 예수님의 십자가나 부활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좇는 대신 얻게 될 세상 의 영광의 자리였다. 결국 두 제자의 자리 욕심은 다른 열 명의 제자들과의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였고 결국 마음이 분열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말았 다. 이번 한국 교회 부활절 연합 행사에서처럼 말이다. 입으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하지만 정작 마음은 상석에서 배부 른 대접을 받는 환영(幻影)에 취해있는 무리들이 득실댄다. 목사와 사모라 는 직함으로 상석을 당당하게(?) 요구하며, 목사와 사모라면 마땅히 상석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또한 부지기수이다. 목사와 사모의 상석 확보 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서는 실미도 공작원 성도들도 너무 많 다. 이번 부활절 용상 사건의 진원지인 교회는 모든 책임을 일반 성도들의 과잉 충성 탓으로 돌리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신앙에 관한 한, 상석을 고집하는 집착증의 일차적임 책임은 목사에게 있다. 상석을 꿈꾸는 욕망은 잘못된 성 경 해석과 거짓된 가르침 그리고 허황된 종교적 확신이 낳은 부산물이기 때 문이다. 용상에 관한 인간 본성의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주님 은 오늘도 이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 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눅11:43-44) 그렇다. 주님처럼, 종처럼 낮아 진 채 진리를 먹고 사는 삶이야말로 사분오열된 한국 교회의 아픔을 치유하 는 유일한 방책임을 잊지 말자.
125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7) 나는 참말로 카톨릭 교회의 성도이고 싶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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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8 2006-04-20
김병혁의 vivavox (7) 나는 참말로 카톨릭 교회의 성도이고 싶다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목사님, 카톨릭 교인에게 테러 당하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유럽의 어느 신문사의 만평란에 실린 마호멧 풍자 그림으로 인해 전 세계 이슬람권의 집단적인 반발이 한창 뉴스거리가 되던 당시, 한 동료 목사 님이 지난번 두 차례에 걸쳐 에 게재된 카톨릭 교회와 관련 된 내 칼럼을 읽고서 농담 삼아 던진 말이다. 여전히 카톨릭 교회를 비롯해서 다른 종파, 다른 종교에 대해 나름대로 애착 과 연정을 갖고 있는 분이라면 가히 반갑지 않은 내용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는 진정한 카톨릭인이 되고 싶다’니 대체 어찌 된 영 문인가? 무슨 연예인 커밍아웃도 아니고 독자들을 우롱할 의도도 없다면 이처 럼 섬뜩한(?) 제목을 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카톨릭이라는 낱말의 오용과 참된 의미 오늘날 ‘카톨릭’(catholic)이라는 낱말은 곧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키 는 표현이 되었지만 초대 교회 당시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원래 카톨릭이란 용어는 ‘보편적’ 혹은 ‘우주적’이란 뜻을 지닌 헬라어 ‘카토리코스’ (katholiko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초대교회의 기독교 분파나 이단 종파로부 터 구별된 정통 교회(Orthodox Church)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에서 진술하듯이 적어도 4세기 후반까지의 모든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켜 “거룩한 공회” 즉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 적인 사도적 교회”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이 표 현은 ‘교회의 보편성’(the Catholicity of the Church)이라는 교회의 본질 적인 속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언급되어 오고 있다. 복잡하고 어려운 신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카톨릭이란 본래 교회 는 오고 오는 모든 역사에 걸쳐서 오로지 하나의 기초, 곧 “사도와 선지자들 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 이 된” (엡 2:20) 오직 하나의 교회 가 있을 뿐이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지극히 성경적 인 용어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오직 한 분이시라면 그와 더불어 기동(起動)하 고 있는 모든 신자는 그 분 안에서 한 성령과 한 믿음으로 오직 한 몸으로 연 합된 하나의 교회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카톨릭 신앙이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모든 하나님의 진실을 너무나 교묘하게 거짓으로 바꾸 어 버렸다. 그들에게 카톨릭이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사제들의 종교 적 교훈과 성례와 전통에 의해 다스려지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기관 (catholic organization)으로서의 로마 교회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2. 진정한 카톨릭 교회와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와의 관련성 누가 진정한 카톨릭 교회이며, 누가 참된 카톨릭 교인인가? 비록 질곡의 교 회 역사 속에서 로마 교회로부터 카톨릭이라는 성경적 용어를 강탈당하는 수 모를 겪었지만 그 말에 담긴 숭고한 의미마저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 안에 유일한 참 교회이다.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오직 성령과 말씀의 권위로 세워지는 교회이다. 카톨릭 교 회 는 하나님의 예정의 은총을 입은 주의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이다. 카톨릭 교 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로를 힘입어 오로지 주의 은혜로만 가능한 교 회이다. 카톨릭 교회는 오직 한 신앙과 한 믿음 안에서 한 몸으로 자라나는 교회이다. 카톨릭 교회는 그 어떤 인간적인 기준이나 조건, 차별과 대립에 의 해 요동치지 않는 교회이다. 카톨릭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며, 하나님의 집 이다. 그러나 이 참된 카톨릭 교회를 구별하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근본적 인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칼빈의 언급대로라면 교회를 카톨릭으로 부 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듯이 교회도 둘이나 셋이 될 수 없기 때 문(기독교강요Ⅳ.1.2)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 사실과 전적으로 다르 거나 혹은 뒤틀려 있다. 현실적으로 개신교(Protestant)라는 지붕아래 얼마 나 많은 교단과 교회가 상이한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 능할 지경이다. 우리를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같이 모두들 자신이 속한 교회의 진실 성과 정통성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 가장 순수한 교 회일지라도 불결함과 혼잡함에 빠질 수 있으며, 어떤 교회는 사단의 모임이라 고 할 만큼 극도로 타락할 수 있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25장 4절) 의 가르침은 분명한 사실이며 현실이다. 3. 참된 교회의 표지들 칼빈은 우리들의 이러한 현실적인 고민과 한계 때문에 주께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한 확실한 표지와 증거를 제시해 주셨다 고 하였다. 주께서 그의 백성에게 참된 의미의 카톨릭 교회를 선사하셨듯이 비록 혼란한 지상의 삶일지라도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식별해 낼 수 있는 기 준과 안목을 함께 주셨다는 말이다. “순수한 복음 전파”, “그리스도에 의 해 제정된 성례의 바른 실시” 그리고 “정당한 권징(치리)의 집행”이라는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가 그것들이다. 모든 개혁주의 교회는 지상 교회의 현실적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카톨 릭 교회의 원시적(元始的) 의미를 지상 교회 속에 바르게 투영하는 일이야말 로 참된 교회의 부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 에게 있어서 진정한 카톨릭 교회의 성패는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지를 얼마나 진실하고 정확 하게 적용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카톨릭 교회의 성도이고 싶다. 참말로!
124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6) 진정한 일치는 복음 안에서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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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0 2006-04-14
진정한 일치는 복음 안에서 가능해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해마다 4월이면 잠실벌이 술렁인다. 프로야구 시즌 개막전 행사 때문이 아니 다.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 예배’가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리기 때문 이다. 기실 연륜이나 규모 면에서 여느 스포츠 프로그램이나 정치 집회와도 꿀리지 않을 만큼 초강력 울트라 메머드급 행사이다. 그동안 한국부활절연합회에서 주관하던 것을 이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 총)와 한국기독교협의회(KNCC)의 공동주최로 매년 번갈아 행사 주관을 맡아 치러지는 이 행사는 올해로 60년째를 맞는 데다 10만명 이상이 참석하게 될 것이라니 가히 한국 개신교의 번영과 위용을 만방(?)에 떨칠 호재가 될 듯 싶 다. 하지만 필자의 관심은 이 행사가 지닌 역사나 형식같은 외적 요인에 있지 않 다. 한국 교회의 명실상부한 교회 연합 운동의 성공적인 사례로 인식되는 이 행사와 더불어 항간에 몇몇 복음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교회연 합일치운동 의 실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중국대륙으로부터 몰려 온 불순물 가득한 황사 때문에 순전한 봄날의 햇살을 빼앗긴 느낌이다. 1. 오늘날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의 실상 교회 연합과 일치. 딴에는 좋은 말이다. 아니, 매우 성경적인 표현이다. 연합 과 일치를 통한 교회의 하나됨(Oneness)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이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교회의 속성이다. 모든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가 추구 해 온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한기총과 KNCC, 복음주의 에큐 메니칼 신학자들과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적극적 연대 혹은 암묵적 동의 속 에 진행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오히려 진정한 교회의 하나됨 에 역행하며 성경과 종교개혁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필자 또한 기독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분오열된 한국 교 회와 한국 사회의 암매한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양극화로 치닫는 교회 와 사회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기독교는 대오각성하는 마음으 로 일치,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교회와 사회의 문 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엄연히 다르 다. 사회적 문제는 타협과 조정의 정치 기 술로 해소될 수 있지만, 교회의 문제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따른 진 리(성경)에 대한 진실한 앎과 정직한 적용이 수반되어야 한다. 작금의 교회연합일치운동의 가장 커다란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운동 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이다. 자신들이 설정해 둔 현실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정상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 조차 임의로 변경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의 교회 연합과 일치에 방해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들이 바라는 화해와 균형과 조화의 정신에 부담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신학이든 신앙고백(교리)이든 교회 역사이든 심지어 성경 구절일지라도 배타 적이고 독선적인 자기만의 진리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기세가 등등하다. 화평 과 관용과 다양성 추구라는 사회적 함의를 여론 삼아 교단과 신학의 경계선 을 허물어뜨리고 이제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가톨릭과 타종교와 함께 진 지를 구축하려고 한다. 2. 진정한 교회의 하나됨은 오직 성경 통해 증명되어야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하나됨은 지상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숭고한 명령이 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오늘날의 무분별한 포용주의와 무차별적인 신학 무 용(無用)주의에 근거한 교회연합일치운동을 교회의 진정한 하나됨으로 못박 아 둔 곳은 찾을 수 없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종교개혁의 역사 그 어디 에도 내용이 전혀 다른 교단과 종교와의 화해와 교제를 위해 말씀 전파와 바 른 신앙(교리) 교육을 뒷전으로 밀어내도 된다는 식의 해석을 찾아볼 수 없 다. 만일 하나님만이 참 유일하신 신이시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만 구원이 가능하며, 구원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이며, 66권 성경이 외에 다른 하나님의 말씀(계시)이 없다는 근본적인 신앙 고백까지 의심하고 부정하면서까지 교회 연합과 일치의 장(場)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분리 주의자요 배타주의자요 독선주의자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누더기를 입는 한 이 있더라도 진리를 팔아가면서까지(잠 23:23)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는(고후 6:14) 배교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다른 복음 과 다른 종교와의 공존공영(共存共榮)의 길을 모색 하는 이들이 마치 예수님보 다 사도 바울보다 칼빈보다 박윤선 박사보다 더 너그럽고 인자한 교회의 선생 인양 행세하고 있으니 말이다. 3. 연합이 복음보다 우선일 수 없어 진정한 교회의 하나됨은 결코 인간적인 사색과 경험과 교제의 산물이 아니 다. 오로지 성경의 바른 해석과 바른 적용이 낳는 필연적인 과정이며 결과이 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 (엡 2:22), 오직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 직하게 돌아와야 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관한 참된 신지식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경건의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그 리할 때 비로소 가장 성경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 다.
123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5)_위험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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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 2006-03-24
위험한 만남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1.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과의 모종의 만남 최근 들어 세계 교회 내의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의 양상은 새로운 국면 을 맞이하고 있다. 어느덧 개신교내의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은 보수와 진보 신학의 연대(連帶)를 뛰어넘어 로마 카톨릭과의 적극적인 연정(戀情) 형 태로 발전하고 있다. 모던 레포메이션(Modern Reformation)지에 따르면 2004 년 10월 미국 버밍험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카톨릭과 개신교를 대표 하는 16인의 신학자들이 서명한 “기독교 연합을 위한 프린스톤 제안"(The Princeton Proposal for Christian Unity)이라는 선언문이 채택된 바 있다. 이 선언문은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위험 한 관계가 어떠한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 에 불과하다. 리처드 존 뉴하우스(Richard, J. Neuhaus)는 루터교 신학자에서 카톨릭 사제 로 전향한 자로 이 모임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 물이다. 현재 “First Things"의 편집인으로 복음주의권과 카톨릭계 안에서 얻은 폭넓은 인맥을 바 탕으로 두 교파간의 실질적인 연합과 일치 운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는 1994년 복음주의 베스트 셀러 작가인 동시에 미국교도소 선교회 이사장으로 미국 복음주의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찰스 콜슨(Charles Colson) 과 같이 “복음주의자들과 카톨릭 교도과 함께(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라는 문서를 발행하여 미국 전역에 배포하였다. 두 사람은 이 문 서를 통해 그동안 역사 속에서 복음주의와 로마 카톨릭 사이의 불편했던 신앙 적 관계를 청산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부패를 대처하기 위한! 양자간의 협력과 양보를 다짐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복음주의와 카톨릭과의 연정을 넘어 아예 동침을 선언한 이 문서의 작성 이면에는 현재까지 세계 복음주의 권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과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는 점이다. 영미 복음주의 신학의 상징이 된 제임스 패 커(J. I. Packer), 트리니트 포럼의 오스 귄니스(Os Guinness), 대학생 선교 회의 창설자 빌 브라이트(Bill Bright), 미국 보수우익 복음전도자 팻 로버트 슨(Pat Robertson), 풀러 신학교의 기독교철학 교수 리처드 모우(Richard Mouw), 복음주의 기독교 역사가 마크 놀(Mark Noll), 제네바 대학의 존 화이 트(John White) 등이 그들이다. 이쯤이면 복음주의와 로마 카톨릭은 한 지붕 한 가족이라 할 만하다. 카톨릭 교회와 안방 살림을 차렸는데 에큐메니칼 신 학을 문 밖에 세워둘 이유가 있겠는가? 2. 결코 로마 카톨릭과 하나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들 이 문서를 작성하는데 동참한 한 복음주의 신학자는 자신이 개신교인이면서 도 카톨릭 교회와의 연정 문서에 동참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 다. ①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는 오래 전부터 사도 신경이라는 공동의 신앙고 백을 갖고 있었다. ②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발생했으므로 주 안에 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있다. ③ 작금의 로마 카톨릭은 중세의 카톨릭이 아니며 많은 부분에서 부단한 자기 개혁을 통해 개신교와 가까워지 려고 노력하고 있다. ④ 이미 빌리 그래함이나 오순절 교회 와 같이 많은 개신 교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로마 카톨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⑤ 제3세계 선교 사역에 과도한 경쟁과 중복 투자를 피하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 구원 사 역의 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⑥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 사회 문제를 해결 하는데 있어서 로마 카톨릭과의 직간접 연대는 피해갈 수 없는 선택 사항이 다. 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결코 로마 카톨릭을 신앙 동 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록 위의 주장들이 사람을 설득시 킬 수 있을지언정 성경과 종교개혁의 정당한 변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① 사도 신경에 언급된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는 로마 카톨릭을 가리키지 않을뿐더러 로마 카톨릭의 중심 교리는 비성경적이이며 반 종교개혁적이다. ②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탄생한 종 교이다. ③ 오늘날 외형적으로 중세의 로마 카톨릭을 극복하고 있지만 내용 (신학과 신앙)면에서는 그 어떤 개혁도 없었다. ④ 로마 카톨릭과 연정을 꿈 꾸는 개신교에 속한 인물과 교회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⑤ 선교는 오로지 삼 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다. ⑥ 바람직한 사회 개 혁이란 인위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성경적인 종교 개혁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분명히 말해두자. 수 천 년 간 어떤 내적 변화의 조짐도 없는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명백히 다른 종교이며 다른 형제이다. 하지만 그들의 변신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들의 유혹은 더욱 강렬해지고 있 다. 그들 앞에선 신학적 차이나 교회사적 구별은 더 이상 의미 없는 몸짓이 되어 버렸다. 자유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복음주의자든 심지어 개신교인이 든 타종교인이든 상관이 없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먹음직한 먹이를 내놓고 덥석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화려한 자태와 음흉한 몸짓으로 먹이를 유인하는 식충식물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교회의 연합과 일치’ 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며 몸부림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남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Selected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4)_로마인가? 제네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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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8 2006-03-09
김병혁의 vivavox (4) 로마인가? 제네바인가?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지난달 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 매체들은 연 일 그에 관한 특종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가 전달되고 각 당 대표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해당 교파인 카톨릭 교회는 물론 정 치권과 각종 사회 단체 심지어 타 종교 단체에서조차 앞 다투어 칭찬과 기대 일색의 논평을 내놓고 있다. 과문한 탓에 또 한 명의 추기경이 과연 카톨릭 교회와 한국 사회에 어떤 긍정 적인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이번 추기경 서임을 두고 그리스도 의 몸된 교회요 형제 된 개신교인으로서 ‘국가적인 경사’로까지 여겨야 한 다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백도웅 총무의 호들갑스러운 권면은 왠지 찜찜하다. 1. 카톨릭 교회는 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번 일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중세 시대의 카톨릭 교회와 비교 해 볼 때 현재의 카톨릭 교회의 변신은 가히 성공적이다 할만하다. 중세의 카 톨릭 교회가 억압과 쟁투로 얼룩진 종교 난장판을 연상시킨다면 오늘날의 카 톨릭 교회는 관용과 연합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절대 권력과 절대 독재의 깃발 아래 천년의 역사를 지배해 오던 부패한 독재 종교가 어느덧 민주주의 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호소력 있는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카톨릭 교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분명 카톨릭 교회의 외관에는 큰 변화가 있었지만 정작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내용에는 전혀 변화 가 없었다. 돈으로 외모는 바꿀 수 있지만 마음은 성형할 수 없는 것처럼 말 이다. 새로운 추기경에 대한 관심과 기대만큼 염려와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이 다. 종교 개혁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개신교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역사적으 로 볼 때 카톨릭 교회 내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변화는 종교 개혁에 대한 일종 의 반작용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1540년대 시작된 트렌트 종교 회의를 비롯해 서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 회의를 통해 자신 들의 신학과 신앙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성경과 전승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승 된 대부분의 카톨릭 교회의 신학과 신앙은 많은 부분에서 반종교개혁적이며, 반성경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2. 카톨릭 교회는 반개혁주의적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변함 없 지만 늘 타락과 부패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그들의 주요 교리를 전통적인 장 로교회의 교의학 구도에 맞춰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론: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기록된 말씀 외에도 자연 세계 (일반 계시)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② 성경론: 카톨릭 교회는 신구약 66권 이외에 외경 일곱 권과 교회의 전승 과 전통에 관한 기록인 성전(聖傳, tradition)을 성경 범주에 포함시킨다. ③ 기독론: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서 무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동참한다. ④ 구원론: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일곱 성례(사)를 제정하셨는데, 이것 자 체는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에 참여하게 되는 수단으로 구원을 성취하는 은총 의 효력을 지닌다. ⑤ 교회론 : 교황은 베드로의 사도권을 잇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성경 해석 과 적용과 도덕에 관하여 오류가 없으므로 그에 대해 반박하거나 비난하는 것 은 반그리스도적이다. ⑥ 종말론: 신앙이 완전한 자들은 죽어서 천국에 이르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대부분의 신자들은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 곳에서의 기간은 신실한 자들의 기도와 선행에 의해 단축되어질 수 있다. 하지만 1960대 이후 카톨릭 교회의 이러한 전통 신학은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 하게 된다. 카톨릭 교회는 구원의 영역을 타 종교에까지 확장한 포괄주의, 다 원주의 신학을 공식화함으로써 포용과 연합의 상징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명실 상부한 선두주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반종교개혁적 카톨릭 교회는 내적 변화 없는 외 적 변신을 통해 종교적 이미지를 극대화해 가는 반면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개신 교회는 내용과 외형에 있어서 심각한 변형이 나타나고 있 다. 카톨릭처럼 종교개혁적인 신학적 엄밀성을 포기한 채 할 수 만 있다면 인 간과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신학과 교회가 개신교 안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3. 우리의 냉엄한 현실과 냉정한 물음 그럼에도 오늘날 개혁주의를 추구한다는 교회와 신학교의 강단에서조차 이토 록 위험천만한 카톨릭 교회를 향한 확신에 찬 경계와 경고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뿐더러 카톨릭 교회와 불온한 동거 관계를 유지하는 개신 교회를 향한 냉 철한 반성과 절박한 충고의 메시지를 찾기 어렵다.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슬 픈 현실이다. 자문한다. 새 추기경의 로마 입성을 앞두고 환호작약하는 무리 틈에서 우리 의 갈 길을 돌아본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람들의 환호와 선 망만이 가득한 로마인가? 아니면 진리를 위해 고난과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 는 제네바인가? 진정 로마인가? 진정 제네바인가? * vivavox(비바복스)는 ‘살아있는 목소리’란 뜻의 라틴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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