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21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3)_열정 칼빈주의자의 고백 (72)
rpress
6316 2006-02-22
열정 칼빈주의자의 고백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1. 익숙하지만 낯선 이름이 된 칼빈주의 더 이상 우리에게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명칭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 다. 하지만 오늘날 칼빈주의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냥 곱지 않다. 역사 적으로 칼빈주의와 불편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교회와 성도들이야 그렇 다손 치더라도 소위 칼빈주의를 신학적 이념으로 삼는다는 교단과 신학교와 교회에서조차 칼빈주의와 칼빈주의자가 점차 냉대와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 는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칼빈주의의 뿌리깊은 역사와 내용만큼이나 칼빈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과 혐오가 동시에 존재한다. 칼빈주의 신학을 배웠다는 하는 신학자와 목회자 중 에서도 칼빈주의의 특정 교리(예를 들어, 예정과 칭의)를 적대시하는가 하 면, 칼빈주의를 죽은 정통주의(Dead Orthodoxy)나 냉랭한 교조주의(Cold Dogmatism)와 동일시하곤 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는 과거의 정통 혹 은 교권을 지 켜주는 울타리는 될지언정, 현대 교회를 견고하게 지켜낼 만한 철옹성과 같은 존재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칼빈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칼빈주 의가 태동했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으며, 또한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질 내용들이다. 진정한 칼빈주의자라면 일희일비(一喜一 悲)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칼빈주의에 관한 이같은 날선 비판과 심각한 왜 곡 현상을 남의 일처럼 여겨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열정 칼빈주의자에게 는 역사적 칼빈주의에 대한 바른 앎과 더불어 참되게 변호해야 할 책무가 주 어져 있기 때문이다. 2. 칼빈주의의 독특성과 차별성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 은 칼빈주의자라는 말은 칼빈를 반대하는 적들로부터 주어진 것인데, 칼빈 사 후에 일어난 종교적인 논쟁 과정에서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 을 일컫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 후반이후 루터파와의 성찬 논쟁을 계 기로 루터파는 복음주의자로 불린 반면, 칼빈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개혁파 혹 은 장로파라고 불렀다. 이것 은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이 지닌 신학적 독특성과 신앙적 차별성을 가리키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자는 내용상 개혁파 혹은 장로교파로 불릴지라도 결코 루터주의적 복음주의자는 될 수 없다. 오늘날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막강한 영향과 선전으로 인해, 교파간 의 신학적 차이와 구별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칼빈주의와 루터 주의, 칼빈주의자와 복음주의자간에는 엄연한 내용적 차이와 신학적 구별점 이 존재한다. 양자의 다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진리를 진리 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엄밀한 해석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은 치열한 신학 논쟁과 경건한 학문 탐구 과정을 통해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적 기준을 찾고, 그것을 신자의 삶에 정당하게 적 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칼빈주의자들은 기독교 역사이래 가장 숭고하며 적정한 신앙고백서 들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개혁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3대 신앙 고백서(벨 직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와 장로교회의 신앙 표 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그것들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은 ‘복음에 대한 정당한 변호’(빌2:16)이며, ‘성도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해 이 유를 묻는 자들을 위한 진실한 답변’(벧전 3:15)인 셈이다. 역사적 칼빈주의 자들이 교회와 신앙을 세움에 있어서 성경과 더불어 이러한 신앙 고백서를 함 께 강조한 이유이기도 한다. 3. 열정 칼빈주의자들의 고백 칼빈주의자들이여!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 나 노하지 말라.’ 확신컨대, 칼빈주의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신학이며, 사도 바울에게서 완성되고, 어거스틴과 교부들로부터 재확인되었으 며, 칼빈을 위시한 수많은 종교개혁자들로 인해 꽃을 피운 가장 완성도 높은 신학적 체계이다. 진리를 아는 일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은총의 열매를 품 고 있는 칼빈주의자임을 감사하고 기뻐하자. 진리의 열정으로 가득 찬 칼빈주의자들이여!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 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자신의 전 생애를 살아가 며, 구원에 있어서 자아의 존을 전적으로 배제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 로 의지하는 사람이다”는 칼빈주의자 워필드(B.B.Warfield)의 고백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자.
120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2)_개혁된 교회Reformed는 항상 개혁되어 (20)
rpress
5060 2006-02-17
김병혁의 vivavox (2) “개혁된 교회Reformed는 항상 개혁되어 간다Reforming” 김병혁 목사/ 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루터와 달리 칼빈의 종교개혁의 성격은 개혁된(Reformed) 것으로 개혁해 (Reforming) 가는 성격이 강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사람들을 ‘루터 파’라고 부르는 반면 칼빈의 종교개혁을 존중하는 이들을 가리켜 ‘개혁 파’ 혹은 ‘개혁주의자’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 간다”는 명제는 칼빈주의 종교개혁의 우산 아래 행동하는 모 든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추구해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승해 나가야 할 교 회 개혁의 숭고한 정신이다. 오늘날 교회 개혁, 제대로 돼 가는가? 이 명제에 담긴 문구를 재해석해 본다면 ‘늘 개혁되어가지 않는 교회는 결 코 개혁된 교회일 수 없다’는 역설적 교훈을 얻게 된다. 사실 ‘개혁’이라 는 낱말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적확한 표현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정 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개혁’이라는 화 두는 가장 인기 있는 단골 메뉴이다. 한국 교회도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어느 교회나 교단 심지어 기독교 단체를 막론하고 ‘개 혁’을 부르짖지 않는 곳이 없다. ‘교회 개혁’라는 문구는 더 이상 이 시대 의 교회로서 비켜갈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역사가운데 개혁이라는 낱말만큼 흔한만큼 남용이 많은 표현 또한 찾기 힘들다. 저마다 종교개혁을 운운하며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개혁이란 어딘가 종교 개혁자들이 부르짖던 개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①교의와 예식으로부터 탈피한 무형식적인 예배를 주창 하고, ②회중 중심의 민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 행정과 운영을 강조하며, ③ 교리와 신앙고백대신 생활과 적용중심의 성경 공부에 관심을 갖고, ④성경 강 해보다 인간 중심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는 설교를 즐기며, ⑤철저한 성경 연구보다 시민들의 종교적 웰빙(well-being)을 위한 대안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주력하며, ⑥일반인들과의 부담 없는 만남과 교제의 장소로서 예배당을 개 방하는 일들을 마치 진정한 교회 개혁의 전리품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이들에 있어서 교회 개혁이란 21세기의 시대 정신이 요구하는 변화 (change)와 혁신(innovation)에 의한 교회의 변신(transformation)과 다르지 않다. 신앙인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라도 감동시킬만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내고 만들어 가는 과정을 ‘개혁되어 가는 교회의 참 모습’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창안해 낸 세상적 방식에 의한 변화와 혁신으로서 교 회 개혁이 오히려 종교개혁의 개혁 정신에 역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이 낳은 좋은 열매조차 외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 각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여전히 종교개혁의 후예이며 교회 개혁의 선구자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교회 개혁에 이르는 부정과 긍정의 길 교회는 세상의 어떤 공동체나 모임과 근원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별한 방식에 따라 앉고 일어선다. 이 말은 교회 개혁의 원리와 적용을 세상의 방식과 관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다. 그렇다면 진정한 교회 개혁은 어떻게(과정), 무엇 으로(내용) 이루어지는 가? 부정(nagative)의 방식을 통한 교회 개혁의 길이 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 어야 한다’는 표현 속에는 이 세상 가운데 서 있는 교회의 현실적 열악성이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의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주님 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일지라도 세상의 죄악과 부패한 인간의 심성으로 인 해 언제라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교회 개혁을 원한다면 교회의 모든 악행과 잘못으로부터 과감하고 신 속한 단절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 범람해가는 거짓 예배, 위장 된 교훈, 잘못된 확신 그리고 헛된 열심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각성이 있어 야 한다. 혹시 그러한 것들이 사람들로부터 각광받는 요소가 된다 하더라도 종교개혁의 바른 지침으로부터 검증받지 못한 경험과 신념이라면 철저하게 내 려놓아야 한다. 이 일은 교회 개혁의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과감하고 철저한 자기 부정이 있고 난 후에 우리는 교회 개혁의 긍정적 (positive) 국면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 개혁을 이끌고 나가는 동력(動力)을 확인하는 일이다. 교회를 항상 개혁해 나가기 위 해서는 이미 개혁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교회를 개혁하는 힘의 원천은 이미 개혁된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개혁된 것이 원리라면 개혁되어 가 는 것은 적용이다. 원리 없는 적용은 근거 없는 사설(邪說)에 불과하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 처럼 진실한 교회 개혁을 원한다면 먼저 ‘옛적 길,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 아보고 그리고 행해야 한다(렘 6:16). 그렇다면 교회 개혁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 할 그 길은 어디이겠는가? 우리의 신앙의 선조인 칼빈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걸었던 길이다. 그 곳에서 이 미 개혁된 신학과 신앙의 원리를 순전하게 찾아서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한 종교 개혁을 완성해 가는 최선의 선택인 동시에 최상의 결정임을 잊지 말 자. * vivavox(비바복스)는 ‘살아있는 목소리’란 뜻의 라틴어입니다.
119 no image 김병혁의 vivavox(1)-황우석 신화와 한국 교회
rpress
4851 2006-02-16
김병혁의 vivavox (1) 황우석 신화와 한국 교회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개신개혁교회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같이 헛되다’는 전도서 기자의 고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요즘처럼 이 말씀이 뼈 속 깊이 느껴지 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1월 10일, 지난 세밑까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이 목을 집중시켰던 황우석 교수팀의 에 관한 서울대조사위의 최 종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가히 참담함 자체였다. 서울대조사위는 ‘애초에 체세포줄기세 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이언스지에 실린 두 편의 논문은 줄기세포 없이 조작되었으며, 황 교수가 최근까지 원천기술보유설의 근거로 주장하던 배반 포 형성기술도 독보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줄기세포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조작이었고 속임이었다는 말이다. 일 장춘몽이라 했던가. 황 교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온 국민이 울고, 웃 던 순간들이 덧없기 그지없다. 세상 성과주의와 교회 성장 주의의 유혹과 덫 황 교수 사태의 근원에는 성과주의에 매몰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의식이 자 리잡혀 있다. 모름지기 과학은 사물에 관한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아무 리 좋은 논리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실험과 검증 과정을 통해 확정되지 않으 면 그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정상적인 과정 없이 합법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없다는 것은 과학의 불변의 공리(公理)이다. 하지만 황 교수는 국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원대한(?) 목적을 핑계로 과학자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 심과 윤리를 포기하고 말았다. 한국 교회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소위 ‘목회 성공병’과 ‘교회 성장병’ 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신학과 신앙 고백과 교회 전통도 필요 없다. 그저 방 법과 수단의 활용도 차이만 있을 뿐 교인 수를 늘리고 교회 규모를 확장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신념이 교회의 존재 이유로 대치되고 있다. 신 학은 과학보다 신실하며, 신앙 고백은 과학적 공리보다 정직하며, 교회 전통 은 과학 체계보다 숭고하거늘 교회의 외적 성장과 양적 부흥이라는 현란한 선 전 문구에 속아 개혁 신앙의 기개와 품위를 포기한 한국 교회의 모습속에서 황우석 신화의 몰락을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진실과 정직을 포기한 과학과 교회의 현실 황 교수를 보면서 더욱 분노하게 되는 것은 그의 거듭된 거짓말 퍼레이드 때 문이다. 그의 거짓말의 위력은 세계적인 권위의 과학 잡지와 과학자들, 정부 관료와 학계와 국민을 한꺼번에 속일만큼 대단하였다. 거짓말로 인한 면피(面 皮)작전이 늘 성공적이었던지 그는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또 다른 거짓말을 일삼았다. 진실과 정직을 담보로 하지 않은 과학은 과 대망상 환자의 손에 들린 폭탄과 같다. 교회와 목사의 생명은 진실과 정직에 있다. 과학자야 자신과 논리에 충실하 면 되지만 교회와 목사는 양심의 주재자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 드신 모든 인격체와 사물에 대해 진실해야 한다. 교회와 목사의 진실의 척도 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말씀 앞에 진실하지 않는 교회의 말은 하나님을 속 이는 가장 나쁜 거짓이며, 말씀 앞에 정직하지 않은 목사의 말은 영혼을 죽이 는 사단의 가장 좋은 도구임을 기억하자. 무지와 무능의 낳은 최악의 결과 황우석 신화는 황 교수의 출 중한 개인기(?) 덕분만은 아니었다. 황 교수 우상 화 의 이면에는 생명공학의 미래에 대한 제대로 된 비전 없이 오로지 국익 창 출의 기회로만 삼고 열광 모드로 일관해 온 정부와 황 교수의 업적과 인기를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는 기회로 활용한 정치세력과 과학적 진실을 외면한 채, 선정적인 발상들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언론과 과학적 사실보다 애국 적 감정에 도취되어 과학을 이념의 대상으로 혼돈한 대중들이 만든 총체적 무 지와 무능의 합작품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를 돌아보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 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이 온 사방에 창궐해가 고 있다. 교회의 십자가 수와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목사의 수는 해마다 증가 하고 있지만 진정한 복음에 대한 갈증만 더해간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 른 앎과 진실한 삶이 도외시되고 있다. 이는 영역 확장에만 골몰하는 교단과 신학교,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목사들, 기관 전단지 수준의 기독 언론 그리 고 바른 배움과 확신 없이 세상에 내몰린 유약한 성도들이 만든 신학적 무지 와 신앙적 무능의 당연한 귀결이다. 차제에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철저하고 냉정한 사색과 반성의 계기를 삼아 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가운데 숨어 있는 황우석 신화의 환상 을 깨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 vivavox(비바복스)는 ‘살아있는 목소리’란 뜻의 라틴어입니다.
118 no image <성주진 칼럼> 신앙 유전자?
rpress
4943 2006-02-16
성주진칼럼 신앙 유전자? 성주진 교수_합신 구약신학 교수 연말을 맞아 지난 한 해의 일들을 돌아보면서 신앙생활의 면면을 반추해 봅니 다. 얼마나 많은 ‘이문’을 남겼는지, 감사와 더불어 아쉬움이 많은 때입니 다. 좀더 믿고 신뢰하였더라면렁렁 좀더 사랑하고 좀더 섬기고 좀더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죄송스러운 것입니다. 반복된 신앙의 기복을 탓하는 연례 행사를 벗어나 원하는 수준에서 신앙생활 을 영위할 어떤 묘책이 없을까요? 최근의 유전자 연구와 유전공학의 발달이 유력한 후보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업적’ 으로 평가받는 유전자 연구는 생물학적 정보를 이용하여 무병장수를 이룰 수 있다는 유토피아의 꿈을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유전학적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과제는 인류에게 맡겨진 중대 한 도전입니다. 기독교회는 이러한 정보 자체를 거부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퇴 행적 복고주의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책임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자 이 땅 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러한 정보를 어떻게 관리하며 사용할 수 있을지를 심사 숙고하는데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벌써 믿음마저도 유전자에 의하여 결 정되는 것으로 보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단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종교적인 믿음이 인간 본성의 표현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신을 믿게 하는 일단의 유전자들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심지 어 어떤 신경학자는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에게서는 뇌의 측두엽에서 더 크 거나 활성도가 높은 신경모듈이 발견된다고 주장하며 광신도의 경우는 일종 의 측도엽상의 간질현상이라고 합니다(리들리).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지 않더라도 유전인자는 인간 설계도요 청사진이자 인간의 운명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전학의 발전과 경향에 대하여 잘못된 두 가지 대응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하나는 유전자 결정론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신앙에 관하여는 한 사람의 신앙과 불신은 유전적으로 그렇게 프로그램 되었 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기계론적 숙명론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자세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선택의 자유 와 책임과 아울러 죄의 실체와 구원의 필요성이 부정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소위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는 유전자를 조작하여 믿음을 강화하 는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은 좀더 큰 믿음으로, 믿음이 지나치다 싶은 사람은 완화시키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믿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처럼 변경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믿음을 가 질지 결정하는 그것만이 믿음의 내용이 되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를 떠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인간에 게 있어 가장 복된 자리는 피조물의 자리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 로 지음을 받았기에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자기 자리를 떠나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할 때에 하나님이 선을 그어 제자리에 주저앉힌 일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발달한 기술로 하나님 대신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한 바벨탑 사건은 분열과 파국을 초래하였습니다. 오히려 인류는 기술을 노아처럼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에 따라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는 그의 식구들 을 구출하 는 수단이자 인류의 구원을 준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책 임은 유전자의 생물학적 정보가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온 인격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믿음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서 어떤 유전자의 교체 로 치환될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사랑, 그리고 성령의 역사와 순종의 삶을 대신할 수 있는 유전학적 대체물은 없습니다. 더욱 진리 를 붙잡고 창조의 질서를 지키며 사랑과 순복에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근 본적인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비록 기복이 있을지라도 믿음의 삶은 선순환을 이루는 나선형의 모습을 지니 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인류의 미래는 유전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 님께 달려 있으며 인간은 이 놀라운 선물을 선용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성주진 칼럼’을 애독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117 no image <성주진 칼럼> 탕자 콤플렉스
rpress
5129 2005-11-24
탕자 콤플렉스 성주진 교수_합신 구약신학 교수 ‘탕자의 비유’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 를 소재로 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죄인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 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탕자가 걸친 남루한 옷 은 아버지를 떠난 초라한 궁상을 대변하고, 그 위를 덮은 넓은 소맷자락은 아 버지의 가없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적인 모습 때문인지 우리는 탕자를 은근히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 다. 탕자가 겪은 고생은 싫지만, 그가 보여준 극적 전환은 우리의 밋밋한 신 앙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이러한 ‘탕자 콤플렉스’는 ‘나이롱 신자’를 자처하는 교인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신앙인도 예외가 아닌 듯 합니 다. 어려서 믿은 이들 중에는 한 잔 걸치지 못하고 한 모금 빨아보지 못한 ‘억울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박해자였지만 돌이킨 후에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 주님을 위 해 자신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어거스틴도 방탕한 삶과 이교에서 극적인 회심 을 경험한 후에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신학은 그의 신학에 대한 주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극적인 회심의 이야 기도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일종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탕자와 같이 확실한 은혜를 체험하고자 하는 소원입니다. 확실한 변화와 무조건적인 용납을 사모하는 마 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형은 아버지와는 달리 동생을 극도로 미워하였 습니다. 탕자 콤플렉스는, 어느덧 동생이 아닌 형의 태도에 공감하는 우리의 바리새적인 율법주의를 허물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풍부한 경험과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 닙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신자, 말씀을 더 실감나게 전할 수 있는 설교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명제와 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감격, 더 절실한 체험의 이야기가 있을 때 더 풍요로운 삶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콤플렉스의 배후에는 낭만주의적 환상이 어른거리고 있습니 다. 소설이나 드라마의 극적 반전이라 는 이야기 구조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탕자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극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집을 나간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실감 나게 느끼려고 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는 돌아올 의사가 전혀 없이 아버지 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죄의 실존적인 모습을 외면하고 아름답게만 보는 것은 착각입니다. 죄는 낭만 이 아니라 영혼의 상실을 초래하는 소외입니다. 불신앙의 삶을 낭만으로 포장 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쉽습니다. 잘못된 낭만주의는 악어와도 같습니다. 악 어는 몸을 물에 숨기고 조는 듯 눈을 감고 있다가 먹이감이 가까이 다가오면 전광석화같이 낚아채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탕자에 대한 부러움의 이면에는 은밀한 욕망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 도 탕자같이 한때나마 세상을 마음껏 즐겨보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 욕망 은 더욱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드 러난 자기 안에는 숨겨진 자아가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욕망은 그림자처 럼 밖으로 드러난 인격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탕자 콤플렉 스에는 신학적인 오해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네가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 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을 오해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이자, 은혜의 오용이며 남용입니다. 더 큰 경험을 얻기 위하여 일부러 죄 를 짓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 다. 탕자 콤플렉스는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일깨워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신앙생 활이 영적 권태증으로 무기력해졌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부해져가 는 믿음을 극적인 현상으로 타파하겠다는 생각은 이해가 가지만, 일상적인 삶 과 통상적인 일에서 순종으로 영위하는 신앙생활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한 건 크게 하려는 심리를 버리고 날마다 작은 간증을 쌓아가는 삶을 가꾸어 야 할 것입니다.
116 no image <성주진 칼럼> 난 사람, 된 사람
rpress
5441 2005-10-28
난 사람, 된 사람 성주진교수_합신 구약신학 교수 우리는 종종 ‘먼저 사람이 되어라’는 교훈을 베풀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 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난 사람’이 되는 데 힘을 쏟을 것인가, 아니면 ‘된 사람’이 되는 데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난 사람’은 잘난 사람의 줄임말로 대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 다. 중성적인 의미로는 뛰어난 재사나 유능한 사업가, 또는 유명 연예인 등 과 같이 보통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눈에 띄게 활동하는 사람을 가리 킵니다. 인격적으로 다소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은 난 사람이야’ 라는 말로 긍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난 사람’과 대조되는 ‘된 사람’은 성숙한 인품을 갖춘 사람, 인격적으 로 본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보여준 사람, 곧 사람다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은 겸손하게 예의를 차 리는 사람을 ‘아무개는 사람이 됐 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된 사람은 나름대로 공동체적 가치관을 구현하 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에 자기만 튀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은 인성과 인격과 같은 내적인 특성을 갖추었다고 인정된 사람 을 가리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은 ‘된 사람’이 되기보다 ‘난 사람’이 되기 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잘난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남도 내가 잘 난 것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기 쉽습니다. “2 등은 필요 없다. 세상은 오로지 1등만을 기억할 뿐이다”는 광고 카피가 이 런 사회적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난 사람’은 이렇게 경쟁 시대의 모토로서 튀고 싶은 열망, 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찬 시대 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난 사람’을 추구하는 분위기에서 ‘된 사 람’ 담론이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도 ‘난 사람’을 삶의 목표와 축복의 내용으로 제시한다는 주장이 제기 되곤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가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 에게 주어진 축복으로서, 개인적인 삶의 목표가 아니라, 공동체가 누리는 복 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삶이 가져오는 질적인 우월성이 양적 표현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 나 라의 뛰어남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인 예로 요셉은 ‘난 사람’이기 이전에 ‘된 사람’입니다. 총리가 되 기 이전에 유혹의 거절과 감옥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사람됨을 검증받 았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은 먼저 된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 난 사람이 되 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원칙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직분자에게 사역에 앞서 신앙인격이 요청 된다는 말과 상통하는 말입니다. 난 사람과 된 사람은 사역의 원리가 다릅니다. ‘난 사람’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잘남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삼게 됩니다. 그 러나 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기능에 앞서 인격을 요구하시는 이유를 볼 수 있습 니다. 어느 신학교의 교육목표에서 ‘학자가 되라’는 말 앞에 ‘신자가 되 라’는 말이 나오고,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는 말 앞에 ‘성자 가 되라’는 사실도 이와 같은 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난 사람도 아니고 된 사람도 아니다’라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 는 삶이야말로 된 사람으로 사는 길이요, 하나님의 일군으로 충성하는 삶이야 말로 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된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 가운에서 이미 난 사람이 되었기 때문 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신분과 자리를 알고 누리는 삶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 된 사람이 되고 난 사람이 되는 복음적인 방법입니 다.
115 no image <성주진 칼럼> 일상과 이벤트
rpress
4943 2005-09-30
일상과 이벤트 성주진 교수_합신 구약신학 민간에 결혼은 일상, 연애는 이벤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소 묘한 말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일상과 이벤트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상은 매일매 일 반복되는 삶이기 때문에 평범하고 단조로울 수 있지만, 이벤트는 모처럼 겪는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에 일상의 따분함에서 벗어나 색다른 경험을 기대 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일상과 이벤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회사 나가는 날은 일 상이요, 휴가는 이벤트입니다. 월급은 일상이요 보너스는 이벤트입니다. 정기 휴일은 일상이지만 추석은 이벤트입니다.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일상이지 만 온 가족이 모처럼 외식을 하는 것은 이벤트입니다. 요즘은 이벤트를 잘 챙 겨야 감동을 준다고 해서 목하 이벤트 회사가 성업 중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일상과 이벤트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대표적인 일상은 매일 의 경건생활과 매주 예배에 출석하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반면, 어쩌다 열리 는 특별 집회나 금식기도 등은 이벤트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나 님과 누리는 통상적인 교제는 일상이지만 하나님이 어떤 기회에 특별한 경험 을 주신다면 이는 이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상과 이벤트는 지켜주어야 할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를 바꾸어서 일상 을 이벤트로, 이벤트를 일상으로 만드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는 일상 의 삶인데 어쩌다 특별행사처럼 실시한다면 경건생활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 제입니다. 성경읽기와 묵상도 일상에 속한 일인데 어쩌다 시행하는 이벤트로 삼는다면 역시 곤란합니다. 반면, 특별한 경험이 뜻밖의 은총이 아니라 매일 배급되는 생필품과 같다면 특별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보다는 이벤트에 사람의 마음이 쏠리기 십상입니다. 이벤트는 일 상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훨씬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이 기대되기 때문일 것 입니다. 담임목사님의 설교보다 어쩌다 듣는 강사의 특강이 멋지게 느껴지는 것은 내용의 새로움도 있겠지만 특강의 이벤트적 성격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 떤 체험을 추구하는 것도 일상의 경건을 경시하고 특별한 이벤트를 바라는 것 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일상과 이벤트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약의 경우, 경건 한 성도가 드리는 매일의 기도와 안식일의 예배, 그리고 각종 절기 등이 아우 러져 일과 휴식, 일상과 이벤트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나가 자녀가 없 어 서러움을 당하는 중에 남편의 고임을 받는 것은 일상이지만, 일년에 한 번 실로의 전에 올라가는 것은 이벤트입니다. 소년 다윗이 양을 치는 것은 일 상이나, 전쟁터에 심부름 가는 것은 이벤트입니다. 신약에서 일상과 이벤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예는 믿음입니다. 구원을 받 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있어야 할 일 상적인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이벤트처럼 어쩌다가 찾아온다면 신앙생활 은 실로 고달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상한 때에 비상한 믿음을 은사 로 주셔서 비상한 사역을 이루도록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 믿음은 이벤트적 인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성령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칙적으로 항상 성령의 주장과 인 도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성령충만은 일상에 속합니다. 늘 성령을 근심케 하고 소멸하다가 어쩌다 특별행사처럼 반짝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이 더욱 충만해져서 기사와 이적 을 베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상적 인 충만이 있고 사역을 위한 특별한 충만도 있습니다. 일상과 이벤트가 균형을 잡아야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 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비상한 체험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앙의 수준 이 한 단계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이 없는 비상 은 추락하기 마련입니다. 일상은 이러한 특별한 비상을 내면화하고 생활화하 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인격을 다져주는 현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상 과 이벤트,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수 놓아 주는 신령한 씨줄과 날줄입니다.
114 no image <성주진 칼럼> 엘리사 스캔들
rpress
5704 2005-08-31
엘리사 스캔들 성주진 교수_합신 구약신학 각양각색의 스캔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추문을 의미하는 ‘스캔들’이라는 말은 원래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뜻하는 헬라어에서 나왔습니다. 숨 돌릴 사이 없이 불거지는 정치적 스캔들 외에도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모든 사건 들은 다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스캔들이 있습니다. 오늘 생각해 볼 스캔들의 중심에는 엘리사가 있습니다. 엘리사가 벧엘의 아이들을 저주하여 42명이나 곰에 물려 죽게 한 사건은 현대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심각한 스캔들입니다(왕하 2:23- 24). ‘천사표’ 아이들의 ‘부조리한’ 죽음은 ‘사랑의 하나님’을 의심하 게 만들 수 있는, 풀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스캔들은 먼저 젊은 세대의 스캔들을 드러냅니다. 이들의 행동은 분명히 선지자를 비웃는 행동입니다. ‘대머리’와 ‘올라가라’가 반복되는 조롱의 노래에는 철부지 의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언약의 하나 님에 대한 강한 거부와 배반의 몸짓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보기 싫은 당신, 빨리 꺼지세요’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무 지 위에 쌓아올린 종교의 성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는 신앙교육의 황무지 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의 스캔들은 곧 기성세대들의 스캔들입니다. 이들은 북 이스라엘 의 종교적 중심지인 벧엘의 아이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과 태도는 벧 엘 어른들의 태도와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 니다. 부모나 공동체가 평소에 집에서나 집회에서 보여주었던 은밀한 태도 를 아이들이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엘리사 스캔들은 하나님 백성 전체의 총체적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스캔들은 말씀의 스캔들을 초래합니다. 선지자는 언약의 수호 자로서 언약을 어긴 백성들에 대하여 언약 저주를 선포합니다. 선지자는 하 나님을 찾는 자에게 복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포 함으로써 언약을 수호할 임무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만일 엘리사 가 언약을 깨 뜨리는 백성에 대하여 저주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그의 침묵은 심각한 직무유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말씀의 스캔들은 심판의 스캔들입니다. 42명이 죽은 것은 엘리사의 개인적 인 보복이 아니라 언약 저주에 따라 합당하게 시행된 하나님의 처벌입니다. 이들의 죽음은 언약의 하나님이 자신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전쟁 을 선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하나님 의 ‘원수’가 되어 진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멸되어야 할 것 이 진멸될 때에 하나님의 복이 회복될 것입니다. 엘리사의 스캔들은 은혜의 스캔들로 마무리됩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이 하나 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한 번도 선한 왕의 통치를 받아보지 못한 북 이스라 엘 백성이 엘리사를 통하여 언약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역사하 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말씀의 스캔들이 있는 곳에는 은혜의 스캔들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책망의 자리를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 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에게는 은혜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최고의 스캔들은 역시 십자가의 스캔들입니 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죄인을 사랑하시니 십자가는 도덕적 스캔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 많은 피조물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십자가는 신학적 스캔들입니다. 의인 이 아닌 죄인이 구원을 받으니 십자가는 종교적 스캔들입니다. 완벽한 사람 이 아닌 부족한 사람에게 은혜가 임하니 십자가는 보응의 스캔들입니다. 지 혜 있는 말이 아니라 미련한 복음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니 십자가는 철학적 스캔들입니다. 세상은 온통 쓸데없는 스캔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십자가의 스캔들만이 세 상의 스캔들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스캔들은 능력의 스캔들이기 에 성도가 세상을 복음의 스캔들로 가득 채울 때 세상의 스캔들은 십자가의 스캔들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스캔들을 세상의 지혜와 윤리 로 순치시키지 않고 스캔들로 스캔들 되게 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믿음입니다.
113 no image <성주진 칼럼> 영악한 그리스도인의 초상
rpress
5278 2005-08-03
영악한 그리스도인의 초상 성주진 교수_합신 구약신학 교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신약시대에 유대사 람들은 초대교회의 거룩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경외심을 가지고 제자들을 칭 송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호감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여론조사 는 친절(?)하게도 교회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낮다는 통계를 보여줍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가 이렇게 비쳐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 니다. ‘기독교인은 영악하다’는 인상도 한몫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 다. 사실 영악한 그리스도인의 초상은 바울이 그리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 의 모습과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도 양같이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 혜로워지라고 당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당부를 영악해지라는 말씀으로 오 해하기도 합니다만. 뱀 같은 지혜는 비둘기 같은 순결과 짝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뱀 같은 지혜는 영악한 지혜가 아니라 성결한 지혜를, 순결을 포기한 영악함이 아니 라 순결을 지키기 위한 전략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교훈은 핍박을 각오한 전도자들을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영악하게 굴 면서 뱀의 지혜를 말하는 것은 오늘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 는 이들에게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영악한 성도의 초보단계는 양다리 걸치기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 성들처럼 담을 타고 앉아서 하나님과 세상 중에서 유리한 쪽, 상황에 따라 득이 되는 쪽을 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장애자를 돕는 행사에 참여하면 서 다른 때는 장애시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남이 하는 것은 투기이 기만 내가 하는 것은 투자요, 남의 공돈은 불로소득이지만 나의 불로소득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깁니다. 영악한 종교인은 제도를 잘 이용합니다. 그중 압권은 예수님이 지적하신 고 르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경건하다는 명예를 얻고, 부모를 봉양하지 않았다는 비난도 피하면서,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입니다. 그러나 이 관행은 드릴 생각 없이 서약하고, 자기 욕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합리화하며, 자기 입맛대로 성 경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신 앙적, 신학적 기만행위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도 오용을 피할 수 없습니 다. 열매가 없는 삶을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은총에 기대어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이미 십자가를 지셨다는 이유 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이 이미 영단번의 제사를 드렸다는 이유로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 를 위해 죽으신 사실은 강조하면서도 형제를 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외면합니다. 말로, 머리로, 감정으로는 열심을 내지만 자신을 드리 는 일은 절대 사절입니다. 이렇게 영악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를 자기 희생 이 없는 종교로 만들어 버립니다. 영악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까지도 이용합니다. ‘나중에 회개해도 하나님은 용서하실 것이다. 이것이 그의 직업이니까’라는 계산으로 심상하 게 죄를 짓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용서를 당연시하 면서 회개의 제스처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마저도 요령껏 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 다. 영악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 교리도 얼마든지 오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이 좋다고 자랑 합니다. 성경은 이런 믿음을 허탄한 믿음이라고 책망하면서 심은 대로 거두 는 원리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일수록 그 믿음으로 인 해 하나님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손해를 입어도 감사하고, 환란을 당해도 기뻐하며, 박해를 받아도 축복하며, 까닭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리석은’ 제자가 되기에는 우리가 너무 영악해진 것은 아닌지요. 조금 어리석고 뒤떨어져 보여도 그리스도를 본받 는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히 영악한 그리스도인의 초상을 지우 고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의 초상을 그려봅니다.
112 no image <성주진 칼럼> 올무인가, 도약판인가?
rpress
5040 2005-07-07
올무인가, 도약판인가? 성주진 목사/ 합신 구약신학 교수 최근 들어 “나는 헛살았다”라는 푸념을 종종 듣습니다. 부동산가격 급등 이 낳은 심각한 부작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아파 트값과 땅값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 겨 주고 있습니다. 뭔가 내놓을 만한 업적이 없는 터에, 재산이라도 변변히 모아놓지 못한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지나간 과거를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경 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재산으로 인한 상실감은 아닐지라도 낭비된 삶, 허비 된 시간, 그리고 다양한 실패와 좌절이 불러온 죄책감은 그리스도인의 양심 을 괴롭히기 일쑤입니다. 크고 작은 죄책감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인국의 밧줄에 매인 걸리버처럼 무력하게 만들고 결국은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마저 도 작아 보이게 만듭니다. 과거의 실패와 좌절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면 어쩔 수 없 n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열악한 여건 때문에 생긴 일 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거를 그대로 수용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상처는 더 욱 깊어지고 나은 듯 하다가도 비슷한 환경에 부닥치면 다시 도지고 불거지 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런 과거는 자유를 속박하는 올무입니다. 과거의 올무를 깨뜨리고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와 왜곡 으로 점철된 과거와 화해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관건은 화해하는 방법입니 다. 과거와 화해하고 과거를 수용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상처는 합병증을 일으키고 과거의 멍에는 계속해서 믿음의 자유로운 비상을 방해할 것입니다. 물론 과거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과거와 화 해하는 문은 항상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과거를 수용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 를 들려줍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하다가 끝내는 애굽에 종으로 팔아 넘긴 형들을 용서하는 일은 요셉에게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를 용서하기에 앞서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형제의 악의가 아 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자기 고난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요셉은 한없이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 형제들을 진정으로 용서 할 수 있었습니다. 모압 평지에서 행한 모세의 설교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화해시키 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아버지 세대의 죽음을 경험한 백성들에 게 광야의 경험은 심판이요 낭비된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 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시기였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모든 것 이 턱없이 부족한 광야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들 은 광야의 결핍과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 것입니다. 광 야 경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에서 하나님과 화해 하고 언약을 갱신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일도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스 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소실만큼 커다란 충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 루살렘을 망하게 놔두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언약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혀온 현실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의로 우심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화해를 향한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언약에 의거한 하나님의 정당한 처벌이라는 점을 인정 하였습니다.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임으로 인정함으로 새로운 시작 을 기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본 표면적인 현상만이 과거의 전부가 아닙니다. 과거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는 하나님의 진리만이 과거의 실패와 상처 때문에 사랑이 식어 지고 믿음이 연약해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과거의 멍에에서 벗 어나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과거와 화해를 이루는 과정 에서 잠 못 이루는 수많은 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과의 화해는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우리를 옥죄는 올무가 아니라 자유롭게 도약 하는 발판이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111 no image <성주진 칼럼> 신화, 판타지, SF영화 바로 보기
rpress
6186 2005-06-13
신화, 판타지, SF영화 바로 보기 성주진 목사_ 합신,구약신학 교수 거대한 가상의 이야기 세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신화가 그중 하나입니다.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 그리고 인도 신화 등 다 양한 신화가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일부 연구가들은 신화에 대한 호기심 유발을 넘어 나름대로 탐구한 신화적 모티브와 인식 코드 및 심층구 조 속에서 현대인을 위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신화학의 제한된 범주를 뛰 어넘어 인간구원과 실재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기독교 신앙에 도전장을 내 기도 합니다. 판타지 소설과 영화도 세계적인 유행을 타고 있습니다. 영국 작가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소년 마술사와 친구 마술사들, 마술 세계에 대한 그럴듯한 이 야기는 아직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고 건전한 세계관이 형성되지 못 한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톨킨 이 쓴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소설의 교본입니다. 이 소설을 충실하게 반영했다고 평가되는 동명의 영화는, 뉴질랜드의 고용구 조를 변화시킬 정도로 파급효과가 큽니다.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가상 세계 의 볼거리 속에 기계문명과 생태세계, 선과 악의 대결, 인간론 등의 거대담 론이 녹아 있습니다. 어두운 현실 가운데서 희망을 이어가는 반지 원정대의 이야기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의 자랑거리로는 SF영화 ‘스타워즈’가 있습니다. 미국의 대중문화뿐 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의 신화와 철학을 적당히 버무린 이 영화는 특히 미국 사회에서 일종의 건국 신화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 또한 기 (氣)와 같은 동양 사상, 부재하는 아버지와 같은 사회적, 신화적 모티브, 테 크놀로지와 인간성의 관계,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화, 판타지와 SF영화는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잘못된 세계관과 진리체계 및 구원관에 물들 수 있는 위험을 내 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물론 보지 못 하게 금지하는 방안도 있습니다. 그 러나 역사는 이 방법이 한계가 있다는 사 실을 가르쳐줍니다. 가상적 이야기의 도구적 성격을 바로 이해하고, 치명적 오류를 지적하며, 선교적 접촉점으로 활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먼저 문학적 장르 또는 문화적 도구로서의 가상의 세계가 지닌 중립적 가치 를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씨 에스 루이스의 작품에는 종종 가 상적인 구조가 활용됩니다. ‘스크류테입의 편지’는 악마가 그 부하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유명한 ‘나니아 연대기’는 기독교 판타지로 볼 수 있습 니다. 사자 아슬란이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이 작품은 기독교인을 포함한 많 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유사한 표현방식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위 묵시문학에 나타 난 상징적인 동물과 세상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이 본 묵시 가 운데에는 이상한 모습을 가진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신약의 계시록에도 기괴 한 짐승과 바다, 하늘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개혁주의 해석자들은 이러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기보다 상징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 습니다. 물론 신화, 판타지, 그리고 SF영 화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참된 계시가 아닙니 다. 성경적 구원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론을 가르치는 것은 더더구 나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현대의 가상세계가 흔히 내포하는 범신론적이고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단호히 배척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가상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인생의 의미에 대 한 탐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내면의 열망을 내비치 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훌륭한 접촉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은, 가상의 이야기가 추구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실재하는 하나님의 나라 를 누리게 하는 복음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가상세계 의 소금물이 아닌 실재하는 영생의 생수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 니다.
110 no image <성주진 칼럼> “스타일이 달라서…”
rpress
5225 2005-05-12
“스타일이 달라서…”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교수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다르듯이, 신자마다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스 타일이 사뭇 다릅니다. 어떤 이는 기도생활에 중점을 두고, 어떤 사람은 성 경공부에 방점을 찍습니다. 어떤 이는 봉사의 일이나 사회적인 이슈에 치중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에 주력합니다. 교회도 서로 다 른 신앙생활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그 이후의 삶을 안내하는 성경은 신앙생활의 모습을 처한 환경 및 삶의 정황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형상화합니다. 농사, 전 투, 경기, 목양, 교육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중 어떤 패턴을 자기의 모델로 삼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특성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농사의 비유에서 두드러진 특성은 심고, 가꾸고, 거두는 일입니다. 농부는 농사의 경험에서 체득한 지혜대로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에 충실하여 수고 의 땀을 흘립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풍성한 추수를 대망하면서 온갖 수고 를 아끼지 않습니다. 농사 패턴은 늦은 비와 이른 비의 은택을 잊지 않으면 서도, 정직한 노력을 강조합니다. 신앙생활은 또한 전투로 표현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정병으로 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되, 때로는 복음의 진리와 신앙의 고수를 위하 여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사탄과 세상 그리고 죄 와 싸우는 존재입니다. 이 경우 신앙생활은 여호수아를 본받아 앞으로 진군 하는 전투를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또한 경기로 비유됩니다. 마라톤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서는 욕망을 절제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야 합니다. 당장 포기하고 싶 은 마음이 간절할지라도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을 바라보고 끝까지 달리는 것 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비유는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목표지향적인 신앙생 활의 특성을 강조합니다. 신앙생활은 또한 목양과 관련되어 표현됩니다. 신앙생활은 곧 목자를 따르 는 일입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입니다. 목자되 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기름진 초장에서 꼴을 먹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 니다. 목자를 따르지 않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요, 다른 목자를 따르 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생활은 제자도로 제시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이 요,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물론 성경의 제자교육 은 교실에서 가르쳐지는 지식이기보다 삶의 현장에서 전수되는 지혜가 중심 입니다. 이 지식은 정보의 축적을 뛰어넘는 인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 다.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패턴을 신앙생활의 모델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성 격이 근면성실한 사람은 농사의 비유를 모델로 삼기 쉽고, 외향적이고 적극 적인 사람은 신앙생활의 본질을 전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공부하기 좋 아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은 곧 성경공부라고 보기 쉽고, 기도의 신비에 압도 된 사람은 신앙생활은 곧 기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강조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 하는 성도에게 주어진 다양성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패 턴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균형을 잃어버리는 일은 곤란합니다. 예를 들면, 신 앙을 전투로만 이해하면 매사에 호전적인 자세로 임할 수 있습 니다. 지나치 게 농사의 비유에 집착하면 보수적, 수동적 심성이 고착될 수 있습니다. 개 인경기의 비유만 고집하면 팀웍의 조화보다 개인기 위주의 경쟁심이 유발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비유들은 독립적으로 완전한 신앙의 모델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인 패러다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무지개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한 색깔만을 떼어내서 절대화하는 것은 무지개 전체의 아름다움과 온전함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하나의 신앙 패턴만을 고집하는 신앙적 ‘환원주의’입 니다. 다양한 신앙의 패턴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각자 가 자기색깔의 신앙적 특성을 드러내되 하나의 특성에 함몰되거나 다른 스타 일을 배척하지 아니할 때, 교회는 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주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109 no image <성주진 칼럼> 3초만 기다리세요
rpress
5294 2005-04-14
‘3초만 기다리세요’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교수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닫기’를 누르기 전 3초만 기다리세요. 정말 누군 가가 급하게 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청색 신호가 떨어져 앞차가 서 있어도 3초만 기다리세요. 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친구와 헤어질 때 그의 뒷모습을 3초만 바라보아 주세요. 혹시 그 사람이 가 다가 뒤돌아보았을 때 웃어줄 수 있도록… 길을 가거나 뉴스를 시청하다가 불행한 사람을 보면 눈을 감고 3초만 기도해 주세요.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니까요.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3초만 고개를 들어 하 늘을 보세요. 내가 화낸 것이 보잘것없는 일은 아닌지… 차창을 내다보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3초만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 어 주세요. 그 아이가 크면 분명 내 아이에게도 그러할 것이니까요. 봄날의 산행이나 산책길에서 반갑게 인사하는 개나리를 만나시거든 3초만 정 답게 맞아주세요. 화사하게 핀 꽃이 당신의 고달픈 삶에 여유와 기쁨을 가져 다 줄 것입니다. 재미있는 소풍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에 3초만 놀던 자리를 둘러보세 요. 하나님이 조성하신 정원의 한 모퉁이를 깨끗하게 치울 수 있는 기회입니 다. 주는 것도 없이 괜히 미운 사람이 미운 짓을 할 때마다 3초만 그를 위해 기 도하세요. 사람들이 나의 미운 짓을 ‘이쁘게’ 보아줄 것입니다. 김 집사의 남모르는 허물이 너무나 커서 공의를 위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알려 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오를 때 3초만 자신을 바라보세요. 그 사람이 나보 다 의롭다는 사실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의심스러운 사이트를 모른 체 클릭하기 전 3초만 주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 세요. 당신의 영혼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정결한 처소가 될 것입니다. 빠듯한 생활이 지겨워지고 부자의 여유가 너무나 부럽게 느껴질 때에 3초만 주님의 가난을 생각하세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 요… 나도 모르는 부자 친척이 많은 유산을 물려주지 않을까 허망한 대박의 꿈에 잠길 때마다 3초만 허벅지를 꼬집어보세요 . 땀 흘리는 수고의 행복이 되살아 날지도 모릅니다. 교인의 숫자와 헌금의 액수가 어느덧 교회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때에 3초만 피터 드러커를 생각해 보세요. 교회가 아닌 비영리기관조차 사람의 변화를 경영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말 한마디 속 시원하게 쏘아주고 싶을 때 3초만 숨을 크게 들이켜 보세요. 마음의 안채를 불태울 화전의 불은 꺼지고 차분한 승리의 기쁨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신념이 너무나 확고할 때에 3초만 판단의 근거를 검토 해보세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얼마나 부분적이며 불확실한 것인가… 냉정한 논리가 가슴을 차디차게 만든다고 생각될 때 3초만 사랑의 감격에 젖 어보세요. 뜨거운 논리가 마음의 균형을 잡아 줄 것입니다. 명예로운 자리가 당연하게 생각되고 주어진 권세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질 때 에 3초만 키신저의 경구를 생각하세요. 권력은 더 깊은 욕망을 부추기는 최 음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담스러운 불우이웃돕기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 채널을 돌리기 전 3초만 귀 기울여 들어보세요. 당신이 어려울 때 모르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 울여줄 것입니다. 북한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왠지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면 빵과 복음에 굶 주린 불쌍한 주민들을 위해 3초만 조용히 기도하세요. 그곳이 바로 주님이 가라고 명하시는 나의 땅끝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고의 폭이 책상 테두리나 자기 집 현관을 넘지 못하고 생활의 영역이 회 사 사무실이나 예배당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마다 3초만 지 구본을 안아 보세요. 주님이 온 몸으로 품으신 세상이 거기에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지치고 힘이 들 때에 3초만 주님의 팔에 안겨 보세요. 모 든 수고에는 끝이 있고 사랑의 수고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법입니다. ‘안녕, 내일 또 만나.’ 가볍게 작별을 고할 때마다 3초만 ‘마라나다’(주 여 오시옵소서)를 되뇌어 보세요. 기대가 넘치는 내일을 맞이할 것입니다.
108 no image <성주진 칼럼> 기어이 번지점프를 하다니....
rpress
5352 2005-03-17
기어이 번지점프를 하다니....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등으로 유명한 여배우의 죽음을 계기로 자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리스도인임이 알려지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살에 대한 논란도 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습니 다. 자살의 동기를 밝혀줄 개인적인 정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 의 신앙과 삶을 판단하기보다는 관련 이슈들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 니다. 처음 이슈는 자살한 그리스도인의 구원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살’ 하면 흔히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과 가룟 유다를 떠올립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왕으로 선택한 다윗을 죽이려 했고, 유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팔았기 때 문에, 자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단정하기 쉽습니다. 자살은 분명히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범죄와 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포함합니다. 따라 서 목사는 전통적으로 자살한 사람의 장례를 거부합니다. 자살한 그리스도인 은 천국에 가 지 못한다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이러한 단정은 자살하지 않을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셈입니다. 성경에 없는 구원의 조건을 추가함으로써 복음의 은혜를 흐리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아무리 중한 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군림할 수 없 기 때문입니다. 구원불가 주장은 또한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하신 속죄의 능 력과 범위를 제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구속의 은총을 확신하는 일이야말 로 최상의 자살방지책이 될 것입니다. 다음 이슈는 마음과 정신의 질환에 대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믿음 과 상관없이 육체의 질병에 걸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마음의 감기라는 우 울증의 치료조차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경정신과적인 질 환을 믿음의 결여나 사탄의 역사로 정죄하는 태도는 상태를 악화시킬 뿐입니 다. 정신적인 질환도 육체적인 질환과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도움과 치료를 필요로 합니다. 이는 불신앙이 아니라 일반은총을 받아들이는 신앙적인 태도 입니다. 이와 연관된 이슈는 기도입니다. “맨날 기도했는데 무모한 바램이었다” 는 유서의 내 용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녀가 나름대로 기도하며 몸부림 친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기도하라고 충고합니다. 기도해도 안 된다고 하면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고 다그치기 쉽습니다. 그러 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기도하라는 권고를 남발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욥의 친구들이 던진 충고처럼 더 큰 좌절감을 불러일으키고 사태를 악화시 킬 수 있습니다. 기도의 강조가 의사의 치료를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 에 따라서는 오히려 요청하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이슈는 그리스도인의 직업입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배우가 될 수 없을까요? 영화가 예술의 한 분야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예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도 덕적 실용성을 결여한 미의 추구가 과연 합당한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프랜 시스 쉐퍼의 견해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는 솔로몬 성전에 야긴과 보아 스라는 두 기둥이 실용적 쓰임이 없이 심미적 이유로 세워졌다는 점을 들어 실용성이 결여된 미의 추구도 그리스도인에게 용인되는 영역으로 봅니다. 나 아가서 쉐퍼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는 좁은 의미의 ‘기독교적인’ 것만을 그려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을 그리 는 작업도 합당한 예술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인간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작 업에 몽학선생의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쉐퍼는 죄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하나 님의 통치를 인정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직업에 대하여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선 정적인 경향과 죄악에 물든 현실, 그리고 상업적인 이미지와 내면의 자아가 유리된 개인의 삶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의 어려움에 압도되어 중요한 문화의 영역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 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내리신 대위임령은 아담이 받은 문화명령의 연장이자 확대이며 완성이기 때문입니 다.
107 no image <성주진 칼럼>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rpress
5242 2005-02-17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여러해 전 유다 남쪽에 위치한 네게브 사막을 보았을 때 황무한 그 땅에 이 상하게도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후로도 그 사막이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 운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한참 후에 사막의 숨은 근원을 알고 나서야 비 로소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대사 한 마디가 사막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샘을 감 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광고 카피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신선미가 다 소 떨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함축적인 의미를 잃지 않고 있는 이 말은 온갖 사막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를 대변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사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번 겨울에 사막 같은 세 사람, 그러나 그 안에 샘을 간직했기에 아름다 운 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막 같이 보이는 그들의 삶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샘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이번 겨울은 이 아름다운 세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 아름다움의 원천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새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 다. 첫 번째 만난 사람은 김우현 감독이 제작한 영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 니」의 주인공 할아버지입니다. 맨발로 전철을 돌아다니며 승객들에게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던지기 때문에 정신이상자로 취급받기 일쑤인 이 80 대 할아버지는 한동안 시청자까지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기인 의 삶을 추적해 들어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나는 믿음의 순수함과 희생적인 나 눔의 삶은 시청자에게 놀라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도시의 사막을 걷는 뭉툭 한 맨발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안에 사랑의 깊은 샘이 넘쳐흐르 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만난 사람은 일본의 나가노 목사입니다. 나가노 목사는, 폐병 때문 에 집에서 쫓겨나고 교회출석마저 거부당한 사생아 청년 가가와 도요히코가 자살을 결행하기 직전, 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준 개척교회 목사 입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가가와 목사는 지 극한 사랑으로 빈민운동과 사회운 동에 헌신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반면, 나가노 목사는 가가와 를 만나기 전 5년 동안 한명의 성도조차 얻지 못한 ‘실패한’ 목사였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노 목사의 광야 같은 천막교회가 그토록 아름다 운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던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땅콩 박사로 유명한 조지 워싱턴 카버입니다. 카버 박사는 끊임없 는 연구와 헌신을 통하여 미국 남부의 피폐해진 농업경제를 살려냄으로써 많 은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한 흑인으로, 미국역사상 가장 특출한 인물로 평가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불굴의 정신, 고매한 인격과 뛰어난 창조성 의 이면에는 참으로 황량한 사막 같은 고달픈 삶의 여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온갖 불행을 딛고 온 미국인을 감동시킬 수 있 었던 아름다움의 원천은 결국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하나님의 은혜였습니 다. 세상이 사막 같이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막 같은 세상이 아 직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 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들 속에 신비로운 샘, 곧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 스도인인 나로 인하여 이 세상은 좀더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자리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을 통하여 세상의 사막을 아름답게 만드 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 속에 이러한 기이한 근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축복 인지요. 감춰진 샘물이 있기에 황무함이 아름다울 수 있듯이, 사막 같은 우 리의 마음과 삶이 은혜의 샘물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고, 사막 같은 이 세상 이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아름다울 수 있다니요. 세상 의 황무함을 탓하는 대신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교회의 아름다움과 세상 의 소망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6 no image <성주진 칼럼> 쓰나미 충격파
rpress
5381 2005-01-12
쓰나미 충격파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지난 성탄절 다음날 인도양 주변국들을 순식간에 덮쳐버린 쓰나미는 수많 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에 사랑하는 이들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특히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참상 앞에서 세계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나마 도 처에서 펼쳐지는 온정의 손길이 위로와 소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에 이번 쓰나미는 신자들에게 당혹감을 가져다줄 수 있습 니다. 불신자들이야 문제를 자연의 법칙과 우연에 넘겨 버리고, 다신교에서 야 각종 신들에게 재난을 하나씩 배정하면 그만이지만, 유일신을 창조주와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재난은 인간의 이해가 미 치지 못하는 신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쓰나미 충격파가 신앙과 신학의 차원에서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편으로 쓰나미는 우상파괴자입니다. 쓰나미는 먼저 피상적인 인과응보 관 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재난이 무조건 하나님의 처벌이라고 단정하 는 고정관념을 재고하게 만듭니다. 노아시대에 닥쳤던 홍수는 분명 타락한 인류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자녀들과 소유, 그리고 그의 몸 에 닥쳤던 재난은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벌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경우에 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다고 단 정하기 어렵습니다. 쓰나미는 나아가서 하나님이 인간 문제의 무골호인 관리자라는 선입견에 철퇴를 내립니다. 하나님은 말썽꾸러기 인간들이 저질러놓은 온갖 문제를 정 리한 다음 조용히 뒤안에서 호출을 기다리는 해결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 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대령해 놓는 지니 같은 피고용인이 아닙니 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자연과 역사를 운행하시는 주권자 입니다. 쓰나미는 또한 사람들이 자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교정합 니다. 지구는 완벽한 기계도 아니며 모든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품 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쓰나미는 하나 님의 그림자를 자연에 투영하여 만든 낭만적인 자연주의를 파괴합니다. 자연 은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낭만주의적 자연관은 일종의 우상숭배 입니다. 쓰나미는 온갖 고통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려는 인간의 고질병을 드러냅니 다. 이번 경우에도 사람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사람은 마땅 히 해야 할 일을 방치하고 있다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덮어씌우는 우를 범하 기 쉽습니다. 누군가가 지적한대로 매일 2만 9천명의 어린이가 치료 가능한 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잠잠했던 이들은 이번 불행이 하나님의 탓이라고 떠들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쓰나미는 파괴된 자리에 새 것을 세울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 니다. 지구촌의 자원과 문제를 함께 나누는 상생의 지혜를 찾아보라고 재촉 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이웃으로 알고 인류애를 실천함으로써 과거의 적대관 계를 청산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우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인 류는 참담한 불행을 소중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쓰나미는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십 자가에서 우리는 친히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시고 인간의 구속 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고난을 봅니다. 십자가는 인간 의 구속을 이룰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쓰 나미는 재난과 고난의 종국적 해결책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 나님의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마지막으로 쓰나미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리켜줍니다. 성경이 재난에 대 한 철학적인 대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측량할 수 없는 섭리의 신비는 하나님 께 맡기고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쓰나미의 틈새를 통하여 언뜻언뜻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초월성이 하나 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줍니다. 심판의 그림자로서 의 쓰나미는 구속의 완성을 향한 믿음의 긴장을 팽팽하게 당겨주고 있습니 다.
105 no image <성주진 칼럼> 성탄절에 던지는 세 가지 질문
rpress
5603 2004-12-16
성탄절에 던지는 세 가지 질문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성탄절은 모든 역설적 진리의 극치입니다. 성탄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 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 많은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의 무 대로 만드신 성육신 사건입니다. 이 성육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지극 히 사랑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 간이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처럼 성육신은 가장 천한 죄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만드는 신 적 사랑의 정점입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깊고도 넓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그 의미는 대략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초석을 놓아주는 구속적 의미, 다음으로 죄인을 구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계시적 의미, 그리고 마지막 으로 성탄절의 주인공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어 떻게 살아야 하 는지 보여주는 모범적 의미입니다. 여기에서는 마지막의 모범적 의미에 치중 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육신의 모범적 의미는 톨스토이의 유명한 이야기 "세 가지 질문"이 감동적 으로 예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먼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 가?"라고 묻습니다. 대답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다른 시간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은 성육신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은 매순간이 성육신의 기회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 사랑을 위하여 낮아지라는 성육신적 요청을 담고 있습니다. 성육신의 안목에 서 볼 때 사랑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평범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고귀 한 시간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가장 범상한 이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 러내는 가장 비범한 시간입니다. 다음으로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 가?"라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하여 '성육신'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멀리 있는 막연한 존재가 아니고 바 로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구체적인 그 사람, 지금 내가 만나서 얽히고 설키어 살아가는 그 사람입니다. 바로 그 이웃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 을 쏟아야 할 대상이라는 교훈 또한 성육신의 표현이자 요청입니다. 무기력 한 삶과 표류하는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성육신의 정신을 어느 정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관계는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을 던집니다. 그 대답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 특히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하여 베푸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이 교훈 또한 성육신 의 정신을 잘 나타냅니다. 성육신 사건은 참 사랑에는 자기희생이 필연적으 로 따라오게 됨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성탄의 요체인 성육신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실 천적인 삶의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육신의 정신은 가장 인 간적인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신적인 일로 승화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 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타락한 이 세상이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성육신의 사랑으로 다가가 야 할 대상임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은 성육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꿋 꿋이 버텨야 할 바로 그 자리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연기'해야 할 바로 그 무대인 것입니다. 시대의 타락한 정신은 언제나 개인과 단체, 교회와 사 회, 그리고 국가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침투하여 영적으로 무력하게 만 들고자 합니다. 이미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서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개인과 단체는 브레이크 없는 승용차와도 같이 나름대로 파국을 예상하면서도 멈춰 서지 못하고 있습 니다. 반면 성육신은 죄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세상을 새롭 게 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이 순간, 바 로 이 사람, 바로 이 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 세상에 성육신의 영광을 드 러내는 일에 동참하는 제자들입니다.
104 no image <성주진 칼럼> 불평의 광야에 핀 감사의 꽃
rpress
5245 2004-11-18
불평의 광야에 핀 감사의 꽃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교수 유난히 아름다웠던 가을단풍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이번 추수감사절을 착잡한 심정으로 맞이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불평으 로 치닫는 대신 감사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불신앙으로 추락하는 대신 신앙 으로 비상하는 길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줄 압니다. 그러나 불평에서 감사를 일구어내는 일은 불평을 나쁘다고 정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불평을 성화의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겪게 되는 하나의 증상으로 이해하고 진 단과 처방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불평 을 감사로 바꾸는 전기가 마련될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불평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기대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상하게도 믿는 사람이 때때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불만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 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숙명이려니 하고 포기하거나, 새옹지마에 희미한 소망을 걸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반해,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불평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과연 내가 하나님께 거는 기대가 정당한 기대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 기적인 욕심을 하나님께 투사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 다. 그리스도인의 불평은 또한 신앙적 안목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실상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인데 손 해인 줄로 생각할 때에 불평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할 때 에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불평은 원하는 것을 당장 에 손에 넣으려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생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나 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향한 하나님 의 사랑과 선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의 안목은 우리에게 감사의 지평을 열어 보 여줍니다. 나아가서 불평은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은 진정한 필요가 있다 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불평은 우리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우회적으로 알려 주는 표지 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평이 생길 때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 이 무엇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반성적 질문을 통하여 우리 는 습관적인 불평을 거룩한 불만족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 로 깨닫게 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자각은 신앙의 발전과 개혁의 원동력 이 됩니다. 사실 모든 의미 있는 개혁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과 부딪히는 현상에 대한 거룩한 불만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불평은 또한 우리가 이제는 기도할 때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불평을 하나님 께 가지고 나와서 기도한 시편기자가 좋은 모델입니다. 시편기자는 자기가 겪 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 앞에 토로한 다음,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내게서 멀리 계십니까?” “왜 나에게서 얼굴을 숨기십니까?” 하는 고 통스러운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셔서 기도에 응답하신 다음에는 감사의 찬미를 드립니 다. 기도를 통하여 불평을 감사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불평의 상황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는 초대장입니다. 마지막으로 불평은 우리의 삶의 중심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살펴보게 합니 다. 불평은 내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때에 생깁니다. 내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 게, 나아가서는 하나님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러나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와 이웃 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 라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불평 대신 감사 를 꽃피게 하시는 줄 압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삶이야말로 불평을 감사로 바 꾸는 하나님의 복된 수단입니다. 오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103 no image <성주진 칼럼> 종교적인, 너무나 종교적인
rpress
5082 2004-10-20
종교적인, 너무나 종교적인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 치고 '경건의 능력'을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는 줄 압니다. 사모하면서도 당면한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다 보면 경건의 우물 은 말라버리기 십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경건의 능력은 차치하고 경건의 모양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경건의 능력은 경건의 모양에 달려 있고, 경건의 모양은 각종 종 교적 형식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의 일은 경건의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 되고, 경건의 능력은 곧 종교적 형식 의 준수에 달려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형식주의는 하나님 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그리고 능력을 상실한 경건은 공허한 형식으로 전락 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사울식의 경건은 '경건의 모양'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사울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종 교적인 사람 인지는 사무엘상의 기록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먼저 13장에서 사울은 사무 엘이 정해진 기한 내에 나타나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드립니다. 백성들이 흩 어지는 것을 보고 초조해진 것입니다. 사무엘을 더 기다리거나 그냥 적과 싸 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굳이 제사를 드립 니다. 14장에도 사울의 종교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아들 요나단이 믿음으로 승리 의 계기를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사울은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전군에 금식 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금식은 병사들의 힘을 빼앗아 싸우지 못하게 하 고, 승리의 주역인 요나단을 죽음의 위기에 빠뜨릴 뿐이었습니다. 금식으로 입증된 그의 종교성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아간과 같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 는 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1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울은 모처 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음성 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모든 짐승을 진멸하라 는 명령을 어기고 나쁜 것은 죽이고 좋은 것은 남 깁니다. 사울은 하나님에게 좋은 것을 드리기 위하여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정도로 종교적인 사람 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이토록 종교적인 사울을 계속 왕위에 앉 히시기를 거절한 것은 가혹해 보입니다. 사울은 전쟁을 앞두고 예배를 통하 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승리를 담보하기 위하여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또한 좋은 예물을 드림으로써 백성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 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배려를 했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종교성은 오 히려 권장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성 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숨겨져 있습니다. 경건의 모 양에 힘쓰는 중에서도 사울은 선지자가 대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 시하고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종교적인 행사를 통하여 사람 과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종교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예배를 수단화하고 말씀을 상대화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도리 와 왕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경건의 본질을 상실 할 때 입게 되는 치명적인 손실입니다. 물론 인간은 과정적인 존재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처음부터 완벽한 기도 를 드릴 수 없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아무리 깊어도 완벽한 기도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실수하면서 배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완벽한 기도를 하려다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보다 부족한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배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아무리 종교적인 형식을 갖춘다 할지라도 참 된 경건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의 경우 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예배와 기도는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종교행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사랑함 으로써 순종하는 것은 경건의 능력을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102 no image <성주진 칼럼> 야베스의 기도
rpress
6602 2004-09-23
"야베스의 기도"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3년 전 한국교회에 소개된 '야베스의 기도'(브루스 월킨슨)가 여전히 성도들 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성도들이 이 기도문을 주기도문처럼 사용 하여 정기적으로 기도한다는 사실은 이 기도의 내용이 21 세기 그리스도인들 의 마음속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랫동안 역대기의 긴 족보 속에 감춰져 있던 기도(대상4:9-10)가 뒤늦게 각광을 받고 있는 셈입 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먼저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응답의 확신을 강조합니다. 야베 스가 존귀하게 된 것은 그가 믿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신실하 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와 응답의 강조는,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공동체에 기도의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던 역대기 저자의 의도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무기력한 기도생활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지 못하던 사람들 이, 야베스의 기도를 통하여 구체적이고 적실한 기도를 배우고 드림으로써 신 앙생활 의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면 이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에는 또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조가 나타납니다. 야베스는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통스러운 탄생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이었 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그의 이름에 내포된 과거의 질곡과 현재의 한계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함으로써 억눌린 사람을 존귀한 자로 만드시는 하나 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따라서 고통의 자리에서 신음하던 사람이 야베 스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이 또한 매우 소중 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기도는 일견 현대인들이 통 상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복에 복을 더하 사'(풍성한 축복), '지경을 넓히시고'(확장되는 영역/비전), '주의 손으 로'(기적적인 능력), 그리고 '환난....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평안과 안전) 등은 매혹적인 주제입니다. 게다가 야베스는 기도마다 '나'(자기사랑)를 빼놓 지 않았으며,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부귀와 명예)가 되었습니다. 바르고 균형 잡힌 시각의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야베스의 기도를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가족과 공 동체가 두루 안전하고 평안하며, 생업의 기반인 사업이 잘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힘쓰고 때로 하나님의 도우심 을 구하는 일 자체가 비난꺼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복이 죄인 을 불러 자녀를 삼으신 목적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문은 주로 구원역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야베스가 구한 지경 (땅)의 확장을, 부동산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의 누림이라 는 관점에서, 그리고 넓게는 약속의 땅에 세우신 하나님 나라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도에게 구약의 땅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된 풍성한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이야말로 야베스 가 드린 기도의 신약적 해석이요, 현대적 적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종말에 대한 전망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늘과 땅의 시민권 을 동시에 가 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 본향에 대하여는 나그네입니다. 그리 스도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종말론적 약속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는 제자입니다. 이러한 측면은 야베 스의 기도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야베스의 기도는, 하늘 본향을 바 라보는 나그네의 삶과 예수를 따르는 '모험적인' 제자도를 위한 기도와 병행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하여는 양단간의 단정보다 균형 잡힌 평가와 지혜로운 적용이 필요한 줄 압니다. 주기도문과의 관계 정립도 균형과 적용의 한 예입 니다. 야베스의 기도문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으로 사용되어야지, 주객이 전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에야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려는 열망을 품은 그 리스도인들이 한시라도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않고,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은 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