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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4 (00:00:00)
은혜 받은 증거

성주진 교수/ 합신 신약신학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은혜는 거의 모든 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듯 합
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은 후나 신앙적인 모임 또는 활동에 참여한
다음에 우리는 흔히 서로 은혜를 받은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총평을 대신하기
도 합니다.

그런데 은혜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쓰이다 보니 과연 이 은혜가 어떤 은혜인
지, 과연 무엇이 은혜가 되었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분
이 좋아지고 감정이 고조되는 것만으로도 '은혜 받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상투적인 용어가 되어버린 듯한 은혜라는 단어
의 진정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은혜가 과연 무엇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
다.

진정한 은혜의 의미는 그 반대개념인 '값싼 은혜'를 통하여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어구는 원래 독일 신학자 본 훼퍼가 당시 독일 교회의 연약

n성과 영향력상실의 원인을 '교회가 값싼 은혜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라고 진
단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진 표현입니다. 그에게 있어 값싼 은혜는 진정한 은혜
의 자리에서 일탈한 상태입니다.

본 훼퍼는 값싼 은혜의 대표적인 예로 회개 없는 죄사함, 참된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 진정한 교제가 없는 성찬, 십자가가 없는 은혜, 희생이 없는 제자
도, 그리고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들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도 지속적으로 위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는 '값
싼 은혜'를 받은 것뿐입니다.

'값싼 은혜'의 병폐는 하나님의 축복을 갈구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희생도 치
르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받되 부담 없
이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
하는 방식으로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생각과 태
도와 관계에서 종전의 입장을 고집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진정한 은혜는 '값싼 은혜'의 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진정한 은혜는 참된 회개, 참된 신앙고백, 하나님
과의 진정한 교제, 십자
가를 지는 삶, 기꺼이 희생하려는 태도, 그리고 변화된 생활을 포함할 것입니
다. 이러한 특징들은 요즈음 통용되는 은혜라는 말의 피상성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물론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여호수
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 공략을 앞
두고 여호수아를 만나주십니다. 그분은 아무 조건 없이 여호수아를 만나 주시
지만 일단 만난 후에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만일 여호수아
가 신을 벗지 않는다면 그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
다고 주장하고, 그분은 거룩하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명령을 거
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값싼 은혜입니다. 신발을 벗은 사람, 곧 하나님의 명
령을 따라 그의 성품을 반영하는 사람만이 '은혜다운' 은혜를 소유한 사람입
니다.

값싼 은혜와 관련하여 신약에서 오해되는 말씀 가운데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
에 이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에 대한 전인적인 믿음이 없이
그저 말로 동의를 표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 오해되기도 합니
r
다. 그러나 이는 문맥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으
로 믿는' 사실의 외형적인 표현입니다. 또 당시 상황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
은 어떤 손해나 불이익을 감수한 전인격적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피상적인 고
백과는 거리가 멉니다.

값싼 은혜의 병폐가 우려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의지의 변화가 은혜 받은
증거로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감정적, 지적 변화를 당연히
포함하지만 인격의 중심인 의지의 변화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
정은 고조되어도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고, 성경지식은 날마다 늘어나도 자신
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원과 성화가 별개로 취급
되고, 신앙의 고백과 사랑의 실천이 불연속선을 이루며, 은혜와 윤리가 접점
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과 세상에 대한 의지의 변화는 오늘날 우리가
주목하고 추구해야 할 은혜의 증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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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no image <성주진 칼럼> 목소리를 낮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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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1 2004-08-25
목소리를 낮추세요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아이를 키우다 보면 목소리가 저절로 커진다는 것이 엄마들의 한결같은 이야 기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큰 소리를 내게 되는 양육의 고충을 토로하곤 합니다. 특히 사내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이 아 이의 성장과 더불어 어느덧 억세져 버린 자신의 목소리를 의식하고서 씁쓸해 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아이의 관심을 끄는 데는 큰 소리보다 낮은 목소리가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합니다. 엄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할 때 아이는 엄마의 말 을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또 엄마의 낮은 목소리는 아이에 게 '이 말은 특별히 너만을 위한 말이야'라는 사인을 은연중에 보낸다고 합니 다. 아이들은 엄마의 큰 목소리가 아니라 작은 목소리에서 자신의 소중한 자 리를 발견하는 셈입니다. 낮은 목소리는 엄마가 아이의 기대밖의 행동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대처하겠다는 사인이기도 합니다. 낮 은 목소리는 감정과 흥분이 아니라 이치 와 화해를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낮은 목소리는 부드러움과 냉철 함을 함께 갖춘 신비로운 발화이기에, 그 자체로 엄마의 사랑과 요구를 전달 하는 강렬한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기가 출제한 목소리 시험에 엄마가 합격한 후에야 비로소 승복하는 영악한 시험관이고요. 이러한 육아의 지혜는 인간관계 전반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느 사 회든 다양한 갈등관계와 엇갈린 의사소통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도 고용주와 종업원, 야당과 여당, 부자와 빈자, 그리고 노년과 청년 등 사회전 반에 걸쳐 다층적인 갈등전선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굵직한 현안마다 경제 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지형에 따라 복잡한 대치국면이 조성되어 있습니 다. 갈등이 깊을수록 자연히 자기주장을 관철하려는 목소리가 커지게 됩니다. 특 별히 피해의식이 강한 사람, 마음에 분노가 쌓인 사람, 자기입장에 대한 확신 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 다. 물론 상대방도 비슷한 피해의식과 분노와 확신을 가지는 경우가 보통이므 로 충 돌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게다가 진정한 동기를 숨긴 채, 나름대로 자기 가 붙잡고 있는 사실의 한 자락을 절대화하고 진리의 한 모퉁이를 전체화하 는 경우에는, 더욱 접점을 찾기가 힘들어 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론 목소리의 크기가 목소리 주인공의 정당성을 말해 주지 않습니 다.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낸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큰소리를 지르고, 가정에서도 꽃병을 깨뜨린 사람이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큰 소리가 아닌, 무언가 다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갈등상황에서는 일단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순서라고 봅니다. 이러한 제스처 는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표시하는 방법입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나서야 남의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낮은 목소리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일방주의를 버리 고 차분하게 상호이해의 공동기반을 찾아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사실, 갈등을 촉발하는 다름은 틀림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공동체에 서 다름은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는 저주가 아니라, 하나됨을 보다 조 화롭고 풍성하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서로를 채워주는 보완재요, 고무하는 자 극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름은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황금율의 전제 이자 무대입니다. 거친 고함소리가 오가는 삶의 현장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낮은 목소리로 힘있 게 말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작고 세미한 음성이 엘리야의 마음에 몰아치는 소용돌이를 잠잠케 하고 이스 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에도 드높았던 소음을 잠재운 것처럼, 날마다 주님의 음 성을 새롭게 듣는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와 사랑의 낮은 목소리로 말할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올라가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을 걸 어 보면 어떻까요. "여보게,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게나."
100 no image <성주진 칼럼> 비너스와 슈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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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6 2004-07-21
비너스와 슈렉 성주진 교수/ 합신 만일 밀로의 비너스가 지금 한국에 살고 있다면 여전히 미의 화신으로 떠받 들어지고 있을까요? 호사가들은 비너스조차도 성형수술을 받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라고 수근댑니다. 콧대를 약간 높이고, 이마는 좀더 넓히고, 가 슴도 확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쌍꺼풀 수술과 허벅지 지방흡입도 필수적이라 고 말합니다. 그만큼 작금의 얼짱 몸짱 만들기 열풍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외모가 취직과 월급과도 상관관계가 있다는 약삭빠른 연구발표 도 무조건 예쁘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 이상 몸은 손대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 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취향에 따른 머리 염색은 만민 의 상식이 되었고 몸을 캔버스로 삼는 스킨 아티스트라는 신종직업까지 등장 하고 있습니다. '신체발부' 운운은 그야말로 옛말이 되어 버렸고, '내면의 아 름다움'이라는 표현 또한 이끼가 파랗게 끼었습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겠지만, 교회의 집회 안내자로도 미모가 '되는'여자 성도 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역시 외모를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의 강조점은 하나님은 외모 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이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세속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성경은 미모 자체의 선악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앞선 말씀에서도 알 수 있 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외모의 언급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 는 성경 이야기에서 중대변수로 작용하여 전개상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경 우가 없지 않습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미인으로는 밧세바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뛰어 난 아름다움 때문에 다윗이 치명적인 죄를 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밧 세바가 과연 객관적으로도 아름다웠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녀가 아름 다웠다는 표현은 다윗의 시각에서 기술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먼 정욕이 그 녀의 아름다움을 과장했을지도 모릅니다 . 어쨌든 밧세바의 미모가 불러일으 킨 소용돌이는 다윗의 통치를 전기의 성공과 후기의 실패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고 있습니다. 남자 중 아름다움의 대표는 역시 꽃미남 압살롬입니다. 정수리에서 발끝까 지 흠이 없는 그의 아름다움의 절정은 치렁거리는 머리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지나친 자부심은, 부왕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과도한 분노로, 나아가서는 그에 대한 계획적인 반역으로 치닫습니다. 결국 그가 자랑하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그에게 죽음의 심판을 집행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부정적인 예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의 추구와 몸에 대한 관심 자 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영혼만이 참된 자아이고 육신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기 때문에 구원이란 곧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플라톤적 이원론 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몸은 분명 진정한 자아의 구성요소입니다. 몸의 중요 성은 주님과 성도의 몸의 부활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문제는 균형의 상 실이요, 가치관의 전도이며, 유행의 맹목적인 추종입니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들이 때맞춰 소개되고 있습니다. 슈렉과 같은 애니메이션이 그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서는, 아름다운 공주의 결혼 상대는 자기를 구출한 멋진 왕자라는 동화적 허구와, 현대미인은 하얀 피부에 금발의 날씬한 팔등신이라는 헐리우드적 허구에 대한 반성이, 외모보 다는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기반으로 한 다채로운 패러디를 통하여 제시되고 있습니다. 작금의 몸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어쩌면 기독교적 아름다움과 대치되는, 비 너스로 상징되는 헬레니즘의 부활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 도인들은 열병처럼 퍼지는 유행에서 한발짝 물러서서, 경건과 사랑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진리로 단장한 아름다움이야말 로 무더운 여름철에 우리의 전인적 건강을 지켜주는 상큼한 영성의 미학이 아 닐까요.
99 no image <성주진 칼럼> 하나님의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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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1 2004-06-23
하나님의 소외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자기중심적인 삶이 초래하는 최대의 불행은 자기소외입니다. 하나님을 소외 시킨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소외를 당하게 됩니 다. 하나님과 영속적인 가치들로부터 소외당하는 비극, 이것이 바로 하나님 을 떠난 이들이 경험하는 실존적 상황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소외가 하나님의 소외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속죄제가 바로 하나님이 소외당한 측면을 부각시키는 제사입니다. 죄는 하나 님을 인간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죄가 하나님의 처소를 오염시켜서 하나 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실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죄 의 피가 성소에 뿌려질 때 하나님의 처소가 정결케 되고 신적 임재가 회복됨 으로써 하나님의 소외와 더불어 인간의 소외가 해결됩니다. 이것이 속죄제 가 보여주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소외당하신 자리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로 바꾸어 놓음으로 써 인간의 소외를 해결하는 것이 속 죄제의 기능입니다. 이렇게 구약제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임재는 예배와 기도의 중심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는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을 또 다시 소외시 키는 장치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지난 5월에 국가조찬기도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일 로 인하여 여러 분들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참석의무가 없는, 믿지 않는 대통령의 임석은 기도회의 필수요건이 아니라 는 점입니다. 정치적 역학관계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들으 시는 것이 확실한 기도회라면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소외는 기도와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태도와 행동에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는 제사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제사를 통하 여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사회를 건설해 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레위기는 사랑을 가르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로 이웃사랑을 명시적으로 명령합니다. 나아가서 “너희 가운데 거하 는 외국인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민족을 뛰어넘는 사랑을 가르침으로 써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신 이웃의 정의를 함축적으로 예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레위기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사랑과 믿음에 기초한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또한 개혁을 제시합니다. 레위기가 규정한 희년 제도는 파산한 사 람들이 빚을 탕감 받을 뿐만 아니라 상실한 기업을 돌려받음으로써 재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레위기는 이렇게 하나님 중심의 사회를 꿈꾸 며 구체적인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놀라운 책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적용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존권의 보장을 포함합니 다. 기부와 사회환원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을 문화적, 제도 적으로 정착시키는 것도 좋은 적용일 것입니다. 물론 희년은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탁월한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을 오늘날의 국가 로 곧바로 대치하여 문자적인 적용을 강요하는 것은 주의를 요하는 일입니 다. 국가와 종교가 하나였던 옛날과는 많이 달라진 지금의 상황을 현실적으 로나 성경신학 적으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지난 6월, 영향력 있는 캐톨릭 신부가 대통령을 ‘우리의 예수’로 모시자 고 말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왕에 비하면서 대제사장 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발언의 취지나 모임의 분 위기, 그리고 신부의 신학적 배경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잘못된 기독론과 성경해석으로 대통령을 오도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교회는 교회 본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자리를 소홀히 여기고 권력의 주변부를 기웃거릴 하등 의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들도 성도의 자리를 지켜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 하여 회복된 하나님의 임재를 이웃과 세상을 향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기반으 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는 것이 인간의 소외를 반전시키는 복된 길입니다.
98 no image <성주진 칼럼> 목표와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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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 2004-05-27
목표와 목적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나 글에서 '목표'와 '목적'을 동의어로 사용할 때가 많 습니다. 사전을 찾아보아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두 단어가 함 축하는 뉘앙스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예를 들면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 이익" 같은 표현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몰두하 는 일의 목표(goal)와 목적(purpose)이 서로 다르고, 교회가 추진하는 사업 의 목표와 목적이 서로 다릅니다. 목표와 목적의 의미상 차이가 이처럼 미묘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둘의 의 미를 혼동하는 삶은 돌이키기 힘든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범하 는 잘못은 목적 없는 목표를 세우거나 목표를 목적으로 착각하는 일입니다. 목표는 흔히 숫자로 표현되기 때문에 달성여부를 쉽게 판가름할 수 있습니 다. 이에 비해 목적은 계량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달성여부를 판단하기 어려 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상위의 목적은 외면한 채 하위의 목표만을 맹렬하게 추 구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어렵게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 속에서 마 치 목적을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목표를 달성했다 할지라도 목표는 목표일 뿐 목적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대 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인생에 성공한 것은 아니며, 아파트 평수를 늘렸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목표와 목적을 주의 깊게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인의 수적증가 가 교회의 목표인가 아니면 목적인가가 성장시대의 전형적인 고민입니다. 구 원받는 성도의 수가 많아지는 것은 존귀한 복음의 열매이지만, 교인의 수적증 가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헌금액 수는 때로 특정사업을 위한 계획상의 목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교회의 목적 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당 건축도 공동체의 외적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중 요한 목표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목적을 결코 대신할 수 없습 니다. 목표가 목적을 구체화하는 한 목표의 설정은 필요하고 유익한 단계입니다. 구체적인 목 표의 설정을 통하여 막연해 보이던 목적의 실현이 현실성을 획득 하게 됩니다. 목표를 달성하려고 믿음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 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는 수시로 목적의 인도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 기 때문에 항상 목적에 의해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목표의 설정과 달성과정 에서 발생하는 편향적 오류의 축적으로 인하여 목표 하나하나를 성취하고서 도 전체적으로는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목적에서 더욱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든 지 생길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는 이겼는데 전쟁에서는 지는 격입니다. 끊임 없이 목적을 주목하지 않으면 목표를 목적으로 삼는 우상화는 시간문제입니 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백성을 공정하게 재판할 수 있는 분별력을 구함으로써 하 나님 나라의 목적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수단이자 목표이었습니다. 만약 솔로몬의 경우를 오해 하여 부와 장수를 추구하는 방편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다면, 이것이야말 로 하나님 나라의 목적과 개인적인 목표를 혼동하는 일이며, 목표를 목적 위 에 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목적을 희생하는 어리 석음이며, 기독교적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전복하는 오류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하는 문제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 라와 의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실 것 을 약속하셨습니다. 반면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 은 결국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목적과 목표를 구분하고 그 의미를 삶에 적용하는 일은 신구약 에서 가르치는 지혜의 삶을 통합하는 원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 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 니다.
97 no image <성주진 칼럼> 정치적 올바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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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4 2004-04-28
'정치적 올바름' 성주진교수/ 합신 구약신학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견해들이 충 돌하는 일이 잦아지고, 다루기 어려운 예민한 문제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치 분야에서도 지난 총선의 결과가 보여주듯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 다. 대립과 갈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상생'의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나 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먼저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점은 복잡한 사회 적 이슈에서 물러나 사적인 영역에만 몰두하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기독교 경건은 종교적 취향이 맞는 동호인들끼리 나누는 폐쇄적인 친교가 아 니라, 공론의 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제시하고 적용하며 공적인 영역 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중요한 것은 대립이 심화되는 영역에 서 이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주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소위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을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 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와 태도를 통 하여 해결하려는 운동은 많은 문제점과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예를 들어 인종, 남여, 장애인 그리고 정치의 문제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요청되는 자 세일 것입니다.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태도 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연구결과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 이 나아졌지만, 내심 백색 피부의 서구인을 선망하고, 검은 피부를 가졌거나 가난한 외국인을 부적절한 말로 무시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 을 내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하게도 인종의 다양성을 기뻐하 고 배타적 응집력을 열린 포용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신학적 자원을 가지 고 있습니다. 남녀의 문제는 성경번역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개역성경의 '형제'는 많은 경 우 '자매'를 내포합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형제자매'로 번역 함으로써 현대의 세분화되고 엄정해진 단어의 쓰임을 고려하고 여성 의 소외감 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성들도 예컨대 '시온의 딸'이라는 표현을 읽 을 때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방향은 그냥 '형제'로 번 역한 후 자매도 포함된다고 설명하는 전통에 대한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습 니다. 장애인에 관련된 새로운 번역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불구자'를 '지 체장애인'으로, '맹인'을 '시각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가 선 택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취급을 그대로 드러내고 주님이 베푸신 큰 사랑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불구자' 등 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입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쓰이 지 않는 용어를 당사자들의 거부감을 무릅쓰고 사용하는 것은 메시지 수용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을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과 거에는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그 렇게 몰기 위하여 사건을 조작한 경우도 있습니다. '색깔론'이 힘을 잃어가 는 지금은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수구골통'이라 고 부르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서는 합리적인 논의와 사회적 통합을 기대할 수 없습니 다. 견해가 다르더라도 사람을 인정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믿는 그리 스도인의 축복입니다. 교회는 세계의 다양성을 골칫거리가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부요함을 배우고 누리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못 지않게 다양하고 적대적인 사회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일구어냈습니 다. 좋든 싫든 소위 선진국들의 다양한 사조와 상호대립이 우리나라에서도 재 현되리라고 예측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열린 마음과 공정한 판단, 그리고 이해하려는 태도로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대할 때 진리의 실천과 전파는 더욱 힘을 얻을 것입니다.
96 no image <성주진 칼럼> 부활의 길, 십자가의 역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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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7 2004-04-02
부활의 길, 십자가의 역설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합에서 계속 이기는 사람은 승리가도 를 달려가는 반면 중도에 탈락한 사람은 패자부활전을 통하여 회생을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패자의 회생이 아닙니다. 능력있는 사람은 자기 실력으로 올라가고, 뒤떨어진 사람은 은혜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 다.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십자가의 죽 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의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십자 가의 역설에 기초한 보편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역설은 죄의 망각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은 죄와 상처 의 망각을 구원과 치유의 방법으로 이해합니다. 여러해 전에 '상처와 치 유'라는 주제의 현대미술전을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이 남 는 작품은 한 여인의 이미지가 아날로그적 복제의 반복을 통하여 왜곡되고 희 미해져 가는 현상을 보여준 비디오 설치작품이었습니 다. 이 시대의 구원은 상처가 '복제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변색되고 퇴조되고 잊혀지는' 데 있다 는 말일까요? 아마추어적 용기를 빌어 해석한다면 시간과 망각이 시대의 상 처를 치유하는 양약이라는 주장같이 보입니다. 이런 식의 해결방식은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방법과 다릅니다. 죄에 대 한 기독교의 해결책은 죄의 사실을 부인하거나, 망각하거나, 억압하지 않습 니다. 오히려 죄의 사실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드러냅니다. 그럴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잊으시고, 우리의 기억을 치유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망각하면 하나님은 기억하시지만, 우리가 죄를 기억하면 하나님은 망각하십 니다. 죄의 문제는 십자가의 역설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적당한 죄책감은 은혜가 된다"(스캇 펙)는 말의 의미입니다. 인간 은 보통 죄책감을 깊숙이 숨기고 죄를 교묘하게 부정하는 성향을 따라서 살아 갑니다. 그것이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죄의 문제를 키울 뿐입니다. 죄의 사실을 직시하는 정당한 죄책감을 은혜의 표(sign)로 받아들이고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죄책 감은 오히려 하나님이 죄 인들과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됩니다. 십자가의 역설은 심각한 죄책감 가운데 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를 읽게 하는 부활의 시각을 내포합니다. 십자가의 역설은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좋아합니다. 십자 가를 통과하지 않고도 부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특수한 지식이나 믿음, 또는 경험만 소유한다면 자기를 부인 하지 않고서도 좋은 제자가 될 수 있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도 주님 을 지근거리에서 모실 수 있으며, 주님의 멍에를 메지 않고서도 온전한 쉼 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힘든 고난의 과정 없이 종교적으로 '성공'하 는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성공주의 영성 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십자가의 역설로서의 부활은 특수한 삶의 정황에서가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성도들이 좋아하는 성구 가운데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일까요? 믿음 없음 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 자체가 큰 믿음입니다. 모순처럼 보 이는 이 말이 사실은 믿음의 역설을 그림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와 함께 부활한 성도가 날마다 죽어야 하는 역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부활절 달걀의 전통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삶은 달걀이 부활 을 상징할 수 있을까요? 달걀의 죽음은 새 생명의 배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 라 배아의 탄생을 위하여 '썩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깰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아이들은 십자가의 역설과 부활의 원리 를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삶는 것은 생명을 위하여 '썩는' 것이 아니라 한 알 그대로 있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십자가의 죽음이라 는 역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95 no image <성주진 칼럼> 신망애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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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0 2004-03-03
신망애 해석학 성주진 교수/ 합신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담 풍' 해라"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대화에 서 발음에 문제가 있을 경우 의사소통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도 정황 을 참작해서 듣는 사람은 나중의 '바담 풍'이 사실은 '바람 풍'이라는 것을 추론하고 대화를 진행시켜 나갑니다. 반면에 '바담 풍'은 '바담 풍'일 뿐이라 고 기계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의미있는 대화가 불가능해 집니다.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 습니다. '바담 풍'이라고 잘못 말한 경우 '바람 풍'이라고 이해되기를 기대하 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바람 풍'이라고 정확하게 발음해도 듣는 이 가 안 듣거나, 잘못 듣거나, 못 들었다고 우기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바 담 풍'이라고 말해 놓고도 '바람 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더욱 많습니 다. 그리스도인 사이의 대화도 같은 문제로 시달릴 수 있습 니다. 아무리 정확한 용어를 구사하고 논리적으로 말을 해도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말의 의미가 제 대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부족한 표현이라도 말하고자 하 는 의도를 잘 파악해서 깊은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화 가 정확한 말과 문법 이상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특히 그리스도인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기초 는 무엇일까요? 또한 그리스도인이 듣고 말함에 있어 주관적으로 요청되는 태 도는 무엇일까요? 필자는 전자를 성경으로, 후자를 믿음, 소망, 사랑으로 보 고자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의미있는 대화를 위해서는 언약의 정신에 기초 한 '신망애 해석학'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의 해석학'이 요청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사 람과 세상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오고가는 말을 의미있게 만 드는 더 큰 그림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창조의 걸작품, 그리고 하나 님의 자녀라는 그림을 통하여 사람과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눈앞에 있는 형제에게로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선한 의도를 믿지 못하는 '의심의 해석학'은 그의 말을 거짓으로 듣게 합니다. 그 가 하는 말이 옳으면 옳을수록 그만큼 가증스럽게 보이고, 좋으면 좋을수록 그만큼 위선적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형제에 대한 지혜로운 분별에 앞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소망의 해석학'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종 말론적 긴장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의 구원이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기 에, 지금의 나의 해석과 관점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자각을 가지고 겸손 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영원의 관점은 또한 불신앙적 조급함이나 '절망의 해석학'을 넘어서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다줍니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풀지 못해 잠 못 이루는 밤에도 더 이상 안달하지 않고 참음으로 온전한 이해를 기다릴 수 있 습니다. 사실 사람은 자신의 복잡미묘한 마음의 작용과 동기를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마음의 심연을 그대로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제대로 이해 되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없을 때 의도는 왜곡되고 의미는 전달되지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말을 곡해하게 되기 때문 에 의미있는 의사소통이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원하는 반응 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해석학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증오의 해석학'을 용해합니 다. '때문에'를 넘어선, '불구하고'에 기초한 사랑의 해석학은 어떤 대화에 도 있을 수밖에 없는 미비점을 보완하여 상호불신과 미움을 치유할 수 있습니 다.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과업입니다. 그리고 신망애 해석학은 과업의 성취를 위한 기반입니다.
94 no image <성주진 칼럼> 남자의 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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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6 2004-02-06
남자의 한(恨)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흔히 한(恨)은 여성의 대표적인 정서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 나 최근 들어 한의 정서가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지적이 잇따르 고 있습니다. 한 많은 남자들이 늘어간다는 말입니다. 남자의 한은 주로 부모 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서, 아내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데서, 그리고 일과 직장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 어느 여성 사회학 자의 분석입니다. 한이라는 단어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상당수 남성들은 불안한 미래와 직장생 활의 스트레스 때문에 어깨가 쳐져 있습니다. 이들은 IMF 환란이 남긴 사회경 제적 여진의 영향권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듯 합니다. '오륙도(五六 盜)'라는 신조어가 '사오정(四五停)', '육이오(六二五)', '삼팔선(三八선)'으 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이태백(二太白)'이란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과장된 표 현이기는 하지만 당사자들의 당혹감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한 통계에 의하면, '만일 선택할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현재의 배우자를 선택하겠는가?' 라는 질문 에, 남자는 40%, 여자는 10%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확인하지 마십시오!) 통계의 추세는 남자가 의존적이 되어가는 반면 여자는 독립적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우위에 서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각 광받는 직업들은 여성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종전에 남성이 자랑하 던 힘과 용기는 기계나 로봇이 대신하기 때문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대신 여 성이 자랑하는 감성과 섬세함과 적응력은 현대사회가 높이 사는 덕목입니다. 이 때문인지 요즘 TV 연속극 등에서도 남녀의 전통적인 역할이 뒤바뀌는 경우 가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산율감소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사교육비의 과중한 부담은 소중한 보 배인 자녀를 무거운 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조기유학 때문에 때 이른 '빈 둥지'와 '기러기 아빠'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렵게 졸업한 자녀들도 직장 을 구하지 못해 '캥거 루 족'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샌드위치 세대' 중에 자 신은 부모에게 힘들여 효도하지만, 자식의 효도나 안정적인 노후대책을 기대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소 희화화된 남성의 푸념에 대해 무슨 대책이 없을까요? '장부의 이름'을 떨치려는 꿈은 제쳐놓더라도, 좋은 아버지, 인정받는 남편, 유능한 상사가 되 려는 소박한 (사실은 야심 찬) 꿈까지 접으려는 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소망 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체면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거나 상심한 마음 때 문에 제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들은 어디에서 신앙적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복고는 해답이 아닙니다. '옛날이 좋았지' 라는 탄식으로 얻는 유익은 하나 도 없습니다. 보다 철저한 가부장적 권위, 남성중심적 질서의 회복, 그리고 홀로 가정을 책임지는 고독한 영웅상의 강조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복고적 가치는 성경적 진리도 아닙니다. 시대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굽 이쳐 흐릅니다. 변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변화 자체를 무조건 부정적으 로 보는 것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불신 앙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입각한 지혜로운 대응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남성성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해야 할 때입니다. 남성성에 대 한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고 성경적인 남성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 회입니다. 무엇보다 비현실적인 허상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자리를 찾는 일이 시급합니다. 체면치레보다 실질을 추구하고, 외적인 성공보다 지속 적인 자기개발과 영적 충실에 힘써야 합니다. 남성성의 회복은 곧 여성성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아내를 공주처럼 살게 해야 멋진 남편이라는 설화의 거품 을 걷어내야 합니다. 아내는 외로운 공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인생 의 동반자입니다. 아내는 교회생활에, 남편은 직장생활에 주력하는 이상한 분 업도 리더쉽의 원칙에 따라 조정되어야 합니다. 남성성을 여성성과 더불어 하 나님의 선물로 인식하고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한 많은 남자가 믿음의 장부 가 되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93 no image <성주진 칼럼> 꿈에, 하나님의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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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5 2004-01-07
'꿈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주진 교수/ 합신 새해를 맞이하여 올 한 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 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호기심인 것 같습니다. 특히 불확성의 시대, 불안정 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미래사를 미리 알아서 어떻게든 대처해 보 려는 욕망이 더욱 강한 줄 압니다. 반면에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 체념하면서 운명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다짐하면서 나 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생의 중 요한 결단을 앞둔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열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 다. 이 간절한 추구의 시점에서 꿈과 영음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질문이 좋은 예가 되리라고 봅니다. 신학교의 면접시 험에서는 어떻게 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는지를 묻게 됩니다. 소명에 대 한 확신과 하나님나라의 일에 대한 열심을 알아보기 위한 예비적인 질문입니 다. 이 때에 간간이 들을 수 있는 대답이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혹 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답변이 아닙니다. 먼저 이런 체험들은 대부분 개 인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보화입니다. 이런 체험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 성과 개인적인 확신을 유지하고 가꾸어 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성경에 도 하나님이 꿈이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나타나시고 그 뜻을 전하 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에게 그 뜻을 알리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방법 에 대하여 유한한 인생이 함부로 논단하는 일은 외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다 른 한편으로 언약의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행하시지 않으시고 일정한 경륜에 따라 구속사를 경영해 나가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가 꾸 었던 꿈과 들었던 말씀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 이후 완결된 성경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경 n험해야 할 지침으로 삼을 성경신학적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독단적으로 주장되기보다는 다른 증거에 의하여 보강 되고 확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의 부름 을 듣고 그곳으로 선교지를 바꾸기까지 밟은 과정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동 역자들과 함께 그가 본 환상을 나누고 면밀한 탐색을 거쳐 합의된 결론에 도 달한 다음에야 마게도냐 지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의 증거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 다. 지난번 면접에서 어느 교회가 한 지망생의 지원타당성을 놓고 투표를 하 였다는 이야기를 인상깊게 들었습니다. 깊은 교제를 나누는 믿음의 형제들 은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대하여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신 앙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성도의 은사와 부르심과 인도를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 하시는 귀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증거는 개인적인 체험 이 혹 주관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방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에서 개인의 의지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중요합니 다. 만일 꿈 에 신학교에 가라는 말씀을 들었다는 지원자가 필요한 시험준비 를 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됩니다. 준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이니까 입 학시켜야 된다는 논리보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았으므 로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반대논리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나 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그 뜻을 행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미래사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자기에게 환란이 닥치리라는 예언을 듣고도 하나님나라의 일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 렘으로 올라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동기 또한 공 동체의 증거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서 재삼 강조되어야 할 요소입 니다.
92 no image <성주진 칼럼> 화이트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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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3 2003-12-17
화이트 크리스마스? 성주진 교수/ 합신구약신학 올해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찾아왔습니다. 당면한 일들 때문에 혹시 정신 이 사납고 마음이 분주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번 성탄절은 더욱 의 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일에 지친 사람들은 성탄절을 또 다른 휴일 로, 연인들은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상인들은 매상을 올리는 날로, 그리고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 주는 날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탄 절의 참 뜻은 과연 무엇입니까? 많은 절기가 그렇듯 성탄절도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뜻은 가려진 채 덧붙 여진 하위문화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당시 베들레헴에 함 박눈이 내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산타할아버지는 올해도 어김없이 루돌 프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나타나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는 벽에 걸린 스타 킹에 선물을 가득 담아주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상황화된 동화적 덧칠들은 어 린이의 꿈을 키우는 장치로서 크게 해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덧칠들은 부정적인 잔상을 남깁니다. 상업적, 민속적, 인도주의 적 덧칠들은 성탄의 독특성을 인간적인 일상성으로 희석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차적인 이미지의 총체에 짓눌려 성탄절의 참 뜻이 잘못 이해되기 쉽습니다. 오해가 쌓이다 보면 성탄 이야기에 담긴 구원의 놀라운 소식은 진부한 교훈과 광고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로서는 성탄 이야기 자체 에 가해진 덧칠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벗겨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동방박사'의 수와 정체에 관한 덧칠이 있습니다. 우리말 찬송가에 도 '동방박사 세 사람' 이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들 의 수가 셋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들이 가져온 예물이 황금과 유황 과 몰약, 이렇게 세 가지인 점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또 그들은 당시의 왕이 나 오늘날의 박사와 동일시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마구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 예수를 놓은 '구유'는 '외양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만, 말들이 '실례'하는 보통의 마구간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어 떤 비평가는 마구간이란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 않 는다는 사실을 들어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신빙성이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성경이 아닌 사람들 의 상상에 대한 공격일 뿐입니다. 성경 본문은 '구유'만을 언급할 뿐 일정한 형태의 마구간을 명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군데에 나타납니다. 두 이야기 를 혼동해서 상반된 성탄 이야기를 반영하는, 상호모순된 두 전승으로 보아서 는 안됩니다. 본문은 두 사건이 서로 다른 정황에서 발생했음을 보여줍니다. 목자들의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직후에 발생한 일이고 동방박사들의 이야기 는 상당한 기간이 흐른 후에 일어난 일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문자보다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 다. 메시지보다 매체가 중요하고,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시대에 영상 매체로 전달되는 성탄절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는 성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먼저 말씀에 근거하여 성탄의 이미지를 바로잡을 때 성탄절 에 대한 세상의 오해는 점차 불식되고 우리의 믿음은 강화될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여러 종류의 덧칠을 벗겨내고 성탄의 진리들을 하나씩 묵상하 면서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새겨보는 것이 어떨까요? 우선 성탄은 초림으로 써, 주님의 재림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주의 오심을 기대한 사람이 적었던 것처럼 오늘날 주의 재림을 바로 대망하는 사람이 많 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탄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로운 사건입니 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나신 이, 그는 곧 만왕 의 왕, 만주의 주, 그리고 나의 주님입니다. 그분은 또한 세상의 빛이십니 다. 무지로 캄캄해진 이 땅을 진리의 빛으로 밝히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 다. 그분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로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하 여 오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는 첫 기적일 뿐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91 no image <성주진 칼럼> "괜히 기도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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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8 2003-12-04
"괜히 기도했나 봐"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잘 알고 있는 성도들에게 기도 의 응답은 기도의 당연한 전제요 일상적인 상식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호 흡'인 기도를 빼놓고서 신앙생활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마다 가까이 계셔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믿는 성도의 자랑이자 영광입 니다. 기도의 응답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아버지 되심 에 대한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가 항상 그대로 응답되는 것 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대해 섭섭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일 까? "괜히 기도했나 봐"하는 외람된 생각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삐진' 사람의 마음을 달래기 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말씀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통 때에는 하나 님이 당장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때에 주시기 위함이라 는 설명이 수긍이 가고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막상 내게 중요한 기도가 응 답받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이러한 좋은 말씀들이 큰 위로가 되지 못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섭섭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 니다. 이러한 상태를 방치해 두면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섭섭 함 때문에 교회의 일에 대해 방관적인 태도를, 그리고 신앙생활에 대해 냉소 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응답을 받지 못한 아픔 때문에 기도에 대하 여 회의적이 되고, 매사에 열심이 식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 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으셨다는 생각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원하 게 만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동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성도 의 섭섭한 마음을 풀어주시는 분은 역시 하나님이시요, 위로하는 것은 하나 님의 말씀입니다. 처음의 충격과 서운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면 주님의 양 n인 성도는 결국 목자인 주님의 사랑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 다 보면 기도의 응답여부는 이제 문제되지 않을 정도가 됩니다. 이러한 경험 은 몇몇 특별한 신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다윗과 신약의 제자들은 기 도응답의 문제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풍랑이 크게 이는 갈릴리 호수 한복판에서 불안하게 요동치는 일엽편주가 우 리가 주목하는 첫 번째 장면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풍랑 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으 리라는 통상적인 기대에 어긋납니다. 약속의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만 이 아니고 가뭄과 타는 목마름도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주님 과 동행하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기에, 기도가 요청되는 어려운 상황 에 처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또 다른 신비는 제자들이 커다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도 주 님은 여전히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수 가운데 폭풍이 있 었고 주님의 응답에 지연이 있었기에 제자들은 주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응답의 지연은 이렇게 신령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 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신앙의 비상과 특별한 구속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분의 캄캄한 부재를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다음 사례는 하나님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가상한 소원을 거절하 신 일입니다. 이는 더 좋은 것, 곧 왕조를 그에게 허락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메시야가 그의 후손 가운데 나셨다는 사실이 성도의 기도를 사용하시 는 하나님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잠시나마 섭섭했 을 다윗의 마음이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넘쳐 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 다. 기도응답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문제입니다. 기도 는 하나님이 나의 '아빠'라는 근본적인 믿음과 그분이 나에게 행하시는 일 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확인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허락하신 이러 한 믿음과 신뢰가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허약해진 기도의 무릎을 하나님 앞 에 다시 꿇을 수 있게 됩니다.
90 no image <성주진 칼럼> 전도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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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9 2003-11-24
전도 콤플렉스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상당수의 성도들이 전도하지 못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 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신자가 가장 활발하게 전도하는 시기는 믿기 시작한 처음 몇 해 동안이라고 합니다. 이 시절에는 구원의 감격과 전도의 열정이 넘 치는 데다가 불신자 친구들의 호기심도 한몫해서 비교적 쉽게 전도를 할 수 있지만, 신앙연륜이 쌓이고 교회직분을 맡게 되면 대체로 교제의 폭이 좁아져 서 전도의 기회가 줄어들고 전도의 열정도 식어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 다. 이와 같은 통계에 비추어 보면 초신자보다는 집사님이, 집사님보다는 장로님 이, 그리고 장로님보다는 목사님이 전도할 기회가 적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 습니다. 물론 객관적인 통계수치나 개인적인 처지가 전도하지 못했다는 막연 한 죄책감을 완전히 없이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전도 콤프렉스는 여전히 마 음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바쁘게 살아가다가 전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병 상의 친지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느끼는 죄책감은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이 내가 이전에 전도한 사람에게 다시 전 도를 받아 죽기 전에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감사와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은밀한 전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보 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복음전도를 소 위 지상명령과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이 '지상'이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가 뜻 하지 않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이 다른 명령을 상대화함 으로써 이 명령만 지키면 주님의 다른 명령은 무시해도 좋다는 암시를 줄 수 있습니다. 전도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일은 아닙니다. 전도를 한다고 다른 일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이 정리 되지 않으면 전도 콤플렉스는 전도 콤플렉스대로 남고, 다른 일은 다른 일대 로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상명령 외에 '지상'이라는 말이 붙은 또 다른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 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는 지상계명입니다. 이 두 '지상'의 관계는 어 떤 것일까요? 우리가 전도의 지상명령을 앞세워 이웃사랑의 지상계명을 경시 하거나 혹은 반대로 할 수 있을까요? 전도명령을 '지상'명령이라고 이해하고 배타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우리는 이웃사랑의 지상계명을 전도명령에 종속되 는 것으로 보거나 전도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할 우려가 있습 니다. 지상명령과 지상계명의 관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추론할 수 있 다고 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존 스톳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강도상해자 를 치료한 후에 후속조치를 위해 필요한 돈을 남겨 놓았지 전도지만 달랑 남 겨 놓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치료하기 전에 전도해야 한다거나, 치료한 직후 에 전도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만이 지상명령에 대 한 지혜로운 순종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잘못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수도 있습니다. 복음주의는 과거 사회복음주의와의 치열한 논쟁과정에서 얻은 상처 때문에 이웃사랑의 범위와 내용을 매우 협소하게 정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신자 에게 전도하는 것을 사실상 이웃사랑의 유일한 내용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그 렇 습니다. 이는 지상계명을 지상명령으로 환원시킨 격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웃사랑의 지상계명은 전도 이상의 포괄적인 사랑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 다. 지상명령에 대한 오해 때문에 이웃사랑에 포함된 책임을 거부하게 되면 주님의 말씀을 핑계로 또 다른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우를 범하게 될 것 입니다. 이렇게 전도 콤플렉스는 지상명령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지상계명의 관점에 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도가 모든 계명을 대체하지 않 기 때문에 전도했다고 해서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 곧 전도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전도 의 지상명령과 이웃사랑의 지상계명은 보완적인 것이지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 다.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에 대한 낮은 호감도를 고려할 때 전도를 위해서라 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지상계명의 실천에 더욱 힘써야 할 때인 줄 압니다.
89 no image <성주진 칼럼> 자연과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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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4 2003-11-05
자연과 복음 성주진 교수 단풍이 곱게 물들었습니다. 집 앞의 단풍나무, 거리의 은행나무, 앞산의 이 름 모를 관목에 이르기까지 각종 나무들이 저마다 마지막 자태를 뽐내고 있습 니다. 이맘때의 가을은 자연이 연출하는 상실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까지 가을의 정취에 한껏 취 해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창조에 드러난 그분의 지혜와 능력에 압도당 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독교는 자연착취와 환경파괴를 위한 신학적 기초를 마 련해 주었다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한 프란시스 쉐퍼의 반 응은 놀라울 정도로 솔직합니다. 그는 이러한 잘못이 플라톤적 이원론에 기인 한 자연과 복음의 분리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역사적 기독교가 잘못된 신학과 성경해석에 기초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우를 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은 자연과 축복의 하나님을 역사와 복음의 하나님 과 분리하지 않습 니다. 자연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의 경계심은 성경이 자연에 대한 우상숭배적 태도 를 정죄하는 사실을 볼 때 정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만 하더라도 아 름답고 장엄한 자연, 인간의 삶과 풍요를 좌우하는 자연은, 이방인에게는 언 제나 경배의 대상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끊임없는 유혹의 원천이었습니 다. 자연을 하나님 위에 높이고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취급함으로써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은 기독교의 상존하는 위협이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 운동 또한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에 대항하여 기독교진리를 변증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역사를 이원화하고 자연의 하나님과 역사의 하나님의 분리하는 현상이 일어나 기도 하였습니다. 잘못된 주장을 반대하다가 자연전반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 도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무신론적인 과학자나 극단적인 환 경론자에게 맡겨버리는 패배주의적 오류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은 자연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을 뿐만 아 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 여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역시 말 씀으로 구속의 역사를 빚어가고 계십니다. 이처럼 자연과 역사는 하나님의 말 씀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기 때문에 이 둘은 구분되지만 분리할 수는 없습니 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만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다스리시 고 결국 구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복음의 대척지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보여주는 비유가 널려 있습니다. 밤하 늘의 별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약속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시청각교재였습니 다. 서울의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별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 타까운 일인지요. 주님도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우리 손에 잡 히도록 쥐어주셨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 들에 핀 백합화는 주님의 가르침 가 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재였습니다. 따라서 자연을 무분별하게 손상하고, 파괴하고, 착취하는 것은 위대한 저자 이자 선생님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사용하시는 교과서를 찢는 행위와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뿐만 아니라 자연이라는 교과서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진지한 기독교저술 가운데에서 자연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접근이 나타나는 것은 실로 다행한 일입니다. 인간의 몸 에 대한 세속적 관심을 계기로 몸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오묘한 돌보심 을 보여주고, 무신론적 자연 담론에 대한 응답으로 자연에서 은혜의 원리를 찾아 보여주는 일들이 좋은 예입니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로 자연이 주는 치유와 쉼을 맛보지 못하는 현대인들 에게 자연은 새로운 휴식과 평안, 그리고 창조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는 하나 님의 기본적인 선물입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자연의 우상숭배적 유혹이 사실상 사라지고 오히려 자연파괴를 유발하는 문화와 생활방식이 몸에 익은 현대인으로서는 자연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과 보다 적극적인 이해가 필요한 줄 압니다.
88 no image <성주진 칼럼> 웅크림의 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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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6 2003-10-22
웅크림의 역학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개구리의 뛰는 모습을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하여 먼 저 잔뜩 웅크립니다. 이 웅크림은 분명 퇴보가 아니라, 도약을 위한 준비입니 다. 필요한 운동량을 축적하기 위해 웅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웅크림은 도약과 분리된 반대동작이 아닙니다. 웅크림은 오히려 도약과 역학적 연동관 계에 있습니다. 웅크림이 없다면 도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도 도약하기 위하여 웅크릴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인생 이라는 마라톤 코스를 100M 경주하듯 내내 질주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걷고 때로는 뛰기도 합니다만, 나름대로 웅크림으로써 필요한 역량을 축적하지 않 고서는 계속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휴식과 연습이 없으면 우리는 곧 탈진하 고 말 것입니다. 적당한 쉼과 학습은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웅크림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요긴한 웅크림은 기도와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로 하여금 기도로 웅크린 후 다시 활동하게 하십 니다. 성경과 교회사가 이 일 의 증인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말씀으로 웅크리게 하신 후 가르치게 하십니 다. 아무래도 학생시절은 질주하는 시기라기보다는 웅크리는 시기일 것입니 다. 졸업 후에 본격적으로 뛰기 위해 잔뜩 웅크리며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 다. 고난도 도약을 위한 또 다른 웅크림입니다. 따라서 웅크림의 과정이 아프 다고 해서 고통을 없이하는 것은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결국 도약을 방해할 뿐입니다. 고치 속에 웅크려 있는 나방을 억지로 끄집어내면 결국 날지 못하 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웅크림의 역학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에 도 큰 도움이 됩니다. 웅크림을 퇴보로 오해하고 잘못 요구할 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한참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 뛰라고 요구하는 것은 도약 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막 웅크리기 시작한 모세에게 지금 은 이곳에서 썩을 때가 아니니 빨리 애굽으로 가서 백성들을 구원하라고 하 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일입니다. 회심한 후 아라비아에 막 도착한 바울에게 이곳에서 시간낭비하지 말고 빨리 로마로 가라고 재촉하 는 것과 같 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웅크리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 다. 조급한 사람은 이러한 지체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책망할 뿐더러 다른 사람의 웅크림도 기다려주지 못합니다. 조급한 마음은 웅크림을 낭비로 생각 하기 때문에 웅크림의 시간을 뜻 없이 보내거나 가능하다면 없애려 하기 쉽습 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당히 웅크리지 않으면 제대로 도약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웅크림은 때때로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연단된 믿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 다. 이 시기의 몸부림은 하나님이 지금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처럼 '어찌하여 나를 버리 셨나이까' 부르짖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핀잔을 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욥에게 왜 그렇게 참을성이 없느냐고 책망 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의 몸짓이 아니라 신앙의 몸부림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웅크림을 배우게 하십니 다.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기 쉽습니 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죄의 파괴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정죄는 다른 사람 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파괴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파괴합니 다." 마찬가지로 웅크려 있는 사람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는 일도 그를 향하 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때에는 오히려 기도와 사랑으로 품 는 인내가 요청됩니다. 마지막으로 웅크린 사람을 조급하게 일으키지 않는 사려 깊은 지혜도 필요합 니다. 웅크림의 어려움은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어 야 할 선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요청되는 것은 감상적인 동정이 아니라 고통 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격려입니다. 무리한 행동을 유발하는 인간적인 조급함 대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자 문해야 할 질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자세는 과연 도약을 위 한 웅크림입니까, 아니면 일락을 향한 퇴보입니까?
87 no image <성주진 칼럼> '우연'과 '혹시'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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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8 2003-10-08
'우연'과 '혹시'의 하나님 성주진교수/ 합신 구약신학 제목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우연'과 '혹시'라는 말 이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왜곡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한 두려움 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삶의 경험을 그대로 반영하는 말들이 성경에 그대로 사용되 고 있는 사실이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이지요. 이러한 당혹감은 갈렙 이야기를 대할 때에 느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수14:12)이라는 말은 전제가 아닌 강한 가정처럼 들 리는데, 이렇게 확신이 없어 보이는 태도는 갈렙같이 뛰어난 믿음의 사람에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가능성을 가리키 는 '혹시'라는 단어가 엄연히 나와 있습니다. 비슷한 당혹감이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는 장면(룻2:3)을 읽을 때에도 감 지됩니다. 이 사건은 장차 룻이 보아스와 결혼에 골인하여 다윗의 조상이 되는 시발점을 이루고 있는데 이 중대사가 '우연'이라니, 하나님의 섭 리임을 아는 우리로서는 적잖이 당황하게 됩니다. 우연은 섭리의 반대가 아니 던가요. 이에 대한 설명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우선 룻의 '우연'은 그녀가 아무 런 사전계획이 없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우 연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다는 룻기의 증언은 인간 의 우연은 하나님의 필연이라는 섭리의 특성을 그림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연은 섭리의 반대가 아니라, 섭리라는 자수의 뒷면입니다. 갈렙의 '혹시'도 흔들리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긴 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에 맡기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갈렙은 열린 칼빈 주의자입니다! 갈렙의 혹시 때문에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비현실적인 승리주 의 교과서로 보지 않고, 믿음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친절한 안내서로 읽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사실적인 '혹시'를 대할 때 마치 속마음을 들킨 사 람처럼 당황할까요? 우리말 '혹시'가 가지는 부정적 뉴앙스 외에, 우리의 믿 음이 지나치게 확실한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내 소원대로, 내 계획대로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자유를 받아들이면 그분은 내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 하시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나 믿음의 본령은 하나님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자유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가 체험하는 불확실한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확실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연'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사실 필수적인 삶의 조건들은 다 '우연히' 주어진 것입니다. 나의 부모, 나의 외모와 성격과 지능 등은 내가 계획하고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나에게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네 삶도 많은 경 우, 환경과 다른 사람의 행동,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의 임의적인 행동의 결 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룻의 우연은 이러한 삶의 자리 또한 하나님이 일 하시는 거룩한 현장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연은 섭리의 자료이자, 씨줄 과 날줄입니다. 따라서 우연의 현장을 버리면 하나님의 역사를 놓치기 쉽습니 다. 이렇게 '우연'과 '혹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방식을 잘 보여줍 니다. 물론 우연과 혹시의 이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은 인간 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서 모든 불확실한 요소를 제거하려는 인간적 노력은 잘못하면 하나님의 광활 한 신비를 내가 아는 협소한 지식의 수준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신 비를 제거당한 하나님, 이는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타락한 지성 이 만들어낸 우상입니다. 반면, 바로 이해된 우연과 혹시는 우리의 믿음을 심 화하고 강화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지나쳐버리기 쉬운 우연과 혹시가 실은 얼마나 귀하고 신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에 맞닿아 있는지요.
86 no image <성주진 칼럼> 개혁의 원동력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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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7 2003-09-25
개혁의 원동력 성주진 교수/ 합신구약신학 개혁이란 말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말입니다. 특히 교단의 특성이 개혁으로 규정되는 상황에서 이 말은 더욱 부 담이 되는 말입니다. 정치권의 현실이 개혁의 부담을 잘 보여줍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개혁을 내세워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정의 추진 력을 얻으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개혁은 실종되고 이전정권의 전철을 밟 음으로써 차기정권의 개혁대상으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입 니다. 개혁이 어려운 이유가 한둘이 아니겠습니다만, 첫째로는 자기개혁의 어려움 을 꼽고자 합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 다. '자기개혁'은 수긍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말입니다. 분명한 사 실은 철저한 자기개혁이 없이 타인을 향하여 개혁을 외치는 것은, '울리는 꽹 과리'와 같이 허 공을 칠 뿐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개혁은 지속적인 추진을 요청합니다. 베자가 말한 바 같이 '개혁교회 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입니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 교회의 특성은 지속적인 개혁을 통하여 주님의 교회를 늘 새롭게 세우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개혁하지 않는 교회는 조만간 경직되고 부패하 는 것이 교회사의 교훈입니다. 개혁교회 역시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싶으면 개혁피로증을 호소하고 개혁기득권을 주장하면서 제자리에 안주하려는 유혹 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이루 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한 원 동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신적 추진력을 상실한 개혁은 한계상황에 부딪쳐 주저앉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나 규정, 그리고 제도 같은 외형적 인 개선에만 치중하기 쉽습니다. 외형적인 변화도 중요하고 제도적인 개선도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이 개혁의 전부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추진력을 상실한 교회는 율법주 의적 무력감에 빠질 우려도 있습니다. 개혁의 동기와 동력이 없이 개혁의 당위성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개혁의 원동력은 부흥이라는 명제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참된 개혁 은 영적 부흥의 열매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진정한 부흥운동은 개 인과 교회, 그리고 사회 전반에 질적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개인의 경건과 헌신, 교회의 예배와 활동,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가 한 차원 '업그레 이드'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영국의 부흥운동이나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놀 라운 부흥과 그 능력으로 추진되는 힘있는 개혁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사에 큰 획을 긋는 이러한 부흥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주장과도 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특별하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부흥은 더 할 나위 없이 강력한 개혁의 원동력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놀라운 부흥이 일 어나기까지 손을 놓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아직 우리가 기대하는 큰 부흥이 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개혁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별 한 부흥 외 에도 개인과 교회가 보다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부흥이 있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부흥 역시 개혁을 추구할 수 있는 추진력을 제공해 줍니다. 부흥이라는 추진력이 없이 인간의 생각이나 노력, 그리고 교권의 힘만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부작용을 낳기 쉽습니다. 부흥이라는 신적인 추진력을 결여한 개혁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원리와 지침으로 축소하거나 은 혜의 복음을 종교와 윤리의 수준으로 낮추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또 한 부흥의 바탕이 없는 공의의 추구는 타인에 대하여 엄격한 율법주의가 되 기 쉽고, 그러한 사랑의 추구는 자신에 대하여 나약한 온정주의가 되기 쉽습 니다. 지금은 우리가 과연 무엇을 동력 삼아 개혁을 추구하고 있는지 점검해 야 할 때인 줄 압니다. 영적인 부흥이 개혁의 원동력이 될 때 개인과 교회는 진정한 개혁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85 no image <성주진 칼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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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6 2003-09-08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급속하게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정상으로 통했 던 일이 오늘은 비정상으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반면 어제 비정상으로 치부 되었던 것들이 오늘은 정상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가 어찌 나 빠른지 어제의 구분법을 가지고 살다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구세대라 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습니다. 경계 허물기에는 분명히 유익한 발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일 장애인을 정상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구분은 차별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습니 다. 따라서 이들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인식은 차별과 억압을 없이하고 더불 어 사는 사회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일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무 는 일이 소외계층을 보듬고 건강하고 통합된 사회를 이룩하는 데 공헌하는 것 이라면 마땅히 환영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익한 장벽 허물기가 허물지 말아야 할 정상과 비정상의 경 계 허물기로 변모된다면 커 다란 불행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허물기에 는 성과 결혼에 관계된 문제들이 적지 않습니다. 동성애가 단순한 개인의 성 적 취향과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허무는 일입니 다. 편의적, 실험적인 혼전동거는 결혼의 울타리를 허무는 것입니다. 간음의 미화는 부부의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모든 경계가 다수의 횡포와 억압 때 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선과 행복을 위해 제정하신 경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나누어서도 안되지만 하나님이 나누신 것을 합해서도 안됩니다. 허물지 말아야 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무는 사람도 자유와 행복을 추 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결과 흐려지고 뒤틀린 판단력이 빚어낸 환상입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유익한 전통 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의 권위마저 거부한 인간지성은 슬프게도 판단과 가치 의 심각한 혼돈을 대가로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본받지 않기를 소원하는 어떤 나라에서는, 한편으로는 성인간 의 합의에 의한 혼외관계는 크게 문제삼지 않 는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장내의 성희롱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습니 다. 물론 후자는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만 왜 이런 엄격성을 간음에 는 적용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왜 큰 도적은 잡을 생각도 안 하면서 작은 도둑에게는 상대적으로 엄격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한 억눌린 양 심이 커다란 도덕적 실패를 상대적으로 작은 죄에 대한 율법적 엄격함으로 보 상받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인간의 합의가 하나님의 법정을 기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는 왜 그런 죄를 저질렀느냐?' 라고 물으실 때에 '그것은 우리가 합의해서 한 일입니다' 라고 대답한다고 무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합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의해 제정되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합의가 아닌 당신의 말씀에 따라 심판하십니 다. 레위기는 지켜야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귀중한 교훈과 은혜로운 진 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부정, 정결, 그리고 거룩의 경계 를 굳게 세웁니다. 그것은 누 구를 '왕따'시키거나 희생양으로 삼거나 차별하 거나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정상으로 회복시키고, 거룩 한 백성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과 악의 구분을 유지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가 무엇인지 알고 죄사함을 받아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신앙 과 불신앙, 순종과 불순종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선포하신 하 나님 나라에서 천국시민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창조질서 속에도 유지되어야할 아름다운 구별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사람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 진정한 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창조의 경계 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예비된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84 no image <성주진 칼럼>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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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2 2003-08-27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가?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사람은 어려서부터 공평한 대우를 요구하며 살아갑니다. ‘내 꺼야’, ‘만지 지 마’ 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불공평해’라는 말은 공평 의 개념이 우리 마음속에 일찍부터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른이 되어 서도 우리는 공평이야말로 행복한 삶과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요체라고 믿고 있습 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다지 공평하지 못합니다. 우선 타고 난 건강, 집안형편, 외모와 지능이 다 다릅니다. 건강과 집안형편은 어느 정 도 개선할 수 있다 하더라도 유전적으로 타고난 외모와 지능의 향상에는 한계 가 있습니다. 또 아무리 공평한 사회라 하더라도 같은 조건하에서 같은 노력 을 기울일 경우 항상 같은 결실을 맺고 같은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조건들입니다. 불신자들은 이것을 우연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불공평한 일에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든 관여하 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을 공평하게 대하실 것으로 기대 합니다. 특별취급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경건, 그리고 우리의 자녀된 사실 때문 에, 하나님이 우리편을 들어주실 것을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기대합니 다. 그러나 이러한 공평에 대한 피상적 이해는 불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음악 영화 ‘아마데우스’는 재능의 불공평성을 다룬 수작입니다. 왕의 인정을 받 으며 성실하게 작곡활동을 벌여온 살리에르는 신동 모차르트가 등장하자 혼란 에 빠집니다.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평범한 재능 밖에는 발휘하 지 못하는 반면, 천박하고 불경건한 모차르트가 훨씬 뛰어난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수긍할 수 없었던 살리에르는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 다. 이 때문에 그는 나름대로의 재능과 뛰어난 감식력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 고 시기심과 적개심에 사로잡혀 불행한 여생을 보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이, 남과 비교함으로써 상향조정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게 될 때,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하기 일수입니다. 다양한 은사 를 인정하지 못하는 획일적인 사회에서 공평의 추구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 는 경쟁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쉽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머리가 될지언정 꼬 리가 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소유와 지위의 경쟁대열에 뛰 어들게 되었고, 어떻게든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하 시는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건전한 삶을 영위한 결과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복 주시는 통상적인 방법입니다. 동시에 우리 는 하나님이 땀흘린 불신자에게도 수고의 열매를 나누어주시고 은사를 방치 한 당신의 종들에게서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으시는, 공평하신 분임을 잊지 말 아야 할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도, 믿음은 좋지만 의술이 떨어지는 의사보다 는 믿음은 없어도 실력 있는 전문의를 더 신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 은 ‘나’라는 시에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보 통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이 육신의 장애를 상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 를 주심으로써 그녀를 공평하게 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 가 육신의 장애문제를 떠나 자신을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라 고 밝힘으로써 하나님 공평이 산술적이거나 기계적, 또는 보상적인 것이 아니 라 주권적 은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탈란트의 비유도 같은 진리를 가르칩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 은 얼마나 가졌느냐, 혹은 얼마나 남겼느냐가 아닙니다. 가진 것을 어떻게 활 용했느냐 하는 것을 충성의 지표로 보십니다. 소유와 소득의 단순비교를 통 해 나타나는 상대적인 불공평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은 혜를 충성된 종들에게 베풀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불 공평한 일들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고 빚으심으로써 주권적인 사랑의 손으 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공평을 뛰어넘어 측량할 수 없 는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83 no image <성주진 칼럼> 믿음의 플라시보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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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4 2003-08-06
믿음의 플라시보 효과? 성주진 교수/ 합신 구약신학 가짜 약도 환자가 믿고 복용하면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보 통 '플라시보(위약) 효과'라고 불리는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약 의 의학적 성분이나 객관적으로 입증된 효능 외에 환자의 심리적인 상태가 질 병의 치료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말일 것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의학개념이 기독교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믿는 내용이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가 아닐지라도 진지하게 믿기만 하면 나름 대로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믿는 진리의 내 용보다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 면 기독교 신앙에도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어떤 사람의 믿는 바가 진리 가 아니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믿기만 하면 '효험'이 있다고 주장합니 다. 이 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입니다. 어떤 대상을 믿든 그 대상을 지성으로 섬기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돌이나 나 무 앞에서 복을 빌더라도 전심으로 믿기만 하면 효과를 본다는 주장을 펴기 도 합니다. 가히 무속신앙의 수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해할 수 있는 일화가 야곱의 이야기 가운데 두 번 나타납니 다. 한 번은 합환채의 경우입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가 아들을 잉태하게 된 것을 합환채의 효험 때문이라고, 혹은 합환채 자체는 효험이 없을지라도 레 아가 그 효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이 버드나무 와 살구나무와 선풍나무를 사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무늬의 새끼를 낳게 된 것 도 유감주술적인 효과 또는 이에 대한 야곱의 믿음 때문이라고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두 사람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이지 그 들의 잘못 때문에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과 신념의 차이입니다. 신념은 자기 주관을 자기 방식으로 밀 고 나가는 것인 반면, 믿음은 계시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 믿는 대상이 잘못되 었으면 그것은 잘못된 신념일 뿐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면 그 믿 음은 진지한 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식의 주관성과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 니다. 얼마 전 영국 스코틀란드에 위치한 네스호에는 네시가 없다는 것이 거 듭 확인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호수에 산다는 괴물에 대한 목격담이 많이 있 었습니다. 그 중에는 관광홍보차원에서 지어낸 것들도 있었지만, 경건한 사 람들의 목격담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진실하다 하더 라도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며,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 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을 믿으며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 고 성경이 계시하신 것을 볼 수 있도록 겸손히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 다. 예레미야 시대에 활약했던 거짓선지자들도 나름대로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평안의 메시지가 실제로 하나님 이 주신 것으로 믿었 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거짓 영에 미혹되었다고 밝힘으로써 그들 나름대로의 신념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실성을 보장하 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주관적인 진지함은 마침내 스스로를 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회개할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가짜 진리를 믿는 것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내용과 믿음의 대상을 늘 성경에 비추어 점검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과 경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대상을 바른 방법 으로 믿는 것이지 얼마나 '쎄게' 믿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제 1계명이 강조하는 믿음의 바른 대상과 방법으로써, 십계명과 주기도문, 그리 고 사도신경의 기초가 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 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는 내용과 대상이라는 신앙의 첫 단추가 바 로 끼어져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주관성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Selected no image <성주진 칼럼> 은혜 받은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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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3 2003-07-24
은혜 받은 증거 성주진 교수/ 합신 신약신학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은혜는 거의 모든 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듯 합 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은 후나 신앙적인 모임 또는 활동에 참여한 다음에 우리는 흔히 서로 은혜를 받은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총평을 대신하기 도 합니다. 그런데 은혜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쓰이다 보니 과연 이 은혜가 어떤 은혜인 지, 과연 무엇이 은혜가 되었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분 이 좋아지고 감정이 고조되는 것만으로도 '은혜 받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상투적인 용어가 되어버린 듯한 은혜라는 단어 의 진정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은혜가 과연 무엇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 다. 진정한 은혜의 의미는 그 반대개념인 '값싼 은혜'를 통하여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어구는 원래 독일 신학자 본 훼퍼가 당시 독일 교회의 연약 n성과 영향력상실의 원인을 '교회가 값싼 은혜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라고 진 단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진 표현입니다. 그에게 있어 값싼 은혜는 진정한 은혜 의 자리에서 일탈한 상태입니다. 본 훼퍼는 값싼 은혜의 대표적인 예로 회개 없는 죄사함, 참된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 진정한 교제가 없는 성찬, 십자가가 없는 은혜, 희생이 없는 제자 도, 그리고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들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도 지속적으로 위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는 '값 싼 은혜'를 받은 것뿐입니다. '값싼 은혜'의 병폐는 하나님의 축복을 갈구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희생도 치 르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받되 부담 없 이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 하는 방식으로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생각과 태 도와 관계에서 종전의 입장을 고집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진정한 은혜는 '값싼 은혜'의 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진정한 은혜는 참된 회개, 참된 신앙고백, 하나님 과의 진정한 교제, 십자 가를 지는 삶, 기꺼이 희생하려는 태도, 그리고 변화된 생활을 포함할 것입니 다. 이러한 특징들은 요즈음 통용되는 은혜라는 말의 피상성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물론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여호수 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 공략을 앞 두고 여호수아를 만나주십니다. 그분은 아무 조건 없이 여호수아를 만나 주시 지만 일단 만난 후에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만일 여호수아 가 신을 벗지 않는다면 그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 다고 주장하고, 그분은 거룩하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명령을 거 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값싼 은혜입니다. 신발을 벗은 사람, 곧 하나님의 명 령을 따라 그의 성품을 반영하는 사람만이 '은혜다운' 은혜를 소유한 사람입 니다. 값싼 은혜와 관련하여 신약에서 오해되는 말씀 가운데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 에 이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에 대한 전인적인 믿음이 없이 그저 말로 동의를 표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 오해되기도 합니 r 다. 그러나 이는 문맥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으 로 믿는' 사실의 외형적인 표현입니다. 또 당시 상황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 은 어떤 손해나 불이익을 감수한 전인격적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피상적인 고 백과는 거리가 멉니다. 값싼 은혜의 병폐가 우려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의지의 변화가 은혜 받은 증거로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은혜는 감정적, 지적 변화를 당연히 포함하지만 인격의 중심인 의지의 변화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 정은 고조되어도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고, 성경지식은 날마다 늘어나도 자신 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원과 성화가 별개로 취급 되고, 신앙의 고백과 사랑의 실천이 불연속선을 이루며, 은혜와 윤리가 접점 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과 세상에 대한 의지의 변화는 오늘날 우리가 주목하고 추구해야 할 은혜의 증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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